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제가 먹겠다고 했습니다만,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데니스가 세상 천진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루스벨라는 케이크 하나 때문에 떠오른 과거가 구깃구깃 접힌 종이 쪼가리가 되어 바닥에 패대기치는 기분을 느꼈다.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정성스럽게 은제 트레이에 사랑을 담아 만든 딸기 케이크를 가져온 주방장과 그 일동은 생각했다.
‘우리 도련님이 미치신 걸까?’
매우 불경스러운 생각이었지만 모두 텔레파시가 통한 것처럼 같은 충격에 빠졌다.
우리 소중한 작은 주인님께서 똑같이 소중한 작은 마님께 바칠 케이크를 뺏어 드시려 하신다.
‘뺏어 드시려 하신다고…… 뺏어서…….’
이 명제가 주는 울림이 너무나 이상해서 그들은 잠시 자신들이 뭔가를 잘못 들은 줄 알고 착각했다.
귀족의 몸가짐을 따지기 전에 이건…… 인간으로서 많이 치사한 행위였다.
솔직함을 조금만 더 가미하자면 얄미웠다!
“어…… 도련님, 아니 작은 주인님께서 드시려고요? 이것을요?”
아니라고 해 주세요, 제발. 이건 우리 작은 마님께 드려야 할 특제 딸기 생크림 케이크라고요.
시종들이 거의 애원하는 눈빛으로 데니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데니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작은 주인님께 드릴 디저트는 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한 주방 하녀가 뒤를 흘깃 돌아봤다. 트레이에는 머리를 맑게 해 주는 차가 있었다. 섬세한 그림이 입혀진 찻주전자와 다기가 자신을 다뤄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방장의 생략된 말에는 ‘도련님은 저거 드실 건데 지금 치사하게 작은 마님이 드실 디저트를 빼앗아 드시겠다고요? 정말로요???’가 있는 게 뻔했다.
‘진짜 먹겠다고?’
루스벨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황을 지켜봤다. 데니스는 자신의 폭탄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
“내가 먹겠다고 했잖아. 내 말이 말처럼 안 들리나 봐?”
화려하게 핀 장미 같은 미인이 웃으면서 협박하니 두려움이 두 배였다. 데니스가 잘 웃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모시는 주인님의 심기가 거슬렸다는 것을 피부에 삐죽 솟는 솜털로 느낀 주방장이 후다닥 케이크 그릇을 데니스 쪽에 놓았다.
“아닙니다! 작은 주인님의 말씀을 어기다니.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이제 놓고 가 봐.”
“예!!!”
살았다! 모두 갑시다!
순식간에 주방의 사람들이 바람처럼 달려가 사라졌다. 심기가 불편한 사나운 고양이를 마주한 쥐 떼처럼 우르르 일터로 도망쳤다.
몰려 있던 사람들이 사라지자 한산해진 널찍한 식당 안에는 데니스와 루스벨라 둘만 남게 되었다. 그 즈음 루스벨라는 입을 다물고 데니스를 관찰하고 있었다.
‘과연 금이 간 찻잔…….’
사나움은 허명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사교계에서 흘러나온 정보가 아주 틀리진 않았음이다. 그것보다 루스벨라는 아까 데니스가 말했던 내용이 더 신기했다.
“저, 데니스.”
“네. 루스벨라.”
“진짜로 제 몫의 케이크를 먹어 버릴 생각이에요?”
먹어 버린다는 단어가 강세가 더 들어갔다. 먹어 버린다, 가 아니라 뺏어 먹을 거냐는 의미로 물어본 것이었기에 그랬다.
“네. 제가 먹어 버리려고요.”
“……진심이에요?”
딱히 저 케이크를 탐내 하는 기색은 없어 보이는데,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지.
루스벨라는 기가 막혀서 다음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를 잊었다.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자신의 말재주의 한계가 여기까지라니.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문이 막힌다는 사실을 지금 뼈에 사무치도록 깨닫고 있었다.
“제 말 아직 다 안 끝났어요.”
데니스가 아까의 사나웠던 태도는 버리고 다시 유순하게 굴었다. 본성을 이미 엿본 루스벨라는 혈색 변화 없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무슨 할 말이 더 남으셨나요.”
“이거, 루스벨라랑 같이 먹을 거예요.”
“네?”
“같이 먹어요, 우리.”
