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이안이 없는 날들 (14/28)
  • 3장. 이안이 없는 날들

    이안이 소수정예를 목표로 삼은 덕분에, 공국으로 가는 일행은 금방 꾸려졌다. 정말 최소한의 기사, 야영에 익숙한 시종들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나는 침실에서 그를 배웅해야 했다. 밤새 열이 났기 때문이다.

    ‘으으, 하필 이런 날 아프다니.’

    남편이 먼 길을 가는데 이렇게 앓아눕다니 마음이 불편했다. 침실에서 끙끙 물수건을 얹고 있으니, 단단한 부츠에 무채색 망토를 두른 이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괜찮습니까, 올리비아?”

    나는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당신에게 옮을지도 몰라요.”

    “올리비아.”

    그가 다가오려고 하길래, 나는 이불을 휙 끌어 올려서 얼굴까지 덮었다.

    ‘먼 길 가는데 아프기까지 하면 절대로 안 되지.’

    행여나 길에서 열이 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멈칫한 이안에게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제가 걱정되면 빨리 다 해결하고 돌아오도록 해요.”

    미룰 수 있는 일이면 미뤘을 텐데. 이안이 불편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이안은 내 미소를 보고도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지, 머뭇거렸다. 그러자 이안의 뒤를 따라 들어왔던 애니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때리며 나섰다.

    “언니는 걱정하지 마세요, 형부. 제가 언니를 말끔히 간호할 테니까요!”

    얘가 지금 뭐래니.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너도 나가야 한단다, 애니.”

    “왜에?”

    “너도 옮으면 안 되잖니. 당연한 거 아니니?”

    “하, 하지만 나는 약초학 전공생인걸!”

    “약초학이 의학은 아니란다. 조용히 하고 어린이는 나가세요.”

    “피이.”

    내 말에 애니는 입술을 삐죽였다. 퉁퉁 부은 뺨이 귀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의 떼를 다 들어줄 수는 없었다.

    ‘열이 너무 높으면 위험하다고.’

    애니와 같은 미성년자가 질병에 더 약한 것은 당연하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진짜 기력이 다 빠졌나 봐.’

    그만큼 최근 힘든 일이 많기는 했지.

    ‘아니면 몸이 젊더라도 영혼의 영향을 받는 것일지도.’

    어느 쪽이건 달갑지 않은 이유였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이안이 조심스럽게 애니의 어깨를 감싸서 방 밖으로 안내했다.

    “이리 와요, 처제. 언니 말이 맞아요.”

    애니는 차마 형부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는지, 결국 입술을 삐죽이며 방 밖으로 나갔다. 펄럭이는 망토에 대고 나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잘 다녀와요, 이안. 얌전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안은 빙긋이 웃었다.

    * * *

    이안이 떠나고도 한 사흘 정도 열이 펄펄 끓었던 것 같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간간이 마이옌 공이 방문했다. 그는 내 곁에 앉아서는 내 손을 꽉 잡아주었다.

    “이렇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무척 가슴이 아픕니다.”

    옮으니까 어서 나가시라고, 낫는 대로 부르겠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정신이 혼미해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대공비 마마에 관한 일은 저와 상의하시면 됩니다.”

    “생제르망 상회와 오르세에 가지고 있는 내 개인 자산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케닌과 마이옌 공은 길게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픈 나를 배려해서 나가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는데.’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모두 내 손에 있었다.

    ‘그냥 아버지와 이야기만 더 하고 싶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눈을 감으면 밤이 되어 있었고, 눈을 뜨면 낮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꼬박 사흘을 앓고 나니, 거짓말처럼 나흘째 아침에는 열이 뚝 떨어졌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누워만 있었던 몸에서는 이리저리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비척비척 일어나서 몸을 이리저리 풀고 있으니 문이 열렸다. 물수건을 갈아주려고 온 건지, 대야와 수건을 들고 오던 애니였다.

    “세상에, 언니!!”

    댕그랑!

    물이 가득 든 대야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치마가 젓는 것도 모르고 애니는 내게 달려와서 나를 꽉 끌어안았다.

    “언니가 얼마나 죽은 듯이 잠만 잔 줄 알아? 이제 괜찮아? 일어날 수 있어?”

    “당연하지. 그냥 몸살이었단다.”

    “그냥 몸살은 무슨! 이러다가 큰일 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랬니, 우리 애니.”

    눈물을 글썽이는 애니를 보고 있으니 나도 코끝이 찡해졌다. 나는 애니를 마주 안아주었다.

    열린 문틈으로 소란을 들은 하녀장이 일어나 있는 나를 보고 서둘러 들어왔다.

    “일어나셨군요! 다행입니다, 마마. 전하께도 얼른 서신을 띄워야겠어요. 무척 안심하실 것입니다.”

    “이런. 내가 걱정을 끼쳐버렸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공국으로 향하면서도 이안은 계속 내 안위를 물었던 모양이다.

    ‘보고 싶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언제 돌아올까 궁금했다. 이안의 모습을 떠올리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하녀장에게 물었다.

    “마이옌 공께서는?”

    잠결에 눈을 뜨면 항상 그가 내 곁에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내 질문에 하녀장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매일매일 오셨는데, 오늘은 대외 행사가 있어서 오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이옌 공께도 서신을 보낼까요?”

    “응. 걱정하실 테니까.”

    왕국 사절단으로 온 것이니 여러 행사에 참여하셔야 할 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도 내 허리에 달랑달랑 매달려서 훌쩍이고 있는 애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애니, 언니에게 밀크티를 만들어주겠니? 이제 막 일어나서 부드러운 게 마시고 싶구나.”

    내 부탁에 애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응! 내가 약초학의 진수를 보여주지!”

    “하하.”

    밀크티 끓이는 데 약초학까지 필요할까. 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생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애니가 나가고, 하녀장은 내게 카디건을 걸쳐주었다. 흩어진 머릿결을 정돈하는 동안 나는 하녀장에게 집안일을 물었다.

    “내가 누워 있는 사이 별일은 없었나?”

    “저택에는 별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보좌관님께서는 하실 말씀이 있으실 것 같군요.”

    백화점도 곧 개장이라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오픈 행사부터, 어떻게 점포를 배치하고 어떻게 직원을 배치할지 등등.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케닌을 불러다줘.”

    하지만 내게 한적하게 집안일을 처리할 시간은 없는 듯했다. 솜씨 좋게 내 머리를 땋아 내린 하녀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전에 알키저스 영식께서 방문 요청을 하셨습니다. 먼저 알키저스 영식을 뵙는 게 나으실 것 같습니다.”

    “로메오가?”

