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진정한 가족
눈처럼 흰 강아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나는 개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어째서인지 환하게 웃으며 강아지를 끌어안았다.
“오야, 오야. 배가 고프다고?”
그렇게 강아지를 달래고 어르는 순간 나는 눈을 반짝 떴다.
‘꿈……?’
품 안에 강아지는 없었다. 이불 속에 완전히 들어가서 잠든 남자만 있을 뿐.
‘이안.’
살짝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몸이 나른해서 결국 다시 자리에 누워버렸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불편하게 자고 있담. 안 답답한가? 베개라도 베지.’
베개 아래로 내려와서 머리끝까지 이불 안에 들어와 있는 모습이 영 불편해 보였다.
나는 손을 들어서 가슴팍을 간질이는 이안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사락사락 손가락에 얽히는 촉감이 부드러웠다.
‘이 머리카락 때문에 그런 꿈을 꾼 건가.’
개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꿈에 개가 나오다니.
‘그래도 그 강아지는 조금 귀여웠어.’
품에 넣고 있으니 따뜻하고 몽글몽글했다. 개를 한 번도 안아본 적이 없는데, 그 강아지는 귀도 문지르고 목도 얼러주었다.
‘사람은 변하는 거니까.’
그래. 싫었던 개가 좋아질 수도 있지. 지금의 나처럼.
‘침대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거, 정말 싫었는데.’
이안이 없으면 언제부턴가 아침이 허전했다. 체온이 나보다 높은지, 안겨 있으면 따끈따끈하니 좋았다.
‘이게 익숙해지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을 때였다.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더니, 흐릿한 푸른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잘 잤어요?”
“네에…….”
목소리가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어린애 같아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풋.”
나는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토닥였다.
“더 자요. 더 자.”
내 말에 그가 내 가슴팍에 고개를 문지르며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둘 다 입고 있는 게 없던지라, 바로 체온이 전해졌다.
“따뜻해.”
내가 할 말이었는데. 이안이 먼저 그리 중얼거렸다.
뺨을 몇 번 비비던 그가 내 허리를 꽉 쥐었다. 다시 나를 올려다보는 눈에는 잠기운이 싹 달아나 있었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보들보들해요? 여자는 다 이런가?”
내가 보들보들한 편인가. 나도 다른 여자가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대답했다.
“궁금해도 소용없어요. 당신은 평생 내 살결밖에 모를 테니까.”
“푸흐흐.”
내 말에 이안이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는 나를 더 꽉 끌어안으며 칭얼거렸다.
“집착 좋아요. 더 해줘요.”
“아이고.”
이 어리광쟁이가 귀여워 보이니 나도 중증이었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침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갑자기 내 배에서 흘러나온 꼬르륵 소리만 아니었다면 몇 시간이고 이렇게 뭉개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배가 고프네요.”
나는 살짝 뺨을 붉혔다. 하필 이 시간에 꼬르륵 소리가 날 건 뭐란 말인가. 내 말에 이안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제 저녁도 안 먹었으니까요. 얼른 식사부터 하죠.”
아, 저녁도 안 먹고 잠자리에 들었던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의 손을 붙들고 일어났다.
* * *
밖에 나가기도 귀찮아서 식사를 침실로 받았다. 가운만 걸치고 테이블에 앉아서 포크를 깨작거리는데, 이안이 나를 응시했다.
“올리비아.”
“네.”
꼬르륵 소리가 난 것에 비해 입맛이 없었다. 그냥 샐러드인데도 묘하게 비린 것 같았다. 내가 입술을 삐죽이고 있을 때였다.
“저 잠깐만 롤렌스 공국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아.”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롤렌스 공국.’
대공으로 선포된 지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공국이란 말 그대로 제국 안에 있되, 제국과 궤를 달리하는 작은 자치 왕국.
‘체제를 정비하러 가 있긴 해야지. 오히려 지금도 늦었어.’
빨리 가야 했는데, 제임스가 속을 썩이는 바람에 이렇게 늦어져버렸다. 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얼마나요?”
“한 2주? 조금 더 길어지면 한 달 정도 걸릴 것 같군요. 아무래도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있으니까.”
