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사라진 올리비아 (15/28)

4장. 사라진 올리비아

굳이 아버지가 계신데도 화이트폴 영애의 방문을 알린다는 것은 이유가 단 하나뿐이었다.

“……제지하기 어려울 지경인가 보군요.”

“예.”

지난번에도 상당히 막무가내처럼 집에 들어와서 현관에 죽치고 있더니.

‘정말 이상한 사람일지도.’

하여간 친아버지에게 그 모습을 보여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권했다.

“아버지, 저희 정원에 온실이 무척 아름다워요. 먼저 가서 둘러보지 않으시겠어요?”

“그러죠.”

아버지는 점잖은 태도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범상치 않은 일이라는 걸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나는 안심하라는 뜻에서 생긋 웃어 보였다.

“금방 따라갈게요.”

“저를 따라오시죠.”

눈치 빠른 집사가 아버지를 정원으로 안내했다. 충분히 멀어졌다는 확신이 든 뒤, 나는 우아하게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그곳에는 화려한 보닛을 쓴 릴리아나 영애가 서 있었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보이겠네.’

화려한 붉은 머리칼이 눈에 확 들어왔다.

“오랜만이에요.”

막무가내로 들어온 주제에 먼저 건네는 인사도 말이 짧았다. 나는 보란 듯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러게요, 화이트폴 영애.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참 많이 무례하군요.”

“저는 그냥 방문했을 뿐인걸요.”

“허가하지 않았는데도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걸 방문이라고 하나요? 어휘력이 부족하신가 봐요. 보통은 침입이라고 한답니다.”

“비꼬는 건 그만두세요. 이미 기분이 많이 상했으니까요.”

사교계에서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인지라 신기하기까지 했다.

‘조금 어린 걸지도.’

나이 어린 영애가 이안에게 꽂혀서 막무가내로 떼를 부리는 쪽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시선을 바꾸니 조금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저 나이 때 어땠더라.’

굳이 회상할 필요도 없었다. 진상들에게 구박받으면서 냉골에서 딱딱한 빵을 갉아먹던 기억은 잊으려야 잊히지 않았으니까.

‘운이 좋은 거지.’

훌륭한 부모의 보호 속에서 다소 철이 늦게 들어도 되는 환경에서 자라나는 것은 순전히 그 사람의 운이었다.

반대로 내가 그런 부모를 만나지 못한 것 또한 순전히 운이었기에, 나는 굳이 그것을 비꼬거나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렇게 넓은 마음을 가지지 못한 모양이다. 화이트폴 영애는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요즘 좋으시겠어요. 훌륭한 아버지까지 만방에 알리셨으니.”

“축하는 고마워요.”

“제가 무슨 축하를!”

버럭하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흠, 그런 것치고 지금 같이 계시지도 않잖아요. 그다지 돈독한 편이 아니신가 보죠?”

내 눈썹이 위로 쑥 올라갔다. 명백히 내 아버지를 찾는 모습이었기에, 곱게 보이지 않았다.

“할 말이 그것뿐이시라면 돌아가 주시죠. 저는 오늘 화이트폴 후작가로 배상명령서를 보낼 거예요.”

내 냉담한 말에 릴리아나는 펄쩍 뛰었다.

“제, 제가 뭘 했다고 배상을 해요?”

그걸 몰라서 묻나. 나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첫째, 가택침입에 따른 손해배상. 둘째, 대공비의 업무시간 침해.”

“그, 그런 걸 배상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부들부들거리는 릴리아나를 바라보며 나는 턱을 치켜들었다.

“제 시간이 꽤 비싸서요. 그리고 이미 5분 지났네요.”

“정확히 6분 5초입니다. 아니, 6초.”

눈치 빠른 하녀장이 바로 뒤에서 첨언해주었다.

“그깟 시간이 비싸봤자잖아요! 그런 걸로 저를 겁줘봤자…….”

“17, 18초…….”

“알았어요! 알았어! 가면 되잖아요!”

원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카운트다운을 하면 빨라지기 마련이다.

마치 패배하여 도망치는 악당처럼 릴리아나 영애는 빠르게 돌아섰다. 물론 마지막 으름장을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안을 어떻게 속였는지 모르지만, 그는 금방 자신의 감정을 깨달을 거예요. 그는 날 사랑한다고요!”

마냥 귀엽게 봤는데, 또 저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영하로 내려갔다. 나는 팔짱을 끼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어서 폴카로 시집갈 준비나 하세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기는. 미래를 알고 있어서 안다.

‘이안에게도 황족이라는 걸 알고 나니 감정의 색이 달라졌다고 했지.’

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지난 생에서는 이안을 버리고 폴카의 왕비가 되었으면서 지금 이렇게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건 이유가 하나뿐이잖아.’

이안이 다른 사람의 것이 될 것 같으니까.

욕심은 많고, 세상 모든 것이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함.

그저 어리다, 사랑을 많이 받고 커서 그런다 곱게 봐주려고 해도 이 부분에서는 저절로 쓴소리가 나왔다.

“온갖 경우의 수를 깔아두고 계산하는 주제에 사랑 운운이라니 개소리도 참신하셔라. 배웅은 이걸로 끝내죠. 다음에는 정말 못 들어오실 줄 아세요. 아시다시피 이안은 지금 저택에 없거든요.”

릴리아나 영애가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지만, 문이 쾅 하고 닫혔기 때문에 들리지도 않았다.

내가 휙 하고 몸을 돌리니 하녀장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배상명령서를 정말 보내실 건가요?”

“케닌에게 맡겨.”

아버지가 계신 곳을 향해 걸으며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다음 주에 오픈하는 백화점 매출로 시간의 가치를 계산해서 청구하라고 하면 알아서 잘할 거야.”

“알겠습니다.”

저런 타입들은 그렇게 경고하면 주변에서만 맴돌지,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오지 못한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지.’

복도를 막 돌아서는데, 온실로 간 줄 알았던 아버지가 귀퉁이에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올리비아?”

“아버지.”

릴리아나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는지, 아버지의 온화한 얼굴이 살짝 경직되어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공손하게 운을 떼었다.

“아버지께도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기왕 이렇게 된 것, 지금이 기회인 듯싶었다.

* * *

화이트폴 저택에 돌아온 릴리아나는 다시 침대에 엎어졌다. 이번에는 밥도 먹지 않았다.

“릴리! 도대체 무슨 일이니?”

후작부인이 애타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릴리아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제대로 해내지 못했어.’

그녀는 눈을 감았다. 당당하다 못해, 여유롭던 올리비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마녀가 너무 못돼서 그래.’

보통 남편의 옛 여자 친구가 찾아오면 쫄아들 만도 한데, 그 마녀는 쫄기는커녕 오히려 매섭게 그녀를 내쫓았다.

‘이안도 그렇게 핍박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착하고 순한 이안을 그 마녀가 릴리아나에게 했던 것처럼 겁을 주어 붙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안을 구해줘야 하는데.’

하지만 오늘 그녀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 다시 타이론 대공가에 찾아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마이옌 공 앞에서 깽판을 부려야 했는데.’

분명 마이옌 공이 타이론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한 것이었는데. 이 마녀는 어떻게 알았는지 제 아버지까지 용의주도하게 빼돌려서 보여주지 않았다.

릴리아나는 손톱을 깨물었다. 얼굴이 저절로 울상이 되었다.

“폐하께서 화를 내실 텐데 어쩌면 좋담.”

그녀는 얼마 전, 황제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아버지, 어머니의 걱정과 달리, 황제는 흔쾌히 그녀를 만나주었다.

“어쩐 일로 만나자고 했지, 화이트폴 영애?”

인자하게 웃는 얼굴이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했다. 그래서일까. 릴리아나는 자신의 속마음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제게 폴카의 왕과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아직 이안을 사랑하고 있어요.”

“아아, 그랬군. 하지만 타이론 대공은 이미 혼인하지 않았나. ”

“이안은 지금 저를 약 올리려고 결혼한 것뿐이에요! 그 사람도 저를 사랑한다고요!”

“그래도 두 사람의 혼인이 지속되고 있는 한, 아가씨가 끼어들 자리는 없지 않겠는가. 설마 타이론 대공의 후처가 되겠다는 건 아닐 테고.”

“후처라니요!!”

황제의 말에 릴리아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질색했다. 황제는 그런 릴리아나를 딱한 눈으로 내려보았다.

“내가 아가씨를 알았다면 절대 타이론 대공의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이제는 이혼밖에 남은 것이 없지 않나.”

“하지만 이안은 그 마녀가 무서워서 이혼하려고 하지 않아요.”

“이혼에는 두 사람의 의견만 필요한 것이 아니지.”

황제는 몹시 슬프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마이옌 공이 타이론 대공에게 사실 정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과연 두고 볼까?”

‘그 말에 일부러 마이옌 공이 있는 시간을 택해서 방문한 건데!’

그런데 마이옌 공의 그림자도 못 보고 올리비아에게 된통 당하기만 하고 나오다니.

억울해서 릴리아나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고 훌쩍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아가씨! 이 신문 좀 보세요!”

그녀가 자매처럼 여기는 하녀가 서둘러서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릴리아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뭔데 그래?”

“대박 사건! 대박 사건이에요!”

“응?”

릴리아나가 신문을 볼 때는 이안에 대한 뉴스뿐.

그러니 하녀가 방방 뛴다는 것은 이안과 관련된 뉴스가 실렸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릴리아나가 좋아할 만한.

“빨리 줘봐.”

릴리아나는 신문을 빠르게 낚아챘다. 그리고 빠른 눈으로 기사를 훑었다.

-마이옌 공, 극대노! 본국으로 귀환. 딸에 대한 실망 때문인가?

‘이게 무슨 뉴스야?’

순간적으로 뉴스 내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릴리아나는 서둘러서 다음 장으로 넘겼다.

-최근 타이론 대공비의 아버지로 알려진 오르세의 마이옌 공이 곧장 귀국길에 올라 화제이다. 믿을 만한 제보에 따르면 마이옌 공은 딸의 혼인에 얽힌 비화를 이제야 듣고 매우 크게 실망한 것으로…….

“어라?”

릴리아나의 시선이 ‘혼인에 얽힌 비화’에 꽂혔다.

그 내용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파넬 공작과 처음에 혼인했지만, 타이론 대공과 바람이 나서 파혼당한 그 사건 아니겠는가.

‘그걸 왜 갑자기 마이옌 공이 알아봤겠어?’

그녀가 생각해낼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방문.

“내, 내가 해낸 건가?”

릴리아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정확히 닷새 뒤,

수도는 이 뉴스로 다시금 한바탕 시끌벅적해졌다.

-자취를 감춘 타이론 대공비, 그녀는 어디 있는가?

올리비아 타이론 대공비가 잠적해버린 것이다.

* * *

조용했던 타이론 대공가에 갑자기 투박한 발소리가 울렸다.

저벅. 저벅. 저벅.

그냥 생활화에서는 절대로 날 리가 없는 거친 발소리였다. 그 발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대공가 식솔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저, 전하.”

그들의 시선 끝에는 후드를 깊게 덮어쓴 큰 키의 사내가 서 있었다. 바로 이안 타이론 대공이었다.

“도, 돌아오셨습니까.”

“그래.”

“예정보다 일찍 오셨군요.”

“조금 무리했지.”

대공이 귀환한다는 소식이 대공저로 전해지지 않은 탓에, 누구도 그를 마중 나가지 못했다. 사실 마중 같은 것은 상관없었기 때문에 이안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사용인들이 놀란 표정을 지나치면서 이안은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그가 향한 곳은 당연히 한 곳이었다.

‘올리비아.’

그녀의 방이었다.

그가 급박하게 공국으로 내려간 이유는 사실 황제가 언제 그를 경계하여 내칠지 모르니, 그 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를 데리고 가도 되었지만, 굳이 놓고 간 이유도 분명 있었다.

‘플로렌스 자작을 처벌하기 위해.’

올리비아는 자신이 대단히 당차고 차가운 여자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정이 많았다.

아무리 플로렌스 자작이 그녀에게 해를 끼쳤다고 해도, 막상 그를 처벌한다고 하면 마음 아파할 것이 뻔했다.

‘마지막까지 반성도 안 하더군. 올리비아 모르게 처리하길 잘했어.’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었다면 그래도 아내를 키워준 공로를 참작했을 텐데. 참으로 끝까지 변함없는 자였다.

‘내가 없는 사이, 올리비아는 잘 지냈겠지? 마이옌 공과도 돈독해졌을 테고.’

그가 많은 재산을 상속해주기로 했다는 소식은 이미 전선매로 받아서 알고 있었다. 대회의에서 있었던 일도.

그런 이야기들을 전해 듣는 내내 그의 마음에 피어오른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보고 싶어.’

설마 이렇게까지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사람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참 사람이라는 게 무서워.’

분명 혼자서도 괜찮았는데. 다른 사람의 온기 따위 필요하지 않았었는데.

어느 순간, 그의 곁에 훅 들어온 그녀는 그를 온통 중독시켜버렸다. 이제는 그녀 없는 나날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였다.

문고리를 돌리며 이안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제 한 일주일은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야.’

그동안 그녀가 부족했던 만큼 모두 채울 때까지 그녀를 물고 빨며 시간을 보내리라.

무척 불손한 생각을 하며 올리비아의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

“……!”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올리비아?”

“저, 전하.”

하녀장이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이안을 불렀다. 이안은 휙 돌아섰다.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자, 잘생긴 얼굴은 동상처럼 생기를 잃었다.

“뭐지? 내 아내가 어디 있나?”

“그, 그것이.”

“외출을 한 건가? 아니면 집무실? 서재?”

“모, 모두 아닙니다.”

하녀장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며 여러 번 마음의 준비를 했건만, 막상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녀는 목이 메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비전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그 말에 이안은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 * *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

스타티스 황태자는 경쾌한 어조로 손가락을 두 개 펴보였다.

