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애니 플로렌스
“영애께서 약품 분석의 대가라고 들었습니다.”
“네?”
연구실에서 흰 가운을 입고 열심히 약초를 분류하고 있던 애니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건장한 체격에 걸쳐진 의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수도방위국.’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수도방위국의 제복이었다. 애니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도움 드릴 일이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찾아왔을 리가 없지요.”
남자는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최근 수도에 신종 약물이 퍼져 있는데, 그 성분분석을 의뢰하고 싶습니다.”
“그렇군요.”
애니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앳된 얼굴을 보는 사내의 얼굴에도 이채가 어렸다.
‘소문과 많이 다르군.’
애니 플로렌스, 22세. 아카데미 연구원. 약초학부 교수 카밀의 수제자.
‘연구에 푹 빠져서 연구실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오지 않는 답답한 여자라고 들었는데.’
그의 앞에 선 여자는 예쁘장한 편이었다. 여러모로 소문의 음침한 연구자와는 다른 이미지였다.
* * *
아카데미 연구실에 들어간 애니는 그 뒤로 그야말로 눈부신 성과를 수십 가지나 내었다.
근육통에 효과가 있는 연고 개발, 부작용이 적은 감기약 개발, 통증제 개발 등등.
하지만 젊은 여자가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위험하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애니도 몇 번이나 업적을 가로채일 뻔했다.
그러니까 그녀의 언니가 올리비아 타이론 대공비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어린아이의 연구물을 가로채다니! 부끄러운 줄 알게!”
감기약을 만들 때, 그녀의 담당교수는 그녀의 보고서로 먼저 특허를 내고 판매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고서의 필체가 애니의 것이라는 사실이 들통났다. 감기약 유통사가 생제르망이라 다행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애니의 연구물을 도둑질한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았다.
“너는 가장의 어려움을 몰라. 나는 책임질 가족이 있다고.”
“너는 젊고 앞날이 창창하잖니! 나중에 새로운 연구물을 내면 되잖아! 너 혼자 명성을 독식할 셈이니?”
“가족도 없는 계집애를 거두어줬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어쩜 이렇게 레퍼토리들도 똑같은지, 어디 학원에서 배워오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올리비아는 가차 없었다. 도둑질에 마음대로 변명을 가져다 붙이는 이들을 차가운 눈으로 훑어본 그녀는, 아카데미 학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설마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다 이런 식인가요? 그렇다면 후원의 가치가 없어 보이는군요.”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타이론에서 상당한 양의 후원금을 받는 아카데미 학장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펄떡펄떡 뛰며 곧장 아카데미 약초학과 교수진 교체를 단행했다.
그래서 정교수가 된 인물이 바로 애니의 스승인 카밀 교수였다. 그녀는 사내 정치에서 밀려서 전임강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청렴함과 성과를 인정받아 정교수로 바로 임명되었다.
사회의 정의구현이었지만, 애니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자신이 가진 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힘들게 기어올라간 것을 한 번에 끌어내릴 수 있는 힘.’
자신의 연구실적을 훔친 도둑놈들은 감싸줄 필요도 없는 쓰레기들이었지만, 그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 또한 애니에게는 비슷한 공포심을 주었다.
그 힘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 올리비아에게서 나오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말조심을 해야 해.’
애니가 자연스럽게 연구실에 처박히게 된 이유도 그것이었다.
* * *
하지만 실적이 쌓이고 명성이 올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의뢰도 오기 시작했다.
“저는 근위대의 부단장 칼츠입니다. 반갑습니다, 플로렌스 영애.”
“선생님이라고 부르세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알겠습니다, 플로렌스 선생님.”
근위대 부단장 칼츠는 일단 애니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실 예상했던 것보다 젊은 여자가 와서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젊은데 잘 찾아낼 수 있을까?’
실력은 나이와 비례하지 않건만, 어리석게도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 정도로 애니는 한창때였다.
희고 고운 얼굴에 크게 뜨여진 눈은 별처럼 빛이 났고, 높게 묶은 머리카락은 풍성하게 퍼지는 곱슬머리였다.
“……젊으시군요.”
결국 칼츠는 참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애니는 이내 배시시 웃었다.
“유능하다는 뜻이겠죠. 감사합니다.”
“……네.”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말하면 말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것 같아서 칼츠는 입을 다물었다. 그을린 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설명해주시겠어요?”
“이게 신종 유행하는 약입니다.”
칼츠 경은 주머니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봉투 안에는 설탕입자 같은 작은 알갱이들이 굴러다녔다. 조심히 그것을 살펴보고 손짓으로 냄새를 맡아본 애니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희미한 박하 향이 나네요?”
바람이 불거나 향이 진한 음식과 섞여 있으면 느끼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향이 가루에서 풍겼다.
애니의 말에 칼츠 경은 큰 소리로 반문했다.
“뭐라고요?!”
“희미한 박하 향이 난다고요.”
“그걸 아시겠습니까?”
“아니까 대답한 거겠죠?”
애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칼츠 경은 굵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금 수사가 지지부진한 것은 그것이 무색무취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흡입하는 현장을 급습해도 증거 확보가 쉽지 않습니다. 보시다시피 설탕과 완전히 비슷해서요.”
“아아.”
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상황인지는 알 것 같았다.
‘보통 술을 마시다가 약을 흡입하니까. 술기운에 비틀댄다고 말하고 도망치기도 하고 그렇겠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잘못 잡혀들어온 사람들도 많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저 남자가 갑자기 박하 향을 맡는 애니에게 격하게 반응할 리가 없었다.
‘내가 후각이 예민한 편이라고는 들었지만.’
애니는 카밀 교수의 극찬을 떠올리며 검지로 뺨을 긁적였다. 개가 된 것 같아서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칼츠 경은 당장 애니의 손을 붙들고 매달렸다.
“영애, 이번 작전에 영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래도요.”
“도와만 주신다면 선생님이 아니라 스승님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제가 부단장님의 스승이 되어서 뭐하게요.”
“그렇게 말씀하시지 말고요!”
자기가 논리적이지 않은 말을 하면서 뭘 말하지 말라는 건가. 애니는 시큰둥하게 콧방귀를 끼었다. 그러자 칼츠 경이 애걸복걸을 했다.
“저 약 때문에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이 지난주 몇 명인지 아십니까? 저 약을 사기 위해 돈을 훔치는 사람들은 어떻고요! 제발 도와주십시오, 선생님!”
“거참.”
