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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24화 (25/166)
  • 24화

    데니스가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붉은 눈동자로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그래서 자리를 비웠던 거였나…….”

    기억을 떠올리던 루스벨라가 코 밑까지의 얼굴을 물에 푹 담갔다. 안면에 닿는 물은 아직도 따끈했다.

    목욕 시중을 다 들어준 시녀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그녀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혼자서 잠시 있고 싶다는 부탁 때문이었다.

    무덤덤하게 아무런 기대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데니스가 그런 행동을 하기 위해 그들을 쫓았다는 것을 알자 마음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이 느껴졌었다.

    그래서 물어봤었다.

    [왜…… 그랬어요? 그 사람들, 내가 혼자서 쫓을 수 있었어요. 추적 물약도 묻혀 둔 상태였다고요.]

    [기사들이 알려 줘서 들었습니다. 추적 물약이라, 그런 수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대단하더군요.]

    [말 돌리지 말고 물어본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해 주세요.]

    [그건……. 저도 그들에게 불쾌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데니스가 루스벨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나의 사람이고, 이 데벤테르의 사람이 된 당신에게 멋대로 군 그 인간들을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직접 벌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빠져나가게 두었습니다만. 제 행동이…… 싫으셨습니까?]

    그 질문에는 아니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기사들도 루스벨라가 추적 물약을 묻혔다고 하자 바로 쫓을 것을 물어보았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굳이 데벤테르 가의 힘을 빌려서 복수하는 빚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저 물약은 묻힌 대상이 살아 있는 한, 영구히 남는 것이었으므로 놓칠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는 후작 가에서 나온 뒤에 그들을 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데니스가 말을 에둘러 했지만 결국 자신을 위해서 그들을 잡아 둘 준비를 했다는 것에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그렇지만 아직도 거둬지지 않는 의심 한 자락은 있었다.

    ‘꼭 미리 안 것처럼 행동하는 것 같다면 내 착각일까?’

    그에게 고마웠다. 그러나 완전히 믿기는 어려웠다. 수수께끼 같은 면모를 보이는 그를 알 수가 없었다.

    ‘이곳은 참 이상한 곳이야.’

    루스벨라는 기어코 정수리까지 물 안에 잠기게 했다. 따뜻한 수온이 온몸을 돌며 그녀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물이 아직 따뜻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여겼다.

    ‘나를 불쌍히 여겨 그러는 것에 별다른 의미 부여를 하고 싶지 않아.’

    기대하지 말자.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마.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결심한 것들만 생각해.

    “그래야만 해…….”

    그러나 되뇌는 말과는 다르게, 욕실 밖 그녀의 침실 안의 서랍장 속에는 데니스가 준 로네와 잭슨의 팔찌와 연동되는 아티팩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싫지는 않았어요.]

    그 말 한마디에 데니스는 만개한 꽃처럼 미소 지었다. 아주 애틋한 무언가를 보는 눈길로. 그렇게.

    루스벨라는 욕조의 물이 식을 때까지 머무르다 밖으로 나섰다. 작은 마님이 나오시지 않는다며 발만 구르던 하녀들이 우르르 그녀에게 몰려들어 이러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며 부산을 떨었다.

    “고마워. 다들. 걱정해 줘서.”

    “작은 마님……!”

    “메일리! 작은 마님을 껴안으면 안 돼!”

    물의 온기는 다 식었지만, 사람이 주는 온기가 루스벨라를 따뜻하게 덥혀 그녀는 춥지 않았다.

    ***

    한편, 리스냐를 부랴부랴 빠져나온 잭슨과 로네 일당은 미칠 지경이었다.

    “제길! 너 때문에 이게 뭐야. 어디에서도 우리를 받아 주는 곳이 없잖아!”

    “이게 왜 내 탓이야? 데벤테르 가의 위세만 믿고 설치는 그 귀족 계집애 탓이지!”

    “야, 말은 똑바로 해. 너나 나나 귀족 작위를 잃고 평민이 된 사람들이야. 네가 루스벨라 지펠론에게 사과만 하고 넘어갔으면 이러진 않았어.”

    “너도 동의했잖아! 이제 와서 내게 책임을 돌리는 거야?!”

    “네가 일을 심각하게 만든 건 맞잖아! 이 거지 같은 팔찌 때문에 무식하게 걸어서 북부까지 가야 한다니. 너 때문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너…….”

    “하, 됐어. 말을 말자. 지금 너랑 대화할 기분 아니야. 짜증 나서 진짜 못 들어주겠네.”

    “…….”

    “뭐 해? 빨리 오지 않고.”