“첫 번째, 그대가 상속하게 될 생제르망 상회를 황실에 바치는 것.”

“저, 전하, 그건 좀…….”

스타티스의 말에 로메오가 난색을 표했다. 생제르망 상회가 보통 재산이 아닌데, 그걸 통째로 바치라는 말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로메오의 간섭에 스타티스 황태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가짜야. 내 명의로 상속하였다가 내가 황위를 계승하는 즉시 그대에게 돌려주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스타티스를 완전히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었다.

로메오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차분히 황태자를 마주 보며 물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요?”

스타티스 황태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두 번째 방법은 첫 번째보다 훨씬 쉬웠다.

“간단해. 그대가 사라지면 되는 거야.”

“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스타티스 황태자는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수도에서 여러 가지 소문이 도는 건 그대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러면서 바다처럼 푸른 눈이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사실 수도에 도는 나에 관한 소문은 대부분이 무척 자극적이었다.

-대국민 고자도 고치는 마성의 여자

-한 나라의 두 공작을 모두 자빠뜨린 매력녀

‘그래 봐야 소문인데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어?’

내 뒤로 수군거려지는 말들이었다. 뭔들 면상에서 쏟아내는 욕설에 비하겠는가.

‘나중에 내 이름으로 발기부전치료제나 내야 하나 봐. 엄청나게 잘 팔릴 듯.’

나는 시큰둥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나를 보는 스타티스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는 대공비의 이런 대찬 점이 참 좋아. 이안도 그렇겠지. 우리는 빌어먹게도 취향이 똑같거든.”

“험하게 자라서 그래요.”

“뭔데? 무슨 소문인데 그래?”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내 소문을 잘 모르는 로메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대표적인 것 하나만 알려주었다.

“내 치마폭에 들어오면 어떤 고자도 불끈이가 된대.”

“헐.”

로메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충격으로 할 말을 잃은 그를 내버려 두고 스타티스는 대화를 이어갔다.

“그 소문들에 상처를 입은 대공비가 어디론가 도망친다고 해도 다들 그러려니 하지 않겠는가.”

그 말은 무척 달콤하게 들렸다.

* * *

‘그래서 오늘, 저는 오르세 왕국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 있습니다.’

나는 창문을 살짝 열고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맞았다. 이름 모를 들풀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살다 살다 장거리 마차에도 타게 될 줄이야.’

파넬 공작부인으로 지내면서, 나는 20년 동안 한 번도 수도를 떠나본 적이 없었다.

남편이 북부로, 또 때때로 파넬 영지로 내려가니 나는 수도 저택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사실 수도를 떠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 했어.’

그때는 무엇이 나를 그렇게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진상들과 다투는 것도, 익숙하지도 않은 집안 관리에 밤잠을 설치며 달려들었던 것도.

정말 숨 한 번 제대로 돌린 적이 없었다.

‘이렇게 쉬운 것을.’

그저 문만 열고 나오면 집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아니, 실제로도 그때는 나올 수 없었을 거야. 옳다구나 진상들이 내 짐을 밖으로 내던졌을 테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진상들에게서 오는 스트레스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성공했다 싶었다.

그렇게 과거를 반추하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그리운 얼굴이 떠올랐다.

‘이안.’

다정하고 조금 능글맞은, 나의 두 번째 남편.

‘케닌과 애니가 잘 전달해줬겠지?’

급히 나오면서 이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나는 케닌과 애니에게 내가 왜 잠시 자리를 비우는지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많이 걱정하지 않아야 할 텐데.’

이안이라면 이유를 다 알고 있어도 내 걱정을 할 것 같았다.

‘아버지랑 함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어요.’

내가 없는 동안 그가 잘 지내고 있기를 조용히 기원하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정중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잠시 쉬었다 갈까요?”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입술을 다물고 있던 아버지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지루하진 않나요?”

“네. 장거리 여행은 처음이거든요.”

내 대답에 아버지는 다시 말문이 막힌 듯했다. 나를 걱정하고 의식하는 것이 느껴져서 나는 수줍게 웃어 보였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저어, 그런데 아버지.”

“예?”

“언제까지 제게 높임말을 쓰실 거예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되어요.”

“하하. 아, 그렇군요.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내 질문에 아버지는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오르세에는 높임말이라는 게 없답니다.”

“네?”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외국인이라서 자연스럽게 높임말을 배우는 게 아니고요?”

“네. 아예 높임말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그렇다 보니 제국어에는 익숙해지기 어렵군요.”

“아아.”

우리가 외국어를 배울 때는 기본적으로 존댓말을 배우지 않나. 그래서 나는 오르세에는 낮춤말과 존댓말의 구분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정말 외국이구나.’

내가 신기해서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제가 존댓말을 써서 불편한가요?”

“아니요. 엄청나게 잘 어울리셔요.”

워낙 우아하고 점잖은 인상이신지라 낮춤말을 사용하는 모습이 오히려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버지처럼 점잖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 말에 아버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생기발랄한 지금이 딱 좋답니다. 저는 멜리사의 그런 모습에 반했죠.”

“연애 이야기 더 해주세요. 두 분이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해요.”

“별로 재미가 없을 텐데.”

사양하는 것 같더니, 아버지는 술술 어머니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처음 만난 이야기, 처음 싸웠던 일, 그리고 화해했던 일, 서로 미래를 약속했던 일들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바깥을 내다보는 것도 잊고 아버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바로 그때였다.

덜커덩!

“꺄!”

한참 이야기 중인데 마차가 크게 휘청였다.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있으니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실례합니다.”

“무슨 일이죠?”

“마차 바퀴가 진창에 빠졌습니다.”

여행을 다녀본 적 없는 나는 이 상황이 심각한지, 흔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아버지가 턱을 짚고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다행히 근처에 도시가 있다고 합니다. 도움을 요청하러 떠났으니, 곧 사람들이 올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죠.”

“그럼 다행이군.”

그렇게까지 심각한 상황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밖에 나왔다.

아버지가 마차를 살펴보는 사이, 나는 숲을 돌아보았다. 시종이 말한 대로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인지, 길도 반듯하고 나무도 잘린 흔적들이 보였다.

‘이렇게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라서 덜컹덜컹거렸구나.’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도 내게는 신기하기만 했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으니, 심심해 보였던지 아버지의 비서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물었다.

“여긴 어딘가요?”

“아직 제국령이랍니다. 제국의 수도에서 오르세의 수도까지는 텔레포트 존을 이용한다고 해도 꼬박 한 달이 걸리죠.”

“그렇군요.”

아직 제국령이라는 말에 조금 놀랐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맞아요. 제국을 가로지르는 데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요.”

그저 내가 체감하지 못하고 있을 뿐.

조금 있으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우리를 도와주러 온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무심코 그쪽을 돌아본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나는 비서를 불러 질문했다.

“저기요.”

“예?”

“여기가 혹시 파넬령인가요?”

내 질문에 비서는 무척 놀랍다는 듯이 안경을 검지로 밀어 올렸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나요?”

“허허허.”

인생이란 왜 이런 것이람.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에서 내리는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제임스였다.

‘내 인생 왜 이따위야.’

소문을 피해서 도망쳤더니 산 넘어 산이었다. 나는 뭐 씹은 표정으로 말에서 뛰어내리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굵직굵직한 선으로 이루어진 남자였다. 전반적으로 다 굵었다. 허리도 굵고, 팔도 굵고, 목도 굵고.

‘저것도 참 싫었는데 말이야.’

나는 그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저 덩치가 나보다 훨씬 크고, 말수가 적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압박감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제임스 파넬.’

내 첫 번째 남편.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에서 내린 그는 길에 서 있는 나를 보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고양이가 털을 세우듯, 반사적으로 긴장하여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가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올리비아.”

내 이름이 이렇게 낯설게 들리기는 처음이었다.

‘내 이름을 불러준 적이 있긴 했나?’

그가 나를 지칭하는 말은 죄 그런 것들. 부인, 여보.

‘내 이름도 모르는 줄 알았더니.’

지난 생의 남자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다르다는 걸 아는데도 저절로 마음이 삐딱해졌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또 만났네요, 파넬 공작. 도대체 왜 여기 계신 거죠?”

대회의가 끝나고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자신이 이끌고 온 사람들에게 마차로 가보라는 손짓을 하고는 정중하게 내게 대답했다.

“영지를 관리하러 온 겁니다. 저는 영주이니까요.”

“이 시기에요?”

“그동안 한 번도 영지에 와본 적이 없으니까요.”

“흠.”

영주가 영지에 온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지난 생에서는 이 부분이 큰 문제였지.’

전대 공작이 서거한 뒤로 아무도 영지를 내려가지 않고 수도에서만 지냈다. 그래서 수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영지관리인이 파넬 공작 영지를 다스리고, 영주는 서류만 받아보았다.

‘우아한 진상은 내정관리는 잘했을지 몰라도 장부 맞출 줄은 몰랐지.’

내가 실권을 잡고 장부의 빈 자리를 발견하기 전까지, 오랜 시간 동안 파넬 영지에서는 관성적인 횡령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 생에는 영주가 직접 왔다니 다행이네.’

실상을 알고 보면 말수 적은 벽돌일지라도, 제임스는 기본적으로 외모만 보아도 위압감을 주는 남자였다. 영지관리인도 잔뜩 긴장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그를 흘긋대었다.

‘그래도 북부로 안 간다고 해서 고깝게 보았는데, 영지로 오다니 기특하네.’

뭔 아이를 평가하듯 기특하다고 생각한 나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차려, 정신! 저 남자는 지긋지긋한 전 남편이라고.’

역시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다.

제임스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나는 조금 떨어진 곳의, 편편한 바위 위에 앉았다.

사내들이 말을 마차에 매어 진창에서 마차를 꺼내려고 애를 썼다.

‘쉽지 않구나.’

말이 애를 쓰는데도 슉 빠져나갈 줄 알았던 마차는 걸릴 듯 말 듯 덜컹거리기만 했다.

‘비가 온 것 같지도 않은데 하필 저쪽에만 저런 진창이 생겼네.’

턱을 괴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내 곁으로 왔다.

“지루하진 않나요? 이렇게 지체되어 속상하군요. 차라도 끓이라고 할까요?”

“전혀 아니에요.”

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남들이 다 고생하고 있는데 철없이 차나 홀짝거릴 수 있겠는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나를 아버지가 기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익숙지 않은 시선에 내가 뺨을 발갛게 붉혔다.

“두 분이서 사이가 좋으시군요.”

묵직한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내 눈꼬리가 저절로 다시 뾰족해졌다.

‘제임스.’

말도 섞기 싫은데 왜 자꾸 저쪽에서는 또 다가온단 말인가.

따끔하게 참견하지 말아 달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더니, 아버지가 더 빨랐다.

“누구시죠?”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팔을 붙들었다.

‘아버지가 정말 저 남자를 모를까?’

제임스의 외양은 인상이 깊어서 한 번 본 사람들은 대체도 그를 잊어버리지 못하는 편이었다.

‘심지어 수여식 때 그 난리가 났었잖아. 분명 조사를 하셨을 텐데.’

그런데 어째서 이 남자에게 말을 거시는 걸까. 호기심 때문이라면 그냥 상대하지 않는 편이 제일 낫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제임스는 아버지에게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제임스 파넬입니다.”

“오르세의 마이옌 공입니다.”

두 사람이 악수하는 모습조차도 내게는 불안하게만 보였다. 나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제임스와 시선이 딱 부딪치고 말았다.

‘헉.’

날 살펴보고 있었던 걸까. 내 마음이 들킨 것 같아서 꺼림칙했다. 나는 슬쩍 아버지 뒤로 한 걸음 숨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딸아이와 나들이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빠지게 된 거군요.”

바퀴가 빠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절대로 파넬에서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에게 쫓기는 것이 아니니까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하필 파넬에서 쉴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파넬에서 사고가 나다니! 나도 참 운이 안 좋아.’

이쯤 되니 내가 문제가 아닌가, 하는 심각한 고민이 생겼다.

‘불운의 신 같은 것이 등에 붙어 다니는 거 아니야?’

그럴듯했다.

‘돌아가면 신전에 헌금이라도 왕창 해야지.’

행운 적립이라고 알랑가 몰라.

의례적인 인사가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그리고 제임스가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파넬 성에서 쉬어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거절하기 애매한, 영주라면 당연히 할 법한 권유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익숙한 아버지는 능숙하게 그의 권유를 밀어냈다.

“저는 제 딸의 의사가 제일 중요합니다.”

아버지와 제임스는 한 집안의 가주이니 한마디를 내뱉어도 그 발언의 파장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딸인 나는 좀 다르지 않나. 지금 나는 타이론 대공비가 아니라 마이옌 공의 스무 살 난 딸이었다.

나는 딱 잘라서 거절했다.

“전 싫어요.”

파넬이라니 미쳤나. 저 사람 성에서 머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입방아에 휘말릴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진저리를 치는 나를 제임스가 감정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뭐가 문제냐는 듯 여상스레 대꾸했다.

“가명을 쓰시면 되지 않습니까.”

“네?”

“이 시골에서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쉬다 가시죠.”

“그건…….”

아무리 귀가 어두워도 은빛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가진 타이론 대공비를 모를 수가 있나.

‘모를 수도 있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가 이내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냐. 파넬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어.’

영주를 꼭 닮아서, 타 영지와는 교류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지내는 바위 같은 영지가 바로 파넬이었다.

‘그래도 굳이 파넬 성에 머물기는…….’

내가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다.

굉장히 불길한 소리가 크게 울렸다.

우지끈.

“히이이잉!!”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말이 우는 소리.

조금 있으니 시종들이 사색이 되어서 달려왔다.

“바, 바퀴가 부서졌습니다. 아무래도 고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왜 하필 지금 타이밍에서 부서지는 건데?’

