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오르세에서 생긴 일 (16/28)
  • 5장. 오르세에서 생긴 일

    우리의 대화는 식사 준비가 끝났다는 알림에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이 정도면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건 제임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다시 출발하기 위해 마차에 오르는데, 제임스가 예의 바르게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오르세의 수도까지 함께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저는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파넬 공작.”

    갑작스러운 제임스의 말에 아버지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를 흘긋 돌아보는 것이, 나와 제임스 사이에 언쟁이 오갔나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아직 영지가 불안한데 너무나 즉흥적으로 비운 것 같아서요.”

    “하지만 여기까지 오셨는데…….”

    아버지의 만류에 제임스는 깔끔한 어조로 대답했다.

    “멀리 갈수록 돌아가는 길이 멀어질 뿐이지요.”

    여러모로 여운이 남는 대답이었다. 제임스는 홀가분한 어조로 인사했다.

    “감사했습니다, 마이옌 공. 덕분에 외국도 구경하는군요.”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대접하지 못해서 죄송하군요. 통역인이라도 붙여드릴까요?”

    “어디 가서 무시당하는 사람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긴, 누가 제임스를 보고 말을 못 한다고 등쳐먹으려 들겠는가. 나도 그런 쪽으로는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제임스를 보고 있을 때였다.

    “올리비아.”

    제임스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만 배웅하고 올게요. 오래는 걸리지 않아요.”

    “그래요.”

    우리는 조금 떨어진 곳까지 걸었다. 우리의 대화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기를 원하지 않았으니까.

    적당한 거리까지 왔다고 생각한 나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봐요. 지금이라면 얌전히 들어드릴 테니까요.”

    참 신기하지.

    그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지금 내 앞의 제임스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제임스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요즘 세대 사람들은 혼인을 유지하면서 따로 살기도 한다더군.”

    그런데 흘러나온 말이 대단히 할아버지 같았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푸후후 실없이 웃고 말았다.

    “새삼 당신이 나이가 많다는 게 체감되네요.”

    내 말에 제임스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 당신에게 일일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란 게 쉽게 돌아오는 건 아니야.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나이가 많아.”

    “아, 네.”

    시간을 돌리는 마법이 쉬웠을 리가 없지. 나는 선선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제임스의 검이 시끄럽게 고함을 질렀다.

    -어이, 인간! 그렇게 대답하면 끝이야? 그걸로 넘어가는 거냐고.

    ‘아, 그래. 네가 있었지.’

    이 수다쟁이가 어떻게 조용하다 했다. 나는 투머로우에게 웃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인간이 아니라, 올리비아야. 그리고 앞으로도 제임스를 잘 지켜주어야 한다.”

    -그거야 내 알 바가 아니고! 아니, 말 돌리지 말라니까. 나이가 많다는 말에 몇 살이냐고는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시끄러. 자꾸 떠들면 저 멀리 풀어놓을 거다.”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하는 건가?!

    시끄러운 투머로우는 결국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검을 저 멀리 두고 온 제임스는 다시 헛기침을 하고 끊어졌던 말을 이었다.

    “하여간 나는 잠시 우리가 혼인 관계를 쉬고, 서로의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거라 생각하고 있어. 이대로 영원한 안녕은 아니라고 말이야.”

    “제임스.”

    내가 제임스에게 내 회귀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더 이상의 대화가 우리 사이에 필요 없다고 결론을 지은 것은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나의 마음에 어떤 미동도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제임스 때문에 두 번이나 죽었다는 거잖아. 물론 그의 본의는 아니었다고 해도.’

    아무리 이유가 타당하다고 해도 내가 겪었던 일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의 나는 어쩌면 제임스 곁을 반드시 떠나고 싶어서 기억을 가지고 돌아온 것인지도 몰라.’

    그리고 나의 이런 심경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제임스 본인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또한 나와 동행을 멈추기로 결심한 것이겠지.

    ‘그런데 여지를 남겨놓는 게 옳은 일일까.’

    잠시 그런 생각도 하지 말라고 딱 잘라 말할까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저게 저 사람의 결론이잖아.’

    그의 마음은 그의 것이었다. 그가 어떤 결론을 내리든 나는 거기 간섭할 권리가 없었다.

    제임스는 부드러운 어조로 내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오랜 시간 고마웠다. 당신과 결혼할 수 있어서 나는 행복한 남자였어.”

    “!”

    설마 제임스에게서 이렇게 길고 다정한 말을 들을 날이 올 줄이야.

    나는 조금 커다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투머로우의 괴성이 들렸다.

    -야, 인간! 야!!

    저 검이 마법을 일으키는 매체였을까.

    ‘시간을 돌리는 마법.’

    제임스 때문에 죽긴 했지만, 그는 나를 위해 그 마법을 두 번이나 써주었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발동되는 마법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당신에게 내가 의미 있는 타인이었다는 뜻일까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적어도 그에게 내가 나쁘지 않은 반려자였다는 것만큼은 내게도 의미가 있었다.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잡았다.

    “제임스, 나는 정말로 당신의 행복을 바라고 있어요.”

    애정이라기보다는 미운 정일까. 나는 진심으로 웃었다.

    “꼭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아요. 그래서 날 약 올려주세요. 알았죠?”

    “……노력해보지.”

    무뚝뚝하게 대꾸한 뒤, 제임스는 천천히 돌아섰다. 풀어놓았던 검을 다시 들고, 문밖으로 걸어 나가는 제임스의 커다란 등을 나는 서서 바라보았다.

    ‘우리가 솔직하게 서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면 미래는 달라졌을까.’

    의미 없는 질문을, 나는 아마 평생 반복하게 되리라.

    * * *

    그 뒤로도 지루한 마차 여행이 계속되었다. 드문드문 도시에 들르기도 하면서 우리는 오르세의 수도를 향해 갔다.

    ‘일단 오르세에 온 이유는 다 해결해야 하니까.’

    얼른 이안을 만나고 싶어 마음이 들떴지만, 내가 오르세에서 해야 하는 일들도 있었다. 오르세 시민권을 얻는 일과, 아버지의 재산목록을 정리하는 것.

    ‘그리고 지금쯤 제국으로 돌아가면 되는지 잘 모르겠어.’

    애초에 내가 오르세로 온 것은 황제의 견제 때문이지 않은가.

    ‘혹시 이안에게 해코지 중인 건 아니겠지.’

    그렇진 않을 거로 생각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북방행을 운운했던 사람이니 안심하기도 어려웠다.

    ‘만약 이안이 혼자 그 괴롭힘을 감당하고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니 또 당장 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싶었다. 내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아버지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오늘은 졸리지 않나요?”

