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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6화 (7/166)
  • 6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고 그만큼 화려했던 결혼식이 끝났다. 치우는 것은 고용인들의 몫이었기에 갓 결혼한 신혼부부인 두 사람은 아기자기하게 꽃과 보석으로 장식된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부친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던가요?”

    “……제가 못 듣고 왔나 보네요.”

    못 들은 것이 아니라 들은 적이 없었다. 루스벨라가 고지받은 사항은 오늘 이 결혼식에 관한 것뿐이었다. 그래서 루스벨라는 식을 마치면 당연히 후작 가의 저택으로 이동할 줄 알았다.

    헌데 행선지가 아무리 봐도 수도를 벗어나고 있으니 이상함을 직감하고 물어본 것이었다.

    ‘날 바보로 만드셨군.’

    아무리 팔려 가는 신세라고 해도 그렇지, 세상천지에 신혼여행지도 모르는 새신부가 있었을까. 오늘 루스벨라는 기이한 신기록을 세워 가는 창피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지펠론 백작이 어떤 생각으로 결혼하는 딸에게 일언반구도 없었는지는 대충 감이 왔다.

    ‘아마 부인되는 사람은 남편이 뭘 하든 간에 따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겠지.’

    내 어머니가 그렇게 평생을 아버지 뒤에서 수발만 들다 허망하게 병으로 가신 것처럼.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궤적만을 따라 살아간다. 이미 적응된 생활 방식을 변화시키려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에 순응하기보다 자신이 걸어온 궤적을 다시 그려가는 일을 선택했다. 루스벨라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비록 가세가 기운 백작 가에서 태어났지만 오랫동안 자손이 없던 때에 선대 백작 부인이 낳은 귀한 아들이었다.

    그 이전에 먼저 세상에 발을 디딘 누이들이 있었으나 모두 정부의 자식들이었다. 정부들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백작 가에서 쫓겨나 각자의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대를 이을 아들만이 중요했던 선대 백작 부부는 늦둥이로 태어난 귀한 아들을 애지중지하며 곱게 길렀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지펠론 백작은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성장했다. 여인을 존중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으로.

    ‘고모님도 계셨지만 언제나 뒤로 밀려나 찬밥 신세가 되셔서 혼인 적령기에 들자마자 멀리 시집을 가셨다고 들었지.’

    루스벨라가 마차의 유리창을 바라보자 회색빛의 머리카락과 어둡게 가라앉은 녹안이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열린 장례식에 온 고모는 자신과 똑같은 머리색에 좀 더 연한 연둣빛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조카인 루스벨라를 보자마자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너도 나와 같은 운명을 걷겠구나.]

    불쌍한 것. 그렇게 말하는 고모의 얼굴에는 피로가 쌓여 있었다.

    세파에 찌들고 평생을 뒷전으로 밀려나 살아온 사람 특유의 한이 서린 피곤함에 루스벨라는 겁에 질려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어린 아이의 눈에는 피로에 절어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마녀처럼 비쳤기 때문이었다.

    루스벨라가 자신 때문에 겁에 질린 것을 본 그녀의 고모는 씁쓸히 웃으며 충고했었다.

    [아가, 이제 이 집에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눈을 부릅뜨고, 어린아이로서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하루빨리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고모?]

    [아직은 이해가 잘 안 될 테지. 이것도 쓸데없는 오지랖이지만……. 이제는 흙으로 돌아간 네 어미가 가엾어 말해 주는 거란다.]

    네 아버지를 믿지 말렴. 오로지 너만을 믿고 너를 위해서 살길을 도모하렴.

    [왜요……?]

    [왜인지는 네가 자라면서 알게 될 거란다. 가엾은 것…….]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모는 영영 지펠론 가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루스벨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가문 내에서 소통하던 사람이 없어져서 더는 친정과의 교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을.

    고모가 마음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던 상대가 그녀의 소중했던 어머니라는 사실을.

    루스벨라는 알고 있다. 왜 그녀의 고모가 그런 슬픈 어조와 얼굴을 하고 어린 그녀를 동정했는지 이제는 안다.