    도대체 내 친구가 날 만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로메오는 내 단장이 끝나기 무섭게 들이닥쳤다. 내가 언제 일어나나 감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로메오는 한 아름 과일바구니를 안고 와서는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약 올렸다.

    “세상에, 여름 감기라니.”

    “감기가 아니고 몸살이거든.”

    “그게 그거지.”

    하녀장이 차를 내왔지만, 나는 내 잔은 받지 않았다. 애니가 내려준 밀크티를 마신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애니는 정말 찻잎으로 약을 제조한 것인지, 무척 쓰고 진득했다.

    로메오가 턱을 괴고 말했다.

    “많이 아프다고 해서 걱정했어. 네가 내 결혼식 증인 해줘야 하는데 말이야.”

    결혼식.

    로메오의 약혼자는 황태자 스타티스. 두 사람의 결혼은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날짜가 거의 확정되었나 보군.’

    결혼 날짜가 나온다는 것은 황제가 바뀔 날도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스타티스 황태자가 여자라는 이유로 황제는 빨리 황위를 선위하고 상황제로서 오래오래 국정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로메오는 장난스럽게 씩 웃으며 말했다.

    “이미 대주교에게 증인은 너라고 말해놨어. 거절은 거절한다.”

    “내가 수락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로메오, 너는 친구가 나밖에 없잖아.”

    “뭐래, 진짜.”

    내 말에 로메오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로메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간다. 몸도 아프니까 얼른 쉬어.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응? 벌써 가? 왜 이야기를 다 안 하고?”

    “이야기 다 했어.”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와 대화하는 내내 로메오는 손톱으로 테이블을 딱딱 두드렸다. 딴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거짓말. 너 지금 망설였잖아. 빨리 말해봐.”

    “눈치만 빨라가지고.”

    로메오는 나를 살짝 흘겨보았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낼모레 대회의에 대공 대리인으로 참석하면 듣게 될 거야. 오늘은 그냥 쉬어.”

    “흠.”

    대회의라.

    ‘대회의에 타이론이 주제가 될 것이 뭐가 있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손가락으로 턱을 문질렀다. 나올 만한 이야기가 많았다.

    ‘마이옌 공과 나의 관계라든지, 백화점 상권에 대한 거라든지.’

    이안이 없는 지금이 타이론을 싫어하는 자들에게는 기회일 터였다. 나는 시큰둥하게 웃었다.

    ‘누가 자기들이 몰아가는 대로 몰릴 줄 알고?’

    나는 스무 살의 세상 물정 모르는 올리비아 파넬이 아니라, 한 집안의 자산을 운영하며 온갖 사업을 벌인 올리비아 타이론이었다.

    ‘내가 파넬 공작 대리로 대회의에 참석한 것이 몇 번인데.’

    대회의 따위 무섭지도 않았다.

    “아 참, 로메오.”

    하지만 그 사실을 미리 경고하려고 찾아온 친구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피어올랐다. 나는 로메오에게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병문안 고마워. 결혼도 축하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참나.”

    내 말에 로메오는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나를 흘겨보는 그의 시선에는 따뜻함이 가득했다.

    “너나 행복하게 살아, 올리. 꼭이야.”

    내 친구가 공교롭게도 지난 생에도 했던 말을 다시 했다.

    시간을 거슬러와도, 언제나 변함없는 내 친구에,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하지만 애니와 로메오를 만날 때까지가 내게 허락된 여유였던 모양이다.

    “이, 이게 뭐죠?”

    “선물입니다, 전하!”

    나를 찾아온 케닌은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서류를 들고 왔으니까.

    * * *

    로메오를 배웅한 뒤, 나는 하녀장의 만류에도 집무실로 향했다. 사흘 동안 누워 있었다는 말은 백화점 개장을 준비할 시간이 사흘 줄어들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케닌을 어서 불러주세요.”

    줄어든 시간만큼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나는 의욕적으로 자리에 앉았다. 의욕에 불타는 것은 케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내가 부르기 무섭게 바람처럼 달려온 그는, 어째서인지 얼굴이 활짝 펴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비전하!”

    “반가워요, 케닌. 오랜만에 보니까 얼굴이 더 잘생겨진 것 같네.”

    “하하하.”

    아니, 표정만 편 것이 아니었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큰 소리로 웃기까지 하는 것 아닌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요?”

    나는 신기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케닌이 가슴을 내밀고 뿌듯해했다.

    “전하께 보여드릴 생각을 하니 가슴이 떨려서요.”

    “뭔데요?”

    내가 없을 때 무슨 금맥이라도 캤나.

    케닌은 씩씩하게 낯익은 서류철을 내밀었다.

    “여기 타이론 대공가의 재산 목록입니다. 이 중에서 이 부분이 대공비 전하께서 관리하셔야 하는 부분이고요.”

    “……네.”

    이미 한번 받아본 적이 있는 자료여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그 옆으로 그가 적색 파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게 대공비 전하의 개인 재산목록.”

    “갑자기 이걸 왜…….”

    내가 정신을 잃은 사흘 동안 재산에 무슨 변화가 생겼나.

    그냥 무심코 서류철을 열었던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맨 윗장, 이제 막 작성된 빳빳한 종이에는 난생처음 보는 재산이 적혀 있었다.

    생제르망 상회 - 제국지부

    오르세의 수도 아르망디 45-3번 지구

    귀중품 100여 종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나는 멍하니 서류만 내려다보았다. 케닌은 으쓱으쓱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아직 정식 승계된 것은 아닙니다. 마마께서 계속 아프셨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일어나셨으니 정식 승계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여기 서명만 하면 되시죠!”

    “하.”

    나는 케닌이 왜 이렇게 으쓱거리는지 이제야 이해했다. 보통 재산 승계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세금도 어마어마하게 물고.

    ‘특히나 나 같은 경우는 국경을 넘으니까.’

    오르세의 세법과 제국의 세법이 다른데 이 승계를 어느 세율을 적용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그 과정을 케닌은 사흘 동안 서류 한 장으로 정리했다는 뜻이었다.

    ‘대단한 능력이네.’

    하지만 이게 단순히 우쭐댈 문제야?

    ‘내가 받아도 돼?’

    존재도 몰랐던 친아버지를 찾은 것도 과분한 복인데, 이제 그 친아버지가 나를 거부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해드린 것이 하나도 없는데.’

    심지어 마이옌 공은 내 이름조차도 부르지 못하고 있었다.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케닌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더더욱 경악할 이야기를 내뱉었다.

