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누구누가 잘하나
이제 모든 것이 정리되고 평화로운 일상이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무렵.
예기치 못한 폭탄이 우리 집에 떨어졌다. 그 폭탄을 들고 온 것은 다름 아닌 태황제였다.
“그래서 아기 이름은 정했니?”
아침에 일어나서 빵에 마멀레이드를 바르고 있던 나는 너무 놀라 빵을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태, 태황제 폐하?”
“오랜만이야, 제수씨! 몸은 어떤가? 태몽은 꿨나? 아기 이름은 지었어?”
“하, 하나씩 질문하세요.”
서둘러서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나는 주변을 살폈다.
‘도대체 이 사람을 누가 여기까지 통과시킨 거야? 언질은 주고 통과시켜야 할 것 아니야?’
그리고 보니 문 앞에 핼쑥한 표정의 집사가 보였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말릴 수 없었구나!’
그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워낙 막무가내여야지.’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이는 만나고 오신 건가요?”
이안이라도 와서 이 상황에서 날 구해줬으면! 이런 마음으로 한 말이었는데, 태황제는 해맑게 웃으며 되물었다.
“이안, 걔를 뭐하러 만나. 나는 제수씨를 만나러 온 건데.”
“…….”
시어머니가 없어서 시집살이 시킬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더니, 이런 복병이 있었을 줄이야.
‘심지어 황제 자리에서 내려오고 더 자유로워지셨어!’
예전에는 황성에 갇혀서 일을 해야 했는데, 이제는 자기가 할 일이 없으니 자유롭게 출몰하는 것이다.
‘이런 부작용이…….’
말하자면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휘둘리게 된 것이다.
‘이전보다 더 불편해지셨어.’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 덕분에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수도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걸.’
우리가 수도에서 돌아온 첫날. 내가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태황제는 사방팔방, 한 번이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자랑을 했다고 한다.
“우리 제수씨가 임신을 했어!”
그에 관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느끼고 있다고도 한다.
‘이제 와서 왜 갑자기 타이론 대공과 친한 척이지?’
‘정치적으로 얻을 게 있나?’
‘자신을 축출하는 데 힘을 보탠 동생과도 사이좋게 지내는 대인배로 이미지를 만들 셈인가.’
다양한 추측이 오가고 있지만 나는 안다.
‘그냥 재미있어 죽겠는 거겠지.’
태황제의 마음은 정확히 모르지만,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혈통의 콤플렉스도 사실이었겠지.
‘그런데 이제는 연연하지 않고 마음껏 사랑을 드러내도 되는 상황이 된 거지.’
덕분에 시작된 것이다. 이 몹쓸 주접!
“제수씨!”
나이 지긋한 야생곰이 나를 향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래서 아기 이름은 지었는가? 딸인 것 같아, 아들인 것 같아?”
“이안은 딸이었으면 하고, 저는 아들이었으면 하고 있어요. 아기 이름은…….”
얼떨결에 대답을 하면서도, 나는 무척 고심해서 단어를 골랐다. 무엇 하나 실수하면 이 야생곰이 난리를 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름은 생각 안 해봤는데.’
내가 입술을 닫았을 때였다. 등 뒤에서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단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기 이름은 태어나면 지을까 하고 있습니다.”
“이안.”
믿음직한 지원군의 등장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이게 뭐야.’
그리고 푸웃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머리카락에 까치가 집을 짓고 있어!’
늘 단정하기 그지없던 이안의 머리카락이 오늘은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었다. 옷차림도 잠옷에 카디건만 걸친 차림이었다.
‘태황제가 왔다는 말에 뛰어나왔구나.’
보통이라면 아내가 잘 접대하고 있으려니 하고 머리를 정돈한 뒤 찾아올 텐데. 헐레벌떡 와줬구나.
사소한 것에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이안의 손등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이안은 내 곁의 의자를 잡아당기고 앉았다. 그리고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미리 연락하고 방문하시죠. 아침 식사 시간에 이러시면 예의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늙으니 계속 잠만 줄어드는구나.”
“그렇게 늙으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안의 지적에 태황제는 갑자기 통통한 몸을 움츠리며 볼을 홀쭉하게 만들었다.
“난 늙었다. 늙었어. 홀홀홀. 몸도 마음도 병들어서 황궁에서도 쫓겨나고…….”
“윽.”
그의 혼신의 힘을 다한 가엾어 보이는 연기에 나는 참지 못하고 ‘윽’ 소리를 내버렸다.
그러나 나와 달리 태황제의 주접에 면역이 있는 이안은 냉정하게 논리적 허점을 찔렀다.
“쫓겨난 게 아니라 훌륭한 후계자에게 넘겨주시고 내려오신 거죠.”
“……너는 왜 이리 밉살맞아졌니.”
태황제는 이번에는 눈을 뱁새처럼 떴다. 이안은 팔짱을 끼고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폐하가 미워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
“정말? 날 미워하지 않는 것이냐?”
“당연합니다. 저도 폐하께 거짓을 고한 적은 없습니다.”
“이안.”
이안의 대답에 태황제는 눈을 글썽거렸다. 판다처럼 커다란 사내가 눈을 부자연스럽게 빛내는 모습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역시 이사 오길 잘했다.”
“……네?”
이사라니? 무슨 이사?
‘별궁에서 지내고 계셨잖아.’
스타티스와 이안의 합작으로 완전히 정치에서 손을 뗀 태황제는 황궁 안에서도 살지 못하고, 수도 외곽에 있는 거대한 별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별궁이라고 하지만, 황궁 여인들의 태교를 위해 사용되던 궁이라 전혀 지내는 데 부족함이 없으실 텐데.’
그리 생각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그때였다. 태황제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을 던졌다.
“오늘부터 너희 옆 저택이 바로 내 집이란다.”
“뭐라고요?!”
우리 옆집이라니?
이웃 주민이 되셨다고요?!
* * *
나와 이안은 이 말의 진위 여부를 알기 위해 바로 황궁에 입궁을 했다. 나의 알현 신청을 바로 받아준 로메오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다.
“말리려고 했지만 말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메오의 말에 의하면 얼마 전에 갑자기 황궁에 찾아온 태황제는 꺼이꺼이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것도 못 하게 하고 저것도 못 하게 하고! 그냥 하다못해 내 동생 옆에서라도 살게 해다오. 시골구석에 박아두고 무슨 짓이니! 거기가 얼마나 할 것이 없는 줄 아니?”
그 말을 전해 들은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시골구석이라니? 그곳도 엄연히 수도인데?”
“사실 그다지 심심하지도 않으셔, 올리. 태황후 폐하와 후궁들이 들고 일어났거든.”
“태황후 폐하와 후궁들이?”
태황제에게는 권력의 무게추를 맞춘단 이유로 수많은 후궁들이 있었다. 그네들은 각각 집안의 이득이나,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태황제의 비위를 살살 맞춰 왔다.
‘지난 생에 로메오는 덕분에 모셔야 할 어른이 몇 명인지 모르겠다고 울상을 지었었지.’
하지만 그 상황에도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태황후께서 황궁으로 들어오셨어. 더 이상 남편의 비위를 맞추며 살고 싶지 않으시다고 말이야.”
“오.”
스타티스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모든 모멸적인 상황을 견디었던 태황후는 이제 스타티스의 위치가 공고해진 상황에서 더 이상 견딜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다른 후궁들도 각각 이혼이나 별거를 청하는 상황이야.”
“저런…….”
당연하다면 당연한 상황이었다. 갖가지 이득으로 사람을 끌어모았으니, 이득이 사라지면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로메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 생각에는 그래서 가족의 의미를 찾으시려는 발버둥 아닐까 싶어. 워낙 타이론 대공을 사랑하시기도 하고 말이야.”
“로메오.”
“하여간 나도 말릴 만큼 말려봤는데 듣지를 않으셨어. 이해해줘, 올리.”
“…….”
기가 막히는 상황이었으나, 로메오의 입장도 이해는 갔다.
‘후궁들이 그 지경이라니 로메오가 모든 서류와 비용 지급을 처리해야 할 거고.’
후궁들이 빈손으로 이혼이나 별거를 청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고스란히 내명부의 주인인 황후의 몫이었다.
‘그 막무가내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긴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꼭 우리 옆집이어야만 했는가. 서운함과 이해가 어지럽게 섞여서, 내가 입술을 꾹 다물었을 때였다.
이안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 그런 상황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뭐, 뭡니까?”
그냥도 이안을 두려워하는 로메오가 덜덜 떨면서 되물었다. 이안은 세상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얼음 같은 단어를 내뱉었다.
“무능.”
“……!”
로메오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직설적인 말에 깜짝 놀란 내가 그의 이름을 버럭 불렀다.
“이안!!”
“흥.”
이 남자가 반항기인가! 왜 이러는 건데?
‘혼내도 듣는 척도 안 하고!’
로메오가 착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크게 문제를 삼아도 이상하지 않은 무례였다. 나는 이안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물었다.
“왜 이렇게 로메오에게만 심술궂은 건데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러자 이안은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다 마음에 안 듭니다. 당신 애칭을 부르는 것도 그렇고, 스타티스랑 잘 지내는 것도 그렇고.”
“거참.”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좋으면 좋은 거지, 왜 그게 싫은 이유가 된단 말인가.
‘아무거나 가져다 붙이기는.’
나는 어린애처럼 심술을 부리는 잘생긴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로메오에게 허리를 굽혔다.
“남편의 무례함을 대신 사과드립니다, 황후마마.”
“올리!”
“올리비아!”
갑작스레 예를 다 하는 내 행동에, 로메오는 놀라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이안의 얼굴은 희게 질렸다.
나를 바라보던 이안의 푸른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그는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습니다. 앞으로 조심하도록 하죠. 죄송합니다, 황후마마.”
“괘, 괜찮습니다.”
바로 고개를 숙이는 이안을, 로메오가 벌벌 떨면서 일으켰다.
나는 싱긋 웃었다. 이안이 슬쩍 나를 흘겨보며 툴툴거렸다.
“하여간 당신은 나를 너무 잘 다룹니다.”
“칭찬이지요?”
“당신이 날 그렇게 잘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짜릿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무릎 꿇는 것이 달갑지는 않으니 다시 하지 말아주십시오.”
짜릿하다는 점에 면박을 줘야 하는 건지,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다니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잠시 망설이던 나는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약속할게요.”
