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1장. 제국의 시계는 급박하게 흘렀다 (18/28)
  • 1장. 제국의 시계는 급박하게 흘렀다

    남을 어떻게 밀어내고, 어떻게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저울질하는가.

    ‘내게도 늘 협박이었지. 말을 듣지 않으면 나를 먼 타국으로 팔아치우겠다고.’

    황태자 임명이 폴카에서 날아온 결혼동맹보다 빨라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손바닥 뒤집듯이 스타티스를 폴카로 보냈을 사람이었다.

    ‘제대로 알려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스타티스가 입술을 열었다.

    “그건 누구나 같은 입장이 아니겠나.”

    그녀의 말에 로메오는 고개를 들었다. 스타티스는 무심한 척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만난 것도 그저 우연이었고, 운이 좋아 서로 잘 맞는다면 좋은 부부가 될 테지.”

    “그게 아니라면…….”

    로메오는 우물쭈물 운을 떼었다가 다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스타티스는 그런 로메오를 보다가 느릿하게 운을 떼었다.

    “한 가지는 말하고 싶군.”

    로메오를 보고 있지만 스타티스의 시선은 그를 향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모후인 황후를 떠올리고 있었다.

    “힘들고 못 견딜 것 같을 때는 말을 해. 깔끔하게 이혼해줄 테니까.”

    그 말에 로메오의 시선이 흔들렸다. 스타티스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황제가 되어서 좋은 점은 그것 하나 아니겠나? 내 자식들이 모두 다 내 자식이라는 거.”

    수많은 후궁, 한 명의 황후, 그리고 수많은 자식.

    분명 같은 아버지의 자식인데도 형제들은 형제가 아닌 것처럼 황위를 두고 다투었다.

    하지만 스타티스가 황위에 오른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자식은 다 스타티스의 자식이며, 경쟁은 공정할 것이니.

    “굳이 버틸 필요도 없고 희생할 필요도 없어. 다 내팽개치고 도망치면 돼. 재혼하고 싶다고 해도 허락해주지.”

    언젠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스타티스는 담담히 로메오에게 해주었다. 과오를 바로 잡겠다고 결심한 만큼, 그녀는 실제로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하지만 로메오에게 이런 반문이 들려온 것은 의외였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도망치고 싶으실 때는 어떻게 합니까?”

    “재미있는 말이군.”

    스타티스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손이 로메오의 멱살을 콱 붙들어서는 강하게 그녀에게로 끌어당겼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짓궂은 목소리가 로메오의 귓가를 울렸다.

    “그럼 도망칠 수 있게 빨리 후계를 만들어볼까?”

    붉은 입술이 그의 입술에 숨결이 얽힐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그 순간.

    “으왁!”

    로메오는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고 말았다.

    “저, 저는 피, 피곤해서 이만! 쉬, 쉬시옵소서!”

    덜덜덜 떠는 것을 감추지도 않고 로메오는 새빨간 얼굴로 다다다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스타티스가 정말 그를 잡아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후다닥 도망쳤다.

    “하하하.”

    웃음이 적은 스타티스였지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쁘지 않아.’

    충동적으로 고른 것치고, 로메오는 나쁘지 않았다. 우선 올리비아와 친구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여성과 오랫동안 동등한 친분을 유지할 수 있는 사내라면 나와도 그런 부부가 될 수 있겠지.’

    불타는 사랑 같은 건 원하지도 않았다. 지엄한 황제가 어떻게 침실에서는 한낱 사내에게 몸을 맡기겠는가.

    ‘그냥 사이좋은 친구처럼 지낼 수만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로메오는 꽤 괜찮았다.

    “너무나 짓궂으십니다.”

    로메오의 품행을 지적했던 시종이 이번에는 스타티스의 행동을 지적했다. 스타티스는 피식 웃었다.

    “뭐, 어떤가. 나는 뭐든지 최초인데, 남편과의 관계 또한 다른 이와 같을 수 없지.”

    스타티스는 그동안 이 제국에 없었던 황제가 될 생각이었다.

    * * *

    이런저런 소소한 일상이 흐르고, 결국 두 사람의 국혼일이 되었다. 국혼은 올리비아의 기억과 달리 다이아몬드 홀이 아니라 대성당에서 치러졌다.

    전통적으로 대관식이 대성당에서 치러졌기 때문이다.

    제복을 입고 등장하는 황태자와 그 약혼자, 반지를 끼워주는 것 외에는 입맞춤조차 없는 근엄하고 간결한 결혼식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황제의 관을 쓸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가?”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관을 들고 황제가 물었다. 스타티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 잘하리라 믿는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타티스의 금빛 머리카락 위에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붉은 홀을 쥐여주었다.

    황제, 엘리자베스 1세.

    그것이 스타티스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 초야도 치르지 못하고 로메오는 수도를 떠나야 했다.

    머나먼 북방을 향해서였다.

    * * *

    “내가 황제로 임명된다고 해서 바로 황제의 권위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날 스타티스는 이안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다.

    ‘형님이 쉽사리 물러날 리가 없어.’

    이안이 황족이라는 걸 이 제국에 아는 사람이 하나 없을 때도, 끝없이 견제하던 사람이 바로 이안이었다.

    “이미 물밑 협상을 해보았지만…….”

    “쉽게 넘어오지 않겠죠.”

    황제가 그런 성품이라서 그런지, 귀족회의에 참석하는 귀족들 중에도 황제와 비슷한 성품들이 많았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기민하게 살피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약삭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확실하게 태황제보다 우위에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지 않으면 힘들 겁니다.”

    “확실하게.”

    “다룰 수 없는 사람을 다루는 게 좋겠죠.”

    “짐이 다룰 수 없는 사람이라…….”

    스타티스는 턱을 쓰다듬었다. 이안은 태연스럽게 한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 * *

    북방으로 향하는 길은 험준했다. 특히나 취미 정도의 승마밖에 익히지 않은 로메오에게는 이런 고행길이 없었다.

    ‘짐은 너무 무겁고.’

    로메오 같은 사내에게 풀체인메일 갑옷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군이 되어 전쟁에 나가는 판국인데 검 한 자루는 들고 가야 할 것 아닌가.

    ‘검이 이렇게 무거운 건지 몰랐지.’

    로메오의 검술 실력 또한 취미 수준의 사브르를 벗어나지 않았다. 어쩌다 시비 걸리면 결투하는 척은 할 정도?

    ‘내가 휘두르던 사브르는 제대로 된 검이 아니었구나.’

    실제 전장에서 사용될 롱소드는 검날의 길이가 130cm. 강철로 그 정도 길이에, 뼈를 부술 정도의 두께로 제작되다 보니, 무게가 상상을 초월했다.

    ‘이래서야 체면이 서질 않는군.’

    승마도 익숙하지 않은데, 무거운 검까지 옆에 차고 가벼운 경갑 차림을 하고 있으니 무게를 잡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쭉 빠졌다.

    자연히 북방을 향하는 속도는 늦어졌다.

    로메오의 상태를 눈치챈 동행인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쉬었다 가겠습니다.”

    “죄, 죄송…….”

    “황후는 죄송하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걸 누가 모르냐고!

    ‘하지만 저절로 나오는 걸 어떻게 해!’

    로메오는 말에서 내리다가 허벅지가 바르르 떨려서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헉!”

    “쯧.”

    그러자, 동행인이 혀를 차며 커다란 손으로 로메오의 팔뚝을 잡아 힘으로 일으켜 세웠다. 로메오의 무게와 짐이 합쳐진 것을 떠올리면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으아아아.’

    로메오는 부담감에 벌벌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팔뚝을 잡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

    묻는 말투는 정중했으나, 로메오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뻣뻣해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에, 음울해 보이는 회청색 눈, 그을린 얼굴에 곰처럼 커다란 덩치.

    바로 제임스 파넬이었다.

    ‘부담스러워, 부담스럽다.’

    그냥 남자 대 남자로 마주해도, 덩치가 너무 커서 저절로 위압감을 주는 남자다. 그런 데다가 지난번 두 사람의 마지막이 썩 좋지 않았지 않나.

    ‘나한테 앙금이 남았을 텐데.’

    로메오는 슬금슬금 제임스의 눈치를 살폈다. 제임스는 또다시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식사도 해야 합니다.”

    “네, 네.”

    로메오는 또 무심코 존댓말로 대답하고 말았다.

    제임스가 북방으로 향하던 로메오의 일행에 끼어든 것은 정확히 절반 지점을 지났을 때였다. 타이론의 지원군이 합류할 거라고 했던 곳이기도 했다.

    ‘당연히 누군가가 군사를 이끌고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저 남자일 줄은 몰랐지.’

    로메오는 슬금슬금 제임스의 눈치를 살폈다. 무뚝뚝한 얼굴은 감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일까.’

    분명 올리비아의 재혼 건으로 이안과 척을 졌을 텐데. 무엇에 낚여서 그가 여기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안심이긴 하지만.’

    북방 전투에서 제임스 파넬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사교계에서는 어리숙할지 몰라도 전장에서는 무서운 남자였다.

    ‘설마 올리를 또 걸고넘어진 것은 아니겠지.’

    로메오는 슬그머니 또 제임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정신만 차리면 그는 제임스를 관찰 중이었다.

    그러다가 제임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마주쳐왔다. 제임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습니까?”

    몰래 보고 있다고, 스스로는 굳게 믿고 있었던 로메오인지라, 이런 직설적인 질문이 날아오자 얼떨떨해졌다.

    “네?”

    “어서 하시죠. 제가 시선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그게.”

    “하시는 김에 말도 내려놓으시고. 이제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으신 분 아닙니까.”

    “…….”

    구구절절 옳은 말인데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은 결국 저 남자의 분위기 때문이리라.

    잠시 고민하던 로메오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예요?”

    “없습니다.”

    “북부에는 절대 안 갈 거라고 했잖아요.”

    “목숨을 걸었던 전우들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태황제 폐하께서 여쭈실 때는 마음이 그렇지 않았는데?”

    “사람이란 마음이 자주 바뀌지 않습니까.”

    옆에서 사람이 피를 토하며 쓰러져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같이 생긴 남자가, 마음이 자주 바뀐다니 믿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그것도 보통 사람들이나 그렇지!’

    로메오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제임스는 무뚝뚝한 어조로 뼈를 때렸다.

    “말을 타는 것에나 집중하십시오. 저를 북부 사령관으로 임명하기 전에 낙마로 목이 부러져 죽으면 얼마나 우스운 상황입니까.”

    “…….”

    그러니까 스타티스의 작전은 이랬다. 로메오가 북방에서 익숙하지 않음에도 열심히 싸우는 모습에 감화받은(?) 제임스가 찾아와서, 로메오가 다시 제임스를 북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돌아온다.

    그런데 로메오가 말도 제대로 못 타고 있는 것이다.

    ‘……그래. 말 위에서 정신이나 차리자. 저 남자를 본들 뭘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로메오는 한숨을 푹 쉬었다.

    북부까지도 꼬박 보름이 걸렸다. 로메오는 자기 눈으로 보게 된 북부의 실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게 정말 같은 나라가 맞아?’

    거칠게 펼쳐져 있는 넓은 땅, 가난한 사람들,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은 제반시설, 넘치는 고아.

    “북부는 원래 그렇습니다.”

    로메오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제임스가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로메오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하지만이 아닙니다. 식량이 비옥하게 생산되더라도 이민족이 훔쳐 가기 일쑤인 데다가, 식량을 지키다가 남자들은 죽어 나가니 고아가 됩니다. 지키는 데만 급급해서 도로나 학교를 지을 시간이 없죠.”

    높은 성벽이 보였다. 성벽에는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끼가 낀 아랫부분과 달리 위에 쌓인 돌들은 새것이었다.

    “지난번 습격 때 다시 정비한 성벽입니다. 그래도 그 뒤로 큰 사건이 없었던 것 같군요.”

    “…….”

    로메오는 입을 다물었다. 저 성벽을 쌓기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이 오갔을지 상상하기 벅찼다.

    ‘지난번 습격이라고 했지.’

    그건 아마도 눈앞의 남자가 막은 것이리라. 우두머리를 잡았다고 수도에도 소문이 자자했었다.

    잠시 말없이 성벽을 둘러보던 로메오가 제임스에게 물었다.

    “당신이 여기서 얼마나 있었다고 했죠?”

    “제가 스물에 왔으니, 다섯 해가 꽉 찼군요.”

    “…….”

    스물에 이런 땅에 사령관이라는 지위를 받고 와서 얼마나 막막했을까.

    말문이 막혀서 선 로메오를 보며 제임스는 코끝으로 한숨을 쉬었다.

    ‘실상은 그보다 곱절이나 더 오래 있었지.’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지 시간이 흐르길 간절히 기원하며 마음이 문드러지던 10년이었다.

    “집이 그립지 않았나요?”

    “그리웠습니다. 사무치도록.”

    제임스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해서 내뱉는 말과 뉘앙스가 달랐다.

    “제게 올리비아는 집과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애처롭게만 들렸다. 제임스는 자신을 응시하는 로메오의 시선을 눈치채고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을 원망하는 건 아닙니다. 올리비아를 탓하지도 않습니다.”