“그럼 저도 준비해야겠네요.”
대공이 처리해야 하는 일만큼이나 대공비가 처리해야 하는 일들도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역시 내정에 관한 거겠지? 대공저도 정비해야 할 테고.’
하지만 당연히 가자고 할 줄 알았던 이안은 뜻밖에 고개를 저었다.
“함께 가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백화점 일도 처리해야 하고 처제도 살펴줘야 하는데.”
“그건…….”
생각도 못 하고 있던 지적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애니야 혼자서도 괜찮겠지만.’
엄밀히 말해서 애니에게 타이론 저택은 아무 연고 없는 남의 집이다. 이제 나와 플로렌스 자작은 남이 되었으니까.
‘애니에게도 그 사실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어제 울면서 집에 와서 잠이 든지라, 애니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설명하지 못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상황에서 애니만 두고 내가 가버리면 애니도 오해하게 될지도 몰라.’
생각이 깊은 애니이니, 내 상황을 듣고 나면 자신의 거취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안은 고심에 빠진 내 손을 토닥였다.
“그리고 아버지도 드디어 만나게 되었는데.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야죠.”
그렇다. 공국으로 내려가 버리면 내 아버지, 마이옌 공과는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을 것이다.
‘사절단으로 온 것이니 얼마나 더 제국에 머물지도 모르고.’
전생과 달리, 그는 이제 제국에 백화점을 짓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더 제국에 머물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혼자 가는 건 마음에 걸려요. 꼭 지금 가야 하는 건가요?”
내 말에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네. 저도 아쉽군요. 우리 신혼여행도 못 다녀왔잖아.”
신혼여행이라.
‘사실 그때는 이렇게 달달한 부부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신혼여행이 웬 말인가. 나는 그냥 이안과 데면데면한 부부가 될 생각이었다. 그래서 예물도, 신혼여행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미래는 바뀌었어.’
나는 눈을 들어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손을 뻗어서 내 손을 꽉 잡았다.
“굵직한 일이 다 처리되면 우리 같이 여행 갑시다. 저 아래 바다로.”
“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젠가 로메오와도 비슷한 약속을 했었다. 결국 지키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안과 가게 된다.’
상상만 해도 마음이 설렜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바다 좋네요.”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이안도 싱긋 예쁘게 웃었다.
그는 다시 포크를 들었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그는 평소보다 부지런히 먹었다. 나도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포크를 들었다.
“그럼 언제 가나요?”
“오늘 장인 어르신은 뵙고 가야지요.”
이안의 말에 나는 오늘 타이론 저택으로 방문한다던 마이옌 공을 떠올렸다.
‘아버지라.’
어쩐지 알 듯 말 듯 복잡한 마음이었다. 이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정했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어머니에 대해서 여쭈려고요. 저도 어머니를 전혀 모르니까요.”
“어머니가 그립습니까?”
“글쎄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는 모두 내 이모인 플로렌스 자작부인이었다.
나는 그녀와 플로렌스 자작을 부모로 의지하고 자랐다. 그러니 어머니가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가족에 관한 건 나이를 몇 살을 먹어도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플로렌스 자작은 내게 나쁜 추억만을 주었다. 하지만 그 남자가 있어서 외롭게 크지 않은 것도 사실이기에, 내 마음은 무 자르듯 깔끔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쨌든 내게는 애니가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동생, 애니. 그 아이를 동생으로 받아들이려면, 플로렌스 가문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나의 복잡한 심기가 고스란히 얼굴에 나타났던 모양이다. 이안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애썼어요. 처제도 잘 챙기고 있잖아요. 플로렌스 자작이 스스로 복을 걷어찬 겁니다.”
애니. 애니의 문제에 관해서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이안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이안.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몰라요. 저는 애니와 함께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어요.”
내가 남편에게 바랐던 것은 내 용돈으로 애니를 기숙학원에 보내는 걸 눈감아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안은 내 기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었다.
처제를 집에서 함께 살게 해주고, 기숙학원보다 더 좋은 학교를 알아봐주었다. 나 없이도 종종 애니와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 또한 하녀장에게 듣고 있어 알고 있었다.
‘정말 이안을 만난 건 행운이었어.’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만 반복했다.