그렇게 한바탕 실랑이가 지나고, 로메오는 다시 태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곧 태어날 조카의 성장 과정을 조금도 놓치지 않으실 거라고 떼를 쓰셨어. 아마 아기가 태어나고 나면 시들해지지 않으실까?”
“아이고.”
내 경험상 심하면 심해졌지, 절대로 약해지진 않을 것이었다.
‘이런 복병이.’
시부모님이 안 계셔서 시월드가 없을 줄 알았더니.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음 날도 태황제께서는 짜자잔 나타나셨다.
“제수씨!”
“풉!”
절대로 갑자기 나타나지 말라고 했더니만!
‘이번에는 왜 꽃밭 한가운데에서 나타나는 건데!?’
마음을 가라앉힐 겸 우아하게 정원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던 나는 대차게 차를 뿜고 말았다.
‘곰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어!’
알록달록한 꽃 사이에서 고동색 옷을 입은 거구의 사내가 불쑥 일어나니 얼마나 놀랐는지!
‘따라다니는 사람도 없는 거야!? 도대체 왜!?’
아무리 은퇴했다고 해도, 태황제 정도 되면 수행원들이 우르르르 따라다녀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거칠게 몇 번이나 기침을 한 뒤 손수건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내가 놀라게 했나아~. 미안하네. 마음이 급해져서 말이야.”
태황제는 해맑게 웃으며 권하지도 않은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어떻게 그쪽에서 나오시는 거예요?”
“아아, 제수씨는 모르나? 저쪽 담장이 우리 집 담장으로 통해. 굳이 대문을 통과하지 않고도 이쪽으로 넘어올 수 있지.”
“네?! 그런 곳이 있다고요?”
그렇다면 무척 위험했던 것 아닌가! 타이론 대공저에 아무나 드나들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경악은 곧 이어지는 태황제의 말에 푸시시 식고 말았다.
“있었던 건 아니고, 내가 어제 만들었어.”
“…….”
무엇이냐, 이 적극적인 가택 침입자는.
‘그러니까 지금 아무도 모르게 여기 출몰한 것이렷다?’
저절로 마음이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허나, 나의 차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자신이 들고 온 두루마리를 풀어냈다.
“내가 이름을 지어보았는데.”
“헉.”
그런데 그 두루마리가…… 엄청 길었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가 내미는 두루마리를 보며 물었다.
“이, 이게 도대체 몇 개지요?”
“한 200개쯤 되려나? 황실 계보에서 괜찮다 싶은 이름을 다 적어와 봤어.”
“…….”
태황제의 해맑은 대답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200개면 그냥 다 보이는 대로 적어온 것 아닌가?’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200개보다도 더 많아 보였다.
‘태황제가 이렇게 한가하다니, 제국은 평온한 것임이 틀림없어!’
나는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200개의 목록이 있어도, 내 마음은 같았다.
“저어, 폐하. 송구스럽습니다만 저희는 아기가 태어난 뒤, 아기를 보고 이름을 지을 생각이에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내 말에 태황제는 둥글둥글한 얼굴을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어째서? 미리 이름을 지어놓고 소중히 하는 게 낫지 않아? 세상엔 태명이라는 것도 있잖아.”
“그게…….”
그가 한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멀쩡한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생각도 못 했다.’
태명이라니.
‘지난 생엔 진상들이 지었지.’
지었다는 말이 옳을까? 정확히 말하면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들이 멋대로 내 배 속의 아이를 불렀다는 것이 옳으리라.
‘뭐라고 불렀는지도 기억 안 나.’
아기는 내 배 속에 있는데, 진상들이 자기 애들인 것처럼 구는 게 꼴 보기 싫어서 신경을 최대한 안 썼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왜 그랬던 걸까. 아무리 진상들이 괴롭힌다고 해도 내 아이였는데.’
나는 모성이 없는 사람인 걸까. 내가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태황제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그래서 제수씨, 아가는 태명이 뭐야?”
“네? 그, 그게.”
태명이라니. 아직 짓지 않았던지라, 나는 입술만 어물어물거렸다. 그때였다.
“형님!”
“이안!”
어떻게 알았는지, 이안이 달려 나왔다. 이번에는 그의 흰 셔츠에 거하게 검은 잉크가 쏟아져 있었다.
‘또 서둘러 나왔구나!’
나는 거침없이 달려온 내 남편에게 깊은 애정을 느꼈다. 어디서부터 달려온 건지, 테이블에 도착한 뒤 숨을 헐떡인 이안이 버럭 태황제에게 말했다.
“이렇게 방문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만.”
“허허, 그랬지. 앞으로 조심하마.”
“…….”
태황제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렇게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것도 대단하다 싶을 정도였다.
이안이 뭐라고 더 잔소리를 늘어놓으려고 했을 때였다. 태황제가 돌연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에게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너는 왜 이렇게 무심하니? 아기에게 태담은 해준 거야?”
이안은 무심하다는 말에 움찔 어깨를 떨고, 또 그다음 이어지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태담이요?”
“태담이 뭔지도 모르다니!”
몰라서 되물은 것인데, 태황제는 무슨 천재지변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이건 내가 부족한 탓이구나. 이렇게 부족한 녀석을 남편으로 보내서 죄송합니다, 제수씨!”
“아, 아니에요. 모르는 게 당연하죠.”
오히려 내가 당황해서 손바닥을 내저을 정도였다. 태황제의 유난에 이안은 무슨 대역죄라도 짓다가 걸린 표정이었다.
‘이안! 모를 수도 있어요! 모르는 게 당연해요!’
나도 생각 못 한 데다가 우리에게 딱히 그런 것들을 세세히 알려주는 어른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만 관대한 태황제는 나의 말에도 버럭댔다.
“총각 때야,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해도 아기 아빠가 되어서도 모르는 게 말이 되나! 내가 저리 데려가서 단단히 교육하도록 하지.”
그리고는 이안의 팔을 잡아서 어디론가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나는 묘한 표정으로 두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건 좋은 건가?’
좋다면 좋을 수도 있었다. 일단 나는 이안에게 아버지의 마음가짐을 가르치기 적절하지 않으니 말이다.
‘차라리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서 폐하께서 알려주시는 게 자연스러울지도!’
바로 그때, 이안을 끌고 가다 말고 태황제가 큰소리로 내게 말했다.
“제가 교육하고 있을 때, 먼저 이름을 고르고 있어요, 제수씨!”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얼굴은 짜게 식고 말았다.
‘아니다. 절대로 안 좋아.’
나는 우울한 눈으로 두루마리를 내려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까지도 밉살맞은 시누이가 옆집으로 이사 온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심각한 문제가 될 줄은…….
* * *
진짜 문제가 시작된 것은 바로 다음 날 아침이었다. 막 잠에서 깨어나 얼굴만 씻었는데 이안이 내 방에 찾아왔다.
“좋은 꿈 꾸었나요, 올리비아?”
“그럼요.”
나는 웃으며 침대로 다가오는 이안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런데 묘하게 이안의 얼굴이 초췌했다.
“왜 그래요?”
“뭐가요?”
“피곤해 보여요.”
“아아…….”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폐하께 시달려서요.”
“네? 그렇게 많이 야단을 치셨어요?”
아니, 그 동글동글 만두가 사람을 달달 볶을 줄도 안단 말인가.
‘남의 귀한 신랑을 왜 볶는데!’
내가 대번에 입술을 뾰롱뾰롱 내밀고 있으니, 이안이 내 곁에 앉아서는 징징거렸다.
“나 대신 형님 좀 혼내주세요, 올리비아.”
“제가요?”
“무섭게 굴 때는 엄청 무섭잖아요. 형님한테도 뭐라고 해주세요. 나한테 야단치듯이 따끔하게.”
“하하.”
어린애 같은 말에 나는 웃고 말았다.
‘딱히 이안에게 화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화도 화낼 일이 있어야 내는 거지. 이안은 눈치껏 내가 폭발하기 전에 물러나는 타입이라 화를 낼 일이 드물었다.
‘나는 별로 안 무서웠는데, 이안에게는 무서웠던 걸까!’
내가 진지하게 내가 정말 사나운 사람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내 어깨에 얼굴을 비비고 있던 이안이 돌연 고개를 번쩍 들고 말했다.
“아니다. 그런 거 하지 말아요. 당신의 야단은 나만 맞아야 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야단맞는 게 중요해요? 뭘 그런 걸 집착하고 그래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그런데 이안이 뜻밖에 정색하고 대답했다.
“당신이 몰라서 그래요. 얼마나 짜릿하다고.”
“…….”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째 이런 말을 듣고 있으니 다시금 의혹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설마 진짜 마조히스트인가.’
지나치게 혼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 한번 다음에는 침실에서 혼내봐?’
이안이 듣는다면 기겁할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 있을 때였다. 이안이 천천히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젖혔다. 그리고 내 손을 다정히 잡아끌었다.
“잠깐 이렇게 앉아볼래요? 침대 귀퉁이에 걸터앉아서.”
“네네.”
나는 이안이 시키는 대로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리고 슬리퍼에 발을 끼웠다. 이안이 그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안? 뭐 하는 거예요?”
“형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던데요.”
“그러니까 뭘요?”
나는 이안이 천천히 내 배에 얼굴을 가까이 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 미미하게 부푼 배는, 나만 그 변화를 알 정도였다.
두 손을 배 위에 두고 얼굴을 가까이 댄 이안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가야.”
“!!”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목소리가 저절로 떨렸다.
“이, 이게 태담이에요?”
“네. 이렇게 하는 거래요.”
“아아…….”
이안이 아기를 부르는 순간부터,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나쁘지 않은 긴장감이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배에 대고 아기에게 말을 해주는, 태담이라는 게 있다고는 들었어.’
하지만 제임스는 물론이고, 플로렌스 가문의 어느 남자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 내 배 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는 거구나.’
비로소 실감이 났다.
“음…….”
아기를 부른 뒤, 이안은 한참 동안 끙끙거리기만 하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이안이 입술을 삐죽이며 내 배에 이마를 기댔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토라진 듯 찡그린 얼굴이 몹시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기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으음.”
나는 다정한 눈으로 그가 말하길 기다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이안이 손을 세우고는 소곤소곤 속삭였다.
“네가 태어나도 네 엄마는 내 거란다.”
아니, 이 사람이!
“그게 뭐예요!”
내 감동 돌려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기다렸더니만!