    “사실 이게 전체 재산은 아니에요. 아무래도 생제르망 상회 전체를 인수받는 건 오르세 왕국에 가야만 처리가 가능해서 말이죠. 연말 정도에 방문하는 걸로 스케줄을 짜면 어떨까요?”

    “생제르망 상회 전체? 그걸 다 제가 받는다고요?!”

    깜짝 놀라서 펄떡 뛰는 나를 보며 케닌은 오히려 의아한 어조로 되물었다.

    “비전하가 아니면 누가 받습니까. 그분의 유일한 따님이신데.”

    “…….”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멍하니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어지럽게 마음속을 소용돌이쳤다.

    ‘이게 기쁨인가, 슬픔인가.’

    꽤 오랜 시간을 살았는데도 최근 맛보는 감정들은 너무나 그 결이 다양해서 생경하기만 했다.

    예전에는 몰랐다. 이렇게 기쁘면서 슬프고, 또 울고 싶지만 행복한 기분을.

    잔뜩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본 케닌이 조곤조곤한 말로 나를 달랬다.

    “마이옌 공께서 첫째 날 들고 오신 것이 바로 이 승계 서류였습니다. 부담 없이 서명하시면 됩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케닌을 마주 보았다. 케닌은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동안 보살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케닌.”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나의 혼란한 마음의 정체를 깨달았다.

    바로 불안.

    “내가 이런 걸 받아도 될까요?”

    평생 살아 있는지도 몰랐던 친부를 찾았더니, 그 친부가 어마어마하게 부자인 데다가 날 계속 찾고 있었다니.

    지나치게 내게 좋은 이야기 아닌가.

    ‘혹시 모두 꿈인 것 아닐까.’

    다시 자고 일어나면, 나는 마흔 살 생일을 앞둔 올리비아 파넬이 되어 눈을 뜰지도 몰라.

    그런 내게, 케닌은 고개를 기울이며 산뜻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럼요, 원래 전하의 것인걸요.”

    * * *

    한 무리 사내들이 말을 타고 산길을 내달렸다. 바로 공국으로 향하는 이안의 일행이었다.

    수도에서 공국까지는 말을 타고 쉬지 않고 달려야 나흘.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하는 강행이었으나, 워낙 승마에 숙련된 말과 사람들인지라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휴식!”

    이제 조금만 있으면 공국 초입이었다. 입성을 앞두고 무리가 잠시 멈췄을 때였다.

    쉬이익.

    바람을 가르는 기묘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매가 창공을 빙빙 돌았다. 바로 전선매였다.

    이안이 품에 있던 피리를 픽 불자, 전선매는 빠르게 날아와서 이안의 팔에 앉았다.

    간이 되지 않은 육포를 꺼내 물리고, 이안은 매의 다리에 매여 있는 편지를 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읽고 있으니 기사단장이 곁에 다가와서는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이안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별거 없다. 아내가 쾌차했다는군.”

    헌데, 기사단장이 그 대답에 싱긋 미소 짓는 것 아닌가.

    “다행이군요. 많이 걱정하셨지 않습니까.”

    ‘내가 그렇게 많이 얼굴에 드러냈던가.’

    담담하게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안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좋지 않아.’

    아직 세상에는 그의 적이 많았다. 올리비아를 사랑하는 마음에 들떠, 지나치게 그녀에 대한 마음을 드러낸 것인가 늦은 후회가 찾아왔다.

    예를 들자면, 그래. 수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계신 분처럼.

    “아낌없이 불안해하고 계시겠군.”

    이안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지금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직접 내린 왕관을 거둘 수도 없고, 갈팡질팡하고 계시겠지.’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가, 원래 그런 사람이 자리에 가면 본색이 드러나는 것인가. 황제에 대한 이안의 단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말을 풀어 물을 먹이고 있으니, 기사단장이 살갑게 말을 붙였다.

    “조금 기다렸다가 비전하와 함께 가시죠. 왜 이렇게 급하게 가십니까?”

    이 시국에 함께 간다고 하면 황제는 공국으로 도망치는가 싶어 안절부절못할 것이다.

    ‘차라리 내 곁에서 지키는 게 나았을까.’

    물론 수도에 아내를 두고 가는 이안의 마음도 바싹바싹 말랐다. 하지만 신중해야 했다.

    “대비는 상대보다 빨리해야 하는 거니까.”

    언제까지 수동적으로 상황에 대응할 건가. 이제는 슬슬 한 방 먹일 때도 되었다.

    슬슬 다시 출발하려 할 때쯤 한 마리 매가 또 날아왔다. 이안은 익숙하게 그 매도 제 팔에 받았다.

    매의 다리에 적힌 편지는, 타이론가에서 온 것보다도 더 간결했다.

    -동의.

    일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 * *

    대회의 날이 밝았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밀려 들어오는 햇빛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당연히 빛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서 일어나세요.”

    하녀장이 촤악,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커튼을 걷었다. 흐릿했던 햇빛이 이제는 선명했다. 나는 오만상을 다 쓰며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따가워…….”

    꼭 울다가 일어난 것처럼 눈이 뻑뻑했다. 손바닥으로 두 눈을 꾹 누르고 있으니, 하녀장이 혀를 찼다.

    “또 늦게 주무셨군요.”

    “일찍 잘 수가 없었는걸.”

    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최근 나는 정말로, 잠을 잘 시간도 없이 바빴다.

    ‘세상에. 생제르망 상회가 그렇게 큰지 처음 알았어.’

    전생에도 그냥 막연히 거대한 상회라는 것은 알았다. 제국의 한복판에 백화점을 세울 정도니까.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수완이 좋은 사람일 줄이야.’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모두 상회에다가 쏟아부었는지, 상회는 범인이 혼자 해냈다고 볼 수 없을 만큼 컸다.

    내게 그것들을 하나하나 넘겨주며 아버지는 흐뭇하게 웃었다.

    “회계학을 전공했다고요? 숫자에 친숙한 건 나를 닮았나 보군요.”

    그 인자한 얼굴에, 차마 평생 독신으로 살 줄 알고 회계학을 공부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백화점 일에, 생제르망 상회까지 겹쳐지면서 요 며칠 동안 나와 케닌은 꼴딱 밤을 새우고 있었다.

    세수가 끝난 얼굴을 살짝살짝 만져보며 하녀장이 난처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화장을 조금 두껍게 해야겠어요.”

    “그 정도야?”

    “네네. 아주 너구리 같으세요.”

    “…….”

    내 나이 스무 살. ‘젊은데 밤 좀 새웠다고 너구리가 될 리가 있어?’라고 반문하고 싶었으나, 내 근처에 놓인 거울을 보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몸이 아픈 데다가 며칠 무리해서 그래.’

