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드디어 알게 되었다 (17/28)

6장. 드디어 알게 되었다

한편 제국이 술렁였던 것처럼 오르세 왕국의 사교계 또한 술렁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훈훈한 미담이라고 생각했지만, 날 선 이들도 있었다. 바로 왕족들이었다.

푸른 날개의 나비가 팔랑거리는 아름다운 정원에, 하나같이 우아하게 차려입은 여인들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흘러나오는 대화는 전혀 우아하지 않았다.

“그 소식 들으셨어요, 왕비님?”

그 말을 꺼낸 것은 국왕의 최근 가장 총애받는 후궁인 베르체 궁부인이었다.

보란 듯이 루비 티아라를 쓴 여인이 찻잔을 들며 되물었다.

“무슨 소식이죠? 혹시 마이옌 공의 소식을 말씀하시나요.”

“네! 알고 계셨군요.”

“지금 수도에서 그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목소리에 신경질적인 느낌이 묻어났다.

그러자 다른 후궁이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진짜 딸인지 알게 뭡니까. 말이 그렇지, 제대로 얼굴도 모르지 않았습니까.”

후궁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근거로 자식임을 증명할 것인가?

하지만 마이옌 공에게는 가장 원초적인 증명 방법이 있었다. 왕비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대답했다.

“얼굴이 무척 닮았다고 하던데요.”

고대로부터 가장 강력한 혈연 증명 방법.

바로 얼굴이 닮은 것이다.

그 이야기에 궁부인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맞아요. 저도 들었어요.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가 없을 정도로 닮았다고 하더군요.”

“그럼 상당한 미인이겠군요. 마이옌 공은 미남이시잖아요.”

“얼른 재가나 하시지, 그렇게 속을 썩이시더니.”

말들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이 자리에 마이옌 공의 재가를 바라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아이는 왕위계승권을 가지는데, 누가 라이벌을 원하겠는가.

잠시 동안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왕비였다.

“외국인이라고 하던데.”

그 말에 귀부인들의 눈썹이 다 찡그려졌다.

“그럼 그 많은 재산은 다 외국인에게 넘어가는 건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왜 외국인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라면 그 재산 때문에라도 오르세에서 살 것 같은데요.”

“오르세 말이나 할 줄 알겠어요?”

그들이 사실 올리비아의 존재에 발끈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마이옌 공이 남길 막대한 유산.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죽을 것 같아서 규제도 하지 않았는데.’

‘이래서야 남 좋은 일만 시킨 꼴 아닌가.’

‘역시 싫다고 해도 재혼을 시켜야 했어.’

저마다 이기적인 계산으로 마이옌 공의 경사를 바라보았다. 그냥 내버려 두면 마이옌 공의 재산은 왕실 재산으로 굴러들어오기 때문이다.

개중에서 가장 소심한 어린 후궁이 우물거리며 입술을 열었다.

“제국의…… 귀족이라는 말이 사실일까요?”

“아직 사절단이 돌아오지 않아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도 말을 아끼고 계시고요.”

“전하께서도 언제까지 마이옌 공에게 쩔쩔매면서 살려는 건지.”

귀부인들은 다시 혀를 찼다. 그녀들은 마이옌 공에게 큰 빚이라도 진 것처럼 설설 기는 국왕의 태도도 거슬렸다.

바로 그때였다. 아까 소리를 높였던 후궁이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

“설마 재산 때문에 가짜 딸을 만든 건 아니겠죠?”

“…….”

있을 수 있는 일에 모두들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겉으로는 우아할지언정, 머릿속으로는 온갖 계산이 오갔다. 그녀들이 호호호 웃고 있을 때였다.

굵직한 목소리가 그들의 모임에 끼어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신가요?”

“왕자.”

왕세자의 바로 아래 동생인, 니코 왕자였다.

니코 왕자는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을 가진, 미남은 아니었지만 다정하고 상냥해 보이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니코 왕자임을 확인한 왕비가 조금 풀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겠습니까. 마이옌 공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왕비도 고압적인 왕세자보다 살갑고 애교가 많은 니코 왕자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편이었다. 니코 왕자는 넉살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왕실의 경사 아닙니까. 저도 들었습니다. 마이옌 공을 꼭 닮은 아주 아름다운 아가씨라더군요.”

니코 왕자의 말을 왕비는 날카로운 어조로 잘라냈다.

“의상실 마담들의 삿된 소리를 일일이 다 믿을 수가 있나요.”

올리비아의 외모를 퍼트린 이들은 다름 아닌, 올리비아에게 드레스를 선물한 디자이너들이었다.

‘그냥도 밀어내야 하는 판에 왕족의 입에서 닮았다는 말이 먼저 흘러나오면 안 돼.’

겉으로만 생글생글 웃을 뿐, 니코 왕자 또한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예리하게 왕비를 비롯한 왕실 어른들의 반응을 눈치챘다.

‘저렇게 어마마마께서 격앙되어 계신 걸 보니 더더욱 호기심이 생기는군.’

도대체 어떤 여인이기에 저리들 가시를 세운단 말인가.

적당히 부인들과 노닥거린 뒤 자리를 떠난 니코 왕자는 자신의 시종장에게 명령했다.

“마이옌 공께 연통을 넣어주세요.”

“뭐라고 보낼까요?”

“음.”

니코 왕자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친애하는 사촌누이의 에스코트는 제가 하게 해달라고요.”

* * *

이상한 꿈은 그 뒤로 꾸지 않았다. 그 이후로 꿈도 꾸지 않고 푹 자는 나날들이 이어졌기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역시 내가 지나치게 예민했던 거야.’

잠자리가 바뀐 것과, 낯선 환경에서 생활하게 된 것, 그리고 이안에 대한 그리움이 설켜서 그런 이상한 꿈으로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환영회만 끝나면 제국으로 돌아갈 거니까.’

곧 이안을 만날 생각에 다시금 몸이 가벼웠다. 나는 일찌감치 단장을 마치고 방 밖으로 나섰다. 아침 식사 전에 산책이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안녕하세요.”

복도에서 마주치는 하녀들과 인사를 하며 걸어 나오니, 막 산책을 끝내고 들어오던 아버지와 딱 마주쳤다. 아버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찍 일어났군요.”

“네.”

대답하고 나서 나는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마차 안에서 내리 잠잤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빠른 어조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피곤해서 그랬나 봐요. 저 정말로 잠이 많은 편이 아니거든요.”

“힘든 일이 많았으니까요.”

그리고 변명을 늘어놓은 것이 부끄럽도록, 아버지는 인자하게 대답했다. 나는 헤헤헤 웃으며 슬그머니 아버지의 팔에 팔짱을 꼈다.

“아버지 곁이라서 마음이 편해서 그런가 봐요.”

“하하. 빈말이겠지만 나쁘지 않군요.”

“진심이에요.”

나와 아버지는 수줍게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아버지는 팔짱을 낀 내 손을 단단하게 붙들고 나를 이끌었다.

“오늘은 같이 식사할까요?”

“좋아요!”

오르세에 있는 저택은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이 훌륭했다. 식당도 정갈하고 산뜻한 느낌이라 꼭 유명한 식당으로 외출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내 의자를 당겨 빼주며 물었다.

“혹시 가리는 음식이 있나요?”

“아니에요! 다 잘 먹어요!”

빈말이 아니라 나는 가리는 게 없었다. 플로렌스 자작은 반찬 투정 같은 걸 받아주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주방장에게 알아서 내오라고 하세요.”

“예, 주인님.”

아버지의 지시를 받은 하녀가 쪼르르 주방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우리는 도란도란 제국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이안에 대해 아버지는 많이 물었다.

“제국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정말 둘이 어떻게 만나게 된 건가요?”

“아.”

나는 살짝 굳어지고 말았다.

‘분명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걱정하실 텐데.’

하지만 이미 저렇게 말씀하시는 시점에서 소문을 다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모르기가 어려운 소문이니까.’

나는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거짓으로 살짝 미화하고 싶은 마음과 사실대로 털어놓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어지럽게 섞였다.

무엇보다 이런 두려움이 컸다.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데…….’

어쨌든 내가 이안을 만난 시점에서 제임스의 아내였던 것은 사실이기에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계속 우물쭈물하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어요.”

결국 내가 택한 것은 대답 보류였다.

“…….”

그런 내 대답에, 아버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서둘러서 손을 흔들었다. 이 부분에서 오해를 주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저는 정말 행복해요. 이안은 좋은 사람이고요.”

“그렇습니까?”

내 말에 아버지가 조금 안심하신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얼른 웃으며 덧붙였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제 마음이 가라앉으면 아버지께 꼭 말씀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가 행복한 것은 사실이니 굳이 대답을 미룰 필요는 없지만.’

그저 행복하다는 말로 대신하기에는 우리에게도 복잡한 사정이 많이 있었다.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점이라든가.’

아버지에게는 어떻게 말해도 이상하게 들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하지만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다.

마이옌 공의 저택에서 하는 부녀간의 첫 아침 식사라는 점을 의식한 것인지, 주방장이 직접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오늘은 특별히 이 계절에만 먹을 수 있는 생선으로…….”

그가 접시의 뚜껑을 여는 순간, 비릿한 냄새가 훅하고 밀려들어 왔다.

내 속이 뒤집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웁!”

그 순간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몸을 웅크리고 헛구역질을 했다.

“우욱!”

“아가씨?”

가리는 것 없다던 아가씨의 헛구역질에 주방장도, 아버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죄, 죄송해요. 갑자기 역해서.”

그 뒤로도 헛구역질은 가라앉지를 않았다. 주방장은 서둘러서 카트를 밖으로 내보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제국에는 없는 생선이라 그러신 모양입니다.”

“그냥 평소처럼 내오도록.”

주방장이 다시 식사를 내오겠다며 나가고, 하녀들이 식당의 창문을 열었다. 생선 냄새가 사라지고 나니 역함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비위가 약한 것은 멜리사를 닮았나 보군요. 멜리사도 못 먹는 음식이 많았지요.”

