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좋습니다. 같이 나가 봐요.”
승낙의 말을 전하는 데니스는 어딘가 부서질 듯이 웃고 있었다.
그가 마치 깨어져 버릴 꿈을 꾸는 것처럼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어서, 루스벨라는 저도 모르게 데니스의 손을 붙잡았다.
“루스벨라?”
“아.”
“왜 그러세요?”
“아…… 그게.”
답할 수 없었다.
당신이 밤의 우물 위로 모습을 드러낸 달그림자처럼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붙들었다고는.
갑자기 왜 그런 불안에 빠졌던 걸까.
‘진짜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내가 무슨 오지랖이람.’
이 사람이 마법을 부릴 것도 아닌데 사라질 리가 없잖아.
바보같이.
“아니에요…… 아무것도.”
루스벨라가 눈을 비비고 다시 데니스를 바라보았다.
눈꺼풀을 감았다 뜨는 찰나의 시간 뒤의 데니스는 다시 멀쩡해 보였다. 어디에도 가지 않고, 현실에 붙박여 존재하는 데니스 데벤테르의 손을 그녀가 꼭 잡고 있었다.
‘……응?’
내가 손을 잡고 있어?
“저, 루스벨라. 손은 놔주실래요?”
“아, 아아. 미. 미안해요. 불쾌했어요?”
“불쾌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데니스가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무어라 말을 전하려다 말고 꾹 다물렸다.
고집스럽게 닫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루스벨라는 궁금함이 싹텄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이미 입 밖으로 내놓고 싶어 하지 않는 타인의 이야기를 강제로 파헤치는 악취미는 없었으므로.
“그럼, 이따 뵈어요.”
“지금 이대로 가도 상관없는데요?”
“저 사람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누가…… 아.”
뒤를 돌아보자 열린 방문 사이로 보이는 복도에 지나가던 지아나가 시야에 포착되었다.
지아나는 후웁, 하고 숨을 크게 들이 마신 뒤에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작은 주인님 내외분이 외출을 나가신다고 합니다! 여러분!!!”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거기! 작은 주인님들의 채비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 좀 빨리 불러 봐! 첫 데이트다!”
“첫 데이트란다!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서 튀어와!”
우당탕탕. 우아함으로 무장했던 고성이 ‘데이트’라는 말이 들리자 달걀을 빼앗기려는 닭장 속 닭들처럼 난리가 났다.
급한 구둣발 소리가 메아리처럼 사방에서 울려서 여기가 성안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오고 가는 시장 길목인지 모를 정도로 많은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작은 마님!”
“그, 그래.”
“저희에게 모든 것을 맡겨 주십시오! 부족한 솜씨지만 최선을 다해 첫 데이트에 걸맞은 완벽한 옷차림을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 정도까지 바라진 않는데…….”
“저희가 원합니다!”
루스벨라는 그 말에 그저 살며시 웃었다.
‘내가 데니스와 잘되기를 바라는구나.’
숨겨지지 않는 그들의 투명한 마음에 그녀는 조금 곤란해졌다. 그와 그녀가 ‘그런’ 식으로 묶이는 것이 가능할지 몰라서였다.
신혼여행 와서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부부다운 행실을 보인 적이 없었다. 시작부터 각방을 썼고, 잠을 잘 때도 주어진 각방에서 잤으니 리스냐 성의 사람들은 적잖이 실망했을 터였다.
정략결혼인 것을 알고 있어도 부부는 부부.
하인들로서는 주인인 분들의 화목함이 곧 근무지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다만, 당사자들은 멀뚱히 서 있는데 주변인들이 더 환호해서 야단법석을 피우고 있으니 생소했다. 시끌벅적하고 기분 좋은 소란스러움이 폭죽처럼 터져 루스벨라를 뒤덮었다.
그게 낯설지만 나쁘진 않았다.
“그럼 부탁할게요, 지아나.”
“맡겨 주신 일을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저희도요! 작은 마님!”
하녀들이 눈을 이글거리며 불태우고 있었다. 루스벨라로서는 마음대로 하라며 몸을 맡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거의 헹가래를 치듯 지아나를 비롯한 하녀들이 루스벨라를 에워싸고 데려가 버렸다.
“도련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작은 마님과의 오붓한 시간 즐기실 수 있도록 저희를 갈아 넣겠습니다!”
“그래. 기대하지.”
시종과 시녀들은 함박웃음을 머금고 두 사람을 각자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
루스벨라는 그대로 머물던 방으로 끌려가 한껏 치장을 당했다.
하녀들의 얼굴이 너무나 진지하여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고 하라는 대로 따라 주었다. 촉촉하고도 섬세한 손길이 얼굴에 색을 입혔다.
