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황제 부부는 오늘도 (22/28)

외전. 황제 부부는 오늘도

“영원한 사랑을 맹세합니까?”

대신관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로메오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옆에 선 여자를 바라보았다.

주근깨가 뿌려진 건강한 얼굴에 푸른 눈동자가 별처럼 빛났다. 하나로 높게 묶은 금빛 머리카락이 그 자체로 왕관처럼 찬란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저 머리카락이 짧았는데.’

귀끝을 스치듯 짧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머리카락이 묶일 정도로 자랐다.

망설임, 외로움, 나약함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단단한 입매가 천천히 벌어졌다.

“맹세한다.”

그 말에 로메오는 저도 모르게 실소할 뻔했다.

‘영원한 사랑이라.’

국혼과 동시에 치러지는 대관식. 두 사람의 결혼을 묶기에는 사랑 같은 단어는 너무나 개인적이지 않은가.

‘사랑할 수 있을까?’

로메오는 물끄러미 스타티스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연한 주홍빛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저 입술로…….’

일방적으로 멱살이 잡혀서는 박치기하듯 입술을 부딪쳤었지. 강렬했던 첫 키스를 떠올린 로메오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얼굴을 붉히며 선 로메오를 스타티스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갑자기 시선이 마주하게 된 로메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바닥을 로메오에게 내밀었다.

“맹세하는가, 황후?”

“아.”

그의 대답이 늦었던 모양이다. 로메오는 정신을 차리고 스타티스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맹세합니다.”

대답을 하고 나서, 로메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런데 내 손이 아래로 가야 하는데?’

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로메오가 다소곳한 새신부 아닌가.

‘지금이라도 고쳐 쥐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며 로메오는 스타티스의 손을 바라보았다. 스타티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내 손을 놓아주지?”

“예?”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로메오는, 모든 사람들이 로메오와 스타티스가 맞잡은 손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바보처럼, 맹세했으면 손을 놓았어야 했는데.’

연습을 했는데도, 막상 결혼식 상황이 되니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질렸다.

‘어?’

후다닥 손을 빼내는데, 마찬가지로 손을 거두는 스타티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웃어?’

분명 피식 웃고 있었다. 이 웅장하고, 부담스러운 자리에서.

‘왜?’

설마 자신의 얼빠진 행동 때문에 스타티스가 웃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하고, 로메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신관이 엄숙한 어조로 선언했다.

“대관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입맞춤도, 드레스도, 축하의 꽃 세례도 없는 건조한 결혼식이었다.

* * *

‘아아, 피곤하다.’

대관식까지 끝내고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돌아온 로메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퍼레이드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구나. 두 번은 못 하겠다.’

이 나라 황제의 국혼인지라, 두 사람은 황관을 쓰고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새로운 황제와 황후의 얼굴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황제 폐하 만세! 황후 폐하 만세!”

“행복하세요!”

“예쁜 사랑 하세요!”

황제 부부를 보기 위해 거리로 나온 백성들이 두 사람을 축복했다.

‘행복. 사랑.’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중에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두 개의 단어만큼은 귀에 꽂혔다.

‘이렇게 만났는데도 행복할 수 있을까.’

사실 하루 이틀 한 생각이 아니었다. 이미 어릴 때부터 로메오 알키저스가 어딘가의 데릴사위로 정략결혼한다는 건 정해져 있었으니까.

어느 정도 행복을 포기하고 있기까지 했으나.

‘올리도 행복하라고 말했는걸. 노력해야지.’

하나뿐인 친구를 떠올린 로메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올리비아 타이론.

학창시절에 두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꽤 많이 했었다.

“오르세에 가보고 싶어.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딱히 무얼 하고 싶은 건 아니야. 그냥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어.”

“갈 수 있을 거야.”

그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면서도, 사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를 찾는다고 행복해지지도 않고, 찾는 것도 실제로 어렵다는 걸.

하지만 그저 그런 꿈이라도 나누고 싶었다.

‘행복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친구는 결국 아버지도 찾고, 남편과 행복해지기까지 했다.

“고마워, 로메오. 모두 네 덕분이야.”

로메오는 올리비아가 어떻게 타이론 대공을 만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알기만 했나! 적극적으로 도와주기까지 했다.

‘올리는 정말 용감해.’

행복하지 않은 시댁을 박차고 나와서 새로운 사랑을 찾다니. 로메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니까 나도 노력할 거야. 행복해지도록.’

설령 정략결혼이었다고 해도 두 사람이 함께 행복해지는 방법도 있으리라. 로메오는 그렇게 다짐했다.

“이쪽입니다, 황후 마마.”

“그래.”

로메오는 곧장 북방으로 떠나야 했으나, 제국법상 인정받은 혼례는 초야를 치러야만 했다.

초야를 치르기 전 몸을 단장하기 위해 시종의 안내를 받을 때였다.

등 뒤에서 소곤소곤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드레스도 못 입고 결혼하셨네.”

“눈부시게 아름다우셨을 텐데.”

시녀들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금세 조용해졌기 때문에, 누가 말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로메오의 귓가에 한 단어는 확실하게 박혔다.

‘드레스.’

신부들은 눈처럼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랑을 맹세한다. 결혼하는 날이 여자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

‘맞아. 그런 날인데 우린 제복을 입고 보냈지.’

강인한 황제 이미지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조금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폐하께서도 그런 결혼을 꿈꾸셨을지도 모르고.’

로메오는 드레스를 입은 스타티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반짝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에 티아라를 꽂으면 소녀처럼 화사하지 않았을까.

‘그래. 맞아. 아무리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고 하더라도…….’

남편인 자신은 챙길 수 있는 것 아닌가.

“폐하, 옷을 벗어주십시오.”

“잠깐만.”

“예?”

로메오는 수발을 드는 시종에게 진지한 어조로 부탁했다.

“필요한 것이 있는데 신방에 구해다 줄 수 있겠는가?”

* * *

로메오가 생각한 것처럼 스타티스는 말랑말랑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스타티스에 비하면 로메오가 훨씬 결혼식에 대한 환상이 있으리라.

‘아, 피곤해 죽겠네.’

묵직한 담비 망토를 한구석에다가 던지듯이 벗으며 스타티스는 고개를 까딱까딱거렸다.

‘더워 죽겠는데 무슨 담비.’

황제의 옷은 대부분이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계절감이나 활동성 부분에서는 망한 경우가 많았다.

‘싫다고 안 입을 수도 없고.’

국혼도, 대관식도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따분했다. 마차를 타고 수도를 한 바퀴 도는 것도 지나치게 지루했다. 중간에 마차를 박차고 일어나 그냥 말 위에 올라타서 내지르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재미있는 건 황후 얼굴을 구경하는 것밖에 없었어.’

로메오의 얼굴을 떠올린 스타티스는 픽 하고 웃고 말았다.

‘그 얼빠진 얼굴이라니.’

