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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만남만큼 이별도 중요하다 (19/28)

2장. 만남만큼 이별도 중요하다

그렇게 2주가 흐르고 우리는 다시 제국으로 귀환하는 길에 올랐다. 마차를 보고 케닌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사 가십니까?”

케닌의 지적이 이해가 갔다. 정말 산더미처럼 많은 짐이 마차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제게 묻지 마세요.”

애초에 내가 산 것도 아니고!

내 표정을 본 케닌이 짠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말한다고 들으실 분도 아니지요. 어떤 고생을 하셨는지 듣지 않아도 알겠습니다.”

“케닌, 지금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는데요?”

“그야 저는 자유니까요!”

“…….”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케닌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좋은가.’

케닌이 저리 하찮게 보여도 아카데미 수재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2주 만에 그럭저럭 오르세 말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문법도 완벽해질 것 같았다.

‘그래도 연고 없는 외국살이가 쉽지 않을 텐데.’

막상 본인은 저렇게 좋아하니 내가 걱정할 거리가 아니긴 했다. 나는 조금 떨떠름하게 케닌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제 출발할까요, 올리비아?”

이안이 내 손을 잡았다. 우리 부부를 배려한 건지, 아버지는 다른 마차에 올랐다.

“좋아요.”

나는 이안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제 제국으로 돌아간다.

* * *

올 때와 달리 텔레포트 존을 사용할 수 없기에 귀환길은 조금 더 험난했다.

‘텔레포트 존을 이용하니까 그 외 지역은 정말 개발을 하나도 하지 않는구나.’

텔레포트 존으로 순식간에 지나는 지역들은 여러 모로 개발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포장되지 않은 도로는 그냥 일반 짐마차만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조성되어 있었고, 길가의 나무 같은 것도 다듬어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자연경관은 아주 멋있어.’

그런 만큼 손을 대지 않은 자연이 울창했다. 저 멀리 보이는 산맥과 흐르는 맑은 물을 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바로 그때였다. 내 곁에 앉아 있던 이안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어깨에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무슨 생각 합니까?”

“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제야 지나치게 깊이 생각에 잠겼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손등을 감싸며 대답했다.

“이 지역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휴양지로 계발할 수 있지 않을까요? 너무 외진가요?”

내 물음에 이안은 내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형편없는 생각인가 해서 내가 살짝 굳어졌을 때였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서운합니다.”

“네?”

“저는 올리비아 생각밖에 하지 않는데, 올리비아는 계속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이안.”

귓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가 무척 간지러웠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손가락을 풀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그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귀여워.’

나보다 훨씬 큰 남자가 풀죽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왜 이렇게 귀여운지.

‘거짓인 걸 알면서도 넘어가게 돼.’

이안이 그런 걸로 상처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괜히 달래고 싶어진다.

“내가 왜 당신 생각을 안 하겠어요.”

나는 손을 뻗어 부드러운 금빛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넘겼다. 살짝 눈을 감고 내 손길에 머리를 맡기고 있던 그가 갑자기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정말입니까?”

그렇게 물으면서, 그의 흰 이가 내 손바닥을 얕게 깨물었다.

‘으으, 또 이건 무슨 짓이람.’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손을 빼내었다. 이번에는 그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제가 이렇게 해야 당신은 날 바라보지 않습니까?”

“아니거든요.”

빨개진 얼굴이 쉽사리 돌아오질 않았다. 나는 입술을 뽀로통하게 삐죽였다. 그리고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다시는 이렇게 지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처음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만난 이안과 이렇게 꽁냥꽁냥거리고 있으니 꿈만 같아.’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이 이렇게 쉽게 아이 문제를 넘어갈 줄 몰랐어요.”

“왜요?”

“무척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음.”

내 말에 이안은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두 팔로 나를 답싹 안아들었다.

“물론, 아기가 제게서 당신을 너무 오래 빼앗아가면 싫겠지요?”

얼떨결에 나는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자세가 되어버렸다.

‘왜 이렇게 달라붙는 걸 좋아한담.’

하지만 이런 그의 잔망스러움이 싫지 않았다. 나는 내 눈높이보다 아래로 내려간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가 내 품에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당신을 닮은 딸이라면 당신을 빼앗아도 예쁠 거 같고.”

“딸이면 좋겠어요?”

“네. 원래 아빠는 딸바보라고 하잖아요.”

“그런 말도 알아요?”

넉살 좋은 대답에 나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리 계속 말을 해둬야 할까. 아들이라고.’

그래야 조금 충격이 덜하려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말했다.

“저는 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을 꼭 닮은 아들.”

“전 그건 싫은데.”

이안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다시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평화롭다는 느낌.’

지난 생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이었다. 고통스러웠던 출산의 기억에도, 긴장되지 않는 건 바로 이안의 이런 태도 덕분이리라.

“아기 낳을 때 같이 있을 거죠?”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이안은 바로 대답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기 낳는 데 엄청나게 오래 걸려요. 20시간이 넘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있을 수 있어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당신은 그 시간 동안 고통받고 있는데, 그때 곁을 지키는 정도도 못 하면 어떻게 합니까?”

“하하.”

나는 이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너무 좋아, 당신.”

“?”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동그란 눈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칭찬을 받아서 좋긴 한데, 왜 칭찬을 해주는 거지?’

그 모습도 귀여워서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그때였다. 덜컹거리며 달리던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호위 중 한 사람이었다.

“날이 어두워져서 쉬었다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긴 어디지?”

이안의 질문에 호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파넬령입니다.”

마차 여행을 한 지 상당한 날이 지나고, 드디어 제국의 파넬령에 도착했다.

* * *

‘역시 황량한 곳이야.’

나는 마차에서 내려서 파넬 성을 둘러보았다. 다시 보아도 무척 황량한 곳이었다. 지금 한창 농번기일 텐데도, 푸르름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세금이 걷혔던 것이 기적이네.’

지난 생에서 나는 파넬령에서 올라오는 세금만 관리했었다. 사실 그것 또한 제임스의 일이었지만, 제임스가 숫자에는 능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떠올려도 개고생이었다.’

이렇게 집안의 외정까지 열심히 관리한 공작부인이 세상에 또 있을까. 나는 애썼다는 뜻으로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마차에서 내려서 조금 있으니 파넬성에서 한 사내가 달려 나왔다.

안경을 쓴 모범생 같은 외모의 젊은이였다. 그는 땅에 머리가 닿을 듯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파넬의 영주대리인 알버트입니다.”

“아.”

“?”

과거에 그를 본 적이 있는 나는 나도 모르게 아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나를 처음 보는 알버트는 당연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흠, 아무것도 아닐세.”

나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지금 생의 나는 알버트를 만난 적이 없으니 아는 척을 하면 안 되었다.

‘알버트는 믿을 만한 사람이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그에게로 흘러갔다. 알버트는 지난 생에서 내 일을 가장 많이 도와주었던 유능한 회계사이기도 했다.

‘젊을 때는 저런 얼굴이었구나. 의외네.’

지난 생에는 진짜 살이 엄청 찐 후덕한 아저씨였는데, 지금 여기 있는 알버트는 허수아비처럼 말라 있었다.

‘돌머리 제임스의 인선치고는 괜찮은 편이네.’

지난번 내가 여길 지날 때, 제임스는 영지관리인을 목 매달았었다. 알버트는 그 후임인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을 반짝 떴다.

‘그런데 알버트가 여기 있으면 수도의 파넬 재정은 누가 관리하지? 진상들이 관리하기 어려울 텐데!’

또 엉망으로 장부를 쓰는 건가. 그걸 바로 잡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거늘!

‘내가 걱정해줄 일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엉망이었던 장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더 컸다. 나는 제임스에게 한 소리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그대밖에 없나? 파넬 공작은?”

그런데 내 질문에, 알버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각하께서는…….”

“?”

내가 고개를 갸웃했을 때였다. 이안이 나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우리의 대화를 잘랐다.

“아내에게는 내가 설명하지. 알겠네.”

“편히 쉬십시오.”

우리가 머물 곳을 안내해준 뒤, 알버트는 쏜살같이 도망쳤다. 영문을 모르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임스가 일부러 나와보지 않는 걸까요?”

“그런 건 아닐 겁니다. 그 사람은 지금 바쁘니까요.”

“제임스가 왜 바빠요?”

내 질문에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북부로 돌아갔습니다.”

“네?”

이안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지만, 나에게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북부.

그가 인생 태반을 보낸 장소.

‘다신 가고 싶지 않았을 텐데.’

그가 무슨 마음으로 북부행을 택했는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왜요?”

대답은 간결했다.

“그래야 황후마마께서 수도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그럼 로메오가 수도에 있어요?”

“네.”

‘그건 좋은데.’

제임스가 또다시 북부에 가 있다니.

제임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나를 무감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지난 생을 함께 꾸렸던 동지를 대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번 생을 응원해주었다.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 정리했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후련하게 살 것이지, 왜 기어 나왔던 북부로 다시 돌아갔단 말인가.

