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 (21/28)

4장.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

“그래서 이름은 지었습니까?”

태황제가 그렇게 끌려간 뒤, 나는 한동안 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말을 듣게 되었다.

다름 아닌 우리 아버지에게!

“아버지…….”

태황제를 내쫓고 나니, 이제는 우리 아버지가 나를 닦달하는 건가.

‘나는 아직 아기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걸요. 이름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일러요.”

그렇게 온화하게 아버지의 관심을 흩뜨리려고 했더니, 아버지의 맞은편에서 우유를 홀짝이고 있던 애니가 뜻밖에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언니, 이름은 중요한 거잖아. 지금부터 고민해도 빠르지 않다고 생각해.”

“……!!”

애니 너마저!

‘내 동생까지 나를 닦달할 줄이야.’

이쯤 되니 여태 이름을 고민하지 않는 내가 문제인가 싶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으니, 아버지가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며 애니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는 곧 아카데미 연구실로 들어간다고 했지요?”

애니는 지난번 나와 고민 상담을 했던 대로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진지하게 연구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아직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은 어린 학생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역시 똑똑한 내 동생!’

나는 애니가 자랑스러웠다. 꼭 내가 칭찬을 받은 것처럼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으니, 애니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교수님께 말씀드려서 일단 시기를 늦추었어요. 언니가 출산한 다음에는 들어가서 생활하겠다고요. 다행히 교수님도 허락해주셨어요.”

교수가 허락한 것은 애니가 행실이 어여쁜 학생이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언니가 타이론 대공비라는 점도 크게 한몫했다.

애니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출산하면 마음도 불안할 텐데, 언니의 곁에 있고 싶어요.”

“애니.”

우리 막냇동생이 이렇게 다정한 생각도 하게 되다니.

‘언제 이렇게 다 자랐담.’

나는 바보처럼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검지로 내 눈꺼풀을 꾹 눌렀다. 그러자 귀신처럼 내 앞으로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자요.”

“……이안?”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일이 있어서 잠시 나갔던 이안이 도대체 언제 들어온 건지 내 곁에 서서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진짜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어떻게 이렇게 필요하다 싶을 때 짠 하고 나타나는지 모를 노릇이다. 애니가 내 곁에 의자를 빼어 앉는 이안을 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형부가 한시도 떨어지지 않겠지만요.”

“물론입니다.”

이안은 냉큼 대답했다. 은근한 뿌듯함까지 느껴져서, 괜히 내 얼굴이 붉어졌다.

‘하여간 팔불출이라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굴지 않아도 되는데.

거기까지 생각했던 나는 문득 지난번 선물 때처럼 애니가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퍼뜩 변명처럼 덧붙였다.

“하지만 이안과 너는 분명히 다른걸. 언니를 생각해줘서 고마워, 애니.”

“헤헤.”

내 말에 애니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화기애애한 우리 자매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버지가 천천히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턱을 괴었다.

그리고는 특유의 온화하지만 우아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곧 태어날 손주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해봤습니다만.”

그 말에 나는 사레가 들릴 뻔했다.

‘생제르망 상회 전체에다가, 오르세에 가지고 있는 사적 재산들까지 이미 엄청나게 많이 주셨는데!’

“또 줄 수 있는 게 남으셨어요?”

진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당연하지요. 평생 혼자 살면서 일밖에 하지 않았는걸요.”

아내도 자식도 없으면 보통 혼자 살다 갈 몸이라며 신나게 놀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열심히 돈을 벌었다니.

‘근면함의 상징.’

나는 존경의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지극히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제 사유재산은 모두 당신에게 넘겼지만, 넘기지 않은 것들도 물론 있습니다. 제 개인이 아니라, 왕족 마이옌 공으로서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죠.”

“네?”

그런 건 넘기면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왕족으로서 소유하고 있는 거라뇨! 그건 함부로 양도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중요한 문제를 왜 이리 평이하게 말한단 말인가. 반박하고 싶은 포인트는 많은데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리고 있자니, 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제가 가진 영지들은 사사로이 양도하기에 예민한 문제라 국왕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겠지만.”

예민하다는 형용사로 수식하기에는 영토는 큰 문제가 아닐까.

아버지는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우리 손주를 위해서 마리아나 해에 있는 섬 몇 개 정도는 충분히 줄 수 있지 않을까…….”

“네? 섬이요?”

상상하지 못한 선물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입니다. 밤에 바라보는 별이 무척 아름답지요.”

여러모로 모순적인 말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멍한 어조로 되물었다.

“무인도에서 별을 바라보신 적이 있으세요?”

무인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잖아?

‘거기서 어떻게 별을 봐?’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거기 별장을 지었거든요.”

“…….”

숨이 막힌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아니, 그런데 낯설지 않아. 이 당혹스러움. 기시감이 느껴져.’

공교롭게도 이런 상황이 몇 번 있었던 것 같다.

보석 18세트라든지, 드레스 사러 갔더니 모자에 장갑에 구두에 아기 옷까지 한 아름 안고 온 일이라든지.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조심스럽게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하나만 여쭈어도 될까요?”

“예.”

“지난번에 오르세에서 이안이 모든 물건을 싹쓸이해서 사들이는 걸 보고 무슨 생각 하셨어요?”

오르세에서 생제르망 상회의 물건을 본다고 갔더니, 이안이 이것저것 주문해서 짐마차 하나를 가득 채웠던, 바로 그날.

나는 아버지가 뭐라고 하며 웃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위가 손이 크군요.”

그런데 그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은 아버지를 보니 그때 그 말이 다르게 들렸다.

“설마 그때 그 말이 ‘사위가 낭비가 심하구나!’가 아니라 ‘그래, 저 정도 통은 있어야지!’라는 뜻이셨어요?”

설마설마하며 물었더니, 아버지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하시며 이렇게 대답했다.

“낭비라는 건 돈이 없는 사람이 돈을 함부로 쓸 때 붙이는 말입니다. 우리 사위 같은 사람에게 붙이는 말이 아니죠.”

“장인 어르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

얼씨구, 둘이 쿵짝이 딱딱 맞는다.

‘내 금전 감각이 이상한 것인가, 저 두 사람이 이상한 것인가.’

나는 미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애니도 나와 같은 표정이라는 사실에 작게 안도했다.

어쨌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근황에 관한 이야기가 재미있게 이어졌다.

이안은 아버지에게 진지하게 조언을 구했다.

“안 그래도 장인어른께 투자 문제로 상의드리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만…….”

“좋습니다. 이 노인의 경험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요.”

일적인 이야기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자니, 애니가 뺨을 발그레 붉히며 말했다.

“형부는 정말 멋진 것 같아.”

“어떤 점이?”

그렇게 애니에게 물으면서도 나는 내심 잘생긴 외모, 젠틀한 태도 등등의 대답을 기대했더란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그런 나의 기대를 와장창 깨버렸다.

“시원시원하고 아낌없이 쓸 때 쓰는 거?”

“뭐어?”

이안의 많고 많은 장점 중에 하필 재력이라니! 현실적으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할머니 같은 조언을 늘어놓았다.

“애니, 네 형부 같은 남자는 세상에 별로 없어. 저런 소비습관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면 결혼하고 큰일 난단다.”

“내가 어린아이인 줄 알아? 나도 그 정도는 알거든?”

내 말에 애니는 도리어 나를 어린아이 보듯 하며 웃었다.

“그리고 언니는 걱정할 거 없어. 형부는 선이 뚜렷하잖아. 아무에게나 헤프게 사용하는 게 아니라고.”

“그런가?”

‘나는 줄곧 비정상적인 소비만 보았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와 애니가 바라보는 이안의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이안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나도 조금 더 익숙해지려고 노력해봐야겠어.’

어쨌든 나도 이안에게 내 가치관만 강요할 생각은 없었기에, 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고민에 빠진 나와 달리, 애니는 금세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바로 아버지가 언급하신 섬에 관한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섬이라니 멋지다. 심지어 내 소유의 별장만 덩그러니 있는 무인도라니!”

“그러게…….”

미쳐버린 스케일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섬이 뭘까? 바다는 뭐지? 책으로는 읽었지만, 상상이 안 가.”

“그건 그렇네.”

애니는 눈을 빛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나는 애니가 왜 저리 흥분하는지는 이해했다.

‘수도에서 나고 자란다면 바다를 보기 어려우니까.’

지난 생에서 애니가 한 번이라도 바다를 본 적이 있을까?

나는 조금 가라앉은 표정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이안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럼 기분 전환 겸 여행을 다녀오면 어떨까요?”

뒤를 돌아보니 이안이 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뜬금없이 여행이라니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내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이안이 다시 내 곁에 앉으며 말했다.

“아이를 낳으면 꽤 오래 돌아다닐 수가 없을 테니까요. 이번 기회에 바람도 쐬고, 아이에게 예쁜 것도 보여줄 겸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바다로요?”

“바다로.”

가장 가까운 바다조차도 수도에서 꽤 멀 텐데.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이안은 안심하라는 듯이 내 손을 붙들었다.

“마리아나까지는 무리겠지만, 삼 일 정도 서쪽으로 내려가면 콘라드라는 작은 해양도시가 있어요.”

콘라드.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내가 눈을 깜빡이니, 이안이 조금 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무역상이 다니는 큰 항구는 아니지만, 편안히 쉬면서 해산물 요리도 먹고 바다 구경도 할 정도는 된답니다.”

“언니, 들었어? 수도 근처에도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가 있대!”

“어어…….”

이미 애니는 잔뜩 흥분해서 방방 뛰고 있었다. 내가 얼떨떨하게 대답하자, 애니는 금세 눈치를 보고 수그러들었다.

“아, 물론 언니가 피곤하다면 어쩔 수 없지. 언니 편한 대로 결정해.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이미 방방 뛰는 모습을 보았는데 어떻게 내키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겠는가.

이안을 그런 내 걱정을 덜어내려는 것처럼, 손을 쥔 손에 꽈악 힘을 주었다.

“주치의는 물론이고, 가까운 거리니 시중들 사람도 많이 데려갈 수 있습니다. 길이 잘 닦여 있어서 누울 수 있는 큰 마차도 가능하고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뭐라고 거절하겠는가.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러면 몸이 더 무거워지기 전에 다녀오도록 해요.”

* * *

내가 여행을 조금 달가워하지 않은 이유는 최근 내 몸의 변화 때문이었다.

컨디션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임신 중기에 든 나는 어느 때보다 생생하고, 피부에서도 빛이 났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씩 느껴지는 몸의 변화 때문에, 임신이 더없이 현실적인 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

내 방에서 잠이 들었던 나는 어느새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아직 아기가 복부를 압박하려면 한참 남은 시기였건만, 숨이 턱턱 막히고 손발이 저릿저릿 저렸다.

‘어지럽고, 걷지도 못하겠고.’

언젠가 느꼈던 고통이 꼭 오늘의 일처럼 선명해졌다. 나는 무력하게 입술만 뻐끔거렸다.

‘이대로 죽는 걸까?’

침대에서 앉지도 못하고 천장만 바라보던 그 고통에 시달릴 바에는 죽는 게 나을 거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무력감에 슬슬 잠겨가고 있을 때였다. 커다란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올리비아!”

