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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7화 (8/166)
  • 7화

    “어때요? 제 말이 맞았죠?”

    “……네.”

    정말 그렇네요.

    너무 낯선 자신의 모습에 루스벨라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 내가 이렇게 웃을 수도 있었구나, 싶어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까 두려워 황급히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려 했지만 아무것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평생을 울지 않으려 연습한 결과물이리라.

    ‘아쉽다.’

    내가 무슨 생각을.

    루스벨라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한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울음을 터트리는 것은 나약한 모습을 노출하는 것이다. 울어서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 어린 그녀가 밀려오는 눈물에 끅끅거리면 항상 이런 말이 뒤따라왔다.

    [뭘 잘했다고 우는 게냐! 가서 반성이나 하고 있어!]

    [흑, 끄윽.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잘못한 줄 알면 울음이나 어서 그쳐라. 쯧, 백작 가의 장녀나 되어서 품위 떨어지게.]

    아버지인 지펠론 백작은 루스벨라에게 유독 엄했다. 다 큰 그녀가 추측하기로, 백작은 공작 가의 드높은 눈높이에 차기 위해 딸을 ‘관리’한 셈이었다.

    그의 체면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그리고 무슨 문제라도 생겨 백작을 귀찮게 하는 일이 없게 하도록 그 나름의 노력을 한 것이라고.

    그리 키운 아버지 때문에 루스벨라는 소리를 내지 않고도 우는 방법을 터득했다. 서럽거나 외로운 날이 오면 그녀는 침대 한구석에 오도카니 쪼그려 앉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밝은 낮에는 우는 일이 없었다.

    어두컴컴한 밤하늘 사이로 밝은 달님이 모습을 드러내면 창 너머로 옅은 빛이 루스벨라를 비췄다. 그러면 그 빛을 쬐면서 그녀는 울어도 울지 않는 것처럼 눈물을 흘렸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물줄기가 이불 위로 축축한 얼룩을 수어 개 만들었다가 사라졌다. 얼룩이 마르는 동안의 시간만큼은 홀로 슬퍼했다. 열두 시가 되면 신데렐라가 다시 구박 데기 엘라로 돌아가는 것처럼 허용된 시간이 지나면 루스벨라는 뚝 울음을 그쳤다.

    최근 들어서는 아예 그 눈물마저도 멈추게 되었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안 나네.’

    내가 어딘가 고장이 난 걸까. 묻고 싶어도 물을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전부 우는 것은 남에게 약점을 보여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가르쳤으므로.

    그래서, 루스벨라는 우는 것도 포기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일일이 잘못을 따지기도 하기 싫었다.

    ‘나는…….’

    탈진한 거구나.

    내가 어떻게 우는 건지도 잊어버리게 된 만큼 나, 많이 힘들었구나.

    “이제 괜찮아요?”

    아. 혼자만의 생각에 깊숙이 빠져 있던 그녀의 어깨를 데니스가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민들레 홀씨가 닿는 만큼 가벼운 접촉이었음에도 루스벨라는 뜨겁게 달궈진 부지깽이로 건드려진 것처럼 크게 놀랐다.

    “미안해요.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괜찮아요.”

    데니스가 멋쩍어진 태도로 뻗었던 손을 거둬 뒷머리를 긁적였다. 루스벨라는 잠시 느슨해졌던 긴장의 끈을 쥐고서 그를 살폈다.

    난생처음 받는 다정한 사람의 온기에 경계심이 풀어졌지만, 루스벨라가 가지고 있는 벽은 크고 두꺼웠다. 이미 한 번 사랑하는 사람을 벽 안의 울타리 안에 들였다가 아픈 결말로 끝난 적이 있었다. 두 번은 무리였다.

    그녀는 타인을 쉽게 사랑할 수 없었다. 그게 연인이든, 친구든, 애완동물이건 간에.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미약한 희망마저 재 속의 불씨로 숨만 쉬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언제 꺼질지 모르는 조그만 희망이었다.