오르세 왕국까지 가야 하는데 마차는 부서지고 말았다. 이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시종들이 타고 있는 말에 오르거나 짐마차에 타는 것뿐.

보통의 귀족 영애라면 여기서 말에 오르겠지만 내게는 치명적인 이유가 있었다.

‘나는 승마에 자신이 없어.’

귀족의 교양이 바로 승마였다. 하지만 말은 가격도 비싸고, 관리유지에도 돈이 꾸준히 들어간다. 플로렌스 자작이 그런 고급 교양을 내게 가르쳤을 리가 있겠는가.

‘어떻게 하지? 짐마차에라도 올라야 하는가.’

내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으로 고민에 잠겼을 때였다. 제임스가 팔짱을 끼고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아니면 그냥 영지 밖으로 나가시든가.”

이렇게 얄미울 수가. 평소에는 눈치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더니만, 이럴 때는 여우 같았다.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당신 굉장히 쪼잔한 거 알아요?”

“영광입니다.”

그 비꼬는 말조차 담담해서, 괜히 열불이 났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대답은 처음부터 하나였던 모양이다.

“좋아요. 맘대로 해요.”

우리는 가장 가까운 파넬 영지로 향했다.

* * *

파넬은 아주 가까웠다.

포장되지 않은 길을 조금 따라가니 농가가 나왔고,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들판에 흩어진 농가의 개수를 세고 있으니 성벽이 등장했다.

‘여기가 파넬.’

전반적으로 딱딱하고 삭막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드문드문 길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닌지, 아버지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난한 영지군요.”

자칫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말인데도, 제임스는 담담하기만 했다.

“오랫동안 방치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런. 어쩌다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애도를 표합니다.”

아버지는 제임스에게도 정중하게 행동했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 애도 표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나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전대 공작을 개인적으로 무척 싫어하고 있었다.

‘아이를 못 낳는다고 연달아 후처를 들이는 건 뭔데. 이혼이라도 하고 재혼을 하든지.’

그리고 그의 행동은 훗날 나에게 세 명의 시어머니라는 빅엿이 되어 날아왔다.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지.’

진상들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꽤 오래 투병을 하다가 숨을 거둔 모양이었는데, 그 부분도 내게는 마이너스였다.

‘죽을 줄 알았으면, 남게 될 어린 아들을 위해 이것저것 안배해야 했던 것 아니야?’

그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한 덕분에 제임스는 어릴 때부터 전쟁터로 나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남편으로도 그렇지만, 아버지로도 별로였던 셈이다.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던 제임스가 느릿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바로 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 저것, 모두.”

마지막에 ‘모두’를 지칭하는데 어둠침침한 회청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잘살게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니.’

아무래도 아직 나에게 미련이 좀 남은 모양이었다.

이제 나와 제임스는 아무 연관이 없는 사이가 되었고, 그에 대해서도 수차례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제임스를 볼 때 마음이 복잡해졌고,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이래서 결혼이 무서운 거야.’

헤어지면 남이라지만 헤어진 뒤 다시 만나는 부부들도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분명 징글징글해서 헤어졌을 텐데.’

그리 생각하며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어차피 이제 저쪽은 나를 모르고, 우리의 과거는 없던 일이 되었다.

가본 적 없는 미래에까지 구질거림을 들고 갈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나는 가벼운 어조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영지에 오신 목적은 이루셨나요?”

“네.”

의외로 똑 부러진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계장부 볼 줄도 모르더니 별일이네. 이제는 관심을 가지기로 했나?’

지난 생에, 내가 회계장부의 구멍을 찾아낼 때까지 제임스는 그 사실을 몰랐다. 회계에 대해 배울 생각도 없었고.

‘하긴, 나도 변했는데 이 벽돌도 변할 수 있는 거지.’

여상스럽게 그리 생각했을 때였다.

제임스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직관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모양이다.

“아니, 웬 사람들이?”

“무슨 일이지?”

“도대체 왜?”

성벽에 가까워질수록, 집이 늘어날수록 묘한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일행들도 나와 비슷한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발견한 ‘그것’을 보고 모두 헛바람을 삼키고 말았다.

“헉.”

그것은 시체였다.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시체.

‘세상에.’

수도에서도 처형식은 무슨 여가 생활처럼 소비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건 조금 기묘했다.

영주민들은 환호한다기보다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 제임스를 향하는 시선에는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제임스는 담담한 어조로 우리에게 말했다.

“보시진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니까 저건 아마도.

‘영주관리인을 처형한 건가?’

하지만 제대로 증거를 잡아서 정당한 과정을 거쳤다면 저런 당혹스러움이 번지고 있을 리가 없다.

‘설마 즉결심판?’

제국법은 지엄해서 살인이 아니고서는 즉결심판하는 일이 드물었다. 아무리 영주라고 해도 영주민을 함부로 사형시킬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를 리도 없을 텐데.’

나는 나보다 앞서서 말을 타고 가는 제임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도 없이 보았다고 생각한 그 뒷모습이 처음으로 생경하게 느껴졌다.

* * *

“편히 쉬다 가십시오.”

우리가 안내받은 파넬 성은 공작가의 위명에 걸맞게 고풍스럽고 웅장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구역도 많았고 일하는 인원도 적어 보였다.

‘여기가 파넬 성이구나.’

나는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성을 돌아보았다. 파넬 공작부인으로 20년이나 시간을 보냈음에도 파넬 본성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까워라. 조금 신경 쓴다면 멋진 성이 될 텐데.’

그래도 관리할 수 없는 물건들에 흰 천을 덮어둔 건 다행이었다. 먼지를 걷어내는 것부터 하려면 보통 일이 아닐 테니.

“여기 머무르시면 됩니다, 아가씨.”

뭐라고 나를 설명했는지, 사용인들은 나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제임스의 말대로 정말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편이 훨씬 나았기 때문에 나도 굳이 그 호칭을 정정하지 않았다.

“아버지는요?”

“바로 옆방입니다.”

식사는 방으로 제공되었고, 나는 아버지 방에서 저녁을 들었다.

수도와 달리 한적한 영지라 그런지 어둠이 빠르게 몰려왔다. 딱히 할 일도 없고, 구경할 것도 없어서 나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마음이 술렁였던 걸까. 결국 달이 환하게 하늘 중앙을 밝히고 있는 늦은 밤, 나는 반짝 눈을 뜨고 말았다.

“이런.”

다시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손바닥을 가슴에 올려두니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미련도 아쉬움도 아무것도 없는데.’

왜 파넬 성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두근거리는 건지.

‘나도 모르는 새 미련 같은 게 있었던 걸까.’

꼭 기묘한 힘이 내 마음을 느릿하게 휘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슬리퍼에 발을 끼우고 창가에 섰다.

정원에서 반딧불이 같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뭘까?’

저 빛이 꼭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테이블에 있는 기름등을 들고, 나는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휘이잉.

이놈의 영지는 바람마저도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잠옷을 마구 들치는 심술궂은 바람을 마주 보고 어깨를 움츠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둥글게 다듬어진 정원수를 몇 개 지나치자, 잔디만 깔려 있는 공터가 드러났다. 달빛이 비처럼 쏟아지는 그곳에, 제임스가 동상처럼 맨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반짝이는 금빛 기다란 막대기 같은 것은…….

‘투머로우?’

황제가 이번에 제임스에게 하사한 국가의 보검, 넘버즈 중의 하나인 투머로우였다.

‘저것이 내 창가까지 그런 빛을 뿌린 건가.’

무가의 안주인이었던 것에 반해, 나는 무기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건 제임스의 영역이라고 선을 긋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술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제임스가 검술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무얼 하는 거지?’

자리에 앉은 제임스는 흰 검날을 드러낸 검을 마주 보고 있었다. 마치 검과 눈싸움을 하는 것만 같았다.

휘이잉.

시간조차 멈춘 것 같은 그 순간을, 거친 바람이 한바탕 흔들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도 제임스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검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임스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검집에 느릿하게 꽂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말했다.

“……나오십시오.”

나는 움찔했다. 시치미를 떼고 몰래 사라질까 했지만, 어두움에 잠겨 검게 보이는 음울한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향했다.

나는 멋쩍음을 느끼며 툴툴거렸다.

“아, 엿보려던 건 아니에요.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잠이 오질 않아서요.”

“예민하시군요.”

“그러는 당신은 왜 일어나 있어요? 하나도 예민하지 않으시잖아요.”

제임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빛을 등지고 있는지라 어떤 표정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오늘 처형을 제가 직접 했습니다. 그놈의 목에 밧줄을 걸고 힘껏 당겼지요. 그래서 그런지 잠이 오질 않는군요.”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농담인가? 아니면 진담?’

너무 담담해서 어떤 의미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이건 무슨 꽃이지?’

노란 꽃잎에 가운데에 갈색 무늬가 있는 키가 작은 꽃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제임스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꽃에는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네? 왜요?”

“파넬에서만 나는 특수약초로, 체질에 따라 독초가 됩니다.”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꽃을 바라보았다.

‘성안의 정원에 왜 독초를 키운담.’

하지만 막상 꽃을 보니 납득이 되었다. 꽃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꺾어다 방을 장식하면 무척 화사할 것 같았다.

체질에 따라서 독초가 된다는 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위험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니, 정원을 장식하기 위해 심는 것도 이해가 갔다.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묘하게 눈에 잔상이 남았다. 내가 도대체 저 꽃을 어디서 보았나 기억을 더듬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제임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밤이라서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제임스를 돌아보았다. 언제 걸어온 건지, 제임스가 성큼 나와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자신의 목을 그어 보였다.

“죽기 전에 꽤 거칠게 버둥거리거든요. 그러다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내기도 하죠.”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옛날의 나라면 조금 심장이 서늘해졌겠지만, 지금은 그냥 시큰둥하기만 했다.

“이럴 때는 말이 많으시네요.”

“실례. 겁주려던 건 아닙니다.”

다른 놈이라면 괜한 이야기로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겠지만, 제임스는 그냥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뿐이다.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이유 없이 나섰을 리 없다는 건 아니까요.”

“…….”

내 대답에 제임스가 말문이 막힌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아차, 싶어진 내가 새초롬한 어조로 덧붙였다.

“당신을 감싸주려고 말하는 건 아니니까 허튼 마음도 품지 말아요. 객관적으로 그렇다는 거예요.”

“압니다.”

‘알긴 뭘 알아. 돌덩이 주제에.’

그렇게 대꾸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지금의 제임스는 내가 진절머리나게 싫어하던 그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내게 높임말을 쓰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할 수는 없지.’

얼굴만 봐도 신경질이 나려는 걸, 나는 이성으로 내리눌렀다. 바로 그때였다.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던 제임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번부터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뭐죠?”

나는 그를 마주 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달빛이 마법처럼 제임스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정말로 제게 미련이 하나도 없으십니까?”

그의 눈빛은 명확한 슬픔으로 빛나고 있었다.

* * *

“미련이요?”

그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임스는 무뚝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여운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우린 부부였지만, 한 번도 부부답게 지내지 못했지 않습니까.”

그 질문은 전제부터 틀렸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했다.

“그걸 부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얼굴도 모르고, 본인들의 의사와도 상관없이 치러진 결혼.

그걸 부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혼인무효가 성립한 거잖아.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어서.’

내가 그리 생각하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을 때였다. 눈을 내리깐 제임스가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적어도 제게는.”

그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목을 큼큼 가다듬은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게는 그것이 전장을 버티는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 걸음 나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아내가 보고 싶다.”

또 성큼.

“이번 일만 끝나면 그녀와 조용히 살 수 있다.”

또 성큼.

고개만 숙이면 내 얼굴에 입술이 닿을 듯 가까이 선 그가 음울한 얼굴로 나를 내려보았다.

“그런데 날아온 것이 혼인무효 소장이라니. 그 비통함을 말로 설명할 수 없더군요.”

그 말이, 내게는 조금도 와닿지 않았다. 나는 들을 들지 않은 손을 뻗어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었다. 그는 순순히 두 걸음 물러났다.

“저는 당신에게 이미 한 번 기회를 주었어요.”

비단 지난 생까지 들추지 않아도, 이번 생에도 나는 파넬에 대단히 유감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것을 제임스에게 서신으로 전달했다.

“내가 어떤 대접을 받으면서 파넬에서 있었는지 아나요? 아마 세탁실의 하녀도 나보다는 좋은 환경에서 지냈을 거예요.”

권한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 허울뿐인 공작부인. 장작도 때 주지 않는 차가운 냉골방. 식사도 빨래도 내가 챙기지 않으면 챙겨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삶에서 나를 구해달라고, 내게 권한을 달라는 내 부탁에 당신은 뭐라고 대답했지?’

나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뜻으로 턱을 치켜들고 그를 응시했다. 제임스는 조금 곤혹스러워 보였다. 내가 이렇게 따박따박 따지고 들 줄 몰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올리비아. 그분들은 제 어머니이고, 사람들은 누구나 처음부터 잘 맞을 수 없습니다.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하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나는 픽 웃고 말았다.

“그 조율이, 내게 정말 필요한가요?”

“!”

내 말에 제임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나는 십 년 동안 하고 싶어서 가슴이 썩어들어갔던 말을, 이제야 내뱉었다.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어머니들은 당신의 어머니이지, 내 어머니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사람도 사람 나름이지. 가지가지 고루고루 진상 셋의 비위를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난처한 듯 눈을 내리깔았던 제임스가 애써 대답을 쥐어짰다.

“결혼이라는 건 그런 배경을 포함한 여러 가지 요소가 중첩되는…….”

“제법 어려운 말도 하실 줄 아셨네요. 결론만 말하면 저는 싫어요. 그래서 혼인 자체를 무효로 돌린 거고요.”

어, 그래 맞아.

네 말대로 결혼은 1:1의 관계가 아니고 집안과 집안이 얽히는 문제이지.