스타티스는 국혼 때의 로메오를 떠올렸다. 식 내내 빤히 스타티스의 얼굴을 쳐다볼 때는 일부러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저쪽도 어지간히 심심하구나 했지.’

심심해서 죽을 것 같은데 평생 자신의 목줄을 쥘 여자의 얼굴 좀 보고 있으면 어떤가.

그런 마음으로 무시하고 있었더니만.

“맹세합니까?”

맹세를 해야 하는 타이밍에서까지 멍하니 그녀만 바라볼 줄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는 빨리 맹세하라는 뜻에서 그를 톡 건드리려고 했더니 냉큼 그 손에 자신의 손바닥을 올려놓는 것 아닌가.

‘하여간 귀여운 사람이야.

갑자기 공주를 에스코트하는 기사 같은 꼴이 된 스타티스는 웃음을 참느라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처럼 날을 세우며 대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라서 다행이지.’

평생 황후를 견제하며 살려면 얼마나 피곤했겠는가.

‘사실 그것도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스타티스가 묶인 머리카락을 풀었을 때였다. 곁에 있던 시녀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스타티스에게 말했다.

“침방에 드실 채비를 하셔야 합니다.”

“아아.”

‘오늘 초야는 예정대로 치르나 보군.’

로메오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가지고 대회의에서 치열하게 다투더니만, 결국 초야까지 치르는 것으로 결론이 난 모양이다.

‘어차피 한 번으로 임신할 리도 없으니.’

그리고 로메오는 죽지 않는다. 로메오가 북방으로 출정하는 것은 일종의 ‘쇼’였으니까.

‘타이론 대공이 어지간히 많이 사병을 보냈던데. 실제로 출정한다고 해도 죽을 리가 없어.’

로메오를 배려한 것인지, 수많은 타이론 사병들이 북방으로 출정하였다. 스타티스는 시큰둥하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차라리 진짜 출정하는 편이 상징적으로나 뭐나 다 좋았으려나.’

스타티스의 인생 계획상 임신과 출산은 빨라야 3년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피임을 철저하게 하더라도 자꾸 관계를 가지다 보면 언제 들어설지 모르는 게 아기.

‘지금이라도 그냥 북방으로 보내버릴까.’

로메오가 들으면 무척 서운해할 이야기를 속으로 생각하며 스타티스는 걸음을 옮겼다.

장미꽃잎이 뿌려진 욕조에서는 훈기가 풀풀 올라왔다. 따끈한 물에 온몸을 담그고 있으니 점점 더 몸이 찹쌀떡인 양 늘어졌다.

‘그냥 잠이나 잘까.’

굳이 초야 치를 필요가 무엇 있나. 그냥 대충 잔 척하고 잤다고 하면 되지.

‘그쪽도 썩 달가워할 것 같지 않고.’

오늘 밤이 지나면 또 한참 떨어져 있어야 하는 부부였다.

‘그럼 오늘은 잠이나 자자.’

그리 결론을 짓고, 스타티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을 닦고 있으니 시녀가 속이 훤히 비치는 야한 슬립을 들고 오기에 턱짓으로 물렸다.

“그냥 편안한 잠옷으로 들고 와.”

“하오나, 폐하. 오늘은 초야이온데…….”

“발가벗고 유혹해야 하는 건 짐이 아니고 황후다. 짐이 왜 그런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어야 하는가.”

“유, 유혹이라뇨.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 천 쪼가리에 그런 의미가 아니면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데?”

“…….”

스타티스의 매서운 추궁에 시녀는 울상을 지으며 쪼그라들고 말았다. 사실 시녀 입장에서는 별생각 없이 슬립을 들고 왔을 뿐이다.

그간 황제의 후궁들이 들어올 때도, 다른 황녀와 황자들이 결혼할 때도 신부는 으레 이런 야한 슬립을 걸쳤으니까.

‘하여간 세상 바뀐 줄을 모르고.’

혀를 끌끌 차며 스타티스는 베이지색 바지 파자마를 걸쳤다. 저벅저벅 걸어서 신방에 가니, 시녀장이 문 앞에 서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는?”

“먼저 드셨습니다.”

“그래.”

어차피 잠이나 잘 건데.

그런 생각을 하며 스타티스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서 있던 로메오를 보게 되었다. 그의 품에는 흰 드레스와 면사포가 들려 있었다.

스타티스의 눈썹이 크게 휘었다.

“그게 뭐지?”

“그, 그건…….”

스타티스의 차가운 목소리에 로메오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로메오는 연신 스타티스의 눈치를 살피며 쭈뼛쭈뼛 대답했다.

“그, 아까 국혼이 신경 쓰여서…….”

“국혼이 왜?”

“국혼이라기보다 대관식이었지 않습니까.”

실제로 스타티스 본인에게는 황후를 얻게 되었다는 것보다,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는 의미가 컸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야?’

국혼보다 대관식인 것이 당연하지. 그리 생각하며 쳐다보고 있으니,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로메오가 주섬주섬 이렇게 대답하는 게 아닌가.

“폐하께 결혼은 한 번……이 아니고 여러 번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첫 결혼이신데 그렇게 흘려보내는 게 아쉬우실 것 같아서요.”

이 와중에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이라는 헛소리를 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이미 후궁 후보가 둘이나 있으니.’

황제는 이번 국혼 때 모두 함께 혼인하기를 원했으나 스타티스는 그 권유를 거절했다.

‘앞으로도 일단 들일 생각은 없고.’

말하자면 황제에 대한 소소한 반항이었다.

‘후궁들과 배다른 형제들 때문에 내가 무슨 고생을 했는데.’

말이 형제이지, 그 사람들은 형제 같지도 않았다. 그냥 거대한 구렁이나 뱀처럼 보일 뿐. 이안과 친해진 것도 가정환경이 그 모양인 것이 컸다.

‘하지만 이 결심을 이 남자에게 말해줄 생각은 없지.’

로메오 알키저스.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유력한 황후 후보였던 남자.

애초부터 삶의 목적이 잘난 부인의 남편이 되는 것이었다는 듯이, 남자의 이력은 평범했다.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은 전공에, 취미조차도 요리.

‘집안에서 이 남자를 이용해먹으려는 어른이 없을 리가 없어.’

저 정도로 한평생을 통제받았다는 건 분명 뒷배가 있다는 뜻이었다. 태황제 한 사람에게 휘둘리는 것도 지긋지긋한데 굳이 저 집안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리 꽃밭이야?’

하지만 하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이 남자가 정말 자신이 알고 있는 서류상의 남자인가 싶었다.

“짐이 드레스를 입고 결혼하고 싶을 것 같아서 미리 준비했다?”

“그, 그게.”

스타티스의 말에 로메오는 강아지처럼 풀이 죽어서는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제가 잘못 생각했다면 죄송합니다.”

그 꼴을 보고 있으니, 또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이거, 위험한데.’

지난번에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을 때도 그렇고,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문득문득 귀엽단 말인가.

‘슬슬 눈치 살피는 게 꼭 강아지 같아.’

