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7화 (18/166)

17화

“하겠습니다.”

“정말……요?”

“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한 데니스는 지체하지 않고 신고 있던 구두를 벗고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희고, 잔근육이 자리한 탄탄한 종아리가 드러났다.

루스벨라와 마찬가지로 맨발이 된 그는 단숨에 물속에 발을 담갔다. 굴절된 빛 아래에서 바닷속의 두 사람의 발이 일렁여 보였다.

“시원하네요.”

그 광경이 굉장히 비현실적이라고 루스벨라는 생각했다.

마음에도 없는 남 같은 남편과 신혼여행 끝물이 되어서야 갑자기 함께 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는 것처럼…….

‘진짜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같이 있네.’

사람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있었다는 사실에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부끄러움은 바닷물에 발을 구르는 것으로 해소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루스벨라.”

“아, 네.”

“아까 춤추는 걸 봤어요.”

이런. 반쪽짜리 자유의 맛에 취해 저도 모르게 춤을 춘 것이 기억났다.

화끈거리는 볼을 쓸며 그러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려는데, 데니스가 우아하게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물었다.

“저에게도 당신과 춤출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여기는 짭조름하고 약한 비린내가 풍기는 바닷가였다. 샹들리에도, 대리석을 깔아 반짝거리는 바닥도, 연회용 드레스도 음식도 없는 곳이었다.

정석적인 춤을 신청하기에 적절치 못한 곳이란 소리였다.

심지어 루스벨라는 아까 마구잡이로, 마음 가는 대로 즉흥적인 춤을 췄기 때문에 그의 제안이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류의 질문에 그녀는 입술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렇지만…….

며칠 전만 해도 올 줄 몰랐던 도시에 왔다. 놀고 오라는 뜬금없는 미션을 남편이 된 자에게서 받아 여기까지 왔다.

‘그럼 여기서 뭘 더 한다고 해서, 나빠질 것도 없지.’

해 보면 뭐가 어때서?

어차피 여긴 나와 저 사람 둘 뿐이잖아.

별날 수는 있어도 지탄받을 일도 아닌데, 내가 기죽을 일도 아닌데.

뭐가 문제야. 루스벨라 지펠론?

“좋아요. 우리, 춤춰요.”

“기쁘네요.”

“대신 물이 옷을 적시지 않게 뱅글뱅글 도는 것 정도나 할 수 있겠지만요.”

“그것만 해도 충분하지요.”

데니스가 그녀에게 맨손을 내밀었다. 루스벨라 역시 아무것도 끼지 않은 손을 그 위에 내밀어 겹쳤다.

그녀의 손 위로 데니스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수려한 외모의, 아름다운 금발의 청년이 눈을 내리깔며 손등에 입을 맞추는 모습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제게 몸을 맡겨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당신이 그렇게 진지하니까 굉장히 낯설어요.”

“그래요? 참고할게요.”

어디다 쓰려고?

루스벨라의 입에서 궁금함이 터지려다 말았다. 데니스가 사람을 싹 치워버린 해변은 고즈넉했고, 그와 춤을 추는 이 순간은 특별하지 않은 듯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긴말이 필요치 않은 한때였다.

***

“저분들 뭐 하시는 거지?”

이상함을 느끼는 건 루스벨라뿐만이 아니었다. 데니스가 호위로 데리고 나온 기사 몇몇은 멀리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중 시력이 뛰어난 기사 하나가 물속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그 먼 거리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어서 다른 기사들이 그에게 물었다. 최근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갓 결혼한 작은 주인 내외였기 때문이었다.

“발로 물을 튀기고 계시는데?”

“응?”

“엥?”

“잘못 본 거 아냐? 드디어 네 시력도 안경을 쓸 때가 온 거 같은데.”

“아니야. 진짜라고.”

“……진짜 그게 다라고?”

애들처럼? 순수하게? 아무 일도 없이?

“그게 전부야……?”

적어도 나 잡아 봐라, 뭐 그런 평범한 염장 질은 저질러야 보통은 가지 않나……?

“어. 나도 내 눈을 믿지 못하겠는 게 한스럽다.”

“데니스 님……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숙맥이신가.”

“두 분이 아주 사이가 서먹해 보이지는 않으셨는데 말이지.”

“우리가 잘못 봤나.”

기사들은 데니스가 난데없이 해변을 싹 비우라고 해서 루스벨라에게 무언가 이벤트를 해 줄 것 같다는 추측으로 얼른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두 사람이 사랑 없이, 그것도 한쪽이 폄하 당할 수 있는 처지로 결혼한 것을 알았다.

하지만, 정략결혼을 한 모든 귀족 부부가 냉막한 사이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들은 희망을 가졌다.