“헉!”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강한 팔이 벌떡 일어나는 나를 자신의 품으로 꽉 끌어당겼다.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거렸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천천히 숨이 가라앉았다.

‘꿈이었어.’

모든 것이 꿈이었다. 나를 짓누르던 압박감도, 죽을 것만 같던 절망감도.

“이안……?”

나는 꿈인가 현실인가 분간이 되질 않아,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내 이마에 입을 쪽 맞추며 대답했다.

“네, 올리비아.”

“하아.”

나를 안고 있는 단단한 품이 이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급하게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이 내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나와 눈을 맞추었다.

“괜찮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깔깔한 것을 제외하면 아무 문제 없었다.

“물 좀 주세요.”

“잠시만요.”

이안이 서둘러서 침대에서 일어나 테이블에서 물컵을 가지고 왔다. 물을 한 잔 마시니 정신이 한층 더 또렷해졌다.

‘이제 임신했다는 실감이 드나 봐.’

그저 의사가 임신했다고 말했을 때와 실제로 몸에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내게 주는 공포감의 무게가 달랐다.

‘역시 잊을 수 없는 걸까.’

내가 고통스러웠던 출산 과정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이안이 내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정말 괜찮습니까? 가위가 심하게 눌리는 것 같던데.”

“……글쎄요.”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를 걱정스레 응시하는 이안을 마주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 탓이 아니에요. 제가 마음이 불안해서 그래요.”

“그 또한 제 잘못입니다. 제가 의지가 되지 못한 거니까요.”

“정말 아니라니까요.”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내게 포용적일 수 있는 걸까. 명백하게 내 탓인 부분까지 끌어안고 가려는 다정한 말에, 내 눈에는 찔끔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나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어내며 말했다.

“아기 낳다가 죽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불안한가 봐요. 물론, 제게 그런 불행한 일이 꼭 일어난다는 법이 없는데도.”

말을 하면서도 내 마음은 칼에 베이기라도 한 것처럼 따끔거렸다.

일어난다는 법이 없다지만, 그것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 또한 없어서.

목숨에 별 지장이 없다고 해도 죽는 것이 나을 만큼 아플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어서.

“제가 보기와 달리 겁이 많거든요.”

나는 이런 식의 말이 썩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또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너만 아기 낳았니? 세상 모든 어머니는 다 그렇게 낳아.”

“아주 유난을 떠는구나.”

실제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누워 있을 때 들었던 말들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반응하는 말에도, 이안은 완고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겁이 많지 않습니다. 아주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이지요.”

그의 손바닥이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몹시 사랑스러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 내 마음이 두근거렸다.

“누구나 두려울 수 있는 일이에요. 그렇게 자신을 탓하지 말아요.”

“…….”

다정하고 상냥한 말에 환하게 웃어주고 싶었는데, 흘러나올 것 같은 울음을 참느라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맞아. 출산은 여자의 인생에서 몇 번 없는 이벤트라고? 서너 번만 해도 많은 거잖아.’

그런 일을 좀 두려워하면 뭐 어떻담. 세상 최고로 유난을 떨어도 이해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여간 못된 사람들이었어.’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과거의 상처 하나를 또 시간 속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아직 이른 새벽입니다. 다시 눕도록 하죠.”

이안은 내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자신의 품에서 걱정하지 말고 잠자라는 듯이 어깨를 꽉 붙들어주는 손길이 자상했다.

“더 좋은 의사를 찾아볼까요? 산모를 돌본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

나름대로 내 고민을 덜어주려는 듯, 제안도 해왔다. 나는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타이론 대공가의 주치의보다 훌륭한 의사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황궁에라도 찾아갈 셈이에요?”

“필요하다면.”

농담인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소리가 퍽 진지했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지 말아요. 황제 폐하께서 이번에는 당신이 주접떤다고 혼낼지도 몰라요.”

“혼나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니까요.”

“못살아, 정말.”

나는 내 시선에 맞닿아 있는 이안의 빗장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수도를 떠나면 또 괜찮아질 거예요. 여행 기대하고 있을게요.”

나름대로 괜찮다는 뜻으로 한 행동이었는데, 의외의 자극을 한 모양이다.

이안이 조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행만 기대되나요?”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손이 천천히 둥근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미끄러졌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반문했다.

“그럼 뭘 더 기대해야 하는데요?”

“이를테면 오늘 새벽이라든지?”

웃는 얼굴은 개구쟁이처럼 해맑건만, 덮고 있는 얇은 이불을 걷어내는 손길은 야릇했다.

“읏.”

몸이 가볍게 돌아가면서 나는 침대에 반듯하게 눕고 그가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나는 입술을 삐쭉거리며 새침하게 말했다.

“주치의가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요.”

내 말에 이안이 살짝 움찔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다른 주치의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틀린 말만 하는 걸 보니.”

“못 살아.”

하여간 말은 잘하지. 나는 키득거리며 두 팔을 들어 이안의 목을 휘감았다.

* * *

그렇게 며칠의 준비 기간이 끝나고, 콘라드로 떠나는 날이 되었는데.

어째 수도를 빠져나가려고 보니 호위의 수나, 마차의 수가 계획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이안은 팔짱을 찌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중얼거렸다.

“……나름대로 취지를 가진 여행이었는데.”

그의 푸른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쌍의 부부가 서 있었다. 이안은 신경질적으로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물었다.

“왜 여기 계신 겁니까, 두 분?”

이안의 질문에, 금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고, 편안한 승마복 차림을 한 여성이 씩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별궁에 가서 온천욕이나 하면서 쉬려고 했더니 모후께서 이미 사용하고 계셔서 말이야.”

바로 이 나라의 황제 스타티스였다!

‘폐하께서 왜 우리 앞마당에 있는 거야?’

이제는 내가 황궁에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심심하면 황족들이 출몰하니.’

심지어 황제 부부만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기사와 시종들, 마차까지 줄지어 서 있었다.

‘설마?’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것은 이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설마 저희와 함께 콘라드로 휴양을 떠나겠다는 말씀입니까?”

이안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한 로메오는 어깨를 움츠리며 슬쩍 황제의 뒤로 숨었다. 스타티스는 특유의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잔뜩 병력을 동원하는 것, 함께 가면 서로서로 이익 아니겠나. 물자도 절약하고, 안전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고.”

언뜻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어디 일국의 황제가 휴양을 이리 가뿐하게 떠난단 말인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심지어 황제와 황후 두 사람이 함께?’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사고이지만, 혹시라도 불우한 일이 생겨나면 두 사람 중 하나는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그래서 황제 부부가 나란히 움직이는 일이 고금에는 없었다.

당연히 그 부분을 지적할 줄 알았던 이안은 입술을 삐뚜름하게 비틀었다.

“돈이 썩을 만큼 많으신 분이 물자 절약해서 뭐 하시려고요.”

그 말이 그 말이긴 한데, 참 간결하면서도 사람 속을 박박 긁는 말이었다.

이안을 싱글싱글 놀리던 스타티스 황제도 이번만큼은 화가 났는지, 권위로 찍어누르기를 시전했다.

“그래서 내 충성스러운 신하인 타이론 대공은 내가 합석하는 것이 불만이다?”

“……자손만대의 영광이옵니다.”

“뿌드득,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뿌드득!”

억지로 하는 대답에 뿌드득 소리가 난다고 말을 하는 사람이나, 그런다고 또 일부러 소리를 내는 사람이나.

‘정말 사이가 좋다니까.’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내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스타티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잘 지냈나, 대공비?”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일전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국혼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사연이 있었든, 내 도주를 황제가 권한 것이든 간에 국혼과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내 사과에 스타티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내 사촌을 잉태했는데 어찌 개인적인 사정이라 하겠나. 나도 축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어조는 딱딱하지만 온화하기 그지없는 인사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였다.

스타티스가 무척 신경질이 난다는 듯 얼굴을 확 구기며 덧붙였다.

“물론, 그로 인해 국경일로 지정하자는 둥, 축제를 벌이자는 둥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두 시간이나 듣고 있어야 했던 내 고충도 알아줬으면 좋겠군.”

“아, 그곳까지…….”

도대체 얼마나 주접을 떨어댄 것이요, 만두 태황제.

‘태황후 폐하께서 더 혼쭐을 내주셨으면.’

속으로 그리 빌고 있으니, 스타티스 황제가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그럼 출발하지.”

그 말 한마디로 우리 여행의 리더가 바뀌었다.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따라오시는 겁니까?”

“어허, 무엄하다. 따라오다니. 짐이 가는 길에 대공이 묻어온 거지.”

“…….”

드물게 말문이 막힌 이안을 보며 나는 또다시 까르르 웃고 말았다.

가족들끼리 떠나기로 했던 태교 여행은, 당초 계획과 비교할 수 없이 화려해졌다. 마지막으로 마차를 점검하며 이안은 뾰족한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정말, 황태자가 되기 전에 저 톡 튀어나온 이마빡 좀 때릴 걸 그랬습니다.”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이안의 이마를 쳐다보고 말았다.

‘세상에, 이마까지 닮았네.’

곱슬곱슬한 금빛 머리카락이 가볍게 덮은 수려한 이마가 잠시 시선을 빼앗았다.

‘아무리 조카라고 해도, 이마를 때릴 생각은 못 할 테지만.’

사이좋게 투덕거리던 두 사람을 떠올리니 다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작게 키득거리며 이안에게 말했다.

“두 사람 진짜 엄청나게 현실 남매 같은 거 알아요?”

“어딜 봐서요?”

이안은 진짜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그런데 그 표정이 도리어 더 황제와 비슷한 인상을 주었다.

‘기본 이목구비가 완전히 똑같은데. 선대의 유전일까?’

새삼 선선대 황제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이상 없습니다.”

“출발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잠시 일행이 늘어나서 혼선이 있었으나, 금세 배치가 끝났다. 마차에 올라타기 전, 로메오가 살짝 찾아와서는 나를 불렀다.

“올리.”

“로메오.”

지난번에도 살이 좀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보니 확실히 턱선이 날카로워 보였다.

‘설마 로메오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갑작스레 휴양을 결정한 건가?’

결혼하고 자꾸 살이 빠지는 것이 영 불안했다. 나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로메오를 응시했다. 로메오는 수줍게 웃었다.

“어쨌든 너랑 같이 가게 되어서 좋다. 우리 오르세로 여행 가기로 하고 결국 못 갔잖아.”

“그러게.”

내게 로메오의 약속은 소중한 기억이었다. 로메오도 그것을 나처럼 소중히 기억하고 있다니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있다가 도착해서 더 이야기하도록 하자.”

“응.”

로메오와 그렇게 인사를 하고 있으니, 이안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강아지처럼 내 어깨에 얼굴을 비비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물었다.

“이제 마음이 좀 풀렸어요?”

“당신이 좋아하니 되었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지극히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말에 나는 결국 사랑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이안을 꽉 끌어안았다. 이안도 그런 나를 마주 안아주었다.

내 뺨에 입을 맞춘 뒤, 포옹을 풀어내며 이안이 말했다.

“당신은 여기에서 처제랑 함께 타도록 해요. 장인어른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당신이 불편한 거 아니에요?”

“전혀 아닙니다.”

