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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23화 (24/166)
  • 23화

    결국 로네는 데니스의 계략 때문에 만신창이 신세가 되어 잭슨을 데리고 떠났다. 데니스는 즐거운 표정으로 아티팩트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았다.

    “빚을 조금은 갚을 수 있었을까. 그녀의 몫을 생각해서 남겨 두기는 했는데.”

    데니스는 루스벨라가 저들을 포함한 이들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로네와 잭슨을 봤을 때의 표정을 봤다.

    흉포한 인어에게 끌려가 심해에서 목이 졸리는 사람의 표정이 저러할까.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하는데, 순순히 죽기에는 즐거워하는 인어의 모습이 화가 나 그것만큼은 죽여야 한다는 사람의 표정 같았다.

    그래서 데니스는 눈치껏 뒤로 빠졌다. 떠나기 전에, 루스벨라를 방해하지 않도록 기사들에게 주어진 자리를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말라고 명했다. 호위로 따라온 기사들에게 일거리를 빼앗아 가다니, 기사들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처사였다.

    “그럼 작은 마님은 누가 지킵니까?”

    “내가 한다. 자리 이탈하는 놈들 있으면 움직인 거리만큼 봉급에서 깎겠다.”

    데니스가 점포 위로 뛰어오르며 답했다. 봉급을 깎을 거라니, 너무 잔인하고도 현실적으로 무서운 협박이었다.

    기사들이 기겁했지만, 데니스가 루스벨라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지키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내고 입만 뻐끔거렸다.

    “그렇게 하면 저희는 그동안 뭐 하고 있으라는 겁니까? 손가락만 빨면서 기다리라고요?”

    기사 체면이 있지! 더구나 작은 마님께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빤히 쳐다만 봐야 한다는 것인가!

    기사들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지만 데니스는 쳐다도 안 봤다. 그에게는 어서 루스벨라를 위해 할 일이 있었으므로.

    ‘저놈들이 도망갈 통로는 총 셋이군. 인파가 몰려 있으니, 가장 서 있는 사람들이 적고 출구와 가장 가까운 저곳을 노리고 도망칠 수 있겠어.’

    놈들이 빠져나갈 퇴로를 미리 파악하는 일이었다. 데니스는 루스벨라가 저 아가리를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들에게 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혀. 눈곱만큼도.

    극단적으로 가상의 상황을 예로 들자면, 루스벨라가 도박판에 끼어 한 곳에 올인을 한다고 해도 데니스는 기꺼이 그녀에게 제 전 재산을 쥐여 줄 수 있을 정도로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저런 허접한 쓰레기들에게 당할 위인이 아니지.’

    데니스는 숨을 죽이고 루스벨라와 두 장사꾼의 대치를 지켜봤다. 예상대로 그 둘은 주제도 모르고 루스벨라를 함부로 대한 사람들이었다. 허리춤에 매인 칼자루에 손을 대고 싶어 주먹이 연신 움찔거렸다.

    저것들의 머리를 베어 버리고 싶은데.

    ‘참자, 참아.’

    쉬운 해결책을 선택하는 게 빠르고 마음도 편하다는 것을 안다. 단칼에 죽여 버리는 것. 그가 잘할 수 있는 일이니 적성에도 맞았다.

    하지만 데니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거든 탈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한다고 해서 ……가 돌아올 줄 아나? 어리석기는.]

    “닥쳐. 나도 알고 있어.”

    과거의 듣기 싫은 목소리. 데니스는 혼잣말로 그것을 털어 내려 했다.

    복잡하고 얼기설기 매여 있는 갈등의 실타래를 귀찮아도 일일이 풀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녀에게 아직 한낱 외부인일 뿐이지.’

    그러니, 함부로 문제의 당사자도 아니면서 끼어드는 실례는 범하고 싶지 않았다.

    루스벨라의 복수는 그녀 자신만의 것이었기에. 그가 그녀를 경애한다고 해서 천지 분간도 하지 못하는 애송이처럼 얘기한 적 없는 도움을 주고 으스대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 일이야.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이제는 그만이 기억할 그녀의 말. 그녀가 그어 놓은 선을 넘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알아요. 복수는 당신의 것이죠. 나는 그저…….”

    당신을 지킬 거예요.

    저 썩을 것들의 목을 베지 않는 건,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건 루스벨라의 홀로서기를 위해서였다. 여태까지 억눌렀던 고인 감정들을 배출하고 시원해질 수 있도록, 그는 뒤에서 묵묵히 지켜 주는 것만 하면 되었다.

    “끝났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몰아세워지는 일을 견딜 수 없었는지, 여자 쪽이 먼저 도망쳤다. 뒤이어 남자 쪽도 자리를 피했다. 아까 봐 뒀던 퇴로로 그들은 달려가고 있었다.

