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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8화 (9/166)
  • 8화

    루스벨라는 그녀를 알아본 사람의 말에 몸을 뻣뻣이 굳혔다. 방금까지도 여행지로 떠난다는 설렘에 몽실몽실한 구름 위를 떠다니고 있었는데. 구름 위에서 떨어져 지상으로 추락했다.

    “뭐? 정말?”

    “그래. 저기 봐. 저기 회색빛 머리카락의 여자가…….”

    다행인 점은 그들이 뭐라 더 말을 꿍얼거려 데니스와 일행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진이 작동했다는 점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루스벨라를 두렵게 했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시야에 드러난 것은 작열하는 태양과 옥색으로 빛나는 푸른 바다였다. 빛을 받아 사금처럼 보이는 해변에는 희디흰 조개껍질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아…….”

    남부는 이렇게 생겼구나. 청명한 날씨에 코에 닿는 소금기 가득한 짠 바닷바람에 루스벨라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알껍데기를 깨고 나온 새처럼 그녀의 감각으로 와닿는 모든 것이 생소했다. 그래서 기분 좋게 뛰는 심장의 쿵쿵거림이 나쁘지 않았다.

    “루스벨라, 바다 구경도 좋지만 저길 봐요.”

    “와…….”

    “어때요? 괜찮죠?”

    데니스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가리킨 곳은 하얀 외벽에 푸른 염료를 칠한 아름다운 고성이었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일 가장 좋은 위치에 지어진 성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함을 주었다.

    “설마 저기가 저희의 그, 신혼여행지인가요?”

    입에 담는 것마저 어색한 단어였다. 신혼여행이라니. 다소 딱딱한 질문에 데니스는 부드럽게 대답해 주었다.

    “네.”

    세상에. 루스벨라는 그의 간결하고도 짧은 대답에서 현기증을 느꼈다. 지극히 당연하다는 그의 태도에 새삼 데벤테르 가가 얼마나 부유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럼 가실까요? 루스벨라.”

    볼우물이 패고 눈꼬리를 주름잡아 곱게 웃는 데니스 그 자체가 리스냐 해안과 같았다. 루스벨라는 미인계가 이런 거구나 하면서 그를 졸졸 따라 후작 가문 소유의 우아한 고성으로 향했다.

    뒤돌아서는 루스벨라의 뒤로 해변가에 그녀의 두 발자국이 남았다. 곧 밀려오는 바닷물에 휩쓸려 사라졌지만.

    ***

    “피곤하다.”

    루스벨라는 데니스와 함께 쓸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잘 먹고 자란 오리에게서 뽑은 털로 채워진 베개와 이불은 두툼하기 그지없었다.

    ‘한여름과 같은 기후인데 이렇게 침구가 두꺼워도 될 일인가……?’

    처음에 이 방이 앞으로 일주일간 작은 주인님 내외분이 사용하실 곳이라며 안내받았을 때 어찌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두툼한 겨울용 이불을 뚫어져라 쳐다보니 데니스가 소리 내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데벤테르 가의 부가 있으니 누리는 호사입니다. 냉각 기능이 설치되어 있는 마도구를 작동시키면, 시원한 바람이 나와요.”

    “그런 신기한 게 있단 말이에요?”

    수도에서도 보지 못했던 귀한 기능성 아티팩트가 데벤테르 소유의 저택에서는 흔한 것이라는 놀라운 설명이 뒤따라왔다. 아직은 5월이라 크게 덥지는 않지만, 이 마도구를 작동시켜 시원해진 공간 속에서 폭신한 이불을 덮으면 그곳이 천국이라면서.

    “곧 써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그 뒤, 먼저 들어가서 여독을 풀라는 데니스의 말에 조금 우물쭈물하던 루스벨라를 이끌고 간 것은 데니스의 유모였다.

    “지아나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지아나가 누구지?

    낯선 풍경,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들 속에서 루스벨라는 고립감을 느꼈다. 세상에서 그녀만 똑 떼어 분리해 옮겨놓은 것 같았다. 마치 인형 놀이를 할 때처럼.

    그러나 걱정은 곧바로 사라졌다. 지아나가 손을 번쩍 들어 루스벨라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앞장서 방을 안내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마님, 이리로 오세요.”

    “알았어요.”

    살았다. 곰돌이 인형처럼 푸근한 몸매를 지닌 유모, 지아나가 앞장서 방을 안내해 줄 때 든든함에 안정감이 차올랐다.

    “작은 마님, 손에 든 것도 들어 드릴까요?”

    지아나의 시선이 루스벨라가 맨 조그마한 손가방에 머물렀다. 그것은 그녀가 치장해 주던 백작 가의 하녀들에게 부득불 우겨 가져온 소중한 물건이었다.

