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을 수는 없어요.”
“루스벨라.”
루스벨라는 긴장했다. 데니스는 루스벨라 앞에서 곤란해할 때마다 더욱 진하게 웃음을 머금고 저렇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지만 이번 건은 그녀로서도 물러나기 어려운 일이었다.
“데니스는 오전부터 오후까지 후작 가의 일을 처리하고 있잖아요.”
“네, 그렇죠.”
“명색이 신혼여행인 데도요.”
“제가 아까 했던 말씀을 그대로 따라서 갚아 주시네요. 응용력도 좋으시지.”
순간 ‘나를 비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데니스의 어조는 평이했으며 그녀를 비웃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고 있는 건가?’
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조금 올라간 것 같았다.
“칭찬은 감사하지만 어쨌든 저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요.”
“왜요? 지나가는 사용인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당신이 일할 이유는 없다고 할 거예요. 세상천지에 어떤 인간이 신혼여행부터 일을 해야 한다고 갈구겠습니까. 그것도 고용주에게.”
루스벨라는 그의 말을 들으며 윈체스터 성은 그렇지 않았노라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대신에 지아나의 말이 떠올랐다.
[도련님께서 다소 과격하시죠?]
‘지아나의 말이 맞았네.’
데니스가 사용하는 어휘는 거침없는 면이 있었다. 북부에서 갓 돌아왔을 때의 루스벨라였다면 기가 죽어 알았다고 하고서 뒹굴뒹굴하는 백수의 삶을 힘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루스벨라는 요 며칠간 잘 먹고 잘 자고 세심한 관리까지 받아 혈색도 좋고 몸도 가뿐했다. 정신도 마찬가지였다.
즉, 말대꾸를 할 힘이 남아돌았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사용인들은 그렇게 대답하겠죠. 하지만 고용주가 묻는 말에 어느 사용인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겠어요?”
“흐음. 그래요?”
놀리는 기색이 다분했지만, 루스벨라는 꿋꿋이 할 말을 이어 갔다. 저 남자의 페이스에 휘말리면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순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을 의무를 받아들일 수야 없어.’
루스벨라는 평생 놀고먹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다. 지펠론 백작 가의 장녀로서 있을 때는 공작의 옆에 서도 괜찮을 수준의 반려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허울만 약혼녀라는 감투를 얻은 뒤에는 약혼녀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명시된 포션 제조와 치유사로서 일하는 데 시간의 8할을 보냈다.
‘게다가 이렇게 귀애 받는 부인처럼 있기가 민망해. 난 여기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는데. 대가 없이 편안한 생활을 받아들일 수는 없어.’
그녀는 후천적인 일벌레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만들어진 워커홀릭이라고 봐야 했다.
루스벨라는 그녀를 속박하던 혈연에서 멀어지자 몸은 상쾌했지만 마음은 늘 무언가 부족하다는 갈망에 시달렸다.
***
지난밤 잠을 자지 못하고 말똥하니 뜬 눈으로 양을 세던 중에 왜 그럴지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최근에 하지 않던 짓이라면…….’
쥐꼬리만큼이라도 있는 치유사의 재능을 개발하거나 신부 수업을 이유로 각종 교양이나 학문을 배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제적이긴 했지만 남을 위해 일하던 것도.
“일을 해야겠다.”
한밤중에 그녀가 벌떡 일어나 앉아 든 생각이 바로 그거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리스냐 성의 데벤테르 사람들은 더 좋은 사람들이었다.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 중 가장 따스히 대해 주는 이들이어서 무엇이라도 해서 받은 은혜를 갚고 싶었다.
“뭐가 좋을까…….”
고심하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테이블 위로 놓인 머그잔이었다. 아까 잠들기 전에 드시라고 지아나가 가져왔던 꿀을 탄 따뜻한 우유가 담긴 잔이었다.
‘회복용 포션을 만들어 주면 조금…… 기뻐할까?’