하지만 나의 불평에 이안은 뻔뻔하게 대꾸했다.
“그게 제가 제일 하고 싶은 말입니다.”
“아이한테 질투하는 건 더더더 추해요. 그러지 말아요.”
“질투가 아닙니다. 이건 정당한 지분 주장…….”
“못 말려, 진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상대로 지분 주장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나는 결국 웃고 말았다.
이안의 따끈따끈한 손바닥이 내 무릎부터 위로 슬금슬금 올라왔다.
“올리비아, 우리도 대화를…….”
바로 그때였다. 거친 발소리가 어지럽게 복도가 울렸다.
나는 허리에 힘을 주고 긴장했다. 이안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전하!”
“전하!”
희한하게도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제각각 다른 사람을 불렀다.
하녀들도 당혹스러웠는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서로 급하다는 듯이 자신의 용건을 소리쳤다.
“태황제 폐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마이옌 공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녀들도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한쪽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아니, 태황제 폐하께서 오신 것이 맞는데.”
그러자 다른 쪽도 서둘러서 말을 했다.
“아니에요. 마이옌 공께서 찾아오셨어요.”
“……아무래도 두 분이 동시에 찾아오신 것 같군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이안이 턱을 문질렀다. 그리고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손님 접대는 제가 할 테니까 단장하고 내려오도록 해요. 아무래도 아침 식사를 같이 하실 생각으로 오신 것 같네요.”
“네. 부탁해요.”
이안은 빠른 걸음으로 방 밖으로 나갔다.
나도 서둘러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신한 뒤로 화장을 안 하거나, 하더라도 최대한 옅게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꽤 필요했다.
“어서 세숫물을 가져오렴. 가벼운 원피스도 꺼내주렴.”
어째 예감이 썩 좋지 않았다.
* * *
역시나라고 해야 할까. 나쁜 예감은 잘 맞는다고 해야 할까.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나 있어?’
응접실에 있는 세 남자는 모두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아니, 우리 아버지마저!?’
세상 화내는 방법을 모를 것 같은 우리 아버지까지 화가 나 있다니.
‘역시 친정과 시댁은 가까워질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인사를 하는 대신 슬쩍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정도 온도가 차가운가 염탐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태황제였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오신 건가?”
“딸아이와 오랜만에 오붓하게 식사를 하려고 왔는데…….”
아버지는 아버지답지 않게 묘하게 느릿한 어조로 말을 흐리다가, 태황제와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폐하께서는 어쩐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그러자 태황제는 발랄하게 대답했다.
“나는 이웃집에 살고 있소.”
“이웃집이요?”
목소리만 들어도 으스대는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가 어이없어하는 투로 반문하자, 태황제는 더더욱 신이 난 어조로 대답했다.
“조카를 마음 놓고 보고 싶어서 아예 이웃집을 샀지.”
‘얼씨구.’
왜 남편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이 조카를 두고 주접을 떨고 있단 말인가.
‘당신 손자한테나 그렇게 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으니 아버지가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대답했다.
“임신하고 편안하게 있어야 할 텐데.”
“그게 무슨 뜻이오?!”
아버지의 한숨 같은 비꼼에 태황제가 발끈했다. 더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기 전에 나는 가벼운 어조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제수씨!”
“내 딸아.”
내가 들어오기 무섭게 두 사람이 서로 반가운 어조로 나를 불렀다. 아버지의 호칭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내 딸이라니.’
우리 아버지까지 저리 각을 세우실 줄은 몰랐는데. 잠깐 사이에 어마어마한 신경전이 오간 모양이다.
두 사람이 나를 돌아보자,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있던 이안도 나를 돌아보았다.
“올리비아.”
이안이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네 글자에서도 그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이안이 저렇게 여유가 없어 보이는 건 또 처음이네.’
이래저래 신기함을 느끼며 나는 어색함을 내색하지 않고 싱긋 웃었다.
“모두 오늘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 싶어서 오셨나 보군요. 우리 아기도 기뻐할 거예요.”
기쁜지 안 기쁜지 내가 어찌 알겠나. 하지만 어차피 저들도 알 수 없으므로 막 던졌다.
아기 이야기로 분위기 환기를 시키려고 한 것인데, 뜻밖에 두 사람의 자랑이 이어졌다.
“내 조카이니 나를 더 반길 테지.”
“손자 사랑은 외가 아니겠습니까.”
‘오…….’
태황제가 유치한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설마 아버지까지 같이 저렇게 나오실 줄이야?
‘쉽지 않은 상대들이군.’
하지만 내쫓기도 쉽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리고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리를 옮기도록 해요. 다 준비가 되었답니다.”
만찬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사이, 이안이 내 곁에 다가와서는 속삭였다.
“……아침 먹다가 체하는 거 아닙니까? 얼른 가라고 할까요?”
아까 두 어른 사이에서 말도 못 거들고 쭈굴거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거늘. 그래도 날 걱정해서 내쫓아보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는 이안의 손을 꽉 잡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 누나가 시어머니 셋도 모셨단다.
신경전은 아침 식사를 하는 내내 이어졌다. 아침 메뉴는 두 어른을 의식한 탓인지, 평소보다 거창했는데, 거창해지기 위해 재료가 많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태황제가 포크로 반숙 달걀프라이를 찌르며 말했다.
“우리 조카는 분명 달걀을 싫어할 거요. 이안이 어릴 때 달걀을 안 먹었거든.”
전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던지라, 나는 조금 놀라서 이안에게 소곤거렸다.
“진짜예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일단 태황제 본인이 근거인 이야기인 것으로.
그가 말하기 무섭게, 우리 아버지가 대답했다.
“우리 손자는 생선을 싫어하더군요. 깔끔한 성품인가 봅니다.”
말투는 기품이 넘쳤지만 결국 내용은 ‘넌 이거 모르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에는 이안이 내게 소곤거렸다.
“진짜입니까?”
“일단 입덧할 때 생선이 역하긴 했어요.”
“이런.”
이안은 무척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입덧 시기를 이안 모르게 지나고 말았네.’
사실은 오르세에 있었던 때가 입덧 시기였지만, 마이옌 공 저택 시중인들이 내 식단을 잘 챙겨준 덕분에 이안뿐 아니라 나 또한 입덧을 잊고 지냈다.
‘아니, 그런데 입덧까지 일일이 챙겨서 뭐하려고?’
뭔가 이런 배려를 받아본 적이 없기에 마냥 생소하고 어색한 기분이었다.
‘사실 이 자리 자체가 어색해.’
나는 여전히 설전을 벌이고 있는 두 어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슴이 간질간질한 것 같기도 하고, 성가시기도 하고 묘한 기분이었다.
그때 이안이 내게 소곤거렸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 사소한 신경전을 두고 봐야 하는 겁니까?”
“어른들은 원래 다 그러세요.”
별것 아닌 걸로 자존심 상하고, 또 세우는 게 어른이더라.
하지만 이대로 너무 무의미하게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아, 나는 적절히 잘라내기로 마음먹었다.
‘언제까지 아침에 이 난리를 겪을 수도 없고!’
나는 웃으면서 말을 시작했다.
“두 분께서 이렇게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고 계시니 정말 기뻐요.”
내 말에 두 사람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제가 요즘 산전 우울증인지, 마음이 자꾸만 가라앉아요.”
“저런! 그러면 안 되지, 제수씨!”
“올리비아.”
테황제는 흥분했고, 우리 아버지는 덩달아 우울해졌다. 이안까지 굳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랬습니까. 전혀 몰랐는데…….”
‘당신까지 속으면 어떻게 해!’
하지만 여기서 이안에게 주절주절 이야기할 수가 없어서 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우리 아기에게 줄 예쁜 선물을 보면 마음이 풀릴 것 같은데…….”
말꼬리를 흐리는 나의 말에, 당장 태황제와 아버지가 앞다투어 이야기했다.
“제수씨! 어떤 게 좋을까? 어떤 게 없어?”
“무엇이든 말해봐요.”
이렇게 낚시가 쉬워서야.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도 겉으로는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국와 오르세에서 내로라하시는 분들이 저와 아기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경쟁을 하신다면 제가 얼마나 기쁠까요? 그렇게 해주실 수 있으시죠?”
“아…… 물론 그래야지, 제수씨.”
“딸을 위해 그렇게 해야지요.”
“네. 그럼, 일주일 뒤에 우리 아기가 제일 좋아할 만한 선물을 가져와 주세요. 절대로 그 일주일 동안에는 두 분 다 저희 집에 오시면 안 돼요. 저한테 힌트를 얻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나는 두 어른을 집에서 내보냈다.
* * *
‘어휴, 아버지한테는 조금 죄송하지만.’
그래도 오르세에서 제국까지 내 출산을 지켜보겠다고 오셨는데 내쫓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만 오시게 하면 또 태황제 폐하께서 삐지실 테니까.’
비밀로 하기도 어려웠다. 저렇게 수시로 옆집에서 출몰하니!
‘잘했어. 잘했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내 앞에 놓인 차를 들었다. 임산부에게 홍차가 좋지 않다고 해서, 마시는 차는 히비스커스였다.
잠시 조용히 앉아 있으니, 이안과 애니가 다가왔다.
“언니!”
“애니, 학교 끝났니?”
“응!”
밝게 웃는 애니의 얼굴이 아름다웠다. 애니의 뺨에 입을 맞추고 있으니, 이안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일단 개구멍은 막았습니다. 새로 만드실 수도 있지만.”
“……개구멍이요?”
“네. 막상 가서 보니 담장 아래를 파내서 만든 구멍이더군요.”
“그 체구로 통과하기가 쉽지 않으실 텐데?”
개구멍은 통상 작은 구멍을 말하는 것 아니던가.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지? 곰구멍?’
어째 이상한데.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니, 이안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 구멍이 좀…… 많이 컸습니다.”
“많이 커요?”
“네. 파느라 고생했겠더군요.”
본인이 팠을 리는 없으니 어디 시종을 또 시키셨으리라. 나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저기 민폐시네요.”
정문을 통과하기가 귀찮아서 개구멍을 파다니 이게 무슨 스케일의 이야기인가.
‘좀 더 따끔하게 혼을 낼 걸 그랬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으니, 애니가 활짝 웃으며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언니! 선물 대결한다는 게 사실이야?”
“으응? 대결이라고 하긴 좀 뭐하지만.”