    어머니의 유품 중 하나로, 검은색 바탕에 좁쌀만 한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꽃 모양으로 장식된 단추가 달린 손가방이었다. 의상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갖고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고집을 부려 겨우 사수한 전리품이었다.

    그래서 남에게 맡기기 어려웠다. 품도 별로 들지 않는 작은 것이라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았다.

    “괜찮아요. 이런 손가방쯤이야 가벼워서 티도 안 나는걸요. 오히려 지아나가 든 짐가방이야말로 너무 무거워 보여요. 괜찮아요?”

    지아나의 양손에는 루스벨라를 위한 짐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친정인 지펠론 가에서 싸 준 짐은 게이트에서 막 내렸을 직후에 데니스가 친히 갖다 버렸다. 그녀가 든 짐은 모두 데니스가 발 빠른 하인을 보내 리스냐 내의 부티크를 쓸어온 결과물이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됐는데.’

    ‘무슨 소리입니까. 친정에서 보내줬다는 짐 안은 너무 가벼웠다고요.’

    그 말에 루스벨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펠론 백작 가는 해도 해도 너무 했다. 시집가는 딸은 출가외인이라고 정말 최소한의 물건들만 딸려 보냈으니까.

    루스벨라는 하녀들이 자신에게 보내진 예물을 보고 부러워했던 것이 얼마나 덧없는 일이었는지를 알아차리고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그녀들이 부러워했던 아름답고 큼직한 보석이 달린 장신구들은 결혼식에 쓴 것들만 빼고 죄 아버지의 비자금으로 쓰이게 될 운명이었던 게지.

    그러면서 뭐? 딸을 아끼는 아버지 이미지로 포장을 해?

    분노를 넘어 해탈의 경지에 올랐다. 루스벨라가 반박하지 않자 데니스는 그녀의 허탈감을 물질로 채워 넣기라도 하려는 듯 일대를 돈으로 초토화하고 쇼핑 바구니를 주렁주렁 달고 왔다. 손이 모자라 못 들고 오는 것들은 부티크의 직원들에게 옮겨 달라고 요청하고 오는 길이었단다.

    ‘자, 유모. 이건 당장 루스벨라가 쓸 것들만 추린 짐들이야. 이것 좀 들고 가줘.’

    데니스가 쓸어 온 옷가지와 구두, 각종 장신구, 모자, 레이스로 수놓은 장갑이나 스타킹 등은 전부 최상등품이었다. 루스벨라의 취향을 모르니 종류별로 골고루 사온 짐 무더기는 그녀를 기겁하게 만들기에 차고 넘쳤다. 총 합이 얼마인지 계산하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이렇게 과한 건 받을 수가 없,’

    ‘아, 루스벨라. 거절하지 말고 받아요. 그거, 환불도 안 되도록 영수증 같은 건 찢어 버리고 왔거든요.’

    ‘…….’

    데벤테르 가문의 위력이 이런 거구나.

    다시 생각해도 그것은 너무 과했다. 척 봐도 보통 큰돈이 나간 게 아니었다. 신세 지고 싶지 않았는데, 어째 정확히 그 반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 루스벨라는 불길함에 몸을 떨었다. 그것을 보고 지아나가 웃으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저희 작은 주인님께서 다소 과격하시죠?”

    “음……. 아니에요, 괜찮았어요.”

    데니스가 들으면 심히 억울할 소리였다. 계속해서 저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욕하시지 않았습니까! 하고. 안 보이는 곳에서나 칭찬해 준다며 부루퉁해서 입을 비죽 내밀지도 몰랐다.

    ‘미움받고 싶지 않아.’

    무늬만 부부인 이 결혼을 어서 청산하고 싶었지만, 그전까지는 주변인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루고 살아야 했다. 루스벨라는 지아나의 주인인 데니스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내밀었다가 화를 당할까 두려웠다.

    귀족이라고 해도 팔려온 신부. 친정에서 데려온 하녀 한 명도 없는 기반 없는 여자. 그게 현재 루스벨라의 위치였다.

    받쳐 주는 이가 없는 곳에서 사람이 얼마나 몰릴 수 있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최악만 면해야지.’

    소박한 바람만은 이루고 싶었다.

    “정말 괜찮았어요, 저는.”

    “마님.”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작은 주인님이 계신 한, 두려움에 떠실 일은 이제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아나는 곧고 깨끗한 목소리로 루스벨라를 다독였다.

    “그리고 고용인들에게 존댓말은 필요치 않습니다. 말씀을 낮춰 주세요.”

    “저는…… 아니, 나는.”

    “불편하신 것을 압니다.”

