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아들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올해 일곱 살 난 길리언 타이론 대공자는 어린 나이에 비해 수많은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남신의 강림’ ‘아버지를 쏙 빼닮은 미남’ ‘서글서글한 미소가 사랑스러운 소년’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 ‘지상에 강림한 아기천사’
일곱 살밖에 안 먹은 아이에게는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호칭들이었지만, 사실 본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세상에 나보다 예쁜 아이는 없는걸.’
소년은 대단한 나르시시스트였다. 하지만 이 다소 밥맛없는(?) 성정은 한 번도 구설에 오른 적이 없었다.
‘어머니도 참 특이해. 겸손하시다고 해야 하나.’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올리비아 타이론 대공비는 아들이 아버지를 닮은 나르시시스트가 되는 것을 굉장히 경계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자랑하지 말라면 자랑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그 아들은 대단한 마마보이였다.
* * *
일설에 의하면, 자신의 뒤를 이를 첫아들을 받아 든 이안 타이론 대공의 첫 마디는 이거였다고 한다.
“내가 다시 아이를 가지면 사람이 아니다.”
그만큼 지독한 난산이었다.
출산이 이런 것인지 모르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실에 들었던 이안은, 올리비아가 진통하는 그 순간부터 제 자리에 서질 못하고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괜찮아? 이게 언제 끝나는 거지? 곧 끝나는 건가? 원래 이렇게 고통스러운 건가?”
“……전하, 지금까지 같은 질문을 67번 하셨습니다.”
“67번 할 동안 변화가 없으니까 그런 것 아니야!”
진통이 시작된 것은 사람들이 활발하기 활동하기 시작하는 오전 10시쯤.
어떤 아기들은 새벽에 갑자기 성급하게 나가려고 떼를 써서 부모를 곤란하게 만든다고 하던데, 이 아이는 아침 식사가 끝나고 문을 두드리니 참으로 예의 바른 신사라고 생각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출산에 대해서 더 알아봤을 거야.’
이안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올리비아의 얼굴을 닦아주기도, 그녀의 손을 잡아주기도 했지만, 결국 어떤 것도 분담해줄 수 없었다.
그렇게 해가 저물고 오후 10시가 되던 그때까지 꼬박 12시간.
신사라고 생각했던 아이는 결국 주변을 모두 녹초가 되게 만들고서야 세상에 태어났다.
“으아앙!”
“건강한 남자아이입니다, 전하.”
“축하드립니다, 전하!”
산모는 초산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서넛은 낳아본 사람처럼 의연했건만, 남편 쪽이 문제였다. 이안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의료진들은 핼쑥한 얼굴로 이안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갓 태어난 아기는 무척 작았고, 얼굴을 새빨갰으며, 몸 여기저기가 푸르스름했다. 작은 머리통에는 적은 숱이지만 선명한 금빛 머리카락이 돋아나 있었다.
“……내가 다시 아이를 가지면 사람이 아니다.”
쭈굴쭈굴한 얼굴임에도 누굴 닮았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아기였다. 그럼에도 아들을 품에 안은 감회는 건조하기 짝이 없어서, 듣고 있던 이들이 움찔 놀랐다.
이안이 복잡한 눈빛으로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기는요?”
“올리비아!”
혼절한 듯했던 그녀가 이안을 향해 팔을 들었다. 이안은 얼른 안고 있던 아기를 올리비아의 품에 안겨주었다.
“아기는 여기 있습니다.”
“내 아기.”
누운 채로 아기를 한쪽 팔에 끼우게 된 올리비아가 고개를 살짝 들어서 아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연신 흘린 식은땀에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안은 고개를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이안?”
아기는 다시 하녀들이 데려갔다. 올리비아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절대로 그녀 앞에서 거친 소리를 내는 적이 없는 이안이었기에 더더욱 의외였다.
‘왜 그러지? 감격이 벅차올라서 그러나?’
그런데 당연히 돌아보고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할 줄 알았던 그가 고개를 숙인 채로 어깨만 들썩거렸다. 올리비아는 설마설마하며 물었다.
“……울어요?”
“안 웁니다.”