나는 화가 치민 나머지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하고 말았다.

‘으으으, 진짜 모르겠다. 하여간 그 벽돌 녀석! 끝까지 신경 쓰이게 하는구나!’

그래 봐라, 이번에는 절대로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않을 거라고!

* * *

‘으으, 내 자신에게 패배한 느낌이야.’

신경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신경을 쓰지 않기가 어려웠다. 괜히 내가 그 남자를 전장으로 등을 떠민 것 같은 찝찝함 때문이었다.

‘찝찝함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지.’

타인에게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는 벽돌 덩어리가 갑자기 북부를 자처했다면 이유는 단 하나뿐일 것이 뻔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심란해서 그런가, 잠도 안 오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커다란 손이 나를 확 끌어당겼다.

“꺄!”

비명을 지르고 보니 따끈따끈한 품속은 다름 아닌 이안의 품속이었다.

“아, 안 자고 있었어요?”

미동도 하지 않기에 자는 줄 알았더니. 내가 놀란 가슴에 손바닥을 올렸을 때였다. 그가 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그 사람 생각합니까?”

“이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지라 심장이 뜨끔했다. 내가 슬금슬금 이안을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푸른 눈동자가 잘 벼려진 검처럼 빛났다.

“저도 꽤 오래전부터 묻고 싶었던 게 있습니다, 올리비아.”

날카로워 보이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그간 잊고 있었던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어째서 그렇게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죠? 당신과 그는 아무 사이가 아닐 텐데요.”

그가 내게 구는 것처럼 그리 말랑말랑한 남자가 아님을 말이다.

“그, 그게…….”

쿵쾅쿵쾅.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까의 놀람과는 궤가 다른 심장 박동이었다.

‘내가 왜 그동안 잊고 있었을까.’

이안 타이론은 이런 사람이었다. 무심한 듯 덤덤하면서도 때때로 보이는 눈빛이 예리한 남자.

‘그래서 처음 결혼을 결심할 때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절대로 그와 어떤 접촉도 하지 않고 각자의 생활을 유지하자고.

‘그동안 내가 잊고 있었어.’

말 한마디도 섣불리 꺼낼 수가 없었다.

그가 예리한 눈으로 날 관찰하고 있었으니까.

“제가 한두 번은 그냥 거슬려도 넘어갔는데…….”

그의 눈이 이렇게 시리게 빛날 수 있다는 걸 왜 잊고 있었단 말인가.

“이제는 정말 이상하다 싶어서요.”

“이안…….”

“그리고 파넬 공작이 북부로 가겠다고 했을 때도, 그 얘길 듣고 난 뒤 당신의 반응도 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미친 생각입니까?

나는 잠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숨이 조여들었다.

‘내가 부주의했어. 숨기고 싶었다면 더 신경 써야 했는데.’

그러고 보면 나도 제임스도 참 허술했지 않은가. 면식도 없어야 할 전부인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손을 내밀지 않나, 보란 듯이 이름을 부르지 않나.

‘이안이 그동안 물어보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지.’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를 안고 있는 이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세상 차갑기만 할 것 같던 남자의 몸이 움찔 떨렸다.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피부를 넘어 내 귓가를 울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나를 아직 사랑해.’

이 이야기까지 듣고 나서도 나를 사랑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평생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설프게 넘어가봤자 균열만 키울 거야.’

애초에 들키지 않았다면 모를까 거짓으로 쌓아올린 관계는 어떻게든 끝이 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맞아요, 이안. 저는 비밀이 있어요. 제임스와 제가 공유하는 비밀이죠.”

“그렇습니까?”

“하지만…….”

운을 떼었지만, 나는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말해도 미친 소리 같았다. 이안의 귀에도 그렇게 들릴 것이 분명했다.

‘사실대로 말해도 거짓말이라고 욕먹을 판이니.’

쓴웃음이 나왔다. 다른 사람 인생이라면 흥미진진하게 관전했을 테지만, 내 인생이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내 침묵을 다르게 해석한 이안이 조금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당신이 지금 말을 꺼내지 못하는 건 저를 못 믿어서입니까?”

“아니에요.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인걸요.”

그동안 나는 이안에게 어떤 것도 감추지 않았다. 지난 생에서 다른 이들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모든 일들을 그에게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안이 한층 누그러진 어조로 내게 물었다.

“그러면요?”

“…….”

하지만 이건 그 이야기들과 조금 상황이 달랐다. 잠시 망설이고 있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안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차피 잠을 자기엔 글렀으니 일어날까요.”

머리가 복잡해서 차가운 바람을 맞고 싶었다.

* * *

달빛 아래 파넬 정원은 고요했다. 꼭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달빛이 참 환하기도 하지.’

전에도 생각했지만, 꼭 등을 켜둔 것처럼 사위가 환했다.

사박. 사박.

우리가 풀을 밟는 소리만 어지럽게 울렸다.

조금 걸으니 넓은 공터가 나왔다. 언젠가 제임스가 투머로우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곳이었다.

“…….”

나는 말없이 멈춰 섰다. 이안은 나를 마주 보고 서 있다가, 한참 동안 내가 말이 없으니 그냥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노란 바탕에 고동색 무늬가 있는 꽃잎에 머물렀을 때였다. 나는 입을 벌렸다.

“무슨 생각 해요?”

내 질문에 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바람이 이안의 금빛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달빛에 반사되는 금빛 머리카락이 눈부셨다.

“그 남자의 공간치고 정원은 잘 가꾸어진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안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여상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 꽃 예쁘죠?”

“네. 독특하네요.”

“파넬에서만 나는 꽃이라고 하더군요. 이름은 듣지 못했어요.”

내 말에 이안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별로 관심 없는 이야기니까 흘려듣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나라도 흘려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제임스가 이야기할 때도 대수롭지 않게 들었지.’

하지만 이제 시작하는 이야기는 내 이야기였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만 같았다. 나는 묘하게 잠긴 어조로 말했다.

“그게 독초래요, 이안.”

“아.”

이안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문득 제임스가 내게 저게 독초라고 말했을 때 나는 뭐라고 말했나 궁금해졌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대부분 사람에게는 해를 끼치지 못한다고 하니까요. 그러니 정원에 심어둔 거겠죠.”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 제게는 치명적이었어요. 잠을 자고 있었는데 그대로 숨이 끊어졌죠. 저는 제가 죽은 줄도 몰랐어요.”

“무슨 소리입니까?”

내 말에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웃은 것 같은데 제대로 웃었는지는 모르겠다.

“제가 이미 죽었대요, 이안.”

두 번. 내가 자각도 하지 못한 사이 죽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게 저와 제임스의 비밀이에요.”

* * *

다음 날 우리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마차를 바꾸어 타거나 하진 않았다.

“…….”

이안은 말이 없었다.

‘믿기지 않나 보지.’

믿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니까.

‘나도 반대로 그런 상황이었다면 믿지 못했을 거야.’

문득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찾아와서 제 인생 2회차입니다, 라고 말하는 이안이라니.

‘진지하게 의사를 만나보기를 권했을 듯.’

나는 창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스치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어제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신이 죽었다고요? 그럼 지금 여기 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질문에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에, 나는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나는 나예요. 당신을 사랑하는 올리비아죠.”

‘미쳤냐고 묻지 않은 게 다행일까.’

어쨌든 말을 했으니 속은 편했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고, 이제 믿고 믿지 않고는 저쪽의 선택이기에.

‘믿지 못한다고 해서 날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는 건 지나치게 이분법적인 사고 아닐까? 믿을 수 있는 것과 믿지 못하는 건 논리적 영역인데.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조금 흐르고, 마차가 구른 지 한참 지나서야 이안이 입을 열었다.

“파넬령은 삭막한 곳이군요.”

“그러게요.”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성을 떠나, 성 밖에 사는 영지민들의 농지가 창밖으로 펼쳐져 있었다.

‘농사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척박하다는 건 알겠어. 차라리 토질에 맞는 다른 곡물로 바꾸는 게 나을 텐데.’

이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에는 와본 적이 없습니까?”

왜 저런 질문을 하나 했더니, 인생 2회차라는 여자가 파넬에 대해 너무 몰라서 그랬나 보다.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지난번 오르세로 가는 길목에서 마차가 고장 나서 들렀어요. 그러니까 이번이 2번째겠네요.”

“그때는 파넬 공작이 파넬령에 있었고요.”

“네. 그냥 과거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퍼뜩 놀라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하늘에 맹세코 당신에게 부끄러운 일은 없었어요.”

“그런 건 의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요.”

이안이 너무나 냉큼 고개를 끄덕여서, 괜히 덧붙인 나만 떨떠름해졌다. 내가 입술을 삐죽거릴 때였다. 이안이 이번에는 영 다른 것을 물었다.

“그때 그 꽃이 독초라는 걸 처음 알았나요?”

