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황가 식구들은 오늘도 (28/28)

외전. 황가 식구들은 오늘도

길리언과 이안은 빈말로도 사이가 좋은 부자라고 할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앙숙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두 사람이 드물게 통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오늘은 꼭 그 톡 튀어나온 이마빡을 때려줘라, 알겠니?”

“네, 아버지.”

그놈의 이마빡.

둘이 아침 식사 자리에서 수군거리는 것을 본 올리비아가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에게 정말 좋은 거 가르쳐주시네요, 이안.”

“그럼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입니다.”

“진담 아니거든요! 반어법이거든요!”

두 사람이 드물게 통하는 순간!

바로 황궁에 계신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가족들을 이야기할 때였다.

이미 열 살이나 된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음에도 이안은 스타티스를 대할 때면 여전히 어린아이 같았다.

“저도 진담입니다. 왜 제가 농담일 거라고 생각합니까? 황태자가 되어서 이마빡을 때릴 수 없는 존재가 되기 전에 얼른…….”

“이안!”

결국 참지 못한 올리비아가 큰 소리로 이안의 이름을 불렀다. 아내에게는 약한 대공은 곧장 눈을 여우처럼 가늘게 휘며 웃었다.

“네, 저도 농담이었습니다. 당신한테 혼나고 싶어서요.”

“헛소리 하지 말아요. 길리언, 너도 절대로 속으면 안 된다. 절대로, 절대로 황녀님의 이마를 때리면 안 돼.”

올리비아의 신신당부에,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던 길리언은 천사처럼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어머니.”

“예쁘기도 하지.”

곱게 대답하는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올리비아는 하트가 뿅뿅 튀어나올 것 같은 시선으로 길리언을 바라보았다. 길리언도 올리비아를 마주 보고 헤헤,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오로지 이안의 얼굴만 와락 구겨졌다.

“……저 가증스러운 녀석.”

“이안!”

“하하하, 오늘도 사.랑.스.럽.구.나. 길리언.”

올리비아의 꾸짖음에 이안은 억지로 웃으며 국어책을 읽듯 어색한 목소리로 길리언을 칭찬했다. 길리언은 해사하게 웃었다.

“아버지도 멋있으세요.”

“……와, 내가 졌다.”

어머니의 칭찬을 받겠다는 일념 하나로 평소에는 벗어놓은 양말을 보듯 하던 아버지를 멋있다고 칭찬할 수 있다니.

‘저건 인정해야 해.’

어떻게 저런 여우 같은 녀석이 태어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저렇게 여우 같은 녀석이니 쉽사리 당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상대 또한 스타티스를 능가하는 능구렁이였다. 이 나라의 첫 번째 황녀인 길리아나를 떠올리며 이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밉살맞은 아들이지만 스타티스의 딸에게 지는 꼴은 못 봐!’

그나마 위안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은 황궁에 있어서 가족이라고 해도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길리아나와 길리언이 마주하는 일도 1년에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나 될까.

그러나 바로 오늘이었다. 그 얼마 되지 않는 날들 중 하나!

“정말이지. 당신은 농담이겠지만 나는 철렁한단 말이에요. 하필이면 오늘같이 입궁하는 날 아침에 꼭.”

“미안합니다.”

이안은 눈을 흘기며 투덜거리는 올리비아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입술을 삐죽였다.

“정말 입궁하고 싶지 않네요. 도대체 아이를 얼마나 낳고 싶은 걸까요.”

“딱히 계획은 없으신 것 같던데요.”

“그냥 우리처럼 하나로 만족하시지.”

그렇다. 오늘 그들은 입궁을 해야 했다. 바로 스타티스가 네 번째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다!

이 번째라서 그런가, 이번에는 임신을 알아차리는 게 늦어서 벌써 안정기라고 했다.

‘언제는 둘, 많아야 셋일 거라고 했으면서 넷째를 가지다니.’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만큼 옛날 일을 떠올리며 이안은 코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첫째는 황후 소생이고 둘째 셋째는 반드시 후궁 소생으로 할 거라고 했지.’

그런데 현실은 후궁은 무슨. 황후랑 좋아서 죽고 못 사는 걸 모르는 사람이 이 제국에 없었다.

계속 불만을 표시하는 이안을 보며 올리비아는 어른스럽게 싱긋 웃었다.

“황가가 다산인 건 축복할 일이에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안은 올리비아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입궁은 너무 귀찮습니다.”

이안과 스타티스의 관계는 여전히 현실 남매였다.

* * *

타이론 대공 부부가 아들 길리언을 얻은 뒤로 다른 자녀가 없는 것과 달리, 황제 부부는 장녀 길리아나 아래로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체질이 다산 체질인지, 길리아나 때도 크게 진통하지 않고 아기를 낳았던 황제는, 그 뒤로도 건강하게 아기를 순산했다.

셋째 딸 때는 이런 여유까지 부렸다.

“딸 셋이라니, 진짜 소문대로 예쁜가?”

셋째 딸인 플로라는 아빠를 닮은 푸른 머리카락에 엄마를 닮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꼭 물의 요정처럼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셋째 딸이 예쁘다는 속설을 증명한 셈이다.

이안은 그때도 밉살맞게 이렇게 물었다.

“이제 자녀계획은 끝입니까?”

다소 무례한 질문에 스타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남편 같은 소리 하지 말게, 대공. 소름 끼치는군.”

그 뒤로 이안은 황제와 자녀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신도 소름이 끼쳤다나 뭐라나.

그런데 경사스럽게도 황제가 또 네 번째 임신을 한 것이다!

“저는 안 가요. 안 가고 싶습니다.”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도 이안은 철딱서니 없이 떼를 썼다. 올리비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나이가 몇 개인데 아직도 이렇게 귀여운 짓을…….”

올리비아의 말에 길리언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떼가 귀여워 보인단 말이야?’

어머니의 눈에도 콩깍지가 낀 것이 분명했다. 길리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니, 올리비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했다.

괜스레 뜨끔한 길리언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버지랑 함께 태황제 폐하를 뵙고 올게요.”

사실은 혼자 가려고 했는데! 착한 아이 코스프레를 하고 싶은 마음이 지나치게 컸던 바람에, 이안이라는 혹이 따라붙게 되었다.

올리비아는 아들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태황제 폐하를?”

“네. 지난번에 빌려주신 책을 돌려드려야 하거든요. 그리고 여쭈고 싶은 것도 있고요.”

“태황제 폐하께서 아시는 게 많기는 하지.”

‘하지만 주접을 너무나 길게 떨어서 들어주기가 힘들 텐데.’

아직까지 건재한 태황제는 더더욱 살집이 붙어서, 이제는 정말 웃지 않아도 웃는 만두 같은 얼굴이 되었다. 주접의 비결은 볼살이었는지, 그만큼 주접도 늘었다.

‘길리언과 태황제 폐하께서 이렇게 친했던가?’

올리비아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 있으니, 이안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나도 형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황제 폐하께서는 바쁘실 텐데 온 가족이 가서 시간을 빼앗을 필요가 뭐 있나요.”

“네? 그야…….”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임신을 축하하려고 입궁했으면, 당연히 온 가족이 황제를 뵈어야지.

‘그러나 황제 폐하께서는 정말 귀찮아하실 수도 있어.’

하지만 변수가 있었으니, 바로 스타티스의 성격이 평범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지난번 플로라 황녀님 때도 대놓고 귀찮아하셨으니까.’

결국 올리비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도 빨리 이야기가 끝나면 이쪽으로 와야 해요.”

“빨리 끝나겠습니까?”

“그거야 그렇겠지만.”

만두 태황제의 주접이 한두 시간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하여간 이따가 봐요.”

결국 황제궁에는 선물을 챙겨 든 올리비아만 들어섰다.

* * *

그리고 예상대로 스타티스는 무척 심드렁하게 올리비아를 맞이했다.

“뭐하러 또 왔는가, 대공비.”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고 말았다. 그리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임신을 축하드립니다.”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닌데 축하는 무슨.”

“그래도 축하해야 하는 일인 것은 맞지요.”

올리비아는 개인적으로 스타티스가 존경스러웠다. 임신 출산의 고통이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다고 해도, 네 번이나 하는 건 보통 담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저리 무뚝뚝하게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아이를 좋아하는 거야.’

좋아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넷이나 낳겠는가. 스스로 모성애가 적다고 생각하는 올리비아는 그런 황제가 조금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임신한 당사자는 터프하기 그지없었다.

“이놈의 임신, 아주 귀찮아 죽겠네.”

“폐하.”

전혀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내뱉는 말에, 시녀장이 낮은 목소리로 스타티스를 불렀다.

스타티스는 대놓고 귀를 후비적거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내가 아기가 싫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임신이 귀찮다고 말하는 것뿐인데 뭐가 문제인가. 진심으로 귀찮은 일인 것을.”

그리고 말하고 나니 뒤늦게 화가 치민 것인지, 평소에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 갑자기 손가락을 꼽아가며 무엇이 귀찮은지 세기 시작했다.

“옷은 자주 갈아입어야 하지, 몸은 무거워지지, 말도 탈 수 없고, 멀리도 갈 수 없지, 게다가 입맛도 변하고, 감정은 내 마음대로 컨트롤이 되질 않아. 이렇게 작정하고 성가시기도 어려운 노릇일세.”

“그건…… 그렇지요.”

더 말해봐야 본전도 못 찾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은 시녀장은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물러났다. 올리비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언변이 점점 늘어나시네.’

