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9화 (10/166)

9화

루스벨라는 혼몽한 정신으로 그리웠던 친구의 이름을 외쳤다. 잠이 덜 깼기 때문에 몸이 무거워서 작은 목소리가 나왔지만, 상대에게는 똑똑히 들렸던 모양이었다. 루스벨라의 이마 위로 다가오던 손바닥이 멈칫하더니 재빨리 물러섰기 때문이었다.

가는 거야? 너도 나를 또 떠나려고?

“가지 마. 페이.”

다시금 덮쳐오는 수마 속에서 루스벨라가 힘겹게 다가온 사람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겨우 엄지와 검지로 잡아당긴 것에 불과했다. 옷자락의 끝만 붙들었기에 떼어 내려면 파리 쫓듯 쉽게 털어 낼 수 있었다.

“…….”

“가지 마…….”

날 두고 가지 마.

그러나 루스벨라가 페이라 부른 사람은 그녀를 뿌리치고 가질 못했다. 돌아서려던 발걸음의 방향을 그녀가 누워 있는 쪽으로 돌려 다가왔다. 앉아 있으려는지 의자를 끌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테이블과 한 쌍으로 놓여 있던 의자였을 것이다.

곧 의자에 착석해 앉는 소리가 들렸다. 루스벨라의 두 눈은 다시 가물가물해졌다. 잘 보이지 않는 허공을 손으로 더듬어 앉은 이의 손을 감쌌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정신이 말짱한 상태였다면 그것이 남성의 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시원하게 뻗은 뼈대가 루스벨라가 찾던 소녀의 것보다 굵직했으니까.

그렇지만 잠에 취한 그녀는 식별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기에 친구라 오인하고 그 사람의 손을 동아줄처럼 꽉 잡았다.

눈이 감기니 입으로 의식의 흐름이 흘러나왔다. 루스벨라는 잠꼬대로 곁에 앉은 이에게 말을 걸었다.

“페이. 나 결국 결혼했어…….”

“…….”

“다시는 사랑 같은 거 할 줄 몰랐던 내가 결혼이라니…… 웃기지?”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루스벨라가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말이 늘어져 그녀가 무방비 상태로 풀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솔직한 속내가 흘러나와 고요한 적막을 야금야금 깨 먹었다.

“……그렇지 않아.”

낮고 깊은 목소리가 루스벨라의 혼잣말에 답해 주었다. 기억하는 미성보다 한층 무거운 목소리임을 알아채지 못하고 여전히 그녀는 잠꼬대 겸 혼잣말을 계속했다.

“그래…… 넌 언제나 그랬지…… 누구도 내 편을 쉽게 들어주는 법이 없었는데…… 너만은 항상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믿어 주겠다고 했어…….”

지금처럼 내가 내 미래를 비관하고 있어도 너는 아니라고 했잖아, 그렇지?

“응.”

“대답이 너무 짧잖아…… 매정하기는…….”

“너한테는 안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자. 악몽은 꾸지 말고, 좋은 꿈만 꿔.”

“그게…… 내 맘대로 되나……?”

“너도 엉뚱한 면은 그대로구나. 쉬어.”

아까는 닿지 못했던 손이 루스벨라의 이마 위로 사뿐히 올라갔다. 솜털처럼 가볍게 접촉한 손은 그녀의 잔머리를 넘겨주고 바늘구멍처럼 눈을 뜬 그녀의 눈꺼풀을 마저 덮어 주었다.

“잘 자.”

내일은 네게 더 좋은 일들이 생길 거야.

약속할게.

“응…….”

고마워.

루스벨라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개미가 땅을 딛고 걸어가는 소리 만큼 작았지만 ‘페이’라 불린 사람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으로 돌아서기 전 한 번, 방문을 열고서 빛 아래에서 한 번. 색색거리며 잠에 빠진 루스벨라를 보고 ‘페이’가 살며시 미소를 건 채 속삭였다.

“꿈도, 현실도 행복한 일들만 네게 가득하기를.”

내가 옆에서 빌어 줄게.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줄게.

“잘 자. 벨라.”