하지만 아버지의 말에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의아한 듯 나를 불렀다.

“올리비아?”

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나는 생선을 잘 먹는다. 하지만 먹지 못했던 순간이 딱 두 번 있었다.

바로 아이를 가졌을 때.

‘설마?’

내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는 피임을 철저하게 했다. 아이가 생길 만한 일은 단 한 번도…….

‘아니, 잠깐만.’

생각해보니 피임을 하지 않았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눈 감아요.”

“자, 잠깐만요. 난 너무 좋은데, 아직 준비가…… 으앗!”

“괜찮아요, 하루쯤.”

‘설마 그때?’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 * *

스타티스 황태자와 로메오 알키저스 영식의 국혼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본래는 6개월 정도 이후에 있을 예정이었으니 훌쩍 다가온 국혼이었다.

사실 당기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알키저스 영식이 전사라도 하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전하를 과부로 만들 셈입니까!”

“헛소리하지 마세요!”

“이게 왜 헛소리입니까!”

“불경한 자 같으니!”

대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감히 황태자의 약혼자의 전사를 운운하는 간 큰 사람들과 그래도 논의는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사람들로 언성은 올라가기만 했다.

본래 이런 상황이라면 황제가 간섭해야 하지만, 지금 황제는 본래 책임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황태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웅성거리는 회의장을 관조하고 있던 황제가 들으란 듯이 스타티스에게 물었다.

자기 죽음을 논하는 사람들을 보며 핼쑥해진 로메오와 달리, 스타티스는 의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태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라를 위해 산화한다면 그것만 한 황태자의 배우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히려 영광입니다.”

고결하다 못해 결벽적인 말이었다. 섣불리 입을 놀리던 신하들의 입은 일제히 닫혔고, 황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황태자로다.”

그가 스타티스에게 못마땅해하는 점이 바로 여자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찬 모습을 보일 때면 후계를 스타티스로 정하길 잘했다는 확인을 받는 것 같았다.

“황태자가 괜찮다고 하니 아무 문제없군. 그렇다면 국혼을 당기도록 하지.”

미혼인 남자를 전장에 파견하는 법은 없다. 그 관례로 제임스가 올리비아와 얼굴도 모른 채 혼인을 했고, 로메오의 결혼식은 앞당겨졌다.

“그럼 언제가 좋겠는가?”

황제는 시기조차도 황태자에게 물었다. 생각하고 결정하는 걸 미루는 티가 안 나는 게 그의 제왕으로서 자질이리라.

그리고 스타티스는 대답이 늘 명쾌하고 빨랐다.

“바로 다음 달에 하도록 하지요.”

“다음 달? 지나치게 매우 급하지 않은가?”

“저는 화려한 드레스도, 보석도 필요하지 않으니 긴 준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허허.”

제복을 입고 결혼하겠다는 뜻이다. 황제는 그조차도 기꺼워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로메오만 슬쩍 스타티스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좋지 않아, 이 흐름.’

모두 부산스럽게 계산을 하는 와중에, 알키저스 백작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그 입장에서는 어렵게 황후로 앉힌 아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죽는 것이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심지어 다음 달 식이라니. 길일을 받기도 힘들다.’

이 수도 저 수도 쓸 수 없으니, 남은 것은 로메오가 살아오는 것뿐이었다. 알키저스 백작은 어떻게든 병력을 따오리라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황족이 직접 출장하는 만큼, 병력 또한 보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메오를 밀어내고 황후 자리를 노리는 놈들 천지인지라, 반대가 뻔할 것을 알고도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호응하는 말이 바로 돌아왔다.

“조카사위가 저리 용맹하게 나서는데 어찌 황실 어른으로 두고 보겠습니까. 이번 추가 병력은 타이론의 사병을 동원하겠습니다.”

“!!”

알키저스 백작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금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긴 잘생긴 사내가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최근 대공비 문제로 두문불출하는 이안 타이론 대공이었다.

그가 나서는 것이 의외인 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괜찮겠니? 몇 년이나 걸릴지 모른다.”

짐짓 다정한 어조가, 엄숙한 회의장에서 거슬렸다. 하지만 그런 내색 없이 이안은 고개를 숙였다.

“타이론의 부 또한 제국에게서 받은 것이니,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타이론에서 주도하는 백화점 사업으로 인해 일각에서는 지나친 편애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 주장들까지 쏙 들어가게 하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의심병 환자인 황제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에도 충분했다.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나는 무슨 복을 받았길래 이렇게 충성스러운 사위와 아우를 두었단 말인가.”

황제의 시선이 당당한 스타티스와 어쩐지 소심해 보이는 로메오, 그리고 고개 숙인 이안을 스쳐 지났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확신이 드는군.”

무엇보다 그를 짜릿하게 하는 것은 고개를 숙인 이안의 모습이었다.

황제는 기분 좋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경사를 두 번에 나누어 치를 이유가 있나. 이번 국혼에 황위를 선위하겠소.”

고개 숙인 이안의 눈동자가 아무도 모르게 반짝 빛이 났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기다리던 한마디였다.

* * *

시간을 돌려, 대회의가 열리기 전.

이안은 집무실에서 제임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형님과는 다른 의미로 곰 같은 사내군.’

황제가 포동포동한 판다라면, 이쪽은 손을 휘둘러서 연어를 마구 잡을 것 같은 불곰 스타일이었다.

문이 꽉 차도록 덩치가 커다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안은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여긴 무슨 일이지?”

제임스는 대답 대신 이안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안의 미간 주름이 더더욱 깊어졌다.

“무례하기는.”

“자리를 권할 것 같지 않아서.”

표정 없는 얼굴이 뻔뻔하기까지 했다. 허름한 옷자락에서는 흙냄새가 났다. 멀리서부터 곧장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아내가 없는 집에서, 아내의 전남편과 조우라.’

웃기지 않은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이었다. 이안은 입술을 비틀었다.

“여긴 뭐 하러 왔지? 나를 비웃으러 왔나.”

“떠보는 건 그만하지.”

“…….”

비꼬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이 우직했다. 이안은 과거 올리비아가 말했던 ‘벽돌’이 이 남자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짜증스럽군.’

굳이 막장치정극에 나란히 등장하지 않았어도, 성향이 맞지 않을 사내였다. 이안은 손깍지를 꼈다.

“오르세에서 왔다는 말이 무엇이지?”

“말 그대로의 뜻이다.”

말수 적은 사내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매끄럽게 혀를 움직였다.

“바로 직전까지 올리비아와 함께 있었지.”

빠직,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이안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저절로 사나운 소리가 목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진짜 방법이 없어서 그대를 두고 보고 있다고 생각하나?”

“왜 나에게 화를 내는 거지?”

제임스는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올리비아가 내게 먼저 동행을 요청했다. 나는 그저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고.”

역시 괜히 집무실에 들였다. 이안은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올리비아가 그랬을 리 없어.”

단답에 조급해진 듯, 제임스의 말이 많아졌다.

“그걸 확신하나? 그대는 그녀의 아버지가 오르세 사람이라는 것도 몰랐지 않은가.”

하지만 차라리 그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이안을 약 올리기에는 좋았으리라. 이안은 입술을 비틀어 신랄하게 웃었다.

“역시 얕은 거짓말이군.”

“뭐?”

설마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 몰랐던 제임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안은 턱을 괴며 물었다.

“올리비아가 알키저스 영식과 절친한 친구라는 건 아나?”

“난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

“정말?”

확신하는 그가 멍청하게 보여, 이안의 말투가 조금 더 상냥한 설명조가 되었다.

“애초에 두 사람이 친해진 것은 오르세 왕국이라는 접점 때문이었어. 모르는 게 없다는 사람이 그런 거짓말로 사람을 떠보나.”

“!!”

정말 로메오와 올리비아의 접점을 몰랐던 제임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은 두 사람이 친구라는 사실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친해졌냐고, 무슨 이야기를 하냐고 물어본 적조차 없었다.

‘그냥 황후와 공작부인이니 친근한 거라고 생각했어.’

제임스와 올리비아가 부부였던 지난 생에서 파넬 공작부인은 귀부인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여성이었다.

사교계에 서툴 수밖에 없는 황후를, 제 부인이 돕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나는 도대체 어디까지 그녀에게 무심했던 것인가.’

자괴감에 빠진 제임스에게, 이안은 쐐기를 박듯 냉정하게 말했다.

“이 이상 치졸하게 굴지 말고 내 아내에게 집적대는 건 그만두도록 해.”

“하하.”

어쩜 이렇게 두 사람이 하는 말이 비슷한지.

‘올리비아가 이 남자 때문에 변한 것일까.’

지난 생에서 올리비아는 말수가 적고 차분했다. 제임스의 말이 못마땅해도 눈썹만 치켜올리는 것이 유일한 감정표현이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는 그녀와, 또 먼 곳에서도 그녀를 믿고 있는 이안을 보니 비로소 깨달음이 찾아왔다.

‘애초에 인연이 아니었다.’

애끓는 연정이었다.

한 번도 제대로 표현은 하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 그녀보다 더 사랑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죽음으로 떠난 그녀를 억지로 잡아매기까지 했다.

‘그저 나는 고통만을 연장한 것뿐이었구나.’

그녀에게도, 또 자신에게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제임스는 한결 편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르세까지 동행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의 일행이 파넬 영지에서 바퀴가 부서져서 잠시 멈췄거든. 제대로 된 호위도 없길래, 내가 오르세까지 지켜주었지.”

“올리비아는 잘 지내나?”

“글쎄.”

제임스는 턱을 문질렀다.

“내가 모르는 여자 같더군.”

울고, 웃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명랑하게 떠드는 올리비아의 모습 자체가 낯설었다.

‘무슨 대답이 저래.’

물론, 이안에게는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이안은 비꼬아 말했다.