이안을 재차 붙잡으려다가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애니와 아버지가 한 마차를 쓴다면 더 어색하잖아.’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내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망설이니, 이안이 싱긋 깔끔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말고 타도록 해요. 이번 여행은 당신이 즐거운 게 최우선입니다.”

다정한 푸른 눈을 마주하고 나는 결국 몇 번이나 했던 말을 우물우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정말.”

내 말에 이안은 눈꼬리를 휘며 씩 웃어 보였다.

* * *

최대한 편안한 마차를 구하겠다더니, 진짜 세상에 이런 마차도 있나 싶은 것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그냥 침대가 통째로 들어 있는데?’

그냥 사흘 내내 침대에서 뒹굴면서 기다리면 되는 마차였다. 막상 그런 물건을 앞에 두고 나니 애니가 신경 쓰였다.

‘나야 그냥 누워서 쉬는 게 제일 좋지만, 애니는 그렇지 않다고.’

휴양을 떠나면서도 애니는 여러 권의 약초학책을 챙겼다. 사흘 내내 누워서 책을 읽는다면 척추에 절대로 좋지 않을 게 뻔했다.

나는 마차에 올라서 침대 모서리에 자리를 잡는 동생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편안하니, 애니?”

“당연한 거 아냐? 아주 좋아!”

다행히 애니는 침대 마차가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마침 내가 언니 마사지해주려고 생오이도 들고 왔거든? 누워서 가면 딱 맞네.”

‘내 동생은 정말 야무지기도 하지.’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나름의 재미를 찾는 애니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있자니, 자연히 이 여행을 계획하고 주도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안.’

이렇게 푹신한 침대 마차를 수배했으면서 깔끔하게 마차에서 내리다니.

‘지금쯤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몰라. 그 남자, 깔끔하게 생겼지만, 머릿속은 온통 시뻘건데.’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설마 지금 내가 그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음흉한 사람을 아쉬워하는 건가?!’

음흉이 나한테까지 전파된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내 옆에 누운 애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생각해, 언니?”

“응? 아, 아니.”

“형부 생각해?”

“……!!”

그렇게까지 티가 났나.

‘아니, 그런데 티가 나면 어떻게 나는 건데? 설마 음흉하게 웃고 있었나.’

나는 반사적으로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나를 보고 애니는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하, 언니 얼굴 빨개졌다.”

“그, 그만 놀려.”

애니의 말에 내 얼굴이 점점 더 빨개진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한참을 깔깔대고 웃은 애니는 너무 웃어서 고인 눈물을 손가락으로 흩어내며 말했다.

“나는 언니가 정말 형부랑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너무 예쁘게 사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

한참 어린 동생에게 예쁘게 산다고 칭찬을 받으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애초에 우린 신혼부부이고 말이지.’

나는 조금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건 한 10년쯤 산 뒤에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닐까.”

“왜 그렇게 할머니처럼 얘기하고 그래?”

애니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나를 어이없다는 듯이 돌아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언니가 세상 풍파를 거하게 맞아서 그런단다.’

이 세상에서 저들만 사랑하는 줄 아는 것처럼 난리를 치며 결혼했다가 몇 년도 안 가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걸 내가 얼마나 많이 봤는데.

‘우리 로메오만 해도 후궁들 때문에 머리카락 빠진다고 난리였었지.’

나는 하도 시기 질투가 여자의 전유물인 것처럼 들어와서, 진짜 남자들은 그런 감정이 없는 줄 알았다.

‘없긴 뭐가 없어. 로메오 보니까 남자들도 그 상황이 되니 음습하기 그지없더구먼.’

서로 편짜서 몰아내기, 누명 씌우기, 총애 투기도 모자라 나중에는 황태자가 서로 자기 애라고 우기고 난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이번 생에는 후궁을 안 들이시네?’

또 무언가가 바뀐 걸까.

‘황제 폐하는 도통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단 말이야.’

“실례.”

‘그래, 지금도 저렇게 무심하게…….’

계속 황제를 떠올리고 있던지라, 나는 조금 늦게 반응하고 말았다.

“화, 황제 폐하!”

스타티스 황제가 우리 마차에 오른 것이다.

‘으아! 나는 내가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환상이라도 보는 줄 알았어!’

설마 진짜 황제 본인이 나타날 줄이야!

당황스러운 건 애니도 마찬가지였다. 애니는 혀가 딱딱하게 굳어서는 가엾을 정도로 덜덜 떨며 인사를 올렸다.

“폐, 폐, 폐, 폐하를 뵙습니다.”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이 깜짝 놀라는데도, 황제의 반응은 평이하기 짝이 없었다.

“편하게들 있게. 나도 편하게 있으려고 들어온 거니까.”

“…….”

아니, 이 무슨 악독한 상관 같은 발언이죠?

‘편하게 있으려면 자기 마차에 있어야지, 왜 우리 마차에 오르는데?’

황제는 권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침대 정중앙에 반듯하게 누웠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타이론 대공, 이 여우 같은 사람 같으니. 이런 마차를 숨겨두고 거짓 보고를 올려?”

“…….”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빼돌렸구나, 이안.’

하여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이었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서로 이렇게 한 방씩 주고받으면서도, 막상 공공의 적이 나타나면 끈끈해지는 관계. 그야말로 현실 남매였다.

‘그래도 역시 황제 폐하시네. 욕도 고상하게 하시고.’

여우 같은 사람이라니. 나라면 여우 같은 놈이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누워서 눈을 감으신 황제 폐하께서 근엄한 목소리로 하명하셨다.

“대공비도, 플로렌스 영애도 얼른 눕게. 임산부를 앉혀놓으면 대공이 정말 날뛸지도 몰라.”

“……실례하겠습니다.”

매우 있을 법한 일이었다. 나는 얼른 앉아 있던 자리에 다시 누웠다. 덕분에 침대 위에는 나, 황제 폐하, 애니라는 기묘한 순서로 누운 세 명의 여자만 남게 되었다.

삐꺽.

작은 소음을 내며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눈을 멀뚱멀뚱 뜨고 벨벳으로 둘러싸인 마차 지붕을 바라보던 내가 입술을 열었다.

“불경한 질문이오나, 여기 계시면 황후 마마께서 외로워하지 않으실까요?”

스타티스가 여기 있다는 건 로메오가 홀로 마차에 올라 있다는 뜻 아닌가.

“황의가 푹 쉬라고 했으니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네.”

내 질문에 황제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표정 없이 눈을 감은 얼굴은 어쩐지 금욕적인 느낌이 묻어났다.

‘역시 로메오가 아파서 휴양을 가는 건가.’

친구가 걱정이 되어, 내 얼굴도 저절로 흐려졌다.

그 뒤로 우리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특히 애니는 황제가 자신의 옆에 누워 있다는 부담감에 숨도 작게 쉬는 것 같았다.

‘차라리 애니를 내 옆으로 데려오고 싶은데! 그렇다고 폐하를 문간에 둘 수도 없고, 창가에 눕힐 수도 없고!’

사면초가로다. 내가 잔머리를 데구루루 굴리고 있을 때였다. 스타티스가 뜬금없이 물었다.

“그래서 마이옌 공에게 선물은 뭘 받았나? 아바마마께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고 방방 뛰시던데.”

“하. 하. 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승부를 가리지 못하긴 했지.’

다음 날 승부를 가리기로 했는데 태황후가 찾아와서 혼쭐을 냈으니까.

나는 쑥스러워하면서 대답했다.

“마리아나 해에 있는 섬을 받기로 했습니다.”

“섬이라. 좋은 선물이군.”

무미건조한 대꾸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섬이 좋긴 한데.

“한 10년 뒤에나 가보지 않을까요?”

10년이 아니라 평생 가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대공 부부가 제국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도 하고, 아기도 장거리 여행을 버틸 수 있을 만큼 자라야 하지 않겠는가.

내 대답에 스타티스는 오히려 날 이해 못 한다는 어조로 말했다.

“꼭 눈에 보여야 만족할 수 있나? 그저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질 것 같은데.”

꼭 이안이 할 법한 대답이었다.

‘역시 영혼의 단짝임이 틀림없어.’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서 스타티스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안보다 조금 더 기다란 금빛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안의 말대로 톡 튀어나온 이마, 오뚝한 코, 조금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 큰 귀까지.

‘정말 이안이랑 많이 닮았어.’

처음에는 흘긋 보았는데 자꾸 닮은 곳이 보이다 보니 점점 시선이 집요해졌다.

‘딸을 낳으면 황제 폐하랑 무척 비슷할지도.’

그런 상상을 하고 있으니, 감겨 있던 황제 폐하의 눈이 반짝 떠졌다. 맑은 하늘처럼 푸른 눈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뜬금없이 물었다.

“그래, 그래서 대공은 꼬박 12주 동안 금욕했나?”

“네?”

정말 들을 거라고 상상도 못 한 질문이었다.

‘12주? 이, 임신 초기 안정기간을 말하는 건가?’

그런데 그걸 왜 물어? 이렇게 선뜻 물어도 되는 사이였나, 우리!

내 속마음이야 어떻든, 황제는 질문했고 나는 대답해야만 했다. 나는 얼떨떨해져서 어물어물 대답했다.

“그, 그야, 제가 오르세에 있었으니까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겠지. 내 말에 황제는 다시 천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물리적 거리가 있었군. 하긴, 대공이 그렇게 참을성이 있을 리가 없지.”

‘아니, 왜 이렇게 남의 신랑을 까는 건데?’

문득 발끈한 나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12주가 되기 전에 재회하긴 했습니다. 그때도 잘 참았고요.”

내 남편의 판단 주체가 하반신이 아니라 머리에 있다는 걸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어서 한 말이었는데, 뜻밖에 황제가 긴 한숨을 내쉬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대공보다도 못한 인내심의 소유자가 되고 싶진 않다.”

“……?”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으니 애니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저기, 저어…….”

나와 스타티스는 동시에 애니를 돌아보았다. 애니는 푸릇하고 기다란 야채를 들고는 울 듯 말 듯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오이 마사지해드릴까요?”

* * *

처음 마차 여행을 시작했을 때, 이렇게 어색한 셋이서 함께 마차를 탈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도록, 잘게 자른 오이를 올려놓고 우리는 허물없이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이를 올려놓고 있어서야, 엄숙한 척 무게 잡기가 쉽지 않은걸.’

모두 우리 동생 덕분이었다.

스타티스는 주로 이안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대공은 어릴 때부터 재수가 없었다. 몰래 발 걸어 넘어뜨리고 천사 같은 외모로 넘어가는 사람이었지.”

“아, 그럴 것 같아요.”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나를 웃는 얼굴로 넘어뜨렸잖아.’

나한테 다 맞춰주는 것 같으면서도, 또 은근히 자기 맘대로 몰고 간단 말이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스타티스는 조금 더 격앙된 어조로 말을 늘어놓았다.

“남을 칭찬하는 법이 없고, 쉽사리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런 주제에 남이 자신을 건드리는 것은 조금도 못 참지. 사람에 따라서 태도가 바뀌는 것도 아주 재수 밥맛이다.”

……아니, 또 왜 남의 신랑을 까고 계신데?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내 남편, 까도 내가 까야지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그래도 황제에게 버럭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하고 소리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 정도는 아닌데요.”