저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모르는 척하자니 양심이 콕콕 쑤셨다. 애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손을 풀고 이야기해요, 우리.”
“해주신다고 할 때까지 절대로 놓지 않을 겁니다.”
“그럼 저는 치한을 만났다고 신고해야겠네요.”
“……네.”
현실적인 말에 칼츠 경은 바로 손을 놓았다. 애니는 팔짱을 끼고 피식 웃었다.
“도와드릴 의향은 있어요. 하지만 그 전에 이야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지요.”
“뭡니까? 작전은 선생님이 계시다면 일주일이면 종결되지 않겠습니까! 사내놈들밖에 없는 근위대지만 선생님의 편의를 위해서 시설보수도…….”
“그런 거 말고요.”
애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보수는 어떻게 되나요?”
스물두 살의 애니는 손해를 보지 않았다.
* * *
‘사람이 마땅한 보수를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애니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다들 공짜로 인력을 굴리려고만 해서.’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까 칼츠 경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언니가 타이론 대공비인데 따로 보수가 필요하십니까? 이미 부도 명예도 충분하실 텐데요.”
‘언니 돈은 언니 돈이고, 내 돈은 내 돈이지.’
애니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올리비아는 동생이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뭐든 해주지 못해서 안달이었지만, 그래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 받아주다 보면 버릇이 나빠진다고.’
이미 올리비아에게 받은 것들이 충분했다. 이 이상 애니는 언니의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곧 있으면 독립할 수 있을 거야.’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번 돈은 차곡차곡 저축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수도에 아담한 주택 하나 꾸려나갈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우리 힘으로 설 수 있을 때가 되면…….’
애니는 작게 웃었다.
‘어쨌든 보수는 넉넉하게 챙겨준다고 했으니 일을 해보실까!’
또박또박 따지고 드는 애니에게 쓸려간 칼츠 경은 상당한 금액의 성공보수를 약속했다. 애니는 얇은 장갑을 끼고 칼츠 경이 건네고 간 약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럼 일단 성분 분석부터 해볼까!’
일반인은 거의 느낄 수 없는 무색무취의 약이라니 가슴이 뛰었다. 애니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 * *
약의 이름은 ‘Noname’이었다. 무색무취의 특성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검사 키트를 만드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어요. 애초에 멘톨 성분이 들어 있는걸요. 제 후각이 맞았던 거죠.”
으쓱거리는 애니를 보고 칼츠 경은 입을 떡 벌렸다. 그냥 약쟁이들을 잡는 것을 도와달라고 불렀는데 아예 검사 키트를 만들어올 줄은 몰랐다.
“그, 그게 무슨 원리입니까? 정확합니까?”
“설명해도 모르실 텐데.”
“무시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렇게 외친 칼츠 경은 정확히 1분 만에 바로 포기를 외쳤다.
‘역시 전문가의 영역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해.’
대단히 훌륭한 교훈만 얻고 말이다. 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급습하셔서 거기 참가자들에게 이 검사 키트로 검사만 하면 될 일이에요. 저는 그럼 이만.”
“잠깐만요! 잠깐만요! 그렇게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네? 여기서 뭘 더 해드려야 하지요?”
칼츠 경은 우물쭈물거렸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검사 키트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리고 검사 키트의 신뢰성이 의심되어서.
“당신도 실제로 검사 키트를 실험해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첫 번째 투입 작전 때 함께해주십시오. 그때 성능이 확실하다면 두 번째에는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흐음.”
애니는 턱을 문질렀다. 그녀가 만든 제품에 대한 의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이전에도 많았다.
딱히 칼츠 경이 뭘 몰라서는 아니었다.
저명한 인사들은 그들대로 애니가 남들은 반년 넘게 걸리는 검사 키트를 뚝딱 만들어내는 걸 보고 의심을 가졌으니까.
“뭐, 좋아요. 도와드리기로 약속했으니까요.”
애니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칼츠 경과 그렇게 약속을 했지만, 사실 그 뒤로 애니는 자신의 시간을 보냈다. 딱히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무작정 부탁만 했지, 어떻게 내게 도움을 청할지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처럼 합리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애니는 나이보다 인격적으로 성숙해 있었다.
‘그런 것에 일일이 예민하게 굴 수도 없는 거고.’
그리고 칼츠 경이 의뢰한 일이 아니더라도 애니는 충분히 일이 많았다.
“선생님, 배합표 좀 살펴주세요.”
“처방 좀 검토해주세요.”
애니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애니는 정신없이 연구실 안을 오갔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2주.
칼츠 경이 불쑥 찾아온 것은 애니가 오랜만에 기숙사가 아니라 타이론 대공저로 퇴근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아, 예.”
“달갑지 않으신 건 알지만 너무 티 내지 말아 주시죠. 저도 마음에 상처를 입는답니다.”
“오시기 전에 편지 한 통만 보내셨다면 이런 시선을 마주할 일도 없으셨을 거예요.”
칼츠 경의 우는소리에, 애니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날카롭게 돌려 깠다. 더 이상 말해봤자 자신이 이득 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칼츠 경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드디어 잠입작전을 해야 해서요.”
“잠입작전? 그런 걸 민간인인 저를 시키려고요?”
“물론, 선생님의 안전은 저희가 보장합니다. 최고의 기사들이 따라갈 것입니다.”
“흐음.”
애니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녀의 짜증은 두 가지 이유에서 났다.
첫째, 칼츠 경은 말만 번지르르하지 전혀 구체적이지 않고 실용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둘째, 올리비아와 길리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진짜 오랜만에 타이론가로 가는 건데, 하필 오늘이람.’
평소에는 연구 때문에 바빠서 기숙사 생활인지라, 언니라고 해도 올리비아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형부를 꼭 닮은 사랑스러운 조카는 또 어떻고!
‘이번에야말로 길리언의 볼을 쭉쭉 늘려보려고 했는데.’
저 남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할 수 없게 된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린 애니는 입술을 비틀었다.
“당신의 막무가내 행동으로 조건이 조금 바뀌었어요.”
“네?”
칼츠 경은 애니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애니가 무언가를 요구할 줄 몰랐다는 표정이 더더욱 애니의 속을 꼬이게 했다.
‘내 잘못이 아니니 당연히 그쪽에서 책임을 져야지.’
애니는 거두절미하게 딱 잘라 말했다.
“제 담당교수님인 카밀 교수님 앞으로 저의 도움을 일주일간 필요로 하니 공가 처리해달라는 공문을 발송해주시죠.”