    그 질문에 나는 얼굴을 붉혔다. 빈말이 아니라, 하루 내내 마차에서 잠든 적도 많았다.

    “제가 너무 많이 잤죠. 부끄럽네요.”

    “나무라는 건 아닙니다. 저도 제 딸을 잘 모르니 하나하나 묻는 것뿐이지요.”

    아버지의 다정한 말이 더더욱 나를 부끄럽게 했다. 나는 변명조로 웅얼거렸다.

    “제가 원래 이렇게 잠이 많은 편이 아닌데…….”

    그러고 보니 좀 이상했다.

    ‘내가 이렇게 잠이 많았던가?’

    나는 기본적으로 잠이 많지 않았다. 지난 생의 마지막, 마흔 살 때도 하루 6시간 이상 잠든 적이 없었으니까.

    ‘큰아이 임신했을 때 빼고는 별로…….’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덜컹.

    “꺄.”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몸이 확 쏠린 나는 얼떨결에 아버지의 품에 쏟아지듯 안겼다. 아버지는 내가 다치지 않았나 여기저기 살펴보시고는 마차의 열린 덧창에 대고 물었다.

    “무슨 일이죠?”

    갑자기 마차가 멈추게 된 이유를 기다렸으나 돌아온 대답은 생뚱맞았다.

    “저어,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응?”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직접 내리라고 한단 말인가.

    ‘설마 또 마차 바퀴가 고장 나기라도 한 건가.’

    이미 한 번 그런 적이 있는지라, 불안했다. 아버지가 먼저 마차 밖으로 내렸고, 그다음 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내렸다.

    마차 밖에는 수십 명의 병사가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선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반갑습니다, 형님! 그리고 조카님!”

    그 남자의 말에 아버지는 매우 놀라서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니, 국왕 전하!”

    ‘국왕?’

    아버지가 왕족이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 한 나라의 국왕이 몸소 마중을 나올 줄이야.

    ‘아버지랑 느낌이 좀 다르네.’

    오르세 국왕은 은빛 머리카락을 빼고는 아버지랑 닮은 점이 별로 없었다. 서글서글 웃었지만, 굉장히 마른 편이라 온화하다기보다는 어쩐지 유약한 인상을 풍겼다.

    나는 치맛자락을 붙들고 나붓하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인사말이 길어지지 못한 것은 내가 나를 누구라고 소개해야 하는지 일순간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타이론 대공비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마이옌 공의 딸이라고 해야 하나.’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다 보니, 저절로 인사말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국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짧은 내 인사말에도 친근하게 반응해주었다.

    “외국인이라 들었는데, 오르세어를 할 줄 아는군요?”

    그의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이 아이도 못난 아비를 찾고 있었답니다.”

    “허허. 감동적인 이야기군요.”

    그저 말 한마디를 익혔을 뿐인데 다들 이렇게 호의적으로 반응해주니, 내가 쑥스러웠다.

    그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둘이 정말 닮았다 등의 의례적인 인사말을 몇 마디 늘어놓은 뒤, 주름진 눈을 휘며 웃었다.

    “그렇게 조카를 찾아 헤매시더니. 정말 잘된 일 아닙니까.”

    “…….”

    지난 생에도 그가 얼마나 애타게 딸을 찾아다녔는지 알고 있는 나였기에, 그 말에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르세 국왕은 내 손을 붙들고 흔들며 쾌활하게 인사했다.

    “오르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제 당신의 나라이기도 하니, 느긋하게 둘러보시길 권합니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그가 마중 나온 곳은 수도로 입성하는 길목의 지척이었다. 조금 산길을 넘으니 언제 산이었냐는 듯이 번화한 도시가 나타났다. 나는 신기한 어조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여기가 오르세의 수도로군요.”

    “제국과 비교해도 지지 않지요?”

    “정말이에요. 아름다워요.”

    “후후후.”

    내가 자신의 모국에 대해 칭찬을 하니, 아버지는 진심으로 기쁜지 소리 내어 웃었다.

    제국과 달리 오르세에는 2층 이상의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거리 전경을 바라보며 내가 입을 벌렸을 때였다.

    다정한 우리 부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국왕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우리 조카님도 찾았으니 환영회를 열어야겠습니다. 형님의 경사는 이 오르세의 경사이니까요.”

    환영회라니. 나라의 경사라고까지 언급했는데, 작은 가족 행사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조금 당황하여 입술을 벌렸다.

    “그, 그건.”

    하지만 거절의 말은 나오기도 전에 막혔다.

    “부디 사양하지 말아요. 이건 조카에게 해줄 수 있는 제 권리이기도 하니까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아버지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가 당신의 저택입니다.”

    드디어 오르세의 내 집에 도착했다.

    ‘보고로 들어 알고 있기는 했지만…….’

    아버지가 오르세에 올 때마다 편안하게 있으라며 내게 일찌감치 승계해준 저택이 눈앞에 있었다.

    ‘대단한 규모네.’

    타이론 저택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연한 녹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저택은 시원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질 좋은 크리스털의 산지답게, 계단 난간 등 여기저기에 크리스털이 보였다.

    내가 조심스럽게 현관에 걸음을 내딛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환영합니다.”

    “어머나.”

    그들의 인사는 제국어였다.

    ‘일부러 나를 위해 연습했구나.’

    아가씨라는 호칭이 낯간지럽게 들렸다.

    복도를 걸으며 내가 주로 이용할 방들을 알려준 뒤, 아버지는 다정한 손길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당신 소유의 집이니 편하게 지내도록 해요.”

    “감사해요, 아버지.”

    내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기뻐할 줄 알았던 마이옌 공의 얼굴은 뜻밖에 흐려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사하다고는 말하지 않아도 되어요.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마땅히 당신이 가져야 했던 것들을 이제야 전하는 것이니까요.”

    기묘하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내가 보냈던 과거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플로렌스 자작을 똑 닮아서 망나니 같았던 큰 오빠, 말아먹은 사업, 빚쟁이들, 어머니도 없이 자란 가엾은 애니.

    ‘내가 만일 오르세에서 자랐다면 어땠을까.’

    나는 예쁘고 우아하게 꾸며진 대리석 복도를 쳐다보았다.

    리본을 묶고 예쁘게 옷을 차려입은 여자아이가 내 곁을 스쳐서 달려갔다. 환상이었다.

    “아.”

    돌이킬 수 없는 과거였다. 나와 비슷한 상상을 하고 있었던 마이옌 공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물었다.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마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예?”