예전에는 만두 태황제 아래에서 어떻게 이렇게 쿨뷰티한 딸이 나왔을까 궁금했는데, 최근에는 만두 태황제도 젊었을 때는 과묵하지 않았나 가정을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황후 폐하께서는요?”

당연히 스타티스와 로메오가 함께 있을 줄 알았던 올리비아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스타티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황후라면 아주 중요한 임무를 받아 출타중이네.”

“중요한 임무라니요?”

“내가 갑자기 체리가 먹고 싶어서 말이야.”

“네?”

올리비아는 얼떨결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체리가 열릴 계절은 아니었다.

‘체리를 찾아 원정을 떠났구나.’

아랫사람을 시켜도 될 텐데.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 황후가 직접 따온 것을 먹고 싶다고 떼를 쓰신 모양이다.

‘꽉 잡혀 살고 있어. 아주 꽉.’

올리비아는 먼 데서 고생하고 있을 친구를 향해 속으로 삼삼한 위로를 건네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의외야. 두 사람이 이렇게 다정한 부부가 되다니.’

올리비아가 주근깨 가득한 스타티스의 뺨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스타티스의 바다처럼 푸른 눈이 올리비아를 향해 빙긋 휘어졌다.

“그대의 동생이 얼마 전에 심신안정에 도움이 될 만한 향초와 베개를 만들어왔다네. 덕분에 숙면을 취했어.”

“다행입니다.”

애니는 최근 그 실력을 인정받아, 황궁 약제사로 취직했다. 아카데미 시간강사도 겸직하는 자리였다.

‘역시 내 동생.’

올리비아가 따로 서포트 하지 않아도 애니도, 에릭도 척척 자기 앞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잘되었어. 잘되었어.’

올리비아가 팔불출 생각을 하며 할머니처럼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스타티스가 여상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대공은?”

“태황제 폐하께 문안을 드리러 갔습니다.”

“아바마마께?”

그 대답에 스타티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번엔 도대체 뭘 꾸미는 겐가?”

“그런 검은 속내로 만나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만.”

“그걸 진심으로 믿나?”

“…….”

올리비아는 흔쾌히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태황제의 주접은 아무 목적 없이 듣고 있기 괴로웠으니까!

‘정말 무슨 꿍꿍이가 있었나?’

하지만 태황제를 만나러 간 것은 완전히 우연 아니었던가. 황제를 만나기 싫다고 찡찡거리고 있을 때 길리언이 함께 가자고 해서.

‘꿍꿍이를 도모하기에는 지나치게 즉흥적이었어.’

그리고 가족들끼리 꿍꿍이는 무슨. 올리비아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완전히 우연이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그래? 왠지 아바마마께서 곧 무슨 소리를 듣고 들이닥치실 거 같은데.”

“임산부를 그리 괴로운 일에 밀어넣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공은 그럴 수 있어.”

“…….”

유감스럽게도 그 부분 또한 부정하기 어려웠다.

잠시 할 말을 고르던 올리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그래도 그이는 폐하를 무척 좋아하니까요. 폐하께 절대로 해가 되는 일을 꾸미지는 않았을 겁니다.”

“대공비.”

“예, 폐하.”

“말하면서도 스스로도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지?”

“……예.”

“아기 이야기나 하세.”

“예.”

올리비아와 스타티스가 한 가족이 된 지 벌써 10년.

이제 두 사람 사이에도 끈적끈적한 우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 * *

한편.

길리언의 돌발 행동 때문에 태황제를 마주하게 된 이안은,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상상을 능가하는 백여우라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이 녀석! 내가 지금까지 이런 강적을 상대하고 있었나?’

잔망의 정도가 범상한 여우 수준이 아니었다. 이안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과분한 적을 상대하고 있었구나!’

이안의 존경의 시선을 받고 있는 길리언은 무척 태연스러웠다.

보송보송한 금빛 머리카락은 잘생긴 이마를 살짝 덮었고, 둥글고 깊은 푸른 눈은 별처럼 반짝였다. 소싯적 제 아버지와 꼭 닮은 얼굴이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너무 뵙고 싶었어요, 큰아버지.”

큰아버지가 누구겠는가. 바로 이안의 형인 만두 태황제였다.

‘형님을 큰아버지라고 부르는 저 담력 보소!’

이안은 길리언이 태황제를 부르는 호칭에서부터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진정 놀란 이유는 사근사근한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허허허허, 큰아버지라니. 태황제 폐하라고 불러야지, 길리언.”

“싫어요. 저는 큰아버지가 너무 좋은걸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태황제 폐하라고 부르잖아요. 제게는 큰아버지가 특별해요. 큰아버지께도 제가 특별하면 좋겠어요.”

“원 녀석도.”

길리언의 웬만한 심장도 다 녹여버릴 불꽃 플러팅에, 만두 태황제는 통통한 볼살을 흔들며 기뻐했다.

그리고 그 화살은 아주 당연하게도, 태황제의 오른쪽에 앉은 금빛 머리카락의 소녀를 향했다.

“보았니, 길리아나. 여자애라면 저런 애교가 있어야지.”

빠직.

태황제의 말에 소녀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그 모습을 보며 이안은 제 손톱을 깨물고 말았다.

‘황녀를 엿 먹이기 위해, 제 어머니에게도 잘 보여주지 않는 애교를 부리다니! 길리언, 이 무서운 아이!’

그렇다! 길리언에게는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황궁에 입궁할 때부터 태황제를 만나겠다고 말한, 단 하나의 이유!

길리아나를 엿 먹이기 위해서!

‘황제 폐하를 뵈러 갔으면 이 역사에 길이 남을 명전투를 보지 못할 뻔했군.’

이안은 매우 흥분해서는 검투경기라도 관전하는 듯한 태도로 열심히 제 앞에 놓인 쿠키를 와삭와삭 씹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이러했다.

장소는 길리아나 황녀의 궁 앞 정원. 사람은 네 명이 앉아 있었다. 만두 태황제의 오른쪽에는 길리아나, 왼쪽에는 길리언, 그리고 마주 보는 자리에 이안.

자리 배치부터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 길리아나와 길리언이 서로 마주 보고 치열하게 주고받는 시선에서 불꽃이 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만두 태황제를 이용해서 갈굴 생각을 하다니! 그야말로 팔을 내어주고 어깨를 베어버리는 무지막지한 전법이었다.

‘저런 애교를 부리려면 본인의 정신력에도 타격이 있을 텐데.’

그리고 이안은 길리언을 잘 알았다. 제 어머니 외에는 이 세상 누구도 안중에 없다는 듯이 구는 이중인격자.

태황제라고 해서 저 아이가 내숭을 떨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내숭은 오로지 길리아나를 갈구고 싶어서!’

아들의 처절한 싸움에 이안의 눈에도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아닌 게 아니라, 갑자기 태황제에게 성별로 지적을 받은 길리아나는 심히 화가 나 보였다.

“할바마마, 여자애라면이라니요. 요즘 세상에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하는 행동이 다릅니까?”

길리아나의 지적에 만두 태황제는 불편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다르지 않지만 생물학적인 특성은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특성이라면요?”

“여성이 좀 더 섬세한 일을 잘하고, 아이들을 잘 다루는 것 같이 성별 차이에서 오는 다름 말이다.”

“예시가 완전히 틀렸어요, 할바마마. 그건 후천적으로 교육 가능한 부분이라고 폐하께서 말씀하셨다고요.”

“네 어머니 말은…… 어휴, 되었다. 그만하자꾸나.”

스타티스에게도 이미 몇 번이나 성별 가지고 간섭을 하다가 면박을 당한 적이 있는 태황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잘랐다.

물론 그런 행동이 길리아나의 성질을 더더욱 돋운 건 당연했다.

“왜 말을 하다가 마시나요? 한 나라의 지존이라면 말을 정확하게 맺어주셔야 아랫사람이 평안한 법입니다.”

“에잉! 나는 이제 지존이 아니다! 네 어머니에게 물려줬다고. 하여간 말꼬리 잡는 것까지 네 어머니를 쏙 빼닮았구나.”

“그리고 어머니라고 하지 마시고 황제 폐하라고 제대로 존칭해주세요.”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런데 어째 양상이 조금 이상했다. 길리아나를 특유의 눈치 없음으로 살살 긁어댈 줄 알았던 태황제가 오히려 거꾸로 갈굼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형님께서도 저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시다니.’

이안은 신선한 눈으로 길리아나에게 제대로 반박도 하지 못하고 신경질을 내는 태황제를 바라보았다.

‘어느 쪽이 당하든 간에 꿀잼이로다.’

입안에 쉴 새 없이 과자가 술술 들어갔다. 재미있는 것을 보느라 흥분되어 있는데 입도 쉬지 않고 움직여지다니,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한차례 된통 호통을 쳐서 태황제의 입을 다물게 만든 길리아나가 대뜸 길리언을 노려보았다.

“그건 그렇고 황녀궁에 무슨 걸음이지, 대공자. 연통도 없이 방문하는 건 무척 무례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겠지?”

매서운 시선, 표정 없는 얼굴, 짧게 친 금빛 머리카락에 주근깨 뿌려진 얼굴이 제 어머니와 꼭 닮았다. 그나마 눈동자만 로메오를 닮아 노을처럼 선명한 주홍색이었다.