“우는 것 같은데.”
대답이 좀 떨렸다. 그러자, 이안은 소맷부리로 자신의 눈을 거칠게 문질렀다. 그리고는 올리비아의 곁에 다시 무릎 꿇고 앉으며 대답했다.
“원래 눈망울이 반짝이는 편입니다.”
“하하, 이 와중에도 잘도 말하네요.”
그래도 한번 터진 눈물이 좀처럼 다시 가라앉지 않는지, 이안의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올리비아는 키득키득 웃으며 손가락으로 이안의 눈가를 문질렀다.
“난 괜찮아요, 이안.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제가 안 괜찮습니다.”
평소에는 이 정도 달래면 곱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늘은 정말 놀랐는지 계속 토를 달았다.
올리비아는 힘없이 손을 뻗어 이안의 금빛 머리카락을 토닥토닥 거렸다.
‘귀여워.’
정말 이렇게까지 귀여울 노릇인가. 몸은 욱씬거리고,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는데 자꾸만 저 우는 얼굴을 만지고 싶었다.
그렇게 고양이를 어르듯, 이안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니 눈물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빨간 눈꼬리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정말 이놈의 것, 잘라버리든지 해야지.”
적나라한 말에 올리비아의 입에서 결국 또 웃음이 터져버렸다.
“무슨 소리예요.”
“웃지 말아요.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으니까.”
정말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 올리비아는 잔잔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개구쟁이처럼 입술을 삐죽거리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올리비아의 뺨에 입을 맞췄다.
“너무 고생했어요.”
순순히 입맞춤을 받으며 올리비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 꼴이 말이 아닐 텐데.”
12시간이나 시달렸으니 초췌하고 부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봐온 것 중에서 최고로 예뻐요.”
이번에 입술이 닿은 곳은 올리비아의 입술 위였다. 얕게 입을 맞춘 뒤, 그는 순순히 떨어져나갔다. 올리비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름은 길리언이 되었군요.”
아들이면 길리언, 딸이면 길리아나.
‘역시 아들이었어.’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임에도 알 수 있었다. 이안 쪽을 더 많이 닮았다는 걸.
‘꿈도 믿을 만하다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고 있자니, 이안이 입술을 댓발 내밀고 툴툴거렸다.
“이미 정해져 있었지 않습니까.”
이안의 말을 들은 올리비아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말하는 정해져 있다는 건 성별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기를 낳기 일주일 전, 스타티스 부부가 먼저 아기를 낳았다. 조산이었지만, 건강한 딸 아기였다.
“딸이니, 아이 이름을 길리아나라고 해야겠군.”
이미 태황제의 주접으로 길리언, 길리아나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던 스타티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길리아나라는 이름을 채갔다.
‘우리가 먼저 지었습니다!’라는 이안의 항의는 당연하지만 받아지지 않았다.
“대공이 지어준 이름이니 아기도 무척 기뻐할 걸세.”
스타티스가 뻔뻔하게 그렇게 말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때를 떠올린 이안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툴툴거렸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부부라니까요.”
“이안.”
올리비아가 엄한 어조로 이안을 꾸짖었다. 이안은 눈을 내리깔고는 강아지처럼 올리비아의 손등에 뺨을 비볐다.
“올리비아.”
그가 부르는 그녀의 이름은 늘 설탕처럼 달았다. 올리비아는 한쪽 눈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이안은 그런 올리비아의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고생했어요. 어서 한숨 자도록 해요. 내가 당신 곁을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자라고 했지만, 바로 잠들 수는 없었다. 땀에 젖은 옷도 갈아입고, 흐른 피도 닦아내야 했으니까.
올리비아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이가 아픈 거 같아요. 손목도 아프고.”
“턱에 힘을 주어서 그럴 겁니다.”
이안이 조심스럽게 올리비아의 턱을 문질렀다. 눈그늘이 짙어진 얼굴이 안쓰럽기만 했다.
“차라리 제 배 속에 넣고 제가 낳는 게 낫겠습니다. 이렇게 심장이 떨어져서야.”
“그렇게 심한 편도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은 훨씬 오래 걸리는걸요.”
