29화
게이트를 타고 다시 수도로 가는 기분은 묘했다.
‘처음에는 다짜고짜 결혼식을 하게 된 입장이어서 화가 나고 신경이 곧추서 있었는데.’
지금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딱 한 가지, 남편이 된 자의 의중을 모르겠다는 것 말고는.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일까?’
루스벨라의 추측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강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그에게도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 건 끔찍한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이라기엔…….’
나라는 사람 자체를 잃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았어.
데니스는 그녀가 언젠가 해코지를 당하던 것을 본 것처럼 민감하게 굴었다.
‘북부에서 멀리에서라도 날 보았던 걸까?’
그가 그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연민인지, 연민에서 비롯된 사랑인지.
혹은 지키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 줄 대체품인지를…….
리스냐 성의 시종들에게 눈물겨운 배웅을 받고, 마차에서 내려 게이트를 타고 다시 마차로 이동하는 순간에도 그 생각만이 뇌를 메웠다.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루스벨라, 사과 타르트 먹을래요?”
“아니요, 괜찮아요. 입맛이 없어서요.”
사과 타르트는 맛있어 보였지만, 그녀는 궁금증으로 인해 속이 꽉 찬 상태라 꽃 모양으로 장식된 타르트에 입맛이 돌지 않았다.
꿀에 절인 듯 윤기가 좌르르 도는 타르트는 매우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루스벨라는 이게 데니스가 화제를 돌리려는 고도의 수작처럼 보였다.
“이거, 지아나가 만든 거예요. 가면서 먹으라고.”
“……그런 이야기는 진작에 해 줘야죠. 잘 먹을게요.”
한 입 베어 물은 사과 타르트는 아삭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루스벨라는 방금까지 입맛이 없다고 한 것도 잊고 오물오물 타르트를 씹었다.
타르트는 금방 동이 났다. 데니스는 기꺼이 제 몫의 타르트도 루스벨라에게 밀어주었다. 루스벨라는 그 타르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포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손을 댄 흔적이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제게만 먹일 생각이었던 셈이었다.
“안 드세요?”
“저도 입맛이 없어서.”
“아버지이신 후작님 때문인가요?”
“아…… 그 사람 때문인 것도 있지요. 그것보다 내가 더 걱정하는 건 따로 있지만.”
‘자기 아버지를 그 사람이라고 지칭하네.’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데니스는 감출 생각도 없이 루스벨라 앞에서 갈라선 부자 관계 사이를 드러냈다.
‘하긴, 나도 그렇지만.’
동병상련이란 건가. 둘 다 아버지를 고를 수 있지 못해서 아쉬워 죽겠다는 점이?
덜커덩.
마차가 돌부리라도 밟고 갔는지 잠시 덜컹거렸다. 마부가 둘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루스벨라나 데니스나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기에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작위 계승 때문인가요?”
“지아나가 이야기해 줬군요.”
루스벨라가 걸릴 것 없다는 식으로 어깨만 으쓱였다. 데니스가 자신에게 잘해 주기만 하고 자신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이 없으니 그에 대한 정보를 줍는 일은 그녀의 몫이라고 하듯.
지아나가 알려 줄 수 있는 정보라면 입에 담을 수 있는 종류의 정보라는 말이기도 했고.
“후작님께서 병환으로 앓고 계시면서도 작위를 물려주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네. 맞습니다. 그 일이 성가시기는 하죠.”
“골치 아픈 게 아니라요?”
“그럴 거라 예상은 했으니 수고스럽고 지난한 과정이라는 생각만 드는군요.”
데니스가 달려가는 마차 때문에 순식간에 지나치는 바깥의 정경을 보며 말했다. 수도의 화려함이 돋보이는 건물들이 들어왔다. 자세히 들여다볼 틈 없이 지나갔지만 봄을 담아 색채가 보다 선명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법. 데벤테르 후작 가문이 돈이 많으니 지금껏 후작도 위세를 부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황제 폐하께서는 세대교체를 원하시는 편이시죠.
“후작이 가문의 부를 앞세워 누린 권력을 못마땅해하셨으니, 아들인 제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젊은 피이니 실수하길 바라면서요?”