그런데 뜻밖의 타박이 날아왔다.

“언니, 폐하 말씀도 들어봐야지.”

“애니……?”

아니, 네가 어떻게?

‘너 형부 좋다고 말했잖아! 지금 황제 폐하 편드는 거니?!’

충격에 빠진 나를 내버려 두고 스타티스와 애니는 이안의 이중성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아니야! 우리 남편 그런 사람 아니라고!’

달기가 설탕 같은 사람이라는 나의 반박은 두 사람에게 무참하게 씹히고 말았다.

얼굴에 붙은 오이를 떼어내며 스타티스는 소녀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하여간 나는 대공이 싫다. 아주아주 싫다. 좀 더 어릴 때 모르는 척 정강이를 까서 자빠뜨려야 했어.”

이마빡을 때릴 걸 그랬다고 후회하던 이안의 말과 묘하게 겹쳐지는 말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안 하고 사이가 좋으시네요. 그렇죠?”

“절대 아니래도.”

“네네.”

나는 이제 대충 스타티스와 이안의 관계를 알 것 같았다. 저리 말하지만, 속으로는 나름의 끈끈한 유대가 있으리라.

다시 말끔해진 얼굴로 침대에 누운 스타티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대공과 대공비가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 짐은 몹시 흡족해. 앞으로 아들 열한 명만 더 낳도록.”

“그……건 좀 무리일 듯싶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하여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열한 명이라니. 왜 저리 구체적인 수치로 말하는 건데?’

한 명 낳는 것도 무서워 죽겠는데 열한 명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아득해져서 나는 그냥 고개를 흔들어버렸다.

그때였다.

“폐하께서는 자녀 계획이 있으신가요?”

내 동생 애니가 말간 눈을 반짝이며 스타티스에게 물었다. 황제 부부의 내밀한 사정은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나는 사색이 되어 애니를 불렀다.

“헉! 애니!”

“괜찮네. 괜찮아.”

그런데 뜻밖에 불호령을 내릴 줄 알았던 스타티스가 무척 관대하게 손을 내젓는 것 아닌가.

‘차분하신 듯해도 선 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스타일이신데.’

왜 저리 관대하담.

‘침대에 누워 있어서 마음이 편해진 것일까? 침대에서는 온화한 분이셨나!’

알쏭달쏭해하는 나는 내버려 두고, 스타티스는 특유의 무미건조한 어조로 대답했다.

“짐은 최근 성현들의 옛말이 틀린 것이 하나 없다는 걸 배웠지.”

“뭔데요?”

“임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계획, 아니면 사고.”

“네?”

스타티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애니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내게는 머리를 땡 치는 듯한 명언이었다.

“아니, 누가 그런 주옥같은 말씀을…….”

“짐이 했네.”

“예?”

아니, 성현들의 옛말이라며.

‘이 사람 이런 사람이었나?’

문득 만두 태황제랑 겹쳐 보이는 건 나의 착각인가.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아 죽겠다는 투로 손을 내저었다.

“하여간 인생에 계획은 다 쓸데없는 거야. 계획을 세운다고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자녀 계획도 세우지 않기로 했네.”

참 이런 모습이 낯설기는 한데,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진짜 속내를 보는 것 같아 정겹기까지 했다. 나는 키득키득 웃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후 마마와는 어떠세요?”

“로메오는 좋은 남자지. 결단력이 조금 부족하지만.”

역시 칼 같은 즉답이 날아왔다.

로메오의 장점은 착하고 배려심 넘치는 성격이었지만, 그런 만큼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느라 결단을 내리질 못하곤 했다.

커다란 결점이라면 결점인 부분을, 스타티스는 가벼운 어조로 휙 넘어갔다.

“결단력이라면 짐에게 넘쳐나니, 남편에게까지 바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좋은 남편일세.”

“……다행입니다, 폐하.”

로메오에 대한 모진 소리가 나오면 어쩔까 해서 속을 졸이고 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둘이 잘 맞는 것 같아서.’

지난 생에서 로메오의 맘고생을 고스란히 보아온 나에게는, 스타티스의 온건한 평가가 달갑기만 했다.

미소 짓는 나를 스타티스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부분에서는 나는 그대에게 감사해야 하네, 대공비.”

“예? 무엇을 말입니까?”

또 뜻밖의 말인지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타티스는 씁쓰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사실 황후와 데면데면한 사이로 지낼 마음이었네. 딱히 로메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황제라면 으레 그래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그 말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하고 있는 나에게 조금 변명처럼 들렸다. 지난 생에서 로메오와 스타티스는 선이 명백한 좋은 파트너 같은 모습의 부부였기 때문이다.

‘그저 황제는 가정에서도 그렇게 지내야 한다고 배워서 그리 대했다면.’

그 차가운 냉대에 속을 끓이던 내 친구의 감정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뜻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대와 대공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꾸게 되었지. 대공의 나사 풀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더군.”

잠시 숨이 턱 막혀서 입술을 깨문 나에게, 스타티스는 느릿한 어조로 덧붙여 말했다.

“왜 나는 황제라는 이유로, 가정에서까지 상대를 견제하며 지내야 하는가?”

“!!”

그 말은 그녀의 마음이 확실하게 변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로메오는 믿을 만한 사람이에요. 저는 폐하께서 좋은 선택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내 친구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반복하게 되지 않도록, 마음을 바꿔주어서 감사하다.

나는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스타티스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곤한 듯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그건 내가 운이 좋은 덕분이지.”

하여간 높은 자의식까지 이안하고 꼭 닮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눈을 감고 스타티스는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슬슬 졸음이 밀려오는 듯,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여하간 짐은 기분이 좋네. 난생처음 계획에 없던 도박을 질렀는데 터진 기분이거든.”

나는 그런 황제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이안은 처음부터 두 분이 잘 지낼 거라고 했어요.”

“대공이?”

내 말에 스타티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가늘게 눈을 떴다. 나는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맞아. 이안은 다 알고 있었어.’

“제가 로메오가 걱정된다고 했더니, 폐하는 분명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했거든요. 지금 생각하니 제가 괜한 걱정을 했던 것이네요.”

스타티스를 잘 아는 이안은, 스타티스의 마음이 바뀌고 있다는 것 또한 눈치챘던 것이다.

자신이 이안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스타티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좋았던 기분이 다시 나빠지는군.”

“하하하.”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나는 다시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 그때, 애니가 작은 손을 들었다.

“저어.”

기혼 여성들끼리 지나치게 대화에 빠져들었던 것인가. 나는 동생을 배려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애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애니는 아기 고양이 같은 눈망울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런데 아기는 어떻게 생기나요?”

“…….”

나와 스타티스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는 척, 눈을 감았다.

누워서 이동하는 데다가,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니 콘라드에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이 콘라드입니다.”

“와아.”

마차 문을 열고 내리니 물씬 소금기 가득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여기가 바다.’

이안의 말대로 웅장한 항구도시는 아니었지만, 있을 것은 다 있었다. 빨간 지붕을 가진 흰 등대,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갈매기 떼, 수시로 오가는 작은 배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와아아, 저게 바다군요! 정말 책에서 읽은 대로예요. 햇빛이 반짝반짝 부서지는 것 같아요!”

가장 신이 난 사람은 애니였다.

‘정말 바다가 보고 싶었구나.’

저렇게 신이 난 애니의 모습은 난생처음 보았다.

“그렇게 좋아?”

“응! 바다에 진짜 오고 싶었거든.”

“그렇구나.”

나는 잔잔한 눈으로 애니를 바라보았다.

‘하긴, 누구든 마음에 품고 있는 풍경이 있으니까.’

나의 경우에는 그것이 오르세였다. 결국 두 번이나 죽을 때까지 가지 못하고 세 번째에야 갈 수 있었던 그곳.

‘애니도 바다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아마 지난 생의 애니 또한 바다를 갈망하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콘라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를 반기러 나온 사람은 바로 콘라드의 영지 관리인이었다. 콘라드는 작은 도시라서 콘라드령으로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근처의 큰 도시에 예속되어 있었다.

“영주성이 있었다면 그리 모셨겠지만, 이곳에는 영주성이 없습니다. 최대한 좋은 숙소를 수배하였으나…….”

“상황은 모두 이해하고 있으니 긴장하지 않아도 좋네.”

스타티스는 갑자기 황제를 모시게 되어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영주관리인을 달랬다.

가장 좋은 숙소를 수배하려고 애썼다는 것이 거짓이 아닌 것처럼, 그가 안내해준 건물은 언덕 위에서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한적한 곳이었다.

“우와.”

오자마자 테라스로 뛰어나간 애니는 탄성을 내질렀다. 늘 차분하던 눈이 별빛을 담은 것처럼 반짝였다.

애니가 뺨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이 풍경을 함께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애니의 말에 나는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름다운 것을 볼 때,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무슨 의미겠는가.

‘사랑을 하고 있구나.’

진지한 교제이든, 한때 스치는 가벼운 애정이든, 무엇이든 좋았다. 나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애니에게 물었다.

“그게 누구인지 물어도 되니, 애니?”

“그, 그, 그게.”

내 물음에 애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애니가 검지를 입술에 대며 속삭였다.

“언니, 이건 비밀이야.”

“그래.”

“그 애는 나 때문에 뭔가 이득을 보게 된다고 여기면 슬퍼할 거야. 그런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진짜 비밀이야.”

“어서 말이나 해보렴.”

연신 비밀이라고 다짐, 다짐을 받아내는 애니가 귀여워서 나는 푸후훗 웃고 말았다.

얼굴을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붉힌 애니가 내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나, 타이론 기사단에서 견습기사로 지내고 있는 에릭이란 아이를 좋아해.”

“……!!”

설마설마했지만 들려오는 이름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정말 이어지고 있었구나. 애니와 에릭의 인연이.’

에릭이 얼마나 간절하게 애니를 사랑하는지는 이미 지난 생에 보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생까지 두 사람이 잘될 거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다행이야.’

내가 끼어드는 바람에 도리어 일이 잘못된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나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애니에게 물었다.

“그 아이와도 이야기가 된 거야?”

“…….”

잠시 우물쭈물 망설이던 애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

“하지만 정식으로 교제하는 건 아니야. 아직 우리가 어리니까.”

“에릭이 그렇게 말해?”

“에릭은 진짜 기사가 되어서 내 앞에 떳떳해질 수 있으면 그때 교제 신청을 하고 싶대.”

그러니까 아직 서로의 감정만 확인한 상태라는 뜻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의외로 태평한 아이구나. 그렇게 미루다가 자신이 준비되었을 때, 너는 이미 다른 사람하고 결혼해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지난 생에서 실제로 두 사람은 그렇게 엇갈렸었다.

나를 파넬로 팔아치웠지만, 진상들에게 가로막혀서 생각보다 돈을 얻지 못하자, 플로렌스 자작은 애니를 구제 불능의 쓰레기에게 빨리 넘겼다.

‘그 뒤로 얼마나 애니가 마음고생을 했는데.’

오로지 아기를 낳기 위해 애니를 사 온 남편은 애니가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쓸모없는 물건처럼 함부로 대하기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넝마가 된 그녀를 구해준 것이 그때까지도 줄곧 애니를 짝사랑하고 있던 에릭이었다.