그래서 나는 결혼 자체를 없던 일로 했단다.

‘할 말이 더 있어?’

그가 왜 내게 자꾸 미련을 보이는지는 대충 이해했다. 하지만 그 이유로 내가 저 남자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감내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아까 말한 대로, 내가 원해서 한 결혼도 아닌데.

“저는…….”

내 말에 제임스의 시선이 엉망으로 흔들렸다. 그가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린 말은 내가 전혀 상상도 못 한 말이었다.

“저는 당신이 잘 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 * *

짹짹.

창밖으로 새소리가 울렸다. 나는 눈을 퀭하게 뜨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파넬에서도 참새는 짹짹 우는구나.’

그러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기가 막힌 소리를 듣는 바람에 밤을 꼴딱 새우고 말았다.

‘내가 잘 지내는 줄 알았다니.’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물론, 어제 그 말을 듣고 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니, 얼마나 아내에게 관심이 없으면 내가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죠! 눈이 발바닥에 달렸나요!!”

나의 고함에 제임스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희게 질렸다.

어쨌든 간밤에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나니 짙은 허탈함이 밀려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보면 나는 한 번도 내 남편에게 제대로 내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던 것 같아.’

정확히는 설명할 만한 친근함이 없었다. 얼굴도 못 보고 결혼한 남편이었으니까.

‘지난 생에는 감히 제임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다는 생각도 못 했어.’

겨우 스무 살.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인생. 갑자기 공작부인이 된 어린 아가씨를 진상들은 제각각 제 성격대로 들들 볶았다.

“네가 얼마나 팔자가 좋은 줄 알아? 내 아들은 지금 사지에서 어떤 고생을 하고 있는데.”

제임스의 친어머니인 무식한 진상은 늘 그렇게 날 갈궈대었고.

“네가 몸이 아프니, 나이가 많니. 나는 목이 따가워서 약도 삼키지 못하는데…… 콜록콜록.”

매사 우울한 징징거리는 진상은 나의 가엾은 처지조차도 별것 아닌 걸로 치부하곤 했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안겨준 우아한 진상.

“귀족 집안의 부인이란 자고로 한 집안의 가주를 대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인데. 쯧쯧, 뭘 배우고 온 것이 있어야지. 보고 배운 것이 없으니 기본도 되어 있지 않구나.”

매일매일 그렇게 갈굼을 당하고 있으니 제임스에게 내 신세를 알릴 생각은 당연히 못 했다.

‘그저 완벽한 공작부인이 되는 것에만 정신이 팔린 상태였었어.’

그래. 제임스가 없는 상황, 그건 그렇다고 칠 수 있다. 전장에 나가 있는데 얼굴도 모르는 부인의 안위를 파악하긴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제임스가 돌아온 뒤에도 그런 상황들은 변하지 않았잖아!’

제임스가 돌아온 뒤에도 내 생활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시어머니들의 다소 과한 간섭에도 제임스는 늘 이렇게 대응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사실 날이 앞으로 짧아야 10년, 길어야 20년 아니오. 젊은 당신이 참는 게 맞소.”

‘아오오오오!!’

지금 다시 떠올려도 욕이 나와서 나는 주먹으로 베개를 퍽퍽 후려쳤다.

그렇게 해도 분이 풀리질 않았다. 어젯밤 제임스가 한 말이 내 머릿속을 빙글빙글 되풀이되었다.

“저는 당신이 잘 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답이 없는 사람이야. 그 편지를 받고도 태평스럽게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나는 머리를 헝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덮어두었던 화만 치밀었다.

‘잊어버리자. 역시 다신 얽히지 않는 것만이 답이야.’

나는 한시라도 빨리 파넬령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아침 식사도 아버지 방에서 이루어졌다. 단장을 마치고 옆방으로 건너가니 아버지가 얼굴을 와락 구기셨다.

“어젯밤에 잠을 설쳤습니까?”

아니, 아버지도 한눈에 알아보시다니. 이제야 처음 알았는데, 아무래도 나는 잠을 못 자면 티가 많이 나는 유형인가 보다.

나는 거뭇거뭇한 눈가를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네.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여서 그랬나 봐요.”

“얼른 오르세에 도착해야 할 텐데. 괜히 힘든 여정이 된 것은 아닌가 걱정입니다.”

“괜찮아요. 저는 아주 건강한 편이고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들어 유난히 피곤해.’

사실 잠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닌데, 요즘은 잠이 막 쏟아졌다. 잠을 못 자면 급히 피로해지는 것도 그 탓인 것 같았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오르세까지 가야 하니까. 최대한 참는 수밖에.’

아무래도 길 위에서는 참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파넬을 벗어나면 바로 텔레포트 존이니까요. 금방 갈 수 있을 겁니다.”

“네.”

일단 오르세 국경만 넘으면 그렇게 급하게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식사를 들고 조금 방에서 쉬고 있으니, 마차 바퀴가 다 고쳐졌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출발합시다.”

애초에 짐을 풀지 않았으니, 다시 출발할 채비를 갖추는 것은 금방이었다. 마차에 올라탈 준비를 하고 우리는 제임스를 찾았다.

“파넬 공작님은 어디 있습니까?”

파넬 성의 가솔들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인지, 난처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시선만 주고받았다. 아버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떠나기 전에 인사해야 할 텐데.”

바로 그때였다. 저벅저벅 군용부츠 특유의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허름한 망토를 걸친 제임스가 작은 가방을 짊어지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인사는 필요 없습니다. 저도 함께 갈 거니까요.”

“뭐라고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담담한 제임스의 얼굴을 보고 와락 얼굴을 구겼다.

“제정신이에요?”

“제정신이 아닐 이유가 있습니까?”

제임스는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보아하니 호위가 부족한 것 같군요. 제가 도움이 될 겁니다.”

오르세 왕국의 다른 사절단들은 모든 일정을 다 마치고 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따라온 호위는 몇 명 없긴 했다.

‘제임스의 실력이야 나도 익히 알고 있고.’

아무리 귀를 닫아도 제임스의 뛰어난 공적은 못 들을 수가 없었다.

“무력 면에서야 그럴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손해예요. 당신과 붙어 있는 게 싫다고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남편은 아니잖아!

나의 반박에도 제임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당신이 싫다고 아버지까지 위험에 빠뜨릴 분도 아니고요.”

그리고 내가 뭘 경계하는지 익히 아는 듯, 시큰둥하게 덧붙였다.

“어차피 오르세에서는 저를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는 다 알게 되거든요.”

“부관의 신분증을 챙겼습니다.”

“…….”

언제 부관의 신분증도 챙겼담. 보통 용의주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냥 벽돌인 줄만 알았더니 이런 융통성도 있었나!’

어째 알면 알수록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나는 기가 막혀서 눈을 치켜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저도 오르세에 볼일이 있습니다. 같은 길이니 동행하시죠.”

“억지 부리지 말아요!”

“당신에게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십시오.”

“…….”

그래도 자기가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건 깨달은 모양이다.

뭐라고 반박하려고 입술을 우물거리던 나는 결국 한숨을 토하며 휙 돌아서고 말았다.

“마음대로 해요.”

어째 계속 그에게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 * *

애니는 숨을 죽이고 눈망울만 데구루루 굴렸다.

‘숨도 못 쉬겠어.’

그만큼 분위기가 무거웠다. 애니는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자신의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에 햇살이 산산이 부서졌다. 애니는 저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을 지금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정말 천사가 내려온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완전히 오산이었다. 그저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따끔따끔해지는 것 같았다.

‘그간 언니가 있어서 그가 유해 보였을 뿐이야.’

이안 타이론. 이 나라의 하나뿐인 대공. 애니의 형부.

그림처럼 잘생긴 얼굴이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대답했다.

“……그래요. 전해줘서 고마워요, 처제.”

느릿한 목소리에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나마 그녀가 올리비아의 동생이라서 지금, 이 순간 이만큼 정중할 수 있다는 걸.

더는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애니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저,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

“그래요. 쉬어요.”

애니는 얼른 문을 열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케닌이 울상을 짓고 애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미안해요, 보좌관님!’

애니는 케닌의 손짓을 못 본 척 문을 닫았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이렇게 지옥의 문이 열리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쉽지 않으리라. 케닌은 울상을 지었다.

‘아가씨,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요!’

위기의 순간 10대 소녀에게 기대는 모자란 어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이안이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케닌.”

“히익!!”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 케닌은 서둘러 두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괜한 소리로 이안을 자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안은 자신의 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이 얼토당토않은 계획을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나.”

‘아씨, 내가 바라보지 그럼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케닌은 억울했다. 그때의 상황은 설령 이안이 있었더라도 말릴 수가 없는 흐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화내겠지? 개 같은 성질머리가 많이 죽었다 했다, 내가!’

그게 어쩔 수 없는 부하의 숙명 아니겠는가. 케닌은 속으로는 온갖 쌍욕을 읊으면서 겉으로는 몹시 공손하게 대답했다.

“화,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권하신 것이라서요. 그리고 비전하의 의지도 강하셨습니다.”

“하하.”

케닌의 대답에 이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다른 손에는 커다란 벨벳 상자가 들려 있었다.

공국의 오래된 성에서 챙겨온, 고풍스러운 목걸이였다. 이안은 입술을 비틀었다.

“내가 이걸, 내 아내의 목에 걸어줄 생각이었는데.”

곧 있으면 성대하게 치러질 백화점의 오픈 행사. 그때 그녀의 목에 이 목걸이를 걸어줄 생각이었다.

이제 친아버지도 찾았으니, 더 이상 유품은 걸지 않아도 된다. 내가 당신의 진정한 가족이 되고 싶다, 라고 고백하며 말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이제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라…….”

화가 치밀어, 상자를 쥐고 있는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케닌은 이안을 달랜답시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마이옌 공께서 함께 가셨지 않습니까.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네 생각이 중요한가?”

“……시정하겠습니다.”

물론 순식간에 말이 쏙 들어갔지만 말이다.

이안은 뻐근한 눈을 꾹꾹 눌렀다.

‘무슨 상황인지는 알아. 훌륭한 판단이지.’

황제가 왜 저리 변덕을 부리는지도 이안은 이해했다. 그 얄팍함이 밉지도 않았다. 오히려 평생 저렇게 바들바들 떨면서 사는 것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함께 떠난다는 선택지도 있잖아.’

올리비아와 함께라면 수도의 화려함을 평생 뒤로해도 좋았다. 벌이고 있는 사업, 친구들도 모두 사라져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왜.’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가서 이안은 조금 더 괴로웠다. 입장을 바꿔서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말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리고 이런 복잡한 마음들은 결국 밖을 향했다.

‘이게 결국 다 내 선에서 해결하지 못한 탓이다.’

소중한 사람을 가지려면, 소중히 할 수 있는 환경을 미리 만들어야 했는데.

이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케닌은 어깨를 움츠리고 움찔 떨었다. 그런 그의 앞을 휙 지나가며 이안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 알현을 신청해라.”

“네? 네네.”

이안은 무섭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걸어 나갔다.

* * *

미치고 환장하겠다고 쓰고 올리비아 타이론이라고 읽는다.

‘진짜 미치겠네.’

나는 마차 창밖을 바라보았다. 굳이 찾아보려고 하지 않아도 제임스의 옆얼굴이 보였다. 못 보려야 볼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야.’

눈이 마주칠까 봐 나는 다시 휙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더 이상 얽히기 싫은데.’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제일이라는 걸 알아도 자꾸 창밖에 보이는데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티를 너무 낸 모양이다. 맞은편에 앉아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가 물었다.

“역시 많이 불편한가요?”

“네?”

역시라니, 아버지는 제임스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거야.

“내 딸이 불편하다면 다소 무례하더라도 동행을 거절해야 하나 해서요.”

“…….”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적절한 단어를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남편이니까 아무래도 불편하긴 하죠. 혼인이 무효로 돌아갔으니 전남편이라는 호칭도 적절하지 않지만요. 물론, 얼마 전까지 얼굴도 모르던 사이였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꼬이는 기분이었다. 내가 입술을 꼭 깨물고 있으니, 아버지가 침착하게 물었다.

“혼인무효까지 하게 된 이유는 뭔가요? 얼굴도 몰랐다고 하니 남편 때문은 아니었겠군요.”

“네. 시어머니가 세 분이셨는데 저를 많이 괴롭히셨어요.”

“그래서 그렇군요.”

“뭐가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는 두 손을 마주 깍지끼며 대답했다.

“두 사람의 문제로 헤어진 게 아니니까 계속 미련이 남는 것이죠.”

* * *

아버지의 지적은 나에게 또 새로운 고민을 주었다.

‘미련이 남아?’

파넬 영지를 벗어나서 이제 곧 텔레포트 존이었다. 지금은 국가 간의 텔레포트 존 이동을 위해 신분검사 및 짐을 검사하는 중이었다.

절차가 끝나길 기다리면서 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아직도 제임스에게 미련이 있나?’

나는 아주 잠시 지난 결혼생활을 반추했다. 그리고 곧장 고개를 흔들었다.

‘으으, 절대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아무리 시어머니들이 원인임을 감안해도, 제임스에게는 어떤 방어권도 없었다. 그는 늘 남의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왜 이렇게 찜찜한 걸까.’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고 있으니 저절로 시선은 제임스를 따라갔다.

‘새삼 다시 봐도 덩치 정말 크네.’

사람이 아니라 곰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저 덩치로 내 편 좀 들어주지. 그랬으면 나도 조금은 덜 괴로웠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저 커다란 덩치조차도 고깝게만 보였다. 내가 새초롬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을 때였다. 제임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아니에요.”

나는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돌렸다. 제임스는 물끄러미 나를 돌아보다가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나는 그 까만 머리통을 쏘아보았다.