“그건…….”
애니의 말에 칼츠 경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바로 떠올랐다. 애니는 그가 뭐라고 웅얼대기 전에 얼른 덧붙였다.
“그리고 타이론 대공비 전하께 제가 오늘 방문할 수 없으니 내일 방문하겠다는 편지도요.”
“알겠습니다.”
칼츠 경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니는 속으로 냉소했다.
‘얄팍하긴.’
일주일의 공가를 근위대 공문으로 내게 되면 애니의 임금도 근위대가 지불해야 할 명목이 생긴다. 그래서 공문을 보내달라는 요구에는 망설였으나, 타이론 대공비의 이름이 나오자 바로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괜히 타이론 대공의 미움을 사서 추궁이라도 당하면 피곤해지니까 그렇겠지.’
조금 더 권력을 휘두를 수도 있었지만, 애니는 참았다. 올리비아는 애니에게는 한없이 부모처럼 너그러운 구석이 있어서, 애니가 스스로 선을 긋지 않으면 한도 끝도 없을 터였다.
‘그렇게 언니를 구설에 오르게 할 수는 없지.’
거기까지 생각한 애니는, 칼츠 경이 타이론 대공저로 편지를 보내는 것까지 지켜본 뒤에 그가 타고 온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차 안에서 그는 넓은 지도 한 장을 펼쳐 보였다.
“믿을 만한 제보에 의하면, 오늘 파티가 벌어지는 곳은 이곳입니다.”
검을 잡느라 딱딱하게 갈라진 손가락이 지도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을 본 애니의 얼굴이 흐려졌다.
“여긴…….”
애니는 저도 모르게 쯧, 혀를 차고 말았다.
‘플로렌스 저택.’
바로 애니의 큰 오빠, 빌리 플로렌스의 저택이었다.
* * *
플로렌스 자작이 이안 타이론 대공에 의해서 대공가로 끌려가서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을 때.
수도의 플로렌스 저택을 재빠르게 차지한 사람이 있었으니, 올리비아보다도 나이가 많은 플로렌스 자작의 장남, 빌리 플로렌스였다.
‘상속이라고 하지만 강탈이나 다름없었지.’
그리고 그 무렵, 올리비아는 애니를 지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서, 빌리가 이 저택을 차지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배가 부른 들짐승은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단다. 차라리 오라버니 같은 개차반 인성은 배를 적당히 불려주는 게 나아.”
애니는 어린 나이였지만, 올리비아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성년이 아니었고, 부계혈통 중심인 이 나라에서 빌리가 애니의 신변에 대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막을 수가 없었다.
‘돈이 없었으면 날 팔아먹겠다고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고.’
큰오빠의 됨됨이를 회상하며 애니는 꼬고 있던 다리를 반대 방향으로 바꾸었다.
‘어색해.’
발을 까딱하니, 평소에는 신지 않는 검은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가느다란 발목 덕분에 아찔한 느낌이 났다.
‘다시 만나러 가고 싶지 않은데.’
막상 작전을 듣고 나니, 그래도 혈연인데 하는 마음이 뭉클 피어났다.
‘오빠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고 싶어.’
애니는 빌리가 약에 찌들어서 개짓거리를 하고 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가족이라는 점이다.
‘좋아. 한번 이야기나 들어보자.’
마음은 그렇게 먹었지만, 플로렌스 저택을 두드리는 애니의 복장은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딱 달라붙는 검은색 슬렉스에 안경까지 썼다.
일부러 딱딱해 보이기 위해서였다. 은연중에 빌리가 자신을 얕잡아보고 위해를 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마음을 여러 번 다시 다잡은 애니는 플로렌스 가문의 정문에 섰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마침 막 외출을 나가려는 듯 나오던 마차가 멈췄다.
문을 열고 나온 남자는 바로 애니가 만나러 온 빌리였다.
“……애니?”
그래도 혈육이라고 한 번에 알아보았다. 애니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오랜만이네, 오빠.”
마차에서 빌리가 풀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애니의 앞에 섰다. 장갑이 끼워진 손가락이 애니의 턱을 쓱 문질렀다.
“안 죽고 살아 있었니? 이야, 얼굴도 많이 곱상해졌네?”
온몸에 개미가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애니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며 빌리의 손가락을 쳐냈다.
“만지지 마.”
“이 건방진 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불필요한 접촉이 싫을 수도 있지, 어째서 그 거부가 건방짐이 된단 말인가.
‘날 무시하는 건 여전하네.’
여자를 물건처럼 대하는 부친에게서 무얼 배웠겠는가. 애니는 마음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빌리는 쓰고 있던 모자를 고쳐 쓰며 빈정거리듯 물었다.
“그래서 여긴 무슨 일이야?”
“오늘 여기 파티가 있다고 들어서 왔어.”
“파티? 그 말을 어디서 들었어?”
애니의 말에 빌리는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애니는 속으로 생각했다.
‘바보. 부정부터 해야지.’
이미 자신도 연루되어 있다는 걸 미리 깔고 대답하는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큰 범죄자가 되기에는 이미 글렀네.’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마음을 수선스럽게 만들던 큰오빠였으나, 오히려 마주하고 있으니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애니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어디긴 어디겠어. 나도 약은 잘 알거든? 아카데미에서 약을 하려면 다 나를 거쳐야 해.”
‘직업이 약초 연구원이니까.’
뭐,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아하.”
애니의 허술한 변명에 빌리는 손뼉을 쳤다. 그리고는 불쑥 애니와 눈을 맞추며 씨익 웃었다.
“아버지가 사라지실 때 너도 없어졌길래, 아버지가 어디다 팔아치운 줄 알았더니 그런 곳에서 구르고 있었어?”
“맘대로 생각해.”
도대체 무슨 추악한 망상을 하는 건지. 애니는 고개를 돌려서 시선을 피했다.
‘내가 없어졌다니. 올리비아 언니랑 뻔히 같이 지냈는데.’
얼마나 관심이 없었으면 하나뿐인 동생이 큰언니를 따라갔다는 사실도 모를까.
‘심지어 팔아치웠다고 생각했다니.’
한번 찾아보지도 않은 현실에 애니는 조금 상처받았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조금 더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그 약은?”
“무슨 약?”
이제 와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 웃겼다. 애니는 냉소적으로 웃었다.
“내가 왜 몇 년 만에 오빠 앞에 내 모습을 드러냈겠어? 오늘 여기에 그 약이 나온다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오지도 않았을걸.”
