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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5화 (6/166)
  • 5화

    무사히 결혼식을 치른 두 사람은 피로연장으로 이동했다. 데니스는 아이보리색 연미복을 입고, 루스벨라는 친정에서 미리 준비한 사랑스러운 연분홍빛의 드레스를 입었다.

    ‘……편하네?’

    배는 여전히 고팠고, 결혼식 전날을 뜬눈으로 지새운 상태였지만 입은 옷이 편안하다는 장점만으로 곤두선 신경이 조금 가라앉았다.

    완벽한 자태로 꽉 조이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버티는 것은 너무나 피곤한 일이었다. 그걸 고려해 준 것인지 허리의 품이 넉넉했다.

    루스벨라는 힐끔 잘 차려입고 나온 데니스를 보았다. 그는 정숙하게 보이는 연미복을 입고 나왔다. 흠잡을 데가 없이 고운 모습이었다.

    루스벨라의 옷차림과 무척 대조되어 보였다.

    “준비한 드레스는 마음에 드십니까?”

    ‘준비한 드레스?’

    루스벨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펠론 백작 가가 기어이 결혼식 드레스마저 후작 가에 떠맡긴 모양이었다.

    “아…… 네. 편해서 좋네요. 감사합니다.”

    “다행이네요.”

    데니스가 활짝 미소 지었다. 루스벨라는 잠시 이 남자가 직접 드레스를 골랐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아니……겠지?’

    뭐 하러 정략결혼 상대에게 그렇게까지 하겠어.

    그녀는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가장 아름다운 5월의 신부. 사랑받는 새신부라서 부러워 보인다.

    ‘다, 헛짓거리에 보여 주기용 쇼일 뿐인걸.’

    데벤테르 후작 가의 위신이 낮아지지 않도록 치러지는 결혼식이니까. 사랑이라는 분홍빛 단어가 끼어들기엔 자리가 좋지 못했다.

    “내려갈까요?”

    “네.”

    기묘한 결혼식에 이어 기묘한 피로연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잔디 위에서 영상구로 보이는 하객들이 그들의 집 안에서 만찬을 들고 있었다.

    ‘음식이 같아.’

    루스벨라와 데니스가 먹을 음식도 같은 종류였다. 일일이 귀족 가문에 음식을 가져다주는 수고로움을 들인 것이 대단했다.

    “모두들 저와 제 아내의 결혼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데니스가 그에게만 목소리가 들릴 사람들에게 말했다. 하객들은 음식을 먹다 말고 그에게 집중했다.

    “모쪼록 저희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셨으면 하는 바입니다.”

    여기까지는 통상적인 결혼식에서 나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제가 몹시 은애하는 분과 결혼할 수 있어 아주 영광스럽고, 행복한 날입니다.”

    ‘뭐?’

    “그게 무슨…….”

    쉿.

    루스벨라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무어라 하려는 때, 데니스가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가 금방 떼었다.

    하객들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하는 새신랑의 장난인 줄 알고 어리둥절해 있다가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런 건가?

    ‘이 결혼이 정략적인 게 아니라고 말하려고 취한 행동인 건가…….’

    순간 자신에게 행한 것인 줄 알았다. 괜한 착각이었나 보다.

    그렇지만 그 모습이 쉬이 잊히지 않았다.

    하객들이 하하 호호 정성스레 준비된 맛도 좋고 때깔도 좋은 음식과 술을 즐길 때, 루스벨라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그의 모습을 되새겼다.

    “맛있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음식은 맛있었다. 굶주린 위장에 음식이 채워지니 살 것 같았다.

    몸이 편해지니 불쑥 결혼식 전날까지 숱하게 들었던 소리들이 꾸물꾸물 그녀를 건드렸다.

    거봐. 좋은 집에 시집가서 호사를 누릴 거라고 했잖아.

    얼굴도 잘생겼겠다. 준비된 드레스를 보니 배려심도 있고.

    그렇게나 불안해하고 불만을 가지더니. 어떻게 생각해? 이제는?

    “……아니야.”

    윈체스터 공작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래서 그에게 반했고, 후에 실망했다.

    [누이는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다 언니 좋자고 하는 일인데. 난 내가 언니였으면 좋겠어.]

    그래. 너희는 그렇게 말했지. 집에서 하도 많이 들은 이야기인지라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떠올린 것 같았다.

    ‘아…… 힘드네.’

