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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2화 (3/166)
  • 2화

    “오늘만큼은 내 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도록 치장시켜라.”

    그것이 루스벨라를 질질 끌어 화장대와 드레스 룸에 데려다 놓은 하녀들의 말이었다.

    “백작님께서 아가씨를 가장 아름다우신 5월의 신부로 만들라고 지시하셨어요.”

    “신랑 측 가문에서 보낸 예물도 질이 좋은 것들만 골라 가득하니 고르시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좋으시겠어요, 아가씨는.”

    “이렇게 좋은 혼처를 두셔서.”

    루스벨라의 회색빛 도는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땋고, 뺨에 보드라운 화장용 솜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녀의 의사는 한 톨도 들어가 있지 않은 예식용 드레스와 장신구를 꺼내면서 하녀들은 재잘거렸다.

    그네들은 정말로 루스벨라가 복이 터진 것처럼 발랄한 분위기 속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루스벨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앞머리를 곱게 말아 주던 하녀가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나요? 아가씨?”

    ‘이 사람들…… 내가 기존에 부리던 하녀들이 아니야.’

    못 보던 얼굴들이었다.

    ‘전부 물갈이가 되었나.’

    짚이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처음 혼약을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루스벨라는 격렬하게 반항의 뜻을 비쳤다.

    ‘도망칠 거야.’

    그리고 결과는 처참하게도 완벽한 실패로 끝났다.

    [네가 내 허락 없이 이 집에서 나갈 방도는 없다. 포기해.]

    [몇 번을 더 시도해도요?]

    [무용한 노력을 들이지 마라. 이미 알잖니?]

    이것은 그 연장선이었다.

    도망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

    “아가씨는 사랑받는 귀부인이 되실 거예요.”

    ‘과연 그럴까?’

    달콤한 말은 거짓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입 안이 썼다.

    ‘거짓말쟁이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지난 몇 년간을 공작 가에서 눈칫밥으로 연명하던 그녀의 눈에 이 하녀들은 가소로울 뿐이었다.

    ‘다 내가 결혼식에서 도망칠까 두려워하고 있잖아.’

    루스벨라는 분명히 보았다. 그녀가 들어서자 밝아진 얼굴로 황급히 무언가를 치우던 하녀의 모습을.

    그녀가 뒷짐을 지고 선 손에 쥔 것은 굵은 밧줄이었다. 매듭을 봐서는 아마도 올가미.

    그녀가 도망치려는 기색이나 일탈 행동이라도 보일라치면 잡아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키우던 가축을 붙잡는 것처럼, 그렇게.

    ‘내 아버지는 정말이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군.’

    나날이 혈육에 대한 정 따위는 있어 봤자 쓸모가 없다는 걸 증명해 주시니 말이야.

    실망했던 나날이 오래도록 깊었기에, 그녀는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무표정한 낯으로 바지런히 움직이는 하녀들을 예의 주시할 뿐.

    “도망칠 생각은 없어.”

    이 말에 방 안의 모든 하녀들이 어깨를 움찔했다.

    “이게 예쁘겠네요. 어떠세요?”

    “……마음대로 해.”

    ‘내 말도 무시하는군.’

    왜냐하면 그것은 쓸모없고, 성공 가능성도 희박한 개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무시당한 그녀의 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보아라, 이미 치장을 해 주는 하녀들부터가 그녀를 경계하며 여차하면 포획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저택을 돌보는 집사와 호위하는 사병들은 어떨까.

    ‘손목이나 팔목 하나쯤은 부러뜨려서라도 결혼식장에 데려가려고 하지 않겠어?’

    대단하신 나의 아버지는 그러시고도 남겠지. 다친 상처는 치료하면 그만이니까. 나라는 상품을 무사히 혼약을 맺은 후작 가에 넘기는 게 최우선이니까.

    ‘부질없는 인생이네.’

    무례하게 파혼을 선언한 전 약혼자를 내쫓으니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의 결혼이라…….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순순히 끈 달린 인형처럼 따르는 것밖에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결혼한 여자는 출가외인으로 취급을 한다는 것. 따라서 양육자이자 보호자로서 그녀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법적 권리가 드디어 그녀에게 이전된다.

    결혼은 마음대로 하지 못하지만, 최소한 이혼은 그녀의 의지대로 진행할 수 있었다.

    결혼식 당일이 되어서야 처음 보는 것들을 주렁주렁 다는 와중에 루스벨라는 생각했다.

    ‘신랑이라는 자를 만나는 순간 담판을 짓자.’

    쉽지 않을 설득이 될 것을 알지만 그래도 도박을 걸어 봐야 했다. 생각해 둔 방안은 두 가지였다.

    그녀와 얼마 후 이혼하는 것. 아니면 평생 이름뿐인 부부 관계로 사는 것.