    제임스의 음울한 눈이 척박한 북부를 담았다.

    “돌아보니 제 고향은 다 부서지고 남은 것이 없어, 이제는 여기 뼈를 묻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로메오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뼈를 묻다니, 무척 묘한 말이었다.

    * * *

    군용으로 지급되는 육포는 질기고 맛도 없었다. 그저 고기를 먹었다는 느낌만 주려는 것 같았다.

    “왜 고기를 육포로 먹어야 하는 거죠?”

    로메오의 물음에 제임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육포는 수도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 주변에는 짐승들의 씨가 말라서 고기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왜요?”

    “이민족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험지에 살기 때문에 사냥을 주로 합니다. 훌륭한 활 솜씨를 가지고 있지요.”

    “그럼 이 지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거의 고기를 못 먹는단 말인가요?”

    “때때로 이민족들과 몰래 거래해서 얻어먹는 일도 있고, 집에서 닭이나 토끼 같은 가축을 키웁니다만…… 소는 농사에 필요하니 먹을 수 없고, 돼지는 키우기 어렵습니다.”

    로메오는 북부에 와서 비로소 세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생존에 떠밀려서 교육도, 여가도 즐길 수 없는 사람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로메오는 황후로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졌다. 이 또한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미래의 분기점이었지만, 제임스도 지금은 눈치채지 못했다.

    둘이 잘 맞는 듯, 맞지 않는 듯 지내는 사이.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뎅뎅뎅!

    한참 단잠에 빠져 있는데 어지러운 종소리가 울렸다. 침대에 누워 있던 로메오는 화들짝 놀라서 구르듯이 침대를 벗어났다.

    “뭐, 뭐예요?”

    부스스한 머리로 문을 열고 나서니, 이미 옷을 차려입고 검을 든 제임스가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침략입니다.”

    늘 이랬다는 듯이,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로메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서 옷을 갈아입었다.

    “도대체 무슨…….”

    밖은 어둡고, 적은 보이지 않았다. 무심코 제임스에게 다가가던 로메오를 제임스가 붙들어서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헉!”

    그리고 그가 있던 자리로 쐐애액- 하고 화살이 지나갔다. 제임스가 자신이 두르고 있던 허름한 망토를 벗어 로메오에게 둘렀다.

    “저들은 활을 잘 쏩니다. 어둠 속에서 밝은 옷을 입으면 표적이 됩니다.”

    “아.”

    왜 저렇게 검은색 일색으로 입고 다니나 했더니 전장에서의 습관이었던 모양이다.

    매서운 눈으로 전방을 살피던 제임스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로메오에게 말했다.

    “맨손으로 화살을 잡을 것 아니면 웅크리고 계시죠.”

    “아니, 그럼 경은…….”

    너는 뭐 맨손으로 화살을 잡을 수 있냐?

    그렇게 대답하려던 순간 제임스가 검을 들어 자신에게 날아오던 화살을 쳐냈다.

    “……네.”

    저런 사람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로메오는 얌전히 대답하고 웅크렸다.

    전투는 금방 끝이 났다. 작정하고 털어버리려고 온 것이 아니고, 그냥 한번 찔러본 것뿐인 듯했다. 해가 어스름 뜰 무렵, 공세는 완전히 사라졌다.

    장교 하나가 웃으며 제임스에게 말을 붙였다.

    “아마 장군께서 돌아왔나 확인한 것 같습니다.”

    “이제 장군이 돌아오신 걸 알았으니 또 조용하지 않겠습니까.”

    “시끄럽다.”

    제임스의 무뚝뚝한 대답이 무엇이 그리 좋은지, 그들은 다들 환하게 웃으며 제임스에게 살갑게 대했다. 그 모습을 보며 로메오는 눈을 깜빡거렸다.

    ‘저런 게 신뢰구나.’

    모두가 제임스를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안 될 일이었으니까.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로메오가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로메오를 향해 제임스가 손을 내밀었다. 로메오가 엉겁결에 손바닥에 손을 올리니 제임스의 미간이 확 찡그려졌다.

    “망토 돌려주십쇼.”

    “아.”

    로메오의 얼굴이 민망함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로메오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역시 나도 이 남자를 좋아하지 못하겠어, 올리!’

    올리비아가 들었다면 ‘거봐, 벽돌이라니까.’ 하고 웃었을 것이다.

    * * *

    물론 가벼운 노크 같은 거였다고 해도 침략은 침략이었다. 눈먼 화살에 맞아서 끙끙대는 병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으으, 아파.”

    “이거라도 물고 있어. 뽑아야 하니까.”

    “으윽!!”

    마취도 안 한 생살에서 화살을 뽑는 모습을 처음 본 로메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건 줄 몰랐어.’

    수도에서 북부의 상황은 늘 숫자에 불과했다.

    몇 번 침략했다더라, 몇 명이 다치고 몇 명이 죽었다더라, 제임스 파넬 공작이 간 뒤로 사상자가 몇 명으로 줄었다더라.

    ‘심지어 공을 세우겠다고 출전을 희망하는 사람들도 있었지.’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숫자로 세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희망했던 걸까.

    ‘이게 지배자가 짊어지는 무게.’

    이런 상황들을 끝없이 숫자로 보고 받으면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

    그게 바로 지배자였고, 이제는 스타티스와 로메오가 할 일이었다.

    ‘아무도 내게 이런 상황을 알려주지 않았어.’

    올리비아와 마찬가지로 로메오 또한 수도를 떠나본 적이 없었다. 로메오는 비로소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알아야 해.’

    스타티스가 제위에 있는 동안 이보다 더 큰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때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로메오도 세상을 알아야 했다.

    ‘피하면 안 돼.’

    그런 마음으로, 로메오는 병사들이 치료를 하고, 또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창백해진 로메오에게, 로메오를 따라 내려온 보좌관이 로메오를 걱정하여 물었다. 로메오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그 남자는 나처럼 적응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을 텐데.’

    로메오의 시선이 저절로 제임스를 찾았다. 이제는 한적해진 성벽을 걷다가, 로메오가 제임스를 찾은 것은 아주아주 어둡고 외진 곳이었다.

    그는 검을 꼭 끌어안고 혼자 눈을 감고 있었다.

    ‘자나?’

    하지만 분명히 자는 것은 아니었다. 로메오는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발소리에 제임스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메오가 물었다.

    “지금 뭘 하는 거예요?”

    “무얼 말입니까?”

    “지금 앉아서…….”

    로메오는 제임스가 안고 있던 검을 보았다.

    ‘넘버즈 투머로우.’

    분명 아까 화살을 쳐낼 때는 저 검이 아니었는데. 어둠 속에서도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검이 그 자리에 있었다. 제임스는 그것을 숨기듯 망토 안쪽으로 밀며 대답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거짓말.’

    근거는 알 수 없지만 확신이 들었다. 뭔가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는 걸.

    “어서 들어가 주무십시오.”

    제임스는 끝까지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돌아서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쿨럭!”

    커다란 몸이 무너지듯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의학에 문외한인 로메오의 귀에도 심상치 않게 들리는 기침이었다.

    로메오는 몸을 돌리고 떠나려는 제임스의 팔을 붙들었다.

    “사실대로 말해 봐요, 당신.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닙니까?”

    “저리 가시죠.”

    제임스가 성가시다는 듯이 손으로 로메오를 떠밀었다. 하지만 로메오는 더욱더 강하게 제임스를 붙들었다.

    “말해 봐요.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도울 테니까.”

    “비키라고……!!”

    화를 내며 제임스는 로메오를 밀쳤다. 그리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저런, 무례한!!”

    로메오의 보좌관은 무척 노여워했으나, 로메오는 같이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가 걸친 옷이 연한 색이기에, 더욱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피였다.

    * * *

    부하들의 말처럼, 제임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그 후로 본격적인 습격은 없었다.

    날이 따뜻하고 보드라운 어느 날, 로메오는 단상에 섰다. 계획대로 제임스에게 지휘봉을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황후에게 걸맞은 화려한 제복을 입은 로메오의 앞에 무릎 꿇은 제임스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령관, 명령을.”

    초라한 옷을 입은 사내가 이렇게 커 보일 수가 있을까. 로메오는 순간 목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로메오는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사령관이 아닙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요.”

    “네?”

    대본에 없던 대사에 제임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로메오는 어쩐지 울 것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당신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자격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당신이 이 북부의 진정한 사령관입니다.”

    “황후 폐하.”

    제임스가 조금 당혹스러운지, 눈살을 찌푸렸다. 로메오는 그런 그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켜 세웠다.

    “제가 꼭 병력 증설, 물자 보급 등 처우 개선을 황실에 건의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북부를 부탁합니다.”

    제임스의 눈꼬리가 쓱 올라갔다. ‘얘가 갑자기 왜 이렇게 살갑게 굴지?’라고 생각하는 게 뻔히 보였다. 로메오는 조금 우물거리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올리에게도…… 꼭 이야기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제임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메오는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고는 단상을 내려갔다.

    이미 지휘부는 다 알고 있는 계획, 보여주기조차도 비틀린 상황이었으나, 나중에 이 사건은 이렇게 역사에 기록된다.

    비겁한 수를 쓰지 않고 겸허히 상대를 인정한, 겸손한 황후

    -황제의 남자, 로메오 알키저스 편 中

    * * *

    태황제의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은 성품은 많은 적을 만들었다. 강직하고 불같은 성미의 사람들은 칩거하여 정계에 나오지 않았고, 교활한 기회주의자들은 비록 황제의 눈치를 보긴 했지만 진심으로 충성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접근한 것이 바로 이안이었다.

    “언제까지 자치권 없이 중앙 정부에 끌려다닐 셈이지?”

    이안이 접근한 것은 귀족회에서도 가장 큰 입김을 자랑하는 피에트로 백작이었다. 그는 태황제의 제1 후궁의 오라비이기도 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피에트로 백작은 오랫동안 황위를 가지고 저울질하는 황제 때문에 잃은 것이 많았다. 금전적으로나, 이권적으로나. 모두 조카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였으나, 마지막에 태황제가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스타티스였다.

    당연히 태황제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태황제의 동생 아닌가.’

    스타티스와 놀랍도록 비슷한 외양을 가진 이안을, 피에트로 백작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안은 눈을 내리깔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대라면 나와 같은 심정일 것 같으니 말일세.”

    “…….”

    그 말을 피에트로 백작은 바로 알아들었다.

    ‘하긴, 대공이 친동생이라는 사실조차도 오랫동안 감추셨지.’

    그게 바로 태황제였다.

    잠시 이안과 시선을 마주하던 피에트로 백작이 입술을 열었다.

    “……확실합니까?”

    자신에게 무슨 이권을 줄 것인가 물을 줄 알았던 이안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피에트로 백작은 피식 웃었다.

    “왜요? 의외입니까?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돈 몇 푼, 허가증 몇 개가 중한 것이 아닙니다.”

    “백작은 감정적인 사람이 아닐진대…….”

    “그러기에는 휘둘린 햇수가 스무 해가 넘습니다, 전하.”

    평생을 휘둘려 살았던 남자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 마음을 말로 하지 않아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확실하게 밀어낼 걸세.”

    “좋습니다. 저는 전하께 협력하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일사천리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설령 태황제에게 유감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번에는 손을 보탰다.

    새로 황위에 오른 황제에게 밉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무렵 로메오가 수도로 돌아왔다.

    * * *

    로메오가 수도에 입성한 것은 대회의 도중이었다. 대회의장은 조금 우스운 상황이 연출 중이었다.

    황제가 상석에 앉아 있고, 그보다 더 높은 상석에 태황제가 만두처럼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었다.

    서기관이 굳어진 얼굴로 글을 읽었다.

    “다음 안건은 폴카의 왕비 후보 선발입니다.”

    본래라면 이 부분에서 귀족들이 먼저 의견을 내야 하건만, 말을 제일 먼저 꺼낸 것은 가장 상석의 태황제였다.

    “폴카의 왕비 후보는 내가 마음에 둔 영애가 있는데…….”

    바로 릴리아나였다. 하지만 태황제가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회의장문이 열렸다.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전장에 있어야 하는 황후가 돌아왔다.

    태황제의 얼굴은 구겨졌고, 다른 귀족들도 웅성거렸다. 로메오가 열린 문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폐하.”

    “고생했습니다.”

    스타티스만이 의연하게 로메오의 인사를 받았다. 상석으로 로메오가 오르려는데, 태황제가 큰 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여기 있는 겁니까, 황후! 북방을 비워두고 온 것입니까?”

    태황제가 화이트폴과 거래한 내용은 바로 북방출정과 릴리아나의 혼사였다.

    ‘그런데 왜 황후가 여기 있단 말인가!’

    이것은 그가 화이트폴과 하는 거래에 큰 차질을 줄 수 있었다. 태황제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로메오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로메오가 침착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북방에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유능한 장수가 있어, 지휘권을 넘기고 귀환하였습니다.”

    “도대체 누구!”

    “바로 제임스 파넬 공작입니다.”

    로메오의 대답에 회의실은 일순간 시끄러워졌다. 그 소란을 잠재운 것은 태황제였다. 멋대로 책상을 두들겨 입을 다물게 한 뒤, 태황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파넬 공작은 북방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선언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바로 그때였다. 가만히 인형처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앉아 있던 스타티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명령했습니다.”

