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당신을 위한 자장가 (9/28)
  • 4장. 당신을 위한 자장가

    그 뒤로 둘의 사이는 변함이 없었다. 만나면 고양이와 쥐처럼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는 사이.

    좀 자라서 감정 다툼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뒤에도 둘이 투닥거리는 것은 똑같았다.

    하지만 그게 어릴 때처럼 여전히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관성적으로 말다툼을 이어가는 거라고나 할까.

    그 증거로 이안의 소문을 들었을 때 가장 격노한 사람이 바로 스타티스였다.

    “대국민 고자라니! 누가 감히 타이론 공작을 그런 식으로 칭해?!”

    무심코 사교계의 소문을 전했던 보좌관은 화들짝 놀랐다.

    “그, 그게.”

    ‘아니, 평소에는 서로 무척 싸우더니만 왜 이렇게 반응이 격한 건데?’

    보좌관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순화하기에는 이미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보좌관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타이론 공작이 스스로 낸 소문 같습니다.”

    “뭐?”

    보좌관의 말에 스타티스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스스로 왜 그런 소문을 내?”

    “그야…….”

    이안의 속내를 알 길 없는 보좌관은 어물어물거릴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멀쩡한 남자가 고자라고 하는데? 정말 고자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런 생각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이안의 진정한 출생을 알고 있는 스타티스에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스타티스는 바로 이안에게로 달려가서 다짜고짜 물었다.

    “제정신이야?”

    “뭐가?”

    이안은 무덤덤한 얼굴로 스타티스를 맞이했다. 그 당당한 태도에 스타티스는 도리어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너, 그, 그, 그거라며.”

    “아.”

    차마 고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거라고 했는데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스타티스의 얼굴은 빨개졌는데, 정작 이안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담담했다.

    “딱히 결혼하고 싶지 않으니까 상관없어.”

    “결혼을 왜 안 해? 그럼 평생 혼자 살 생각이야?”

    스타티스의 말에 이안은 자조했다.

    “혼자 태어났으니 혼자 살다 가는 거지.”

    “네가 왜 혼자인데?!”

    화가 난 나머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안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스타티스를 바라보자, 스타티스는 다시 입술을 삐죽였다.

    “내가 네 가족이란 뜻은 아니고.”

    “다행이네. 소름 끼칠 뻔했거든.”

    “뭐!”

    신경 써서 말을 해줘도 매사 이런 식이니 버럭버럭하고 만다. 이안을 흘겨보던 스타티스가 결국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었다.

    “……혹시 나 때문이야?”

    스타티스의 말에 시큰둥해하던 이안이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타티스는 뾰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아이를 낳아도 내 계승권에는 아무 문제 없거든? 그러니까 나 때문이면 그 마음 접어둬!”

    스타티스를 빤히 쳐다보던 이안은 피식 웃었다. 이 조카는 삐죽거리다가도 또 다정해지니 결국 미워할 수가 없었다.

    “너 때문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런 거 아니면 네가 굳이 결혼을 안 할 이유는 뭔데? 평생 고자 소리 들으면서 살 생각이야?”

    “왜 내가 평생 혼자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결혼할 수 있어.”

    “네가 언제?”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뭐래, 진짜.”

    이안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돌아섰다. 스타티스는 그런 이안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노려보았었다.

    그게 벌써 수년 전.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더니.’

    결혼을 안 할 거라던 그 녀석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순식간에 결혼했다. 국외에 잠시 일정이 있었던 스타티스가 어떻게 결혼에 의견을 낼 틈도 없었다.

    ‘아바마마 때문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화를 내며 귀국했더니만, 의외로 두 사람은 무척 사이가 좋아 보였다. 정말 연인처럼 말이다.

    “잘 해결되어야 할 텐데.”

    스타티스가 정한 이안과 제임스가 결판을 내는 날은 황제의 탄신일로부터 일주일 뒤.

    장소는 황궁이었다.

    * * *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얼굴이 지워진 아이들이 진상들과 즐겁게 놀고 있었다.

    “할머니.”

    “오냐, 오냐.”

    “엄마는 싫어. 할머니가 제일 좋아.”

    다정다감한 그곳에, 나만 낄 수가 없었다. 햇살이 따스한 가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만 웅크리고 서 있었다.

    ‘내 집인데, 내가 설 곳이 없어.’

    깊은 무력감이 숨을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내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내 등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부인.”

    나는 고개를 돌렸다. 까만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큰 덩치의 남자가 나를 향해 흉터투성이인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리 오시오, 부인.”

    “아아!”

    바로 제임스였다. 나는 겁에 질려 물러나려고 했지만,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이 훨씬 빨랐다. 그는 나를 꽉 붙들었다.

    “내 인내심은 썩 길지 않소.”

    “헉!!”

    나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낯익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지만, 몸의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제임스가 찾아왔어.’

    나는 손톱을 세워 내 팔을 긁었다. 커다란 손자국이 지금도 남은 것만 같았다.

    ‘나를 파넬로 데려가려고.’

    나를 미워하고 이간질하기만 하던 세 명의 시어머니, 괴롭기만 했던 결혼생활이 바로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애니는 어떻게 하지? 겨우 타이론 공작가에 머물면서 학교에 다니기로 했는데.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손톱이 여린 살갗을 찢을 듯 깊이 파고들었다. 그런데도 공포 때문인지 아픔이 느껴지질 않았다. 이 시점에서 내게 가장 두려운 건 다름 아닌 이 사실이었다.

    ‘그 고통스러운 삶을 반복해야 하는 거야?’

    제임스도, 시어머니 셋도 다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는데도 그 길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나 자신을 내가 끌어안아도 심장의 냉기가 자꾸자꾸 흘러나와 몸을 얼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바들바들 떨었다. 바로 그때였다.

    “쉬이. 천천히.”

    “아.”

    따뜻한 손이 나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아요, 괜찮아.”

    낮고, 묵직한데, 다정한 목소리.

    고개를 들자, 잘생긴 남자가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눈을 나와 맞춰왔다.

    “나예요, 올리비아.”

    허덕거리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안정적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안…….”

    “우리 집이에요. 당신 방이고.”

    그가 달팽이처럼 느리게 팔을 펼쳐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내가 놀랄까 봐 배려해주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태도 하나하나가 내 마음을 울렸다.

    ‘꼭 얇게 약을 발라주는 것 같아.’

    심장 고동이 천천히 잦아들면서 얕은 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조금 안정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이안이 다시 살짝 몸을 떼어 나를 마주 보며 물었다.

    “이제 괜찮아요, 올리비아?”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손이 떨리긴 했지만, 아까처럼 공포에 잠식되지는 않았다.

    이안이 작게 웃었다.

    “참 신기하네요. 내가 아는 당신은 무척 당찬 사람이었는데. 자신을 향해 굴러오는 불행을 씩씩하게 발로 뻥 걷어찼죠.”

    그의 커다란 손가락이 내 눈가를 문질렀다. 그제야 나는 고였던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안이 손끝을 쪽 하고 빨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파넬 공작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이렇게까지 동요하다니.”

    나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누가 봐도 처지는 결혼에, 이 나라 귀족이 다 있는 자리에서 전남편이 등판하다니.

    나는 축 늘어진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 내가 싫어요?”

    “아니요.”

    내 이마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그가 다시 나를 힘을 주어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나는 좋아요. 당신과 좀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당신의 약한 면, 강한 면 모두 알게 되는 거잖아요.”

    나는 대답 없이 그의 어깨에 내 뺨을 비볐다. 그의 숨결이 내 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자, 내 몸이 종처럼 울리는 것만 같았다.

    “당신은 이미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요. 내가 애정결핍이라든가, 아내에게 푹 빠져서 만날 아내 물건을 쇼핑하고 있다든가.”

    “푸흡.”

    아니, 그건 지나치게 사소한 비밀 아닌가. 하지만 나를 웃기게 하기엔 충분했다. 나는 이 심각한 와중에도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내가 작게 웃자, 그가 그제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흩트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이제 기분은 괜찮아졌어요? 당신, 무척 하얗게 질렸었잖아.”

    “아.”

    덕분에 다시 황제의 탄신제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부인.”

    그가 날 부르는 순간 꼴사납게도 얼어붙고 말았다. 과거가 그대로 나를 삼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당황스러워했어야 했는데.’

    이 시점에서의 ‘나’는 제임스를 만난 적이 없으니까.

    ‘왜 그렇게 익숙하게 날 부르는 거야. 그러니까 굳어져 버렸잖아.’

    나는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제임스를 털어버렸다. 그리고 이안에게 우물거리며 말했다.

    “미안해요.”

    내 말에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왜요?”

    “그야 부부가 함께 참석하는 첫 공식행사가 엉망이 되었고…….”

    말을 하면 할수록 내 어깨는 절로 움츠러들었다.

    ‘무척 신경 썼는데.’

    이 날, 가장 예뻐 보이고 싶어서 가장 자신 있는 것들로만 꾸몄는데, 이렇게 엉망이 될 줄은 몰랐다.

    ‘하필 이런 일이…….’

    이럴 줄 알았으면 로메오의 말을 조금 더 새겨들을 걸 그랬다. 내가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이안이 손가락으로 내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말했다.

    “우리의 첫 공식행사는 결혼식이었죠. 당신도 알다시피 대성공이었고.”

    “이안…….”

    “그리고 미안할 건 그 무식한 남자죠. 당신이 제게 미안할 게 뭐가 있나요.”

    “그래도.”

    하지만 찜찜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상황이, 삶을 바꾸려고 했던 내 탓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냥 순응해 살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지.’

    하지만 그저 얌전히 순응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나 괴로웠었는데.’

    제임스를 향해 내뱉었던 이안의 말은 내 마음도 거세게 흔들었다.

    “세상에는 되돌릴 수 있는 일들만 있는 게 아니다.”

    이번에 제임스를 마주하면서 선명하게 깨달았다.

    시어머니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느꼈던 아픔, 상처. 남편에게 외면당하고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며 느낀 모멸감.

    ‘어떻게 그런 기억들을 잊지?’

