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엉망이 된 탄신제
알키저스 백작가의 현관을 열고 들어서며 로메오는 제임스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내 부인은 속고 있어.”
로메오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 남자가 거짓을 말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올리는 타이론 공작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어.’
자신을 향해 인사를 올리는 이들에게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로메오는 손님방으로 바로 올라갔다. 머릿속에는 오늘 만난 올리비아와 이안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행복한 미소가, 가짜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다정한 포옹, 자연스러운 말다툼과 화해, 그리고 열정적인 키스.
그들은 그저 사이좋은 부부였을 뿐이다.
생각을 정리한 로메오는 손님방의 문을 두드렸다.
“돌아왔습니다.”
“…….”
방 안은 어둠침침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시간인데도 커튼이 창문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어둠에 녹아든 것같이 까만 남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밤을 사람으로 만들면 이런 모습일까. 그의 몸에서 색을 가지고 반짝이는 것은 음울한 회청색 눈동자뿐이었다.
그가 로메오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흘러나온 것은 인사가 아니었다.
“자네 눈이?”
“아?”
그의 말에 로메오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눈가를 만졌다. 눈물을 흘렸던 탓인지 아직도 눈꼬리가 따끔거렸다.
‘부끄러워.’
로메오의 나이는 올리비아와 똑같은 스무 살. 그런데 황궁에서 꼴사납게 울고 말았다.
바로 스타티스 때문이었다.
“모르지, 그대와 나도 운이 좋을지. 아님, 나쁠지. 한번 시험해볼 텐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황태자는 그대로 그의 목을 잡아당겨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모래 맛이 날 것 같은 건조한 입맞춤이었다.
‘첫 키스를 멱살잡이를 당해서 하게 되다니.’
로메오는 생긴 것처럼 섬세한 성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첫 키스를 강탈당한 그는 당황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고 말았던 것이다.
화끈.
돌이켜 생각해도 너무 창피했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것도 간 것이지만, 그랬다고 울음을 터뜨린 게 말이다.
‘전하께서도 엄청 당황하셨었지.’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엄청 놀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화가 나신 거지? 되게 냉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로메오가 생각하는 스타티스는 감정을 거의 내보이지 않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가 그간 보아온 공식석상에서도 모두 그랬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지.’
타이론 공작과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스타티스에 대한 생각에 빠지려던 찰나, 로메오는 제임스의 집요한 시선을 느끼고 헛기침을 했다.
“큼큼,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메오의 말에 제임스는 여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에게 로메오가 중요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내 부인은 언제 만날 수 있소?”
“그건…….”
올 것이 왔구나. 로메오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
설마 로메오에게 거절을 당할 줄 몰랐던 제임스의 눈이 커졌다. 로메오는 조금 더 길게 자신의 의중을 설명했다.
“타이론 공작과의 결혼은 올리가 진정 원하던 것이에요. 저는 친구로서 그녀의 행복을 빌 뿐, 당신을 돕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속고 있는 거래도!”
로메오의 말에 제임스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 곰처럼 커다란 사내가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로메오의 심장이 저절로 떨렸다.
“애초에 대국민 고자와 결혼이 말이 되오? 아이 없는 가정이 행복할 수 있다고?”
“아이가 모든 결혼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정말로 친구 올리비아의 행복을 빌었으니까.
“제 할 말은 끝났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로메오의 정중한 축객령에 제임스는 혀를 쯧 찼다.
“그대는 진정한 친구라고 믿었는데. 실망이오.”
열 받아서 한 대 때리기라도 할까 봐 쫄았으나, 제임스는 그렇게 한 마디 한 뒤 그대로 로메오를 스쳐 나가버렸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로메오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친구이기에 믿는 거야.”
그의 친구는 바보가 아니었다. 스스로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말했다. 파넬 공작가는 쓰레기통이고, 거길 나올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다고.
‘타이론 공작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어. 절대로 거짓이 아닐 거야.’
그렇다면 친구로서 자신은 그녀를 믿고 지지해줄 수밖에.
‘이제 내가 황후가 될 테니까. 더더욱 도울 수 있고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로메오가 주먹을 꽉 쥐었을 때였다.
문득 이상한 점이 로메오의 머리를 퉁 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나와 올리가 절친한 친구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로메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제임스는 떠나버렸기 때문에 그의 의문에 답을 해줄 사람은 없었다.
* * *
‘어휴, 정신이 없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는 탄신제에 참석할 준비를 했다.
‘셀 수 없이 많이 참석했는데도 늘 이렇다니까. 아마 다시 태어나도 또 긴장하겠지.’
시큰둥하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는 은빛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땋아서 말아 넣은 여자가 있었다.
바로 나였다.
이번 탄신제에 참석하기 위해서 고른 옷은 연분홍색 러플이 달린 산호색의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머메이드 드레스였다. 내가 가장 자신 있게 소화하는 디자인이기도 했다.
“어머나, 너무 예뻐요!”
“확실히 키가 크셔서 쭉 뻗어 있으니 이런 디자인이 잘 어울리시네요.”