    “만약, 정말 만약이에요.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내게 그것은 그저 가정이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시간을 넘어 여기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내 질문을 받은 아버지는 턱을 문지르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멜리사와 헤어졌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군요.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겁니다.”

    역시 그런가. 내가 바뀐 미래를 떠올려보았을 때였다.

    아버지는 뜻밖의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올리비아. 저는 겁쟁이라 결국 시간을 돌리지 못할 것 같군요.”

    “왜요?”

    누구나 살면서 돌이키고 싶은 순간은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버지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미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멜리사가 내가 사랑하던 그녀와 같지 않을 만큼 오래요.”

    허탈한 듯 웃는 얼굴이 내 뇌리에 박혔다.

    “저는 제 딸의 어릴 때 모습을 보지 못해 서운해하고 있지만, 막상 나는 나쁜 아버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시간을 돌리고 싶지 않습니다.”

    현명한 대답이었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왜 시간을 돌렸을 때 내가 파넬을 뛰쳐나왔는지도 알 것 같았다.

    나는 그 고통을 견뎌내던 올리비아와는 또 다른 사람인 것이다.

    “아참.”

    손을 꽉 잡고 생각에 잠겨 있자니, 아버지가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여 말했다.

    “제국으로 편지가 전해지는 데 한 달이 조금 넘게 걸린답니다. 보내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오르세로 가는 것도 큰일이었지만, 그 일정에 제임스까지 끼는 바람에 편지에는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

    ‘걱정하고 있을 텐데. 내가 생각이 짧았네.’

    나는 서둘러 방에 들어가서 책상에 앉았다. 내가 편지를 쓸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이미 책상 위에는 펜과 종이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편지지 앞에 앉아서 심호흡을 했다.

    ‘누구에게 편지를 보내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편지지를 앞에 두니 마음이 정갈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펜촉에 잉크를 듬뿍 묻혔다.

    ‘일단 애니.’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 펜을 드니 글은 술술 써졌다.

    -애니에게.

    언니는 잘 지내고 있어.

    삿된 소문들 때문에 네가 많이 힘들까 걱정된단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니까 상처받지 말고, 언니를 믿고 기다려주렴. 사랑한다.

    편지지를 정갈하게 접으니 자연히 다음 사람도 떠올랐다.

    ‘그리고 로메오.’

    로메오의 결혼식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증인이 되어주기로 했는데.

    로메오에게도 이런저런 미안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간결하게 내 마음을 담았다.

    -나의 친구 로메오에게.

    너의 북방행이 어떻게 진행 중인지 모르기에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게 뻔뻔한 짓은 아닌가 고민이 돼.

    너를 만나게 되어서 얼마나 행운이라고 생각하는지 몰라.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해.

    그렇게 로메오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정리하고 나니 이제 딱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안.’

    두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술술 써 내려간 것과 달리, 이안에게 보내는 편지는 망설여졌다.

    나는 한참 동안 빈 종이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펜을 들어서 간신히 한 문장을 적었다.

    -보고 싶어요.

    그에게 털어놓고 싶은 많은 이야기들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나는 그저 이안이 보고 싶었다.

    * * *

    내 예감대로 오르세 국왕이 말하는 환영회는 그냥 작은 가족 모임이 아니었다.

    “왕궁에서 제일 큰 무도홀을 여실 거라고 해요.”

    “사흘이나 계속 무도회를 열 거라고 하셔서 모두 기대를 하고 있답니다.”

    하녀들이 재잘재잘 전해주는 말들은 내가 웃으면서 듣기에는 하나같이 부담되는 것들이었다.

    ‘사흘이나? 내가 주인공인 무도회가 열린다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제가 주인공이니까 빠지면 안 되는 거겠죠……?”

    “농담도 잘하셔.”

    농담 아닌데. 하녀들은 세상 웃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공주님이 아닌 무도회의 주인공은 아가씨가 처음이세요. 그만큼 국왕 전하께서도 축하하고 싶으신 거죠.”

    “하하하.”

    이제 그만 이야기해주세요. 이미 충분히 부담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긴, 무리도 아니지만.’

    내 아버지, 마이옌 공은 유력한 왕위계승권자였고, 오로지 사랑을 이유로 그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결국 아내도 아이도 찾지 못했다.

    원래 사람들은 비극적인 이야기에 열광하는 법. 특히 높은 분의 이루지 못한 절절한 사랑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겠는가.

    ‘따라올 때 어느 정도 각오는 했잖아.’

    나도 무도회를 막 꺼리고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아직도 아버지란 존재와 내가 모르는 혈육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겠지.’

    나는 그렇게 내 마음을 정리했다. 사실 팔자 좋게 내 마음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기도 했다.

    “무도회가 결정되었으니 얼른 옷을 맞춰야겠어요!”

    “마이옌 공의 따님에게 드레스를 헌정하고 싶다고 의사를 표현한 디자이너가 잔뜩 있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분을 추천하는데…….”

    보통 외국의 무도회에 참석할 때는 자국의 드레스를 입는 것이 관례이다.

    하지만 나는 엄밀히 말해서 제국의 타이론 대공비로 방문한 것이 아닌 데다가, 드레스를 협찬하고 싶어 하는 디자이너들이 잔뜩 있어서 새로 맞춰야 했다.

    하녀들과 응접실로 내려가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촉박하게도 드레스를 맞출 수가 있나요?”

    그러자 하녀들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대답했다.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어야지요! 마이옌 공의 따님인걸요!!”

    ……아무래도 내 예상보다 훨씬 내 존재가 유명한 모양이었다.

    내 곁을 뱅글뱅글 돌며 참새처럼 지저귀는 하녀들을 이끌고 응접실에 내려와 보니 다섯 명 정도의 디자이너가 저마다 자신 있는 드레스를 가지고 와있었다.

    “이 중에서 세 벌을 택하셔야 해요. 무도회는 3일이니까요.”

    하녀들이 친절하게 속삭여주었다.

    내가 드레스 앞에 서자, 디자이너들은 저마다 자신이 지은 드레스의 콘셉트는 무엇이고 어떤 점이 특별한지 설명했다. 귀 기울여 들은 뒤 나는 간단한 결론을 내렸다.

    “입어보고 결정하죠.”

    “좋은 생각이세요.”

    상징이 뭔지, 의미가 뭔지 절절하더라도 내게 어울리지 않으면 끝이었다. 응접실에 바로 파티션을 치고 간의 탈의실을 만들었다.

    하지만 첫 드레스를 걸치자마자 나는 난처해지고 말았다.

    “이게 요즘 오르세에서 유행하는 드레스랍니다.”

    “이런.”

    오르세는 제국보다 기후가 더웠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재질 자체가 잠자리 날개처럼 얇았다.