    지금 생각하니 그 길을 다시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 오만이었다.

    ‘시시각각 비슷한 상황이 되면, 찾아오는 기억에 짓눌리지 않을까?’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 와중에도 그의 눈은 잔잔한 호수처럼 차분했다.

    “이안.”

    “예, 올리비아.”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안이 여전히 나를 아내로 다정히 대해준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 마음이 계속될 수 있을까? 황제 폐하께서도 여전히 나를 너그럽게 생각하시고?’

    사람의 마음이란 상황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와 이안을 두고 사교계에서 얼마나 뒷말이 나올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헤어져달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어.’

    물론 헤어진다고 해서 한 번 승인된 혼인무효장이 효력을 잃을 리는 없으니, 내가 파넬로 돌아가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안의 의견대로.’

    내가 입술을 사리물었을 때였다. 이안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안 들어도 알 것 같네요.”

    이건 또 무슨 뜻일까.

    내가 슬쩍 눈을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지금까지와 똑같습니다. 저랑 쇼핑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고, 가끔 백화점이 잘 지어지고 있나 구경하죠.”

    “정말이에요? 몰래 나와 혼인무효해볼까 생각하는 거 아니고요?”

    뾰족한 내 질문에 그는 눈을 휘며 예쁘게 웃어 보였다.

    “당신이 저를 시험하고 싶으시다면 몇 번이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이안.”

    가슴이 울컥했다. 나는 눈물을 꾹 참으며 그의 얼굴을, 반듯한 이마와 곱슬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움이 넘친다는 게 이런 걸까.’

    세상에 누가 이렇게 나를 따뜻하게 감싸줄까. 나는 치밀어오르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갑자기 실리는 내 무게에 대비하지 못한 그가 뒤로 넘어갔다.

    부드러운 입술이 달콤했다. 그의 아랫입술을 쪽쪽 빨자, 그가 놀란 것처럼 눈을 떴다가 이내 살짝 입술을 벌렸다.

    ‘따뜻해.’

    그의 숨결은 그가 나를 끌어안는 손길처럼 따뜻했다. 평소처럼 세게 얽는 입맞춤이 아니라 머리를 쓰다듬듯 부드럽게 혀가 얽혔다.

    ‘역시 이 사람이 좋아.’

    나는 얼마 전 깨달았던, 그 감정을 다시금 떠올렸다.

    ‘이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몇 번이나 각도를 달리 입술을 부딪치고 나서야 나는 입술을 떼었다. 나는 그의 너른 가슴에 내 뺨을 비비며 속삭였다.

    “안아줘요.”

    내 말에 그가 흠칫 몸을 굳혔다. 그러나 이내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많이 충격받았어요. 오늘은 쉬는 게…….”

    “제가 원해요.”

    나는 그의 가슴과 내 사이를 벌리는 얇은 천을 송곳니로 깨물었다.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당신 품에서 잊고 싶어요.”

    “올리비아.”

    내가 그의 가슴팍에 느릿하게 뺨을 비볐을 때였다.

    “제겐 너무나 즐거운 말이지만.”

    “꺄!”

    갑자기 그가 내 몸을 붙들고 몸을 빙글 돌렸다. 순식간에 그가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그는 내 이마에 입을 쪽 맞추었다.

    “오늘은 안 돼요. 의사도 조용히 쉬게 내버려 두라고 했어요.”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데. 입술을 삐죽이는 내게, 이안은 목 끝까지 꼼꼼히 이불을 덮어주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넘겨주었다.

    “고집 센 당신을 위해 제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네요.”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내가 눈을 깜빡깜빡거렸을 때였다.

    “어여쁜 작은 새, 날아가다 버들잎을 물어왔지.”

    무겁고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렸다.

    “내 슬픈 얼굴에 입 맞춰주렴.”

    언젠가 그가 내게 부탁했던 자장가였다.

    가만히 노래를 들으며 나는 가물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긴 하루였다.

    * * *

    “정말 미안해, 올리!”

    날이 밝고, 타이론 공작가, 아니 대공가에는 손님이 밀어닥쳤다.

    뜻밖의 방문 소식에 나는 잠옷만 가벼운 원피스로 갈아입고 뛰어나왔다.

    현관에서 푸른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젊은 남자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바로 내 친구 로메오였다.

    “로메오.”

    인사할 틈도 없었다. 가엾게도 밤새 잠을 설쳤는지 빨간 눈을 한 로메오가 나를 보자마자 내게 매달렸다.

    “나도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막무가내일 줄 몰랐어. 그렇게 행동할 줄 알았다면 네게 좀 더 자세하게 말했을 텐데. 모두 내 탓이야. 날 때려! 발로 밟아!”

    “로메오, 진정해.”

    아니 이렇게 다짜고짜 뭔데.

    나는 당장 바닥에 엎드리는 로메오를 일으키기 위해 그의 팔을 붙들었다. 하지만 로메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진정하겠어! 어젯밤에도 한숨도 못 잤다고. 모두 내 탓이야!”

    로메오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내가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이 되어 잠시 굳어졌을 때였다. 묵직한 목소리가 우리 등 뒤에서 울렸다.

    “일단 내 아내에게 예의를 지켜주지, 알키저스 영식.”

    “대공 전하.”

    셔츠 차림에 카디건만 걸친 이안이 슬리퍼를 끌며 걸어 나왔다.

    “잘 잤어요, 올리비아?”

    “아, 네…….”

    간밤에 이안이 불러주던 노래가 떠올라, 내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잠도 얼마 못 잤을 텐데.’

    손가락에 잉크가 묻은 것을 보니 아침 일찍 일어나서 업무를 본 모양이다.

    ‘하긴, 어제 일로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을 거야.’

    어제를 떠올린 내 얼굴이 다시 흐려졌다. 이안은 내 어깨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로메오는 훌쩍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메오 알키저스가 인사드립니다, 타이론 대공 전하. 대공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로메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안이 그린 듯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뱉는 말에는 뼈가 있었다.

    “영식도 약혼 축하하네. 듣자니 우리 ‘올리’의 아카데미 동기라지?”

    ‘아휴, 집요해.’

    로메오가 나에게 올리라고 부르며 매달린 것을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애칭이 딱히 특별한 건 아니니 샘내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다 알아듣는 것 같더니 또 이런 말을. 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이안…….”

    “네네, 잘못했어요. 자중할게요.”

    또 바로 사과를 하니 얄미웠다. 내가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을 때였다. 로메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네, 대공 전하. 대공비 마마가 행복하신 모습을 보니 동기로서 기쁩니다. 두 분 잘 어울리십니다.”

    “나도 아네.”

    또 로메오의 칭찬 한마디에 얼굴이 우쭐우쭐해졌다. 나는 이안이 귀여워서 픽 웃고 말았다. 그리고 아직도 훌쩍거리는 로메오에게 말했다.

    “하여간 네 탓이 아니고 그 작자가 문제야. 그러니까 그렇게 자신을 탓하지 말아.”

    “하지만 내가 미리 제대로 말해주었다면 너도 대비를 했을 것 아니야.”

    “너는 말해주었잖아.”

    불편했던 가족 모임. 로메오는 분명히 내게 말해주었다.

    “파넬 공작이 수도에 있어.”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사실 네 말을 믿지 않고 있었어. 내가 알기로 그는 북방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었으니까.”

    내 현재를 바꾸었으면서도, 나는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다.

    제임스가 그렇게 수많은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성품이라는 것 또한 몰랐다.

    “설마 탄신제에 그렇게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그러니까 네 탓이 아니야.”

    “올리…….”

    내 대답에 로메오는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이고, 마음 약한 내 친구 같으니.’

    나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안아주고 싶었지만, 이제 우리는 그렇게 스킨십 해도 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아침 일찍 달려온 거야? 식사는 했어?”

    “아직…….”

    “그럼 다 같이 식사하자. 이안, 당신도 식사 아직이죠?”

    “먹었어도 또 먹어야죠.”

    이건 또 무슨 대답이람.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이안을 쳐다보았을 때였다. 하녀장이 허리를 무척 굽히며 말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손님이 한 분 더 계신데요…….”

    “응?”

    이 아침에 손님이 한 명 더 있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 모셔진 손님은 정말, 정말 상상도 못 한 사람이었다.

    “제수씨이이~!!!”

    포슬포슬한 만두처럼 둥실거리는 얼굴을 가진 남자가 낙엽처럼 얼굴을 구깃구깃 구기며 눈물을 흩뿌렸다.

    “으아닛, 폐하!”

    바로 이 나라의 황제 폐하였다!

    아니, 귀하신 몸이 왜 전갈도 없이 이렇게 와 있어?!

    나는 놀라서 그에게 후다닥 달려갔다. 그는 내 손을 붙들고 물개 앞발처럼 두꺼운 손으로 손등을 쓰다듬으며 울먹였다.

    “우리 제수씨, 설마 이걸로 우리 이안을 뻥! 차버리고 파넬 공작에게 돌아갈 건 아니지? 나 도장 못 찍어줘! 황제의 인장은 낙장불입이란 말이지!”

    ‘낙장불입은 무슨! 그 도장, 이미 한 번 다시 번복하셨었잖아요.’

    이렇게 톡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나를 원망하고 계실 줄 알았는데.’

    조금 꽉 막힌 인사라면 너 때문에 내 동생이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화를 낼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내 탓을 하고 있지 않았다. 이안처럼 말이다.

    ‘나는 참 운이 좋아.’

    그냥 파넬을 벗어날 생각으로 무작정 찾아간 타이론 공작가였는데, 이렇게 좋은 시댁을 만날 줄이야.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절대 그럴 생각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그럼! 우리 제수씨는 이미 우리 가족이라고!”

    내 대답에 구깃구깃하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러니 정말 그의 얼굴이 대나무 먹는 곰처럼 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감사해요, 모두.”

    한 차례 웃음이 밀려가고 나니 냉정함이 찾아왔다. 나는 곧게 고개를 들었다.

    제임스와 담판을 지어야 할 때였다.

    * * *

    올리비아 플로렌스.

    그녀 자신은 몰랐겠지만, 그녀는 아카데미 내에서 꽤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예쁘지 않냐?”