    잭슨과 로네는 힘겹게 산을 타고 오르는 중이었다. 그들은 휴가차 리스냐에 들린 것이긴 했지만, 겸사겸사 거래처에 눈도장을 찍기 위해 방문한 것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갖고 온 짐이 상당했다. 북부에서 가져온 선물용 물건들은 진즉 다 털었지만, 거래처 상인들에게 답례품으로 받은 선물이나 리스냐를 돌며 사들인 귀중품이나 특산물이 꽤 있었다.

    어차피 돌아갈 때도 게이트를 타고 이동하면 그만이니 양껏 사서 북부로 돌아갔을 때 비싼 값으로 받아 이득을 챙길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그게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이야…….’

    성인 남자 셋이 들어도 남는 짐을 가지고 걸음을 재촉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리스냐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미 해가 지고 다른 마을로 도착하지도 못했다.

    ‘망할. 최소한 마차나 배라도 타고 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데니스가 그 어떤 이동 수단도 이용할 수 없다고 해서 마차는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잭슨에게도 기절한 사이 데니스가 팔찌를 걸어 두었기 때문에, 둘 다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땀을 흘리며 걷고 있었다.

    로네는 데니스의 협박이 결코 거짓이 아닐 거로 생각해 모든 이동 수단과 편의 시설에 대한 것을 포기한 상태였지만, 잭슨은 아니었다. 그는 기절한 상태였기에 로네가 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이런 팔찌 따위, 아무 기능도 없는데 협박으로 그냥 하는 말일 줄 누가 알아?]

    로네도 잠시 그 말에 혹했다. 지독한 죄인들을 감시하기 위해서나 만들어진 영주들의 팔찌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모조품을 만들어 그들이 생고생을 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로네는 혹했다.

    [그, 그럼 한번 마차를 알아보자. 튼튼한 말이 이끌고, 넉넉한 짐을 넣을 수 있고 우리도 편안히 갈 수 있는 것으로.]

    [야, 로네. 인간적으로 네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뭐?]

    [내가 잠든 사이 네가 입을 잘못 놀려서 데벤테르 소후작이 이 팔찌를 걸었다며. 너 혼자 갔다 와. 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

    [어서 가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서두르지 않으면 북부에 가는 길만 더 늦어진다고.]

    [……알았어.]

    잭슨은 깨어난 뒤 로네에게 몹시 차갑게 굴었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는 것처럼 그는 모든 잘못을 로네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척했다.

    아니꼬웠지만 로네는 할 수 없이 혼자서 마차 대여소로 향했다. 혹여나 잭슨이 길길이 날뛰어 그녀만 홀로 두고 떠나는 일은 없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그 여자 때문이야.’

    루스벨라!

    그리고 데벤테르 가의 그 미치광이 남자.

    두 사람을 욕하며 로네는 마차 대여소의 직원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신가요?]

    [여기, 마차 한 대를…….]

    왜앵― 왜앵― 왜앵―

    [이게 무슨 소리지?]

    [뭐, 뭐야?]

    데니스가 걸어 놓은 팔찌가 심장이 떨어져라 크고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어 내며 울렸다. 마차 대여소의 직원은 로네의 팔에 걸린 팔찌를 보고 식겁했다.

    [세상에. 죄인들이나 하고 다니는 아티팩트잖아? 여기요, 거기 누구 없어요? 이 사람 좀 쫓아내 줘요!]

    ‘제기랄!!!’

    결국 로네는 미친 듯이 그 자리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진짜 범죄자처럼 낙인찍힌 신세가 되었다는 것에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뭐야. 마차를 빌리려고 하니까 진짜 그 팔찌가 못 빌리게 막았다고?]

    [……그래. 이젠 걸어가는 것 외에 방도가 없어.]

    [미치고 환장하겠네. 씨발.]

    [왜 욕을 하고 그래?]

    [너 때문이잖아! 이러고 어떻게 가란 말이야!]

    그들은 한참 말다툼을 벌이다가 시장에서 그물과 커다란 천을 사서 짐들을 묶었다. 그리고 수레를 사서 그것들을 실었다. 그 모습이 마치 아이들의 집에 몰래 선물을 두고 간다는 요정 같았다.

    거대한 자루가 든 수레를 하나씩 질질 끌면서 이동해야 했다. 등에는 식량용 가방이 매여 있었다. 얼마나 긴 고행길이 될지 모르니 양껏 사서 쑤셔 넣은 건조식품과 물이 들어갔다.

    그러니 짐은 무거웠고, 거추장스러웠다. 잭슨이 짜증을 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로네도 지쳐 있었다.

    “아, 몰라. 오늘은 여기까지만 걷고, 노숙해. 도저히 더는 못 걷겠어.”

    “산이라 짐승 떼가 나타나면 어쩌려고? 위험하니까 조금만 더 걸어서 가자. 지도를 보면 곧 마을이 나온다고 했어.”

    “그 마을이 나와도 어차피 노숙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잖아? 안 그래?”