    걸려들었군. 고맙기도 하지.

    데니스는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며 긴 다리를 뻗어 달렸다. 일반적인 인간의 달리는 속도를 넘어선 빠르기로 그는 그들이 다가올 위치에 먼저 가서 기다렸다.

    예상대로 로네와 잭슨을 맞닥뜨렸고, 그 후는 아까 겪은 대로였다. 루스벨라가 이 자식들을 직접 벌하길 원하니 놓아주기는 할 테지만, 곱게 보내 주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품 안에 들어 있는 아공간 주머니에 있는 팔찌를 이용하면 될 것 같았다.

    ‘적당히 루스벨라에게 관심 없는 것처럼 구슬리면 넘어오겠지.’

    데니스가 설계한 덫인 줄도 모르고 로네는 속아서 줄줄 개소리를 지껄였다. 단어 사이로 스며 있는 인간의 악의가 코를 찔렀다. 역겨움을 참아 가며 데니스도 연기를 했다.

    ‘죽이는 건 너무 쉬워. 더 오랫동안 고통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해.’

    숨통이 조여서 말라붙도록.

    팔찌는 채워졌다.

    ‘이제 그녀가 그들을 쫓고 싶다면 언제든 가능해.’

    그게 아니라도 이 둘은 북부까지 돌아가는 데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겪어야 했다.

    그들이 마차나 여관에 갈라치면 팔찌가 시끄럽게 울리며 그들을 들여보낼 수 없게 막아 줄 것이다. 가는 내내 노숙은 기본이고, 어디서 묵지를 못 하니 제대로 씻지도 못 하며 가게 될 것이다.

    로네와 잭슨이 떠난 곳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데니스는 중얼거렸다.

    “그 고생을 한다고 사람이 죄를 뉘우칠 것 같지는 않지만.”

    툭툭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주머니에 있는 휴대용 통신 마도구가 진동했다. 기사들이 돌아와 달라고 요청하는 소리였다.

    “가야지. 그녀가 기다리게 둘 수는 없으니.”

    그는 다시 사람 같지 않은 속도로 달려 루스벨라를 만나러 갔다. 발걸음을 몇 번 옮기자 루스벨라와 기사들이 나타났다.

    데니스를 발견한 기사들의 눈이 밝아졌다. 그들의 반응을 보고 루스벨라도 뒤를 돌아 데니스를 바라봤다.

    “주군! 어디 갔다가 이제 오십니까!”

    “잠시 볼일이 있어서. 루스벨라는 괜찮습니까?”

    “……난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일단 신발부터 새로 사야 할 것 같군요.”

    “괜찮아요. 이거 신고도 충분히 걸을 수 있으니까.”

    루스벨라의 말은 덤덤했다. 그녀는 데니스가 어딜 갔는지에 대해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기대도, 실망도 없는 사람처럼 딱딱한 태도였다.

    “그건 내가 안 되겠는데요.”

    “난 정말 괜찮…….”

    “그대로 가게 되면 내가 열심히 꾸며 주는 데 혼신을 다한 지아나에게 혼날 겁니다. 난 잔소리를 듣는 게 싫거든요. 그러니 신발을 새로 사러 가는 게 어때요? 유모에게 혼나지 않도록요.”

    루스벨라가 데니스의 말에 푸근하게 웃으며 쾌활한 미소로 오늘 외출 때 배웅하던 지아나를 떠올렸다. 상냥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 그런 사람의 얼굴에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해요.”

    “고마워요.”

    데니스가 화사하게 웃으며 눈을 접었다. 루스벨라는 이제 그의 웃음에 면역이 되어 무심하게 쳐다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자, 그럼 갈까요?”

    나들이는 여기서 끝이었다. 루스벨라가 신고 있던 샌들과 가장 흡사한 것을 사고서 그들은 다시 데벤테르 가 소유의 성으로 향했다.

    좋게 시작해서 끝이 나쁜 나들이였다.

    ***

    성으로 돌아오자 지아나를 비롯한 하인들이 한달음에 달려와 그들을 맞이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작은 마님!”

    “어떠셨어요? 도련님과 데이트는?”

    “아…….”

    루스벨라가 난감함에 동공을 떨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사방에 주인 내외의 첫 데이트 후기를 기다리는 하녀들뿐이었다.

    하녀장 지아나도 그들을 말릴 생각이 없었다. 지아나도 루스벨라와 데니스가 그림 같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는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아나. 루스벨라가 곤란해하잖아. 우선은 피곤할 테니 씻고 편히 쉬게 부탁하지.”

