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이상해 보일 수 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해 보고 싶었다.
신발을 집어 던지고, 오면서 봤던 평민 아이처럼 루스벨라도 첨벙첨벙 물을 튀겨 가며 물놀이를 해 보고 싶었다.
“해 보고 싶으신가요?”
“안 될……까요?”
역시 욕심을 부리지 말았어야 했을까. 사유지라서 외부인들은 올 수 없는 구역이지만 내가 예의 따위 차리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려나?
무작정 저지른 용기가 두려움으로 바뀌려는 찰나였다.
“됩니다.”
“역시 안 되는…… 네?”
“당신이 원하는데, 안 될 리가 없지요. 금방 채비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채비를 하시려고…….”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이는 거, 아닙니까?”
“……맞아요.”
“그렇다면 우리 외의 다른 사람들을 전부 치우면 되는 일이죠.”
데니스가 문제 될 것 하나도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루스벨라는 이제 저 웃음이 해맑지만 자기 뜻을 무식하게 밀어붙일 때 나오는 표정임을 알 수 있었다.
오만함과 자신감 사이의 표정이 저러할까.
“사실 저야 귀족의 품위니 뭐니 별로 따지고 싶지도 않고, 제게 따질 위인도 별로 없습니다만.”
싱긋.
“루스벨라의 편안하고 쾌적한 여행을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하겠습니까.”
“저는 괜찮…….”
“해 보고 싶으시다면서요. 저도 남에게 당신의 무방비한 모습을 노출시키고 싶지는 않으니 괜찮다고 하실 필요 없습니다.”
말을 마친 데니스는 통신용 아티팩트를 이용해 부하에게 연락했다.
“알렌, 지금 당장 해안가를 폐쇄해라.”
“네? 갑자기요? 이용하던 사람들의 반발이 심할 텐데요. 누가 통째로 해안을 빌리기라도 한답니까? 누굽니까, 이번 돈지랄범은?”
“나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쿨럭대며 사레들린 기침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돈지랄도 통이 크고 배포도 넓은 분이나 가능한 멋진 행위입죠. 네. 데니스 님의 명령이시니 곧바로 수행하겠습니다.”
“그래.”
짧고 성의 없는 답변을 끝으로 데니스는 통신기를 종료했다. 무뚝뚝하던 얼굴은 그를 기다리고 있던 루스벨라를 보자마자 풀어졌다.
“잠시만 기다려 줘요. 루스벨라가 실컷 물장구를 치고 놀아도 될 겁니다.”
‘으음, 괜찮은 걸까?’
아슬란에게 말하고서 후회했던 것처럼 괜한 짓을 한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그리고 루스벨라는 자신을 너무 낮춰서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을 기억했다.
[벨라. 너도 소중한 사람이야.]
응. 페이.
나, 노력해 볼게.
‘기억해야지. 내 소중한 친구의 말들을.’
“좋아요. 기다릴게요.”
기다리는 건 그녀의 특기였다.
***
20분쯤 지났을까. 해안가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데니스가 호위로 데려온 기사들도 대기하라고 물린 바람에 둘만 남게 되었다.
루스벨라 그녀 한 사람 때문에 그 많던 사람들을 전부 들어가게 만들었다는 점이 경이로웠다.
“감사합니다.”
“별것 아닙니다. 이제 편하게 노셔도 되니, 편히 즐겨 주기를. 30분 정도로 사람들이 나가 있도록 지시했으니, 그 시간 동안 놀면 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루스벨라의 무거워졌던 마음이 다시 깃털처럼 가벼워져 얼굴에 근심이 지워졌다.
“참고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는다고 해도 걱정하지 말아요. 방금 기사를 시켜 여벌의 옷과 수건 등을 근처에 있는 가문 소유의 건물에서 갈아입을 수 있도록 해놓았으니까.”
당신은 그저 마음껏 놀기만 하면 됩니다.
친절함을 넘어 어딘가 맹목적인 구석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왜?’
나에게서 뭘 보고 이렇게 친절한 것일까.
