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미운 정도 정이라고 (11/28)
  • 6장. 미운 정도 정이라고

    오르세 왕국에서 시작되어 이제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생제르망 상회.

    그 오너는 놀랍게도 오르세 왕국의 왕족인 샤를 드 로렌이었다. 공식적인 직함은 마이옌 공.

    본래 왕위계승 후보로 언급될 정도로 혈통이 완벽하였으나,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며 왕위계승권을 포기한 로맨티스트이기도 했다.

    하지만 개인사 측면에서는 불행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는데, 그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게 한 여자와 결국 결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왕위계승권 문제로 분쟁을 치르는 동안, 그를 지지하던 세력은 그녀를 다른 곳으로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찾을 곳은 제국뿐인데.’

    그가 상회를 운영하게 된 것도 순전히 그 여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오르세 왕국 내에 있을 줄 알았으나, 그녀는 갓난아기를 안고 국경까지 넘었다.

    ‘포기해야 하나.’

    아내를 찾아 헤맨 지, 이미 20년.

    이제 대륙에 그가 찾지 못한 나라는 제국뿐이었다.

    ‘멜리사.’

    사랑하는 여인을 떠올리며 샤를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릴리아나 화이트폴 영애 문제로 한차례 폭풍이 지난 뒤, 우리는 또 다른 폭풍을 맞이해야 했다.

    다름이 아니라, 황태자 전하 앞에서 제임스와 삼자대면을 하기로 한 날이 다가온 것이다.

    ‘구여친 다음에는 구남편이냐.’

    아주 지긋지긋했다. 왜 이렇게 지난 사람에 미련을 가지는 건데?

    ‘제발 포기 좀 해라, 좀.’

    난 그렇게 빌었지만, 제임스도 릴리아나도 호락호락할 것 같지가 않았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입술을 짓씹으려다가, 애써 발라놓은 화장이 뭉개질까 봐 참았다가를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똑똑 울리더니 이안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올리비아, 준비 다 되었습니까?”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순간 손바닥으로 입을 꾹 누르고 말았다.

    ‘잘생겼어!’

    아니, 얼굴이 휘황찬란한 것은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갑자기 왜 빛이 나는데!’

    멋들어진 스트라이프 정장에 센스 있는 산호색 행커치프가 돋보였다. 워낙에 몸의 선이 예쁜지라, 찰싹 달라붙는 정장이 무척 잘 어울렸다.

    나는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좋아요. 이미 이겼어요.”

    “네? 무슨 말이에요.”

    “그런 게 있어요.”

    문득 왜 이안이 레스토랑에서 릴리아나에게 나를 처음 보일 때 최대한 화려한 보석을 달고 싶어 했는지 이해했다.

    ‘아무리 남에게 둔하고 자존감이 높은 제임스라도 이안을 보면 움찔하겠지.’

    저런 절대 미모의 사내가 이 세상에 흔치 않지.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다 되었어요. 이제 나갈까요?”

    “아, 잠깐만요.”

    나는 오늘 로즈핑크의 목을 덮고 소매가 없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심심해 보일 수 있는 디자인이라, 목에 길게 스카프를 둘렀는데, 이안이 그걸 붙들었다.

    “리본이 헝클어졌어요.”

    “어차피 가서 다시 매야 할 텐데…….”

    나는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이안이 리본을 고쳐주길 기다렸다.

    사르륵.

    손가락이 긴 면을 잡아당기니, 부드러운 천이 풀렸다. 예민한 살갗에 이안의 손가락이 살짝살짝 스치는 느낌이 은근했다.

    “자, 다 되었어요.”

    “고마워요.”

    언제 다 묶나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이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비켜줘야 하는 남자가 내 앞을 지키듯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안?”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올려보았을 때였다. 그가 사르르 눈을 휘어 웃으며 말했다.

    “예뻐서요.”

    덕분에 내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 *

    중재 장소는 바로 황태자궁이었다. 마차에서 내려서 조금 걸으니 마침 비슷한 시간에 황태자궁에 도착한 제임스와 마주할 수 있었다.

    ‘제임스.’

    여전히 옷 챙겨줄 사람이 없는지,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까만색으로 도배하고 있었다.

    ‘아휴, 진짜. 저렇게까지 색을 맞추면 오히려 성의 없어 보인다니까.’

    오기 전에는 ‘이안이 이겼다!’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충 입고 서 있는 그를 보니 챙겨주고 싶은 오지랖이 불쑥 솟아났다.

    ‘무섭다, 세월.’

    이게 바로 미운 정이라는 건가.

    부산스러운 내 마음과 달리, 제임스도 이안도 한마디 인사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

    자꾸만 시선이 그리로 가는 걸 억지로 참고 앉아 있으니, 빨간 재킷에 활동성이 돋보이는 승마 바지 차림의 황태자가 자리에 착석했다.

    ‘이안과 그러고 보니 많이 닮았네.’

    비슷한 색채의 금빛 머리카락이나, 연한 푸른 눈동자나.

    ‘따지고 보면 조카니까.’

    이안이 선황의 자식으로, 현황제의 형제라면 스타티스 황태자에게는 작은아버지가 된다.

    두 사람의 계보를 헤아리고 있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런데 정작 형이자 아버지는 토실토실한 곰처럼 생겼잖아.’

    도대체 그 외모는 어디서 튀어나온 거란 말인가.

    어쨌든 황태자가 앉음과 동시에 본론을 꺼냈다. 첫 마디는 공식장소와 달리 무척 불량했다.

    “내가 중재를 맡겠다고 하긴 했는데, 말이지. 애초에 내 중재가 필요한 일인가 싶은데.”

    ‘서두부터 강하다!’

    이참에 제임스를 찍어내겠다고 생각하고 행차한 나였지만, 스타티스 황태자의 차가운 말에 저절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제임스를 흘긋 바라보았다. 제임스 또한 황태자가 이미 타이론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턱에 힘을 주고 있었다.

    조금의 침묵 끝에 입을 연 건 제임스였다.

    “……지금 전하께서는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 중재를 자청하셨다는 뜻입니까?”

    제임스답지 않은 날카로운 반문이었다.

    ‘저렇게 따질 줄도 알았어?’

    지난 생에서 제임스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황제에게 충성했다. 황제가 가라면 사지인 줄 알면서도 나서는 충성스러운 기사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왜 지금은?’

    전혀 제임스답지 않은 태도였다. 내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을 때였다.

    스타티스 황태자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반듯한 입술이 지금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파넬 공작, 그대는 혼인무효 자체가 그대의 의지가 아니었으므로 무효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혼인무효장에 찍힌 것은 분명 파넬 공작가의 인장이지.”

    “인장을 가주의 허가 없이 찍은 범인들은 집 안에 구금해둔 상태입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진상들을 가두었다고?’

