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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3화 (4/166)

3화

“당신…….”

‘뭐 하자는 짓이지?’

루스벨라는 잇새를 비집고 나오려는 문장을 겨우 악물고 평정을 유지했다.

“저…… 데벤테르 소후작?”

“무슨 일이십니까, 지펠론 백작.”

“얼굴에 왜 가면을 쓰셨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그녀와 결혼한다는 남자가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이따위 결혼 망해 버리라고 했지만…….’

신이시여. 소원을 들어주시려거든 제대로 들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 예비 남편은 작정이라도 한 듯 얼굴을 완전히 덮는 가면을 쓰고 나왔다.

그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 신체적 특징이라고는 금을 가루로 내어 뿌린 듯한 화사한 금발과 온화한 빛의 적색 눈동자였다.

그 외의 이목구비는 모두 갑갑한 가면 속에 가려져 그가 어떤 외양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이국에서는 신부가 신랑을 맞기 전에 얼굴을 신랑 외에는 보이면 안 된다고 하여 가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희 딸아이가 면사포를 쓰면 되었…….”

“아니요. 이는 순전히 제가 지펠론 영애께 잘 보이고 싶어 그런 것인걸요.”

“아, 예…… 그런가요.”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눈이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지펠론 백작은 입술만 앙다물 뿐 허허 웃느라 바빴다.

저 눈웃음이 명백히 비웃음이라는 걸 모를 리는 없을 터인데.

‘무성한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일까.’

루스벨라의 꼭 쥔 손에 푸른 힘줄이 섰다.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지만…….’

지금의 괴짜 같은 답변을 보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데벤테르 가의 장남은 피해야 할 금이 간 찻잔이다.’

금이 간 찻잔.

겉은 멀쩡해 보여도 차를 따르는 순간 내용물이 흐르는, 버려야 할 찻잔.

그게 데니스를 일컫는 말이었다.

후작 부인이 아들이 사시사철 푸른 거목으로 자라길 바라며 지은 이름과 다르게 그에게 달린 모욕적인 별칭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서자에게도 무시당하는 귀족의 수치.’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병약한 도련님.’

사교계의 쑥덕거리는 인사들의 입을 타고 버려야 할 찻잔은 몸집을 불려 갔다. 딸이 있는 집안의 귀족들이 그를 기피하여 비유한 것이 정착된 사례였다.

그것이 비웃음의 영역에서 벗어나 경외와 두려움의 땅을 밟게 된 것은 대략 반년 전의 일이었다.

후작 저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금이 간 찻잔이 테이블을 뒤엎었어.]

[반기를 들고 일어나 찻주전자를 엎고 멀쩡하던 다른 두 개의 찻잔을 부쉈다지.]

언제 아팠냐는 듯 멀쩡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데니스 데벤테르는 이복형제들을 제치고 후계자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그 과정은 과연, ‘삼켜 버렸다’라고 표현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무시당하던 찻잔 후작 영식은 이복형제의 피를 보지는 않았다. 그저 그는 내기를 제안했다.

[나와 싸워서 내 팔다리 한 쪽이라도 꺾으면 이 자리에서 기꺼이 죽어 주마.]

[저게 뭐라는 거야?]

[죽고 싶어 환장했나?]

……그러나 내기에서 져 쫓겨난 것은 이복형제들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 사람들, 앙갚음도 못할 정도로 사람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며?’

‘관절이 다 꺾였다더라. 그것도 맨손으로 말이야.’

‘세상에. 그런 분에게 아가씨가 시집간다고?’

‘아무리 못되게 굴었다지만 친형제이면서 그렇게 잔인하게 굴어도 되나?’

혼인 준비를 이루어질 때 저택의 하녀들이 수군거리던 것을 주워들은 루스벨라였다.

‘나라고 그렇게 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지.’

루스벨라가 지펠론 백작 가와 윈체스터 공작 가에서 지내는 동안 겪은 것은 대체로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최악의 경우 데니스가 소문처럼 흉포한 자라 제게 손을 대려 한다면…… 끔찍했다.

‘대화가 통하길 바라자.’