12시간 진통이 결코 편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훨씬 길게 고생하는 난산도 많았다.
‘이만하길 다행이지.’
올리비아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이안이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입니까. 내 아내가 당신인데.”
“하하.”
이안의 대답에 올리비아는 결국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끌어안고 입을 쪽 맞춰주고 싶었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소리만 하죠?”
“당신이니까요.”
올리비아의 손가락에 재차 입을 맞춘 이안이 울상을 짓고 중얼거렸다.
“정말 절대로 둘째는 낳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그때처럼 올라타도 절대로 안 넘어갈 거예요.”
“저도 사양이에요…….”
그 후 올리비아는 따뜻한 수건으로 몸을 닦고 깨끗한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고생한 탓인지 순식간에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올리비아의 곁을 지키는 이안에게 곁에 다가온 집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전하, 전하께서도 옷을 갈아입으셔야…….”
물론 이안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모두 물러가라. 나는 내 아내의 곁을 지킬 것이다.”
* * *
“그랬었죠.”
타이론 대공저에서 열린 티파티. 기꺼이 참석한 스무 명의 귀부인들이 입에 올린 것은 다름 아닌 길리언의 탄생 때 이야기였다.
특히 출산 과정은 물론이고, 꼬박 하루 넘게 부인의 곁을 지킨 타이론 대공의 이야기는 수도에 널리 퍼져서, 대공 부부의 금실이 얼마나 좋은지 알려주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되었다.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요.”
“우리 그이는 제가 아기를 어디로 낳았는지도 모를걸요.”
“호호호, 짓궂으셔라. 아무리 무심해도 모를 수가 있나요.”
화사하게 꾸민 귀부인들이 모두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중심에는 어깨를 살짝 스치는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네요. 벌써 수년이나 지났는걸요.”
바로 올리비아였다.
올리비아 타이론 대공비는 아가씨 시절에는 사람들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대공비가 된 이후에는 완전히 달라졌다.
‘저 여자가 오르세의 마이옌 공의 딸일 줄 누가 알았겠어.’
‘타이론 대공이 괜히 혼인한 게 아니라니까.’
처음 결혼할 때는 사랑하는 마음이 빚어낸 금세기 최고의 신데렐라 스토리였으나, 지금은 이안을 부러워하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올리비아 타이론이 소유하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보라. 백화점과 거대한 상회, 그리고 오르세에 가지고 있는 수많은 저택들.
‘제국과 오르세를 오가느라 바쁘지.’
‘제국에 계실 때 눈도장을 찍어야 해.’
사업적인 문제로 제국과 오르세를 오가는 대공비 때문에, 그녀가 가끔 주최하는 티파티의 초대장은 가치가 천정부지였다. 그녀의 눈에 들어서 마티니 백화점 VIP만 되어도 이득이니, 저마다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했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 들어봐도 알 것 같네.’
한편, 티파티를 내려다보며 왕년의 사교계 퀸이었던 올리비아는 무척 시니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런 표정은 좀 감추지. 부채는 뒀다 뭐하나.’
아무리 눈치가 느리다고 해도 사람을 돈다발처럼 바라보는 시선을 모른 척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하물며 저렇게 티 나게 바라보고 있어서야.
‘아아, 지루해. 이 시간에 케닌의 보고서를 읽는 편이 더 나을 텐데.’
올리비아를 대신해서 오르세에 남은 케닌은 현재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얼마나 완벽하게 적응을 했냐면, 이런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 아무래도 저는 전생에 오르세 사람이었나 봐요.
거기에 동봉된 케닌의 초상화는 더더욱 가관이었다. 분홍색 바탕에 푸른색 무늬가 있는 화려한 셔츠에 머리 모양도 괴상했다!
‘일은 제대로 하는 걸까. 지난번에도 연락했더니 남부 섬을 순회 중이라고 하지 않나.’
아무래도 제국으로 불러들여야 하는 거 아닐까 싶었지만, 또 올라오는 보고서와 실적은 눈부셔서 그런 말을 쏙 들어가게 만들었다.
‘어쨌든 꼼꼼히 봐야 해. 뭔가 이상하다고.’