    “황제?”

    기가 막혀서 태황제는 책상 밖으로 몸을 내밀어 스타티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턱을 괸 채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스타티스의 건방진 태도에 분을 터뜨렸다.

    “어, 어째서 황제가 그런 명령을! 북방으로는 화이트폴이 갈 거라고 하지 않았소?!”

    그 말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는데, 너무 화가 나서 그런지 여과 없이 튀어나왔다. 화이트폴 후작과 태황제 사이에 오간 거래를 눈치챈 이들의 얼굴이 굳어졌을 때였다.

    스타티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 폴카의 왕비가 되고 싶은 소녀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아바마마.”

    조용한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모두가 원하는 자리를, 거래로 누군가가 가진다는 것이 과연 공정합니까?”

    완전히 자신을 부정하는 말에 태황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황제…….”

    “이제 아바마마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리고 나의 시대에서는 더 이상 이런 관행이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스타티스는 황제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물려주신 김에 편히 쉬시지요.”

    완벽히 태황제의 패배였다.

    * * *

    대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다른 안건들은 ‘태황제를 내쫓은 뒤’ 재논의하기로 했다. 회의장을 나오면서 태황제가 붙든 것은 당연히 자신의 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안이었다.

    “이안, 이안!”

    “예, 폐하.”

    이안은 공손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태황제는 믿음직한 동생의 팔을 붙들고 분통을 터뜨렸다.

    “어떻게 스타티스가 이렇게 할 수가 있지?! 너는 알고 있었느냐?”

    “황제 폐하께서 그동안 느꼈을 모멸감을 생각하면 예상 못 할 일은 아니었죠.”

    “뭐라고?”

    태황제는 이안이 스타티스를 ‘황제 폐하’라고 깍듯하게 높여 부르는 것에서 한 번 충격, 그리고 ‘모멸감’을 언급하는 데서 한 번 더 놀랐다.

    “이안, 너, 너는…….”

    “어머니와 달리 저는 살려두신 것에 감사하는 건 사실입니다.”

    이안은 자신을 붙들고 있는 태황제의 손을 정중하게 떼어내었다. 그리고 깔끔한 어조로 덧붙였다.

    “하지만 저 또한,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안…….”

    이안은 애타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태황제를 뒤로했다.

    ‘사는 게 그런 것이지.’

    어떻게 사람이 마냥 좋을 수만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양가감정을 가지게 되고 만다.

    태황제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견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기나긴 악연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이안은 태황제를 등 뒤에 두고 저벅저벅 걸었다. 등 뒤에서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휴.”

    태황제가 완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 다다라서야 이안은 걸음을 멈췄다.

    ‘분명 업보대로 받는 것일진대, 왜 이리 마음은 무거운 것인지.’

    이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을 때였다. 케닌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안에게 성큼 다가섰다.

    “전하.”

    “……조금 있다가 이야기해.”

    이안은 케닌을 쳐다보지도 않고 매정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케닌이 슬금슬금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대답했다.

    “후회하실 텐데요?”

    “후회는 네가 하겠지. 요즘 내가 만만한가 본데…….”

    “편지가 왔습니다!!”

    이안이 화를 내기 전에, 케닌은 냉큼 소리부터 질렀다. 이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편지가 무슨…….”

    거기까지 이야기한 이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케닌이 지금 이 상황에서 히죽거리며 들고 올 편지가 뭐가 있겠는가!

    “빨리 줘!”

    “그러게, 후회하실 거라니까.”

    케닌은 성질 급한 상관에게 구시렁거리며 편지를 내밀었다. 오랜 시간 험한 여행길을 견디면서 건너온 편지는 모서리가 닳아져 있었다.

    앞면에는 딱 떨어지는 필체로 발신인이 적혀 있었다.

    -올리비아 타이론

    ‘올리비아!’

    이안은 떨리는 손가락을 연신 미끄러뜨리며 편지를 열었다. 간절히 기다리던 것이 무색하도록, 편지 내용은 무척이나 간결했다.

    -보고 싶어요.

    “…….”

    이안은 물끄러미 편지지를 들여다보았다. 동상이 된 것처럼 굳은 모습이 어색하기만 했다. 케닌이 뻘쭘한 표정으로 이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 저기요, 전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가만히 굳어 있던 남자가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케닌은 엉겁결에 그의 뒤를 따라 뛰며 물었다.

    “저, 전하! 전하! 왜 그러시는 거예요? 어디 가세요?!”

    이제 막 태황제를 밀어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황궁에 태황제를 지지하는 세력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인데!’

    잘못해서 역풍을 맞으면 어쩌려고?! 케닌의 애타는 마음도 외면한 채, 이안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올리비아를 만나러 갈 거야!”

    “뭐라고요?”

    “올리비아를 만나러 갈 거라고!”

    이만하면 오래 참았지!

    * * *

    하지만 황궁을 내달린 것처럼 대공 정도의 신분이 오르세로 넘어가는 건 간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운이라고 해야 할까. 적절한 명목이 있었다.

    ‘오르세 사절단의 귀환 배웅’.

    마이옌 공과 달리 제국에 남았었던 오르세 사절단이 귀환하고 있었다.

    사절단은 이미 일주일 전에 귀환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잠도 자지 않고 말을 타고 꼬박 내달려서야 겨우 그들에게 합류할 수 있었다.

    ‘이제 올리비아를 만날 수 있어!’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아주 오랫동안 참았으니까.

    ‘이번에야말로 고백할 거야.’

    이안은 자신의 품에 든 묵직한 주머니를 꾹 쥐었다. 그 안에는 그가 올리비아에게 선물하려 마음먹은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렇게 열심히 오르세 왕궁에 도착해서도, 이안은 곧장 올리비아를 만날 수 없었다. 오르세 국왕이 돌아온 사절단을 보고 난처해하면서 말했다.

    “허어, 내가 기껏 마이옌 공의 딸을 찾은 것을 축하하는 환영회를 오늘 열기로 했는데.”

    그의 말인즉슨, 환영회와 사절단의 귀환이 겹쳤다는 것이다.

    “내 체면도 있으니, 이틀만 귀환 소식을 늦게 알리면 어떻겠소? 대신 왕궁에서 융숭하게 대접하겠소.”

    누구 명이라고 거절하겠는가.

    그런 이유로 이안의 도착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내 아내라는 사실도 알려지지 않은 것 같군.’

    마이옌 공이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숨긴 것 같았다.

    ‘빨리 보고 싶은데.’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마음이 닳아졌다. 이안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무도회 반대편의 후원을 거닐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 귀걸이와 티아라는 보통 물건이 아니에요. 맞죠?”

    “!!”

    이안은 깜짝 놀라 그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올리비아!’

    그곳에는 꿈에 그리던 그의 아내가 서 있었다.

    ‘그런데 저놈은 뭐야?’

    웬 비리비리한 놈팡이와 함께.

    놈팡이는 유들유들해 보이는 얼굴에 작달막한 녀석이었다. 그는 올리비아를 향해 뺨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어마마마께서 마음에 드는 여인이 생기면 선물하라고 주신 것이에요.”

    마음에 드는 여인. 귀에 거슬리는 단어가 쏙쏙 들렸다.

    ‘설마…….’

    이안은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니코 왕자를 쏘아보았다. 올리비아가 새침한 어조로 물었다.

    “그걸 왜 제게 주셨죠?”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안은 화가 치밀어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역시 올리비아에게 집적거리고 있었구나!’

    역시 품에서 떼어놔서는 안 되었다. 이안은 다시는 아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리라 재차 다짐하며 귀를 기울였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니코 왕자의 말은 점입가경이었다.

    “그리고 아셨을 거 아닙니까. 당신의 남편이 누구인들 간에 저보다 나을 수 없다는 걸요.”

    ‘뭐 인마!’

    아주 기가 막히는 소리였다. 상대는 뭘 들이대도 이안보다 한참 밑질 것 같은 꼬맹이였다.

    ‘당장 멱살 잡고 끌어내 버려야…….’

    다소 위험한 상상을 하며 이안이 막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올리비아가 허리에 손을 얹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제 남편이 길가의 비렁뱅이일지라도 그 사람이 제가 사랑하는 남자예요. 그러니 이런 불쾌한 일은 벌이지 말아주세요.”

    “……!!”

    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분명 니코 왕자에게 말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것 같았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씩씩하지?’

    올리비아의 모든 것이 좋았다. 한없이 연약하여 흔들릴 때도, 그에게 간절하게 매달릴 때도.

    하지만 역시 제일 좋을 때는 그녀가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씩씩하게 대답할 때였다.

    ‘짜릿해.’

    그가 사랑하고, 또 그를 사랑하는 여자가 지금 바로 눈앞에 있었다.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이안은 와락 올리비아를 끌어안았다. 말랑하고 포근한 촉감이 비단처럼 팔에 달라붙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그리운 향기가 그를 독한 술처럼 취하게 했다. 이안은 니코 왕자를 향해 낮게 일갈했다.

    “그러니까 내 아내에게서 썩 꺼져!”

    * * *

    나는 놀라서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이안의 옆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며 그의 이름을 부르니, 그가 눈을 사르르 접으며 곱게 웃었다.

    “네, 올리비아.”

    “정말 당신이에요?”

    “이렇게 잘난 남자가 세상에 또 있을까요?”

    뺀질뺀질한 대답을 보니 이안이 확실했다. 내가 붕어처럼 멍하니 입술만 벙긋벙긋할 때였다.

    보는 앞에서 꺼지라는 소리를 들은 니코 왕자가 화가 나서는 발을 쿵쿵 굴렀다.

    “뭐, 뭡니까! 무례한 사람 같으니……!”

    나름의 위협 행동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안이 조금 더 여유로운 어조로 대꾸했다.

    “무례한 건 남의 아내에게 함부로 들이대던 당신의 행동이죠.”

    이안의 말에 니코 왕자의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당신이 제 사촌의 남편이란 말입니까?”

    “네. 그러니 실컷 보시고 대답하시죠, 정말 제가 당신보다 못났는지.”

    “뭐……!!”

    버럭 하려던 니코 왕자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나라도 그럴 것 같았다.

    ‘와, 새삼 다시 보니 키가 작네.’

    단둘이 서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안과 이렇게 마주 서니 확실하게 알겠다.

    ‘얼굴도…….’

    니코 왕자는 평범하게 못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반짝반짝거리는 이안 앞에 있으니 한 마리 오징어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짠한 눈으로 내 사촌을 바라보았다. 니코 왕자도 스스로 그렇게 느낀 것인지,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내게 버럭 했다.

    “당신이 외면에만 휘둘리는 그런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하?”

    외면에만 휘둘린 게 누군데!

    기가 막혀서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해줄 새도 없이 그는 돌아서고 말았다.

    “이런.”

    저렇게 돌아섰으니 돌아가서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 아닐까. 내가 고민에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부드러운 입술이 촉 하고 내 뺨에 닿았다.

    “제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죠?”

    “이, 이안.”

    “올리비아.”

    귓가에 속삭여지는 그의 목소리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났다.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지, 한층 더 매혹적이었다.

    ‘안 돼! 지금 이렇게 있을 때가…….’

    그의 품을 빠져나가야 했건만, 내가 그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밀기 무섭게, 그가 두 팔로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보드라운 입술이 내 입술을 꽉 틀어막았다.

    “읍!”

    그의 체취가 훅하고 밀려들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의 품이었다. 나를 꽉 붙드는 팔에, 나도 모르게 매달렸다.

    ‘이안.’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뒤로 쓰러질 듯 나의 허리가 휘자, 이안이 내 등을 받치며 입술을 떼었다.

    “드레스가 매혹적이네요. 당신의 흰 피부와 잘 어울려요.”

    그가 내 어깨에 살짝 잇자국을 내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빗장뼈 쪽으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내 상상하고 똑같아.’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의 그에게 내 몸을 맡기고 싶을 때였다.

    “엄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몸에 힘을 주어 서며, 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아, 안 돼요.”

    “올리비아?”

    이안이 의아한 어조로 나를 불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나는…….”

    나는 아직 당신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오르세에 있는 동안은 만나지 않는다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왜 이 남자는 내 앞에 있단 말인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예요?”

    “당신이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내 목소리가 분명 이상했을 텐데도, 이안은 부드럽게 내 말에 대답을 해주었다. 자신의 입술을 막고 있는 내 손등을 부드럽게 감싼 남자가,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촉, 하는 소리와 함께 묘하게 야릇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당신 말을 잘 듣잖아요.”

    내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동시에 나는 울고 싶어졌다. 내 편지라니.

    ‘보고 싶다고 적은 그 한 줄 편지?’

    고작 그 한마디에, 당신은 머나먼 타국까지 날 쫓아왔단 말인가.

    애정을 담뿍 담은 눈동자가 어두운 밤하늘 아래 나를 응시했다. 부드럽게 휘어진 푸른 눈동자가 도리어 내 마음을 할퀴는 것만 같았다.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면 저 눈이 일그러질지도 몰라.’

    그런 상상을 하니 겁이 더럭 났다. 나는 그가 붙든 손을 뿌리쳤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날 마주 보는 사람에게 버럭 소리도 지르고 말았다.