“아내의 안부를 전해주러 여기까지 왔다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물론 그 때문에 온 것은 아니다.”

제임스는 다시 딱딱해진 얼굴로 이안을 응시했다.

“타이론에서 북방으로 병사를 주둔시키는 중이라고 들었다.”

그가 수도에서 그 깽판을 부렸어도, 북방에서 그를 향한 지지는 하늘을 찔렀고, 부하들은 여전히 그를 믿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아직 황제도 모르는 따끈따끈한 북부의 소식을 비밀리에 받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물론 그 모든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싶어 하는 이안에게는 달가운 말이 아니었다.

‘이놈이 뭘 요구하려고.’

이안이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제임스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제임스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지휘관을 날 시켜달라.”

“뭐?”

제임스의 두꺼운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은 이안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제 발로 걷어찰 때는 언제고 왜 나에게?”

“그동안의 세월에 대한 답례라고 할까.”

제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에게 지독한 세월이라고 해도, 제임스에게는 평안하고 고마운 나날들이었다.

‘그러니 아깝지 않다.’

제임스는 음울한 눈을 들어 이안을 마주 보았다.

“나는 이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수명……?”

이안은 눈을 깜빡였다. 시한부라니, 예상 범주 내의 말이 아니었다. 이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죽을병이라도 걸린 건가?”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5년 정도 남았다.”

제임스는 너무나 담담해서 죽음을 논하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이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정말인가?’

진위를 알아내기 어려운 말이었다. 잠시 고민해보던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왜 나에게 말하는 거지?”

이안의 말에 제임스는 팔짱을 꼈다. 통나무 같은 팔뚝이 도드라졌다.

“올리비아가 그랬지. 나는 수를 계산 못하니까 차라리 정직하게 모든 패를 밝히고 요구를 하라고.”

올리비아, 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친근해서 이안의 입꼬리가 삐뚜름해졌다.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해서 말을 끊거나 하지는 않았다.

저 말이 진실이라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제임스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북부로 가는 것이 아마 최선의 패일 것이다. 나를 이용해라.”

“그렇게 해서 요구하는 것은?”

뭔가 커다란 것을 요구할까 해서 귀를 기울였건만, 돌아온 것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대답이었다.

“그녀의 행복.”

이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자기 피로감이 밀려와서, 제임스는 눈을 감았다.

‘다시는 북부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건만.’

북부는 산맥 사이로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애초에 황량한 땅이라면 이민족들이 그리 기승을 부리지 않으리라.

‘지긋지긋해.’

인생의 절반을 그곳에서 보낸 제임스에게, 북부는 아늑한 고향 같기도 하고 증오스러운 감옥 같기도 한 곳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숨을 거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올리비아가 타이론을 택한 이후 홧김에 북부로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북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거기서 고생하고 있을 부하들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파넬 영지도 정비하였고, 어머니들도 크게 혼이 났으니, 지난 생처럼 파넬이 엉망으로 굴러가지도 않을 거야.’

신변정리가 모두 끝난 셈이다. 제임스는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한 상태였다.

이안은 턱을 괴고 제임스의 표정 없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올리비아의 행복이라.’

“그건 그대가 요구하지 않아도 당연히 최선을 다할 일인데.”

자꾸만 뾰족하게 대꾸하게 되는 건, 아무래도 전남편이라는 관계 때문이리라.

이안의 대답에 제임스는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에게 위협이 될 만한 건 모두 없애버려. 이렇게 오르세로 나돌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내심 그 부분에서 자존심이 상해 있었던 이안인지라, 날카로운 지적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제임스를 훑어보았다.

‘내게는 지나치게 좋은 조건인데.’

지금 제임스는 지나치게 차분해서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올리비아를 다시 자신의 아내로 삼기 위해 무리수를 두던 남자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결국, 이안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묻고 말았다.

“……그 말이 사실인가?”

“믿든지 말든지. 그대가 믿는 건 중요하지 않다.”

친구 사이도 아닌데 무슨 신뢰가 필요하단 말인가. 제임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에는 그의 말문도 막혔다.

“올리비아는 알고 있나?”

“…….”

제임스는 헤어지기 전날, 올리비아가 웃으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신은 나보다 아주아주 오래 살 테고.”

“모른다.”

투머로우는 그녀에게 이야기하라고 말했지만, 제임스는 결국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사하게 웃는 올리비아는 처음 보았으니까.’

이안은 슬픔에 잠겨드는 제임스를 보며 물었다.

“올리비아에게 집착했던 것도, 남은 생애를 그녀 곁에서 보낼 생각 때문이었나.”

“비슷해.”

“이기적이군. 죽을 줄 알면서 젊은 여자를 붙잡아두다니.”

“……그런 생각은 못 해봤는데.”

이안의 지적에 제임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기적이라고?’

제임스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그는 이미 올리비아를 먼저 떠나보낸 삶을 두 번이나 겪었으니까.

그러니 한 번쯤은, 그녀를 남기고 자신이 먼저 떠나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기적.’

생각해보니 이안의 말이 맞았다. 올리비아는 자신을 살려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시간을 돌린 것도, 그녀보다 먼저 죽기를 원한 것도 모두 그의 선택이었다.

‘나는 어디까지 어리석어질 참인지.’

제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당신 말이 옳아. 그래서 그녀 곁에 있는 사람이 당신인 거겠지.”

전과 완연하게 다른 태도에 이안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이렇게 마음이 바뀐 건가?”

제임스는 초연한 눈을 들어, 이안에게 대답했다.

“나 혼자만의 짝사랑이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대답은 이안의 마음에 돌처럼 무겁게 박혔다.

* * *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은 모르지만, 제임스 파넬은 기사로서는 믿을 만한 사람이지.’

북부에 타이론이 동원 가능한 병력을 투입해서 한 번에 정리할 셈이었다. 그래도 몇 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지만.’

그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이안이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푸른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일단 선위 계획은 발표가 되었으니.’

최대한 빠르게 완벽하게 실권을 빼앗아오는 게 중요했다. 이안이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이안.”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의 이름을 부를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안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손가락질로 회의장 밖을 가리켰다. 이안은 황제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황제의 입장 대기실이었다. 완벽히 두 사람만 남자, 황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안에게 물었다.

“어차피 화이트폴에서 나설 거라고 하지 않았더냐. 왜 너까지 병사를 동원하려는 거냐?”

‘역시.’

아까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으면서, 지금은 또 다른 소리를 내뱉는다. 타이론에서 전공을 세울까 불안감이 와락 밀려온 것이 분명했다.

‘이런 얄팍함이 그를 오랫동안 자리보전하게 해주었지만.’

칼자루를 쥔 자가 변덕스러운 탓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칼들은 얼마나 괴로운가.

이안과 스타티스는 서로를 싫어했지만, 그 부분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어 동맹을 이루게 되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작전을 설명한 스타티스는 이를 갈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쥐고 흔들게 두지 않겠어.”

이안은 그 의견에 완벽하게 공감했다. 그리고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 지금은 몸을 낮춰야 할 때였다.

이안은 준비해온 답을 꺼내 들었다.

“폐하께서 화이트폴을 아껴두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황제의 얼굴이 다시 와락 찌푸려졌다. 이안은 부드러운 어조로 설명했다.

“폐하, 폴카의 왕비 자리는 보통 자리가 아닙니다. 고작 북방행으로 건네기에는 아까운 자리 아닙니까?”

“그건…….”

황제는 눈을 깜빡였다. 이안은 차분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걸려들지 않을 리가 없어.’

조심성도 많고 욕심도 많은 사람이었다. 저 떡밥을 물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황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그렇지. 기왕이면 동맹을 굳건히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가문의 여식을 보내면 좋은 자리이긴 하지. 아니면…… 시간을 끌어 화이트폴한테서 다른 걸 더 얻어낼 수도 있겠지.”

그럴 줄 알았다. 이안은 눈을 내리깔았다.

“물론, 저는 화이트폴 후작영애에게 큰 마음의 짐을 지고 있고, 그녀가 폴카의 왕비로도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치가 사적 감정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반문에는 이미 솔깃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안은 쐐기를 박았다.

“북방은 저희 타이론에서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폐하께서는 더 큰 것을 얻으십시오.”

“그 말은 네가 북방으로 출장도 불사하겠다는 뜻이냐?”

“필요하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고민하는 듯 잠시 말이 없던 황제가 묘한 표정으로 이안을 응시했다.

“그녀는 네게 아직도 미련이 있는 것 같던데.”

여기서 그녀가 ‘릴리아나’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이안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북방행을 자처하는 데는 그 이유도 있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인기가 많으니 고달프구나.”

“…….”

이안은 턱에 힘을 주었다. 표정이 일그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긴장한 보람이 있었는지, 황제는 이안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황제는 손을 들어 이안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 도움은 잊지 않겠다. 앞으로 이어질 스타티스 치세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안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껄껄 웃으며 대기실을 나섰다. 이안은 그 뒤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는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갑자기 어지럽군요. 조금 있다가 들어가겠습니다.”

“아니다. 요즘 네가 마음고생이 심하지 않았니. 이어지는 회의는 불참하고 저택으로 돌아가 쉬어라.”

“감사합니다.”

황제가 나서고 문이 완전히 닫힌 뒤에야 이안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피곤해.’

예전에는 어떤 식으로 황제를 대했는지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때는 그냥 적당히 비위도 맞추고 했던 거 같은데.

‘올리비아.’

이안이 만난 사람 중에 속내를 감추지 않고 투명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올리비아가 처음이었다.

“타이론 공작님, 저와 결혼해주세요.”

그녀의 청혼은 릴리아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제발 좀 그 말 좀 안 하면 안 되냐고 했더니 이렇게 대답했었지.’

“선택지를 두 개 드릴게요. 흔쾌히 결혼한다, 수줍어하면서 결혼한다. 어느 쪽이세요?”