하지만 마티니 백화점 사업도 해야 하고 생제르망 상회 제국지부 사업도 해야 하는 올리비아 입장에서는 오르세의 상회 일까지 신경 쓰기가 영 쉽지 않았다.
‘아아, 바쁘다 바빠.’
이렇게 바쁜 그녀가 제국에 머무를 때마다 다과회를 개최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타이론 대공자께서는 정말 늠름하세요.”
“아직 연치가 어리신데도 정말 의젓하세요.”
“저희 아들과 비교하면 너무 어른스러우셔서 깜짝깜짝 놀란답니다.”
바로 하나뿐인 아들, 길리언 타이론 때문이었다.
길리언 타이론은 이안을 꼭 빼닮은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복숭앗빛의 싱그러운 뺨에, 여자로 착각할 만큼 그윽한 눈매, 구불거리는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은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이름처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았다.
“짐의 첫 사촌인데 그냥 넘어갈 수 있나. 그에게 타이론 백작위를 내리고 그린란드를 영지로 내린다.”
첫 시작은 황제 폐하였다. 조산으로 아이를 낳은 만큼, 황제의 출산 시간은 무척 짧았는데, 그만큼 정무로 복귀하는 기간 또한 짧았다.
그리고 복귀하자마자 내린 명이 바로 저것이었다.
“폐하, 무척 과하옵니다! 재고하여주시옵소서!”
고작 태어난 지 40여 일 된 아기가 백작이 된다는 소식에 혼비백산한 올리비아는 황궁으로 당장 서신을 띄웠다. 그러자 돌아온 황제의 대답은 쌈박하기 그지없었다.
“왜? 그대가 다트로 맞춘 세 개를 모두 주려다가 참는 건데.”
이것이 황제의 스케일인가. 할 말이 없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황제 폐하께서도 저렇게 하시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아들이라고? 그럼 황실보고 안에 있는 검들 중 한 자루를!”
만두 태황제도 당연히 지지 않고 주접을 떨었다.
“이 아이는 오르세의 왕족이기도 하니 당연히 오르세 왕국의 보물을 꺼내야지요.”
사돈 체면에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마이옌 공도 등판했다.
이렇게 난리를 치는 와중에 의외로 가장 난리를 칠 줄 알았던 이안 타이론 대공은 조용했다.
이안이 아기를 위해 뭘 줄까 너무나 궁금했던 나머지,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이안에게 물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태어난 아드님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나는 준비하지 않소.”
“네? 어째서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어머니를 이미 가지게 해주었으니, 그 녀석이 내게 감사해야 맞지.”
역시 자타공인 아내 팔불출다운 대답이었다.
하여간 이렇게 많은 것을 타고난 아들을 두고 있으니, 올리비아는 이런 걱정을 하게 되었다.
‘우리 아들이 제대로 된 사회성을 기를 수 있을까? 주변에 죄 어른들뿐인 데다가 저 어른들도 저렇게 저 아이를 예뻐하지 못해서 안달이니.’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아이를 가진 부모들과 함께하는 티파티였다.
‘우리 아들에게도 좋은 친구가 생겼으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올리비아는 찻잔을 들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지만 그냥 좋은 차를 즐기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그 또한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 * *
한편, 같은 시간 길리언 타이론 대공자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아, 지루해.’
워낙 천사처럼 예쁘게 생긴 아이인지라 지루해하는 표정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동년배 소년 소녀들은 은연중에 길리언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길리언의 눈에 차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와서 할 것이지.’
길리언은 취향이 완전히 제 아버지와 똑같았다. 무슨 소리냐 하면 올리비아처럼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똑 부러지게 할 때 가장 좋아한다는 뜻이다.
‘어머니도 참. 이런다고 친구가 생길 턱이 있나. 수준이 맞아야 생기지.’
길리언은 턱을 괴고 속으로 다소 재수 없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미운 일곱 살임을 감안하면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생각은 별로 귀엽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귀엽지만.’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길리언이 슬쩍 미소 지었을 때였다.
어린 영애 하나가 활짝 웃으며 길리언에게 말을 붙였다.
