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산다는 것은 바뀐다는 것 (10/28)

5장. 산다는 것은 바뀐다는 것

응접실에서 타이론 대공 부부가 신혼의 깨볶음을 하고 있는 사이.

케닌은 앞장서서 에릭을 안내하며 타이론 대공저에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수도에 머무르고 싶겠지만, 사실 수도에는 이미 인력이 꽉 차서 말이다. 아마 기본적인 훈련을 받고, 테스트를 통과하여 수련기사가 되면 공국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크다.”

대공가로 승작되어 독립영지를 받게 되면서 이것저것 개편이 되는 중이었다. 빠르든 이르든 언젠가 공국으로 내려가야 했다.

케닌은 지극히 이성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물론, 그전에 네가 통과하지 못하고 이곳을 떠나게 될 수도 있다. 전하께서는 너를 무조건 채용하라는 건 아니시니까. 기사가 될 기회를 주라는 거지.”

“알겠습니다.”

에릭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닳고 닳아서 별반 감흥이 없는 것이 케닌의 눈에 훤히 보였다.

케닌은 혀를 찼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아이와 얽히게 되었을까.’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올리비아의 영역이었다. 케닌은 잡생각을 잘라내며 손으로 에릭이 가야 할 곳을 가리켰다.

“그럼 견습생 숙소는 이쪽으로…….”

“앗.”

바로 그때였다. 안내하느라 잠깐 뒤를 돌아본 사이, 수풀 사이로 튀어나온 누군가와 케닌이 쿵 부딪쳤다.

개나리꽃이 걸어나온 듯, 화사한 외출용 드레스를 입은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죄송해요, 남작님. 제가 한눈을 팔다가.”

“아닙니다, 아가씨.”

바로 올리비아의 동생, 애니 플로렌스였다.

막 학교와 도서관을 다녀오던 참이라 애니의 품에는 책과 여러 장의 종이뭉치가 들려 있었다. 부딪치면서 놓치는 바람에 그것들이 모두 땅바닥에 흩어졌다.

“어머나.”

세 사람은 잠시 말없이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웠다. 얼추 정리되었을 때였다. 애니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에릭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분은?”

타이론 가문에서 한 번도 자기 또래의 아이를 본 적이 없는 애니는 눈을 반짝이며 에릭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케닌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아가씨의 은인이라고 했는데? 아가씨는 기억을 못 해?’

한눈에 에릭을 알아보던 올리비아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아가씨의 어릴 때 은인인 건가. 잘 모르겠네.’

가끔 올리비아에게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뭔가 틀렸다고 딱 짚기는 뭐한데, 또 그것이 묘하게 거슬리는 그런 감각.

‘하지만 이쪽은 아가씨를 알아보는 것 같고.’

케닌은 흘긋 에릭을 응시했다. 아까까지 담담했던 소년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애니의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

부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침묵에, 케닌이 에릭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오늘 들어온 기사 견습생입니다. 어서 고개를 숙이거라.”

“아.”

케닌의 재촉에 에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운 것도 건네드리고.”

“여기 있습니다.”

투박한 손이 꽤 많은 양의 종이뭉치를 건넸다. 그것을 받던 애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나! 손가락에서 피가 나요. 종이에 베이셨나 봐요.”

“괜찮습니다.”

에릭은 서둘러서 손을 치웠다. 심장이 순식간에 최고 속도로 뛰었다.

태어날 때부터 고아.

아무도 지켜주지 않고 혼자서 구걸을 하며 자란 손이 얼마나 거칠겠는가.

‘이런 상처투성이 손가락에 살짝 베인 상처 따위가 뭐라고.’

애니는 귀족이었고, 그는 평민이었다. 애초에 존대하며 신경 써줄 필요도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상냥했다. 으레 귀족들이 평민을 대하듯 그냥 그를 그렇게 지나치지 않았다.

처음 만났던, 바로 그때처럼.

“저 때문인데요. 괜찮다고 해도 그냥 지나갈 수 없어요.”

푸르른 녹색 눈동자가 다정함을 담뿍 담고 그를 응시했다.

‘눈부셔.’

어릴 때와 변함없이 상냥한 그녀를 마주하니 기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에릭은 손가락을 등 뒤로 감추며 다시 한번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아이참.”

굳게 다물린 에릭의 입술에서, 고집스러움을 엿본 애니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귀엽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여기요.”

비스듬하게 걸쳐진 작은 가방에서 그녀는 손수건을 꺼냈다. 테두리에 그녀와 꼭 어울리는 연한 보라색 방울꽃이 수 놓인 손수건이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에릭에게 말했다.

“꼭 훌륭한 기사가 되어서 저희 언니를 지켜주셔야 해요.”

공교롭게도 자매가 주어와 목적어만 달라졌지, 똑같은 부탁을 건넸다. 에릭은 머뭇거리다가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그럼 안녕히 계세요.”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애니는 가볍게 그를 스쳐 타이론 저택으로 향했다. 하늘하늘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에릭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그 뒤로 나는 앓아누웠다. 단순한 감기몸살이었는데, 얼마나 지독한지 온몸이 얼음에 빠진 것처럼 덜덜 떨렸다.

그래도 쉴 수가 없었다.

“편지, 편지를 써야 하니…… 펜과 종이를 주렴.”

열이 올라 희게 질린 손을 내밀며 내가 하녀에게 말했다. 하녀는 덩달아 파랗게 질리며 대답했다.

“세상에, 마마. 안 돼요. 열이 펄펄 나시는데 어떻게 편지를 쓰세요!”

“꼭 써야 돼. 지금 아니면…….”

몸이 아픈 건 아픈 거고. 애니를 위해 해야 하는 마지막 일이 있었다.

‘지금 안 하면 타이밍을 놓칠 거야.’

애니와 에릭이 여기 있고, 아버지는 언제 올라올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한 와중에도 편지 한 통을 적었다.

수신인은 몇 해 전에 멀리 결혼해서 나간 플로렌스 가문의 장남이었다.

“이걸 부쳐줘…….”

“아이고, 마마!”

편지까지 쓰고 나니 이제는 정말로 기력이 없었다. 나는 꺼질 듯이 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남편에게 별자리 한 번 알려줬다가 죽게 생겼네.’

열대식물이 자라는 온실이니 잠자기에도 충분히 따뜻하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그래도 이안은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잠은 안 온다고 생각했는데 깜빡 잠이 들었었던 모양이다.

“올리비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멀었다. 열이 펄펄 나는 내 이마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시원해.”

기분 좋은 시원함에 다시금 잠이 고롱고롱 밀려왔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내게 내민 손의 주인을 볼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눈에 힘을 주었다.

“이안……?”

“네. 접니다.”

흐릿한 시야로 잔뜩 일그러뜨린 이안의 얼굴이 들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얼굴이 그게 뭐예요.”

잘생긴 얼굴이 다 상했네. 기운만 있으면 푸석푸석해진 뺨을 쓸어주었을 텐데 조금 아쉬웠다.

내가 웃자, 이안은 내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무어라 기도하는 것처럼 중얼거리던 그가 삐쭉 눈을 내밀고 입술을 삐죽였다.

“당신이 죽은 듯 잠만 잔 게 사흘째입니다.”

“벌써요?”

그냥 잠깐 잠든 것 같은데.

나는 얼떨떨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허리를 완전히 세운 그가 내 이마에 붙은 앞머리를 떼어주며 말했다.

“제 잘못입니다. 당신이 날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너무 좋아서 잠자코 있었거든요.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잠든 당신을 안고 들어오기라도 할 걸 그랬어요.”

‘그게 왜 당신 탓이에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순간 목이 따가워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런데 잠자코 있었다니?’

까슬거리는 목을 큼큼거리던 내가 물었다.

“설마…… 당신 그때 안 자고 있었어요?”

내 말에 이번에는 이안이 배시시 웃었다. 긍정의 뜻이었다. 내 얼굴이 퐁 하고 달아올랐다.

“뭐야, 그럼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당신을 재우려고…… 쿨럭! 쿨럭!”

“얼른 물 마셔요. 목이 많이 상했어요.”

미지근한 물을 이안이 내 입술에 흘려 넣어주었다.

물을 마시니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만 같았다.

‘진짜 사흘이나 정신을 놓고 있었구나.’

그동안 많이 못 잤던 것 같기도 하고.

‘제임스랑 담판 짓는다고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번쩍 잊고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안에게 물었다.

“앗, 그럼 내가 정신을 놓고 있는 동안 제임스가 난리를 치진 않았나요?”