“고마워요, 이안.”
내 말에 이안이 가볍게 팔을 테이블에 기대며 몸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묘하게 뜨거운 푸른 눈동자가 나를 곧게 마주 보았다. 부드럽게 휘어진 살구색 입술이 야살스럽게 열렸다.
“더 부탁하고, 더 이용해요, 나를.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주십시오.”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당황한 내가 온몸에 힘을 주어 굳었을 때였다.
그가 손을 뻗어서 내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뭘 하나 했더니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귓가에 꽂아준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내가 말했잖습니까. 당신이 내게 의지하면 할수록 기뻐요. 난 애정결핍이거든요.”
“……못 말려, 진짜.”
가만 보니 애정결핍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이것저것 퉁 치고 넘어가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이안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인 어르신이 오시려면 시간이 좀 더 남았는데…….”
그의 눈가가 붉었다. 몹시 야한 빛깔이었다. 반듯한 손이 내게 내밀어졌다.
“같이 씻을래요?”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도장처럼 꾹 눌렀다.
* * *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이것저것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마이옌 공을 보는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흑.”
“이런.”
마이옌 공은 눈을 마주치자마자 울어버리는 나를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품에서 연한 베이지색 손수건을 꺼내어 내밀었다.
“닦아요. 이러다가 눈가가 짓무르겠어요.”
“죄, 죄송…….”
“아닙니다.”
흰 장갑을 낀 손이 무척 정중했다. 손수건을 받아 들던 나는 다시 왈칵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흑.”
지난 생에서는 이 손수건을 받지 않았던 일이 생각난 탓이었다.
‘그때도 우리는 만났었는데.’
진상들이 부끄럽다고 구박하는 것이 뭐라고 나는 하나뿐인 유품을 그렇게 깊숙이 박아놨던 걸까.
‘그 바람에 아버지도 만나지 못하고.’
가엾은 건 마이옌 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국 자식을 찾지 못한 채 제국에 고슈 백화점만 두고 쓸쓸히 오르세 왕국으로 돌아갔으니까.
내가 계속 우느라고 말을 못 하니, 이안이 먼저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문을 떼었다.
“제 아내가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닌데. 아무래도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마이옌 공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마음은 흐르는데, 아직 어색한 데다가 내 눈치가 보여서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안이 그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이안 타이론입니다. 따님과는 올해 혼인하였습니다.”
“오르세 왕국의 샤를입니다. 국왕께서 과분하게도 마이옌 공작으로 임명하여 주셨지요.”
“위명은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랐지만, 호의적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손수건을 꽉 쥐고 더듬더듬 입술을 열었다.
“저, 저는…….”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줄줄줄 흘렀다. 나는 목을 가다듬어, 애써 또박또박 말했다.
“제 이름은 올리비아예요.”
“올리비아.”
내 이름을 들은 마이옌 공의 눈가가 인자하게 접혔다.
“예쁜 이름이군요.”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는 내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에 이름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었다.
“앉아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내가 우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안은 훌륭하게 호스트 역할을 해냈다. 그는 내가 묻고 싶었던 것들도 나를 대신해서 물어봐 주었다.
“어쩌다가 부인과는 헤어지게 되셨습니까?”
내가 묻기에는 예민한 질문들까지, 그가 하니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자 마이옌 공의 얼굴이 흐려졌다.
“멜리사를 잃은 것은 전적으로 제 어리석음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갈팡질팡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야기는 이랬다.
어머니는 호기심이 많았던 아가씨로,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멋대로 가출을 해서 오르세 왕국까지 넘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가 여행하기에, 타국은 너무나도 위험한 곳이었고, 모든 돈을 도둑맞고 길에서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저는 그녀에게 한눈에 반하고 말았지요.”
왕국 밖을 꿈꾸고 있었지만, 넘어갈 수 없는 처지였던 아버지에게, 가출을 해서라도 여행을 나온 어머니는 자유의 상징처럼 보였다고 한다.
“반대할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
상대는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왕족, 그러나 여자는 신분증명도 할 수 없는 빈털터리 여행자.