“그렇죠. 저란 사람은 유폐되어 자랐고, 사교계에 악명만 자자하니 인맥이랄 것도 없으니까요. 황실은 제게 호의적인 척 작위를 물려 달라고 아버지께 압박을 넣고 있지만 속셈은 시커멓죠.”
이득이 되는 일이니 협조하고 있는 것이라는 소리였다. 우아하고 고귀한 황실도 승냥이가 따로 없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황실이 바라는 그런 얼간이가 아니에요. 그렇죠?”
“물론이죠.”
데니스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루스벨라는 이 남자를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황실에서 원한 얼간이 같은 사람이었다면 진즉 도망쳤을 것이다. 시원하게 뒤통수를 치고서.
“탐탁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황실이 나를 도와준다는 건 나쁘지 않은 패고…… 저의 계획은 다가오는 건국 기념일 전까지 아버지인 후작과 협상하는 것이죠.”
건국 기념일 때는 수도와 지방을 가리지 않고 모든 귀족들이 황실이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했다. 그날에 작위를 물려받은 귀족들의 승계식도 겸하여 거하게 치러 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당연히 윈체스터 공작도 참여하겠지.’
루스벨라가 이마를 찡그렸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데니스는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루스벨라가 다시 아슬란을 마주쳐야 한다는 예정된 필연에 진저리를 치는 동안 데니스는 홍차를 홀짝거렸다.
루스벨라는 스트레스를 줄이라고 타르트를 챙겨 넣어 준 지아나의 선견지명에 고마움을 느꼈다.
“데니스.”
“네.”
“알고 있겠지만, 난 이미 북부에 버려진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북부에 넘어가는 일은 없어요.”
루스벨라가 결연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데니스는 그녀가 단호히 북부를 그녀의 인생에서 단절시키는 발언에 눈에 이채를 띄었다.
“날 쓰레기 버리듯 내쫓은 사람들이 다시 날 거둘 일은 없겠지만요. 아, 이미 결혼했으니 그럴 확률도 0에 수렴하겠네요.”
“음, 루스벨라. 인생은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마차가 도착했다. 데니스는 마시던 홍차 찻잔을 내려놓고 내릴 준비를 했다.
그는 먼저 나가서 루스벨라를 에스코트하려고 손을 뻗었다. 루스벨라는 기꺼이 그 손을 잡았다.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 말은, 드높은 자존심으로 유명한 공작 가가 나에게 사과라도 하러 온다는 이야긴가요?”
루스벨라가 진심으로 웃긴 헛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웃음을 기침처럼 터트렸다. 소후작 부부를 맞이하려 나온 시종이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쳐다봤다. 데니스는 그 시종에게 손짓으로 짐을 옮겨 달라고 요청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인생은 아무도 모르는 게임의 연속이니까.”
“데니스.”
루스벨라가 웃음을 뚝 그치고 매섭게 말했다.
“설령 그렇다 한들, 길을 가다 난데없이 벼락에 죽을 확률처럼 윈체스터 공작 가가 내게 사과할 일은 아주 드물다고 봐야 할 거예요.”
두 사람은 데벤테르 후작 가의 드넓은 저택 안으로 걸어갔다. 아직 본채가 나타나지 않은 아름다운 길을 밟고서 나누는 대화라기엔 가시가 충만했다.
“사과를 한다면요?”
그 고고한 아슬란 윈체스터가 당신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빈다면 그때는 어쩌겠습니까?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비를 맞으며 궁색해진 시골 쥐처럼 애원한다면요.”
직접 본 것처럼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그것에 그녀는 발끈했다.
“되게 잘 조사하셨나 보네요? 후작 가의 정보력이 이렇게 자세한 줄은 몰랐네요.”
루스벨라는 왜 자신의 뒷조사를 했냐고 묻지 않았다. 굴러다니는 게 사교계가 뿌린 소문이었다.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알아보기만 하면 금방 나오는 일이었을 테다.
‘결혼하려는 상대가 어떤지 궁금해서 한 일이었다고 하면 할 말도 없고.’
이런 일을 트집 잡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당연한 일 같아서.
