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물기를 닦고 기사들의 호위를 받아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그들이 가는 곳은 각종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장이었다.
리스냐에는 다른 나라와의 무역이 가능한 항구가 있었다. 그 때문에 이국적인 물건이나 외국인을 볼 수 있는 일은 흔했다.
상거래가 활발한 만큼 다양한 식자재가 흘러들어왔다.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흘러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음식을 조리하는 방법이 가지각색이었고, 그것은 곧 리스냐의 특색이 되었다.
“그러니 이 도시의 꽃을 보기 위해서는 시장을 놓칠 수 없지요.”
이곳을 들린 여행자들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꼭 시장을 들렀다. 신분 차이가 있어 이용하는 건물은 달라도, 리스냐에 오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장소가 바로 시장이었다.
이는 일찍이 데벤테르 가문이 상업이 번성할 것을 알아보고 시내 중심가에 십자가 모양으로 설치해 둔 상점 건물을 상인들에게 유료로 대여해 준 것이 시작이었다.
점포마다 값싼 건물 대여료를 책정하는 대신, 리스냐에 정착해서 사는 것을 조건으로 건 것이었다. 물론 벌이가 잘된다면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주는 것도 포함이었다.
상인들은 영주가 내건 조건에 혹해 몰려들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건물은 마법사들을 동원해 시간이 오래 지나도 버틸 수 있게 시간의 흐름을 멈춰 놓는 마법을 걸어 놓아 아직까지도 튼튼하고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오래된 건축물만이 가질 수 있는 고아함과 매일같이 유입되는 새로운 문화의 여러 사람들이 드나드니, 리스냐는 옛것과 새것의 조화로움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 매력에 반해 이 도시를 아예 오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오는 사람은 없다는 풍문이 돌 정도였다.
“와아아…….”
작은 어항 속 금붕어처럼 백작 저와 공작 성안이 세상의 전부였던 루스벨라에게는 발걸음을 내디뎌 눈에 담는 모든 것이 신선한 충격이자 즐거움이었다.
‘소금기가 스며든 거리. 다채로운 복식을 입은 사람들의 향연.’
이 도시를 사는 사람에게는 별것 아닐 것들이 그녀에게는 보석처럼 귀하게 여겨졌다.
물장구를 쳤다고 푸딩처럼 말랑해진 마음의 루스벨라는 호기심을 드러내며 이것저것 질문했다.
“저건 어떤 상품인가요?”
“벤트라 지역의 사탕수수로군요. 제국의 하얀 설탕과 달리 저 지역의 사탕수수를 정제하면 황색의 설탕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럼 저쪽의 생선은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요?”
“그 생선은 허겁지겁 걸신들린 듯 먹는 귀신을 닮았다 하여 아귀라고 하더군요. 수심이 깊은 바다로 나가야 잡을 수 있다고 해요.”
‘신기한 것들 투성이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귀족이 다니는 상점가로만 이동할 수 있었지만, 루스벨라는 평민과 귀족의 거리 모두를 눈에 담고 싶었다. 고여 있던 물과 같았던 그녀에게는 새로운 정보의 홍수가 기꺼운 일이었다.
누군가의 통제, 또는 눈치를 보느라 답답함으로 가물던 그녀의 마음이 촉촉한 수분을 머금고 깨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보석이나 장신구를 보는 게 어떠냐는 질문은 일절 하질 않네.’
신나게 질문을 퍼붓던 루스벨라가 데니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데니스는 바로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다.
“더 질문할 것이 있습니까?”
“음, 솔직하게 물어도 되나요?”
“뭐든 괜찮습니다.”
“……와. 데니스 님 ……부리는 것 좀 봐.”
데니스의 눈썹이 변화를 잡아내는 데 예리한 인간이 아니라면 잡아내기 힘들 수준으로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아, 어디서 벌이 한 마리가.”
“어디요?”
‘주변에 꽃이 없는데……?’
퍼억. 데니스가 뒤에서 조그맣게 다른 의미로 감탄한 부하의 배에 빠르게 주먹을 꽂아 넣고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순백한 미소를 걸치고서.
뒤에서 호위로 나온 기사들이 그 웃음을 보고 알아서 기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은 덤이었다.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다른 기사들도 일제히 ‘입 닥치고 있으라’라는 신호를 눈짓으로 보냈다.
“날아갔네요. 제가 잘못 본 것 같아요.”
“그런데 아까 누가 뭐라고 중얼거리지 않았어요?”
“아니요. 저는 못 들어서.”
“그렇다면 제가 잘못 들은 거겠네요. 저쪽 길로 가 보는 건 어때요?”
“좋아요. 지아나가 일러 주기를, 저 방향의 통로로 가면 이 시장의 하이라이트인 먹거리 장터와 유명한 식당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카페는 물론이고요.”
“얼른 가 보죠.”
루스벨라가 데니스가 가리킨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먼저 앞서서.
“루스벨라? 같이 가요. 그러다 길 잃어요.”
“빨리 가 보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아, 그럴 수 있죠.”
거짓말은 아니었다.
‘맛있는 식사를 해 볼 수 있다는 기회에 신난 건 진짜니까.’
……그것보다는, 뒤에 있던 부하가 뭐라고 했는지 다 들었기 때문이었지만.
[……와. 데니스 님 내숭 부리는 것 좀 봐.]
데니스 데벤테르가 루스벨라에게 내숭을 부리고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대한 진실 여부는 데니스가 기사를 한 대 치면서 입증되었다.
일반인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간 주먹이었지만,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기사를 가격했음을 알아챘다.
‘누가 다가올까 봐 귀를 기울여 기척을 느끼는 습관이 이럴 때도 쓰이네.’
