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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0화 (11/166)
  • 10화

    식당으로 내려가자 이미 멀끔하게 준비를 마친 데니스가 루스벨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식사를 마친 것일까 궁금해하며 루스벨라가 자리에 앉았다. 데니스가 앉은 자리 바로 맞은편이었다.

    “좋은 아침이네요. 간밤에 잠은 잘 잤어요?”

    데니스가 루스벨라에게 물었다. 아침부터 흠잡을 데 없는 집주인의 모습은 화사했다. 루스벨라는 무덤덤하게 그에 답했다.

    뒤에 선 하인들은 데니스가 시야에 보이는 순간부터 바짝 기합을 줬다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상전을 대하는 작은 마님의 모습에 눈을 홉떴다.

    ‘자…… 작은 마님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발음하지는 않았지만.

    “덕분에요. 시중들어 주는 하녀들이 참 일을 열심히 하더라고요.”

    “그거 다행이네요. 신경 써서 뽑은 보람이 있어서.”

    “……배려해 줘서 고마워요.”

    시답지 않은 평범한 대화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침 메뉴가 나왔다. 식당으로 내려오기 전에 들었던 메뉴와 동일했다.

    갓 조리되어 나온 아침 식사는 따끈했다. 새우 수프는 고소했고, 해초가 들어간 샐러드는 씹는 맛이 있었고, 에그 베네딕트는 위장을 포만감으로 그득 채워 넣었다.

    ‘맛있다…….’

    특히 에그 베네딕트에는 어떤 마술을 부린 것인지 아무리 먹어도 느끼하지 않았다. 통통한 새우 살이 듬뿍 들어가 자잘하게 새우를 썬 수프보다 훨씬 풍미가 있었다.

    ‘혼자 먹는 식사였다면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먹었을 텐데, 아쉽다.’

    루스벨라가 지긋지긋하게 잔소리를 들어가며 배운 예법대로 식기를 골라가며 음식을 먹었다. 햄스터처럼 오물오물 맛난 식사를 즐기는데 시선이 느껴져 바라보니 데니스가 흐뭇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음식을 입에 물고 물어보는 것은 결례니 볼 안 가득 찬 음식물 덩어리를 목 너머로 꿀꺽 넘기고 물었다. 입 안에 있던 음식물이 많아 다 씹어 넘기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잘 먹어서요. 보기 좋네요.”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어라.

    루스벨라가 데니스에게 자기 몫의 식사나 어서 먹으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의 그릇에는 음식물 부스러기만 남아 있었다. 깨끗하게 싹 비워진 그릇에 루스벨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언제 이걸 다 먹은 거예요?”

    루스벨라는 진심으로 드물게 놀라고 있었다. 그녀의 식사 속도는 남들에 비해 빠른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눈칫밥 먹던 경력이 꽤 되었기 때문에 그놈의 예법을 지켜 가며 빠르게 먹는 기술을 저절로 생존하기 위해 익힌 그녀였다.

    ‘그런 나보다 더 빠른 속도로 먹다니…… 이 사람 정말 알면 알수록 정체를 모르겠네.’

    사람 헷갈리게 하는 걸 보면 이미 자기가 찻잔 속의 독에 취해 환각을 보는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그녀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데니스를 관찰하자 그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차, 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봤구나.

    “죄송해요. 제가 무례했죠.”

    “음? 아니요. 이 정도야. 아주 귀여웠는걸요.”

    “……네?”

    “귀여웠다고요. 부인 덕분에 식사를 끝내고도 심심할 거리가 없어서 좋았어요.”

    루스벨라가 미간을 찡그렸다. 이미 다 자란 성인인 그녀는 귀여운 구석이 없었다. 아버지인 지펠론 백작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말이 있었다.

    ‘여자애가 애교도 없이 그게 뭐냐. 딸이라면 살가운 면이 있어야지. 그래야 나중에 공작께도 사랑받는 아내가 될 게 아니냐.’

    ‘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고쳐 볼게요.’

    루스벨라는 다른 두 동생처럼 아버지에게 애교를 부리는 딸이 못되었다. 그렇지만 루스벨라는 아버지의 말을 따르는 착실한 딸이었기에 겉보기에는 두 동생을 더 아끼는 것 같아도 자신 역시 그와 동등한 무게로 사랑해 주고 있다고 믿었다.