    그가 보인 여러 가지 새로운 모습들이 나를 놀라게 했지만, 가장 놀라운 건 저 말이었다.

    ‘나랑 결혼한 게 아니라 어머니들이랑 결혼한 것 같았던 저 남자가?’

    제임스 파넬은 절대로 어머니를 거스를 수 없다. 그 판단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까지 결혼을 유지하고 싶다고? 도대체 왜?’

    결국 모든 일은 이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도대체 왜?

    ‘이해를 못 하겠어.’

    마음이 다시 흔들흔들거렸다. 하지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 곁에서 나처럼 입술을 꾹 깨물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안의 기척이, 놀랄 만큼 내 마음을 빠르게 안정시켜주었다.

    ‘……이해할 필요도 없지.’

    어차피 이제는 남인 사람이었다. 가족일 때나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지.

    ‘그리고 그 진상들에게 실권을 준 건 바로 당신이잖아.’

    마음을 다잡은 나는 다시 뾰족한 시선을 던졌다. 스타티스 황태자 또한 그 부분을 지적했다.

    “허나, 전장에 나가며 자네가 직접 그대 가문의 인장을 맡겼을 것 아닌가. 그대를 대신해 봉사해온 믿음직한 대리인에게, 이번 일이 그대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몰아세우는 건 지나치게 과한 처사가 아닌가 싶은데.”

    “그건…….”

    역시나라고 해야 할까. 진상들에 대한 지적이 나오자, 제임스는 말문을 흐렸다.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제임스를 보던 황태자의 무미건조한 시선이 이번에는 나를 향했다.

    “그대의 의지는 어떠하지?”

    내가 가장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었다. 나는 냉큼 대답했다.

    “죽어도 파넬로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부인!”

    내 대답에 제임스가 분을 내며 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저놈의 부인, 부인, 부인!

    ‘저 호칭이 익숙하게 들리는 내가 싫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지난번에도 이야기했는데. 마찬가지로 호칭에서 불쾌감을 느낀 이안이 입술을 비틀었다.

    “내 부인을 왜 자꾸 그대의 부인이라고 칭하는지 모르겠군.”

    이안의 차가운 목소리에, 제임스가 그를 응시했다. 어두운 밤하늘 같은 회청색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남편이 전장에 나간 사이 아내를 도둑질한 주제에 왜 이리 당당하지?”

    “도둑질? 파넬에서 핍박당하던 여자를 구해준 것 아니고?”

    “핍박? 남의 가정사를 그렇게 폄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폄훼라.”

    이안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그 싸늘한 눈빛을 보고 진정 즐거워한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공작은 정녕 올리비아가 파넬에서 당하고 있는 불합리한 일들을 알지 못했나?”

    그러면서 이안은 최대한 감정 없이, 내가 파넬에서 당했던 일들을 나열했다.

    집안에서 가장 허름한 방에서 덜덜 떨고 살며.

    식사도 제때 못하고.

    욕설과 매질까지.

    ‘으아, 다른 사람 입으로 들으니 정말 막장이었다 싶네.’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내가 그렇게까지 푸대접을 받았는지 몰랐던 황태자 전하가 눈살을 찌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부끄러움에 살짝 뺨을 붉혔다.

    이안의 말을 들은 제임스의 얼굴 또한 창백하게 질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결국 한숨 섞인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최대한 전장에서 일찍 돌아오려고 했다.”

    그 말 또한 내게는 의외였다.

    ‘답장을 그딴 식으로 보냈길래 아예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더니.’

    이것이 지난 생과 사건의 시간대가 조금씩 어긋난 이유였던 모양이다.

    제임스의 말에 이안은 지극히 냉소적으로 반문했다.

    “그대가 돌아온다고 해서 뭐가 좋아지는데?”

    그 또한 핵심질문이었다. 제임스가 오고 생활이 나아졌다면 나도 참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진정한 지옥은 제임스가 돌아오고 벌어졌지.’

    지난날들을 떠올리자 일말의 안타까움조차도 가뭄처럼 말라버렸다.

    물끄러미 대화를 관전하고 있던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며 홍차 잔을 기울여 안에 담긴 남은 홍차를 모두 쏟아버렸다.

    더 이상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제스처였다.

    “결론은 이미 나와 있군. 지금 그대는 아집을 부리고 있네. 전 부인의 새로운 생활을 축복하고 물러나도록 하지.”

    하지만 제임스는 그에 수긍하지 않았다.

    “이런 대화는 부당합니다.”

    뭐래, 이 벽돌이.

    결국 이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나는 찻잔을 들고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애초에 이 대화 자리가 있어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손가락이 떨려, 홍차에 파문이 일었다. 나는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찻잔을 굳이 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여유롭고, 당당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부당? 진정 부당한 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당신과 혼인해야 했던 거겠죠.”

    제임스의 얼굴이, 오늘 처음으로 선명한 감정을 뗬다.

    서운함이었다.

    “하지만, 그대는 나를 모르잖아.”

    “모른다는 점이 부당하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태연스레 대꾸했지만, 사실 내 마음도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나 또한 제임스와 나름의 유대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제발 이번으로 마지막 하자.’

    그를 상처 입힌다고 해서 내 마음이 후련해지지도 않았다.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지기만 할 뿐.

    “나는 분명히 말했어요, 파넬 공작. 우린 끝이에요. 애초에 시작도 한 적이 없지만요.”

    나는 그런 바람을 담아, 더더욱 매정하게 말했다.

    * * *

    이번엔 꽤 충격이었는지, 제임스는 비슬비슬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

    달그락.

    그제야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왈칵 엎질러진 홍차가 둥글게 점점 퍼져나갔다.

    나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스타티스 황태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못난 모습을 보여 송구합니다, 전하.”

    스타티스 황태자는 턱을 괴고 앉아서 툭 내뱉었다.

    “타이론 대공하고 이혼하고 나랑 결혼하지.”

    “예?”

    근데 이게 무슨 소리야.

    ‘이, 이혼? 또 재혼? 내가 누구랑?’

    스타티스 황태자는 뒤로 보고 앞으로 봐도 여자였다.

    ‘여자가 지금 나한테 청혼을 한 건가.’

    상상도 못 한 상황이라 오히려 머리가 돌처럼 굳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안이 내 어깨를 확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헛소리 마시죠, 전하. 제 아내가 무척 늠름하고 멋진 건 인정하지만, 신혼부부에게 이혼이라뇨!”

    내가 들은 소리가 맞나 보다. 나는 둔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너무 당황한 덕분에 떨리던 손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황태자는 어린애처럼 입술을 삐죽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대에게는 과한 신부야.”

    “전하께서는 여자 아닙니까!”

    이안의 반박에, 황태자는 의외로 논리정연한 대답을 내놓았다.