“길리언, 우리랑 공놀이하자.”
“더워.”
길리언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곁에 앉아 있던 다른 영애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더워? 그럼 부채질해줄까?”
“그러면 눈이 건조해져.”
이렇게 대놓고 귀찮아하면 그만할 법도 하건만, 다 같이 키득거렸다.
“귀여워.”
‘뭐가 귀엽다는 건지.’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다 귀찮았다. 많은 여자아이에게 둘러싸인 채 앉아 있던 길리언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난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야겠다. 집에서도 이렇게 시달린다고 생각하니 피곤해.’
공교롭게도 제 아버지와 비슷한 비혼 희망이었다.
그렇게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싸여서 시큰둥한 대답을 해주고 있을 때였다. 웬 남자아이 한 명이 한쪽에 공을 끼고 심통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다들 그 녀석은 내버려 두고 우리끼리 공놀이하자.”
누군가 해서 고개를 들었더니, 어디 3층에서 굴러떨어진 식빵같이 생긴 녀석이었다. 길리언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녀석은.’
안 그래도 볼 때마다 거슬리던 녀석이었다. 길리언이 입술을 비틀었을 때였다.
아까 같이 공놀이하자던 애가 제일 사납게 대꾸했다.
“싫은데? 우리가 왜?”
“난 길리언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그래. 길리언은 예쁘잖아.”
“이익.”
그녀들의 말에 식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물론 길리언도 어이없어하긴 마찬가지였다.
‘아까는 공놀이하자더니.’
역시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다, 사람의 말!
바로 그때였다. 여자애들이 모두 길리언의 편을 들어서일까. 식빵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빽 소리쳤다.
“그래봤자 걔는 반푼이 혈통이잖아! 그런 애랑 뭐하러 잘 지내려고 해?”
“…….”
그 말에 길리언의 얼굴이 딱하고 굳어졌다.
‘뭐라고?’
저 반푼이 혈통이라는 말이 뭔지는 길리언도 알고 있었다. 바로 올리비아가 마이옌 공의 혼외자이기에 나온 말이었다.
사실상 마이옌 공이 평생 수절하며 지조를 지켰음에도, 두 사람이 정식 혼인상태가 아니었음을 지적하며 사람들은 올리비아를 혼외자로 깎아내렸다.
‘그걸 지금 내 앞에서 간 크게 떠들어?’
길리언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그러자 그 식빵 녀석이 도리어 더 화를 내었다.
“그걸 얘네들이 몰라서 그렇지, 알면 너랑 놀아줄 거 같아? 너는 결혼도 못하고 평생 혼자 살걸!!”
“…….”
그 말을 들은 길리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식빵은 괜히 쫄아서 으르렁거렸다.
“뭐, 뭐? 사실이잖아?”
“사실이면 뭐든 말해도 된다는 거야?”
“그래! 나는 정직한 것뿐이라고.”
“그래? 그렇구나.”
그 대답에 길리언은 활짝 웃었다. 워낙 예쁘게 생긴 이목구비인지라, 웃는 순간 꽃이 휘날리는 것처럼 환하게 빛났다.
“헉.”
두근!
일순간, 심지어 그 식빵 녀석마저 할 말을 잃고 길리언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길리언은 천사처럼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물었다.
“여자들은 예쁜 남자를 좋아하는데 너는 어떻게 결혼해?”
촌철살인이었다.
말뜻을 알아들은 식빵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타올랐다. 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 남자는 외모가 전부가 아니야!”
“그래?”
물론, 결혼이 얼굴로만 되는 건 아니다. 집안, 재력, 성격, 직업 등등 다양한 요건이 맞아떨어질 때 이루어지는 것이긴 한데.
길리언은 무슨 말이냐는 듯이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성격이 썩 좋지도 않잖아.”
“무슨 근거로 내 성격이 좋지 않다는 건데!”
저 겉만 번지르르한 녀석은 예쁘장한 얼굴에 악마 같은 성격을 감추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식빵이 버럭 소리 질렀다.
‘나야말로 천사처럼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걸.’
얼굴은 좀 부족할지라도 마음은 벨벳처럼 곱다고 생각했을 때.