나는 이안이 애니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몰라, 이안을 흘긋 쳐다보았다.
대결이라.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했다.
‘그냥 집에 못 들어오게 하려고 만들어낸 행사이긴 한데.’
내 속도 모르고, 애니는 눈을 별처럼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나도 참가해도 돼? 나도 멋진 선물을 하고 싶어.”
선물 이야기를 하는 동생이 마냥 귀엽기만 해서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애니, 너는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선물이란다.”
“그래도! 나도 무언가 해주고 싶단 말이야.”
‘용돈도 얼마 되지 않는데, 무슨 선물을 하겠다고.’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선물은 가격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지난 생에 나는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대하다가 로메오에게도 애니에게도 상처를 입혔다.
‘이번 생까지 그렇게 딱딱하게 굴고 싶지 않아.’
나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니가 기대하고 있을게.”
“정말?! 내가 1등 해야지! 기대하고 있어!”
“그래.”
애니는 나름대로 염두에 둔 물건이 있는지, 가벼운 걸음으로 본관으로 향했다.
손을 흔들며 애니를 배웅하던 나는 내 곁에 앉아서 아무 말 없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
이안은 턱을 괴고 진지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설마 당신까지 끼어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내 말에 이안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 아내에 관한 것은 뭐든 제가 1등이어야 하니까요.”
“그만두세요!”
이 사람, 아까부터 왜 이런담!
나는 진심으로 그를 말렸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다다음날, 나는 오랜만에 황궁으로 출타했다. 방문하는 곳은 다름 아닌 이 나라 최고의 귀부인들이 모이는 다과회.
‘제국에서의 행사는 정말 오랜만인데.’
임신을 핑계로 불참할까도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 혼자 남자인걸! 제발 참석해줘, 올리.
바로 로메오의 눈물의 편지 때문이었다.
‘얘는 지난 생에도 다과회 때문에 힘들어하더니.’
보통 황제가 남자일 때는 다과회는 황후의 소관이 된다.
하지만 황제가 여자일 때는?
‘그냥 과감하게 행사를 때려치우면 될 텐데.’
유례없는 상황이니, 전대까지 의례적으로 하던 행사들은 과감하게 접으면 된다.
하지만 그것도 못 한다는 평가를 받고 싶지 않은 로메오는 무리하게 여자 황후의 일까지 해내려고 했다.
‘그 결과가 나한테 징징거림이라니 유감이지만.’
어차피 다과회에 나란히 참석한다고 해도 우리는 친한 척도 할 수 없을 텐데.
하지만 로메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지라, 나는 군말 없이 행사에 참가했다.
물론, 오랜만이라 긴장도 되었다.
“어째 편하지가 않네.”
집에서야 몸 어디 한 곳도 조이지 않는 넓은 원피스를 입으며 지냈지만, 귀부인들이 모두 모이는 행사에까지 그리 편안한 옷을 입긴 뭐 했다.
‘가슴이 좀 커졌나.’
그래서 가슴 아래쪽으로 매듭을 지은 엠파이어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었는데, 그 또한 조금 불편했다.
‘그래도 신발은 예뻐. 좋아.’
높은 구두 대신, 리본으로 발목을 장식하는 발레리나 슈즈를 신었는데, 발랄하면서도 편안해서 마음에 들었다.
‘이안이 센스가 좋다니까.’
물론, 이 코디는 모두 이안의 작품이었다.
“당신한테는 이렇게 귀여운 게 어울려요.”
오늘 아침, 이안은 내가 미리 골라둔 옷과 신발을 과감하게 치우고 새 옷을 골라주며 저렇게 말했다. 아침의 그를 떠올린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귀여운 게 어울리다니. 그런 말 처음 들어.’
이안과 지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내가 모르고 있었던 나를 발견하게 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나쁘지 않았다.
“내가 주문을 걸어줄게요. 기운이 나는 마법의 주문.”
그리 말하며 그는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럼 오늘 다과회도 재미있게 즐기고 와요. 절대 무리하지 말고.”
사근사근한 웃음이 지금도 선연히 떠올랐다. 나는 괜스레 내 입술을 문질렀다.
‘자기도 바쁘면서. 하여간 어떻게 저 남자가 무뚝뚝한 남자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
조금 걷는 사이, 이미 내 몸은 거의 다과회장에 도착해 있었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시녀들을 본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럼 힘을 내볼까!’
나는 다과회장 안으로 사뿐사뿐 들어섰다.
* * *
긴장한 것이 무색하도록, 다과회 분위기는 평온했다.
“임신 축하드려요, 타이론 대공비 전하.”
“부군께서 몹시 좋아하시겠어요.”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태교 여행을 보내주신 분이신걸요. 어쩜 그리 다정하신지.”
‘아하.’
많은 사람들이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인사를 하나하나 들으며 나는 지금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지 깨달았다.
‘만두 폐하께서 이렇게 소문을 내셨구나!’
내가 처음 제국에서 사라졌을 때, 아무 해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삼각관계에 지쳐서 도망쳤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려 태황제가 흥에 겨워 이렇게 말하고 다닌 것이다.
“우리 제수씨가 아기를 가졌어! 이안을 꼭 닮은 미남미녀지!”
‘아니, 왜 이안을 꼭 닮았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거지. 심지어 미남미녀? 쌍둥이냐?’
물론 나도 이안을 닮을 것 같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나야 태몽에서 이안을 꼭 닮은 아들을 봐서 그런 것이고!
‘내가 민감한 건가? 내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야?’
직전에 태황제와 우리 아버지의 신경전 때문인지, 저 말이 썩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게 나쁘지는 않았다. 나쁜 소문들은 싹 사라지고 다정다감한 타이론 대공의 소문만 남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들인 것 같아요, 딸인 것 같아요?”
“글쎄요. 저도 너무 궁금하네요.”
대충 그런 대화를 주고받을 때였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시종의 말에 우리는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들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황제 폐하?’
‘내가 제대로 들은 것 맞아?’
서로가 서로의 얼떨떨한 얼굴을 보며 청각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어서 다과회장으로 두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황제 스타티스와 로메오였다.
‘아닛! 황제 폐하께서도 참석한다는 말은 없었잖아!’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두 사람이 착석하기를 기다렸다.
‘시녀들이 어쩐지 분주하게 움직인다 했더니.’
갑자기 상석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해서 분주하게 움직였던 모양이다.
“모두 자리에 앉으시오.”
황제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부인들은 자리에 앉았다.
나는 슬쩍 로메오의 눈치를 살폈다. 로메오는 묘하게 초췌해 보였다.
‘황궁살이가 정말 많이 힘든가? 어째 볼 때마다 야위는 것 같은데.’
다음에 입궁할 때는 보양식이라도 챙겨서 들어와야겠다.
속으로 다짐하고 있으니, 스타티스 황제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물었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하고 있었는가?”
“타이론 대공가의 좋은 소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폐하.”
냉큼 대답한 것은 가장 가까이 앉은 후작부인이었다. 스타티스는 턱을 괴었다.
“타이론 대공가의 좋은 소식이라. 그에 관해서라면 짐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
턱을 괴며 슬쩍 웃는 얼굴이 소름 끼치게 이안과 닮아 있었다. 나는 서둘러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 아이와 스타티스 황제는 사촌지간이니, 신경을 써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서둘러서 잘라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안을 놀리기 위해서라면 다소 엉뚱한 명령도 내리실 분이셔!’
이안과 스타티스의 관계는 무척 묘해서, 서로 챙기는 것 같으면서도 약 올릴 기회만 찾고 있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재미있는 내기를 하고 있다면서?”
스타티스는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나는 움찔했고, 순진한 로메오가 그 미끼를 덥석 물었다.
“내기요?”
“아, 황후는 모르는가? 지금 대공가에서는 곧 태어날 아기님이 가장 좋아할 선물을 찾아내는 내기를 하고 있다네.”
“아, 그래서…….”
로메오는 묘한 소리를 내며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라니? 또 나 몰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가장 유력하게 짚이는 후보는 바로 태황제 폐하였다.
‘설마 이거 관련해서 주접을 떨고 다닌 것은 아니겠지?’
아니긴 뭐가 아니겠는가. 유감스럽게도 정답이었다. 태황제에게 한껏 도발을 당한 스타티스는 위험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짐은 무슨 선물을 해야 짐의 격에 맞을까? 내 사촌에게 영지라도 미리 하사할까?”
‘참가해주지 않는 것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영지를 하사하겠다는 건가?
‘제발 그만둬!’
이미 물려받을 것이 충분히 많은 아이였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 이상 관심받고 싶지 않아!’
* * *
다과회를 마치고 나는 심신이 완전히 지쳐서 집에 돌아왔다.
마차 문을 여니, 이안이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손을 올리며 나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네 집안은 다 배포가 미쳤어요.”
“뜬금없이 무슨 말입니까?”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설명 대신 그에게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나를 내려준 뒤, 종이를 펴본 이안의 미간 주름이 더더욱 깊어졌다.
“지도? 그런데 왜 이렇게 군데군데 찢어져 있습니까?”
“폐하께서 다트판에 걸어두신 지도예요.”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찢어진 부분이 우리 아기에게 줄 영지래요.”
“네?”
그게 다과회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제국 지도를 다트판에 올려놓고 맞추는 영지를 우리 아이에게 주겠다나, 뭐라나.
‘나보고 단검을 던져보라고 하셨지.’
나는 얼떨떨해하면서도 단검을 던졌고, 처음에는 난생처음 던지는 단검인지라 빗맞았다.
‘그래서 오기가 솟아났고.’
정신 차려보니 다섯 번 기회 중 세 군데나 단검으로 맞췄다는 사실.
“난처하다면 그냥 일부러 빗맞추면 될 텐데. 역시 대공비는 화끈한 성격이 매력이야. 황궁에 자주 놀러 오도록.”
스타티스는 정원이 떠내려가라 깔깔깔 웃고는 지도만 남긴 채 자신의 집무실로 떠났다.
그 뒤에 로메오가 필사적으로 폐하는 농담도 통 크게 하신다며 애써 이 상황을 포장했다.
‘이 금발 남매는 왜 날 가지고 그러는 거야.’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이안을 흘겨보았다. 이미 내 안에 이안과 스타티스는 남매처럼 묶여 있었다. 얼굴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하고.
‘좋은 듯 슬쩍 꼬인 점이라든가.’