당돌했던 올리비아의 모습을 떠올린 이안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와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헤어져 있으니 더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이안은 주먹을 쥐었다.

‘일을 빨리 마무리 지어야 해. 그다음에는 오르세로 날아갈 거야.’

그녀의 편지가 없는 것은 서운했지만, 이안은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으므로 편지 쓸 생각도 못 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내가 갈 때까지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올리비아.”

* * *

“세상에, 이건 꿈일 거야.”

올리비아는 침대 위에서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왜 임신을 생각 못 했을까.’

늘어난 잠, 갑작스러운 피로, 조금씩 변하는 체형.

모두 다 임신의 신호였는데.

“이안이 곁에 없어서 다행이야…….”

올리비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를 만나고 싶지가 않았다.

* * *

올리비아의 방문으로 들썩이던 저택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빨래를 널며 하녀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께서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걸까요?”

“그러게요.”

모두 올리비아가 우울해졌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아침 식사를 하다 말고 올리비아는 방에 틀어박혔다.

“리나의 말에 의하면 침대 밖으로 아예 안 나오신대요.”

리나는 올리비아를 가까이서 수발을 드는 하녀였다.

“왜 그러실까요?”

“글쎄.”

시끌벅적한 저택이 좋았던 하녀들은 올리비아가 얼른 기운을 차리기를 기원했다.

가장 올리비아를 걱정하는 건 당연히 올리비아의 아버지인 마이옌 공이었다. 그는 바깥 일정도 모두 취소하고 올리비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올리비아, 들어가도 되나요?”

“……네.”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기운이 없었다. 마이옌 공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끼이익.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컴컴한 방에 아버지가 열고 들어온 문 모양으로 길게 빛이 늘어섰다.

‘아침인가.’

나는 욱신거리는 눈을 문질렀다. 간밤에 많이 울어서 그런가, 눈가가 쓰라렸다.

‘커튼을 걷어야 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싫었다. 이런 무력함은 오랜만이었다.

저벅저벅.

가볍게 걸어와서는 아버지가 내 침대 맡에 앉았다. 그러고는 다정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아버지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 아픈가요?”

나는 대답 없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상냥함이 지금은 나를 더 슬프게 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에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제대로 미소를 짓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 것을 보면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의 단정한 미간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

“헛구역질한 것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신경 쓰지 말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멜리사도 비위가 무척 약했었답니다. 당신이 멜리사와 닮았다는 증거 같아서 오히려 기뻤는걸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면요?”

나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버지와 상의해볼까?’

하지만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적당한 대답을 내뱉었다.

“향수병……인 것 같아요.”

“남편이 많이 보고 싶은 모양이군요.”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보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보고 싶지 않아.’

우리 결혼의 가장 큰 전제조건이 바로 아기였다.

‘아기를 가지지 않기로 했는데, 이렇게 덜커덕 생겨버리다니.’

그렇게 조심했는데,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그동안 그럼 그 꿈들이 다 태몽이었구나.’

꿈에 나온 강아지를 소중히 안아 들었던 것, 이안과 꼭 닮은 남자가 엄마라고 불렀던 것.

모두 태몽이었다.

‘이안을 닮은 아들인가 봐.’

어린 이안의 모습을 상상해보려다가 나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닌걸.’

심지어 타국에서 알게 되다니. 여러모로 난처한 상황이었다.

‘편지를 쓸까? 중요한 문제이니 직접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말을 꺼냈다가 이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면.

‘무서워.’

이안에게 모든 심경을 토로하고 의지를 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그에게 최대한 늦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편편한 배는 조금도 임신한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 아버지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많이 힘든가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온전히 내 문제였기 때문에, 아버지에게까지 우울함을 전염시키는 건 옳지 않았다.

“그냥 기분이 가라앉아서 그래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저런.”

내가 억지로 웃어 보였음에도, 아버지는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위와 함께 올 걸 그랬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에요. 오고 싶다고 한 것도 저였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올리비아.”

내 손을 붙드는 손이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는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정말 타이론 대공을 사랑하는군요. 그렇지요?”

“……네.”

잠시 숨을 멈췄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

결국 지금 이 고민은 모두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를 사랑하기에,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어려워.’

막연히 사랑하는 사람은 조금 더 편할 거라 생각했다. 더 스스럼없이 자신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착각이야. 사랑하니까 더 조심스러워지는걸.’

미움받고 싶지 않다. 그와 다투고 싶지 않다.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이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이안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꽉 잡았다. 아버지는 내 손가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은 좋은 것이죠. 인생의 가장 큰 축복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벌렸다.

“아버지께서는 왜 지금까지 독신이셨어요?”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날 바라보았다.

“무슨 의미인가요?”

“어머니를 잃으신 지 오랜 시간이 흘렀잖아요. 외롭지 않으셨어요?”

침대에 앉아서 나는 이런 고민을 했다.

‘만약 이안이 완전한 이별을 선언한다면 혼자서 꿋꿋하게 그에 대한 마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한 번 누군가의 온기를 알아버렸는데, 그 없이 살 수 있을까. 나는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망설이는 나와 달리, 아버지는 어쩐지 후련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외로웠지요. 누군가 다른 이의 체온에 위로받고 싶었던 밤이 없다고는 말하기 어렵군요.”

붉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경험해온 눈동자였다.

“멜리사를 그리워하는 마음, 또 내 아이를 찾고 싶다는 마음이 독신의 이유였지만, 온전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죠. 저는 국왕 전하를 압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건…….”

아버지가 내뱉은 말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였다.

순간 말문이 막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로맨틱하지 않은 이유라서 실망했나요?”

“그런 건 아니에요.”

오히려 현실적이고 솔직한 대답이라 마음이 놓였다.

내가 당혹스러웠던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안이랑 상황이 똑같아.’

나는 두 손으로 이불을 꽉 잡았다.

머릿속에는 지난 생의 이안이 떠올랐다. 내가 숨을 거둘 때까지도 계속 독신이었던 그 남자.

‘이안도 이런 생각이었을까?’

늘 무심해 보이던 그때의 이안을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울적한 어조로 물었다.

“왕족에게 혈통이란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내게 중요하다고 해서 타이론 대공에게도 그렇다고 확답할 수는 없지요.”

우문현답이었다. 차분하게 대답한 뒤, 아버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답할 수 있습니다. 타이론 대공은 당신을 목숨처럼 사랑하고 있을 겁니다.”

“네에?”

이게 또 무슨 말이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내 딸에게 빠지지 않으면 누구에게 빠지겠어요.”

뭐야. 뭔가 근거가 있는 말인가 해서 귀를 기울였더니.

‘팔불출 발언이었나.’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남들이 들으면 창피할 말이지만, 그래도 듣기 좋네요.”

“하하.”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다가 결국 웃었다.

“고마워요, 아버지.”

* * *

마이옌 공과 내일은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로 약속하고 난 뒤, 나는 오랜만에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가지런히 편지지와 펜이 놓여 있었다.

‘편지…….’

지난번 이후 다시 편지를 적지 않았다.

‘이안은 편지를 기다리고 있으려나.’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편지를 보내지 않으면, 이안은 내가 어디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이는 어떻게든 찾아서 올 것 같단 말이야.’

제집인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올지도 몰라. 나는 쿡쿡 웃고 말았다.

하지만 웃었음에도 나는 펜을 결국 들 수 없었다. 나는 빈 종이를 내버려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아버지와 상의해봐야겠어.’

오늘 대화로 깨달았다. 아버지는 어떤 상황이든 나를 지지해줄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안에게도 이야기를 전해야지.’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마음고생을 한 탓일까. 방 안에만 있었는데도 잠이 밀려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다음 날, 나는 아버지에게 임신 소식을 알릴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산뜻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땋고 있는데, 하녀가 달려 들어왔다.

“아, 아가씨, 그, 그게요!”

“무슨 일이에요?”

오르세에 온 이래 이렇게 하녀가 쿵쾅쿵쾅 뛰어다니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한참 동안 말을 버벅거리던 하녀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왕자님! 왕자님께서 오셨어요!”

“왕자님?”

나는 괴상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 * *

마이옌 공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니코 왕자를 맞이했다. 웃는 얼굴은 상냥했지만, 흘러나온 말은 그렇지 못했다.

“분명 방문 의사는 공손히 거절했던 것 같은데.”

“예, 저도 잘 받아보았습니다.”

니코 왕자는 뻔뻔스럽게 웃으며 마이옌 공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고는 자신이 곱게 안고 온 벨벳 상자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어마마마께서 제 사촌에게 귀한 선물을 내리셔서요. 아랫것들에게 시키기가 불안했답니다.”

“…….”

왕비가 올리비아의 존재를 달가워할 리가 없는데. 하지만 벨벳 상자는 겉만 보기에도 무겁고 귀해 보였다.

니코 왕자는 마이옌 공과 흡사한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왕실에서 제국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저 아닙니까. 사촌에게 오르세를 설명하기에는 제가 제일 적합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틈을 찾기 어려운 말이었다. 마이옌 공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작정하고 왔군.’

왕실 사람들이 하루라도 더 올리비아를 먼저 보고 싶어서 들썩이는 것은 마이옌 공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왕자가 직접 찾아오니 달갑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어차피 제국으로 돌아갈 아이거늘.’

마이옌 공이 다시 정중하게 니코 왕자를 내쫓으려고 할 때였다.

등 뒤에서 또각또각 여자 구두가 대리석을 울릴 때 나는 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뒤를 돌아보니 은빛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 내린 올리비아가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오르세에서 보기 힘든 디자인의 원피스가 우아하고 고풍스러웠다.

“올리비아.”

마이옌 공이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여신……?”

옆에서 얼떨떨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했더니 니코 왕자는 입을 떡 벌리고 올리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예감이 썩 좋지 않아, 마이옌 공은 손바닥을 문질렀다.

오르세 국왕은 정비로부터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 집에 찾아온 왕자는 두 번째 왕자, 니코란 말이지?’