    그게 지금은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는지를 안다. 알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래서 루스벨라는 귀엽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말은 제가 원숭이처럼 우스워 보였다는 소리인가요.”

    “아니요. 그것보다는 토끼에 가까웠죠. 눈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것까지 딱 토끼.”

    ‘그러는 자기가 더 토끼 같은 눈을 하고서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딱 맞았다. 루스벨라는 데니스를 흘겨보았다.

    생글생글 웃으며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자신을 쳐다보는 게 얄밉게 앞발을 공손히 모으고 눈을 가늘게 뜬 토끼 같았다.

    “저 놀리는 거 재밌어요?”

    “놀리는 거 아닌데요. 진심인데.”

    “……놀리는 거 맞잖아요.”

    루스벨라가 아무 사전 협의 없이 결혼한 것에도 좋은 점이 한 가지는 있다고 좋아하며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렸다.

    음식이 입에 넣는 족족 잘만 위장으로 들어갔다. 데니스만큼 빠르지는 않지만, 그녀 앞의 음식이 금방 동이 났다.

    더 먹어도 될까?

    식사를 날랐던 하인들은 이미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식사 다음에 내올 디저트를 준비하느라 그들은 정신이 없었다.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머릿속은 딴생각하느라 시끄러웠지만.

    ‘작은 마님께서 우리가 준비해 주신 식사를 다 드셔 주셨어!’

    ‘세상에, 정성스럽게도 싹 드셨네.’

    ‘피곤하셔서 입맛이 없으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 상냥하신 분이시네.’

    ‘열심히 준비하길 잘했다. 잘했어.’

    주방장과 그 밑의 보조를 도맡는 사용인들은 매와 같이 잽싸게 루스벨라와 데니스의 식사를 훑어보고 아무 일도 없는 척 침착하게 디저트를 준비했다. 그들이 다루는 식기나 조리 도구 등이 미세하게 신나서 떨린다는 건 그들 자신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작은 주인님이자 그들의 도련님이신 데니스가 후작의 조건인 정략결혼을 받아들였을 때는 걱정이 많았다.

    데니스는 약하게 태어났다는 죄로 평생을 뒷전으로 밀려나 살았다가 겨우 후계자 자리를 되찾았다. 어떻게 허약했던 그가 갑자기 남들이 기겁할 만큼의 무용을 부리게 되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들은 도련님이 잘되었다는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결혼이라니! 지금까지 아끼던 사생아 아들 둘을 내친 것이 아쉬웠던 데벤테르 후작은 정말이지 주인이지만 주인답지 못하게 옹졸한 면이 있었다.

    리스냐 성의 실제적인 주인은 가엾게도 미쳐 버린 후작 부인이었던 지라 남편인 후작도 주인으로 모셔야 했지만 싫었다.

    그자는 그들이 탄생부터 축복했던 귀한 도련님이 죽든 말든 관심 없었던 치였다.

    그래서 갑자기 데니스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수도에서 전해지고, 상대가 한번 파혼당했던 영애라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소문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신부가 되시는 아가씨를 직접 두 눈으로 봐야 알겠지만, 그녀에게 얽힌 소문이 워낙 많아서 성 내의 고용인들은 머리를 싸맸었다.

    좋은 분이 오시면 좋겠는데.

    우리 도련님 너무 고생하셨단 말이야. 함께 도란도란까지는 아니어도, 친구처럼 지내실 수 있는 분이면 족하겠다.

    그리고 게이트를 건너 루스벨라가 온 지금은 안심하고 있었다.

    성의 새로운 식구가 되어 준 루스벨라는 표정 변화가 적었지만 무심한 상냥함을 지닌 윗전이었다. 하녀장 지아나가 루스벨라가 자신의 짐을 들어 주려고 했다는 말을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워 들었다.

    누군가는 그녀를 보고 귀족답지 않다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스냐 성 내의 사람들은 그런 루스벨라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마음 구석이 찌르르해지는 면모에 그들은 그녀에게 기꺼이 열었다.

    ‘조금 서투르셔도 저분은 이제 우리의 새 주인님이셔.’

    그리고…… 그들의 도련님께서 저렇게 따스한 눈으로 본 사람이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성안의 사람들은 가진 정보는 적었지만 그들의 주인을 믿는 충심은 거대한 산골짜기를 파도 모자랐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데니스와 루스벨라가 행복하기를 빌었다. 기왕이면 예전과 다르게 날카로워져서 돌아온 데니스에게 루스벨라가 다시 지금처럼 웃음을 찾아 주기를 바랐다. 웃는 모습이 가장 어여쁘신 도련님이 살기를 뿌리며 으르렁거리는 것이 더는 싫었다.