“애니.”
그런데 너무 나갔던 걸까. 애니의 말에 빌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가 애니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 가까이 다가와서는 물었다.
“너 진짜 어디서 이야기를 들었어?”
“그게 뭐? 이미 수도의 약쟁이들 사이로는 암암리에 소문이 돌았거든? 그거, 냄새도 안 나서 잡히더라도 나만 시치미 떼면 그만이라며?”
솔직히 소문이 도는지 안 도는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근위대가 나섰을 때는 세상 사람들 다 아는 상황일 공산이 컸다. 애니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내가 그거 구해온다고 윗선에 큰소리 탕탕 쳤단 말이야. 그러니까 좀 알려줘.”
“윗선……?”
애니를 당장이라도 패대기칠 것같이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던 빌리가 돌연 멈춰 섰다. 애니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거리니, 빌리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속삭였다.
“너 유통도 해?”
아하. 바라는 게 이쪽이었나. 애니는 부러 으스대었다.
“그럼? 대체 내가 뭐하러 온 줄 아는 거야?”
“네 보스는 커?”
“그 물건을 원하는 사람을 말하는 거라면…….”
애니는 손톱을 들여다보며 느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나라에서 제일 클걸.”
근위대의 가장 높은 사람이 황제이니 엄연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애니의 말에 빌리는 잠시 침묵했다. 머리를 부산스럽게 굴리는 것이 마주 보고 있는 사람에게도 확연히 보여서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애니, 이리 와봐.”
“왜?”
생각 정리가 끝났는지, 빌리는 애니가 하품을 슬슬 할 때쯤이 되어서야 그녀의 손목을 구석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애니를 바라보았다.
“너 확실해? 진짜야? 지금 한 말 모두 책임질 수 있어?”
“뭔데? 오빠부터 제대로 설명해.”
애니는 오히려 더 고개를 빌리 쪽으로 내밀며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다리를 놓아주는 건, 오빠가 제대로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다음이니까.”
“사실…….”
애니가 강하게 나서자, 빌리는 오히려 움츠러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럽게 애니에게 속삭였다.
“이 약을 만든 건 아버지야.”
“뭐?”
뜻밖의 이야기에 애니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버지가?’
애니가 알고 있는 플로렌스 자작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나오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빌리는 애니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는지 조금 더 덧붙였다.
“아버지가 제약사업을 하다가 거하게 말아먹은 건 알고 있지?”
“응.”
“이 집을 물려받고 지하에서 찾아냈어. 제약사업을 할 때 만들어냈던 약이래. 환각작용이 너무 심해서 폐기했더군.”
플로렌스 자작의 제약사업은 망했을지 몰라도, 나쁜 목적은 절대로 아니었다. 환각제를 생산해서 팔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배짱이 크지도 못했다.
‘약을 제조하다가 걸리면 전 재산 몰수에 즉결처형인걸.’
돈 벌려다가 목숨도 잃으면 무슨 소용이람.
‘환각작용에 지레 겁먹고 바로 지하에 묻어놨을 거야.’
“그걸 오빠가 찾아냈다고? 직접 만들 수도 있게 되었고?”
“물론, 지하에 공장을 만들었지.”
의외로 본격적인 모양이다. 애니가 심각함을 느끼고 표정을 찡그렸을 때였다.
빌리가 작은 카드를 애니에게 꽂아주며 말했다.
“오늘 파티에 너도 네 보스를 데려와. 네 보스와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까. 이게 초대장이란다.”
“……그래.”
기나긴 대화에 안부 한 마디 묻는 말이 없었다.
‘내가 도대체 뭘 기대한 건지.’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애니는 입술을 비틀었다.
* * *
다시 만난 오빠는 환각제 제조라는 무시무시한 범죄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
오빠가 건네준 초대장에 따라 플로렌스 저택으로 향하며, 애니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공장이라고 말했지만 만들지 못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물건을 시장에 확 풀지 못한 거겠지.’
약의 원료가 구하기 어려운 거지, 만드는 방법 자체는 어렵지 않다. 물건이 부족하니 몸을 사리는 것이리라.
‘뭘 하든 어설퍼서는.’
하긴, 척척 잘할 수 있으면 애니의 뻔한 거짓말에도 속지 않았으리라.
‘어쨌든 씁쓸하네.’
빌리는 중벌을 면치 못할 터였다. 결국 오랜만에 만나는 오빠를 감옥에 집어넣는 일을 하게 된 애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애니는 간소한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마차에 올라타 있었다. 제대로 플로렌스 저택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칼츠 경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덕분에 쉽게 잠입하게 되었군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별일 아니었습니다.”
작전은 간단했다. 칼츠 경과 애니가 잠입해서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면 밖에 신호를 준다. 그럼 미리 대기하고 있을 근위대가 저택을 덮칠 예정이었다.
애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피곤하네요. 얼른 일을 끝내고 쉬고 싶어요.”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드레스 차림이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
칼츠 경의 칭찬에, 애니는 그냥 그린 듯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고르고 고른 말이 드레스 칭찬이라니, 이 남자도 참 처음 만났을 때부터 꾸준히 뻔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애니에게 칭찬을 늘어놓던 칼츠 경이 슬쩍 애니의 눈치를 살피며 웅얼거리듯 물었다.
이 마차 안에는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애니의 곁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얼굴에 흉측한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어서 남자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푸석푸석한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것뿐이었다.
애니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절 지켜주러 온 분이세요.”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은 이번 작전에…….”
“제가 보증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애니는 온화하지만 단호하게 칼츠 경의 말을 잘랐다. 칼츠 경은 불만스러운 것 같았으나,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 마차 안에는 다시 침묵이 맴돌았다. 애니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처음 보는 곳 같아.’
분명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데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낯설기만 했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흐른 거겠지.’
그리고 그때의 애니와 지금의 애니는 달랐다.
그저 어리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던, 과거의 불합리함을 하나씩 떠올리고 있으니 마차는 플로렌스 저택에 도착했다.
초대장을 내미니, 마중을 나온 사용인들이 모두 정중하게 애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환영합니다, 아가씨.”
아가씨라는 호칭도 낯설기 짝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니까.
“연회장은 이쪽입니다. 주인님께서는 2층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연회장을 먼저 둘러보고 싶은데.”
“그건…… 네, 알겠습니다.”
이 저택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던 애니는 바로 연회장으로 자신을 안내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한 애니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쁜 짓에는 센스가 좋네.’