뚜벅이는 걸음걸이가 점차 멀어져갔다. 루스벨라는 ‘페이’의 주문이 효과라도 있었던 것인지 설핏 입가에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

그날 밤 그녀의 꿈에는 어머니와 페이가 나왔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와 꽃이 흐드러진 들판에서 웃으며 이야기를 실컷 나눴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

루스벨라는 꿈속의 달콤함을 더 맛보고 싶었다. 이대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형형색색의 아리따운 들꽃을 엮어 루스벨라에게 화관을 만들어 주던 페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갑자기 어디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 페이!”

“아가? 루시? 어디로 가는 거니?”

“어머니,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금방 페이를 데리고 올게요. 페이! 거기 서!”

루스벨라가 간절히 애원을 담아 불렀지만 페이는 달리는 두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헥헥거리며 쫓아가자 페이는 어느 성에 도달하자 달리기를 멈췄다.

“페이, 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 우리 이제 돌아가자, 응?”

“벨라.”

“저기에 어머니가 홀로 계셔. 쓸쓸하지 않으시게 어서 가야 해. 그래야…….”

“루스벨라. 네 어머니는 돌아가셨잖아.”

우뚝.

“……알아.”

맞아. 백작 가에서 유일하게 내 숨통을 틔워 주셨던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이건 꿈이고.

‘페이 네가 잔인하게 현실을 일깨워 주는 걸 보니 이건 꿈이 맞구나.’

슬프다.

루스벨라가 꿈을 인식한 순간 몽글몽글하게 입혀져 있던 파스텔 색조의 색깔이 모두 거둬졌다. 동화는 사라지고 현실만이 그녀 앞에 남았다.

달콤했던 환상이 거두어진 루스벨라는 흰 모슬린 원피스가 아니라, 데니스를 따라 리스냐까지 입고 온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페이가 도착한 성을 보았다. 푸른 지붕에 눈처럼 흰 외벽. 데벤테르 가의 우아한 고성이었다.

‘루스벨라.’

눈을 내려 페이를 찾았을 때, 그곳에는 데니스 데벤테르가 있었다. 금발에, 붉은 눈. 그가 페이와 똑같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더는 불행하지 않을 현실에서 깨어날 시간이에요.’

페이, 이 사람은 대체 누굴까?

너는 어디에 있어?

***

“아…….”

루스벨라는 탄식 같은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었다. 음전함을 강조하며 짙은 녹색의 숲처럼 깔려 있던 지펠론 가에 있는 그녀의 방이 아니었다.

더러운 티 하나 없이 순수한 백색의 천장에 루스벨라는 자신이 결혼해서 리스냐의 성에 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문밖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작은 주인님께서 새로 오신 마님께 설렁줄이 어디 있는지 알려 드리는 걸 깜빡했다잖아!”

“그래서, 지금 함부로 작은 마님의 방에 들어가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런 결례를 범했다가 잘리고 싶어?”

“잘리는 건 아니지! 새벽같이 일어나 작은 마님을 보살펴 드리고 싶은 게 뭐가 어때서!”

“생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 걸기네. 나서는 사람이 용사다, 용사.”

루스벨라는 기민하게 귀를 기울여 문 앞의 사람들이 수발을 들어줄 하녀라는 것을 인지했다. 어쩔까 하다가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그들을 불러보기로 했다. 언제까지 대치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들도 계속 기다리면 다리가 저릴 테고.

“거기 누군가요?”

물론 갓 깨어나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설정을 붙여서. 괜히 하녀들의 말을 들었다는 티를 내면 불편해할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아이고! 애들아, 작은 마님 일어나셨다!!!”

“말 안 해도 우리도 알아!”

최대한 소리를 죽여 저들끼리 소곤소곤 급보를 전했지만 기민한 루스벨라는 그것을 전부 들었다. 큼, 크흠흠. 긴장했는지 목을 가다듬고 그들이 문을 열었다.

선두에 선 하녀가 경력이 가장 오래됐겠지.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는 루스벨라에게 하녀 일동이 고개를 숙여 아침 인사를 전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작은 마님. 밤새 편안한 잠은 주무셨습니까?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었고요?”