“네.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서 꽃에 별로 관심이 없거든요.”

그날도 제임스와 함께 있지 않았다면 굳이 정원을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그 얼굴을 보기 껄끄러워서 돌아보다가 꽃을 발견했을 뿐.

‘진상들이 날 싫어하는 건 알았지만 20년이나 함께 살았는데도 죽일 정도로 싫어하는 줄은 몰랐어.’

그리 생각하니 역시 그 쓰레기통을 탈출하길 잘했다 싶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선견지명을 칭찬하고 있을 때였다.

이안이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 남자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북부에 가겠다고 했는지.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이 바뀐 거군요.”

나는 눈을 들어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그때 처음 당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그에게 들었군요.”

무서울 정도로 예리한 추측이었다.

* * *

이미 한 번 지났던 어느 미래.

이안은 신경질적으로 목을 조르는 크라바트를 잡아당겼다.

‘태황제 폐하께서는 왜 이런 곳에 참석하라고 해서.’

푹신한 붉은 융단 소파임에도 불편하기만 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오페라글라스를 흘긋 본 이안은 이내 콧방귀를 끼었다.

‘오페라는 딱 질색인데.’

오페라는 많은 돈이 필요한 예술이다. 그런 만큼 후원자의 의중에 따라 극의 성격이 결정되기 마련이다.

황립오페라극단의 후원자는 당연히 황제였다. 정확히는 태황제.

‘자화자찬을 그렇게 뻔뻔스레 하는 것도 재주지.’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고 이안의 친모인 선황후를 깎아내리는 극을 본 뒤로, 이안은 오페라를 극도로 혐오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는 것도 즐겁지 않고.’

아무리 프라이빗한 좌석이라고 해도 다른 좌석에서 자신이 어떻게 앉아 있는지 보인다. 이안은 귀족들이 여태 혼자인 자신을 은근히 비웃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결혼한 게 뭐 대단한 거라고.’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이안이 시큰둥하게 콧방귀를 끼었을 때였다.

반짝, 무대조명에 따라 별빛처럼 은은한 은빛이 났다. 이안은 물끄러미 그쪽을 바라보았다.

‘나 말고도 혼자 온 사람이 있군.’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녀의 텅 빈 옆 자리에는 그녀가 들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손가방이 놓여 있었다.

이안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파넬 공작부인.’

무도회나 대회의 등에서 여러 번 보아서 얼굴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물끄러미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무대조명이 둥근 이마와 오뚝한 콧날을 타고 요요히 흐르고 있었다. 나른하게 뜨인 눈이, 그녀도 별로 극을 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든가 말든가.’

이안은 대놓고 눈을 감았다. 그가 오페라 때마다 잠을 자는 것은 별로 비밀도 아니었다.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걸어 나오니, 비가 오고 있었다.

케닌이 우산을 펴고 바로 그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싱글싱글 웃으며 내뱉는 첫 마디부터가 무척 불손했다.

“푹 주무셨습니까, 각하.”

케닌이 은근히 놀리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닌지라, 이안은 시큰둥하게 무시했다. 사실 그가 시큰둥한 건 케닌을 대할 때만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 모든 것이 다 밍밍했다. 무채색의 시시한 세상이었다.

마차에 올라 문을 닫은 뒤, 이안은 빗물에 젖은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파넬 공작은 오늘 참석하지 않았더군.”

이안의 말에 케닌은 키득키득거렸다.

“그치는 원래 집돌이로 유명하니까요. 대신 파넬 공작부인이 참석하지 않았습니까?”

“참석했어.”

“재미있는 사람이죠. 대외적으로 공작이 해야 하는 일까지 모두 처리하니까요. 최근 일처리에 노련미가 붙었다는 평입니다.”

“그래?”

케닌은 불면 날아갈 듯 가벼운 녀석이라도, 일처리에 있어서는 꼼꼼한 녀석이었다. 그런 그가 칭찬하는 걸 보니 파넬 공작부인도 수완이 좋은 듯했다.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만.’

이안은 아까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희고 고운 얼굴, 커다란 루비 같은 눈동자. 기다란 속눈썹에는 별이 걸려 있는 듯 반짝거렸다.

“……예쁘더군.”

이안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케닌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마음에 드셨습니까?”

케닌의 질문에 이안의 미간이 콱 찡그려졌다.

“그건 무슨 질문이야?”

“슬슬 태황제께서 언제 결혼하냐고 묻는 것도 지긋지긋해서요.”

“상대는 남편이 있는 여자야.”

누굴 무슨 구설에 올리려고. 이안이 딱 잘라서 대답했음에도, 케닌은 능글능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각하를 결혼시키고 싶어서 안달이신데, 맘에만 드신다고 하면 뺏어주시지 않을까요.”

“끔찍한 가정이군.”

이제 보니 자신을 놀리는 것이 재미있어서 계속 말을 잇는 모양이다.

‘잠깐.’

마차가 출발하길 기다리고 있는데, 막 오페라 극장에서 나와 멍하니 서 있는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빗물이 줄줄 흘러 흐릿한 창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녀였다.

“……케닌.”

“예?”

“어서 우산을 가져다드리고 와라.”

“네?”

“시끄러워. 얼른 가.”

이안은 어이없어하는 케닌을 내쫓듯이 마차 밖으로 내쫓았다.

“잠깐만요? 각하, 지금 진심? 진심입니까?”

졸지에 빗속에 내던져진 케닌이 뭐라고 꽥꽥 소리를 지르다가 올리비아에게 다가갔다. 걸음을 옮기는 것까지만 보고 이안은 눈을 감아버렸다.

‘그냥 사소한 변덕일 뿐이야.’

어떤 의미도 없었다. 그저 가끔씩 변덕처럼 찾아오는 상냥함 일뿐.

그것이 지난 생의 두 사람 간의 거리였다.

* * *

나는 일순간 숨을 멈추고 말았다. 이안이 부드러운 어조로 툭 던진 말 때문이었다.

“당신도 그때 처음 당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그에게 들었군요.”

“!!”

아니, 얼마나 예리해야 이렇게 불친절하게 툭툭 던진 말에서 단서들을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보통은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부터 할 텐데.’

나는 결국 피식피식 웃으며 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제가 졌어요. 당신에게는 어떤 것도 숨길 수가 없네요.”

다음에도 뭘 몰래 못하겠다는 의미였는데, 이안은 묘하게 예민하게 반응했다.

“숨기려고 했습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죠! 숨기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내 말에 이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그를 마주 보고 있던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저는 여태까지 제가 죽었다는 걸 몰랐어요. 그냥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한참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죠.”

말하기 전에는 무척 길고 지루한 이야기일 것 같았는데, 막상 입 밖으로 내니 한 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다음은 당신이 아는 대로예요. 꿈인가, 환상인가.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어요. 제게 파넬은 지옥이었고, 거길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를 만난 겁니까?”

“당신은 20년 뒤까지도 독신이었어요. 어느 행사에서든 늘 무심하고 불쾌한 표정이었죠.”

나는 이제는 내가 잊고 있었던 이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잘생긴 얼굴로 희미한 미소라도 지으면 휘황찬란하게 빛이 났을 텐데, 그는 늘 뚱한 표정이었다.

그래, 사실 그를 택한 것은 그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이라면 그냥 날 명목뿐인 부인으로 내버려둘 것 같았어요.”

“……그냥 충동적으로 소문만 듣고 고른 게 아니었군요.”

내 말에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나는 또 다시 웃고 말았다.

“충동적이었죠. 충동적이지 않으면 어떻게 한 번 살았던 인생을 외면하고 다른 길로 접어들겠어요? 이성적이었다면 살았던 인생을 더듬으면서 조금 더 낫게 바꾸려고 했을 거예요.”

내가 파넬에서 이룬 것들, 내가 가졌던 것들, 내가 해야 했고, 또 내가 할 수 있었던 일들.

그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이 사람에게 온 것이었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걸까.’

눈물이 툭툭 떨어져 내 치맛자락을 적셨다. 이안이 손을 뻗어서 그런 내 눈을 문질렀다. 뜨거운 체온에 눈꼬리가 후끈해지는 기분이었다.

“울지 말아요.”

낮은 목소리가 사탕처럼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그의 손길을 피했다. 눈물이 흩어지는 작은 구슬처럼 여기저기 튀었다.

“당신도 손 내밀지 말아요. 내가 울든 말든 달래주지 않으면 되잖아요.”

“그건…….”

이안이 머뭇거리듯 말끝을 흐렸다. 내 귀에는 그것이 나를 탓하는 걸로만 들렸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당신에게 말해봤자 당신은 믿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안을 마주볼 용기가 없어, 바닥만 내려다보며 내 마음을 쏟아냈다.

“과분한 사랑을 받았어요. 맛본 적 없는 행복한 나날이었죠. 본래 내 것이 아니었을 거예요.”