내 말에 이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황궁에서 한 차례 연락은 왔는데, 당신이 다 나은 뒤 이야기하기로 했어요.”

“그 돌머리가 순순히 수긍했네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지.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했는데도 또다시 내게 연락을 하려고 했던 건가.’

지긋지긋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물먹은 솜처럼 다시 몸이 무거워졌다.

“올리비아?”

이안이 깜짝 놀라서 내 손을 다시 꽉 붙들었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지었는지 잘 모르겠다.

“피곤해…… 잠…….”

깨어서 떠들었던 것이 꿈인 것처럼 다시 잠이 훅하고 밀려들었다. 뒤늦게 완성된 수프가 든 트레이를 밀고 들어온 하녀장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마마, 수프 한 술이라도 들어보세요.”

수프고 나발이고 그냥 잠만 자고 싶었다. 되었다고 고개를 살짝 흔드니, 이안이 간절한 어조로 물었다.

“따로 먹고 싶은 것은 없나요, 올리비아?”

먹긴 뭘 먹어. 그냥 한숨 자고 나면 나을…….

‘아.’

문득 한 음식이 떠올랐다.

“달걀죽…….”

“네?”

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안과 나란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하녀장에게 물었다.

“달걀죽이 뭐지?”

하녀장도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게 재차 물으려던 이안은, 내가 설명할 컨디션이 아닌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제에게 물어보고 올게. 처제라면 뭔가 알지도 몰라.”

점점 멀어지는 이안의 뒷모습을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아이도 모를 텐데.’

달걀죽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냥 대충 달걀만 비벼와도 나는 몰랐을 것이다.

나도 달걀죽이라는 걸 이름만 들어봤지 먹어본 적이 없으니까.

‘엄마.’

플로렌스 부인, 아니 정확히 나를 친자식으로 입적하여 키운 ‘이모’는 죽기 전, 크리스털 목걸이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네 어머니가 죽기 전에 달걀죽이 먹고 싶다고 했단다. 네 아버지가 자주 만들어주던 거라고…….”

오르세산 크리스털 목걸이와, 오르세에서 즐겨 먹는다는 음식, 달걀죽.

그것만이 내 친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 * *

한차례 소동을 벌인 뒤에, 나는 다시금 깊은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사위는 어두웠다.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몸이 한결 가볍네.’

몸살이 파도처럼 한차례 몸을 쓸고 이제는 지나간 기분이었다. 내가 팔에 힘을 주어 무거운 몸을 막 일으켰을 때였다.

“이안.”

내 허리 맡에, 이안이 엎어져서 잠들어 있었다.

‘여태껏 내 곁을 지킨 거야? 얼마나? 지금까지?’

나는 깜짝 놀라서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왜 여기 이러고 있어요. 얼른 방에 돌아가서 자요.”

“올리비아.”

깊은 잠이 든 건 아니었는지, 이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살짝 충열된 연한 푸른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는 뿌드득한 몸에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나와 눈을 맞추었다.

“이제 괜찮나요?”

“많이 좋아졌어요. 고비를 넘겼나 봐요.”

“다행이에요.”

이안이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꽉 붙들었다. 굵은 손가락이 내 손끝을 문질렀다.

“올리비아.”

내 이름만 부르고는, 그는 잠시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입술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당신, 들었군요.”

애니가 달걀죽이 무엇인지 알 리가 있나. 거기서 포기하면 좋았을 텐데, 이안은 결국 로메오에게까지 찾아가 물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들어버린 것이다. 바로 내 출생의 비밀을.

“미안해요.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지난 생에서는 제임스는 물론이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와서 말을 꺼내는 것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전, 사실 애니와 친자매가 아니에요.”

나는 내 부모의 얼굴을 모른다. 적어도 어머니의 이름은 알지, 아버지는 아예 들은 바가 없었다.

그냥 막연히 오르세인이 아닐까 예측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누구인지도 들을 수 없게 되었죠.”

어떤 사연인지, 어머니는 혼인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임신했던 모양이다. 의탁할 곳이 없었던 그녀는 결국 하나뿐인 여동생, 플로렌스 부인에게 몸을 의지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플로렌스 가문 적에 올려준 사람이에요. 그래서 저도 아버지가 제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걸 거절하지 못했었고…….”

과거의 기억과 지금 생의 기억이 뒤죽박죽 섞였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플로렌스 자작에게 이리저리 흔들린 건 엄밀히 말해 과거의 일이니까.’

결과적으로 내가 그리 흔들리는 바람에, 나는 애니를 구할 수가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곱씹으며, 내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바로 그때였다. 이안이 내 손을 한층 더 세게 쥐었다.

“올리비아, 나는 그런 사실은 다 상관없어요.”

“이안.”

“저는 그저, 당신이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걱정했을 뿐입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이안을 마주 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거센 바람이 부는 바다처럼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

“왜냐면 나도 비슷한 처지였거든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지난 생에서, 밝혀진 적 없던 그의 출생의 비밀이었다.

“저는 수많은 전대 황제의 아이들 중 유일한 황후의 자식이었어요. 저를 이용해 황위를 흔들 세력이 나타날까 두려워했던 형님은 저를 당시 자식이 없던 타이론 공작 부부에게 맡겼었죠.”

이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타이론 공작 부부를 불행하게 만들어버렸어요.”

“아.”

작고한 타이론 공작 부부의 성품은 알지 못하지만 그 ‘불행’이 어떤 모습인지는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플로렌스 저택의 분위기는 이랬으니까.

“이게 대들어? 내가 너 때문에 저런 혹덩이까지 하나 더 키우고 있는데 감히?”

나의 친이모라는 이유로 나를 딸로 키우게 된 플로렌스 부인은 늘 플로렌스 자작에게 구박을 받았다. 어떤 상황이든 나를 물고 늘어지면, 그녀의 입은 다물리고 말았다.

그녀가 늘 식물처럼 기운이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나였을지도 모른다.

“타이론 공작 부부의 마차 사고는 나 때문이었죠. 생일을 맞아 근교로 여행을 떠나며 두 사람은 나를 두고 크게 다퉜습니다.”

그리고 그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음울했다.

“그 뒤로 화이트폴 후작에게 위탁되었지만 거기서도 결국 나 때문에 불행한 일이 생겨서…….”

화이트폴 후작저의 이야기를 하던 그의 얼굴이 일순간 괴롭게 일그러졌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던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혼자 살겠다고 결심했던 겁니다. 나를 아끼는 사람들에게는 불행한 일이 닥치니까.”

“그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그렇게 대답하는 내 입술은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손등을 감쌌다.

그 말은 내가 이안을 통해 받은 위로이기도 했다.

‘당신이 내게 용기를 주었어.’

나는 나도 모르는 새, 내가 받아왔던 불합리한 운명에 순응하고 있었다. 쓰레기통에서 벗어난다며 이안을 택했으면서도, 또 이안에게 어떤 다정함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그 증거였다.

‘은연중에 그렇게 여기고 있었던 거야. 내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이안은 의심 많은 내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입장을 헤아리며 배려해주었다.

따뜻하고 온화한 시간을 보내며 나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야. 나도 사랑받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

그리고 이제는 내가 그에게 용기를 주어야 할 때였다. 나는 이안의 손을 꽉 붙잡았다.

“불행은 그저 스치는 바람 같은 거예요. 당신이 붙든 것도 아니고, 영원히 머무는 것도 아니죠.”

“맞아요. 당신 덕분에 알게 되었어요.”

“네?”

위로를 하긴 했으나, 설마 이렇게 빠르게 수긍할 줄 몰랐던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안은 픽 웃으며 내 코끝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 나를 최고의 행운이라고 칭해주었잖아요. 기억 안 나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정말 근래에 했던 말이라, 오히려 기억이 늦었다.

“당신이 제 청혼을 받아준 것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에요.”

‘으아악! 그 말을 이렇게 써먹다니!’

정작 그때에는 별로 감흥 없는 것처럼 흘려듣더니 반칙이었다. 내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런 나와 눈을 맞추며, 이안은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올리비아, 그러니 당신도 당신 자신을 탓할 것 없어요. 위축될 이유도 없죠. 출생의 어떠함이 당신이 누구인지 규정짓지 못하니까요.”

“이안.”

그의 말에, 오랫동안 닫아왔던 녹슨 빗장이 하나 스르륵 열렸다.

‘오로지 로메오에게만 털어놨었지.’

그것도 로메오가 딱히 더 좋아서, 믿음직스러워서가 아니었다.