    “한 나라의 지존에게 반려가 남자 여자 둘 다 있는 게 뭐 어떻다고. 게다가 대공비는 내 약혼자와도 절친한 사이이니 투기하지 않고 사이좋게 내정 운영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아, 듣고 보니 그러네요.”

    역대 황제 중에 황비로 남자를 둔 황제도 있는데 뭐! 여자 황제가 여자 황비를 둘 수도 있는 거지!

    ‘게다가 로메오라니. 혹하긴 한다.’

    로메오 알티저스. 내 하나뿐인 친구 아닌가.

    조금만 생각해봐도 너무나 잘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눈을 반짝거릴 때였다. 이안이 나를 꽉 끌어안으며 툴툴거렸다.

    “저런 빈소리에 솔깃하지 말아요, 올리비아. 나는 저 무식한 남자처럼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거니까요.”

    ‘순순히 물러갔나.’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로 이게 마지막이면 좋겠는데.’

    왠지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에 이안의 팔을 꽉 붙들었을 때였다. 스타티스 황태자가 찻잔에 각설탕을 와르르 쏟으며 말했다.

    “대공은 내게 아주 큰 빚을 졌어.”

    “제가요?”

    이안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뻔뻔스레 대꾸했다. 황태자는 입술을 비틀었다. 사실 그녀는 지금 머리가 아팠다.

    “파넬 공작이 지금 저 상태에서 다시 북부로 갈 것 같은가? 나는 북부로 떠날 믿음직스러운 다른 부하를 찾아야 한다고.”

    “어차피 가겠다고 자원하는 곳은 열 손가락 넘을 것 아닙니까.”

    “파넬처럼 욕심 없이 명을 따르는 부하가 흔한 줄 아나.”

    제임스가 자기 몫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건, 그의 성품도 성품이었지만 집안에서 제대로 이권을 따지고 거래할 수 있는 어른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생에도 느끼긴 했지만 새삼 입맛이 쓰네.’

    지난 생에서 파넬 공작부인으로서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도 이런 부분이었다. 나는 제대로 가문의 이득을 받아내려고 하는데 주변에서는 이런 시선을 쏟아냈다.

    “파넬이 변했어!”

    “저 여자 때문이야. 과연 파넬 대부인의 말대로 악독한 여자로군.”

    내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남편은 목숨 걸고 전장에 나갔는데 제대로 된 보상도 못 받았지, 남편과 상관없는 사업을 벌이는데도 반응들이 죄 저러니 말이다.

    ‘설마설마했는데 황실에서도 호구 취급이었군.’

    이제 제임스와는 남남이건만, 미운 정이 남아서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이참에 북부에서 돌아온 게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제임스가 북부에서 복무한 10년. 그 긴 세월의 헌신을 그는 제대로 보답받지 못했다. 어차피 받지 못할 보답이라면 일찌감치 돌아오는 편이 나았다.

    ‘지금이야 나한테 집착하지만, 서서히 자신의 상황도 돌아보게 될 거고. 그러다 보면 새 사람도 만나겠지.’

    다른 여자와 혼인을 한 제임스라니. 상상해보려고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까지는 내가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내가 제임스에 대해 떠올리고 있는 사이, 이안과 스타티스는 계속 북방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화이트폴 후작을 보내면 딱이지만, 은거 중이니.”

    “지금 저보고 찾아가라고 눈치 주는 겁니까?”

    “일꾼을 내보냈으면 책임도 져야지.”

    “너무하시네요.”

    만담하는 것 같이 가볍게 대화가 오고 갔지만 그렇게 가벼운 주제는 아니었다.

    ‘화이트폴 후작.’

    최근 자주 오르내리는 그 이름.

    ‘내가 한참 사교계 활동을 할 때에 그는 은거 중이 아니었어.’

    이 무렵이야 진상들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라 정확히 사교계의 동향이 어떤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파넬 공작부인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을 무렵, 화이트폴 후작을 만난 적이 있었다.

    ‘온화한 신사였지.’

    이안이 그를 친아버지처럼 존경한다고 말하는 게 당연했다. 척 보기에도 그의 인품은 훌륭해 보였으니까.

    ‘그가 두문불출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이안이 말한 그 사건 때문일 거야. 후에 그가 다시 활동을 한다는 건 그 문제가 풀어졌다는 것.’

    결국 문제는 한 사람으로 귀결되었다. 얼마 전 저택에 찾아와서 안하무인으로 굴었던 한 여성.

    ‘릴리아나 화이트폴.’

    타오르는 불꽃 같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지만 지난 생에서 나는 그녀를 만난 적이 없는데.’

    저렇게 화려한 외모를 가진 여성을 모르고 지나쳤을 리가 없다. 게다가 결혼한 집에 찾아와서 부인에게 이혼해달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당돌함이면 이안을 쉬이 포기했을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릴리아나라. 분명 어디서 들은 이름인데.’

    “아!”

    그때였다. 번뜩 떠오르는 한 줄 소식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타티스 황태자와 투닥거리던 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올리비아?”

    “아, 아니…….”

    순간 과거의 기억이 섞여들어서 이안의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왜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그녀구나. 폴카의 왕비가 된 여자.’

    폴카가 제국과 동맹을 맺으며 제국에서 왕비를 맞이하고자 한다. 다들 황녀들 중 하나가 결혼을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 인물이 시집을 갔는데 그게 바로 화이트폴 영애, 릴리아나였다.

    ‘무척 간절하게 자청했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두 가지 이유가 다 함께 맞물려서 그녀가 왕비가 된 것이었다.

    릴리아나의 의견, 그리고 그녀를 최대한 멀리 보내어 이안을 자유롭게 하고 싶었던 황제의 의중.

    ‘말도 통하지 않는 먼 타국에서 왕비가 되는 게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안이 과거에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내가 대공이어서 좋아요?”

    “내가 황족이라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

    유추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이안의 혈통이 좋았던 것이다.

    ‘기가 막혀.’

    혈통 때문에 친부모도 아닌 사람들 밑에서, 평생 그림자처럼 살아온 남자에게 그 사실이 얼마나 큰 상처였을까.

    ‘세상에. 너무 불쌍해.’

    오죽하면 대국민 고자를 자처했을까.

    나는 울컥해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다정한 눈빛을 맞춰왔다.

    “올리비아, 왜 그래요? 많이 피곤합니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고 갑자기 생각할 게 있어서요.”

    “어떤 생각이요?”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당신의 힘이 되어주고 싶어.’

    나는 이안의 손을 꽉 잡았다. 이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올리비아?”

    “…….”

    말을 꺼내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잠시 그의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하여간.”

    턱을 괴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스타티스 황태자가 여상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믿음직한 후임자를 구할 수 없다면 그대가 대신 북방으로 출정해주어야 해, 타이론 대공.”

    “네?”