길리언은 울먹이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웅얼대듯 말했다.
“그야 나는 정말로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지금 화를 내고 있잖아.”
“뭐?!”
누가 걱정하는 말을 그렇게 한단 말인가! 식빵이 화가 나서 큰 소리로 반박하려고 했을 때였다.
“길리언의 말이 맞아!”
“못됐어!”
그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소리를 질렀다. 여자애들만이 아니라 남자애들까지였다.
“흑.”
지금 자신의 편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흐아아앙!!”
식빵은 추하게 울며 도망치고 말았다.
그렇게 다과회는 식빵의 울음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자초지종을 듣고 달려온 올리비아는 깜짝 놀라서 아들을 붙들었다.
“아니, 길리언!”
“네, 어머니?”
길리언은 커다란 눈망울을 천진하게 깜빡였다. 길리언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올리비아를 닮은 부분이 바로 눈이었다. 아몬드 형의 이안의 눈과 달리, 길리언의 눈은 끝이 여우처럼 뾰족했다.
올리비아는 길리언과 시선을 맞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했니?”
“무슨 말이요?”
“마르티스 영식이 못생겨서 결혼 못 한다는 말.”
‘그 식빵같이 생긴 게 마르티스 영식이었나?’
알 게 뭐람. 길리언은 시큰둥하게 다시 기억 저편으로 이름을 몰아냈다. 그리고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정말 걱정되어서 그랬어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외모 같은 건 직설적으로 지적하면 안 되는 거야.”
“왜요?”
올리비아의 말에 길리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잘생긴 건 사실이잖아요.”
“그러니까 조금 더 겸손하게…… 아이고.”
아들의 잘못을 지적해주려고 해던 올리비아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알려줘야 한단 말인가.’
걱정한 대로였다. 태어나서부터 자신이 잘생긴 것을 아는 아이!
‘잘생긴 건 좋지만, 남을 무시하면 안 되는데.’
그리 생각하며 올리비아가 입을 다물었을 때였다. 등 뒤에서 그윽한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인가요, 올리비아?”
“이안!”
올리비아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반색했다. 그녀의 등 뒤에는 멋들어진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이안이 걸어오고 있었다.
다소 무뚝뚝했던 과거의 인상과 달리, 최근 타이론 대공에 대한 이미지는 ‘친절하고 겸손한 신사’였다.
‘이안이라면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거야.’
잘생긴 남자의 삶은 잘생긴 남자가 알지 않겠는가. 그렇게 결론지은 올리비아는 이안에게 말했다.
“이안, 나 머리 아파요. 당신이 길리언에게 다시 이야기 좀 해줘요.”
“네, 올리비아.”
이미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인지, 이안은 자초지종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남편이 최고야.’
믿음직한 남편의 뺨에 입을 맞춘 뒤, 올리비아는 자신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붕어빵처럼 똑같이 생긴 두 부자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올리비아의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올리비아가 완전히 사라진 뒤, 이안은 길리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했다, 길리언.”
“별말씀을요.”
길리언은 이안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으로 짝 소리가 나게 마주쳤다.
이미 정원에 있던 시종들의 입을 통해 자초지종을 모두 전해들은 이안이었다. 그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중얼거렸다.
“그 못생긴 식빵 같은 것이 겁도 없이 우리 아내를 뒷담을 했다면서.”
“그러니까 말이에요. 분수를 몰라도 유분수지.”
길리언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똑 닮은 노란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이안은, 그래도 뒤늦게 아내의 ‘조언’을 해주라던 부탁을 떠올리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냈다.
“그래도 매끄럽지 못했어. 질책받을 만한 꼬리는 절대로 남겨두면 안 되는 거란다.”
물론 그 방향은 올리비아가 예상한 것과 아득하게 멀었다. 이안의 말에 길리언은 콧방귀를 끼었다.
“흥. 아버지나 잘하세요. 지난번에 셰퍼트 상회의 법인취소 공작을 벌이셨잖아요. 애들 싸움에 죽자고 달려드시다니.”