내가 터덜터덜 저택 안으로 들어서니, 이안이 지도를 아무렇게나 구겨 던지며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왜 그러신답니까?”
“태황제 폐하께서 어제 황궁을 한바탕 휘젓고 다니셨대요.”
“이런.”
내 대답에 이안은 손가락을 딱 울렸다.
“우리 집에 못 오게 하니 이제 황궁에 가서 주접을 떨고 계신 모양이군요.”
주접이라.
‘황제일 땐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이제는 이 주접을 모르는 사람이 이 나라에 없을 지경이었다.
“그냥 우리 집에 봉인해야 할까요.”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여기저기 사고를 치고 다니게 풀어둘 바에는 이 한 몸 희생해서 봉인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이, 내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황제 폐하께도 효도할 기회를 드려야죠.”
그냥 황궁에 가도록 내버려 두라는 말이었다.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효도라. 효도라기보다 한 번쯤 눌러주고 싶으신 것 같던데.”
스타티스의 행동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효도라고 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나의 반론도 이안은 가볍게 흘려버렸다.
“부모의 객관적 위치를 각인시켜주는 것도 효도라면 효도겠죠. 저는 부모님이 안 계셔서 모르겠네요.”
“아이고. 말은 잘하세요.”
교묘하게 자신의 약점을 내밀어서 반박할 수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으니, 이안이 팔을 뻗어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벌써 일주일에 이틀이 이렇게 흘러버렸네요. 닷새 남은 평화로운 시간을 함께 보내도록 합시다.”
“어떻게요?”
“일단은 낮잠이 어때요?”
“당신은 졸리지 않잖아요.”
나는 흘긋 이안의 옷을 바라보았다. 내가 나갈 때와 다른 것을 보니 그도 외출에서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럼 처리해야 할 일이 또 생겼을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는 내 귓가에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당신의 베개 담당이죠.”
거절하기 어려운 달콤한 목소리였다.
‘언니는 바쁜가?’
애니는 살금살금 올리비아의 집무실을 기웃거렸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안에서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이게 매출표입니다.”
‘일하고 있구나.’
애니는 슬쩍 틈새에 귀를 기울였다. 케닌 보좌관이 오르세에 남으면서 최근 올리비아에게는 새로운 일들이 많이 생겼다.
‘저 사람이 새로 채용한 보좌관인가 보다.’
애니는 문틈으로 슬쩍슬쩍 보이는 안경 낀 여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올리비아는 사무적인 어조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르세 코너를 꾸미는 건 어떻게 진행되고 있죠?”
“수요 조사 중입니다. 일단 맛보기 행사에서는 대단히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1층에 커다란 행사매장을 확보해서 먼저 기획전을 해보죠. 그래도 반응이 좋으면 정식매장을 내는 거로.”
“좋은 생각이십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어려워서인지, 순간 애니에게는 올리비아가 무척 먼 사람처럼 느껴졌다.
‘언니…….’
아니, 언제는 가까웠던 적이 있었나.
‘언니는 옛날부터 똑 부러졌었지. 자기 일을 잘했고.’
여자가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경기를 일으키는 아버지가 올리비아에게만 아카데미를 허락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올리비아가 알아서 아카데미 진학까지 잘했으니까.
‘언니는 나랑 달라. 나는 늘 어설프니까.’
아버지가 아무 말 못 하도록 똑 부러지게 훈수도 두지 못하고, 아버지가 모르는 것을 무심하게 넘기지도 못했다. 이러니 올리비아처럼 상황을 빠져나갈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내 언니였는데…….’
애니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올리비아가 자랑스러운 언니였던 예전과, 부모님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또 마음가짐이 달랐다.
잠시 웅크리고 생각에 빠져 있던 애니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짝 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도 언니는 내 언니잖아! 언니도 그렇게 말했고. 아무리 남들이 그렇게 손가락질한다고 해서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를 독려해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약해졌다. 애니는 여전히 올리비아에게 얹혀살았고, 많은 것들을 그녀의 호의에 기대어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번 선물 이야기가, 애니에게는 무척 달가웠다.
‘언니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
받기만 하는 염치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애니는 주먹을 꽉 쥐었다.
* * *
‘케닌의 빈자리가 느껴지네.’
백화점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제국을 장시간 비웠던지라, 인수인계가 필요한데, 보좌관 또한 새로운 사람인지라 아직 업무 이야기를 하는 데 공백이 있었다.
‘물론, 금방 익숙해지겠지. 새 보좌관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고.’
최근 날아온 편지에 의하면, 케닌은 물 만난 고기 같았다.
-오르세 좋아요! 오르세 만세! 세라비-!
‘이러다 영영 제국으로 안 들어온다고 할지도.’
잠시 쉬고 있으니 하녀가 한 뭉치의 초대장을 쟁반에 담아왔다.
하녀를 따라 들어온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웬 편지입니까?”
나도 방금 봐서 잘 모르겠지만. 나는 봉투를 뒤집어보았다. 딱 두 장의 발신인을 확인하는 순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지난번 다과회에 참석한 부인들이 보내신 거예요.”
“재미있는 시간이었나 보군요.”
재미? 재미를 느낄 새가 있었나.
‘황제 폐하께서 등장하신 다음부터는 너무 긴장해서 기억이 잘 안 나.’
뭔가 계속 내게로 스포트라이트가 와서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차라리 이안과 내 문제였다면 뻔뻔했을 텐데, 하필 태황제 폐하가 언급되어서!’
나는 가장 위에 있던 봉투를 페이퍼 나이프로 갈랐다. 그사이 쟁반에 올려진 편지를 하나하나 살펴보던 이안이 코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화이트폴은 없군요.”
“후작부인은 지난번 다과회에도 나오지 않으셨어요.”
“흐음.”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이 영 불안했다. 나는 페이퍼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찾아요?”
화이트폴과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할 것이 없는데. 이안은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당신에게 앓는 소리를 하면 혼쭐을 내주려고 찾았습니다.”
“?”
대답을 들으니 더더욱 알쏭달쏭했다.
‘앓는 소리 할 것이 뭐가 있담.’
화이트폴 후작부인은 원래 사교계 활동이 잦은 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굳이 사교활동을 하지 않아도 잘 굴러가는 명문가라는 뜻이었다.
‘그 아가씨는 성격상 잘살 것 같고.’
나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붉은 머리 릴리아나를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폴카로 시집가지 않았을까?’
한 번쯤 체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편지를 펼쳤다. 정갈한 글씨체로 적힌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타이론 대공비 전하께
저희 가문에서도 축하의 선물을 전해드리고 싶어서요. 어느 날 방문하면 좋을지 답신해주시기 바랍니다.
“오, 이런.”
설마설마하며 나는 다음 편지도 열어보았다. 발신인은 다르지만 내용은 거의 흡사했다.
나는 편지를 내려놓으며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선물을 하겠다고 하시니, 너도나도 성의를 보이려는 것 같아요.”
“나름대로 경쟁이군요.”
이안은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지만 내 마음은 그의 말처럼 편안하지 않았다.
‘왜 경쟁을 하고 그런담.’
체면 때문에 선물을 받아도 답례를 해야 하고, 이만저만 성가신 것이 아니다.
‘물론, 이번 기회에 친분을 가져도 나쁘지 않은 이들이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가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고 있을 때였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렇게 된 것, 차라리 규모를 키워서 연회를 여는 건 어떻습니까?”
“네?”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규모를 키워? 연회?’
연회를 연다는 생각은 조금도 못했는데.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내게, 이안은 조곤조곤 말했다.
“막상 아기가 태어나고 나면 정신이 없어서 열기 어려울 겁니다. 전야제라는 느낌으로 몸이 가벼울 때 축하연을 열도록 하죠.”
“거기서 선물 개봉식도 하고요?”
“기왕 경쟁이 붙은 것, 규모를 키우는 게 낫지요.”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지난 생에도 축하연 같은 것이 열리긴 했던 것 같다.
‘나는 침대 위에 있었지만.’
아파 죽겠는데 밖에서는 웃고 떠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아 서러워서 울었었지.
‘그게 축하연이었구나.’
신기할 정도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그랬구나, 하는 마음뿐.
“올리비아?”
대답 없이 생각에 잠긴 내가 이상했는지, 이안이 나를 불렀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네. 한번 생각해볼게요.”
* * *
그 시간, 애니는 거리에 나와 있었다. 넓은 광장에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분수가에 앉아서 애니는 어린아이처럼 발을 붕붕 흔들었다.
‘그런데 언니는 무얼 좋아할까?’
애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떠오르는 것은 많았다.
‘언니는 책을 좋아하고, 바삭한 토스트도 좋아하고, 구슬 꿰어서 만든 팔찌도 좋아했었지.’
애니는 올리비아가 받고 기뻐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하지만 그 직후 조금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이제는 언니에게 다 있을 텐데.’
바삭하게 구운 식빵에 꿀만 발라먹어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자매는 그것보다 훨씬 깨끗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지냈다.
‘오히려 내가 나쁜 과거를 떠올리게 할지도 몰라.’
올리비아와 함께 시간을 보낸 추억이지만, 애니는 그 시간들조차 돌이키기 싫은 과거가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애니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등 뒤에서 슬슬 변성기가 오기 시작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무슨 생각 하세요, 아가씨?”
“에릭!”
그녀의 등 뒤에는 견습기사로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 에릭이 서 있었다.
훈련을 마치자마자 나온 것인지, 햇빛에 빨갛게 물든 얼굴이 뜨거워 보였다. 애니는 손수건을 내밀었다.
“땀이 엄청 많이 났네. 바로 달려온 거야?”
“모, 목욕은 했는데. 냄새나나요?”
“전혀. 더워 보여서 물어본 거야.”
그렇게 이야기했더니 에릭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순진한 애니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했다.
“언니한테 뭘 주면 좋아할까 고민하고 있었어.”
“어제는 팔찌를 만들어줄 거라고 했잖아요.”
두 사람의 약속은 어제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애니가 구슬을 사러 번화가로 나오겠다고 하니까 에릭이 기꺼이 경호를 하겠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에릭의 대답에 애니의 얼굴이 더더욱 흐려졌다.
“아니, 처음엔 그런 마음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언니가 기뻐할 것 같지가 않아서…….”
최근 올리비아의 목은 이안이 직접 걸어준 화려한 루비 목걸이가 장식하고 있었다.
‘분명히 구슬 같은 건 조악하게만 보일 거야.’