오르세어도 익숙하지 않은데, 잔뜩 흥분해서 빠르게 말을 뱉어내는 하녀에게서 내가 원하는 정보를 골라 듣기는 어려웠다.

‘갈색 머리카락에, 다정한 미소로 유명하다고.’

국왕의 아들이면, 내 사촌이라는 뜻이었다.

‘아버지와 혈연이면 다정한 게 당연하지.’

내 아버지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마이옌 공은 내가 본 이들 중에서 가장 신사다운 사람이었다.

‘나도 아버지처럼 온화하게 늙고 싶어.’

이미 지금 시점에서 늦어도 한참 늦은 것 같지만. 나는 회귀한 이후 내가 했던 행동들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차라리 지난 생이 더 온화했을지도.’

그냥 떠올리지 않는 게 낫겠다. 나는 다시 기억의 저편에 나의 행동들을 묻어두었다.

타이밍 좋게 나를 안내하던 하녀가 말했다.

“아, 저기 계시네요.”

나는 고개를 들어 복도를 바라보았다. 복도에는 아버지와, 금실이 잔뜩 들어가서 휘황찬란한 제복을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저 사람이 니코 왕자구나.’

놀랍게도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조금 실망했다.

‘물론, 은발의 왕족들이 득시글득시글할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갈색 곱슬머리에, 평균 정도의 키, 그리고 마른 체구를 가진 왕자는 어쩐지 유약하게만 보였다.

‘내가 너무 제임스와 이안에게 길들여진지도.’

제임스는 평균을 논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큰 덩치의 소유자였고, 이안도 올려다보려면 고개가 아플 정도로 키가 훌쩍 컸다.

하여간 이안하고 비교하니 평범한 얼굴이었지, 니코 왕자만 두고 보면 그럭저럭 말끔한 외모였다.

‘그래도 국왕 전하를 제외하면 처음으로 찾아온 친척이구나.’

잘 보여서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지극히 사교적인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나를 돌아본 니코 왕자가 어리버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여신……?”

“?”

나는 당혹스러워서 걷던 걸음을 멈췄다.

‘내가 귀가 이상한가? 제대로 들었나?’

여신이라고 한 것 같은데.

오르세어가 능통하지 않아서 확신이 들질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아버지 곁에 섰다.

“어떻게 나왔나요.”

“하녀가 알려주어서요. 왕자님께서 오셨다면서요.”

내 대답에 아버지가 어쩐지 내 곁의 하녀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어?’

하지만 내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기 전에 아버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니코 왕자를 소개했다.

“네. 이쪽이 이 나라의 니코 왕자입니다.”

“…….”

그런데 소개말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대답이 없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눈도 깜짝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크흠.”

결국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니코 왕자를 팔꿈치로 살짝 건드렸다. 니코 왕자는 화들짝 놀라더니만,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그만.”

“네?”

이렇게 직설적으로 칭찬을 듣기는 또 처음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왕자를 다시금 불렀다.

“니코 왕자.”

그제야 헛 하고 정신을 차린 니코 왕자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레이디.”

“아니에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순진한 꼬마를 보는 기분이라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면전에서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네요.”

‘아니지.’

사실 니코 왕자만이 아니었다. 이안도 수시로 내게 이렇게 속삭이곤 했다.

“예뻐요.”

‘이안.’

나는 항상 예쁘다, 아름답다 하면서 호시탐탐 내 입술을 노리던 남자를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 이안은 지나치게 무심한 태도였기 때문에, 그가 본색을 드러낸 순간 무척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음흉스러운 남자 같으니. 외모가 취향이라고 조금도 티를 내지 않더니.’

그러더니 정식으로 식을 치르기 무섭게 돌변했지.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그때처럼 설렜을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안은 특별해.’

그의 말 한마디, 나직하게 웃는 모습,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리는 표정.

무엇 하나 평범하지 않았다. 내게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

이렇게 사랑하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만나는 것이 두려워지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내가 회한에 젖어 있을 새도 없이, 정신을 차린 왕자가 나에게 인사했다.

“저는 오르세의 2왕자, 니코입니다. 드디어 마이옌 공의 따님을 찾았다고 들어서 방문했습니다.”

“네. 마이옌 공의 딸 올리비아입니다.”

내가 오르세식으로 인사를 하려고 하니, 니코 왕자가 나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그러고는 제국식으로 내 손등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손은 놓고 이야기하지요.”

아버지가 그리 말하면서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때문에 니코 왕자가 붙든 손은 풀리고 말았다.

니코 왕자가 살짝 뺨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제국식 예법은…….”

“이곳이 제국은 아니니까요.”

그의 반문은 나오기도 전에 온화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의 단호한 말에 잘려 나갔다.

‘아니, 우리 아버지에게 이런 면이?!’

웃는 낯만 보아서 다른 사람들의 부탁도 잘라내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강단이 있었다.

“아버지.”

“흠흠.”

내가 웃으면서 아버지를 부르자, 아버지는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아버지의 팔에 매달렸다.

“아버지, 너무 좋아요.”

아버지는 얼굴을 붉히시면서 연신 헛기침을 했다. 우리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니코 왕자가 생긋 웃었다.

“두 분이 다정하시군요.”

니코 왕자의 말에 아버지는 근엄하게 대답했다.

“친해지려고 노력 중이랍니다.”

그 말에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우리 이미 친한 것 아닌가요? 저 혼자만 그렇게 생각했던 건가요?”

“그, 그게 아니라.”

“제게 낯설다고 느끼고 계셨다니.”

“그, 그게.”

조금 놀렸더니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버지가 귀여워 보였다. 내가 쿡쿡 웃었을 때였다.

“저도…….”

니코 왕자가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도 친해지고 싶습니다, 레이디.”

“어머나.”

진지한 척 허리에 힘을 주고 몸을 세운 모습이 어린애 같았다.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영광이에요, 왕자님.”

* * *

그렇게 아버지와, 나, 그리고 니코 왕자가 앉아서 차를 마시게 되었다. 으레 친척들이 할 만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비서관이 찾아왔다.

“잠시만 결제 관련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얼른 다녀올게요.”

아버지는 연신 니코 왕자를 찜찜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결국 자리를 떴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봐야 나는 유부녀인걸. 뭘 저리 걱정하신담.’

아버지가 떠나고 나서도 우리 테이블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니코 왕자는 제국에 대해서 많이 공부를 해서 대하기가 편안했다. 특히 유창한 제국어는 제국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는 신기해서 니코 왕자에게 물었다.

“어째서 제국어를 공부하셨어요?”

나의 질문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이옌 공처럼 되고 싶었거든요.”

“아버지처럼요?”

“왕족이라고 왕국 내에서 평안하게 살기만 하란 법이 있습니까. 전 세계를 여행하고 다니는 마이옌 공의 모습이 제겐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아카데미에서 오르세로 여행 올 것을 꿈꿨으니 저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왕족으로 사는 건 따분할 수도 있지.’

다시금 내 머릿속에 오페라를 보며 졸고 있던 이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져라. 사라져.’

마음을 조금만 놓으면 이안이 자꾸만 생각났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이안에 대한 생각을 털어버렸다.

명랑해 보이는 외모의 소유자인 니코 왕자는 그 느낌대로 계속해서 활달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주로 화제는 우리 아버지였다.

“저는 마이옌 공을 정말 존경합니다. 닮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이옌 공은 정말 외모도 멋있으시고.”

‘뭐야, 우리 아버지 팬이야?’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멋있는 분이신 것은 맞기에, 나는 적당히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제 더 이상 아버지를 예찬할 것이 없어진 니코 왕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 질문을 던졌다.

“제국은 어떤가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을 물으시는지 모르겠네요. 제게는 고향이니까요.”

제국의 수도를 떠난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다. 나의 대답에 니코 왕자는 과장스럽게 자신의 이마를 때리며 웃었다.

“제 질문이 잘못되었군요. 제국에서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혹시…… 마음에 품은 정인이 있으십니까?”

은근히 아닌 척 물어보는 모습이 어린 소년을 보는 것 같아서 귀엽기까지 했다. 나는 다소곳한 태도로 대답해주었다.

“저는 결혼을 했어요.”

“네?”

설마설마했는데, 아버지가 오르세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도 알리지 않은 것 같았다.

‘나를 배려하신 거겠지.’

사용인들이 왜 아가씨라고 부르는지도 알 것 같았다. 대부분이 내가 유부녀인 줄 모르는 것이다.

‘그래도 괜한 기대를 품으면 안쓰러우니까.’

나는 눈치채지 못한 척, 웃으면서도 딱 잘라서 말했다.

“아버지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셨나 봐요. 저는 결혼을 이미 했답니다.”

“어, 언제.”

“오래된 건 아니에요. 올해 했거든요.”

“이럴 수가.”

니코 왕자는 퀭한 얼굴로 비틀거렸다.

‘조금 미안한가?’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를 배려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예전처럼 자신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나는 두 손으로 내 납작한 배를 덮었다. 한 번 임신을 자각해서 그런가, 배가 무겁게 느껴졌다.

‘……이안이 아이를 포기하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아이가 아예 생기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살아 숨 쉬고 있는 아이를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최악의 경우 이혼이라도 요구하면…….’

끔찍한 상상에 마음이 괴로워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뒤로 우리의 대화는 데면데면하게 흘러갔다. 니코 왕자도 나도 자신의 생각에 갇혔기 때문이다.

“……마이옌 공께서 바쁘신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이것은 어머니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니코 왕자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나에게 네모난 상자를 건네주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감사해요.”

그래도 친척을 만나 선물도 받다니, 그 자체로도 기분이 좋았다.

니코 왕자가 웃으며 상자를 쓰다듬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묘하게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제가 환영회 당일에 에스코트해도 되겠습니까?”

“?”

나는 순간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좋거나 싫어서가 아니고 오르세를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보통 아버지가 에스코트해주지 않나?’