    내 눈에도 다크서클이 무척 진하게 보였다.

    옷을 갈아입고 나니 본격적인 치장이 시작되었다. 머리카락을 굵은 빗으로 빗으며 하녀장이 말했다.

    “처음 대회의에 참석하시는 거잖아요. 최대한 화사해 보여야 해요.”

    “그래, 그래.”

    나도 대회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외양에 많이 영향을 받는지도.

    ‘젊어서 그런가 화장이 잘 먹네.’

    이렇게 저렇게 톡톡 건드리니 마법처럼 다크서클은 사라졌다. 머리카락은 하나로 굵게 땋아 내리기로 했다. 아무래도 대회의인지라, 지나치게 화려한 원색은 자제했다. 눈화장이 끝나니, 다른 하녀가 미리 골라온 보석들을 내밀었다.

    “이 다이아몬드 세트는 어떠세요?”

    이안의 안목은 훌륭해서, 그가 선물한 보석들은 하나같이 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버지가 주신 건?”

    어차피 이안은 지금 수도에 없잖아.

    ‘아버지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아버지가 선물한 걸 걸고 싶어.’

    “그중에서 골라올까요?”

    나는 부끄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장은 흐뭇하게 웃으며 보석을 가지러 떠났다.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나는 조금 설렜다.

    ‘아버지도 오시려나. 황궁에 머물고 계실 테니, 그때 인사를 해도 되겠지.’

    나는 눈을 감고 기도했다.

    하느님, 우연이라도 좋으니 마주치게 해주세요.

    * * *

    나는 왜 몰랐을까. 우연이란 놈이 나에게 좋게 발현될 때보다는 나쁘게 발현될 때가 많다는 걸.

    ‘하필.’

    마차에서 내린 나는 공교롭게도 동시에 마차에서 내린 그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부인.”

    바로 제임스 파넬이었다.

    * * *

    함께 수도에 있는 한, 마주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딱 만날 건 없잖아.’

    이게 인생의 아이러니일까. 나는 삐뚜름한 표정을 지으며 매정하게 대꾸했다.

    “당신 부인이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아, 실례.”

    제임스는 딱히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원래 저런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그 대답에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럼 뭐라고 부르지? 당신 이름?”

    “타이론 대공비라고 부르세요. 제대로 존칭을 쓰고요.”

    “입에 붙어서 그만.”

    “…….”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대회의장으로 향하는 방향이 같았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나란히 걷는 꼴이 되었다. 나는 슬쩍 제임스를 쳐다보았다.

    ‘옷차림은 여전하네.’

    그냥 옷을 예쁘게 입을 줄 몰라서 대충 색만 맞추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멋을 부릴 필요는 없는 사람이지만.’

    아무리 허름하게 입어도 제임스는 기본적인 체구가 큰지라, 다른 사람과는 느낌이 달랐다. 게다가 무인인지라 지나치게 멋을 부리는 것이 도리어 안 어울리기도 했다.

    ‘그래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격식은 살펴야지.’

    생각이 너무 깊었던 모양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제임스에게 훈수를 두고 말았다.

    “크라바트가 삐뚤어졌어요. 고치세요.”

    “아.”

    내 말에 제임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투박한 손이 자신의 목에 엉성하게 걸려 있던 크라바트를 그냥 잡아당겼다. 그가 담담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서툴러서. 이것만큼은 익숙해지지 않는군.”

    “혼자서 못하겠으면 집사나 어머니에게 부탁하면 되잖아요.”

    “글쎄.”

    지난 생에서 제임스의 크라바트를 내내 매주던 것은 나의 일이었다.

    ‘내가 없으면 다른 사람을 시키면 되지.’

    제임스는 풀어낸 크라바트를 그냥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순간 내 입 밖으로 이런 말이 튀어 나갈 뻔했다.

    ‘내가 매줄 테니까 내놔요. 대회의에 어떻게 크라바트도 안 매고 참석한다는 거예요?’

    다행히 입술을 몇 번 달싹인 것으로, 그 말은 튀어나오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좋지 않아.’

    지난 수여식 때 사건으로 정이 뚝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또 얼굴을 마주하니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무섭다, 미운 정. 무섭다, 습관.’

    수년의 세월을 같이 보냈다는 건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었다. 상대를 나도 모르게 이해하게 되니 말이다.

    ‘다신 얽히지 말아야지. 눈길도 주지 말아야지.’

    다짐 또 다짐을 하며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나와 함께 걷고 있었을 제임스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렸다.

    제임스는 언제 걸음을 멈춘 건지, 나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돌아본 나와, 깊게 가라앉은 제임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제임스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아름답습니다.”

    뭐래, 진짜.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나는 내 팔을 문지르며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칭찬도 필요 없으니 떨어져 주시죠.”

    내 말에 제임스는 싫은 기색도 없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

    하여간 할 말 없게 만드는 건 똑같군. 나는 휙 돌아섰다.

    두근두근.

    심장이 다른 의미로 쿵쾅쿵쾅 뛰었다.

    ‘이상해.’

    제임스를 10년을 데리고 살았지만 저런 칭찬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그가 내게 존댓말을 쓰는 것도 처음이었다.

    ‘왜 이제 와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많은 날들이 떠올랐다. 순간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참았다.

    ‘울면 안 돼. 울면 화장 지워져.’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샘은 무슨 계기만 있으면 고장 난 것처럼 열리려고 했다.

    ‘그냥 먼저 가는 게 낫겠어.’

    제임스와 함께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과거가 떠올랐다. 나는 발에 힘을 주었다. 또각또각 소리가 어지럽게 복도를 울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제임스는 굳이 속도를 높인 내 뒤를 따라붙지 않았다.

    * * *

    대회의장에는 이미 많은 귀족들이 앉아 있었다. 내가 입장하니 이목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의 온도 차이도.

    ‘지난번에는 대국민 고자도 녹여낸 마성의 여인 취급하더니만.’

    마이옌 공의 딸이라는 게 그렇게나 큰 사건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내 호감을 사고 싶어 하는 열망들이 느껴졌다.

    자리에 앉으니 내 옆자리가 지정석인 롤랑 후작이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반갑습니다, 대공비 전하.”

    요 콧대 높은 양반이 웬일이래. 나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뵈어요, 롤랑 후작님.”

    나의 인사에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결혼식 때 한 번 뵈었을 텐데, 저를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요.”

    정확히는 지난 생에서 당신을 만나서 기억하고 있었답니다.

    롤랑 후작부인은 인품이 훌륭한 분으로, 자수 모임을 주도하는 사교계의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롤랑 후작도 교육기관에 많은 투자를 하는 괜찮은 사람이고.