파티가 시작된 지 좀 되었는지 술 냄새가 진동하는 연회장은 조명이 극단적으로 어두워서 사람들의 얼굴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게다가 두꺼운 벨벳으로 구역을 나누어서 한눈에 연회장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있는 애니의 눈에도 현재 여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벌써 취해서 해롱거리는 사람들 천지군.’
애니는 저절로 벌게지는 얼굴을 부채로 가리며 연회장 안쪽을 이곳저곳 거닐었다.
‘박하 향이 나지 않는데?’
꼼꼼하게 연회장을 돌아본 애니는 결국 문제의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냥 거짓말이었나.’
빌리는 그 약을 손에 넣지 못했으면서도 자기가 만들고 있다고 거짓으로 허세를 부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럼 그냥 일반 사건으로 처리해야겠네. 일단, 여기에는 증거가 없어.’
그렇게 생각하고 애니가 막 돌아서려 했을 때였다. 애니가 찾아오지 않자, 초조해진 빌리가 그녀를 찾아 1층으로 내려왔다.
“건방진 계집애 같으니. 왔으면 빨리빨리 얼굴을 비출 것이지.”
투덜거리는 소리가 너무나 잘 들렸다. 애니는 굳이 기분 나빠하지도 않았다. 빌리가 그런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뿌드득.
하지만 그녀와 동행한 남자에겐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곁에서 들려오는 위협적인 소리에, 애니는 손을 뻗어서 남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
까마귀 가면에 가려진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애니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애니 곁에 선 칼츠 경과 의문의 남자 사이에서 잠시 번민하고 있던 빌리는 결국 남자 쪽이 애니가 말한 보스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애니, 그분이 네가 모셔온 손님이니?”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도 비굴하게 어깨를 움츠리는 모습이 전형적인 악당이었다. 애니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오빠.”
차라리 좋은 기회였다. 애니는 거침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먼저 물건부터 내놔.”
“무슨 소리니? 이미 파티는 시작되었는데.”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슬쩍 연회장을 가리켰다. noname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애니에게는 우습기 짝이 없는 공갈이었다.
“이렇게 시답잖게 굴 거면 재미없어. 나는 오빠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니까.”
“이런.”
애니의 대답에 빌리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시키지 않았는데도 제 아버지를 착실하게 닮은 빌리는 여자라면 입을 다물고 남자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고 믿는 종자였다.
빌리는 이를 바드득 갈며 흉포한 표정으로 애니를 응시했다.
“언제 이렇게 건방져졌을까, 우리 애니가.”
“건방?”
그런데 그 말에 대꾸는 애니의 등 뒤에서 나왔다. 검은 까마귀 가면의 남자가 애니의 어깨를 짚으면서 애니 앞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건가.”
움찔.
빌리의 몸이 일순간 움츠러들었다. 남자의 몸이 그보다 훨씬 큰 데다가 가면 아래로 드러난 그의 턱과 뺨에 온통 잔 흉터가 점처럼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저 흉터들은?’
누가 고문한 것처럼 작고 불규칙적인 흉터가 얼굴 전체에 퍼져 있으니, 인상이 좋을 수가 없었다.
빌리는 잔뜩 겁을 집어먹었으면서도 애써 허세를 부리며 물었다.
“다, 당신이 정말 유통 상인인가?”
“못 믿겠으면 사람을 안에 들이지 말았어야지.”
남자는 픽 웃었다. 까마귀 가면 때문에 더더욱 으스스했다. 흉터투성이 커다란 손이 빌리의 멱살을 억세게 틀어쥐었다.
“이렇게 된 거, 여기서 널 죽이고 저택 안에 있는 것만 수거해가야겠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려, 빌리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빌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내가 없으면 만드는 법은 없을 텐데.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이 세상에 나만 알고 있다고.”
그러면서도 부산스럽게 눈동자를 굴리는 것이, 무얼 믿고 맨몸으로 설렁설렁 나왔는지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자는 빌리의 말을 픽 비웃었다.
“원물만 있으면 애니가 만들 수 있어. 물론 시간이 걸리겠지만.”
“저 계집애가 뭘 할 줄 안다고?”
“입 닥쳐.”
애니를 비하하다가 남자의 분노를 샀으면서도,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했다. 남자는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텐가, 아니면 안내할 건가?”
“으윽.”
빌리가 이를 아드득 갈았을 때였다. 선득한 쇠붙이가 빌리의 목줄기를 압박했다. 빌리는 그제야 정신을 번뜩 차렸다.
‘이놈은 진짜야!’
괜히 뻐기다가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빌리는 서둘러 대답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안내하면 되잖아.”
“진즉 그럴 것이지.”
남자는 친근한 듯 빌리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겉보기는 좋아 뵐지 몰라도 빌리가 도망치지 못하게 구속하는 것이었다. 빌리는 벌벌 떨면서 얌전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숙련된 솜씨에 칼츠 경이 애니의 귀에 소곤거렸다.
“……저 사람 정말 누군가요?”
“입 좀 닥쳐요.”
애니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잘랐다.
결론적으로 빌리의 말은 반만 사실이었다.
“이, 이게 그 약이야. 네가 원하는…….”
빌리의 안내를 받아 간 곳에는 흰 가루가 병에 소복하게 담겨있었다.
적어 보이지만 500ml 작은 병 하나만으로도 천문학적인 금액을 자랑한다.
‘규모가 상당하네.’
일단 약을 가지고 있다는 건 공갈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장을 갖춰서 생산 중이라는 건 거짓이었다.
‘나름대로 애는 쓴 것 같은데.’
환각제의 원료가 되는 풀들을 길러내기 위해 여러 가지 설비를 갖춘 것 같으나, 자라고 있는 풀들은 너무 작고 시름시름거렸다.
‘약초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니.’
사실 플로렌스 자작의 제약사업이 망한 것 또한, 그 자신이 약초에 대한 지식 없이 마구잡이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진짜 쓸데없는 것까지 많이 닮았네.’
그만큼 세월이 흘러서일까, 아니면 타이론 공작 부부를 보며 자란 덕분일까. 애니의 눈에는 어릴 때와 달리 빌리와 플로렌스 자작의 비인간적인 면모들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어쨌든 제조를 시도는 했다.’
환각성 약물 유통도, 제조도 모두 중죄였다. 그 사실을 확인받은 애니의 얼굴이 저절로 어두워졌다.
빌리는 그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고 실실 웃으며 남자에게 말을 붙였다.
“이제 협상에 들어갈까요?”