오르세는 제국과 다른가 싶어서 멈칫한 사이, 니코 왕자는 내 손을 붙잡고 손등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럼 며칠 있다가 뵙겠습니다.”

“아? 네.”

묘한 여운이 남는 인사였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환영회 날은 금세 찾아왔다.

내가 방에서 뭘 하고 있든지 간에 절대로 먼저 찾아오는 일 없던 저택 하녀들이, 그날 아침만은 우르르 들어왔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얼른 준비하셔야지요!”

“으응……?”

단잠에 빠져 있던 나는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온 그녀들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녀들은 무척 의욕에 차 있었다.

“오늘이 드디어 무도회 첫날이잖아요! 어서 준비하셔야지요!”

“……오후부터잖아?”

“그러니까 준비라고요!”

제국에서도 이렇게 일찍 준비한 적이 없는데 왜 여기서는 이렇게 일찍 준비해야 한단 말인가.

‘왜 이렇게 의욕에 가득 차 있지?’

얼마나 이 모습이 낯설었냐면, 내가 그동안 참석했던 무도회는 무도회가 아니었나 싶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어나서 꾸미고 나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녀들이 나를 앞에 두고 눈을 빛냈던 것이다.

“이제 누구를 데리고 입궁하실 건가요!”

“……데리고 입궁을 해요?”

“네. 무도회에 귀족 영애들은 수발을 들 하녀를 데리고 함께 들어가요. 보통 한 명이지만, 지체 높은 귀족은 세 명도 데려가지요.”

“가서 무엇을 하는데요?”

“무도회에 참석을 하죠!”

“아하.”

그러니까 하녀들로서는 귀족 영애를 따라 입궁하는 것이 유일한 입궁 방법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동안 이 저택에는 영애가 없었고.’

말하자면 첫 번째 기회가 온 셈인 것이다.

‘내게 선택을 받고 싶어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나를 꾸몄던 거구나.’

말하자면 그들도 설레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왕궁이 얼마나 구경하고 싶겠어.’

나는 턱을 괴고 피식 웃었다.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하녀들이 퍽 귀엽게 느껴졌다.

“모두 여섯 명이었던가요?”

“맞아요, 아가씨.”

“무도회는 삼 일간 이어지니까 두 명씩 번갈아 가면서 참석하면 되겠네요. 서로 순번을 협의해서 오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내 대답에 하녀들은 환하게 웃으며 우르르 또 몰려나갔다.

‘가위바위보라도 하려나.’

나는 또 피식 웃었다. 웃어서 그런지 조금 나른함이 밀려왔다.

‘나도 저렇게 설렜던 적이 있었을 텐데…….’

있었나? 잘 모르겠다.

‘나는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으니까.’

진상들은 무도회에 아예 참석을 못 하도록 몇 번이나 방해를 했다.

‘그런 방해를 물리치고 겨우겨우 참석하면 뭐하나.’

첫째 진상 친구들에게 망신을 당하고 정원에 나가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선연하다.

‘나에게 무도회는 특별히 무장하고 나가야 하는 전쟁터 같은 곳이었지.’

황궁의 화려함,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 같은 것을 알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여유가 생기다니.’

와글와글거리는 하녀들의 모습이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조금 있으니 하녀 두 명이 다가와서는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오늘은 저랑 마리가 아가씨를 보필하기로 했어요.”

“잘 부탁드려요!”

“나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내가 상냥하게 대답하자, 그녀들은 또다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발그레 얼굴을 붉히고 물었다.

“저어, 아가씨,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한데요.”

“네. 말해보아요.”

“저희 둘은 그럼 꾸미러 가도 될까요?!”

그 말에 나 또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설렘이 내게도 전염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요. 꼭 예쁘게 하고 와야 해요.”

“네!”

두 사람이 우르르 떠나고 네 명의 하녀가 남았다. 그녀들은 내 머리카락을 장식할 핀에 대해서 토론을 시작했다.

“은빛 머리카락을 살려주려면 역시 붉은 루비 아닌가요?”

“푸른색 사파이어도 잘 어울려요. 지금 입은 드레스가 붉은 계통이니까요.”

그렇게 마지막 단장을 하고 있으니, 문득 이런 궁금함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귀족과 수행원들이 모두 한곳에 섞여 있는 건가요?”

내가 궁금한 건 그거였다. 하녀가 무도회를 따라 참석한다니, 오르세의 신분제가 제국만큼 뚜렷하지 않은 건가.

내 질문에 하녀들은 저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쏟아내었다.

“저도 참석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듣기로는 플로어가 구분되어 있대요.”

“그리고 손목에 민트색 리본을 달아야 해요.”

“아마 아가씨께서 춤을 추시는 무도회장에는 높은 계층의 귀족분들만 모여 있을 거예요.”

“언덕 같은 구조라고 생각하시면 되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마구 섞이는 건 아닌가 보구나.’

작위별로 들어갈 수 있는 홀이 구분되어 있는 모양이다.

‘홀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지만,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는 없을 테고, 정원까지 개방하겠지.’

내가 하녀 입장이라면 아가씨를 따라 들어가서 왕궁의 정원만 구경해도 신기할 것 같았다.

“아가씨, 마실 것을 가져다드릴까요?”

“음.”

나는 조금 고민했다. 오르세의 드레스는 구조상 화장실을 다녀오기가 무척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예 안 먹고 있을 수는 없지만.’

나는 고개를 들어 하녀에게 말했다.

“그보다 숄을 가져다줄래요?”

“숄이요?”

“얇은 레이스도 좋아요. 어깨에 걸치고 싶어서요.”

“추우세요?”

“아, 아뇨.”

추워서가 아니다.

“……역시 민망해서요.”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내가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말하자, 하녀들은 한차례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 * *

시간은 금방 흘렀다. 너무 이른 시간부터 단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핑거푸드를 축내고 있으니 일어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내일도 있으니까 오늘은 적당히 피곤하지 않을 정도로만 즐기고 오세요.”

“맞아요. 내일도! 내일모레도 있으니까요!”

“하하.”

내일도 이렇게 이른 시간에 들썩이지만 않으면 피곤하지도 않을 거 같은데.

‘순번이 정해졌으니까 내일까지 저렇게 들떠 있지는 않을 거야.’

과연 그럴까. 나는 지나치게 내게만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저들이 일찍 쳐들어와도 내일은 피곤해서 눈 못 뜰걸.’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걸어 내려오니, 마침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던 아버지를 딱 만날 수 있었다.

“무척 아름답군요, 우리 딸.”

“아버지도 멋있으세요.”

매일 나에게 구박만 하던 플로렌스 자작과 달리, 아버지는 참 다정다감했다. 설탕 같은 칭찬을 들으며 나는 배시시 웃었다.

“그럼 마차에 오를까요?”

“네.”

아버지를 따라 마차로 올라가고 있으니 저절로 이안이 안아 올려주던 때가 떠올랐다.

‘쇼핑하러 갈 때. 내가 드레스 폭이 좁아서 마차에 오르지 못하고 망설이니까 번쩍 안아주었지.’

장난스럽게 찡긋거리던 눈매가 선연했다.

“혹시 자기 부인을 만나면 이렇게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늘 스스로 해결하려는 모습이 멋진 건 아는데, 나한테는 기대도 된다고요.”

우뚝.

나는 나도 모르게 발판에 한 발을 올린 채로 멈춰서고 말았다. 나보다 앞서 오른 아버지가 내 손을 잡은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올리비아?”

“저기, 아버지…….”

“네?”

“마차에는 저희 둘이만 타나요?”

“그렇죠. 하녀들은 마부 곁에 앉을 거예요.”

아버지는 갑자기 그런 것을 묻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상냥하게 대답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단둘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네, 좋아요. 시간은 충분하니까요.”

황궁까지 마차는 느릿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아버지, 제가 언제고 아버지께 제 결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고 한 것 기억나시나요?”

“물론입니다.”

“사실은요…….”

나는 아버지에게 내가 살아온 과정에 대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빚 대신 팔리듯 결혼을 해서 만난 세 명의 시어머니와, 전쟁에 나간 남편, 내가 파넬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그래서 타이론 대공을 골랐어요. 파넬을 탈출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거든요.”

“……올리비아.”

아버지는 내 말을 묵묵히 듣고 계시다가 천천히 나와 눈을 맞추었다. 붉은 눈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누구요? 어머니들이요? 잘 지내고 있겠지요.”

“…….”

잘 지내든 거지같이 지내든 나랑은 이제 아무 상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께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얼굴이 더더욱 우울해졌다. 나는 웃으며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아버지. 아버지를 속상하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니에요.”

“당신이 무척 마음고생을 하면서 자랐을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아버지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흐려졌다. 나는 아버지의 손등을 토닥였다.

“전 괜찮아요. 충동적으로 선택한 사람이었지만, 이안은 좋은 사람이었거든요. 전 정말 행복했어요.”

“……왜 과거형이죠?”

내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민이 생겼거든요.”

정말 이걸 아버지에게 말씀드려도 되는 건가. 하지만 내가 의지할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자약해지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기를 가졌어요, 아버지. 그이는 아기를 원하지 않는데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 *

“…….”

내 고백을 들은 뒤, 아버지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나는 쭈뼛쭈뼛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도 놀라신 걸까.’

아버지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데도 이렇게 심장이 떨리는데 과연 이안에게는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인생이란 왜 이렇게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걸까.’

이제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고처럼 아이가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가 속절없이 무릎 근처의 치맛자락만 뜯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르세에 오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군요, 그렇지요?”

“네.”

알았다면 무리해서 마차 여행을 시도하진 않았을 것이다. 조심해야 하는 초기 때 장거리 마차 여행을 떠나다니.

‘정말 다행이야.’

만약 무슨 일이라도 났으면 또 어쩔 뻔했나. 순간 아찔했다.