    “……그래도 더 걷자. 짐승 떼에 물려 죽는 개죽음은 너도 싫잖아.”

    “제길. 쉬지도 못 하고 이게 무슨 고생이야.”

    로네는 계속해서 제게 불만을 토로하는 잭슨을 어르고 얼러 동이 틀쯤에야 마을에 도착했다. 그들은 사정사정해서 헛간에나 몸을 누이고 못 잤던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총 서른 개의 마을을 더 지나가야 했다. 마을을 지나가는 동안 둘의 행색은 몰라보게 더러워졌다. 꼬질꼬질해도 냇가를 만나지 못하면 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관의 신세를 지지 못하니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수레를 끌고 운반한 짐들은 가는 동안 비에 젖어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근육통에 시달리며 옮긴 것이 아깝게도 상당수는 버려야 했다.

    또, 여정의 중간중간 로네와 잭슨은 누가 잘못했느냐는 문제로 계속 싸웠다. 정신과 육체 모두가 피로에 찌든 극한의 끔찍한 여행이었다.

    “아……! 북부다! 드디어 북부에 왔어!”

    겨우 고생한 끝에 둘은 북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엉망이 된 꼴로 온 두 사람을 문지기는 알아보지 못해 들여보낼 수 없다며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품에서 북부의 주민이라는 신분 패를 꺼내 들고 나서야 성문 안으로 들여보내 주려 했다.

    왜앵― 왜앵― 왜앵―

    “이게 무슨 소리야?”

    “안 돼!”

    “제길. 부서져! 부서지란 말이야!”

    이 미칠 것 같은 경고음이 또 팔찌에서 울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잭슨은 팔찌를 부숴 버리기 위해 경비병이 들고 있던 칼의 검집을 빼앗아 제 손목을 내려쳤다.

    “아악!”

    그러나 손목만 삘 뿐이지, 팔찌는 멀쩡했다. 누가 봐도 수상한 두 사람의 모습에 경비대는 그들을 구금했다.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나서야 둘은 성안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시끄럽게 울리는 팔찌의 소리가 멈추지 않아 비싼 값을 주고 소음 차단 마도구를 구입해야 했다.

    데벤테르 소후작이 이 팔찌를 풀어 줄 생각이 없을 테니 족쇄처럼 평생을 끼고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팔찌를 찬 상태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졌으니 성사했던 거래가 끊기거나 거래처가 돌아서는 일이 자꾸 생겨났다. 한순간에 쌓아 놓은 모든 일이 무너지게 생기자 그들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루스벨라 그년과 데벤테르 가의 미치광이를 가만두지 않겠어.’

    생고생으로 인해 눈이 뒤집힌 두 사람은 분노에 타올랐다. 더는 잃을 게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그날부로 북부의 사교계에 끊임없이 소문을 흘렸다.

    ‘공작에게 소박맞아 형편없는 모습으로 쫓겨났던 여자가 팔려 간 주제에 겁도 없이 후작 가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후작 가의 미친 후계자는 그 여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노쇠한 후작을 죽일 예정이다.’

    ‘또한, 데벤테르 가문을 장악하게 되면 복수의 칼날을 갈아 윈체스터 공작 가를 향해 찌를 생각이다.’

    ……라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마구 남발하고 다녔다. 혹시나 자신들을 쫓을 것을 염려하여 소문을 내는 사람은 이중, 삼중으로 돌려 누가 시켰는지 알지 못하게 했다. 어차피 팔찌에 추적 기능이 있으니 그런 시도는 다 헛수고였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해 데니스와 루스벨라의 평판을 망칠 각오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어머, 세상에. 그 여자가 그렇게까지 망가질 줄은 몰랐는데. 사람 참 무섭군요.”

    “그렇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공작 각하께서 미리 주신 지참금도 거두지 않았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는군요.”

    “역시 사람은 다시 봐야…….”

    가십거리는 언제나 사교계의 즐거운 유희 거리였다. 그들은 진실을 파악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 식어 가는 감자였던 루스벨라의 이야기는 다시 오븐에 데워져 가장 따끈따끈한 전파력을 자랑하며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야야, 아슬란. 파혼당했던 네 전 약혼녀가 결혼했다며?”

    “……그게 무슨 소리지? 전 약혼녀?”

    “아, 이 소문에 둔한 자식. 요즘 그게 북부 사교계를 강타하는 가장 큰 이슈인데. 너와 연관된 주제인데 아직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 자. 어서 들어 봐봐. 일이 어떻게 되었냐면 말이야…….”

    “바쁘다.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아 좀! 듣고서 판단을 해 봐! 너도 들어 보면 재밌을 거야.”

    “하아…… 쓸데없는 이야기라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든가. 인생 살아가는 재미가 없는 너도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걸?”

    결국 그 이야기는, 루스벨라의 전 약혼자였던 아슬란 윈체스터 공작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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