    그리고 후회한다.

    내가 조금만 더 영악하고 사리 파악에 능한 아이였다면 좋았을 걸 하고.

    그랬다면 적어도 바보처럼 아버지의 말이 다 맞는 말이고 자신은 모자란 딸이니 아버지의 기대를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멍청이 같은 생각 따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리석었지…….’

    정말로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지금이라도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지나간 과거를 통해 뼈저리게 아는 것은 덤이었다.

    “루스벨라?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그래서 루스벨라는 눈앞의 남자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미리 신행 정보를 알려 주지 않은 것은 그녀의 친정이었다. 루스벨라의 잘못은 없었다.

    오히려 루스벨라가 이런 거지 같은 집안에 더는 못 있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미친년처럼 난동을 피우며 시위를 하지 않은 것만 해도 지펠론 가는 감사해야 옳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부끄러울 이유가 무어람.’

    이미 친정인 지펠론 백작 가와는 연을 끊겠다는 마음으로 나왔는데.

    항시 가문을 위해서라도 겸손하고 단정한 모습을 보이라는 교육이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었다.

    “제 친정이 제게 이리 박하답니다. 제게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를 않았군요.”

    싱긋 웃으며 내뱉는 말에는 얼음송곳이 알알이 박혀 있었다.

    ‘시원하다.’

    루스벨라는 이 말을 꺼내면서 전혀 창피하지 않았다. 왜냐, 사실이니까.

    데니스 데벤테르도 알고 있을 게 뻔하니, 도움 안 되는 가식은 내려놓고 당당히 진실을 토해 내기로 결정한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자, 당신은 이제 내게 뭐라고 답할 거지?

    얼음송곳이 입혀진 말을 던졌다. 돌아오는 말은 어떤 의도를 담고 올까.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사람의 말에는 결국 그 사람이 살아온 궤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지.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대답해 줘. 법적으로 나의 남편이 되는 사내여.

    “저는…….”

    그래.

    “당신의 친정에 화가 나는군요.”

    “예?”

    “지펠론 백작 가는 부인께 어떻게 대하길래 신혼여행을 갈 곳도 알려 주지 않은 거죠?”

    “어…….”

    “이야기를 더 들어 보죠. 부인께 더 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까? 예를 들면, 내가 그대를 위한 예물을 얼마나 보냈는지, 또 결혼식장을 꾸밀 때 어떤 점을 신경 써서 만들었는지 알려 주긴 했습니까?”

    “그게…… 아니요.”

    “하. 그치들은 그동안 뭘 한 거람.”

    어라. 이게 뭐지.

    잔뜩 가시를 세워 공격성을 드러냈던 얼음송곳은 뜨끈한 겨울의 모닥불의 포근함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따뜻한 열에 녹아 버린 얼음 사이로 연약한 마음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말랑말랑하고, 쉽게 상처를 받는 루스벨라의 심장이었다. 반쯤 물이 되어 버린 차가움이 소리쳤다.

    믿지 마. 괜한 기대를 걸지 마.

    저번처럼 또 너만 상처를 받고 아파하게 될지도 몰라.

    그렇지만 따끈한 모닥불의 열기는 어느새 거대한 난로가 되어 그녀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제가 얼마나 이날을 고대하며 준비했는데…… 저 때문에도, 가문 때문에도 걱정이 많으셨겠군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아니긴요. 당신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도리어 속상하게 만들다니.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왜 내게 사과를 하는 거지?

    당신이 직접적으로 잘못한 것은 없잖아. 따지면 나의 친정인 지펠론 가가 무식하게 조건에 환장해서 결혼을 밀어붙인 탓이라고.

    처음 겪는 따뜻한 말과 이해할 수 없는 사과에 루스벨라는 목석처럼 굳어서 데니스의 말을 경청하기만 했다.

    데니스는 여전히 루스벨라가 마음을 풀지 못한 줄 알고 풀죽은 강아지처럼 눈을 다소곳하게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당신을 5월의 가장 행복한 신부로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환히 웃게만 해 주고 싶었는데. 제가 소홀했네요.”