‘죄송하다고 납작 엎드려도 모자랄 판에 탄신제에서도, 수여식에서도 나를 곤란하게만 하고.’

그가 저지른 일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피가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빨리 다른 여자랑 결혼해버리지.’

이 상황이 되니, 제임스가 알콩달콩 사는 모습을 봐야 속이 편안할 것 같았다.

‘맞아. 이게 다 저 사람이 구겨진 셔츠나 입고 알짱거리니까 미련인지 뭔지 남는 거 아니겠어? 수도에 가면 괜찮은 영애를 찾아봐야겠어.’

기왕이면 진상들이 무시 못 할, 괜찮은 집안의 아가씨로 말이다.

내가 굳은 다짐을 했을 때였다. 아버지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이제 준비가 되었습니다.”

“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아버지의 곁에 섰다.

엄격한 사람들이 지키는 관문을 지나 열린 문으로 들어서니 하늘을 향해 높이 뻗은 에메랄드 빛깔의 투명한 빛의 기둥이 보였다.

‘저게 텔레포트 존.’

마법과는 전혀 거리가 먼 나로서는 텔레포트 존이라는 거대한 마도시대의 유물이 신기하기만 했다.

‘도대체 무슨 원리로 움직이는 걸까.’

설명을 들어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궁금했다.

빛의 기둥 앞에서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까만 후드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이미 좌표를 작성하였으니 기둥 안에 들어가셔서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때때로 마력에 예민한 체질이신 분들께서는 헛구역질을 하거나 어지러움을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저것을 이용하기 위해서 내가 할 일은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등 뒤를 따라 기둥 안으로 들어섰다. 보이는 것처럼 빛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들어갈 때도 아무 느낌이 나지 않았다.

“그럼 마법 발동합니다.”

조금 빛이 진해졌다고 느꼈을 때였다.

두근!

심장이 크게 펑 하고 뛰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그저 시작이었다.

“으아!”

“올리비아!!”

내가 비명을 지르자, 아버지가 나의 어깨를 붙들었다. 하지만 그 소리조차도 순식간에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나는 두 손으로 내 몸을 끌어안았다.

‘아파! 아파!!’

심장이 엉망으로 뛰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카락이 한 가닥 한 가닥 곤두서고, 발가락 끝부터 손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꼭 몸이 흩어지는 것 같아!!’

생전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아픔이었다. 주머니에 포도를 넣고 쥐어짜면 이런 아픔일까. 나는 울리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이질적인 소리가 귓가를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정말 귀찮은 인간이군.

‘어?’

아주 투박하고, 굵고, 거친.

누가 들어도 인간의 것이 아닌 음성.

그것은 누군가를 향해 감정 고저 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대가는 그대의 수명, 감당할 수 있겠는가?

‘시간을 되돌려?’

텔레포트 존은 공간을 이동하는 마법이지, 시간과는 상관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음성에 내가 눈을 깜빡였을 때였다.

이번에 들려온 목소리는,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내 아내가 없는데 그깟 수명이 무슨 소용이 있지?

‘아!’

너무나 귀에 익어서, 굳이 누구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목소리.

그건 바로.

“……인!”

눈부신 빛이 내 눈을 찔렀다. 일순간 환해지는 시야에 나는 멍청히 눈만 깜빡였다. 모든 것이 잔상처럼 일렁였다.

“아?”

빙글빙글 도는 빛무리들이 신비로웠다. 동시에 따뜻하고 포근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잠들고 싶을 정도로.

‘이게 뭘까.’

내가 가물가물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두꺼운 손가락이 억세게 나의 팔을 붙들었다. 굵고 묵직한 목소리가 나의 귀를 울렸다.

“……부인!!”

어떻게 이 목소리를 잊을 수 있을까.

나는 찬물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반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멍청하게 나를 붙든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제임스?”

“부인…….”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내가 반사적으로 ‘부인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죠!’라고 소리치려 할 때였다.

결국, 뾰족한 소리는 튀어나오지 못했다.

“다행이군, 다행이야, 여보…….”

“제임스.”

그가 와락 두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잘게 떨리는 팔이 너무나 생경해서 나는 그를 밀어내는 것도 잊었다. 그의 얼굴이 내 어깨에 비벼졌다. 그리고 곧 뜨겁게 어깨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가 울고 있었다.

“제임스…….”

그는 왜 나를 붙들고 우는 걸까.

도대체 지금 내게 일어난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목소리는 무슨 뜻이지?’

물은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나를 부서져라, 꽉 끌어안고 있는 그의 팔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 * *

타이론 대공의 알현 신청은 순식간에 수락되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스타티스를 만날 수 없었다. 그가 입궁하기 무섭게 그를 찾아 나선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

이 넓은 황궁에서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두 명뿐이다. 이안은 굳어진 얼굴로 뒤를 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풍성한 풍채를 자랑하며 황제가 그를 향해 달려왔다.

“소식은 들었다. 마음고생 했겠구나!”

“폐하.”

황제는 살갑게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문질렀다. 이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를 대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기에.

황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다정한 말들을 쏟아냈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말렴. 제수씨가 잠시 마음이 산란해서 그런 것 아니겠니. 하지만 널 정말 사랑하니 곧 돌아올 거란다.”

그 사람은 당신 때문에 나간 거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이안은 오늘 입궁한 본론을 꺼내 들었다.

“……대회의에서 있었던 일은 들었습니다.”

“대회의? 아, 북방의 일을 말하니?”

이안의 말에 황제가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이미 그가 타이론이 떠나도록 권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안이었으나, 그는 모른 척했다.

“네. 알키저스 영식이 가기로 했다면서요?”

“아, 그건…….”

황제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이 무슨 의도로 대회의를 꺼내 들었는가 고민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이안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서 말하긴 어렵지만, 그 또한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여론이 그러하니 알키저스 영식이 일시적으로 출정은 할 테지만 곧 돌아올 것이거든.”

로메오가 올리비아의 절친한 친구라서 묻는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이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신 내보낼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무척 뜻밖이었다.

“화이트폴 후작이 기꺼이 나가겠다고 하더구나.”

“예?”

이안과 릴리아나 사이의 불쾌한 사건으로, 화이트폴은 황제에게 사죄를 하고 정계에서 모든 손을 뗀 참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첫 번째 정치적 행보로 북방행을 택하겠다는 뜻이었다.

황제는 무척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딸아이를 폴카의 왕비 후보로 보내는 대신 북방으로 출정하기로 했단다. 참으로 충성스러운 사람 아니냐.”

“화이트폴 영애가 그것을 바라던가요?”

“음, 그것이.”

황제는 대답을 선뜻 내뱉지 못했다. 릴리아나가 직접 찾아와서 말한 것이 있으니 말이다.

“저는 이안을 사랑해요.”

그런 황제를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은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택 사용인들은 릴리아나 때문에 올리비아가 여행을 떠났다고 믿고 있었어.’

사정을 모든 사람에게 말할 수 없으니, 올리비아는 애니와 케닌에게만 말을 하고 떠났다. 하지만 저택 사람들은 세간에서 떠들 듯 소문을 원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릴리아나를 지목했다.

릴리아나가 저택에 찾아와서 또 한바탕한 것이 이유였다.

‘그 한바탕에 이 사람이 정말 관여되어 있지 않을까?’

이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사이 황제는 어물어물 이유를 늘어놓았다.

“귀족의 결혼에 영애의 마음이 사실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잖니. 폴카의 왕비라면 과하게 좋은 자리이기도 하고.”

“영애가 거절할 리 없지요.”

“내 생각도 그렇단다.”

이안은 에헴거리는 황제에게 공손한 어조로 운을 떼었다.

“하지만 국혼인 만큼 일찍 처리될 리는 만무. 화이트폴 후작의 출정은 적어도 1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하옵니다만.”

“그렇지! 내 생각도 그래!”

걸려들었다. 이안은 덤덤한 얼굴로 자신이 원하는 결론으로 상대를 끌어들였다.

“그렇다면 폐하, 알키저스 영식과 황태자 전하의 국혼을 더 앞당겨야 하는 것 아닙니까?”

스타티스의 국혼은 동시에 스타티스 황제의 즉위식이기도 했다.

‘이제는 더 참지 않을 거야. 높은 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날 뜻대로 휘두르겠다면 내려 보내드리지.’

그렇게 결심한 이안의 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 * *

오르세 왕국 쪽의 텔레포트 존은 한순간 난리가 벌어졌다.

내가 텔레포트 마법에 휘말린 뒤 경기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어찌 사태가 해결되자 마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하.”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아버지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내 딸이 그렇게 마력에 예민한 체질이라니…….”

“저도 몰랐어요.”

평생을 수도에서만 지낸 내가 마법에 노출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아니, 마력에 거부감을 가져봐야 어지럼증이나 헛구역질 정도라더니.’

그 정도로 말하기에는 지독한 아픔이었다. 몸 전체를 산산조각내는 것 같은 아픔.

갑자기 혼절한 나를 살펴야 했던 마법사는 아직도 창백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돌아갈 때는 오래 걸린다고 해도 텔레포트 존을 이용하기 어렵겠습니다.”

“네.”

나도 그런 고통을 다시 한번 겪는 것은 사양이었다.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내 눈치를 살피는 아버지에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솔직히 지금도 기운이 없었지만, 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한 억지웃음이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을 안심시키고 나니, 내 시야에 제임스가 밟혔다.

그는 언제 그렇게 나를 끌어안았냐는 듯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히 울었지?’

“다행이군, 다행이야, 여보…….”

두려운 듯 바들바들 떨리던 통나무같이 두꺼운 팔과 내 어깨를 적시던 뜨거운 눈물.

솔직히 지금뿐만 아니라 지난 생에서도 그는 내가 사라져도 전혀 슬퍼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그의 모습이 무척 의외였다.

‘왜 그렇게까지 나를?’

당신은 타인에게 별로 관심이 없잖아. 일찍 남편을 잃어버린 시어머니들의 이야기에나 그나마 귀를 귀울였을 뿐.

‘사실은 내게도 관심이 있었어? 내가 사라지면 울 거야?’

그럼 지난 생의, 갑자기 마흔 살이 되어 사라진 나를 위해 조금은 울었을까?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더 잠겨 있을 수도 없었다. 아직 우리의 여행은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몸을 추스르고 마차에 오르니, 아버지가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설명해주었다.

“여기에서부터 오르세 왕국입니다. 오르세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지루한 마차 여행이었다. 거의 하루 내내 달린 덕분에, 우리는 국경에서 가까운 도시들 중 가장 큰 리옹에 도착했다.

“와.”

어둠이 몰려오는 어스름한 시간이었지만, 도시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남녀노소 흰 셔츠에 빨간 치마나 바지를 입은 모습이 발랄해 보였다. 나는 입을 벌리고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문화가 조금 다르네요.”

“수도로 가면 더 느껴질 거예요.”

아버지의 설명에 따르면 국경에서 가까운 지역이라 다른 나라의 문화가 섞여 있다고 한다.

“마침 축제 중인 것 같군요. 있다가 구경을 나올까요?”

“좋아요.”

반짝거리는 거리가 신기하다 했더니, 축제 기간이라 특별히 많은 마력등을 켠 것이라고.

잘 정돈된 대로를 지나니 리옹의 가장 중심지에 위치한 성, 루미에르가 등장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리옹 영주가 친히 나와 손을 내밀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오르세어였다. 나는 미리 알고 있는 오르세 예법으로 인사를 올리며 대답했다.

“저도 영광이에요. 마이옌 공의 딸, 올리비아입니다.”

“……오르세 말을 하실 줄 아시는군요!”

내 대답에 리옹 영주는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언젠가 아버지를 찾아올 생각이었기 때문에.”

“올리비아.”

“감동적인 이야기군요.”

아버지는 내가 당신을 찾으려고 오르세어까지 공부했다는 말에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오르세 말을 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인지, 리옹 영주는 무척 살갑게 우리를 대접했다. 나는 오랜만에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까 길에서 본 흰 셔츠에 붉은 치마를 차려입으니 방문이 똑똑 울렸다.

“지금 나갈까요?”

문을 여니 나와 비슷한 복장을 한 아버지가 웃고 있었다. 내가 거리 구경을 하고 싶다는 말을 잊지 않은 것이다. 나는 기쁜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의 팔에 매달렸다.

“좋아요!”

우리 두 사람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여전히 검은 옷 일색인 제임스가 그런 우리의 뒤에 따라붙었다.

“제가 호위를 서겠습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제임스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위처럼 서 있었다. 딱 이 사람이 고집을 부릴 때의 표정이었다.

‘호위는 필요 없다고 말해도 들어먹질 않겠구먼.’

오랜만에 보는 벽돌(?) 모습에 내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아, 마이옌 공!”

길을 떠나려는데 리옹 영주가 달려 나왔다. 그리고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시간 좀 있으신지요? 리옹에 생제르망 상회의 투자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내일이면 떠나실 것 같아서.”

“아, 하지만…….”

아버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리옹 영주는 지금 우리가 무슨 관계인지도 모르고 허허로이 웃었다.

“제 영지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리옹이 치안이 무척 좋답니다. 축제 기간이라고 해도 호위 한 사람만 있으면 안전하니 걱정하지 마시고, 저와 회의를 하시죠!”

“그, 그건.”

“어서 이쪽으로요!”

아니, 우리 둘이 붙어 다니게 놔두지 말아요!

그렇게 외치고 싶었으나, 아버지를 채어가는 리옹 영주의 행동이 날쌨다. 저 멀리 멀어지는 아버지를 향해 나는 허망하게 손을 뻗었다.

“아.”

아버지 대신 이 남자라니.

나는 질린 표정으로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제임스는 표정 변화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가실까요?”

“…….”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제임스와 함께 반짝이는 거리를 걸으며 나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네.’

나는 입술을 퉁퉁 내밀고 내 옆을 따라 걷는 제임스를 흘긋 바라보았다. 앞을 곧게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딱딱하기만 했다.