아버지는 턱을 문지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위가 아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은 뭡니까?”

“그게 저희 결혼의 조건이었어요. 왜냐면 저도 아기를 원하지 않았거든요.”

이안은 자신이 황족혈통이라서 아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경우에는.

“아기를 낳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잖아요.”

아기 낳는 것이 두려웠다.

‘이번에도 그렇게 고통스러울까.’

나는 그냥 막연히 지난 생을 떠올리고 한 말이었는데, 아버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런……. 올리비아.”

내 손을 꽉 붙드는 아버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그제야 아버지가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우리 어머니는 나를 낳고 쇠약해져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그 곁을 지키시지도 못했다. 아버지가 조금 빠른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누구에게나 불행한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아요. 당신에게는 더더욱이요.”

“아버지.”

“일단 유명한 의사들부터 수소문해봐야겠군요. 복잡하고 말이 많은 수도보다 한적하고 마음이 편안한 곳으로 가서…….”

“아버지, 진정하세요.”

내가 힘을 주어 말하자, 아버지는 조금 퀭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맞아요. 저는 괜찮을 거예요. 어머니보다 건강한걸요.”

나도 본 적 없는 어머니지만 그냥 그렇게 말했다. 이모가 늘 누워 있다가 일찍 병사한 것을 생각하면 우리 어머니도 비슷했을 것이다.

“미안해요. 내가 모자란 아버지라…….”

아버지는 몇 번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훨씬 차분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그래서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거군요.”

“네.”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그 말에 이번에는 내가 울컥했다. 혼자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내 마음을 읽어주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그런 내 손등을 차분하게 토닥였다.

“올리비아. 나와 멜리사도 비슷했습니다. 상황이 우리를 극한으로 몰아갔기 때문에 아이가 선물이라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어요. 사랑에 빠진 것조차 후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안 봐도 두 사람이 어떤 고난을 겪었을지는 뻔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정말 다 잃었으니까.’

왕위까지 걷어찼으면 행복해져야 했는데, 아내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알 수도 없었다.

그 비통함이 고스란히 지난 얼굴이 차분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있어서 저는 무척 행복합니다. 타이론 대공 또한 그렇게 느낄 테죠.”

“……그이가 화를 내지 않을까요? 제게 실망할 수도 있잖아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사람이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부닥치면 제일 먼저 화가 나니까요.”

아버지의 말은 담담하고 온화해서 잘 듣는 약을 내 머릿속에 바르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내 손을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 당신을 사랑한다면, 원하지 않았던 아기까지 사랑하게 될 거예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리고 네게는 이제 이 아버지가 있지 않니.

아버지가 내뱉지 않은 말이 귓가를 울리는 것만 같았다.

* * *

환영회가 열리는 오르세의 왕궁은 제국과는 완전히 양식이 달랐다. 둥근 돔 형식의 지붕이 이곳이 낯선 이국이라는 걸 내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오늘은 마음 편하게 환영회에 참석하도록 해요. 그리고 내일 진료를 받아봅시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토닥여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아버지에게 털어놓아서 그런지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오르세 왕궁을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왕궁에 대한 설명이 듣고 싶은가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설명하자면…….”

하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등 뒤에서 우리의 대화를 젊은 남성이 싹둑 잘랐기 때문이다.

“여기 계셨군요.”

뒤를 돌아보니 부슬부슬한 갈색 머리카락을 완전히 뒤로 넘긴 니코 왕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왕자님.”

“한참 찾아다녔습니다.”

니코 왕자는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아버지가 그런 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왜 우리 딸을 찾아다녔나요? 왕자는 지금 왕족 입장을 준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묘하게 뾰족한 어조였으나, 니코 왕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저는 제 사촌누이의 에스코트를 맡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사촌누이를 찾을 수가 없어서 한참 헤맸답니다.”

“에스코트?”

“이미 사촌누이께는 허락을 받았답니다.”

“네?”

아버지는 고개를 크게 갸웃했다. 그러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저 말이 진짜인가요, 올리비아?”

“네? 아, 저는 다들 그렇게 하는 건 줄 알고…….”

“이런.”

나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뭐야, 보통 그런 거 아니었어? 특별한 거였어?’

내 입장에서야 뻔히 아버지가 있는데 에스코트를 청해오니 당연히 오르세의 관습인 줄 알았다. 아버지는 내 놀란 표정에서 그런 마음을 읽고는 혀를 찼다.

“앞으로는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오르세 관습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배려하지 않고 입소문을 내니까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의 말씀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한미한 자작가 영애로, 춤과 예법을 익힐 기회가 별로 없었음에도, 사람들은 내가 완벽한 파넬 공작부인이 되지 못했음을 헐뜯었으니까.

“제가 떼를 쓴 것이니, 누이를 나무라지 말아주세요.”

니코 왕자는 밉지 않게 생글생글 웃으며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내 귀에서 반짝이는 노란색 귀걸이를 보며 웃었다.

“선물로 드린 장신구를 착용하셨군요.”

니코 왕자가 건네준 벨벳 상자에는 바로 시트린 귀걸이와, 작은 티아라가 들어 있었다.

‘귀걸이만 착용했는데 용케 알아봤네.’

티아라는 어쩐지 과하게 느껴져서 착용하기 꺼려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 가족들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기뻐서요.”

“잘 어울리십니다.”

낯간지러운 칭찬이 나쁘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계속 니코 왕자가 어린 소년처럼 보여서 조금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대화가 썩 좋지 않게 들렸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경각심을 가지고 또 대화에 끼어들었다.

“왕자,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제 딸은 이미 출가외인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니코 왕자는 바로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조금 놀라서 나를 돌아보시기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티타임 때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왜?”

사촌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것에 아버지가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신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팔에 팔짱을 끼며 배시시 웃었다.

“걱정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제 딸은 믿습니다만…….”

너는 못 믿는데.

그런 표정으로 아버지는 니코 왕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이 민망해서 나는 헤헤,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니코 왕자의 팔에도 팔짱을 끼었다.

“이렇게 아버지와 사촌을 양쪽에 팔을 끼우고 있으니 좋네요.”

“흠.”

아버지는 난처해하면서도 내 넉살 좋은 말에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아버지도 함께 셋이 입장하는데 별일이 있을 게 있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의 느긋한 마음에는 제국에선 사촌 간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는 것도 한몫했다. 아무리 니코 왕자가 어필을 해도 내게는 남자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조금 있으니, 무도회장의 넓은 문이 나타났다. 시종이 큰 소리로 우리의 입장을 알렸다.

“니코 왕자님과 마이옌 공, 그리고 마이옌 영애 드십니다.”

나는 천천히 오르세의 사교계로 한 걸음 내디뎠다.

* * *

오르세의 귀족들은 대다수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어머나, 마이옌 공을 정말 쏙 빼닮았네요.”

“따님을 찾게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마이옌 공.”

“정말 이 나라의 경사네요.”

정신없이 밀려드는 축하 인사를 받으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갑자기 피곤해진다.’

하녀들도 무도회에 참석한다고 말할 때부터 느꼈는데, 오르세의 무도회는 제국과 텐션이 달랐다. 제국이 좀 더 무겁고 우아한 분위기라면, 오르세는 꼭 축제 한복판에 온 것 같았다.

‘적어도 자기소개는 하고 말을 쏟아내야 하는 거 아니야? 오르세는 이런 식인가?’

자기소개도 없이 쏟아지는 말들에, 내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하고 있을 때였다.

조금 뾰족한 질문이 내게로 날아들었다.

“그런데 왜 니코 왕자님과 함께 입장하신 건가요?”

“네?”

일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바늘처럼 꽂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들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나의 입술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

내가 말이 막혀서 입술을 벙긋거렸을 때였다. 내 아버지가 여유가 느껴지는 느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니코 왕자님이 제국어에 능통해서 그렇답니다. 제 딸은 아직 오르세어에 그리 밝지 않거든요.”

현명한 대답이었다. 질문을 던진 부인이 호호호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나, 외국인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니코 왕자님의 제국어 실력은 오르세 안에서도 소문이 자자하지요.”

그들의 태도를 보며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그렇게까지 경계의 대상이야? 여긴 사촌 간이어도 상관없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에는 아버지의 애드리브대로 따르는 게 맞는 것 같아, 나는 어색한 오르세어로 대답했다.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요. 앞으로 오르세에서 사실 거니까요.”

“오르세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꾹 눌러 참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 국왕 전하와 왕세자, 왕비와 후궁들이 나왔다.

국왕이 등장했으니 조금 분위기가 차분해질까 했더니만, 국왕의 연설 또한 흥이 가득 차 있었다.

“오늘은 모두가 알다시피, 존경하는 마이옌 공이 드디어 혈육을 찾은 즐거운 날입니다. 모두 재회한 부녀를 축복해주시길!”

“축복해요!”

“행복하세요!”

무도회장의 모든 사람이 나를 향해 축복의 말을 던지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나는 다른 의미로 아찔해졌다.

‘아아, 적응 안 된다.’

정말 이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을까. 나라가 달라진다는 게 이렇게까지 문화가 달라진다는 것임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조금 멍해져 있는 나를 니코 왕자가 잡아끌었다.

“올라가서 왕실 어른들과 인사하도록 하죠. 제가 소개해드릴게요.”

“네.”

나는 아버지와 니코 왕자를 따라 왕족들이 앉아 있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위로 올라가니 무도회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데리고 온 하녀들은 저기 있네.’

멀리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하녀들이 보였다. 넓은 유리벽 하나로 무도회장이 나뉘고, 내 예상대로 정원까지 완전히 개방된 형태였다.

‘날씨가 따뜻하니 굳이 벽으로 닫아두지 않는구나.’

어쨌든 개방성은 좋은 구조였다.

단상 위에는 이미 알고 있는 국왕 외에도 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니코 왕자가 웃으며 그중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린 여성을 소개했다.

“제 어머니이신 왕비님이시랍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답인사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 귀걸이는 어디서 났지요, 영애?”