아까는 뺏어 먹는다더니.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럴 거라면 제가 케이크를 받은 뒤에 나눠 먹어도 되었을 텐데요. 아니면 주방장에게 똑같은 것을 더 만들어 달라고 하던가요.”
“루스벨라, 전 케이크 별로 좋아하진 않아요.”
그건 디저트로 달랑 차만 나왔을 때 예상한 바였다.
“그럼 왜 드시겠다고 하신 거예요?”
“당신이 머뭇거리는 걸 봤거든요.”
먹고 싶은데, ‘무언가’ 때문에 멈칫하는걸.
“……그건 케이크 그릇이 꽤 무거워서 그런 거예요.”
“주방장이 옮겨 줄 그릇이었잖아요.”
데니스는 넘어가 주질 않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니 암담했다.
루스벨라가 입을 꾹 다물고 험악한 표정이 나오려 하자 데니스가 두 손을 들어 항복 자세를 취했다.
“그 케이크를 보는 시선이 너무 슬퍼서 내가 대신 먹겠다고 거짓말 좀 했어요. 불쾌하게 만들려고 한 말은 아니에요.”
“……제가 어떤 표정이었는데요?”
“음, 누가 케이크를 포크로 쑤셔서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기를 바라는 것 같았어요. 저자가 그랬다! 하면서 주변이 난리가 나서 시선이 분산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고요.”
‘내가 그 정도의 표정을 지었나……?’
거울을 보지 않는 이상 확인할 방도는 없었다.
“자신의 감을 너무 믿는 것 아니신가요? 표현도 과장된 것 같고요.”
“글쎄요. 판단은 루스벨라의 몫이죠.”
사실은 그의 말이 맞았다.
정곡을 찌르는 독심술과 같은 말이었다. 심장을 열어 내면을 들킨 것 같아서 꼭 쥐었던 치맛자락이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아침에 단장시켜 준 하녀들이 봤다면 속상해할 일이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루스벨라를 대신해 데니스가 또 사람 홀릴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루스벨라. 먹기 힘들면 그냥 말해요.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다들 충분히 말하면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
“나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죠. 이제 당신을 위해서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눈치 볼 것 없어요.”
당신은,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기만 하면 되어요.
시종들에게 살벌한 웃음을 날렸던 자라고는 믿을 수 없이 상냥한 말이었다. 그 따뜻함이 루스벨라의 마음을 누그러지게 했다.
“……가져온 정성은 어떻게 하고요.”
“이제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네요?”
“제 말에 대답해 주세요. 데니스. 내가…… 어떻게 하면 그 순박한 사람들을 상처 입히지 않고 돌려 말할 수 있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는 내가 싫다.’
지금 말한 것처럼 정중하게 돌려서 거절의 뜻을 전하면 되는 것을. 아니면 억지로라도 입에 넣고 먹으면 되는 건데.
이곳은 북부가 아닌데도 괜스레 사람이 무서워 어깨가 움츠려졌다.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에 귓바퀴가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에요, 방금 한 말은 없던 것으로…….”
부끄러움에 이미 쏟아진 말을 주우려는 찰나였다.
“지금처럼 저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네?”
“오늘이야 제가 나서서 케이크 도둑이 되었지만, 다음부터는 저를 가리키면서 이 작자가 뺏어 먹겠다고 엄포를 놨다고 해요.”
“억지잖아요.”
“억지면 뭐가 어때서요? 결과적으로 저에게 모든 화살을 돌릴 수 있어요. 당신이 걱정했던 부분들은 모두 상쇄할 수 있죠.”
괜찮은 생각 아닌가요?
“……당신은요?”
“저요? 전 상관없어요. 미움받는 건 익숙한 일이거든요.”
여기에 아니꼽게 보는 시선 더 추가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 없는 인생인걸요.
덤덤하게 덧붙이는 말이 정말 괜찮아 보여서 더 신경이 쓰였다.
“전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은데.”
‘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자기는 상처받아도 되고, 나는 그렇게 두지 않겠다니.’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람일진대.
어딘가 삐뚤어진 방향으로 어긋난 해결 방식이었다. 루스벨라는 데니스의 답변에서 그가 녹록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었음을 되새겼다.
상처받아도 상관없다니,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서. 오랫동안 강물에 뾰족한 면이 둥글어진 돌처럼 상처에 무뎌져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다.
그녀나 데니스 데벤테르나 다를 것 없는 가시투성이 인간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데니스 쪽이 더 광기에 가깝게 일그러진 인간이라는 것.