    ‘그래도, 고마움은 꼭 이야기하자.’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어린 날의 루스벨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종이 위로 꾹꾹 눌러 적었다. 그리고 그 종이가 없어도 바로 기억날 수 있게 달달 외웠다.

    할 수 있어.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말로 표하는 것이 너무 간만이라 그녀는 긴장감에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허파 두 쪽이 공기로 한계까지 차올랐다. 자, 하나, 둘, 셋.

    “고마워요. 정략결혼에 처음 보는 결혼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제게 친절하게 대해 줘서요.”

    “우린 이제 부부잖아요. 당연한 거예요.”

    데니스가 입가를 둥글게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에 어색하게나마 루스벨라도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렇다면 데니스는 내가 그와 엮이지 않았다면, 내가 겪어 봤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대했을까?

    혼자서 만들어 낸 질문에 루스벨라는 상처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 생각을 하고서 마음 아픈지 의아해하며 심장 근처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런 그녀의 불안함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데니스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덧붙였다.

    “물론 당신을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결혼으로 묶인 사이가 아니었어도 지금처럼 대했을 거예요. 루스벨라, 당신은 그저 당신이란 사람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니까.”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당신이 당신이기에 마땅히 해야 하는 일들이에요.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이상함이 익숙해질 때까지 제가 노력해야겠네요.”

    “제가 뭐라고 해도 안 들으실 거죠?”

    “아, 들켰나요?”

    “숨기실 생각이 없잖아요, 당신.”

    “일부러 그런 거예요. 눈치채 주시길 바랐거든요.”

    “……정말 이상한 사람.”

    “그거 칭찬이죠? 고마워요.”

    “칭찬 아니에요.”

    서로 치고받는 대화는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부부가 아니라 옛적부터 알고 지낸 절친한 친구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사람. 정말 저 금빛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데니스.”

    “네. 루스벨라.”

    “신혼여행지에 도착하면 그때는 알려 줄 건가요? 굳이 나를 선택한 이유 말이에요.”

    “물론이죠. 다만…….”

    “다만?”

    “단번에 알려 드리면 재미가 없으니 당신이 맞춰 주시면 좋겠네요.”

    ……이것 봐라.

    이 남자, 사람을 갖고 노는 괴상한 취미가 있는 게 분명해.

    “싫어요?”

    “수수께끼는 제 관심 분야가 아니라서요.”

    “그러지 말고, 이번에 제게 어울려 주시면 안 될까요?”

    네? 네? 하면서 데니스가 모로 고개를 기울여 붉은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꼭 털빛이 노란 토끼 하나가 주인을 보고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행색이었다.

    그걸 본 루스벨라는……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다 큰 남성이 애교를 부리는 광경을 처음 봤다. 루스벨라가 자라면서 접한 친밀한 사이의 남자라고는 아버지와 전 약혼자였던 윈체스터 공작이 전부였다.

    그 두 사람은 루스벨라에게 고압적으로 구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애교는 무슨, 다정한 말씨로 대해 준 적이 몇 번이나 있을는지. 그에 비하면 갓 결혼한 그녀의 남편은 참 살가웠다. 길거리의 아무 행인이나 붙잡고 1시간이면 친해질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찻잔 안의 독을 들이마신 걸까.’

    사람 홀린다는 소문은 들어 보지 못했는데.

    루스벨라가 악명으로 자자한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금색의 풍성한 속눈썹이 눈꺼풀이 감았다 떠질 때마다 나풀거렸다.

    덜컹거림이 거의 없는 마차 안으로 들어온 햇살에 데니스의 천진한 얼굴이 반짝이며 빛났다. 워낙 선명한 금발과 적안이라 정말 보석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그는 눈부셨다.

    그와 이 공간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이 모든 게 꿈이고, 나는 아직도 지펠론 백작 가의 내 방에 있지 않을까?

