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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4화 (5/166)

4화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아니잖아요.”

“글쎄요.”

데니스가 의뭉스럽고도 무해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가면을 벗은 그의 외모는 한 떨기 꽃, 지상에 떨어진 천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그는 선이 굵은 미남이 아니라, 유려하게 뻗은 소나무 가지처럼 곧고 단아한 이미지가 돋보이는 미인이었다.

반대로 가면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하얗게 빛나는 살결과 보석처럼 빛을 내는 붉은 눈동자와 금발이 어우러져 화려함을 더하고 있었다.

‘금이 간 찻잔은 무슨.’

사람 잡아먹을 듯이 황홀함의 극치를 뽐내는 세이렌이 여기 있었다.

루스벨라는 데니스에게 공공연히 붙여진 별칭이 우스웠다. 필시 그를 한 번 보고서 질투심에 사로잡힌 어느 머저리가 소문내지 않았을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 식장 안에서 데니스가 삭막함과 공포를 씌워 준 가면을 벗자 결혼식장 안의 손님들의 얼굴이 멍해졌기 때문이었다.

몇몇은 얼굴을 붉히며 그를 훔쳐보기에 바빴고, 어떤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나자 루스벨라를 시샘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루스벨라로서는 어이가 없는 적의였다.

영상 속의 사람들의 소리 없는 경악과 질투가 홀을 메웠다.

그들의 시끌벅적한 말들은 오직 장치를 작동시킨 데니스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들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들리지 않을 뿐, 실제로는 모두 쑥덕거리고 있겠지만 당장은 버틸 만했다.

그렇게 이 사람이 탐이 나면 네가 결혼하지 그래?

‘누군 결혼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서 있는 줄 아나.’

데니스가 가면을 벗고 루스벨라를 마주했을 때, 놀랐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보고 놀랐던 것은 외모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아이가 생각나서 당황했어.’

“루스벨라? 어디 아파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스벨라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러나 이내 하얗게 질린 얼굴은 천천히 혈색을 되찾아갔다.

‘그럴 리가 없지.’

성별도 다르고, 키나 몸집도 다른걸.

“제가 뭘 좀 착각했어요. 죄송해요. 다시 집중할게요.”

전혀 다른 사람에게서 닮은 구석을 발견하려 했다니. 루스벨라는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착각을 곧바로 지워 버렸다.

‘……기분 나빴을까. 트집이라도 잡히는 건 아니겠지?’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루스벨라는 이 남자에 대해 아직 아는 것이 없지만, 공작의 약혼녀였을 때의 습관이 튀어나와 불안해졌다.

데니스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홍색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질책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루스벨라는 두려웠다.

지펠론 백작이 받아 챙긴 지참금 값을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녀의 두려움은 그것에서 기인했다.

그때, 데니스의 손이 다가왔다. 아름다운 외모와 다르게 손이 참 컸다.

‘뭘 하려는 거지?’

스쳐 가는 좋지 못한 기억에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루스벨라.”

괜찮아요.

크고 길쭉한 손가락들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 손길이 화장 솜보다 더 가벼워서 루스벨라는 눈을 뜰 수 있었다.

“괜찮을 거예요. 지금은 내가 못 미덥겠지만…… 약속할게요.”

무엇을 약속한다는 걸까.

‘당신은 왜 날 그런 시선으로 보는 거지?’

마치…… 오래된 연인을 보는 듯한 애틋함으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저런 시선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느새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버진 로드의 끝에 서 있었다.

가만히 침묵하는 둘을 보며 사회를 보고 있는 사제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루스벨라의 얼굴 앞으로 늘어뜨린 베일 사이로도 굵은 땀방울이 훤히 내다보였다.

그들이 결혼하는 계절은 가장 따뜻한 5월의 봄이었다. 날은 적당히 선선했고, 더위를 탈 요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루스벨라는 그녀의 아비가 역시 유력한 집안과 결혼하니 가장 좋은 날로 골라잡을 수 있으니 얼마냐 좋으냐고 껄껄대던 것을 기억했다.