내 눈에만 무서워 보이는 것이 아닌지, 우리 앞길은 저절로 열렸다. 사람들이 제임스를 보며 피하는 탓이었다.

‘이런 점은 좀 편할지도? 어차피 타국이니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테고.’

제임스가 무서워서라도 나한테 사기 치려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저벅저벅 걷고 있으니 저절로 아까 텔레포트 존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나의 말에 제임스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은 미워해도, 선행까지 나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법. 고마운 일은 고마운 일이었다.

“마력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순간 당신 목소리가 들렸어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돌아오지 못했을 거예요.”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끝나고 빛무리가 나를 감싼 순간, 차라리 정신을 놓고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현실로 끌어당긴 것은 다름 아닌 제임스의 목소리였다.

“……부인!”

‘화가 치밀어서 정신이 번쩍 든 것일지도.’

그리 생각하며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자 내 곁을 걷던 제임스가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만에요.”

나는 다시 제임스를 쳐다보았다. 장소가 오르세의 소도시라서 그런 걸까. 내 마음의 응어리진 부분도 어딘가 풀어진 모양이다.

“말도 그냥 놓아요. 당신의 존댓말을 듣고 있으니 소름이 돋네요.”

“…….”

내 말에 제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인파를 따라 조금 걷다 보니 본격적으로 벌어진 노점상들과 광장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그리고 거리의 악사들이 보였다.

춤에 별로 흥미도 없고, 제임스도 관심이 없을 것이 분명했기에 곧장 노점상으로 향했다.

‘확실히 다른 나라구나.’

노점상에서 판매하는 것들은 말린 과일, 자잘한 수공예품, 예쁘장한 액세서리 등이었는데 모두 눈에 익지 않았다.

신기하게 둘러보던 내 시선을 반짝이는 붉은 무늬가 빙글빙글 도는 기다란 막대가 사로잡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며 노점상 주인인 할머니에게 물었다.

“이게 뭐지요?”

“유리 비녀랍니다, 예쁜 아가씨.”

“유리 비녀.”

대답을 들었는데도 무엇인지 확 와닿지를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할머니가 내게 손짓을 했다.

“이렇게 착용하는 거예요. 이렇게 머리채를 휘감아서.”

“아아.”

할머니가 머리를 돌돌 말아서 끼우니 마법처럼 머리가 막대기 하나로 고정이 되었다.

“와, 신기하네요.”

내가 거울을 보며 눈을 깜빡이자, 할머니는 입술을 오므리며 홀홀 웃었다.

“듬직한 애인에게 사달라고 해요.”

듬직한 애인?

할머니의 시선을 따라가니 팔짱을 끼고 무뚝뚝하게 서 있는 제임스였다.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애인 같은 거 아니에요.”

“밀고 당기기 중인가요?”

“아니, 그런 말도 아세요?”

“젊은 애들은 자기들만 불꽃 같은 사랑을 하는 줄 안다니까. 이 할머니도 다 해봤어요, 홀홀.”

“하여간 전혀 아니에요.”

제임스가 오르세 말을 할 줄 몰아서 다행이었다.

딱 잘라 대답한 뒤, 나는 가판 위에 놓인 다른 물건들도 세세하게 쳐다보았다.

‘이런 건 우리 백화점에서도 잘 팔릴 것 같아.’

반짝거리는 무늬가 신비롭고 또 영롱했다.

‘비녀는 익숙하지 않지만, 머리핀이나 브로치로 바꾼다면…….’

하지만 재질이 유리이니 착용하다가 깨지면 위험할 텐데. 그랬다가는 클레임이 들어오고, 백화점 자체의 신용도가 하락하기 때문에 신중, 또 신중해야 했다.

그렇게 몇 가지를 할머니에게서 구입한 뒤, 나는 비슷한 좌판을 몇 군데 더 살펴보았다.

보닛과 비슷하지만, 훨씬 얇은 귀도리라는 뜨개물을 들고 막 돌아섰을 때였다. 제임스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장신구에 관심이 많은가?”

말 놓으라고 했더니 귀신같이 놓는다. 자신도 좀 어색하긴 했던 모양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평균이라고 생각하는데.”

“유심히 보기에.”

“아, 그건 제국에 가서 팔아볼까 하고요.”

“팔아?”

내 대답에 그는 아주 생소한 대답을 듣는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귀도리를 들고 있던 종이봉투 안에 넣으며 대답했다.

“요즘 새로 사업을 시작했거든요.”

사업도 보통 사업이 아니다. 수도 한복판에 올라가고 있는 건물이 바로 내 것이니까.

‘오늘 정도 오픈했을 텐데.’

준비는 다 끝내고 나온 것이지만, 걱정이 되었다. 케닌이 잘 정리했을까? 호응은 어땠을까?

‘직접 참석하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네.’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나는 내 마음을 다독였다.

괜찮다. 내가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서 살피면 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안이 어련히 잘했으려고.’

이안은 사업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백화점 안에 마담 바네사를 비롯한 고가의 사치품으로 프리미엄관을 만들자는 의견도 그의 입에서 나왔다.

‘빨리 귀국하고 싶어.’

그를 떠올리니 마음이 두근두근거렸다. 이제 막 오르세 왕국에 발을 디뎠는데도,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수도에 도착하면 이안에게 편지를 보내야지.’

어떤 말을 적어 보낼까. 머릿속으로 문장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좀 허전하다 했더니, 내 곁을 졸졸 따라오던 제임스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내 등 뒤에 멈춰 서 있었다.

‘뭐야?’

왜 저러고 있단 말인가. 내가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제임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당신을 잘 몰랐던 것 같아.”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하려나 기다렸더니, 흘러나온 말이 고작 저거였다.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알 만한 시간도 없지 않았나요?”

“그건…….”

그는 또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익숙한 걸음 소리가 등 뒤를 울렸다. 나도 모르게 나를 따라오는 발소리에 안심한 뒤, 그런 감정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언제부터 저 사람이 내 뒤를 따라왔다고.’

저 사람의 등을 좇던 사람은 나였다. 내가 집안을 훌륭하게 건사하고, 사업을 번창시켜도 한 번 돌아보지도 않는 야속한 남자의 등을, 10년이나 좇았다.

‘인제 와서 저렇게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다니 우스운 일이지.’

오래 걸은 탓인지 배가 출출했다. 마침 근처의 노점상에서 얇게 구운 반죽에 연유와 초콜릿을 발라서 돌돌 만 크레이프를 팔고 있었다.

나는 두 개를 사서 하나는 제임스에게 내밀었다.

“이거 받아요. 맛있을 거 같아요.”

제임스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한 입 베어 물은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달군.”

“그러게요.”

아닌 게 아니라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았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당신은 단것을 좋아하잖아.’

곰처럼 생겨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만 좋아한다고 생각했지. 뭘 먹어도 ‘그냥 그렇다. 괜찮다. 가리지 않는다.’라고 대답해서 식성을 파악하는데도 힘들었다.

‘아.’

거기까지 과거를 떠올리던 나는 왜 내가 그를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지를 깨달았다.

‘계속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야.’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기적을 통해서, 나는 내가 모르는 제임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각이 내가 이미 흘려보낸 시간과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나는 계속 과거와 비교를 하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 내가 이렇게 행동했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변했다면 그건 이안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제임스와의 과거를 바꿀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나는 현재를 사는 것 같았지만 과거를 살고 있었어.’

입맛이 썼다. 뜻하지 않은 깨달음에 내가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언제 다 먹은 건지, 빈 포장지를 와락 구기며 제임스가 물었다.

“아버지가 오르세 사람이라는 걸 원래 알고 있었나?”

계속 마이옌 공에 대해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수여식 때 마이옌 공의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짓던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이모 얘기를 듣고 추측했을 뿐이에요. 실제로 만날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어요.”

“오르세어를 공부하면서?”

그 질문은 퍽 나를 우습게 했다. 나는 신랄한 어조로 되물었다.

“공부하면 뭐 하나요? 오르세를 방문할 기회도 없었던 것을.”

“…….”

아카데미를 졸업할 무렵, 정확히는 졸업장만 받으면 되는 시기에 나는 납치라도 당한 것처럼 서둘러 파넬 공작과 혼인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정말 내 의지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황제의 여상스러운 말과 플로렌스 집안의 빚이 오갔을 뿐.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오르세로 올 수 있었겠는가. 그것도 정확하지 않은 친부를 찾으러.

하지만 나는 지금 아버지를 찾았고, 오르세 왕국에서 한가로이 크레이프를 먹고 있었다. 그 사실 만으로도 가슴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정말 미래가 바뀌었구나.’

그런 마음을 담아, 내가 중얼거렸을 때였다.

“그런데 오르세에 오다니, 정말 꿈 같아요.”

-한심한 인생이군.

거칠고 무거운 목소리가 나의 감탄에 대꾸했다. 나는 눈을 치켜뜨고 제임스를 돌아보았다.

“뭐라고요?”

“뭐?”

그런데 제임스도 나를 마주 보고 고개를 기울이는 것 아닌가. 나는 미간에 힘을 주어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방금 제게 뭐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전혀 아니다.”

“?”

분명히 내 귀에 들렸는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영문을 모르겠네.’

내가 의심을 풀지 않고 수상쩍은 눈으로 제임스를 이리저리 살펴보았을 때였다.

예의 그 목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내 목소리가 들리나, 인간.

“!!”

이번에는 확실했다. 제임스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도대체 어디서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여기다. 하여간 무심해서.

‘여기?’

나는 제임스의 망토를 들쳤다. 제임스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무, 무슨 짓인가?”

“조용히 좀 해봐요.”

분명히 소리가 좀 더 아래쪽에서 들렸는데, 그러니까.

-여기, 여기라고.

“!!”

목소리를 따라 제임스의 몸을 더듬거리던 나는 얼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세상에.”

제임스가 차고 있는 검이 말을 하고 있었다.

* * *

검이 말을 하다니,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하하, 진짜. 시간을 거슬러오지 않았다면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을 거야.’

우리는 일단 축제 광장을 벗어나, 인적이 드문 공원으로 갔다. 그리고 검과 삼자대면을 시도했다.

검은 생긴 것과 달리 수다쟁이인지, 나의 생각 하나하나에 대답을 해주었다.

-넌 미치지 않았다, 인간.

‘대답 고오맙다!’

-천만의 말씀!

진짜 고맙다는 뜻이 아니거든!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내 눈앞에 있는 검을 노려보았다. 어두운 밤에서도 황금빛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아름다운 검.

바로 황제가 하사한 넘버즈, ‘투머로우’였다.

제임스는 검과 눈싸움을 벌이는 나를 대단히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이 검이 말을 한다는 건가? 정말로?”

“…….”

내가 들어도 미친 소리 같기는 했다.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네. 심지어 대단히 수다쟁이네요.”

“그래?”

나는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제임스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로 이 검이 떠드는 게 안 들려요?”

“무슨 소리지?”

제임스는 팔짱을 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지난번에 이 검하고 이야기하고 있었잖아요. 파넬 정원에서.”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밤에, 달빛을 온몸에 맞으며 검을 노려보고 있던 그의 모습을.

그때는 그냥 이상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이 떠드는 모습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대화를 하고 있었구나, 하고.

하지만 나의 질문에 제임스는 눈썹만 꿈틀거릴 뿐이었다.

“대화를 한 게 아니다.”

대화를 한 게 아니면 도대체 뭘 한 건데? 나는 눈을 찌푸렸다.

“그럼 눈싸움?”

“…….”

제임스의 표정에서 이렇게 선명하게 감정이 전해진 적이 있을까. 명백하게 나를 한심스러워하는 표정에, 나는 마음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전혀 아니야. 지껄일 줄 알았으면 부숴버렸을걸?”

“흐음.”

나는 턱을 괴고 다시 투머로우를 바라보았다. 검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내 착각인가.

-저, 저 인간이 날 부술까 봐 말을 안 하는 게 절대 아니다. 저 인간은 벽돌처럼 둔해서 내가 말해도 알아듣질 못한다고.

그건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도 뭐라고 말하나?”

“당신이 벽돌처럼 둔하다고 하네요.”

“…….”

제임스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제임스가 벽돌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보니, 확실히 그의 검이었다. 나는 턱을 문질렀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네 말을 듣는 거지?”

모른다고 버럭거릴 줄 알았던 투머로우는 뜻밖에 대답을 내놓았다.

-대규모 마법을 두 번이나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력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고.

“대규모 마법?”

-그래. 더 이상은 계약에 따라 말을 할 수가 없다.

요놈 좀 보게?

‘제임스는 무서워하면서 나한테는 무게 잡네.’

“제임스.”

내 부름에 제임스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당신 검, 열 번만 패대기쳐도 되나요?”

말을 안 들으면 맞아야지. 상대가 인간도 아니니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투머로우는 무척 물리적 충격에 약한 검이었다.

제임스는 내 부탁대로 투머로우를 바닥에 열 번 내리쳐주었다. 투머로우는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너무한다. 너무해. 너 같은 인간은 처음이야.

투머로우는 나를 천하의 나쁘고 무식한 인간으로 매도했다. 나는 나대로 어이가 없어서 입술을 삐죽였다.

“흠집도 안 났구먼, 무슨 말이야.”

제임스가 있는 힘껏 바위에 내려쳤지만, 과연 명검. 그렇게 해도 유리처럼 매끄럽고 투명한 날에는 어떤 흠집도 나지 않았다.

-흑흑. 야만인, 인간도 아니다.

다소 시끄러워진 것만 빼면 말이다.

‘새파랗게 빛나는 것이 멀쩡하기만 한데.’

내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검은 삐져서 툴툴거렸다.

-기분상의 문제다.

아, 예. 표정도 하나도 보이지 않는 물건인데 기분이 전해지는 것이 신기했다.