하지만 길리언도 만만치 않은 천적이었다. 길리언은 아예 착한 아이 전법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황녀께서 바쁘셔서 잊으셨나 봐요. 제가 분명 지난달에 다음 입궁 때는 황녀를 보러 가도 되냐고 물었을 때 된다고 하셨는데. 게다가 나는 황녀의 ‘오촌 숙부’잖아요. ‘오촌 숙부’가 ‘오촌 조카’를 만나는 데 연통이라니 너무 딱딱합니다.”

으드득.

여우 같은 말에 길리아나의 입술에서 으드득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안도 입술을 떡 벌렸다.

‘오촌 숙부라니! 또 강공!’

엄밀하게 촌수를 따지면 길리아나보다 길리언이 한 줄 위였다. 지금 길리언은 그것을 무기로 휘두르지 않는 척 내숭을 떨면서 휙 던진 것이다.

‘길리언, 무서운 아이!’

이안은 새삼 또 자신의 아들이 엄청난 호적수라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길리아나는 뺨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가까운 사이라도 더더욱 예의를 지켜야지. 오래 볼 사이라면 더더욱.”

길리아나의 말은 정론이었다. 그러나 그 공격을 길리언은 또다시 연약한 코스프레를 하며 흘렸다.

“그런 것치고, 조카님께서는 제게 하대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이 숙부를 가까이 여기시면서 연통을 운운하니 좀 서운합니다.”

“그 부분은 제가 잘못했군요, 대공자.”

또다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이안은 괜스레 길리아나의 턱관절을 걱정했다.

‘이쯤 몰아붙였으니 되었어. 더 이상은 길리아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거야. 슬슬 내가 중재를 해야…….’

그렇게 이안이 생각했을 때였다.

길리언이 한 번 더 길리아나에게 말로 펀치를 날렸다.

“대공자라니 너무 정이 없네요. 저랑 가족이 아니었나요. 숙부님이라고 부르세요, 조카님.”

“길리언!”

화들짝 놀란 이안이 아들을 불렀다. 하지만 너무나 늦은 만류였다.

결국 길리아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야, 적당히 하자. 우리?”

꽈당.

길리아나가 박차고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길게 뻗은 다리가 태황제와 함께 앉아 있는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테이블에 반쯤 몸을 올린 길리아나는 손을 뻗어 길리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길리언은 겁먹은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것도 예의의 한 종류인가요, 조카님.”

그 바람에 성질이 난 길리아나의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켜 올라갔다.

“적당히 하자고 했지, 길리언? 한 대 처맞은 거 가지고 자꾸 이렇게 쪼잔하게 굴래?”

자신의 아들을 멱살잡이하는 조카딸을 만류하려던 이안은 돌처럼 굳고 말았다.

‘한 대 처맞았다고?’

선수가 길리언이 아니고 길리아나였단 말인가!

길리언은 멱살 잡혀서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한층 더 가증을 떨었다.

“한 대 처맞았다고 하기엔 너무 아팠는걸요, 조카님.”

“한 번만 더 조카님이라고 말하면 네 이 다 부숴버린다.”

“으으, 폭력적이야. 야만인.”

“이게 진짜!”

길리아나가 길리언의 멱살을 잡고 흔들려고 했을 때였다.

이 난리통을 잠재운 것은 태황제였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주먹다짐을 해?!”

매일 빙글빙글 웃기만 하던 태황제가 노호성을 지르니 그 박력이 대단했다. 길리아나는 바로 손을 떼고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길리언은 얄밉게 어깨를 으쓱했다.

“주먹다짐은 쟤만 했어요.”

“……야.”

길리아나는 다시 도끼눈을 뜨고 으르렁거렸다. 태황제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탕 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듣자 하니 이 자리에서만 일어난 게 아닌 거 같은데. 빨리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해?”

“…….”

길리아나는 다시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길리언은 또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쟤는 말 못 할걸요. 쟤가 잘못했거든요.”

“뭔데?”

태황제가 길리언을 바라보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길리아나가 손날로 목을 날리며 으르렁거렸다.

“너 말하면 뒈진다.”

“길리아나!”

“…….”

이름을 부르자 길리아나는 다시 찔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길리언은 구겨진 셔츠 깃을 펴며 대답했다.

“지난번에 황궁에 찾아갔더니 길리아나가 가만히 있는 제게 다가와서 다짜고짜 정강이를 걷어찼어요. 그것도 승마 부츠를 신고요!”

“뭐?”

태황제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으나, 이안은 짚이는 바가 있어서 이마를 탁 쳤다.

‘폐하!’

아무래도 그쪽 집안에서도 조기교육을 진지하게 시켰던 모양이다!

예전부터 이안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스타티스가 황태자가 되기 전에 이마빡을 때렸어야 했어.”

스타티스도 마찬가지로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더 자라기 전에 정강이를 까서 넘어뜨리는 거였는데.”

양쪽 다 처음에는 그냥 하는 말이었다면, 점점 시간이 흘러 서로 한 방씩 먹이면서 간절한 진심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걸 2세에게도 조기교육을 했고.

진상이 드러난 상황에서, 길리아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렸다.

“어마마마께서 꼭 한 번만 때려주라고 신신당부하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별생각 없이 발이 나갔을 뿐이에요.”

“그래서 승마 부츠까지 신고 걷어찼다고?”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 싶어서.”

“아이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태황제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었다. 길리언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안 했어요. 아무리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셔도 다른 사람을 때리는 건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길리아나는 그런 생각도 못 했나 봐요.”

“너 입 다물어.”

“사실을 말하는데 함부로 핍박하지 말아주세요, 조카님.”

“이 자식이 진짜.”

“메롱.”

또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길리아나와, 메롱메롱 약을 올리는 길리언 때문에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졌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길리언을 안아 들었다.

“이건 모두 제 잘못입니다. 당분간 집에서 반성하며 조용히 지내겠습니다.”

“아버지?”

어쨌든 길리아나는 장차 황제가 될 귀한 몸이었다. 농담으로라도 이마를 때려라 이런 말은 안 했어야 했다.

이안은 흐려진 얼굴로 재차 고개를 숙였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왜 그렇게 사죄를 해요, 아버지? 나는 하나도 잘못한 거 없어요. 쟤가 날 때렸다니까요.”

표면적으로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들을 잘 알고 있는 이안은 분명 맞을 소리를 했을 거라는 것에 오른팔도 걸 수 있었다.

“입 다물어, 길리언. 그럼 지금 길리아나를 약 올리는 건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하니?”

“…….”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아버지가 정말 화났다는 걸 눈치챈 길리언이 다시 얌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침통한 얼굴로 앉아 있던 만두 태황제가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반성한다고 나아질 게 무엇이 있니?”

“예?”

뜻밖의 반문에 이안은 눈을 깜빡거렸다. 태황제의 시선이 남매처럼 닮은 두 아이를 향했다.

“길리언, 길리아나. 너희는 가족이란다. 험한 세상에서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데 이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다니. 이 할아비는 실망이구나.”

태황제의 말에 길리언은 ‘큰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아닌데요.’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치졸한 말꼬리를 잡지 않은 것은 순전히 길리아나 때문이었다.

길리아나는 명백히 불쾌한 표정으로 길리언을 흘겨보았다.

“대공자가 왜 제 가족입니까? 저는 절 도울 동생이 둘이나 있는걸요.”

“길리아나!”

길리언이야 형제 하나 없이 불쌍한 신세라지만 자신은 자매가 둘, 그리고 곧 하나가 더 생길 것이었다.

길리아나는 한술 더 떠서 하고 싶었던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리고 할바마마께서도 형제를 경계하셨지 않습니까. 저는 대공자와 친하게 지내라는 말씀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태황제의 시선이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있는 이안을 향했다.

‘형제를 경계했다고.’

그 부분에서 태황제는 참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경계한 건 사실이었지만, 더없이 아끼고 사랑한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새어머니는 무참하게 살해했지만, 방긋방긋 웃는 어린아이는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 그게 동생이고, 가족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태황제는 성질이 났다. 혈통으로 흠이 잡혀서 형제를 견제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과 달리, 이 녀석들은 서로 견제할 이유가 없지 않나!

‘나도 이안과 사이좋게만 지낼 수 있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터.’

누군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도 상황이 그렇지 못했는데. 태평성대에 복에 겨운 녀석들이었다.

태황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차라리 잘되었구나.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든다.”

“뭐가 말입니까?”

“이안.”

이안은 자신의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태황제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런 목소리로 그를 부른 것치고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저절로 불길함이 몰려왔다.

태황제는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길리아나를 데리고 가서 넷째 황손이 태어날 때까지 돌보아주렴.”

“예?”

“네?”

“할바마마!”

이안과 길리언은 멍한 표정을 지었고, 길리아나는 버럭했다. 태황제는 고개를 흔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몸이 무거워지실 때마다 태황후의 궁에서 머물렀지만, 최근에는 태황후도 몸이 좋지 않으니 힘들다는 걸 알지 않으냐. 어디 적당한 곳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인데 잘되었다. 이번 기회에 길리언과 친해지거라.”

태황제의 말 대로였다. 황제가 임신하고 황후의 관심도 그쪽으로 쏠려 있을 때 황녀들의 교육의 공백이 생길까 하여 임신 기간 동안 육아는 태황후가 전담했었다.

하지만 올해는 태황후의 건강이 무척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올해가 마지막이려나 봐요. 그러니까 자꾸 찾아오지 마요. 귀찮으니까.”

매정한 태황후의 말을 떠올리던 태황제의 얼굴이 저절로 침통해졌다. 그가 황좌에서 완전히 내려오고 나서 이안과 비로소 진정한 형제가 된 것처럼, 그와 태황후는 이제야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나둘 진실 되게 꺼내고 있었다.

