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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20화 (21/166)

20화

“뭐야?!”

“꺼지라고 했다. 한 번 더 말해 줄까? 혀 잘리고 싶지 않으면 꺼지라고.”

“이…….”

장사꾼인 사내는 부글부글 속이 끓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곳은 다 트인 대낮이었고, 루스벨라는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도시의 영주인 데벤테르 후작의 며느리였다.

먼 기억 속 초라하던, 한미한 백작 가의 영애가 아니었다. 이를 부득부득 가는 사내를 옆에 있던 여자가 가볍게 토닥였다.

“참아. 잭슨. 저 사람, 지금 어쨌거나 소후작 부인이잖아.”

“젠장…….”

“얌전히 있어. 응?”

‘다 들려.’

작은 소리로 귓속말을 해 봤자 들렸다. 조용히 지나간다고? 누구 마음대로 그냥 간다는 거야?

고작 몇 분 전 그녀를 도마 위에 올리고 신나게 비난하던 목소리는 어디로 갔는지.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들이면서 내게 그랬단 말이지.’

루스벨라는 이 상황이 즐겁지 않았다. 제게 상처를 준 무뢰한들을 다시 보게 되면, 똑같이 날이 선 말로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는데. 시원하지 않다는 생각만 들었다. 더불어, 그녀가 진정으로 바랐던 상황은 아니라는 것도.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야.’

뭘까. 어떤 점이 불쾌한 걸까.

그 둘은 루스벨라의 뒤에 조금 떨어진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루스벨라도 그곳을 쳐다봤다. 아까 그녀가 있던 곳이었다. 무장한 상태의, 건장한 기사들이 대여섯 모여 있었다. 데니스는 어디로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기사들은 소란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데니스가 어떤 명령을 그들에게 내린 것 같았다.

아하.

이 인간들은 강자 앞에서는 약해지는구나.

‘과거의 나는 약해서 말로 헤집은 거고.’

그것을 깨달으니 두 인간이 더 증오스러워졌다.

그들은 루스벨라가 아니라 기사들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넘어가려고 한 것이었다. 때문에 루스벨라의 기분은 통쾌하지가 않았던 거였다.

루스벨라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인지, 여자 장사꾼이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들리도록 목청을 높여 말했다.

“……죄송합니다. 미래의 데벤테르 후작 부인. 저희는 가던 길을 마저 갈 테니,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뭐지? 무슨 일이야?”

“저분이 이번에 영주님의 첫째 아드님과 결혼하신 분이라는데?”

“뭐? 나도 볼래.”

호기심을 느낀 관광객과 도시의 시민들이 그들 주변을 기웃거렸다. 사람들이 불어나고 있었다. 기사들의 눈치를 살피며 몸을 사리던 둘의 눈빛이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풀어졌다.

‘귀족에게는 체면이 다지.’

상업이 발달하고, 부를 쌓아 귀족의 작위를 사는 자들도 나타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집권하는 자들은 고리타분한 구석이 있었다.

명예가 손상될 것 같으면 물러날 게 아니냐는 약은 속셈이었다.

여론을 이용할 속셈인 게 뻔히 드러났다. 데벤테르 가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결혼했다는 소식은 리스냐에 만연히 퍼져 있었다. 새신부의 대략적인 용모도 알음알음 사람의 입을 타고 전해졌을 터.

‘방금까지는 회색 머리나 녹색 눈동자란 단순한 정보만 있었겠지만, 내가 이리 대놓고 입을 나불댔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을 거야.’

그것이 행상, 로네의 생각이었다. 로네는 과거에 자신이 루스벨라에게 어떤 모욕적인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았다.

다만, 저 여자를 오랜만에 보고 나니 ‘아, 그때 그 버림받았던 약혼녀!’라고 어렴풋이 만났던 기억만이 존재했다.

‘이 도시에는 장사가 아니라, 휴양 차 왔는데 여기서 발목이 잡힐 수야 없지.’