‘그런데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다니.’

이러다가 또 타이밍이 어긋나는 것 아닐까.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불안감에 내가 입술을 깨물었을 때였다. 애니는 의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변하지 않을 거니까. 나는 에릭이 좋아. 에릭이 아닌 다른 사람은 상상도 되지 않고.”

“애니.”

도대체 언제 이렇게 컸을까.

결연한 의지를 담아서 반짝이는 눈망울이 아름다웠다. 나는 애니의 풍성한 곱슬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니는 네가 좋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좋아.”

“언니!”

내 대답에 애니는 활짝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언니에게도 얼른 소개하고 인정받고 싶어. 언니도 분명 좋아할 거야.”

나는 동생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리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두 사람의 사랑에 어떤 장애도 없기를.’

나는 애니의 삶이 예쁜 동화처럼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로 끝나길 바랐다.

* * *

하지만 수도를 떠나왔음에도, 나는 푹 잠들 수 없었다. 침대에 누우면 어김없이 고통의 기억들이, 불길한 예감들이 나를 괴롭혔다.

“헉!”

콘라드에 도착한 첫날 밤, 나는 또다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물속에 잠겨 있다가 겨우 육지로 나온 것 같았다.

“하아…….”

예상은 했었지만, 불안감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했다. 그만큼 내게 뿌리 깊은 고통스러운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배 속 아기에게도 좋지 않을 텐데.’

잠을 잘 자지 못한 것이 이미 꽤 오래되었다. 임신했을 때 눈물이 많아지거나, 수면 패턴이 바뀌는 것은 흔한 증상이었지만, 이렇게까지 길게 이어지는 건 분명 이상했다.

‘내가 마음을 좀 더 강하게 먹어야 하는데.’

나는 내 곁에서 눈을 감고 자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달빛에 희게 빛나는 얼굴이 수려했다.

‘다행이다. 오늘은 깨우지 않아서.’

이안은 예민한 편이라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깨어나곤 했다. 하지만 콘라드까지 오는 마차 여행이 고된 탓에, 오늘만큼은 푹 잠이 든 모양이었다.

‘물을 마시고 나도 다시 누워야겠다. 도대체 지금 몇 시지?’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슬리퍼에 발을 끼웠을 때였다.

“아앗!”

종아리가 쥐어짜이는 듯한 아픔이 훅 밀려왔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안이 서둘러서 내게로 구르듯 다가왔다.

“올리비아! 왜 그래요?”

“다리가, 다리가 아파서…….”

다리가 욱신거려서 눈물이 핑 돌았다. 당장이라도 주치의를 부르러 달려가려는 이안을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붙들었다.

“쥐, 쥐가 났나 봐요.”

주치의를 부를 만한 일이 아니었다. 잠시 나를 돌아보던 이안이 내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만요.”

“아앗!”

커다란 손이 내 종아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근육을 비트는 것만 같아서 저절로 비명이 흘러나왔다.

‘맞아. 임신하면 이런 변화도 있었지.’

사소하지만 성가신 고통이었다. 그래도 이안의 손아귀 힘이 좋아서 그런가, 쥐는 금방 풀렸다. 나는 말랑말랑한 종아리를 주물러주는 손을 붙들었다.

“이제 괜찮아요.”

이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다른 곳은 저리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대답은 했지만, 한숨이 나왔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부지기수일 텐데.’

그때마다 이안을 깨우는 것도 미안한 일이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깊이 잠들지 못해서. 차라리 침실을 따로 쓰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괜찮습니다.”

이안은 완고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팔을 넓게 펼쳐 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기를 가지는 건 참 힘든 일이군요. 이렇게 계속 아프기도 하고.”

“그러니까요.”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내가 충분히 안정되었다고 확인한 이안이 조심스럽게 나를 부축해서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가 내 곁에 앉아, 이불을 정돈해주며 물었다.

“이불을 조금 더 두꺼운 것으로 바꿀까요? 따뜻해지면 아무래도 순환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날씨가 더워지는 계절인지라, 이불이 얇은 것은 당연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안아줘요.”

이안은 가볍게 웃더니 내 곁에 누워서는 자신의 품에 나를 꽉 가두었다.

추워서 쥐가 난다고 생각한 건지, 유난히 몸을 바싹 붙여와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키득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체온이 높아요? 어릴 때부터 그랬나요?”

“글쎄요. 누군가를 마주 안아본 적이 없어서.”

이안이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숨결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 체온을 아는 사람도 이 세상에 당신뿐입니다.”

“하하.”

어떻게 이렇게 달콤한 말을 잘하는지.

‘이안은 어떻게 이렇게 든든한 걸까.’

나는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문질렀다. 두근두근 울리는 심장 소리가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불안함이 완전히 가시지도 않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에게만 매달려 있었다.

내가 쉽사리 잠이 들 것 같지 않았는지, 이안이 물었다.

“따뜻한 우유를 마실까요? 수면에 도움이 될 거예요.”

“아니요. 되었어요.”

“저녁도 거의 먹지 않아서 배가 고플 텐데.”

“별로 입맛이 없어요.”

우유도, 달달한 것들도 최근에는 썩 당기질 않았다. 모두 마음이 편안해야 먹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올리비아.”

이안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손에 힘을 주어 너른 등을 꽉 끌어안았다.

“안아줘요. 그거면 충분해요.”

이 불안은 온전히 내 마음의 문제였다. 그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문제로 그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 * *

‘올리비아.’

이안은 자신의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잠이 든 올리비아의 얼굴을 내려보았다. 고운 눈가에는 검은색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최근 잠을 잘 이루지 못한 탓이었다.

‘무엇이 불안해서 그럴까? 내가 의지가 되질 않나.’

올리비아는 처음 만났을 때의 당차고 철없어 보이는 인상과 달리, 마음에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상처는 평소에는 아문 듯 보이다가도 어떤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언제 나았냐는 듯이 제 존재감을 주장했다.

‘그런 것이 트라우마이지.’

이안이라고 불안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그에게 부모는 채워지지 않은 공백이었다. 자신이 받아보지 않은 무조건적인 애정을 과연 내 자식에게 줄 수 있을까?

‘하지만 올리비아와 함께라면 이 불안감 또한 건너갈 수 있을 거야.’

자꾸만 아이가 올리비아를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녀를 닮은 아이라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 당신도 나를 의지해줘요.’

이미 그는 그녀에게 많은 용기와 위안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모르는 것 같지만.

* * *

“그만…… 먹을게요.”

나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내 맞은편에서 식사하고 있던 아버지와 애니, 이안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꽂혔다.

‘윽, 역시.’

말을 하면 걱정을 끼칠 거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들어가질 않는걸.’

내 앞에는 절반 조금 넘게 비워진 클램차우더 수프가 놓여 있었다. 전채요리였다.

‘이것도 가까스로 먹었다고.’

조개와 크림의 냄새가 올라오는 순간 거짓말처럼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억지로 숟가락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도 절반이 최선이었다. 아버지가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리시며 말했다.

“……하지만 아직 메인 요리가 나오지 않았는걸요. 이 바다에서 갓 잡은 싱싱한 꽃새우 요리라고 합니다.”

꽃새우라니. 수도에서 먹기 힘든 진귀한 식재료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뚝 떨어진 입맛은 돌아오질 않았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산물이 잘 맞지 않는 거 같아요. 먼저 올라가서 쉴게요.”

“저런.”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애니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말했다.

“내가 괜히 바다로 오자고 한 거야?”

동생의 말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내 컨디션이 떨어지는 것과 애니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었다.

‘문제는 내 안에 있는걸.’

바다가 아니라 그대로 저택에 있었더라도 나는 이렇게 피곤해했으리라.

“전혀 아니야, 애니. 네가 기뻐하는 모습만으로도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냥 오늘 입맛이 없어서 그래. 내일은 더 맛있는 거 먹자.”

“응.”

동생을 달래고, 나는 식당을 빠져나왔다. 혼자 방으로 올라가려고 했더니 성큼성큼 커다란 발걸음 소리가 내 뒤를 따라왔다.

“올리비아.”

“이안.”

바로 이안이었다.

바닷가 도시에 와서 그런지, 이안은 소매 폭이 넓은 셔츠에 가볍고 얇은 바지 차림이었다. 좀 더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느껴지는 차림도 그린 것처럼 잘 어울렸다.

‘그래. 우리는 여행을 왔지.’

그런데 나 때문에 이안도 밖으로 나가질 못하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미안해져서, 이안의 등을 떠밀었다.

“식사마저 하고 와요. 식사한 다음에는 콘라드도 구경하고 오고요. 저는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런가 졸리네요.”

내 말에 이안은 싱긋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꽉 붙들었다.

“저도 그래요. 그럼 함께 침실로 가요.”

“하지만 당신…….”

‘식사도 다 하지 못했잖아요.’

그 말이 목 안쪽에서 울렁거렸다. 나는 정말 전채요리만 들고 나왔기 때문에, 이안 또한 수프에 샐러드 조금만 먹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나를 따라 나오다니.’

내 얼굴이 죄책감에 흐려졌을 때였다. 이안은 전혀 개의치 말라는 듯이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신하고 함께 자고, 당신이 배고플 때 먹으면 됩니다. 한 끼 정도 굶어도 문제없고요.”

“말도 안 돼요. 당신이 나보다 덩치가 얼마나 큰데.”

“그렇게 따지면 당신은 두 사람 몫을 먹어야 하는걸요.”

“……윽.”

반박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말았다.

‘이안의 말이 맞아. 배 속의 아기를 생각하면 잘 먹어야지.’

하지만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쥐었다.

“아니면 먹고 싶은 건 없어요? 과일이라든지, 고기라든지?”

“어…….”

아기를 가졌으니 먹고 싶은 음식이라. 나는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그, 글쎄요.”

나는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보통 사람들은 임신하면 특정 음식들이 무척 당긴다고는 하던데.’

하지만 먹고 싶다고 해서 사다 주는 것 또한 배려 아니겠는가. 나는 그간 그런 배려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내 놀란 표정을 미심쩍은 표정이라고 생각한 듯, 이안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구해올 테니까 말해주십시오, 올리비아.”

용이라도 잡아 오겠다는 듯이 결연하게 말하는 표정이 어쩐지 재미있었다. 나는 푸흐흐 힘 빠진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정말 바다 건너고 산 넘어서 가져와야 하는 걸 말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렇다면 나중에 우리 아이에게 들려줄 추억이 되겠지요.”

이안이 내 배 위에 따끈따끈한 손바닥을 올렸다. 그리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얼마나 입맛이 까다로운 아이였는지 아니?”

“으악!”

상상만 해도 창피한 이야기였다. 나는 이안을 살짝 흘겨봤고, 이안은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조금 더 홀가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더워서 입맛이 떨어졌을 뿐이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안.”

“…….”

내 대답에, 이안의 풀렸던 얼굴은 다시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 * *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과거의 언젠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마님, 힘을 더 주셔야 합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못해. 난 못해…….”

꿈속의 나는 아기를 낳고 있었다. 20시간이나 진통에 시달렸던, 바로 그때였다.

“죽을 거 같아.”