조금 더 일찍 마음을 털어놓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태황후와도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

평생 다정한 남편이 아니었으나, 가는 길까지 외롭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몇 개월만 타이론 대공저에서 지내다가 오너라.”

“그건…….”

반박하려던 길리아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말았다. 제 아버지 품에 안겨서 눈치를 살피던 길리언이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길리아나하고 충분히 친해요, 큰아버지. 그렇지, 길리아나?”

“웃어넘기려고 해도 소용없다.”

“피.”

그동안 애교를 부리면 다 넘어갔던 큰아버지가 단호하게 구니, 길리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뜻밖의 결론을 조마조마한 눈으로 살펴보던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황제 폐하께 말씀을 드리는 게 옳을 거 같습니다.”

아니, 이 양반이 자기 자식들도 아닌데 왜 다짜고짜 타이론가로 가는 것을 기정사실로 만든단 말인가.

‘폐하께서도 거절했으면.’

이제 기댈 곳은 스타티스뿐이었다. 이안은 길리언을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 * *

“……그래서 지금 이렇게 우르르 몰려온 건가요?”

황제와 몇 마디 덕담을 나누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채비를 갖추었던 올리비아는 우르르 몰려온 태황제 등등 때문에 황제의 곁에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스타티스의 반듯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길리아나를 타이론 대공저에서 지내게 하라고요?”

“그렇습니다, 황상!”

태황제는 묘하게 흥분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짐은 이번 사태에 황상과 타이론 대공 두 사람의 책임이 지대하다고 생각하며…….”

“아주 옳으신 생각이십니다!”

태황제의 서두를 듣는 순간 스타티스는 박수를 치며 태황제의 의견에 적극적인 동의를 표했다.

‘서두의 웅장함으로 보건대 저 설교는 두 시간짜리였다.’

스타티스의 빠른 결단에 길리아나는 몹시 배신감을 느끼는 표정으로 스타티스를 응시했으나, 그것은 알 바 아니었다.

‘사실 타이론 대공가 정도면 아주 훌륭한 곳이고.’

그동안 관례대로 태황후에게 맡길 수 없으니, 그다음 후보가 타이론 대공저인 것은 당연했다. 스타티스는 올리비아를 응시했다.

“타이론 대공비만 동의하면 될 것 같군. 우리 아이들을 맡아주시겠는가?”

태황제가 지칭한 것은 길리아나였는데, 어느 순간 황제의 말에서는 ‘아이들’로 복수가 되어 있었다. 올리비아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문질렀다.

‘황녀님들을 지내게 해달라고?’

올리비아의 시선이 잔뜩 뿔이 난 길리아나에게로 향했다. 길리언과 똑 닮은 얼굴 때문인지, 꼭 딸이 하나 더 생긴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딸이 없었지.’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인연이 없는 것처럼 딸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다.

‘이참에 딸 가진 엄마가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한 올리비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타이론의 영광이지요.”

“……아아.”

멀리서 ‘못한다고 해. 안 한다고 해.’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던 이안은 아내의 깔끔한 대답에 좌절하고 말았다.

* * *

그래서 돌아가는 길.

타이론 대공 부부와 길리언만 태웠던 조촐한 마차는 북적북적해져서 황궁을 빠져나왔다. 마차 안에 탄 사람들은 이러했다.

황제 부부의 장녀, 길리아나 10세. 조용하고 얌전한 차녀, 로즈 8세. 그리고 로메오를 꼭 닮은 서글서글한 막둥이 플로라, 4세.

“…….”

서로서로 눈치를 살피느라 마차 안은 조용했다. 먼저 입술을 연 것은 다름 아닌 막내 플로라였다.

플로라는 푸른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올리비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아줌마 알아! 아바마마 친구야!”

“아줌마…….”

신선한 호칭에 올리비아의 몸이 휘청했다.

‘아줌마인 것은 맞지. 아줌마인 것은 맞는데.’

나이로 보나, 사회적 위치로보나 아줌마가 된 것은 맞았는데.

‘직접 들으니 미묘해!’

기분 나쁠 말이 아닌데 묘하게 찝찝한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올리비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뭐라 말을 못 하고 있으니, 차녀인 로즈가 동생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타이론 대공비 전하라고 불러야 해, 플로라.”

“타이요오오?”

네 살짜리 아가가 어떻게 그 기나긴 호칭을 발음하겠는가. 안 되는 발음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플로라를 보던 올리비아가 빙긋 웃었다.

“그냥 편하게 숙모라고 불러요, 플로라.”

“숙모?”

“좋아요.”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플로라의 시선이 이번에는 올리비아 곁에 앉은 이안을 향했다.

“아저씨가 숙모 남편이야?”

“아저씨…….”

이번에는 이안이 휘청했다. 그가 어디 가서 아저씨라는 말을 들어봤겠는가.

‘마흔 살 넘게 혼자였던 지난 생에도 그런 말은 들어본 적 없을걸.’

올리비아는 당황한 이안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어버버 거리던 이안은 자신을 보고 키득거리는 올리비아를 보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난처한 모습을 보고 좋아하시다니 너무합니다.”

올리비아는 어린애를 다루듯 이안의 머리카락을 토닥토닥해주며 대답했다.

“아니, 시무룩한 모습이 귀여워서요. 그리고 아저씨인 건 사실이잖아요.”

“이런.”

혀를 차는 얼굴은 깔끔하기 그지없었으나, 머릿속은 새빨갰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그녀의 손목을 당장 틀어쥐고 얕게 깨물고 싶은 충동이 불쑥 밀려들어왔다.

‘어디, 아저씨라고 불린 김에 얼마나 음흉한지 보여줄까.’

이안이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올리비아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을 때였다.

플로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순수한 어조로 말했다.

“뽀뽀해요? 둘이?”

“!!”

보는 눈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안은 후다닥 올리비아에게서 멀어졌다. 그건 올리비아도 마찬가지였다.

올리비아는 헛기침을 큼큼하며 대답했다.

“뽀, 뽀뽀라니. 그럴 리가 있겠니.”

“어어, 뽀뽀가 아닌가?”

플로라는 천연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손뼉을 짝 치며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하긴! 어마마마가 뽀뽀는 여자가 하는 거랬어요. 어마마마가 먼저 이렇게 꽉 붙잡고…….”

“조용히 해, 플로라.”

이번에도 플로라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차녀 로즈였다. 플로라의 말에 올리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황제 폐하께서 적극적이구나.’

왠지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막상 절친한 친구의 부부관계 이야기를 들으니 또 마음이 영 이상했다.

‘로메오도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로메오보다 올리비아가 더 먼저 결혼했으니, 올리비아와 이안의 꽁냥꽁냥 또한 그쪽이 먼저 경험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민망한 것 같기도.’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올리비아는 새삼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을 여기저기 자랑한 것 같아서 민망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사이좋은 부부로는 로메오네도 만만치 않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신기하게 다 조금씩 섞여 있네.’

올리비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세 자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신기한 눈으로 타이론 대공 가족을 살펴보는 것은 세 자매도 마찬가지였다. 플로라가 또랑또랑한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아저씨는 숙모랑 무슨 사이예요? 우리 가족이에요?”

“당연히 가족이지. 이 아저씨는 네 할바마마의 동생이란다.”

“할바마마의 동생?!”

플로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말했다.

“그러면 아저씨가 아니라 할아버지네요!”

“헉.”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는 명칭에 이안은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틀리지 않아!’

반박할 수 없다는 게 제일 문제였다. 할아버지의 동생이니 이안의 정식 호칭은 작은 할아버지였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숙모가 아니라 작은 할머니군요.”

올리비아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제대로 촌수를 따지면 그랬다. 올리비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길리언과 플로라를 번갈아가면서 보았다.

“내 자식이 이렇게 어린데, 내가 벌써 할머니라니…….”

모두 만두 태황제와 이안의 나이 차이가 큰 탓이었다.

“하하하.”

할 말을 잃은 부부를 보며 길리언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평소의 내숭을 벗어던지고 그 나이대 소년처럼 웃는 길리언의 모습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런 길리언을 바라보는 플로라의 눈에도 뾰로롱 하트가 솟아났다. 플로라는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왕자님!”

“응?”

“오빠야는 왕자님이야! 왕자님!”

플로라는 잔뜩 흥분해서 길리언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슬쩍 본 길리언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플로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주님.”

얼굴을 이안을 쏙 빼닮은 소년은, 센스도 제 아버지를 쏙 닮았다.

자신의 손바닥에 반밖에 차지 않는 플로라의 손을 부드럽게 쥐고는, 길리언은 진짜 동화 속 왕자처럼 손등에 입을 맞췄다.

“꺄아!”

그리고 그 행동에 플로라가 쏙 빠져버린 것은 당연했다. 플로라는 마차 안이라는 것도 잊고, 폴짝 뛰어올라서는 이안의 목에 매달렸다.

“나 왕자님하고 결혼할 거야!”

“그거 감사한 말씀이네요.”

“왕자님! 왕자 오빠야!”

막냇동생의 행동에 로즈는 안절부절못했고, 이안과 올리비아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한심해.’

길리아나는 흘긋 그쪽을 돌아보고는 턱을 괴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 * *

늘 차분하던 타이론 대공저가 갑자기 북적거렸다. 갑자기 예정에 없이 머물게 된 깜찍한 세 명의 귀빈 덕분이었다.