루스벨라가 손을 매만졌다. 변변치 않은 실력이지만, 공작 성에서 대량으로 밤샘을 하며 만들던 경험이 있으니 수도로 올라가기 전 남은 시간 내에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촉박하긴 하지만, 재료만 있다면 가능해.’
“내일 지아나에게 부탁해 봐야겠다.”
아니지. 지아나에게 말했다가는 데니스에게도 들통날 확률이 높았다.
그 주인에 그 가신이라고, 지아나는 데니스처럼 루스벨라가 푹 쉬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재료는 다른 하녀에게 시키는 게 좋겠다.’
의도치 않게 깜짝 선물을 준비하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루스벨라는 이왕 하는 거, 후작 가의 자금을 쓰기보다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고 싶었다.
친정에서 가져온 돈은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결혼식장에서 착용했던 애정 없는 장신구들이었다. 데니스가 지펠론 가에서 챙겨 준 빈약한 짐을 버릴 때 이것만은 챙길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붙어 있는 보석을 팔면 간단한 회복용 포션을 만들 재료를 살 값은 충분할 거야.”
루스벨라는 오랜만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촛대를 들어 간직하고 있던 장신구를 찾아 찾기 쉬운 서랍 안에 넣어 뒀다.
그리고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자신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고민했다.
‘치유사는 기본적으로 연금술사의 속성을 가지지만, 사제처럼 미약하게나마 축복을 걸어 줄 수도 있으니 그것도 해 볼까?’
고맙다는 표시로 전해 주면 다들 음식이 맛있었다는 주방장처럼 함박웃음을 지어 주면 좋겠다. 상상만 해도 달콤한 설탕절임을 넘긴 것처럼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좋아. 계획한 대로 실행해 보자.’
일할 생각에 받기만 해서 무거웠던 마음의 반을 덜어 낸 루스벨라는 이불 속에 들어가 돌돌 몸을 말았다. 공기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마도구를 틀어 쾌적했기에 그녀는 마음껏 폭신한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했다.
***
그렇게 결심을 하고 푹 잠이 들었는데, 꿈도 꾸지 않고 자서 일어나 기운차게 하루를 시작했는데 데니스가 그녀를 말린 것이다.
“이것만큼은 저도 포기 못 해요.”
“루스벨라, 그 말은 꼭 제가 당신의 자유를 제한한 것처럼 들리는데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요. 어쨌든 놀고 오라는 말은 들어주기 어려워요.”
놀고 오라니. 그런 말은 정말이지 익숙하지가 않았다. 대가 없는 자유는 없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아서 데니스의 제안이 무섭게까지 느껴졌다.
“……루스벨라. 당신 정말 성실한 거 알아요. 대가 없는 호의가 낯설어서 이러는 것도 알고요.”
그렇지만.
“그러니 당신은 더욱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 둘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까지 쉬지 않고 받은 것을 꼬박꼬박 돌려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자유롭게…….”
얼마나 달콤하고도 그녀와 멀리 있는 단어이던지.
“네. 자유롭게요. 당신은 지금 자신에게 너무 강박적으로 구는 경향이 있어요. 꼭 세금 징수관처럼 철저하게 당신에게 주어지는 호의를 계산적으로 셈하지 않아도 되어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녀에게는 이것이 보통이었지만 데니스는 반박의 기회를 주지 않고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네. 그것보다는 사용인들에게 더 웃어 주고, 고맙다고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행복해할 겁니다. 제가 약속드리죠.”
이 남자가 하는 말은 이상한 것들 투성이였다.
그런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이고, 눈만 깜빡이면 사라질 것들로 사람들이 기뻐하다니.
‘꼭 ……처럼.’
믿고 싶어지게.
“……정말 확실한 정보에요?”
“제가 곧 계승 받을 후작위라도 걸까요?”
“아니에요. 됐어요.”
리스냐 성의 주인은 본디 데벤테르 후작 부인이었다. 성안의 사용인들은 데니스와 유대 관계가 깊었으니 그의 말에 더 신빙성이 있었다.
‘그렇지만 나름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는데.’