    “항상 방과 후엔 도서관에 있던데.”

    “하지만 차분해서 말 걸기가 어려워.”

    늘 수업이 끝나고 나면 도서관에 앉아서 그날의 복습을 했기 때문에, 올리비아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 도서관에 가면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오, 누가 이번엔 꽃다발을 놓았네.”

    “앗, 이런. 이번에도 거침없이 쓰레기통에 버리는군.”

    “아아, 짜릿해.”

    올리비아에게 남몰래 호감을 표하고 싶은 남학생들은 때때로 올리비아의 고정석에 꽃이나 초콜릿 따위를 올려놓곤 했다.

    물론, 올리비아는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한 번은 단짝으로 붙어 다니는 로메오 알키저스 영식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아깝게 왜 버려? 먹든지, 팔든지 하지.”

    거기에 대답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뭐가 들었는지 어떻게 알고.”

    조심성이 많은 건지, 무심한 건지. 그런 성품에 또 반하는 얼간이들이 생겨나면서 도서관은 늘 북새통이었다.

    하지만 제임스 파넬이 나타난 날만큼은 도서관도 조용해졌다.

    ‘쟤가 여긴 웬일이래?’

    ‘와, 진짜 듣던 대로 인간 흉기처럼 생겼다. 어떻게 저렇게 덩치가 크지?’

    ‘내 머리통도 한 손에 쥘 듯.’

    보통 도서관에 와서 소란을 피우는 놈들은 속이 빈 쭉정이 같은 녀석들이었다. 학업에 열중하지도 않고 신체 단련에도 게으른 이들인지라, 인간 장벽 같은 제임스를 마주하고 나니 모두 찔끔한 것이다.

    ‘곧 북방으로 떠날 거라 들었는데.’

    ‘오늘은 피해야겠다.’

    제임스가 딱히 어떤 위협 행위를 한 것도 아닌데, 지레 쫄아든 녀석들은 바퀴벌레인 양 샤샤샥 사라졌다.

    “…….”

    제임스는 조용한 도서관에서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데.’

    올리비아는 똑같았다. 도서관 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햇살 아래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무엇을 들여다보는지, 미간을 찡그리고 책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웠다.

    ‘오늘 한마디 말이라도 걸지 못하면 영영 말을 못 해볼 텐데.’

    그가 도서관에 온 까닭은 단 하나였다.

    그는 졸업 학년이고, 올리비아는 신입생이었다.

    오늘이 사실상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하지만 용기를 내어 여기까지 왔음에도, 그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평생 검술밖에 배운 것이 없는 제임스는 올리비아에게 건넬 만한 말을 몰랐기 때문이다.

    ‘회계학과……라고 했던가.’

    특히나 숫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원래 한 영지의 주인이 될 남자였으니 마땅히 재정관리법에 대해 배워야 했으나,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공작은 다른 학습에 더 신경 쓰도록 해요.”

    바로 어머니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실제로 어머니들이 알아서 집안을 잘 다스렸기 때문에 제임스는 특별히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할 말이 없다니. 아쉽군.’

    하다못해 파넬의 재정 이야기라도 꺼내면서 말을 붙이면 자연스러웠을 텐데.

    ‘도대체 뭘 보는 걸까.’

    제임스는 서가 사이에 서서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사람이 쳐다보면 시선을 눈치챌 만도 하건만, 둔한 건지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 시간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을 텐데.’

    왜 그동안은 도서관에 와볼 생각을 못 했던 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제임스는 그저 나무처럼 서서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결국 그녀가 자리를 떠날 때까지, 제임스는 한마디 말도 붙이지 못했다.

    * * *

    ‘그런 적이 있었지.’

    제임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리해서 북부에서 수도로 서둘러 찾아온 것인지라, 그의 몸은 상당히 피곤했다.

    하지만 정신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맑았다.

    ‘올리비아.’

    제임스는 지끈거리는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올리비아를 떠올렸다. 당연히 최근에 황제 탄신제에서 본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름다웠지.’

    진한 산호색의 드레스는 올리비아의 늘씬하고 훤칠한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리고 그녀를 빛나게 했던 화려한 다이아몬드 장식들.

    잠시 올리비아를 떠올리던 그가 입술을 비틀었다.

    “……어울리지 않아.”

    화려한 장식, 값비싼 드레스.

    그녀의 손을 붙들고 있던 반반하게 생긴 사내.

    어느 것 하나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다 그놈이 물들인 걸 거야.’

    드레스가 올리비아에게 몹시 잘 어울렸다는 사실은 애써 뇌리에서 꽉 억눌렀다. 제임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안을 떠올리니 저절로 다리에 힘이 생겼다.

    ‘빨리 데려와야겠어.’

    황태자가 직접 중재를 하겠다고 했으니, 빨리 날짜를 잡아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제임스가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

    방문 앞에는 세 명의 부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바로 제임스의 세 어머니였다.

    움찔!

    갑자기 덩치 큰 남자가 불쑥 문을 열고 튀어나오자 세 명의 부인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제일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제임스를 낳은 셋째 부인이었다.

    “아, 아들아, 네가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니!”

    그녀가 운을 떼자, 나머지 두 부인도 덩달아 그를 나무랐다.

    “그래요, 공작.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는 겁니다. 하물며 우리는 공작을 위해서 그런 것인데요!”

    공작을 위해서.

    그간 세 부인이 무슨 짓을 하든 가져다가 붙이던 변명이었다.

    “마, 맞아요. 파넬의 명예를 더럽히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고요.”

    그리고 파넬의 명예.

    그것이 올리비아를 깎아내리는 주된 이유였다.

    가진 것도 없고, 친정도 별 볼 일 없고, 시어머니들의 말에 사근사근 복종하는 것도 아닌 며느리.

    “황제 폐하께서도 너무하시지! 어떻게 파넬에 저리 모자란 며느리를 붙여주셨단 말이야? 파넬의 위신은 다 저 아이가 떨어뜨리고 다니지!”

    그게 그녀들의 주된 공격이었다.

    그리고 효심이 지극한 제임스는 그들이 그렇게 이야기할 때면 뭐든 따라주었다.

    “어머니들 마음대로 하세요.”

    ‘이번에도 당연히 우리 편을 들어야지!’

    ‘그것이 얼마나 패악을 부렸다고!’

    올리비아와 직전의 대거리를 떠올린 세 부인이 눈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

    이쯤 해서 굽혀야 하는 제임스가 말없이 그녀들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무척 불안하고 부자연스러운 침묵이었다.

    ‘왜, 왜 그러는 거지?’

    ‘우리가 뭘 잘못했나?’

    슬슬 심력이 약한 둘째 진상부터 뒷걸음질 쳤을 때였다. 제임스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래서 누가 인장을 찍으셨습니까?”

    움찔!

    세 부인은 일제히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셋째 부인이었다.

    “이, 이 사람이 그랬다! 이 사람이 그랬어!”

    그녀가 지목한 것은 병약한 둘째 부인이었다. 둘째 부인은 버럭댔다.

    “아, 아니, 기가 막혀서. 아아, 쓰러지겠네.”

    평소 저혈압이니 화가 나면 정상 혈압이지, 어떻게 쓰러지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비틀비틀했다. 경험상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가 그런 그녀를 안타깝게 여긴다는 걸.

    ‘설마 친모를 벌하겠냐며 책임진다고 큰소리를 빵빵 치더니, 역시 천한 것들은 믿을 수가 없군!’

    그러면서 둘째 부인은 손바닥 아래로 셋째 부인을 노려보았다. 그녀 처지에서 셋째 부인은 운이 좋아 아들을 낳은 천한 하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물밑에서 신경전이 오가고 있을 때였다. 잠시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첫째 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올리비아와의 혼약을 무효로 돌릴 때 우리가 공작의 허락을 받지 않고 미리 도장을 찍은 건 인정할게요.”

    이 상황에서도 우아한 말씨는 다른 두 부인과의 격차를 느끼게 했다. 그녀는 꼿꼿하게 몸을 세우고 제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먼저 이혼을 요구한 건 그쪽이에요. 게다가 혼인무효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타이론 공작가에 들어가 살기까지 했죠.”

    그 사실은 몰랐던 제임스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혼인이 정리되기 전에 그놈과 살기까지 했다고?’

    차분하고 무심했던 올리비아를 기억하는 제임스에게, 그 말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웠다.

    ‘납치인가? 아니면 사기?’

    도대체 어떻게 그녀를 꼬여냈단 말인가.

    ‘그놈도 가만두지 않겠어.’

    이안 타이론을 떠올리며 제임스가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살벌한 소리에 두 부인은 흠칫 놀랐으나, 정작 첫째 부인은 의연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사람은 공작의 인연이 아닙니다. 공작도 잊어버리고 북방으로 돌아가 자랑스러운 임무를 끝내고 계세요. 두 번째 아내는 우리가 참하고 얌전한 아이로 찾아둘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물론, 한참 있다가.

    이번에 제임스의 충동적인 행동 덕분에 세 부인은 그가 자신들의 예상범주 밖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결혼을 시키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 북방으로 보내야 해.’

    일단 보내놓고 나면 파넬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테니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순순히 수긍할 줄 알았던 제임스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자랑스러운 임무? 정말 당신들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군.”

    그에게서 단 한 번도 볼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냉소적인 미소였다.

    ‘당신들이라니?’

    제임스는 한 번도 어머니들을 그렇게 칭한 적이 없었다. 순간 위협을 느낀 첫째 부인이 얼어붙었을 때였다.

    제임스는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올리비아 플로렌스를 내 아내로 달라고 황제 폐하께 부탁한 건 바로 나야!”

    그의 말은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올리비아조차도.

    제임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당신들이 말하는 자랑스러운 임무는 그 아내를 위한 것이었다고.”

    이번 생에서 그녀를 아내로 지목한 건 황제가 아니라 다름 아닌 그였다.

    ‘그런데 지금 일이 이렇게 되다니.’

    그 생각만 하면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분을 참지 못하고 제임스가 거친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멀리서 벌벌 떨고 있던 하녀가 조심스레 다가와서 말했다.