셰퍼트 백작 영식은 지난번 다과회 때 올리비아가 상회를 운영하는 노하우가 부족해서 생제르망을 잘 키우지 못한다고 입을 털었던 열두 살 소년이다.
올리비아가 어린애가 뭘 알고 그랬겠냐고 웃고 넘어가서, 이안도 생글생글 웃으며 넘어가는 듯싶었었는데.
“……그거 너는 어떻게 알았냐?”
사실은 뒤에서는 셰퍼트 상회의 법인취소까지 시도했던 것이다.
이안의 물음에 길리언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도도하게 대답했다.
“어머니는 모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서 이런 능구렁이가 나와서.”
“누굴 닮았겠어요?”
“…….”
“…….”
말싸움을 하던 부자는 문득 동일한 불쾌감을 느껴서 입을 다물게 되었다.
두 사람은 지나치게 닮아서, 어떤 욕을 하든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었던 것이다.
‘왜 나는 아버지를 닮았을까.’
‘아내를 닮은 예쁜 딸이나 나왔으면 좋았을 것을.’
심지어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생각하는 것까지 비슷했다.
둘이 그렇게 오순도순 서 있으니, 올리비아가 다시 내려왔다.
“이야기는 끝났나요?”
“네, 올리비아.”
애초에 혼낸 적도 없으면서, 이안은 말을 아주 잘 들었다는 듯이 해맑게 대답했다. 바로 그때였다.
“흑흑, 어머니.”
“?!”
옆에서 아주아주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이안은 기가 막혀서 옆을 돌아보았다. 길리언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제가 그렇게 나쁜 말을 했는지 처음 알았어요. 전 정말 나쁜 아이예요.”
“뭐라고? 지금 우는 거니, 길리언?”
눈물이 별로 없어서 걱정까지 되던 아들이 지금 서럽게 울고 있었다. 잠시 굳어 있던 올리비아는 서둘러서 길리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울지 말렴. 마르티스 영식이 먼저 나쁜 말을 했다면서. 엄마도 다 들었단다.”
“그래도요! 저같이 나쁜 아이는 울어도 되어요. 이 얼굴이 못생겨질 때까지 울 거예요.”
“도대체 아이를 얼마나 혼낸 거예요, 이안!”
엄마가 달래도 눈물이 그치질 않으니, 결국 불똥이 튄 것은 이안에게였다.
‘억울해!’
혼낸 적은커녕, 오히려 이 쪼그마한 아이에게 핀잔까지 들은 이안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이 능구렁이 같은 녀석은 한술 더 떠서 머리를 짚고 비틀거리며 말했다.
“어머니, 너무 혼이 나서 그런가, 조금 어지러워요.”
“이리 와, 길리언. 세상에, 우리 아가를 누가.”
올리비아는 있는 힘껏 길리언을 마주 안았다. 길리언은 올리비아의 어깨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오늘 어머니랑 같이 자고 싶어요.”
‘안 돼!’
그 말에 이안은 입을 떡을 벌렸다.
‘오늘은 내가 올리비아랑 자는 날인데!’
이 똑 닮은 부자는 엄마와 아빠, 아들 셋이 다 같이 잔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저 멀리로 날려 보냈다. 결국 암묵적인 동의하에 요일을 나누었는데…….
‘너 지금 선 넘는 거야. 그만해라.’
‘흥.’
부자는 올리비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 치열한 다툼도 결국 올리비아의 말 한마디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래, 그래. 오늘은 힘들었으니까 엄마랑 코코낸내 하자.”
“네!”
‘코코낸내는 무슨! 덩치가 멧돼지도 때려잡게 생겼구먼!’
올리비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리언을 보며, 이안은 애꿎은 바닥만 발로 찼다.
아버지의 마음을 읽은 길리언은 용의주도하게 몰래 혀도 내밀었다.
‘메롱.’
‘아이고, 저 녀석.’
완전히 이안의 패배였다. 이안은 손바닥으로 얼굴만 덮었다.
“저어, 전하. 하실 일이 아직 남으셨는데…….”
아내와 아들을 떠나보내고 멍하니 서 있는 대공에게,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이안의 눈빛이 일순간 번뜩였다.
