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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21화 (22/166)
  • 21화

    “이, 이익…….”

    “왜, 말을 못 하겠나? 네가 저지른 죄에 대한 사과를 하는 게, 그렇게 어렵던가?”

    “…….”

    “내가 말을 잘못했군. 혀를 잘라 버린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어.”

    사과도 못 하는 혀를 잘라다 무엇에 쓰겠어.

    울 것 같이 웃던 루스벨라가 그 말을 하면서 얼굴을 굳히자 아무 감정도 없는 인형이 말하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자신이 깔보던 여자에게 독설을 들으니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네가 뭐라고, 네가 뭔데 내게 개망신을 줘!’

    로네의 얼굴이 수치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붉으락푸르락 문어처럼 바뀌는 로네의 낯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네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내가 너 때문에 받은 상처와 조금이라도 비슷할까.’

    신의 말씀을 옮겨 적은 석판에는 인간에게 자비와 자애를 추구할 것을 명하는 구절이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너를 해하려 한 사람이 있거든 그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네가 인도해 주거라.

    라고.

    그렇지만 루스벨라는 그 말에 따르고 싶지 않았다.

    ‘싫어.’

    루스벨라가 가장 힘들 때 빈 소원은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은 그녀가 가장 구원이 필요할 적에 옆에 없었다. 간절한 기도가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이야말로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는 동아줄이었다.

    그녀는 이제 신을 믿지 않는다.

    도와줄 사람이 없는 지금, 로네와 과거의 루스벨라는 같은 선상에 서 있었다.

    “뭐라도 말해 보지 그래?”

    루스벨라가 그들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그 시선이 섬뜩하여 로네는 결국 루스벨라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로네가 주변을 돌아봤다. 로네가 거짓 연기를 해서 모여든 사람들은 어느새 로네와 잭슨을 곱지 못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는 경멸이 스며 있었다.

    “들어 보니 저분께서 오히려 피해자셨던 모양이신데.”

    “감히 귀족을 모함해? 그것도 영주님의 아드님과 결혼하신 분을. 겁대가리를 상실해도 유분수지.”

    “퉤. 무슨 구경거리가 났나 싶었더니. 갑시다. 더는 보고 싶지가 않네.”

    로네가 쥔 주먹이 파들파들 떨렸다. 겪은 적 없는 상황에 몸이 말을 듣지가 않았다.

    “로, 로네. 우리 아무래도, 자존심 굽히고 사과하고 끝내는 게…….”

    같이 무릎을 꿇고 불쌍한 척을 하던 잭슨이 로네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다.

    ‘줏대도 없는 새끼.’

    로네는 잭슨의 팔을 쳐내고 끝까지 루스벨라에게 사죄의 의미로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어떻게 비굴하게 저 여자에게 고개를 숙일 수가 있어!’

    로네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사람이 조금 빠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의 대치를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알지도 못하는 타인들의 시선이 로네를 힐난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제 로네가 바란 그림이 아닌, 루스벨라에게 로네가 사과하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싫어. 절대 싫어.’

    로네는 그때 루스벨라에게 독설을 퍼부었던 일을 용서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로네는 자신이 오히려 정의로웠다고 생각했다.

    공작 성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던 멍청한 여자에게 너의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걸 알려 준 건 장기적으로 루스벨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하는 조언이었다고 말이다.

    자기합리화를 하는 로네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갔다. 그렇게 생각하니, 루스벨라가 데벤테르 가의 며느리가 된 것에 어쩌면 자기 지분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궁지에 몰리자 앞뒤 분간하지 못한 생각이 몸집을 불려 로네를 잠식했다.

    “나는…….”

    “그래, 로네. 우리 사과하는 척만 하고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자.”

    잭슨의 말에 로네는 결국 이성의 끈을 놓쳤다.

    “닥쳐, 잭슨.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너도 그때 통쾌해했잖아. 주제도 모르고 기다리기만 하는 꼴이 같잖다고.”

    “로네! 야!”

    “난 굽힐 생각 없으니 정 뭣하면 잭슨이랑 이야기하든지.”

    어차피 또 홀대받으며 사는 것 같은데, 굳이 자존심을 접을 이유가 없었다. 로네는 누가 잡을 새도 없이 뛰어갔다.

    “야! 야! 로네! 같이 가!”

    로네는 미리 봐 둔 사람들이 없는 틈 사이로 도주했다. 잭슨은 욕설을 작게 중얼거리더니 루스벨라를 힐끔 보고서 로네를 따라 도망쳤다.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루스벨라는 신을 벗었다. 굽 있는 샌들을 손에 쥐고 도망치는 로네와 잭슨을 향해 던졌다.