헉헉대며 눈물 콧물 다 쏟은 얼굴로 말을 했더니, 나와 마찬가지로 진이 다 빠진 산파가 나를 호되게 나무랐다.

“정말 여기서 멈추시면 마님도 아기도 죽는 거예요! 마지막 힘까지 다 짜내셔야 해요!”

“흑.”

눈물이 주르륵 흘렀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이를 악물고 애를 썼다.

그렇게 아기를 낳고, 완전히 혼절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걸을 수가 없었다. 멍하니 누워 있는 내 귓가로 하녀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아기가 너무 컸어.”

“살아나신 것이 기적이야. 보통 사람이었으면 죽었을걸.”

내가 죽을 뻔했단다. 아기가 커서.

꿈인데도 고통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자니, 진상들이 나타나서는 내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게 식탐도 작작 부렸어야지. 아기를 가졌다고 절제 없이 마구 먹어대니 아기가 그렇게 배 속에서 자란 것 아니겠니.”

결국 내 목숨줄을 내가 줄였다는 소리였다.

‘아니야. 내가 무슨 식탐을 부렸다는 거야. 막달까지도 일했는데.’

나의 반박은 조금도 말이 되어 나오질 못했다. 일방적인 비난을 받다가 나는 번쩍 눈을 떴다.

“헉!”

꿈이었다.

‘지독해, 진짜…….’

창밖으로는 주홍색 해가 길게 늘어졌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자니,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던 이안이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달려왔다.

“올리비아, 괜찮아요? 또 아팠나요?”

“이안.”

나는 대답 대신 그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왜 이렇게 미련한 걸까.’

나도 고통의 기억을 얼른 떨치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피곤해.’

그냥 이안의 품에 안겨 있고만 싶었다.

* * *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정원에 앉아서 볕을 쬐고 있으니, 그림자가 얼굴을 가렸다. 고개를 드니 금빛 머리카락을 경쾌하게 하나로 높게 묶은 여자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대공비.”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바로 스타티스였다.

좋지 않은 컨디션 때문에 나와 이안은 주로 숙소에 머물렀지만, 다른 일행들은 콘라드의 구석구석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그중 가장 발랄하게 돌아다닌 사람이 바로 스타티스와 로메오였다. 오늘도 당연히 두 사람이 나갔을 거라 생각했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은 숙소에 계시네요?”

“로메오가 병이 나서 말이야.”

스타티스는 권하지 않았는데도 털썩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가볍게 입술을 삐죽였다.

“골골거리길래 그냥 두고 나왔네.”

“곁에서 간호하는 게 아니고요?”

“안 돼. 골골거리는 걸 보면 자꾸 찍어 눕히고 싶어져.”

“?”

반려자가 골골거리면 다정하게 돌보아 줘야지, 왜 찍어 누른단 말인가.

‘폐하께서도 하여간 이해하기 어렵다니까.’

스타티스도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화법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맥락을 놓치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스타티스가 나른하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물었다.

“요즘 그대 걱정 때문에 모두 한숨을 쉬느라 땅이 꺼지겠던데.”

그 말에는 나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티를 내고 싶진 않았는데.’

뭐라고 변명을 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자니, 스타티스가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대가 마차 안에서도 잠들지 못하고 웅크리고 앉아 있던 것과 관계가 있나?”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는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알고 계셨나요?”

“그렇게 매일매일 깨는데 모를 수가 있나.”

“…….”

콘라드까지 오는 마차 안에서도 나는 연신 불안함에 시달리며 수시로 잠에서 깨었었다.

‘그때마다 폐하께서는 잘 주무시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당연히 눈치를 채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찔러오니 당황스러웠다. 스타티스는 턱을 살짝 치켜들며 물었다.

“말해보지. 무엇이 그렇게 불안해서 잠도 이루지 못하는가?”

“그냥.”

나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이안과 비슷한 푸른 눈동자를, 지금 이 순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냥 임신해서 그런 것 같아요.”

“임신?”

내 대답에 스타티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대공이 아기를 가지기 싫대?”

이안이 아기를 가지기 싫어했다는 사실까지 추측하고 있었다니.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예리한 사람이었다.

“아니, 아니에요. 물론, 그이는 처음에 싫어했지만.”

나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우물우물 입술을 열었다. 이상할 정도로 감춰왔던 이야기가 솔직하게 흘러나왔다.

“전 아기 낳는 게 두려워요. 죽을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내 대답에, 스타티스의 미간 주름은 더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물었다.

“짐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 대공과 마이옌 공이 어련히 최고의 의료진을 찾아다니고 좋은 것으로만 준비했을 텐데 무엇이 그리 불안한가?”

“……폐하께서는 불안하지 않으세요?”

이렇게 속마음이 술술 흘러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눈앞에 앉아 있는 여자가, 이안과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이리라.

“폐하께서도 언젠가 아기를 낳으실 거잖아요.”

아기를 가지고, 열 달을 품어, 낳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죽을 수도 있고, 죽지 않더라도 죽을 만큼 아플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이죠.”

그보다 더 막연한 건, 출산은 그 뒤로 이어지는 수많은 변화들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허나 나약하기 짝이 없는 내 질문과 달리, 스타티스의 대답은 강인했다.

“불안하여 바뀌는 것이 없는데 왜 내가 불안에 떨겠는가.”

나는 찻잔을 들어 입술에 대는 행동으로 슬쩍 내 표정을 감추었다. 그러자 얼음처럼 차가운 스타티스의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대공비의 불안은 도대체 무엇에서 기인하는 거지? 그대는 이미 그 고통을 아는가?”

“그…….”

직설적인 질문에 내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을 때였다.

하녀가 달려와서는 내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소리를 질렀다.

“전하! 크, 큰일 났습니다!”

“뭐?”

큰일이라니. 휴양차 쉬러 온 곳에서 큰일이 날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식량이라도 도둑맞았나?’

그렇게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들려오는 말이 심각했다.

“대, 대공 전하께서!”

“이안이?”

이안의 호칭이 나오는 순간부터 심장이 쿵쾅쿵쾅 어지럽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하녀를 응시했다.

‘이안이 왜? 이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온갖 나쁜 일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것을 알아차린 스타티스가 엄한 목소리로 하녀를 꾸짖었다.

“어디서 심기를 어지럽히느냐?! 제대로 말하지 못할까!”

“죄, 죄송하옵니다.”

하녀는 물론이고, 불안함 속으로 정신없이 끌려가던 나까지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불호령이었다.

하녀는 그제야 제대로 상황을 전달했다.

“대공 전하께서 현재 두 손을 모두 크게 다치셨습니다!”

* * *

‘아니, 그 사람이 두 손을 모두 다칠 일이 뭐가 있어?’

나는 불안함에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하녀를 쫓아갔다. 하녀가 안내해준 곳은 뜻밖에 주방이었다.

‘주방?’

플로렌스 가문에 있을 때야 사실 주방을 자주 들락날락했다. 끼니를 잘 챙겨주지 않을 때가 다반사였으니, 나라도 스스로 챙겨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올리비아 타이론이 된 뒤로는 주방에 얼씬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아니어도 잘 관리하는 인력들이 많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안이 주방에는 왜……?’

온갖 의문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했다. 주방에 들어서니, 이안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주치의가 그의 양손에 연고를 덕지덕지 바른 참이었다.

‘세상에.’

그의 두 손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척 보기에도 아픔이 몰려와서,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올리비아.”

나를 먼저 발견한 것은 이안 쪽이었다.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하녀가 소리친 것만큼 중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웃긴 왜 웃어. 사람 심장을 이렇게 떨어지게 해놓고.’

내 눈치를 살피느라 지은 억지웃음인 것을 아는데도,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서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난리예요?”

“올리비아, 그게…….”

이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뺨을 긁적였다. 그때 그의 곁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인 두꺼운 작은 유리 냄비가 보였다.

‘저걸 맨손으로 잡아서 화상을 입은 모양인데.’

문제는 뭔데 이안이 이걸 맨손으로 잡았단 말인가. 나는 슬쩍 냄비를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노란 쌀알 같은 것이 적은 국물과 함께 섞여 있었다.

“이게 뭐예요?”

음식 같기는 한데, 썩 맛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제국 음식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국적인 비주얼이었다.

이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안은 난처한 듯 고개를 숙여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달걀죽입니다. 당신이 먹고 싶다던…….”

“네?”

이안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도대체 언제 먹고 싶다고 했어요?’

그렇게 물으려다가 생각해보니 한 번 달걀죽이 먹고 싶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몸이 펄펄 끓어 누워 있자니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가 그리워졌었지.’

어머니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달걀죽을 좋아했다는 것뿐이어서, 충동적으로 그 이야기를 했었더란다.

‘그런데 그게 왜 지금 나와?’

나는 살짝 입술을 벌리고 그와 그릇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거 설마?

“……지금 그거 당신이 만든 거예요?”

“그게.”

놀라서 묻는 내 질문에 이안은 더더욱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금 빠른 어조로 변명을 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당신이 요새 도통 기운을 못 차리지 않았습니까. 마침 콘라드로 오는 길에 장인어른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많이 있었고.”

“이안.”

“당신이 이게 먹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거든요. 그런데 그릇이 이렇게 뜨거울 줄은…….”

“이안, 나 좀 봐요.”

나는 두 손으로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은 이안의 얼굴을 감쌌다. 이안이 푸른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감출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 그의 눈동자에 가득했다.

‘당황했구나.’

평소 무언가를 별로 실패해본 적이 없는 남자인지라, 요리도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다 이렇게 화상까지 입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귀여워.’

그래서 평소와 달리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은 모습이,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가슴을 열고 튀어나올 것처럼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주치의 쪽을 응시했다.

“진료는 끝났는가?”

“네. 모든 처치는 끝났습니다.”

“그럼 모두 나가보게. 전하와 단둘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예.”

모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주방에 남은 사람은 결국 우리 둘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의기소침해하고 있는 이안을 마주했다.

“다른 사람을 시킬 수도 있었잖아요. 왜 당신이 직접 했어요?”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음에도, 이안은 그게 책망하는 것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움찔 떨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나를 위해서요?”

이안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손을 들어, 내 손등 위에 포갰다. 눈이 내리깔리며 가지런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이 기뻐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으니까요.”

“이안.”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걸까.’

이안은 몇 번이나 내게 말하지 않았던가.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다. 고통스러운 짐을 혼자 짊어지지 말아라.

‘그런데도 한없이 불안해한 건 바로 나였어.’

그런 나 자신을 깨달으니, 얼어붙었던 마음 한구석이 미지근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울먹거렸다.

“난 정말 바보예요.”

“올리비아?”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이안.”

그가 반사적으로 나를 마주 안으려다가 약을 바른 손 때문에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정말 사랑해요.”

내가 그에게 했던 고백들 중 가장 절절한 목소리였다.

* * *

그렇게 이안의 화상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2주 정도만 붕대를 감고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연고는 하루에 두 번씩 발라주셔야 합니다.”

주치의도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돌아온 다음 날의 티타임.

양손을 붕대로 둘둘 감은 이안의 입에 내가 조심조심 셔벗을 떠넣어 주고 있자니, 맞은편에 앉아 있던 스타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쯧쯧, 요리 하나 할 줄을 몰라서 그 사달을 냈소?”