로메오만이 나를 오르세 왕국으로 데려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괜찮아.’

이제야 비로소 내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를 찾지 못해도, 오르세 왕국에 가지 못해도…….’

내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친부에게 집착했던 것은 오로지 하나의 이유였다.

나도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가족을 가지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괜찮아. 되었어. 이미 가지고 있으니까.’

애니는 지난 생과 달리 밝고 건강하게 학교에서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우며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내 곁에는.

‘내 남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금빛 머리카락의 남자.

그 존재를 자각하는 순간부터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나는 살짝 뺨을 붉히며 물었다.

“키스해도 돼요?”

이안은 조금 놀란 듯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언제든지, 올리비아.”

나는 두 팔을 펼쳐 이안의 목에 매달렸다. 나의 허리를 이안의 팔이 단단하게 안았다.

새가 부리를 비비듯, 우리는 조심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핥았다.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깊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농밀한 입맞춤이 길게 이어졌다. 입술을 뗀 뒤에도 우리는 서로의 얼굴 여기저기에 잔 입맞춤을 남겼다.

마주하는 눈빛에 전에 없던 여유가 타오르는 열정 아래 안개처럼 깔렸다.

나는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헤집으며 말했다.

“당신, 내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있죠?”

내 말에 이안은 대답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다, 고작 몇 마디 말로 모두 표현할 수 없을 인생이었을 거란 걸.

‘나도 당신에게 숨기고 있으니까.’

언젠가 그에게 내가 인생 2회차라는 걸 말할 수 있을까?

‘자신 없어.’

미래가 언제든 변하는 것이기에, 함부로 그것을 약속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순간이든, 어느 때든, 내가 돌아서려고 하면 당신은 이 순간을 말하도록 해요. 그럼, 나는 이 마음을 기억해내고 무슨 일이든 당신을 용서할게요.”

앞으로 이어질 기나긴 인생에서, 오늘의 기억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한순간을 잡아줄 수 있을 거란 건 확답할 수 있었다.

내 말에 이안은 피식 웃었다.

“나는 절대로 당신을 상처 입히지 않을 겁니다.”

그가 천천히 내 침대 위로 올라왔다. 무릎을 세워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아이를 안 듯 나를 자신의 품에 폭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은 단단했고, 알싸한 향기가 났다.

“늘 내 곁에 있어요.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그건 상상이 안 되네요!”

내가 할머니라니, 그게 웬 말이야!

‘이 남자가 늙은 모습은 더더욱 상상이 안 되고!’

늙어서도 이렇게 반짝반짝 빛나려나. 상상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는 서로 경쟁하듯 미래를 토해냈고, 키득키득 웃었다. 몇 번이고 입맞춤을 나누었고, 결국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주치의에게 나란히 혼난 것은 덤이었다.

* * *

그리고 사흘 뒤!

나는 완전히 몸살감기를 털어버렸다. 다행히 이안은 내게 옮지 않았다.

“원래 건강체거든요.”

‘왜 너만 안 걸리냐! 억울하다!’라는 항변에, 이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데리고 사는 남자가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당신에게는 좋은 거 아닌가요?”

“조, 좋기는 도대체 뭐가…….”

“그래서 우리 계약은 어떻게 되어가는 겁니까? 일주일의 다섯 번으로 확정된 거죠?”

“미쳤어, 이 남자!”

대낮에도 한치의 부끄럼 없이 그런 소리를 나불거리는 입술을, 나는 내 입술로 꽉 막아주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온실에서 하룻밤을 보낸 대가로 일주일을 꼬박 앓아누운 셈이다.

‘지난 생에는 별로 아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

파넬에서 그렇게 냉골에 못 먹어도 아프질 않았는데, 어찌 된 것인지 몸이 편해지니 이렇게 크게 앓았다.

‘앞으로 내 인생에 서프라이즈는 없다. 역시 사람은 하지 않던 짓을 하면 병이 나는 법이지.’

나는 단단히 결심했다.

내가 앓아누운 사이에도 세상의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서, 내가 뿌려놓은 여러 가지 일들은 결과를 물고 왔다.

당연히 그중의 가장 굵직한 일은 애니였다.

“언니, 이제 괜찮아?”

학교를 다녀온 애니는 조심스럽게 내 곁에 앉았다. 나는 애니가 해주는 하루 일들을 들었다.

“학교에서는 이런 걸 배웠는데…….”

대부분은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달랐다.

“아, 그리고 저택에서 내 또래 기사 견습생을 만났어. 신기하더라.”

바로 에릭의 이야기였다.

‘접점이 있었구나.’

애니는 에릭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에릭은 분명 애니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애니를 내보내고, 나는 안락의자에 몸을 푹 묻었다. 큰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마음이 노곤해졌다.

‘애니는 이제 행복해질 거야.’

그녀의 행복을 위해 내가 깔 수 있는 포석은 모두 깔았다.

나는 흘긋 시선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내가 의식을 잃었던 동안 날아온 편지가 펼쳐져 있었다.

바로 아버지의 편지였다.

-여기서 투자자문을 맡아 더 머물러야 할 것 같구나. 애니를 네가 잘 책임지고 있으렴.

편지 내용은 내게 달가웠다.

‘책임지고 있지요. 아버지가 기대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나는 최근 아버지가 알면 뒤로 나자빠질 일을 하나 단행했다.

바로 수도의 플로렌스 저택을 팔아버린 것이다.

‘오빠가 그렇게 신이 나서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지.’

우리 큰오빠는 우리 아버지의 복사판이었다. 성실하게 일하기는 싫어하고 어떻게 큰 몫을 잡아서 팔자를 고칠 생각만 하는 한량.

하지만 큰 몫을 잡으려고 해도 종잣돈이 필요한 법.

나는 그래서 살살 오빠를 긁었다. 그게 바로 혼미한 와중에도 적었던 편지였다.

-아버지는 고향에 자리를 잡을 생각이신 거 같은데, 그동안 저택 관리를 할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야. 이대로는 집이 폐허가 되어버릴걸.

장남인 오빠가 집을 관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오빠가 집을 돌아보면서 천천히 값비싼 것들을 하나하나 챙길 거라고 예상했다.

‘그것도 과소평가였지.’

-어차피 이 집은 장남인 내 집이니까! 미리 유산 당겨 쓰는 거야!

그렇게 주장하며 큰오빠는 아버지 집무실에 있는 인감과 집문서로 순식간에 집의 명의를 바꿔버렸다.

결국, 나와 애니는 한 푼도 가지지 못하고 고스란히 남자 형제들에게 돈이 돌아간 셈이지만, 아깝지는 않았다.

‘더러운 돈을 받으면 나중에 또 거머리처럼 달라붙을 거야. 그냥 떼어주는 게 나아.’

애니의 몫은 나중에 내가 불린 투자금에서 떼어주면 그만이다.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는 집이 없으니까. 기가 막혀 하다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겠지.’

결국 애니의 미래에 위협이 될 만한 것들은 다 치워버린 셈이다.

나는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제 앞으로의 행복은 애니 자신에게 달렸어.’

에릭이랑 이어지든, 그게 아니든, 나는 이제 그저 애니를 지켜보며 지지해주기만 할 생각이었다.

‘내 동생은 충분히 혼자서 행복을 그러쥘 수 있는 아이니까.’

애니는 걱정할 필요 없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애니 일이 일단락되고 나니 다른 보고들도 하나둘 떠올랐다.

‘백화점도 순조롭고.’

용지매입 등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백화점은 벌써 1층이 올라간 상태였다. 다음 주에 이안과 함께 공사현장을 구경하러 가기로 했다.

‘그다음은 이안과의 계약이 문제인데.’

계약이라고 부르기도 낯뜨거운, 그놈의 잠자리 횟수!

‘아니, 그런 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거야?! 이놈이나 저놈이나.’

투덜거리면서도 싫지 않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나는 빨개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다 알고 기어오르는 거야.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요망한 남자 같으니. 나는 눈웃음을 살살 치며 치고 빠지는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바로 그때였다.

“저어, 비전하.”

“응?”

노크하고 들어온 하녀장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 무척 당혹스러워 일그러져 있었다.

“그, 그…….”

말도 잇질 못했다. 나는 등받이에서 몸을 떼어 일으키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뜸을 들이고 그러니?”

“내, 내려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도대체 무슨 큰일인데 저런 반응인 걸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녀장의 뒤를 따라나섰다.

