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25화 (26/166)

25화

“……그래서 그 아가씨가 후작 가의 악명이 자자한 놈과 결혼하게 되었다지 뭐야. 그것도 끼리끼리 잘 결혼했다고 말이 많다고.”

“그게 끝인가?”

“음?”

“어차피 항간에 떠드는 소문에 불과할 텐데, 그럴 시간에 네 가문이나 더 돌보는 게 어때.”

“야! 넌 이 엄청난 뉴스가 즐겁지도 않아?”

“별로. 그런 하잘것없는 유언비어에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군.”

대화를 나누는 공간은 윈체스터 공작 성의, 아슬란의 집무실이었다. 아슬란은 오늘 처리해야 할 서류를 정리하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에게는 언제나 일이, 공작 가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사교계에서 뒹굴다 온 가십거리를 주워 와서는 싱글싱글 웃는 친구라는 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볼일 끝났으면 가 봐. 너희 아버지께서 아들이 후계자 수업은 안 받고 농땡이 치고 있는 꼴을 보면 네 목덜미를 잡으러 오시겠군.”

“아아. 그거. 난 가문을 이을 생각이 없는데, 아버지가 한사코 내가 장남이라니까 물려받아야 한다고 어깃장을 놓으시는 거지. 나에게도 선택할 자유라는 게 있지 않겠어? 응?”

“다니엘 크렌베르. 네 인생에 진지함이라는 걸 좀 찾아볼 수는 없나?”

“아마 죽기 전까지는 불가능할걸. 남자는 철들면 죽는다며? 아, 북부의 철심으로 유명하신 공작님께서는 다르신가?”

낄낄 경박하게 웃는 다니엘은 도저히 윈체스터 가문 산하에 있는 가문 중 으뜸인 크렌베르 백작 가의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철없고, 한량 체질인 도련님으로만 보였지.

‘이런 놈과 내가 친구라니.’

아슬란은 밀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또래라고 해서 맺어진 친구 사이는 오늘도 귀찮았다.

항상 그랬다. 아슬란은 묵묵히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고, 그 옆에 다니엘이 쪼르르 나타나서 하고 싶은 말만 줄기차게 하는 식이었다. 한 명은 너무 무겁고 딱딱한 반면에, 다른 한 명은 가볍고 유쾌하니 합의 균형이 맞아서 지금까지도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거 너도 관련된 이야기인데 정말 아무런 관심도 없어? 네 전 약혼녀에 대한 이야기잖아. 끌리지 않아? 궁금하지 않냐고.”

“그까짓 소문이 얼마나 정확하겠어. 그런 걸 주워들을 시간에 서류를 하나 더 처리하는 게 낫겠군. 아니면 검을 더 수련하든가.”

“재미없는 자식.”

“그러는 네놈은 생각 없는 놈이다.”

아슬란이 무표정한 낯으로 한심하다는 티를 팍팍 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네. 북부 공작님의 귀가 틀어막혔으니 소인은 물러가 보겠습니다. 세상에, 저렇게 아무 재미도 없이 살 수가 있나? 어떻게 그러지? 평생 수절하고 사는 사제도 너보다는 나을 거다.”

“가라. 재미없는 인간의 주먹질을 맛보고 싶지 않으면.”

“간다, 가!”

다니엘은 결국 아무 소득 없이 공작 성을 나섰다. 그는 철광석처럼 딱딱하기 그지없는 친우의 낯이 당혹스러움으로 일그러지길 바라고 왔었다.

‘하지만 아예 사실 자체를 안 믿잖아, 저 녀석.’

싱거웠다. 요즘 한창 귀족 가의 영애들과 탐독하고 있는 소설 속 사랑처럼 극적인 만남의 꼬리를 제가 줄 수 있을까 해서 왔는데. 기대하던 반응을 해 줘야 할 당사자가 저리 무뚝뚝하니 흥이 식었다.

다니엘은 아슬란의 전 약혼녀인 루스벨라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공작의 곁이 아니라 늘 먼발치에서 홀로 초라하게 서 있는 모습만 봤지만, 그녀가 아슬란에게 흠뻑 빠져 있었단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건 사랑을 해 본 사람이 알 수 있는 간절한 눈이었다. 그래서 루스벨라를 처음 봤을 때, 그리고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니엘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불쌍한 여자. 그 철옹성 같은 녀석이 마음을 줄 리가 없는데.’

하물며 아무런 교류도 없었던 집안과의 정략적 약혼이었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다니엘은 처음부터 루스벨라의 끝을 보았다.

약혼자인 아슬란에게 사랑받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녀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북부의 귀족들에게 녹아들지도 못하고. 결국에는 쫓겨나는 말로까지.

하지만 자유로운 연애와 돈 많은 백수로서의 삶을 지향하는 다니엘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 바로 루스벨라의 결혼이었다.

‘그 여자. 아슬란만 평생 보고 살 눈이었는데 결혼을 한 게 용하단 말이지.’