데니스가 리스냐에 온 첫날 돈지랄을 해서 가져온 드레스와 그 외의 것들을 두고 첨예한 논쟁이 하녀들 사이에 벌어졌다.
“좋아요. 이걸로 가죠.”
최종 선택지는 민들레를 닮은 연한 노란 색의, 발목이 드러나는 아랫단이 부풀려진 귀여운 외출용 드레스로 정해졌다.
센스가 없는 루스벨라 대신에 하녀들이 귀걸이며 팔찌며 구두를 날씨와 상황에 맞춰 사랑스럽게 맞춰 주었다.
“다 되었습니다.”
“고맙네.”
거울 속에는 몹시 사랑스러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 루스벨라는 정성을 다해 준 시녀들에게 고마웠다.
“고마우시면 도련님과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세요, 작은 마님.”
“맞아요! 저희는 그거면 충분해요.”
루스벨라는 데니스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성안 사람들은 그저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뿐이라는 것을.
“응. 알았어.”
잘 다녀올게.
그 말을 하면서 루스벨라는 저도 모르게 반듯한 치아가 드러나도록 미소를 지었다. 어둠을 뚫고 동이 트는 것 같은 태양을 닮은 귀한 미소였다.
하녀들이 그 웃음에 얼어붙은 줄도 모르고 루스벨라는 베이지색 굽이 달린 샌들을 신고 데니스를 찾아갔다. 오래 돌아다닐 것을 염두에 두고 고른 신발이라 굽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또각또각 발소리가 대문 앞에 서 있는 데니스 앞에서 멈췄다.
그녀를 발견한 그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멋져요, 루스벨라. 휴양지 차림으로 아주 제격인걸요?”
“고마워요. 당신도…… 제법 멋져요.”
금발에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를 한 데니스는 간단한 차림새였다.
흰 셔츠의 단추를 살짝 풀어 헤치고, 진한 청남색의 바지를 입은 것이 전부였다. 어떠한 장신구도 걸치지 않았고 구두도 가장 평범한 것을 신었는데도 아름다웠다.
꾸미지 않았음에도 멋들어진 태가 나서 루스벨라는 굳이 제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기분 좋네요. 음, 손을 붙잡아도 될까요?”
“……그래요.”
데니스의 손은 따뜻했다. 리스냐의 무더위가 그 안에 응축된 것 같았다.
더운 날씨임에도 그 손을 잡으니 온기가 전해져서 놓고 싶지 않았다. 추운 겨울날의 기억이, 손을 잡으니 생각나지 않아서였을까.
“당신 손은 차니 이렇게 손을 붙잡고 있으면 금방 따뜻해질 거예요.”
타인의 온기는 그녀에게 위험했다. 그 온기에 취해 기대고 싶어지니까. 전해진 온기처럼, 얼어 버린 마음도 녹아 버리게 된다면…….
‘……아니야.’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굳건히 다짐하질 않았는가.
정략결혼, 팔려온 신부. 호의적으로 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자신의 처지.
‘떠나고 싶다고 했잖아.’
이 이상으로 분에 넘치는 것을 손에 담으려 하지 말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시작하게 된다면, 멈출 수 없겠지.
“가요, 우리.”
부디 내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없기를.
***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리스냐에 오면 꼭 와 봐야 할 관광지를 위주로 돌았다. 가장 처음 들른 곳은 백색의 황홀한 모래가 눈부신 해변과 옥색의 바닷가였다.
리스냐는 남부 특유의 뜨거운 기온 때문에 해변에 나와 헤엄을 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체로 그건 평민들이 하는 행동이었다.
귀족들은 품위와 체면을 생각하여 밖에서 함부로 신체를 드러내기를 꺼렸기 때문에, 귀족들은 미리 준비한 차양과 천막을 깔고 해변에 있거나, 해변 근처의 귀족을 상대로 만든 고급 라운지 바에 가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진짜 바다네.’
루스벨라가 만감이 교차하는 눈으로 옥색의 맑고 투명한 바다를 바라봤다. 물결이 해변에 다다르면 하얀 거품을 내며 부서지는 것조차 아름다웠다.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이에요. 주변도 조용하고요.”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호위를 대동하여 나갔지만, 해변을 걷는 동안에는 최소 거리를 유지한 채로 둘만이 걷는 시간을 가졌다. 리스냐가 데벤테르의 영지인 덕에 둘은 데벤테르 가문이 소유한 사유지 안에서 조용히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뙤약볕이 뜨거운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시원한 소재의 드레스를 입었다고 해도 금세 땀방울이 맺혔다. 자연스럽게 바다에 시선이 갔다.
‘시원해 보이네.’
손이나 발을 담가 보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데니스가 가이드 역할을 자처하여 해안가에 대한 설명을 해 줬다.