    아니,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람. 나와 이안은 딱딱하게 굳어져서 황태자를 마주 보았다.

    * * *

    어두움이 아른아른한 거리에서 반백 머리 중년이 술잔에 술을 왈칵 부었다.

    술을 얼큰하게 마신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턱을 시근거리며 중얼거렸다.

    “올리비아.”

    그는 바로 올리비아와 애니의 아버지 플로렌스 자작이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인지.’

    그는 고향에 있었다. 물론 이안의 말을 대단히 잘 들어서가 아니었다.

    지난주 그는 씩씩하게 수도로 올라갔다. 하지만 관문조차 통과할 수가 없었다.

    “귀하는 수도 방문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힌 상황인가. 수도에 집을 가지고 있는 귀족이 수도로 들어갈 수 없다니.

    ‘내가 대역죄인도 아닌데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타이론 공작이 뭐라고.’

    아무리 공작이라고 해도 이런 패악을 부릴 수는 없었다.

    물론, 이안이 막무가내로 그를 협박하여 수도에서 내쫓은 것은 아니었다. 플로렌스 자작은 아주 거대한 저택과 사용인들, 그리고 꽤 많은 액수의 품위유지비를 받았다.

    그럼에도 수도에 올라간 것은 딱 한 가지 이유였다.

    바로 저잣거리에서 주워들은 소문.

    “타이론 대공가? 타이론이 대공이 되었다고?”

    바로 이안 타이론의 출생의 비밀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플로렌스 자작은 발을 구르며 분노했다.

    “제길! 이제 공국의 비가 되었는데 아버지를 이렇게 박대해? 키우지 않아도 되는 것을 길러줬더니만 은혜도 모르고.”

    올리비아와 이안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아주 여우 같은 놈이었다.

    ‘일찌감치 떼어준 거야. 대공이라 발표하기 전에.’

    이안이 건넨 저택과 품위유지비도 대공이라는 지위 앞에서 색이 바랬다.

    ‘이 늙은 아버지 하나 챙기기 싫어서. 이 못된 계집애 같으니.’

    그리 생각하며 플로렌스 자작은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바로 그때였다. 묵직한 목소리가 그의 곁에서 들려왔다.

    “플로렌스 자작인가.”

    “누구……!!”

    이 시골 촌구석에서 그를 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플로렌스 자작이 새우 눈을 뜨고 옆을 확 째려봤을 때였다.

    통나무가 서 있는 것 같은 단단한 몸의 사내가 서 있었다. 플로렌스 자작 따위는 한 손으로 뭉개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누, 누구십니까?”

    그를 보니 저절로 분노 조절이 되었다.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군, 플로렌스 자작.”

    빌빌거리는 그를, 표정 없이 내려보며 사내가 자신을 소개했다.

    “제임스 파넬이오.”

    * * *

    “믿음직한 후임자를 구할 수 없다면 그대가 대신 북방으로 출정해주어야 해, 타이론 대공.”

    스타티스 황태자는 여상스레 말했지만, 웃어넘길 수 없었다.

    ‘정말 권하는 말이었을 거야.’

    북방의 전투는 여러 가지 이권이 얽혀 있는 복잡한 곳이었다. 지금 대륙은 굉장히 안정적이어서 실제로 전쟁에서 공훈을 세울 수 있는 곳이 드물다.

    그래서 군권으로 기틀을 잡았던 가문에서는 호시탐탐 노리는 자리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욕심이 많은 사람이 가게 되면 여러모로 위협적이기도 했다. 견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제임스는 그런 자리를 차지했으면서도 빈손으로 털레털레 돌아왔던 거고.’

    다시 생각해도 속이 터졌다. 붙잡아다 놓고 잔소리를 늘어놓아도 대답은 늘 같았다.

    “나는 그런 걸 바라지 않소.”

    ‘아오, 그 벽돌.’

    다시 생각하니 이번 생에서는 얽히지 않기로 한 건 백번 잘한 것 같았다.

    북방을 떠올리다가 결국 제임스에 대한 욕을 하고 있던 나를 이안이 불렀다.

    “올리비아.”

    “이안!”

    얼마나 깊이 생각했는지, 그가 내 집무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북방으로 가는 것이 확정되기라도 했나. 마음이 다시 또 불유쾌한 삐거덕 소리를 내었다.

    그때였다.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온 이안이 발랄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데이트합시다.”

    “네?”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안이 내 손을 잡았다. 내 손이 싸늘하게 식어서인지, 그의 손바닥이 뜨겁게 느껴졌다.

    “우리 약속했잖아요. 파넬 공작 문제가 해결되면 같이 데이트하기로.”

    “하지만 정말 해결되었는지 모르는걸요.”

    “전하께서 우리 결혼에 문제가 없다고 공증해주셨잖습니까. 그치가 뒤엎을 방법은 없어요.”

    “…….”

    이안의 확실한 말에도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대답하지 못했다.

    왜일까, 이렇게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야. 이안은 제임스를 몰라.’

    제임스는 의견 표현을 잘 하지 않지만, 우직하고 고집이 센 편이었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그 뜻을 돌이키거나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이렇게 쉽게 물러날 리 없어.’

    비슬비슬 물러가면서도 수긍하는 말 한마디 내뱉지 않은 것이 그 반증이었다. 정말 졌다고 생각했다면 제임스는 포기하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왜 이렇게 내게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모든 문제는 돌고 돌아서 제임스의 이상행동으로 돌아왔다. 나는 제임스가 이렇게 진상들에게 반항하면서까지 결혼에 집착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분명 이 시점에서 나와 제임스는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는데.’

    석연치 않은 점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나는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런 내 잇새로 말랑한 손가락이 들어왔다.

    “올리비아, 나를 봐요. 입술 상하니까 깨물지 말고.”

    이안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제야 나와 시선을 마주한 그가 흡족한 듯 웃었다.

    “우리 나가서 맛있는 거 먹어요. 오페라 예약도 했어요. 백화점을 둘러보고 가면 딱 맞을 거예요.”

    “이안.”

    나는 순간 다른 의미로 말문이 막혔다.

    “좋아요. 나가요.”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쓰는 남자가 무척 사랑스러워 보였다.

    * * *

    오늘은 빨간 치마에 흰 블라우스, 머리는 땋아서 둥글게 말았다. 평소 내가 잘 입지 않는 스타일로, 이안의 코디였다.

    “너무 소녀 같은 거 아니에요?”

    그렇게 내가 툴툴거리자, 이안은 뺨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소녀 때의 당신도 궁금하네요. 어떤 아이였어요?”

    “별거 없었어요. 그냥 공부하고 있었고.”

    “공부를 좋아했구나?”

    공부가 딱히 좋았던 건 아니다. 공부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뿐.