    ‘속살이 비치겠어.’

    하지만 비치는 것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어깨가 드러나는 것은 당연하고 가슴도 깊게 파여서 앙가슴까지 모두 드러났기 때문이다.

    ‘너무 야한 것 아니야?’

    내가 어색한 표정으로 거울을 돌아보고 있으니, 하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제국 스타일보다 노출이 조금 더 심하죠? 허리를 꽉 조이고요.”

    “많이 다르네요.”

    이렇게 속살이 드러난 적이 처음이라, 예쁘고 안 예쁘고를 떠나 어색하기만 했다.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거울을 확인하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안이 보면 좋아하려나?’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차려입은 나를 보면 이안은 어떻게 할까?’

    나는 잠시 내 등 뒤로 이안이 선 상상을 했다. 커다란 손가락이 내 어깨를 문지르고 드러난 흰 어깨를 잘근잘근 씹을 것이다.

    내가 무도회에 나가야 하니 저리 떨어지라고 말하면 이렇게 대답하며 여우처럼 웃겠지.

    ‘아예 무도회 못 나가게 만들어볼까.’

    그리고 이미 드러나 있는 뽀얀 살을 송곳니로 깨물며……

    ‘아이고, 내가 무슨 망측한 생각을!!’

    나는 서둘러서 고개를 흔들어서 생각을 털어버렸다.

    ‘으으, 너무 얼굴을 보지 않은 기간이 길었나 봐.’

    스르륵 솟아난 음란한 생각에 얼굴이 후끈거렸다. 하녀 중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이마를 짚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얼굴이 빨개지셨어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열이 나시는 것 같은데.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무리한 일정이었을까요?”

    어떻게 저리 걱정하는 사람 앞에서 남편 생각을 해서 달아올랐다고 대답하겠는가.

    “…….”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얼굴은 점점 더 후끈후끈해지기만 했다.

    한편 제국은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모이면 때때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타이론 대공비 전하께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셨다며?”

    “혹시 이대로 타이론 대공이 버려지는 건 아닐까?”

    “버려질 이유가 뭐가 있겠어?”

    “왜 없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남자는 유명했잖아.”

    대국민 고자로.

    고위 귀족 남녀가 평범하게 헤어져도 센세이션일 판이었는데, 타이론 대공에게는 치명적인 소문이 따라붙어 있었다.

    타이론 대공비의 부재와 더불어 재미난 소문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인과였으리라.

    “역시 정상이 아니었던 걸까.”

    “모르지. 잘생긴 얼굴과 달리 부실한지도.”

    “그러니까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라니까.”

    “얼굴이라도 잘생기고 이야기해라.”

    당사자들에게는 속 터지는 이야기였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그냥 한번 웃고 끝나는 우스갯소리에 불과했다.

    바지런하게 거리를 걷고 있던 케닌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소리는 조심해야 할 텐데.’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다. 그만큼이나 사람들은 타이론의 사정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타이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척 위험했다.

    ‘우리 전하께서는 지금 터지기 직전이라고.’

    바로, 타이론 대공 이안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도 대공비와 인사 한번 하지 못하고 헤어진 것 때문에 화가 나 있는 대공이었다.

    거기다가 대공비가 대공에게 질려서 그를 버렸다는 둥, 헤어졌다는 둥 말을 얹는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행위였다.

    ‘아아, 빨리 돌아오셔서 대공 전하를 달래주세요. 저 대마왕을 감당하실 분은 비전하뿐이시라고요!’

    케닌은 간절하게 허공을 향해 기도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신이 아니고, 당연히 어떤 대답도 없었다.

    케닌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비전하께서는 왜 편지 한 통 안 보내시는 걸까.’

    이럴 때 딱 당신을 좋아한다, 날 믿고 기다려달라 편지 한 통만 도착하면 이안도 조용해질 텐데 말이다.

    하지만 편지는 오늘도 오지 않았고, 케닌은 보고를 하러 다시 타이론 대공저로 돌아가야 했다. 케닌은 한숨을 폭폭 쉬었다.

    ‘아이고, 돌아가기 싫다. 그냥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케닌은 죽상을 하고 이안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그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는 대공가의 사용인들은 모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전하, 케닌입니다.”

    문을 두드리면서도 케닌은 간절하게 빌었다.

    ‘나가라. 없어라. 황제 폐하를 뵈러 떠나라!’

    하지만 그의 바람이 무색하게 안에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

    재수도 억수로 없지. 케닌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이안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은 꼭 동상처럼 보였다.

    ‘분명 예전에는 저게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바보처럼 헤실거리던 얼굴에 언제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또 저 냉혹한 얼굴이 낯설었다. 케닌은 눈을 내리깔며 몹시 공손하게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일단 지시하신 서류는 모두 처리했습니다. 허가도 모두 끝났고요.”

    이안은 심드렁한 얼굴로 서류를 휙휙 넘겼다. 케닌은 그 빠른 손길에 안심하지 않았다.

    지금 이안은 무척 심기가 좋지 않았다. 귀신같이 서류의 허점을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실수한 건 없겠지? 없었던 것 같기는 한데.’

    케닌이 조마조마함에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하고 있을 때였다. 미간에 주름을 잡은 이안이 여상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새로운 소식은 있나?”

    “별것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무척 안심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대공비가 그렇게 사라지고, 타이론 대공의 명예는 바닥에 떨어진 참이었다. 황제는 배부른 곰처럼 무척 이 상황에 만족하고 있었다.

    ‘제발 결혼하라고 매달릴 때는 언제고.’

    이안은 입술을 비틀었다. 어떻게 참아보려고 해도 참아지지 않았다.

    “졸렬한 인간 같으니.”

    “…….”

    케닌은 방 안에 두 사람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뒤를 돌아보았다. 황제가 듣는다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성질머리 덕분에 제국이 평온한 건 사실이지.’

    황제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전적인 지지를 보내지도 않았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귀족들은 황제의 비위를 맞추려고 안달이었다.

    ‘지금까지야 적당히 그 장단에 맞춰주었지만.’

    이안 한 사람을 붙들고 흔들 때는 그런 졸렬함이 나쁘지 않았다. 이안은 그냥 적당하게 살고 싶었고, 황제의 치세 아래서 그는 절대로 중책을 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를 건드린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그는 얌전히 당해줄 수가 없었다.

    “공국의 정비는 끝났나?”

    “예.”

    “타이론 사병은?”

    “모두 대기하였습니다. 하지만 경험 있는 병사가 드물어…….”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지.”

