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1장.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면 안 된다 (12/28)

1장.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면 안 된다

‘성인이 되자마자 끌려나갔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제임스의 겉모습만 보고 제임스가 얼마나 고통받았을지 상상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보다 훨씬 큰 체구, 강해 보이는 인상에,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성격까지.

‘부하들에게는 대단히 관대하면서도, 위기에는 앞장서서 나서는 상관이었고.’

그래서 약간 사람들은 그가 씩씩한 장수인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제임스도 연약한 인간이었기에, 그는 밤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곤 했다.

“흐억.”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숨을 내쉬며 자다가 벌떡 일어난 건 몇 번인가. 뭐가 그리 불안한지 검을 끌어안고 앉은 채로 눈을 붙인 건 또 몇 번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의 북부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헌신과 충정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보답을 받아야 해.’

나는 고개를 들고 의연한 태도로 황제를 응시했다. 황제는 턱을 괴고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정당한 대가를 내려주라고?”

“예. 그가 고생했다는 건 폐하께서도 인정하시잖아요.”

“음.”

내 말에 황제는 대답 대신 침음성만 흘렸다. 느긋해 보이지만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이권이 치열하게 오가고 있을 게 분명했기에, 나는 입술을 다물고 얌전히 기다렸다.

잠시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뜻밖에 흘러나온 말은 지극히 감정적이었다.

“그대는 파넬 공작을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그런데 왜 그를 챙기지?”

“제 감정과는 별개의 문제예요.”

나는 분명한 어조로 선을 그었다. 모든 문제를 감정적으로 접근하고 해석하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다.

“저는 그 부분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해요. 바로 잡아야 해요.”

나는 최대한 질책하는 어조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모든 문제는 아버지도 없는 가엾은 소년을 전장으로 무작정 내민 데에서 시작된 것 아닌가.

그것 때문에 말이 나오니 어영부영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혼인을 치르게 하고, 그의 고생에 대해 보답은 하지 않고 입만 쓱 닦고.

‘제임스를 대하는 황제 폐하의 태도는 분명히 잘못되었어.’

조금이라도 그라는 남자를 존중하고 배려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부분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내 말에 황제의 통통한 볼살이 쏙하고 들어갔다. 재미있다는 듯이 웃은 탓이었다.

그가 은근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그래서 그 충정의 대가로 그대를 요구하면 어쩔 셈이지?”

뜻밖의 질문에 나는 숨이 살짝 막혔다.

나를 요구한다?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지금 천지분간 못하고 나타나서 나와 다시 혼인을 부활해달라고 우기는 태도를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싶었다.

“그는…… 지금 제대로 사리 분별을 못하고 있어요. 아마 젊은 나이에 전쟁터에서 혹독한 시간을 보낸 탓이겠죠.”

하지만.

“앞으로도 신하들의 충정을 바라신다면 파넬 공작에게는 제대로 된 상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내 의견을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내 생각이 옳으니까.

적절한 타이밍에 이안도 한마디를 보탰다.

“어차피 그 요구에 타이론은 응할 생각이 없으니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안.”

사실 그에게도 예민할 수 있는 문제인데, 이렇게 흔쾌히 내 편을 들어주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서로 다정한 시선을 주고받는 우리를 지켜본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그래서 그대는 어느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나?”

반쯤 내 말에 넘어온 질문이었다.

나는 그가 이안처럼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준다는 사실에 기뻤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수도 없이 지난 생에서 내가 이만큼은 요구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제임스를 닦달했던 내용이니까.

“임무를 완수했을 시, 1만 데르크에 준하는 현물, 그리고 황실보고에서 검이라도 한 자루 내리면 되지 않을까요?”

“먹고 떨어지라고 하는 거냐고 더 반발하지 않을까.”

“그럼 그때는 자기 몫이죠.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는 것도.”

줘도 싫다는 사람에게 굳이 보물을 안겨줄 필요는 없었다. 거기까지는 내가 알 바도 아니었다.

“그렇게 해야 귀족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오지 않을 거예요. 한 번 고려해주세요.”

“확실히 좋은 방법이야. 검토해보도록 하지.”

황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시원시원한 태도였다.

잠시 멍하니 있었던 나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미흡한 의견에 귀를 기울여주셔서 감사해요, 폐하.”

“아니야. 나는 제수씨가 이렇게 강단 있는 사람이라 좋아. 말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과찬이세요.”

하지만 말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특히나 나와 제임스의 얽힌 사연을 떠올리면 말이다.

‘제임스도 뿌듯함을 느끼면 좋겠네.’

보상 같은 것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이 나를 인정하고 안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좀 더 자신을 존중해주는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어쨌든 부부라는 사이로 얽혀 오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제임스 또한 행복해지길 바랐다.

내가 제임스를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턱을 문지르던 황제가 어쩐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참 재미있는 일이야.”

둥글둥글한 인상에 파묻혀 있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조사 내용을 보면 제수씨와 파넬 공작 사이에는 어떤 접점도 없는데 말이지. 정작 두 사람은 무척 친근하게 행동한단 말이야.”

“그건 우연…….”

내가 서둘러 오해라고 대답하려고 했을 때였다. 내 말을 자르고 황제가 내가 전혀 모르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파넬 공작이 북부로 출정하는 대가로 그대와의 혼인을 요구한 걸 아나?”

“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북부로 출정하는 대가로 날 요구했다고?’

그 말에 이안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의 뜻이네. 사실 진지하게 말하지 않아서 나도 귀담아듣지 않았었지만.”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는 뜻이다. 처음 듣는 말에 내 머릿속이 엉망으로 꼬여 들어갔다.

“그, 그럴 리가…….”

나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우리는 그냥 생일이 같아서 얻어걸린 부부였잖아?’

내 기억 속에 나와 제임스의 결혼은 분명 그랬다.

‘그런데 지금 이건 무슨 소리야?’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이 틀렸던 건지, 아니면 이번 생은 바뀐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번 생은 자꾸 과거와 달라지는 거지? 나 한 사람이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바뀔 수가 있나?’

밀려오는 혼란스러움에 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을 때였다.

황제는 팔짱을 끼고 인자하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꺼냈다.

“공작은 그대를 어디서 보고 마음에 품었을까. 나는 요즘 그게 참 궁금하다네.”

나야말로 궁금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잖아.’

왜 하필 나를 찍었을까. 왜 내게 이렇게 집착하는 걸까.

도통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 * *

황궁에서의 티파티는 의외의 근심거리를 내게 던져주었다.

“파넬 공작이 북부로 출정하는 대가로 그대와의 혼인을 요구한 걸 아나?”

몰랐다. 오늘 처음 듣는 말이었다.

“공작은 그대를 어디서 보고 마음에 품었을까.”

‘아니야. 제임스가 나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어.’

나와 제임스는 절망적이라고 할 정도로 접점이 없었다. 우리의 공통점을 굳이 찾고 또 찾자면, 아카데미 동문이라는 점이었지만, 내가 입학할 무렵 제임스는 졸업생으로 북부 출정을 앞두고 훈련을 받고 있었다.

‘나는 제임스를 만난 적도 없어. 스치듯 볼 기회조차 없었지.’

내가 입학할 무렵, 제임스는 바로 현지훈련을 떠났으니까.

‘정말 모르겠다.’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바로 그때였다.

“부인.”

귓가에 제임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마흔 살 내 생일 때가 아니고 바로 얼마 전 황제의 탄신제 때 들었던 호칭이다.

‘그때도 그는 왜 그렇게 자연스러웠지?’

결혼식에서조차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10년 뒤에야 만날 수 있었던 부부.

그런데 어떻게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부인, 이리 오시오.”

진중하게 가라앉아 있던 표정은 난생처음 보는 여자를 보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듯 부른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뿐이지 않은가.

‘설마 제임스도 과거의 기억이 있는가?’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소름이 온몸에 돋아났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지을 수가 있지? 사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잖아.’

그런 기적이 어떻게 내게만 일어날 수 있겠는가.

제임스도 만약 나처럼 시간을 거슬러 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힘을 주려고 해도 손가락 끝부터 바들바들 떨려왔다.

이런 불안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내가 작게 심호흡을 하고 있을 때였다.