그렇다고 형부처럼 화려한 금붙이를 사줄 만한 형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애니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아기 옷이나 용품들도 다 있을 테고.”
애니의 투덜거림을 듣던 에릭이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가씨의 특기를 살리시는 건 어때요?”
“내 특기?”
“아가씨는 약초에 능하잖아요. 수면에 도움이 되는 약초들로 속을 채운 베개나 무릎담요 같은 걸 드리면 좋을 것 같은데요.”
“아.”
에릭이 그 생각을 떠올린 건, 애니가 평소에 진통제나 연고를 만들어서 에릭에게 건네주곤 했기 때문이다.
에릭의 말을 들은 애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에릭 넌 천재야!”
“헤헤.”
임신을 했으니 분명 올리비아도 숙면이 어려울 터였다.
“그럼 천이랑 약초를 사러 가야겠다. 가자.”
애니는 에릭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다시 에릭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또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행운을 부른다는 네 잎 클로버를 수놓아줘야지.’
애니는 속으로 결심했다.
‘세상 모든 행복이 다 언니에게 가도록.’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약속했던 일주일이 되었다.
준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축하연은 그리 규모 있게 준비되지는 않았다. 나는 과감하게 가족 단위 파티를 목표로 하여 음식도 장식도 아기자기하게 꾸몄다.
‘이제 손님만 맞으면 되는군!’
어차피 다과회 손님들만 맞기 때문에 몇 명 되지 않았다. 내가 목록을 체크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제수씨!”
“윽!!”
들려서는 안 될 말에 나는 뛸 듯이 놀라고 말았다.
“폐, 폐하?!”
아니, 이 사람!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내 계획에 따르면 태황제의 등장은 축하연의 중반부 이후였다. 그런데 제대로 개시도 하기 전에 나타난 것이다.
펄쩍 놀란 나를 보며 태황제는 허허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반기지 않아도 되네. 우리는 가족 아닌가.”
‘반기는 거로 보이냐.’
하여간 철저한 자기 중심주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야박하게 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은근히 되물었다.
“보통 귀빈은 가장 늦게 오시는데…….”
평생 남에게 눈치를 주었지, 눈치를 받아본 적은 없는 태황제는 배를 내밀며 대답했다.
“아무리 귀빈이라고 해도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데 늦는 게 말이 되는가.”
“그, 그건 그렇지만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담장만 폴짝 넘어오면 되니.’
그리고 저번에도 개구멍을 팠던 분인데, 이번이라고 과연 정문으로 왔을까 싶었다.
내가 한숨을 쉬고 있으니, 태황제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사돈댁께서는 안 오셨나?”
“여기 왔습니다.”
“아버지!”
묻기 무섭게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 번째로 놀라고 말았다.
‘우리 아버지는 또 왜 이리 일찍 오셨어!’
이분들, 이렇게까지 신경전을 벌이는 거였나! 오는 시간까지 중요한 거였어?
아버지는 잘 어울리는 남색 정장 차림이었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는 모습은 신경전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반갑습니다.”
하지만 곧장 태황제에게 인사를 건네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내 생각을 수정했다.
‘무척 신경 쓰고 계시군.’
평범한 사돈도 어려운데, 한쪽은 오랜 시간 끝에 찾은 친아버지이고, 다른 한쪽은 부모 없는 나이가 많은 형이니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 꺼내기도 전에 태황제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만두 주제에 노려보는 모습이 무척 알량스러웠다.
“무척 부지런하군. 귀빈은 천천히 나타나야 하는 거 모르오?”
‘당신도 일찍 오셨잖아요.’
하고 싶은 말은 있었으나 참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늙으니 잠이 없어져서 그런다더군요.”
‘우리 아버지가 더 젊으실 텐데.’
어른들의 대화인지, 어린이들의 대화인지 모를 수준이었다. 사이에 낀 나는 그냥 허허 웃었다.
‘이럴 때는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상책이지.’
애들 싸움이든 어른 싸움이든 중간에 끼어들면 같이 끌려들어갈 뿐이다.
그 뒤로는 신경전을 관전할 시간도 없었다. 손님들이 연달아 찾아왔기 때문이다.
“축하드려요, 전하.”
“두 분이 모두 미남미녀시니, 아기의 미모도 기대가 됩니다.”
이런저런 덕담을 들으며 나는 손님을 맞이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충분히 무르익고, 고대하던 선물을 뜯어야 할 때가 되었을 때였다.
이안이 커다란 상자를 안고 와서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제 것부터 열어보시죠.”
‘저걸 준비하느라 늦게 나타나셨군!’
기어코 선물을 준비한 모양이다. 이안이 나서자, 태황제도 그를 밀치며 얼굴을 디밀었다.
“내 것부터! 당연히 내 것부터 열어야지.”
“제발 비키시죠, 폐하.”
“어허! 말투는 공손한데 몸짓은 전혀 공손하지 못하구나.”
“……알면 비켜주십시오.”
신경전이 그쪽으로까지 번지고 있을 때였다. 나는 문득 연회장을 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애니는요?”
내 동생 애니가 보이질 않았다.
* * *
‘애니가 오지 않을 아이가 아닌데.’
뭔가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간질였다. 나는 이안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애니를 데려올 테니까, 잠시만 손님 상대 좀 해주세요.”
“아랫사람들을 시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안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내 직감이, 이건 내가 직접 나서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주 잠시면 되어요. 다녀올게요.”
“무리하지 말아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보내주었다.
나는 손이 비는 하녀들과 함께 정원으로 나갔다.
“애니!!”
하지만 저택의 정원이 워낙 넓은지라,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도 애니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정말 저택 밖으로 나간 걸까?’
그런 것치고는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애니의 방에는 아마도 나를 주려고 준비한 듯한 베개와 무릎담요가 예쁘게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분명 오늘 참석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그런데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걸까.
‘혹시 눈치가 보이는 걸까.’
어쩔 수 없이 생각이 부정적으로 흘러갔다. 주변에서 애니에게 손가락질할 사람들도 무척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막아도, 모든 입을 다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나를 두고도 남편 잘 만나서 팔자 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널려있는데, 나와 친자매도 아닌 애니를 향해서는 더 심한 말이 쏟아질 것이 뻔했다.
‘내가 조금 더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했는데.’
그렇게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너른 풀밭 너머로 리본이 팔락거렸다.
애니였다.
“애니!!”
“어, 언니?”
나는 서둘러서 애니를 향해 걸어갔다. 흙투성이가 된 애니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어딜 갔던 거야?”
“언니…….”
하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가서 살핀 동생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밖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차갑게 얼어붙은 데다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내가 움찔 굳자, 애니가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울먹거렸다.
“언니한테 주고 싶었는데, 없어서……. 그래서 계속 찾고 있었어.”
“도대체 뭐가!”
이렇게 될 때까지 찾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걱정하는 마음으로 소리를 지르니, 애니가 더더욱 의기소침해져서 웅얼거렸다.
“네 잎 클로버가…….”
“뭐라고?”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네 잎 클로버라니.
‘토끼풀 말이야?’
그걸 왜 웅크리고 찾았단 말인가.
“언니한테는 다 있잖아. 비싼 것도, 좋은 것도! 그래서 나는 네 잎 클로버를 따주고 싶었는데…….”
말문이 막혀 굳어 있자, 애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세상에, 애니.”
나는 그제야 애니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그놈의 선물 때문에!’
애니는 최선을 다해서 선물을 마련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하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진짜 네 잎 클로버를 모으려고…….’
동생이 그런 맘고생을 했다고 생각하니 나도 덩달아 울컥했다. 나는 애니의 손을 꼭 붙들었다.
“언니는 네가 행복하기만 해도 충분해. 정말이야. 네가 뭘 주었어도 언니는 기뻤을 거야.”
“하지만 언니.”
나의 말에 애니는 옷자락을 꽉 쥐고 바닥을 내려보았다.
“언니도 알잖아. 계속 귀찮고 손이 많이 가면 미움받는다는 걸…….”
“애니!”
“부모님도 내게 무조건적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언니가 그렇게 할 수 있어?”
“…….”
애니에게는 플로렌스 자작의 학대가 고스란히 상흔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몹쓸 인간 같으니.’
아이가 사랑을 받는데, 아이라는 사실 외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단 말인가.
쓸모 있어야 하고, 예쁘고 얌전해야 사랑을 준다는 건 순전히 어른들의 이기심 아닌가.
‘나는 그렇지 않아.’
하지만 그 말들을 애니에게 하기에는 막막하기만 했다. 나는 그저 애니의 손을 꽉 붙들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안 돼. 아직 못 찾았단 말이야!”
일이 벌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애니가 나를 세게 밀친 것도 아니었다. 내가 삐딱하게 서 있던 것도 아니었다.
“앗!”
그런데 애니가 손을 뿌리치는 그 순간, 내 몸이 기우뚱 균형을 잃었다.
‘다리에 힘이, 갑자기……?’
갑자기 어지러우면서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이 몰려왔다. 나는 느릿하게 풀밭에 쓰러졌다. 그리고 희게 질린 얼굴로 이마만 짚었다.
“어, 언니!”
그런 나의 어깨를 애니가 꽉 붙들었다.
“괘, 괜찮아? 어, 어, 어떻게 하지?”
내가 애니를 붙잡고 싶었다. 나보다 네가 더 힘들어 보인다, 괜찮니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열면 헛구역질을 할 것 같았다. 애니가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로 소리쳤다.
“누가 좀 도와줘요!!”
* * *
지나던 하녀의 도움을 받아서 나는 내 침실에 눕혀졌다. 내 옆에서 펑펑 울고 있는 애니의 손을 붙들고 있으니, 의사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갑자기 다리 힘이 풀려서 넘어졌네.”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하고 나니, 의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립성저혈압 같습니다. 임신 여성에게 나타나는 증상들 중 하나이니, 혼자 산책하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주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까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애니를 바라보았다.
“들었지, 애니?”
나는 다른 손을 뻗어서 애니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네 탓이 아니니까 울지 않아도 돼.”
“언니…….”
내 위로에 애니의 눈물은 잦아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졌다. 나는 눈짓으로 하녀들과 의사를 내보냈다.
애니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울부짖었다.
“엄청 놀랐어! 이러다가, 이러다가 조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나는 애니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것만큼은 확답할 수 있었다.
“네가 내 행운이니까.”
