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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26화 (27/166)
  • 26화

    한 번 의심의 싹이 고개를 쳐들자 아슬란은 그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아슬란이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검은색으로 칭칭 싸맨 남자가 나타났다. 아슬란의 그림자 노릇을 하는 심복, 시온이었다.

    “시온.”

    “예, 주군.”

    “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나의…… 옛 약혼녀인 지펠론 가의 영애를 기억하나?”

    아슬란의 말에 시온은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무릎을 꿇고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 변화가 아슬란에게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시온은 정신을 차리고 아슬란의 말에 답했다.

    “물론입니다, 주군.”

    입바른 말은 했지만, 시온은 아슬란의 전 약혼녀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기에 이름만 희미하게 기억났다. 그런 존재가 있었다, 라는 사실까지만 알고 있었다.

    시온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보필해야 하는 건 아슬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시선 밖에 있었다.

    “내가 얼마 전에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다니엘 크렌베르에게서 말이지.”

    “크렌베르 영식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 녀석이 나보고 그러더군. 내 전 약혼녀가 결혼을 했다고. 남부의 데벤테르 소후작과. 그런데 다니엘이 알려 준, 소문 속에서의 그녀는 여전히 악질적인 사람으로 묘사되더군.”

    “……예?”

    “그리고 그녀가 이곳에 있을 적에도 행실이 그릇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왕왕했지.”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무엇보다 아슬란의 뉘앙스는 꼭, 루스벨라가 소문과는 다른 사람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온은 황당함에 주군께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가 자중했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 타당한 의문을 던졌다.

    “하지만 지펠론 영애는 이제 데벤테르 소후작 부인이십니다. 후작의 병이 나을 기세가 없다고 했으니, 곧 후작 부인이 될 겁니다. 그러니 주군께서는 그분을…… 더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슬란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시온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는 알 수 있었다. 에둘러 말한 문장의 저의는 어차피 끊어진 인연이니 돌이켜 발자취를 찾지 말자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시온의 말은 정답에 가까웠다. 어느 집안에서건 좋지 못한 사건으로 트집이 잡혀 쫓아낸 여자를 다시 찾는 일은 없을 터였다.

    쫓아낸 집안이, 사실은 뭔가 잘못한 게 있지 않고서야 그럴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공작 각하께서 책잡힐 일은 없으셨다.’

    시온은 정말 그렇게 믿었다. 평생 아슬란에게만 충성하며 산 그는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졌다. 시온은 명령한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시온에게는 루스벨라의 일을 아슬란이 언급한 것이 생뚱맞게만 느껴졌다.

    자랑스러운 주군께서 명하시는 사안이니 아주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시온은 부디 이 임무를 빨리 끝내고 훌훌 털어 버리고 싶었다.

    “자네는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나?”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가령 내 전 약혼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이지.”

    “글쎄요…… 제가 기억하는 정보들은 다 단편적인 것들뿐이라. 그리고 주위에서 말하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것밖에는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사실 확인을 거쳐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사실 확인이라…….”

    아슬란은 그 단어를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에만 신경 쓰느라 루스벨라가 어떻게 지내는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한때는 주군의 부인이 될지도 몰랐던 분이니 어련히 잘 지냈거니 싶었다.

    “의심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이 성에 와서 불행하게 지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네가 그녀가 실제로 어떻게 지냈는지를 알아보아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너 혼자만이 이 일을 조사해야 한다는 점이다. 공작 성의 그 누구에게도 내가 지펠론 영애의 이야기를 캐고 다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

    의심이 발아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어제와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아슬란은 다니엘이 어제 해 준 말대로 악의로 점철된 소문이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기에 시온에게 당부한 것이었다.

    ‘나조차도 지펠론 영애를 떠올리면 주위에서 그녀가 잘못되었다는 소리만 하던 것을 기억하는걸.’

    그래서 냉정하게 루스벨라가 파리한 낯으로 그를 찾아왔을 때, 냉정하게 내쳤다. 루스벨라는 공작 성의 사람들에게 있어 만인의 적이었다. 아무도 그녀를 환대하지 않았다. 가장 윗사람인 아슬란마저 그녀를 보면 어서 나가 주기만을 바라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정말 루스벨라 지펠론이 아슬란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쳤나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약혼녀였던 루스벨라를 쫓아냈던 일은 가신 가문의 아슈라 영애에게 무례를 범했기 때문이었다. 그 영애가 아슬란을 짝사랑해 왔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윈체스터 공작 가는 어찌 되었건 이미 약혼녀를 들인 상태였기에 조용히 마음을 접어 가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아슬란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루스벨라가 자신을 해치려 했다며 그 영애가 엉망이 된 드레스 차림에 눈물범벅으로 살려 달라 호소했다. 무도회장에서 쌍을 이뤄 즐겁게 춤을 추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아슈라 영애를 감쌌다.

    [세상에!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누가 아슈라 영애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으…… 으흑. 괘, 괜찮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괜찮다뇨, 영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어떻게 그냥 갑니까.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누가 그런 겁니까!]

    [저…… 저어…….]