    “나, 나는 지금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뭐라고요?”

    “당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요!”

    “……?!”

    놀란 듯 입술을 오므리는 이안의 얼굴이 낯설었다. 더 이상 보고 있었다가는 울면서 사실대로 술술 불게 될 것 같아, 나는 몸을 휙 돌렸다.

    ‘정말 보고 싶었는데. 이게 뭐람!’

    마음이 뒤죽박죽이었다. 당장 안겨서 위로받고 싶은 마음 반, 그가 날 뿌리칠까 두려움이 반이었다. 결국, 택한 것이 도망이었다.

    “잠깐만요, 올리비아.”

    재게 발을 놀리는 나를 보고 퍼뜩 정신을 차린 이안이 등 뒤에서 나를 불렀다.

    “기다려요!”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마음을 애절하게 쥐어짰지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헉!”

    턱하고 발이 바닥에 튀어나온 돌에 걸렸다. 몸이 크게 기우는 것을, 이안이 안아주었다.

    “으쌰.”

    분명 무거울 텐데도, 그는 솜뭉치라도 드는 것처럼 가벼운 소리를 내며 나를 안아 들었다.

    놀란 내가 가볍게 발을 휘적이자, 그가 조심스럽게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알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보고 싶지 않다면 일단 물러나 드리죠.”

    내게 가까워진 얼굴이 가라앉아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니, 애달픈 미소가 되었다.

    “저는 당신 말을 잘 들으니까요.”

    “윽.”

    그 말을 들으니 또 마음이 바늘로 찔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착하게 말하지 말아요.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요…….”

    언제 애달파했냐는 듯이, 이안은 냉큼 내 말꼬리를 잡았다.

    “물론, 올리비아는 나쁜 사람이 아니죠. 당신 얼굴을 보겠다고 국경도 넘은 남자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팽개쳤지만요.”

    “윽.”

    뼈를 때리는 말에 반박할 말도 없어서 나는 입만 벙긋거렸다.

    ‘비겁하게 팩트로 공격하기냐!’

    내가 그를 흘겨보자, 이안은 거짓으로 눈물을 닦는 척을 하며 덧붙였다.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다짜고짜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괜찮습니다. 전혀 나쁘지 않아요.”

    “……얄미워.”

    “하하하.”

    내 투정에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말해줘요, 올리비아. 뭐 때문에 도망치는 겁니까?”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가 신경 쓰였다. 나는 고개를 휙 돌리며 중얼거렸다.

    “말하면 싫어할 거예요.”

    “절대로 안 싫어해요. 당신을 싫어할 사람이었으면 아까 당신이 돌아설 때 이미 오만 정 다 떨어졌어요.”

    “……그렇게 방금 행동이 밉상이었어요?”

    오만 정 다 떨어졌을 거라는 말에 찔끔한 내가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는 눈을 찡긋하며 대답했다.

    “당신이니까 참았습니다.”

    “못 살아, 진짜.”

    어이가 없어져서 나는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막상 웃기 시작하니,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고민을 한 거람.’

    참 어리석은 일이었다. 막상 그를 마주하고서야 깨닫다니.

    내가 믿지 못한 것은 이안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이었다.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봐.’

    오르세에서 아버지에게 받은 모든 것들이 다 불편했던 것도, 나를 쫓아 여기까지 온 남편을 뒤로하고 도망쳤던 것도 결국 다 내 마음의 문제였다.

    ‘그저 솔직하게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는데.’

    나는 허리에 힘을 주고 몸을 반듯하게 세웠다. 마음이 가벼워져서인지, 고민했던 말은 생각보다 훨씬 가볍게 흘러나왔다.

    “나 임신했어요.”

    “……뭐라고요?”

    이안이 알아듣지 못한 듯, 재차 물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또박또박 대답해주었다.

    “나, 당신의 아기를 가졌다고요.”

    이 남자는 또다시 멍한 어조로 말했다.

    “다시, 다시 말해줘요.”

    첫 번째는 후련했고, 두 번째는 조금 떨렸다. 하지만 같은 말을 세 번째 반복할 때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냥 찰떡같이 좀 알아듣지!’

    나는 또박또박 한 단어 한 단어 잘라서 소리치듯 말했다.

    “당신의! 아기가! 내 배 속에! 있다고요!”

    소리를 지르고 나서 조금 아차 싶었다.

    ‘이렇게 버럭대면서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조심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야기해도 모자랄 판에 소리를 지르는 게 웬 말인가.

    내가 스스로 반성하고 살짝 어깨를 움츠렸을 때였다. 한참 동안 멍하니 내 배를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아직 배가 안 나왔는데?”

    “임신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배가 나와요! 배가 나오는 건 아기 낳기 두세 달 전부터예요.”

    이렇게까지 임신 출산을 모를 수가 있나. 그렇게 생각했다가 문득 제임스를 떠올려보니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금 빠르게 덧붙였다.

    “그때 생겼어요. 당신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제가 그냥 하자고 했던 그때.”

    “아.”

    내 말에 이안은 눈을 깜빡거렸다.

    “당신이 먼저 내게 다가왔었던 그때?”

    “으악! 왜 그런 것만 상세하게 기억하는 건데!?”

    하늘에 맹세하건대 내가 저 남자와 결혼한 뒤, 내가 먼저 유혹한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그런데 그 유일한 유혹이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서 내 뒤통수를 칠 줄이야.

    ‘항상 부끄러움은 내 몫이야. 이래서 사람은 한순간도 충동에 몸을 맡기면 안 되거늘.’

    얼굴이 화끈거려서 나는 손바닥으로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 뒤로 우리 사이에는 말이 오가지 않았다.

    이안은 묵묵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결국 침묵이 불편해진 내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그게…….”

    하지만 이안은 입술을 벌렸다가 다시 앙다물어버렸다.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역시 지나치게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네?”

    내 사과에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모두 나 때문이에요. 아기를 낳지 않기로 했으면서 피임을 제대로 못 하고…….”

    그때 그렇게 충동적으로 굴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어색할 일도 없었을 텐데.

    ‘나는 정말 바보야.’

    저절로 눈에 눈물이 고였다. 바로 그때였다. 이안이 두 손으로 내 어깨를 붙들었다.

    “아니, 아니에요. 사과하지 말아요.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 계속 불편해하고 있잖아요.”

    “불편한 게 아니에요. 저는…… 음, 그러니까.”

    이안은 얕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신기하다?”

    “신기해요?”

    “아버지가 될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하지만 신기한 거랑은 좀 달라요. 가슴이 간질간질하기도 하고.”

    잠시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이안이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기쁨인가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도 다행이야.’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안의 얼굴 어디에서도 불쾌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제야 내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당신이 아기를 지우라고 할 줄 알았어요.”

    “네?”

    내 말에 이안은 정말 깜짝 놀랐다. 나는 살짝 눈을 내리깔며 덧붙였다.

    “아니면 당장 이혼하자고 할 줄 알았어요.”

    “잠깐만요. 왜 그렇게 극단적인 겁니까?”

    “하지만 당신은 정말로 아기를 가지고 싶어 하지 않았잖아요.”

    “올리비아.”

    이안의 손바닥이 내 오른뺨을 감쌌다. 그의 말간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지난 며칠 동안 고민했던 것이 떠올라서 울컥했다.

    ‘……내가 얼마나 불안했는데.’

    내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이안의 둥근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안이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키스해도 됩니까?”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슬쩍 그를 흘겨보며 대답했다.

    “지금 심각한 이야기 중인데.”

    “심각하니까 더더욱요.”

    “……입술만 댔다가 떼어요.”

    “네네.”

    이안은 얌전하게 대답했다. 커다란 두 손이 내 얼굴을 감싸고, 알싸한 향기가 훅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더니.

    “읍!”

    입술을 비집고 말캉한 살덩이가 밀려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비틀어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가 강한 힘으로 오히려 나를 자신에게로 잡아당겼다.

    얽어오는 혀가 뜨거웠다. 허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등줄기가 짜릿했다. 한참이나 각도를 달리하며 입을 맞춘 끝에야, 이안은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팡 때렸다.

    “정말! 이럴 때 말을 안 듣죠.”

    “하하.”

    꽤 힘을 실어서 때렸는데도 아프지도 않은지 키득키득 웃는다.

    두꺼운 팔이 나의 허리를 휘감고 자신의 몸으로 바짝 잡아당겼다. 깜짝 놀라, 그의 팔에 매달리니 사르르 웃는 얼굴이 반짝였다.

    “키스할 때 어땠어요? 여전히 날 사랑합니까?”

    “그게 무슨 질문이에요?”

    여전히라니. 질문의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다. 나는 한시도 그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이가 생겼을 때도 그에게 미움받는 게 가장 두려웠을 정도로.

    그리고 그런 마음은 이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숨 쉬는 시간도 아까워요. 입을 맞추기에도 부족하거든요. 여기까지 오면서 이번에야말로 침대 밖으로 일주일은 안 나올 거라고 몇 번을 다짐했는지 모릅니다.”

    적나라한 말에 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의 이런 말에 심장이 간질간질하다면 내가 이상한 걸까.’

    예전이라면 남사스러운 소리 그만하라고 등짝을 때렸을 텐데,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나는 눈물이 고인 눈을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나를 붙들고 있던 손을 풀었다.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던 겉옷의 안주머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안에서 나온 것은 빨간 물방울 모양 보석이 길게 늘어지는 목걸이였다.

    “당신의 눈동자 색과 비슷한 것 같아서요.”

    “예뻐요.”

    이안이 조심스럽게 내 목을 감싸듯 내 목덜미에 손을 가져왔다. 그리고는 툭 하고 내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바로 내 아버지 마이옌 공이 어머니에게 선물했던 그 목걸이였다.

    “크리스털 목걸이는 당신의 부모님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죠. 하지만 이제 당신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있지 않습니까.”

    “이안.”

    새로운 목걸이가 묵직하게 가슴으로 늘어졌다. 달칵 소리와 함께 목걸이를 채운 이안이 고개를 숙여 내 콧잔등에 입을 맞추고, 내 눈가에 입을 맞췄다.

    “이제 가족이 된 거예요. 곧 태어날 아기와 당신, 그리고 나.”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내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바스락!

    그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울리는 소리에 나와 이안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 와중에도 나를 보호하듯, 이안은 나를 자신의 등 뒤로 보냈다.

    희미한 불빛 사이로 회랑에서 걸어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아버지 마이옌 공이었다.

    “하도 안 오기에, 걱정이 되어…….”

    “아, 아버지.”

    그러다가 나와 이안이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시고 멈추어 선 것이다.

    ‘못 살아!’

    아버지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민망함에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 * *

    니코 왕자의 활약(?)으로 사절단의 귀환은 예정보다 빨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안은 완벽한 사교용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제국의 이안 타이론 대공입니다. 여기 올리비아의 남편이지요.”

    국왕에게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이안은 타국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안의 소개에 등 뒤에서 소곤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안 타이론 대공이라면…….”

    “그, 소문의 소유자 아닌가요?”

    “부실하다던…….”

    ‘맙소사, 이 나라에도 다 소문이 나있구나.’

    나는 슬쩍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 어디에도 꺼림칙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르세어를 몰라서 다행이야. 이건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있어야겠다.’

    물론, 이안은 제국에서도 대국민 고자라는 별명에도 꿈쩍도 하지 않던 사람이다.

    ‘그러나 타국에서도 대국민 고자로 불린다는 걸 알면 그렇게 의연하기 어렵지 않을까.’

    진실은 저 너머로.

    이안의 소개에 왕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내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게 불쾌한 듯싶었다.

    “아내보다 많이 늦으셨군요.”

    “네. 특별히 가져와야 할 것이 있어서요.”

    이안은 품에서 밀랍이 쾅 찍혀 있는 편지를 꺼냈다.

    “황제 폐하의 친서입니다.”

    “오오.”

    오르세 사절단이 아버지보다 유독 늦게 귀국한 것에는 스타티스 황제의 즉위도 한몫했다.

    새 황제가 즉위하면 각국에서는 축하사절단을 보낸다. 그러나 이미 제국에 체류하고 있던 오르세 왕국 입장에서는 즉위식을 참석하고 오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각국으로 황제가 바뀌었으니 잘 지내보자는 내용의 친서를 보내지.’

    그걸 이안이 들고 온 것이다.

    ‘참 용의주도한 사람이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르세로 넘어올 수 있었나 했더니, 저런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신기한 눈으로 이안을 응시하니 이안은 눈을 찡긋했다.

    “물론, 제가 미친 듯이 달려온 것도 있습니다. 오르세 사절단은 지금쯤 저에게 넌더리를 내고 있지 않을까요?”

    “왜 그렇게 무리해서 일찍 온 거예요?”

    “당신이 나를 보고 싶다고 했으니까요.”

    “네네.”

    또다시 그 ‘말 잘 듣는 착한 남편’ 타령인가 보다. 나는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소란이 있었지만, 무도회는 다시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이안의 외모는 오르세에서도 먹혔다.

    “어머나, 남편분이 정말 멋지시네요. 잘 어울리세요.”

    “세상에! 미의 남신이 강림한 것만 같아요.”