‘거참 예민하고 까다로운 검이네. 말도 많고 말이야. 그동안 말할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답답했을꼬.’

나는 검과 눈을 맞추고 - 어디까지나 눈이 있을 때 이야기지만 - 물었다.

“넌 언제부터 말을 하게 된 거니?”

-시간의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크로노스의 시간, 또 다른…….

역시 수다쟁이. 내가 묻기 무섭게 근엄한 척 주절거린다. 나는 손가락으로 검신을 톡 때렸다.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거든?”

내 시큰둥한 질문에 검은 화가 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에게는 시간이 의미가 없다. 흐르지 않으니까.

“더 쉽게 말해봐.”

-모른다.

‘더 때려주고 싶네.’

근엄한 목소리로 이렇게 얄밉게 이야기하는 것도 재주였다.

이대로라면 이야기는 조금도 진척되지 않고 검만 두들기고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욱하는 마음을 누르고 다른 것을 물었다.

“나에게 광역마법 두 개가 걸려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야?”

-그건 계약위반이라 말할 수가 없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나는 결연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아직 매를 덜 맞았구나.”

내가 재차 자신을 패대기칠까 두려웠는지, 투머로우는 빠른 어조로 소리쳤다.

-저, 정말이다! 내가 무생물이라고 해서 세상의 법칙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오랜 세월 존재하기에 얽매이는 법칙이 많다고.

“흠.”

그럴듯한 말이었다. 나는 일단 내게 걸린 마법이 뭔지 검이 대답할 수 없는 게 사실이라고 가정했다.

그렇다면 이 변화는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그럼 나는 이제 계속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야?”

-텔레포트 마법으로 인한 간섭현상으로 잠시 일어난 오류인 것 같다. 체내 마력이 안정된다면 다시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구나.”

계속 지속되는 상황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다면 조용한 편이 나으니까.’

마법에 관한 건 따로 마법사를 만나서 물어보는 게 낫겠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눈을 드니 제임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살다 살다 검이 말을 하는 것도 듣게 되네요. 오래 살고 볼 일이에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한 말이었는데, 제임스는 뜻밖의 반문을 했다.

“오래 사는 게 좋은가?”

“좋은 거 아닐까요? 덕분에 아버지도 만나게 되었잖아요. 이렇게 오르세 왕국에도 와 있고.”

만약 지난 생으로 숨이 끊어졌다면 영영 이루지 못했을 일들이었다.

‘시간이 돌아와서 다행이야.’

돌아온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은 것 같아 뿌듯했다.

제임스는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얼굴보다 훨씬 앳된 청년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무렵의 제임스를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제임스가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것은 내 나이 서른 때.

시간이 돌아와 생긴 기적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남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금 본 적 없는 그의 젊은 시절을 마주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분명 확실히 보복하려 하시겠지. 북방행을 거절했으니.’

하지만 그의 인생 전반으로 두고 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무리 황제의 눈 밖에 나더라도, 인생에 한 번뿐인 젊은 날을 전쟁터에서 보내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여러모로 지난 생과는 다른 인생을 살게 되겠지. 새콤달콤한 연애도 하고, 차여보기도 하고.’

평범한 20대 청년이 보낼 법한 나날을 제임스에게 대입해 보았지만, 도통 떠오르질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것일 뿐, 제임스의 인생은 지금도 지난 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살다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요. 일단 당신은 나보다 아주아주 오래 살 테고.”

그런 마음을 담아, 나는 조곤조곤 몇 마디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내밀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에게도 허투루 흘리는 시간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뿐.

“사랑하는 여자도 만나게 될 테죠. 가정도 꾸리게 될 거고요. 그렇게 살다 보면 오래 살아서 좋다고 생각하는 날도 올 거예요.”

나처럼.

눈치껏 마지막 말은 입안으로 삼켰다. 이렇게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안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더 커졌다.

‘잘 지내고 있을까? 이제는 수도로 돌아왔겠지?’

내 안의 이안은 온실 속에서 화려하게 자란 장미 같은 남자라, 어디 다친 곳은 없나 걱정이 되었다.

‘공국에는 쇼핑할 곳도 없었을 텐데. 심심해서 죽겠다고 투덜거리고 있었을 거야.’

그 사람이 내게 주고, 또 내가 그에게 주었던 많은 시간들이 떠올랐다. 아련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그리고 있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런 것이 그리움이구나.’

지난 생에는 그저 앞으로 달음질치느라 깨닫지도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리고 내가 참을 수 없이 그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런 결심이 들었다.

‘다시 돌아가야겠어. 이안을 만나러.’

아버지도 만났고, 꿈에 그리던 오르세 땅도 밟았지만, 그 기쁨보다 이안이 내 곁에 없다는 상실감이 더 컸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른 아버지와 상의를 해서 돌아갈 일정을 조율해야…….’

나는 원래 추진력이 좋은 성격이라, 한번 마음을 먹으니 해야 할 일들이 우르르 떠올랐다. 바쁜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어 걸음 걸었을 때였다.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사랑하는 여자라.”

제임스가 묘한 어조로 나의 말을 잘라먹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이, 나를 음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그대라면 뭐라고 대답할 건가?”

“네?”

이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는 와락 눈살을 찌푸려 귀라도 후벼파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잘못 들은 것이 아닌 모양이다.

저벅, 저벅.

나를 향해 걸어오는 그의 발소리가 무겁기만 했다. 커다란 손가락이 내 뺨에 닿지 못하고 간질간질하게 스쳤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당신이라면.”

그의 회청색 눈동자는 밀려온 어둠 때문인지 검은색에 물든 것처럼 보였다. 나는 눈도 깜빡하지 못하고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제임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럼 다시 내 아내가 되어줄 텐가?”

“제임스.”

이런 순간에조차 아무 표정을 짓지 않는 그가 참 독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당신의 부인이 된 것이 황제 폐하의 즉흥적인 결정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황제 폐하께서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더군요.”

회귀한 뒤, 줄곧 궁금했던 것.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나를 알고 있었어요, 당신?”

“…….”

제임스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마주 보고 선 우리 두 사람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한차례 지나갔다.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일까.’

황제에게서 저 말을 들은 뒤로 나는 계속 혼란스러웠다.

‘내가 지난 생에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이번 생이 달라진 것인가.’

만약 이번 생이 달라진 것이라면.

마음은 떨렸으나, 겉은 평온했다. 나는 목에 힘을 주고 꼿꼿한 자세로 그를 응시했다. 내 혼란스러움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나를 꼼꼼히 뜯어보듯 바라보고 있던 제임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아카데미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어. 당신이 먼저 내게 신입생 입학식장이 어디냐고 물었지.”

“네?”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카데미?’

내가 입학할 때, 그는 졸업 학년으로 실전투입에 앞선 훈련 중이었다.

‘그런데 만난 적이 있다고? 심지어 내가 먼저 말을 걸었어?’

하고 많은 사람을 놔두고 이렇게 곰처럼 커다란 남자에게 길을 물었단 말인가?

‘……기억나지 않아.’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제임스는 아주 오래된 것을 보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멍한 눈빛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나는 첫눈에 당신에게 반했어.”

당신이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저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말들이 내게 낯설기만 했다.

“저는…….”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막상 대답을 하려니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뭐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좋아해 줘서 고맙다고? 나는 그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몰랐다고?’

떠오르는 말 하나하나가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시어머니들에게 그렇게 당하고 있는 걸 지켜보기만 했어?’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으면 마음이 따뜻해져야 정상일 텐데. 뾰족한 생각들이 아프게 내 마음을 찔렀다.

‘입은 뒀다 뭐해? 그때부터 좋아했다, 그 말을 20년 동안 안 하고 이제야 한다고…….’

제임스의 말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내 마음은 우울하게 가라앉기만 했다.

그것이 그와 내가 보낸 시간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제임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제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말하면 무엇인가 달라지나?”

나는 굳어진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허탈한 표정이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야. 그렇지?”

“그건…….”

그에게 따뜻한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힌 듯 나오지 않았다.

제임스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아.”

그의 커다란 손가락이 내 눈가를 스쳤다. 그의 체온은 미지근했고, 손끝은 딱딱한 데다가 갈라져 있어서 스치는 것이 아팠다.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마.”

그제야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임스와 올리비아의 외출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나갈 때보다 더 어색하게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마이옌 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피곤하다며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제임스도 자신이 배정받은 손님방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기 무섭게 투머로우가 웅웅대었다.

-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지?

수다쟁이라고 툴툴거렸던 올리비아의 말이 떠올라서, 제임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 말도 하는 여자였나.’

제 기억 속의 올리비아는 마냥 차분하고 근엄한 공작부인이었기에,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올리비아가 낯설기만 했다.

‘지금이 훨씬 편안해 보여.’

참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미웠다. 계속 다시 돌아오라고 말해도 타이론 대공이 좋다고 대답하는 그녀가 야속했다.

‘그렇게 포기가 되질 않았는데…….’

그녀의 편안한 모습을 보니, 그 미련한 집착이 우습도록 쉽게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이제야 마음이 가라앉았어.’

이번 여행은 이별 여행이었다. 이 여행을 마지막으로 제임스는 올리비아와 완전히 멀어진 인생을 살리라 다짐했다. 그게 그녀를 위한 일이었다.

조용히 자신의 다짐만 되새기고 있는 제임스가 답답해서, 투머로우는 재차 윙윙거렸다.

-왜 말을 안 하냐고 물었지 않나!

“무얼?”

제임스는 무뚝뚝한 어조로 되물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에 무생물인 투머로우의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투머로우는 시끄럽게 투덜거렸다.

-왜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말하나? 게다가 왜 계약 내용도 말하지 못하게 해? 엄밀히 말하면 그녀 자신도 알 자격이 있지 않은가.

투머로우의 투정에 제임스는 그냥 고개만 휙 돌렸다. 무심한 목소리는 이제 바람처럼 가볍게만 들렸다.

“말하면 무슨 의미가 있나.”

-의미가 왜 없지?

상대방이 저리 무심하니 말하는 쪽이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투머로우는 뾰족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네가 뭘 희생했는지 모르지 않나.

희생.

오랜 세월을 보낸 특별한 검은 세상 모든 사람이 검의 마법을 발동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마법의 대가가 절대로 가볍지 않다는 것도.

‘대부분의 인간들은 대가를 알게 되면 포기했으니까.’

하지만 제임스는 그 모든 것을 굳이 그 여자에게 알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모두 그 여자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도 말이다.

억울하지도 않은지, 제임스는 시큰둥한 태도로 투머로우의 검신만 톡 건드렸다.

“입을 조심해라.”

제임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조금 전 올리비아와 나누었던 대화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일단 당신은 나보다 아주아주 오래 살 테고.”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했던 그 말이, 얼마나 내 속을 찔렀는지 당신은 알까.

‘알지. 아주 잘 알고 있어.’

나는 당신보다 오래 산다. 그건 내가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어쩔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당신보다 일찍 죽고 싶었는걸.’

하지만 그건 늘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 보면 오래 살아서 좋다고 생각하는 날도 올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당신이 없는 세상은 캄캄한 어둠과도 같아서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으니까.

당신은 이미 나를 두 번이나 스쳐 지나갔다.

* * *

올리비아도, 제임스도 쉽사리 눈을 붙이지 못하고 기나긴 밤이 지나갔다.

다음 날, 마이옌 공은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럼 바로 출발할까요?”

“네, 좋아요.”

“알겠습니다.”

마차에 오른 올리비아는 피곤했는지,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마이옌 공은 굳이 그녀를 깨워 무슨 말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여러 가지 사연이 있겠지.’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 중에 두 사람이 만나, 가족이 되는 것이 결혼이다. 그런데도 결혼 무효소송까지 벌이며 헤어졌을 때는 당사자들이 설명하기 어려운 많은 사건이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 저 남자는 우리 딸아이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마이옌 공은 창밖으로 저벅저벅 말을 타고 걷고 있는 제임스를 흘긋 보았다.

‘어느 쪽이든 간에 잘 해결되었으면.’

그렇게 조용히 오전이 지났다. 아직 도시가 나오지 않았지만, 마차는 멈춰 섰다.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마차가 멈추어도 올리비아는 깨질 않았다.

“올리비아?”

몇 번 그녀를 흔들어 깨우려고 했던 마이옌 공은 그냥 한숨을 내쉬며 먼저 마차에서 내려섰다.

마차 앞에 서 있던 제임스가 물었다.

“올리비아는요?”

“잠이 깊게 들어서 일단 두고 내렸습니다. 식사 준비가 다 되면 깨우려고요.”

“그렇군요.”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헤어졌을 당시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올리비아도 잠을 설쳤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만 다물고 있는 제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이옌 공이 말했다.

“잠시만 마차를 지켜주고 계십시오. 저는 준비가 어떻게 되고 있나 보고 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제임스는 팔짱을 끼고 마차에 기대섰다. 바위처럼 보이는 그를 한 번 돌아보고, 마이옌 공은 자신의 비서를 향해 걸어갔다.

제임스는 눈을 감았다. 사실 한숨도 자지 못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고 있으니 눈알이 욱신욱신거렸다.

‘이 몸은 분명 20대일진대.’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다. 시간을 거슬러 온 부작용일지도 모른다.

-원래 그런 거다. 육신은 다시 돌아왔다고 해도 정신에는 피로가 누적되니까.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곁에 매달린 투머로우가 시끄럽게 웅웅거렸다.

제임스는 신경질적으로 생각했다.

‘이번 생에는 이 검을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이 검과 자신 또한 지독한 악연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떼어놓고 떼어놓아도 다시 또 만나게 되는 걸 설명할 수가 없었다.

-매정하긴. 내 덕분에 오늘의 그대가 있는 것 아닌가.

제임스는 시큰둥하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약이 오른 투머로우가 악마처럼 속삭였다.