들려온 것은 인사가 아니라 뾰족한 추궁이었다.

웃는 얼굴에 균열이 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손에 힘을 주어 바르르 떨리려는 얼굴을 막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지요, 왕비님?”

하지만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를 도둑으로 보는 것 같은 시선에 내가 입술을 비틀었을 때였다.

니코 왕자가 타이밍 좋게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가 선물한 것이에요, 어마마마.”

“왕자가?”

얼음처럼 차가운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지, 니코 왕자는 생글생글 잘도 웃었다.

“네. 사촌누이가 반가워서요.”

“반가워서?”

왕비는 기가 찬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다시 나를 응시했다.

“그건 내 물건입니다, 영애.”

“뭐라고요?”

“제 물건이지요. 어마마마께서 제게 주셨지 않습니까!”

‘아하.’

내가 공작부인으로 지낸 게 몇 년인가. 몇 개의 단어만 듣고도 이 상황에 대한 답이 나왔다.

‘그러니까 왕비가 내린 보석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왕비가 왕자에게 여성의 장신구를 내릴 때는 그 의미가 명확한 것.

‘철딱서니 없이 그게 자기 거라고 생각했나 보군, 저 왕자는.’

“잠시만요.”

나는 곧장 귀걸이를 풀었다. 왕비의 시녀가 바로 내게서 귀걸이를 받아갔다. 나는 생긋 웃으며 몇 번이나 반복했던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제가 오르세어에 익숙하지 못해 곡해한 것 같군요. 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정말 제 것인데…….”

눈치도 없이 끼어드는 왕자를, 나는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랑 이야기 좀 할까요, 왕자님.”

귀엽다고 웃어넘기려고 했더니 이런 빅엿을 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 * *

아무래도 내가 아버지 곁에 있다고 해서 마음을 지나치게 놓았던 모양이다.

‘조그마한 것 하나하나 조심해야 하는 곳이 사교계이거늘.’

하다못해 철없는 사촌이 뒤통수를 칠 줄이야.

‘인간적으로 이건 내 잘못 아니다. 누가 결혼까지 한 사촌누이에게 애정 공세를 할 줄 알았겠어.’

요새 어째 제임스도 그렇고, 지난 생에 없던 꼬임이 자꾸 있는 것 같은데.

‘선을 그어야지.’

지난 생과 달리 내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살갑게 받아주어서 그런 것 같았다.

니코 왕자와 나는 무도회장과 정반대의 후원으로 향했다. 등이 여기저기 켜져 있어서 전혀 어둡지 않은 곳이었다.

“제가 계속 사촌끼리 할 수 있는 일인가 해서 웃어넘겼는데, 아무래도 선을 넘은 것 같군요.”

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니코 왕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귀걸이와 티아라는 보통 물건이 아니에요. 맞죠?”

“음, 사실은…….”

니코 왕자는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꼭 엄마에게 혼나는 어린애 같았다.

“어마마마께서 마음에 드는 여인이 생기면 선물하라고 주신 것이에요.”

“허어.”

설명을 듣고 나는 혀를 찼다. 내 행동에 그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실제로도 어릴지도.’

하는 행동을 보니 성년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리다고 해서 모든 행동이 납득되는 것은 아니다.

“그걸 왜 제게 주셨죠? 저는 결혼한 몸이라고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하지만 오르세에서 계속 지낼 것이지 않습니까?”

“네?”

생각지 못한 반문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니코 왕자는 억울하다는 듯이 뺨을 부풀리고는 툴툴대듯 말했다.

“제국이 우리와 달리 정략결혼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결혼도 그런 식이었을 테고요.”

제국의 결혼식에서 본인들 의사보다 부모의 의사가 더 크게 반영되는 것은 맞았다.

“당신의 남편은 지금 여기 없지 않습니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신부를 머나먼 타국까지 홀로 보냈다는 건 뻔한 일이죠. 사랑이 없는 결혼이라고요.”

기가 막혀서 픽 웃음이 나왔다.

“이봐요, 왕자님. 왜 제 배우자를 당신이 마음대로 판단하죠?”

내 말에 오히려 니코 왕자는 발끈했다. 내가 자신의 사랑을 의심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런 강렬한 사랑을 어떻게 외면합니까. 고작 몇 개월 늦게 만났다는 이유로.”

“그래서 일방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르셨다?”

“네! 그리고 아셨을 거 아닙니까. 당신의 남편이 누구인들 간에 저보다 나을 수 없다는 걸요.”

“아하, 그래서 그런 고풍스러운 장신구를 보내셨구나.”

나는 진짜 조금 웃겼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어리고 순진하게 굴지 않았다면 조금 덜 웃겼을까.

“대단한 자신감이시네.”

“뭐라고요?”

누군들 자기보다 나을 리 없다는 말도 참 우스운 말이었다. 한차례 잘게 웃은 나는 얼굴을 굳혔다.

“왕자님, 제가 방금 당신의 막무가내 행동에 감동했을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러면 대단히 오해세요.”

잘 모르겠다. 나는 10대에도 저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을 무척 싫어했으니까. 도서관에 놓이는 꽃이나 과자 따위를 와르르 버린 이유도 같았다.

“누가 동의하지 않은 강요를 좋아할 수가 있나요?”

그들이 내 자리에 두는 선물은 모두 일방적인 것들이었으니까.

내 대답에 니코 왕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가, 강요라니요! 사랑은 그런 말로 포장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랑. 그 말이 만능 키워드인가.”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왕자님은 만난 지 두 번밖에 안 되는 제 무엇에 그렇게 사랑을 느꼈는데요?”

“그, 그건.”

내 질문에 니코 왕자는 당혹스러운 듯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러고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할바마마와 똑같은 은빛 머리카락에…….”

상대를 처음 만났을 때,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외모가 눈에 들어오는 건 당연하다.

‘이안도 그렇게 말했었지.’

“처음엔 얼굴이 취향이었죠. 특히 눈이.”

“예쁜 여자가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제발 결혼해 달라고 간절하게 청혼을 하는데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던지.”

하지만 그렇게 말했던 남자가, 눈앞에 있는 이 왕자처럼 다짜고짜 내게 달려들었던가?

‘그래.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이안을 떠올리니, 지금 이 순간 더없이 의연해질 수 있었다. 나는 힘을 담아서 강인한 어조로 말했다.

“제 남편이 길가의 비렁뱅이일지라도 그 사람이 제가 사랑하는 남자예요. 그러니 이런 불쾌한 일은 벌이지 말아주세요.”

우리의 대화에 누군가가 끼어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잘 들었나?”

낮고 그윽한 목소리가 내 등 뒤에서 울렸다. 내가 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을 돌아보았다. 익숙한 황금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매끈하고 잘생긴 얼굴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니까 내 아내에게서 썩 꺼져!”

이안이었다.

* * *

스타티스와 로메오의 결혼식은 황태자의 국혼이라고 하기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간결하고 빠르게 치러졌다.

사실 결혼은 전채에 불과하고, 메인은 대관식이었기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다.

“의상은 이렇게 하면 될까요?”

“제복이니 화려한 망토를 다는 편이 좋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담비 망토를 두르시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남자 황후 자체가 워낙 드문 일이다 보니 고려해야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바쁜 것은 온전히 로메오였다.

‘으으, 출정 준비도 해야 하는데, 혼인이 이렇게 복잡하다니.’

손을 잡고 함께 들어올 것인지, 반지는 누가 끼워줄 것인지, 자리에는 어떻게 앉을 것인지.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이건만, 중신들은 그 사소한 문제에도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아, 힘들다.”

오늘도 한차례 입씨름을 하고 난 로메오는 너덜너덜해져서 정원 의자에 널브러졌다.

“그런 행동은 황후마마의 품위를 손상시킵니다.”

“헙.”

널브러지지는 못했고 조금 편안하게 앉았다.

‘이게 정말 옳은 일인가.’

로메오는 아픈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입술을 짓씹었다.

‘물론, 내 인생은 성공한 것이지만.’

알키저스 백작가의 장남이 아닌 아들.

집안을 물려받아야 하는 장남이 아닌 이상, 좋은 혼처를 찾아다녀야 하는 것은 숙명이나 다름없다.

‘황후 자리라니, 내게 과분한 자리이지.’

어른들 말 잘 듣고, 얌전히,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있어라.

그렇게 한 결과로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여성의 남편이 되었지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바닥이 없는 늪에 빠진 것처럼 막막한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른들의 말을 들으면 되었지만, 이제는 그의 인생이니까.

‘나도 올리처럼 씩씩하면 좋을 텐데.’

올리비아를 떠올리며 로메오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올리비아와 친구로 지내는 내내, 그녀의 굳은 심지가 부러웠다.

‘나는 마음이 약해서 주변에 휘둘리고 말아.’

꽃이든 케이크든 가차 없이 버리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부러웠던가.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고, ‘착한 아이’ 병에 걸린 것처럼 강박적으로 살았다.

‘그 결과가 여기인데…….’

이제는 더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로메오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머리 위에서 심드렁한 음성이 쏟아졌다.

“무슨 생각을 하지?”

“헉!!”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는 다름 아닌 스타티스 황태자였다. 로메오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전하를 뵙습니다.”

약혼자라기보다 신하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스타티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었어.”

“저어…….”

이번에는 대답을 우물쭈물거린다.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것도, 대답을 기다리는 것도 싫어하는 스타티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하지만 흘러나온 말에, 그녀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좋은 황후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황후?”

“네. 그건 어떻게 해야 될 수 있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요.”

“…….”

스타티스는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그녀도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어떤 황제가 되어야 좋은 황제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가 무어라 했겠는가.

“좋은 황제는 아버지 말을 잘 듣는 황제지.”

‘개소리.’

스타티스는 입술을 비틀었다. 황제가 알려준 것들은 죄, 안 좋은 것들뿐이었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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