“아이참, 여자아이들이 머물 만한 방이 없는데.”

올리비아는 하녀장과 손님방 분배를 하다가 울상을 지었다. 아들만 하나 있는 데다가, 애니도 독립했기에 최근 타이론 대공저에는 아기자기한 방이 하나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나쯤 지난달 인테리어할 때 만들어둘 것을.”

“여자아이라고 꼭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한다는 건 편견 아니겠습니까.”

하녀장이 울상이 된 여주인을 달래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세상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순전히 내 자기만족이야! 여자아이에게는 장난감이 가득한 핑크빛 방에, 레이스 커튼이 드리운 침대가 잘 어울리잖아.”

“글쎄요.”

소싯적의 스타티스를 꼭 빼닮은 길리아나를 떠올리며 하녀장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스타티스에 대한 최근 주변국의 평가는 ‘말 그대로 생물학적 성별만 여자인 황제’였다.

‘길리아나 님도 그런 성품 같던걸.’

걸음걸이가 어찌나 당당한지, 오히려 남자아이인 길리언보다도 발자국 소리가 선명했다.

‘비전하께서는 젊으신데, 이상하게 고리타분하실 때가 있단 말이야.’

스타티스가 황제가 되고, 제국에는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이제 길에서는 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여성들의 모습이 결코 드물지 않았으며, 분홍색이나 노란색 같은 여성의 색을 입은 남자들도 자주 보였다.

‘게다가 막내 황녀님만 빼면 다들 나이가 그리 어리시지도 않은걸.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하녀장이 젊은 대공비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임시 손님방을 배정하고, 내일부터 사람을 불러서 단장하는 수밖에. 내일 아침 일찍 마티니 백화점의 유아용품 담당자와 가구 담당자를 들라고 해.”

올리비아는 최대한 그렇게 자신과 타협했다.

하녀장은 한 번 더 올리비아를 말릴까 고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열심히 고민하는 올리비아의 모습조차도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비전하께도 갑자기 딸이 생긴 기분이신가 보네.’

한 번쯤 이렇게 평소 취향과 다른 것들도 사보고, 꾸며보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하녀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세 자매의 방은 예전에 애니가 쓰던 방을 비롯해서 올리비아의 방과 가까운 방들로 정해졌다.

“나는 왕자님하고 같이 있고 싶은데.”

막내 플로라가 이렇게 웅얼거렸으나, 올리비아는 칼같이 그 칭얼거림을 잘라냈다.

“타이론의 모든 방은 계단을 기준으로 오른쪽은 남자, 왼쪽은 여자랍니다. 예외는 없어요.”

“히잉, 할머니 너무해.”

“…….”

할머니라는 호칭에 다시금 올리비아는 할 말을 잃었다.

길리언은 플로라가 마음에 들었는지, 플로라의 왕자님 타령에 정중하게 맞춰주었다.

“밤에는 각자 방에서 지내야 하지만, 자기 전에는 얼마든지 함께 있을 수 있잖아요. 같이 정원 산책을 떠날까요, 공주님?”

“좋아요, 왕자님!”

우아하게 내밀어지는 손을 플로라가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의젓하게 잡았다.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어린 황녀의 손을 에스코트하여 정원으로 나서는 길리언의 뒷모습이 제법 신사 같았다.

하녀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올리비아에게 말했다.

“공자님도 동생이 생겨서 좋으신 가봐요.”

“그러게. 의젓한 길리언을 보니 감회가 새로워.”

‘평생 아기 같을 줄 알았는데.’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할 것을 걱정했던 아이가, 훌쩍 커서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동생을 돌보아주고 있었다.

‘기특해.’

올리비아는 감격해서 눈물을 글썽였다. 하녀장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훈훈한 이 분위기에서, 딱 한 사람만 불만에 가득 찬 듯 딱딱했다. 바로 길리아나였다.

길리아나는 휙 돌아서며 말했다.

“저는 방에 들어가서 쉬겠습니다.”

“아, 그래요.”

사실 별로 피곤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쉰다는 말도 어폐가 있었다. 하지만 딱히 잡을 이유도 없기에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리아나는 타고나길 지배자인 것처럼 처음 오는 집인데도 아랫사람을 부렸다.

“거기 너, 네가 안내하도록. 내 방이 어디지?”

“이, 이쪽입니다.”

“…….”

하녀의 안내를 받아서 저벅저벅 걸어가는 뒷모습 또한 낯선 곳에 오게 된 열 살짜리 아이답지 않게 당당했다.

반듯하게 뻗은 허리와 살랑이는 금빛 머리카락을 보며 올리비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 길리언이랑 같은 나이인데 분위기가 엄청 다르네.”

“그런가요?”

하녀장이 고개를 기울이자, 올리비아는 팔짱을 끼고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응. 우리 길리언은 애교도 많고, 칭얼거림도 많은 것이, 아기 같잖아. 아까는 훌쩍 자란 것 같아서 조금 서운했는데, 길리아나 황녀를 보니 다시 어리긴 어리구나 싶어.”

‘그건 아마 대공비 전하 앞에서만 그러실 텐데요.’

하녀장은 현명하게 그 대답은 목 안으로 삼켰다.

두 자매와 달리 로즈 황녀는 이런 부탁을 했다.

“저는 책을 읽고 싶어요.”

“그럼 서재로 안내할게요. 황궁보다는 당연히 부족하지만, 타이론의 서재에도 그럭저럭 볼 것이 많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각자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흩어졌다. 올리비아가 세 자매에 대해서 더 하녀장에게 지시를 내리려고 할 때였다.

“비전하, 황궁에서 짐과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안내하거라.”

세 자매보다 준비가 늦은 짐이 이제야 도착한 모양이었다. 함께 온 사람은 아직 어린 플로라를 돌보는 유모와, 세 자매의 교육을 책임지는 담당관이었다.

“설령 타이론 대공저에 머문다고 해도 황녀님들의 교육은 예정처럼 이어집니다. 그 스케줄은 이렇습니다.”

“그렇군.”

대공저에 온다고 배움을 게을리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스케줄 표를 받아본 올리비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말 많은 걸 배우는구나. 특히 길리아나 황녀는.’

검술에 전술학까지, 꼭 지금 배워야 하는가 싶은 과목들이 시간표를 꽉 채우고 있었다.

‘미래의 황제 폐하이시니 당연한가.’

그래도 이렇게 많은 것을 배우면 지치지 않을까?

저 작은 아이가 어떤 중압감과 싸우고 있을지, 올리비아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걱정이 무색하도록 길리아나는 자신의 스케줄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꼭 사람이 아니라 기계 같았다.

‘같은 집에 있는데도 얼굴을 볼 시간이 별로 없네.’

아침 식사 시간과 저녁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길리아나의 일정은 황궁에서 온 교육관이 짠 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따로 올리비아와 시간을 보낼 틈이 없었다.

불안불안해하던 올리비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침 식사 시간에 물었다.

“힘들지 않나요? 쉬는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아요?”

“저는 괜찮습니다.”

올리비아의 물음에 길리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 미래를 위해 하는 고생이니 조금도 고되지 않습니다.”

“어른스럽기도 해라.”

미래를 위해서 현재 하고 싶은 일들을 참는다. 정말이지 어른스러운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열 살이잖아.’

길리언보다 고작 며칠 빠른 생일.

‘그 나이에 미래를 위해 참을 수 있는 건가? 요즘 애들은 다 나보다 빠른가?’

올리비아는 자신의 열 살 때를 기억해보았다. 이모는 아팠고, 아직 어린 애니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던 기억만 났다.

‘나는 사실 미래를 기대할 생각 자체를 못했었지.’

미래를 기대하는 것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는 좋은 걸지도 모르지만.’

올리비아는 길리아나의 심리상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았다.

바로 이안이었다.

‘이안이라면 잘 알겠지.’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길리아나 황녀님이 그렇게 대답했다고요?”

듣고 바로 답을 내려줄 줄 알았던 이안은 입을 틀어막고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닌가.

“왜 그래요, 이안?”

올리비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안은 한숨을 폭 내쉬며 대답했다.

“예전의 폐하와 너무 꼭 닮아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왜 괴로워요?”

스타티스를 닮으면 좋은 것 아닌가. 이해를 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올리비아를 마주하며 이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를 늘 높게 평가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올리비아. 저도 어린 시절이 있었답니다.”

태어날 때부터 신사였을 것 같은 이 남자에게도 폭풍 같은 사춘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열심히 생성해낸 흑역사도!

“저와 황제 폐하는 못 말리는 앙숙이었고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철없었던 사건이 여럿 있습니다.”

정말로 부끄러워서 이안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올리비아는 그런 그를 보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조금 듣기는 했어요.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천사처럼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면서요?”

두 사람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콘라드로 가는 마차 안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이안이 왜 이중인격자인지 열심히 설명했지.

“……폐하께서 그 이야기를 하십니까?”

“네.”

“그 뒷이야기는 안 하시죠?”

“뒷이야기가 있어요?”

그런데 그조차도 자기 유리한 대로 편집한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이안은 무척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올리비아에게 빠른 어조로 일러바쳤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일으켜드리기 위해 내민 제 손을 힘껏 잡아당겨서 저도 바닥을 뒹굴게 만드셨답니다.”

“어머나.”

두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림이 순식간에 그려졌다. 황족 체면에 때리지도 못하고 낙엽을 잔뜩 붙인 채로 노려보는 두 금빛 머리카락의 아이들도.