-이대로 이 여자를 데리고 도망치면 어떤가? 차라리 그게 편할 텐데.

제임스의 시선이 투머로우를 향했다. 드디어 관심을 끌었다는 걸 깨달은 검이 신이 나서 웅웅거렸다.

-이대로 보내기는 억울하잖나.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이대로 외국에서 살면 누가 쫓아오겠나.

너무나 달콤해서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말이었다. 이 말에 솔깃하는 자신이 싫었다.

제임스는 다시 눈을 감으며 매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헛소리 그만해.”

바로 그때였다.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렸다.

“역시 거짓말이었군요.”

제임스는 눈을 크게 떴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잠들어 있어야 하는 올리비아가 눈을 뜨고 그를 창밖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희고 고운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꽉 깨물어진 입술이 피가 날 것만 같았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제임스에게 물었다.

“당신도 시간을 거슬러 온 거예요. 맞죠?”

확신에 찬 붉은 눈동자를 보니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제임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손가락으로 턱을 문지르던 제임스가 결국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했지만, 예전 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군.”

“그래요! 그런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니까 거짓말을 한 거죠?”

“……어떻게 알았지?”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는 뜻이었다.

그의 대답이 들리기 무섭게 올리비아는 막힌 숨을 몰아 내쉬듯 내쉬며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설마설마했는데.’

그 가정이 맞을 줄이야.

맞췄다는 후련함보다 허탈함이 더 컸다. 올리비아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할 때면 이쪽 눈썹을 찌푸리니까요.”

바로 어제 밤.

투머로우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말하는 그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확신했다.

그가 자신에게 감추는 것이 있는 게 확실하다고.

올리비아는 마차 문을 열고 내려섰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제임스에게 물었다.

“말해줘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가 길 텐데.”

“그래도 상관없어요. 그러니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해요, 제임스.”

과거의 일이라고 덮어놓고 지나가기엔, 그녀 자신의 일이었다.

올리비아는 제임스와 똑바로 시선을 맞췄다. 머뭇거리던 제임스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흘러나온 것은 지독하게 오래전 이야기였다.

* * *

제임스 파넬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좋음도 싫음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돼지 여물도 아무 표정 없이 삼킬 수 있는 사람이 그였다.

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웩!”

제임스는 바닥에 엎드려서 정신없이 토사물을 게워냈다. 그의 등 뒤로 조롱이 쏟아졌다.

“어휴, 저런 게 총사령관이라니.”

“도대체 뭘 믿고 싸울 수 있는 거야?”

“중앙에서 이 북부를 신경 쓰는 게 맞아?”

부하가 상관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무척 무례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북부의 사령관으로서 한심한 모습인 것은 맞았으니까.

‘언제가 되어야 익숙해질 수 있는 거지? 익숙해질 수는 있는 건가?’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파견되기 위해서 훈련을 받아왔었다.

하지만 막상 실전은 훈련과 완전히 달랐다. 검이 사람의 뼈를 부수고 살을 베는 감각은 손바닥에 자꾸만 진득하게 들러붙는 것만 같았다.

‘끔찍해.’

얼굴로 튀었던 살점과 피를 떠올리니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제임스는 필사적으로 흘러나오려는 눈물만큼은 참았다.

‘지독해.’

가장 끔찍한 것은 언제까지 그가 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끝나기는 하는 건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이런 풍경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

음울함에 제임스의 시선이 어두워졌을 때였다. 등 뒤에서 한 기사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집에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을지…….”

그 말에 기껏 참았던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나도 돌아가고 싶어.’

제임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살아서 돌아갈 수는 있을까?’

이렇게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니, 우습게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아카데미 도서관이었다.

사락. 사락.

은빛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무심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고 있던 소녀.

올리비아 플로렌스.

‘말이라도 한마디 걸어보는 거였는데.’

그때는 몰랐다.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걸.

‘난 바보야.’

그렇게 비참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그사이 제임스는 많이 변했다.

원래도 과묵했지만, 이제는 하루에 한마디도 안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평생 익숙할 것 같지 않던 칼질도 손에 익었다.

이제는 자신이 베어 넘기는 게 사람인지 인형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한 통의 편지가 날아온 것은 그가 모든 것을 체념했을 때였다.

-믿음직한 파넬의 기둥에게.

오랜만이구나.

다름이 아니라 오래 전장에 있는 너를 배려하여 폐하께서 신부를 결정하셨단다.

플로렌스 자작가의 올리비아라고 한다.

편지를 읽은 제임스는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올리비아?’

편지에 적혀 있는 단어 중 그에게 익숙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내. 배려. 올리비아 플로렌스.

몇 번이나 편지를 다시 읽고 나서야 제임스는 편지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다.

‘그녀가 내 아내가 된다고?’

이게 꿈인가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연히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그녀라니!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제임스는 난생처음 신을 찾았다. 신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돌아가고 싶어.’

죽은 사람처럼 가라앉아 있던 제임스의 눈빛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목적 없는 삶에 한 가지 목적이 생겼다.

그는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올리비아를 만날 것이다.

* * *

그렇게 흐른 시간이 10년이었다.

떠날 때 앳된 청년이었던 제임스는 완연한 남자가 되어서 돌아왔다.

그를 오랫동안 북방으로 내쫓은 장본인인 태황제는 돌아온 그를 반겼다.

“파넬 공작! 그대가 해낼 줄 알았네!”

수십 년간 제국의 국경을 괴롭히던 이민족을 완전히 소탕한 것이다. 그저 말 한마디로 치하할 수 있는 업적이 아니었다.

그런 대단한 일을 했으면서도 제임스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 모습이 태황제의 눈에 무척 기껍게 보인 것은 당연했다. 그는 무척 인색한 남자였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는 그를 위해 황실보고를 열었다.

“자네에게 하사하기 위해 꺼낸 검일세. 넘버즈 중 하나인 투머로우지.”

그런 것 따위 딱히 받고 싶지 않았으나, 태황제의 내미는 손을 부끄럽게 할 수도 없었다. 제임스는 공손하게 시종장이 내미는 투머로우를 받았다.

서둘러서 검을 허리에 매는데, 낡은 허리띠가 툭 하고 끊어졌다. 그 모습을 본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단장도 하지 않고 수도로 달려온 것인가? 가족들을 만나지 않고?”

“물론입니다.”

“허허허, 역시 훌륭한 충성심이로다.”

태황제는 곧장 황궁으로 찾아온 충성스러운 공작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제임스의 단단한 어깨를 두드렸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보게. 아내와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겠군.”

아내.

그 말만큼 제임스의 심장을 설레게 하는 것이 있었을까.

황제의 허락을 받은 제임스는 속도를 내어 수도 파넬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가 떠난 시간 동안 바뀐 수도의 모습도, 사람들의 옷차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드디어 만날 수 있어.’

그녀에게 이민족에게 패하여 돌아온 무능력한 남편이 되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싸운 10년이었다.

‘그녀도 나를 자랑스러워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제임스는 파넬 저택의 문을 밟았다.

가장 먼저 그를 반긴 것은 어머니였다.

“제임스! 내 아들!!”

“어머니.”

“세상에! 이렇게 자라다니.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아들아.”

눈물을 흘리며 그를 마중하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보는데도 전쟁터에서 메마른 감정은 움직여지질 않았다.

제임스는 그저 자신을 전쟁터에서 버티게 했던 유일한 존재를 찾았다.

“그런데 제 아내는……?”

남편이 오랜만에 귀환하였으니 아내는 마땅히 나와서 반겨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 생각한 제임스가 낯선 얼굴을 찾아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제임스의 어머니는 입술을 삐죽이며 못마땅한 티를 내었다.

“그 게으름뱅이가 남편이 온 줄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혼쭐을 내줘야지.”

‘게으름뱅이? 혼쭐?’

그녀가 하는 말들이 다 가시처럼 뾰족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표시였으나, 제임스는 그냥 여상스럽게 그 말들을 흘려들었다.

‘어머니는 원래도 말이 거친 편이셨으니.’

이런 부분이 제임스의 단순한 면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사이가 나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직 방에 있는 것인가?’

제임스는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2층으로 올라갔다.

“내 아내의 방은 어디지?”

“네? 네? 그, 그게…….”

하녀들은 곰 같은 제임스에게 깜짝 놀라면서도 올리비아의 방을 손가락으로 알려주었다. 등 뒤로 어머니의 새된 목소리가 울렸다.

“그 게으름뱅이를 뭐하러 직접 만나러 가니? 사람을 시키면 되지!”

제임스는 그 목소리도 등 뒤로 흘렸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올리비아를 만나고 싶은 마음만이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방 앞에 서니 심장이 떨렸다. 제임스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부인? 들어가도 됩니까?”

안쪽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급한 마음이 먼저 문고리부터 돌렸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을씨년스러웠다. 문을 열어젖힌 제임스는 바위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

제임스의 뒤를 따라온 어머니가 방 안으로 들어서지 않는 제임스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먼저 올리비아의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너는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방 밖으로 나오질 않고…….”

그리고 방 안의 풍경을 보고 새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이, 이게 뭐야!!”

올리비아의 방 안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자다가 변을 당한 듯, 저항한 흔적도 없이 침대에 누운 여자가 침대 밖으로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툭.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제임스는 붉어진 눈으로 그 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벽면에는 피로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원수를 잊지 않는다.

그가 짓밟은 북부 이민족들의 짓이었다.

그들 또한 제임스에게 복수를 했던 것이다.

* * *

제임스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눈을 깜빡였다. 상상도 못 한 이야기라 와 닿지 않았다.

‘내가 죽었다고? 제임스를 만나지도 못하고?’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나의 기억 속에는 없는 과거였다.

‘기껏해야 내가 생각한 건 마흔 살 생일날 회귀하게 된 이야기 정도였는데.’

내가 서른에 이미 한 번 죽었다니?

그것도 이민족들에게 복수 당해서?

‘말이 안 되잖아. 그 무렵 나는 멀쩡하게 앉아서 제임스를 맞이했는걸. 제임스가 쳐들어왔던 것은 늦은 밤이었고.’

나는 천천히 내 기억을 되짚었다. 내가 지난 생에서 제임스를 처음 조우했을 때를 말이다.

그날은 내 첫 번째 시어머니의 장례식 마지막 날이었다.

수많은 손님을 치르고, 관을 땅에 묻고, 이제 막 집에서 쉬려는데 소란이 일었다.

“꺄악!”

“이,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피! 피다……!”

끔찍한 것을 본 듯한 비명, 그리고 쿵쾅거리는 낯선 발걸음.

그 바람에 피곤한 몸을 소파에 묻고 있던 내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벌컥.

문이 갑자기 열리고, 곰처럼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들어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가 말라붙어 있어서 머리카락 색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데, 두 눈만 도깨비불처럼 새파랗게 빛났더란다.

“당신…….”

그게 바로 내 남편 제임스와의 첫 만남이었다.

멍하니 내 기억과 그의 말에서 다른 점을 찾고 있던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제임스의 음울한 눈이 열리는 내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가늘게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첫 번째 진상의 장례식에도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충성심 깊은 그가, 왜 피투성이가 되어서 황궁이 아닌 파넬 저택을 먼저 찾아왔는지.

“그래서 나를 처음 찾아올 때 당신이 피투성이였던 거군요.”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파넬 저택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할 나의 미래를.

제임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나의 예측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래.”

예상은 했지만, 막상 긍정의 답이 돌아오니 심장에 얼음을 붓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살아 있잖아. 그런 일은 겪지도 않았어.’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나의 마지막 기억을 내뱉었다.

“나는 마흔 살 생일을 앞두고 있었어요. 막 생일파티에 나서려는데 눈을 떠보니 스무 살이 되어 있었죠.”

제임스의 말이 사실이고, 나의 기억 또한 온전하다는 가정하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럼 그때 한 번 또 죽었던 건가요?”

적어도, 내가 두 번 이상 죽었다는 것.

그리고 제임스는 이번에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너무 기분이 가라앉으면 웃음이 나온다는 걸 이렇게 알게 될 줄이야.

‘다른 사람은 한 번 사는 인생을 나는 세 번이나 살다니.’

믿을 수도 없고, 믿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번엔 또 누구였는데요? 누가 감히 파넬 공작부인을 죽일 수 있죠?”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한 나라의 공작부인이 방에서 살해를 당해? 그것도 두 번이나?

‘아니, 첫 번째야 그렇다고 쳐도, 마흔 살 때는 아니잖아. 그때 나는 명실상부한 공작부인이었다고.’

그리 생각하며 내가 입술을 비틀었을 때였다.

제임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범인의 정체는 그야말로 상상도 못 한 사람이었다.

“우리 어머니.”

“네?”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제임스는 이 상황에서도 무표정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범인은 우리 어머니였다.”

* * *

세 번째 진상은 내 안에서 사실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워낙 첫 번째 진상이 나를 지능적으로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냥 못 배워서 무식하고 아들만 아는 여편네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살해할 생각도 할 줄 아는 여자였단 말인가!

이제 그녀와 얽힐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그냥 웃음이 나왔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도대체 뭐로 죽였는데요?”

“그때 그 독초.”

“독초? 아.”

파넬 저택에서 본 노란 꽃잎에 무늬가 있던 예쁜 꽃이 생각났다. 제임스가 예쁘다고 함부로 다가가지 말라고 했던 것도.

“그래서 이번에는 시간을 더 멀리 돌렸던 거다.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

“그런데 당신이 미처 예전 생의 기억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제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뱉지 않은 뒷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로 인해 아내를 잃게 될 줄이야.’

결국 내가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다고 말한 것 또한 진실이었던 셈이다.

‘답답한 남자 같으니.’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자기 마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부인과 상의도 하지 못하고.’

그는 과연 시간을 돌린 것을 후회할까, 아니면 그래도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현명하게 묻지 않았다. 자괴감에 빠지는 건 나 한 사람이면 족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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