이래 봬도 데니스 데벤테르는 꽤 미끈하게 잘빠진 얼굴의 소유자였다. 기사단의 전부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주인께 알려지면 모두가 예의 그 사악하도록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경을 치겠지만, 어쨌든 긍정적으로 생각될 만한 요소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게 반반한 얼굴이라는 건 말이 필요 없는 장점이었다.

‘잘생긴 사람 싫어하시는 분은 없지!’

주인 되는 분이라서 하는 빈말이 아니었다. 독버섯이라는 악명이 붙는 데는 데니스의 화려한 외모도 한몫했기 때문이었다. 쑥덕대는 사교계의 한량 같은 귀족들도 그의 외모만큼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감탄했다.

그러니 작은 마님께 얼굴을 이용한 친밀한 접촉을 하실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녀는 외모에 휘둘리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작은 마님의 현명함에 기쁘면서도 데니스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하여 슬펐다.

‘두 분이 잘 지내시면 좋으련만.’

기사단도 주인이자 상관인 데니스의 행복을 빌어 주는 사람이었다. 새로 오신 작은 마님과 잘되길 비는 마음에 신전에 가서 기도하고, 시장에 널려 있는 양산형 부적까지 사서 소원으로 빌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들의 충성은 비실비실한 첫째 도련님이 무서울 정도의 압도적인 무력으로 데벤테르 가를 평정했을 때 시작되었다.

오늘내일하던 데니스가 귀신처럼 사생아 둘을 내치고 기사단을 찾아온 날을 잊지 못했다.

‘병약하고, 사람들과의 제대로 된 교류도 하지 못하던 분이…… 사람 잡아먹은 눈으로 왔었지.’

아직도 기억한다.

시체처럼 창백해진 낯에 가느다래서 부러질 것 같은 팔다리의 버려진 도련님이 밤중에 기사단의 거처에 들렀다.

그의 차림은 가만히 누워 침대에서 요양하는 사람답지 않게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한 손에는 웬 몽둥이가 들려 있었으며, 안광은 일주일을 굶은 늑대의 것이었다. 웬 피도 드문드문 하얀 셔츠 위로 남아 있는 것이 딱 사람 잡아먹으러 온 귀신의 몰골이었다.

[누, 누구.]

[나다. 데니스 데벤테르.]

이름을 들은 후에도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아 한참을 이목구비를 더듬어야 했다.

[첫째 도련님……? 몸도 편찮으신데 여기까진 어쩐 일로.]

데니스는 그 기사의 말에 몽둥이를 정면으로 치켜들고 말했다.

[방금 내 이복동생들을 후작 가에서 내쫓고 오는 길이다.]

[예?]

잘못 들었나? 건드리면 톡 하고 부서질 것 같은 도련님이 누굴 내쫓아?

꿈이라도 꾸는 건가 싶어 볼을 꼬집는 기사에게 데니스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내게 복종해라.]

[……무슨 소리십니까. 후작님께서 건재하신데…….]

[이미 후계자로는 나밖에 남지 않았고, 아끼던 아들들을 잃은 실의에 잠긴 후작은 결국 물러날 것이다.]

실권은 내게 주어진다.

[그러니 나를 따라라. 내게는 시간이 없다.]

시간이 촉박하신가? 뭐에 쫓기시는 게지?

‘정말로 도련님께서 이복동생들을 쫓아내셨다면, 지금까지 왜 가만히 계셨던 거지?’

[설마 도련님, 시한부 질병에라도 걸려서 이러시는 겁니까?]

[아니. 그 반대지.]

그럼?

[그보다 더 급박하고 서둘러야 하는 일이 있어서 그렇다. 한시가 급해.]

[무슨 일이신지 알려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지금은 말할 수 없어. 아무도 안 믿을 테니까. 날 미친 사람 취급해서 가둬 두면 모를까.]

그렇게 말하는 데니스는 흉포해 보였고, 초조해 보였다.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경들은 내가 이해 안 되지? 나도 알아. 그렇지만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들을 쳐낼 수밖에 없어.]

‘진심이다…….’

기사들이 다 달려든다면 데니스에게 승산이 없었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기에 그들은 가지고 있던 검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묻고 싶은 말이 아주 많지만, 일단은 알겠습니다. 협조하겠습니다.]

[새로운 우리의 주군을 위하여.]

기사단의 사람들도 적장자가 아니라 사생아 중 하나가 후작 가를 이어받을 것을 경계하고 있던 차였다.

그 둘은 아버지인 후작의 총애만 믿고 가문을 언제 손에 넣을지만 엿보고 있는 작자들이었다. 훌륭한 차기 후작이 되려고 노력하지는 못할망정 다른 형제의 평판을 깎는 데에 더 공을 들였다.

기사단뿐만 아니라 후작 가의 충직한 식솔이라면 누구나 데벤테르 가의 미래를 걱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반적인 귀족 가의 사생아처럼 자란 데니스는 올곧게 자라 주었다. 일주일에 몇 번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얼마 살지 못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눈빛이 그 놀고먹던 새끼들과는 다르시군.’