    아주 화끈하게 뒤통수를 쳐주리라. 그리 생각하며 이안이 입술을 깨물었을 때였다.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전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구지?”

    최근 대공비가 없는 상황을 고려해서, 대공가에는 손님이 뚝 끊어진 상태였다.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던 이안은 찾아온 인물의 이름을 듣고 넘기고 있던 서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제임스 파넬 공작님이십니다.”

    이 상황에서 제일 보고 싶지 않은 남자였다.

    “……돌려보내.”

    봤자 속만 긁을 것이 뻔했기에, 이안은 고개를 휙 돌렸다. 하지만 집사는 뜻밖에 우물쭈물하며 망설였다. 이안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그, 그게…….”

    집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오르세에서 왔다고 하면 알아들으실 거라고.”

    “……개자식이.”

    이안의 입술에서 결국 욕설이 튀어나왔다.

    * * *

    한편 이 소문에 신이 난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화이트폴의 릴리아나였다.

    릴리아나는 자신의 방에 앉아서 가십지를 넘겼다. 타이론 대공비가 사라진 지 꽤 시간이 흘러서, 이제는 가십지에도 기사가 올라오지 않았다.

    릴리아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흥. 그렇게 사라질 거면서 내 속을 긁었단 말이지?’

    그녀가 타이론 대공저에 다녀온 뒤, 실제로 화이트폴에는 배상신청서가 날아왔다.

    금액으로는 크지 않았지만, 그 내역을 본 부모님에게 대차게 혼이 난 것은 당연했다.

    “릴리아나! 무단침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니!”

    “다시는 타이론 대공저에 얼씬도 하지 말거라!”

    ‘피, 부모님은 나만 뭐라고 해.’

    릴리아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자신은 그 마녀로부터 이안을 구하려는 것뿐인데, 부모님은 도통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내 덕분에 마녀는 사라졌으니까. 이안도 지금 마음은 아프더라도 곧 회복할 거야.’

    그리고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을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걸.’

    망상은 병이지만, 이미 어릴 때부터 망상에 빠져 지내던 릴리아나는 자신의 생각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마녀는 사라졌고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되는 거지.’

    하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떨떠름해졌다. 이안을 영영 놓치는 것 같아서 계산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 하나둘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릴리가 후처가 되는 거잖아?’

    어느 동화에서도 왕자가 기혼자였던 적은 없다. 현실에서 왕족들은 수많은 아내를 두고, 실제로 황제도 후궁이 여럿이지만, 적어도 동화 속에서는 그럴 리가 없다.

    릴리아나도 자신이 후처가 될 거라는 상상은 해본 적도 없었다.

    ‘릴리는 첫 결혼인데. 이건 내가 손해 보는 거잖아.’

    한번 계산하기 시작하니까 여러 가지 것들이 떠올랐다.

    ‘이안은 부모님도 안 계시잖아. 나는 멀쩡히 부모님이 건재하시고. 대공가라고 하지만, 화이트폴도 만만치 않단 말이지.’

    하나하나 계산하다 보니까 자신이 이안과 결혼하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로만 느껴졌다.

    릴리아나가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타이론 공작님을 뵈러 안 가보세요?”

    자매처럼 여기는 하녀가 가십지를 정리하면서 릴리아나에게 물었다.

    ‘가긴 가야 하는데.’

    상황상 지금이 적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저울이 자신에게로 기운다고 생각하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릴리아나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획 돌렸다.

    “안 갈래!”

    “네?”

    당연히 꽃단장을 하고 나갈 줄 알았던 하녀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릴리아나는 입술을 씨근거렸다.

    ‘괘씸해.’

    생각해보니 무척 괘씸하지 않은가. 자신이 있는데 어떻게 다른 여자랑 먼저 결혼을 할 수가 있담.

    그런 상황에서 버려졌으면 무릎 꿇고 빌면서 자신을 데리러 와야지, 자신이 먼저 가서 달래주는 건 수지에 맞지 않았다.

    ‘나한테 빌러 올 때까지 안 갈 거야.’

    릴리아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하녀는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가 또 이상한 핀트가 맞았다는 걸 깨닫고 살살 어르듯 말을 걸었다.

    “아가씨, 지금이 딱 기회예요. 배신감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아가씨께서 달래주셔야 마음이 녹아내리지요.”

    “안 갈 거야.”

    ‘이안은 조금 마음고생을 해도 돼.’

    릴리아나는 그리 생각하며 휙 돌아섰다. 이렇게 고집부릴 때의 릴리아나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하녀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이안이 오면 어떻게 해줄까 고민을 하고 있던 릴리아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집 안은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창밖으로 부산스럽게 오가는 하인들이 보였다. 릴리아나의 방을 정리하며 하녀가 대답했다.

    “오늘 콘웰에서 사람이 와서요. 다들 그쪽 접대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는 거 같아요.”

    “콘웰에서 왜?”

    콘웰은 화이트폴과는 먼 친척 관계였다. 말이 친척이지, 릴리아나는 콘웰 쪽 친족들의 얼굴도 몰랐다.

    하녀는 그걸 정말 몰라서 묻냐는 투로 되물었다.

    “모르셨어요? 이번에 후작님께서 콘웰의 셋째 도련님을 입양하기로 결정하셨잖아요.”

    “뭐라고?!”

    그 이야기를 처음 듣는 릴리아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아니, 누구 마음대로 입양을 해?’

    릴리아나는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바쁘게 계단을 내려갔다.

    귀족들이 입양을 하는 경우는 딱 두 가지였다.

    사생아를 합법적으로 집안에 들이기 위해서, 혹은 집안을 이을 손이 없어서 결국 믿을 만한 친척 중에서 들이는 것.

    콘웰에서 셋째 아들을 데려온다는 건 후자라는 이야기였다.

    ‘아니, 화이트폴에는 내가 있잖아. 어떻게 콘웰에서 후계자를 데려올 수가 있어?’

    릴리아나는 아버지의 결정에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예 자식이 없다면 모를까, 릴리아나라는 딸이 떡하니 있지 않은가.

    ‘데릴사위도 아니고 입양이라니. 말도 안 돼. 정말 말도 안 돼!’

    릴리아나는 잔뜩 화가 나서 응접실에 도착했다. 응접실에는 마침 콘웰 자작 부부와 이제는 화이트폴의 식구가 될 자작가 소년이 서 있었다.

    “어머나, 릴리.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단다.”

    화이트폴 후작부인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릴리아나를 환영했다. 릴리아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웃어?’

    어떻게 어머니가 이 상황에서 자신을 보며 웃을 수 있는지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릴리아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 아이가 바로 제 딸 릴리아나랍니다.”