“……처음 뵙겠습니다. 데벤테르 소후작 님.”

결혼식에서 나눌 인사로는 영 이상했으나 초면이니 어쩔 수 없었다. 루스벨라는 예법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인사를 했다.

‘……?’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아…… 실례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애.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데니스는 얼음처럼 굳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사르르 녹는 미소를 지었다. 해동이라도 된 것처럼 눈꼬리에 물방울이 언뜻 비친 것 같았다.

‘잘못 봤겠지?’

“자, 이제 제 손을 붙잡고 가시죠. 루스벨라.”

이대로 이 사람과 결혼해도 괜찮을까?

결혼식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기에 우선 데니스의 손을 마주 잡긴 했으나 루스벨라의 마음은 불안정했다.

‘무서워.’

만약 이 결혼도 내 인생에 있어서 틀린 선택이, 오점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는 내가 견딜 수 있을까?’

폭발할 듯이 몰아치는 루스벨라의 감정을 전혀 모르는 지펠론 백작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데벤테르 경. 실례지만 그 가면 좀 어떻게 벗을 수 없겠습니까? 제 딸아이가 많이 곤란해합니다만…….”

먼저 예의를 어긴 것은 데니스 측이었음에도 지펠론 백작은 비굴하게 눈을 내리깔며 최대한 좋게 그를 설득하려 했다. 데벤테르 가의 막대한 지참금을 받아 챙겼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루스벨라 지펠론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아버지께서 곤란한 것이겠죠. 제가 아니라.’

왜 저를 물고 늘어지십니까.

루스벨라는 그녀의 입으로 곤란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언제나 알아서 그녀의 의사를 판단하는 그녀의 아버지가 멋대로 핑계를 딸로 정해 말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이 진저리치게 싫었다. 루스벨라는 어째서 루스벨라로 태어났어야 했나? 왜?

‘이런 운명으로 태어날 줄 알았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이로웠을 터인데.

천천히 가면을 쓴 금 간 찻잔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예?”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과연 테이블을 엎은 찻잔을 별칭으로 단 사내는 말 한마디에도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어쩌라는 거라뇨, 소후작님. 이제 제 사위 된 처지에서 그런 말은…….”

“난 영애와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이 아니라.”

“제가 딸아이를 대변…….”

“영애가 내게 처음 뵙겠다고 말하는 혼사를 치르는 아비가 대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꺼져.

말만 예의 바르지 속내는 가차 없었다. 꺼지라고. 말을 잘라 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아주 노골적이었다.

그것을 간파한 루스벨라는 고개를 돌려 입가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언사에 막혔던 숨이 뚫렸다.

‘어떡하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이…… 이익…….”

가면 안에 가려진 표정을 알 수가 없어 지펠론 백작은 땀만 뻘뻘 흘렸다.

‘어린놈이 감히…….’

그러나 그 어린놈에게 내세울 거라곤 나이밖에 없었다. 데벤테르 후작 가에 밉보여서 좋을 것도 없었고.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그가 내린 선택은, 루스벨라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도피였다.

“아…… 하하. 이쯤에서 제 딸을 넘기고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작은 꽁무니를 빼고 하객석으로 도망쳤다.

‘……뭐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객석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본래 하객들이 앉아야 할 자리에는 수십 개의 아티팩트만이 놓여 있었다.

‘이건 마력으로 작동되는 영상 통신구잖아?’

얼굴을 보고 대화할 수 있어서 굉장히 비싼 것인데 이런 것을 수십 개나 두고 있으니 놀라웠다.

백작이 통신구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데니스가 그를 불러 세웠다.

“백작.”

“커, 커흠. 무슨 할 말이라도……?”

“하객석에 앉을 필요 없어. 영애가 나와 결혼함으로써, 이제 영애는 데벤테르 가의 사람이니까.”

나가 주게. 지금 당장.

“그게 무슨…….”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지펠론 백작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나와 루스벨라 지펠론 이외에 그 어떤 다른 이도 필요치 않다는 이야기지. 아버지인 당신이라도 말이야.”