나는 그제야 내 안에도 이런 불안감이 계속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래의 삶과 다른 삶을 살아가면서, 제임스가 나타나고 플로렌스 자작이 찾아올 때마다 이 마음은 내 안에서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건 네 자리가 아니잖아.’

갑자기 찾아온 행운들은 원래 갑자기 나가기 마련이다. 나는 손등으로 눈을 문질러 닦으며 대답했다.

“앞으로의 일은 당신 마음대로 해요. 어떤 나쁜 일이든 간에 당신을 원망하진 않을 거예요.”

“올리비아.”

“이혼이든, 보상이든 다…….”

“올리비아, 내 말 좀 들어요!”

이안이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꽉 붙들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들고 그를 마주했다.

푸른 눈동자는 아무 감정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해요?”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말을 하면서도 미친 소리 같은걸요.”

아무리 이안이 성격이 좋다고 해도 이런 상황까지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말을 안 하니까.’

당연히 화가 나서 그런 것 아닌가. 무뚝뚝했던 그를 떠올린 나는 서러워서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이안이 부드럽게 그런 내 눈을 문질러주었다.

“울지 말아요. 눈이 붓겠어요. 뚝.”

“어떻게 멈춰요? 당신이 싫어하는 게 느껴지는데.”

“싫어하지 않아요. 난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제게도 이해할 시간이 필요해서 말을 아낀 것뿐이에요.”

이안은 차분한 손길로 나를 토닥였다. 그의 목소리는 자장가처럼 나른했다.

“내가 지난 생에는 계속 독신이었다고 했죠?”

“네.”

“재미있네요. 그럴 것 같긴 했지만요.”

그는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보니, 내가 좋아하는 반달모양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는 아마 지난 생에도 당신에게 끌렸을 겁니다.”

그가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사르륵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귓불을 스치는 손가락은 데일 듯 뜨거웠다.

“하지만 이미 당신이 다른 사람의 아내이기에 포기했을 거예요. 저는 보기보다 소심한 겁쟁이거든요.”

“그럴 리가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먼저 용기 내어 다가왔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함께하게 된 거잖아요?”

이안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조금 생각을 바꿔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본래 만날 운명이었던 거예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우리가요?”

“어떤 이유로든 엇갈렸지만, 죽음조차도 건너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까요?”

“내가…….”

이안의 다정한 말에 다시금 멈췄던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말았다.

“그렇게 내게만 좋게 생각해도 되나요?”

“올리비아.”

이안은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감쌌다. 짓궂게 웃는 표정도 사랑스러웠지만, 진지하게 날 내려다보는 얼굴은 멋있었다.

그리고 내가 진지한 이안의 모습에 새삼 반한 것처럼, 이안도 우는 내게 비슷한 감상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당신의 씩씩하고 거침없는 모습에 반했지만, 당신이 이렇게 한없이 약하게 흔들릴 때면 몹시 사랑스럽답니다.”

그의 입술이 내 코끝에 닿았다. 촉촉 이어지는 입맞춤이 간지러웠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꼬리는 그가 쪽하고 더 깊이 입을 맞췄다.

내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그를 불렀다.

“이안.”

“고마워요, 올리비아. 용기를 내주어서. 나를 택해주어서.”

“…….”

그 말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나는 이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든든한 품에 안기니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 뒤로 나와 이안은 과거의 이야기를 조금씩 늘어놓았다.

“아버지를 찾게 된 것도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저도 폐하께 휘둘리지 말아야겠다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이 당신 덕분입니다.”

서로 감추고 싶었던 것들까지 털어놓으면서 조금 더 돈독해진 느낌이었다.

‘정말 부부가 된 느낌.’

나는 부끄러움에 슬쩍 이안을 바라보았다. 온통 두근거리고 짜릿했던 것이 우리의 관계라면 지금은 안정이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 관계가 끈끈해졌을 무렵, 우리는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타이론 대공저는 떠날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다녀오셨습니까.”

“다녀오셨어요!”

반가운 얼굴들이 우르르 나와서 인사를 했다. 눈물을 찍어내는 사람도 있어서 나까지 찡해졌다.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제수씨!!”

‘저 포슬포슬한 만두 얼굴까지…… 엥?’

아련한 눈으로 마중 나온 사람들을 바라보던 나는, 있어서는 안 되는 얼굴을 보고 세차게 기침을 하고 말았다.

“코, 콜록! 콜록!”

세차게 기침을 하고 있으니, 나에게 기침을 하게 만든 원흉이 다가와서는 뻔뻔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런, 우리 제수씨, 내가 너무 반가워서 놀랐구나.”

그럴 리가 있냐!

“아, 아니, 어째서 여, 여기에…….”

“오랜만입니다, 태황제 폐하.”

말을 더듬더듬거리는 나의 앞을 가로막듯 이안이 섰다. 그리고는 웃는 낯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태황제는 뻔뻔하게 웃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오르세는 잘 다녀왔니?”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

‘대화가 자연스럽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안에게 들은 태황제는 아주 나쁜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한미한 가문의 영애인 데다가, 재혼이어서 허락했다면서. 그리고는 오르세 왕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태도를 바꾸고.’

그렇게 아낌없이 이안에게 자신의 콤플렉스를 내보인 사람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그리고 듣기로는 대회의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나갔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허허로이 웃으면서 만날 수 있는 사이야?

“…….”

내 떨떠름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던 모양이다. 태황제는 허허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내가 정치적으로 이안에게 손해 본 것이 많다고 해도 우리가 가족이 아닌 건 아니니까.”

“원래 그런 분이셨죠.”

요컨대 정치적으로 견제한 건 사실이지만, 가족으로서 아끼고 사랑하는 것도 사실이니 괜찮다는 말이다.

‘왜 이렇게 쿨해.’

저세상 쿨함이었다. 내가 감히 따라갈 수도 없었다.

‘원래 다 이런가?’

나는 플로렌스 자작가의 가족들을 떠올렸다가 얼른 기억을 지웠다. 그 집안에서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것은 동생인 애니뿐이었다.

태황제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폴짝폴짝 뛰어서는 내게로 달려왔다.

“그건 그렇고, 제수씨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나?”

“윽.”

그런 건 왜 물어요. 거리감 느껴지게.

구겨지는 얼굴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안이 시기적절하게 태황제를 막으며 말했다.

“접촉은 삼가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안정해야 해서요.”

“안정이라니?”

고개를 갸웃거리던 태황제의 얼굴이 이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세상에!!!”

“아이고, 깜짝이야!”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꾹 누르며 태황제를 흘겨보았다.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하지만 태황제는 지나치게 흥분해서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상황이 아니었다. 원래도 자기중심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아기가 생겼구나! 아기가 생겼어!”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얼마나 되었니? 아직 초기이니?”

“그, 그게…….”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중년 남자의 시선을 외면하며 나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것 때문에 오르세로 간 것입니다. 친정아버지 곁에서 안정을 취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럼 적어도 몇 달은 되었겠구나!”

눈도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이안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쪽에 신경을 쓸 수도 없었다. 멋대로 결론을 내린 태황제가 내 손을 정신없이 잡고 흔들었기 때문이다.

“미안하오, 제수씨! 그런 줄도 모르고. 아기가 있는 줄 알았으면 더 신경 썼을 텐데.”

“아니, 네, 뭐…….”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저것이 빈말인가, 진심인가.’

이안을 북방으로 보내려고 했던 사람이 아기가 있었으면 좀 더 신경 썼을 거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내가 무척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모양이다. 살짝 한숨을 내쉰 이안이 내 귓가에 소곤소곤거렸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태황제 폐하께서는 스스로를 속일 수 있으신 분이니까요. 하시는 말씀을 하나하나 귀담아들으면 피곤해집니다.”

‘이게 노하우인가!’

자기 자신조차 속일 수 있다니, 그 말이 참 무섭게만 들렸다.

‘그런 태황제에게 적응한 이안도 대단해.’

도대체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뭐란 말인가. 내가 묘한 표정으로 둘을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한껏 들뜬 태황제가 뺨을 분홍색으로 물들이며 박수를 쳤다.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알려야겠구나. 아니다, 아예 국경일로!”

“에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폐하! 폐하!!”

내가 큰 소리로 태황제를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 버렸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저, 저대로 내버려 두어도 되나요?”

이안은 시종일관 시큰둥했다. 태황제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황제 폐하께서 정하시는걸요. 그리고 제가 아는 황제 폐하는 저런 허무맹랑한 말을 들어주실 분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렇지만.”

내가 아는 스타티스 황제는 그런 사람이긴 했으나, 불확정 요소도 존재했다. 저 이야기의 대상에 이안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국경일이 되는 편이 재미있으니까 수락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그건.”

이안의 얼굴에 보기 드물게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그도 그 생각은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한참동안 입술을 우물거리던 이안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도록 하죠.”

“그래요.”

어쨌든 길고 긴 여행길을 지나 돌아온 우리 집이었다!