“없었……어. 덕분에 잠자리가 아주 편했어.”

자면서 꾼 꿈은 마지막이 개운치 않았지만. 그 점만 제외하면 루스벨라는 이 성에 아무런 불만도 느끼지 않았다. 약혼자로서 신부 수업을 핑계로 간 공작 성에 받은 냉대 비슷한 것도 각오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은 따뜻한 남부의 기후에 걸맞게 모든 이들이 그녀에게 친절했다. 루스벨라와 어제 결혼한 데니스부터 지금 이 하녀들까지. 과분한 대접에 형식적인 인사치레에도 진심이 담겨 나왔다.

루스벨라는 무표정했지만, 미묘하게 잔뜩 긴장한 채 리스냐에 입성한 때보다는 느슨해진 감이 있었다.

‘저번보다는 덜 경계하시는구나!’

최선을 다해 루스벨라를 모시라는 데니스의 명을 받고 고르고 골라 뽑혀진 하녀들은 그것에 기뻤다.

허나 새롭게 주인이 되신 분께 괜한 부담을 드리기 싫었던 그들은 프로답게 능숙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은은한 미소만을 걸치고 루스벨라를 대했다.

가장 앞장서 들어왔던 하녀가 말했다.

“아침 세수와 단장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러게.”

경어를 쓸 필요가 없다고 해서 놓은 말은 어색했다.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스벨라는 이를 밀고 나가기로 했다.

“단장을 마치면, 아래 주인님 두 분께서 쓰실 식당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오늘 아침 메뉴는 새우 수프와 해초를 곁들인 샐러드, 얇게 저민 햄이 들어간 에그 베네딕트로 준비하였습니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 있으신지요?”

“괜찮네. 나는 아무거나 잘 먹으니까.”

먹는 것은 공작 성에서나 친정인 백작 가에서나 가리는 것 없이 다 먹어야 했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입 안에 먹지 못하는 음식도 밀어 넣어야 했다.

[완벽해야 사랑받을 수 있단다.]

사랑, 사랑, 사랑.

약혼자였던 공작에게 나쁜 말이 들어가는 게 싫어서 억지로 먹었다. 나중에 토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 먹어 치웠다.

편식을 하면 안 된다는 풍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비는 이상한 곳에서조차 완벽을 요구했다.

‘그래도 나를 따라오는 수군거림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공작이 루스벨라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걸 안 뒤에는 살려고 먹어야 했다. 편식하면 곧 굶어 죽을 것만 같은 노동 환경에 놓였을 때는 미칠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그래서 루스벨라는 지금 이 상황에 무척 만족하고 있었다. 살벌하지 않은 평온한 분위기. 친절하게 본분을 다하는 하녀들. 정성스레 준비한 식사를 내오고 싶어도 굳이 싫어하는 메뉴라면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주방장.

‘아늑하다.’

이대로만 가면 좋겠다. 이 우호적인 분위기를 잃고 싶지 않아.

금 간 찻잔이 지배하는 부엌 속에 들어온 것치고 대접이 너무 후했다. 정성 들여 관리되고 있는 유리 온실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역시 데니스는 깨진 찻잔이 아니라 따끈한 머그잔이었던 걸까. 루스벨라는 아리송했지만 우선 깨끗이 씻고 허기를 채우는 것이 먼저였다.

“그럼 부탁하겠네.”

“맡겨만 주세요!”

루스벨라가 하녀들에게 고마워 자신도 모르게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딱딱히 굳었던 얼굴이 펴지자 하녀들도 덩달아 기뻐 힘껏 배에 힘을 주고 답했다.

‘좋은 분이 들어오신 것 같아!’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하녀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리 생각했다. 드디어 홀로 힘들게 버텨 오신 작은 주인님께 봄날이 찾아왔다면서 속으로 축포를 터트렸다.

‘아침 먹기 전에 사람들을 물리고 나서 이혼 건에 관해 이야기를 해 볼까.’

정작 당사자인 루스벨라는 꼼꼼한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