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릴리아나 화이트폴 (25/28)
  • 외전. 릴리아나 화이트폴

    그녀를 마주친 것은 완전히 우연이었다.

    장소는 오르세 왕국의 왕궁. 오랜만에 오르세에 방문하여 인사를 올리기 위해 왕궁에 입궁한 올리비아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여성을 보고 멈춰서고 말았다.

    “어머나?”

    “어머.”

    붉은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올린 여성은 활짝 피어난 장미처럼 화려한 미인이었다. 머리카락 색에 맞춘 듯, 진한 와인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올리비아의 눈에는 익지 않은 드레스 양식이었다.

    당연했다. 저건 제국도, 오르세의 드레스도 아니었으니까.

    “오랜만입니다, 왕비님.”

    “……그러게요.”

    바로 릴리아나 화이트폴이었다.

    올리비아의 인사를 떨떠름하게 받는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불쾌감이 먹물처럼 번져갔다. 그 모습을 보며 올리비아는 코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내게 유감인가 보네.’

    그녀와 이안의 아들 길리언이 벌써 여덟 살이었다. 릴리아나가 폴카의 왕비로 시집을 가게 된 것도 8년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될 법도 하건만.’

    실제로 올리비아는 오늘 여기서 릴리아나를 마주할 때까지 그녀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편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럴 수도 있지. 모두의 마음이 다 내 맘 같은 것은 아니니.’

    서운한 일을 모두 잊고 미래를 도모하는 편이 낫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물며 릴리아나처럼 자아가 비대한 사람들은.

    ‘이제는 얽힐 일도 없으니.’

    거기까지 생각한 뒤, 올리비아는 릴리아나의 생각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릴리아나 말고도 그녀가 생각해야 하는 일들은 오르세에 잔뜩 있었다.

    * * *

    니코 왕자의 일로 왕비와 잠시 데면데면했던 올리비아였지만, 그 후에는 다시 두 사람의 관계가 돈독해졌다.

    올리비아가 그녀에게 정기적으로 선물하는 제국의 유행상품들이 큰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호호호, 덕분에 이번 티파티 때에는 마들렌 부인의 코를 꽉 눌러줄 수 있었다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왕비 입장에서는 사교계 유행을 선도할 수 있는 상품들을 가져다주는 올리비아가 기꺼웠고, 올리비아 입장에서는 왕비가 무료로 생제르망 상회의 물건들을 홍보해주니 이득이었다.

    “그래서.”

    오르세 왕비가 올리비아를 우아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타이론 대공자는 오르세 국적도 함께 가지게 되었다고?”

    “오르세는 제 고향인걸요.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이렇게 부드럽게 대답하기에는 그 과정이 썩 순탄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거의 돈으로 산 것이나 다름없지.’

    국적을 가졌을 경우, 외국인인 경우보다 상속세에서 이득을 보기 때문에 오르세 쪽에서는 치열하게 국적을 부여해주지 않으려고 버텼다.

    하지만 추후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서는 이중국적은 필수!

    ‘어휴, 케닌이 수완을 발휘해서 다행이지.’

    올리비아는 케닌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르세에 머무는 케닌은 다른 의미로 한숨이 나오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올리비아가 딴생각을 하고 있자니, 왕비가 훅 치고 들어왔다.

    “아예 오르세에서 신붓감을 구하는 건 어떤가?”

    “아.”

    올리비아는 얼굴이 굳어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멈췄다. 그리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소개해주고 싶으신 괜찮은 영애가 있나요?”

    “신붓감이야 많지 않은가. 이 왕실에도 비슷한 또래의 영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

    요컨대 가지고 있는 부가 탐이 나서 다시 왕실 식구로 대공비를 넣어 오르세로 가져올 심산인 것이다.

    ‘우리 길리언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텐데.’