‘떠날 때는 과연 언제 돌아올 수 있을까 싶었는데.’

나는 감격 어린 눈으로 우리 집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따라 들어올 줄 알았던 아버지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제국에도 생제르망 소유의 저택이 있습니다. 거기 머무는 편이 낫겠군요.”

“왜요, 아버지? 여기서 지내요.”

“오래 보아야 하는 사이인 만큼 더 선을 지켜야 하는 법입니다. 지나치게 가까우면 정이 나기 마련이지요.”

“아.”

참 점잖고도 현명한 이유였다. 사위와 딸이 반가운 만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말이었다.

‘아버지도 참.’

고마운 말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정문까지 배웅했다.

그리고 수도에 와서 만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다.

“언니!”

“애니!!”

짐을 정리하고 조금 쉬고 있으니 하교하고 돌아오는 애니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애니를 꽉 끌어안았다.

“언니 없는 동안 잘 지냈어? 힘들지는 않았고?”

“나는 괜찮았어. 언니는? 멀리 가느라 힘들지 않았어?”

“언니가 무슨 걱정이니. 네가 걱정이지. 우리 동생 얼굴 좀 보자.”

나는 애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젖살이 빠진 것인지 얼굴이 떠나기 전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다.

“누가 괴롭히진 않았지? 친구들이 놀리진 않구?”

“언니도 참. 내가 애야?”

애니는 키득키득 웃으며 얼굴을 감싼 내 손을 밀어냈다. 나는 턱을 문질렀다.

“키도 많이 큰 것 같고…….”

“하하하.”

잠깐 못 본 사이에 동생이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의젓해 보이는 동생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가슴이 아파졌다.

‘예전에는 이 변화들을 모두 지켜보지 못했지.’

파넬에 갇혀 사느라고, 나는 애니가 자라는 모습을 조금도 보지 못했다.

‘간신히 찾아냈을 때는 상처받을 만큼 상처받은 상태였고.’

내 동생을 보니 또 찡해졌다. 눈물을 글썽이며 나는 애니를 토닥였다.

“언니가 신경 써준다고 하고는 늘 이렇게 애니가 혼자 크고 있네. 미안해서 어쩌지.”

“무슨 소리야, 언니.”

내 말에 애니는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언니가 멀리서도 항상 내 생각하는 거 알아. 걱정하지 마.”

“애니.”

아이들은 어떻게 이렇게 빨리 크는 걸까. 씩씩하게 대답하는 애니를 보고 있으니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조금 뿌듯하기도 했다.

“그래서? 언니가 없는 동안 재미있는 일은 없었니?”

“재미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나야 늘 공부하고 있었지.”

애니는 내 곁에 앉았다.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듯 꼬물거리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교수님께서 졸업하고 연구실로 들어오면 어떻겠냐고 하셨는데…….”

“세상에! 애니, 그건 네가 아주아주 훌륭한 학생이라는 뜻이잖니!”

“그, 그 정도는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닌가. 교수들은 아주 까다로워서 아무나 연구실에 부르지 않는다.

“역시 내 동생이야.”

내 칭찬에 애니는 수줍지만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잠시 앉아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오르세에서 봤던 것들을 이야기했고, 오르세에서 사온 선물도 건네었다.

“예쁜 리본이네.”

내가 건넨 것은 오르세 산 크리스털이 작게 달린 진한 녹색 리본이었다. 애니가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나는 애니가 반묶음으로 머리에 매고 있는 리본을 보게 되었다.

‘같은 색이네.’

애니가 이 색을 좋아했던가. 잘 골랐다 싶어서 뿌듯해졌을 때였다.

잠시 그것을 만지작거리던 애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는 형부랑 결혼할 때 무슨 생각을 했어?”

“나? 나야…….”

너무나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결혼했지.”

“신분은? 재력은? 그런 건 하나도 고려하지 않았어?”

당연히 고려했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면 지나치게 멋이 없을까?’

내가 웃으면서 대답을 흐렸을 때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니?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니?”

“그, 그게 아니라.”

내 질문에 애니의 얼굴이 펑하고 달아올랐다. 나는 그 순간 느끼고 말았다.

‘있구나!’

내 동생에게도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다 컸구나.’

나는 손자를 쳐다보는 할머니 같은 표정으로 내 동생을 바라보았다.

‘기특해. 기특해.’

상대가 누군지 듣지도 않았는데 기특하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아마 지난 생에서 불행했던 애니의 과거가 떠올라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래. 그래서 갑자기 언니가 왜 결혼을 했나 궁금해진 거구나.”

“응. 세상 사람들은 다 어떻게 결혼까지 하는 걸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오구. 오구.”

“오구?”

헉! 너무나 기특한 나머지 입으로 소리가 나와버렸다. 나는 큼큼 헛기침하며 우아한 공작부인의 가면을 다시 뒤집어썼다.

‘이런 마음으로 태황제 폐하께서도 주접을 떠시는 걸까.’

그 사람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저절로 이해가 갔다.

‘뭔가 죽을 때까지 아기일 줄 알았던 아이가 다 자랐단 느낌.’

애니가 결혼한 모습까지 상상하니, 입꼬리는 더더욱 흐물흐물 늘어졌다. 우아한 공작부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잊고, 나는 다시 또 헤벌쭉한 미소를 지었다.

“언니?”

“헙!”

표정 관리. 표정 관리. 나는 다시 헛기침했다.

“그런데 혹시 누구니? 나도 아는 사람이니?”

설마 에릭인가 싶어서 슬쩍 떠보았더니 애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 언니한테 말할 정도가 아니야.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에릭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에릭은 퍽 절절해서 애니에게 이럴까 말까 망설일 리가 없었다.

‘그냥 학교에서 만난 건가?’

“그럼 왜 갑자기 이야기가 결혼까지 튀었니?”

보아하니 그냥 사귈까 말까 밀고 당기는 상황인 거 같았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설마 결혼같이 중요한 일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가벼운 놈인가?!’

충분히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망하는 게 결혼이었다. 그런데 가볍고 충동적으로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녀석이라니.

‘그렇다면 전심전력으로 반대해주겠어.’

그리 생각하며 나는 관심이 없는 척 슬금슬금 물었다.

“왜? 남자가 너보고 결혼하재?”

“아니, 그런 말 안 해.”

“뭐?”

막상 그 대답을 듣고 나니 이번에는 또 화가 치밀었다.

‘우리 애니처럼 예쁜 아이를 두고 결혼 이야기를 안 한다고?! 설마 결혼은 다른 사람이랑 할 건데 우리 애니랑은 가볍게 만나겠다는 거야?’

그런 몹쓸 놈이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다짐 또 다짐하며 나는 애니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인데? 뭐 하는 애니?”

애니는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음, 그런 문제가 아니라, 언니.”

“그럼 뭐가 문제니!”

“음…….”

애니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나는 무척 초조해하며 애니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애니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현실적인 문제였다.

“교수님이 연구실을 권해주셨다고 했잖아. 그러면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공부해야 하거든. 그런데 그럼 그 사람하고 떨어져 있어야 하니까…….”

“!!”

그 말을 들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지나치게 너를 어린애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끽해야 나는 그냥 그 사람이 괜찮은지 모르겠다, 이 정도의 고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설마 이렇게 장기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을 줄이야.

“애니,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언니도 상대방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조금 더 진지하게 애니에게 물었다.

“학생이니?”

“음, 굳이 말하자면 그렇지?”

그러면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굳이 말하면 그렇다는 건 또 무슨 뜻인가.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애니에게는 얼마든지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나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다정히 물었다.

“너랑 나이 차이도 크니?”

“비슷해.”

“아직 결혼 같은 구체적인 미래를 그리기 어렵다는 뜻이구나.”

“응.”

학생에 어리다면 아직 결혼 같은 말이 나오지 않는 게 당연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애니, 너는 연구실에 들어가고 싶은 거 아니니?”

“맞아. 내 꿈을 이룰 기회인걸. 나는 불치병 치료제를 만들고 싶어. 그걸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다정한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이었다. 나는 턱을 괴고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럼 네가 궁금한 건 그 사람이 널 기다려줄 수 있을까, 겠구나?”

“응.”

고개를 끄덕이는 말간 얼굴이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지. 나는 손을 뻗어서 애니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애니, 언니가 살아보니까 운명이라는 게 있더라. 이어질 사람은 어떻게 해도 이어지고, 아닌 사람은 어떻게든 헤어지게 되어 있어.”

나와 제임스가 끝없이 얽히고 얽혔듯이, 또 뜻밖에 이안을 만났듯이.

“그러니까 너는 걱정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누군가를 위해 너를 희생해서는 행복해질 수 없어.”

“……응.”

내 말을 곰곰이 곱씹듯이 들은 애니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에게 묻기를 잘했어.”

예쁘기도 하지.