정체는 굳이 1층으로 내려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계단 난간에서도 1층의 상황이 훤히 보였으니까.

“아이고.”

색색깔의 꽃들이 끝도 없이 1층에 늘어서 있었다. 노란색, 빨간색, 분홍색. 어디서 저렇게 쨍한 색들의 꽃들로만 골랐는지.

‘저게 돈이 얼마야.’

꽃밭을 통째로 떠서 1층에 옮겨놓은 것 같았다. 저 찰나의 즐거움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을까 생각하니 속이 터졌다.

‘이안, 이 남자를.’

꽃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그때 등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올리비아.”

“이안!”

나는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얼떨떨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더더욱 속이 터졌다. 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타박했다.

“이게 웬 꽃이에요. 애초에 저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무식하게 많이 사 오다니…….”

내가 입술을 삐죽거릴 때였다. 이안이 얼굴을 무섭게 굳히며 대답했다.

“제가 사 온 것이 아닙니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안이 아니면 누가 나한테 저렇게 많은 꽃을 보내?’

그다음으로 떠오른 건 살 오른 가을 곰 같은 황제의 얼굴이었다.

‘설마 제수씨가 생각나서~ 하고 보낸 건 아니겠지.’

설마설마하며 소름 돋아 하고 있을 때였다. 하녀장이 쭈뼛쭈뼛 나와 이안의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열었다.

“저어, 마마. 이건 파넬 공작 각하께서…….”

“뭐?”

누구? 너무나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라 한 번에 알아듣지를 못했다. 하녀장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보라색 작은 정사각형 봉투를 내밀었다. 카드였다.

카드 내용은 제임스가 쓴 게 맞았다. 무섭도록 간결했으니까.

-아프다고 들었소. 쾌차하기 바라오.

당신의 남편 제임스

“아니, 이 화상이!”

남편은 무슨 놈의 남편이야.

이렇게 짧은 글로 사람의 복장을 뒤집는 것도 재주였다.

카드는 박박 찢어서 바로 불살라버렸다. 그리고 나는 냉정한 얼굴로 명령했다.

“전부 돌려보내.”

“하오나, 비전하.”

“하오나고 자시고 돌려보내. 그리고 앞으로 파넬에서 오는 모든 것은 받지 말도록.”

저 많은 양의 꽃을 나르느라 고생했을 사람들에게는 미안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내일 수도 모든 신문의 헤드라인을 안 봐도 맞출 수 있겠군.’

-파넬 공작! 전 부인에게 열렬한 애정공세!

‘이래서야 정말로 우리 셋 다 우스워지겠어. 아니, 이미 우스워졌어!’

사실 노래가 저잣거리에 퍼질 때부터 우리 셋의 우스운 치정극은 시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름을 부을 필요는 없잖아!’

역시 좋게 말하면 사람이 꾸밈이 없이 진실했고, 나쁘게 말하면 무식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

우아하게 비꼬는 사교계식 싸움에는 익숙하지만, 정작 이렇게 정석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상대는 드문지라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때, 이안이 내 어깨를 짚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꽃이 들어오는 걸 많은 사람이 보았을 거예요. 입방아에 올랐으니 돌려보내는 것보다 길에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좋은 생각이에요!”

그렇게 하면 해드라인을 좀 고칠 수 있었다.

-파넬 공작! 전 부인에게 열렬한 애정공세를 했으나 길거리에 뿌린 꼴

“아휴, 정말.”

내가 이런 것까지 고민하며 살아야 하나. 자괴감이 들었다.

‘선물을 할 거면 받는 사람에 대해 조사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니야? 나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고.’

어떻게 하고 많은 것 중에 꽃을 꼭 집어 줄 수 있단 말인가.

‘스케일이 아무리 커도 이 정도면 민폐야. 하나도 안 기쁘다고.’

입술을 삐죽이던 나는 제임스를 떠올리고 이내 납득했다.

‘제임스라면 모를 수 있어. 이번 생의 제임스가 아니라 지난 생의 제임스도 내가 꽃가루 알레르기라는 걸 모를 거야.’

선물을 한 적이 없으니까.

어쨌든 제임스는 제임스인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다른 귀족이 내게 이랬다면 나는 무척 격노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럴 수 있어.’

어떻게 이름 석 자만으로 내 마음이 이렇게 누그러지는 건지. 하여간 그 또한 재주였다.

당장 이딴 짓은 집어치우라고 편지를 적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내 집무실 쪽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내 눈에 좀 이상한 모습의 이안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 이러다가 난간 부서질 듯.’

계단 난간을 붙들고 있는 이안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평온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나는 매서워 보이는 푸른 눈을 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나는 꽃을 싫어해요. 괜히 라이벌 의식 불태우지 말아요.”

기왕이면 선물은 형태가 남는 게 훨씬 좋았다. 나중에 값어치도 그렇고.

움찔.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이안의 몸이 크게 떨렸다. 이안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티가 납니까.”

“아니요. 하지만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당신이 어떤 식으로 화를 내는지, 또 어떻게 기뻐하는지.

흥분할 때면 어디가 어떻게 달아오르는지까지.

“올리비아.”

간밤에 귓가에 속삭여지던 낮은 목소리가 떠올라, 나는 화르륵 얼굴을 붉혔다.

‘이걸 티 냈다가는 또 놀릴 테지.’

이안이 쳐다보기 전에 얼른 도망쳐야겠다. 나는 서둘러서 몸을 돌렸다.

“저는 파넬 공작가로 보낼 서신을 적을게요!”

“잠깐만요, 올리비아.”

부끄러움에 얼른 집무실로 사라져버리려는 나를 이안이 꽉 붙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본론을 읊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어제 서신을 보내셨어요. 나흘 뒤, 황태자 궁에서 삼자대면하자고요.”

“아.”

삼자대면. 그 말을 듣고 나니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갑자기 꽃을 보내고 그런 거군.’

제임스도 나름대로 이안을 견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쩐지 하지 않던 짓을 한다 했다.’

20년을 산 아내에게도 꽃 한 송이 꺾어 건넬 줄 모르는 남자가 바로 제임스 파넬이었다.

‘역시 자존심이 걸리니 행동이 달라지는구나.’

하지만 자존심을 운운하면 또 이야기가 달라졌다. 자존심을 지키려면 사실 이 우스꽝스러운 치정극에서 그가 이탈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왜 제임스는 내게 집착하는 걸까.’

나는 팔짱을 끼고 잠시 고민했다.

다시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설마 제임스도 인생 2회차인가.’

하도 답이 나오질 않으니 이상한 생각까지 들었다. 말도 안 된다며, 내가 내 생각에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을 때였다.

“저어, 전하.”

이번에는 집사장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꽃다발을 안고 나타났다. 연보라색, 그리고 흰색으로 구성된 우아한 꽃다발이었다.

이안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꽃은 모두 저잣거리에 나누어주라고 했을 텐데.”

“이건 파넬 공작가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 말하며 집사장은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고개를 갸웃했을 때였다.

“화이트폴 후작 영애께서 전하께 보내는 것입니다.”

“…….”

집사장의 말에 이안은 입술을 꾹 닫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이트폴 후작 영애?’

화이트폴 후작가 자체가 영지에 내려가 있을 때가 많아서, 사교계에서 보기 드문 사람들이었다. 특히 후작 영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귀에 익은 이름이야.’

나는 어렵지 않게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안의 입에서 언급된 적이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그 뒤로 화이트폴 후작에게 위탁되었지만 거기서도 결국 나 때문에 불행한 일이 생겨서…….”

‘타이론 공작 부부가 서거하고 이안을 맡아 길렀던 사람들!’

조금 자란 유년기의 이안과 후견인, 그리고 불행.

그 세 가지를 조합하니 공교롭게 한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설마설마한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이안, 나 한 가지만 물을게요.”

“예.”

“화이트폴 후작 영애가 일전에 아마란테에서 마주친 그 화려한 미인인가요? 물결치는 붉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

“……예.”

내 말에 이안은 얼음처럼 굳어져서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굳어진 이안 대신 집사장이 곁에서 ‘히익!’하고 비명을 질러주었다.

내 얼굴이 그만큼 흉측하게 얼어붙은 탓이었다.

‘그 여자에게만은, 이안이 허세를 부리려고 했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그리고 나를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응시했던 여자.

‘누가 봐도 보통 사이가 아니잖아.’

비슷한 또래의 소년 소녀가 한집에서 얼마간 지냈으니, 어떤 스파크가 터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결혼도 두 번째인걸. 옛날 여자 친구 정도야, 그럴 수도 있지.’