    “타이론 대공 전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타국의 고위귀족이라는 점도 매력적이지만, 그 남자가 키가 훤칠하고 잘생기기까지 했다면 화제는 더 만발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그에게 이상한 소문까지 붙어 있다면.

    “그 소문이 진짜냐고 물어볼까요?”

    “예끼! 어떻게 물어보나요.”

    수군수군하는 말에도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가 무도회 내내 잡혀 있겠어.’

    울었다 웃었다 화냈다 감정이 격하게 오간 탓인지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내가 피곤함에 눈을 살짝 깜빡였을 때였다.

    나를 이 상황에서 구해준 건 아버지였다.

    “사위와도 긴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오늘은 일찍 돌아가 보겠습니다.”

    국왕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아버지는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를 구해주었다.

    “아버지!”

    내가 환하게 웃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아버지가 굳어진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네와 나는 할 말이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구해준 게 진짜 구해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은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이 오갔다.

    ‘아버지께서 오해하시면 어떻게 하지?’

    나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굳어진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와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는 이안을 쳐다보았다.

    ‘으으, 이렇게 일이 풀릴 줄 알았으면 임신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하지 않았을 텐데!’

    이미 아버지는 이안이 아기를 원하지 않으며, 내가 그로 인해 그에게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사위가 짜잔 하고 나타났으니.

    ‘우리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나 가늠하고 계실지도 몰라. 아니면 아예 먼저 뭐라고 불호령을 내릴까 고민 중이실지도.’

    어느 쪽이든 조마조마하긴 매한가지였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때였다. 아버지의 시선이 나를 스치다가 반짝 빛났다.

    “목걸이…….”

    “네?”

    “아니.”

    “?”

    아버지의 중얼거림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반복하여 말하는 대신 시선을 이안에게 고정했다.

    “저는 아직 당신을 사위로 완전히 인정한 게 아닙니다.”

    “아, 아버지.”

    “우선 내 말부터 들어요.”

    시작부터 거친 말에,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버지를 불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또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안이 그런 내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요, 올리비아.”

    “하지만…….”

    너무나 변수가 많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다.

    ‘아버지가 아기도 싫다는 놈이 왜 피임도 신경 쓰지 않았냐! 이러면서 한 대 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정중하고 온화한 아버지를 봐서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었지만, 때때로 부모는 상상치 못한 일도 해낼 수 있는 존재인 법이다.

    내가 초조함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과 달리, 아버지와 이안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아버지였다.

    “몇 가지, 묻고 싶습니다.”

    “얼마든지요.”

    무슨 질문이냐! 나까지 잔뜩 긴장해서 귀를 기울였을 때였다.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올리비아를 괴롭게 했던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

    ‘그야, 플로렌스 자작과 파넬의 진상들이지만…….’

    이안에게 왜 그것을 가장 먼저 묻는단 말인가.

    ‘아버지, 역시 내 말을 마음에 두고 계셨던 걸까?’

    마차 안에서, 내가 파넬에서 당했던 온갖 수치와 모욕을 듣고 부들부들 떨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는 감격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그런데 그 질문에서 감동을 느낀 건 나뿐인 모양이다. 내 시선을 받은 아버지는 조금 당황했고, 이안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올리비아. 잠깐만 눈을 감고 있어볼래요?”

    “네?”

    “빨리요.”

    “……?”

    아니, 왜 내 눈을 감아야 해?

    하지만 내 의아함에 대답 대신 이안은 빨리 눈을 감으라고 재촉만 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눈을 꽉 감았다.

    뭔가, 이안이 제스처를 취한 것 같았다. 아버지가 꽤 흡족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랬군요.”

    “그렇습니다.”

    “……?”

    그렇긴 뭐가 그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떴다. 두 남자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물었다.

    “지금 두 분이 뭐 하는 거예요?”

    뭐, 왜? 내 일인데 당신들끼리 무슨 수신호를 주고받는 건데?

    ‘나도 알려줘라! 날 괴롭히던 사람들이 무슨 상황인지!’

    진상들도, 플로렌스 자작도 아주 즐겁게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보아 하니 무언가 있는 모양이다. 내가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아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다음에 이어진 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다시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진지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태어날 아기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이안 또한 꼿꼿한 자세로 성실하게 대답했다.

    “제가 아기를 낳고 싶지 않다고 했던 것은 순전히 제 혈통을 태황제께서 견제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아기를 싫어하는 건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고르던 이안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그 문제를 막 해결하고 오던 참입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문제를 해결해요?”

    “태황제께서는 축출되셨습니다. 앞으로 대회의를 비롯한 어떤 정치적 화합에도 의견을 내실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이안의 말에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처음 듣는 말에 여러 가지 단어들이 낯설게 튀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이안은 이제 자유였다.

    “이안……!!”

    나는 감격해서 이안의 팔을 붙잡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괴로워했는데.’

    태황제는 갓 태어난 이안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은 사람이었다. 이안을 사랑하지 않는 양부모에게 떠넘기고, 화이트폴에서 나쁜 기억이 생기도록 방치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 사람을 밀어내다니.’

    아주 어릴 때부터 그를 지배하던 나쁜 괴물을 몰아낸 것이다.

    이안이 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그의 체온이 익숙하게 날 감싸 안았다.

    이안이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내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는 아버지가 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장인어른. 걱정하지 말고 맡겨주십시오.”

    “흠.”

    내 아버지는 이안의 말에 턱을 문질렀다. 근엄한 얼굴을 내가 긴장하여 바라보았을 때였다.

    아버지의 얼굴이 일순간 부드럽게 풀렸다. 아버지는 허허로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일까요. 괜찮은 사내인데도 한없이 내 딸을 훔쳐 가는 도둑놈처럼 보이는 게.”

    “아버지…….”

    “여태껏 아버지로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더 제가 해줄 것도 없군요.”

    아버지가 온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훌륭하게 제 앞길을 헤치고 나갔군요, 올리비아. 장합니다.”

    “아버지.”

    다정한 칭찬의 말에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처음부터 잘 헤치고 나간 것이 아니에요, 아버지.’

    내가 걸어온 많은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게 손수건을 내미는 마이옌 공을 보고도 아버지인지 모르고 지나쳤던 일, 병상에 누워 하염없이 울어도 누구 하나 달래주지 않았던 날들,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던 차가운 밤.

    ‘용기를 내길 잘했어.’

    나는 말없이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이안의 손을 꽉 붙들었다.

    ‘포기하지 않길 잘했어.’

    불행에 그대로 잠식될 수도 있었다. 지난 생에도 그리 발버둥을 쳤는데도 어쩔 수 없었지 않냐고 자신을 이해시키면서 쓰레기통으로 걸어 들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길 잘했다. 희미하게 보이는 미래에 내 인생을 걸기를 잘했다.

    아버지의 칭찬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대답하면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런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온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정중하게 이안에게 허리를 굽혔다.

    “내 딸을 잘 부탁합니다, 타이론 대공.”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보다 이안의 손이 빨랐다.

    “마지막처럼 말씀하지 마세요, 장인 어르신.”

    이안은 차분히 아버지를 일으키며 말했다.

    “이 사람은 대차 보여도 외로움을 많이 타고 가족을 무척 그리워한답니다. 부디 자주 찾아와주세요.”

    “이안.”

    거슬림 없이 부드럽게 정리하는 그의 태도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 * *

    우리가 마이옌 저택에 오고 나서 조금 시간이 흘러서 한 무리 손님이 또다시 방문했다. 바로 이안을 따라서 오르세로 온 일행들이었다.

    반가운 얼굴이 나를 보며 눈을 글썽였다.

    “비전하!!”

    “케닌!”

    바로 이안의 보좌관 케닌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케닌을 보며 활짝 웃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수도 일은 어떻게 하고요?”

    “하하하, 제가 똥손이라서…….”

    케닌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케닌의 설명을 들어보니 이안을 따라 오르세로 오는 것은 제비뽑기로 정했다고 한다.

    “평소 제가 운이 안 좋다고는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제가 당첨될 줄은 몰랐죠.”

    “운이 안 좋은 건가요? 좋은 거 아닌가요? 타국까지 나올 기회는 거의 없잖아요.”

    “그건 비전하께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직접 겪어보지 않아서 그러십니다.”

    케닌의 설명에 의하면 제정신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지옥의 강행군이었다고 한다.

    “오르세 사절단 사람들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셔야 했는데…….”

    “저런.”

    나는 밤낮없이 이안을 수행하느라 고생하는 케닌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돌아가는 길은 그렇게까지 험하지 않을 테니까요.”

    “과연 그럴까요? 저희 전하께서는 빨리빨리 병의 숙주 같은 분이라 비전하께서 계시더라도…….”

    이안에게 적잖이 시달렸는지, 내 말도 믿지 않았다. 나는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빨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을 거예요. 임산부는 험하게 돌아다니면 안 되거든요.”

    “……뭐라고요?”

    내 말에 케닌은 돌처럼 굳어졌다. 나는 한층 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임신했어요, 저.”

    “신이시어…….”

    아니, 반응이 왜 이래?

    ‘상사의 아이가 생긴 것을 기뻐하는 반응이 전혀 아닌데.’

    나는 갑자기 핼쑥해진 케닌을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해답은 조금 있다가 우리에게 다가온 이안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이안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임신 소식을 들었나? 그럼 이야기는 빠르겠네. 자네의 소속변경은 그런 이유로 당분간 없을 예정이다.”

    “으아아아아.”

    나중에 알고 보니 나와 재회하게 되면 이안은 케닌을 내 소속 보좌관으로 임명해주겠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임신으로 당분간 실무에서 떨어져 있을 테니.’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이안의 보좌관 확정.

    “으아, 으아, 으아.”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해파리처럼 흐늘거리는 케닌의 어깨에 턱하니 이안의 팔뚝이 올라갔다. 겉만 보면 사이좋은 친구 같았다.

    “너무 좋아서 그러나? 빨리 좋다고 해.”

    “……좋아서 눈물이 납니다.”

    “목소리가 작다.”

    “좋아서 죽겠습니다!”

    두 사람의 만담 아닌 만담을,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지켜보았다.

    그렇게 터덜터덜 케닌이 비참하게 퇴장한 뒤, 이안이 성큼 다가와서는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올리비아.”

    “이안!”

    나는 반사적으로 내 허리를 휘감는 그의 팔뚝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아무래도 팔이 닿는 부위가 배이다 보니 신경이 쓰였다.

    “이렇게 갑자기 끌어안는 건 지양해줘요. 물론, 당신이 조심할 거라는 건 알지만…….”

    “네, 명심하죠.”

    이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나의 귓가에 은근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건 그렇고 이제 침실로 들어가야지요?”

    어째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침실!’

    사람들이 제국어를 알아들을 리가 없는데도 눈치가 보였다. 나는 이안의 팔을 붙들고 다짜고짜 걸음부터 옮겼다.

    하녀를 내보내고 방 안에 둘이 남아서야 한숨이 폭 나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안을 마주 보았다.

    “첫날부터 한 침실에서 보내면 아랫사람들 보기 민망할 것 같은데요.”

    게다가 그는 엄연히 손님 자격으로 머무는 것 아니던가.

    하지만 이안은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장인 어르신께서는 흔쾌히 한 침실을 쓰라고 하시던데요.”

    “아니, 둘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한 침실을 사용하라니!

    내 얼굴이 다시 화르르 불타올랐다. 이안은 재미있다는 듯이 능글능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장난치지 말아요.”

    “하하.”

    이안은 키득키득 웃으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목덜미를 스치는 이안의 숨결이 오싹거렸다. 커다란 손가락이 내 허리둘레를 거미처럼 기었다.

    “농담입니다. 사실은 집사가 손님방이 정비되지 않아서 일행을 수용하기 힘들겠다고 하길래 제가 당신과 같은 방을 쓰겠다고 말했어요.”

    “아.”

    케닌을 비롯한 타이론 공작 일행이 수가 꽤 되었다. 갑자기 손님들이 우르르 찾아왔으니 방이 준비되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심지어 밤이니까.’

    그걸 그렇게 이야기하다니. 나는 뾰족한 눈으로 이안을 흘겨보았다. 그때였다.

    “올리비아.”

    진지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예쁘다고 생각했던 살구색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입술이 벌어지고 드러난 가지런한 이가 내 아랫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읏.”

    아파서가 아니라 오랜만에 느껴보는 은근한 분위기에 저절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손가락이 내 등 뒤의 리본을 스르륵 풀어냈다. 동시에 그의 말캉한 혀가 고른 치열을 더듬었다.

    “으응…….”

    도대체 얼마 만에 입을 맞추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냥 몸을 맡기기에는 여러 가지 걸리는 점들이 있었다. 나는 가볍게 이안의 가슴을 밀어내었다.

    “저기, 이안. 아는지 모르겠지만 임신 초기에는 되도록 몸을 조심해야…….”

    그는 밀리기는커녕 두 팔로 나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낮은 목소리가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안고만 있을게요. 그건 허락해주십시오.”

    “…….”

    “보고 싶었습니다.”

    나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나는 그를 마주 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야.’

    무엇을 피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내가 뭘 고민했는지 다 잊혔다.

    ‘우리 두 사람만 중요한 것을.’

