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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화 (2/166)

1화

루스벨라 지펠론은 오늘 눈을 뜨기 싫었다. 오늘은 그녀의 결혼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긋지긋한 정략결혼.”

진저리 나는 결혼 장사.

그녀의 아비는 기어코 딸을 비싼 값에 팔아넘기는 데 성공했다. 오늘 그녀가 갈 결혼식은 한 줌의 사랑 없이 그녀의 아비가 이룩한 성취의 산물이었다.

‘웃기지도 않지.’

그렇게 결혼으로 이득을 보고 싶다면 아버지야말로 다시 결혼하시면 될 것을.

그녀의 아비는 가지고 있는 탐욕스러움을 숨길 줄 아는 잘생긴 구렁이였다.

미중년까지는 아니어도 그 아래 단계인 훈훈한 중년 남자의 반열에 오를 수는 있을 것이다. 저의 아비는 백작이었고, 상처(喪妻)했으니 물색해 볼 상대가 없지도 않을 것이고.

그러나 가문의 부흥을 핑계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느라 눈에 먼 아비와 재혼할 귀족 출신의 여인은 없지 않을까. 루스벨라는 조소했다.

그게 나의 불행의 이유 전부인가.

‘차라리 오늘 아침 해가 뜨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어젯밤 잠들기 전 그녀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몰래 숨긴 성냥을 꺼내 양초에 불을 붙이자 방 안은 주홍색의 은은한 불빛으로 메워졌다. 오롯이 그 불빛 앞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홀로 있노라니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신이시여.”

거기 계십니까.

당연하게도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아직 쌀쌀한 봄 날씨 때문인지 그녀가 열 수 없게 굳게 닫아 놓은 문틈 사이로 찬 바람이 솔솔 흘러들어왔다.

‘촛불이 꺼질 듯이 흔들리네.’

바람이 불어왔다. 촛불이 요동치며 그림자를 뒤흔들었다. 루스벨라의 표정이 흔들리는 불빛에 맞춰 이지러졌다.

‘아슬란 윈체스터 공작.’

나의, 전 약혼자.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 생생하게 밤을 비집고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각하를 제 인생의 반려로 삼지 않았던 게 최고의 선택이었네요.’

‘당신을 사랑했다는 게 후회돼요.’

푸흐흐. 웃음이 터졌다.

억눌리고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살아온 그녀의 생애와는 정반대되는 파격적인 행보와 언사였다.

그 전날, 그녀는 아슬란에게 청첩장을 통보하러 간다는 긴장감에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여 병자와 같은 몰골로 그를 만나러 갔었다.

거울 속에 비쳤던 모습은 죽어 가는 시체 같았다. 잘 먹고,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저는 당당하게 그에 대한 미련을 떨치고 왔습니다.”

기도해도 듣지 않는 나의 신이시여. 듣고 계시나이까?

‘그날만큼 속이 개운했던 적이 없었지.’

긴장이 풀렸는지 탈은 좀 났지만.

공작 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그녀는 심한 메슥거림을 느꼈다. 위장은 쓰릴 정도로 울렁거렸고, 토기가 밀려왔다. 파혼 이후 몇 차례나 익숙하게 느낀 괴이한 증상이었다.

‘하지도 않은 일 가지고 파혼당한 것 때문이겠지.’

더는 생각하기 싫었다. 안 좋은 기억도, 복통도, 곧 있을 결혼도.

[이래서야 데벤테르 후작 저를 볼 면목이 있겠느냐! 얼마 뒤면 성혼을 올려야 하는데, 어쩔 것이야!]

[저 아파요, 아버지.]

[그걸 자랑이라고 말하느냐?]

다행히 백작은 의사를 불러 진찰해 주기는 하였다. 의사는 말했다.

[아가씨의 병은…… 제가 치료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군요.]

[그럼 이 아이가 대체 왜 이런단 말이냐? 설마, 불치병은 아니겠지? 그리되면 내가 몹시 곤란해.]

[그것이, 마음의 문제이온 듯 하옵니다.]

[마음의 문제라 하면?]

[실례지만 아가씨께서는 그, 파혼으로 인한 상사병을 앓고 계신 게 아니실지…….]

[내가 상사병이라고?]

루스벨라는 그 말에 어이가 없어 실소조차 머금지 못했다.

‘상사병, 상사병이라?’

이미 다 끝난 사이에 인제 와서 상사병을 운운하는 의사가 우습기만 했다.

[……내가 돌팔이를 집에 들였군.]

그 말에 노기를 드러낸 것은 그녀의 원망스러운 아비였다. 루스벨라는 이때만큼은 그녀의 아버지가 체면과 위신에 목숨을 거는 인간이란 것이 다행스럽게 여겼다.

[상사병이라고? 하하, 감히 의사 주제에 입을 함부로 나불거리는 놈이로구나.]

[배, 백작님.]