“하지만 나는 저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아이라고? 당신은 나와 결혼까지 하는 이 성장한 영애께서 아이로 보이나?”

칼을 도려내 입에 바른 것처럼 독을 탄 뜨거운 찻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매서운 기세에 눌린 백작이 죽어도 못 놓던 체통을 놓치고 딸꾹질을 시작했다.

“끅, 끄윽.”

“이만큼 설명해 줬으면 알아서 나가. 귀찮게 하객석에 앉아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제 이 사람은 나의 사람이니까.

불편한 자리를 피하고자 백작은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미래의 데벤테르 후작이 제 사위라며 주변에 거들먹거렸던 것 치고는 초라한 퇴장이었다.

“이제 저희 둘만 남았군요.”

“네.”

“가실까요?”

“……그래요.”

입구에서부터 남편 될 이의 손을 붙잡고 입장했으나 보이는 것은 오직 서로뿐이었다.

‘저게 뭐지?’

루스벨라도 영상 통신구의 존재를 발견했다.

아름답고 화려한 결혼식장에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들의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루스벨라는 이에 흘낏 데니스를 쳐다봤다. 아까의 행동으로 보아 하객들이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가 일방적으로 찾아온 모두를 내친 것일 수도 있었다.

“무슨 꿍꿍이십니까?”

뜨겁게 타오르던 모욕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차가운 이성과 궁금증만이 남았다. 루스벨라는 초록색 눈을 똑바로 고정해 가면 속의 붉은 눈동자를 노려봤다.

“아무것도. 나는 그저 그대와 둘만 남게 될 날을 기다렸을 뿐입니다.”

칼날을 녹여 바른 혓바닥이 아니라 봄볕의 꽃비가 담긴 다정한 말씨가 들렸다.

루스벨라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왜…… 내게는 친절하게 구는 것이지.’

아버지께는 그리 냉담하게 굴었으면서.

아까까지 무섭게 굴던 깨진 찻잔이 갑자기 코코아를 탄 머그잔 행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이 결혼식을 불편해할 것 같아 준비해 놓은 장치입니다.”

데니스가 주머니에서 아티팩트를 작동시키는 연결 장치에 마력을 부었다.

우웅―

곧 홀 내에 있는 모든 영상 통신구들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곳에 오지 않았을 뿐, 결혼식장에 가는 격식을 맞춰 입은 차림새였다.

“세상에…….”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결혼식이라면 뒷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영상 통신구의 한계는 작동시킨 사람하고만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기에.

“가면도 당신을 기분 나쁘게 해 주려고 쓴 게 아닙니다.”

보세요, 당신의 두 눈으로 직접.

데벤테르의 적장자가 가면을 벗었다. 그의 드러난 맨 얼굴을 본 루스벨라의 얼굴에서 침착함이 사라지고 놀라움이 차올랐다.

‘……잘생겼네.’

가면 아래에 숨겨져 있던 얼굴은 웬만한 미인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청초하고 섬세한 이목구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펠론 백작에게 날린 독설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처연함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미남이었다.

‘누군가를 닮은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아.’

통신구 쪽도 그의 얼굴을 보고 난리가 났다.

「말도 안 돼! 소문으로는 흉측하기 그지없는 괴물이라고 했는데……」

“아, 실례.”

데니스는 ‘결혼을 축하한다.’라는 말 이외에 하객들에게 어떤 말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잽싸게 탄식이 흘러나온 통신구에 마력을 붓는 것을 중단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준비한 겁니까?”

나를 위해서인가요?

‘……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주제넘은 생각은 마음에 독으로 작용한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는 모르나 이 남자는 루스벨라가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드나요? 당신을 위해서 준비했는데.”

괜한 기대가 아니었다.

‘저 눈은…….’

익숙한 눈이었다. 데니스의 눈은 윈체스터 공작을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 루스벨라의 눈과 같았다.

처음 봤으면서, 당신은 왜 나를 그리도 연모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가.

“……당신은 누구지?”

믿을 수 없어 떠는 그녀에게 데니스 데벤테르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던 사람.”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것은 원하던 대답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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