“…….”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빌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재차 대답을 촉구하려고 했을 때였다.
칼츠 경이 품 안에 있던 짧은 검을 뽑아 들었다.
“빌리 플로렌스, 너를 약물 불법제조 및 유통 혐의로 체포한다.”
“뭐?”
빌리는 자신을 겨누고 있는 작고 날카로운 검을 바라보았다. 장검이었다면 모를까 짧디짧은 검인지라 오히려 우습게만 보였다.
‘그리고 고작 이 인원으로 뭘 한다고?’
아까는 애니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았지만, 이 저택에는 경호원이 잔뜩 깔려 있었다. 빌리는 바보였지만, 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얼마든지 돌발행동을 할 수 있다는 건 알았다. 그도 약을 꽤 많이 하는 편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경호원을 부르면 그만이지.’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칼츠는 그가 생각한 어떤 사람보다도 숙련된 기사였고, 밖으로 이미 돌입 사인을 보낸 뒤였다. 바로 품에 들고 있는 작은 마법구슬을 이용해서였다.
지하만 조용하지, 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걸 모르고 빌리는 칼츠에게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이 누군데?”
“나는 근위대 부단장 요한 칼츠다.”
“근위대?”
들으면 들을수록 허술한 변명이었다. 빌리는 부산스럽게 자신의 가슴팍을 뒤졌다. 시가를 피우기 위해서였다. 피우면 세상이 제 발밑에 있는 것 같은 고양감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안 찾아져?’
자신의 손이 떨리는 생각은 못 하고, 빌리는 신경질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근위대가 무엇 때문에 약물 수사를 하는 거지?”
칼츠는 무표정한 얼굴로 빌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검 끝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이다.”
“농담도…….”
근위대는 황제의 친위를 담당하는 곳인데 왜 이런 수사를 한단 말인가. 애써 웃어넘기려던 빌리의 얼굴에 순식간에 쩌적 금이 갔다.
“애니, 이년이!”
그는 순간 악귀처럼 돌변해서는 애니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가족을 팔아?!”
애니는 자신의 탓을 하는 빌리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수년 만에 재회한 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가족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서, 지금 이 순간에는 가족가족 잘도 말한다.
‘누가 보면 내가 떠민 줄 알겠네.’
“팔긴 누가 팔아? 알아서 묘자리를 파고 있었던 거지.”
“뭐라고!?”
애니의 시큰둥한 말이 빌리의 성질을 건드렸다. 빌리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애니의 머리채를 휘어 잡으려 했을 때였다.
“내가 네년은 꼭 죽이고…… 으악!!”
쿵!
까마귀 가면을 쓴 남자가 그 팔을 잡고는 그대로 빌리를 바닥에 메다꽂았다.
“으아아악!”
말 그대로 제압에만 신경 쓴, 무자비한 손속에 빌리의 팔이 꺾였다. 기괴한 각도가 부러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조금도 그의 비명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애니를 곧게 바라보았다. 방금의 몸싸움 때문에 남자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괜찮아?”
동굴에서 나오는 것 같은 그윽한 저음과 잘 어울리는 그을린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형이었지만, 미형이란 느낌보다는 무섭다는 느낌이 강했다. 얼굴 전체에 점처럼 퍼져 있는 흉터가 눈에 먼저 들어왔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난번 무투회 때…….”
그 얼굴을 확인한 칼츠 경이 당황한 어조로 남자를 불렀다. 빌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잡아누른 남자는 담담한 어조로 자신을 소개했다.
“에릭 카멜입니다.”
“요한 칼츠입니다.”
엉겁결에 덩달아 자기소개를 하고 난 뒤, 칼츠 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은 분명 수도 치안대에 입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칼츠는 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해마다 열리는 무투회. 그 행사의 우승자는 이 나라 최고의 검사임을 인정받는 것과 같기에, 황실근위대, 그중에서도 황제를 지척에서 모시는 친위대로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바로 저 남자가 그 영예를 걷어찼지.’
남들은 그 자리를 꿈꾸며 무투회에 참가하는데, 정작 남의 꿈을 빼앗아서는 자신은 길에 내버린 셈이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가치들까지 모조리 짓밟힌 기분에, 칼츠 경은 싫어도 저 얼굴을 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지?’
엄밀히 말해서 수도 약물 단속 같은 일은 수도 치안대에서 맡아야 하는 일이었다. 이번에 근위대가 맡은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는데, 그 현장에 그가 서 있으니 저절로 이런 의혹이 들었다.
‘설마 우리 공을 가로채려고?’
거의 확신에 가까운 억측이었다. 칼츠 경이 지금 상황도 모두 잊고 에릭에게 비난을 퍼부으려 했을 때였다.
애니의 명랑한 목소리가 그의 억측을 모두 잘라내었다.
“제 약혼자예요.”
“예?”
“제 약혼자라고요. 제가 걱정되어서 따라온 거고요. 생각하시는 어떤 정치적인 의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 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말하는 것 같았다. 칼츠 경은 애니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렇게 반문했다.
“하지만 그자는 평민이지 않습니까?”
당연한 질문이었다. 애니는 한미할지언정 귀족 가문의 영애였고, 타이론 대공비의 동생이었다. 칼츠 경에게는 귀족 영애가 평민 남자와 약혼을 한다는 상황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사 작위를 받았다고 해도 고작 그것인걸. 치안대에서 승진하기는 글렀고.’
군벌귀족들 중에서 잘 나간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근위대 출신이었다. 여러모로 에릭은 그들 사회에서 규격 외인 셈이다.
칼츠 경의 말에 애니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저런 잣대가 자신을 잴 때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지만, 에릭을 향하니 도저히 참기 어려웠다.
“정말 끝이 없으시네요. 외모 품평에, 신분 차별, 성인지 감수성도 없으시고.”
애니의 지적에 칼츠 경의 얼굴도 찌푸려졌다.
“왜 그렇게 날카롭게 반응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애니의 얼굴부터 평가하던 남자였다.
‘저런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할 수가 없겠지.’
그저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삶’을 버리고 연구실에서 일하는 애니나, 오직 사랑하는 사람 곁에 서고 싶어서 기사까지 된 에릭의 삶은 그들이 보기에는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이리라.
애니는 그래서 칼츠 경에게 구구절절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신 딱 잘라 본론만 이야기했다.
“당신의 이해는 필요하지 않아요. 그냥 약속했던 보수나 잘 넣어주시고 일주일 공가 처리나 잘해주세요.”