“아니에요. 손과 발만 담그면 충분해요.”
해변 위로 체면은 잠시 내려놓고 시원한 물에 몸을 맡기는 것도 좋겠지만, 그렇다면 열심히 꾸며 준 하녀들의 노고가 물거품이 될 것이니 안 될 말이었다.
루스벨라가 조심스럽게 샌들을 벗으려고 했다.
허나 굽이 있어서 그런지 그녀는 한 발로 휘청거리느라 샌들을 벗기 어려워했다. 그녀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굽이 높아서 그런 거예요. 평소에는 이렇지 않아요.”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녀가 한 변명에 그는 능청스럽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게 귀족 영애가 당연히 할 반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싫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아직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건데.’
데니스라면 루스벨라를 기꺼이 도와줄 수는 있을 것이다.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처럼, 그녀를 앉히고 손수 신발을 벗겨 주는 일도 저 남자라면 가감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보인 모습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는 안 돼.’
자꾸 기대기만 해서는 진짜 자유를 찾아 나설 수 없어.
새장에 갇혀 살던 새가 왜 바깥으로 풀려나도 야생에서 살던 새의 무리에 끼지를 못 하겠는가. 주인이 주는 먹이와 포식자의 공격이 없는 안전한 실내에서 살다 보니 적응하지 못하고 외따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다 죽는 거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곳에서 혼자.
‘도와주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으면 그런 개죽음으로 끝이 나는 거야.’
과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강박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루스벨라는 말없이 휘청거리면서도 끝내 신발을 다 벗었다. 데니스는 그동안 뒤로 돌아섰다.
“다 끝나면 이야기해 주세요. 그때 다시 앞을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귀족 영애의 발을 보지 않는 매너를 해 줘서가 아니라, 그녀 혼자서 신발을 벗도록 내버려 둔 것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신발 정도야 스스로 갈아 신을 수 있었으니까. 드레스가 발목이 드러나는 종류의 것이라서 다행이었다.
‘시원하다.’
맨발로 닿는 모래사장의 감촉이 선연했다. 햇볕이 모래를 달궈 뜨거웠지만 그녀는 해방감을 느꼈다. 숨이 트이는 기분이 상쾌했다.
“이제 뒤로 도셔도 되어요.”
“네.”
루스벨라는 성큼성큼 걸어가 푸르게 빛나는 바닷물에 발바닥을 적셨다. 발끝으로 척추까지 전해지는 시원함이 올라왔다.
멈추지 않고 더, 더 걸어갔다. 희고 마른 발을 삼킨 바닷물은 아슬아슬하게 드레스가 젖지 않도록 복숭아뼈 바로 위까지 적셨다.
첨벙이는 물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머뭇거리던 루스벨라는 점차 과감하게 발을 굴렀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즐겁다.’
루스벨라는 냇가에서 멱을 감고 노는 어린아이처럼 말갛게 웃으며 물속을 뛰어다녔다. 물 안이어서 저항력 때문에 다리가 뭍에서보다 느리게 움직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를 만끽했다.
탁 트인 수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바다와 그녀 자신이 동일시되는 것 같았다. 청량함이 폐를 채우고, 피부 위로 닿는 차가운 물이 기분 좋았다.
“루스벨라.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요.”
“나도 알아요! 그런 것쯤은.”
어느새 루스벨라의 입가는 둥근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었다. 희미한 미소가 아니라, 눈과 입과 얼굴 근육 전부가 웃고 있는 미소였다.
첨벙, 첨벙, 첨벙.
제멋대로 물장구를 치면, 투명한 물 아래로 보이는 부드러운 백색 모래가 그녀의 발을 감쌌다. 손으로는 몇 번이고 물을 담아 공중에 흩뿌렸다. 햇볕을 받아 보석처럼 빛을 내며 물방울이 흩날렸다.
주변에 다른 귀족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녀를 보고 이마를 찌푸렸을 것이다. 아니면 흉을 봤을 테지.
저 여자는 어디서 왔길래 무지렁이 촌부처럼 저까짓 바닷물에 환장을 하는 것이냐고.