내 인생은 늘 후회투성이었지만, 애니를 생각하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질 수 있었다. 내가 망설여서 애니가 지난 생처럼 불행해지는 게 가장 두렵기 때문이다.
‘아, 이런 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게 부모의 마음일까.’
조건 없이 해주고 싶고, 살뜰하게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
지난 생에는 몰랐던, 아니 알 기회도 없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 * *
애니는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다. 그 아이를 방에 눕혀주고, 의사의 말대로 얌전히 침대에 누워 있으니 이안이 찾아왔다.
“이안.”
“올리비아.”
가까이 다가온 이안이 침대가에 무릎을 꿇고 나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의사에게 들었을 거 아니에요. 가벼운 빈혈이었어요.”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손님들은요?”
“잘 정리해서 보냈습니다.”
그리 대답하면서 이안이 내 얼굴을 문질렀다. 그런데 어쩐지 느낌이 평소와 달랐다. 나는 그의 손을 붙들어 보았다.
손바닥에 피딱지가 엉겨 붙어 있었다. 나는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손은 왜 그래요?”
내 질문에 이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의 품에 파고들었다.
“여기 달려오고 싶은 걸 참다가 조금.”
“조금이 아닌데요.”
다시 살펴보려고 했지만, 그가 두 손으로 내 허리를 꽉 끌어안는 바람에 볼 수가 없었다.
잠시 굳어져 있던 나는 조심스럽게 이안의 머리카락을 토닥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문틈으로 빼꼼 태황제와 아버지가 얼굴을 내밀었다.
“제수씨.”
“괜찮은가요?”
“폐하. 아버지.”
나는 두 사람을 반기며 웃었다. 이안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가 매달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아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전 괜찮아요. 기립성저혈압이라고, 일어나면 어지러움을 느끼는 증상이래요.”
“저런. 그럼 이 저택에 모든 계단을 없애야겠군.”
내가 대답하기 무섭게 태황제가 주접을 떨었다. 놀라운 건 그럴 때면 늘 면박을 주던 아버지까지 고개를 끄덕였다는 점이다.
“맞습니다. 계단을 모두 없애고 정원도 평평하게 만들죠.”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두 사람의 말에 나는 까르르 웃었다. 그러자 여태 무릎을 꿇고 내 허리쯤에 매달려 있던 이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농담이라고 생각합니까?”
“아…….”
그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의 눈에는 슬픔이 소용돌이치듯 돌고 있었다.
솔직히 조금 당혹스러웠다.
이안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그래도 손님맞이가 허술하면 당신이 자책할 것 같아서 마무리까지는 잘했지만요.”
이안은 다시 내 허리춤에 고개를 묻었다.
“중간에 몇 번이나 다 때려치우고 뛰어오고 싶었습니다.”
이안이 말을 끊기 무섭게 태황제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 제수씨. 이 녀석이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아나?”
“나도 많이 걱정했습니다.”
태황제도, 아버지도 나를 가라앉은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미안해요, 모두.”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조금 기쁘기도 해.’
나를 짓궂게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했던 태황제까지, 진지하게 나를 걱정한다는 사실이 참 묘했다.
나는 솔직하게 내 마음을 표현했다.
“사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날 걱정하는 것이 처음이라서……. 제가 좀 얼떨떨했어요.”
“올리비아.”
내 말에 아버지의 표정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내가 평생 누구의 걱정도 받지 못하고 자라온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싱긋 웃어 보였다.
“내일 다시 방문해주세요. 선물은 내일 열어보도록 해요. 우리 가족들끼리요.”
내 말에 당장 기쁘게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던 태황제는 뜻밖에 고개를 흔들었다.
“무리할 필요 없네. 이제 옆집에 사는걸. 다음에 보면 되지.”
“맞아요. 일단 쉬도록 해요.”
아버지가 바로 맞장구를 쳤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배시시 웃고 말았다.
“감사해요.”
나는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그냥 임신이라는 이벤트에 저 사람이 무척 신이 난 거라고 말이다.
‘사실 나와 이안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누가 자기 재미만으로 남에게 시간을 할애하겠는가.
‘내가 지나치게 속 좁게 생각했나 봐.’
태황제와 아버지가 내 방을 나서고 나서야 이안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축 늘어진 눈꼬리가 비 맞은 강아지 같았다.
“오늘은 같이 자도 됩니까?”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절로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래요. 씻고, 잠옷 입고, 다시 만나요.”
“음…….”
내 말에 이안은 일어나지 않고 내 손길만 얌전히 받았다.
‘이럴 땐 꼭 강아지 같아.’
내가 물끄러미 잘생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그가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나도 여기서 씻으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이안의 머리를 살살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나 어디 안 가요. 아무 일 없고요.”
내 말에 이안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눈만 떼면 무슨 일이 생기니 이제 못 믿겠습니다.”
“하하.”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침대맡에 줄을 당겼다. 기다리고 있던 하녀가 얼른 얼굴을 내밀었다.
“부르셨어요, 마님?”
“전하의 잠옷을 가져오너라. 목욕 준비도.”
“예.”
내 명을 들은 이안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오늘은 왜 이렇게 제 투정을 다 받아줍니까?”
꼭 언제는 안 받아준 것처럼 말한다. 나는 피식 웃었다.
“저는 원래 당신에게 약한데요?”
“제게만 허락해주는 다정함이란 말씀이십니까.”
이안은 키득키득 웃으며 다시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좋네요, 아주.”
“못 말려.”
오늘 걱정시킨지라, 나는 얌전히 이안의 어리광을 받아주었다.
그 뒤로, 가볍게 몸을 닦고, 잠옷을 입은 우리는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이안의 손바닥에 약을 발라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안은 이번에도 아낌없이 어리광을 부렸다.
“너무 따가워요! 나를 사랑하는 만큼 살살 해주세요.”
나는 빙긋 웃으며 소독약을 콸콸콸 부었다. 이번에는 진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앗, 따가!”
* * *
누워서도 귀찮게 굴 줄 알았는데, 이안은 금방 잠들어버렸다.
나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이안의 팔을 만지작거리다가 내 배에 두 손바닥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아기라.’
아직 배가 나오지 않아서일까. 어떤 감각도 느껴지질 않았다.
‘아직 실감은 안 나는데.’
깊은 고통의 기억 때문인지, 임신을 했을 때도 임신 자체가 기쁘다기보다 이안에게 뭐라고 말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이안이 좋다고 말해준 뒤로는 더 깊이 생각을 해보려고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렇게 고통스러울까.’
결국, 내가 인내해야만 하는 상황들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기를 떠올리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모두 많이 슬퍼했겠지?’
저 주접쟁이들이 슬퍼하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조심해야겠다.’
그리 생각하고 나는 조금 놀랐다. 지난 생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느라 바빴으니까.’
임신했다고 선물을 챙겨주는 사람도 없었고,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들을 골라주는 사람도 없었다.
내 몸에 대해서도, 아기에 대해서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내가…….’
막 입술을 깨물었을 때였다. 이안이 슬쩍 몸을 뒤척이는 듯하더니 내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 자고 무슨 생각 합니까?”
“당신은 안 잤어요?”
“당신보다 먼저 잠들면 안 되죠.”
참 별걸 다 생각한다. 나는 조금 키득거리고 웃다가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몸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
내 대답을 들은 이안은 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며 속삭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절절하게 묻어나와서, 나는 조금 샐쭉해졌다.
‘아니, 내가 그렇게 속을 썩였나?’
조금 썩인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찔리는 것도 많아서,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이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나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서는 이마를 내 어깨에 문질렀다.
“뭘 해도 좋으니 내 곁에서만 해요.”
“당신이 지켜줄 테니까?”
“어떻게 해서든.”
나른한 한숨을 내쉬는 건 그쪽이었는데, 정작 마음이 편해진 건 내 쪽이었다.
“이안, 나 조금 알 것 같아요.”
“무엇을 말입니까?”
목덜미를 간질이는 숨결에 어깨를 움츠리던 나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사랑이 뭔지, 다정함이 뭔지…….”
내가 애니에게 불안감을 준 것은 내가 일방적으로 주려고만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그렇게 쌓아가면 안 돼.’
살면서 한 번도 누군가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나는 그냥 이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어. 누군가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게 어떤 느낌인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이런 내 마음이 전해진 걸까. 이안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굵은 손가락이 내 허리를 지나, 내 손등 위에 포개어졌다. 따뜻한 체온이 아랫배에 전해졌다.
“솔직히 아직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제 아기가 태어난다는 게, 제가 아버지가 된다는 게.”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안은 조금 부끄러운지, 살짝 눈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당신과 단둘이 지내는 미래 외에 그려본 적이 없어서.”
“……저도 그래요.”
그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또 안심이 되기도 했다. 나는 이안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없어요.”
내가 인생에서 보아온 어머니란, 파넬의 시어머니 세 명과 일찍 돌아가신 플로렌스 자작부인뿐이었다.
‘모두 이상적이라고 하기 어려웠지.’
제임스 하나에만 목을 매고 있느라고 며느리조차도 경쟁자 취급하던 세 사람. 힘없이 남편의 학대를 방관만 하던 이모.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아기를 낳아야 했다.
‘이번에도 난산일지도 몰라.’
차라리 죽는 게 나은 고통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그 공포를 털어놓았다.
“당장 아기를 잘 낳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걸요. 두려워요.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
아기를 낳고 기르며 가장 힘들었던 것이 그것이었다.
아기를 만든 사람은 둘인데, 그 과정과 고통, 희생은 온전히 내 몫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외롭고 괴로웠어.’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목이 꽉 막혔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았지만, 내가 지금 울면 이안이 또 걱정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그때였다. 잠시 말없이 듣고 있던 이안이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이런 경우, 답은 하나뿐이지 않겠습니까.”
답이 무엇일까.
임신과 출산은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예쁜 자식을 얻기 위한 고통이니 참아야 한다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왜 너만 죽는소리냐고 탓하기도 했었지.’
진상들이 들려주던, 조금도 공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내가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이안은 느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같이 노력해봅시다.”
“……!”
뜻밖의 이야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안을 마주 보았다. 이안은 조금 멋쩍은 듯 웃었다.
“저도 아버지가 되는 건 처음이라, 잘할 수 있을지 모르고, 방법도 잘 모르지만 말이에요.”