애정과 관심에 굶주린 자의 눈빛이었다. 그것도, 한 번 마음을 주면 거두기가 힘든 사람의 눈.

솔직히 다니엘은 루스벨라가 그대로 상사병이라도 앓다가 죽을 줄 알았다.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랑받지 못한 사람 특유의 절박함이 루스벨라에게서 묻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슬란이 그녀를 쫓아내던 날 루스벨라는 산산이 부서졌다. 텅 빈 동공이 섬뜩하리만치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그것도 남부에서 한가락 하는 가문이자, 부로 유명한 데벤테르와의 결합이라니. 대단하군.’

그들의 결혼이 정략적이라는 것 외에 전해지는 소문은 와전되고 뒤틀려 진실은 한 줌에 불과했다. 조금씩 다른 수어 개의 복제품으로 갈라져 사람들의 귀를 찾아 들어갔다.

그중에는, 데벤테르 가의 미친 소후작이 아내를 끔찍이 여긴다는 소문도 들어 있었다. 결혼식은 화려했고, 두 사람은 사랑이 없이 결혼했으나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것도.

……그러니 목석같이 둔하고 얼음보다 냉정한 제 친구도 이 소식을 들으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던 게다.

“내가 멍청했지.”

저 철벽이 그런 말랑말랑한 마음이 자랄 틈바귀를 주는 놈이 아닌데.

진작에 그럴 수 있었다면 루스벨라도 그렇게 참담한 생활을 공작 성에서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예비 신부 수업은 한겨울 폭풍처럼 쏟아지는 눈보라보다 더 혹독했다.

‘됐다. 이렇게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굳이 더 주절댈 이유가 없지.’

수고롭게도 나선 걸음이 헛수고가 되었다. 지루해진 기분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다니엘에게 데리고 온 하인이 실실 웃으며 물었다.

“다니엘 님, 제가 이겼죠?”

“……그래. 네가 이겼다.”

“거 보십쇼. 윈체스터 공작님께서는 그런 ‘사소한 일’ 따위에 아무런 신경도 안 쓸 거라고요.”

“그래. 그래. 네 말이 옳다.”

기분이 저조해진 다니엘은 평소처럼 아량이 넓게 하인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다니엘과의 내기에서 이긴 하인은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들은 루스벨라에 관해 떠도는 소문을 듣고 아슬란이 동요할 것인지에 대한 내기를 한 상태였다. 하인은 듣자마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쪽에 걸었고, 다니엘은 고심하다 반응할 것이라는 쪽에 걸었다.

내기에 건 돈은 50골드로, 하인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는 신이 나서 제 주인이 어떤 기분인지도 포착하지 못하고 줄줄 떠들었다.

“다니엘 님은 평소 내기의 왕이시면서, 왜 아슬란 님이 그 영애를 신경 쓸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다니엘 님답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거야 윈체스터 공작님의 전 약혼녀라면, 북부 사람이라면 다들 치를 떨며 싫어하는걸요. 주제도 모르고 공작 가에 들어온 여자라고요.”

그 말을 들은 다니엘은 우스웠다. 어쨌거나 신분의 차이가 명확하거늘, 이 하인을 비롯한 공작 성의 식솔들은 루스벨라를 자신보다 못한 사람 취급을 했다.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아직도 이리 얕잡아 보이는지. 귀족으로서 그녀는 실격이었다.

‘이 녀석도 데리고 다닐 놈으로는 실격.’

자신이 뭐라도 된 것처럼 북부 운운을 하면서 체면과 명예를 따지는 그 모습이 다니엘은 웃겼다.

‘그리고 이 녀석, 아마도 제일 그 영애를 배척했던 가신 가문에서 온 하인이지?’

원래대로라면 아슬란과 혼사로 맺어졌어야 할 가문인 사일러스에서 온 하인이었다. 추천장을 받고 온 하인은 사일러스 가문에서 열심히 가르친 세뇌 덕분인지 완전히 루스벨라에게 적대적이었다.

정말로 주제넘었던 쪽은 누구였을까?

“흐음…… 글쎄. 누가 진짜 주제도 모르고 날뛰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

“예?”

“아니야. 아무것도. 여기 약속한 50골드다.”

짤랑이는 돈주머니가 하인의 손아귀로 툭 떨어졌다. 얼굴에 가득 차오른 경멸은 사라지고 환희만이 번졌다.

“가, 감사합니다!”

“네가 내기에서 이긴 값이지. 고마우면 집까지 가는 동안 좀 조용히 해. 네 목소리가 시끄러워서 짜증이 나.”

“아…… 죄송합니다. 자중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가벼운 언사와 행동으로 유명한 다니엘 크렌베르였지만, 그는 제 입맛에 맞지 않는 자는 단칼에 내치는 냉혹한 면이 있었다. 하인은 순간적으로 목격한 차가운 주인의 얼굴에 모골이 송연해져 입을 다물었다.

다각다각. 마차가 이동하는 동안 말발굽 소리만이 공기를 울렸다. 적막함은 생각에 멍하니 빠질 기회를 주었다. 다니엘은 곰곰이 상념에 젖어 들었다.