“리스냐 해안의 특징은 보시다시피 유리 속처럼 속이 다 비치는 맑은 바다라는 점입니다. 또한, 더운 날씨를 위해 신이 내려 준 선물이라는 전설처럼 해수의 온도 자체는 굉장히 차가운 편이지요.”
“그래서 시민들이 저렇게 물놀이를 하러 오는 거군요.”
“네. 리스냐에서는 일상입니다.”
“귀족들도 피서를 많이 오는 것 같던데, 저들은 물에 몸을 담그지 않나요?”
“주변에 보는 눈이 많다고 생각해서 꺼리니까요. 굳이 물에 들어가고 싶다면, 해안을 통째로 빌리는 것을 택합니다.”
“그렇군요.”
루스벨라는 데니스와 팔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걷고 있었지만, 시원한 파도에 시선이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드물게 반짝이는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저 바닷물에 손이나 발을 담가 보았으면 좋겠다.’
귀족이면서 버려야 마땅할 생각이라는 것을 알지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 인생의 첫 바다를 보는 마음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머리가 이상해져 버린 것일까.’
너무나 과분한 대접을 받아 마음에 건 빗장이 풀어져 버린 탓인가. 소소한 일탈을 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 혈관을 타고 흘러내렸다.
‘북쪽의 함박눈은 그렇지 않았는데.’
똑같이 차가운 성질을 띤 눈이, 북부의 새하얗던 매서운 눈이 떠올랐다.
사계절이 존재하는 중앙의 수도와는 다르게, 북쪽은 일 년의 대부분이 추웠다. 봄은 짧고, 겨울은 길었다. 싸라기눈은 없고 오로지 한번 내리면 사람을 죽일 듯이 내리는 함박눈이 폭풍우처럼 쏟아졌다.
공작 성에 약혼녀의 신분으로 입성하는 루스벨라는 북부의 매서운 눈을 보고 겁에 질렸다. 그녀가 알던 포근한 눈이 아니었다. 거침없는 대자연의 무서움을 알리는 거대한 눈 폭풍은 눈에 대한 두려움을 주기 충분했다.
‘눈에 손을 대지 못한 이유는 그거 말고 더 결정적인 게 있었지.’
아슬란 윈체스터.
그녀의 전 약혼자 때문이었다.
[저어, 소공작님. 저와 눈싸움 하시지 않으실래요? 이, 이거 재밌어요. 어떻게 하는 거냐면…….]
[루스벨라, 라고 했었습니까?]
[네, 네!]
[난 그런 한가한 애들 놀이에 신경 쓸 시간 없습니다. 그리고, 북부에서 눈은 무서운 포식자와 같은 자연재해입니다.]
말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쓰십시오. 여긴 북부입니다.
[저는…… 그게…….]
명색이 약혼녀인건만,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아슬란과 친해져 볼 생각으로 건넨 제안이었다. 두근거리는 설렘을 담아 직접 만든 장갑과 모자, 목도리도 준비한 참이었는데.
[저는 그러한 가벼운 태도를 아주 싫어합니다. 루스벨라, 당신이 내 약혼녀로 이 땅에 왔다면 윗사람으로서 모범을 보이십시오. 경각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하란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그런 제안은 하지 마십시오. 불쾌합니다.]
‘그랬었지.’
그때 내 나이는 고작해야 열넷밖에 되지 않았는데.
좋아하는 약혼자에게 무참한 거절의 말을 들은 후로 그녀는 눈을 피해 다녔다. 눈을 보면 아슬란의 영하보다 차가운 말들이 비수처럼 가슴을 찢었다.
그래서 루스벨라는 눈이 싫었다. 눈을 보면 좋은 이유보다 싫은 이유를 많이 떠올리려 노력한 것 때문이었다.
축축하고, 농작물에 해를 입히고, 높게 쌓이면 농가의 지붕을 무너뜨리기도 하는 무서운 눈.
눈이 오는 날씨를 싫어하게 되자, 북부의 웅장함을 자랑하는 풍경 중 하나인 만년설이나 빙하에도 관심을 끊었다. 그것들도 보게 되면 아슬란의 비위를 상하게 할 말을 무심코 내뱉게 될까 봐. 그게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무슨 북부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 이런 것에 관심이 없다고 또 꼬투리를 잡히긴 했지만.
‘그래서일까?’
따스한 남부의 바닷물이 물결치는 것을 보니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도 그 물결에 흘려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차가움을 지닌 것이지만, 마음에 와닿는 정도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데니스.”
“네.”
여기서 손과 발을 담가 봐도 될까요?”
그녀는 몇 년 만에 충동적이고 사사로운 욕심이 들어간 부탁을 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