“폐하께서 당신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파넬 공작에게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넘버즈 시리즈 중 하나 ‘투머로우’를 내리시겠다고 하는군요. 그 수여식은 다음 달 초로…….”

이안은 오늘 황궁에서 정해진 것들을 천천히 읊었다. 그러다가 불쑥 내게 고개를 내밀고 눈을 맞췄다.

“올리비아? 듣고 있어요?”

“이안.”

해가 쨍한 여름 하늘 같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를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도 음울한 회청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제임스.’

그저, 그가 기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왜 이렇게 흔들리는가.

“왜 그래요? 아까부터.”

이안이 엄지로 내 붉어진 눈가를 문질렀다. 그를 마주하는 것도 죄스럽게 느껴져서 나는 눈을 감았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뺨 전체에 느껴졌다. 나는 나른한 한숨을 내뱉었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요.”

“어떤 문제인지 내게도 이야기해줄 수 있습니까?”

“미안해요,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확실하다고 해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사실 다른 사람의 아내였고, 시간을 거슬러와서 당신을 만났는데, 전 남편도 공교롭게 시간을 건너온 것 같다고?

‘못해.’

이안이 아무리 날 사랑한다고 해도 저 상황은 이해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런 복잡스러운 내 마음도 모르고, 이안은 부드럽게 채근했다.

“확실하지 않아도 이야기해주십시오. 당신은 괜히 사소한 것에 흔들리는 스타일이 아니잖아.”

“미안해요, 이안. 혼자 생각 좀 하고 싶어요.”

사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지금은 그를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차에 나란히 앉은 상황이 불편해지기는 처음이야.’

여태까지는 이안이 불편했던 적이 없었는데. 달콤했던 꿈에서 깨서 현실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이안을 피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안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올리비아.”

그가 손으로 부드럽게 뺨을 감싸서, 내가 그를 마주 보게 했다. 이안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이런 말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은 해야겠군요.”

무엇을?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안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뜻밖에 연약한 목소리였다.

“내가 정말 북부로 가기 싫은 이유는 내가 떠나고, 저 무식한 놈과 당신이 수도에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싫어서입니다.”

“이안.”

이안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구나. 이안이 가지 않는다는 건 제임스가 수도에 남는다는 뜻이니까.’

놀라 눈을 크게 뜬 나를, 이안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했다.

“왜일까요. 그 사람이 나타난 다음부터 나는 불안하군요.”

나는 손을 들어 이안의 손바닥을 감쌌다. 나보다 훨씬 큰 손이 어쩐지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미안해요. 당신이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는 줄 몰랐어요.”

참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도 내 마음은 한없이 불안했는데, 막상 나와 마찬가지로 흔들리는 이안을 보니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래. 제임스가 기억이 있다고 해서 흔들릴 이유가 어디 있니, 올리비아.’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랑스러운 사람의 곁을 떠날 건 아니지 않은가.

나는 팔을 벌려 이안의 목을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듯 이안의 몸이 굳어졌다.

“우리는 괜찮아요. 다 잘될 거예요.”

나는 이안을 다독였다.

물론, 그건 내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나는 내 마음의 불안을 살짝 구석으로 밀어냈다.

이안은 어릴 적부터 감이 좋았다. 그리고 그 직감은 올리비아를 만났을 때도 선명했다.

‘사실 만나기 전에는 별로였지.’

겨우 스무 살. 다른 남자와 이미 혼인한 사이.

그런데 대국민 고자와 밤마다 붙어먹는다는 노래를 일부러 퍼뜨리다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싶었어.’

나가기도 싫은 자리, 황제의 권고로 ‘얼굴이나 보자.’ 하고 나갔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이안은 직감했다.

이 여자다, 라고.

분명 이제 막 스물이 된 젊은 여성인데 그보다 더 성숙한 느낌이었다. 시원시원하게 말하면서도 그 사이에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무엇이 그녀를 절박하게 만드는 걸까.’

그 점을 눈치채니 그녀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이안은 깨달았다.

이미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걸.

‘몰랐어. 내가 이렇게 순식간에 누군가에게 빠져들 수 있다는 걸.’

그의 예감은 언제나처럼 맞았다. 그녀와 이야기하면 이야기할수록, 그는 그녀에게 더 매료되었다.

‘평생 혼자 살 생각이었는데.’

그녀가 바꾼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황제 또한 바뀌었다.

“네게 돌려주고 싶다.”

황제의 그 말을 들었을 때, 이안은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실소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렇지, 황제는 속이 좁고 냉정했다.

이치대로라면 타이론 공작가와 화이트폴 후작가에서 분란이 일어났을 때 이안이 자신의 동생임을 밝혀야 했다. 하지만 의심이 많은 성품이 그것을 막았다.

“아직 후계자가 안정적이지 않은데,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지 않다.”

이안에게 정계 진출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공훈을 세울 기회를 주지 않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었다.

이안을 경계하기 때문에.

그런 주제에 그는 또 죄책감을 느끼고 이안에게 살갑게 굴었다. 여러모로 이율배반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을 바꾼 것이 올리비아였다. 이안을 불러낸 황제는 술에 얼큰히 취해서 자신의 진담을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네 짝을 찾아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출신이 한미하고, 이미 결혼했던 적이 있으니 적당한 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

역시. 그는 그 한순간에도 모든 상황을 계산했다. 황제를 나무랄 것은 아니었다. 무릇 위정자란 숨 쉬듯 계산을 해야 하는 법.

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마음이 바뀐 것은 그도 계산하지 못한 점이리라.

“하지만 막상 행복해 보이는 너를 보니, 네게서 빼앗은 많은 것들이 떠오르더구나. 그것은 너 한 사람에게만 빼앗은 것이 아니라 네가 낳을 아이들의 미래와 권리이기도 하지.”

황제는 수십 년을 하지 않았던 말을, 비로소 내뱉었다.

“미안하다, 이안. 못난 형을 용서해다오.”

그제야 이안은 자신을 괴롭히던 과거의 한 단락이 마무리되었음을 깨달았다.

‘모두 그녀 덕분이야.’

그렇기에 이안은 자신이 받은 것처럼, 올리비아도 과거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랐다.

못된 아버지를 멀리 보내고, 사랑하는 동생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스타티스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로메오가 절친한 친구라니 자주 입궁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제임스가 나타난 다음부터 불안하게 삐걱거렸다.

“부인.”

내 아내를 부인이라고 멋대로 칭하는 것도 짜증 났지만.

“이안이 아니라 제임스에 관한 거예요.”

왜 그녀는 저토록 자연스럽게 파넬 공작의 이름을 부르는가.

‘둘이 무슨 관계가 있나?’

서류상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의 접점은 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감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있다’고.

‘분명 흔들리고 있는 거야. 파넬 공작이 먼저 결혼을 청했다는 말을 듣고.’

황제가 그 말을 한 다음부터, 올리비아는 눈에 띄게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자는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그리고 그녀는 왜 그 말에 흔들리는가?

두 사람이 친근한 관계가 아닌 이상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안이 예리하게 그녀를 관찰하는 줄도 모르고, 올리비아는 두 손으로 그를 끌어안고 아이를 다독이듯 토닥였다.

“우리는 괜찮아요. 다 잘될 거예요.”

그것은 그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이안은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잘록한 허리가 그의 품 안에 쏙 들어왔다.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가.’

강단이 있는 것 같다가도 무르고, 여린 것 같다가도 강하다. 그녀가 드문드문 소신을 보일 때마다 이안은 등줄기가 저릿저릿했다.

예를 들면, 아까 황제 앞에서 제임스 파넬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내려달라고 부탁할 때라든가.

‘하필 감싸고 도는 게 파넬 공작이라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누군가가 홀로 남은 이안을 위해 저렇게 나서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이안은 올리비아의 어깨에 눈을 문질렀다.

‘파넬 공작은 정말 멍청이야. 이런 보석을 못 알아보고.’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렇게 나서줄 사람이었으니까.

‘이제 와 욕심을 낸들 내가 물러날 줄 알고.’

만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는 이미 올리비아를 만났다.

이제 올리비아는 그의 밑바닥 모든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언제고 담판을 지어야겠어.’

플로렌스 자작을 치워버린 것처럼 녹록하진 않을 터였으나.

이안의 눈동자가 파랗게 타올랐다.