    “어머나, 역시 소문대로 아름다우시네요.”

    부인들끼리 의례적인 대화가 오갔다. 콘웰 자작부인이 자신의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바란, 너도 인사하렴.”

    소년은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과연 화이트폴의 후계자로 낙점할 만했다.

    수줍음도 별로 없는지, 소년은 릴리아나에게 살갑게 웃으며 인사를 붙였다.

    “안녕하세요, 누님. 이번에 화이트폴에 오게 된…….”

    하지만 그 인사는 끝까지 이어지지도 못했다. 릴리아나가 사납게 대꾸했기 때문이다.

    “누가 네 누나야?!”

    “릴리!”

    손님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저게 무슨 행동이란 말인가.

    화이트폴 후작부인은 서둘러 릴리아나에게로 다가와서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하지만 지금 릴리아나에게는 자신을 꾸짖는 어머니가 도리어 비합리적인 폭군으로 보였다. 릴리아나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매섭게 치떴다.

    “어머니도 너무 하세요. 어떻게 입양 같은 커다란 문제를 마음대로 하실 수가 있어요? 저한테 상의도 안 하시고요!”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이 자리에서 소리를 더 높이는 딸을, 화이트폴 후작부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이따가 이야기하자.”

    “싫어요!”

    다른 사람 앞에서 창피하다는 인식은 물론 릴리아나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릴리아나가 발끈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내가 언제 따질 수 있는데? 조금 있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것 아니야.’

    화이트폴의 넓은 영토와 저택, 고성이 모두 저 얼굴도 몰랐던 소년의 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건 엄연히 내 것이라고! 화이트폴의 유일한 딸, 바로 나!’

    그리 생각하며 릴리아나가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결국 릴리아나의 무례함을 참지 못한 후작부인이 덩달아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네가 무슨 상관이니? 곧 있으면 폴카로 시집을 갈 거면서! 화이트폴을 들고 타국으로 가겠다는 거야?”

    “누가 제가 폴카로 갈 거라고 해요?”

    릴리아나의 사나운 반문에, 화이트폴 후작부인은 도리어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그럼 안 갈 거니?”

    “그, 그건…….”

    막상 어머니가 그 부분을 찌르고 들어오니 릴리아나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방금 방에서 그 저울질을 하고 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타이론 대공비가 되고 싶긴 한데, 후처는 싫어. 한 나라의 왕비가 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안이 아직 빌러 오지 않았다. 딱 잘라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릴리아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건 확답할 수 없지만.”

    “뭐라고?”

    그 대답에 후작부인의 눈꼬리가 매서워졌다. 한참 동안 말을 못 하고 딸을 노려보고 있던 후작부인이 한숨을 토해냈다.

    “내가 정말 딸을 잘못 키웠구나.”

    “네?”

    릴리아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늘 집안에서 사랑받는 귀한 외동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신 거야? 날 혼내신 거야?’

    그리고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후작부인은 재차 릴리아나를 야단쳤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계속 외면했는데 이제는 참을 수가 없구나. 내가 정말 딸을 잘못 키웠어!”

    “어머니, 무슨 그런 심한 말씀을 하세요?!”

    릴리아나는 발끈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아 마땅한 딸이라고 믿으니 당연했다.

    후작부인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릴리아나를 바라보며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아버지가 너를 폴카로 보내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기로 하셨는지 아니? 그런데 철없이 뭐라고?”

    “하, 할 게 뭐가 있나요! 내가 완벽해서 들어온 제안인 것을요.”

    “뭐라고?”

    후작부인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너는 일국의 왕비 자리가 무슨 뚝 하면 떨어지는 줄 아니?”

    “…….”

    뚝 떨어지는 줄 알고 있었던 릴리아나는 입술만 꾹 다물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해서 여전히 유아기 때의 환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동화 속 주인공이었고, 주인공이 가장 좋은 것을 가져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개연성은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마땅히 한 나라의 왕비가 될 만한 사람인걸.’

    하지만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은 현실 아닌가. 후작부인은 그 부분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아버지는 너 때문에 전쟁터로 나가실 생각이야. 그래서 급하게 후계자까지 찾은 거라고!”

    “!!”

    현실에서 좋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희생해야 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시간이기도 했고, 물질이기도 했다.

    하지만 릴리아나는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럴, 그럴 리가 없어요.”

    현실을 부정하는 딸을, 후작부인은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사실 진즉 이렇게 말을 해주었어야 했다.

    ‘내가 물러서기만 할 것이 아니었어.’

    현실을 알려주면 릴리아나가 순수함을 잃어버릴 거라고, 상처받을 거라고 한 번 두 번 미루던 것이 결국 눈덩이가 되어서 돌아왔다. 후작부인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눌렀다.

    “이제 너도 성인이잖니. 그런데도 상황이 파악이 안 되니? 네 무얼 보고 왕비로 삼으려 한단 말이냐?”

    “그야 저는 예쁘고, 화이트폴 혈통인 데다, 마음씨가 곱고…….”

    자신의 장점을 늘어놓던 릴리아나의 몸이 우뚝 굳어졌다.

    ‘이건 다 이안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

    그가 자신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폴카의 왕비 자리를 운운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쯤 타이론 대공비의 티아라를 쓰고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었겠지.

    화이트폴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 이건 다 이안 때문이야. 이안이 갈팡질팡하는 바람에.’

    그렇게 생각하니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릴리아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섰다.

    “제가, 제가 해결하고 올게요!”

    “릴리!”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후작부인은 릴리아나를 붙들려고 했지만, 릴리아나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안이 해결하는 것이 옳아.’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 * *

    릴리아나는 금방 타이론 대공저에 도착했다. 릴리아나는 불안감에 연신 자신의 손톱을 깨물며 말했다.

    “어서 이안에게 내가 방문했다고 알려줘.”

    “그건…….”

    릴리아나 때문에 대공비가 상처받고 떠났다고 알고 있는 대공가의 시중인들이었기에, 릴리아나를 대하는 태도가 영 떨떠름했다.

    하지만 릴리아나의 눈에는 그런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어서 빨리 문제를 해결해야 해. 아버지가 나 때문에 전장에 서시다니.’

    초조함에 릴리아나는 연신 손톱을 물어뜯었다. 철없이 구는 그녀였지만 전장이 무섭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녀가 앉지도 않고 현관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곰처럼 커다란 남자가 성큼 릴리아나 앞으로 다가왔다.

    ‘뭐야, 이 남자는?’

    릴리아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 어딜 감히…….”

    호통을 칠 생각이었지만 커다란 덩치를 보니 저절로 쪼그라들었다. 릴리아나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쳐다보……시는 거예요?”