눈치는 살피는데, 또 눈치가 없다는 점에서 백치미가 있다고 해야 하나.

‘어쩐지 골려주고 싶어.’

스타티스는 이안과 매우 흡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 드레스는 짐보다는 그대에게 어울릴 것 같은데.”

“네?”

스타티스의 말에 로메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타티스는 짐짓 진지한 척 드레스를 훑어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몸 선도 가늘고, 얼굴도 예쁘장하고.”

아닌 게 아니라 어디서 급하게 공수한 드레스는 어떤 몸에라도 맞도록 낙낙했다.

‘그리고 이 남자는 작지.’

문득 스타티스는 왜 로메오에게 별반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지 깨달았다. 로메오는 성품만 온순한 게 아니라 외양적으로도 위협적인 면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초식동물이라고 해야 하나.

‘내 망할 동생 놈들과는 다르군.’

그저 아들이라는 이유로 스타티스를 압박해대던 후궁 소생의 황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덩치로 스타티스의 기선을 제압하려고 시도했다.

“그리 가녀린 몸을 가지고 어찌 황제의 위엄이 살겠습니까.”

“쩌렁쩌렁 고함도 지르지 못하면서 어찌 회의를 들어가시려고.”

“이런 일은 사내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 놈들을 꿇어 앉히기 위해 스타티스는 웃음을 지우고, 더욱더 엄격한 어조로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해가 없어.’

저잣거리 저열한 소문 중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라도 밤에는 남편 밑에서 깔리는 신세 아니냐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곱게 봐줘도 이 남자는 그럴 깜냥이 안 돼 보여.’

봐라. 지금도 드레스가 어울린다는 말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지 않았나.

“노,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으나 스타티스는 꾹 참았다. 그의 인권을 존중해서가 아니고 그를 더 완벽하게 놀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진지하게 되묻는 스타티스를 보며 로메오는 얼음처럼 꽝꽝 얼어붙었다.

‘조금만 더 떠밀면 정말 입을 것 같은데.’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하루 종일 시달려서 당장 자고 싶었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스타티스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도발했다.

“짐의 초야를 가져가려고 하는 것 아닌가? 좀 더 발칙하게 굴어보지.”

“으으…….”

스타티스의 도발에 로메오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그, 그럼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진짜 드레스를 입을 셈인가 보다. 스타티스는 터덜터덜 돌아서는 로메오의 어깨를 붙들었다.

“무슨 소리.”

로메오가 커다란 눈으로 스타티스를 바라보았다. 스타티스는 매우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벗어.”

“네?”

이미 커진 눈이 더 커질 수 있었는지, 이제는 사슴처럼 울먹거렸다.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스타티스는 무심한 어조를 지어냈다.

“어차피 오늘 밤에 벗을 옷 아니었나. 당장 여기서 벗어.”

“그, 그건.”

로메오는 계속 움찔움찔거리면서 속절없이 안고 있던 드레스만 꽉 쥐었다.

“그게…….”

‘시녀들의 말에 휘둘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쯤 되니 뭐하러 드레스를 챙겼나 싶어졌다.

‘이건 그녀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는커녕, 나만 난처해지고 있잖아!’

물론 로메오의 착각이었다. 스타티스는 지금 무척 즐거워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안 입는다고도 못하겠고, 입지도 못하겠고.’

어찌 되었든 난처함의 끝까지 내몰린 로메오는 결국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걸리고 말았다.

그런 로메오를 보고 결국 스타티스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어휴,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서야.”

단호한 태도와 달리, 부드럽고 고운 손가락이 로메오의 눈가를 문질렀다. 동글동글한 눈물이 주르륵 스타티스의 손등을 타고 흘렀다.

스타티스는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속삭였다.

“울음 뚝. 이래서야 짐이 추행하는 것 같지 않나.”

“……추행 맞는데요?”

“훌쩍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군.”

당장 이 자리에서 옷을 벗으라고 하는 게 추행이지, 뭐란 말인가.

하지만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벌벌 떨면서 할 말은 아니었다. 스타티스는 손바닥으로 로메오의 얼굴을 문질렀다. 주홍빛 눈동자가 노을처럼 아름다웠다.

“이 드레스는 날 배려한 거겠지. 맞나?”

“네.”

로메오는 훌쩍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티스는 확연히 부드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어째서?”

“그야…….”

로메오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울음이 잦아들고 나니 코끝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맑게 빛나는 눈으로 그는 스타티스의 푸른 눈을 마주했다.

울먹이던 것에 비해, 목소리는 또렷했다.

“우리는 이제 평생을 함께할 사이 아닙니까. 그러니 폐하께 잘 보이고 싶었습니다.”

“나에게 잘 보여서 뭐하게? 북방행을 미뤄달라고 부탁하려고?”

“그런 거 아닙니다.”

스타티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동안 그녀에게 바라는 것들만 많던 사람들 때문에 생긴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로메오의 말에 스타티스의 눈썹은 느슨하게 풀리고 말았다.

“……행복해지고 싶으니까요.”

행복. 혼기를 꽉 채운 성인 남자가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막연한 말 아닌가.

‘나쁘지 않아.’

하지만 그 꿈같은 말들이 거슬리지 않았다. 스타티스는 로메오의 머리카락을 살짝 손가락에 말아쥐었다. 연한 푸른색 머리카락은 새벽하늘 같은 빛깔이었다.

“나는 그대의 머리카락 색이 금발이 아니어서 황후로 간택했지.”

후보는 셋. 그중 두 사람은 스타티스와 같은 금발이었다. 그래서 스타티스는 로메오를 택했다.

‘후궁을 두어 많은 자식을 낳더라도, 황후 소생만큼은 뚜렷하게 드러나길 바랐으니까.’

황위를 담보로 사람의 목줄을 죄는 건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지극히 계산적인 결혼.

“그런 결혼에 행복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냉소적인 스타티스의 물음에도, 로메오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곧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했다.

“시작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노력하고 싶습니다.”

“어째서?”

“제 친구와 꼭 행복해지기로 약속했으니까요.”

“하.”

이 몽환적인 남자는 행복의 이유까지도 꿈속에 사는 것 같았다.

“그 친구가 바로 타이론 대공비겠군.”

한 번도 충동적인 적이 없이, 현실적이기만 했던 스타티스에게는 그 또한 신선했다.

‘하긴, 그건 타이론 대공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안 타이론의 성질이 나쁘다는 건 진즉 알았지만, 그렇게 해맑게 웃을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그 또한 타이론 대공비를 만나서 변한 것일 터.’

스타티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참 알면 알수록 탐나는 사람이야, 대공비는. 그 지랄맞은 대공의 성미를 맞추기가 쉽지 않을 텐데.”

스타티스의 시선이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워하는 로메오에게 꽂혔다. 그녀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물론, 그건 그대에게도 해당되는 사안이겠지만.”

자기 입으로 뻔뻔하게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타이론 대공과 다르게, 스타티스는 자신이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걸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안보다 한층 더 고압적이기도 했다.

