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루스벨라가 팔을 들어 데니스를 저지시켰다. 데니스는 무어라 입을 달싹이며 움직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진정했다.
루스벨라는 조용히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선 두 명의 장사치를 보았다.
‘저 사람들.’
맑고 심지가 단단히 곧게 벼려진 녹안이 그들을 응시하고 있는데도 남을 코앞에서 험담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본 적이 있다.’
인간에게 신이 줬다는 축복인 망각은 어째서 아프고 괴로운 기억들에는 유독 약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끔찍한 기억은 보이지 않는 정신에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늘 피를 흘렸다.
저 두 사람도 그런 상처를 남긴 사람들이었다.
루스벨라가 새벽까지 언 손을 후후 불어가며 겨우 북부의 병사들을 위한 포션을 제작할 때였다.
공작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제대로 된 대우도 받지 못하고 일만 하며 고생하던 그녀는 장사꾼 둘과 마주쳤었다.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공작 성에 필요한 식자재나 겨울 내를 튼튼하게 버틸 누빈 옷 등을 납품하는 장사꾼들은 루스벨라에게 고생한다며 따뜻한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처음에 루스벨라가 귀족인 줄 몰랐다. 공작의 약혼녀가 아무리 박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해도 설마 잠도 잘 못 자고 고용된 사람처럼 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누구지?]
[모르겠네. 하지만 이런 구석진 방에 있는 걸 보면 이곳 공작 성에 소속되어 일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그래, 그 생각이 분명 정상이었다.
그러나 루스벨라는 그 정상의 범위 내에 속하지 못하고 떠도는 이방인 신세였다.
루스벨라는 추운 한겨울에 새카만 어둠 속에서 초에 의지하며 궁핍하게 지내고 있었다.
내일까지 기한을 맞춰서 달라는 공작의 보좌관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 부당함을 아무도 제기하지 않았다. 지펠론 백작의 갈굼에 익숙하게 자라온 루스벨라 역시 그랬다.
‘내가 잘하면 될 거야.’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니, 공작님께서 나를 봐 주지 않으시다면 그건 다 내 책임이라고.’
그때의 루스벨라는 사랑에 굶주려서 그래 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잔인한 현실을 직시할 수 없었다. 차라리 모든 게 나의 탓이어서 해결할 수 있다는 쪽이 그녀에게는 희망찬 선택지였다.
노력. 노력만 잘하면 모든 게 잘 될 수 있을 거야.
종이 인형처럼 얄팍한 희망은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다시 일어설 힘을 주었다. 루스벨라는 그 희망이 거짓 희망이라고 버릴 용기도, 혜안도 없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수는 있으나 사랑받는 아내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의심을 짜부라뜨려 뒤로 숨겼다.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행복한 공작 부인이 되어야지.’
그럼 지금 느끼는 이 설움도 다 날아갈 거야.
공작님도 내가 계속 열심히만 한다면 돌아봐 주시고, 다시…… 내게 웃어 주실지도 몰라.
‘그렇게 만들 거야.’
맹목적인 첫사랑은 모든 오감이 채집한 위험 경보를 무시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미래. 지펠론 백작이 말했던 가장 행복한 미래인 공작 부인이 되는 삶을 이룩하기만 하면 이 모든 고생을 보답받을 수 있을 거라고 바보같이 매달렸다.
지금의 루스벨라는 과거의 멍청하리만큼 바보 같았던 자신을 동정한다. 그녀 외의 그 어떤 누구도 가엾던 과거의 그녀를 불쌍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상처투성이의 그녀가 가진 상처 중 가장 큰 아픔이었기에. 어쭙잖은 호기심으로 건드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눈앞의 인간들이 증오스러웠다.
‘그걸 저놈들 때문에 알게 되었으니, 고맙다고 말하기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루스벨라의 두 눈동자에 불이 튀었다.
아니지.
당연히, 안 될 말이지.
멍청했던 과거의 루스벨라는 유령이 나올까 무서웠던 찰나에 나타났던 두 장사꾼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녀도 약간의 오해를 가지고 두 사람을 대했다.
홀로 포션을 만드느라 무서울 그녀를 위해 드디어 사람을 보내 준 것이라는 착각이었다.