    “각하, 타이론 대공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뭐?”

    감히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한단 말인가. 제임스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이내 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고 서둘러 봉투를 뜯었다.

    안에 적힌 내용은 간결하기 짝이 없었다.

    -빠른 시일 내에 만나서 결말을 짓도록 해요.

    올리비아 타이론

    바로 올리비아의 편지였다.

    제임스의 답장은 순식간에 날아왔다. 마치 내게 연락이 오기를 기다린 사람 같았다.

    -나도 좋아. 내일 아라미르에서 보도록 하지.

    제임스 파넬

    ‘아라미르라.’

    일전에 이안이 나를 골리려고 했던 바로 그 찻집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곳이긴 했지만, 제임스가 그곳을 지목한 것은 의외였다.

    ‘돌머리치고 괜찮은 선택이네. 누가 조언을 해준 걸까?’

    내가 아는 제임스는 찻잎의 종류도 모를 사람이었다.

    편지에 적힌 투박한 글씨를 내려다보던 내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내 기호와 별개로 아주 좋지 않은 선택이지.’

    아라미르는 일전에 나와 이안이 화제가 되었던 것처럼 모든 공간이 넓게 열려 있었다. 현재 수도에서 타이론 대공과 파넬 공작, 그리고 그 사이에 낀 나의 관계의 행방에 대해서 이목이 집중된 상태이다.

    ‘그런데 하필 이런 장소를 고르다니.’

    나를 우습게 만들겠다는 걸까. 아니면 해볼 테면 해보라는 건가.

    ‘……그 정도 생각도 없었을 거야. 아니면 우아한 진상의 조언이었을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나는 이번에 아예 제임스와의 연을 끊어버릴 셈이었다.

    ‘그럼 굳이 황태자 전하까지 나서지 않아도 되고.’

    일단 탄신제에서의 소동은 차후 황태자가 직접 중재를 하겠다는 말로 끝맺었다. 하지만 나는 그 상황도 어이가 없었다.

    ‘내가 당사자잖아. 내가 타이론 대공비가 되길 희망한다고 말하면 그만이잖아.’

    혼인무효 과정 자체에 문제가 있든 말든 간에, 이 상황에서 누구도 나를 강제할 수 없었다.

    ‘내가 이안의 곁에 있길 바란다고.’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제임스를 만난다고 생각한 것만으로도 부들부들 떨리던 손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내 슬픈 얼굴에 입 맞춰주렴.”

    감미로웠던 이안의 목소리가 다시금 내 귓가를 울렸다. 그 다정함을 버리고 쓰레기통으로 굴러 들어가는 멍청이가 있겠는가.

    ‘그래. 차라리 모두 쳐다보는 앞에서 망신이나 당하라지.’

    나는 약해지려는 마음에 단단히 빗장을 걸었다. 몇 번이나 거울을 보며 도도한 표정을 지어보고 있을 때였다.

    “저어, 언니…….”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돌아보니 작은 소녀가 내 방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내 동생, 애니였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애니를 반겼다.

    “응! 무슨 일이니.”

    애니는 꼼지락거리며 어렵게 말문을 떼었다.

    “저기, 탄신제 때 무슨 일이 있었다고 들어서…….”

    “아.”

    애니 생각을 하지 못할 줄이야. 이안의 배려로 애니는 최근 타이론가에서 학교로 통학하는 중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학교에서 아이들이 전해준 거니?”

    “…….”

    애니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긍정의 표시였다. 나는 생각이 깊은 내 동생을 끌어안아 주었다.

    “가엾게도. 언니를 걱정해서 찾아온 거구나.”

    “아니야, 언니. 힘든 건 언니잖아. 나는 그냥 언니가 우울하진 않은가 와 본 것뿐이야.”

    내 말에 애니는 어른스럽게 나를 도리어 달랬다. 도대체 이 꼬마가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었단 말인가. 나는 애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약초학은 재미있니?”

    나의 질문에 애니는 곧장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너무 재미있어. 언니 말을 듣길 잘했어. 언니는 어떻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알아?”

    “네 언니니까 그렇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썩 편하지 않았다. 지난 생의 나는 애니가 약초학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으니까.

    ‘지금 너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이 내 자기만족일지도 몰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가식이라 말할지 몰라도, 나는 애니에게 지난 생에서 못 해준 것까지 모두 해주고 싶었다. 나는 애니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아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애니. 우리는 계속 타이론 대공가에서 살 거야.”

    “계속?”

    “응. 계속.”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순간 내가 잊고 있던 사실을 하나 떠올렸다. 애니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빠른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갑작스럽게 대공이 되었으니, 공국으로 내려가게 될 수는 있지만!”

    “하하하.”

    내 허둥지둥한 모습에 애니는 맑게 웃었다. 그리고는 내 손바닥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대답했다.

    “난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언니도 많이 고생했으니까.”

    “애니.”

    정말 언제 이 아이는 이렇게 자란 걸까.

    기쁨과 동시에, 지난 생에 내 눈치를 살피며 혼자 곪아가고 있었을 동생을 상상하니 가슴이 아파졌다. 나는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고 애니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부른 것은 이안의 보좌관 케닌이었다.

    “케닌.”

    “예, 대공비 마마.”

    케닌은 묘하게 기쁜 모습으로 내 부름에 달려왔다. 아마도 이안에게 일거리를 떠밀고 온 것 같았다. 이안에게는 좀 미안했지만, 나도 케닌이 꼭 필요했다.

    나는 얼마간 미루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을 한 명 찾고 싶어요.”

    “사람이요?”

    내가 꺼내든 뜻밖의 임무에 케닌은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조금 빠른 어조로 찾는 사람의 정보를 알렸다.

    “수도 정보 길드에서 일하고 있는 에릭이라는 이름의 소년이에요.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나이는 열다섯 정도. 이제 막 길드에 들어갔을 거고, 특이점이 있다면 얼굴 전체에 작은 흉터가 있어요. 어릴 때 유리 등에 맞아서 생긴 상처죠.”

    “정보 길드요…….”

    내 말에 케닌의 이마가 구겨졌다.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던 케닌이 다소 조심스러운 어조로 내게 물었다.

    “혹시 파넬 공작가에 심을 세작이 필요해서 그러신 겁니까? 그것이라면 저희 쪽에도 준비를…….”

    이 말이 그렇게 들릴 수도 있구나.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나는 까르르 웃고 말았다.

    “무슨 소리예요. 절대 아니에요.”

    “그럼?”

    손바닥을 내저으며 내가 웃자, 케닌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소년의 얼굴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플로렌스 가문의 하녀거든요. 지금이라도 그때 일을 보상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렇군요.”

    빈약한 이유에, 케닌은 조금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껄적지근해도, 딱히 흠을 잡을 수 없겠지.’

    굳이 보상을 이제 와서 하겠다는 저의가 뭐냐고 물어도, 내가 이제야 보상할 여건이 되어서 그런다고 대답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실제로 그런 이유로 평민에게 큰 상을 내리는 미담이 없는 것도 아니고.

    ‘사실이기도 하고.’

    실제로 에릭의 얼굴에 흉터를 만든 건 플로렌스 가문의 하녀가 맞았다. 애니에게 말을 걸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거지 소년이 훗날 애니를 지옥에서 꺼내줄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지.’

    지난 생에서 아버지는 애니를 마약쟁이에게 5만 데르크에 팔아넘겼다.

    그때 애니를 그 마약쟁이의 손아귀에서 구해준 사람이 에릭이었다.

    ‘나는 나대로 그때 출산후유증으로 생사를 오갔기 때문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지만.’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그리고 에릭이라고 해서 고생을 안 한 게 아니었다. 길거리의 거지 소년이 하급 귀족 소녀에게 어울릴 사람이 될 때까지, 그 또한 어마어마한 고생길을 거쳤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두 사람을 내가 도울 거야.’

    다시 돌아와, 애니를 플로렌스에서 데려왔을 때부터 내가 다짐했던 일이었다.

    에릭과 애니의 행복한 미래를 그리며, 나는 케닌에게 여상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파넬 공작가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제임스는 말수가 아주 적어서, 세작을 들인들 이렇다 할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거예요.”

    “…….”

    너무 생각이 애니에게로 쏠린 탓일까. 나는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내가 묘하게, 제임스를 잘 아는 듯이 말했다는 사실을.

    * * *

    자고 일어나니 결전의 날이었다.

    ‘오늘은 무조건 적자주색으로!’

    적자주색은 호불호를 거의 주장하지 않는 제임스가 드물게 싫어하는 색이었다.

    ‘피랑 비슷해서 싫다고 했던가 그랬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새삼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전장에 있다 온 사람이라는 게 실감 나곤 했었다.

    ‘그것도 다 과거의 이야기지! 나에게는 당신이 싫어하는 색으로 충분하다, 이거야.’

    적자주색 드레스에 어울리게, 화장은 자연히 진하고 선명해졌다. 머리를 틀어 올리니, 거울 속에는 무척 도발적이고 화려한 여성이 서 있었다.

    ‘좋아. 좋아.’

    딱 제임스 파넬이 싫어하는 여자로군.

    ‘이참에 정이 뚝 떨어져서 날 뻥 차 줬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확실하게 새로운 부인까지 구해다 주고 싶었지만.

    ‘나 살자고 그 쓰레기통에 애먼 여자를 밀어 넣을 수는 없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씩씩하게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현관에는 외출복 차림을 한 이안이 서 있다가 나를 반겼다.

    “올리비아.”

    “이안! 어디 나가요?”

    외출한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했을 때였다. 이안은 못 말린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당연히 당신을 따라나서려고 외출복을 입은 거죠.”

    “네? 저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했잖아요.”

    제임스와 단둘이서 결판을 내려고 했는데, 이안이 따라가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조금이라도 의지할 줄 알았던 모양인지, 이안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그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내게 물었다.

    “정말 혼자 가도 되겠어요?”

    내가 일곱 살 어린애도 아니고. 나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당신까지 앉아 있으면 분위기만 험악해지고, 우리만 우스워져요. 제가 당당하게 그 얼굴에 찬물을 확 끼얹고 올게요.”