    ‘친해져서 나쁠 게 없지.’

    내 대답에 그는 조금 놀란 듯 허허 웃었다.

    “보통 결혼식 때에는 정신이 없어서 그날 하루가 기억을 못 하던데, 대공비 전하께서는 무척 담이 크신 모양입니다.”

    “남편이 믿음직스러운 덕분이지요.”

    이안을 높이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롤랑 후작이 운을 떼니 여기저기서 대화를 붙여왔다. 이런저런 의례적인 인사말을 나누는데 이색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로메오?’

    원래 로메오는 백작 영식으로, 가주들만 참석할 수 있는 대회의에는 참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황후가 되기 때문인지, 알키저스 백작의 뒷자리에 미리 착석해 있었다.

    ‘이제 정말 너도 결혼을 하는구나.’

    나는 다 큰 자식을 보듯 흐뭇한 표정으로 로메오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회의장 맨 앞에 선 서기관이 큰 소리로 말했다.

    “정숙!”

    서기관이 정숙하라고 외치는 것은 황족이 입장한다는 뜻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은 모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높은 자리의 문이 열리고, 근엄한 제복을 차려입은 황제와 황태자 스타티스가 들어왔다. 스타티스가 착석하자, 황제가 엄숙한 어조로 개회사를 읊었다.

    “제4차 대회의를 개최한다.”

    땅땅땅!

    의사봉 소리가 경쾌했다. 나는 조금 신기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만날 채신머리없는 모습만 보았는데, 이렇게 엄숙하실 수도 있구나.’

    내가 파넬 공작부인으로 자리를 잡았을 때 이미 황제는 스타티스였기 때문에, 사실 지금의 황제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았다.

    ‘어?’

    그런데 내 착각일까. 나를 스치는 황제의 시선이 좀 이상했다.

    ‘좀 쎄한데.’

    이안과 혼인한 이후, 이렇게 전체가 모이는 자리에서는 꼭 사달이 났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상석에 앉은 황제가 느릿한 어조로 운을 떼었다.

    “대회의 첫 번째 안건은…….”

    모두가 황제를 응시했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온갖 주요 안건 - 동부의 가뭄, 올해의 세율, 구휼미 비축량 등등 - 이 아니었다.

    “파넬 공작이 귀환하면서 생겨난 북부 전선의 공백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히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파넬 공작을 향했다.

    제임스는 무엇을 생각하는 건지 모를 돌덩이 같은 표정만 짓고 있었다.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파넬 공작, 할 말이 있나?”

    이미 여러 번 생각했지만, 나는 이 남자를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몰랐던 모양이다.

    나는 당연히 제임스가 다시 북부로 간다고 할 줄 알았다. 그곳에서 동고동락했던 부하들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제임스는 명백하게 선을 그었다.

    “폐하, 저는 이미 북부에서 5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만하면 황가를 향한 저의 충정은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가지 않겠다?”

    “그렇습니다.”

    그의 대답에 대회의장이 크게 술렁였다.

    “얼마 전에 넘버즈를 수여 받았지 않소?”

    “그런데도 저리 맹랑하게 대답하다니.”

    “누구의 입김이 들어간 것 아니겠습니까?”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개중에는 제임스 대신 북방으로 가고 싶은 모 가문에서 파넬 공작과 거래를 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오갔다.

    사실상 전쟁터가 아니면 별로 특기가 없는 제임스가 왜 굳이 출정을 거부하겠냐는 분석이 깔린 이야기였다.

    그 소란을 견디지 못하고 황제가 의사봉을 연신 땅땅 두드렸다.

    “정숙!”

    대회의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팔걸이에 턱을 괸 채로, 황제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 이유는 역시 그대의 파혼으로 인한 앙금 때문인가?”

    자연히 내 얼굴로 쏠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정면을 바라보며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굳이 그들에게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제임스는 모범적인 답변을 내뱉었다.

    “발언하지 않겠습니다.”

    다소 황제에게 하기에는 무례한 대답이었지만, 무슨 대답을 한들 마이너스일 상황에서는 훌륭한 대답이었다.

    제임스가 대답하기 무섭게 대회의장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이들이 있었다.

    “폐하, 이 건은 저희 라르크에게 맡겨주십시오!”

    “폐하, 이번에야말로 대대로 변경백이었던 저희 유리우스 가문에!”

    바로 정통성이 무예에 있는 가문들이었다. 오랫동안 공을 세울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이들에게, 이번 북방행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찬스였다.

    황제는 턱을 괸 채로 회의장의 소란을 관조했다. 할 말을 다 쏟아낸 이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자, 비로소 황제의 입술이 열렸다.

    “짐도 이 건을 두고 꽤 오래 고민했네. 그리고 결국 이런 결론을 내렸지.”

    결론이 무엇인가. 모두의 이목이 황제의 입술로 쏠렸다. 그가 바라본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타이론 대공비.”

    “예, 폐하.”

    설마 이 상황에서 내게 칼끝이 향할지 몰랐던 나는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무슨 생각인지 모를 가라앉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타이론으로 인해 생겨난 문제이니, 타이론에서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말은 뜻이 명확했다.

    ‘타이론이 출정하라.’

    이미 스타티스 황태자에게 한 번 들은 적이 있는 권고였다. 나는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답했다.

    “가문의 영광입니다.”

    하지만 내가 수긍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출정 당사자인 이안이 이 자리에 없다는 점부터가 걸렸다. 대회의장이 여러 가지 반론으로 막 시끄러워지려던 참이었다.

    말쑥한 얼굴의 청년이 손을 번쩍 들었다.

    “폐하, 발언 기회를 주십시오.”

    그쪽을 발라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제도 의외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지, 내 사위여?”

    손을 든 것은 다름 아닌, 내 친구 로메오였다.

    동글동글한 눈에, 입술을 꽉 깨문 로메오는 답지 않게 결연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항간에 저, 로메오 알키저스를 두고 아무 능력도 없는데, 운이 좋아서 황태자의 약혼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과 맥락적으로 맞지 않는 말에 모두 고개를 갸웃했을 때였다.

    로메오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대답을 씩씩하게 내뱉었다.

    “그래서 이번 북방 원정을 통해, 제 능력을 증명해 보이고 싶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대회의의 결과는 순식간에 황제가 말릴 새도 없이 로메오가 제임스를 대신하여 출정하는 것으로 결정 났다. 여기에는 무척 음습한 이유가 있었다.

    ‘알키저스 영식은 검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샌님이지.’

    ‘이참에 출정해서 죽어버리면.’

    ‘황후 자리는 비는 게 아닌가.’