‘귀여웠을 거 같은데.’

올리비아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왜 이안과 스타티스가 이렇게 견원지간이 되도록 주변에서 내버려두었나 했더니.

‘귀여워서 웃으면서 넘어가곤 했었나 보다.’

역시 아이들은 적당히 혼내면서 키워야 한다니까. 올리비아는 오늘 또 한 가지 배웠다.

그 말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이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그분도, 옛날부터 순 자기 유리한 대로만 말한다니까요.”

이안 자신도 그렇게 행동하면서, 상대만 탓하는 것이 아주 현실 남매다웠다.

‘정말 가끔은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

그리 생각하며 올리비아는 미간을 구겼다. 바로 그때였다. 침울한 척 가라앉아 있던 이안의 시선이 은근히 올리비아를 향했다.

“그건 그렇고, 우리 무척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것 같은데.”

서른을 막 지난 올리비아는 여전히 생생하고 아름다웠다. 어깨를 살짝 스치는 긴 기장의 단발머리는 이안이 아무리 바빠도 몸소 가위를 드는, 그의 자랑거리였다.

‘우리 아내는 머리를 잘라도 예쁘고, 길러도 예쁘고.’

눈부신 은빛 머리카락이 스르륵 물처럼 흘러내리고 드러나는 흰 목덜미가 그의 심장을 한 차례 들었다 놨다.

‘어떻게 이렇게 늘 설레게 하는지.’

“올리비아.”

이안이 명백한 목적을 담아서 올리비아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올리비아가 갑자기 주먹을 꽉 쥐고 큰 소리로 말했다.

“역시 안 되겠어요, 이안!”

“네?”

막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려고 했던 이안은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졌다.

올리비아는 이안이 음흉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다는 것도 모른 채, 자신의 생각을 쏟아냈다.

“아무래도 제가 우리 길리언의 교육에 너무 무관심했나 봐요.”

“네에?”

왜 이야기가 길리언으로 튄단 말인가? 분명 길리아나가 어른스럽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잖아?

“길리언은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하지만 길리아나는 길리언보다 훨씬 많은 걸 배우는걸요. 길리언도 공국을 물려받아야 하니 길리아나 못지않게 알아야 하는 것이 많은데.”

“그거야…….”

태황제의 권력견제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은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찌저찌 다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다 타고난 대로 사는 거죠. 어련히 잘할 수 있으려고…….”

거기까지 말했던 이안은 자신을 흘겨보는 올리비아의 시선에 곧장 태세를 바꾸었다.

“생각해보니 당신 말이 옳습니다. 길리언은 지나치게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죠.”

대답하고 나니 문득 좋은 생각도 떠올랐다.

‘길리언이 바빠지면 나랑 올리비아가 함께 보낼 시간도 많아지는 거잖아?’

지금은 티타임마다 길리언까지 끼어서 셋이 보내고 있었지만, 다시 단둘이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이안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살가운 태도로 말했다.

“생각해보니 길리언도 벌써 열 살이군요. 공부를 열심히 할 때도 되었지요. 저도 경영학과 세무학에 입문한 게 그때였습니다.”

“역시 그렇죠?”

이안의 말에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악기도 하나 배워야겠고, 예법에는 능한 편이지만, 이제 실무도 익혀야 하는데…….”

열심히 고민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이안은 올리비아의 귓가에 입을 쪽 맞췄다.

* * *

타이론 대공저에 온 다음부터 줄곧 길리아나는 저기압이었다. 그 이유는 온전히 길리언 때문이었다.

‘저 애가 뭐라고.’

길리언 타이론. 길리아나에게는 오촌 숙부에 해당되는 동갑내기 ‘동생’.

생일도 자기보다 느린 주제에 가끔 숙부 행세를 하며 속을 박박 긁으면 그렇게 성질이 날 수 없었다.

‘저렇게 속이 시커먼 애가 뭐가 좋다고.’

길리언이 길리아나에게 묘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듯, 길리아나 또한 길리언이 꼴 보기 싫었다.

무엇보다 길리언은 길리아나가 가지지 않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관계 완급 조절에 능한 점이라든가.

‘로즈도 플로라도 다 저 애한테만 쏙 빠져서.’

길리아나는 창밖을 흘긋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길리언과 두 여동생이 보였다.

“여기 있습니다, 공주님.”

“감사해요, 왕자님!”

웃으면서 무엇을 주고받길래, 무엇인가 해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더니 토끼풀을 얼기설기 얽어서 만든 화관이었다.

‘저게 뭐람.’

화관 같은 건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었다. 보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쟤는 도대체 저런 걸 어디서 배워서.’

곱상한 얼굴에 어울리는 짓을 잘도 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다 마음에 안 들어.’

정강이를 먼저 발로 찬 행동에 감정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설마하니 그걸로 이렇게까지 두고두고 뒤끝을 남길 줄 몰랐지만.

‘그냥 조용히 있어야지.’

여우 같은 길리언과 맞붙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길리아나는 타이론가에 있는 동안 조용히 지내기로 결심했다.

‘사실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으면 만날 여유도 없고.’

길리아나는 이미 충분히 바빴다. 굳이 길리언과 트러블로 더 바빠질 이유도 없었다.

‘그쪽이 찾아오지 않으면 만날 일도 없어.’

그런데 길리언의 마음은 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서재로 수업을 받으러 가고 있는데, 복도 길목에 길리언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길리아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길리아나의 으르렁거림에도 안 들리는 것처럼 길리언은 팔짱을 끼고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길리아나는 발끝으로 길리언의 발뒤꿈치를 살짝 쳤다.

“길 가는데 방해되잖아. 비켜.”

넓은 복도이니 피해서 가도 그만인데, 굳이 물러나지 않는 것은 순전히 길리아나의 성질 때문이었다. 길리아나가 톡 건드리자, 그제야 길리언은 고개를 돌려서 길리아나를 마주 보았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야, 공부 작작 해라.”

타이론 공작부인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껄렁한 말투였다.

‘여우 같은 녀석.’

길리아나는 정말 이렇게 하나하나 다 마음에 들지 않기도 어렵겠다고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너 때문에 갑자기 어머니가 나한테도 이것저것 배우라고 하시잖아. 나는 그거 싫다고.”

보아하니 이 마마보이가 공부량이 늘어나면서 어머니와 보낼 시간이 줄어드니 따지러 온 모양이다. 길리아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되지, 왜 나한테 와서 행패인데?”

“다른 건 몰라도 너보다 모자라다는 말은 듣기 싫거든?”

“나도 하는 걸 네가 소화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미 와서 행패 부리는 것부터 인정한 꼴 아니야?”

“…….”

길리아나의 지적은 예리한 데다가 사실이었기 때문에 길리언은 잠시 주춤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이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되물었다.

“넌 뭐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건데?”

타고나길 황제의 적녀로 태어난 데다가, 후궁도 없으니 그녀의 황위를 위협할 사람도 없었다. 부모는 아직 젊고 건강하니, 급박하게 황위를 물려받아야 할 상황이 올 리도 없었다.

‘조금 더 쉬엄쉬엄해도 될 텐데.’

하다못해 황궁에서야 그렇게 지낸다고 쳐도 타이론 대공저에서 지낼 때는 여유를 가져도 되는 거 아닌가?

길리언의 반문에 길리아나는 픽 코웃음을 쳤다.

“그냥 하니까 하는 거지. 비켜.”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는 길리언을 밀어내고 길리아나는 길을 걸었다. 그냥 무시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에 앙금이 남았는지, 서재에서 수업하는 내내 그녀는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냐고?’

역시 다 가진 녀석은 모른다. 길리아나가 어떤 불안감을 안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더 완벽하지 않으면.’

길리아나가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짧은 휴식이 끝나고 문밖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황녀님, 마담 세헤라 님이 오셨습니다.”

길리아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 * *

“난 요즘 슬퍼.”

막내 플로라가 물의 요정 같은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맞은편에 앉아서 홍차에 설탕을 와르르 넣고 있던 길리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슬프세요, 공주님?”

길리언의 대답에 플로라는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장난하지 마, 오빠. 플로라는 지금 진지하거든?”

“……그래?”

공주라고 부르기만 하면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뜻밖에 네 살짜리 여자아이에게 혼이 난 길리언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왜 슬퍼, 플로라?”

길리언의 진지한 태도가 마음에 든 플로라는 다시 자신의 팔에 고개를 묻고 웅얼거렸다.

“큰언니 때문에 슬퍼.”

“큰언니? 길리아나?”

뜻밖의 이야기였다. 끽해야 엄마가 보고 싶어, 정도 이야기를 생각했더니만.

‘길리아나 때문에 슬플 일이 뭐 있어?’

평소 앙숙처럼 지내는 것과 별개로, 길리언은 길리아나가 어떤 아이인지 잘 알았다. 누군가에게 걱정을 끼칠 사람이 아니었다.

“길리아나가 왜?”

“세헤라 할머니 때문에.”

“그게 왜?”

계속되는 길리언의 반문에, 플로라는 긴 한숨을 내쉬며 길리언을 흘겨보았다.

“오빠는 그것도 몰라? 실망이야.”

“…….”

아니, 뭘 했다고 실망이래.

‘마담 세헤라는 태황제의 손위 누이잖아.’

길리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서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자식 없이 이른 나이에 남편을 잃어서, 별궁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다고 들었는데.’

길리언은 그녀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길리언의 탓이 아니라, 그녀가 모든 만남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하는 소일거리라고는 오로지 황녀들의 예법 수업뿐.