    “…….”

    남자는 말 대신 손가락으로 릴리아나의 뒤를 가리켰다. 바로 현관문이었다.

    ‘아, 비키라는 거구나.’

    릴리아나는 얼굴을 붉히고는 슬쩍 물러났다. 그리고 그 덕분에 커다란 덩치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남자가 보였다.

    “이안!”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사내는 이안에게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는 가보겠다.”

    “그러시든가 말든가.”

    이안은 답지 않게 팔짱을 끼고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릴리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안에게 하대?’

    릴리아나는 자신의 옆을 스치는 남자를 다시 돌아보았다. 짧게 친 검은 머리카락에 그을린 얼굴이 험상궂게만 보였다.

    ‘설마 친구인가?’

    릴리아나의 생각에 하대를 할 만한 관계는 친구 말고는 없었다. 릴리아나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이 저런 산적 같은 사람하고 친구일 리가 없어.’

    친구가 아닌 것은 맞았지만, 그 마음을 소리 내어 말했다면 제임스도 이안도 모두 얼굴을 찡그렸을 것이다.

    제임스가 문을 닫고 나갔다. 릴리아나는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이안에게 다가섰다.

    “저, 저기 이안.”

    자신이 부르면 이안도 다정하게 그녀에게 다가설 줄 알았다.

    하지만 이안은 다정하기는커녕 무척 차가운 표정으로 머리카락만 쓸어 넘겼다.

    “제가 기분이 오늘 많이 불쾌해서요. 본론만 간단히 듣고 싶군요.”

    이안에게 들어본 적 없는 냉정한 목소리였다. 릴리아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왜 그렇게 차갑게 말하는 거야? 전처럼 상냥하게 말해줘.”

    “…….”

    이안은 팔짱을 끼고 릴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전혀 자신의 호소에 동요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릴리아나는 옷자락을 꽉 쥐었다.

    “네가 해결해 줘야 하는 일이 있어. 아버지 일이야.”

    화이트폴 후작의 언급은 효과가 있었다. 이안은 고개를 돌려 릴리아나와 눈을 마주했다.

    “뭡니까?”

    그 모습에 릴리아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에게는 아직 서운한 모양이구나. 하지만 마음을 닫은 것은 아니야.’

    화이트폴 후작의 일에 반응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릴리아나는 한층 더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께서 너 때문에 북부 이민족 소탕에 출전하신대.”

    “나 때문에?”

    이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천연덕스럽게만 보였다. 릴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발끈해서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네가 괜히 내 질투심을 자극하려고 결혼 같은 걸 하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겼잖아.”

    “내가 널 자극하려고 결혼했다고?”

    릴리아나의 말에 이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계속 모르겠다는 표정인지라, 릴리아나도 부아가 치밀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그래! 이제 충분하니까 그만둬. 빨리 나랑 결혼해. 그리고 아버지의 북방행을 막아달란 말이야.”

    “하.”

    이안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눈빛이 겨울처럼 스산했다.

    “그런 말을 제 아내에게도 했습니까?”

    “사실인데 말 못 할 게 뭐가 있어?”

    이안의 분위기에 조금 기가 눌렸지만, 릴리아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대답하지 못할 게 없었다.

    그녀의 마음 안에서는 이것이 진실이었으니까.

    이안은 그런 릴리아나를 보며 실소했다.

    왜 그동안 그녀를 보며 귀여운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안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나는 그동안 화이트폴에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었지. 그래서 그대에게 물렀던 것도 사실이야.”

    저벅.

    그녀를 향해 이안이 한 걸음 내디뎠다. 묘한 압박감에, 릴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안은 희게 질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눈빛이 차게 식어 있었기 때문에,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릴리아나조차도 진짜 미소라고 착각할 수가 없었다.

    “내 아내를 건드리고도 내가 참을 줄 알았나?”

    이안의 말에 릴리아나의 얼굴에 혼란이 밀려왔다. 릴리아나의 머릿속에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이안이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빨리 나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해야지. 너 때문에…….”

    어떻게 나에게 그가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저의 행동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데.

    횡설수설하는 릴리아나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며 이안이 등 뒤에 선 케닌을 불렀다.

    “케닌.”

    “예, 전하.”

    “그래서 올리비아가 저 헛소리를 듣고 어떻게 했지?”

    헛소리라는 말에 릴리아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케닌은 하고 많은 날들 중에 이안이 가장 기분 나쁜 날 찾아온 영애를 짠한 눈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배상신청서를 보내셨습니다. 무단침입과 업무방해로요.”

    “올리비아는 너무 물러.”

    이안은 다시 한 걸음 릴리아나에게 성큼 다가갔다. 릴리아나가 겁에 질린 얼굴로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헛소리를 들어주는 건 오늘뿐이야. 어서 돌아가도록 해. 그리고 폴카로 얼른 떠나는 게 좋을 거야.”

    이안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젠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과거의 인연을 생각해서 봐주는 것은 오늘까지다. 그렇게 선을 긋는 말이었다.

    “으으……!!”

    수치와 모멸감을 동시에 느낀 릴리아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릴리아나는 눈물이 고여서는 이안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안, 너무해!”

    그리고 왔을 때처럼 휘리릭 달려 나가버린다. 예의도 뭣도 없는 행동을 보며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약 올리기라도 하듯 케닌이 슬그머니 말을 붙였다.

    “무르신 건 전하시겠죠. 전하께서 화이트폴에 세게 나갈 수 없다는 걸 비전하께서는 눈치채셨을 테고요.”

    올리비아에게 정을 많이 줬던 케닌으로서는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떼를 쓰는 릴리아나에게 차가워질 수밖에 없었다.

    케닌의 말에 이안은 피식 웃었다.

    “올리비아가 걸렸는데 사정을 봐줄 것 같아?”

    이안은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머릿속에는 순식간에 화이트폴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보복들이 떠올랐다.

    ‘여차하면 폭로전을…….’

    온갖 더러운 짓을 생각하던 이안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커다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젠장.”

    가지런한 잇새로 거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놈이 또 무슨 미친 짓을 하려나, 하는 표정으로 케닌이 팔을 들었다. 무의식적인 방어 자세였다.

    하지만 이안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꺼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올리비아는 언제 올까, 케닌.”

    “전하.”

    커다란 키의 사내가 이 순간 길 잃은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이안은 여전히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로 중얼거렸다.

    “올리비아가 보고 싶어.”

    “그러시겠죠.”

    “다시 만나면 방문을 걸어 잠그고 한 걸음도 못 나가게 해야겠어.”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케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어차피 올리비아가 따끔하게 한마디 하면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저 멀쩡하던 사람이 왜 저런 소리까지 중얼거리게 되었나 싶을 뿐.