    ‘아버지가 지참금도 안 주실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좋은 혼처로 시집가는 인생은 접어두었으니 당연히 공부를 해서 취직을 해야 했다. 회계를 택한 것도 숫자계산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행정관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이론 대공비가 되다니. 역시 인생은 아무도 알 수가 없어.’

    열 살 때의 내가 이 미래를 알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나는 마차의 흔들림에 기대어, 하루하루 살기 급급해서 미래조차도 쫓기듯 그렸던 어린 소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 왔어요.”

    잠시 울적함에 젖어 있는 사이, 마차는 백화점에 도착했다. 이안의 손을 잡고 내려선 나는 탄성을 질렀다.

    “와아.”

    지난번에 차를 마시며 멀리서 올라가는 장면을 보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

    ‘웅장해. 거대해.’

    내가 알고 있는 고슈 백화점보다도 더 규모가 컸다. 인부들이 열심히 땀을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감탄했다.

    “순식간에 지어지고 있네요.”

    “운이 좋았어요.”

    이안은 겸손하게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단순한 운이 아님을 알았다.

    ‘이만한 인력을 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얼마나 힘들게 뛰어다니고 사람을 모집했을까. 그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살짝 아릿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천천히 백화점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나는 북부에 대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눈을 빛냈다.

    “1층에는 화장품하고 식료품을 입점시킬 거예요. 2층에는 여성복, 3층에는 남성복.”

    어쩔 수 없이 신이 났다. 지난 생에도 하고 싶었으니까. 이런 사업.

    “많은 사람이 와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휴게시설도 넉넉히 설치하고요. 분명 많은 호응을 받을 수 있겠죠?”

    어린애처럼 조잘거리는 나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이안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잘될 거예요. 올리브는 신의 열매니까요.”

    그 말에, 나는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진짜 이름을 마티니라고 할 거예요?”

    장난이겠지. 어떻게 백화점 이름을 마티니라고 해.

    ‘심지어 내 이름에서 따온 거라니!’

    사람들이 유난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얼굴을 빨갛게 붉혔을 때였다.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능청스레 되물었다.

    “너무 심심한 이름인가요? 한 마디 더 붙일까요? 몬 쉐르 마티니.”

    “으악!!”

    붙이고 붙여서 몬 쉐르(내 사랑)냐!

    나는 손바닥으로 그의 요망한 입술을 꽉 틀어막았다. 이안이 피식 웃었다.

    ‘또 나를 놀렸어.’

    보아하니 날 놀려먹는 데 재미를 붙인 모양이다. 나는 손바닥을 치우고 그를 흘겨보며 툴툴거렸다.

    “정말 그동안 어떻게 참았대요.”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달콤한 소리, 부드럽게 자기 좋을 대로 이끌어가는 대화 솜씨까지.

    ‘사람이 이렇게 잔망스럽기가 쉽지 않은데.’

    그동안 대국민 고자로 오해받느라 애썼다 싶었다.

    그때였다. 그가 성큼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갑자기 좁혀진 거리에 내가 당황하여 물러나려는데, 그의 굵은 팔이 내 허리를 끌어안아서 자신 쪽으로 휙 당겼다.

    “왜 참았다고 생각합니까?”

    귓가에 속삭여지는 낮은 목소리가 목 뒤로 찌르르 울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고자가 아니라고 해서 세상 모든 여자를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요.”

    내 말은 그 끼를 감추느라 고생했다는 말이었는데. 하지만 내가 발언을 정정할 틈도 없이 그가 내게 입을 맞춰왔다.

    할짝.

    내 입술을 살짝 핥아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야한지. 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더 깊이 파고들려는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바, 밖이거든요!?”

    공사현장인지라 사람이 없다고 해도, 여기 벌써 우리 수행원과 호위기사까지 둘 이상 있었다.

    이안은 눈을 깜빡이다가 손을 들어 내 손바닥을 살짝 치우며 은근히 웃었다.

    “그럼 안에서는 괜찮습니까?”

    “그, 그건.”

    나는 눈망울을 데구루루 굴렸다. 무심코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또 이걸로 오늘 밤새도록 괴롭힐지도 몰랐다.

    “그때, 그때 달라요!”

    “그럼 시간마다 물어봐야겠네.”

    물어보긴 뭘 물어봐.

    나는 그를 째려보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이안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웃음의 여운이 남은 입꼬리를 휘며 중얼거렸다.

    “아마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혼자 살지 않았을까요?”

    “이안…….”

    그 말에는 나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실제로 내가 살다 온 미래에서, 그는 20년 뒤에도 혼자였으니까. 여전히 대국민 고자로 알려져 있었고.

    ‘그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깊은 마음을 내게 주고 있는 것 아닐까.’

    어쩌면, 내가 그에게 답하는 그것보다도 더.

    어쩐지 슬퍼져서,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 * *

    “이쪽으로 와요, 올리비아.”

    백화점을 다 둘러보고 바로 마차에 오를 줄 알았는데, 그는 어디론가 나를 이끌고 갔다.

    백화점 조경을 위해 깔아놓은 잔디밭 위였는데, 생각지도 않은 흰 테이블과 다구가 놓여 있었다.

    우리를 보고 그 앞에 서 있던 흰 셔츠에 검은 조끼를 걸친 중년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이안이 가벼운 어조로 설명했다.

    “1층에 입점할 찻잎 가게 주인이랍니다.”

    “대공비 마마를 뵙습니다.”

    “함께 차를 마시려고 부탁했어요. 오너로서 찻잎의 질도 확인할 겸.”

    이안이 의자를 빼주었다. 거기 앉으니 주인이 네 종류의 티백 중 하나를 고르라 내밀었다.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전부 다.”

    그렇게 내뱉고 나니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바로 보석상에서 이안이 보석 세트를 다 털어올 때였다.

    “역시 통이 크시다니까.”

    이안도 그때가 생각났는지, 마담 바네사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나는 피식 웃었다.

    쪼르르륵.

    조금 있으니 향긋한 찻물이 찻잔을 채웠다.

    ‘나쁘지 않네.’

    향이 괜찮았다. 찻잔을 들고, 나는 가볍게 찻물을 흔들어 보았다. 찰랑거리는 찻물이 영롱했다.

    맞은편에 앉은 이안이 커다란 백화점 건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백화점이 문을 열면 이런 호사도 부릴 수 없을 테죠.”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나는 눈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정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앉을 자리도 없었으면 좋겠다.

    미래를 통해 백화점이 대박이 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나였으나, 막상 마주하고 있으니 심장이 떨리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 내게 이안은 사르르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될 겁니다. 당신 눈썰미가 좋잖아. 한눈에 나를 찍었죠.”

    “……제발, 그때 일은 잊어주면 안 될까요.”

    “어떻게 잊겠습니까.”

    이안은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 내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나한테 씩씩하게 청혼을 했는데.”