‘그마저도 나이가 많아서 늘 할 수 없다고 들었어.’

그래서 황실 어른의 예우 차원에서 1년에 한 번, 특정 시기 동안 집중교육을 받는다고.

공교롭게도 지금이 그 시기였다.

‘이번에는 드물게 타이론가로 몸소 오시기로 했다지?’

황녀들의 타이론행이 지극히 충동적으로 정해져서 생겨난 해프닝이었다. 본래라면 그녀는 자신의 별궁을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

타이론가로 온 지금 또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길리언도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지간히 괴팍한 사람인가 보지? 그렇게까지 얼굴을 감추다니.’

길리언은 새삼 그 생각을 했다. 그와 만날 일 자체가 없는 사람인지라, 지금까지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플로라는 진저리를 치며 웅얼거렸다.

“마담 세헤라가 얼마나 무섭다고. 마귀할멈이야.”

“뭐어?”

플로라의 말에 길리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예법 수업을 듣기 싫어서 하는 말인가 했더니, 이어지는 말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이만한 작대기로 플로라도 막막 때려.”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때리는데?”

“자기 말대로 플로라가 못한다고. 플로라가 바보랬어.”

길리언은 말문이 턱 막혔다.

‘감히 한 나라의 황녀에게 바보라니. 아무리 태황제 폐하의 누나라고 해도 너무하잖아.’

게다가 황녀라는 직분을 차지하고도, 플로라는 겨우 네 살이었다. 이런 작은 아이에게 매를 든다는 말 자체가 이해할 수 없었다.

길리언은 눈살을 찌푸리고 조용히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로즈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말이니, 로즈?”

“……사실이야.”

일부러 안 들리는 척, 책만 보던 로즈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와 플로라는 지난달에 수업을 들었어. 동생이 아직 어린아이고, 첫 수업이라는데도 마담 세헤라는 조금도 봐주지 않았지.”

그리고 이번은 길리아나의 차례라는 뜻이었다. 플로라가 틀릴 때마다 매를 맞는 게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된 길리언은 무척 큰 충격을 받았다.

‘황제 폐하께서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닌데.’

거기까지 생각했던 길리언은 문득 깨달았다.

‘하지만 황제 폐하 또한 마담 세헤라의 예법 교육을 받았겠지.’

마담 세헤라가 별궁에서 황녀들의 예법만을 담당한 세월은 아득히 길었다.

‘본인도, 본인의 형제들도 모두 같은 교육을 받았다면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어.’

이렇게 포괄적으로 상황을 살필 수 있다는 게 길리언의 가장 큰 재능이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상황을 재어보던 길리언은 조심스럽게 자매에게 물었다.

“부모님께는 말씀드려보았어? 무섭고 힘든 수업이라고.”

“말할 수 없는걸.”

대답은 뜻밖에 막내 플로라에게서 나왔다. 플로라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는 투덜거렸다.

“마담 세헤라가 그럼 또 바보 멍청이라고 할 거야.”

“플로라!”

플로라의 말에 길리언은 비명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저런 말을 하다니.’

항상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둥기둥기 자란 길리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길리언은 언젠가 자신의 어머니가 해주었던 것처럼 플로라를 따뜻하게 위로해주었다.

“마담 세하라가 거짓말쟁이야. 플로라는 바보도 멍청이도 아니야. 플로라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공주님인걸.”

“왕자님…….”

감동한 플로라의 호칭이 다시 오빠에서 왕자님으로 바뀌었다. 플로라는 와앙 울음을 터뜨리며 길리언의 품에 안겼다.

“맞아! 플로라는 예쁜 아이야. 흐에엥!”

“그래, 그래.”

길리언은 이안이 올리비아를 토닥이듯 플로라를 끌어안고 토닥여주었다.

“그래서 마담 세헤라의 수업을 들을 큰언니가 걱정이 되었구나. 맞지?”

“응.”

“그럼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어른들게 말씀드리고 수업을 취소하는 건 어때?”

길리언 생각에는 그게 제일 괜찮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로즈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빠도 못 들은 걸로 해줘. 우리는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로즈.”

길리언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이들이 저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길리언은 플로라를 끌어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내가 부모님이라면, 너희가 고통을 자신들 때문에 참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실망스러울 것 같아.”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소년은, 이제 어른들의 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었다. 길리언은 플로라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리아나와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어린 동생들은 그렇다고 쳐도, 길리아나까지 그렇게 꾹 참고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 자매를 뒤로한 길리언은 집사를 붙들고 물었다.

“길리아나 황녀님은 어디 있지?”

* * *

길리아나의 예법 수업은 타이론 대공저에서도 가장 으슥한 곳에 있는, 최근에는 사용하지 않는 손님용 별장에서 이루어졌다.

‘하필 이런 곳에.’

길리언도 때때로 숨바꼭질을 할 때 빼고는 오지 않는 으슥한 곳이었다. 바지런히 길을 걷고 있으니, 별장 앞을 지키듯이 선 기사 두 사람이 길리언을 막아섰다.

“멈추십시오.”

마담 세헤라를 모시는 여자 기사들이었다. 그녀들은 딱딱한 어조로 경고했다.

“마담 세헤라께서는 세상 모든 남자를 만나지 않으시기로 맹세하셨습니다. 아무리 대공자라고 할지라도 여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가로막는 이유도 해괴했다.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

‘남편을 잃고 정절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겠지만.’

길리언은 고개를 들고 자신보다 키가 큰 기사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긴 우리 집입니다. 내가 못 갈 곳은 없습니다.”

“마담 세헤라께서 계신 곳은 예외입니다. 그분은 태황제 폐하로부터 마땅히 그러할 권리를 얻으셨습니다.”

길리언은 눈살을 찌푸리고 어이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권리를 주장하고 싶으셨으면 황궁에 남으셨어야지.”

울던 플로라를 떠올리니 더더욱 마음 한구석이 엉망으로 꼬여들었다.

‘고작 권리를 얻었기 때문에, 그 알량한 권위를 내세우며 아이들을 체벌했나.’

길리언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남의 집에 와서 자신의 법을 주장하는 건 어느 나라 방식입니까? 나는 내 조카님을 보고 싶습니다. 어서 물러서십시오.”

이 정도 이야기하면 물러날 법도 한데, 기사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안 됩니다.”

“안 된다고요?”

길리언이 착하고 순한 소년인 것은 오직 제 어머니 앞이거나 어머니의 귀에 패악질이 들어갈까 염려될 때뿐이었다.

‘지금은 길리아나를 구하기 위해서였으니 엄연히 정의구현이야.’

그렇게 멋대로 결론을 내린 길리언은 한층 사나운 어조로 빈정거렸다.

“어떻게 할 건데요? 저를 끌어낼 것입니까? 아니면 억지로 밀어낼 것인가?”

“대공자.”

그런데, 기사들은 정말로 물러나지 않았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물러나세요, 대공자.”

“…….”

어깨를 긴장하는 모습이, 여차하면 무력으로라도 길리언을 몰아내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길리언은 결국 혀를 차며 돌아섰다.

‘만만치 않군.’

막무가내로 달려들어서 소란을 피우는 것도 방법이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만인의 앞에서 고통스러운 예법 수업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이 까발려진다면 길리아나가 자존심 상해할 것이 분명했다.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는데.’

길리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방법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했다. 방금 기사들의 말에 답이 있지 않았나.

마담 세헤라는 세상 모든 ‘남자’를 만나지 않는다고.

* * *

‘어지러워.’

길리아나는 휘청거렸다. 벌써 얼마나 오랫동안 걷기 연습을 했는지 모르겠다.

‘다리 아파.’

길리아나의 자세는 반듯했고, 장군처럼 당당했다.

마담 세헤라의 신경을 건드린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당신은 여자입니다. 남자처럼 성큼성큼 걷는다고 해서 당신 성별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굳이 천박함을 따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마담 세헤라는 길리아나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렸다.

그리고 몇 시간이나, 쉬지도 못하고 계속 걸음걸이를 교정한 것이다. 나비처럼 사뿐사뿐 걷도록.

“윽.”

결국 버티지 못한 길리아나가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어나십시오.”

그런 그녀를, 의자에 편안하게 앉은 마담 세헤라가 나무랐다.

“지금 이까짓 걸로 힘들어 주저앉으면 어떻게 높은 자리에서 버틸 생각입니까.”

그 말이 길리아나의 자존심을 긁었다. 길리아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힘을 주었다.

“윽!”

그러나 힘이 풀린 다리가 쉽사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하녀옷을 입은 작은 체구의 소녀가 물컵과 물수건을 가지고 길리아나 앞으로 다가왔다.

“마담, 황녀님 얼굴이 엉망이에요. 땀을 닦을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소녀의 말투는 사근사근했고, 몸짓은 가볍고 우아했다. 마담 세헤라의 찌푸려졌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질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하거라.”

완고한 노인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졌다. 하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길리아나의 이마에 찬 수건을 대주었다.

그런데 소녀의 얼굴이나 손짓이 몹시 눈에 익었다. 길리아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쉿.”

땀을 닦던 손이 자연스럽게 길리아나의 입을 막았다. 길리아나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말하면 안 되는 걸 아는데도,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돌았어?”

하녀는 바로 길리언이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잘 어울릴 노릇인가!’

길리아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 정도로 눈앞에 소년은 완벽한 소녀였다.