반대가 없는 게 이상했다. 그냥 정부나 첩으로 들이라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제 가족들이 멜리사를 몰래 빼내어 다른 곳으로 보낼 정도로 반대할 줄은 몰랐습니다.”
마이옌 공의 얼굴이 슬픔으로 젖어 들었다. 나는 그가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고 부인과 아이를 찾아 나서는 데까지도 상당한 고난이 있었을 거라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후회나, 슬픔을 토로하는 대신 나를 보고 웃었다.
“이제라도 딸을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를 겁니다.”
“저도요.”
나는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눈물이 아무리 나와도, 이 말은 꼭 전해야 했다.
“저도 기뻐요, 아버지.”
* * *
마이옌 공은 차를 한 잔 완전히 비운 뒤에는 깔끔하게 일어섰다.
“한 달은 제국에 머물 예정입니다. 찬찬히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죠.”
내가 자식이고, 그가 부모인데도 그는 내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주었다. 나를 대할 때마다 조심하는 것이 느껴져서 감사함과 서운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마이옌 공을 배웅하고 난 뒤, 이안은 나를 침실에 데려다주고 물러났다.
“저는 그럼 이제 내일 공국으로 가는 행렬을 정비해야겠군요.”
“제가 당신 짐을 싸야 하는데…….”
“이미 지난번에 한 차례 싸두었잖아요. 잊어버렸습니까?”
“아.”
스타티스 황태자가 북방으로 가라는 말을 했을 때, 이안의 짐을 쌌지.
‘그걸 내가 안 풀었던가.’
제임스의 뒷바라지 10년. 내가 생각해도 이제 나는 숙련된 짐 챙김이었다.
“당신 안색이 안 좋아요. 어서 누워 있어요.”
“……네.”
아닌 게 아니라 심력을 쏟은 탓인지, 몸이 무거웠다.
“그럼 다녀와요.”
나는 이안을 내보내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안 올 것 같았는데, 막상 누우니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몸이 무거워.’
이마가 뜨끈뜨끈했다.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너무 울어서 그런가.’
어릴 때도 울다가 열이 올라서 머리가 아팠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이 때잖아.’
어린아이 때와 성인일 때가 같을 수가 있나.
하지만 이내 나는 깨달았다. 철이 든 뒤로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모가 돌아가신 뒤로 내가 울어도 달래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파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진상들에게 온갖 모욕을 듣고, 아랫것들에게 무시를 당해도 누구 하나 내게 다정한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나는 자연스럽게 강해졌다. 내게 들으란 듯이 쏟아지는 나쁜 말들은 무시할 수 있었고, 나를 모욕하는 이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괜찮았던 걸까.’
겉보기야 강하고 의연해 보였겠지만, 과연 내 속은 괜찮았을까?
‘그래도 창피해.’
그때는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왜 이제야 후드득 쏟아지는 걸까. 나는 너무 울어서 따끔거리는 눈을 살살 눌렀다.
바로 그때였다.
“언니.”
문을 빼꼼 열고,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은 소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애니. 내 동생.”
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애니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종종걸음으로 내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 뺨에 입을 맞추고 인사를 했다.
“학교는 잘 다녀왔니?”
“응.”
“재미있었고?”
“늘 똑같아.”
“그랬구나.”
애니가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침대 끝을 두드렸다. 애니는 사뿐히 모서리에 앉았다.
‘어차피 어디로든 듣고 올 거야. 이미 듣고 왔을 수도 있고.’
타이론 대공비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워낙 지대한지라, 출생의 비밀 같은 자극적인 소재를 쉬쉬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차라리 내가 먼저 말하는 게 나아.’
나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애니, 언니가 네게 할 말이 있어.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사실 자매가 아니라 사촌이야.”
나는 애니에게 나긋나긋한 어조로 나의 출생이 어떠했는지 설명했다.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와의 이별, 그리고 나를 거두어준 플로렌스 자작부인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하지만 언니는 여전히 애니가 내 친동생이라고 생각해.”
“언니…….”
내 말에 애니가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그런 애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입술을 깨물고 있던 애니가 울먹이며 물었다.
“나는 그러면 큰 오빠네 집으로 가는 거야? 아니면 아버지랑 다시 같이 살아?”