그렇다면, 이 노사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아마 이 남자겠지.

웬만한 사교계의 여인들보다도 아름다운 옆의 사내를 쳐다보며 루스벨라는 조용히 생각했다.

“저어, 이제 사랑의 서약을 읊어도 되겠습니까?”

늙은 고위직의 사제는 손수건 하나 없이 긴장감에 땀을 쏟으며 공손히 물었다. 그에 데니스는 무뚝뚝하게 단답했다.

“그러도록 해.”

“예에.”

‘정말이지 꼼짝을 못하는군.’

아까의 다정한 목소리가 꿈 같이 느껴졌을 정도로 냉랭한 어조였다.

‘왜 내게는 유순한 태도를 보이는 걸까.’

아니. 이건 순순한 걸 넘어서 이미 목줄이 채워진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당신을 기다렸다니. 그는 그녀의 무엇을 보고 기다렸다는 것일까?

설령 루스벨라의 친우와 그가 동일인이라 하여도 그는 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녀에게 다정한 위로를 속삭였다는 말인가?

복잡하게 얽혀드는 속사정은 모르는 노사제가 읊는 결혼 서약문이 낭랑히 울렸다.

“신랑과 신부에게 묻겠습니다.”

목이 칼칼했는지 노사제는 헛기침 한 번을 하고 진중한 태도로 데니스와 루스벨라에게 물었다.

“지금 그대의 옆에 서 있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하겠습니까?”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예식 절차였다. 지루하고 갑갑한, 어느 결혼식에 가서든 흔히 들을 수 있는 그저 그런 구절.

그렇지만 그 말을 들으니 루스벨라의 고요한 마음속 수면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약속할 수 없다.’

그렇지만 기도를 들어 주지 않는 신 앞에서 거짓 맹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루스벨라도 한때는 꿈많은 소녀였다. 그녀는 윈체스터 공작을 처음 만났던 순간 사랑에 빠져 으레 첫사랑에 빠진 아이가 한 번쯤 소망해 볼 법한 동화 같은 사랑의 결말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 결혼식장 곳곳을 장식한 싱그러운 생화와 그들을 축복해 주는 하객들.

그 모든 것보다 가장 그녀가 동경했던 것은 그녀의 옆에 서서 함께 팔짱을 끼고 영원히 사랑한다고 약속해 줄 사람의 존재였다.

지난 몇 년간 루스벨라는 그 사람이 아슬란 윈체스터 공작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영원히 굳건할 줄 알았던 약혼도, 그녀의 연심도 깨지자 남은 것은 얼음보다 차가운 냉소였다. 루스벨라는 더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사람도 믿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자유…….’

아무것도 그녀를 구속하지 않는 자유.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깟 결혼식 따위 얼마든지 거짓으로 맹세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니 깃털보다 가벼운 양심의 무게를 심장에 얹고 기꺼이 말하리라.

거짓말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아야 했다.

“네, 맹세하겠습니다.”

“……예. 저도 맹세하겠습니다.”

단숨에 덤덤한 표정으로 거짓 맹세를 말하는 루스벨라의 말 뒤로 조금 늦은 데니스의 약속이 따라붙었다.

보통의 신부라면 곧 남편 될 자의 느린 대답에 의심부터 들었겠지만, 루스벨라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허리와 흉통을 잔인하게 조여오는 빌어먹을 웨딩드레스를 어서 벗고 아름다운 신부가 되기 위해 굶어 주린 배를 채우고 싶다는 간절함만 가득했다.

설렘과 로맨틱한 분위기가 감돌지 않는 예비부부의 대답에 노사제만 손수건을 찾으며 곤란해했다. 더 바짝 긴장한 태세로 노사제가 말했다.

“그렇다면 신랑과 신부는 키스로 사랑의 맹약을 완성해 주길 바랍니다.”