    지아나의 목소리가 둔중하게 루스벨라의 심장을 치고 지나갔다.

    역시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서 왔는지 다들 알고 있는 걸까? 알면서도, 내가 곤란해할까 숨기려고 애를 쓰는데 내가 괜한 거스러미를 일으켜 곤란하게 만든 걸까?

    ‘무서워.’

    이래서 친절은 맛봐서는 안 됐는데. 그림자 속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 사는 괴물이 입을 쩍 벌렸다. 그래, 그거야. 더 불안해하라고. 닥쳐, 닥치라고.

    짧은 시간 내에 지옥의 아가리에 삼켜지려는 그녀를 지아나는 다시 말 한마디로 구출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작은 마님께서 당연히 느끼실 감정이십니다. 세상 어느 새신부가 낯선 환경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겠어요? 그것도, 아무 연고 없는 곳으로 뚝 떨어진 셈인데.”

    “…….”

    “제게 딸이 있어도 걱정되어서 밤잠을 못 이룰 거예요. 그 애가 얼마나 외로울까, 적응하느라 고생이 많아서 밥은 잘 챙겨 먹을까 하고요.”

    “……그런가.”

    “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아차, 작은 주인님께 제가 너무 수다스럽게 입을 놀렸네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을 텐데.”

    “아니야. 내가 무슨.”

    “그렇게 말씀하셔도 피곤함이 눈에 보이세요.”

    아차. 루스벨라는 눈에 띄는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밤을 설친 어두운 눈 아래가 화장으로 가렸다 한들, 흰 눈자위 위로 실핏줄이 빨갛게 서 있었다. 결혼식 이후 시간이 꽤 흐른 이후라 더 그랬다. 끼니를 챙기지 못한 가녀린 몸이 후들거렸다.

    “나는 그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그렇지?

    “상냥하시군요.”

    “내가……?”

    “그럼요. 일일이 고용인의 마음까지 신경 쓰는 윗분들은 흔치 않으시거든요.”

    ‘상냥이라…….’

    괜한 오지랖이 아니고, 상냥.

    칭찬에 목이 말랐는지 버석해진 입가가 촉촉해지는 착각이 일었다. 허기로 쓰리던 위장에 청량한 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몸에 활기가 돌았다.

    나야말로 좋은 말을 해 줘서 고맙다고 전하고 싶은데. 입을 벌리려 하면 목이 따가워서 할 수가 없었다.

    “어서 이부자리 봐 드리고 짐 정리까지 해놓은 다음에 자리를 피해 드리겠습니다.”

    “……응.”

    지아나는 뚝딱뚝딱 일처리를 순식간에 끝내 버리고 서둘러 자리를 비워줬다. 그것이 그녀의 배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루스벨라는 나른한 고양이처럼 지긋지긋하게 들어왔던 품위와 체면을 벗어던지고 구름같이 폭신한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편하게.

    너른 창문으로는 누워 있어도 바깥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였다. 운치 좋은 풍광을 바라보며 루스벨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산뜻한 바람이 그녀의 이마를 간질였다.

    북부의 공작 성에 있을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상쾌함이었다.

    ‘그곳은 너무나 추웠는데.’

    북부는 살을 넘어 뼈를 찢는 혹한의 눈보라가 몰아치는 곳이었다. 그곳은 일 년 내내 한겨울처럼 추워서 인간에게는 몹시 불리한 기후였다.

    그로 인해 북부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생존을 최우선시해서 움직이는 효율을 추구하게 되었다. 약한 사람은 억지로라도 강해지도록 멱살을 일으켜 세우는 거친 곳. 그곳에서 루스벨라는 끊임없이 강함을 인정받아야 할 것을 강요당했다.

    쓸모가 없으면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에 시달리면서.

    [이런 싸구려 포션이나 만들면서 공작님의 곁에 서겠다고?]

    ‘잊히지가 않는 기억이네…….’

    아슬란 윈체스터에 대한 미련은 떨구고 왔어도 이미 받았던 상처는 아물지 않아 루스벨라를 괴롭혔다.

    잊자, 잊을 수 있어.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니잖아.

    지친 몸을 쉬고 있으니 잠이 밀려왔다. 루스벨라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모처럼의 달콤한 수면에 빠졌다.

    ***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지고 서느런 밤바람이 커튼을 살며시 밀어내고 들어왔다. 어둠 속에 잠긴 방 안으로 작은 촛불에 의지한 누군가가 들어왔다.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소리에 잠귀가 밝은 루스벨라는 가늘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보이는 것은 금색과 붉은색.

    “페이……?”

    너야?

    말보다 손이 먼저 눈앞의 상대에게 뻗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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