    ‘역시 결혼은 할 게 못 돼. 솔로가 최고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오늘도 케닌은 비혼의 의지를 다졌다.

    * * *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화장대에 앉아 있었고,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안?”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부드러운 금빛 머리카락이 뺨에 문질러졌다.

    “언제 왔어요?”

    대답 대신 남자는 혀를 내밀어 내 뺨을 핥았다. 나는 간지러워서 까르르 웃었다.

    “뭐예요? 강아지처럼.”

    내 말에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리고 살구색 반듯한 입술을 벌렸는데.

    “엄마.”

    “헉!”

    그 순간 내 눈이 반짝 떠졌다.

    ‘뭐, 뭐야.’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아서 나는 한참 동안이나 눈만 깜빡였다.

    천천히 시야가 또렷해지면서 낯선 천장에 눈에 들어왔다.

    꿈이었다.

    ‘이게 뭐야.’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얇은 이불이 스르륵 떨어졌다.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안이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꿈이라니. 게다가 꼭 강아지 같은 느낌이었어.

    ‘지난번에도 비슷한 꿈을 꿨는데.’

    묘한 꿈이었다. 지난번에는 그냥 이안이 애정결핍 운운해서 그런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이번에는 영 찜찜했다.

    ‘도대체 무슨 꿈일까.’

    하지만 꿈을 고민한들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관두자. 꿈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자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가? 머리가 무거웠다. 나는 설렁줄을 당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녀가 올라왔다. 내가 지금 제일 원하는 차가운 물도 함께였다. 그녀는 사근사근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딱 적절한 시간에 일어나셨네요. 드레스가 다 왔어요.”

    “어머, 벌써요?”

    나는 눈을 깜빡깜빡했다.

    ‘내가 아는 드레스는 수선하는 데도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거 같은데.’

    그런 나의 의문을 읽은 것처럼, 하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누가 입으실 것인데요.”

    어쩐지 숨이 턱 막히는 말이었다.

    ‘타이론 대공비가 마이옌 공의 딸보다 낮은 지위는 아니지만.’

    한 공국의 왕비의 지위가 어떻게 왕족의 딸에 비해 낮겠는가. 하지만 오르세에서 내게 해주는 것들은 대공비로 받던 대우와는 조금 결이 달랐다.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묵직하게 마음을 채웠다. 내 이런 마음도 모르고 하녀는 발그레한 얼굴로 물었다.

    “방으로 들이라고 할까요?”

    당장 내게 드레스를 보여주고 싶어서 참을 수 없다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기에는 내가 너무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세수 먼저 하고요.”

    “아, 그렇군요! 잠시만요.”

    세숫물도 금방 준비되었다. 머리카락까지 단정하게 정리하고 나니, 하녀들이 드레스를 세 벌 나란히 세워두었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너풀거리는 드레스였다.

    드레스를 요모조모 뜯어보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허리가 조금 굵어진 거 같은데?’

    어제 입어볼 때는 몰랐는데 세워져 있는 드레스를 보니 조금 사이즈가 달라졌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아니다. 가슴이 조금 커졌나?’

    내가 한참 동안 드레스를 쳐다보고 있으니, 하녀가 조금 불안해진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었어요. 역시 익숙하지 않은 의상이라.”

    아닌 게 아니라 몸의 라인을 드러내지만 레이스를 덧대는 등 노출을 줄이는 제국과는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다.

    내 대답에 하녀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익숙해지실 거예요. 계속 오르세에 계실 거잖아요.”

    “아.”

    나는 그제야 그들의 친절이 왜 자꾸 내게 거북스럽게 다가오는지를 깨달았다.

    그들은 나를 영영 오르세에서 살 사람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까지 오르세에 있을까.’

    아가씨라는 호칭도, 나를 향한 환대도 다 그런 맥락의 하나로 느껴졌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데.’

    이제는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 * *

    아침 식사를 하고, 오르세의 예법에 대해서 공부하고 나니,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아버지의 서재로 가니 아버지는 몇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이 서류가 바로 오르세 시민권에 관한 서류입니다.”

    오르세어를 공부했다고 해도, 이런 공적인 문서를 접하니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게 무슨 내용이지?’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나를 쿡쿡 소리를 내며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던 아버지가 서류의 중간 부분을 짚었다.

    “여기 서명하면 되어요.”

    “네.”

    나는 유려한 필체로 서명했다.

    -올리비아 타이론

    내 서명이 끝나자, 아버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제 딸이자, 명실상부한 오르세 국민이군요.”

    “저어, 아버지.”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듣지 못하고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게 상속에 관한 서류입니다. 오늘은 그게 어떤 재산인지 함께 둘러보도록 하죠.”

    그냥 한눈에 보기에도 서류에 적힌 것이 많았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재차 아버지를 불렀다.

    “저기요, 아버지.”

    “네. 말해요.”

    흡족해하는 아버지를 보니 나도 기분은 좋았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를 꼭 해야 했다.

    “시민권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슬슬 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을 짜야 할 것 같아요.”

    내 말에 아버지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아버지는 당혹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벌써요?”

    사실 아버지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헤어지는 것이 나도 서운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돌아갈 때는 텔레포트 존을 사용할 수 없으니, 두 달 가까이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텔레포트 존을 이용하지 않으면 오르세에서 제국까지 넘어가는 데도 한 달이 꼬박 걸린다. 적게 잡아도 한 달 반은 걸리는 여정이었다.

    텔레포트 존을 이용하고 아파하던 내 모습을 기억하는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딸과 헤어지기 싫다는 서운함이 뚝뚝 묻어났다.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떠날 때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온 거라서 걱정이 되어요. 슬슬 구설도 잠재워야 하고요.”

    “그렇지요. 맞아요. 당신의 입장도 있으니까요.”

    아버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또한 왕족이라, 윗사람으로 행실이 얼마나 많은 말을 타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납득하는 것과 감정적인 것은 다른 문제. 아버지는 여전히 서운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아버지.”

    가슴이 찡해진 나는 아버지의 손을 꽉 붙들었다. 주름져 있지만 내 손보다는 훨씬 큰 손이 따뜻했다.

    “이제 자유롭게 만날 수 있잖아요.”

    “……맞습니다.”

    내 말에 아버지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평소처럼 점잖은 미소를 지었다.

    “일단 환영회가 끝나고, 날짜를 잡도록 해요.”

    “네.”

    곧 만날 수 있겠구나.

    서운한 마음과 별개로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안의 얼굴을 그리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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