    “그래도 워낙 무식한 사내라 걱정됩니다.”

    이안은 제임스가 화가 나서 나를 끌고 가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다.

    ‘제임스가 생긴 게 좀 그렇긴 하지.’

    곰처럼 큰 덩치, 사나워 보이는 눈매, 무뚝뚝한 성격.

    그것 때문에 제임스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많았다.

    ‘사실 알고 보면 그런 호구도 없는데 말이야.’

    내가 괜히 제임스를 남의 편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제임스는 기본적으로 남에게 관대하고 인내심이 많았다.

    ‘제임스가 내게 화를 내는 모습이라니 상상도 못 하겠고.’

    무작정 두려워하기에는, 내가 제임스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신 호위를 데려가잖아요. 아무리 무식한 남자라고 해도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데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을 거예요.”

    “…….”

    내 말에 이안은 대답 대신, 오늘 나를 보필할 세 명의 호위기사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붓하게 치맛자락을 쥐고 인사했다.

    “그럼 다녀오겠어요.”

    “얼른 돌아와요, 올리비아. 내가 참지 못하고 당신을 찾으러 갈지도 모르니까.”

    “농담도.”

    나는 이안의 뺨에 입을 맞추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오래지 않아 느릿하게 출발했다.

    “저기 봐, 타이론 공작부인이다.”

    “이제는 대공비 전하라고 불러야지.”

    아라미르에 마차가 멈추고 내가 내리자마자 수런거림이 거리 전체에 번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코끝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것 같네.’

    하지만 언제고 내야 했던 결판이었다.

    ‘맞아. 처음부터 내가 제임스와 제대로 결론을 지었더라면 제임스가 북방에서 달려오는 일도 없었을 테지.’

    파넬 공작가와의 혼인무효 과정에 있어서, 나는 완전히 제임스를 배제하고 일을 진행했다. 그는 진상들의 말대로 따르는 인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인간을 상대로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어.’

    나는 다시금 풀어지려는 마음을 단단히 붙들었다.

    ‘혹시 몰라서 행운의 부적도 가져왔으니까.’

    ‘그것’이 담긴 손가방이 묵직했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지배인이 확연히 예전과는 다른 태도로 나를 대했다.

    “오셨습니까, 마마. 예약하신 분께서는 이미 와 계십니다.”

    마마라는 표현이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익숙해져야 했다. 나는 도도하게 몸을 세우고 대답했다.

    “안내하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차를 마시고 있던 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차를 마시러 왔는데, 나와 제임스가 들어오니 대박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시선을 받는 게 낫다.’

    괜한 오해가 생기진 않을 테니 말이다.

    제임스는 가게 정중앙에 앉아 있었다. 큰 덩치 때문에 못 알아보려야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제임스.’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데리고 살았던 지긋지긋한 첫 번째 남편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아한 진상이 옷도 안 챙겨줬나 보군. 그냥 잘 못 입겠으니 대충 검은색으로 꺼내입은 게 분명해.’

    10년 동안 함께 산 짬은 역시 위대했다. 그를 보는 순간, 그가 어떤 상황에서 뛰어나온 것인지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무료한 듯 팔짱을 끼고 있던 제임스가 걸어오는 나를 그제야 발견했다. 그의 어둠침침한 회청색 눈이 반짝 빛이 났다.

    “부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모셔도 시원치 않을 판에, 앉은 채로 부인이라니.

    “첫 마디부터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기가 쉽지 않은데.”

    배알이 순간 꼬였다. 나는 그가 권하기도 전에 ‘탕’ 소리가 나게 의자를 빼서 앉았다. 그리고 시리게 웃었다.

    “타이론 대공비라고 제대로 불러주시죠. 저는 이제 더 이상 당신 부인이 아니에요.”

    “당신은…….”

    내 말에 제임스의 눈동자가 풍랑이라도 맞은 것처럼 흔들렸다.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던 그는, 이내 단단한 벽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마주 보았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소.”

    막상 마주 보니 그는 여전했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자기주장을 하는 것이나 뭐나.

    ‘하긴, 그런 돌머리니까 탄신제 때 그리 당당히 나섰겠지.’

    하지만 애초에 이건 지극히 사적인 문제였다. 나는 냉정하게 그 부분을 짚었다.

    “제 호칭을 정하는 데 당신의 동의가 필요하던가요? 당신이 지극히 아끼는 당신의 어머니들이 저의 퇴가를 몸소 허락해주셨는데요.”

    “…….”

    내 말에 제임스는 입술을 꾹 닫았다. 그냥도 험악한 인상이 곰이라도 때려잡을 것처럼 흉악해졌다.

    “히익!”

    “여, 역시 북방을 지키는 장군!”

    제임스가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주변에서 수런거렸다.

    하지만 이미 제임스에게 익숙해진 내게는 어떤 위협거리도 되지 못했다.

    ‘저렇게 분위기 잡으면 뭐해? 자기가 입은 셔츠를 누가 꺼내놨는지도 모르는 남자인데.’

    내가 시큰둥한 눈빛으로 제임스에게 응대하고 있을 때였다. 직원이 비척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저기, 주문은…….”

    나는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주문했다.

    “얼음물로. 얼음 왕창 넣어서.”

    “네?”

    지금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뜨끈한 차가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나.

    우스운 건 제임스가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같은 걸로.”

    “네??”

    찻집에서 얼음물 두 잔이라니. 점원은 무척 혼란스러워하다가 사라졌다.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차를 즐길 줄 모르는 건 여전한가 보네.’

    하긴, 여전하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늘 제임스 파넬이었다. 변한 것은 나뿐이었다.

    ‘아직 그 시절을 보내지 않은 사람이지.’

    곧 내게 가해를 가할 사람이기도 했고.

    ‘그러니 전혀 안쓰러워할 것도 없어.’

    냉랭하게 그리 생각하며, 나는 화제를 돌렸다. 사실 제임스를 만나서 묻고 싶은 건 딱 한 가지뿐이었다.

    “북방은 어떻게 하고, 지휘관이 여기 와 있는 거죠? 얼른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 계획의 틀어짐의 시작. 바로 제임스의 귀환이었다.

    ‘예전처럼 10년 있다가 귀가했으면 이 난리통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사실 그걸 생각하고 저지른 일이기도 했다. 설마하니 제임스가 귀가해서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대답해볼 테면 해보시지.’

    그런 눈빛으로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고 있자니, 또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켈트족의 우두머리 게일을 잡았어. 당분간 내가 돌아가지 않아도 함부로 싸움을 걸지 않을 거야.”

    “네? 켈트족의 우두머리를 잡았다고요?”

    ‘벌써?’

    내 기억이 맞다면 그가 켈트족을 평정하는 것은 5년쯤 있다가 생겨야 하는 일이었다.

    놀라워하는 내게, 제임스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일찍 오려고 무리를 좀 했지.”

    그 대답이 더더욱 내게는 이상하게만 들렸다.

    ‘도대체 그가 왜 빨리 돌아오려고 하는데?’

    그가 빨리 오려고 한 이유.

    탄신제에서 나를 부른 이유.

    진상들에게도 매정하게 대한 이유.

    모든 퍼즐이 하나로 통함에도 그 조각을 맞추지 못한 것은, 머릿속에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가득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럴 리 없어.’

    나는 떨리는 눈으로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는 안 돼.’

    그 지옥을 헤치고, 20년이란 시간을 보내어, 겨우겨우 그 지옥을 빠져나왔다.

    ‘말하지 마.’

    하지만 이런 나의 바람이 무색하게, 그는 딱히 어려운 기색도 없이 무뚝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당신을 빨리 보고 싶어서 서두른 거야, 올리비아.”

    숨이 꽉 조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이제 와서?’

    지난 생에 저렇게 한마디라도 다정하게 대해주었다면 굳이 이번 생까지 넘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도대체 왜요?”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내가 보고 싶었다는 말에 마음이 설레기는커녕, 얼음이라도 부은 것처럼 싸늘해졌다.

    ‘왜 이제야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

    내가 더더욱 성질이 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잖아요.”

    20년이나 아내였던 여자에게도 한마디 보고 싶었다는 말도 할 줄 모르던 남자가, 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옛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당신도 놓친 물고기가 맛있어 보이나? 잡은 물고기에는 관심이 없고?’

    그것은 더 최악이었다. 내가 아내로서 성실하게 정조를 지키고 집안에 봉사한 것이, 오히려 그를 무관심하게 만들었다면.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 누가 뭐라고 해도 무관심하게 여기는 쪽이 쓰레기잖아?’

    내가 차가운 눈으로 제임스를 쏘아보았을 때였다. 제임스는 표정에 변화가 적은 타입이라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측하기 어려웠다.

    “여기 얼음물입니다.”

    우리가 서로 노려보는 사이 점원이 물컵을 놓고 후다닥 사라졌다. 제임스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당신은 하나도 몰라.”

    “네?”

    아니,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리게 하고 한다는 말이 고작 나는 몰라?

    ‘당연한 거 아니야? 말을 안 하면 어떻게 아는데?’

    점점 이 대화가 의미가 있나 부아만 치밀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 때문에 얼음물을 원샷 했을 때였다.

    제임스가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지금도 당신을 내 부인이라고 생각해.”

    뭔 개떡 같은 소리냐고 비웃으려 했을 때, 그가 조금 더 빠르게 뒷말을 이었다.

    “그러니 돌아와. 애초에 타이론 대공이 진심일 리가 없잖나.”

    그것 또한 내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한 소리였다.

    * * *

    “올리비아.”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것만 같았다.

    “예뻐요. 처음 볼 때부터 예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었어.”

    늘 솔직하게 나를 칭찬하고, 또 아껴주는 말들.

    그 말들이 내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제임스는 모를 것이다.

    ‘그동안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나 들어본 적이 없으니, 끊임없이 의심이 들고, 그것이 불편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아니까.

    “이안은 제게 늘 진심으로 대해요. 그런 무례한 말은 삼가주세요.”

    “하지만 여보, 그 사람은 음…….”