    발이 두 개여서 다행이었다. 던질 것이 둘이니 하나만 던지는 것보다는 맞힐 확률이 더 높았으니까.

    “악!”

    죽어라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달리는 로네는 맞추지 못했지만, 후발 주자인 잭슨의 등에 신발을 맞히는 건 성공했다. 굽이 있는 쪽으로 맞아서 어지간히 아플 게 분명했다.

    “뭐야. 저 사람들. 저대로 그냥 도망치는 거야?”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는 꼴 좀 보게.”

    구경꾼들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리고 상황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루스벨라는 홀로 남겨져 그들이 도망친 통로 쪽을 노려봤다.

    “그렇게 도망쳐 봤자 달라질 것은 없어.”

    고요한 수면 같던 녹안에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불꽃이 튀며 또렷해졌다. 두 장사꾼을 보는 순간, 루스벨라 안에 있는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깨어나 복수해 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날 상처 입혔던 사람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똑같이, 아니 그것보다 더 큰 절망으로 갚아줄 테니까.”

    루스벨라는 차라리 로네와 잭슨이 도망쳐 준 것이 기뻤다. 그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짐승 같은 못된 인간들이라 좋았다.

    그런 악한 자들은 쉽게 용서하지 않아도 되고, 마음껏 미워해도 되니까. 로네가 조금만 더 영악한 사람이었다면, 분노하는 루스벨라가 왜 시리도록 차가운 웃음을 걸치고 그녀를 대했는지 알아챘을 것이다.

    사과? 그렇게 쉽게 궁지에 몰아넣어 받는 사과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적어도 내가 홀로 아파하며 곪아 썩던 고통에 비할 바는 되어야지.’

    그래서 고마웠다. 쥐새끼처럼 꼬리를 말고 황급히 뛰어간 꼴이 사랑스러웠다.

    그녀에게 정당한 복수의 기회를 멍청하게 내줘서 입이 찢어질 듯 웃고 싶었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그제야 기사들이 루스벨라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루스벨라는 그것에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저들을 이용해서 쫓아냈다면 혼자서 그들을 상대한 만큼의 의미가 없었을 테니.’

    “루스벨라 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요.”

    “일단 신발부터 구해 오겠습니다.”

    기사 하나가 빛의 속도로 신발을 파는 가게에 들어가 편한 샌들 하나를 사 왔다. 발 치수를 몰라 대충 눈대중으로 골라온 것이지만 사 온 신발의 크기가 더 커서 헐렁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충분합니다.”

    데니스의 명령으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기사들이 루스벨라에게 다가와 걱정을 표했다. 그들은 겉보기에 허약해 보이는 작은 마님이 방금 겪은 일을 보고도 태연해하게 괜찮다고 말해서 놀랐다.

    ‘당장 그 장사꾼들을 잡아다 감옥에 가둬도 모자를 말을 들으셨는데.’

    게다가 대화 내용을 주워들으니, 그녀는 윈체스터 공작의 약혼녀로 있을 때 평민에게까지 모욕을 받을 정도로 참담한 생활을 했던 모양이었다.

    소문으로 들은 것은 오로지 루스벨라 지펠론이 공작의 약혼녀로서 평소 행실이 부적절했고, 공작이 참다못해 그녀의 죄를 밝혀 쫓아냈다는 것뿐이었다.

    북부를 지키는 숭고한 역할을 해내는 공작 가에서 나온 이야기이니 당연히 악역은 감당하지 못할 처신을 한 루스벨라였다. 신분과 가문이 가지는 힘의 차이가 이야기 속 심판의 저울을 윈체스터 공작에게 더 가볍게 해 준 것을 모두가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가진 힘이 없으면 억울해도 짓밟히는 것이 강자의 논리였다.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고 누가 그러던가. 루스벨라야말로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커서는 약혼자에게 충실한 착한 이 중의 착한 이였다.

    그런데도 루스벨라는 온갖 오명을 뒤집어쓰고 맨몸으로 공작 가에서 쫓겨났다. 비오는 날, 쫄딱 젖어 잘못이 없는데도 죄송하다고 빌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저어, 작은 마님.”

    “네, 말씀하세요.”

    “저희가 본의 아니게 아까 그…… 불경한 자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가서 잡아 올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루스벨라가 상냥하게 웃었다. 그녀가 말하는 내용은 웃는 얼굴과 극히 상반되는 내용이었지만.

    “놓친 사냥감을 잡는 게 더 매력적이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잠시 두고 보지요. 그자들을 잡는 것은 나의 몫이니,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이, 이분 무섭다.’