* * *

나는 내 집무실에 앉아서 신문을 넘겼다. 몇 장 넘기지 않고, 제임스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황궁보고에 잠들어 있던 넘버즈 ‘투머로우’가 주인을 찾다! 그 주인은 다름 아닌 북방의 젊은 호랑이 파넬 공작!

‘넘버즈라.’

나는 턱을 톡톡 두드렸다. 파넬 공작부인이었던 것치고, 나는 사실 무기나 전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었다. 제임스가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무척 유명한 거겠지. 이렇게 대서특필 되는 거 보면.’

수여식은 내달 초. 무도회 같은 큰 행사를 겸하진 않지만, 그래도 수도의 중진들은 모두 행차하는 큰 행사가 될 터였다.

‘타이론에서도 가야겠지. 적당한 축하선물을 가지고.’

무엇이 좋을까. 나는 턱을 괴고 톡톡 두드렸다. 마침 백화점에 관해서 상의하러 들어온 케닌이 그런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고민은 아니고요. 그냥 뉴스를 보고 있었어요.”

“무슨…… 아, 파넬 공작의 수여식이군요.”

‘투머로우’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인지 기사에는 그 관련 이미지가 하나도 실려 있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단한 검인가 봐요?”

“대단하긴 하죠. 그래서 넘버즈로 분류되잖아요.”

“넘버즈가 뭐죠?”

내 질문에 케닌은 간략하게 대답했다.

“전설적인 장인 튤라가 생전에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낸 검을 통틀어서 넘버즈라고 불러요. 대표적인 형제 검으로는 ‘하늘을 가르는 검’과 ‘저스티스’ 등이 있죠.”

“이름이 죄다 거창하네요.”

하늘을 가르는 검이라. 도대체 어떤 검인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날카롭다는 뜻이겠지?

‘옛날 사람들은 이름을 낭만적으로 짓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하늘을 가른다든가 정의라든가 하는 이름과 달리 ‘투머로우’는 직관적으로 이름이 와닿질 않았다.

‘설마 내일을 볼 수 없게 해버린다든가, 막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

그럼 조금 무서울지도.

그리 생각하며 나는 여상스럽게 신문을 넘겼다.

-오르세 왕국의 사절단이 도착, 마이옌 공이 왕족 대표로 방문.

-황태자 전하의 국혼 초읽기! 로메오 알키저스는 어떤 사람인가.

-폰즈 백작의 네 번째 재혼!

‘별로 신기한 뉴스는 없군.’

각 왕국에서 제국으로 사절단을 보내는 것이야 매년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오르세 왕국은 늦은 편이었다. 보통 황제의 탄신제에 맞춰서 들어오니 말이다.

‘로메오는 한동안 바쁘겠네.’

결혼 선물은 뭐로 보내야 할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나는 신문을 덮었다. 그리고 케닌에게 물었다.

“백화점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이달 말일에는 완공이 될 것 같고, 인테리어 작업은 한 달 걸릴 것 같습니다.”

“상점 모집은요?”

“순조로운 편입니다. 예상보다 모집이 잘 되어서 오픈할 때에는 2층까지 채워서 오픈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이 나라에 아직 없는 형태의 가게인지라 많은 호응을 얻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이만큼 입점 업체를 모아온 케닌의 수완이 대단했다.

“곧 너도나도 들어오고 싶어서 점포임대료를 더 내겠다고 하는 곳이 될 거예요. 처음이 중요하니까 조금만 더 힘내보아요. 케닌이 고생이 많아요.”

“아닙니다.”

케닌은 나름대로 의연한 척했으나,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가는 것이 다 보였다. 이안이 얼마나 빡세게 사람을 굴리는지, 그는 아주 작은 칭찬에도 약한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겠지만.’

케닌은 놀리면 팔딱팔딱 뛰는 모습이 무척 웃겼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내가 픽 웃었을 때였다. 케닌이 머뭇머뭇거리며 운을 떼었다.

“그리고 비전하, 이 부분은 사실 말씀드려도 되나 조심스럽습니다만.”

“뭐죠?”

“파넬 공작이 최근 수도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복귀 신청은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

뭔데 뜸을 들이나 했더니 제임스의 이야기였다. 나는 웃던 모습 그대로 굳어졌다. 케닌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건 아닐까 찝찝합니다만.”

하필 이 시기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니. 나도 조금 찝찝해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는 명예로운 기사니까요.”

“하지만…….”

케닌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딜 간 걸까.’

내가 아는 제임스는 정면으로 달려들면 달려들었지, 비겁한 수를 쓸 사람은 아니었다.

‘딱히 무슨 수를 쓸 방법도 없고.’

수도 밖에 나간들 내 약점이 굴러다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평생 수도를 떠난 적이 없는데.

‘별일 아닐 거야.’

나는 고개를 흔들고 다시 백화점 관련 서류로 시선을 두었다. 하지만 꺼림칙함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몽글몽글 내 주변을 맴돌았다.

* * *

제임스의 ‘투머로우’ 수여식은 황궁이 아닌, 대성당에서 치러지기로 정해졌다. 그 모습을 참관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참관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나는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정치적으로 잘 써먹으시네.’

충정에 대한 대가는 이렇게 확실하게 치른다!

기왕 주기로 한 것 최대한 과시하겠다는 뜻이었다.

‘보통 너구리가 아니야.’

생긴 건 곰처럼 생겼지만, 사실 이번 상황 전체를 보라. 모든 것은 황제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지 않았나.

‘그나마 이안을 예뻐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 예뻐서인지, 이제는 하나밖에 안 남은 형제라서 그런지,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한 부채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으로 삼으면 상당히 피곤할 스타일.’

그 정도로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로 그런 장인 어르신을 모시며 괴로워할 로메오에게 미리 애도를.

똑똑.

조금 있으니 방문이 두드려졌다.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기에,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열린 문 앞에는 이안이 서 있었다.

“준비 다 되었어요?”

“네. 가요.”

이안의 작위, 타이론 대공.

젊은 시절 황제의 대대적인 정리 작업 덕분에 이 나라에 전 황제의 자식은 이제 황제와 이안밖에 남지 않았다.

황실의 두 번째 어른으로 주요 행사 때마다 이안이 참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의 팔에 팔짱을 끼니,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 아닌가.

“왜, 왜요?”

혹시 화장이 잘못되었나? 나는 당황해서 내 얼굴을 더듬었다. 그러자 이안이 나를 와락 끌어안는 것 아닌가.

“아니요. 그냥 당신이 너무 예뻐서 새삼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무슨.”

갑자기 훅 들어오는 작업 멘트에, 내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슬쩍 그를 흘겨보며 웃었다.

“당신도 멋있어요.”

“빈말 아닙니다. 어쩜 이렇게 사람이 예쁘지. 볼 때마다 넋을 놓게 되네요.”

또, 또 불꽃 플러팅 날린다.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침실로 끌려간 적이 있기에, 나는 냉정하게 그의 팔을 풀고 한 걸음 물러났다.

“넋은 마차 안에서 놓으면 안 될까요.”

“냉정해.”

입술을 삐죽이는 이안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쪽 입을 맞춰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다음 일정이 없다면 모를까, 일국의 대공이 늦을 수는 없잖아.’

내가 생각보다 강경하게 철벽을 치자, 이안은 결국 느릿하게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툴툴거림은 끝나지 않았다.

“오늘 하필 가는 곳이 파넬 공작의 수여식이라니. 아아, 가기 싫다. 그 무식한 사람도 내 아내에게 반하면 어쩌죠?”

제임스가 반한다고?

‘그 벽돌에게도 그런 말랑말랑한 감정이 있을까?’

잘 모르겠다. 애초에 제임스와의 결혼생활은 버석한 모래를 씹는 기분이었는걸. 특별할 것도, 즐거울 것도 없이, 그냥 똑같은 하루하루, 미지근한 온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보란 듯이 진하게 키스하죠.”

나름대로 한 달 가까이 고민한 끝에 나는 제임스의 상황을 결론지었다.

일단, 미래에서 과거로 회귀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시간을 거스르는 건 기적인데, 그 기적이 우리 두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났을 확률은 매우 적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그는 내게 집착하는가.

거기에 나는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냈다.