    제임스가 드물게 말문이 막혀서 질질 말을 끌었다.

    ‘남자들이 이렇게 굴 때는 딱 하나뿐이지.’

    나는 담담하게 상황을 요약했다.

    “고자라고요?”

    “그래.”

    내가 대신 말해주어서 무척 다행이라는 듯이 제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내게 웃기기만 했다.

    ‘차라리 고자였다면 더 마음이 편안했을 텐데.’

    나는 뜻하지 않게 그가 절륜해서 우울하단 말이다.

    그가 고자라고 해서 나와 그의 관계가 바뀌는 건 아니지 않나.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가 고자면 또 어때서요?”

    하지만 나의 질문에, 제임스는 드물게 길게 반론을 제시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아이도 없는 삶이 행복할 리가 없잖나. 부부는 결혼하고 아이를 가짐으로 완성되지.”

    “더 이상 할 말이 없네요.”

    이 무렵의 제임스는 분명 20대 중반의 창창한 청년일 텐데, 어째 제시하는 행복론은 팔십 먹은 노인 같았다.

    ‘아이를 가져서 완성이라고?’

    그 말대로라면 나는 전생에 가장 행복한 여자여야 했다. 그런데 내가 빈말이라도 행복했다고 할 수 있나?

    “어차피 당신의 말을 들으려고 만나자고 한 거 아니에요. 내 말을 들으라고 부른 거지.”

    이때부터 이렇게 꽉 막힌 남자였구나.

    ‘완전히 시간 낭비였네.’

    나는 결론부터 꺼내 들기로 했다.

    “난 파넬이 지긋지긋해요.”

    “……!”

    내 말에 제임스는 몹시 충격받은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따박따박 준비해온 말을 쏟아냈다.

    굳이 내가 예쁘지도 않은 이 남자를 다시 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내 의지를 피력하기 위해서.

    “다신 그런 곳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거니까 당신도 당신 어머니들이 정해주는 여자랑 결혼할 생각이나 해요. 사실 우리는 부부도 뭣도 아니었잖아요.”

    내 말에 제임스의 턱이 바르르 떨렸다.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그에게 익숙한 내 눈에는 예리하게 들어왔다.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까지 눈치챌 수 있게 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그리고 또 그 마음이 갈가리 찢겨서 사랑 따윈 전혀 남지 않는 데는 또 얼마나 시간이 걸렸고.

    ‘이제 나는 아무 미련 없어.’

    수런거리던 마음이 오히려 말로 내뱉으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의연한 얼굴로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나를 마주 본 제임스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가 그답지 않게 애절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부부가 아니야? 결혼이 쉬워?”

    “아뇨, 결혼 어렵죠. 이혼은 더더더 힘들었고요.”

    결혼도 이혼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했다.

    “내가 힘들게 이혼할 동안 당신은 무얼 했죠?”

    “…….”

    내 예리한 말에 제임스는 다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는 다시 얼음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저도 인간이면 할 말이 없겠지.’

    나라고 처음부터 제임스를 잊어버리고 새 인생을 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나는 냉정하게 내가 파넬을 떠나게 만들었던 일등공신에 대해 운을 뗐다.

    “내가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편지에 당신은 뭐라고 대답했던가요?”

    바로 제임스가 내게 보낸 편지.

    짧고 간략한 편지는 지금도 토시 하나 틀림없이 읊을 수 있었다.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어머님들 말씀을 잘 듣고 계시오.

    어머님들 때문에 도저히 못 살겠다는 내 편지에, 그는 저따위 성의 없는 대답을 늘어놓았었다.

    “당신 말대로 나는 어머님들 말씀을 따라 파넬을 떠났어요.”

    헤어지는 마당에 굳이 저런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얼굴도 모르는, 제임스의 두 번째 부인을 위해 기꺼이 악담을 베풀기로 했다.

    누군지 몰라도, 그녀까지 나와 같은 전철을 밟는다면 가엾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끝이에요. 실수로라도 만나지 않도록 해요.”

    할 말을 끝낸 나는 활약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내 옆에 놓여 있었던 손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임스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미동도 하지 않고 테이블만을 내려보았다.

    나는 코끝으로 한숨을 내쉬고 등을 돌렸다.

    또각또각.

    그렇게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나를 등 뒤에서 불렀다.

    “여보.”

    우뚝.

    너무나 익숙해서, 조금만 긴장을 놓으면 저절로 뒤를 돌아보게 될 것 같았다.

    ‘안 돼.’

    하지만 나는 턱에 힘을 주어 버텼다. 등 뒤에서 제임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보, 내게도 기회를 줘. 당신 말대로야. 우린 지금까지 접점이 없었지.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않나.”

    ‘도대체 어떤 얼굴로 저 돌덩이 같은 사람이 애원을 하고 있을까.’

    미운 정도 정이라고, 한껏 무뎌진 제임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울렁거렸다.

    ‘이렇게까진 안 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지금 시점에서 단호하게 헤어지는 것이 우리 두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이었다.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타이론 대공비예요. 하대하는 걸 봐주는 것도 오늘까지예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우아하게 아라미르를 빠져나갔다.

    이대로 나와 제임스의 인연이 끝나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 * *

    올리비아가 그렇게 일방적인 이별 선언을 하고 돌아선 뒤, 아라미르에는 곰처럼 커다란 덩치를 사신처럼 검은 옷으로 감싼 음침한 사내만 남았다.

    제임스는 음울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보았다. 그 자체로 동상이 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불편함을 참지 못한 직원이 먼저 다가가서 제임스에게 물었다.

    “저어, 손님?”

    “……싫다.”

    “네?”

    제임스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난 당신을 포기할 수 없어.”

    그렇게 중얼거린 제임스는 저벅저벅 걸어서 아라미르를 빠져나갔다.

    “하아.”

    “이제야 살겠다.”

    제임스가 나가고, 긴장의 끈이 끊어진 것처럼 일순간 아라미르에 소음이 밀어닥쳤다. 저도 모르게 제임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인간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제임스의 등 뒤, 커다란 고무나무로 가려져 있던 테이블에서 신문을 보던 남자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저 인간이.”

    요상스러운 무늬의 스카프에 색안경, 두꺼운 모자까지 썼지만 타고난 미모를 숨길 수가 없었다.

    바로 이안이었다.

    이안 곁에서 우아하게 찻주전자의 모래시계를 돌리고 있던 케닌이 고개를 갸웃했다.

    “안 나서십니까, 전하?”

    “안 돼. 올리비아와 약속했어. 이번에는 따라오지 않기로.”

    약속이 무슨 소용이람. 케닌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벌써 따라오셨잖아요.”

    “입 다물어.”

    ‘하여간 괜히 신경질이야.’

    케닌은 입술을 삐죽이며 찻잔에 홍차를 채웠다. 적갈색 액체가 쪼르르 흰 잔을 물들였다.

    이안은 입술을 짓씹었다.

    ‘제임스 파넬.’

    그는 나가고 없었지만, 문을 꽉 채울 것 같던 그 덩치는 여전히 눈에 아른거렸다.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군.’

    그 정도 매정하게 말했으면, 사내답게 마음 접고 물러서 줄 것이지. 이안은 조만간에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케닌.”

    뜨거운 찻잔을 후후 불고 있던 케닌이 몸을 일으키는 상관에게 히스테릭한 짜증을 부렸다.

    “아, 또 왜요? 이제 막 차 좀 마시려고 하는데.”

    “내 아내보다 일찍 들어가야 의심을 사지 않을 거 아냐.”

    “아오, 진짜 가지가지 하시네!”

    들키는 게 싫으면 말을 듣든가. 이것도 저것도 듣지 않는 청개구리 같은 상관 때문에, 케닌의 속만 펄펄 끓었다.

    하지만 막상 집에 도착해보니 올리비아는 만날 겨를도 없었다. 서둘렀지만 올리비아보다 늦었을뿐더러, 올리비아가 굳이 이안을 찾지 않았던 것이다.

    “비전하께서는 피곤하셔서 먼저 방으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녀장의 보고를 받으며 이안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이안을 향해 케닌은 방방 뛰었다.

    “그러게 뭐하러 서둘렀어요, 뭐하러!”

    어쩌다 이 부부의 사이에 끼게 되었단 말인가. 오늘도 서러운 비혼주의자는 ‘비혼비혼’ 하고 울었다.

    * * *

    제임스를 만나고 난 뒤, 나는 무척 긴 시간 잠이 들었다. 온몸의 기운을 제임스에게 빼앗긴 것만 같았다.

    꿈속에서 나는 몇 번이고 오늘 제임스와의 만남을 곱씹었다.

    “부부는 결혼하고 아이를 가짐으로 완성되지.”

    ‘정말?’

    그의 말대로라면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결심한 나와 이안은 평생 완성될 수가 없는 부부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잖아.’

    나와 제임스가 이룬 완성은 뭐였는데?

    ‘너희가 가정만 완성되었던 거겠지. 날 빼고.’

    그 생각을 끝으로 나는 눈을 떴다.

    천불 나는 꿈이지 슬픈 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베개가 흠뻑 젖어 있었다.

    ‘이것도 지긋지긋해.’

    도대체 언제까지 과거의 기억에 질질 끌려다닐 것인가.

    ‘어머니.’

    나는 목에 걸린 투명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셨나요.”

    “응. 이안은?”

    “집무실에 계세요.”

    “내가 얼마나 잠을 잤지?”

    “벌써 오후 9시예요. 곤히 주무시길래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저녁 식사를 올릴까요.”

    “아니, 되었어.”

    제임스를 만난 탓인지, 입맛이 없어서 뭘 먹고 싶지도 않았다.

    누워 있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고 있을 때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녁 먹을 때 이안이 날 찾지 않았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제임스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서라도 나와 함께 식사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고 있는 나를 보고 그냥 돌아섰겠지.’

    나를 배려해서.

    그 순간 좋은 생각이 퐁 하고 머릿속에 솟았다. 나는 하녀에게 말했다.

    “내가 하인들을 불러 시킬 일이 있는데.”