    아버지가 어떻게 높은 자리도, 많은 재산도 뒤로할 결심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도 어머니의 손만 붙들 수 있으면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두 분은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했지.’

    부모님을 떠올리니 이렇게 이안과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 더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도 보고 싶었어요, 이안.”

    한 번 더 꽉 끌어안은 뒤, 이안은 나를 풀어주었다.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귀에 꽂아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연한 푸른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제 달랑 안아 들기를 할 수 없다는 게 슬프네요.”

    예전이라면 답싹 안아서 침대에 내려놓았을 텐데, 임신해서 그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쿡쿡 웃고 말았다.

    “앞으로 할 수 없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걸로 슬퍼하면 안 될걸요.”

    “역시 둘째는 없는 거로…….”

    “네? 뭐라고요?”

    “아닙니다.”

    아주아주 불손한 말이 들렸던 것 같은데.

    나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안은 반짝반짝거리는 미소로 나의 시선을 튕겨냈다.

    그 뒤로 우리는 잘 준비를 했다. 드레스를 벗고 통이 넓은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부슬부슬 풀고 있으니, 이안이 내 머리카락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이번에야말로 머리 잘라보지 않을래요? 얼굴형이 예뻐서 단발도 잘 어울릴 거예요.”

    “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난번에는 해본 적이 없는 스타일이라고 거절했었지.’

    그의 손가락 사이로 물처럼 빠져나가는 은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저 머리카락이 서서히 어떻게 희어지는지 이미 알고 있다.

    마흔이 될 무렵에는 이미 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눈처럼 흰 머리카락이 꽤 많이 섞여들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당신 곁에서 시간이 흐르겠지.’

    이안의 곁에서 함께 늙어갈 나를 떠올리니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아요. 내일 일어나서 자르도록 해요.”

    “맡겨주세요.”

    기운차게 대답하며 이안이 내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췄다.

    채비를 끝낸 우리는 침대에 누웠다. 나를 끌어안는 손길이, 곁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이 기분 좋았다.

    내 어깨에 입술을 묻으며 이안이 중얼거렸다.

    “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왕이면 당신을 꼭 닮은 예쁜 딸.”

    “딸이요?”

    “네. 당신하고 커플로 꾸미면 얼마나 황홀할까요.”

    헤비쇼퍼다운 발언이었다.

    ‘그런데 아들 같은데.’

    나는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태몽이 사실이라면, 태어날 아이는 이안을 꼭 닮은 아들일 터.

    ‘실망할지도 모르니까 말하지 말아야겠다.’

    태몽에 관한 것은 나만의 비밀로 간직해야지.

    “국혼은 어떻게 되었나요?”

    “국혼과 동시에 즉위식이 치러졌습니다. 다시 뵐 때는 황후마마라고 부르셔야 할 겁니다.”

    “로메오의 표정이 기대되네요.”

    오르세의 이야기, 제국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우리는 잠이 들었다.

    단잠이었다.

    * * *

    마음이 편안해서인지, 무도회가 힘들어서인지 나는 꽤 늦은 오전에 일어났다.

    아침 식사는 정원에서 하자는 권유에 따라 밖으로 나서니, 케닌이 이미 앉아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케닌.”

    “네네.”

    케닌의 우거지상은 오늘도 펴지지 않았다. 둥근 테이블에, 딱 케닌과 마주 보는 의자를 빼내어 주며 이안이 말했다.

    “여기 앉아요, 올리비아.”

    “고마워요.”

    나는 자리에 앉았다. 이안이 내 곁에 앉자, 기다리고 있던 하녀가 트레이에서 음식을 꺼내어 주었다. 케닌 앞에도 접시가 놓이는 것을 보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식사를 안 한 거예요? 배고프지 않아요?”

    나야 늦잠을 잤지만, 케닌은 늘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는 사람이다.

    ‘배가 많이 고팠을 텐데.’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케닌을 응시했다. 케닌이 반색하며 내 말에 대답하려 할 때였다.

    “아, 그거야…….”

    이안이 케닌의 말을 가로챘다.

    “그래, 케닌. 먼저 식사하고 있지 그랬어?”

    “……위선자.”

    이안의 말에 케닌이 부들부들 떨며 이안을 흘겨보았다. 이안은 팔짱을 끼고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뭐라고? 매우 불경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저런. 안 봐도 알 것 같은 상황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화제를 돌렸다. 안 그래도 케닌을 볼 때부터 묻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백화점은 어떻게 되었어요? 개점일 전에 제국을 떠나게 되어서 얼마나 신경이 쓰였는지 몰라요.”

    “대박! 초대박이었습니다!”

    화제 전환은 성공적이었다. 나 못지않게 케닌 또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에그 베네딕트를 가르던 식기를 내려놓고, 빠른 어조로 말했다.

    “비전하의 안목은 정말 대단하세요! 처음 계획을 들었을 때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예상보다 훨씬 매출이 좋아요.”

    과거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박이 났구나. 나는 환하게 웃었다.

    “케닌의 수완이 좋은 덕분이지요. 케닌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낼 수 없었을 거예요.”

    “비전하!”

    내 말에 케닌이 감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퍼뜩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엑스 자로 가리며 이안에게 소리쳤다.

    “질투하지 마세요, 전하! 남자의 질투는 추하다고요.”

    케닌의 말에 이안은 팔짱을 끼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질투를 할 리가 있나. 유능한 수하는 유능한 상관 아래 모이는 것을.”

    이안의 말에 케닌은 몹시 짜게 식었다.

    “으으, 재수 없어.”

    “뭐라고?”

    “……아닙니다.”

    두 사람의 마음은 몰라도 보는 입장에서는 웃기기만 했다. 나는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여전하군요.”

    내 말에 케닌은 거짓으로 우는 것처럼 눈꼬리를 손등으로 찍었다.

    “여전해서 너무 슬픕니다, 비전하. 그래도 비전하를 뵈면 소속을 바꿔준다고 하셔서 그것만 등불처럼 믿고 의지했는데.”

    “하지만 케닌의 능력을 펼치기에는 저보다 전하 곁이 좋을 거예요. 케닌은 저 같은 사람의 보좌를 하기에는 아까워요.”

    “비전하…….”

    내 격려에 케닌이 다시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이안이 내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싸늘한 어조로 케닌에게 말했다.

    “케닌, 1미터 밖으로 멀어지게.”

    “질투는 추하다고 말씀드렸지요, 전하!”

    “하하하.”

    이제야 내 일상이 돌아온 기분이라, 나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이 악마!’

    케닌은 손수건을 물어뜯었다.

    목에 걸릴 것 같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서 케닌은 정원을 구경하겠다는 핑계로 두 사람과 헤어졌다. 그리고는 덤불 구석에 숨어 있는 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악랄할 수가 있담.’

    케닌은 이른 아침에 불쑥 자신의 방에 찾아왔던 이안을 떠올렸다. 밤을 새운 것처럼 퀭한 눈을 문지르며 찾아온 금빛 악마는 뜬금없이 물었다.

    “케닌, 아침 식사했나?”

    “네? 당연히 했습니다만.”

    “그럼 두 번 먹어.”

    애초에 케닌의 대답은 신경 쓰지 않았다는 투였다. 케닌은 기가 막혀서 되물었다.

    “왜 두 분이 단란하게 드시지 않고…….”

    그러니까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둘만 있으면 자꾸 건드리고 싶어져.”

    그건 당신 사정이지!

    ‘면전에 그렇게 소리 질렀어야 했는데.’

    케닌은 손수건을 개처럼 거칠게 깨물었다. 잡아당기기도 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기도 했다.

    ‘악마. 희대의 악마.’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저 악마의 눈에 띄었단 말인가. 아카데미 수석을 차지한 게 죄란 말인가! 독신주의자란 말에 속아서 덥석 제안을 수락한 내가 바보였지!

    ‘누군 연애 못 할 줄 아나! 나도 연애할 수 있다고! 안 하는 것뿐이라고!’

    상당히 근거를 입증하기 어려운 변명을 씨불이며 케닌은 계속 성질을 내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어…….”

    “네?”

    “!$^$&*.”

    “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오르세어였다. 케닌은 5개 국어를 할 수 있는 수재였지만, 안타깝게도 오르세어는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손수건이었다.

    * * *

    나와 이안은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것을 보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흥흥흥~.”

    나는 조심스럽게 이안에게 소곤거렸다.

    “케닌 맞나요?”

    “맞습니다만.”

    우리 두 사람이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노래하는 케닌이었다.

    “케닌이 노래를 하다니!”

    “음치가 아니었나?”

    나와 이안은 제각각 다른 이유로 놀랐다.

    우리는 지금 환영 무도회 두 번째 날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하고 1층에 내려와 있던 참이었다.

    ‘가기 싫다.’

    첫째 날부터 니코 왕자와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 그런지, 준비하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오늘은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사절단의 귀환도 겸하는 날이니까.’

    이안이 예정보다 빨리 존재를 알리게 되면서 환영 무도회는 그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드레스랑 하녀들도 모두 정해졌는걸.’

    이미 3일 동안 나를 따라 참석할 하녀들이 정해진 상태인데, 내가 손바닥 뒤집듯이 마음을 바꾸면 무척 슬퍼할 것이다.

    하여간 그런 이유로 오늘의 무도회에는 케닌도 참석해야 하는데.

    ‘오늘 상태가 왜 저러지?’

    불평이 많을지언정 기본적으로 이성적인 케닌과 도통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등 뒤로 너른 꽃밭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눈의 착각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아는 것 없나요?”

    “저도 아침 식사 이후 지금 처음 보는 겁니다.”

    “흐음?”

    오르세 저택 내에서 케닌을 저렇게 들뜨게 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였다.

    “오늘도 아름답습니다.”

    내가 계속 케닌을 신경 쓰는 것이 탐탁지 않다는 듯이, 이안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깜짝깜짝 놀라게 끌어안지 말라고 해도.’

    몸이 쓰러지듯 그의 품에 안기는 바람에 귀에 걸린 붉은 루비 귀걸이가 짤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안이 선물한 목걸이와 색을 맞춘 것이었다.

    “올리비아.”

    이안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내 목에 걸린 목걸이가 몹시 흡족했는지, 그는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 얼굴을 보니 화를 내기가 어려웠다.

    ‘저렇게 좋아하다니…….’

    생각해보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도 내 목걸이에 유독 신경을 썼었지. 보석상에서도 바꾸어 끼우려고 했었고.

    ‘내게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었던 걸까.’

    당신은 그 자체로 내게 의미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려다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나치게 낯간지러웠던 탓이다.

    ‘나도 마음의 빗장이 풀렸나 봐.’

    손바닥으로 얼굴에 바람을 부치고 있으니, 이안이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오르세 드레스가 잘 어울립니다.”

    “그런가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입은 드레스 또한 오프숄더의 상체 대부분이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는데 드러난 어깨가 시린 느낌이었다.

    “저는 도통 적응이 되질 않아요. 제국 것보다 노출이 많고…….”

    “…….”

    그런데 바로 뭐라고 맞장구를 칠 줄 알았던 이안이 입을 꾹 다무는 게 아닌가.

    “이안?”

    나를 안고 있는 그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말해봐요. 무슨 생각 했어요?”

    이안은 고개를 휙 돌렸다. 당혹스러움이 감추지 못하고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아닙니다.”

    “얼굴이 빨개졌는데?”

    “저는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신사로서, 신사는 숙녀의 명예에 어긋날만한 말과 행동은 아무것도…….”

    “사실대로 말하면 들어드릴게요.”

    “아.”

    내 말에 이안의 동공이 잘게 지진을 일으켰다. 잠시 머뭇거리며 망설이던 그는 결국 내게 고개를 숙였다.

    “사실은…….”

    그가 소곤소곤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웃는 낯으로 그의 말을 다 들었다. 그리고 냉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2미터 떨어져요.”

    “올리비아?”

    “빨리 저리 가요. 앞으로 접근금지예요.”

    “…….”

    이안은 말없이 내 곁에서 멀어졌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를 가느다란 눈으로 쏘아보았다.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천사 같은 얼굴 돌려내!

    그렇게 케닌은 꽃을 뿌리고 다니고, 나와 이안은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서둘러서 계단을 내려왔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아버지.”

    아버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군요. 제가 기다려야 하는데.”

    “아니에요. 얼마 기다리지 않았어요.”

    “그럼 얼른 갑시다.”

    나는 아버지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현관으로 걸어 나가려고 하니, 꿈쩍도 하지 않고 떨어져 있는 이안이 아버지의 시선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거기 계신 겁니까, 타이론 대공?”

    이안은 경건한 어조로 대답했다.

    “벌을 받는 중입니다.”

    “??”

    아버지의 얼굴이 의아해진 것은 당연했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약아서.’

    아버지를 걸고넘어지면 내가 어떻게 계속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했겠는가.

    “빨리 이리 와요, 이안.”

    “네.”

    이안은 생글생글 웃으며 내 옆에 찰싹 붙었다. 내가 한숨을 내쉬며 이안의 팔에도 내 팔을 끼웠다.

    “다녀오세요, 주인님.”

    “다녀오세요.”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현관문을 열고 나서니, 미리 대기해 있던 마차에 마부와 따라가는 하녀들이 고개를 숙였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헉.”