성냥팔이 소녀가 추위로 얼어 죽기 전에 성냥불로 따뜻한 환상을 본 것과 같은 이치였다. 외로움과 추위, 어둠에 몹시 지쳐 있던 루스벨라의 사고 회로는 그렇게라도 긍정의 불빛을 돌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다.
망할 공작 가. 빌어먹을 사랑이라는 환상.
되돌릴 수 없어서 더 슬픈 과거의 기억.
[공작님께서 보내 주신 사람들이신가요?]
[어…… 그렇긴 하죠? 할 일을 주셔서 오긴 한 거니까. 보내 줬다는 말은 맞지 않지만.]
[추위로 고생하셨을 텐데 어서 앉으세요. 제가 벽난로에 불을 피울게요.]
[아니, 어려 보이는 아가씨가 무슨. 그냥 우리가 할게요.]
[……그러고 보니 어째서 이 엄동설한에 불을 피우지 않았어요? 공작 성은 어느 곳보다 장작이 넉넉하게 구비된 곳이었을 텐데…….]
루스벨라는 차마 장작과 같은 생활품을 넣어 주는 하인들마저도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굉장히 악랄한 괴롭힘이었지만 그녀는 참았다.
참을 도리밖에는 없었다.
망할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세뇌시키듯 주입한 말들을 했기 때문이었다.
[투기하지 마라. 사소한 일로 공작을 귀찮게 하지 마라.]
안사람은 그저 묵묵히 내조나 하면 될 일이다. 불쾌한 일이 있어도 그건 다 너를 시기한 못된 무리의 소행이니 견뎌라.
[트집 잡히지 말렴. 알았느냐?]
[……네. 아버지.]
……멍청한 루스벨라. 멍청해질 수밖에 없었던 가엾은 루스벨라.
그쯤에서 공작이 격려 차 보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새벽에 깨어 있는 중에 만난 사람들이 반갑고 소중하다는 생각 외에는 할 수 없었다.
장사꾼 둘이 그녀를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아…… 그건 제가 장작을 받아 오는 걸 깜빡해서 그랬어요. 괜찮아요. 불 붙이고 올게요!]
[뭐…… 그래요.]
루스벨라가 오랜만에 사람과의 대화다운 대화를 해 봤다고 좋아하고 있을 때, 두 장사꾼은 어두운 실내에서 속닥속닥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저 여자 뭔가 이상한데? 여기서 일하는 하인이 아닌 것 같아.]
[그러게. 장작은 따로 관리하는 하인이 가져다가 주는 건데. 그것도 모르고 있다니. 혹시 몰래 숨어들어온 외부인 아니야? 쫓아내야 하는 건가?]
[조금만 더 지켜보자.]
루스벨라는 그것도 모르고 불을 붙이고 기뻐했다. 얼마 되지 않는 양의 장작이었지만, 이럴 때 써야 하는 거라며 아껴 쓰던 장작을 털어 넣었다.
활활 타오르는 붉은 빛의 불꽃이 피어오르자 어둡던 실내가 확 밝아졌다.
[여러분! 기다리셨…….]
[뭐야, 저 사람.]
[세상에. 버림받았다는 소문이 자자한 공작님의 약혼녀잖아?]
어둡던 창고 안을 불이 밝히자 제대로 보이지 않던 세 사람의 얼굴이 불빛에 노출되었다. 루스벨라의 회색 머리카락과 녹안이, 희게 질린 흰 피부가 장사꾼들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 내가 버림받았다니. 어디서 유언비어를 주워듣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유언비어?]
[와. 이 영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아니면 필사적으로 모르는 체하려는 거야?]
한 쌍의 남녀가 루스벨라를 비웃었다. 루스벨라가 애써 피운 벽난로의 불은 따뜻함을 준 대신에 그녀가 간절히 원했던 타인의 따뜻한 말을 앗아갔다.
추워. 불을 켰는데도 추울 수가 있구나.
[어차피 팽 당한 이름뿐인 약혼녀고,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으니 막 대해도 상관없겠지?]