친정에서 지펠론 백작은 딸을 감시했다. 그의 명분은 ‘귀한 곳으로 시집갈 딸이니 더 신경을 써서 바른길로 인도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위선자 아버지는 정말이지 갖다 붙이는 데에 도가 튼 양반이었다. 백작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를 참된 아버지라며 칭찬했다.
지펠론 백작의 눈에 루스벨라는 황금알을 낳을 거위였다.
거위는 인간에게 소유된 가축이다. 그 거위를 아무리 아낀다 해도 분류되는 카테고리가 가축에서 인간으로 옮겨 가지는 않는다.
백작이 그러했다.
오냐오냐 아들만 예뻐하는 집안에서 자란 그는 여자의 행복은 잘난 남편을 만나면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의 비틀린 가치관은 아내에서 딸로 옮겨져 일거수일투족을 까다롭게 관리했다.
[이것도 못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미래의 공작 부인 자리를 위해서라도 더 잘해야 할 것 아니냐.]
[아, 아버지…… 자, 잘못했어요.]
[저렇게 느려서야 사랑받는 아내로 지낼 수 있을지 원.]
그때는 그런 말들이 다 맞는 줄 알았다.
모든 건 다 내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야. 나만 더 잘하면 돼.
‘내가 더 잘하면……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
그래서 어떻게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 만났을 때 반해 버린 아슬란을 만났을 때는 당당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나란히 서서 저가 얼마나 그를 좋아하는지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준비한 것이 쓸모없게도, 공작 성에서 그녀는 배척받았다.
지펠론 백작 가는 북부의 패자인 윈체스터 공작 가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계륵이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가문.
아이러니하게도 지펠론 백작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태생이 루스벨라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리고 공작님께서는 나를 도와주지 않으셨지.’
백작 가의 감시는 끝나지 않고 루스벨라를 괴롭혔다. 백작이 아니라, 루스벨라의 약혼녀 자리를 곱게 보지 않는 인간들에 의해 그녀는 감시당했다.
예법, 식기 잡는 법, 드레스를 고르는 안목, 자세 등등.
어느 것 하나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는 정글 같은 곳에서 그녀는 버려짐으로써 탈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루스벨라는 귀가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타인이 근처에 가까이 존재하기만 해도 그녀의 청각은 예민하게 정보를 수집했다. 마치 초식 동물이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 주변의 정보를 습득하는 것처럼 그녀는 몹시 민감한 청력을 지니게 되었다.
때문에 데니스가 제게 내숭을 부리고 있다는 정보를 줍게 됐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부하가 그만큼 놀랐다는 건 데니스가 아무에게나 그러지 않는다는 증거였고, 왜 제게 내숭을 떠는 거냐고 물을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데니스가 숨기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루스벨라는 자신의 행동이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 통제당하는 끔찍한 경험의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려 한다면 굳이 캐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면, 물어보면 불편할 거야.’
그러기 싫어.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있었다. 아까도 지금도 루스벨라는 데니스와 데벤테르 가에 받고 있기만 하는 것 같아 겁이 났다. 이 친절에 중독되면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예전처럼 혹독한 추위보다 더한 외로움 속에 남겨지면 그녀는 버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질 정도로 물렁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아, 저기 먹거리 밀집 구역이 보이네요.”
과연, 적절한 타이밍에 코와 입을 자극하는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입맛을 다시며 걸어간 그곳은 바쁘게 음식을 조리하는 요리사들과 서빙하는 직원들, 그리고 나올 요리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사람의 활기가 생생히 전해지는 공간에 루스벨라는 두근거림으로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녀를 보고 데니스가 물었다.
“혹시 인파가 몰려 있어 불편하지는 않습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나 그렇게 심약한 성격 아니에요.”
뜬금없는 질문에 루스벨라가 다소 공격적인 답을 내놨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입김에 가로막히던 일이 생각나서 그런 것일 테다.
‘이 사람은 내 아버지가 아닌데……. 비슷한 상황만 된 것 같다 싶으면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되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인데 미안했다. 루스벨라는 곧바로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그런 게 아니라, 나는…….”
“괜찮아요. 당신을 탓하려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럼 이 사내는 무엇 때문에 그녀에게 그런 질문을 했을까.
‘단순히 배려 때문이었다면…… 사과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답을 멀리서 찾을 수고는 덜었다. 시장을 구경하고 있는 루스벨라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에.
가깝지 않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대화 내용이 숨 막히도록 잘 들렸다.
“뭐야, 공작 성의 쫓겨난 약혼녀가 여기 있었잖아?”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야, 그때 게이트 타기 전에 기억나? 회색 머리의 귀족 영애. 저 사람이 그 버려진 분이라잖아.”
“어디? 아……. 진짜네.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겼는데, 뭐 때문에 쫓겨나는 수모까지 겪었담.”
좀 불쌍하다, 그렇지?
“불쌍할 게 뭐가 있어. 지금 보니까 다시 저번처럼 좋은 혼처 잘 물어서 시집간 모양인데. 우리 같은 아랫것들 처지나 생각하라고. 높은 귀족 나리들이야 알아서 잘 먹고 잘살 테니까.”
“하긴, 그렇지? 그나저나 부럽네. 남자 잘 만나서 인생 피고. 역시 쫓겨나던 날 비참하게 울부짖던 건 다 가식이었나 봐.”
뾰족한 말들이 거침없이 시뻘겋게 달군 혀를 통해 쏘아졌다. 루스벨라를 향한 악의가 농축되어 있는 말이었다. 하나같이 비리고, 역하고, 구린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게 봐주기 힘들었다.
“저…….”
데니스가 내숭을 떨던 것을 거두고 송곳니를 드러내려는 순간이었다.
“가만있어요.”
저것들.
내가 물어뜯어야 할 놈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