    “미쳐, 진짜.”

    안 그래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심이 찔리는 중이랍니다.

    ‘운이 좋았어.’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내가 이안을 택한 건 그가 고자이고 무심한 성품이니 명목상 아내가 되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무척 용감했네.’

    몇 가지 우연이 겹쳤을지언정, 우리는 만났고, 이제는 진심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괜찮아.’

    문득 엉망으로 술렁이던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입술을 열었다.

    “북부로는 언제 가나요? 제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내 말에 차를 마시고 있던 이안의 몸이 굳어졌다. 그가 살짝 떨리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미소 지었다.

    “나는 걱정하지 말아요. 타이론도 걱정하지 말고요. 잘 이끌어나갈 수 있어요. 믿음직한 참모도 있으니까요.”

    케닌은 훌륭한 보좌관이었다. 지금부터 인수인계를 받으면 시간은 조금 빠듯하겠지만, 지난 생에는 인수인계 없이도 파넬을 이끌고 나갔는걸.

    ‘그 지긋지긋한 경험이 힘이 될 줄이야.’

    이제는 고통스러웠던 과거도 웃으며 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의연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요.”

    “……아, 진짜.”

    내 말에 이안은 낮게 탄식하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왜 이렇게 늠름한 겁니까, 당신.”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내가 만약 늠름하다면 그건 이안이 내게 건네준 용기와 지지 덕분일 터였다. 파넬 공작부인일 때 나는 조금 더 신중했고, 신경질적이었다.

    이안은 손바닥으로 턱을 문지르다가, 입술을 비틀었다.

    “내가 다칠까 봐 걱정 안 됩니까?”

    “걱정되어요.”

    “몇 년이나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10년쯤은 괜찮아요.”

    예전에도 10년이나 남편 없이 혼자 집안을 건사했는걸.

    그때가 오히려 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진상들의 방해공작까지 거셌으니까.

    계속 돌아오는 의연한 대답에, 어쩐지 초조해 보이던 이안이 살구색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리고는 슬쩍 야살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내가 거기서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두 집 살림이라도 차리면 어떻게 해요?”

    그 질문에는 나도 참을 수 없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두 집 살림은 무슨.

    “그럴 사람 아니잖아요, 당신.”

    “올리비아.”

    내가 깔깔깔 웃자, 이안은 입술을 삐죽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지금 조금 서운하군요.”

    “네?”

    “당신이 이렇게 의연해서 자랑스럽고 설레는데, 또 서운해요. 이건 무슨 마음일까요.”

    “아…….”

    놀랍게도 그 마음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데 이율배반적인 마음.

    ‘나도 그러니까.’

    그가 가서 서운하고, 하지만 동시에 자랑스럽고. 그가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니 조금 기쁜, 그런 뒤죽박죽 이상한 마음.

    내가 덩달아 숙연해하고 있으니, 이안이 손을 뻗어서 내 손을 잡았다. 진지한 표정을 지은 그가 천천히 말했다.

    “여차하면 공국으로 갑시다, 우리.”

    “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공국? 이번에 황제가 하사한 작은 왕국을 말하나.

    ‘관리차 가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 시점에서 공국으로 떠난다는 건 누가 봐도 관리차 가는 게 아니지 않은가! 북부행이 싫어서 저 멀리 줄행랑치는 거지.

    ‘기가 막혀.’

    생각지도 못한 회피 방법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어이없어하는 나에게 이안은 오히려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한창 깨가 쏟아지는 신혼인데 북부로 떠나라니 말이 됩니까. 저는 절대로 안 갈 거예요.”

    “이 나라를 위해서잖아요.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말아요.”

    “음.”

    내 질책에 이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 그가 조심스레 나와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비겁한 남자는 싫습니까?”

    그 모습은 또 왜 이렇게 귀여운지.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이때는 엄하게 꾸짖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 당신이 뭘 하든 싫지 않아요. 하지만 귀족의 의무는 져야지요.”

    “그래도 나는 당신 곁에 있고 싶은걸요.”

    “요, 애정결핍.”

    나는 손가락을 펼쳐서 이안의 손에 깍지를 꼈다. 나보다 훨씬 크고 마디가 붉어진 손이 단단하게 조여왔다. 나는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우리는 헤어져 있어도 괜찮아요.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예전의 나는 이렇게 의연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 내 눈앞에 있지 않으면 변할까 봐 무서웠고, 한눈을 팔고 있으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이안은 멀리 떨어져 있다고 나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었다. 내 마음 또한 가벼이 날아갈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괜찮다. 5년이든, 10년이든.

    ‘정 그리우면 내가 찾아가면 되지.’

    옛날처럼 집을 비우면 큰일 나는 상황도 아니잖나. 케닌이나 다른 보좌관들에게 잠시 맡기면 된다.

    ‘그러니까 괜찮아.’

    그런 나의 여유가 전해진 걸까. 입술을 삐죽삐죽거리던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당신 말이. 어디에 있든, 언제 만나든 우리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게 결혼이라는 단단한 결속으로 묶인 ‘부부’였다.

    내가 지난 생에 느끼지 못했던 유대와 소속감을 느끼며 해사하게 웃었을 때였다.

    이안이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올리비아.”

    “이안.”

    그의 푸른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사냥감을 낚아채기 위해 준비하는 매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눈에서는 나를 향한 열기가 느껴졌다.

    내가 홀린 듯이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크흠.”

    화들짝!

    갑자기 들려온 말에, 나는 잠에서 깬 것처럼 깜짝 놀랐다. 헛기침을 한 것은 이안의 뒤를 따라온 수행원이었다.

    그는 뺨을 살짝 붉힌 채로,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어내며 말했다.

    “예약시간이 다 되옵니다, 전하.”

    “아, 이런.”

    이안은 낮게 탄식했다. 누가 들어도 ‘한창 좋을 때였는데. 예약시간을 좀 더 늦게 할걸.’이라는 의미의 탄식인지라 내 얼굴이 저절로 달아올랐다.

    이안은 미련이 철철 넘치는 눈으로 내 입술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일어날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꾸벅 인사하는 찻잎 가게 주인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나는 이안의 손을 꽉 잡았다.

    “굳이 안 가도 되어요.”

    “네?”

    이안이 무슨 의미냐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오페라 싫어하잖아요.”

    “어?”

    내 말에 이안은 진심으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아요, 당신?”

    “다 아는 수가 있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파넬 공작부인으로 오페라 행사에 갔던 날. 제임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와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특석을 혼자 독점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옆으로 향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는 이안이 혼자 앉아 있었다.

    커튼 뒤에 기대고 앉아서는 꾸벅꾸벅 졸고 있던 모습이 하도 인상 깊어서 잊히지 않았다.