[흠씬 두들겨 맞고 내쫓기고 싶은 게냐? 어디서 주워들은 망발을 가지고 내 앞에서 주둥이를 놀리는 것이냐?]

건방진 것이. 네까짓 게 뭐라고.

아버지의 목소리에 스민 노기는 잘 잡은 탯줄에 대한 자긍심이 건드려진 것에 대한 분노였다.

백작이란 신분은 그의 자신감이자 역린이었다. 귀족으로 태어났다는 행복과 더 높은 자리로 향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똘똘 뭉친 그의 속내가 고스란히 그녀에게 비쳤다.

의사도 그것을 아는지 바닥에 코가 뭉개지도록 엎드려 잘못을 빌었다.

[배, 백작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아직 청소하지 않은 바닥 위로 먼지가 굴러다녔다. 더러운 먼지 덩어리가 그의 머리카락에 엉켜 하나가 되었다. 루스벨라는 그것을 침대에 누워 가만히 지켜보았다.

‘똑같아.’

의사나 먼지나. 때 묻은 것들을 몰고 다니는 것이 같았다.

그리고 루스벨라의 아버지야말로 그녀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먼지 덩어리였다.

때 묻은 욕망으로 가득 찬 백작이 의사의 비굴한 호소를 받고 짙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날 모욕하고도 이 집 밖으로 멀쩡히 기어가고 싶진 않겠지? 그 정도로 양심이 없을 거라 생각하진 않네.]

[제발……. 이 늙은이가 잠시 미쳐 헛소리를 지껄였습니다. 다시는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겠습니다. 맹세합니다.]

[흐음,]

나이 든 의사는 바닥에 구겼던 머리를 슬쩍 들어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살짝 누런빛을 띠는 흰자가 이리저리 굴러 백작의 심기를 가늠했다.

루스벨라는 그녀의 아비를 잘 알았다. 그는 자신에게 잘못을 빌며 애걸하는 인간들을 좋아했다.

이미 그의 기분은 반쯤 풀어져 있었다. 헐겁게 늘어진 리본처럼 느슨해진 백작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의사는 사탕발림 섞인 아첨을 넣어 백작에게 간청했다.

[배, 백작님께서는 곧 데벤테르 후작 가와 인연을 엮는다고 들었습니다. 그토록 좋은 혼처라니, 수도의 모든 영애들이 백작님과 같은 아버지를 두지 못했음에 한숨을 내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면서 힐끗 그가 루스벨라를 쳐다봤다. 늙은 의사는 루스벨라에게도 아첨을 부리면 멀쩡히 걸어 나갈 확률이 높아질 거라고 계산을 마쳤는지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께서도 틀림없이 이런 훌륭한 혼처를 찾아 주신 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말해 주세요, 아가씨.

의사는 무언의 눈초리로 그녀에게 그리 애원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루스벨라는 의사의 말이 가당찮은 개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말은 모른 척했다.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자마자 그녀에게 원망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다. 루스벨라가 그를 도와줄 것 같지 않자 다시 노선을 바꿔 백작에 집중했다.

[백작님께서 이토록 수완이 좋으시니, 남들이 부러워할 혼처가 따라붙는 게지요. 이게 다 백작님의 은덕 아니겠습니까.]

‘크흠, 제법 맞는 소리를 하는군.’

백작을 추켜 올린 달콤한 속살거림에 그녀의 아버지는 물에 풀어놓은 설탕처럼 분기를 씻어 냈다.

욕심도, 욕망도 타오르는 불처럼 그득한 그녀의 아버지는 인정받기를 좋아했다. 백작의 취향에 꼭 들어맞는 말을 한 의사는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에잇, 퉤. 다시는 이런 집에 오나 봐라!]

의사는 백작 저 대문을 나서기 전 침을 댓 발 즈음을 갈기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 의사 나름의 미약한 반항이었으리라.

별것 아니었을 일상적인 풍경이었을 뿐인데, 루스벨라는 그것을 보고 결심했다.

‘아, 나도 그에게 뭐라도 하고 와야겠구나.’

그래야 속에 쌓인 이 불덩이가 훨훨 날아가겠구나.

일방적인 파혼이었다. 무례하고, 오만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는 없는 무식한 파혼 선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루스벨라는 그녀를 싫어하는 북부 귀족들의 모략에 걸렸다. 이름뿐인 약혼녀 자리라 해도 그 자리는 너무나 탐나는 직위였기 때문이었다.

루스벨라가 이유 없는 복통을 호소하게 만든 원인은 그에 있음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루스벨라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으니까.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워서 고민해도 그녀의 과실은 없었다. 루스벨라는 아슬란이 원하는 대로 흐릿한 허수아비처럼 존재감 없는 허깨비 약혼녀에 불과했으므로.

그의 눈치만 보느라 책잡힐 일은 손톱만큼도 남기지 않으려 노력하다 엉엉 울음을 터트린 적도 있을 만큼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결국, 차가운 외면뿐이었어.’