‘알 게 뭐야.’
나는 지금 아주 즐거운데.
루스벨라는 뒤에 데니스가 있다는 것도 잊고 물을 튀기면서 놀았다. 숨 막힐 듯한 의무와 책임, 그리고 걸려 있다는 미래를 강조하면서 그녀에게 채워 있던 목줄이 사라진 것 같았다.
이곳에는 지긋지긋한 그녀의 아버지도, 아픈 첫사랑이 된 윈체스터 공작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날 상처 입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투명한 바닷물이 내면에 남아 있던 감정의 찌꺼기를 삼킨 것처럼 후련했다.
한 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던 여인이 바다를 배경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사람을 흥겹게 해 줄 노래도, 음악도 없었고, 무도회장에서 출 수 있는 춤과는 사뭇 다른 이른바 막춤이었지만 루스벨라는 행복해 보였다.
그녀가 울 때 소리 내서 울지 않는 것처럼 지금도 웃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곁에서 루스벨라를 지켜보는 데니스는 알 수 있었다.
저것은, 마음이 벅차오르는 기쁨이 너무나 커서 웃음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당신이 즐거워 보여서 다행입니다.’
백사장의 모래만큼이나 창백한 그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비쳤다. 아무도 보지 못하여 아까운 미소였지만 그래서 더 찬란했다.
그는 주어진 시간 동안 루스벨라가 마음껏 바다를 배경으로 춤을 추도록 두었다. 정해진 시간이 넘었을 때도, 알렌에게 다시 연락을 걸어 시간을 조금만 더 늦추자는 제안을 빙자한 통보를 날리고 그녀 곁을 지켰다.
“그래요. 당신은 본래 그렇게 빛나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한 철만 피었다가 지고 마는 꽃처럼 죽어 가는 눈을 할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니, 적어도 그런 꽃은 꽃망울을 피워낼 기회라도 있었지만…… 당신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지요.
‘이번에는 달라지도록. 당신이 원하는 길을 가도록 반드시 도울게요.’
당신에게 받은, 다 못 갚을 은혜를 이런 식으로라도 조금씩이나 갚을 수만 있다면.
‘이 생을 다시 살게 되는 것도 내게는 충분히 의미 있고 값진 일이 되겠죠.’
그리 생각하는 데니스의 주먹 쥔 손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는 루스벨라가 자신의 존재를 잊고 물놀이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았지만, 혹여 그녀가 멀뚱히 서 있는 자신을 보고 부끄러워할까 봐 뒤돌아서려 했다. 시간이 되면 루스벨라에게 가자고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루스벨라가 데니스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와 그의 두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말했다.
“데니스!”
“네.”
“이리 와요. 바닷물이 아주 시원해요!”
“알고 있어요.”
“아……. 그렇겠죠, 참.”
루스벨라는 즐거움에 젖어 데니스와의 사이에 놓인 심리적인 거리를 잊었다. 꿈에서 깨어나듯 현실을 자각한 그녀의 두 볼이 홧홧하게 불타올랐다. 그녀도 모르게 신나게 놀고 말아서 데니스를 쳐다보기 민망했다.
‘무슨 정신으로 그랬던 거지?’
난감함에 초록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렀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마음과는 다르게, 편한 차림으로 풍경에 녹아들어 있는 이 남자를 보자니 입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아까처럼.
“한 번만…… 나랑 물장구칠래요, 데니스?”
저지르는 것은 쉬웠다. 잠깐의 망설임은 알 게 뭐라는 식으로 입을 여니 간단했다.
거절할까? 아마 거절하겠지?
그래도 물어본 건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보고 놀고 오라고 했지만…….’
혼자 이 즐거움을 누리는 것보다 둘이 같이 나누면 좋을 것 같았다. 낯선 곳에서만 낼 수 있는 출처 모를 용기가 그녀를 북돋웠다.
그는 어떤 대답을 할까. 조마조마함에 손과 발을 적신 수분이 모조리 말라 버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데니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