“내가 내놓은 해결 방안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네.”
“나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다치잖아요. 난 그런 책임 떠넘기기가 싫어요.”
유모가 떠났던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루스벨라는 당시 받았던 벌이 반성문 오십 장이었다. 그러나 그 벌도 완화해서 받은 처벌이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두 동생이 그녀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언니.]
[누이.]
[그거 알아? 언니의 유모는 언니가 받아야 할 벌까지 받아서 쫓겨난 거래.]
[맞아. 원래는 반성문이 아니라, 하루 세끼는 꼬박 굶으며 물도 못 마시고 반성해야 하는 벌이랬어.]
[그걸 유모가 다 뒤집어쓰고 나간 거래.]
[누이가 벌을 받는 걸 바라지 않아서. 그래서 오명을 감수하고 쫓겨나는 걸 선택했대.]
[우리가 알려 줬다는 건 비밀이야?]
그 말을 듣자마자 대문을 박차고 나왔다. 손에 쥐고 있던 포션 제작용 시약이 나뒹굴어 바닥에 웅덩이로 고였다.
이미 몇 년이 지나서 유모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루스벨라는 유모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미친 사람처럼 맨발로 뛰어나갔다.
[유모! 유모!]
왜 그랬어.
나 때문에 그러면 안 됐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나 때문에…….]
추천서가 없으니 다른 귀족들의 집에 일하러 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오래였으니 어머니의 친정에 돌아갈 수도 없었을 테고.
[유모…….]
유모, 지금 잘살고 있는 건 맞는 거야?
[으, 으흑.]
쫓겨난 이후로도 유모는 루스벨라에게 편지를 보냈다. 격주로 한 번씩 오던 편지를 손꼽아 기다리며 버텼던 날이 있었다. 그 편지는 보내지는 주기가 한 달이 되었다가, 일 년이 되었다가, 결국은 끊겼다.
끊긴 편지는 어디로 갔을까.
루스벨라는 그것이 못내 서럽고 괴로워 두 번은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난 싫어.’
나 대신에 누군가가 내가 졌어야 할 책임을 지고 홀로 감내하는 것이 나는 싫어.
그러니 대답해 주세요.
“다음부터 이런 짓은 하지 마세요.”
“그럼 어쩌시려고요?”
“제가 솔직하게 말할게요. 곤란하면 곤란하다고. 내가 우선이어야 할 상황에서는 내가 먼저라는 걸 알고 이야기할게요.”
“좋네요.”
“그러니까 이 케이크, 당신에게는 빼앗기지 않을 거예요.”
떼쓰는 어린아이나 할 법한 말을 했지만 더는 부끄럽지가 않았다.
“최근 들었던 소식 중에서 가장 유쾌한 소식이네요. 제게서 케이크를 빼앗아 간 사람은 당신이 유일할 겁니다.”
“비꼬는 거 아니죠?”
“당연히 칭찬하는 거죠. 잘하고 계십니다.”
그 말에 루스벨라는 유모를 잃고 울음을 터트리던 자신이 위로받고 있다고 느꼈다.
‘착각……일 텐데.’
외로웠고, 자책감에 시달려서 끙끙 앓았던. 그렇지만 주변에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홀로 감내했던 슬픔을 데니스가 나눠 받고 있다는 생각에 목 안쪽이 시큰거렸다.
“앉으세요. 차가 식으면 맛없어요.”
“그러죠. 루스벨라도 제게서 되찾은 케이크 맛있게 먹고요.”
“재촉하지 않아도 먹을 생각이었어요.”
“들켰어요? 빨리 안 먹어 버리면 제가 다시 훔쳐 가려고 했거든요.”
“절대 못 훔쳐요. 가져가려는 순간 케이크를 얼굴에 던져 생크림 범벅이 될 자신이 있다면 그러시고요.”
“알았어요. 안 그럴게요.”
루스벨라는 기운차게 포크를 놀려 케이크 조각을 크게 한 입 덜어 냈다. 그리고 곧장 입속에 넣었다. 폭신하고 말랑한 케이크 시트와 신선한 우유를 쓴 생크림, 그리고 시럽에 절여 만든 딸기의 조화가 완벽했다.
‘달콤해,’
먹는 내내 무서웠던 아픈 기억은 들지 않았다. 그 위를 덮는 것은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얼마나 맛있었는지를 혀끝에서 느낀 감상이었다.
결혼해서 먹은 딸기 생크림 케이크는, 포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