    단순한 북방출정보다도 더 많은 이권이 얽혀 있는 자리가 바로 로메오의 자리였다. 순식간에 그 계산을 끝낸 귀족들은 만장일치로 이 안을 통과시켰다.

    “찬성합니다.”

    “알키저스 백작 영식의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북방행이 결정되었으니, 황태자 전하의 국혼을 당겨야겠군요.”

    그 이야기의 흐름은 내가 가로막을 수도, 멈추게 할 수도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황태자와 이야기를 나누려는 건지, 로메오는 저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로메오의 뒤를 쫓아갔다.

    “로메오!!”

    스타티스와 로메오가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로메오의 팔을 꽉 붙들고 흔들었다.

    “미쳤어? 너는 전쟁을 전혀 모르잖아!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내 고함에 로메오는 실없이 웃었다.

    “그건 타이론 대공도 마찬가지잖아, 올리.”

    “하, 하지만…….”

    로메오의 말은 맞았다. 이안도 제임스 같은 훈련은 받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목이 졸리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바보야, 죽을 수도 있다고.”

    “네 남편은 죽어도 되고?”

    “그게 아니지! 우릴 위해 네가 희생하는 게 싫은 거야.”

    “하하하.”

    내 말에 로메오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정말 내 입지를 생각해서 결정한 거야.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마, 올리.”

    “로메오.”

    말은 저렇게 했지만 나를 위해서라는 것을 어떻게 모르겠는가. 그렇게 떠나기 전에 내 행복 운운하면서 밑밥을 깔아대었는데.

    ‘하여간 이 녀석도 손해만 본다니까.’

    나는 내 친구를 일그러진 얼굴로 올려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흥미롭다는 듯이 스타티스가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이게 그대의 선택인가?”

    로메오에게 신경 쓰느라 스타티스 전하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서둘러서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녀는 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고개를 까딱이더니 다시 로메오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렇게 믿을 만한가, 타이론 대공비가? 익숙하지도 않은 전장에 기꺼이 나가겠다고 자원할 정도로?”

    스타티스의 반문에 로메오는 곧게 몸을 세우고 또랑또랑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녀는 제 유일한 친구입니다.”

    역시 친구가 나밖에 없었구나……가 아니고!

    “로메오.”

    나는 감격한 표정으로 로메오를 바라보았다. 로메오가 살짝 뺨을 붉히며 웃어 보였다. 우리 두 사람을 보며 스타티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친구? 연정이 아니고?”

    “연정이라고 하기엔…….”

    로메오는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도 그런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다.

    스타티스 황태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대들은 정말 특이하군.”

    나는 그냥 딴청을 부렸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통 사이가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건 이해했다.

    ‘하지만 로메오를 정말 이성으로 인식해본 적이 없는걸.’

    그리고 그건 로메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남매에 가까운 사이였다.

    우리 두 사람의 명백한 의지 표명(?)에 스타티스 황태자는 팔짱을 끼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타이론 대공비, 그대는 그대의 친구의 배우자인 나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건 조금 이상한 질문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전하께서도 이안을 믿는다는 뜻이에요?”

    “농담도.”

    내 말에 스타티스 황태자는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나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난번 가족 모임 때에도 느꼈지만, 이안과 황태자의 관계는 나와 로메오의 관계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이성은 아니지만, 믿을 수 있는 관계.

    나는 시원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저는 전하를 믿을래요.”

    “내 무얼 보고?”

    “전하는 믿을 만한 분이세요.”

    나는 황제가 된 스타티스가 어떤 모습인지 알고 있었다.

    ‘상벌이 분명하고 현명하신 분이었지.’

    상황제의 도움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스타티스의 능력이 눈부셨다.

    ‘로메오도 칭찬했었고.’

    나는 스타티스를 곧은 눈으로 응시하며 다시 한번 대답했다.

    “네. 전 전하를 믿습니다.”

    “진짜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사람이야, 대공비는.”

    스타티스 황태자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수족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폐하께서는 그대를 무척 경계하고 있다네.”

    “네?”

    전혀 생각도 안 한 말이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큰 소리로 반문했다.

    “어째서 저를요?”

    ‘내 혈통 때문에?’

    최근 내 일신에 일어난 변화는 그것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도 충분한 이유가 되질 못했다.

    ‘동생의 아내가 더 고귀한 혈통이라면 좋은 것 아닌가? 왜 그것이 경계의 이유가 되지?’

    내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서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스타티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폐하께서는 일평생 혈통으로 고통받았기 때문에 타이론 대공에게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어. 어린 아기에게서 어미를 빼앗았다는 죄책감과 내 자리를 위협할 거대한 라이벌에 대한 경계심이지.”

    그 말에 나는 입술을 벌렸다. 이안에게도 그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심지어 지난 생에서 그가 황제의 동생이라는 사실은 영영 밝혀지지 않았지.

    ‘하지만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지나치게 심하잖아.’

    심지어 이안이 태어날 때 상대는 이미 황위 계승을 한 상태였다.

    ‘아무리 혈통적 우위라고 해도 그 상황을 뒤집는 게 가능한가.’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라이벌 관계가 성립하나요?”

    “내 생각도 그렇지만, 사람의 감정은 무 자르듯 떨어지지 않으니까.”

    말은 온화했지만, 스타티스 황태자의 얼굴에는 지긋지긋함이 묻어났다. 비슷한 화제로 이미 여러 번 이야기가 오갔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자식인 나라고 신뢰하실 것 같은가. 후궁의 자식들과 끝없이 경쟁시켜 마지막까지 저울질한 분이 그분이시다.”

    “…….”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의 말이 맞았다. 지금 황제에게는 많은 후궁이 있고, 후궁들에게서는 많은 자식이 있었다. 특히 서장자가 아들이었던 탓에 적장녀인 스타티스는 오랜 힘겨루기를 했다.

    ‘그게 저울질이었다?’

    그렇다면 저울이 이쪽으로 기울 때, 능력보다도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저울추를 올렸을 것이 안 봐도 훤했다.

    내가 이해했다는 걸 눈치챈 스타티스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런 분이, 이안의 아내가 왕가 혈통인 것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은가. 지금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내가 맞춰볼까?”

    그건 나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차라리 파넬에게 줄 것을.”

    “정답.”

    맞췄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북방을 저울로 올린 것도 같은 맥락이야. 만약 북부로 떠난다면 다시 수도로 돌아오기 어려울 테지.”

    그저 마땅히 보낼 사람이 없어서 권하는 줄 알았더니, 그런 배경이 있을 줄이야. 이야기의 전말을 듣고 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로메오를 돌아보았다.