“그게 무슨 소리니, 애니. 너는 여전히 언니랑 같이 살 거야.”
“하지만 언니가 날 책임질 이유는 하나도 없잖아.”
“왜 없어?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거짓으로 서운한 표정을 지어내며 물었다.
“설마 너는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애니가 붕붕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애니는 흘긋 나를 흘겨보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언니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역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생각이 깊은 애니다웠다. 나는 애니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말했다.
“보답이 뭐 필요하니. 꼭 너는 행복하게 살아야 해. 알았지?”
“언니는?”
“응?”
그런데 오늘은 애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법 예리하게 반문했다.
“언니는 행복하지 않아?”
순간 말문을 막히게 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나는 행복하지 않냐고?’
하루하루에 쫓겨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지도 못했던 나에게 신선한 질문이었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행복이라는 게, 아무 걱정 없이 오늘 이 순간으로 충만한 감정이라면.
“언니는 지금 제일 행복해.”
나는 지금 이 순간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이안이 있고, 애니가 있고. 이제는 아버지까지 찾았는걸.’
나는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애니가 그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언니, 빨리 조카 낳아줘.”
“뭐?”
이게 무슨 소리람. 나는 순간적으로 굳어져서 애니를 바라보았다. 애니는 개구쟁이처럼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도울 일이 뭐가 있겠어. 언니가 조카를 낳으면 내가 다 키워줄게!”
“뭐라고?”
세상에 어떻게 저런 생각을. 나는 당황스러움도 잊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동생의 머리를 열심히 쓰다듬었다.
“말만이라도 고마워, 애니.”
내 말에 애니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말만 하는 게 아니야. 조카의 이름도 내가 정해줘야지. 뭐가 좋을까. 카트린느?”
“그건 너무 부담스럽구나.”
반짝반짝 빛나는 애니의 얼굴이 눈부셔서, 나는 그저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아기라.’
나와 이안 사이에 절대로 가질 리 없는 것.
‘없어도 난 괜찮아.’
아이들을 원래 좋아하지도 않는걸.
그리 생각하면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 * *
스타티스는 이안을 싫어한다.
거기에는 이안 자체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도 있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도 있었다.
‘진절머리가 나.’
굳이 꼽는다면 바로 이런 때.
스타티스는 눈을 들어서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에는 붉은 망토를 담요처럼 덮고 있는 풍채 좋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제국의 황제, 글라디우스 2세.
늘 인자한 미소만 짓고 있던 황제의 얼굴이 석고처럼 굳어져 있었다.
“짐이 지나치게 서둘렀나 싶구나.”
스타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고 싶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대화의 턴을 돌리려면 차를 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붉은색 홍차 파문을 바라보고 있으니 초조함으로 가득 물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하니 플로렌스 영애가 친부가 오르세 왕족일 줄이야. 이래서야 혈통적으로도 완벽하지 않으냐.”
“황실의 경사이지요.”
스타티스가 보기에 황제는 참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황실의 적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생 무시를 당한 터라, 날 때부터 적통인 이안에게 콤플렉스가 있다.
그렇다면 모질게 내치면 될 텐데, 마음이 약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만다.
‘마음에 안 들면 멀리 보내면 그만일 것을.’
또 불안해서 멀리 밀어내지는 못한다.
‘이안만 재수 없게 걸렸지.’
그가 적통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든가. 적통으로 태어난 탓에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자라지 않았나.
스타티스는 고개를 들어, 한없이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크게 노하여 꾸짖었다.
“무슨 소리냐. 그러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라도 태어나면 무슨 소리가 나올 줄 알고!”
“무슨 소리가 나오겠습니까?”
스타티스는 여상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럴 때 격하게 반응해봐야 황제의 불안증만 심해진다는 사실을 그녀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미 아바마마의 치세이옵니다. 모두가 충성스러운 신하이온데, 무엇이 그리 걱정되십니까.”
하지만 올리비아의 아버지가 오르세의 마이옌 공이라는 사실이 황제에게는 무척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만큼 말하면 납득하던 황제가, 오늘만큼은 손톱을 깨물며 불안에 떨었다.