자존심을 박박 긁는 한마디였다. 그냥도 손쉽게 할 줄 알았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이안인지라, 이마 한구석에 삐죽 힘줄이 솟았다.

이안은 그답지 않게 빈정거렸다.

“그러는 황후 마마께서는 아주 요리를 잘하시나 봅니다.”

그쪽으로 도발은 하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스타티스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황후는 못 하는 게 없지.”

“얼씨구?”

이안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로메오를 돌아보았다. 로메오는 쩔쩔매면서 대답했다.

“요, 요리가 취미였기 때문에.”

“…….”

무슨 귀족 영식이 요리냐,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로메오는 태생부터 알키서스 가문에서 좋은 집안의 데릴사위로 보내려고 정해두었던 몸. 요리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내조에 도움이 되는 잡지식이 많은 편이었다.

스타티스는 싱글싱글 웃으며 약 올리기에 박차를 가했다.

“지금 그대가 들고 있는 셔벗도 우리 남편이 만든 거라네. 우리 대공이 이리 무능해서야 어떻게 내조를 하는지…….”

“그만하시죠.”

결국 참지 못한 이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스타티스의 말을 잘라냈다. 두 손이 화상 상태가 아니었다면 테이블도 주먹으로 내려쳤을 기세였다.

“이제 실컷 쉬시고 노셨으니 얼른 수도로 돌아가십시오.”

“싫은데?”

“국정이 장난입니까. 어서 돌아가세요.”

“그렇게 나라를 걱정하는 대공은 짐의 허락 없이 이리 날아오지 않았는가.”

“폐하!”

어떻게 대공의 휴가와 일국의 황제의 휴가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불만을 담아, 이안이 스타티스를 응시했을 때였다.

스타티스는 턱을 괴고, 무심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가고 싶으면 대공이나 돌아가지? 짐은 여기서 2주는 더 있을 예정이니라. 안정기까지 움직이지 말라고 황의가 신신당부했거든.”

“……안정기라뇨?”

2주. 안정기. 무시할 수 없는 단어의 연속에 이안은 멍하니 반문했다. 나는 퍼뜩 놀라서 로메오를 바라보았다. 로메오는 새빨간 얼굴로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웃었다.

“아기가 생겼습니다, 대공.”

“뭐어?!”

세상에! 우리 로메오가 아기 아빠가 되다니!?

‘지난 생에는 국혼한 뒤에도 3년쯤 있다가 생겼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국혼을 치른 시기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초고속 임신 아닌가!

“너무 빨리 생긴 거 아닙니까?”

나와 마찬가지로 시기 계산을 한 이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스타티스에게 물었다. 스타티스는 여전히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기는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니,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지기 싫다고 안 생기는 것도 아니네.”

“번드르르한 말은 집어치우시죠.”

“그러는 대공은 뭐 계획적인 임신이었는가?”

“…….”

번드르르한 말 집어치우라고 말하기 무섭게 황제가 훅 찌르고 들어왔다. 진검이었다면 피를 토했을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말문이 막힌 이안을 보며 스타티스는 마지막 한마디를 더 던졌다.

“내 남편이 만들어준 셔벗이나 얼른 먹고 가시게.”

이안의 완벽한 패배였다.

* * *

“결혼하시더니 능글맞아지셔서, 아주 이야기할 때마다 화가 나 죽겠습니다.”

티타임이 파하고, 나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며 이안은 투덜거렸다. 나는 그저 웃으며 대답했다.

“사이가 더 좋아져서 그런 거겠지요.”

“절대로 아닙니다.”

이안은 진저리를 치며 대답했다. 나는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로메오도 아이를 가졌구나.’

나는 티타임 때 보았던 로메오의 얼굴을 떠올렸다. 쑥스러워하고 있지만, 분명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그게 아버지의 얼굴일 테지.’

그리고 나는 이안이 어떤 표정으로 내 임신 소식을 들었는지를 떠올렸다.

“저는 아버지가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당당한 표정을 지었는지도.

“이안.”

내가 걸음을 멈추자, 이안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진지한 눈으로 이안을 마주하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네?”

뜬금없는 말에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차분한 어조로 한 마디 한 마디 이었다.

“아기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당신의 아내로서요. 부족한 면도 많겠지만, 최선을 다할게요.”

이 남자의 곁에 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을 돌아왔던가. 그의 손을 잡은 뒤에도 얼마나 많은 방해가 이어졌던가.

‘그런데도 나는 그의 손을 잡았지. 그리고 이제.’

우리는 부모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혀 연고 없는 낯선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취미, 취향 뭐 하나같지 않은 것을 끊임없이 조율해야 한다.

그리고 부모가 되는 것은 그보다도 더 큰 인내심과 희생이 필요한 일.

‘하지만 이제 더는 두렵지 않아.’

어떤 아픔이 있더라도, 또 어떤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울 용기가, 내 마음 안에 가득 차올랐다.

모두 내 앞에 선 남자가 내게 준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나의 말에 눈꼬리를 휘며 그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리비아.”

그가 붕대로 휘감긴 손을 내게 내밀었다. 오직 나를 기쁘게 하려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은 손이었다.

“기쁨도 슬픔도 언제나 당신 곁에서 함께 짊어지겠다고 약속합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좋아요.”

우리는 다시 멈췄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안이 명랑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함께 아기 이름부터 고민해볼까요? 저도 생각해둔 이름이 있긴 합니다만.”

무심코 펜을 쥔 것처럼 손을 움직이기에, 나는 얼른 그의 팔짱을 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엄격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그 전에 당신 손이 나아야지요. 흉이라도 질까 봐 겁나요.”

그러자 그가 내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흉이 생기더라도 제 아내만 예뻐해 주면 상관없습니다.”

“어머, 이미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요.”

나는 눈을 깜빡이며 새침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길가에 비렁뱅이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당신뿐이라고요.”

내 말에, 이안이 눈도 깜짝하지 않고 나를 지긋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 안으로 불꽃이 튀는 것처럼 일렁이는 열망이 보였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제가 고백해야겠군요.”

온전히 나를 향하는 순수한 열망. 바로 그가 내게 보이는 사랑이었다.

“사랑합니다, 올리비아. 영원히 내 곁에 있어 주십시오.”

이렇게 멋진 남자가, 절절히 사랑을 고백하는데 내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기꺼이요.”

* * *

휴양을 끝내고, 우리는 수도로 돌아왔다. 귀환과 동시에 황제의 임신이 대대적으로 알려졌기에, 귀환길은 대단히 성대했다.

“황제 폐하 만세!”

“황후 폐하 만세!”

수많은 만세 소리를 뒤로 하며 수도로 입성하는 스타티스와 로메오 부부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분명 아기도 어여쁠 테지.’

다정다감한 로메오가 어련히 잘 돌보겠는가. 그리 생각하며 나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나는 로메오와 임신 정보나 육아 상식 따위를 나누며 한가로이 지냈다.

한 통의 편지가 날아온 것은 그런 날들 중 어느 오후였다.

* * *

그 시간은 나와 이안이 정해둔 태담 시간이었다.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은 나는 빙긋 웃으며 두 손으로 내 배를 감쌌다.

“이제는 제법 배가 부풀었지요?”

“글쎄요.”

내가 느끼기에는 이제 배가 많이 부푼 것 같았는데, 이안이 보기에는 전혀 아닌가 보다.

‘많이 묵직해졌는데.’

내가 입술을 삐죽이며 슬슬 간질간질한 옆구리를 문지르고 있으니, 이안이 무릎을 꿇고 내 배에 가까이 얼굴을 대었다.

“아가야, 아빠 말 들리니?”

그리고는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내 배에 귀를 가만히 대고 있는다. 나는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듣고 있을 거예요.”

지금은 귀를 대어봤자 꼬르륵 물소리만 들리지 않을까. 그러자 이안은 다시 배에 대고 속삭였다.

“듣고 있으면 발로 빵 차보렴.”

“태동이 생기려면 아직 더 있어야 해요.”

나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이안을 응시했다. 이안은 내 배에서 손을 떼더니, 자신이 들고 온 작은 책을 펴들기 시작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오늘도 책을 읽을 거예요?”

“그럼요. 어릴 때부터 교육이 중요하니까요.”

“오늘은 무슨 책인데요?”

“오늘이요? 오늘은…….”

내가 이렇게 얼굴을 찌푸리며 제목을 묻는 이유가 있었다. 이안은 늘 얼토당토않은 책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이안은 활짝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어차피 혼자 사는 인생]인데요?”

“이안!”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혼자 사는 인생을 가르칠 셈인가!

‘어제는 [아빠에게 엄마를 양보해]라는 책이었지! 어디서 그런 책을 구해와서는.’

도대체 태교를 하겠다는 건지, 홀로서기부터 가르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얄밉게 싱글싱글 웃는 이안의 이마를 검지로 꾹꾹 눌렀을 때였다. 집사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전하, 급전이 왔습니다만.”

“뭐지?”

급전. 말 그대로 급한 편지.

‘급전은 자주 주고받지 않는데.’

황궁에서 온 것인가 했더니 봉투가 황궁의 것이 아니었다.

“…….”

이안은 굳어진 얼굴로 집사가 내미는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열어보지도 않은 채 세로로 쭉 찢으려고 했다.

“뭔데, 그렇게 휙 찢어버리려고 해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나는 얼른 손을 뻗어서 이안의 손을 붙들었다. 이안은 상큼하게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쓸데없는 편지라서요.”

“잠깐만 줘봐요.”

“정말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이 남자가 이렇게 말꼬리를 흐릴 때는 방심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나는 이안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아 들었다.

-화이트폴 후작가

발신인은 다름 아닌 화이트폴 가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여기서 웬 편지가? 심지어 급전?”

“잠깐만요, 올리비아. 태교에 좋지 않으니 열어보지도 말아요.”

‘도대체 무슨 편지길래.’

이렇게까지 막으니 도리어 내용이 궁금해졌다. 나는 이안의 만류도 무시하고 봉투를 뜯었다.

편지 내용은 무척 평이했다. 태교 운운한 게 이상할 정도로 말이다.

-폴카 왕비 후보 경합전에, 릴리아나를 밀어주십시오.

“왕비 후보 경합전?”

낯선 단어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오르세에 있는 동안 정해진 일이에요. 폴카의 왕비가 되고 싶은 영애들은 제국 안에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폐하께서 공정한 경합전을 벌이기로 하셨답니다.”

“그런데 밀어달라는 건 무슨 말이죠?”

공정하게 치르는 경합전에 왜 이런 편지를 보낸단 말인가. 내가 눈을 깜빡이니, 이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대회의에서 그 후보 검증을 거치는데,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진 사람이 바로 저거든요.”

“아.”

내일이 바로 대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급전을.’

이 편지가 유출되면 걷잡을 수 없이 망신일 텐데. 어지간히 몸이 달았던 모양이다.

편지를 팔랑이던 나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후보에게 투표할지는 정한 거예요?”

그랬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전 대회의를 불참할 생각인데요?”

“왜요?”

“제 아내 얼굴 보기에도 바쁜데 무슨 후보 경합전 같은 것까지 얼굴을 비춥니까.”