‘그런데도 왜 신랄한 말투가 나왔을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각또각 걷는 구두 소리가 저택의 본채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데니스가 문고리를 잡고 나서야 루스벨라가 답했다.
“만일 저와 똑같은 방식으로 애원한다고 해도 싫어요. 무조건 거절입니다.”
지나간 후회를 받기는 싫어요.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어요.”
“…….”
“내 마음은 이미 윈체스터 공작에게서 돌아섰어요. 의심의 여지 없이, 미련 한 방울도 쥐어짜서 버리고 왔죠.”
청첩장을 던지고 온 일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최고로 꼽을 일이었다. 그 일을 루스벨라가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할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답이 되었나요?”
“네. 충분합니다.”
데니스는 안심하고 있었다. 그의 입가로 둥근 호선이 그려졌다.
그것이 어째서 만족스러웠는지는 그도 몰랐다.
데니스가 문고리를 열어 들어가자 수많은 시종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작은 주인님.”
데벤테르 후작 가에 다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이게 제 방인가요?”
“그렇습니다, 작은 마님.”
“아하…… 이런 식으로 심술을 거시는군요.”
내 시아버지 될 사람은 말이죠.
루스벨라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시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죄송하다고 말했다.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후작 가를 장악했어도 역시 왕년의 권력자가 만들어 내는 틈새까지는 어쩔 수 없겠구나, 그리 생각했다.
‘리스냐와는 전혀 달라.’
그 따뜻하고 안온했던 곳이 신기루였던 것처럼, 이곳은 차가웠다.
그렇지만 루스벨라는 알고 있었다. 리스냐에서 받은 따뜻한 온기가, 대가 없이 주어지던 애정이 그녀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장소만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도 변했다.
‘오히려 잘됐어.’
내가 마주할 거라고 여겼던 현실은 이런 모습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작은 마님! 후, 후작님께서 말을 듣지 않으면 저를 당장 쫓아내겠다고 하셔서…… 작은 주인님께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았어요.”
방 배정을 알려 주는 시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애원했다. 루스벨라는 그녀의 사정을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었다. 평민 출신의 시녀가 수도에서 추천장 없이 쫓겨나면 먹고살 길이 막막했겠지.
‘각방 조치야 나야 상관없지만.’
이는 후작이 들은 대로 그녀를 괄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버려두고 키운 적도 없는 아들의 짝으로 파혼 전력이 있는 말 많은 여자는 안 된다, 이거였다.
데니스는 루스벨라와 결혼한 것이 그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지켜 준다는 의미임을 수행하고 있었다. 리스냐에서 둘은 각방을 사용했고, 어떤 성적인 접촉도 없었다. 하다못해 가벼운 키스라도.
‘그래도 너무 쪼잔하네.’
루스벨라가 사용할 방으로 주어진 것은 가장 구석의 어두침침한 곳이었다. 좁고, 청소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북부의 지난날을 떠올리게 하는 방이었다.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자신을 배려해 주는 것에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후작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망신 주려는 의도가 보이니 앉아서 엿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저, 저를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 작은 마님. 제발요.”
아, 아직 시녀가 남아 있었지.
“너에게 문책할 것은 없다. 안심하고 돌아가거라.”
“감사합니다!”
그녀를 안내한 시녀의 얼굴이 극적으로 파란색에서 정상적인 얼굴색으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시녀는 날아갈 듯이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루스벨라는 그 시녀가 지나가고 난 후에 당장 데니스를 찾아갔다.
데니스는 예상했다는 것처럼 머리를 짚으며 아버지의 깜찍한 술수에 언짢아하고 있었다.
“내가 뭘 말하려고 왔는지는 알겠죠? 데니스.”
“물론입니다, 루스벨라. 당장 제 옆으로 방을 배정하도록 할…….”
“아뇨.”
루스벨라가 데니스의 말을 중간에 멈춰 세웠다. 말이 잘렸는데도 데니스는 불쾌함 없이 그녀의 활활 타오르는 녹색 눈동자를 보았다.
“우리, 지금부터 같은 방을 쓰기로 하죠.”
“……예?”
각방 탈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