    * * *

    이안의 집무실은 침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사뿐사뿐 걸어서 그 방문 앞에 섰다.

    마침 이안에게 보여줄 보고서를 들고 오던 보좌관이 문 앞에서 나와 마주쳤다. 슬렉스를 입은 중년여성으로, 이름은 마냐였다.

    “마마?”

    “전하께서는 이제 주무실 예정이에요.”

    “그럼 내일 들고 오도록 하죠.”

    그녀는 내게 눈을 찡긋하고는 산뜻하게 돌아섰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

    “어서 들어와.”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나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정신없이 서류에 서명을 하고 있던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얼른 줘봐. 숫자가 안 맞는 거 같아.”

    나는 대답 대신 그 손에 내 손을 올렸다. 당연히 종이를 만질 생각에 손가락을 바르작거린 이안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올리비아?”

    나는 싱긋 웃었다.

    “바빠요, 이안?”

    “아니요.”

    바쁘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그는 서둘러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꽉 붙들고 있는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내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우리, 조금 걸을까요?”

    “좋아요. 오늘 일은 다 끝났습니다.”

    이안은 기꺼이 나를 따라나섰다.

    캄캄한 밤에, 서늘한 공기가 우리를 휘돌았다. 손가락을 얽어 잡고, 우리는 천천히 정원을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열대식물로 가득한 오랑제리였다.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올리비아?”

    “뭘요?”

    어둠이 드리운 그의 눈가가 묘하게 촉촉했다.

    “아까 파넬 공작을 만나러 갈 때 가방에 무얼 넣고 간 겁니까? 무거워 보이던데.”

    “억.”

    아니, 그사이에 그걸 봤단 말인가!

    ‘창피해!!’

    결국 제임스에게 써먹지도 못했는데, 여기서 이 말이 나올 줄이야.

    “그, 그게…….”

    “왜요? 뭔데 그래요?”

    “그러니까…….”

    나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꼭 이럴 때는 집요하지.’

    대답하기 전에 물러나지 않을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기어 들어갈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하께서 내려주신 티아라를 들고 갔어요.”

    “예?”

    미처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이안이 입술을 벌린 채로 굳어졌다.

    “그, 그게…… 여차하면.”

    나는 귀 끝까지 빨개져서 웅얼거렸다.

    “휘두르려고…….”

    내 말에 이안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머리에 쓰려고 가져간 것이 아니고요?”

    화르륵.

    ‘아, 진짜 창피해.’

    내가 티아라를 택한 것은 그 자체로 주는 자신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것이 내가 가진 물건들 중 크기 대비 무게가 가장 나갔기 때문이다.

    ‘제임스가 아무리 돌머리라도 다이아몬드가 깨져나갈 리는 없을 테니.’

    하지만 이게 남에게 당당히 말할 이유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잠시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고 있던 나는 휙 돌아섰다.

    “나 돌아갈래요.”

    “잠깐만요, 잠깐만요, 올리비아.”

    나는 얼굴을 가린 채로 걸어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려 했다. 그런 내 어깨를 이안이 붙들었다. 돌아보니 그의 입술이 꿈틀꿈틀거리고 있었다.

    “진짜 왜 이렇게 귀여워요.”

    그가 와락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내 어깨에 비벼지는 얼굴에, 잠시 굳어져 있던 나는 두 팔을 벌려 그를 마주 안았다.

    그렇게 얼마나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을까. 넓은 잠옷 소매가 스르륵 밀려 내려가 팔이 공기 중에 드러났다. 이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살갗이 차가워요.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오랑제리만 보고요.”

    “거길요?”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나라에서 잘 자라지 않는 열대 나무들로 가득한 오랑제리는 황립식물원으로 지정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훌륭한 곳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소유주인 이안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밤이 되어야만 볼 수 있는 게 있어서요.”

    “그게 뭘까요?”

    “그러니 어서 가요.”

    “그럼 이것이라도 일단 걸쳐요.”

    이안은 자신이 걸치고 있던 쥐색 카디건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이안이 자주 사용하는 알싸한 향수 냄새가 내 몸을 감쌌다.

    내가 그를 붙들어 오랑제리로 향한 것은 한참 전 그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불이 켜져 있네요.”

    이 시간에 와본 적이 없는지, 이안은 순순히 감탄하며 유리문을 열었다.

    작게 타오르는 촛불을 따라 걸으니 수풀 사이로 흰 침대가 빛이 났다. 이안은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여기에 왜 침대가?”

    “제가 아까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어요.”

    내 대답에 이안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굳어졌다.

    “올리비아, 이렇게 갑자기 적극적으로 바뀌면 오예입니다만…….”

    “무슨 얼빠진 소리예요. 어서 눕기나 해요.”

    나는 이안의 등을 떠밀었다. 이안은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걸어가서 침대에 누웠다.

    ‘왜 저렇게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있는데?’

    자세가 조금 거슬렸다.

    어쨌든 나는 이안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 투명한 유리 온실 천장 너머로 잉크를 쏟은 것 같은 까만 하늘과, 반짝이는 별들이 펼쳐졌다.

    나는 신이 난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요? 머리 위로 별이 쏟아지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네요.”

    ‘별이 아니라 날 쳐다보는 거 같은데.’

    뭔가 탐탁지 않은데.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나는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빈말이 아니라, 별의 바다에 빠진 것 같았다.

    “당신은 내게 자장가를 불러 달라고 말했지만, 저는 솜씨가 없어서요. 대신 별자리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안 될까요?”

    그렇다. 내가 이안을 데리고 밤에 오랑제리에 온 이유는 그것이었다.

    ‘당신은 내게 자장가를 불러주었으니까.’

    내 말에 이안은 눈을 깜빡거렸다.

    “별자리 말입니까? 잘 알아요?”

    “남들보다는 조금 더?”

    “우와.”

    뭘 우아, 씩이나. 나는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할머니가 된 기분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 별과 이 별을 연결하면 백조자리가 되는데, 여기서 백조가 왜 하늘의 별이 되었냐면…….”

    별자리를 한 네 개 정도 이야기했을까.

    처음에는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이안의 눈이 가물가물해지더니 이내 고롱고롱 잠이 들었다. 금빛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쓸어넘기며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당신이 금방 잠들 줄 알았어요. 당신은 성향이 이성적이더라고요.”

    얼굴은 신화 속에서 튀어나올 것같이, 세상 감성적으로 생겼으면서.

    금빛 눈썹이 가지런히 감긴 얼굴이 소년처럼 해맑기만 했다.

    “이안 타이론.”

    나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남편.”

    그렇게 중얼거리니 저절로 제임스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어떻게 부부가 아니야? 결혼이 쉬워?”

    나도 상상도 못 했다. 내 미래가 이렇게 바뀔 줄은.

    “……조금도 쉽지 않았어.”

    나와 제임스는 생일이 같다는 하찮은 이유로 부부가 되었다.

    인륜지대사를 랜덤으로 뽑기냐고 화를 냈지만, 사실 남녀가 진심으로 사랑에 빠질 확률보다도 낮은 확률이었다.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남자와 부부로 맞추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남자의 부인이 되는 건 무척 쉬웠지.’

    내가 억지로 내 몸을 부풀리지 않아도, 있어 보이는 척 말을 지어내지 않아도 여기서는 모두 나를 공작부인으로서 존중해준다.

    “당신이 싫다면 하지 않을게요.”

    나를 권위로 억누를 수 있는, 이안까지도.

    ‘그러니까 우린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도 제임스를 떠올리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울적해져서, 나는 조심스레 이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 * *

    열대식물이 자라는 온실이라고 과신했던 것이 문제였다.

    “엣취!”

    다음 날 나는 지독한 몸살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아아, 머리도 아프고, 목도 따갑고. 장난 아니네.’

    으슬으슬 추워서 나는 걸치고 있던 카디건을 끌어당겼다. 내 침실의 침대 맡에 의자를 놓고 앉은 이안이 울상을 짓고 날 바라보았다.

    “올리비아.”

    아니, 함께 온실에서 잤잖아. 근데 왜 나만 이렇게 비실거리고 저쪽은 저렇게 반짝거리는 건데.

    ‘이 컨디션에 저 얼굴은 너무 눈부셔. 빨리 보내고 싶다. 그리고 얼른 드러누워서 쉬고 싶다.’

    머리가 무거웠다. 나는 내가 가까이 디밀어진 이안의 얼굴을 가볍게 떠밀며 말했다.

    “괜찮아요. 어서 일하러…… 콜록!”

    기침이 터져 나와서 말도 끝맺지 못했다. 쿨럭거리는 나를 본 이안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아내가 이렇게 아픈데 일이 손에 잡힙니까? 오늘은 저도 쉴 거예요.”

    “그래도 제 곁에 있으면 안 돼요. 콜록! 콜록! 당신한테 감기를 옮기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콜록!”

    “하지만.”

    잠시 턱을 짚고 고민을 하던 이안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차라리 나한테 감기를 옮겨요. 그럼 당신은 나을 거 아니에요.”

    “네?”

    아니, 이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말을 하고 나니 더더욱 그럴듯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는 몸을 들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역시 옮기려면…… 이 방법이 최고이려나?”

    ‘뭐라고?’

    감기를 어떻게 옮겨? 나는 눈을 깜빡였다. 커다란 손바닥이 내 왼쪽 뺨에 닿았다.

    끼이익.

    갑자기 이안의 몸무게까지 쏠리면서 침대가 기묘한 소리를 내었다. 내 쪽으로 다가온 이안이 반듯한 입술을 벌렸다. 이유 모를 오싹함에 나는 손가락 끝까지 긴장해서 힘을 주었다.

    막 입술이 포개지려는 순간이었다.

    “마마, 저 케닌입니다.”

    “꺄!!”

    이안에게 홀렸던 나는 그 순간 정신을 차리고 화들짝 놀라서 그를 떠밀었다.

    ‘이 요망한 남자 같으니!!’

    감기를 옮기는 방법이라는 것이 키스였냐!

    ‘키스하고 있는데 케닌이 들어왔어 봐! 얼마나 민망했을까. 아니, 애초에 병이 옮기면 사라지냐고!’