이안은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안락의자에 있는데 덩치 큰 사내가 내게 매달리니, 꼭 커다란 골드레트리버가 올라탄 것만 같았다.

“이안.”

“예, 올리비아.”

나는 그의 부들부들한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사락사락 빠져나가는 촉감에, 내 마음까지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딱히 마음을 사로잡는 후보가 없었다면 이번에는 화이트폴 영애를 뽑도록 하죠.”

“네?”

내 말에 내 원피스 가슴팍에 달린 리본을 깨물고 있던 이안이 고개를 번뜩 들었다.

“하지만 당신, 릴리아나를 싫어하지 않습니까?”

“싫어요. 싫은 건 사실인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나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제 이기심일 수도 있지만……. 곧 아기도 태어나는데 괜한 원한을 사고 싶지 않아요.”

사실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인 이유였다.

지난 생에서 릴리아나는 폴카의 왕비였는데, 이번 생에서 되지 못한다면 순전히 내가 미래를 바꾼 탓 아닌가.

‘조금의 마음의 빚도 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그녀를 밀어달라는 건 아니었다.

“물론, 더 적합한 후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그렇게 할 필요 없어요.”

“올리비아.”

내 말에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풀어낸 이안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폴카의 왕비가 된다고 해도 그녀는 행복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녀가 바라보는 왕비는, 화려하고 높은 자리는 모두 허상이니까요.”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막연히 왕비가 되면 행복할 거야, 나는 세상의 주인공으로 태어났으니까, 같은 허상을 끌어안고 살기에는 세상이 녹록하지 않다.

‘후궁 몇 명만 들어와도 마음이 무너져내릴걸.’

물론, 그녀의 불행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나의 추측일 뿐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은 그녀의 몫인 거죠.”

그녀는 이미 이 길을 바라고 있지 않은가. 굳이 흐르는 강물을 막지 않겠다는 정도일까. 그녀가 왕비가 되기를 진지하게 원하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내 뜻을 전해 들은 것인지,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안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회의 참석할 거예요?”

“저는 아내의 말을 잘 들으니까요.”

이안은 다시 내 품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토라진 듯 입술을 삐죽거리는 얼굴까지도 수려하여 내 시선을 저절로 빼앗았다.

“하지만 조금 서운하긴 하네요. 아내가 나서서 다른 여자를 챙겨주라고 말하니.”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여자라뇨. 오해할 소리를.”

“애칭 부른다고 화내고 도망치고 질투할 때는 귀여웠는데…….”

“으악!!”

엄하게 말하면 그만할 줄 알았더니 한술 더 떠서 나불거린다.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바닥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아바브브?”

이안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웅!”

대답은 잘하지.

나는 이안을 흘겨보다가 천천히 두 손바닥을 떼었다. 이안이 키득키득 웃으며 멀어져 가는 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역시 그랬군요.”

“질투 아니었어요. 질투 아니라고요! 알겠어요?”

“누가 봐도 질투인 것 같았는데.”

얄밉기도 하지!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이안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러는 당신도 로메오가 올리라고 부를 때마다 물고 늘어지잖아요!”

“저는 늘 정정당당하게 밝히지 않습니까. 저는 질투하고 있습니다.”

나의 반격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안이 너무나 담담하게 자신이 질투쟁이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런 말까지 진지하게 늘어놓았다.

“기왕이면 제 이름을 허리띠로 만들어서 당신에게 달아주고 싶네요. 엄한 놈팡이 접근금지라고 커다랗게 수놓아서.”

“와, 상상만 해도 창피하네요.”

빨간색 벨벳 띠로 커다랗게 ‘이안 타이론’이라고 붙여놓는다니.

‘하여간 엉뚱한 생각만 한다니까.’

나는 코끝으로 한숨을 쉬며 안락의자에 몸을 깊숙하게 묻었다. 이안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제가 대회의 다녀오면 뭐 해주실 겁니까?”

“제가 뭘 해줘야 해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당신이 말 안 했으면 절대로 안 갔을 텐데요.”

“으음.”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틀린 말 같기도 하고.

‘하지만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까.’

언제쯤 이야기를 할까 고민했는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나는 깔끔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머리 자르죠.”

“예?”

내 말에 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계속 머리 자르자 자르자 하고 못 잘랐잖아요. 아무래도 미루면 안 되겠어요. 지금 잘라요.”

“그리고요?”

이안은 조금 얼떨떨한 것 같았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가 반색해 마지않을 거라 확신하는 대답을 내뱉었다.

“자른 머리에 어울리는 모자랑 드레스 사러 가요.”

“!!”

내 말에 이안의 눈동자가 훅 줄어들었다. 꼭 간식을 발견한 고양이 같은 눈이었다. 그는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고는 신이 나서 물었다.

“일주일쯤 쇼핑해도 됩니까?”

“어휴, 진짜.”

왜 단위가 그 모양이야. 시간도 아니고 날짜냐.

“일주일이 뭐예요. 70분으로 합시다.”

“너무 짧아요. 불합리합니다.”

“그게 뭐가 불합리해요? 너무한 건 당신인 거 아시죠?”

“당신은 예뻐서 꾸며도 꾸며도 질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제 탓이 아닙니다.”

이제는 초월 논리까지 들이댄다. 무조건 내 탓이란다.

‘내가 말로 이안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결국 물러난 쪽은 나였다. 나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마음대로 하세요.”

이안이 신이 나서는 내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 * *

바로 머리 자를 준비를 하라고 했더니 집사가 가위와 쟁반, 넓은 천을 바로 꺼내와 주었다. 나는 등받이가 짧은 의자에 앉았다. 이안이 가위와 빗을 들고 내 등 뒤로 섰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로 당신이 자르는 거예요? 세련과 촌스러움은 한 끗 차이인 거 아시죠?”

“저만 믿으세요. 저는 못 하는 게 없는 남자입니다.”

“네네, 2주나 붕대를 감고 계셨지만요.”

“그건…… 정정하죠. 요리 빼고 못 하는 게 없는 남자입니다.”

하하하, 뻔뻔한 대답에 나는 낮게 웃고 말았다.

찰캉찰캉.

은제 가위가 다물릴 때마다 나는 소리가 꼭 맑은 물소리처럼 듣기 좋았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내 목덜미와 귓가를 스쳤다. 평소라면 오싹했을 손길이건만, 오늘은 어쩐지 졸음이 밀려왔다.

‘진지하네.’

내 앞에 세워진 거울 덕분에 이안이 머리 자르는 모습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심혈을 기울여 내 머리카락 끝 한 올 한 올을 바라보는 이안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았다.

‘집중하는 얼굴도 잘생겼네.’

어느 각도이든 무결점이기 어려운데, 이안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잘생긴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자니, 저절로 이런 궁금증이 흘러나왔다.

“우리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내 질문에 이안이 거울을 통해 나와 눈을 마주 보았다. 푸른 눈이 씩 부드럽게 휘어졌다.

“당신을 닮은 은발에 붉은 눈동자였으면 좋겠습니다.”

저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도 포기하기는 어려운데. 나는 가볍게 눈을 찡그렸다.

“반반이라는 선택지는 없는 건가요?”

“제 예감인데, 왠지 반반은 없을 거 같습니다.”

감이 좋은 남자의 말인지라, 나도 모르게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다 문득 마음에 작은 두드림이 들려왔다.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이 이름을 정했어요.”

찰캉. 귓가의 머리카락을 자르던 이안이 다시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를 마주 보고 웃었다.

“길리언(Gillion)이라고 하죠.”

“무슨 의미가 있나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는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잘 어울려.’

제 아버지를 닮았다면 분명 너스레를 잘 떨겠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뜻밖에 손뼉을 치며 동의해줄 줄 알았던 이안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

굳어진 얼굴을 보니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왜 그래요? 마음에 안 들어요?”

“네. 남자 이름 같아서 아무래도 거슬립니다만.”

움찔.

예리한 남자 같으니. 나는 반사적으로 내 배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 같은걸.’

두 번이나 꾼 태몽이 지금도 생생했다.

‘이안을 꼭 닮은, 아들.’

그런 생각을 하며 있자니, 이안이 느릿하게 픽 웃었다.

“하긴.”

“?”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보니, 이안은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자아이라면 길리아나라고 부르면 되겠군요. 좋은 이름입니다.”

“길리언. 길리아나.”

나는 조심스럽게 이름을 되뇌어 모았다. 입술에 착 달라붙는 것이 둘 다 좋은 이름이었다. 나는 활짝 웃었다.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해요.”

이안은 나를 보고 마주 웃었다.

“그럼 다시 앞을 볼까요? 거의 다 잘랐답니다.”

“그래요.”

나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기다란 머리채가 툭툭 떨어질 때마다 머리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이안의 말과 달리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머리를 자르는 것은 끝이 났다.

‘이렇게 짧은 머리는 처음이네.’

목덜미를 스치는 머리카락 촉감이 낯설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웃었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잘 어울리나요?”

거울 속에 보이는 짧은 머리의 내가 무척 어색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후련한 느낌이었다.

‘이런, 그런데 가지고 있는 옷들이 잘 안 어울릴지도 모르겠네. 좀 더 발랄하게 기장을 줄여야 하나.’

어울릴 만한 코디를 떠올리며 거울을 보던 나는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그럼 이제 외출을 할까요?”

그런데 당장 반색해서 방방 뛸 줄 알았던 남자의 얼굴이 자못 심각했다.

“올리비아.”

“네?”

왜 저렇게 진지하게 나를 부른담? 내가 지레 긴장해서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이안은 무척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 전에 당신 옷에 제 이름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만.”

“무슨 소리예요!”

아까 농담으로 말했던 허리띠 발언을 잇는 말이었다.

‘심각하게 듣고 있었더니!’

긴장했던 것이 우스워져서 나는 이안을 흘겨보았다. 이안은 그런 나를 꽉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너무 예뻐서 누가 잡아가면 어떻게 하죠? 그놈을 가만두지 못할 거 같은데.”

“가상의 적까지 만들면서 피곤해지지 맙시다.”

어째, 이 사람도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점점 주접이 느는 것 같다.

내 타박에 이안이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쪽쪽 얼굴에 입을 연신 맞추었다. 강아지가 핥는 것처럼 뺨이 간지러워, 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걱정할 필요가 뭐 있나요. 나는 당신밖에 모르는데.”

“!!”

내 말에 이안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잠시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외출이 아니라 일단 침실로…….”

은근한 유혹에, 나는 허리를 더듬는 그의 손목을 꽉 틀어쥐고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좋은데, 약속한 일주일에서는 하루 깔 거예요.”

“으음.”

내 말에 이안은 진심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는 고양이처럼 눈망울을 빛내며 물었다.

“둘 다 하면 안 됩니까?”

“몸이 힘들어서 안 되어요, 욕심쟁이 씨.”

당신이야 체력이 넘칠지 몰라도, 나는 슬슬 피곤하다고.

한참을 끙끙대고 있던 이안은 결국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음을 정했습니다.”

“뭔데요?”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이안을 마주 보았다. 이안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일전에 약속한 대로 오프숄더 드레스를 여기까지 끌어내리고…….”

“으앗!”

또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그의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본편 완결, 외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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