    전자가 최상이고 후자가 차선책이었지만, 후자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전공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 조용히 살아가는 것. 공작의 옆에서 질리도록 해낸 경험이 그녀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해 줄 것이다.

    “다 됐어요. 아가씨. 거울을 보세요!”

    “백작님 말씀대로 오늘 결혼하는 그 누구보다 아가씨가 제일 아름다운 신부가 될 거예요.”

    “마음에 드시나요?”

    백작이 고용한 것으로 보이는 전문 인력들은 본인의 업무를 마치자마자 묵례를 하고 재빠르게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래서 방 안에는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루스벨라와 대리만족의 황홀함을 느끼며 설레는 그녀의 낯선 하녀들만이 남았다.

    “대답을 듣고 싶어?”

    “물론이죠. 아가씨께서는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이시잖아요.”

    “아버지의 파수꾼 주제에 말이 많네.”

    “…….”

    “이번에도 무시인가?”

    루스벨라는 하녀들의 튼실한 팔뚝과 종아리에 시선을 두었다. 그에 비해 그녀의 연약한 육체는 도망칠 때 발목만 걸면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얕보이기 쉬운 육체였다.

    “어떠세요, 아가씨?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시나요?”

    가장 막내로 보이는 주홍빛 고수머리의 하녀가 물었다. 루스벨라는 천천히 입을 풀면서 그에 대답했다.

    “두근거리지.”

    내 인생이 고작 이런 거래 따위로 팔려나갔음에 분노해서.

    “그리고 아주 마음에 들어.”

    오늘 나의 결혼식인 점은 끔찍하지만, 적어도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있다는 점에서.

    ……그래 봤자 남편이라는 새로운 족쇄가 그녀를 얽어맬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희망을 가져 보려 그녀는 노력했다. 위태롭게 어두운 밤을 비추는 촛불마저 꺼진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연 속을 목적 없이 떠돌 테니까.

    “아가씨, 마지막으로 구두를 신을 차례에요.”

    “……유리 구두네.”

    “아름답죠?”

    높은 굽을 자랑하는 아찔한 구두였다. 루스벨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신데렐라 처지인 걸 잊지 말라고 주는 선물 같아서였다.

    ‘후작 가에서 준 건가? 아니면 역시 아버지인가?’

    누가 친히 만들어다 준 것이든 간에 달갑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구역질이 났다.

    “속이 쓰려. 토기가 올라와.”

    “결혼식이니 당연한 거예요. 참으세요.”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 아무것도 먹지 못한 위장은 구토를 하면 멀건 위액만 뱉어 내겠지.

    순백의 드레스 위로 위액이 쏟아지면 어떨까? 적어도 이 빌어먹을 유리 구두를 받은 값을 하진 않을까?

    머릿속에 물처럼 고여진 생각들은 유리 구두가 신겨지는 순간 바람에 흩날리는 구름처럼 흩어졌다.

    “이제 식장으로 이동하셔요, 아가씨.”

    신성한 부부의 결합을 맹세할 시간이 도래했다.

    ***

    길고 치렁치렁한 웨딩드레스는 그것 자체로 루스벨라를 도망치게 하지 못하는 훌륭한 밧줄이었다.

    ‘나한테 붙어서 드레스를 붙잡고 가는 인원만 몇인지.’

    앞과 뒤와 옆이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로 촘촘히 붙어 있었다. 몸과 마음 둘 다 불편했다.

    하늘하늘한 베일이 얼굴 위로 드리워져 있어 아무도 몰랐겠지만, 루스벨라는 이를 갈고 있었다. 귀족 영애로서 부끄럽지도 않냐며 잔소리를 들을 행동이었다.

    “백작님, 아가씨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내 딸! 오늘 아주 완벽하구나. 최고의 결혼식에 걸맞은 차림새야.”

    “아버지께나 좋은 결혼식이겠죠.”

    그 말에 정적이 일었다. 싸해진 분위기에 하녀들은 도로록 눈을 굴렸다.

    “뭐라고 했느냐, 루스벨라? 아비가 귀가 좋지 않아서 말이다.”

    “아버지. 다 들으셨으면서 모른 척하지 마세요.”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얼굴은 태양이 뜬 것처럼 환하기 그지없었다. 반면에 결혼식을 올릴 당사자인 루스벨라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고요했다.

    “너희들은 나가 봐라. 이건 수고의 뜻이니 받아 챙기도록.”

    “헉. 그, 금화……!”

    “대신 너희들은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다. 알겠느냐?”

    “예, 예! 물론입니다!”

    수고비로는 큰돈이었다. 침묵의 대가로 주는 금화에 입꼬리가 귀에 걸린 하녀들은 기뻐하며 불편한 자리를 어서 빠져나왔다. 곧 방에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사용인들이 나가자마자 지펠론 백작이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경솔한 발언이었다. 저놈들이 괜한 입방아라도 찧으면 어쩌려고 그랬느냐?”