    가장 민망한 건 그가 다가오자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눈도 깜짝하지 못하고 그를 마주 보았던 바로 내 자신이었다.

    ‘요망해! 요망해! 인큐버스가 틀림없어.’

    무서운 사람 같으니. 절대로 둘이 있을 상황을 만들지 말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드, 들어와요!”

    내 대답에 케닌은 기운차게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마마. 전하께서도 계셨군요.”

    내가 밀치는 바람에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이안은 케닌을 흘겨보았다.

    “케닌, 자네는 감봉이야.”

    “네? 뭐라고요?”

    그저 기운차게 들어온 것뿐인데 감봉 운운에, 케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나는 또다시 열리는 이안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아휴, 시끄러워요. 헛소리 말아요. 콜록!”

    나는 손수건으로 내 입을 막았다. 그리고 허리를 세워 앉으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죠?”

    “찾으시던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벌써?”

    케닌이 이야기하는 건 에릭이 분명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새삼 타이론 가문의 힘이 느껴졌다. 수도에는 여러 개의 정보 길드가 있고, 그 성격 때문에 대단히 폐쇄적이라 이름을 안다고 해도 조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벌써 찾다니.’

    내가 놀라자, 케닌은 으스대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 분의 명령이신데요. 당연히 빠르게 이행해야지요.”

    “지금 어디 있죠?”

    “응접실에 있습니다.”

    케닌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에 발을 끼웠다. 아무리 몸이 아프다고 해도, 에릭이 이 집에 와 있는데 얼굴을 보는 걸 미룰 이유가 없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둘이 지금 무슨 이야기지?”

    “제가 얼마 전에 케닌에게 따로 부탁한 일이에요. 찾을 사람이 있어서요.”

    어깨에 숄을 두르는 나를 보고 이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나가보려고요? 오늘은 몸이 좋지 않으니 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부축해주면 되죠.”

    “…….”

    내 말에 이안은 잠시 멈칫 굳어졌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이안이 눈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이제 나를 정말 잘 다루시네요.”

    “그래도 말릴 거예요?”

    “아니요. 제 부인의 부탁이라면 부축만이 아니라 업어서라도 다녀야죠.”

    “당신이 거절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나는 눈을 휘며 웃었다. 이제 조금 이안에 대해서 알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기대받는 것’에 약했다.

    ‘진짜 스스로 말한 대로 애정결핍일지도.’

    그리 생각하며 나는 내게 내밀어진 이안의 팔에 내 팔을 단단히 꿰었다.

    사뿐사뿐 걸어 내려가니 응접실에는 정돈되지 않은 검은 머리칼에, 말랐지만 큰 키를 가진 소년이 서성거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막처럼 메마른 검은 눈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이 아이가 맞아. 에릭.’

    먼 미래에 불행에 빠진 애니를 건져주는 남자였다.

    ‘애니를 짝사랑해서 오랫동안 애니의 곁을 맴돌았었지. 그래서 애니가 버려졌을 때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렸고.’

    결국 애니와 에릭은 행복해졌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10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만날 운명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지난 생처럼 애니가 불행하게 살도록 내버려 둘 마음은 전혀 없었다.

    나를 마주한 그의 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쇠를 긁듯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은 플로렌스 가문의…….”

    “역시 나를 아는구나.”

    오랫동안 애니를 지켜봤다더니 역시 나를 알고 있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십 년도 더 넘게 애니만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고 있었다니.’

    알면 알수록 좋은 신랑감 아닌가.

    ‘좋아.’

    “저는 이 아이에게 빚을 졌어요. 그래서 저도 이 아이에게 보답을 하고 싶은데.”

    나는 고개를 들어 이안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이 아이가 기사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수 있을까요?”

    “예?”

    설마 내가 그런 요구를 할 줄 몰랐던 이안이 턱을 쓰다듬었다.

    나는 잠시의 침묵을 이해했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소년을 대뜸 데리고 와서 가문의 기사로 삼아달라고 했으니 난처하겠지.’

    하지만 이 순간, 나는 그가 내 부축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처럼 부탁 또한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어렵진 않습니다. 바로 지시하도록 하죠.”

    내 예상대로 이안은 선뜻 내 부탁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순간 가슴이 울컥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 느낌.’

    무언가 그를 알고, 또 기대하고, 기대에 화답받는 기분.

    ‘이런 느낌은 뭐라고 부를까.’

    기나긴 인생을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내가 순간 욱 올라오는 격렬한 감각을 감추지 못하고, 열띤 눈빛으로 이안을 마주 보았을 때였다. 에릭이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게 기회를 주시는 건가요?”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세상의 밑바닥에서 태어나, 잔뜩 메마른 눈동자에 반짝 희미한 희망의 불꽃이 타올랐다.

    나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너는 돈으로 작위를 사려고 했을 거야. 그렇지?”

    “마, 맞아요!! 어떻게 저를 아시는 겁니까?”

    미래를 통해서 보았으니까.

    그리고 저 볼품없는, 정보 길드의 잔심부름이나 맡던 말단 소년은 수년 뒤 단승작위를 가지게 된다.

    오로지 애니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지. 애니는 쓰레기 같은 놈에게 팔려가고.’

    그러니 내가 지금 에릭을 찾아, 기사로 만드는 것은 두 사람의 험한 사랑의 여정에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었다.

    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멋진 기사가 되어 내 동생을 지켜주렴.”

    “가, 감사합니다!”

    에릭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그제야 흥분이 퍼져나갔다. 이야기가 일단락된 뒤, 케닌은 에릭을 데리고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엣취!”

    긴장이 풀어지자마자 재채기가 연신 튀어나왔다. 나는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아무래도 몸살감기가 제대로 찾아온 모양인데.’

    나는 자주 아프지는 않았지만, 한 번 아프면 호되게 앓곤 했다. 이번에도 어째 느낌이 싸했다.

    으슬으슬한 팔을 문지르고 있으니, 이안이 물었다.

    “저 아이는 누굽니까?”

    “예전에 애니를 지켜주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도 겉모습만 보고 하녀 아이가 들고 있던 유리등을 던졌죠.”

    그 등이 얼굴에 맞아 깨지면서, 에릭의 얼굴에는 잔흉터들이 잔뜩 남게 되었다.

    대략의 이야기를 들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의 맥락을 잘 짚어냈다.

    “그 아이, 처제를 좋아하는군요.”

    “네. 곁에 있을 구실을 주었으니, 그다음은 저 아이의 몫이겠죠.”

    나도 물론 그 생각을 했다.

    ‘내가 도와준다고 나서는 바람에 오히려 두 사람이 이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

    갑자기 안온해진 삶에, 에릭의 마음에서 사랑의 감정이 사라질 수도 있다. 절실하지 않은 환경에, 애니는 에릭을 사랑하지 않게 될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신이 아닌걸. 모든 것을 다 내 뜻대로 굴러가게 할 수는 없어.’

    그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되도록 고생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자.

    그게 내 두 번째 삶의 목표였다.

    “평민이에요.”

    그렇게 다짐을 하고 있는데, 이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툭 던지듯 말을 이었다.

    “부모도 없고, 가진 것도 없죠.”

    나는 이안과 시선을 맞추었다. 맑은 하늘처럼 푸른 눈에는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처제랑 맺어주려고요?”

    “……번듯한 귀족에 돈이 많은 사람과 사는 것도 행복할 수 있겠죠.”

    지난 생, 애니를 돈 주고 아내로 데려온 나쁜 놈이 그런 놈이었다. 남들 보기에는 멀쩡한 귀족.

    그래서 애니가 행복했나?

    “하지만 저는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에릭에게 기회를 주는 거고요.”

    하지만 그 기회도, 결국 이안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리고 이안, 정말 고마워요.”

    내 말에 이안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제 청혼을 받아준 것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에요. 나를 믿고, 내 말이 불합리한 것 같아도 따라주어서 늘 기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가 나를 믿지 않는다면, 내 하는 행동마다 사사건건 태클을 놓고, 진상들처럼 얌전히 살라고 윽박지른다면 지금처럼 애니와 에릭을 구할 수 있었을까.

    ‘이번 생에서 결혼을 한 사람이 이안이어서 정말 다행이야.’

    결국 돌고 돌아서, 내가 느끼는 행복의 시작은 이 남자였다. 내가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을 때였다.

    “올리비아.”

    여전히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면 귓불을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움츠렸다. 팔짱을 낀 그가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대공이 되어서 어때요?”

    엥.

    ‘저건 또 무슨 질문이야.’

    하고 많은 말들 중에 왜 갑자기 저걸 묻는단 말인가.

    ‘나는 감격하든지, 날 놀리든지 할 줄 알았는데.’

    애써 마음을 고백했는데 상대가 저렇게 반응하니 푸쉬쉬 식는 기분이었다. 나는 살짝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뭐가 어때요? 달라진 게 있나요?”

    “하하하.”

    그런데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그가 갑자기 허파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웃는 게 아닌가.

    ‘뭐야, 진짜.’

    내가 어이가 없어서 얼굴을 와락 구겼을 때였다. 큰 소리로 웃던 그가 갑자기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내 이마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속삭였다.

    “당신이 너무 좋아.”

    그의 고백을 들으니 배 속부터 꽉 조여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슬쩍 뺨을 붉히며 그를 밀어냈다. 물론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 가, 감기 옮아요. 가까이 오지 말아요.”

    “얼굴도, 몸매도, 말투도 다 내 취향이지만. 역시 성격이 최고예요.”

    “네?”

    내 성격이 뭐?

    “대공비의 상징인 티아라로 전남편 머리를 후려갈길 생각을 하는 대범함…….”

    “으아악!”

    결국 나를 놀리는 말이었다. 나는 있는 힘껏 그를 떠밀며 소리쳤다.

    “당장 나가요! 당장 나가지 못해요!?”

    “하하하.”

    그는 다시 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부끄럽다 못해, 수치스러워진 내가 뾰족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을 때였다.

    “사랑해요, 올리비아.”

    그가 그렇게 속삭이며 내 뺨에 입술을 쪽 맞췄다.

    내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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