    ‘흥미 없어 하면서, 나를 위로한다고 예약하다니.’

    내가 좋아하는 차를 준비하고, 참고 오페라도 보려고 하고.

    별것 아닌 듯 이어지는 배려.

    ‘그러니까 우리는 괜찮아.’

    진심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으니.

    나는 이안의 손을 꽉 붙들었다.

    * * *

    잘 정돈된 거리를 새치가 섞인 은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긴 남자가 걸었다. 지팡이를 짚고, 폭이 넓은 페이즐리 무늬의 크라바트를 멘 우아한 신사였다.

    ‘결국 제국까지 왔군.’

    그는 바로 오르세 왕국에서 제국까지 찾아온 생제르망 상회의 주인, 마이옌 공이었다.

    그의 주름진 적색 눈이 바닥을 응시했다.

    ‘여기서는 내 아내와 딸을 찾을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이미 수십 년이 흘렀다.

    그녀가 먼저 찾아올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좋지 않은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미 다른 남자와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도 내 아이가 있어.’

    그가 왕위계승권을 포기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

    바로 사랑의 결실.

    ‘내 자식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마이옌 공은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했다.

    바로 그때였다.

    “저건 뭐지?”

    그의 시선에 닿은 것은 한창 짓고 있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이미 상당히 올라갔는데도 짓고 있다니.

    ‘적어도 3층 이상이란 뜻 아닌가.’

    수도에 이렇게 높은 데다가 규모가 큰 건물을 짓고 있다니. 그 용도가 뭔지 궁금해졌다.

    마이옌 공의 질문에 생제르망 상회 제국지점 본부장이 맨들맨들한 이마를 문질렀다.

    “아, 이름이 복잡해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뭐였더라…….”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기억을 더듬던 본부장은 큰소리로 대답했다.

    “아! 백화점이라고 합니다.”

    “백화점?”

    뜻밖의 말에 마이옌 공은 눈살을 찌푸렸다. 본부장은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오르세 말에 능통하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제국인인지라 새로운 개념은 제국어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다양한 종류의 가게를 한곳에 모아서 장사한다는데, 저도 설명드리기가 어렵네요. 과연 수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제국 본부장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마이옌 공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제국에 와서 하려던 사업이니까.

    “누가 그런 아이디어를…….”

    도대체 누가 자신보다 한발 앞서서 그런 생각을 해냈단 말인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혹시 수족들 중에서 정보가 샜나 싶어서 심각해졌을 때였다.

    “앗, 저기 나오네요.”

    본부장이 환하게 웃으며 저쪽을 손가락질했다. 마이옌 공은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출입이 금지되어 있을, 공사장 울타리를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선남선녀가 넘어 나오고 있었다.

    “타이론 대공 부부입니다. 최근 제국에서 가장 화제의 인물들이죠. 이 사업도 타이론 대공가에서 추진하는 겁니다.”

    “타이론……?”

    익숙하지 않은 이름을 중얼거리던 마이옌 공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멜리사.”

    멜리사. 부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닳아지는 것 같아서 부르지 못했던 그 이름.

    하지만 이 순간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너무나 닮았어.’

    고양이처럼 뾰족한 눈꼬리, 도도하고 새침해 보이지만 웃을 때는 부드럽게 누그러지는 인상까지.

    너무나 멜리사와 똑같았다.

    “저 사람이 누구지?”

    “타이론 대공비 마마이십니다. 한미한 자작가 출신인데 갑자기 대공비가 되어서 단언 화제의 인물이지요.”

    본부장은 갑자기 안색이 변한 마이옌 공을 보며 당황하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저 사람에 대해서 조사해오게.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도.”

    “네?”

    본부장이 당혹스러운 듯 반문했으나, 마이옌 공은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안과 데이트를 끝내고 또 며칠이 흘렀다. 나는 그사이 이안과 사이좋게 정원을 가꾸거나, 쇼핑을 했다. 케닌에게 타이론 가문의 재정상태와 사업 현황도 전해 들었다.

    이안은 그런 나를 보며 구시렁거렸다.

    “멀리 떠나보내기 전에 나랑 시간을 보내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군요. 너무합니다!”

    “아니, 갑자기 닥친 다음에는 준비할 새가 없으니까…….”

    의연하게 괜찮다고 대답할 때는 언제고, 막상 내가 준비를 하니 또 서운하긴 했던 모양이다.

    이 상황에 대해 내가 하녀장에게 고충을 늘어놓았더니, 하녀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서운하실 만하지요.”

    “왜?”

    “일단…… 지금도 짐가방을 싸고 계시고…….”

    “아.”

    무심코 남편의 셔츠를 착착 개서 가방에 정리하던 나는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이 무서운 습관.’

    제임스가 전장에 있는 동안, 물론 필요한 물건을 그쪽에서 구입하기도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은 그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정리해서 북방으로 보내주었다.

    “그게 아내로서 마땅히 네가 해야 할 일이지.”

    파넬 안주인으로서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허락하지 않으면서, 그들은 제임스에게 보내는 짐은 내가 싸도록 만들었다.

    물론 내가 챙긴 대로 그대로 가는 건 아니었다.

    “내 아들에게 이런 쓰레기 같은 걸 주었어? 정신 나갔니?”

    “하여간 없이 살아서.”

    “안목이 형편없구나.”

    진상들은 내가 가방을 정리해두면 그걸 열어보고 비난하느라 늘 정신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나를 괴롭히고 싶었던 것뿐이었어.’

    나에게 비난은 해야겠는데, 자기들이 실권을 건네주기 싫으니 일을 맡길 수가 없다.

    그래서 마땅한 건수로 잡은 것이 제임스의 짐이었던 셈이다.

    내가 우뚝 멈춰 서자, 이때라는 듯이 하녀들이 끼어들었다.

    “이런 일은 저희가 할게요.”

    “어쩜, 짐을 여러 번 챙겨 보셨나 봐요. 이렇게 구색을 잘 맞추셨대.”

    그들의 탄성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녀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첨언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자면, 주인님께서는 마님께서 이 상황을 기꺼워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고 봅니다.”

    “에엑?”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하지만 이내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닌데.’

    스타티스 황태자가 콕 집어서 가라고 한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이 사람 저 사람 다 섭외해볼 건데, 정 없으면 네가 가라는 말이지.’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착착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아내가 어떻게 느껴졌겠는가.

    ‘아무래도 오해를 풀어줘야겠어.’

    누군가를 배웅하고 뒷바라지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한 일이라서 그로 인해 오해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안을 만나고 올게.”

    이 시간이면 이안이 어디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방 밖으로 나오자, 마침 복도를 지나던 집사가 내게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 비전하.”

    “집사.”

    ‘이안은 어디 있지?’라고 물으려던 내 목소리는 목 안으로 쏙 들어가고 말았다. 집사가 은쟁반에 편지 한 통을 담아서 내밀었기 때문이다.