    개구리가 밟힌 것 같은 소리를 낸 사람은 다름 아닌 케닌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케닌?”

    케닌은 불그죽죽해진 얼굴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저 여성분은 누구신가요?”

    누굴 가리키나 했더니 오늘 나를 따라 무도회에 갈 순번인 하녀 두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제 하녀인데요.”

    “오, 이런.”

    내 대답에 케닌의 얼굴이 펑하고 터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아무리 봐도 케닌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 * *

    이틀째 무도회는 어제보다도 훨씬 사람이 많았다. 니코 왕자는 어제의 소란을 의식해서인지 참석하지 않았다.

    어제 소란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왕비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젠 실례했소. 이렇게 멋진 남편을 먼저 만났더라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오.”

    사과하는 척, 유부녀임을 감춘 나를 교묘하게 돌려 까는 말이었다. 나는 못 알아듣는 척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실례는 왕자님께 했지요. 니코 왕자님께서 특별히 신경을 써주신 것인데 일이 이렇게 되어서 마음이 아팠답니다.”

    “왕자는 신경 쓰지 마시오.”

    왕비는 내가 눈치 없이 니코 왕자를 감싸고 도니 감정이 팍 상한 것 같았다.

    ‘내가 사교계 경험이 몇 년인데.’

    나는 속으로 픽 웃었다. 국왕의 축사가 끝나고 이런저런 소개가 이어졌다. 어제보다 긴 식전행사에 조금 피곤하다 싶을 무렵 춤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안하고 한 곡 춰야 하나?’

    나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진지한 고민에 빠져 있는 나를 케닌이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저, 저기 비전하.”

    “네, 케닌.”

    비장한 표정으로 부르길래, 설마설마했더니만 역시 질문은 그것이었다.

    “아까 그 아가씨는 어디에 계실까요?”

    케닌은 내가 본 중에서 가장 연애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입버릇처럼 자신은 고결한 비혼주의자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타국에서 사랑이라니.’

    어쩐지 로맨틱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아랫사람들은 가장 아래 구역에서 즐긴다고 들었어요. 저기 정원과 맞닿은 무도회장이요.”

    “그렇군요.”

    “잠깐만요, 케닌.”

    내 대답을 듣기 무섭게 뛰어 내려가려는 케닌을 붙들었다.

    “오르세어로 ‘저와 교제해 주세요.’라는 말은 배우고 가세요.”

    “아! 감사합니다!”

    내 말에 케닌의 얼굴이 환하게 개였다.

    씩씩하게 내가 읊어준 말을 중얼거리며 달려 나가는 케닌의 등을 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케닌, 괜찮을까요?”

    그러자 내 곁에서 멀뚱멀뚱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안이 곧바로 대답을 툭 내놓았다.

    “안 괜찮겠죠.”

    아니, 지금 저렇게 들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놓고 안 괜찮을 거라고 해도 돼?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이안을 돌아보았다.

    “……슬슬 당신이 케닌에게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은데요.”

    “음.”

    내 지적에 이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저는 제법 저 친구를 아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기나긴 면박의 역사를 알고 있는데, 아끼다니 무슨 망발!

    이런 마음이 고스란히 표정에 드러났던 모양이다. 이안은 피식 웃으며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올리비아가 그렇게 말하니, 더 다정하게 대해주도록 노력하죠.”

    * * *

    ‘이런 짜릿함!’

    케닌은 씩씩하게 사람들 사이를 갈랐다. 그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차피 오르세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려! 나는 살아 있어!’

    사랑을 처음 느껴보는 10대 소년처럼 그는 들떠 있었다.

    손수건을 건네주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을 사로잡히는 것만 같았다.

    바다처럼 푸른 눈, 바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옅은 금발.

    ‘어라?’

    거기까지 생각했던 케닌은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묘한 기시감이……?’

    조금 전까지 두근두근 설레던 마음에 찬물을 맞은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기분도 처음이 아닌 것 같아.’

    분명 이렇게 짜릿짜릿했던 적이 일전에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질 않지만…….

    ‘아마도 학생 때.’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해서 케닌이 얼굴을 와락 구겼을 때였다.

    “어어어?”

    가장 아래 구역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사람이 많았다. 그만큼 붐비기도 했다. 갑자기 파도처럼 출렁이는 사람들의 무리에 케닌이 떠밀려서 뒷걸음질 쳤을 때였다.

    “으악.”

    작은 비명을 지르며 케닌은 뒤로 넘어갔다. 모든 문을 열어 정원까지 자연스럽게 개방된 상태라 케닌은 곧장 풀밭으로 넘어졌다.

    “으으으.”

    뒤통수를 부딪치면서 넘어진 게 몇 년 만이람.

    케닌이 머리를 문지르면서 몸을 일으켰던 그때.

    “……!!”

    “?!”

    수풀 뒤에서 뜨겁게 입을 맞추던 남녀와 눈이 짠하고 마주쳤다. 그런데 어째 얼굴이 익은 것이.

    ‘그 여자!’

    바로 그가 찾아 헤매던 바로 그 하녀였다.

    “까아!”

    케닌이 올리비아에게 배운 말을 써먹을 새도 없이,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잔인하고도 빠른 실연이었다.

    * * *

    내가 케닌을 걱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케닌은 퉁퉁 부은 눈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케닌?”

    “비전하.”

    내가 서둘러 손수건을 내밀자, 그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수건에 코를 킁 풀었다.

    ‘눈물을 닦으라고 준 것이지, 코를 풀라고 준 것이 아닌데.’

    상대가 너무 서럽게 울고 있어서, 나는 차마 그리 말하지 못하고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여기서 손수건 가지고 인상 쓰면 마음에 대못을 박는 거다.’

    참자, 올리비아!

    그렇게 조금 떨떠름하게 있으니, 이안이 끼어들었다.

    “왜 그러고 있나, 케닌.”

    “저리 가세요, 전하.”

    이안이 보나 마나 자신을 놀릴 거라고 생각한 케닌은 파리 쫓듯 손을 휘저어 이안을 내쫓았다. 이안은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불쑥 이렇게 물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나?”

    “뭘요?”

    “그대는 나를 좋아해.”

    “네?”

    케닌도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놀라기는커녕 팔짱을 끼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잘 생각해봐, 여자, 날 닮았을걸.”

    “히극!”

    정곡이었는지 케닌이 울다 말고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충분히 놀란 사람에게, 이안은 쐐기를 박았다.

    “다시 보면 콩깍지가 벗겨졌으니 기억만큼 예쁘지 않을 것이고…….”

    “그만두세요! 이미 충분히 자괴감이 드니까요!”

    그렇게 외친 뒤, 케닌은 원망스러운 눈길로 이안을 노려보다가 테라스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입을 벌린 채로 눈만 깜빡거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그러니까, 케닌이 이안을 좋아한다고?’

    나는 창백한 얼굴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은 이 와중에 당황하거나 놀라기는커녕 태연했다. 이랬던 것이 한두 해 일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예요?”

    “음, 정확히는.”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케닌은 예쁜 걸 좋아해요. 지독한 심미주의자죠.”

    “그런데요?”

    이안은 아주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저보다 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가요.”

    “…….”

    이 순간, 나는 케닌이 조금 불쌍했고, 왜 평소에 케닌이 이안을 재수 없다고 입에 달고 살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저 높은 자존감!’

    어떻게 저렇게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자신만큼 세상에 아름다운 사람이 없다고 자신한단 말인가.

    ‘반박할 수 없는 게 분해!’

    헛소리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내가 평생 본 사람 중에서 이안이 가장 잘생긴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자기 입으로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이안은 키득키득 웃으며 내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웠다.

    “농담이고요, 사실 원흉은 황제 폐하입니다.”

    “네에?”

    황제 폐하라면…… 스타티스?

    스타티스와 이안의 얼굴이 무척 닮은 것은 사실이었다. 만두 같은 태황제보다 스타티스와 이안이 남매 같을 정도로 말이다.

    “황제 폐하가 보좌관을 찾느라 아카데미를 곧잘 방문했었거든요.”

    이안은 지금 떠올려도 웃기다는 듯이 키득키득거렸다.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기껏 아카데미 수석을 데려다 놨더니, 황태자 전하 앞에서 코피를 뿜으며 기절했던 것이.”

    “첫사랑이었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모든 것이 납득되었다.

    ‘그래서 금발에 푸른 눈이 매력적으로 각인되었나 봐.’

    하지만 아까 그 하녀는 스타티스나 이안처럼 휘황찬란한 미녀가 아니었는데. 나는 조금 애잔한 눈으로 케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케닌도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슬쩍 떠보니 기절한 기억이 없더라고요. 지나치게 수치스러워서 기억을 지웠나 봅니다.”

    “저런.”

    하긴, 나 같아도 황태자 앞에서 코피를 뿜으며 기절했다면, 그 기억을 도려내고 싶을 것 같았다.

    ‘스타티스 황제가 첫사랑이라니 케닌 눈 높네.’

    이미 황제에게는 내 친구 로메오가 있기에 나는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내가 한숨을 폭 내쉬었을 때였다. 이안이 갑자기 팔짱을 끼고 있던 내 팔을 자신 쪽으로 바짝 당겼다.

    “그보다 저는 제 부인이 제게만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는데.”

    그가 손을 흔들어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고개를 가까이 대었다.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아까 말한 거, 해도 됩니까?”

    ‘아니, 이 사람이!’

    아까 말한 거라면 오프숄더 드레스를 보고 자신이 떠올린 음란한 망상들 아닌가!

    ‘진짜 어쩜 이렇게 뻔뻔하담.’

    나는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는데, 정작 말을 한 사람은 반질반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갸웃거렸다.

    그런데 그 모습이 왜 이렇게 귀엽게만 보인단 말인가.

    ‘이게 콩깍지인가.’

    당장 그의 뺨을 붙들고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불쑥 솟아났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네?”

    내 대답에 이번에 눈을 휘둥그레 뜬 것은 이안이었다.

    뺨을 은은하게 붉히고 눈을 내리깔고 있는 나를 보던 그의 입술이 슬금슬금 올라갔다. 그가 몹시 짓궂은 어조로 내게 과장스럽게 귀를 들이대었다.

    “뭐라고요? 잘 안 들립니다.”

    이 남자 보소. 또 이렇게 받아주면 기어오르지.

    나는 큰 소리로 그의 귀에 대답했다.

    “2미터 밖으로 떨어지라고 했어요!”

    * * *

    이런저런 사연이 있던 무도회가 끝나고, 아버지는 오르세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의사를 저택으로 초청했다.

    잠시 내 손목도 진맥하고 배에 청진기도 대보고 하던 의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임신이 맞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미 임신을 확신하고 있던 내게는 별로 의미 없는 말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숨을 죽이고 의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버지와 이안은 동시에 낮은 탄성을 내질렀다.

    “고생했습니다.”

    아버지가 내 손을 꽉 붙들었다. 부들부들 전해져오는 떨림은 감격 같기도 하고 두려움 같기도 했다.

    나는 의사에게 물었다.

    “기간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입덧 시기로 추측하기로는 10주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10주.”

    10주라면 오르세로 오고 있을 때 딱 임신 초기였다는 뜻이다. 마차 안에서 내내 잠을 잤던 것이 떠올랐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게다가 텔레포트 존에서 사고도 있지 않았던가.

    같은 생각을 의사도 했던 모양인지, 내가 고심하고 있던 것을 그대로 짚었다.

    “임신 초기에는 특히 몸을 조심하셔야 하는 것 알고 계시지요? 장거리 마차 여행이었는데도 문제가 없었다니 하늘이 도우셨습니다. 앞으로도 적게는 2주, 넉넉하게 4주간은 안정을 취하십시오.”

    “네.”

    마차 여행으로 고단한 나머지 아기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나는 두 손바닥으로 내 배를 감쌌다.

    ‘고생했어, 우리 아가.’

    어쩐지 아기가 괜찮다며 씩 웃는 것 같았다.

    의사의 말을 아버지에게서 전해들은 이안이 물었다.

    “그렇다면 오르세에 최소 2주는 머물러야겠군요.”

    “아예 이참에 오르세에서 출산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버지가 물었다.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손이 여전히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안타까운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이미 나와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진 적이 있는 아버지인지라, 딸이 임신했다는 상황 자체가 두려운 것 같았다.

    이안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장인 어르신. 이 아이는 공국의 후계자이기도 하고, 현 황제 폐하께서 자녀를 낳기 전까지는 황위 계승권에도 유력한 후보입니다.”

    “……그 말이 옳습니다. 제가 사적인 감정에 지나치게 흔들렸군요.”

    아버지도 왕족인지라 왕위계승권이 가지는 상징성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이안이 산뜻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대신 장인 어르신께서 제국으로 오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요?”

    이안의 말에 아버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임신 기간에는 감정이 예민해진다고 하니 장인 어르신께서 마음의 지지가 되어주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지금부터 출산 때까지는 꽤 시간이 남았는데. 그렇게 오래 신세를 지는 것은 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의 말씀대로 출산까지는 7달 정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이안은 단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는 이제 가족인걸요.”

    이안의 말을 듣는 아버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버지는 살짝 몸을 돌렸다.