‘행복해지고 싶다며? 그럼 나에게 맞춰야지.’

어찌 되었든, 지금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궁금했다. 거짓으로 연약한 척을 하는 건지, 어디까지 긁으면 성질이 나오려는지. 모두 다.

스타티스는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뭐해? 어서 벗어.”

재차 시작된 옷 벗어 타령에, 로메오는 다시 어깨를 움츠리며 쭈뼛거렸다.

“바, 방금 추행은 안 하신다고…….”

“누가 추행이래? 짐이 뭐가 아쉬워서 남자를 추행하나.”

“그, 그거야.”

‘방금 당신 입으로 그렇게 말했잖아요!’

사내의 옷을 스스로 벗으라고 하는 게 추행이지, 뭐란 말인가.

또다시 울먹거리는 로메오를 바라보며 스타티스는 픽 웃었다.

벗기 싫으냐? 그럼 내가 벗지 뭐.

“추행이 아니라 초야를 치르자는 거지.”

툭툭 손가락이 단추를 푸는 소리가 두 사람만 있는 방에서 크게 울렸다. 스르륵 떨어져 내리는 파자마를 보고 로메오는 새빨개진 얼굴을 돌렸다.

하지만 다가오는 흰 나신은 피할 수도,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와서는 그가 안고 있던 것들을 낚아챘으니까.

“이런 팔랑팔랑한 드레스는 내 취향이 아니지만, 면사포는 잘 챙겼어.”

드레스를 한번 펼쳐보고는 바닥에 휙 던진 스타티스가 폭이 넓은 면사포를 펼쳤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에 면사포만 카디건처럼 둘렀다.

피식 웃는 얼굴이 담담해서 더 야릇했다.

“제법, 매혹적이지 않은가.”

로메오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 * *

나쁘지 않았다.

그게 초야에 대한 스타티스의 단상이었다.

‘생각만큼 격하지 않았지.’

스타티스도 물론 밤일에 대해서 배웠다. 실전은 몰라도 이론은 완벽했다. 하지만 막상 경험한 초야는 그녀가 읽었던 어떤 기록들과도 달랐다.

‘역시 글은 믿을 것이 못 된다니까.’

애초에 경험이 없는 두 남녀가 이론만 빠삭해서 무슨 거사가 일어나겠는가. 조금 민망한 순간들도 있었고, 눈을 질끈 감고 넘어간 순간들도 있었다.

‘어쨌든 막 아프고 그렇지도 않았어. 나쁘지 않았지.’

스타티스는 따뜻한 물을 머리 위에 끼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오랜 시간 목욕을 하는 건 스타티스의 버릇이었다.

보통 이럴 때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계속 로메오의 생각뿐이었다.

‘간질간질해.’

스타티스는 자신이 이상한 상태라는 사실을 그저 묵묵히 인정했다.

‘부부라서 다른 것인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스타티스도 답할 수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가운만 걸친 채 나오니, 수건을 들고 많은 시녀들이 달라붙었다. 머리를 말려주는 손길을 느끼며 스타티스는 눈가를 꾹 눌렀다.

“오늘 업무는 뭐지?”

“중신들과 회의가 있습니다.”

“그거야 매일 있는 일이고.”

국혼이 어제였으니 하루쯤 쉬어도 좋으련만, 이제 막 황제가 되었으니 쉴 시간도 없었다. 시녀장이 내미는 서류를 넘겨보며 스타티스는 관심이 없는 척 툭 물었다.

“황후는?”

그녀의 질문에 시녀장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주무시고 계십니다.”

“아직도?”

스타티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하루는 늘 이른 시간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피곤했던 대관식과, 긴 초야를 치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시녀장은 ‘어제 늦게 주무셨잖아요!’라고 대답하고 싶은 것을 꾹 누르며 재차 고개를 숙였다.

“……원래 체력이 없으신 분 같았습니다.”

뭐라고 말하겠는가. 어떤 상황이든 간에 아내보다 먼저 나가떨어진 남편이 문제지!

미간을 찌푸렸던 스타티스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몸에 좋은 것을 많이 먹이라고 전하게.”

하지만 그 말은 시녀장에게 몹시 의외였다. 물론 의외는 지난밤 황제가 황후전에서 잠들었을 때부터 의외였지만 말이다.

‘좋은 걸 먹이라니? 체력을 키우겠다는 뜻이신가?’

남편의 체력을 키울 때의 의미는 단 하나뿐이지 않겠나. 시녀장은 설마설마하며 물었다.

“오늘 밤에도 황후전에 드실 것입니까?”

그 말에 스타티스는 드물게 바로 답하지 못하고 굳어졌다. 그녀 자신도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황후전에 들어? 또?’

황후 소생을 황태자로 삼을 생각은 있었지만, 굳이 불필요한 스킨십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왜?’

자꾸 나답지 않은 짓을 하는 걸까.

스타티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좀처럼 충동적이지 않은 사람인지라, 지금의 변화가 썩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스타티스는 자신의 행동을 납득했다.

‘하지만 황후는 곧 북방으로 떠나잖아?’

그가 아무리 그녀를 변화시키려고 한다고 해도, 애초에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한참 북방에 있다가 돌아오면 나도 결혼의 설렘 같은 건 싹 정리했을 테지.’

지금의 흔들림은 처음 결혼을 해서 생겨난 균열 같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스타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 * *

한편, 로메오의 첫날밤에 대한 단상은 스타티스와 완전히 달랐다.

‘아이고, 죽겠다.’

스타티스가 조금 아프지만 좋을 것이다, 라는 말을 들었다면 로메오는 그동안 아주아주 좋을 것이다, 라는 말만 반복해서 들었다.

그런데 솔직히 좋다기보다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

분명 좋긴 좋았는데, 뭐랄까. 좋지 않은 의미의 무아지경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이 일에 쏙 빠진다고 황홀경을 느끼진 않지 않나.

딱 그런 느낌이었다. 뭔가 상대에게 맞추려고 하다 보니 무리해서 정신없이 휘말려버린.

“……눈부셔.”

로메오는 어제보다 핼쑥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따사롭기 그지없었다.

‘늦게 일어났구나. 이른 아침은 절대로 아니야.’

그 와중에 스타티스는 일찍 일어나서 일과를 시작한 건지, 곁이 비어 있었다.

멍하니 있으니 밖에서 시종이 공손하게 물어왔다.

“기침하셨습니까, 황후 폐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니 허리도 아프고, 종아리도 굳어 있고, 머리까지 욱신거렸다.

‘하긴, 새벽녘에나 잠이 들었으니.’

절대로 예상하지 못했던 격정적인 밤이었다.

가운 앞자락을 여미고 일어나며 로메오는 시종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머리가 아프네. 너무 일찍 일어났나 봐.”

그랬더니 시종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오후입니다만.”

“뭐?!”

시종의 말에 로메오는 침대에서 펄쩍 뛰었다. 그리고 서둘러서 창문을 바라보았다.