    데니스가 적절한 틈을 타 끼어들어 지아나를 만류했다.

    과연, 루스벨라는 타고난 체구가 왜소한 편이어서 그런지 고작 나들이를 다녀왔는데도 지친 기색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실제로 루스벨라는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 이미 ‘작은 마님은 소중하다’라는 콩깍지가 낀 지아나는 그런 세세한 것까지는 발견해 내지 못했다.

    “아이고 참. 내 정신 좀 보게. 메일리! 신디! 이리 좀 와라. 작은 마님의 시중을 들어 드리자.”

    “네!”

    “맡겨만 주세요.”

    “이따 봐요. 루스벨라.”

    “알았어요.”

    루스벨라는 자신이 머물도록 지정된 후작 부인의 방으로 올라갔다. 하녀들이 옷을 벗기는 것을 도와주고, 욕조에 따뜻한 물을 넣고 향유를 준비했다.

    “어, 작은 마님! 신고 갔던 신발이 달라지셨네요?”

    “어머, 정말.”

    아. 결국 들켰나.

    ‘……속상해하려나?’

    그렇게 열심히 날 꾸며 줬는데…….

    “이건.”

    “이 신발은 어찌 된 건가요? 혹시 이거, 작은 주인님께서 사 주신 건가요?”

    “작은 주인님이? 그런 센스 있는 행동을?”

    “……맞긴 해. 내가 돌아다니다 신발을 못 쓰게 되어서…… 그래서 그가 사 줬어.”

    “어머, 어머머.”

    “작은 주인님이 행동력이 좋으시네요. 어쩜.”

    “두 분 사이가 좋아지길 바랐는데, 괜한 기우였나 보네요. 이리 다정하게 구시니 앞으로 더더욱 사이가 좋아지시겠죠.”

    하녀들은 이 성에 오랜만에 찾아온 주인 내외의 핑크빛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재잘거렸다. 참새들이 짹짹이는 나무 사이에 앉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루스벨라는 안도했다.

    ‘조용히 넘어갔네…….’

    다행이다.

    ‘데니스는 이래서 내게 신발을 사다 준 걸까?’

    데니스가 혼나고 싶지 않다며 신발을 사 준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는 어쩌면 하녀들의 상심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루스벨라의 걱정을 꿰뚫어 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데니스가 신발을 사 준 덕에 하녀들 중 누구도 루스벨라가 오늘 나들이에서 불쾌한 인간들을 만나고 왔다는 걸 몰랐다. 그리고 그들은 굳이 신발을 무슨 연유로 잊어버렸는지 캐묻지 않아 마음이 편했다.

    “지아나 하녀장님! 온도는 지금 딱 맞아요. 루스벨라 님이 들어가셔도 될 것 같아요.”

    “작은 마님, 씻을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식기 전에 들어가시죠.”

    “알겠네.”

    루스벨라는 하녀들의 도움으로 옷을 전부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목 위까지 차 있으니 몸이 노곤해졌다. 양옆에서 그녀를 씻기는 하녀들의 전문가적인 손길 아래 시장에서 나오기 전의 일이 생각났다.

    [루스벨라. 이거 한번 신어 보세요. 이게 가장 오늘 신고 나온 신발과 비슷하네요.]

    [탁월하신 선택이십니다. 부인의 하얀 피부와 참 잘 어울리시네요. 다른 상품들도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요. 그건 됐어요.]

    단칼에 신발 가게 주인의 영업력을 차단한 루스벨라가 샌들을 신으려 할 때였다.

    데니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루스벨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손으로 샌들을 곱게 들고서.

    [……뭐 하시는 거예요?]

    [보다시피 직접 신을 신겨 드리려고 있어요.]

    뭐? 루스벨라는 그가 제게 왜 이러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어리둥절해했다. 뒤에서 직원이 로맨틱하다는 소리를 한 것도 같다. 신을 신겨 준다는 이야기에 아니라고 하지 못했지만.

    ‘……하고 싶은 대로 두자. 신발 갈아 신기는 게 뭐 대수라고.’

    루스벨라는 불쾌했던 자들과의 만남 때문에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었다. 그녀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데니스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목을 잡고 샌들을 갈아 신겼다. 맞지도 않던 헐렁한 신발이 꼭 맞는 치수의 것에 밀려 저리 치워졌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신발을 갈아 신기며 데니스가 한 말이었다.

    [당신에게 무례하게 군 자들에게 어떤 게이트도, 편의 시설도 이용할 수 없도록 제한을 거는 아티팩트를 설치했습니다.]

    [뭐라고요?]

    [당신이 쫓고 싶다면 편하게 그리 할 수 있게 한 행동인데, 괜찮나요?]

    깨진 찻잔이 무해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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