    기사들의 몸에 난 털이 쭈뼛 섰다. 그들의 주군은 화려한 독버섯이란 악명을 떨치는 사람이었다. 처음 루스벨라를 봤을 때, 여리고 순해 보여서 그들은 혀를 차며 그녀를 걱정했다.

    ‘아이고, 독버섯이 너무 아름다워서 꽃인 줄 알고 나비가 잘못 찾아왔네.’

    그 생각을 정정하기로 했다. 작은 마님께서는 나비가 아니라 팅커벨이라 부르는 거대한 나방이셨다. 이름만 귀엽지, 실제로 보면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나방이 웃는데 웃지 않는 지금의 모습과 같았다.

    “저, 어떻게 찾을 생각이신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덴젤.”

    “작은 마님께서 어떻게 저 불한당 둘을 쫓을 계획이신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야.”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이 수업 다 끝날 즈음에 지도 선생께 질문하는 녀석 같으니라고.

    시력 좋은 막내 기사, 덴젤이 작은 마님의 카리스마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다른 기사단원들은 가장 어린 후배의 패기에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물론, 반어법의 의미로.

    ‘야. 누가 막내 조용히 안 시켰냐.’

    ‘몰라. 다들 겁에 질려서 입 다물고 있던 거 아니었어?’

    ‘너도냐?’

    ‘그러는 너도?’

    함께 검을 수련하고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들이니 눈짓만 해도 알아서 척척 알아듣고 답변을 주고받았다. 눈치 없는 막내 놈만 그걸 모르고 초롱초롱 루스벨라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스벨라는 흔쾌히 덴젤에게 답을 주었다.

    “추적이 가능한 물약을 묻혀 두었으니 가능해요.”

    “지워지는 것 아닙니까?”

    “그건 아니에요. 이거, 영구히 쫓을 수 있게 제가 직접 만든 물약이거든요.”

    “루스벨라 님은…… 치유사라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치유용으로 포션을 만들다 보면 다른 용도의 포션도 만들어 볼 때가 있거든요. 저의 소소한 취미죠.”

    감탄이 절로 나오는 생산적인 취미에 기사들이 입을 벌렸다.

    ‘저런 분을 공작 가는 내쫓은 거야……?’

    “……그런 건 언제 묻혀 두셨습니까?”

    “신발 던졌을 때요.”

    “……예?”

    “그들을 발견했을 때 이미 손가방에서 추적용 물약을 꺼내 묻힌 뒤였어요. 무색무취라, 손에 발라도 아무도 몰랐죠.”

    “허면…….”

    “손목이라도 낚아채서 묻힐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더라고요. 게다가 도망치기까지. 그래서 급한 대로 신발에 묻혀 던졌는데, 맞혔다니 운이 좋았죠.”

    굽에 덕지덕지 발라 놨던 게 참 잘한 일이었어요.

    “혹시나 싶어서 평소 들고 다니던 약이 이럴 때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요.”

    “…….”

    “…….”

    다른 기사들은 얼이 빠져 할 말을 잃었다.

    ‘역시 사람은 겉보기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더니…….’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팅커벨 마님에게 절대 개기지 말자고 다짐했다. 저리 치밀하신 분이라면 조져도 곱게 조지시질 않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와, 작은 마님 진짜 멋지세요. 어떻게 그 찰나에 그런 생각을 하셨지?”

    “그렇게 칭찬받을 일은 아니었답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나중에 그 인간들 잡으시러 가시면 저도 따라가 봐도 될까요?”

    “음…….”

    해맑게 루스벨라의 복수극에 관심을 가지는 덴젤을 보고 다른 기사들이 사색에 빠졌다. 야, 야! 제발 그만하고 이리 와서 주군이나 기다리란 말이야!

    루스벨라가 곤란함에 처한 얼굴로 기사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다들 부리나케 덴젤을 잡고 그녀에게서 떨어뜨려 놨다.

    “아, 왜요!”

    “으브 드츠르그.”

    반항하는 걸 복화술로 웃으며 닥치라고 하니 덴젤은 상급자의 무서움에 눌려 깨갱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하. 이 자식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작은 마님께서는 신경 쓰실 것 하나도! 없습니다.”

    “아, 하하. 주군께서는 어디 가신 거더라……?”

    ***

    그 시각, 데니스는.

    “여, 여기까지 대체 어떻게 따라온 겁니까……?”

    “데, 데, 데벤테르 소후작이 왜 우리를…….”

    로네와 잭슨을 따라잡아 그 앞에 한가로이 검으로 손장난을 치며 서 있었다.

    “왜긴.”

    너희들이 내 아내를 화나게 했으니 온 거지.

    로네와 잭슨은 X됐다는 표정으로 망연자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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