    “그럼 로메오의 북방행은……?”

    황제의 의중이 그렇다면, 로메오가 그 자리에서 자신이 출정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미운털이 박힐 짓 아닌가.

    내 질문에 스타티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미리 물었네. 이런 상황이 있는데, 먼저 친구에게 귀띔을 해줄 것인가 아니면 방관할 것인가.”

    “네가 내 입장이라도 그렇게 행동했을 거야, 올리.”

    “세상에.”

    쿨한 두 사람의 대답에 나는 두 손바닥으로 내 입을 가렸다.

    “로메오, 이 은혜는 어떻게 갚지?”

    “올리.”

    내 친구가 그렇게까지 나를 생각해줄 줄은 몰랐다. 감격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감정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스타티스가 내게 물었기 때문이다.

    “북부로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폐하께서 이제 어떻게 행동할 것 같은가.”

    또 다른 방법으로 나와 이안을, 되도록 중앙에서 밀어내려고 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를 안심시킬 만한 충성의 대가가 필요하겠군요.”

    내 말에 스타티스 황태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공비, 진심으로 내 후궁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나? 이안에게는 너무 아까워.”

    “하하하.”

    나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씩씩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말씀해주십시오, 전하. 무엇이든 전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스타티스 황태자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말해주었다.

    정말 그녀를 신뢰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 * *

    릴리아나 화이트폴 후작 영애는 자신의 방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타이론 대공가에서 이안에게 축객령을 들은 뒤로, 그녀는 매일매일 이 상태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안이 자신의 앞에서 그 여자 편을 들다니.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릴리아나는 자신의 이불을 쥐어뜯었다.

    “이안의 신부는 나였어. 10년 전부터 나였단 말이야.”

    처음 이안을 만났던 날이 그녀의 기억에 선했다.

    백마 탄 왕자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금빛 머리카락, 발그레한 뺨, 어쩐지 어두워 보이는 눈동자.

    첫눈에 그녀의 남자임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대할 수가 있지.”

    릴리아나는 이안 또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믿었다.

    대국민 고자라는 소문 때문에 그 착각은 한층 더 심해졌다. 자신을 밀어내는 이안의 행동에 이런 서사를 부여한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만, 발기부전으로 날 슬프게 할까 봐 나를 밀어낸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이안이 자신의 침실에 들어온 그녀를 비명을 지르면서 내쫓은 것도 이해가 갔다.

    ‘자신도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래도 그런 남자와는 혼인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잠시 마음을 접어두었는데 이런 소식이 들려왔다.

    “타이론 공작이 올리비아 파넬 공작부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처음 그 소문을 들었을 때, 릴리아나는 코웃음을 쳤다.

    ‘서지도 않는다는데 그렇고 그런 사이는 무슨.’

    하지만 상황은 그녀가 비웃은 것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순식간에 파넬 공작가와 혼인무효가 이루어지더니만, 이안 타이론과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바로 혼인까지 한 것이다.

    릴리아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에서 활활 불길이 이는 것만 같았다.

    “그 마녀가 이안을 홀린 게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야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이안이 자신을 그리 내칠 리가 없었다.

    ‘다시 한번 이안을 만나봐야겠어.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말해줘야지.’

    그리고.

    ‘나를 질투하게 만들 셈이었다면 충분히 목적을 이뤘으니까 이제 그만두라고도 알려줘야겠어.’

    혼인무효를 하려면 혼인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신청해야 한다. 릴리아나는 아직 이 혼인을 이안의 질투심 유발 작전의 한 종류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장 오늘이라도 찾아가 볼까?’

    그녀가 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하녀가 온 줄 알았더니, 뜻밖에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릴리아나의 친어머니인 화이트폴 후작부인이었다.

    “얘야, 나와보렴. 할 이야기가 있단다.”

    어머니가 직접 찾아오는 일이 드문지라, 릴리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서둘러서 후작부인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향한 곳은 서재였다. 시중드는 사람도 하나도 없는 모습이 어색해서 릴리아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인가요, 아버지, 어머니.”

    부부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후작부인이었다. 후작부인의 얼굴에는 그린 것 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궁에 다녀오셨단다.”

    “네, 대회의 때문이셨죠.”

    대회의 참석을 이미 알고 있었던지라, 릴리아나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입을 다물고 있던 화이트폴 후작이 천천히 말했다.

    “그 뒤에 따로 폐하를 뵈었단다.”

    그 말에 릴리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이트폴 후작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 딸아이에게 이야기를 해도 되는가.’

    하지만 이대로 속으로 끙끙 가지고 있어도 해결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인지라, 결국 후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폴카와 제국이 이번에 동맹을 맺게 되었는데, 그 상징으로 정략결혼을 하기로 했단다. 폴카의 왕비 자리를 두고 말이다.”

    “폴카의 왕비요?”

    왕비라는 말에 릴리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너도 알고 있잖니. 황실의 황녀들은 모두 어릴 적 약혼을 했다는 걸. 공작가에는 딸이 없고.”

    후작은 마른세수를 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가 폴카로 시집을 가면 어떨까 하는데.”

    “폴카의 왕비…….”

    릴리아나의 눈이 몽롱해졌다. 한 나라에서 가장 추앙받는 레이디가 되어 사는 것은 릴리아나의 오랜 꿈이었다.

    화이트폴 후작 부부는 웃는 얼굴로 릴리아나에게 은근히 권했다.

    “좋은 자리 아니니. 너는 어릴 적부터 성에 살고 싶다고 했잖아.”

    어릴 때는 제국의 황후가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이가 바로 릴리아나였다.

    그때 그 착각을 정정해주지 않고 웃어넘겼던 것이 후작 부부의 가장 뼈아픈 실책이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는 여자이니까.’

    어떻게 해도 황후는 될 수 없지 않은가.

    ‘일국의 왕비 자리가 흔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과분할 정도였다. 황제가 화이트폴에 마음의 부채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감히 허락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바로 반색할 줄 알았던 릴리아나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폐하를 뵙고 싶어요.”

    “뭐?”

    화이트폴 후작은 고개를 들었다. 릴리아나는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폐하를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 * *

    집에 돌아온 나는 나가기 전과 달리 해파리처럼 너덜너덜했다. 마차에서 내리는 나를 보고 마중을 나왔던 하녀장이 입을 떡 벌렸다.

    “어머나!”

    “……다녀왔어.”

    어째 마차 문이 안 열린다 했더니 내가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하는 탓이었던 모양이다.

    하녀장이 열어준 문으로 비틀비틀 내리니, 하녀장이 울상을 지었다.