연한 오렌지색 햇살은 늦은 오전 햇살 같기도 했고, 늦은 오후 같기도 했다.

‘그럼 저 빛이 해가 지고 있어서 저런 색이란 말이야?!’

로메오는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설마 내가 하루 꼬박 잠을 잔 것인가?”

“그렇사옵니다.”

“…….”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착즙되어 쪼글쪼글해진 오렌지 껍질이 된 기분이다.’

널브러져 있다가 이제야 침대 밖으로 기어 나오다니.

‘무서워!’

이렇게 하루가 삭제될 정도로 힘들었단 말인가. 놀랍기만 할 따름이었다.

‘다들 그럼 어떻게 사는 거지?!’

로메오가 얼떨떨해하고 있으니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식사를 올리겠습니다.”

“아, 식사.”

이걸 아침이라고 해야 해. 저녁이라고 해야 해.

미리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지, 금방 따끈한 식사가 든 카트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양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이게 뭐지?”

“시금치 수프에, 아기 돼지를 통째로 구운 스테이크, 데친 장어를 올린 샐러드…….”

“한 끼 식사로는 과하지 않나?”

스테이크도, 샐러드도 디저트까지 모두 묵직해서 메뉴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시종은 또다시 공손하게 대답했다.

“잘 드시게 하라는 폐하의 명령이었습니다.”

“…….”

뭔가 불순한 의도가 느껴졌다.

‘아니지, 아닐 거야. 한 나라의 황후가 이렇게 연약하면 안 되니까 그런 명을 내리신 거겠지.’

초야 한 번에 하루가 삭제되다니. 이런 체력으로는 내명부를 다스릴 수 없었다. 로메오는 조금 더 정신을 차리기로 마음먹고 부지런히 식사를 했다.

나름대로 빨리 포크를 움직였는데도, 곁에 선 시종은 자꾸만 재촉을 해댔다.

“조금만 더 빨리 드시옵소서.”

“남기셔서도 안 되고, 느리게 드셔서도 안 됩니다.”

아니, 먹는 사람 마음이 불편하게 왜 이렇게 자꾸 재촉을 해댄단 말인가.

“그만하시게. 이러다가 체하겠네.”

로메오가 엄한 소리로 시종을 꾸짖자, 시종은 다시 황송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서 그렇사옵니다.”

“무슨 시간이 없는데?”

“폐하께서 오늘도 침소에 드신다고 하셨사옵니다. 준비가 필요하옵니다.”

“뭐?”

상상도 못 한 이야기에 로메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늘도 침소에 드신다고?’

로메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사적으로 자신의 흐트러진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오늘 또?”

아무래도 황제의 정력이 그가 상상한 것 이상인 듯싶었다.

* * *

식사는 6시 무렵에 끝이 났다. 황제는 8시에 황후궁에 찾아오겠다고 전갈을 보냈다.

‘2시간 남았구나.’

황제가 오기 전에 몸을 깨끗하게 씻고 단장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로메오는 장미꽃잎이 둥둥 떠 있는 욕조에 들어가서 머리카락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이게 바람직한 부부관계의 단추를 꿴 것인가 아닌가. 로메오는 알 수가 없었다.

‘애당초 왜 오늘도 침소에 드시는 거지?’

로메오가 막연하게 상상한 스타티스와의 관계는 조금 더 건조했다.

남들의 눈을 의식해서 정해진 날에만 합방을 하고, 평소에는 그저 예의 바르게 대하기만 하는 사업적 파트너 같은 부부.

‘그런데 어제도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었잖아.’

지금 와서 회상해보니 스타티스는 즐거워 보였다. 계속 드레스를 입히려고 하기도 하고 옷을 벗기려고도 했지.

‘그리고 먼저 훌렁 옷을 잡아 내리실 때는…….’

면사포를 휘감은 몸을 떠올린 로메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다음 펼쳐진 일들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불순하다. 불순해.’

몽글몽글 떠오르는 어제의 기억을 털어내기 위해 로메오는 물속으로 흡하고 한 번 잠수했다가 나왔다.

‘이제 슬슬 머리를 말리고 단장을 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물 밖으로 나왔는데.

“목욕은 의외로 거칠게 하는 편이군, 황후.”

“화, 황제 폐하?!”

금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편안한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친 스타티스가 언제 온 건지 욕실에 앉아서 건들거리고 있었다.

‘으, 으악! 알몸!’

로메오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그리고는 새빨개진 얼굴로 물었다.

“어, 어째서 여기 계신 겁니까? 게다가 전갈로 알리신 것보다 빨리 오셨습니다.”

“황후가 내일이면 북방으로 출병하지 않는가. 그래서 어제처럼 늦게 재우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일찍 왔지.”

“네에?”

아예 오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지 않나요.

그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로메오는 어색하게 웃었다. 스타티스는 턱짓으로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타월은 여기 있네.”

“그, 그.”

시중을 들 시종들은 황제가 오는 바람에 모두 자리를 떠나준 모양이다.

‘그럼 내가 직접 걸어가서 저 타월을 집으란 말인가!’

황제에게 가져다 달라고는 할 수 없으니, 결국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창피한데!’

이제는 로메오의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런 로메오를 보며 스타티스는 싱긋 미소 지었다.

“더 물에 있으면 퉁퉁 불 것 같은데. 어서 이리 오게, 황후.”

로메오는 익힌 문어처럼 새빨개져서는 주춤주춤 욕조에서 나왔다. 그리고 스타티스의 곁으로 걸어갔다.

‘빨리빨리.’

상대방은 옷을 다 갖춰 입고 있는데, 자신만 홀딱 벗고 있는 상황이 이렇게 창피할 줄이야!

‘이젠 황제 폐하께서 오신다고 하면 절대로 목욕 안 할 거야. 절대로 안 해!’

이런 난처한 상황은 두 번은 사양이었다.

그가 빠른 손으로 큰 수건을 넓게 펴서 몸을 망토처럼 두르고 있자니, 스타티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메오의 몸이 움찔 떨렸다.

‘가, 가까워!’

그대로 수건을 끌어 내리기라도 할 것 같아서, 로메오가 수건을 꽉 쥐었을 때였다. 스타티스의 손가락이 로메오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여기 꽃잎이 붙었군.”

“…….”

가볍게 머리카락을 건드렸다가 떨어지는 손가락의 곡선이 유려했다. 그녀의 검지에는 방금 물에 떠다니던 붉은 꽃잎이 들려 있었다.

로메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꽃잎을 바라보고 있자, 스타티스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짐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일부러 머리에 붙인 것인가?”

“절대 아닙니다!”

이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란 말인가. 애초에 로메오는 그런 애교 같은 걸 부릴 줄 모르는 성품이었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도 몰랐는걸.’

로메오가 당황해서 버벅거리고 있으니, 스타티스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저런, 그럼 이번 기회에 하나 배웠으면 좋겠군.”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푸른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가늘었다.

“꽃으로 장식한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우니, 앞으로 짐에게 잘 보이고 싶을 때는 꼭 꽃으로 장식하고 나오게.”