나는 반짝거리는 동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뭐 하는 앤지, 사는 집은 어디인지, 미래에 비전이 있는지.’

하지만 살아보니, 또 그런 것들이 행복에 다가가는 가능성을 높여줄 수는 있어도, 행복을 확정해주는 것은 아니더라.

“애니, 언니는 네가 어떤 사람을 데려와도 좋다고 할 거야. 언니는 그냥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응, 꼭 기억할게.”

내 야무진 동생은, 부족한 내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애니의 손을 꽉 붙들었다.

애니는 충분히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아이였다.

* * *

애니를 보내고 잠시 의자에 기대서 앉아 있으니,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인가 해서 돌아보니,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사람은 이안이었다.

“처제랑 이야기를 다 나누었습니까?”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니가 앉았던 의자에 이번에는 이안이 앉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 아이들은 왜 이렇게 빨리 크는 걸까요?”

“무슨 일입니까?”

“애니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나 봐요.”

말로 하고도 좀 이상했다.

‘항상 아기일 줄 알았더니.’

벌써 커서 어른이 되면 어떻게 할까 고민도 하다니.

이안이 손을 뻗어서 내 뺨을 쓸어내렸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이 녹아내릴 듯 달달했다.

“섭섭합니까?”

“그럴 리가요.”

나는 피식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커다란 손이 내 손을 다신 풀리지 않을 것처럼 꽉 쥐었다.

“애니도 저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할 텐데요.”

“그거 영광이군요.”

겸양 부리지 않는 것이 이안다웠다.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때였다. 이안이 갑자기 정색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우리 딸은 절대로 결혼 안 시킬 겁니다.”

“네?”

너무 어이가 없는 소리가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눈을 깜빡이고 있던 나는 이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중에 딸한테 얻어맞을 소리를! 내가 기가 막혀서 바라보고 있으니 이안은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결혼은 타인과 맺어지는 것인데, 잘 맞을 확률이 안 맞을 확률보다 더 크지 않겠어요?”

“그, 그건 그렇죠.”

다른 가정에서 자란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잘 맞기는 거의 불가능하리라.

“하지만 결혼이란 게 안 맞는다고 반품처럼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 그것도 사실이죠.”

나는 험난했던 나와 제임스의 이혼 과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결론을 내렸다.

“그럼 뭐하러 도박을 합니까. 그냥 돈 많고 지위 높은 부모님하고 속 편하게 혼자 사는 게 낫지요.”

무지막지한 결론에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역시 왕년의 비혼주의자!’

논리정연하여 한 치의 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강경한 의견을 듣고 있으니 저절로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럼 아들은요……?”

“아들 말입니까?”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산뜻한 어조로 대답했다.

“얼른 어디 데릴사위로 보낼 건데요?”

“왜요!”

딸은 결혼도 안 시키고 다 해주고 데리고 살 거라면서 왜 아들한테는 이리 박한데?!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날 닮은 아들이면 얼굴 물려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빨리 내쫓고 다 우리 딸한테 줄 겁니다.”

“…….”

‘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란 말인가.’

얼굴 물려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니.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소리에 입술을 파르르 떨던 나는 이내 웃으며 눈을 맞춰오는 이안을 보며 납득했다.

‘근거가 없진 않아. 아마 거울 보면서 평소에도 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답답한 건 똑같았다! 자기가 잘생긴 줄 아는 남자라니!

‘우리 아들이 이런 면까지 닮지 말아야 할 텐데.’

하지만 어렵겠지. 얼굴이 닮으면 세수하다가도 자신이 잘생겼다는 것을 깨달으리라. 나는 문득 급격히 피로해졌다.

더 이야기하기도 싫어서 손을 풀고 의자에 등을 깊이 묻으니, 이안이 살살 팔을 주물러주며 물었다.

“오늘 피곤하진 않아요?”

“한 사나흘은 꼼짝 않고 쉬고 싶어요.”

임신 중기가 되면서 초기 때처럼 잠이 쏟아지거나 입덧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소보다 피곤한 건 사실이지.’

그런데 이 얄미운 남자가, 내가 대답하기 무섭게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것 아닌가.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답장하도록 하죠.”

“네? 뭘요?”

나는 눈을 반짝 떴다. 그리고는 이안이 사각사각 무언가를 적고 있는 종이를 빼앗아 들었다.

붉은 봉투에 들어 있는 빳빳한 종이.

바로 황궁에서 온 서신이었다!

“세상에! 이 사람이!”

“뭐가 문제입니까?”

깜짝 놀라는 나와 달리 이안은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편지를 이안의 반대쪽으로 들며 대답했다.

“이게 문제죠! 로메오에게 편지가 왔으면 왔다고 알려주어야 할 거 아니에요!”

“별 내용이 아니라서.”

별 내용이 아니라도 당연히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편지를 펼쳐보았다.

편지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친애하는 친구 올리에게.

“…….”

왜 이 사람이 이 편지를 내게 안 보여주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이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생각인지 알겠는데, 절대 당신이 추측하는 그 이유로 당신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 거 아닙니다.”

“확실해요?”

“그럼요. 저는 그런 치졸한 질투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여전히 의심스러웠으나, 하도 당당하게 주장하기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를 내려보았다. 그때 작은 목소리가 불만을 중얼거렸다.

“물론, 왜 계속 내 아내를 올리라고 부르는가 사소한 불만은 있지만…….”

“이안!”

역시 올리라고 적혀 있어서 안 보여주려고 했구나!

‘이 몹쓸 집착남 같으니!’

나는 그 뒤로 한바탕 이안에게 편지를 숨기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다시 마음 편하게 앉아서 편지를 열었다.

편지는 간결했다.

-네가 수도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어, 올리.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입궁하기 좋을 때를 정해서 알려줘.

‘소식을 들었다니?’

편지에서 유난히 내 눈을 거슬리는 구절이 바로 그 구절이었다.

‘로메오가 내 소식을 들을 것이 뭐가 있어?’

심지어 수도에 도착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바로 그때 내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태황제 폐하……!’

임신 소식을 널리 알려야겠다며 신나게 달려나가지 않았던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셨을지 상상하기 두렵다.’

나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고 끙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제가 편지 안 보여줘서 화났어요?”

또 막상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화낼 일은 아니죠. 하지만 마음대로 답장을 보내려고 한 건 문제예요. 황후마마께서 부르시는데 사나흘 뒤가 뭐예요?”

“저는 당신의 몸 상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세상 어느 귀족이 황족에게 그리 뻔뻔하게 대답하냐구.’

하지만 따지고 들어봤자 또 논리정연한 말이 돌아올 게 뻔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고 있던 이안이 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말했잖습니까. 애칭 부르는 거, 질투 난다고요.”

“로메오는 이제 황후마마세요.”

“그래도요.”

그가 내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제가 애정결핍이라.”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살짝 눈꼬리를 내린 그가 귀엽게 입술을 삐죽였다.

“당신이 나만 바라보고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당신만 바라보고 있어요.”

나는 이안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이안이 슬쩍 내게 물었다.

“진짜입니까? 아이가 태어나도 제가 1순위예요?”

이건 또 무슨 미묘한 질문이람.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당신이 자꾸 아들이 태어날 거라고 예고하는 것 같아서요.”

뜨끔!

그 대답에는 나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예리해.’

내가 한마디씩 아들은요? 아들이 태어나면요? 라고 묻는 것에서 불길한 기류를 눈치챈 모양이다.

‘안 되겠어. 조금 더 은밀하게 말을 던져야…….’

상대는 고양이 뺨치게 예민한 사람이었다. 좀 더 은밀하게 아들을 낳을 것 같다고 밑밥을 깔아야겠다.

어쨌든.

“로메오에게는 내일 입궁한다고 편지 보낼게요.”

“말 돌리기는.”

이안은 슬쩍 눈웃음을 치면서 내게 물었다.

“그럼 오늘은 제가 당신을 독점해도 됩니까?”

이렇게 슬슬 떠보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독점하고 있잖아요.”

* * *

오랜만에 방문한 황궁은 어쩐지 조금 들떠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바빠 보였다.

‘역시 새 황제라서 다들 분주하구나.’

힘차게 시작하는 분위기라 내 마음까지 들뜨는 기분이었다.

‘묘하게 다들 나를 흘금대는 것 같은데.’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랜만에 제국에 와서 그런가 봐.’

이안과 나는 이제 황족이기에 마차를 타고 황궁을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굳이 어디 들르지 않고 바로 황후궁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반기는 로메오를 만날 수 있었다.

“올리, 소식은 들었어!”

“네?”

“임신했다면서!”

“헉.”

첫인사부터 이 모양이었다.

‘얘가 훅치고 들어오네.’

나는 얼떨결에 어깨를 움츠렸다. 워낙 로메오의 목소리가 커서 주변에 쩌렁쩌렁 울린 탓이다.

그런 내 어깨를 이안이 부드럽게 감싸며 대답했다.