내심 데니스가 어서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고 가문에서 입지를 다져주길 바랐던 사람들은 환호했다. 차기 후작께서 말한 ‘급한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오나 당장 잘된 일에 기뻐 그 생각은 뒤로 묻혔다.

그래서 데니스가 돌연 루스벨라 지펠론과의 결혼을 추진했을 때 말이 많았다.

[주군! 왜 그런 영애와의 결혼을 결심하신 겁니까! 주군께서 뭐가 부족하시다고요!]

[맞습니다. 지금이라도 결정을 무르시고, 본래 태중 약혼자였던 분과 결혼을…….]

[내가 한다잖아.]

왜 이렇게 다들 토를 다는 거지?

형형하게 누군가를 물어뜯을 것처럼 노려보는 것도 아닌데 위압감에 반발하던 사람들이 합죽이가 되었다. 타고난 천재처럼 살기로 사람의 기를 죽이는 것이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가신들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정녕, 이 사내가 그들의 병약했던 첫째 도련님이 맞으신가? 정부들의 입김과 후작의 방관 아래 다 죽어 가던 그분이 맞는 건가?

뒷전으로 밀려나서 살았다던 이야기와 맞지 않는 사나운 주인의 모습에 모두 침만 꼴깍 삼켰다.

[이 저택 안의 사람들은 내게 곧잘 말했지. 아픈 걸 훌훌 털고 일어나기만 하면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

[그, 그러긴 했죠.]

[그럼 내 말을 좀 들어주지 그래.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짓이라.]

연약한 꽃인 줄 알았던 꽃봉오리가 새빨간 독을 품고 화하여 웃었다.

[그러니 지금은 다른 말은 얹지 말고 따라 주지 그래. 굳이 이유가 필요하다면, 원하는 대로 말해 주지.]

내가, 그 사람에게 한눈에 반했다.

[그래서 지켜 주고 싶어 데려오기로 했다. 번복은 없다. 더 말 얹지 말고 내 말을 따라.]

‘지펠론 가와의 접점이 없는데 그 영애는 언제 보시고 저런 말을.’

대충 무마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발언이라 생각해서 넘겼던 가신들이었다. 때가 되면 알려 주시겠거니, 하고.

그러나 실제로 루스벨라를 만나 살가운 새끼 호랑이처럼 구는 주인을 보니 그 말이 진심이었구나 싶어 그들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응원에 나서고 있었다.

그래서 아닌 척, 시력이 제일 좋은 막내를 시켜서 실례임을 알지만 두 분을 지켜보게 한 건데. 소꿉장난도 아니고. 고작 물이나 튀기며 놀고 있다니.

“갈 길이 먼 것 같은데.”

“두 분 사이의 아기씨를 보려면 한참 남은 것 같다.”

“그래도 저 정도면 시작이 나쁘지는 않다는 거 아니냐? 풋풋한 커플로 보여서 난 괜찮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야 좋겠지만.”

대화를 하고 있던 기사가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저래서야…… 작은 마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서 시끄러운 말을 하는 자들이 늘 것 같단 말이지.”

고작 저런 사소한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분께서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수도 귀족들의 무서움을 견디실 수 있을지 걱정되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다들 쉬쉬하고 있었지만, 루스벨라 지펠론을 두고 도는 악의적인 이야깃거리는 데니스 못지않게 넘쳤으므로.

“그래도 지금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모셔야 하는 분들이잖아.”

“그래. 행복하시기만을 빌자. 데니스 님께서 분명 무슨 생각이 있으실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무리하게 뜻을 관철하며 혼사를 진행하지는 않으셨겠지.

그들은 수도의, 데벤테르 가의 타운 하우스를 떠올렸다. 못난 아버지이자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인 데벤테르 후작이 아들에게 실망해 자리보전 중이었다.

명분이야 간단했다. 과분한 혼처를 얻은 며느리를 보기 싫어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데니스가 후작 가를 단기간 안에 장악하면서 그의 편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후작은 작위를 넘기지 않고 부득불 타운 하우스에 남아 있었다.

지금껏 제대로 된 부모 노릇도 하지 않다가 인제 와서 참견한다는 것이 우스웠지만, 후작은 그가 살아온 인생처럼 뻔뻔하게 버티고 있었다.

‘조용하고 참하신 분 같던데. 부디 상처받을 일만 없었으면.’

씁쓰레한 표정을 짓던 막내 기사가 다시 해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루스벨라와 데니스가 물에서 나와 도톰한 타월로 물기를 닦고 있었다. 내려갈 때였다.

“가자. 주군과 마님을 모시러.”

쓸데없는 생각은 새하얀 모래 위로 처박고 그들은 그들의 주인을 모시러 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