‘아직 이안이 대국민 고자라고 믿고 있는 거야.’

나와 이안이 수도에 염문을 뿌릴 때, 그는 북방에 있었다. 그래서 아직도 그가 고자인 줄 아는 것이다.

‘맞아. 나한테 아기도 없는 삶이 어떻게 행복하냐고 묻는 걸 보면 틀림없어.’

이안이 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나한테 2세 계획을 묻는데, 제임스만 내가 아이 없이 살 거라고 했다.

‘제 딴에는 내가 가엾게 느껴졌나 보지. 하지만 이안과 내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만 알면 순순히 물러갈 거야.’

진한 키스 한 번이면 정신 차리지 않을까.

내 말에 이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없는 꼬리가 살랑이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진짜? 나 진짜로 할 겁니다.”

“……하지 말아요.”

누구를 밤에 이불킥하게 만들려고.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이안의 팔에 팔을 꿰었다.

* * *

황제를 평민들이 가까이서 볼 기회가 별로 없기에, 대성당에는 일찍부터 평민들의 입장으로 붐볐다.

물론 그들이 입장할 수 있는 구역이 정해져, 진짜 황제와 귀족들의 가까이까지는 갈 수 없지만 말이다.

‘귀족들도 생각보다 많이 왔네.’

너무 많은 사람이 일제히 돌아보니 일일이 얼굴을 확인하는 게 쉽지 않았다. 우리는 상석의, 귀족들과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저들은 낯선 얼굴인데.’

나는 맞은편에 앉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드문드문 검은 피부의 이국적인 생김새를 가지고 있는 이들도 섞여 있었다.

‘저들이 오르세 왕국에서 온 사절단인가 보군.’

보통 사절단이 오면 큰 행사를 베풀기 마련인데, 그동안은 탄생제로 퉁 쳤고 이번에는 파넬 공작 수여식으로 퉁 치려는 듯했다.

‘대단한 수완이야.’

다른 행사를 열자니 돈이 들고, 마침 파넬 공작에게 검도 수여해야 하니 겸사겸사하겠다는 것이다.

‘가재도 잡고 도랑도 치네.’

칭찬인지 비꼼인지 모를 소릴 중얼거리고 있으니 황제와 함께 제임스가 나타났다. 나는 제임스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머리카락 무슨 일이야.’

제임스는 오늘도 검은색 일색이었다. 하지만 옷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오늘 같은 날 빗질도 한 번 안 하고 나온 거야? 그 정도는 집안 누구든 챙겨야 하는 거잖아.’

나는 혀를 찼다.

‘하여간 우아한 진상, 의뭉스러운 인간 같으니.’

저건 분명 첫째 시어머니의 작품이 분명했다. 그녀는 제임스 덕분에 파넬 대부인으로 군림했지만, 제임스가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기에 은근히 선을 긋곤 했다.

‘아휴, 내가 무슨 생각이람.’

이제는 남이건만, 제임스의 모습을 볼 때면 참견하고 싶어 근질근질해졌다. 이쯤 되면 병이다 싶었다.

행사는 무난하게 끝났다. 애초에 그저 공훈을 치하하고 검을 내리는 것뿐이니 문제가 있을 것도 없었다.

“훌륭한 장수에게 훌륭한 검을 내렸으니, 이제 적을 소탕할 때로다.”

‘북쪽으로 좋게 말할 때 돌아가라는 뜻이렷다.’

심드렁하게 보고 있던 나는 황제의 말에 또다시 박수를 치고 말았다.

‘역시 의뭉스러운 사람이야. 조심해야 해.’

제수씨라고 살갑게 굴어도 절대로 마음을 놓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행사가 가볍게 끝나고, 아직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 절묘한 타이밍에 한 사내가 상석으로 걸어와서는 나를 불렀다.

“올리비아!”

설마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나는 펄떡 놀랐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아버지?”

그 사람은 다름이 아닌 나의 아버지 플로렌스 자작이었다.

* * *

설마 이런 자리에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어떻게 아버지께서 수도에 계신 거예요?”

그런데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할 줄 알았던 아버지는 뜻밖에 입술을 비틀며 빈정거렸다.

“왜? 네가 그렇게 기를 쓰고 막으면 내가 못 들어올 줄 알았냐?”

“네?”

기를 쓰고 막다니. 내가 왜 아버지의 출입을 막는단 말인가.

순간 말문이 막힌 내가 입을 꾹 다물었을 때였다. 이안의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짚었다. 낮은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장인어른.”

평소와는 다른 느낌의 소름이 훅 돋아났다. 이안은 무척 불쾌해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기분은 그럴지언정, 아버지를 향하는 그의 얼굴은 완벽하게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간덩이가 부은 것인가. 지난번에는 이안에게 바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조아리던 사람이, 이번에는 배를 내밀고 빈정거렸다.

“얼굴이 좋아지다뇨. 이렇게 상한 것 안 보입니까?”

“저런. 몸이 안 좋으셨습니까?”

아버지의 날카로운 대답도 이안은 부드럽게 받았다. 하지만 그의 턱이 무섭게 시근거리는 것을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났지?’

나는 의아해서 이안을 돌아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아버지가 상상도 못 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제 딸이 신의도 모르는 악랄한 여자라는 소문에 밤잠을 설치느라 이렇게 야위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버지?!”

아무리 수여식이 끝났다고 해도 이 자리에는 황제가 남아 있었다. 황제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자리에서 떠나는 간 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수많은 사람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세상에! 여기서 이런 소리를 하다니.’

이제야 우리를 응시하는 시선들을 깨달은 내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나처럼 그 시선을 눈치챈 아버지는, 도리어 목소리를 더 높였다.

“무슨 소리냐니! 너는 이미 파넬 공작과 혼인한 몸이잖니. 그런데 어떻게 저리 훌륭한 지아비를 두고 다른 남자의 부인이 될 수가 있어?”

“네?”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왜 이제 와서?’

지난번에 왔을 때는 훌륭한 사위를 두어 영광이라고 굽신거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갑자기 헛소리를 하는 건지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멍하니 굳어진 순간, 이안이 나를 지키듯 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정중한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이런 자리에서 큰 소리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이런 자리가 아니면 어디서 이야기합니까? 대공이 무서워서 대공저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장인어른.”

“말 잘하셨군요. 저는 올리비아의 아비입니다. 그리고 아비 된 도리로, 이 결혼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도대체 뭘 했다고 이제 와서 인정하네 마네란 말인가. 듣자 듣자 하니 들어줄 수가 없었다.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의 인정은 필요 없어요.”

“아니, 필요할걸.”

그런데 아버지도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파넬 공작과의 혼인무효증에 서명할 때 너는 생일이 지나지 않았어. 즉, 혼인무효에도 부모인 내 허락이 필요하다는 뜻이지.”

“!!”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회귀한 상황이 마흔 살 생일이었던 탓에, 나는 내가 회귀한 뒤 당연한 듯이 성인으로 행동했다.

‘그런데 그때 내가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았었다고?’

워낙 난리통에 이루어진 혼인무효라 그 무렵이 생일이었나 아니었나도 기억이 가물거렸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여태 내 생일을 한 번도 챙겨준 적이 없잖아.’

“어차피 네 생일은 네 어미가 죽은 날이니 축하할 필요도 없지.”

그렇게 말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내 생일을 물고 늘어지다니 기가 막혔다.

나는 눈에 힘을 주어 그를 쏘아보았다.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오실 거예요?”

잘 살라고 응원은 못 해줄망정,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망신이라니.

그런데 아버지는 도리어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이 계집애가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은혜요?”

“그래. 네 한 몸만 잘 먹고 잘살면 끝이더냐? 가엾은 이 아버지는 보이지도 않고?”

“네?”

정말 장소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내가 갚아준 빚은 뭔데?’

남들처럼 지참금 주고 잘살라고 빌어주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빚을 얹어서 보내지 않았던가.

‘그래서 내가 당한 수모들은 또 뭔데? 그 뒤로도 애니 핑계, 오빠 핑계 대면서 수도 없이 돈을 가져갔잖아.’

머리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패대기치고 싶었다.

내가 폭발하기 직전, 이안이 입을 열었다.

“제가…….”

무섭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꼭 지옥에서 기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이안이 아버지의 어깨를 붙들었다.