    “데벤테르 후작 가에 별말이 들어갈까 봐요?”

    “당연한 것 아니냐?”

    데벤테르 후작 가는 부로 명성이 높지만, 그 부를 가지고 일군 것들이 많아 지펠론 백작 가에는 비교할 수 없는 위상을 지녔다.

    무릇 귀족 사회에서의 결혼이란 가문의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이는 일이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려 며느리로 들이려는 여자가 가정 내에서 아버지와 불화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면 좋아할 리가 없다는 게 백작의 생각이었다.

    ‘어떻게 성사시킨 결혼인데. 절대 무를 순 없지.’

    “너도 내 나이가 되면 알 거다. 이게 다 널 생각해서 그런 것이라는 걸.”

    “절 생각해서 그랬다고요?”

    헛웃음만 나왔다. 딸이 허탈하고 괴로운 마음을 담아 쳐다봐도 지펠론 백작은 끄떡하지 않았다.

    “그래. 너도 데벤테르 후작 가의 일원이 되어 네게 주어지는 것을 누리다 보면 내게 고마워할 것이야.”

    “고마워한다고요…….”

    루스벨라는 알았다. 아버지가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대가로 후작 가에 받은 지참금이 상당하다는걸. 귀족 가의 평균적인 지참금의 배를 넘는 돈과 보석과 광산 문서 같은 것들을 받았다는 걸 알았다.

    [역시 맏딸이 집안의 밑천이 되어 주는군. 키운 보람이 있어.]

    어느 날 밤에 탈출하려다 아버지의 방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만족에 찬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제게 귀띔이라도 해 주셨으면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을 거예요.”

    “말하면, 뭐가 달라지느냐?”

    “……뭐라고요?”

    “어차피 그럼 넌 도망치려 했겠지. 저번처럼 말이다.”

    묵직하게 내리꽂히는 목소리가 심장을 난도질했다. 다행히 눈가는 버석했다. 공들인 화장이 아깝지 않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제게 잔인하시군요.”

    “칭찬 고맙구나. 어서 식에 가기나 하자. 데벤테르 가의 후계자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

    백작이 부케를 들어 루스벨라의 손에 쥐여 줬다. 루스벨라는 힘없이 그것을 받았다.

    ***

    식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내내 루스벨라는 아버지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답답해.’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는 길은 숨이 찼다. 마주 잡은 손은 자꾸 땀이 차는 것인지 텁텁했다.

    루스벨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백작에게 말했다.

    “손이 너무 불편해요. 땀에 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새로 교체해야겠구나.”

    “……그럴 것까지는 없어요.”

    “결정은 내가 한다.”

    백작은 복도에 돌아다니는 아무 하녀나 불러 새 레이스 장갑을 가져오게 했다.

    “여기 있습니다.”

    “어서 갈아 끼거라. 시간이 없다.”

    그때, 루스벨라의 장갑을 벗겨 주려던 하녀가 말했다.

    “어……? 아가씨의 흰 장갑에 붉은 얼룩이 있습니다. 백작님.”

    그 말에 백작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니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백장미 다발에 미처 제거하지 못한 가시가 그의 손을 할퀸 것이었다.

    “연고를 가져올까요?”

    “되었다. 루스벨라만 있으면 괜찮으니. 이만 가 보아라.”

    하인을 보내고 난 뒤 백작은 딸에게 손을 내밀어 명령했다.

    “치료해라. 루스벨라.”

    “……싫습니다.”

    ‘공작 가를 나오면서 더는 치유술을 쓰기 싫어하는 걸 아시면서.’

    “어서 해라. 하지 않으면 결혼 후 네게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어길 수도 있다.”

    ‘저열한 협박.’

    루스벨라는 하기 싫었지만 아버지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이윽고 그녀의 눈동자와 같은 연녹색의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와 상처를 아물게 했다.

    “됐어요.”

    “좋군. 어서 식장으로 가자꾸나.”

    지펠론 백작은 서둘러 딸의 손을 붙잡고 식장으로 향했다. 육중한 문 앞에 도착하자 늙은 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부께서 입장하십니다.”

    화려한 교회 내부의 기둥에 생화와 진주를 자잘하게 엮어 장식한 것이 아름다웠다.

    ‘최고로 아름다운 결혼식이 될 거라고 호언장담하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나.’

    티끌 하나 없이 순백으로 반짝이는 버진 로드는 환히 빛나는 조명 아래에서 빛을 냈다. 버진 로드를 따라 아래에서 위로 시선을 옮기던 루스벨라의 시선 끝에 남편 될 이의 모습이 비쳤다.

    “……당신?”

    그를 보고 루스벨라는 너무 놀라 넘어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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