잭슨과 로네는 이미 다 몰락해서 귀족이라 부를 수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결국 살길을 찾기 위해 집안의 귀족 족보를 돈 많은 평민에게 팔아넘겼다. 그리고 그 돈을 발판 삼아 장사를 시작했고, 일이 이제야 자리를 잡자 바쁜 몸을 쉬고자 아름답다는 남부로 휴가를 온 것이었다.

‘재수 없게.’

아등바등한 삶을 살아온 로네는 쉽게 살아가는 귀족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건 그녀가 팔아넘긴 귀족 신분에 대한 미련이었다.

이제 더는 귀족이 아니라는 분함을 시시때때로 약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것 같고, 한미한 귀족들을 보면 독설을 날리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루스벨라도 로네의 화풀이감이 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유리한 위치인 공작의 약혼녀 자리를 차지했으면서, 무력하게 당하는 꼴이 우스웠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잭슨과 로네가 돈을 꽤 벌었다고 한들, 부호로 유명한 데벤테르 가에 비빌 수는 없었다.

그 점이 샘이 났다.

‘결혼 좀 잘해 덕 본 주제에.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으면서 운만 억세게 좋네.’

난 뼈 빠지게 고생해서 내 자리를 쟁취했는데. 저 여자는 뭐가 잘났다고 저런 좋은 조건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얼굴이라면 꽤 예쁘장하긴 했지만, 그걸로 혼처를 따냈다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로네는 속으로 실컷 루스벨라를 비웃었다. 자신이 놓쳐 버렸고, 이제는 가지지 못하는 것을 쉽게 누리는 루스벨라가 미웠다.

로네는 가자미처럼 눈을 옆으로 돌려 꼼짝도 하지 않는 기사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서 있는 자리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로네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불쌍한 척 눈꼬리를 내렸다. 다른 손으로는 보이지 않게 살을 꼬집어 눈물이 찔끔 나오게 했다.

‘불쌍한 척을 최대한 해야지. 사람들이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도록.’

가린 입가에는 키득거리는 악마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공작 가 못지않은 좋은 귀족 가문에 시집간 루스벨라를 보니 배알이 뒤틀려 조용히 지나가기는 싫었다.

꼴을 보니 저 집안에서도 그녀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나 같은 평민이…… 뭐라고 지껄였는데도 가만히 있을 수가.’

한 번 버림받은 여자가 또 버림받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데벤테르 가의 후계자도 이미 저 여자가 내쳐졌던 것을 미심쩍게 여겨 거리를 두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보고 꺼지라고? 웃긴 소리.’

루스벨라를 보고 있으니 희끄무레했던 기억이 얼추 떠오르는 것 같기는 했다.

‘그때보다야 독이 오른 것 같기야 하지만, 악녀처럼 굴 거였으면 더 제대로 했어야지.’

적어도 기사 한 명이라고 데리고 와서 위협했으면 로네와 잭슨은 곧바로 꼬리를 말고 빌거나 도망쳤을 것이었다. 자신의 비굴함은 모르쇠하고 로네는 루스벨라를 다시 짓밟을 연기를 펼쳤다.

“아아, 데벤테르 가의 작은 마님. 시장 구경을 하고 있던 저희에게 꺼지라니요. 생업이 달려 있어 이 도시를 들른 평민에게 너무 가혹하신 것 아닙니까 저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요?”

털썩. 동정심을 모으기 위해 무릎을 꿇는 건 자극적인 양념을 치기 위한 행동이었다. 로네는 잭슨의 옆구리도 찔러 악의적인 연극에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뻔뻔하게 나가는 게 이기는 거였다. 자기 잘못은 감추고, 남의 과오는 없어도 부풀린다.

로네와 잭슨은 진심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루스벨라를 두고 욕한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앞에서 떠들지 않았으면, 그걸로 된 거 아냐? 뒤에서 떠든 게 뭐 대수라고.

‘그게 언제 이야기인데. 지금 와서 그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는 거야?’

‘멍청한 년. 이번 기회로 네 주제나 파악하고 살라고.’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작은 마님!”

잭슨이 말하면,

“저희를 벌주려거든 제발 그만둬 주세요. 이리 무섭게 구시니 너무 무섭습니다.”