아까웠다.
이미 손가방 속에는 재룟값을 대려고 가져온 장신구들이 들어 있었다. 레시피도 다 생각해 두었는데…… 아쉬웠다.
데니스가 시무룩해진 그녀의 낯빛을 살피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요? 제가 말한 대로 우선 놀고 들어오세요. 남은 기간 내내요. 단, 마지막 날에 고용인들을 위한 선물을 사 들고 오는 것으로 합의해요.”
“……좋아요! 그런 조건이라면 흔쾌히 나갔다 올게요.”
“좋네요. 목소리가 크고 밝아졌어요.”
“내가…… 그랬어요?”
“네. 듣기 좋았어요.”
데니스가 루스벨라를 보며 꿀보다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남자가 짓는 웃음은 파괴력이 엄청나서, 잠시 루스벨라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사실은 이 모든 게 깨어나면 사라질 꿈이 아닐까.’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들이 많은 이 꿈에서 깨어난다면 너무나 슬플 것 같았다.
데니스가 가지고 있던 서류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참, 안전을 위해 기사 몇이 루스벨라의 뒤를 따를 겁니다.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나지 않을 테니,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돌아다니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또 알아 둘 사항이 있나요?”
“있죠. 어디가 놀러 가기 좋은지 알아 두어야 하니까요.”
데니스는 곧바로 리스냐의 어디로 가야 좋은지를 루스벨라에게 지도를 펼쳐 알려 주었다.
게이트를 타고 왔을 때 본 해변가를 걷는 것, 각종 해산물과 기념품을 파는 야시장, 그리고 소원을 들어주는 인어가 나온다는 바위까지.
“굉장히 다닐 곳이 많네요.”
“리스냐는 휴양지로 유명한 도시니까요. 괜히 이곳을 신혼여행지로 잡아 온 것이 아니랍니다.”
그랬구나.
‘나는 단지 이곳이 데벤테르 가가 소유한 영지 중 하나라 온 것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여태 새신부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얹혀살게 된 식객이라고 스스로의 처지를 되새기고 있었는데, 아니었다니 몸의 긴장이 훅 풀리는 것 같았다.
‘지아나도, 주방장도, 날 돌봐주는 하녀들도 다 데니스가 명령해서 어쩔 수 없이 친절하게 대해 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들은 데니스 말대로 내게 호의를 베풀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어.
‘군식구가…… 아니었던 거야. 나는.’
고맙고, 조금 민망하고, 기뻤다.
코끝이 찡해지려는 걸 꾹 참고 루스벨라가 데니스에게 질문했다.
“데니스는요?”
“네?”
“데니스도 저랑 같이 신혼여행 온 거잖아요. 그런데 계속 일만 하시고. 우리, 같이 나가서 놀다 와요.”
“제가……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불편하지 않겠어요?”
“당연하죠.”
우린 이제 부부가 되었잖아요.
“부부…….”
“당신이 왜 저를 선택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한 번 부부의 연으로 묶인 몸이니 함께 돌아다녀야죠. 성 내의 사람들도 그걸 바랄 거예요.”
루스벨라는 자신의 목소리가 어쩐지 들떠 있음을 자각했다. 데니스의 제안대로 놀러 갈 것이 기대되어서는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이 여유롭고 능글맞던 사람이 같이 밖에 나가자는 제안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한층 인간다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그녀가 지켜본 데니스는 상냥했고, 친절했지만, 어딘지 투명한 벽으로 가로막힌 느낌이 있었다. 데니스라는 사람의 파이가 있다면 고작해야 16분의 1 정도만 맛을 본 것 같았기에.
“저랑 같이 나가 봐요, 데니스. 당신이 알려 줄 리스냐가 무척 궁금해요.”
‘잠시만…… 아주 잠시만.’
그녀를 따뜻하게 대해 주는 사람의 온기에 조금만 기대보고 싶다는 충동의 손을 들어 주고 싶었다.
길게는 아니고, 짧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스스로 굳게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