“마르티스…….”
“네?”
“그 집 구석에 대해서 조사해와.”
“네에??”
이렇게 또 음침한 복수를 할 곳이 한 군데 더 늘어났다.
* * *
올리비아는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팔을 넓게 펼치자, 길리언이 쪼르르 들어와서는 팔을 베고 누웠다. 올리비아는 팔꿈치를 세워 길리언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많이 컸네.’
옛날에는 품 안에 쏙 들어왔는데, 이제는 팔이 좀 짧았다.
‘일곱 살치고 큰 편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얼굴을 제 아버지와 쏙 빼닮은 소년은, 체형까지 비슷했다. 키가 훌쩍 크지만 이안은 전반적으로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는데, 길리언 또한 그랬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안아보면 보기보다 큰 골격에 깜짝 놀라고 마는 것이다.
‘많이 닮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진짜 이렇게 똑같을 줄은 몰랐어.’
얼굴 전체에서 눈의 형태 빼고는 올리비아를 닮은 곳이 없기 때문에, 눈을 감으면 정말 이안과 똑같았다.
‘신기해.’
그와 자신의 아이가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았다. 신기한 눈으로 길리언의 요모조모를 뜯어보고 있자니, 길리언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어머니는 왜 아버지하고 결혼했어요?”
입술을 삐죽이는 표정은 또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올리비아는 길리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며 물었다.
“그런 건 갑자기 왜 묻니?”
“아버지는 쫌생이에, 신경질적이고, 제멋대로잖아요.”
“네 아버지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걸.”
이안 타이론 대공을 상대로 내리는 평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박하고 날것이었다.
올리비아는 피식 웃으며 드러난 길리언의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 그러고 보니 이마도 나를 닮았구나.’
이안의 이마는 편편한 편이었다. 이렇게 자신을 닮은 구석을 하나씩 찾을 때마다 신기한 기분이 되었다.
올리비아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길리언에게 말했다.
“이안은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엄마는 아빠를 만나게 되어서 행복하단다.”
“하지만 아빠보다 제가 나은걸요.”
“그럼. 우리 길리언이 최고지.”
어떻게 남편과 아들이 같겠는가. 올리비아는 길리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길리언은 그런 올리비아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랑 같은 나이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어머니랑 결혼했을 거예요.”
“그러면 너는 이 세상에 없지 않을까.”
어린아이 때 한 번쯤은 한다는 ‘엄마랑 결혼할 거예요.’를 들은 올리비아는 피식피식 웃었다. 그렇게 길리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그 아이들은 잘 지낼까.’
이제는 정말로 만날 일 없는 그 아이들.
제임스도, 진상들도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은 때때로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바로 지금처럼.
‘잘 지냈겠지. 내가 없는 미래에서.’
올리비아는 고개를 흔들어서 생각을 털어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진상들이 또 아이들은 애지중지했으니까.’
그것이 자신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든, 아니면 정말 핏줄이 소중해서였든 간에.
‘나도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 더 다정한 엄마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제임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차피 그 아이들은 긴 시간을 엄마 없이 살아야 하는 아이들이었다. 차라리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편이 나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인지, 미래인지를 떠올리며 올리비아가 쓴웃음을 지었을 때였다. 길리언이 손가락으로 올리비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나, 해서 시선을 내려 그와 눈을 마주하니, 귀여운 얼굴이 손을 세우고 소곤소곤 물어왔다.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예요?”
어쩜 이렇게 앙큼한 질문을 하는지. 올리비아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어젯밤에도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올리비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당연히 저죠?”
‘못 살아, 정말. 이렇게까지 닮을 노릇인가?’
올리비아는 길리언의 귓가에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음, 비밀인데. 비밀 지켜줄 수 있니?”
“당연하죠. 신사의 명예를 걸 수 있어요.”
이 꼬마 신사는 뺨을 발그레 붉혔으면서도, 꽤나 의젓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비아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길리언의 귓가에 속삭였다.
“엄마는…….”
이안과 길리언을 가장 사랑해.
그들이 물을 때마다 번갈아가며 다르게 대답한다는 건 그녀만 아는 비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