“저희야 한낱 상인에 불과하니 괜찮다지만……. 미래의 후작 부인이 되실 분께서 꺼지라는 상스러운 말을 하시다니…… 영지의 시민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지나간 과거를 생각해서라도 자중해 주시지요. 저희가 노파심에 용기를 내어 간청합니다.”

잭슨과 로네는 용서를 비는 척 루스벨라의 말버릇을 깎아내리고 지적했다.

예전에는 꼼짝없이 당하기만 하고 아무 말 못 하던 사람이 저희에게 분노를 표출하니 참을 수 없이 짜증 났기 때문이었다.

‘전처럼 약해빠진 멍청한 계집애로나 있으라고.’

농도가 너무 짙어 질척하게 흘러내리는 악의가 주변을 적셨다.

시장을 돌아보다가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온 사람들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네는 확신했다. 귀족은 명예에 죽을 둥 말 둥 한다. 루스벨라도 귀족이니 자칫하면 좋지 못한 소문이 퍼지는 일은 경계할 터. 더구나 그녀는 갓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니 이미지 관리에 목을 맬 거라 생각했다.

“흑. 제발 저희를 용서하시고 보내 주세요.”

루스벨라는 조용히 그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관망했다.

로네는 그것을 보고 루스벨라가 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들을 보내 줘야 한다는 현실에 굴복한 것이라고 기뻐했다. 억지로 짜낸 눈물 사이로 비치는 눈이 저열한 희열로 물들었다.

“할 말은, 다 했나?”

“……예?”

“다, 했냐고 물었다.”

‘뭐야?’

로네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제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눈치껏 상거래 조건을 협상하던 감이 경고를 보냈다.

“너희는 지금이나 그때나 달라진 게 없구나. 아주, 똑같아.”

“뭐, 뭐…….”

“그래서 차라리 고맙구나. 달라졌다면 속에 꾸역꾸역 밀어 넣은 분노를 풀 곳도 없었을 텐데.”

‘뭐야, 이 여자!’

루스벨라는 어딘가 이상했다. 귀족이면서, 밀려드는 행인들의 곱지 못한 시선 따위 아랑곳하고 있지 않았다.

데벤테르 후작 가에 정숙한 아내로서 모범을 보이기 위해 물러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다. 잃을 게 없는 사람처럼 그녀는 덤덤한 목소리로 자기 할 말을 했다.

“그때도 지금에도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

“너희들은 뭐가 그리 잘났다고, 선하다고 나를 비웃나?”

“저, 저희가 언제 부인을 비웃었다고…….”

“비웃었잖아. 아니야? 그것도 기억 못 하겠는 상대에게 다시 똑같은 수작을 걸려는 너희는 그럼 무엇이지?”

“그…….”

“너희는 그때 내 말을 수도 없이 잘라먹고 자기 할 말만 했지. 입 다물고 너희가 괴롭힌 자의 말을 들어라.”

무덤덤한 목소리에 담긴 분노는 식지 않는 용광로 같았다. 칼이 없는 연약한 레이디였건만, 로네와 잭슨은 처음으로 루스벨라가 무섭게 느껴졌다.

“이름 뒤에 붙는 성의 가치가 대단한 것은 안다. 내가 지펠론이었을 때나. 데벤테르가 되었을 때나 그것은 변함이 없다.”

귀족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운이 좋은 거니까. 그래, 속된 말로 탯줄을 잘 타고났다고 볼 수 있겠군.

“그러나 너희들은 때깔 좋은 그 신분 아래에 감춰진 나의 불행을 아느냐? 내 이야기를 알고 있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어째서 가볍게 놀리지?

무엇을 믿고 기고만장하게 입을 가볍게 놀리는 짓을 저지르는 것이냐?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여 나오는 한심한 작태를 너희는 정녕 모르는 것이냐?”

모른다고 해도 문제고. 안다고 해도 문제다.

“자, 다시 물어보자. 너희는 무엇이 그리 재밌어 나를 괴롭혔지? 지금도 왜 나를 깎아내리지 못하여 안달이 난 것이냐?”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올라오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람이 맞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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