“……!!”

가까이 다가온 입술이 로메오의 입술을 대답도 할 수 없도록 바로 삼켜버렸다.

꽉 쥐고 있던 수건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에 툭 떨어졌다.

* * *

‘……이번에는 진짜 아침인가.’

로메오는 퀭한 얼굴로 눈을 떴다. 여전히 그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로메오는 가만히 눌린 자국이 있는 베개를 바라보다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말았다.

‘또 해버렸다.’

정말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욕실에서 그를 향해 빙긋 웃는 스타티스의 얼굴이 몹시 그윽해서…….

‘머릿속이 툭 하고 끊어지는 기분이었어.’

그 순간에는 오로지 그녀를 품에 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그녀가 황제이며, 그가 소중히 대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잊지 않았지만.

‘정말, 이번에는 다 기억이 나.’

자신의 품에 쏙 들어오는 허리와, 흐트러지던 금빛 머리카락, 붉게 달아오르던 주근깨 가득한 뺨도.

‘……조금 좋았을지도.’

사실 많이 좋았지만, 수줍은 로메오는 쾌락에 젖어 있는 것이 점잖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여운에 잠겨 있을 수가 없었다.

‘딴생각. 딴생각.’

그렇게 되뇌고 있자니, 어제처럼 시종이 밖에서 고했다.

“기침하셨습니까, 황후 폐하.”

“들어오라.”

어제와 똑같은 시종이었다. 그는 로메오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올리고는 이렇게 고해올렸다.

“폐하께서 북방행은 내일 해도 되니 오늘은 쉬시랍니다.”

설마 잠자리 때문에 중요한 출정이 밀릴 줄이야!

로메오는 다시 후끈후끈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물었다.

“설마 오늘도 오후인가?”

“점심이 조금 안 된 시간입니다.”

“…….”

거의 오후라는 소리였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좀 나은가.’

결국 막바지의 기억이 흐릿한 건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지만.

‘어제는 도대체 몇 시에 잠을 잔 걸까. 폐하께서는 조금도 지치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그럼 내가 약골이라는 뜻인가!

로메오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약간의 자괴감에 잠겨 있자니, 시종이 알아서 점심 식사가 든 카트를 끌고 왔다.

“오늘은 정력에 좋다는 흑염소 스테이크와…….”

“뭐?”

“아, 죄송합니다. 정력에 좋다는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

정력에 좋다는 음식까지 먹이고 있었냐!

‘용의주도하신 분.’

그런 명령을 누가 내렸겠는가. 로메오는 부르르 떨었다.

어쨌든 황명이니 다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로메오는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 넣었다. 좋아하는 음식이 육식보다는 채식에 가까운 그에게는 조금 곤혹스러운 식단이었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는 괜찮으실까?’

아니, 이렇게 자신은 시름시름해서 식단까지 바꿔야 하는 상황인데, 같이 밤을 보낸 황제는 안녕한 것인가!

로메오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는 괜찮으신가?”

“평소와 똑같은 일정을 소화 중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

튼튼하시구나.

그래도 튼튼하다고 신경을 안 쓰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로메오는 재차 물었다.

“황제 폐하의 요리사를 만나고 싶은데.”

북방행이 결정된지라, 로메오는 사실 황후로서 해야 할 일들을 당장 넘겨받지 않았다. 마침 태황후 또한 황궁에 남겠다고 한지라, 급하게 인수인계를 받을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니 한가한 시간에 조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일단은 황제 폐하의 식단과 취향, 그리고 생활 전반을 알아보는 것으로.

* * *

오늘은 정말 안 찾아올 줄 알았던 스타티스가 또다시 초저녁에 로메오를 찾았다.

‘내가 왜 또 찾아온 거지?’

로메오도 당혹스러웠지만, 발걸음을 하는 스타티스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게 다 그 남자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런다.’

어쩜 그렇게 놀리는 재미가 있는 것인지. 스타티스는 이 재미를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서운할 지경이었다.

‘이래서 타이론 대공이 대공비를 만난 다음부터 집에서 두문불출하는 것이군.’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집에 있는데, 굳이 집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은 게 당연했다. 일이야 아랫사람에게 맡기면 그만이고.

‘나는 맡길 사람이 없어서 오호통재로다!’

황제가 되어서 좋다고 생각했더니 이런 변수가 생길 줄이야. 국정이 성가시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스타티스는 움찔했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곧 떠나니까.’

곧도 아니다. 바로 내일이다.

‘이번에는 정말 잠깐 얼굴만 보고 나와야지.’

이미 충동적으로 하루 미루지 않았던가. 스타티스는 다짐, 또 다짐하며 황후궁에 들었다.

“오셨습니까, 황제 폐하.”

하지만 그녀의 다짐은 황후궁에 들기 무섭게 흔들리고 말았다. 바로 로메오 때문이었다.

‘일부러 저리 꽁꽁 싸맨 건가.’

활동적으로 움직이면 땀이 뻘뻘 나오는 계절이었다. 그런데 로메오가 입은 옷은 목까지 모두 가리는 셔츠에 긴 소매였다. 최대한 속살을 내보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풀풀 풍겨나왔다.

‘귀엽기는.’

그래봤자 벗으라고 명하면 바로 벗겨질 옷 아니던가.

‘또 괜히 내 마음을 흔드는군.’

저런 옷차림에 쭈뼛쭈뼛 겁이 많은 토끼처럼 연신 눈치를 보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스타티스는 속으로 열심히 다짐, 또 다짐했다.

‘오늘은 얼굴만 보기로 했다. 오늘은 얼굴만.’

저 옷을 벗기고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이 보고 싶지만, 오늘은 참으리라!

시간이 이른 저녁인지라 두 사람은 오붓하게 식당에 앉아서 식사를 들었다.

스타티스와 마주 앉아서 로메오는 무척 긴장한 듯 연신 스타티스의 눈치를 살폈다.

“왜 자꾸 짐을 그리 바라보지?”

“조, 조금 어색해서 그렇습니다.”

“어색해?”

스타티스는 눈치채지 못한 척 은근히 물었다.

“침대 위가 아닌 테이블 위에서 짐을 바라보니 느낌이 이상한가?”

“푸훗!”

말이 지나치게 적나라했던 탓인지, 로메오는 마시고 있던 물을 거하게 뿜고 말았다.

“콜록! 콜록! 콜록!”

“저런. 내가 진심을 찔렀나 보군.”

“절대 아닙니다!”

당황한 주제에 거세게 고개를 흔드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스타티스는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아네. 다 알고 있어. 그러니 진정하지 그래.”

“큰 소리를 내어 죄송합니다.”

“그것도 알면 되었고.”

스타티스의 말에 로메오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 있는 접시는 절반도 비우지 못했다. 스타티스는 입술을 삐죽였다.

‘저리 조금 먹으니 힘을 쓰지 못하지.’

억지로라도 더 먹이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지만, 자신 때문에 긴장해서 먹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이만 정리할까?”