    여덟 살이지만 아버지를 꼭 닮은 잔망스러운 소년을 떠올리며 올리비아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아직 길리언은 여덟 살인걸요. 천천히 찾아보려고 합니다. 물론, 알려주신다면 적극 검토는 미리 해보도록 하지요.”

    “여덟 살이면 약혼자를 찾기에는 충분하지 않소. 나도 왕가의 여인이 된 것이 열네 살 때라오.”

    ‘그건 범죄지!’

    결혼연령에서 성년을 중요시하는 제국과 달리, 오르세는 조혼이 유행이었다. 물론 제국 출신인 올리비아에게는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 아들은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

    이미 태어날 때부터 많은 것을 가진 길리언에게는 딱 하나 사랑만이 부족했다. 올리비아는 진심으로 그를 이해하고 응원해줄 수 있는 배우자를 길리언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내가 이안을 만난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며 진심으로 미소 지었을 때였다. 시녀가 들어와서는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 폴카의 왕비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아아, 오셨습니까.”

    그 소리에 올리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의 안내를 받아서 사뿐사뿐 걸어들어오던 릴리아나가 올리비아를 보고 굳어졌다.

    “아.”

    “안녕하세요, 왕비님.”

    올리비아는 얼른 릴리아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릴리아나가 굳어진 얼굴로 그런 올리비아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오르세의 왕비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대공비와 왕비가 동년배에 동향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서로 이야깃거리가 많을 것 같아서 함께 대화할 기회를 마련했답니다.”

    “……그러셨군요.”

    남들이 보기에는 당연히 그럴 법했다. 동향 사람인 데다가, 나이대도 비슷하니까.

    하지만 실상 둘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그래도 표정 관리를 저렇게 못해서야.’

    올리비아는 여전히 굳어 있는 릴리아나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에 앉으니 릴리아나 몫의 차가 세팅되었다. 릴리아나가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오르세 왕비가 먼저 말문을 떠냈다.

    “그러고 보니 근래에 득녀하셨지요?”

    “네, 둘째 아이랍니다.”

    폴카로 시집간 것이 몇 해인가. 충분히 아이 둘을 낳을 수 있는 기간이었다. 오르세 왕비는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딸 둘이라니 국왕께서 몹시 예뻐하시겠습니다.”

    그런데 대답이 영 새침했다.

    “그래봤자 딸인걸요.”

    왕위 계승에 잡음이 있음을 팍팍 알리는 듯한 대답이었다. 여자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을 떠올린 오르세 왕비는 릴리아나의 가시 돋친 대답에 조금 당황했다.

    그때, 릴리아나의 시선이 올리비아를 향했다.

    “……그러는 대공비께서는 아들 하나만 있으시던가요?”

    “그렇답니다.”

    화살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눈치챈 올리비아가 온화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자 오르세 왕비가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대공자가 대공을 닮아 얼마나 잘생겼는지 모른답니다. 벌써 장래가 기대된다고 할까요.”

    “…….”

    아들이 이안을 닮았다는 소리는 릴리아나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이후 이야기는 지루하게 흘렀다. 유행 이야기, 사교계에서의 고달픔, 바람직한 왕비의 자세 등등.

    그러다가 오르세 왕비가 릴리아나의 미모를 칭찬했다.

    “아이를 둘이나 낳으셨는데도 어쩜 이리 고우신지.”

    그 말에 릴리아나는 고개를 들고 우쭐거렸다.

    “저는 다산 체질이라고 모두 감탄했답니다. 둘째도 한 시간 만에 태어났지요.”

    “어머나.”

    초산이 아니라고 해도 한 시간 만에 순산했다니 부러운 이야기였다. 올리비아가 시큰둥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다시 화살이 그녀를 향했다.

    “타이론 대공께서는 외로움이 많으시니, 많은 자녀를 낳아드려야 할 텐데.”

    웃으면서 하고 있지만 번뜩이는 시선에서 속내를 감출 수가 없었다.