    “황궁에서 초대장이 왔습니다.”

    황제의 티타임 초대장이었다.

    * * *

    놀랍게도 초대장에 적힌 날짜는 오늘, 정확히 2시간 뒤였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예의야!’

    티타임을 가지자는 초대장을 이렇게 급하게 보내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냥 편안하게 가족을 부른다, 생각하고 그러신 걸 겁니다.”

    이안은 속 편하게 그렇게 대답했지만, 나는 속이 터졌다.

    ‘가족이어도 편안할 수가 없는 사이예요, 폐하!’

    어쨌든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우리 부부를 무척 친근히 여기시는 건 분명했다.

    이안이 한참 어린 늦둥이 동생이니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부르시진 말아달라고 따끔하게 말씀드리고 와야겠어.’

    그리 다짐하며, 나와 이안은 급하게 의관을 정제하고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이제는 너무 자주 와서 황궁이 익숙하게 보이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서 안쪽으로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만두처럼 포슬포슬한 볼살을 뽐내며 황제가 짠하고 나타났다.

    “제수씨!”

    ……아, 이 호칭에까지 익숙해지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치맛자락을 붙들고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황제는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에이, 우리 사이에 이런 예는 안 차릴 때도 되었지.”

    “하하하.”

    윗사람이 까란다고 까면 안 되는 법이다. 나는 그냥 그렇다 안 그렇다 대답도 안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황제는 어지간히 급했는지, 우리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안이 떠날까 봐 불안에 떨고 있다면서. 갑자기 사랑하는 남편하고 헤어지려니 얼마나 속상했을까.”

    “네?”

    별로 안 속상했는데요.

    내가 생각해도 나는 무척 의연하게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소리를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나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황제는 물개처럼 두꺼운 손으로 내 어깨를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황태자가 괜한 소리를 해가지고. 제수씨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그러니까 매일매일 즐겁게 살아요.”

    “…….”

    여기까지 듣고도 이 자리가 누구의 농간인지 모르면 바보일 것이다.

    황제가 내게 뭐라 말을 더 하려는데 보좌관이 황제를 불렀다.

    “폐하, 티타임을 가지시기 전에 잠시 이것 결재를…….”

    “먼저 앉아 있어요.”

    토실토실한 몸이 엄청 가볍게 통통 튀어서 저리로 갔다. 나는 웃으며 황제를 배웅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진 목소리로 이안을 불렀다.

    “이안.”

    내 곁에서 마찬가지로 그린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딱딱한 얼굴로 그를 흘겨보았다.

    “나 좀 봐요.”

    티테이블에 앉아서 시종들이 다 구경하는 와중에 이야기하기는 좀 그랬다. 나는 이안의 팔을 붙들고 정원을 산책하는 척 들어갔다. 그리고 인적이 드물어지기 무섭게 이안을 추궁했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알겠죠?”

    “잘못했습니다.”

    이 밉살맞은 남자는 내가 얼굴을 굳히기 무섭게 바로 사과했다. 나는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렇게 말하지 말고 뭘 잘못했는지 요목조목 제대로 말해봐요.”

    “그게…….”

    이안은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형님께 북방에 안 갈 거라고 말해달라고 부탁한 점?”

    모르는 줄 알았더니 자기 잘못을 알기는 한다.

    “그래요. 왜 자꾸 우리 사적인 문제를 황제 폐하로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제일 손쉬운 방법이니까?”

    “이안.”

    “네, 엄마.”

    “장난하지 말고요.”

    여전히 반성의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이안은 그런 나를 서운한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 내가 가는 것 외에는 아무 선택지가 없는 듯이 굴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나는 무슨 뜻이냐는 의미로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그를 응시했다.

    이안은 한숨 섞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정말로 갈 생각이 없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말씀처럼 심각한 상황도 아니고요.”

    “잠깐만요, 이안.”

    그의 말에 나는 손바닥을 내밀어 잠시 그의 말을 막았다.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 아까도 그래서 사과하려고 했었지.’

    그의 말은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실을 깨닫게 했다.

    꼭 이안이 가야 하는 자리는 아니지 않나?

    “그러네요. 나도 너무 외골수처럼 생각했군요.”

    사실 파넬 공작가에서 흔쾌히 북방으로 떠나서 그런 거지, 거절하려면 거절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원하는 사람은 많은데 굳이 원치 않는 사람이 갈 이유는 없지 않나.

    ‘제임스가 완전히 포기하고 온 것도 아니고.’

    나는 아라미르에서 제임스가 했던 말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괜찮아. 아직 여유가 있어.”

    ‘그때 여유가 있다고 말했어. 제임스도 다시 돌아갈 생각이 있다는 뜻이야.’

    스타티스 황태자의 말에 나는 꼭 이안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임스가 북방을 비우고 이쪽으로 달려 나온 것이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사실 제임스가 북방으로 다시 돌아갈 의사가 있다면?

    ‘그럼 지금 내가 고민해야 할 것은 남편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아니라…….’

    뜻밖의 상황에 내가 손가락을 깨물었을 때였다. 언제 앉으신 건지, 티테이블에서 황제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찌 황제를 기다리게 하겠는가. 우리는 다시 서둘러서 티테이블로 돌아갔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나게 하는가?”

    “폐하.”

    생각해보면 나는 황태자가 한 말에만 집중했을 뿐, 상황을 넓게 보지도 못했다.

    ‘제임스는 부하들에게는 대단히 지지받는 훌륭한 상관이었어. 그런 그를 지금 잠시 명령에 불복했다고 북부 작전에서 제하는 것은 불합리해.’

    사실 정말 불합리한 것은 따로 있었다.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이안은 걱정 말래도. 절대로 내 하나뿐인 아우를 북방까지 보낼 수는 없지.”

    “아뇨, 그게 아니라요.”

    황제는 내가 이안을 제발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 줄 알았는지 손을 내저었다. 나는 완고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안이 아니라 제임스에 관한 거예요.”

    “파넬 공작?”

    내 말에 황제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손가락으로 귀를 문지르기까지 했다.

    나는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이런 말을 하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른다. 제임스랑 무슨 사이냐고 할지도 모르지.

    ‘그래도 이건 말해야 해.’

    나는 고개를 곧게 들었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그가 북방에서 보여준 헌신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내려주세요.”

    바로 제임스 파넬의 처우에 관한 문제였다.

    * * *

    제임스는 전투에서 있었던 일을 자주 이야기하지 않았다.

    원래 성정이 과묵해서도 그렇지만.

    “으으…….”

    사실 제임스와 수많은 밤을 보냈던 나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제임스? 왜 그래요?”

    “으허억!”

    “제임스!”

    “피가…… 팔이……!”

    그는 아무도 모르게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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