잘생기고, 가진 거 많은데, 지위까지 높은 젊은 독신남이 연애 경험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판타지였다.

‘그래, 그거야 연장자의 아량으로 넘어간다고 쳐.’

하지만 ‘쎄함’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바로 지속적으로 이안이 언급했던 내 외모.

“그런데 또 외모가 내 취향이야.”

“하?”

너무나 기막힌 생각이 떠올라서 나는 입을 벌렸다. 웃어넘기지 못했던 것은 내 직감이 정답이라고 열심히 외쳤기 때문이다.

‘설마. 설마.’

붉은 곱슬머리에 푸른 눈과 은빛 직모에 붉은 눈.

‘너무나 명확한 대조잖아.’

그러나 내 마음은 직감의 의견을 부정했다. 결국 나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

바로 본인에게 묻기.

“설마 내가 그 영애와 정반대 인상이라서 취향이라고 했던 건가요?”

내 질문에 이안은 희게 질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정답이었다.

* * *

-나흘 뒤, 점심.

황제는 스타티스 황태자가 보낸 작은 쪽지를 펴보고는 그대로 책상 위에 있던 촛불에 태워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앉은 곰처럼 커다란 덩치의 남자에게 여상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언제 북방으로 내려갈 생각인가, 파넬 공작.”

황제의 앞에 앉은 건 다름 아닌 제임스였다.

‘의자에 몸을 욱여넣은 것 같군.’

찻잔을 들어 올리는 간단한 행동에도 팔근육이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옷으로 가려진 모든 부분에도 아마 근육이 고르게 퍼져 있으리라.

‘거슬려.’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등 뒤로 자신을 지킬 호위기사가 잔뜩인데도, 강인한 장수를 앞에 두니 어쩔 수 없이 위압감과 불쾌감이 들었다.

‘이안과 결투를 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황제가 샅샅이 제임스의 몸을 훑고 있을 때였다.

찻잔을 내려놓으며 제임스가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 아내를 찾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이미 늦었대도.”

“폐하.”

혀를 끌끌 차는 황제에게, 제임스는 으스스한 어조로 말했다.

“폐하께서 먼저 약조를 어기셨습니다. 저 또한 폐하와의 약조를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약조라.”

황제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 부분에서 내 과실은 명백하게 인정하네. 하지만 그대 또한 무작정 내 탓만을 할 수는 없을 거야.”

제임스 파넬이 북부로 나가기 일주일 전, 두 사람은 그때도 이런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었었다.

황제는 그 대화를 똑똑히 기억했다.

“분명 그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올리비아 플로렌스?”

“모르는 여자입니다. 현재로선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았습니다.”

“모르는 여자를 아내로 정해달라고?”

“그냥 생일이 같아서요.”

황제는 찻잔을 들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가 이안의 열애 소식에 옳다구나 자신의 명을 번복하는 데는, 바로 제임스의 심드렁한 태도도 한몫했다.

“나는 그대가 별 이유 없이 그녀를 아내로 지목한 줄 알았어. 이렇게 사랑하는 줄 알았으면 망설였겠지.”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게 꺼려졌을 뿐입니다.”

이 순간에도 말투가 얼마나 딱딱한지, 돌덩어리가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꼽게 바라보던 황제가 툭 하고 핵심을 찔렀다.

“말은 바로 하지. 올리비아 플로렌스가 정말로 그대와 점점이 없었기 때문 아니었나.”

“…….”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제임스는 입술을 다물었다. 황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전장에 나서기 전에, 아니면 결혼이 정해지기 전에라도 그녀에게 한 마디 말이라도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을.’

결국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그녀를 놓친 셈이다. 황제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나도 그대에게 면목이 없네. 허나, 타이론 대공 부부는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어. 이번엔 그대가 물러나지 그러나.”

어차피 말 한 마디 섞지 못하고,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사이 아닌가. 황제가 냉정하게 그리 말했을 때였다.

제임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 곁에서 말라 죽이면 죽였지, 자유롭게 놔주지 못하겠습니다.”

이기적인 말에 황제의 입술에서 상소리가 나왔다.

“이런 씨…….”

“씨?”

“허허, 차가 오래 놔두었더니 너무 시어졌구먼.”

그래도 충실한 부하가 전장에 있는 동안 아내를 빼앗은 꼴인지라, 황제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욕설을 주워 삼켰다. 물론 속으로는 열심히 욕했다.

‘이놈이 남의 금쪽같은 제수씨를 왜 말려 죽이겠다는 거야! 정말 사랑하면 행복을 빌어줘야지, 네가 그러고도 사내놈이냐!’

그는 이걸 속으로 생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전 일기에 썼는데, 후대에 황제들이 얼마나 욕을 잘했는지 알려주는 사료로서 박제되었다.

* * *

그러니까, 이안은 화이트폴 후작 영애와 어릴 때 모종의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그녀 쪽은 아직도 이안에게 감정이 남은 모양이고.’

나를 이글이글 두 번이나 노려보았다. 지금도 미련이 철철 남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안이 바람을 피우거나 아직 감정이 남은 건 아니잖아.’

오히려 이안은 나를 이용해서 그녀의 미련을 완전히 떼버리려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켕기는 게 있다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겠지.

‘냉정하게 따져서 내가 기분 나쁠 상황은 아니야.’

대국민 고자라는 이유로 이안을 택한 건 누구였던가. 이안이 고작 외모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나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내 쪽이 너무한 건 분명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다고! 무척 나빠!!’

널뛰기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서둘러 내 집무실로 도망쳤다. 이대로 이안을 마주 보고 있으면 상처 입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마, 차를 올릴까요?”

“응. 캐모마일로.”

“알겠습니다.”

나는 홍차를 즐겨 마시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줄, 캐모마일로 정했다.

차를 기다리며 자리에 앉아서도 나는 불안하게 계속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나답지 않아.’

왜 그 자리에서 나는 바로 휙 돌아서고 말았던 걸까.

‘꺼림칙한 게 있다면 이안에게 말하면 되잖아.’

실제로도 나는 줄곧 그렇게 지내왔다. 이안에게 꺼리는 것 없이 모든 말을 하며.

‘그런데 오늘은 왜 그럴 수 없었던 걸까. 정말 이상해.’

왜 이렇게 흉포한 감정이 들끓는 걸까.

내 마음인데도 내 마음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잠시 열기를 입술 밖으로 뱉어냈다.

그렇게 조금 있으니, 하녀장이 찻주전자와 찻잔이 올라온 쟁반을 안고 들어왔다.

쪼르르.

찻물이 찻잔 안에 가득 채워지는 그 짧은 시간도 참지 못하고, 나는 성급하게 입술을 열었다.

“이안은 어떻게 하고 있어?”

내 귀에도 내 목소리는 삐죽삐죽하게 들렸다. 하녀장은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내리깔며 대답했다.

“집무실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꽃다발은?”

왜 하필 또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말이 꽃다발이야!

내 머릿속에서도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하녀장이 다시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각하께서 버리라고 집사장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안이 버리라고 했다니, 그대로 흡족해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삐죽 또 못된 심보가 올라왔다.

“가져와.”

“예?”

“어떤 꽃인가 보고 싶어서 그래. 가져와 봐.”

봐봤자 속만 상할 것이 분명한데, 그 순간 또 그런 모순적인 명령을 내렸다.

하녀장은 조금 망설이다가 후다닥 가서 꽃다발을 들고 왔다.

“여기 있습니다, 마님.”

여러 가지 꽃이 섞여 있지만,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이것이었다.

‘푸른 물망초.’

아마 꽃말이 나를 잊지 말아요, 였나.

‘가지가지 하는구먼.’

배알이 꼴려서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꽃말로 은근히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사교계에서 자주 사용하는 간접언어 중 하나였다.

‘어차피 흘려들으면 돼. 이안도 하나하나 기억도 못 할 것.’

내가 스무 살 아가씨였다면 두근두근거리며 꽃을 골랐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미 한 번 벽돌 같은 남자를 데리고 살아봤다.

‘남자들은 이런 것 하나하나 알지도 못한다고.’

그러니까 이 꽃다발조차도 그냥 이안에게는 하나의 꽃에 지나지 않을 수 있었다.

‘실제로 자세히 보지도 않고 버리라고 했고.’

그런데 굳이 들고 와서 내 속을 스스로 상하게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도 모르겠다, 나의 마음.’

심란하다, 심란해. 그리 생각하며 내가 조금 세게 꽃다발을 테이블에 내려놓았을 때였다.