    ‘너 말고 내가 타이론 대공비가 되었다면 이안도 더 행복했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시선이었다.

    올리비아는 담담히 그 눈빛을 받아넘기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이는 무척 행복하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상냥한 분이시니 말씀이야 그렇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상냥하지만 빈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랍니다. 왕비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테죠.”

    “…….”

    올리비아의 말이 정확한지라, 릴리아나는 입술을 비틀면서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오르세 왕비가 조금 놀랍다는 듯이 되물었다.

    “타이론 대공을 잘 아십니까?”

    “예. 오누이와 다름없는 사이였거든요.”

    그 이후 릴리아나는 이안과 얼마나 친한 사이였는지를 길게 늘어놓았다. 차를 호로록 마시며 올리비아는 한숨을 함께 삼켰다.

    ‘아직도 미련이 남나 보구나.’

    씁쓸한 이야기였다.

    * * *

    “타이론 대공비.”

    그렇게 티타임을 파하고 돌아서는데, 릴리아나가 복도에서 올리비아를 불렀다. 올리비아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멈춰 섰다.

    릴리아나는 아까보다도 훨씬 사나운 얼굴로 올리비아에게 따졌다.

    “내 것을 빼앗고 살고 있으니 행복한가?”

    “……당신 것이라뇨?”

    “그대의 지위, 그대의 남편, 아들까지 모두 내 것이었을 텐데, 그대가 빼앗은 것 아닌가.”

    “하.”

    어이가 없으니 웃음이 나왔다. 어지간히 말이 되는 소리를 지껄여야지.

    ‘아직도 그런 망상 속에 사나.’

    미련이 남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현실을 왜곡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올리비아는 날카로운 어조로 그 부분을 지적했다.

    “제가 없어지면 이 자리가 당신의 것이 되나요?”

    질투도 정도 껏이지, 그 이상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릴리아나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이안은 날 사랑해.”

    “그건 당신의 망상이죠.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안은 평생 혼자 살았을 거예요.”

    이미 한 번 거쳤던 미래이기에, 올리비아는 더 힘을 주어 말할 수 있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세상의 중심이 당신이 아니고, 당신이 주인공이 될 수도 없다는걸요.”

    누구나 10대에 깨달아야 하는 진리를, 릴리아나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올리비아의 말에 발을 구르며 화를 냈다.

    “난 달라. 난 특별해. 나는 왕자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단 말이야.”

    그 말이 올리비아에게는 더더욱 우스웠다. 동화 속 왕자의 사랑을 꿈꿨다고?

    “그래서 왕비가 되셨잖아요?”

    그래서 그 왕자와 결혼하여 왕비가 된 것 아닌가.

    시큰둥해하는 올리비아의 대답에 릴리아나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뭐가? 그 배불뚝이에 여색만 밝히는 뚱뚱한 남자? 그게 왕자님이라고 할 수 있나?”

    “당신이 희망했던 자리였어요.”

    “이런 자리인 줄 알았다면 희망하지 않았을 거야! 모두 나를 속였어! 당신은 내 것을 빼앗았고.”

    “……더 이상 말하는 의미가 없군요.”

    말귀가 통하는 사람이어야 이야기를 하지. 올리비아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릴리아나가 당장이라도 그 머리카락을 뜯고 싶다는 표정으로 올리비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 보잘것없는 당신 같은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다시 내게 돌려줘.”

    “당신 말이 맞아요. 이 세상에서 나는 그저 하늘을 가로지르는 작은 별 중 하나에 불과하겠죠.”

    올리비아는 릴리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제발 이제는 깨달아요. 당신은 태양이 아니에요.”

    “뭐? 이, 이 여자가!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그러거나 말거나.

    올리비아는 악을 쓰는 릴리아나를 등 뒤에 내버려두고 휙 돌아섰다.

    ‘저 여자가 저리 마음먹고 지옥 같은 인생을 살든, 말든.’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인생을 걸어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