    머리가 지끈거리며 울렸다. 들었을 때도, 지금도 기억하기 싫은 말이 떠올라 골치가 아팠다.

    그녀는 잠시 데니스를 보았다. 모두의 시선은 화려한 외모를 가진 청년에게 쏠려 있었다. 루스벨라에게 주목하는 이들은 없었다.

    “밥이나 먹자.”

    편안한 데서 먹어도 되겠지.

    그녀는 자리를 옮겨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다.

    ***

    루스벨라는 입에 음식을 꾸역꾸역 들이밀었다. 정성껏 차려진 음식들은 그녀에게 포만감을 주었다. 그게 좋았다.

    먹는 순간에는 그 행위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피로연장은 5월의 화창함을 만끽할 수 있는 야외의 정원에서 진행했다. 색색의 꽃이 잘 손질된 잔디 옆으로 장식되듯 피어 있었고, 햇살은 찬란하여 그 자체로 그림이었다.

    영상구로 보이는 하객들은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들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루스벨라는 양팔을 교차해서 자기 자신을 끌어안았다.

    음식을 섭취해도 마음의 허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어머니…… 엄마. 보고 싶어요.’

    마음과 몸이 모두 약해지는 날이면 루스벨라는 일찍 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팠다. 신을 찾지 않는 대신 돌아가신 뒤 마땅히 천국에 있겠거니 하는 어머니를 찾으며 소원을 비는 행위는 그녀의 오래된 습관 중 하나였다.

    언제나처럼 어머니께 비는 소원은 같았다.

    엄마, 나 힘들어요.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 건지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기적처럼 나타나셔서 절 인도해 주시면 안 돼요?

    ‘잘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는데.’

    정략결혼이 밥 먹듯이 이루어지는 귀족 신분 주제에 가당찮은 소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귀족들 사이에서도 연애결혼을 하는 추세가 늘었다. 또한 아무리 정략결혼을 하더라도 원만한 결혼 생활을 위해 일정 기간 동안 정을 쌓아 갈 만남을 가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래서 루스벨라의 이야기는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옛적 불행한 동화의 주인공 이야기나 다름없는 꼴로 팔려 가는 신세였으니까.

    ‘좋은 혼처인지는 아무도 모르면서.’

    그와 결혼하는 그녀만이 어떨지 알게 될 것이다. 소문만 무성한 남자였으니까. 겉모습은 괴물 같지는 않았으나 속은 어떠할까.

    ‘약해지지 말자.’

    약해지면 결국 물어뜯기고 이용당하기만 하다 버려질 뿐이야.

    눈물은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버석거리는 눈가에 고인 물방울을 닦아 내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루스벨라가 데니스의 시선을 느끼고 눈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말투가 시비조로 들릴 수 있었으나, 억양이 단조로웠고 표정에 아무런 색채가 묻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데니스는 그녀가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치채셨습니까? 최대한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다가왔는데.”

    “사박거리며 오는 기척 냈잖아요. 다 들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미동 없이 저만 바라보고 있던 이유가 뭐예요?”

    “눈부셔서요.”

    응?

    요즘 금이 간 찻잔은 겉면에 꿀이라도 바르고 다니나?

    “뭐라고요?”

    “당신을 이 자리에서, 이런 상황에서 만나는 게 꿈 같아서 그래요.”

    “……네?”

    “진심이에요.”

    예상치 못한 낯간지러운 말에 루스벨라는 입술만 우물거리다가 대답할 때를 놓쳤다.

    아까처럼.

    그가 정말로 그녀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까의 키스하는 ‘척’할 때도 그렇고, 악명 높은 금 간 찻잔이 제 앞에서는 따뜻한 코코아를 탄 머그잔으로 위장하고 있으니 이상했다.

    귀족 간의 결혼이라고 해도 자신의 결혼을 마음대로 결정지을 수 없었다. 귀족 태생의 영애가 결혼하게 된다는 것의 의미는 결국 남편에게 ‘소유권’이 이전된다는 말과 같았다.

    그걸 알고 있으니 부친인 지펠론 백작이 그녀를 이 남자에게 팔아넘긴 것과 다름이 없었다.

    즉, 데니스 데벤테르가 소문 속 포악한 성격대로 루스벨라에게 험하게 굴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는데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루스벨라는 내기를 해도 좋았다. 오늘 하객으로 온 이름 모를 웃는 상의 귀족들도 집에 들어가면 그들의 결합이 언제까지 갈지를 재고 있을 거라고.