탁.

풍성한 꽃 속에서 작은 카드가 톡 하고 튀어나왔다.

꽃다발의 색과 어울리는 연보라색 카드였다.

‘보지 않는 게 나을 텐데.’

그냥 버려질 카드, 그대로 덮어두면 세상에 없었던 일이 되고 끝날 텐데.

나는 그 카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카드를 양옆으로 벌렸다.

카드의 내용은 간결했고, 기분 나쁘게 글씨는 정갈했다.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뿐이야, 이안.

당신의 릴리

“이게 진짜!”

화가 훅 하고 솟아올랐다. 나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카드가 우두둑 구겨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버리질 못하겠어.’

제임스가 보낸 편지는 곧장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건 버릴 수가 없지?’

곁에 두고 봐봤자 속만 들끓을 게 뻔했는데, 동시에 버리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내가 이상해.’

마음이 울렁울렁거렸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카드와 꽃다발을 내려보았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출 준비를 해주게, 하녀장.”

한 모금도 머금지 않은 찻잔에서는 희미한 김이 솟아올랐다. 그것들을 뒤로한 채 나는 성큼성큼 걸었다. 하녀장이 내 곁을 따라붙으며 물었다.

“어디를 나가시려고요?”

“그냥 바람이 쐬고 싶어서.”

그냥 이렇게 집에 있으면 속이 더 부글부글 끓을 것 같았다.

* * *

취해버릴 것같이 넘실거리는 꽃의 파도를 넘어서,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아.”

마부의 질문을 받은 나는 정작 얼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당연했다. 어디 가고 싶어서 나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괜한 외출인가.’

하지만 그냥 집에 있자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경험상 이럴 때에 그 원인이 되는 사람과 붙어 있으면 꼭 후회할 짓을 했다.

‘그러니 나가기는 해야 하는데.’

그리 생각하며 나는 마차에 달린 창문으로 타이론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이 창가에 서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멀어서 어떤 표정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안.’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화를 지글지글 낼 때는 언제고, 막상 저렇게 창틀에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알싸하게 아파왔다.

‘그래도 내가 신경 쓰여서 저기 서 있는 거겠지.’

저렇게 신경 쓰이도록 내가 행동했다고 생각하니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이안은 단것을 좋아하니까.’

단것을 사 들고 와서 있다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보자.

그렇게 결심한 나는 마부에게 아까보다 한결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케이크 가게가 어디인가?”

“리버티 시장 내에 있습니다만.”

“그리로 가지.”

마차는 천천히 굴러갔다.

* * *

리버티 시장은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홍차 잎 가게와 마주하고 있는 커다란 시장이다.

홍차 가게가 흥하면서 홍차를 마실 때 필요한 다과 같은 것들이 하나둘 그 가게 근처로 모여들어서 시장을 이루게 되었는데, 지금은 귀족 가문이나 황실로 납품하는 식자재, 디저트 전문시장이 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군.”

나를 따라온 하녀장은 장황하게 리버티 시장의 역사를 읊어주었다. 나는 눈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생에는 직접 찾아와본 적이 없으니까.’

제임스는 물론이고 진상들도 디저트류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집안에서 디저트를 사올 때는 티파티나 연회를 주최할 때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집사가 보통 가서 업체를 선정하고 그랬지.’

그랬던 장소를 내가 이렇게 직접 찾아와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천천히 모든 것을 내 눈에 담듯 걸었다.

그렇게 한 30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케이크 가게가 있는 섹션에 들어섰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설탕을 아낌없이 퍼부은 아이싱 장식들이 화려하게 눈을 사로잡았다.

‘저건 구두인가? 저건 드레스?’

결혼식 연회 한가운데 놓아도 손색없는 아름다운 설탕공예 케이크들이 보였다.

왜 생크림 케이크가 안 보이고 버터케이크들이 주를 이루는가 생각했더니 답이 나왔다.

‘설탕은 같은 무게 은과 같은 값이니까.’

우유만 있으면 되는 생크림 케이크는 굳이 귀족들에게 선보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안도 잘 먹을까?’

결혼해서 부부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가 어떤 입맛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막연히 단것을 좋아하나 보다, 했을 뿐.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어서일까. 주인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케이크 찾으세요? 어떤 케이크를 주문하시겠어요?”

“남편과 둘이 먹을 건데…….”

“그럼 3호 사이즈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고민하고 있었던 차에, 점원이 그리 말하니 사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정말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케이크를 싫어한다면 다음에는 케이크를 사지 않으면 되지.

“장식은 개수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데, 보통 다섯 개 이상은 올리지 않아요.”

“여기에서 고르면 되나?”

“네.”

장식을 고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로 전시된 케이크를 둘러보던 나는 주문서를 들고 오는 주인에게 물었다.

“메시지는 몇 글자까지 넣을 수 있지?”

그냥 장식만 꽂아서 바로 가져갈 줄 알았던 주인이 내 질문에 조금 멈칫했다가 바로 기운차게 대답했다.

“열다섯 글자까지 가능합니다. 어떤 글자로 해드릴까요?”

“…….”

막상 새길 수 있다고 하니 또 망설여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아, 라고 넣어주게.”

“예?”

“그렇게 해줘.”

“네, 넷!”

주인이 후다닥 메모하는 것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이라면 그 말을 보면 안심하겠지.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값은 하녀장이 치렀다.

“얼마나 걸리지?”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럼, 차 한잔 들고 오도록 하지.”

“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결국 케이크는 마부가 찾아올 것이다. 나는 하녀장과 함께 리버티 시장 입구에 있는 유명한 홍차 가게로 향했다.

“위층으로 가지.”

“예, 마마.”

성행하는 홍차 가게답게 건물은 5층이나 되었다. 1~3층은 홍차와 클로틸드 크림, 레몬커드, 샥스핀 등등 홍차와 곁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을 팔았고, 4층에는 찻잔을 비롯한 다기를 팔았다. 그리고 5층이 찻집이었다.

앉아서 차를 고르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좀 더 로맨틱한 문구로 해달라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사랑한다 좋아한다 이런 말은 하기에 아직 꺼림칙하고.’

바로 그때였다. 고개를 돌리니 탁 트인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무섭게 올라가고 있는, 건물도.

“저게 짓고 있는 백화점…….”

그 건물을 보니 가슴이 울렸다. 백화점은, 이안이 나를 신뢰하고 거금도 아낌없이 투자한 사업이었다.

‘그이는 늘 나를 믿어주었지.’

그런데 고작 과거의 일에 이렇게까지 흔들리다니. 문득, 내가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안과 이야기를 해봐야지.’

그 생각이 드니, 더 이상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없었다. 마침 마부가 완성된 케이크를 들고 왔기에,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돌아가자.”

하녀장과 마부는 어쩐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는 길은 나올 때보다 빨랐다. 치맛자락을 꾸깃꾸깃 쥐고 있던 나는 도착하기 무섭게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나를 반긴 것은 내 남편이 아니었다.

타이론 저택의 현관 앞에는 곱슬곱슬한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화려한 미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무척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마주했다.

“반갑습니다, 타이론 대공비 전하.”

“……?”

얼마나 당당한지, 내가 일순간 이곳이 타이론 공작가가 맞나 다시 확인할 정도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분명 우리 집이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당당하게 허리를 세우고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화이트폴 후작가의 막내딸, 릴리아나예요. 타이론 대공 전하와는 막역한 사이죠.”

“막역?”

아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신혼집에 함부로 낯선 사람이 찾아온 것도 어이가 없는데, 새신랑하고 막역한 사이라고?

‘화이트폴 후작 영애.’

바로 오늘 문제의 꽃다발을 보낸, 그 여자였다. 나는 뾰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절로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내 저택에는 무슨 일이죠? 사전에 언질도 없이 남의 집에 찾아오다니 후작 영애답지 않은 예의범절이네요.”

잔뜩 비꼬았으나, 그녀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극히 극적인 태도로 자신의 두 손을 모았다. 화려한 외모 때문에 그다지 가련해 보이진 않았다.

“예의가 부족했으나 이해해주세요. 제 친구의 가엾은 이야기를 들으니 견딜 수가 없어서요. 마침 대공비 전하께도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무섭게 쏘아볼 때는 언제고. 나는 뭐라고 말하나 들어보자는 심경으로 팔짱을 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안을 놔주세요.”

* * *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안을 놔달라고요……?”