그 말에 루스벨라의 밋밋했던 낯이 와락 일그러질 뻔했다. 다행히 다년간 공작 성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단련된 얼굴 근육은 잠시 경련만 하고 무표정한 낯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루스벨라는 속으로 욕을 했다.

‘입맞춤 그게 뭐라고.’

꼭 결혼식장에서 키스해야만 사랑이 영원할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웃긴 일이었다.

당장 사교계에서 수군거리는 가문 한두 개만 뒤져도 앞으로는 행복하고 서로에게 충실한 부부로 남을 것처럼 약속하고서는, 뒤로는 정부와 첩을 끼고 사는 자들이 꽤 있을 터였다.

그러니 입맞춤은 의미가 없었다. 적어도 루스벨라에게는 그랬다.

사랑의 키스가 아까 노사제가 읊었던 서약문만큼이나 고루하고 지루한 절차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 할 수는 없었다.

“루스벨라. ……이리 와 줄래요?”

키스하기 싫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루스벨라의 베일 위로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너무, 가까웠다.

“아.”

놀란 루스벨라가 다리를 삐끗할 뻔하자 데니스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받쳐 주었다. 온실 속에서 귀하게 기른 화초 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몸을 붙들어 주는 손아귀 힘이 대단했다.

원치 않게 결혼으로 엮이는 상대치고는 괜찮은 조건들로 가득한 사내였다. 통속 소설 속 남자주인공에 부합할 만한 점들만 꼭 따온 것 같은 데니스의 모습은 확실히 두근거릴 만한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고?’

……루스벨라의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기 전이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현재 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식을 어서 끝내고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만이 전부였다.

그녀는 베일 앞에 가까이 다가온 데니스에게 속삭였다. 근처의 하객들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절한 작은 목소리였다.

“우리, 입맞춤하는 척만 하고 끝내죠.”

당신도 나랑 별로 결혼하기 싫었을 것 아니에요?

섬세하게 장인이 고생해서 만든 꽃무늬 레이스 베일 사이로 형형한 녹안이 데니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데니스 데벤테르는 루스벨라가 단단한 광물처럼 보였다. 이미 세공해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어두컴컴한 광맥 안에 박혀 자신이 얼마나 빛나는지 모르는 원석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적개심 어린 루스벨라의 눈동자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녀의 명령을 거절할 정도로 심지가 단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대신, 하는 척만 하는 주도권은 제가 잡도록 하죠.”

“얼마든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루스벨라의 얼굴 위로 조심스러운 손길이 내려앉았다. 길고 가늘게 뻗은 손가락이 하녀들이 공들여 화장해 놓은 뺨 위에 올라올 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루스벨라가 기분이 이상해진 것은, 데니스가 곧 사라져 버릴 사람을 붙잡는 간절한 손짓으로 그녀의 고개 위로 그의 입술을 가져갔을 때였다.

‘닿나?’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말한 것과 다르게 그녀에게 입을 맞출지 의심하고 있었다. 거침없이 다가온 입술은 그녀의 입술과 맞부딪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

닿지 않았다.

닿기 직전에서야 살짝 옆으로 틀어 입술은 그녀의 입술 바로 옆의 살갗에 안착했다.

루스벨라는 거울이 없어 둘이 어떤 포즈로 서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보지 않고도 하객들의 뜨거운 반응으로 그들이 키스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 참석한 모두가 이게 허울 좋은 정략결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열렬한 키스 한 번에 가식적인 미소와 박수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데니스가 감사 인사를 하객들에게 전하는 것을 보니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흉악한 찻잔을 떠넘겨 기뻐하는 사람들의 축하는 그들의 기쁨만큼 길게 이어졌다.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루스벨라와 데니스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밝게 웃는 신혼부부의 모습을 연출했다.

“이로써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노사제 역시도 결혼식 특유의 분위기에 취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환히 웃는 새신부의 모습으로 루스벨라는 생각했다.

‘어서 빨리 혼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막 부부가 된 사람이 할 생각이라기엔 적절치 못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루스벨라를 데니스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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