둥근 흰 모자 아래로 부드럽게 흘러내린 금빛 머리카락,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 은은히 붉은 뺨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길리아나가 홀린 듯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걸 느낀 길리언이 짓궂은 어조로 말했다.

“제가 상당히 예쁘긴 하죠. 저도 알고 있습니다.”

“……말을 말자.”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길리아나는 어쩔 수 없이 길리언을 흘긋대었다. 남자일 때도 무생물로 느껴질 정도로 잘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처럼 꾸며놓으니 비스크돌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길리아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왜 온 거야?”

“네 걱정이 되어서 왔지.”

그 대답에 길리아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소름 끼쳐 하는 것이 역력한 얼굴을 본 길리언이 슬쩍 눈도 찡긋했다.

“얼마나 꼴사나운가 구경도 할 겸.”

“그럼 그렇지.”

하녀로 꾸며놓아서 그럴까. 원래의 길리언이 저렇게 말했으면 당장 정강이를 까버렸을 텐데, 화가 나질 않았다. 길리아나는 도리어 뺨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누굴 걱정한다는 거야?’

이렇게 우리 사이가 서로 걱정을 나눌 사이였나. 길리아나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을 때였다. 마담 세헤라가 말했다.

“도대체 하녀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나누는 거죠?”

휴식이 길어지는 것 같으니, 저 못된 할망구가 또 뿔이 난 모양이다. 길리아나가 입술을 깨물었을 때였다. 길리언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마담 세헤라를 마주 보았다.

“마담, 황녀님이 너무 피곤해 보여요.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고 쉴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어주세요.”

“무엄하게! 일개 하녀가 황녀의 교육에 훈수를 두는 것이냐?”

마담 세헤라는 역정을 내었지만, 길리언의 말투가 너무 사근사근해서인지, 평소보다 분기가 빠져 있었다.

“마담, 화를 내지 말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마담 세헤라를 세 치 혀로 살살 녹이는 길리언을, 길리아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길리언은 뻔뻔하기 그지없이 눈을 내리깔고 완벽하게 조신한 소녀를 연기했다.

“황녀께서는 곧 황태자가 되실 몸. 예법 말고도 배워야 하는 것이 산더미랍니다. 이렇게 지치게 되면 다음 수업에 지장이 생겨요.”

그 말에 마담 세헤라는 콧김을 풍 품었다.

“황녀께서 우둔하여 예법을 숙달하지 못하니 오랜 시간이 걸린 것 아니냐! 내가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니다.”

“맞아요. 맞아요. 우리 황녀님은 성정이 우악스러워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걷지를 못하시죠.”

길리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한 바퀴를 빙그르 돌았다. 발소리가 나지 않으면서도 가벼운, 완벽한 숙녀의 발걸음이었다.

마담 세하라는 우아한 자태를 보고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처럼 걸을 수 있었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을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한 길리아나가 어금니를 악물었을 때였다. 길리언이 두 손을 맞잡고는 소름 끼치도록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하지만 여자가 꼭 사뿐사뿐 걸어야 하나요? 황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걸음이잖아요.”

‘길리언?’

자신을 편들어주는 말에 길리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길리아나가 하고 싶은 말도 그것이었다.

길리아나의 어머니이자, 이 나라의 황제인 스타티스는 사뿐사뿐 걷지 않았다. 길리아나는 그런 어머니를 닮고 싶었다. 그 마음이 그녀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뿐이었다.

‘……나는 황제가 되고 싶어.’

고된 교육을 묵묵히 견디는 것도,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훌륭한 황제가 되고 싶었다.

마담 세헤라는 그런 스타티스의 마음을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황녀가 황태자로 언급되는 건 오직 아들이 없기 때문이야. 늠름한 아들이 이번에 태어나면 당장 처지가 바뀔 것이다. 나는 오로지 황녀님을 위해서 그런 거야.”

그 말은 그동안 길리아나도 수백 번 들었던 말이었다.

“이번 대에는 특별했지만.”

“여자가 어떻게 또 황제를 하겠어?”

“다행히 황제 부부께서 금실이 좋고 건강하시니 얼마든지 아들을…….”

그녀의 욕망을, 그녀의 노력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폄훼하는 말들.

그때였다.

길리언이 생글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을 부정했다.

“아들이 심약하고 조용할 수도 있잖아요.”

“!!”

그 말에 길리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순간,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길리언의 머리 위로 빛이 찬연하게 빛나는 것만 같았다.

‘맞아. 왜 다들 아들이면 내 자리를 빼앗을 거라고 생각하지?’

그 아이가 길리아나보다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길리언은 그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어떻게 네가…….’

남자인 데다가, 모두의 사랑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고 있는 아이가, 그녀의 약점을 감싸는 말을 하고 있으니 이상했다. 길리아나가 멍하니 그를 바라볼 때였다.

마담 세헤라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남자들은 모두 씩씩하게 걷고, 용맹하게 행동할 수 있어. 그렇게 타고나.”

“그래요?”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노인의 말이었다. 길리언은 천사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물론 행동은 전혀 천사 같지 않았다.

부욱!

하녀복 앞섶이 찢어져나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고작 열 살이지만, 편편하고 너른 가슴이 모두의 시선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는 남자인데요?”

“뭐, 뭣?!”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마담 세헤라는 펄떡 뛰었다. 길리언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길리아나에게는 이런 수업 따위 필요 없어요, 마담! 그리고 요즘 세상에 수절이 웬 말이에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에 사랑을 꽃피우세요!”

“이, 이 녀석!”

남편을 잃고, 남자를 조금도 가까이 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을 자랑으로 아는 할머니를, 길리언이 가벼운 어조로 놀렸다. 그리고는 달려와서 길리아나의 손목을 잡아챘다.

“가자, 길리아나.”

“난…….”

홀린 듯이 길리언을 바라보고 있던 길리아나의 얼굴에 낭패가 번졌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긴장이 풀린 탓인지,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길리언은 눈치 빠르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싱긋 웃었다.

“이런.”

길리아나와 별반 차이 없는 손이라고 생각했다. 키도 고만고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실례합니다.”

길리언은 길리아나의 팔을 잡아당기는 것 같더니, 그대로 길리아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어?”

길리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었다. 길리아나를 안아 든 길리언이 빠른 걸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스치는 바람에, 머리를 덮고 있던 모자가 날아갔다. 금빛 머리카락이 올올이 날리고, 흰 얼굴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슬쩍 미소를 베어문 입술이 개구졌다.

‘멋있어.’

길리아나는 분하지만, 길리언이 멋있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말았다.

* * *

길리언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인지, 마담 세헤라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곧장 황궁으로 돌아가 버렸다.

길리언이 친 깽판은 조금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오한 것과 달리 혼은 나지 않았다.

물론, 다른 종류의 혼은 났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니, 길리언?”

올리비아는 이마를 짚으며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길리아나와 사이좋게 본관으로 들어온 길리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별거 아닌데요. 그냥 자꾸 왕자님이라고 불려서 그런가, 왕자님 놀이가 하고 싶더라고요.”

아들의 변명에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녀옷을 입고?”

“아.”

지금 입고 있는 복장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 이 옷은 말이에요…….”

눈을 가늘게 뜬 어머니 앞에서는 길리언의 매끄러운 혀도 힘을 잃었다.

길리언은 필사적으로 변명을 쥐어짰다.

‘어서 생각해내라, 내 머리야!’

하지만 무슨 변명을 해야 하녀옷을 입고 본관 정원을 내달린 것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길리언이 얼음처럼 굳어졌을 때였다.

길리아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모두 내 탓입니다, 대공비.”

“네?”

“내가 큰 비밀을 알아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고개를 슬쩍 떨구면서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누가 봐도 대단히 큰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올리비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길리아나를 응시했다.

“큰 비밀이라뇨?”

길리아나는 슬쩍 길리언의 눈치를 살피려는 듯 바라보더니 안타까움이 역력한 어조로 속삭였다.

“제 숙부는 사실 이모가 되고 싶었대요.”

말이 어려워서 이해하는 데는 10초가 필요했다. 충격적인 말을 들은 올리비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네에?! 기, 길리언, 너 그, 그런 생각을?”

“아니에요, 어머니! 무엇을 상상하시든 절대로 아닙니다.”

길리언은 울상을 지었다. 여장을 즐기는 남자로 오해받은 것도 속 터져 죽겠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처음 부르는 숙부라는 말을 이렇게 사용하기냐!’

이것이야말로 물에 빠지는 사람 건져놨더니 보따리 훔쳐가는 상황!

“어머니, 저기 보세요. 길리아나가 웃고 있잖아요. 거짓말이라니까요.”

“우리 아들이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아니라니까요!”

길리언은 필사적으로 올리비아에게 자신은 오체 건강한(?) 남자임을 열심히 피력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길리아나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돌아섰다.

‘그래도 조금 멋있었지.’

“길리아나에게는 이런 수업 따위 필요 없어요, 마담!”

어머니는 황제가 되고 싶으면 강해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강해지려고 했다. 어려운 말도 쓰고, 웃지 않고 딱딱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늘 당당해지려고 했다.

사실 진짜 멋있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네 걱정이 되어서 왔지.”

걱정되어서, 얼굴을 보려고 여자 옷을 입고, 여자처럼 걷고, 여자처럼 꾸몄어도 길리언은 그 순간 반짝였다.

‘그래도 말해봤자 분명 우쭐거릴 테니 말하지 않을 거야.’

길리아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움츠리고 웃었다.

구김 없는 해사한 미소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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