아니, 내가 이안을 묶어놓기라도 했나. 나랑 헤어지면 당장 뛰어내려 죽어버릴 거라고 협박이라도 했나.

‘물론, 시작이 매끄럽지 않긴 했지만.’

그 부분에서는 그의 책임도 상당 부분 지분을 차지했다. 아니, 애초에 고자라고 했잖아! 고자가 아니었다면 나도 재고했을 거라고.

‘그런데 나보고 놓아달라고?’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오해를 풀기 위해 나는 입술을 천천히 떼었다.

하지만 내가 말하기도 전에, 화이트폴 영애는 계속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네. 비전하께서는 조금도 이안을 사랑하지 않으시잖아요. 그이는 마음씨가 착해서 질질 끌려가고 있을 뿐이에요. 양심이 있으시다면 그이를 놓아주세요.”

“하.”

이쯤 되니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는 게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우리 부부에 대해서 도대체 뭘 얼마나 잘 알아서?’

열이 확 솟았다. 하지만 내가 순간적으로 대차게 그녀에게 대하지 못한 것은 그녀와 이안의 관계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둘이 죽고 못 사는 사이인데 내가 갑자기 끼어든 것일 수도 있잖아.’

상황이 혼란해서 그런가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떠올랐다. 바로 그때, 적절하게 현관문이 열리고, 이 자리를 수습할 수 있는 남자가 뛰어나왔다.

바로 이안이었다.

“릴리!”

“이안!”

밖으로 달려 나온 이안은 나와 릴리아나의 사이를 가로막듯, 내 앞에 섰다.

마치 나를 지키는 듯한 태도였으나, 이미 콩깍지가 거하게 씌어 있는 릴리아나는 마냥 행복해하며 말했다.

“이제야 얼굴을 보여주네. 어쩜, 마음고생을 많이 했나 봐. 안 좋아 보여.”

안 좋긴 누가 안 좋단 말인가. 누가 봐도 이안은 결혼하고 얼굴이 폈는데!

발끈했지만, 내가 나설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제임스와 달리, 이안은 행동하는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릴리아나에게 말했다.

“내 부인에게 무슨 무례지? 만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이렇게 계속 저택 현관 앞에 진을 치기까지 하고.”

그제야 나는 상황을 대략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게 마치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마중을 나온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은 이안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현관 앞을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충분히 수치스러워할 수 있는 상황이건만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항간의 소문으로 수치스러운 건 이해하지만 나한테는 감출 필요 없어. 나는 늘 네 편이니까.”

정확히는 상황을 자기 유리한 대로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거 완전체네.’

다른 사람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순전히 자기감정에만 취해 있었다.

이안은 그것이 자신의 유한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조금 더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돌아가, 릴리. 과거의 정을 생각해서 강압적으로 굴지 않고 있지만, 이렇게 내 아내에게 무례를 계속 범한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어.”

“하지만 이안! 나는 친구로서 네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강압으로!”

“왜 강압이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스스로 결혼을 했을 리가 없으니까! 너는 정말로 결혼할 생각이 없었잖아.”

친구라고 하더니 정말로 이안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건 분명했다. 세간에 소문처럼 이안은 사랑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라고.’

나는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 그녀에게 적절한 정신적 충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한 걸음 성큼 나섰다.

“영애, 영애께서 하나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게 있어서 정정하고 싶네요.”

“뭐죠?”

더없이 사근사근하게 굴던 그녀의 눈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갔다. 나는 이안의 팔에 팔짱을 끼고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요염하게 웃었다.

“제가 이안을 구속하고 있는 게 아니고, 이안이 제게 매달리는 거예요. 영애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남편은 제게만 남자가 되거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래봤자, 너도 이안이 고자인 줄 알겠지.

‘하지만 고자 아니거든.’

아니나 다를까. 내 노골적인 말에 그녀의 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 이게 무슨 남사스러운……!”

갓 스무 살 아가씨였다면 이런 말을 내뱉고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충분히 뻔뻔하게 굴 수 있는 나이였다.

나는 하녀장의 손에서 케이크를 빼앗아 들어 상자째 그녀의 손에 건네주었다.

“귀한 손님에게 맞는 선물을 마침 제가 사 왔네요. 여기선 영애에게 찻물 한 방울 드릴 수 없고, 대신 가져가서 드세요.”

그것참 공교롭기도 하지. 케이크 위에 적힌 말은 그녀 자신에게도 교훈이 될 것이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아.

멍하게 굳어져 있는 그녀를 보고 나는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 다시 이안의 팔을 잡아당겼다. 현관문 고리를 쥐고, 나는 적당히 예의 바른 어조로 말했다.

“피곤해서 배웅은 하지 않을게요. 그럼 안녕히.”

거기까지가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인내심의 끝이었다.

나는 쾅 소리가 나게 무거운 현관문을 닫았다.

‘휴우.’

매정하게 문을 닫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큰 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나를 이안이 마주 보았다. 그는 대단히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올리비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 사 온 외출 선물도 엄한 사람에게 넘겨버렸고.

‘피곤해.’

더 이상 그와 이야기할 기운도 없었다. 나는 뻑뻑한 눈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뭐해요, 여보. 내가 피곤하다고 했잖아요.”

내 말에 이안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특유의 눈웃음을 쳤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역시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그는 두 팔로 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혼자서 내려왔을 계단을 나를 안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안!”

등 뒤로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안고 가는 모습을 보고 말문이 막힌 거겠지.’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안과 불행하지 않아. 오히려 감정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 같아.

나는 어깨 너머로 굳이 그녀를 바라보는 대신 그냥 이안의 가슴팍에 이마를 대었다.

‘제임스도 그렇고, 다들 적당히 포기해주었으면.’

솔직히 그 생각뿐이었다.

* * *

이안이 나를 안아서 데려간 곳은 나의 침실이었다.

침대에 앉히듯 나를 내려놓은 뒤, 모자와 리본을 섬세한 손길로 풀어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 앞에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변명이 아주 많아요, 올리비아.”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늘이 깊어 그윽해 보이는 그의 푸른 눈이 맑은 가을하늘 같았다.

‘화내지 말아야지.’

무슨 말을 듣든, 냉정하게 들어야지.

“일단, 릴리는 제가 부른 게 아니에요.”

주먹을 꾹 쥐고 한 다짐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나는 날 선 목소리로 이안에게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네?”

첫 마디에 내가 화를 낼 줄 몰랐던 이안이 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나는 조금 더 길게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애칭을 부르지 말라고요.”

“올리비아.”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저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기분이 나빠.’

사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기분 나쁠 것도 없었다. 로메오도 나를 올리라고 부르지 않던가. 오랜 친구 사이에는 특별할 것도 없는 애칭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릴리라는 이름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이제야 알겠어. 그가 얼마나 기분이 상했을지.’

역시 사람은 당해봐야 어떤 기분인지를 알게 된다. 나는 언제 애칭에 관한 이야기도 진지하게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였다.

“올리비아.”

커다란 손이 내 뺨을 감쌌다. 어쩐지 오스스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의 손가락이 이끄는 대로 곧게 앞을 마주 보았다.

은은한 미소를 지은 잘생긴 얼굴이, 나를 향해 물었다.

“질투하는 겁니까?”

“질투?”

“화이트폴에서 꽃다발이 왔을 때부터 계속 저기압이었잖아요.”

“난…….”

이안의 말은 정곡이었다. 릴리아나가 보낸 꽃다발을 보았을 때부터 내 속은 엉망으로 일그러졌으니까.

‘그게 질투라고?’

나는 눈을 내리깔아서 이안과 시선을 피했다. 떨리는 목소리에 어쩔 수 없는 혼란이 묻어났다.

“난 모르겠어요. 이게 무슨 감정인지,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건지…….”

나는 그동안 내가 내 자신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 감정은 늘 명확했고, 다른 사람을 향할 때에 그 색채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예외가 바로 이안이었다. 이안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매일매일 새로운 감정을 맛보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그동안 내가 알았던 감정은 그럼 감정이 아니었을까.’

누군가를 향해 마음이 울렁이고 어지럽게 뛰는 격한 감정을, 나는 이전에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편안함이나, 인정받음에서 오는 기쁨도. 아니, 사실 그 어떤 감정도 내 이전 생에서 알던 것과 같지 않았다.

‘그래. 사실은 몰랐던 거야.’

나는 이제야 알았다. 사랑도, 질투도, 행복도 모두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이 가진 수천의 감정들 중 내가 아는 것은 사실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어째서 이렇게 이안 타이론만 특별하단 말인가.’