    아슈라 영애가 가리킨 곳에는 새파래진 얼굴의, 멍한 표정의 루스벨라 지펠론이 서 있었다. 루스벨라는 손을 떨며 아니라고 외쳤다.

    [아닙니다. 제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제발 믿어 주세요.]

    그렇지만 매서운 사람들의 눈동자는 루스벨라가 들고 있는 유리잔에 꽂혔다. 그녀가 든 잔 안에는 아슈라 영애의 연둣빛 드레스를 핏빛으로 물들인 와인과 똑같은 종류가 희미하게 몇 방울 남아 있었다.

    [지펠론 영애, 정말 아니라고요?]

    [영애가 공작님을 사모하는 몇몇 영애들을 질투해서 괴롭히는 걸 여기서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건 전부 모함입니다! 제 치유의 능력에 맹세컨대, 저는 결백합니다. 왜, 왜 아무도 믿어 주시지 않는 거예요…….]

    누군가 조롱하듯 중얼거렸다. 대단치도 않은 치유 능력은 걸어서 무엇 하냐고.

    [몰라서 물어요? 그야 영애가 저지른 전적이 셀 수 없이 많으니 당연한 거죠.]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몰아져 가는 상황에 루스벨라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무도회장에 울리던 음악 소리가 뚝 끊겼다. 장내의 공기가 모조리 사라진 것처럼 싸늘한 적막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비난했다.

    [세상에. 상스럽게 소리를 지르다니. 품위 없게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신이 그런 게 아니라면 조용히 넘어가면 될 일이죠. 보세요. 지펠론 영애께서 화를 내시니 아슈라 영애께서 완전히 겁에 질리셨잖습니까.]

    [흐윽, 흑. 저, 저는 괜찮아요. 제가 무언가 잘못했으니 영애가 제게 화를 내신 거겠죠…….]

    [영애도 참. 너무 착하시고 여리셔서 탈이십니다.]

    연회장에 있던 대부분의 귀족들이 아슈라 영애를 위로했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는 아슈라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진정하라며 가장 편안한 휴게실로 옮겼다.

    그사이 루스벨라는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 익숙하게 많이 당해 본 수법이라, 더 말해 봤자 그녀에게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아슬란은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다 재판관처럼 판결을 내렸다.

    [아직 실질적인 증거가 없으니, 지펠론 영애를 범인으로 몰아가지 말도록. 상세한 조사를 통해 알아보면 될 일이다.]

    명백히 중립의 선에 있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었다. 명색이 약혼 관계이면서, 아무런 편도 들어주지 않았다. 아슬란은 그게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약혼녀라고 해서 특별 대우를 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그건 균형을 어그러뜨리는 일이었다.

    ‘그게 내 철칙이었으니까.’

    그 결정을 후회한 적이 없었는데, 단상 위에 있던 아슬란이 루스벨라와 그때 눈이 마주쳤었다.

    루스벨라의 선명한 녹안이 흐려진 푸른색으로 보였다. 그것은 마치 밤바다에 일렁이는 파도가 몰아치는 색처럼 느껴졌다.

    루스벨라의 입술이 소리 없이 그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냈다.

    당.

    신.

    도.

    나를 의심하고 있어요?

    아슬란은 그런 루스벨라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버석하게 말라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눈동자에 막연한 죄책감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언제나 정도를 걷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해진 길을 벗어나 삐끗한 찝찝함이 남았다. 그 찝찝함이 가슴을 술렁이게 만들기도 전에 루스벨라와 파혼했지만. 그래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었지만…….

    새하얀 눈길 위로 더럽게 남겨진 검은 발자국을 되새기는 것 같아 눈가를 꾹꾹 눌렀다.

    ‘내가 잘못 처신한 것이고, 그녀가 옳은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사과를 하고 돌이키면 되는 일이다.’

    돌이켜? 뭐를?

    기억 속의 애처로운 듯 서늘했던 표정의 루스벨라가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이미 파혼도 했고, 그 상대는 결혼까지 한 와중에 인제 와서 미안하다고 구는 게 염치없다는 걸 아슬란도 알았다.

    다만 그의 자존심과 튼튼히 쌓아 온 벽돌집 같은 편견이 그를 솔직한 참회의 시간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게 했다.

    아닐 거야. 아니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흘러가자 아슬란은 만일 그가 틀렸고, 루스벨라의 말이 진실이었을 경우가 거짓이기를 바란다는 걸 깨달았다.

    빌어먹을.

    ‘이딴 졸렬한 생각이나 품고 있다니…….’

    진실은 가혹하다. 이미 잘못 들어온 길을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는 걸 알아서, 아슬란은 자신의 비겁함을 꾸짖으면서도 바랐다. 자신이 옳기를. 소복이 쌓인 흰 눈길에 아무런 오점도 없었기를.

    그러나 그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얼마 후 시온이 주저하는 얼굴로 조사한 보고서를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사실이란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주군.”

    아슬란이 얼굴 근육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보고서였을 종이 뭉치를 주먹으로 구겼다. 맨 첫 장에 쓰여 있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지펠론 영애의 무고함에 대하여」

    평탄했던 인생에 붉은색 잉크가 찍, 하고 뿌려지는 환청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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