[내 약혼자가 선을 넘고 허락된 것 이상을 요구하는군요.]

[……공작님?]

[하여, 지펠론 가(家)와의 약혼을 파기하는 바입니다.]

모멸감에 치가 떨렸음에도 루스벨라는 바보 천치처럼 그의 무릎에 매달려 애원했다.

[잘못했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파혼하자는 말만 담지 말아 주세요. 홧김에 저지른 실언이라고 해 주세요. 공작님. 제가, 뭐라고 말씀하시건 다 고칠게요. 저, 잘할 수 있어요.]

시키시는 거 잘 따르는 게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일이에요. 말대꾸도 하지 않고, 너는 뭘 하라고 하면 묵묵히 해내는 게 장점이라고 저희 아버지도 칭찬하셨는걸요.

한없이 멍청한 기대였는데, 그때의 그녀는 어리석어서 그것을 몰랐다.

그날은 하필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루스벨라는 그녀를 뿌리치고 마차로 향하는 아슬란을 붙잡고 살갗을 때리는 사나운 빗방울을 맞아 가며 눈물로 호소했다. 애써 차려입은 드레스가 물에 젖은 솜처럼 눅눅해져 무겁게 그녀를 가라앉혔다.

아슬란의 옷도 축축이 젖어 갔었다. 그는 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떼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놔주십시오, 영애. 영애의 이런 점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겁니다.]

‘그게 끝이었지.’

아슬란 윈체스터는 그 말만 남기고 시궁쥐처럼 엉망이 된 루스벨라를 두고 떠났다. 아슬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는 형식적인 절차의 연속이었다. 아비는 제게 화를 내며 모두 제 탓이라 길길이 날뛰고, 동생들은 이제 좋은 혼처를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며 그녀를 잡고 매달렸다.

[그만하세요, 다들!]

혼란과 절망과 우울함의 끝을 달렸다. 그녀라는 사람의 가치라는 게 있는지 매일 밤 울면서 자문했다.

그 답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자기 자신을 책망하며 지냈던 날들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것을.

아슬란 윈체스터. 그 남자가 멋대로 끝을 선언했다면 그녀도 마땅히 다시는 그녀의 인생에 그라는 남자가 그리는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었다고 말해야 함을.

결심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얼마 후 결혼 날짜가 잡혔고, 청첩장이 루스벨라의 손에 쥐어졌다. 망설이지 않고 아버지가 출타하신 틈을 타 공작에게 달려갔다.

‘기회는 지금뿐이야.’

아녀자의 정숙을 빌미로 루스벨라를 구속하는 아버지는 숨이 막혔다. 저는 듣지도 못했던 데벤테르 후작 가와의 접촉이 달갑지 않았다. 최근 그녀를 통제하려는 강도가 높아진 것은 그 때문이리라.

‘결혼이라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면 할 수 있는 거라도 하고 싶어.’

인연의 찌꺼기를 버리자. 비우자.

아무도 환영하지 않던 건 예전이나 그때나 매한가지였다.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긴장은 사라지고 도리어 희열이 차올랐다.

‘아아, 진작에 이리 했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개미의 반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리 하렵니다.

[공작 각하, 여기 제 결혼식 청첩장이에요.]

한번 터진 말은 술술 그녀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추접스럽지도 않았고, 우아하고 의연하게 그녀는 그와의 인연에 종지부를 찍고 왔다.

“……다시 생각해도 짜릿하네.”

그녀는 내일 결혼할 남편의 얼굴조차 모른다. 파혼한 루스벨라처럼 소문만 무성한 남자. 사교계는 문제아들의 결합에 입방아를 찧고 있을 것이다.

‘마음껏 떠들라지. 곡식을 좇아 주워 먹는 참새처럼 쑥덕대기나 하라고.’

“그런다고 나는 기죽지 않아.”

나는 나를 지킬 거야. 공작보다 더한 무뢰배가 나를 뒤흔든다면 나도 그를 물어뜯어 버릴 거야.

희망은 신이 물어다 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지.

후.

입김 한 번에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촛불이 꺼졌다. 생일 케이크의 초를 불어 끄는 것과 비슷한 감상이 들었다.

나이를 먹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그녀의 정신이 한층 단단해졌음에 기뻐했다.

“이따위 결혼식, 확 망해 버려라.”

루스벨라는 오래도록 잠이 오질 않기를 바랐다. 그녀의 두 눈덩이 아래가 시커먼 그늘이 있을수록 꼴이 더 우스워질 테니까.

그러나 공작을 만나러 갈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몸은 그녀의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청개구리와 같았다. 수마가 루스벨라를 덮쳤다.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이었다.

‘내일아, 오지 마라.’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루스벨라가 눈을 떴을 때, 하녀들이 일렬종대로 문 앞에 서 있었다.

피할 수 없는 결혼식 당일의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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