* * *
플로렌스 저택에서 파티를 벌인 이들은 모두 검거되었다. 신종 약물 noname도 모두 잘 수거되었다. 애니가 호언장담한 대로 검사 키트는 해당 약을 복용한 사람들의 피에 반응했다.
“거봐요, 내 말이 맞죠?”
애니의 말에 칼츠 경은 얼굴만 구길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애니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애니도 그에게 더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모든 일을 끝내고 타이론 대공가로 향하는 길.
밤거리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공기는 선선했다. 마차를 불러도 되지만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걷기로 했다. 밤안개가 옅게 깔린 거리를 차분하게 걷던 애니가, 결국 참지 못하고 에릭을 흘겨보았다.
“왜 자꾸 웃어?”
그녀가 못마땅한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다! 에릭이 아까부터 계속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애니의 고양이 같은 시선에, 에릭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날 위해 화내는 것이 기뻐서.”
“그런 거 아니거든.”
애니는 그런 적 없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었다. 에릭은 또다시 낮게 웃었다. 아까 칼츠 경에게 쏘아붙이던 애니를 떠올리기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무척 씩씩했지.’
에릭이 근위대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근위대에는 칼츠 경처럼 꽉 막힌 놈들 천지였다.
“그냥 타이론 기사단에 들어오지 그러나. 자네 정도 실력이면 아무도 토 달지 않을 텐데.”
타이론 대공은 에릭에게 그렇게 권했다. 하지만 에릭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사실 그에게 검술을 가르쳐주고 기사 작위를 내려준 곳이 타이론이기에, 사실 타이론에 그대로 뿌리를 박는 편이 그에게도 주변 여론에도 좋았다.
하지만 에릭은 그 또한 거절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애니가 타이론으로부터 독립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언니는 이대로라면 내 기저귀까지 갈아주려고 할 거야. 나는 그런 삶은 절대 사양이야!”
에릭 또한 타이론을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싶었기 때문에, 기꺼이 치안대에 입단했다. 물론, 타이론 기사단에 들어가면 타이론 대공령에서 일해야 한다는 점도 선택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애니가 연구원 생활을 계속하는 한, 그녀는 수도를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의 미래를 모두 고려하여 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래도 칼츠 경 같은 사람들에게 숨기지 않은 편견 가득한 시선을 받을 때면 어쩔 수 없이 수도에 남은 것이 후회되는 것이다. 애니는 입술을 삐죽였다.
“아주 기분 더러운 일이었어. 보수가 세지 않았으면 받지 않았을걸.”
그래도 보수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전문분야를 살릴 수 있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냥 에릭을 두고 다녀올 걸 그랬나 봐.’
그런 시선으로 볼 게 뻔해서 가면으로 얼굴까지 가린 것인데, 빌리 그놈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다 허사가 되었다. 애니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은 에릭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위험했어. 다시는 하지 마, 그런 일.”
“하지만 덕분에 다 모았잖아. 우리의 독립자금!”
애니는 가볍게 제자리에서 깡충깡충 뛰었다. 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이었기 때문에 저절로 마음이 들떴다.
‘이제 당당하게 언니에게 말할 수 있어.’
올리비아는 애니가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좋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덜컥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결혼하겠다고 상대를 데리고 가는 것은 옳지 못했다. 적어도 어른이 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알려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언니도 이제 가정이 있는데 언제까지 나를 아기처럼 챙길 거야?’
지금도 애니를 다섯 살 아이처럼 대하는 올리비아를 떠올리며 애니는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에릭의 손을 붕붕 흔들었다.
“고마워, 에릭. 함께 가줘서. 솔직히 말해서 칼츠, 그 사람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에릭은 애니가 자신의 말을 들을 리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코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잘 이야기했어.”
위험으로 제 발로 뛰어들 거라면 차라리 자신을 데리고 가는 편이 낫지. 그런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한숨이었다. 자신을 향한 마음을 느낀 애니가 또다시 웃었다.
“헤헤헤.”
“왜 웃어?”
에릭이 눈살을 찌푸렸다. 애니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에릭의 거친 손바닥을 문질렀다.
‘가면이 벗겨졌을 때 칼츠 경의 얼굴이 제법 볼만했지.’
알아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바로 신상명세를 떠올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애니는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내 남자친구가 유명한 사람이긴 한가 봐. 가면 벗자마자 바로 알아보니.”
“흉터 때문이겠지.”
애니의 말에, 에릭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애니는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그 바람에 하늘하늘 흩어졌다.
“그럴 리가 있어? 아마 무투회 때 잔뜩 긴장했을 거야. 자기가 이길 수 없을 거 같으니까.”
“당신이 나를 과대평가하는 거야.”
“아까도 빌리 오빠가 꼼짝도 못 하던걸?”
“그건 당신을 깎아내리니까 더 화가 나서…….”
에릭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생각해도 아까의 그는 과했다. 칼츠 경이 나서도록 내버려 두어도 됐는데, 굳이 보스라는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나선 것은 그가 애니를 모욕했기 때문이었다.
에릭의 건조한 시선이 애니를 향했다. 세상 모든 것을 볼 때와 확연히 다른 온기가 그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에릭에게 애니는 특별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괜찮아?”
“……글쎄.”
에릭의 질문에 애니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애써 밝은 척했지만, 사실 마냥 후련하기만 하진 않았다. 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차라리 없는 게 나은 오빠인데 왜 이렇게 착잡한지 모르겠네. 차라리 알려주고 도망치게 해야 했을까?”
하필 주범이 빌리 플로렌스였을 게 뭐란 말인가. 애니는 자신이 큰오빠를 사지로 몰아가게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찜찜했다. 분명 나쁜 일을 저지른 것은 그쪽인데도 말이다.
‘내가 미리 경고라도 했으면 개심했을 수도 있잖아.’
이런 바보 같은 미련이 자꾸만 남았다. 그러나 애니의 고민을 에릭은 한마디로 정리했다.
“당신이 말해도 믿지 않았을 거야.”
“……맞아. 우리 오빠는 그런 인간이지.”
에릭의 말이 정답이었다. 애니의 말 한마디에 개심할 사람이었다면 진즉 마음을 고쳐먹었을 것이다.
‘결국 후회도 부질없는 것이지.’
그렇게 생각한 애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에릭이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꽉 붙들었다.
“나는 가족이 없어서 이럴 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말에 애니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곧 가족이 될 거잖아.”
“…….”