그의 서투르기 짝이 없던 태담, 괜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며 선물을 고르던 모습들이 하나둘 내 머릿속에 떠올렸다.
‘맞아. 그에게도 어려운 일이지.’
부모가 된다는 건 서투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태어나는 아이는 세상 누구와도 같지 않고, 그 누구도 그 아이에게 적절한 교육이 무엇인지 확답해주지 못한다.
그런 내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듯, 이안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그 말에 나는 결국 꼴사납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의외로 신경전은 아주 쉽게 끝나고 말았다.
다음 날, 나는 응접실에서 스타티스와 분위기가 무척 흡사한 마르고 꼿꼿한 부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제 남편이 폐가 많았습니다, 대공비.”
“화, 황후 마마…….”
바로 만두 태황제의 아내이자, 스타티스 황제의 어머니 태황후였다.
당황한 나머지 황후 마마라고 부르는 나를, 그녀가 표정 변화 없이 사무적인 어조로 정정해주었다.
“태황후 마마라고 불러야지요.”
“네, 태황후 마마.”
“좋아요.”
꼭 고모나 이모에게 혼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내가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을 때였다.
태황후가 허리를 숙였다.
“어쨌든 제 남편이 폐가 많았습니다. 제가 잘 수거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쓰레기도 아니고 수거라니.
‘물론, 민폐이긴 했지만.’
연락도 없이 들이닥치는 건 물론, 멋대로 내기의 스케일을 키우지 않나, 사돈댁과 신경전을 벌이지 않나.
‘생각해보니 엄청난 민폐였군.’
나를 걱정하는 모습에 내 마음이 풀리긴 했지만, 하나하나 따지니 민폐인 건 분명했다.
내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서 있으니, 저쪽에서 이안과 태황제가 걸어왔다.
평소처럼 ‘제수씨이~’ 하고 주접을 떨려던 그는 태황후를 보는 순간 얼음처럼 얼어붙고 말았다.
“여, 여보.”
늘 갓 쪄낸 만두처럼 보송보송하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은 신선한 변화였다.
태황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황제를 불렀다.
“얼른 이리 와요, 당신. 내가 아주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와, 진짜 황제 폐하께서 앞에 서 있는 것 같아.’
스타티스와 외모로는 닮은 구석이 없었지만, 말투나 풍기는 분위기가 아주 비슷했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태황제가 파리처럼 두 손을 비비며 태황후의 곁으로 다가갔다.
“몸은 괜찮소? 건강이 아주 좋지 않았잖소.”
삐쩍 마른 여인 곁에서 토실토실하고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굽신거리는 것이 어울리는 듯 안 어울렸다.
하지만 빈말로라도 괜찮냐고 묻지 않는 편이 나았으리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종일관 냉정하던 태황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으니 말이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나요!”
태황후가 빽 소리를 지르자, 태황제는 더더욱 어깨를 움츠렸다. 태황후는 발을 탁탁 굴렀다. 높은 하이힐이 대리석에 부딪혀 맑고 위협적인 소리를 내었다.
“주책도 유분수지. 후궁들이 다 떠나고 나니까, 할 일이 없어서 잘살고 있는 동생 부부를 괴롭혀요?”
“괴, 괴롭히다니. 내 딴에는 아끼는 마음에 한 것인데!”
“그게 괴롭히는 거죠! 시아버지가 옆집으로 이사를 와도 열 받을 판에, 나이 많은 형이 그런다니 말이 되나요!”
“윽.”
태황후의 말에 일순간 파르르 했던 태황제는 계속되는 일갈에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박수를 쳤다.
‘잘한다, 잘해.’
이러면 안 되는데, 솔직히 좀 고소했다. 나를 그동안 그렇게 난처하게 했으니, 이 정도 면박은 당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만두 태황제.
태황후의 말에 조금 수그러드는 것 같았던 그는 다시금 버럭 자기가 잘했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럴 거면 결혼하지 말아야지! 결혼한다는 건 가족도 보듬겠다는 뜻이잖아!”
아니, 언제부터 혼인신고서가 모든 것을 디폴트하게 되는 문서가 되었단 말인가.
‘할 말은 많은데 말이 안 통하니 이길 수가 없다.’
심지어 나보다 나이도 많고, 태황제이기까지 하다. 나는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혹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박을 하지 않고 넘어간 끝에, 저렇게 자기 말이 진리인 줄 아는 완전체가 탄생한 것인가!’
그리 생각하니 소름이 돋아 내가 막 나의 팔을 꽉 붙들었을 때였다.
태황후가 그 헛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버럭 하고 말았다.
“당신이 그런 생각이니까 그 많은 후궁들이 다 우르르 떠난 거예요. 당연한 게 어디 있어요? 다 서로서로 맞추어 가는 거죠!”
“윽.”
태황후의 말에 태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태황후의 얘기에 납득해서가 아니라, 실권을 잃기 무섭게 많은 후궁들에게 버려진 자신의 처지가 떠올라서 약해진 느낌이었다.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내가 한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이안이 나의 손을 꽉 잡았다.
“?”
고개를 갸웃하며 마주 보니 그는 푸른 눈을 휘며 특유의 그윽한 눈웃음을 쳤다.
‘아니, 이 남자는 또 갑자기 왜 애교람.’
평소라면 귀여워 보였을 텐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뜬금이 없었다. 내가 이안과 눈을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
태황제가 애절한 어조로 태황후에게 말했다.
“그래서 황후는? 황후는 내게 돌아온 건가?”
돌아오다니?
‘설마 태황후께서도 태황제를 뻥 차버린 거야?’
그래서 갑자기 독거노인이 된 태황제는 우리 옆집으로 다짜고짜 이사를 왔고?
‘역시 가족밖에 남는 것이 없다, 같은 구시대적 발상을 했겠지. 안 봐도 훤하다.’
그 증거로 태황후가 나타나기 무섭게 태황제의 개구리처럼 커다란 눈망울에 초롱초롱 눈물이 맺혔다.
“조강지처가 좋다더니…….”
태황제가 감격한 얼굴로 태황후의 손을 잡으려고 했을 때였다.
태황후가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미쳤어요?”
“!!”
북해 만년설도 이렇게 차갑지는 않을 것이다. 태황후는 태황제를 그야말로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며 덧붙여 말했다.
“당신이 주접떨어서 못 살겠다고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시길래, 혼쭐을 내러 온 것뿐이에요. 더 이상 주책이라는 말 듣지 말고 거기까지만 하세요.”
“여, 여보!”
태황후에게 SOS를 날린 것은 다름 아닌 스타티스 황제였던 모양이다.
‘참 의외네.’
태황제를 우리에게 토스하고 아주 홀가분해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나름대로 한구석에 기억은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태황제를 끌고 떠나면서 태황후는 다시 꼿꼿한 태도로 나를 응시했다.
“저 옆집도 제가 알아서 처분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임신했다고 들었는데 예쁜 아기 만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워낙 깔끔한 태도라 아까 화를 낸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다. 나와 이안은 태황제 부부를 배웅하러 현관까지 나갔다.
막 마차에 오르기 직전, 태황후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제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말해요. 집안에 상의할 만한 여자 어른이 없어서 고민스러울 때가 많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솔직히 생각하지 못했던 말인지라 대답이 조금 늦었다.
태황제와 태황후를 태우고 마차는 사라졌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알던 분과 전혀 다른데.’
물론, 나는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태황후를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그녀는 몸이 약했고, 그녀를 대신해서 행사를 지킬 수많은 후궁이 있었던 탓에, 공식행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참석해도 얼굴만 비추고 사라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저렇게 당차게 쏘아붙일 수도 있는 분이셨나.’
신기한 눈으로 태황후가 사라진 곳을 보고 있노라니, 이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의외라서요.”
나는 솔직하게 내가 생각한 것들을 대답했다.
“저런 성품이신데 어떻게 그 많은 후궁들을 견디셨을까요?”
“글쎄요.”
내 말에 이안은 눈살을 찡그렸다.
“그동안은 참으셨겠죠. 황제 폐하께 해가 될까 봐.”
그 대답은 뜻밖에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자식을 위해 참다니.’
태황제는 변덕스러운 성품이고, 태황후가 조금이라도 심기를 거스르면 그 화는 고스란히 스타티스에게 쏟아질 수도 있었다.
태황후는 자기 때문에 자식의 앞날이 가로막혔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인내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래가 바뀌어버렸지.’
원래대로는 스타티스가 즉위한 후에도 태황제는 꽤 오래 뒷방 권력자로 정사를 쥐락펴락했었다.
그런데 미래가 바뀌어 그는 지금 모든 실권을 젊은 황제에게 넘긴 상태였다.
‘그러니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어진 거야.’
그리고 내 추측이 맞다는 듯이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저도 저분이 저렇게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는 것 처음 보네요.”
참고 또 참다가 마음의 병으로 늘 시름시름 앓기만 했던 지난 생의 태황후.
‘좋은 일이겠지.’
지나간 세월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이라도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노라니, 이안이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래서 태황후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까?”
“네?”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도움을 청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은근히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괜찮아요.”
나는 이안의 커다란 손에 깍지를 껴서 꽉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금세 손바닥을 뜨끈뜨끈하게 달구어주었다.
“당신이 함께할 거라고 했으니까요. 나는 당신에게 의지하면 되지요.”
“올리비아.”
이안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발끝을 들어서 이안의 뺨에 입을 쪽 맞추었다.
“저는 당신이 있어서 괜찮아요.”
내가 의지하고, 모든 것을 숨김없이 보여줄 수 있는 상대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활짝 웃었다.
그런 나를 보던 이안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나를 멍하니 보던 남자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가, 다시 나를 마주 보았다.
“아, 정말…….”
잇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절절 끓었다. 그의 입술이 깃털처럼 가볍게 내 이마에 닿았다.
그리고는 그가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과 있으면 꼭 일곱 살 난 아이가 된 기분입니다.”
“왜요?”
“참을성이 없어지거든요.”
그 순간 커다란 손이 내 뒷머리를 독수리처럼 꽉 낚아채는 것 같더니, 내가 좋아하는 살구색 입술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내 입술에 맞닿았다.
‘뜨거워.’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맨살에 닿고 싶은 갈망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손길이 나의 허리와 등을 배회했다.
입술이 떨어지니, 진지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 속에 내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안아줘요.”
“하지만…….”
저토록 투명하게 욕망을 드러내면서도 참는 그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이번엔 내가 먼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