“네.”

스타티스는 턱짓으로 상을 치워달라 명했다. 시종들이 빠른 손길로 식탁을 치우고 후식을 내왔다. 작은 유리그릇에 주홍색 얼음덩어리가 담겨 있었다.

스타티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뭐지?”

스타티스의 취향은 확고했다. 후식은 진한 커피. 혀가 얼얼하도록 독한 것으로.

‘내 취향을 몰라서 이것을 내온 것은 아닐 텐데.’

설마 후세 생산(?)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인가. 스타티스가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로메오가 몹시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제가 만든 셔벗입니다.”

“셔벗?”

“한번 드셔보십시오.”

“…….”

스타티스의 미간이 다시 반듯하게 펴졌다.

‘직접 만들었다고?’

후식이 왜 바뀌어서 나왔나 했더니 황후가 몸소 만든 것인지라 어쩔 수 없이 바뀐 모양이다. 스타티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를 위해 만들었다는데 당연히 맛을 보아야지.’

어쩐지 마음이 들뜨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을 받은 스타티스인지라, 신난 티는 조금도 내지 않았다.

로메오는 긴장한 표정으로 스타티스를 바라보았다. 작게 한 스푼 우물거리던 스타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맛있군. 이게 뭘로 만든 거지?”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로메오는 한결 안도한 어조로 대답했다.

“감입니다.”

“감?”

감이라는 말에 스타티스의 펴졌던 얼굴이 다시 와락 구겨졌다. 로메오는 서둘러서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감을 싫어하신다고 들어서. 이렇게 하면 잘 드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만들어 보았습니다.”

“싫어하는 음식을 왜 주었지? 짐을 화나게 하고 싶어서?”

“절대 아닙니다.”

이미 벌벌 떨고 있는 얼굴이, 일부러 그녀를 도발할 정도의 깜냥은 당연히 없어 보였다. 로메오는 어물어물 대답했다.

“그, 그냥. 골고루 먹어야 건강해지니까요.”

그 모습을 보니 또 신기하게 웃음이 피식피식 나왔다. 스타티스는 턱을 괴고 물었다.

“짐을 건강하게 만들어서 뭘 하려고? 간밤에 부족했나 보군.”

로메오가 스타티스의 말의 의미를 알아듣는 데는 약 30초가 필요했다. 뒤늦게 말을 알아들은 로메오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네에?!”

간밤에 부족은 무슨. 아니, 애초에 이렇게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는 화제인가?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해?’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눈을 들어보니 빙글빙글 웃고 있는 스타티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놀린 것이다.

“정말 짓궂으십니다!”

로메오가 잔뜩 입술을 삐죽이며 그렇게 대답하니, 스타티스는 턱을 괴고 앉아서는 피식 웃었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 그대가 잘못인 거지.”

“저는, 저는…….”

놀리면 재미있다고 이렇게 사람을 놀려도 되나. 하지만 막상 뭐라고 하자니, 상대는 황제였다.

‘내가 뭐라고 따지냐고요.’

로메오가 속으로 그렇게 좌절하고 있자니, 스타티스가 재차 웃으며 말을 붙여왔다. 능숙한 화제 전환이었다.

“요리를 원래 잘하나?”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배우라고 하셔 시작했습니다만.”

사실 로메오의 인생 전반은 할아버지가 만든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맛보기 수준에서 더 나아간 것은 분명 로메오의 선택이었다.

“지금은 좋아합니다. 재미있어요.”

“특이하네.”

요리를 좋아하는 남자라. 평생 요리를 할 생각도, 배울 생각도 없었던 스타티스에게는 신선했다.

“잘 만드는 음식은 뭐지?”

스타티스의 질문에 로메오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배운 것은 아닙니다. 만들 수 있는 것도 그냥 간단한 샌드위치나 수프 같은 정도이지요.”

“좋군. 내일 점심은 다른 식사 말고 황후가 만든 정찬으로…….”

원래 바빠서 정찬을 다 먹지 않는 편인 스타티스가 반색하며 말을 이었을 때였다. 그녀가 조금 둔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 내일은 북방으로 떠나는 날이던가.”

로메오가 북방으로 떠나서 파넬 공작과 바꿔치기를 하는 것은 이미 사전에 다 논의가 끝난 것인데, 왜 이제 와서 새로운 사실처럼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눈을 깜빡이던 스타티스는 느릿한 어조로 덧붙였다.

“내일 말고 내일모레 떠나면…….”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습니다, 폐하. 하물며 사적인 일로는요.”

그러자 로메오가 드물게 확고한 어조로 스타티스의 말을 잘랐다. 스타티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적이라니. 짐은 이 나라의 황제이고, 그대는 황후이다. 우리 부부의 일에는 사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요.”

로메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돌아오면 많이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약조 드리지요.”

“…….”

마냥 밀면 밀리는 대로 휘둘릴 것 같더니, 뜻밖에 강경한 소리도 잘한다. 스타티스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고, 눈을 가늘게 떴다.

“참 이상한 일이야.”

“예?”

이상한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이던가. 보낼 생각 없던 초야를 보내게 되었고, 다신 찾지 않겠다더니 다음 날에 이어 오늘까지 앉아 있다.

‘이게 다 저 남자의 태도가 달라서야.’

왜 이렇게 자꾸만 계획과 어긋나는 걸까 생각해보니 모두 저 남자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황후가 내가 생각했던 황후가 아니기 때문에.’

분명 약혼식 때만 해도 인상이 흐릿한 남자였는데 왜 이렇게 색이 달라졌단 말인가. 스타티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는 왜 내게 요리를 해주고 싶어졌지? 요리야 요리사가 하면 그만인 것을.”

“그게 황후의 일이니까요.”

“그거야 엄밀히 말하면 아직 아니지. 내명부는 태황후 폐하의 소관이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로메오는 설명하기 어려운 듯,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 잘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왜?”

결국 그녀의 사고는 한 가지 질문을 되풀이했다.

그대는 왜 이렇게 달라진 행동을 하는가.

“그대가 설령 쓸모가 하나도 없다고 해도 짐은 그대를 황후에서 폐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우리 부부가 굳이 친근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그냥 데면데면하게.

서로에게 예의만 지켜서.

그것이 스타티스가 로메오에게 바라는 황후였다. 하지만 지금 로메오는 명백히 그 선을 넘었다.

“솔직히 나는 당황스러워.”

한번 운을 떼어서인지, 속마음이 술술 쏟아져나왔다.

“한 번도 공적인 일로 흔들린 적이 없는데, 그대는 북방행도 취소하고 내 곁에만 잡아두고 싶어지니.”

변덕스러운 태황제에게 일평생을 휘둘린 탓에 스타티스는 무엇이든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을 혐오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로메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달랐다. 제 생각대로 되질 않는데도 그 변화마저 기꺼울 정도로 말이다.

스타티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게 좋은 현상인가?”

로메오는 덩달아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좋은 현상 아닐까요?”