애니의 말에 에릭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은은하게 빨개진 뺨은 애니의 눈에만 보였다. 키득키득 웃던 애니는 명랑한 어조로 되물었다.
“당신은 괜찮았어?”
“무엇이?”
“그냥. 오랜만에 쉬는 시간인데 쉬지도 못하고.”
애니의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에릭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휴가라고 해도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건 아닌데.’
오히려 애니와 딱 붙어 있을 수 있으니 이쪽이 더 좋았다.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았어. 추억도 되새기고.”
“추억?”
플로렌스 저택에서 에릭이 회상할 만한 추억이 뭐가 있단 말인가. 에릭의 과거를 모르는 애니에게는 의아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때였다. 말없이 걷던 에릭이 불현듯 작은 다리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네.”
“뭐가?”
“…….”
에릭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둡게 가라앉은 시선이 가로등 아래 반짝이는 물결을 담았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오가는 평범한 거리.
그곳에서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 * *
어린 시절 에릭은 길바닥에 차고 넘치는 고아 비렁뱅이였다. 돈 많고 허술한 놈들의 주머니를 훔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밑바닥 인생. 딱딱한 빵이라도 한 덩이 갉아먹을 수 있으면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한데 그날은 그런 날들 중 어느 날과도 같지 않았다. 그는 다리 근처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 하얀 손이 그에게 불쑥 내밀어졌다.
“받아.”
에릭은 눈을 들었다. 예쁜 분홍색 꽃송이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꽃송이를 잡은 손을 따라 올라가자, 진한 빨간색 드레스 소맷자락이 보였고, 옷자락을 따라 올라가니, 꽃송이보다도 훨씬 더 어여쁜 얼굴이 보였다.
‘갈색 머리카락.’
분명 흔하디흔한 색인데, 저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은 좀 더 환하게 보였다. 꼭 잘 익은 밀밭의 색처럼 말이다. 여자아이는 생긋 웃었다.
“받아. 오늘은 내 생일이거든. 언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길래,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 행복을 나누어주기로 했어.”
여자아이의 말은 에릭에게 생소하게만 들렸다. 에릭은 입술을 벙긋거렸다. 말을 할 사람이 없었던지라, 오랜만에 내뱉는 목소리는 거칠기만 했다.
“……행복?”
“응. 행복.”
그 목소리를 들었으면 질색하고 도망칠 만도 하건만, 소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먼지로 더러운 에릭의 손에 꽃송이를 꽉 쥐여주었다.
“너도 오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 되렴.”
커다란 꽃송이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꽃의 향이 아니라, 그 여자아이에게서 나는 냄새가 옮겨온 걸지도 모른다.
그 뒤로, 에릭은 플로렌스 저택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그녀의 집 담벼락을 서성이다가 하인들에게 매질을 당해서 쫓겨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찾아왔다.
‘그 애를 더 보고 싶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온 소녀의 환한 미소가, 그녀가 건네준 달콤한 꽃향기가 며칠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너도 오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 되렴.”
행복이라니. 평생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누가 태어날 때부터 부모도 없는 거지새끼가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단 말인가.
‘그 애가 보고 싶어.’
애니를 만나는 것은 어느 순간, 그가 바라는 하나뿐인 소원이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하루하루를 보냈을까.
대문이 열리고 마차가 한 대 달려 나왔다.
‘그 아이가 있을지도 몰라.’
오로지 그 희망 하나를 가슴에 품고, 에릭은 마차 앞을 가로막았다.
“워, 워!!”
갑자기 뛰어든 사람 때문에 깜짝 놀란 마부가 가까스로 마차를 멈추었다. 에릭은 앞뒤 재지 않고 마차 문 앞으로 달려갔다.
오로지 애니가 얼굴을 내밀길 기다리며.
하지만 문이 열리고 뛰어나온 것은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하녀였다.
“어디 더러운 거지새끼가!”
하녀는 자신이 들고 있던 유리전등을 에릭을 향해 집어던졌다. 얇은 전등이 얼굴에 맞아 박살이 났다. 에릭의 얼굴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꺄아!”
맞은 건 에릭인데, 비명은 마차 안에서 흘러나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라 에릭은 아픔도 잊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마차를 응시했다.
“무슨 짓이야, 마샤!”
“하지만 아가씨!”
하얗게 질린 소녀가 하녀를 밀치고 마차에서 뛰어 내려왔다. 바로 애니였다.
“세상에, 괜찮니? 가엾게도 다쳤잖아.”
그녀는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에릭의 곁에 앉아서는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유리 조각 때문에 더 다칠까 봐 조심스럽게 얼굴을 닦아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아.’
그 손길을 느끼는 순간, 에릭은 자신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버러지 같다고, 존재하는 이유가 없다고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지금 그의 가슴 안에서 뛰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사랑이었다.
* * *
‘그래도 정말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녀는 귀족 아가씨, 그는 부모도 없는 고아 소년.
아무리 목숨을 다해 사랑한들, 이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이렇게 손을 잡고 있다니. 꿈만 같아.’
에릭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니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애니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하는데? 옛날 여자친구 생각해?”
심술이 나서 막 던진 말이었는데, 뜻밖에 에릭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비슷한데. 첫사랑 생각했어.”
“뭐어? 첫사랑!? 첫사랑이 있었어?”
에릭의 말에 애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잠시 이해를 해보려는 듯이 번민하던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울화를 터뜨렸다.
“억울해! 나는 첫사랑이 에릭인데! 나만 억울하잖아! 취소해. 없던 걸로 해!”
“아주 다정하고 상냥한 아가씨였지.”
“얼씨구?”
이렇게 화를 내는데도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하는 에릭을 애니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바라보았다. 에릭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애니에게 속삭였다.
“바로 너 말이야, 애니.”
“……응?”
애니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에릭은 피식 웃고는 애니의 손을 잡아당겼다. 다시 저벅저벅 돌바닥을 차는 걸음 소리가 울렸다. 그에게 이끌려 걸으며 애니가 연신 질문을 쏟아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어릴 때 만난 적 있어? 그때부터 나를 좋아했었어?”
“하나씩 물어봐.”
에릭은 눈을 들어 연한 안개에 휩싸인 거리를 보았다. 이 거리를 하염없이 혼자 헤매던 시절이 있었다. 영원히 혼자서 버러지처럼 살다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당신은 내 빛이야.’
그런 그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바로 애니였다.
“행복을 나누어줄게.”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에릭은 피식 웃었다.
행복은 그녀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