‘정말로 그 돌덩이 같은 녀석이 전 약혼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을까?’

다니엘이 보기에, 아까 아슬란은 일에 집중하느라 다니엘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사실상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전부 흘려보냈을 것이라고 오랜 친우로서의 감이 외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니엘이 하인과 내기에서 반응할 것이라는 쪽에 돈을 건 이유는 이것이었다.

‘아슬란이 그 약혼녀에 아무 미련도 없다면, 왜 아직도 약혼녀의 자리를 비워 두고 있는 거지?’

아닌 게 아니라, 이미 아슬란은 혼인 적령기를 맞이한 지 꽤 되었다. 약혼이 아니라 곧바로 결혼식을 치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스벨라의 결혼 소식이 더 놀라웠던 것이다. 설마설마하니 그 여자가 아슬란보다 먼저 결혼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런데 루스벨라와 파혼 후 약혼녀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6개월이 넘게 흘렀는데도, 그의 옆자리는 비어서 먼지만 날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원.”

자신의 짝이 될 자리를 비워 둔 게 혹시나 해서 기대를 걸었는데, 촉이 잘못된 쪽으로 기운 모양이었다.

재미없게.

‘아슬란이 안달 내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야기가 정말 재밌게 흘러갈 텐데……. 아쉬워라.’

다니엘은 악취미적인 상상을 하며 히죽거리다가 이내 질려서 눈을 붙였다.

그가 바랐던 ‘재미있는 상황’이 태연해 보였던 아슬란에게 벌어지는 줄도 모르고.

***

“……집사.”

“예, 공작 각하.”

“정말로, 그녀가 결혼했나?”

“사실입니다. 각하.”

“루스벨라 지펠론 영애가…… 정말로 결혼했다고?”

“그렇습니다. 공작 각하.”

사실임을 확언하는 집사의 말에 아슬란은 숨이 탁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슬란 윈체스터는 정이 많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원체 일벌레였기에 약혼녀에게 마음을 써 주는 사람도 아니었다.

아슬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북부를 지키는 책임감과 의무였다. 그는 결혼 역시 사랑이라는 감정적인 영역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은 후계자를 낳아야 하는 신성한 결합이며 조약이지, 그 사이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아슬란. 너는 선대와 같은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예. 어머님.]

[사랑은 5월에 핀 장미처럼 화려하게 피어나지만, 결국 추하게 식어 버릴 감정이야.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 감성보다는 이성을, 마음에 치우치기보다는 논리를 따라야 한다.]

절대, 누군가에게 송두리째 마음을 내주지 말렴.

[나는 네가 나처럼 상처받는 모습을 절대 볼 수가 없단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

제가 잘할게요.

하나뿐인 북부의 수장으로서…… 모두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그래서 괜찮은 줄만 알았는데.’

아슬란 윈체스터의 일 처리는 정확하고 논리 정연했다. 그는 사람의 정에 연연하지 않고 멀어진 대신 정의의 신처럼 누구에게나 냉정한 심판을 내릴 수 있는 차가운 인간이 되었다.

그래서 전 약혼녀였던 루스벨라 지펠론도 같은 방식으로 내쳤다. 그녀가 윈체스터 공작 가의, 북부의 안주인으로서 부족하다는 항의 어린 서신이 계속해서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저분을 우리의 안주인으로 모실 수 없습니다.’

아슬란은 처음에 그 서신들을 무시했다. 그러나 하나가 셋이 되고, 열이 되고 조작된 증거와 모략 섞인 제보가 들어오자 그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슬란은 몰랐다. 그게 루스벨라를 내쫓으려는 음모인 줄. 그의 눈에는 완벽한 증거였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게 아슬란의 패착이었는데, 약혼녀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던 그는 매정하게 가엾은 루스벨라를 쫓아냈다.

[제발…… 제발 파혼하자는 말만 담지 말아 주세요.]

[공작님. 제가, 뭐라고 말씀하시건 다 고칠게요.]

그 말들이 아슬란에게는 죄를 짓고 넘어가 달라는 비겁한 변명으로만 들렸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마음속에 루스벨라가 오열하던 것이 찜찜하게 남아 있었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을 따라야 하는 것이 옳지만, 그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보며 아슬란은 아주 조금, 그의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나 고민했다.

‘그것조차 곧 잊어버렸지만…….’

묻어져 있던 찜찜함을 되살린 건은 청첩장을 들고 온 루스벨라였다.

그녀가 시선을 끌어 보고자 하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인 줄 알고 배웅조차 나가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거짓인 줄 알았던 결혼 소식은 진실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앞으로 들이밀어진 그녀의 잘못은 진실이 아니었나.

“내가…… 잘못 판단했던 건가?”

믿었던 가신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찌해야 좋은 것이지.’

아슬란은, 혼란스러웠다.

그가 올바르게 걸어왔다고 자부했던 길이, 이미 잘못 들어간 길이었을 가능성에 그는 속이 불편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