    불량 찻잔과 한 번 버림당한 여자의 조합이라. 요새 수도 내에서 가장 뜨거운 화젯거리가 아닐까?

    “왜…….”

    왜 내게 잘해 주십니까?

    속삭임으로조차 나가지 못한 말이 바람에 휩쓸려 사라졌다.

    때마침 피로연장 방향에서 오늘의 주인공인 그들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후작가에서 데려온 사용인들 중 한 명으로 보였다.

    “작은 마님! 작은 주인님! 어디 계세요?”

    “보세요. 어서 돌아가야…….”

    지끈.

    ‘윽, 머리가…….’

    휘청이며 발을 디딘 자리에 뾰족한 돌멩이가 있었다. 하필이면 습하고 그늘진 대지 위에 오래 머무른 것이라 이끼가 무성하게 돋은 돌이었다. 그대로 발이 미끄러졌다.

    넘어진다.

    루스벨라는 최대한 충격을 줄이기 위한 자세를 취하려 했다. 피로연장이 열린 정원은 관리가 잘되어 있었지만, 루스벨라가 서 있는 자리는 그렇지 않았다. 방금 밟은 돌멩이와 비슷한 자잘한 자갈들이 무수히 널려 있는 이 자리는 정통으로 넘어지면 위험했다.

    온몸에 전해질 아픔을 대비하며 최대한 몸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

    어째서지?

    머리를 보호했던 손을 거두자 보이는 것은 속내를 파악할 수 없는 괴상한 남자였다.

    데니스 데벤테르.

    그가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괜찮습니까?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걱정이 가득한 두 눈에 오롯이 루스벨라의 창백한 얼굴이 담겼다. 그녀는 겁에 질려 있다가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는 자신을 비추는 붉은 눈동자를 보면서 물었다.

    “왜 나였어요?”

    왜 나로 골랐나요?

    데벤테르 가의 깨진 찻잔의 악명이 높아도 그는 한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꿰찬 인물이었다. 그것도 가지고 있는 부가 어마어마한 후작 가문. 선택지는 못해도 다섯이 넘었겠지.

    그런데도 굳이 한 번 구설수에 올라 파혼당한 여자를 고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귀족 가문에서 기피하는 흠 있는 결혼 상대는 총 셋이었으니까.

    남편을 잃은 여자, 사생아로서 천한 핏줄을 타고난 여자.

    그리고 좋지 못한 일로 파혼을 당한 여자.

    웃긴 점은 여자는 이런 흠이 있을 경우 혼처를 찾기가 하늘에서 별을 따올 만큼 힘들지만, 남자의 경우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복형제를 고이 보내줬다지만 죽였다는 소문이 팽배한 남자.’

    그리고 곧 저를 방치해 두었던 아비마저 죽이고 싶어 한다는 남자.

    그럼에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후작 가의 후계자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나를 가문에 들이셨는가.

    루스벨라의 강렬한 시선에 그녀의 허리를 받치고 있던 데니스가 그녀를 멀쩡히 세워 주며 말했다.

    “대답이 듣고 싶으십니까?”

    “네.”

    “저에 대해 궁금해해 주시니 영광이네요.”

    이봐, 또 이상한 말만 하고.

    “저…….”

    “작은 주인님 내외분! 어디 계신가요!”

    이런, 망할 결혼식 일정 같으니라고.

    “우선은 함께 피로연을 마무리하러 가볼까요?”

    자, 제 손을 잡아 주세요.

    ‘내가 어린 애도 아닌데…… 꼬박꼬박 손을 내밀어 주네.’

    사실은 당연해야 할 예의가 그녀에겐 익숙지 않은 것이어서, 조금 기뻤다.

    맛보지 못했던 상냥함에 루스벨라는 속으로는 불퉁하게 중얼거리고,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손을 그의 손 위로 얹었다.

    버진 로드 위에서 아버지가 그녀의 손을 멋대로 건넬 때와는 다른 간질거림이 느껴졌다.

    이 감정은 뭐지?

    “조심해요.”

    오늘 처음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남자의 손은 따뜻하고 크고, 부드러웠다. 검을 쥐어 본 손이라 굳은살이 곳곳에 있다는 걸 알았지만, 실제로 그다지 부드러운 손은 아니었지만 루스벨라는 자신이 직접 느낀 것을 믿는 편이었다.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엄마.

    나는, 도저히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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