    그래서 미안해요. 더 신경 써 주지 못했던 게.

    “왜…….”

    왜 내게 그렇게까지 다정하게 구는 거예요?

    당신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더 많았다는 걸 알아요.

    적어도 두 손으로 꼽을 수 있는 것 이상이었겠죠. 널리 악명이 퍼져 있는 상태였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나보다 아름답거나, 가문이 융성하거나, 보다 사랑받고 자란 영애와 결혼할 수 있었음을 나는 알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친절해요?’

    내 아버지처럼 내 의사 따위는 짓누르고 살 수도 있는데. 그게 아주 편한 방법일 텐데. 왜, 왜, 왜.

    “나를…….”

    나를 왜 기대하게 만드는 거예요.

    울컥함을 짓씹고 나온 말은 형편없었다. 겨우, 이런 것.

    “나를 이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이 내게 이렇게 친절히 대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서요.

    “루스벨라, 그 말이 아주 유명한 작업 멘트라는 거, 알아요? 남자든 여자든, 자기가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가서 던지는 말이거든요.”

    “그런 뜻으로 물어본 거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요. 장난치지 말고 대답해 줘요.”

    “어땠을 것 같아요?”

    “제가 장난치지 말아 달라고 했잖아요.”

    “화났어요?”

    “안 났어요.”

    “화났네. 내가 심했다면 미안해요.”

    “……미안해할 것까지는 없어요. 애초에 당신, 잘못한 것 없다니까요.”

    “그래도 미안한걸요.”

    “그만해요 이제.”

    “알았어요. 대신.”

    뭐지? 또 뭘 말하려고 하는 거야?

    루스벨라의 손이 편하게 갈아입은 여행용 원피스 자락을 붙잡았다. 이제는 얼마나 모진 말이 나올지가 아니라, 이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올 유쾌한 궤적이 도저히 익숙지가 않아 두려웠다.

    겨울만이 존재하던 세상에서 얼어붙어 있던 연약한 심장이 그를 만나 처음으로 따스함을 맛본 대가로 화들짝 놀라 두근거리고 있었다. 심장 박동이 줄어들지는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놀랐다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루스벨라도 억지로 채소 씹어 먹은 어린아이처럼 슬퍼하지 말아요.”

    “제가 언제 그랬다고…….”

    나는 계속 웃고 있었는데.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던진 질문을 할 때도 웃으려고 했단 말이야.

    ‘아무도 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이상해하지 않았는데.’

    내가 무시와 홀대와 휘둘림을 당해가며 만든 나의 가면은 견고했다고. 슬퍼 보인다고 말해 준 사람은, 지금껏 없었단 말이야.

    “결혼식장에 가면을 쓰고 등장한 나보다, 당신이 더 두껍게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의 착각에 불과할 수도 있죠.”

    “아니라는 거 알아요.”

    “우린 오늘 처음 만나 결혼하는 사이인 데도요?”

    타당한 질문이었다. 루스벨라와 데니스는 만난 적이 없는 생판 남이었다. 한 십 년은 알고 지낸 커플처럼 데니스는 지나치게 다 안다는 투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지적하자 그는 그저 웃었다.

    “그렇지만 루스벨라, 당신 지금 얼마나 편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줄 알아요?”

    “내가……요?”

    “네. 거울을 갖다 줄게요.”

    “어디 있는지 알려 주면 내가 가져다 쓸 수 있어요.”

    “내가 전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소문난 부호에 무시무시한 무력을 행사하며 후계자 자리를 꿰찬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햇살 부스러기 같은 웃음을 뿌리며 그는 짐 속에 들어 있던 손거울을 찾아 루스벨라에게 내밀어 주었다.

    “어때요?”

    “아…….”

    내가 이런 식으로 웃은 적이 있던가?

    거울 속 여자는 아주 낯선 방식으로 긴장을 풀고 편안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게 너무나 자신 같지 않아서 루스벨라는 망연히 거울을 한참 쳐다봤다. 데니스는 그녀가 거울을 보는 동안 턱을 괴고 있었다.

    그녀가 더는 거울을 보지 않고,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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