로메오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사이좋은 부부에 대해서는 타이론 대공 부부 외에는 알지 못했으니까.

그의 부모 또한 정략결혼을 했고, 자신들이 어른들의 설계대로 살아온 것처럼 자식의 인생 또한 설계했다. 로메오를 태어나자마자 어디 좋은 집안 데릴사위로 보내겠다고 마음먹은 것처럼 말이다.

“저도 막연히 제 배우자와는 데면데면하게 지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운이 좋아서 황후 자리까지 올랐지만.”

그렇다 보니 로메오도 다른 형태의 부부를 꿈꾼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올리비아가 이안 타이론과 결혼하기 전까지.

“하지만 이제는 잘 지내고 싶어요. 그래서 서로 행복해지면 좋겠습니다.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냥 숨만 쉬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그저 그림처럼 예쁜 삶을 남들에게 꾸며 보여주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 길었다.

로메오는 빛나는 눈으로 스타티스를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믿을 수 있는 배우자가 되도록요. 그러니 폐하께서도 저를 믿어주세요.”

한없이 여리게만 보이던 남자인데, 또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제법 믿음직스러웠다. 일순간 그의 모습에서 가슴이 뻐근해진 스타티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메오.”

“!!”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로메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토끼 같은 모습에 스타티스는 픽 웃고 말았다.

“오늘은 그냥 얌전히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오는 스타티스를 본 로메오가 슬그머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아아, 그럼 그냥 얌전히 돌아가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매혹적인 말만 해대면서 짐보고 돌아가라고?”

스타티스의 손가락이 로메오의 턱에 닿았다. 그 순간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로메오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말했다.

“아랫사람들이 잔뜩 있습니다, 폐하.”

“그거야 물리면 그만이지.”

스타티스가 말하기 무섭게 식사 시중을 들던 이들이 우르르 식당 밖으로 나갔다. 로메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 하오나.”

“신혼부부가 신혼도 즐기지 못하고 헤어지게 생겼는데 아랫사람들의 눈치까지 살펴야 하나?”

‘우린 보통 신혼부부가 아니잖아요!’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고 말했지만, 이렇게 몸정부터 쌓아가는 건 지나치게 고속질주인 것 아닐까!

로메오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런 그가 귀엽기만 해서, 스타티스는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욕실에서도 했는데 뭘 수줍어하고 그래?”

“……으아.”

‘그건 제 본의가 아니었습니다만.’

로메오는 무척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스타티스를 응시했다. 그러자 스타티스의 눈썹이 쓰윽하고 올라갔다.

“그래서 싫었나?”

“……그건 아닙니다.”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지나간 첫째 날과 달리, 둘째 날은 분명 달랐다.

‘그리고 셋째 날은 또 다를 테지.’

로메오는 빨갛게 붉힌 얼굴로 스타티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 *

“……그때는 귀여웠는데 말이지.”

스타티스는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졸지에 절친한 친구의 첫날밤 이야기를 듣게 된 올리비아의 얼굴이 애매하게 굳어졌다.

“회임하셨습니다!”

계획보다 훨씬 빠른 임신이었다. 뜻밖에, 황궁은 축제의 분위기였다.

“빨리 후계자를 낳아버리고 폐하의 뜻을 펼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태황후는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낙심하고 있는 딸에게 그렇게 말했다. 자신을 탓하는 사람도, 이 소식을 싫어하는 사람도 하나 없는 상황에서 스타티스는 도리어 조금 얼떨떨했다.

‘뭐야, 계획이랑 어긋났는데도 오히려 반응이 온건하네.’

온건하기만 했나. 태황후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에 부부는 콘라드로 휴양까지 떠날 수 있었다.

“신혼여행도 다녀오지 못했잖습니까. 이참에 즐겁게 부부간의 시간을 보내시죠.”

덕분에 깨닫게 된 것이다.

‘인생이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구나.’

스타티스의 푸념인지 자랑인지 모를 이야기를 들은 올리비아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폐하의 계획은 뭐였는데요?”

“아기는 한 3년쯤 있다가 가지려고 했지. 그때쯤에는 후궁도 셋은 들이려고 했고.”

“아아.”

“?”

어쩐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 올리비아를 보니 입맛이 떨떠름했다.

‘대공비는 가끔 손바닥 위에 날 올려놓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단 말이야.’

분명 오래 겪어보지 않았는데, 그녀를 잘 안다는 듯한 기색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게 또 호의가 가득 담겨 있어서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점이 독특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올리비아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폐하, 혹시 태몽도 꾸셨어요?”

“아니.”

초기라서 그런지, 원래 꿈을 잘 안 꾸는 체질이라서 그런지 태몽은 아직이었다.

“그대는 태몽을 무얼 꾸었나?”

“저는 흰 강아지 꿈을 꾸었어요.”

“강아지는 무슨. 늑대면 모를까.”

“하하하.”

귀엽기 짝이 없는 태몽에 스타티스는 입술을 비틀었다.

‘대공 같은 능구렁이에게 어떤 유전의 기적이 벌어져도 강아지 같은 자식이 나올 리가 없어.’

우리 황후라면 모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올리비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딸이면 좋을 것 같으세요, 아들이면 좋을 것 같으세요?”

“글쎄.”

질문에 스타티스는 잠시 대답을 멈췄다. 그때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로메오의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하세요?”

“로메오.”

꽃을 꺾어오는 길인지, 로메오의 품 안에는 한 다발의 장미가 들려 있었다. 스타티스는 충동적으로 로메오에게 물었다.

“황후는 아들이면 좋겠나, 딸이면 좋겠나?”

“네? 으음.”

로메오는 걸음조차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스타티스는 입술을 비틀었다.

‘반드시 아들이지.’

그녀가 적통임에도 당연히 황태자가 되지 못한 데에는 그녀가 여자라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안정적인 황권 확보를 위해서라도 스타티스는 장자가 아들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계산속이 무색하도록, 로메오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둘 다 좋을 것 같은데요?”

“…….”

스타티스는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하여간 우리 황후는 늘 그렇지. 계산할 줄도 모르고, 그저 해맑고.’

하지만 그 덕분에 배우게 되지 않았던가.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그 계획의 노선을 벗어나더라도 인간은 더 좋은 결과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대 말이 옳아.”

아들이든 딸이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깟 후궁 안 두면 그만이지.’

경쟁 체재가 될 것 없이 다 황후의 소생이면 그만 아니겠는가.

로메오는 자신이 스타티스에게 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안고 온 한 아름의 장미를 내밀었다.

“꽃을 좋아하셨죠? 그래서 아침에 막 피어난 장미로만 골라 땄답니다.”

“고마워.”

꽃은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날, 로메오의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을 떼어주었던 일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내린 듯하지만.

‘꽃보다 예쁜 건 당신일세.’

꽃다발을 안아 들며 스타티스는 낯간지러운 말은 목 안으로 삼켰다.

그런 건 안정기가 끝나고 침대 위에서 실컷 들려줄 생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