“너는 모른다. 내가 그 아이에게서 황위를 빼앗았듯, 그 아이도 네게서 빼앗을 수 있어.”
아니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가 황위를 받기로 하였을 때, 이안은 고작 100일도 지나지 않은 아기였다. 그 아기가 아무리 제대로 탄생이 알려진들, 어찌 황위에 올랐겠는가.
황제는 간절한 눈으로 스타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모든 것이 너를 위한 것임을 왜 모르느냐, 스타티스.”
‘지긋지긋해.’
스타티스는 입술을 씰룩였다. 그녀가 가장 사는 것이 지긋지긋할 때가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그의 불안감, 콤플렉스를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라고 포장될 때.
‘내가 이안보다 그렇게 많이 모자란가?’
황제가 저리 행동할 때마다, 스타티스는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확인받는 것만 같았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스타티스는 그리 생각하며 다시 차를 호로록 마셨다.
‘어차피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녀의 차례였다.
‘곧 국혼과 동시에 즉위식을 가질 예정이니까.’
스타티스의 푸른 눈이 예리하게 테이블 언저리를 스쳤다.
‘저 소리를 들어주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어.’
정말 위험한 자를 제 앞에 두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황제는 자신의 속내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스타티스는 지루한 소리를 심각한 표정으로 들어주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 * *
애니는 최근 하루하루가 꼭 꿈속을 사는 것만 같았다.
‘정말 행복해.’
등굣길, 마차에 올라서 애니는 들고 온 책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가방 안에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약초학 책이 들어 있었다.
‘마음껏 책도 볼 수 있고.’
올리비아가 아카데미까지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친자식이 아니라 관심이 없었던 덕분도 있었다.
플로렌스 자작은 여자에게 많은 공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여자가 무슨 책이냐! 건방진 것 같으니. 깡그리 다 태워버려!”
애니가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집안의 모든 책을 다 태워버린 것이 그녀의 나이 열두 살 때.
당연히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타이론 저택은 좋아. 희귀한 책들도 많고, 마음껏 읽을 수 있고.’
그에 비하면 타이론 저택은 애니에게 천국이었다. 맛있는 음식, 늘 깨끗한 침구, 손만 뻗으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책, 얼마든지 주어지는 종이와 잉크.
무엇보다도 좋은 건 바로 큰언니 올리비아와 함께 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언니가 좋은 남자를 만나서 다행이야.’
처음에 언니가 파넬 공작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고 할 때는 세상이 노래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한 쌍의 잉꼬처럼 잘 지내는 두 사람을 보니 저절로 안심이 되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이렇게 지낼 수 있었으면.’
애니는 작게 기도했다.
그사이 마차는 학교에 도착했고, 가방을 챙긴 애니는 폴짝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학교에서 친해진 친구, 리타가 애니에게 다가왔다.
“좋은 아침이야, 애니.”
반갑게 인사를 하고 소녀들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리타가 영 이상했다. 은근슬쩍 애니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저어, 그런데 괜찮아?”
“뭐가?”
전혀 나쁠 일이 없는 애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리타의 말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그게…… 네 언니 때문에 말이야. 아니, 이제 언니가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그게 무슨 말이야?”
“어머, 너 모르니?”
도대체 뭘 모른다는 걸까.
그 대답은 금방 들을 수 있었다.
“네 언니가 사실은 친언니가 아니라면서. 플로렌스 자작님이 어제 파넬 공작의 투머로우 수여식에서 길길이 날뛰다가 망신만 당했다던데. 아무 말도 못 들은 거야?”
리타의 말은 너무나 직설적이어서 도리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언니가 내 친언니가 아니라고?’
이게 무슨 소리람.
‘그리고 아버지는 고향에 계실 텐데.’
어느 것 하나 와닿지 않는 설명이었다. 애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학교에 들어섰다.
하루를 보내는 동안, 그녀는 어제 있었던 소란을 모두 이해했다.
파넬 공작의 수여식에 있었던 일이 하루 종일 화제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알고 보니 오르세 왕족이었다니.”
“솔직히 왕족은 아니지. 제대로 결혼식을 올리고 태어난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오르세의 마이옌 공이 잃어버린 정인과 그 자식을 찾아 헤맨 건 유명하잖아. 심지어 아직까지 결혼도 안 하셨을걸.”