    “당분간 나가시지 말아야겠어요. 외출만 하고 오시면 얼굴이 반쪽이 되시네요.”

    “그 정도야?”

    “네. 완전 얼굴이 깜깜해요.”

    “…….”

    피곤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계단을 올랐다.

    “일단 자야겠어. 대충 치장만 정리해줘.”

    “네.”

    씻는 것도 귀찮았다. 대충 얼굴만 씻고 침대에서 한숨 붙여야겠다. 장갑과 손가방을 건네던 나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집사를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케닌에게 말해줘. 아직 소유권 이전 등기 치지 말라고.”

    “네. 현재 출타 중이시라 돌아오시면 전해드리겠습니다.”

    “좋아.”

    집사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보좌관들이 모두 이 저택 안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사업장에 가기도 하고 타이론 영지로 내려가기도 한다.

    “바로 잠옷으로 갈아입으시겠어요?”

    “응.”

    보석을 풀어서 정리하고 나니 목이 개운했다. 생각보다 귀걸이랑 머리핀 등이 묵직했던 모양이다. 하녀들을 내보내고 빗으로 머리카락을 빗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이안이 떠올랐다.

    ‘이안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을 내려보았다. 대회의장에서 황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타이론이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에 나는 뭐라고 대답했던가.

    “가문의 영광입니다.”

    워낙 황제가 평소에 이안과 나를 살가워했기 때문에, 설마 그런 마음으로 북방행을 권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만약 그때 로메오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이안을 사지로 떠밀 뻔하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떠올리니 소름이 돋았다.

    나는 빗을 내려놓고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나도 모르게 들떠 있었나 봐.’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지금 생활에 마음을 완전히 놓고 있었던 탓이다.

    ‘차라리 공국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 나을까.’

    나는 침대에 누웠다. 머리가 복잡했다.

    ‘이안은 알고 있었을까? 몰랐으니까 나를 두고 간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나를 배려한 걸까.’

    천장을 보고 있으니 그의 푸른 눈동자와 금빛 머리카락이 아른아른거렸다.

    평소에는 무뚝뚝하다가도 나를 향할 때면 헤퍼지는 그 웃음도.

    ‘이안.’

    나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익숙한 손길이 귓가에 느껴졌다. 굵은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걷어다가 내 귓가에 꽂아주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안.’

    잘생긴 얼굴이 나를 보며 그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곱게 접힌 눈가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언제 왔어요?’

    그가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인지, 그걸 묻기보다 그를 끌어안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보고 싶었어요.’

    내 말에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마주 안았다.

    “엄마.”

    “헉!”

    눈이 번쩍 떠졌다. 어스름하게 어둠이 깔리다 만 방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꿈이었다.

    ‘이게 또 무슨 꿈이야.’

    이안이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꿈이라니.

    ‘개꿈인가 봐.’

    하지만 개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선명했다. 그 목소리 톤까지 기억해낼 수 있을 정도였다.

    ‘너무 보고 싶어 했나 봐.’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창밖을 보니 어스름한 하늘에 별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타이론에 있어도 바라보는 하늘은 같은 하늘이겠지.

    “그러니까 얼른 돌아와요, 이안.”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 * *

    그렇게 잠시나마 평안한 날이 흘러갔다. 나는 아버지와 시간을 많이 보냈다.

    아버지는 여전히 내가 어색한지 존댓말을 사용했다.

    “이제 다음 주면 오르세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다음에 국왕 전하께 정식 허가를 받고 제국으로 넘어오려고 합니다.”

    “오르세는 어때요? 궁금해요.”

    “언제든지 방문하도록 해요. 그렇게 부탁하려고 저택을 드린 거랍니다.”

    아버지가 내게 상속해준 재산목록 중에는 오르세의 수도에 있는 저택이 한 채 포함되어 있었다.

    막연히 아버지가 살고 계신 저택인 줄 알았는데, 내 오르세 방문용 저택이란다.

    “그럼 아버지는 다른 곳에서 지내세요?”

    라는 질문에 그는 약간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수도에만 14채의 저택을 가지고 있답니다.”

    너무나 어마어마한 재산이라서 감이 오질 않았다.

    놀라서 말문이 막힌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아버지는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물론, 외국인의 상속법 문제가 해결되면 모두 드릴 거랍니다. 외국인에게 아직 이 정도 규모의 상속사례가 없어서 허가가 나고 있지 않지만요.”

    “괘, 괜찮을 거 같아요, 아버지. 제게 너무 많아요.”

    내 말에 늘 온화하고 차분하시던 아버지는 드물게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재물은 다다익선이니 절대로 거절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네.”

    순둥순둥한 왕족 청년이 어떻게 거부로 성장했나 했더니, 또 금전 감각은 남다른 모양이었다.

    그렇게 상속 이야기가 조금 오가다가, 아버지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조금 더 편안한 방법이 있긴 한데…….”

    “뭔데요? 아버지께서 편안해야 좋지요.”

    “오르세의 국적도 획득하는 겁니다. 정식으로 오르세에 제 딸로 등록하고요. 그러면 외국인이 아니니 상속법이 조금 더 쉬워집니다.”

    “아.”

    생각하지도 못한 말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도 덧붙였다.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죠. 재산을 이리저리 복잡하게 오고 가면서 세금을 줄일 수도 있고, 자금세탁도 할 수 있고.”

    자금세탁이라.

    “그건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내가 올곧아서가 아니라 심장이 떨려서였다.

    ‘과도한 국부유출은 제재 대상이라고.’

    지난 생에서 그 비슷한 짓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생각보다 엄하게 국가에서 단속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아버지는 짧은 시간에 내게 자신이 아는 것, 그리고 가진 것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안이 돌아오면 뭐라고 말할까.’

    낯선 아버지와 점점 친근해질수록 멀리 있을 그가 그리워졌다.

    ‘아내가 부자가 되어서 좋다고 말할까? 그 사람이라면 넉살 좋게 대답할 것 같아.’

    이제 평생 놀고먹어도 되겠네요, 같은 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것도 귀여울지도.’

    방구석에 있는 남자는 써먹을 곳이 없다는 게 내 지론이었는데, 희한하게도 이안은 그 꼬라지를 해도 귀여울 것 같았다.

    ‘빨리 왔으면.’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후후후, 웃고 있을 때였다. 집사장이 무척 긴장한 표정으로 나와 아버지의 티테이블로 다가왔다.

    “비전하, 잠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음?”

    보통 일이 있어도 아버지가 와 있는 동안은 방해하지 않았는데. 나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죠?”

    집사장은 연신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릴리아나 화이트폴 영애께서 방문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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