“제가 너무 신사적이었던 모양이군요.”

꽈악 힘을 주면서 어깨 쪽 재킷이 우그러들었다. 아버지는 이안에게 압도되어 숨을 죽이고 굳어졌다.

이안이 아버지의 귓가에 둘만 들리도록 뭐라 속삭일 때였다.

통나무처럼 투박한 목소리가 또박또박 홀을 울렸다.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겁박하는 겁니까.”

“파넬 공작.”

이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아버지로부터 떨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 검을 든 거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바로 제임스였다.

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당신이 꾸민 짓인가.”

“…….”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제임스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 머릿속에 언젠가 들었던 케닌의 경고가 떠올랐다.

“파넬 공작이 최근 수도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제임스.”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빨개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내가 무얼?”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가 뻔뻔스레 반문했다.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왜 이렇게 속상한지, 나는 알고 있었다.

‘난 저 사람을 믿었어.’

케닌은 불안해했다. 의심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도리어 안심시켰다. 제임스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 비열한 방법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나는 지금 내 믿음을 배신당한 것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울음을 참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엉망으로 떨려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 명예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저를 비참하게 만들어서 당신이 얻는 게 무엇인가요?”

정말 나를 아내로 얻고 싶은 사람이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가. 도망칠 길을 모두 틀어막고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오는 것을 사랑이라고 포장할 수 있는가.

‘당신이 정말 그런 사람이었나?’

내 나름대로 간절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제임스의 반문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게 중요한가?”

“하.”

내 인격을 모조리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고맙네요. 마지막 죄책감까지 모두 없애주셔서.”

나는 솔직히 제임스가 내게 악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인정했다. 원하지도 않았고, 얼굴도 모르는 아내가 갑자기 전쟁에 나간 사이 다른 남자 손을 잡고 사라지다니.

‘그래, 그럴 수 있어. 분할 수도 있고 내게 화를 낼 수도 있지.’

하지만 가족까지 이용해서 모욕하는 건 너무한 것 아닌가.

‘심지어 내가 파넬에서 당했던 고통을 생각하면 저가 이렇게 당당할 수는 없지.’

아버지, 아니 플로렌스 자작과 제임스를 보니 몸의 피가 다 식는 느낌이었다.

내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제임스가 나타나서인지 플로렌스 자작이 더더욱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질렀다.

간 크게도 이번에는 황제를 향해서였다.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이 결혼은 무효입니다. 친아버지인 제가 반대하니까요!!”

얼떨결에 황제가 있는 곳을 돌아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대들은…….”

평소 포근한 만두 아저씨 같던 분이, 매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그가 와락 소리를 질렀다.

“짐이 우습나!!”

역시 황제라고 해야 할까.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이렇게 바락 고함을 지르니 전에 없던 박력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정말 화가 많이 나신 건지, 그는 발을 쿵 하고 굴렀다.

“감히 짐이 있는 자리에서 사적인 일로 분위기를 흐리다니! 정녕 짐이 진노하는 모습이 보고 싶은 겐가!”

“그, 그건……!!”

소인배인 플로렌스 자작은 막상 황제가 역정을 내니 터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 발 나선 것이, 바로 오늘 행사의 주인공 제임스였다.

“그만큼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폐하.”

“파넬 공작.”

황제의 푸른 눈이 잘 벼려진 칼날처럼 제임스를 향했다. 우두둑 이가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는 선을 넘었다.”

이 정도 황제가 정색을 하면 졸아들 만도 하건만, 제임스는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감정적으로 말씀하지 마시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따져주시지요.”

“감히.”

일국의 황제를 감정적이라고 재단하는 것인가.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이대로 화를 내도록 내버려 두면 안 돼.’

이 자리에는 외국 사절도 있을뿐더러, 보는 눈이 많았다. 여기서 황제가 권위로 그를 짓누른다면 두고두고 이런 말이 흘러나올 것이다.

황제가 충성스러운 파넬 공작의 아내를 빼앗아 동생에게 주었다고.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해.’

나는 침착하게 한 걸음 나섰다. 이미 마음이 식을 대로 식은 터라, 이제는 어떤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고 도리어 평온했다.

“폐하, 저 사람의 말은 전제부터 틀렸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카드가 몇 장이나 되겠는가. 나는 결국 평생 동안 감추고 있던 비밀을 꺼내 들었다.

“저 사람은 제 친아버지가 아니니까요.”

“그게 무슨 의미지?”

플로렌스 자작은 돌처럼 굳어졌고, 제임스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곧게 고개를 들었다.

지난 생에는 한 번도 내뱉어본 적 없던 나의 비밀.

‘하지만 이미 이안은 알고 있는걸.’

그리고 그런 비밀은 자신의 사랑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말해주었다. 오히려 고생했다고 다독여주었다.

그러니 나는 이 순간, 침착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의 뜻입니다. 제 친어머니는 플로렌스 자작부인의 언니, 멜리사 올랜도입니다. 저를 낳고 바로 죽는 바람에 동생인 플로렌스 자작부인이 저를 딸처럼 키우셨지요.”

“그에 대한 증거가 있는가?”

황제의 반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

“얼굴만 봐도 증거가 될 텐데요.”

누가 봐도 플로렌스 자작과 나는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는 애니와 같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아닙니다, 폐하! 저 아이가 타이론 대공비가 되고 싶은 욕심에 이제는 부모까지 부정하는군요!”

“그럼…….”

플로렌스 자작은 아니라고 펄떡 뛰었지만, 더 이상 황제는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가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그대의 친부는 누구지?”

“제 친부는…….”

거기서는 나도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내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아이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밝히지 않았으니까.

‘나는 내 아버지를 몰라.’

아버지에 대한 단서는 하나뿐이었다.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

‘하지만 이런 초라한 목걸이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검지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 순간 많은 이가 내 입술을 응시하고 있었다. 플로렌스 자작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사실대로 말하자.’

모르면 모른다고. 끝없이 꼬리표가 따라다녀도 괜찮다. 이안은 계속 나를 믿고 지지해줄 테니까.

“제 아버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렇게 나서고 싶진 않았는데.”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상석에서 울렸다. 나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오르세 왕국 사절단 중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흰 머리가 섞인 은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긴, 반듯한 이마에 차분하고 지적인 인상의 사내였다. 키는 크지 않지만, 우아함과 고상함에 몸에 배어 있었다.

그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그녀의 아버지입니다, 폐하.”

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나도 잘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와 나는 인상이 전혀 달랐다. 살짝 눈꼬리가 올라간 나와 달리, 그는 온화하고 인자해 보였다.

하지만 은빛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만은 똑같았다.

‘아버지? 정말로?’

이 세상에 붉은 눈은 흔치 않았다. 은발도 흔치 않다. 하지만 두 공통점에도 내가 아버지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나는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오르세의 마이옌 공.’

제국에 와서 고슈 백화점을 짓는 남자. 생제르망 상회의 주인.

그리고 오르세의 왕족.

전생에도 그와 나는 만난 적이 있었다. 대화도 했었다.

“실례합니다. 제 딸아이와 비슷해 보여서.”

하지만 그때 그는 돌아섰다.

그런데 왜 이번 생에는 그가 이리 선뜻 내 딸이라고 말한단 말인가.

‘아닐 거야. 그때도 아니었잖아.’

“저는 제 딸의 의사는 무엇이든 존중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딸의 의사를 들어보지요.”

말해주어야 했다. 헛된 기대를 하지 말라고, 돌이킬 수 없는 말은 하지 말라고.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저는…….”

하지만 그가 던지는 말이 너무나 달콤해서, 이기적인 나는 결국 그를 위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순간, 하고 싶었던 말을 큰 소리로 외쳤다.

“저는 이안을 사랑하고 있어요!”

“올리비아.”

이안이 감격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제임스가 쫓아오든, 플로렌스 자작이 악을 쓴들, 이 세상의 모든 신이 몰려와 파넬 공작부인이 되는 것이 네 운명이니 순응하라고 해도 나는 이제 이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이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황제는 지친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제 정말 이 주제로 논쟁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하지. 신물이 나는군.”

사실상 나의 혼인에 대한 논쟁 종결 선언이었다. 황제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제임스를 노려보았다.