“아직 몸을 조심해야 한답니다.”

뭔가 긴장감을 딱 끊어내는 것 같았다. 나를 둘러싼 공기가 그가 풍기는 여유로운 공기로 뒤바뀌는 느낌이었다.

‘이안과 함께 와서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메오는 어려움이 역력한 얼굴로 이안에게 인사했다.

“축하하오, 타이론 대공.”

“별말씀을요.”

웃고 있었지만 로메오의 친구인 내 눈에는 다 보였다.

‘이안은 두고 왔으면 좋았겠다는 느낌을 풀풀 풍기는구나.’

나로서는 둘 다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어려움은 어쩔 수 없기에 나는 그냥 어깨만 으쓱했다.

우리는 황후궁에 미리 마련된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로메오는 나보다도 더 흥분해서 앉자마자 내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들일까, 딸일까? 아직 모르지?”

나는 아직 임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할 마음을 먹지 못했기에, 그리고 황후가 된 로메오에 대한 긴장으로 입술을 떨고 말았다.

“그, 그건 아직 모르……옵니다?”

이 어색한 존댓말에 로메오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냥 편하게 말해. 우리밖에 없는걸.”

“그래도…….”

지난 생에서는 트집 잡는 이들이 많아서 로메오가 이렇게 말을 해도 말을 한 번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생은 또 상황이 다르잖아.’

나는 그때처럼 자리를 잡지 못한 허울뿐인 공작부인도 아니었고, 로메오와도 엄연히 한집 식구가 되지 않았나.

‘어렵다.’

내가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이안이 냉큼 대답했다.

“딸입니다.”

“응?”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순간 나조차 혼란스러웠다. 멍해진 나를 제치고 로메오가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웃었다.

“와, 그렇군. 축하선물로 공주님에게 어울리는 아기침대를 주문해야겠어.”

“감사합니다.”

“…….”

이렇게 순식간에 우리 애는 딸이 되었다. 나는 잠시 싸늘한 눈으로 서로서로 덕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이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안.”

“네, 올리비아.”

이안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이상 딸 타령을 하면 이제 당신이 싫어질 것 같아요.”

“……잘못했습니다.”

이안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하여간 어린애 같다니까.’

어쨌든 그렇게 이안의 입을 다물린 뒤, 나는 다시 예의를 차려서 로메오에게 인사했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황후마마. 저야말로 국혼에 참석하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으으으.”

“?”

내 인사를 들은 로메오는 오징어처럼 몸을 배배 꼬았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존댓말은 그만두래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도 낯간지러워 죽겠는데, 네가 하니까 진짜 민망하다.”

그렇게 말하는 로메오는 우스울 정도로 지난 생과 똑같았다.

‘로메오는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저런 친구에게 지난 생에 나는 어떻게 말했던가.

“그런 명령을 내리는 것은 저의 공작부인으로서의 입지조차 위협하는 불합리한 행동입니다. 자제해주세요.”

그때 나는 공작부인으로 자리 잡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서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내 말에 씁쓸하게 웃던 로메오의 얼굴이 선했다.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지금 생각하면 세상 어리석은 짓이었다.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의 구설을 의식해서, 친한 친구의 마음을 상처 입히다니.

그래서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내 대답에 로메오는 활짝 웃었다. 해바라기처럼 밝은 미소였다. 그래서 나는 역시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절대 그러면 안 되겠지만.’

우정도 우정이지만 황후로서 로메오의 입지도 중요하지 않은가.

어쨌든 그렇게 실랑이가 끝나고, 우리 이야기는 다시 국혼으로 돌아왔다.

“결혼식은 별거 없었어. 대관식이 더 중요한 행사였는걸.”

“그랬어?”

로메오는 황후라는 지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탈한 태도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난 생에는 엄청 화려하게 치러졌었는데.’

다이아몬드 홀에서 수천 송이의 꽃이 깔린 화려한 결혼식이었다.

‘그리고 보니 후궁들 이야기가 없네.’

심지어 스타티스 황태자의 손을 잡은 남자는 로메오 한 사람이 아니었다.

‘황후 후보였던 다른 이들까지 모두 후궁으로 책봉되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생에는 후궁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눈을 빛냈다.

‘이것도 좋은 변화일까?’

애니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만큼이나, 나는 로메오도 행복했으면 바랐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혼 생활은 어때?”

“풉!”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아하게 차를 들이켜던 로메오는 차를 뿜어냈다.

“그, 그게…….”

어색하게 웃는 모습이 영 불안해 보였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로메오를 응시했다.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그런 건 아니고.”

로메오는 검지로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살이 좀 빠졌나.”

듣고 보니 토마토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좀 야윈 듯 보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로 사는 게 쉽지는 않겠지.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꼭 도와줄게.”

“고, 고마워.”

로메오는 몹시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상한 건 이안이 우리의 대화를 듣고 빵 터진 것이다.

“하하하.”

‘왜 웃는 거지?’

도대체 우리 대화에 어디가 웃긴 걸까.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대답해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 뒤로 몇몇 사담이 오갔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피곤해져서 이야기를 잠시 쉬었을 때였다.

로메오가 심각한 표정으로 운을 떼었다.

“올리, 네가 오면 말하고 싶은 게 있었어.”

“뭔데?”

나는 눈을 깜빡였다. 차를 들이켜 목을 축인 로메오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제임스 파넬 공작 관련 일이야.”

“제임스?”

로메오가 제임스에 대해 할 이야기가 뭐가 있단 말인가.

로메오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북부에 같이 잠깐 지냈거든. 무척 멋있는 사람이더라고.”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나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그 사람은 원래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더라.”

“그, 그래?”

제임스 파넬을 예찬하는 근육질의 사내들은 지난 생에도 질릴 듯이 많았다. 셋째 진상은 그때마다 ‘역시 내 아들!’ 타령을 했고, 나는 매력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묻고 싶었었다.

‘다시 생각해도 꼴 보기 싫다.’

나한텐 남의 편인데, 우리 형님이 최고라고 하는 생면부지의 사내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로메오를 마주 보았다.

“그런데 왜? 네가 새삼 파넬 공작의 칭찬을 하려고 말을 꺼내는 건 아닐 테고.”

“모른 척하기에는 양심이 걸리더라고.”

“그러니까 뭐가?”

우물쭈물거리던 로메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사람 많이 아파 보였어. 몰래 피도 토하던데? 너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야?”

“……뭐라고?”

로메오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요절한 나보다 훨씬 오래 산 사람이 제임스였다.

‘당연히 아픈 곳도 없었다고.’

그런데 피를 토하다니. 나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 없어.”

내 대답에 로메오는 찻잔을 꽉 붙들었다.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안다면 너는 분명 그에 관해서도 제대로 대화했을 테니까.”

그리고 간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가 인제 와서 무언가를 돌이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적어도, 모든 이야기는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

로메오의 말에도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임스가 아프다니?’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 * *

제임스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몸이 왜 이러지.’

그는 타고나길 강하게 태어났다. 감기 같은 잔병치레는 한 적이 없었고, 남들보다 통각도 둔한 편이었다. 아픔은 배로 잘 참았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다른 사람들은 다 이런 느낌을 느끼면서 산단 말인가.’

메스껍고 숨이 가쁘다는 감각 자체가 처음이었기에, 제임스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어느 정도 상태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투머로우는 그런 제임스를 비웃었다.

-내가 말했지 않나. 시간을 돌렸다고 해서 네 영혼의 시간까지 돌아간 건 아니야. 너는 지금 죽기 직전의 늙은 노인이라고.

‘노인이라.’

제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튼튼해서, 올리비아가 죽은 뒤에도 한참이나 살아남았을 테지.’

스물다섯에 올리비아와 결혼하여, 그녀와 죽음으로 헤어질 때까지 마흔다섯 살. 20년의 세월을 거슬러왔음에도 그에게는 5년이라는 세월이 남았다.

올리비아를 떠나보낸 뒤 30년 정도 혼자 살았을 거란 뜻이다.

‘징그럽군.’

애초에 이렇게까지 강골이 아니었다면 전장에서 그리 오래 버텨야 하지 않았으리라.

-억울하지. 왜 이런 곳에 처박혀 있어야 하나 싶지 않아?

투머로우가 쓴웃음을 짓고 있는 제임스에게 속삭였다. 제임스는 물끄러미 빛나는 검을 바라보았다.

‘악마.’

이 검은 물건이 아니라 악마임이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는 말만 속삭일 리가 없었다.

“닥쳐.”

제임스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투머로우의 속삭임을 잘라냈다. 투머로우는 멈추지 않았다.

-네가 시간을 돌려서 그 여자만 행복하게 살고 있잖아. 네게 남은 게 뭔데? 억울하지도 않나?

“닥치라고!”

결국 제임스는 검을 바위에 내려쳤다. 물리적 폭력에 약한 검은 입을 찍 다물었다. 제임스는 실소했다.