    이 사람이 나와 결혼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기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대신해서 채운 것은 불안이었다. 습관처럼 양 손가락을 얽다가 손톱에 손이 갔다. 검지의 손톱을 교양 없이 뜯으려는 찰나에 마차가 멈췄다.

    “주인님, 게이트 앞에 도착했습니다!”

    “수고했다.”

    루스벨라를 대할 때와는 딴판으로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한 데니스는 후작 가의 하인이 문을 여는 순간 먼저 내렸다. 내리자마자 그는 루스벨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하기 위함이었다.

    “나와 함께 가 주실래요, 루스벨라?”

    “……네.”

    루스벨라는 혼란스러웠다. 데니스 데벤테르는 어떠한 이유를 들어 그녀를 신부로 골랐다. 루스벨라 지펠론은 데벤테르 후작 가에 아버지의 욕심을 채울 만큼의 값을 받고 팔렸다. 이게 그녀의 불행이었고, 받아들여야 할 사정이었다.

    주제 파악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루스벨라는 뼈에 새기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나를 헷갈리게 만들어.’

    마치 그녀가 사랑받아서 결혼한 것처럼 착각하게 되잖은가. 루스벨라는 자신의 위치를 상기하려 애썼다.

    그녀의 목표는 오로지 자유였다. 자신이 사고로 죽었다고 처리해도 좋았다. 마음에도 없던 결혼은 데니스도 좋아하지 않을 게 뻔했다.

    지금이야 자상하고 상냥하게 대해 주지만, 그도 결국은 타인에 불과했다. 루스벨라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그가 바라는 것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래도…….

    “데니스.”

    “……루스벨라?”

    “데니스라고, 이름으로 불러도 되죠?”

    “물론이죠. 루스벨라.”

    계속 당신으로 지칭하기보다는 이름으로 불러 주는 게 좋겠지. 그게 예의고, 내가 그와 협상해 떠나기 전까지는 계속 얼굴을 마주 보고 살아야 하니까.

    그것만큼은 용인해도 되겠지.

    데니스의 손을 잡아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린 뒤, 둘은 짐을 챙긴 하인들과 함께 게이트로 향했다. 손도 잡지 않았고, 둘 사이의 거리도 미묘하게 벌어져 있었던 터라 부부보다는 데면데면한 남매 사이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둘 모두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후작 가에 새로 들어오시는 작은 마님이 엄청난 분이신가 봐.’

    ‘그러게. 저 무서운 작은 주인님이 물에 풀어놓은 설탕처럼 저리 달달하게 구시는 건 처음 봐.’

    ‘잘해 드리자.’

    ‘작은 주인님 심기 건드리면 큰일 날라.’

    그것을 날쌔게 포착한 후작 가에서 따라온 사용인들의 눈에는 무조건 잘 보이지 않으면 죽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루스벨라는 절대 모르겠지만. 차차 알아가게 될 일이었으니 괜찮았다.

    게이트 앞으로 가자 출입을 관리하는 황실 공무원이 다가와 통행증을 물었다. 후작 가의 하인이 그에게 통행증을 내밀었다. 검집이 뽑혀진 칼날 위로 쇠사슬이 X자로 교차해 지나가는 문양의 금패였다. 데벤테르 후작 가의 문양이라는 것을 확인한 관리가 길을 안내했다.

    “리스냐 해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복도의 끝까지 걸어간 뒤 오른쪽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알았네. 모두 안으로 걸어가지.”

    데니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관리가 말한 방 안으로 들어가자 푸르스름한 마나를 뿜어내는 마법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른 명 정도 되는 인원이 그 속에 자리를 잡고 마법사가 진을 작동시키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서 마법사가 튀어나왔다. 그가 마나를 불어넣으며 말했다.

    “그럼, 가시는 길이 즐겁기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이 번쩍이는 푸른 마나로 뒤덮였다. 게이트를 타고 멀리 나갈 일이 없었던 루스벨라는 이 모든 것이 신기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관찰했다. 하나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공작 가에서 쫓겨난 지펠론 가의 아가씨 아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눈이 딱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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