“파넬 공작은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이야.”

제임스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떠오르지 않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플로렌스 자작만 화가 나서 쿵쿵 날뛰었다.

“이게 말이 되나! 무슨 증거로 이 아이의 아버지가 당신이라는 거야?”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는 건너편에 앉은 이들이 오르세 왕국 사절단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모양이다.

마이옌 공은 그런 플로렌스 자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멋진 대답을 했다.

“얼굴만 봐도 알 텐데.”

통쾌한 한 수였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에게는 무슨 증거가 있지?”

“그, 그건…….”

증거랄 게 뭐가 있겠는가. 그냥 태어나서 출생신고를 한 것이 증거지. 하지만 순간 플로렌스 자작은 어물어물거렸다. 그만큼 허술하고 멍청한 치였다.

‘머릿속이 어지럽겠지.’

그러게 입 다물고 있었으면 중간은 갔을 텐데.

나는 차가운 눈으로 내 아버지였던 남자를 쳐다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좋았던 추억이 없었다.

마이옌 공이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우리 딸아이를 맡아준 마음씨 착한 부부에게 거액의 수고료를 지불할 마음으로 제국까지 왔습니다.”

거액의 수고료.

딱 플로렌스 자작이 솔깃할 만한 말이었다.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대답하시지요. 당신이 정말 이 아이의 아버지가 맞습니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플로렌스 자작은 얼굴을 붉히고 동동 발을 굴렀다. 맹렬하게 머리가 굴러가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마이옌 공과 이안을 분주하게 오가며 바라보던 그가 결국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가, 감사료는 얼마나…….”

‘얄팍한 인간 같으니.’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마이옌 공은 불쾌한 기색도 없이 온화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런 자리에서 말하긴 그렇군요. 제가 나중에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플로렌스 자작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쥐새끼처럼 제임스의 눈치를 보다가 서둘러서 도망쳤다.

‘쌤통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수도의 저택은 이미 그의 아들이 팔아치워서 자신의 주머니로 빼돌린 참이었다.

‘집에 갔다가 길바닥에 내쫓기라지.’

그리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바로 그때였다. 눈앞에 그늘이 드리워진다 싶었더니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앞에 섰다. 제임스였다.

제임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말인가?”

“무엇이 말이죠?”

“그대가 플로렌스 자작의 친딸이 아니라고?”

“당신이 보시는 대로예요.”

누가 벽돌 아니랄까 봐. 여태 같은 자리에 있었으면서 왜 묻는지 모르겠다.

내 시큰둥한 대답에 제임스의 미간 주름이 더더욱 깊어졌다. 그가 뜬금없이 물었다.

“어째서 말을 안 했지?”

“왜 내가 당신에게 말을 해야 하죠?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요?”

“하지만 저자에게는…….”

제임스의 시선이 내 곁에 선 이안을 향했다. 이안은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대답했다.

“내가 올리비아의 남편이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소?”

그리고는 흘긋 나를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할까요, 진한 키스?’

기억력도 좋지. 나는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하지 마요! 하면 한 달 동안 이야기 안 할 거야.’

‘피, 당신이 먼저 권했으면서.’

‘농담이었다고 말했죠?!’

우리가 눈짓으로 대화를 하는 것을 본 제임스의 얼굴이 휴지 조각처럼 구겨졌다. 제임스는 입술을 구깃거리며 나를 바라보다가 휙 소리가 나도록 몸을 돌려 나갔다.

‘이쪽도 이제 해결된 것 같군.’

이제는 더 흠을 잡으려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웅성웅성거리며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긴장이 풀려 주저앉고 싶었지만, 내게 휴식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으니 말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마이옌 공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태도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손바닥 위에 내 손을 올렸다.

* * *

지난 생에서도 나는 마이옌 공을 만난 적이 있었다. 황실에서 주관한 행사였는데, 그때 나는 공적인 행사에서 우아한 진상에게 면박을 당하고 울고 있었다.

‘이게 결혼이야? 나는 평생 이런 상황에서 참고 살아야 하는 거야?’

어디 상담할 곳도 없어서, 속절없이 정원에 숨어서 울기만 했다. 그때 내게 손수건을 내밀어준 사람이 바로 마이옌 공이었다.

“괜한 참견이라면 죄송합니다. 손으로 비비면 눈이 다칠 것 같아서.”

난생처음 보는 사람의 호의를 쉽사리 받을 수가 없었던 나는 그의 손수건을 받지 않았다. 그는 멋쩍은 듯 웃었다.

“실례합니다. 제 딸아이와 비슷해 보여서.”

그 뒤로도 우리는 몇 번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계속 내게 상냥했다. 온갖 나라를 헤매며 찾아다닌다는 딸을 겹쳐보듯이 말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내게 자신이 아버지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다르단 말인가.’

신부님의 배려를 받아, 아무도 없는 텅 빈 대성당 예배당에서 나는 마이옌 공을 마주했다.

나는 내 앞에 선 마이옌 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버지?”

내 물음에, 시종일관 잔잔하던 그의 눈동자에 파문이 생겼다. 은은하게 붉어진 눈가가 나를 향했다. 분명 내 눈도 그럴 터였다.

“정말 당신이 제 아버지인가요?”

내 질문에 그는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이것이면 증거가 될까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은 물방울 모양의 투박한 펜던트였다.

“올리비아.”

깜짝 놀란 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반사적으로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익숙한 촉감이 손가락 끝에 걸렸다.

‘내 것이 여기 있는데 저기 같은 것이 있다는 건…….’

내가 흔들리는 눈으로 다시 마이옌 공을 응시했다. 그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 펜던트는 내가 직접 깎은 것입니다.”

그의 말에 펜던트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낮게 잠긴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얼굴을 보고 혹시나 했습니다만, 오늘 당신의 목걸이를 보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직접 깎아서 만든 크리스털은 이 세상에 두 개뿐이니까요.”

“하, 하지만 당신은…….”

지난 생에서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잖아요.

그 말은 목 끝에서 걸렸다. 그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전생에는 이 목걸이를 차고 다니지 않았어.’

진상들이 가장 싫어하던 게 바로 이 투박한 목걸이였다.

내가 시집오며 유일하게 들고 온 귀금속이 이렇게 초라하다는 사실에 그들은 길길이 날뛰었다.

“사랑도 받아봤어야 베풀지.”

“네가 이렇게 자랐으니 성정이 모가 났지.”

“폐하께서도 너무하시지, 어떻게 이렇게 모자란 아이를 우리 며느리로 정하셨담.”

‘내가 살려면 이런 건 눈에 띄면 안 돼.’

그래서 나는 하나뿐인 부모님의 유품을 보석함 가장 깊은 곳에 감췄다. 공적인 자리는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도 한 번도 착용한 적이 없었다.

“세상에…….”

그런데 바로 그 목걸이 때문에 내가 지난 생에는 아버지를 찾지 못했었다니.

‘맞아. 내 출생서류는 흠잡을 곳이 없으니까. 마이옌 공도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딸이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나는 유품인 목걸이를 늘 걸고 다녔다.

이안은 나를 그런 걸로 평가하지 않았으니까.

“정말 아버지세요……?”

내 눈에서는 결국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마이옌 공이 다가와서는 그런 내 손을 꽉 붙들어주었다.

오랜 시간을 헤매다가 잡은 손이었다.

* * *

몸이 흔들흔들거렸다. 꼭 요람에 누운 것만 같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나른한 몸을 가볍게 바르작거리니, 앞머리가 이마 너머로 넘어갔다.

‘바람이 부는 건가?’

얼굴이 간질간질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뿌옇게 흐렸다. 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눈앞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이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안.”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에 조각 같은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석양이 창문으로 길게 들어와서 방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내 침실이었다.

“내가 도대체 언제…….”

방으로 걸어들어온 기억이 없었다. 나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마이옌 공을 붙들고 울었고, 너무 우느라고 이야기를 못 하니까 내일 다시 만나자고 하고 헤어졌지.’

그다음이 흐릿했다. 미간을 찌푸리니, 이안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대답해주었다.

“마차에서요. 곤히 잠들었길래 제가 안고 올라왔어요.”

“아.”

우느라 기력이 빠져서 기절할 듯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안은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오늘 정말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지치는 게 당연하죠.”