    ‘그러니 혼신을 다해 대접하자!’

    신혼여행으로 리스냐 성에 온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었다. 머무르는 일주일 동안 최선을 다하자고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한 상태였다.

    성 내의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젊은 신혼의 작은 주인님 내외를 어떻게 하면 즐겁게 놀다 가시게 할 수 있을까로 열렬한 논쟁 중이었다.

    그러니 루스벨라가 더 먹고 싶다고 이야기한다면 기꺼이 쟁반 가득 탑을 쌓아서 음식을 다시 내올 용의가 있었다.

    그것을 말하지 않아서 루스벨라나 주방의 요리사나 모른다는 것이 함정이었다.

    ‘더 먹고 싶은데, 더 달라고 해도 되는 걸까.’

    루스벨라는 고뇌하고 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더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첫 끼니에서 너무 많이 먹는 모습이 몸매 유지는 안 하고 돼지처럼 먹는다고 할까 봐 두려웠다.

    그녀 혼자만의 생각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한번 핍박받아 본 사람의 상처는 쉬이 잊히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지금 날 아닌 척 지켜보는 시선이 한둘이 아니지.’

    루스벨라는 주저하다 스푼을 내려놓았다. 짧은 시간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데니스는 그녀가 스푼과 포크를 내려놓는 것이 미적거렸다는 것을 파악했다.

    한편, 주방의 하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스푼이, 스푼이 내려갔다! 포크도 식탁 위로 기어이 착석하고야 말았다!

    ‘더 드셨으면 좋겠는데 더 먹어 주실 수 있으실까……?’

    ‘떽. 작은 마님의 저 가냘프신 몸을 봐. 괜히 우리가 더 드렸다가 거절도 못 하시고 드셨다가 체하시면, 네가 책임질 거야? 어?’

    ‘그건 좀…….’

    ‘그렇지? 그럼 가만히 있어라. 나도 많이 아쉬운 건 마찬가지니까.’

    주방 쪽 사람들은 결국 아쉬움을 뒤로하고 너무 힘줘서 더 만들었던 음식을 드리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관자와 가리비를 이용한 볶음 요리가 그렇게 허무하게 작별을 고했다.

    “대신 우리의 필살기를 보여 주자고.”

    주방장이 비장한 얼굴로 딸기 생크림 케이크에 마지막 피날레로 화려한 아이싱 조각을 올리며 말했다. 그에 주방 사람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플레이팅에 사활을 걸었다.

    이미 하얗고 제철 딸기가 송이송이 듬뿍 들어간 케이크는 별다른 짓을 하지 않아도 먹음직스러웠다.

    거기에 설탕으로 빚은 미니 루스벨라와 데니스를 얹자 깜찍함이 폭발했다. 결혼식 때의 복장을 실제처럼 섬세히 구현한 주방장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수준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가장 예뻐 보이는 작은 꽃과 허브를 얹고 초콜릿 소스 등을 가미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디저트 상을 내놨다.

    ‘마님! 갑니다!’

    저희의 정성을 받아 주세요!

    ‘그리고 우리 작은 주인님 많이 예뻐해 주세요!’

    두 사람이 금실이 좋다 못해 뚝뚝 꿀을 흘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간 케이크를 보고 루스벨라의 눈이 다시 놀란 토끼처럼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이게 나 주려고 만든 것인가?”

    “네, 작은 마님.”

    “이렇게 아름다운 케이크는 내 평생 처음이야. 정말…… 고마워.”

    주방장이 지붕을 뚫고 올라가려는 어깨를 간신히 진정시키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순간 평생이라고 해 봤자 스무 해 남짓을 전부 수도에서 보낸 귀족 영애가 이런 것에 감동하는 게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겼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디저트를 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새 주인이 그러시다니 그 말이 맞을 거라 믿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작은 마님. 맛도 생긴 것만큼이나 무척 좋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어서 드셔 보세요.”

    “아…….”

    루스벨라는 곤란에 빠졌다. 먹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아까 허무하게 추가 요리를 보낸 것과 같은 이유로 받기가 어려웠다.

    ‘어쩌지?’

    그녀가 쉽게 음식을 마음 놓고 먹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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