‘이것도 올리비아 덕분에 알게 되었지.’

바위도 자를 수 있는 날카로운 검이 설마 몇 번 패대기쳐진다고 입을 다물게 될 줄이야.

‘그런 여자인 줄 몰랐어.’

그가 기억하는 올리비아는 차가운 얼음으로 만든 조각 같은 여자였다. 감정표현이 적고, 늘 냉철하고, 이성적인 여자.

그렇게 웃고 떠들고 화내는 올리비아는 처음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던 거겠지.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가문의 일도 모두 그녀에게 맡기고.’

무거운 책임을 진 자는 말수가 적어질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은 제임스가 제일 잘 알았다. 그도 북방에 오기 전엔, 이렇게까지 말수가 적은 사람은 아니었다.

‘올리비아.’

제임스는 가만히 마지막에 만났던 그녀의 얼굴을 그렸다.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흰 얼굴에, 붉게 물든 눈꼬리 끝으로 눈물이 방울방울 흘렀다.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뻐근해지는 모습이었다.

‘당신이 날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되었어.’

-그게 말이 돼? 너도 너 자신에게 솔직해지지 그래!

투머로우가 제임스에게 시끄럽게 항의를 했다. 제임스는 말없이 검을 다시 바위에 내려쳤다.

그렇게 한바탕 투머로우와 실랑이를 하고 내려오니 부관이 쫓아왔다.

“가, 각하!! 수도에서……!!”

“무슨 말이지?”

수도에서 올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제임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관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성안에 서서 깜짝 놀랐다.

“이건…….”

그의 앞에는 수많은 군인들과 짐 마차가 서 있었다. 가장 앞에 선 청년이 무릎을 꿇으며 손을 내밀었다.

“파넬 공작 각하께 황후마마의 친서를 전합니다.”

황후마마라면 로메오였다. 제임스는 말없이 친서를 펼쳤다.

-북부의 충격적인 상황에 깊이 반성하여 북부에 파견할 병력과 식량, 물자를 새로이 편성했습니다.

‘지난번에 단단히 결심하는 것 같더니.’

솔직히 북부에서 근무하는 십수 년 동안 중앙정부에서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지원한 것은 처음이기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감사하다고 답해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편지의 마지막을 읽었을 때였다.

마지막 문장이 제임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타이론 대공비와 대화를 나눌 자리를 마련할 테니 수도로 올라와 주십시오.

* * *

로메오는 그답지 않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초청하는 서신은 보냈어. 아무리 늦어도 보름이면 수도에 도착할 거야.”

“뭐라고?”

나는 깜짝 놀라서 로메오를 바라보았다.

‘너, 너! 어디에 이런 미친듯한 추진력을 숨기고 있었어?’

내가 아는 로메오에게서 기대하기 힘든 미친 추진력이었다.

놀라서 내가 입술을 벙긋거리고 있으니, 이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미 북부에 초청장이 갔을 거라는 말입니까?”

이안의 질문이 좀 묘했다. 북부에 도착 여부를 왜 물어봐?

‘도착 안 했으면 중간에서 낚아채려고?’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나는 슬그머니 올라오는 의혹을 꾹 눌렀다.

로메오는 내 손을 붙들고 눈을 글썽거렸다.

“내가 내 마음 편하자고 널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아. 하지만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어.”

“로메오…….”

로메오의 마음을 나는 충분히 공감했다. 나와 제임스가 어떻게 얽혔는지를 모른다고 해도, 죽음을 앞둔 남자가 혼인무효로 사라진 전 아내를 되찾으려는 그림은 충분히 감정을 자극할 만하니까.

‘로메오는 또 마음이 여리잖아.’

하지만 이안에게는 조금도 공감이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이렇게 말했다.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저는 또 모르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줄 알고.”

“……윽.”

“이안!!”

내가 큰소리로 이안의 이름을 부르자 이안은 혀를 쏙 내밀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떻게 저런 말을 웃으면서 할 수 있담!’

로메오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왜 로메오가 이안을 어려워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로메오는 표정에 다 드러나는 타입이니까.’

저렇게 웃으면서 촌철살인 같은 건, 로메오에게 불가능했다.

“로메오.”

그의 상황을 이해한 내가 막 로메오의 이름만 불렀을 때였다. 이안이 얼굴을 흐렸다.

“꼭 그 사람을 만나야 합니까?”

‘아니, 만난다고 아직 말도 안 했는데!’

내가 긍정의 대답을 하기 전에 선수 치듯 말하는 이안을 보며,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제임스가 아프다면 분명 나 때문이겠지.’

나는 제임스가 그 흔한 기침 한 번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정말 건강한 사람이었다.

‘꼭 이런 인간들이 100살 넘게 살지, 라고 꼬인 생각도 했었어.’

하는 짓에 예쁜 구석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건강하기까지 하니 얼마나 밉게 보였겠는가.

‘시간을 돌리는 마법의 부작용일지도 몰라.’

생각해보면 나도 꽤 많이 아프지 않았던가. 스무 살의 나는 그렇게 잦은 병치레를 하지 않았는데, 이번 생에는 이상할 정도로 열이 나서 앓아누웠었다.

‘하지만.’

나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난 만나지 않아, 로메오.”

“뭐?”

“네?”

로메오와 이안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아니, 로메오는 그렇다 치고 당신은 또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요?”

“당연히 만난다고 할 줄 알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보였어요? 저는 남편 말을 잘 듣는데.”

“…….”

정말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보통 이러면 귀엽게 받아치는 이안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굳어졌다.

“그 사람과 나는 이야기를 끝냈어. 친구처럼은 못 지내겠지만, 서로 앞날을 응원해주기로 했지. 어떤 상황이든 바뀔 것이 없어.”

나는 로메오와 눈을 맞췄다.

“그러니 만나지 않아.”

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 * *

제임스는 답을 기다리는 전령에게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올라가지 않겠다고 전해라.”

“네?”

설마 그런 대답을 들을 줄 몰랐던 전령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굳어졌다.

“황후마마의 초대입니다. 아마도 공을 치하하실 텐데…….”

“내가 북부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또 자리를 비운단 말인가.”

제임스는 무뚝뚝하게 그렇게 대답하고 돌아섰다. 제임스의 대답에 감격한 부관이 눈물을 글썽였다.

“역시 공작님이셔.”

제임스는 다시 자신이 조용히 앉아 있었던 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허리춤에 매여 있던 투머로우가 시끄럽게 웅웅거렸다.

-왜? 좋은 기회잖아. 네 수명 이야기를 하면 그 철벽같은 여자도 다시 흔들릴걸.

제임스는 차가운 눈으로 투머로우를 내려보았다. 검은 제임스가 자신의 말에 솔깃했다고 생각했는지 또다시 웅웅거렸다.

-그래, 차라리 결혼식 전으로 시간을 돌리면 어때? 혼인무효 같은 깜찍한 짓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거야.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그래.”

제임스는 투머로우를 집어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자신의 손처럼 익숙했다.

‘내가 이 검을 쥔 지도 꽤 시간이 흘렀지.’

이 순간에서 올리비아와 제임스의 결혼식 시점까지 돌리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또다시 마법을 쓸 텐가?

투머로우가 신이 난 목소리로 물었다.

제임스는 가끔 궁금했다. 이 악마 같은 검이 지긋지긋한데, 왜 나는 이 검을 버리지 못했는가.

‘이제야 알겠어.’

“네가 내 미련이었구나.”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를 손에 쥐고 싶은 미련이 검을 버릴 수 없게 했던 것이다.

제임스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나는 역시 그녀의 행복 같은 건, 바랄 수 없어. 그녀처럼 상냥해질 수 없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시간을 돌리자.

투머로우는 의기양양하게 떠들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임스는.

“그래도 인간쓰레기가 될 생각은 없어.”

있는 힘껏 검을 바위에 내려쳤다.

-으악! 그만, 그만둬!

그동안은 봐준 거라는 듯, 거친 손속이었다. 캉캉하고 거친 쇠붙이 소리가 바위에서 울려 퍼졌다.

-그만!!

바위가 깨지면서 돌조각이 튀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 * *

“에휴.”

로메오는 황궁 침실 창가에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일과를 끝내고 씻고 들어온 참이던 스타티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타이론 대공비와 파넬 공작 때문에요.”

로메오는 풀죽은 목소리로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스타티스에게 늘어놓았다. 눈썹을 찌푸리고 그 이야기를 쭉 들어준 스타티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나?”

“네?”

로메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껌뻑였다. 스타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로메오의 의자 손잡이를 짚었다. 그 바람에 벌어진 가운 사이로 맨살이 보여, 로메오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기운이 남아돌았나 본데…….”

귓가로 속삭여지는 낮은 목소리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로메오는 뺨을 붉히며 스타티스와 눈을 맞췄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 부인에게나 신경 쓰시지?”

“……잘못했습니다.”

뭐라고 말하겠는가. 로메오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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