“…….”

나는 입술을 다물고 오늘 하루를 떠올렸다.

‘맞아. 제임스가 플로렌스 자작을 데려왔었지.’

또다시 혼인무효장을 물고 늘어졌었다. 플로렌스 자작은 자신이 내 아버지라는 걸 강조하며 다시 나를 제임스에게 보내려고 했고.

‘제임스.’

내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해준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런 이안의 팔을 꽉 붙들었다.

“이안.”

이안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이거 꿈 아니죠? 진짜죠?”

저절로 손가락 끝까지 파르르 힘이 들어갔다. 이안은 반대 손을 들어, 내 손등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 진짜예요, 올리비아. 아버지를 만난 것도, 내 품에 안겨 있는 것도.”

“하아…….”

그 특유의 따끈한 손바닥이 내 마음까지 데워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나른한 숨을 쉬었다.

이안은 내 곁에 앉아서, 내가 마음을 가라앉힐 때까지 완전히 기다려주었다.

그의 다정함이 얼마나 내게 힘이 되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나는 그의 손바닥에 내 뺨을 비비며 말했다.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이안. 눈을 뜰 때면 지금이 꿈인 것만 같아요. 나는 다시 싸늘한 쪽방의 초라한 올리비아 파넬이 되죠.”

내 편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거대한 무덤 같은 저택, 나를 노려보는 세 명의 시어머니, 내 편을 들기는커녕 방관하기만 하는 남편. 친정 식구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가끔 찾아와서 돈을 달라고 닦달하는 것뿐.

‘의지가 될 가족이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달랐을까.’

가족.

내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목이 따끔따끔했다.

신기했다. 그렇게 울었는데도 또 눈물이 나오다니.

“……아버지를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눈을 적셨다.

이안의 손바닥이 내 눈을 문질렀다. 눈물이 그의 체온보다 더 뜨거웠다. 이안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어째서요? 한 번쯤 찾아볼 만도 했잖아요.”

“네, 맞아요. 그 때문에 로메오랑 친해졌죠. 이 크리스털이 오르세산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거든요.”

나는 얌전히 눈물을 닦아주는 이안의 손길을 받았다. 그리고 로메오를 떠올리니 기가 막히게도 웃음이 나왔다.

로메오의 집안인 알키저스는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오르세 왕국과 교역을 하는 집안이었다. 로메오는 늘 입버릇처럼 졸업하면 나를 오르세 왕국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럴 겨를조차 없었지. 졸업하기도 전에 파넬 공작과의 혼인이 결정되었으니까.’

오랜 꿈이 좌절되었음에도 나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도리어 나의 평온함 때문에 깨달았다.

사실 나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에서 내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리가요. 어렵게 찾았다고 해도 그쪽이 나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죠.”

로메오와 오르세 왕국에 가서 무얼 할까 떠들면서도, 나는 사실 내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친부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살다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버지가 나타났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말랐던 눈가가 다시 젖어들었다.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요, 이안?”

“올리비아.”

이안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붙들었다. 나는 훌쩍였다. 왜일까. 이 남자 앞에만 서면 나는 어린아이가 될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과한 행운을 거머쥐어도 될까요?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나의 얼굴을, 이안이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의 미소가 눈부셨다.

“당신은 많은 걸 바꾸었습니다. 평생 고자라고 불리면서 혼자 살 생각이었던 나를 사랑에 빠뜨렸잖아요.”

“하지만요, 나는…….”

그 미소 앞에 내 마음은 다시 쭈그러들었다. 나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두 팔을 뻗었다.

“키스해줘요, 이안.”

갑자기 내가 매달리니, 이안은 놀란 듯 몸을 굳혔다. 하지만 이내 내 몸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반듯한 살구색 입술이 부드럽게 내게 맞닿았다.

할짝.

꼭 강아지들끼리 얼굴을 비비는 것처럼, 우리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문질렀다.

‘내가 과거로 돌아와서 낸 용기는 이안에게 손을 내민 것뿐이야.’

다시 같은 인생을 살 엄두가 나질 않아서, 어떻게든 파넬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막무가내로 뽑아 든 선택지였다. 그로 인해 행복해질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바뀌었다면, 또 미래가 바뀐다면…….’

그건 당신의 다정함 덕분일 테지.

나는 체중을 실어서 이안에게 매달렸다. 순간 무게 중심을 잃은 이안이 그대로 기울어지다가 내 침대로 넘어갔다.

“엇!”

침대가 크게 출렁였다. 우리 두 사람의 위치는 이제 완전히 역전되어, 내가 그를 위에서 내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가슴팍을 짚고 앉아서 말했다.

“눈 감아요.”

그리고 손가락에 걸리는 이안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갑자기 적극적인 행동에 당황한 이안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몸을 일으켰다.

“자, 잠깐만요. 난 너무 좋은데, 아직 준비가…… 으앗!”

“괜찮아요, 하루쯤.”

우리는 부부인데, 사랑을 나누는데 무슨 준비가 필요하단 말인가.

“당신 품에서 잠들고 싶어.”

지금 내게는 꿈이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내가 이 아름다운 남자를 위에서 내려다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래에서 올려볼 때도 그는 조각 같았지만, 위에서 내려다볼 때도 그는 아름다웠다.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생겼지?’

속눈썹이 촘촘히 달린 우아한 눈매도, 오뚝한 코도, 반듯한 이마도.

어디 한 군데 못난 구석이 없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게다가…….’

벌어진 셔츠 안으로 드러나는 흰 가슴 또한 탄탄하고 매력적이었다.

저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리고는 내가 홀린 듯이 이안의 가슴팍만 보았다는 걸 깨달았다.

‘으으, 부부가 된 지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넋을 놓고 보다니!’

이게 다 익숙하지 않은 각도 때문이다!

정신 차리라는 뜻에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니, 이안이 피식 웃었다.

“무리하지 말아요.”

“무리하는 게 아니에요.”

은근슬쩍 몸을 일으켜 앉으려는 그의 가슴팍을 내가 꽉 눌러 다시 눕혔다.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껌뻑거렸다.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나, 나도 당신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우리 관계를 주도해야 한다.

토마토처럼 빨간 얼굴로, 당찬 포부(?)를 밝히자, 이안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안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요. 응원해드릴게요.”

“……얄미워.”

지금 우리 관계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건지! 내가 지금 당신을 덮치고 있다고.

‘어디 두고 보라지.’

하지만 나의 포부와 달리, 손길은 어색하기만 했다. 셔츠를 벗겨낸 나는 어설프게 그의 옆구리를 더듬어갔다. 이안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간지럼 피우려는 거라면 성공이신데.”

“입 다물어요.”

나도 지금 땀이 뻘뻘 나거든요.

내가 이안을 흘겨보니,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예쁘게 울어드릴까요?”

“당신, 진짜.”

자꾸 이렇게 장난 칠 거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 목을 조이던 단추를 툭툭 풀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휙 소리와 함께 몸이 뒤집혔다. 방금 전까지 아래 깔려 있던 잘 생긴 얼굴이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 잠깐만요! 이건 반칙이잖아요!”

“미안해요.”

이안의 손가락이 내 목덜미를 쓱 쓸어내렸다. 바로 방금 단추를 푼 그곳이었다.

“내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 * *

해가 지기도 전에 침대에 들어간 지라, 욕심을 부린 뒤에도 여전히 밤이 깊지 않았다.

이안은 자신의 품에 안겨서 새근새근 자는 여자를 내려보았다.

‘으으, 도대체 누구보고 잔망스럽다는 건지.’

평소에는 수줍음을 그렇게 타더니만, 또 이럴 때는 세상 씩씩했다.

어떻게 밤을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자신을 유혹하던 순간부터 그의 눈은 휙 돌았으니까.

‘이 요물!’

진짜 어디서 이런 여자가 갑자기 불쑥 나타났단 말인가. 살면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길 거라고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이안은 조금 신기한 눈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눈이 아플 것 같은데.’

그렇게 서럽게 우는 여자는 처음 봤다.

‘그만큼 속상했던 거겠지.’

마이옌 공이 자신의 친부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올리비아는 숨이 넘어가도록 울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슬펐는지 묻고 싶을 정도로.

‘얼음이라도 대줘야 하나.’