[야. 북부에서 장작도 안 주는 취급이면 말 다 했지. 이 성에서 평민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데, 바른말 한다고 해서 저 여자가 뭘 어쩌겠어?]
[뭐…….]
[이봐, 공작님의 약혼녀 되시는 분. 내가 큰 인심 써서 말해 줄게. 정신 똑바로 차려.]
당신은 버림받은 지 오래야.
[그럴 리가, 없어.]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역시 소문대로 구질구질하네. 매달리는 여자는 매력 없다는 거 몰라? 아, 어쨌거나 귀족의 혈통을 타고나셨으니 이런 류의 지식은 모르나?]
[감히 공작님의 약혼녀인 내게! 무례한 작자들인 줄도 모르고 내가 과분한 환대를 했군. 당신들이 이러는 거, 공작님께서 아시면 뭐라고 하시겠어? 이런 짓은 공작님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못할 거잖아?]
덜컥. 그 말에 루스벨라는 심장이 날카롭고 묵직한 것으로 찔려 넣어지는 환상통을 느꼈다.
[나, 나는.]
[당신이 공작님께 이런 무례를 간언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춥고 좁은 창고에 있지도 않았겠지. 내 말이 틀려?]
[…….]
[당신이나 우리나, 공작님께는 관심 밖의 사람일 뿐이야.]
그것도 모르고 가당찮은 희망의 끈을 놓지도 못하고 있다니.
[아아, 안쓰럽기도 해라.]
[…….]
모멸감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더 추해지지 않는다는 게 위안이어서 비참했다.
루스벨라는 매일 힘겹게 회복용 포션을 만들며 공작 성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이 차가운 성의 차가운 사람들이 제게 따스해질 거라고, 공작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얄팍하고 실낱같던 소망이 현실을 일깨워 주는 말 몇 마디에 산산이 부서져 바닥을 뒹굴었다. 루스벨라의 자존심도 짓밟혀 뭉개졌다.
[지금도 봐. 우리가 당신에게 경어를 쓰지 않고 있는데도 당신이 뭐라고 할 수나 있기는 해? 못 하잖아.]
[……너희는.]
어떻게 이리 잔인하게 사람의 마음을 난도질하느냐?
[내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내게 왜 이러는 거지?]
벽난로에 루스벨라가 손수 피운 불꽃이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나는 그저 사랑받고자 노력했을 뿐인데.
[내가 이런 경멸과 수치를 받을 이유가 무엇이길래 내게 이러느냔 말이다!]
뭉쳤던 설움이 한데 모여 발악하는 절규로 태어났다. 한 맺힌 울음이 곧 터질 것 같았다. 익숙하게 혀를 꾹 치아로 깨물며 그러지 않도록 울음을 삼켰다.
[당신의 잘못?]
그냥. 당신은.
[주제도 모르고 이 북부에 기어들어 왔다는 것에서부터 다 잘못한 거야.]
[감히 공작님을 노리다니. 간도 크지. 분수도 모르고.]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현실을 일깨워 주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자비로워?]
깔깔깔.
‘이건 악몽이야…….’
루스벨라는 그때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엎어졌다. 관리되지 않아 더러운 바닥의 때가 그녀의 소박한 드레스 자락에 묻었던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녀를 조롱했던 남녀 장사꾼들이 아무 사과도 없이 갔지만, 그들의 말대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평소대로, 홀대받으며 포션을 만드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윈체스터 공작은 루스벨라 지펠론을 버려뒀다. 그래서 청첩장도 던지고 오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이게 누구신가.”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권리는 누가 줬는데?
공작이? 공작 성에 살고 있던 식솔들이? 아니면 건방진 너희들이? 신이?
그들과의 거리가 발을 내딛는 거리만큼 좁혀졌다. 팔 한쪽의 거리만큼 가까워지자, 루스벨라가 말했다.
“그 칼날 같던 혀들은 잘 간수하고 있었나?”
“뭐, 뭐야.”
그딴 건 아무도 못 주고, 받을 수도 없어.
쓰레기 같은 너희들이야말로 정신 차려야 할 순간이야.
자, 더는 자비롭지 않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마.
“꺼져. 그 혀가 다 잘리고 싶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