    잠시 가늘게 어깨를 떨고 계시던 아버지는 이내 언제 약한 모습을 보였냐는 듯이 반듯하게 허리를 세웠다.

    “죄송합니다. 늙으니까 눈물만 많아져서.”

    “그럼 이번에 저희와 함께 제국으로 가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이안은 그렇게 아버지의 걱정을 일단락 지었다. 하지만 아직 남은 문제도 있었다.

    “아직 생제르망 상회 건이 해결이 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꺼낸 걱정거리에 이안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능한 부하가 있거든요.”

    믿고 맡길 유능한 부하라니. 딱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내 착각일까?

    “이안, 설마?”

    * * *

    설마가 맞았다!

    이안이 나를 대신해서 오르세에서 생제르망 상회의 일을 넘겨받을 관리인으로 지목한 것은 다름 아닌 케닌이었다.

    “네? 오르세로 발령이라고요?”

    오랜만에 하는 일 없이 정원에서 볕을 쬐고 있던 케닌이, 이안의 명령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임신한 아내와 내가 언제까지 오르세에 머물 수는 없잖아.”

    “그래서 저요? 제가 여기서 뭘 할 수 있는데요?”

    이안이 너무나 다짜고짜 사전 설명 없이 ‘너 오르세에서 일해.’라고 말했나 보다. 내가 조금 빠른 어조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실 이번에 생제르망 상회 전체에 대한 상속절차를 끝냈어요.”

    “전체요?! 와아, 비전하. 이제 보니까 돈이 졸졸 따라다니시는 분이시네? 곧 있으면 저희 전하보다도 부자가 되시겠어요!”

    ‘아니, 감탄하는 포인트가 왜 이래?’

    전에 백화점 일을 진행할 때도 느꼈지만, 케닌도 상당히 돈에 밝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부자가 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지 않은가!

    나는 케닌의 손을 붙들고 조금 더 설명을 보탰다.

    “케닌, 부탁드려요. 오르세 말도 아직 서툰 당신에게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게 참 죄송스럽지만…….”

    “생제르망 상회를 관리하는 거예요? 제가요?”

    “네. 믿고 맡길 분이 당신밖에 없네요.”

    여행이라면 몰라도 일로 외국에서 나와 있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것을 감안해서 간절하게 애원한 것인데, 어째 케닌의 표정이 해맑았다.

    “몇 년이나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음, 아기를 낳고도 바로 움직일 수가 없으니…… 물론, 아버지께서 오시면 또 상황이 달라지겠지만요. 적어도 2년?”

    “최소 2년이란 말씀이죠?”

    “예.”

    “야호!!”

    케닌은 뛸 듯이 기뻐했다.

    ‘아니, 왜 이렇게 기뻐하는 거야?’

    얼떨떨할 새도 없었다. 케닌이 두 손으로 내 손을 붙들고 흔들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비전하. 제가 외국어에 얼마나 능하다고요. 오르세어 정도는 한 달 안에 숙달할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기가 막혀서 말도 더듬으며 물었다.

    “저어, 케닌? 지금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자 케닌은 냉큼 대답했다. 곧 이안과 멀리 떨어진다는 생각에 언어필터도 없어진 것 같았다.

    “당연히 좋지요! 저도 결재받지 않고 사업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지랄 같은 상사도 없고, 권한은 넓고,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짠하기까지 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부하를 얼마나 부려먹는 거예요?”

    “손이나 떼고 이야기합시다.”

    이안은 케닌이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없다는 듯이 오로지 나와 케닌이 맞잡고 있는 손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크, 이러다가 또 불똥이 튈라.’

    괜히 멀쩡한 부하의 손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얼른 케닌의 손을 놓았다.

    다행히 케닌은 이안의 번뜩이는 시선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케닌은 환하게 웃으며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맡겨만 주세요, 비전하! 제가 잘 관리하고 있을게요!”

    “네네, 좋아요.”

    부하가 의욕에 불타오르면 나야 고마운 일이지. 나는 그저 웃었다.

    * * *

    제국으로 돌아가는 날은 2주 뒤로 하기로 했다. 괜히 타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느니 집에 가서 조금이라도 빨리 편안하게 쉬자는 생각이었다.

    ‘2주 동안 무얼 한담.’

    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게으른 고양이처럼 꾸벅꾸벅 졸면서 의자에 앉아 있으니, 이안이 찾아왔다.

    “뭐하고 있습니까?”

    “이안.”

    나는 내게 다정히 다가와서 입을 쪽 맞추는 남자의 뺨에 마주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나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할 일이 무엇이 있나요. 그냥 쉬고 있지요. 이안은요?”

    “저도 웬만한 일들이 이제 막 끝났습니다.”

    이안이 오르세에 온 것은 그저 나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기에, 그도 나름대로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다행이에요.”

    나는 타국에서도 바쁘게 돌아다녔을 남편을 꼭 끌어안았다. 이안이 피식 웃으며 내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내 의자의 손잡이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래서 2주 동안 아내와 오르세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데……. 뭔가 하고 싶은 것 있나요?”

    “딱히 없는데요.”

    ‘굳이 할 일을 만들어야 한다면 낮잠이나 잘까?’

    임신한 탓인지 늘어지기만 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 대답을 들은 이안의 입꼬리가 쓰윽 고양이처럼 올라갔다.

    “아주 좋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겠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름이 돋는 건 왜일까.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팔뚝을 꽉 붙들었다.

    “……잠깐만요, 이안. 제가 임신 초기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죠?”

    당신이 무슨 일을 꾸미든 간에 나는 무리하면 안 되는 연약한 사람이라고!

    그런 바람을 가득 담아서 짙은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니, 이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당연히 잊지 않았습니다. 이리 오세요, 올리비아. 장인 어르신께서도 기다리고 계시답니다.”

    “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고.’

    아버지와 나, 이안 셋이서 하하호호 할 만한 일이 떠오르질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라갔다.

    이안의 손을 잡고 1층 로비로 내려가 보니 흰 장갑까지 야무지게 끼고 계신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다정하게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올리비아. 몸은 괜찮은가요?”

    “아주 좋아요, 아버지. 아버지는 그런데 오늘 그 복장은…….”

    너무나 외출 복장이어서 어쩐지 좀 불안해졌다.

    내가 슬금슬금 이안과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위가 오르세에 있는 생제르망 상회에 가보고 싶다고 해서요. 저도 이번 기회에 직접 안내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생제르망 상회를 발음할 때에 아버지에게서는 큰 자부심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나치게 이안을 의심하고 있었나 봐.’

    생각해보니 생제르망 상회를 물려받는 서류에만 서명을 했지, 나도 정확히 그곳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제국에서 아기를 낳으면 당분간 오기 힘들 테니까. 이참에 모두 살펴보고 오는 게 좋겠지.’

    케닌은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아랫사람을 부리려면 어떤 일인지 주인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좋아요, 아버지.”

    내가 환하게 아버지의 팔에 팔짱을 꼈을 때였다. 아버지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아기용품을 여기서 준비하는 것도 제법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고요.”

    “네?”

    아기용품.

    준비.

    이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가 있지 않은가. 나는 불안한 눈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설마. 설마.’

    “……우리 지금 쇼핑 가는 거 아니지요?”

    “하하.”

    내 질문에 이안은 사람 좋은 미소만 흘렸다. 하지만 그의 미남계에 휘둘릴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팔을 꽉 붙들었다.

    “웃지 말고 대답해요. 우리 지금 쇼핑 가는 거예요?”

    “쇼핑이라뇨. 이제는 당신 소유인 상회를 둘러보는 것입니다.”

    괜히 근엄한 척 이안이 정색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그 김에 이것도 사고 저것도 입어볼 수는 있겠지만…….”

    “이안!”

    이안의 쇼핑 스타일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질릴 수밖에 없었다.

    ‘또 얼마나 사려고! 제국까지 들고 가는 것도 일인데!’

    우리 동네에서 잔뜩 사는 것과, 다른 동네에서 사서 운반까지 하는 것은 엄연히 스케일이 다르다. 운반비용을 감안하면 오히려 손해일 수도 있고.

    “제 말 좀 들어봐요, 올리비아.”

    하지만 이안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저는 오르세의 드레스를 보는 순간 이런 생각이 딱 들었답니다. 마이옌 공의 따님이 운영하는 백화점 1층에 있는 오르세 양식의 드레스 전문점.”

    몽롱하게 말을 늘어놓은 이안이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림이 괜찮지 않나요?”

    “그, 그건 그렇지만.”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았다.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제국 상류층에게 오르세 양식의 물건들은 대단히 매혹적일 테니까.

    ‘게다가 내 출신이 오르세이니, 전문적으로 보이잖아?’

    나는 오르세를 이제 처음 밟아보지만, 어쨌든 오르세 국적을 가지고 있고, 아버지도 오르세 사람이다.

    어설프게 오르세를 따라 해도 진짜 오르세 물건처럼 보일 거란 뜻이다.

    “여성복뿐만 아니라 육아용품이나, 생활용품 코너에도 오르세 물건들이 있으면 호응이 좋을 겁니다. 마침 생제르망 상회가 있으니 유통에도 이점을 가지고 있죠.”

    “……일리 있는 말이에요.”

    반박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화점과 생제르망 상회의 소유자로서 진즉 이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들었다.

    “미안해요. 당신이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어요.”

    “아닙니다. 그동안 제가 오해받을 만한 행동을 한 것이 문제겠죠.”

    “이안.”

    나는 겸손하게 대답하는 이안을 감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안은 씨익 짓궂게 웃었다.

    “그리고 당신이 해주기로 약속한 그걸 하려면…….”

    “잠깐만, 잠깐만요. 무척 음흉한 목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

    “음흉이라뇨. 저랑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고 나서자, 이안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푸른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냈다. 순진한 아기천사 같은 얼굴이었다.

    ‘왜 저렇게 천사처럼 생긴 거야.’

    하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악마들도 기본적으로 천사처럼 예쁘게 생겼잖아?’

    역시 악마였나.

    ‘애초에 말도 안 되는 대국민 사기를 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한숨 소리를 들은 아버지가 눈가를 곱게 접으며 웃었다.

    “사위가 쇼핑을 좋아하나 보군요.”

    “네. 저 사람의 유일한 취미예요.”

    “좋은 것 아닙니까. 물건을 보는 안목이 좋다는 뜻이지요.”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을 텐데.’

    하지만 반박하기는 어려웠다. 이안이 물건을 보는 눈이 좋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아버지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서 가봐요.”

    * * *

    생제르망 상회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커다란 상회였다.

    ‘과연! 이래서 다른 나라로 진출까지 꿈꾸었던 거군!’

    막연히 오르세에서 제국까지 진출할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렇게 직접 와서 보니 상회 규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유통부, 영업부, 신제품 개발부…….”

    “사람에게는 전문 분야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저도 그 의견에는 동의해요.”

    내가 공작부인으로서 교육을 하나도 받지 못하고 파넬에 가게 되었을 때, 나는 서둘러서 많은 것을 익혀야 했다.

    하지만 예법, 춤, 교양을 익히기에도 바쁜데 꼭 익혀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바로 자수와 꽃꽂이.

    “이런 건 손이 빠른 아이들을 시키면 되잖아요! 다른 것을 공부하기에도 바쁘단 말이에요.”

    “남편의 손수건도 만들지 않겠다는 말이냐!”

    진상들의 난리질로 결국 손수건에 이름 새길 정도의 자수는 배웠지만, 태피스트리 같은 거대한 작품까지는 배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웃겨. 어차피 남편은 10년 있다가 돌아오는데 무슨 남편 손수건 만드는 법을 배우라고.’

    그리고 그게 내 인생에서 가장 아까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다른 것들을 배웠다면 사교계에서 자리를 잡는 시간이 더 빨랐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괜찮지만…….’

    그때 배운 것들로 내가 타이론에서 대공비로서 흠잡을 데 없이 활동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었다.

    ‘이래서 배워서 쓸데없는 건 없다는 말이 있나 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상단관리인이 우리를 반기러 달려 나왔다.

    “연락은 미리 받았습니다. 유아용품은 저쪽 방에 미리 몇 점 꺼내놓았는데 한번 보시렵니까?”

    “그전에…….”

    이안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여성 장신구와 드레스를 보고 싶습니다.”

    “네?”

    “기왕이면 모자 종류와 장갑, 구두도요. 제 아내에게 맞는 아이템들을 종류별로 모두 갖추고 싶군요.”

    “?!”

    상단주는 설마 이런 주문을, 심지어 본인도 아니고 남편에게 받을 거라고는 상상 못 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우리가 안내받은 방 안으로 수많은 물건이 운반되어 왔고.

    또 나갔다.

    “좀 더, 붉은 계통으로.”

    “질이 떨어집니다. 이런 걸로는 안 됩니다.”

    “오간자가 더 들어간 건 없습니까?”

    쉼 없이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 물건들은 소파 위에 착착 쌓였다. 아버지는 조금 핼쑥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위가 아주 손이 크군요.”

    “……죄송해요. 제가 버릇을 잘못 들여서.”

    아무래도 제국에 돌아가면 돈을 사용하는 단위부터 다시 가르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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