내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나의 양 뺨을 감싸고 고스란히 지나는 모든 감정을 마주했을 남자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올리비아. 나 웃어도 돼요?”

“네?”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너는 웃어?

내가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이안이 팔을 넓게 벌려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질였다.

“당신이 너무 좋아서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군요.”

“이안.”

그의 말에 나는 다시 뺨을 붉혔다. 잠시간 나를 끌어안고 내 어깨에 뺨을 비비던 남자는 천천히 몸을 들었다.

고개만 숙이면 코끝이 맞닿을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는 서로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촉.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천천히 입술을 포갰다.

평소의 키스는 정신없이, 누가 떠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고 정열적으로 이어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의 내부를 탐하는 대신 부드럽게 입술을 빨고, 서로의 숨결에 입술을 비비었다.

따뜻하고, 안정적인 키스.

하지만 입술을 천천히 떼었을 때, 마주 보고 있는 남자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게 사랑.’

경험한 적 없었던 감정을, 나는 어린아이처럼 하나하나 배웠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지만, 동시에 더없이 편안했다. 포만감과도 비슷한 감각이었다.

내가 차분해졌다는 사실을 눈치챈 이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내 곁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내 손에 깍지를 끼고 단단히 쥐었다.

그의 입술에서 내가 줄곧 궁금해했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화이트폴 영애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어떤 관계도 아니었어요.”

나는 잠자코 이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안은 턱을 문질렀다.

“내가 잠시 화이트폴에 맡겨졌던 건 이야기했었죠.”

“타이론 공작 부부의 서거 뒤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잊어버리겠는가. 그가 허심탄회하게 내뱉은 과거의 이야기를.

“솔직히 저는 화이트폴 후작님이 더 아버지 같았어요. 그분은 정말 마음으로 저를 아껴주셨죠.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날들이었어요. 그러니까…….”

이안은 먼 과거를 보듯 멍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릴리아나가 제가 사실 황족이라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요.”

* * *

이안을 그저 황제의 동생으로만 여기던 타이론 공작.

갑자기 나타난 아이에 대해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한 타이론 공작부인.

두 사람은 갓난아기였던 이안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주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 제게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주시면 안 돼요?”

어린아이가 무얼 알겠는가. 설명을 듣는다고 해서 납득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애정결핍에 허덕이며 이안은 성장했다.

그에게 냉정했던 부부는, 죽을 때조차도 냉정했다.

“도련님, 주인님과 마님께서 마차 사고로…….”

애정의 작은 조각 하나 주지 않은 채, 그들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장례식에서 처음 만난 그의 친형 - 황제는 그의 탄생의 비밀에 대해서 그제야 털어놓았다.

“아직 내 치세가 안정적이지 않다. 너도 네가 황족이라는 사실은 잊고 사는 편이 좋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사랑받지 못할 운명.

그 비밀을 들은 소년의 눈은 새카맣게 죽었다.

‘역시 내가 문제였던 거야.’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텐데.

그렇게 자신을 원망하던 소년에게 찾아온 사람이 바로 화이트폴 후작이었다.

“네가 형님의 아들이구나. 이렇게 어린데 가엾기도 하지.”

이안이 타이론 공작 부부의 자식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화이트폴 후작은 친조카를 대하듯 이안에게 온 마음을 다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귀여운 동생도 생겼다. 바로 화이트폴 영애인 릴리아나였다.

“오빠, 나 너무 예쁘지? 난 사실 숨겨진 황녀 아닐까?”

릴리아나는 공상에 빠져 있는 것이 취미인 어린 소녀였다. 그녀가 오빠오빠 부르며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모습이 그는 싫지 않았다.

‘이게 가족인가.’

포근하고, 따뜻하고.

하지만 화이트폴 후작 부부의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이안의 마음속에는 묘한 죄책감이 피어났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그는 이미 황제에게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사실 타이론 공작 부부의 자식이 아닌데.’

화이트폴 후작 부부는 그가 친조카라고 믿고 애정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애정도 사실 내 것이 아니야.’

차라리 상냥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이안은, 결국 어느 날 화이트폴의 모든 가족을 모아놓고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저는 사실 타이론 공작 부부의 아들이 아닙니다.”

화이트폴 후작은 진정한 인격자였다. 자신을 기만했다는 기나긴 이야기를 듣고도, 그는 가만히 이안을 안아주었다.

“그동안 마음고생했겠구나.”

그의 반응에, 이안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그 뒤로 화이트폴 가족들과 이안의 관계는 더 돈독해졌다.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황족이 되고 싶어. 오빠는 우리와 진정한 가족이 되고 싶지?”

릴리아나의 돌발 행동을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둘이 맺어지면 완벽하잖아.”

완전한 나신에 얇은 가운 하나를 걸치고 침실에 숨어든 릴리아나를 보고, 이안은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사실은 소리를 질러도 안 되었다. 몇 살 더 많은 오빠답게, 릴리아나를 달래든가, 아님 조용히 해결해야 했다.

결국 그날은 이안의 마지막 다정했던 날이 되고 말았다.

* * *

이안의 과거 이야기를 모두 들은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말았다.

‘세상에.’

저렇게 적극적으로 뻔뻔하게 달려들길래 뭔 껄적지근한 건수라도 있어서 그런 줄 알았더니만.

이안은 나를 보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대국민 고자도 사실 완전 거짓말은 아닙니다. 그때 릴리아나에게 느낀 충격이 너무 커서, 타인과 친밀한 관계가 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무서운 일로 느껴졌었거든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소름이 쭉 끼쳤다.

‘날 좋아한다고 사전에 동의도 없이 내 침실에 숨어든다고.’

그리고 공교롭게도 나는 그 비슷한 경험을 지난 생에서 했다.

“나도 많이 참았소.”

나만 얌전히 몸을 맡기면 온 집안이 평안할 거라고 말하던 그 무뚝뚝한 남자.

그 관계가 내게는 얼마나 치욕과 모멸감을 주었었던가.

‘그걸 이안도 당했던 거야. 훨씬 어린 나이에.’

그가 겪었을 마음의 상처가 상상이 되질 않아서, 나는 울망울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안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달라붙는 사람은 끝이 없었고…….”

“잠깐만요. 달라붙는 사람이 끝도 없다뇨. 한 명이 아니에요?”

“네?”

이안은 무슨 뜻이냐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이내 능글맞게 씩 웃으며 자신의 뺨을 쓸어 보였다.

“반짝이는 외모, 공작위에 많은 재산,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만한 청년.”

“우웩.”

자기 자랑도.

하지만 더 슬픈 건 그 자랑들 중 어떤 것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긴, 나도 고자가 아니면 잔뜩 달라붙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고자라도 좋다는 사람도 몇몇 봤었고.’

결혼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 소문들이 다 새삼스럽게 느껴진담. 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올리비아.”

이안이 진지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어요. 내가 왜 아이를 가질 수 없는지, 내 과거가 어땠는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들은 이야기는 모두 그만 알고 있는 내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당신은 어때요? 날 사랑하나요?”

“이안.”

나는 그와 눈을 맞추었다.

지난 생에서, 그는 20년 동안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신의 비밀들을 세상에 알리지도 않았다.

모두 나만 특별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거부하겠는가.

“내가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올리비아.”

내 대답에 이안이 다시 나를 꽉 끌어안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그의 등을 서툰 손길로 마주 안아주었다.

두근. 두근.

은은한 심장 소리가 꼭 노랫소리 같았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내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정리가 다 된 다음에, 우리 느긋하게 수도 데이트해요. 그때는 당신 쓰고 싶은 대로 돈도 다 써도 돼요.”

늘 그에게 과하다, 그건 아니다, 그만 사라고 말하는 나였지만.

‘한 번쯤은 풀어줘도 되겠지.’

내 말에 이안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맙소사. 방금 조금 설렜습니다.”

“자기 돈을 자기가 쓰는 건데 뭐가 설레요.”

“내 돈을 쓰는 게 설레는 게 아니에요. 당신을 위해 쓰는 것이 설레는 거지.”

하여간 달콤한 말도 되게 잘한다.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잠시 그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이안,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못하겠어요.”

내겐 많은 비밀이 있었다. 그에게 말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앞으로도 감추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단언할 수 있어요.”

나는 그의 등을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안 특유의 높은 체온이 나를 따뜻하게 했다.

마음속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보낸 많은 시간들은,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을 거예요.”

내가 겪었던 고통, 눈물, 힘들었던 시간들.

그래도 괜찮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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