“그럼 마이옌 공의 막대한 재산이 모두 타이론 대공비의 것이란 뜻이야?”
수군거림을 들으며 애니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난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올리비아에게 더 잘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겠다. 애니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하교한 뒤, 애니는 집에 들어가서 올리비아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아서 덤불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낯선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아가씨?”
“아.”
애니는 고개를 들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목검을 메고 서 있었다.
기본 이목구비는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얼굴에 주근깨처럼 여러 개의 흉터가 흩어져 있어서 조금 흉했다.
애니는 소년의 이름을 금방 떠올렸다. 그녀가 타이론 저택에서 소개받은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에릭이라고 했지?”
“마, 맞습니다.”
소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애니가 그저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에릭은 애니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서 더듬더듬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계세요? 바닥이 차갑습니다.”
“괜찮아.”
“깔고 앉으실 거라도.”
막 훈련을 마치고 온 소년의 손에 뭐가 있겠는가.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에릭은 자신이 입고 있던 셔츠를 벗으려고 했다.
갑자기 눈앞에 훌렁 나타나는 탄탄한 복근에, 애니가 눈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
“무, 무슨 짓이야!”
“죄, 죄송.”
에릭은 다시 얼른 말아 올렸던 셔츠를 내렸다. 에릭의 얼굴이 이제는 터질 듯이 빨개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의 행동이 우스웠던 탓이다.
그 모습을 보고 결국 애니는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애니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당신이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놀라서 그랬어. 소리 질러서 미안해.”
“…….”
에릭의 까만 눈동자가 애니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애니의 얼굴 어디에도 불쾌감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슬쩍 가까이 다가섰다.
“그런데 왜 여기 이렇게 계세요?”
“심란한 소리를 들어서.”
애니는 무릎을 세우고 팔에 얼굴을 묻었다. 올리비아 앞에서는 늘 어른스러운 척했지만, 아직 그녀도 사춘기 소녀였다.
“나는 우리 언니밖에 없는데, 알고 보니 우리 언니가 내 친언니가 아니라고 하더라고.”
고민이 스르륵 너무나 가볍게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어. 이 집을 나가야 할까. 생판 남이니 더 이상 부담 주지 말아야겠지?”
애니의 고민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에릭은 고개를 흔들었다.
“대공비께서는 개의치 않아 하실 것 같은데요.”
올리비아와 말 몇 마디도 섞지 않았지만, 에릭은 올리비아가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애니를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올리비아를 사랑하는 건 애니도 마찬가지였다. 애니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런 거야. 언니는 괜찮다고 할 테니까. 그러니까 내가 제 발로 나가야지.”
그 아버지 밑에서 꺼내어 학교를 보내준 것만으로도 올리비아는 최선을 다해주었다. 애니는 올리비아에게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애니는 올리비아와 남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나가고 싶지 않아. 언니랑 평생 함께 살고 싶은걸.”
이율배반적인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애니가 침울하게 눈을 비볐을 때였다. 진중하게 듣고 있던 에릭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고민을 그대로 다 토로하고 오세요.”
“응?”
애니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에릭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보기에 두 분은 진정한 가족인걸요. 답답한 점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 모두 말하세요. 가족은 그래도 되잖아요.”
“아.”
애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릭의 말이 옳았다.
‘무엇을 하든 마음을 전해야 하니까.’
애니는 활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었다.
“고마워, 에릭.”
“천만에요.”
에릭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 답례라고 하기는 뭐한데.”
당장이라도 본관으로 뛰어가려던 애니는 걸음을 멈추고 에릭을 돌아보았다.
“견습이라서 손수건 만들어줄 사람이 없지? 내가 만들어줘도 될까?”
애니의 말에 에릭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에릭은 허리를 꾸벅 숙이면서 큰 소리로 인사했다.
“여, 영광입니다!”
“뭐, 영광까지야.”
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에릭에게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
그리고 애니는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타이론 저택을 향해 뛰어갔다. 에릭은 그녀의 머리카락 끝까지 모두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았다.
애니와, 에릭 두 사람의 이야기도 천천히 진행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