하지만 곤히 자는 여자를 깨우고 싶지도 않았다. 이안은 흰 얼굴을 따뜻한 눈빛으로 내려봤다.

방문이 울린 건 바로 그때였다.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전하.”

단정한 목소리는 케닌이었다.

‘잠든 올리비아는 깨어 있을 때와 느낌이 달라서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는데.’

하지만 눈치 없이 이 시간에 찾아온다는 것은 그만큼 중대한 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이안은 혀를 차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쯧.”

침실에 구비되어 있는 가운을 걸치고 낙낙한 바지를 입고 나오니 문 앞에 케닌이 쓴 약이라도 삼킨듯한 표정으로 공손하게 인사했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아무래도 전하께서 기꺼워하실 것 같아서 붙잡아두었습니다.”

“누가 찾아왔는데?”

“플로렌스 자작입니다.”

“호오.”

뜻밖의 이름이었다. 이안은 입술을 비틀었다.

‘안 그래도 잡아두려고 했는데.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고 제 발로 들어왔군.’

올리비아의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수많은 사람 앞에서 까발려졌는데도 여길 찾아오다니 낯짝도 두꺼운 치였다.

이안은 케닌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내가 많이 만만해 보이나 보군. 그렇지 않나, 케닌?”

“비전하와 결혼하신 뒤로 이미지가 많이 바뀌시긴 했죠.”

케닌은 이마에 맺히는 땀을 문질러 닦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왜 하필 내가 오늘 당직이란 말인가.’

이안의 보좌관은 총 3명. 매일매일 여기서 숙식할 수 없으니, 돌아가면서 당직을 선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운이 없는 비혼주의 남성, 케닌의 차례였다.

‘젠장! 부부의 침실문을 두드리는 것도 상당한 담력을 요구했는데, 이제 심기 불편한 주인과 함께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한낱 월급쟁이가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얌전히 비위 맞추며 따르는 수밖에.

이안은 입술을 비틀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참 웃기는 일이야. 나는 올리비아에게만 친절해지고 싶은데, 다들 내가 친절해진 줄 알고 기어오르니.”

“…….”

눈치 빠른 케닌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조금 걸으니 플로렌스 자작을 가두어둔 방이 나왔다. 걸신들린 것처럼 대접 차원에서 나온 과자를 흡입하고 있던 자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 각하.”

‘저게 뭔 손님이라고 과자를 대접하고 앉았어.’

이안의 눈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갔다. 이안은 손을 들어 목을 치는 포즈를 취해 보였다. 바로 알아들은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는 디저트와 차를 내온 시종을 갈구러 데리고 나갔다.

케닌이 이안의 눈치를 보다가 엄한 목소리로 자작을 꾸짖었다.

“전하라고 불러야지. 무엄하네!”

“죄, 죄송합니다.”

아까 대성당에서는 파넬 공작을 믿고 대거리질을 해대더니, 이제는 또 벌벌 긴다. 그 모습이 우습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쾌했다.

이안은 턱을 꼿꼿하게 들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그래, 여긴 무슨 일로?”

“그, 그게…….”

플로렌스 자작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할 말은 내뱉었다.

“저의 집을 판 돈을 받으러 왔습니다.”

너무나 뻔뻔한 요구에, 도리어 이안의 머리가 인지 부조화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그는 턱을 문지르며 물었다.

“집? 플로렌스 저택 말인가.”

“예.”

기가 막혀서. 이안은 팔짱을 끼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걸 왜 여기서 찾지? 그걸 판매한 건 그대의 큰아들일 텐데.”

“그, 그게.”

이안이 사실 정황을 모를 줄 알고 얼렁뚱땅 돈을 받아내려 했던 플로렌스 자작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굳어졌다.

식은땀을 흘리는 플로렌스 자작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안은 코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문전박대당했나 보군.’

저 같은 아들을 낳았을 테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여길 찾아오다니.’

어지간히 배알도 없고 뻔뻔한 작자였다.

플로렌스 자작은 이미 버린 이미지, 더 버릴 것도 없다고 생각한 건지 오히려 어깨를 펴고 당당히 말했다.

“올리비아는 제 장녀가 아닙니까.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있습니다.”

“부모가 아니지 않은가.”

“네?”

“올리비아는 친아버지를 찾았어. 그런데도 장녀라고 칭한다고?”

“아, 아무리 핏줄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키워준 정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여러모로 기가 차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작자들은 자기 자신조차도 속일 수 있는 이들이었다. 이안은 친권에 대해 짚는 대신, 선을 그었다.

“그건 마이옌 공이 치르기로 했지. 타이론과는 관계가 없다.”

키워준 값을 받고 싶다면 친부모를 찾아가면 그만이다. 이안의 칼 같은 거절에 자작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 그렇다면…….”

아직도 할 말이 있단 말인가. 이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을 때였다.

플로렌스 자작은 진지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제 막내딸의 값을 치르십시오.”

또 개소리였다.

“……막내딸?”

이안은 귀를 의심했다.

‘미친 사람과 마주하고 있어서 내 귀도 미쳤는가.’

플로렌스 자작은 친절하게 이런 이안의 의심을 풀어주었다.

“전하께서 제 딸 애니를 데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랑스러운 아이인 데다가 언니와도 잘 지내니 후처로 들이기 딱 맞습니다.”

진심으로 막내딸의 값어치를 운운한 것이다.

‘와, 쓰레기.’

상상도 못 할 그의 발언에 케닌은 입을 딱 벌리고 감탄했다.

이안의 눈빛은 케닌보다 더 심했다. 차가움을 넘어서 이제는 벌레를 보는 것 같았다. 이안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서 값을 치르라고?”

“예.”

“처제가 노예인가? 자신에 대한 권리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데 어찌 그대가 함부로 사고 팔고 하지?”

이 쓰레기는 마땅히 받을 질문에도 당당했다.

“자식이라면 당연히 부모가 권리를 가지는 것이지요. 그럼 자식을 왜 키웁니까?”

진심으로 자식을 재물의 한 종류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를 마주하고 있으니, 이안의 머릿속에는 자연히 한 사람이 떠올랐다.

‘올리비아.’

친아버지를 만나서 정신을 잃도록 울던 모습.

‘바로 이 사람 때문에 그토록 슬퍼했던 것이군.’

이런 부모 밑에 있을 바에는 차라리 부모 없이 사는 편이 나을 지경이었다.

“나는 그대에게 많은 걸 베풀었네. 그저 수도에만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면, 호화로운 저택과 생활비를 보증해주기로 했지.”

“제가 노예입니까? 아무리 전하라고 하셔도 부당한 명령이십니다.”

아직도 제가 올리비아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건지, 이안 앞에서 발끈하는 태도가 퍽 건방졌다. 이안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서 파넬 공작의 손을 잡았나.”

이안의 반문에 자작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리고 또다시 내 앞에 얼굴을 내밀고?”

이안의 계속되는 지적에 자작은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부렸다.

‘끔찍한 인간이군.’

이런 사람이 평생 벌레처럼 붙는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이걸 감내하고 있었을 올리비아에 대한 안타까움도 우물처럼 퐁퐁 솟아났다.

‘가만둘 수 없어. 수도 밖으로 쫓는 것만으로도 안 돼.’

결국 이안은 결심했다. 눈을 감았다가 뜬 그는 엄한 목소리로 케닌에게 명했다.

“케닌, 이자를 나의 영토, 롤렌스 공국으로 이송하거라.”

“예, 전하.”

케닌이 손짓하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구석에 서 있던 경비병들이 자작을 붙들러 다가왔다.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자작은 꽤액 소리를 질렀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하. 제가 왜 공국으로 가야 합니까?”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자작은 무의미한 발버둥을 치며 끌려나갔다.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케닌은 혀를 찼다.

제국의 법은 귀족이 귀족을 사사로이 치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공국.

공국은 제국의 법과 달리 자율적으로 돌아간다. 공국의 주인인 대공은 공국 내에서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즉, 공국 국경을 넘는 순간 저 남자의 처우는 모두 이안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는 뜻이었다.

‘평생 콩밥 먹으면서 반성하길.’

과연 반성이나 할지 모르겠지만.

케닌은 제 운명도 모르는 버러지의 등 뒤에서 성호를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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