옷을 입혀준 하녀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나는 뿌듯하게 웃었다.
‘다행히 잘 골랐나 보네.’
중요한 자리이다 보니 가장 자신 있는 것들로만 정했다. 그래도 내심 걱정했는데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양이다.
나는 거울을 보며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곁에 선 하녀들이 그런 나에게 보석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귀걸이는 처음 고르신 대로 장미석으로 하시겠어요?”
“각하께서 선물하신 다이아몬드 귀걸이도 괜찮은 것 같아요.”
“맞아요. 은빛 머리카락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하녀들의 열성적인 시선이 영 익숙하지가 않았다.
‘파넬에서는 나한테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지난 생에서는 탄신제가 어땠더라.
‘우아한 진상이 날 따돌리고 갔었던 거 같은데.’
마차에 앉을 자리가 없다나. 지금 생각하면 웃긴 변명이었다.
‘우아한 진상만 대외 행사에 나가면서.’
그냥 나를 따돌리기 위해 세 진상이 뭉쳤던 것이다.
꾸밈을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서 혼자서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결국 떠나는 마차를 배웅하고 섰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비참했던 기억은 잊히지 않는군.’
기억도 안 난다고 생각했는데, 어제처럼 그때의 허망하고 초라했던 감정이 밀려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안이 선물한 걸로 착용할까.”
“좋은 생각이세요.”
“착용하신 목걸이와도 잘 어울릴 거예요.”
나는 어머니의 유품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지금이야 몸에서 떼지 않고 있지만, 지난 생에서는 이렇게 열심히 차지 않았다.
‘그냥 그때는 모든 것이 다 창피했어. 쉽게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도 몰랐지.’
초라한 펜던트를 진상들이 비웃었기 때문에 나도 자연스럽게 보석함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하지만 이안은 나를 비웃지 않았어.’
그러니 나도 더 이상 예전처럼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조금 있으니 방문이 똑똑 울렸다. 고개를 돌리니 열린 문틀에 이안이 팔짱을 끼고 기대 서 있었다.
“준비 다 되었습니까.”
“네.”
타이밍도 좋지. 꼭 내 치장이 다 끝나면 알려달라고 알림이라도 설정해둔 것 같았다.
나는 이안을 향해 걸어갔다. 이안은 흰 장갑이 끼워진 내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오늘은 내 곁에 딱 붙어 있어요.”
“왜요?”
“당신이 아름다워서 걱정되어서요.”
그의 말에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농담도.”
“왜 농담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거야…….”
나는 내 앞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고수머리를 단정하게 넘겨서 잘생긴 얼굴이 시원시원하게 드러나 있었다.
‘섹시해.’
내가 문제가 아니고 이 남자가 문제였다. 저런 얼굴로 나른하게 응시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가 씨익 웃었다.
“아니면 날 감시해줘요. 난 구속받는 거 좋아하니까.”
“거짓말.”
구속받는 걸 좋아하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나.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자기도 자기가 잘생긴 걸 아는 거야.’
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구속이라는 단어가 무척 관능적으로 들렸다.
내가 뺨을 은은하게 붉혔을 때였다. 그가 또다시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 해주는 건 뭐라도 좋습니다.”
달콤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내 손을 잡아끌며 상큼하게 웃었다.
“그럼 우리 출발할까요?”
“……네.”
아니, 그냥 출발하는 거냐.
‘왜 서운한 건데.’
분명 마주 보는 눈빛이 반짝였는데, 내 심장도 뛰었는데, 그냥 마차에 오르자는 이안에게 조금 서운해졌다.
‘안 시켜도 예전에는 알아서 입 맞추더니.’
분명히 스킨십을 할 타이밍이었는데 말이다.
‘아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안 그래도 자꾸 달라붙어서 곤란하다고 생각했잖아.’
나는 자꾸만 ‘스킨십을 하고 싶다.’ 쪽으로 흘러가는 생각을 부여잡으며 내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첫 번째 남편을 피해서 결혼한 두 번째 남편이 너무 달달해서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차라리 잘된 거야!’
그렇게 내 스스로 내 자신을 혼내고 있을 때였다.
마차가 덜컹하더니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때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이안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뭐가요?”
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앉으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뭐가 궁금한가 했더니 이안의 말은 무척 뜬금없었다.
“화장은 어떻게 수정합니까?”
왜 갑자기 화장 타령이람. 그래도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작은 가방에 챙겨왔어요.”
황궁 행사에는 많은 휴게실이 넉넉하게 존재하지만, 화장품까지 모두 구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귀부인들은 보통 자신의 전담 하녀에게 자신의 전용 물품들을 맡기고 휴게실에서 기다리라고 시킨다.
‘내 하녀는 지금 마부 옆에 앉아 있지.’
내가 그녀를 떠올리며 여상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이안은 재차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립스틱도?”
“당연하죠.”
“그럼 문제없네.”
뭐가 문제가 없다는 건가 물을 시간은 없었다.
그의 커다란 몸이 나를 덮듯이 갑자기 다가와서는 나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포갰다. 처음에는 입술을 뭉개듯 비비더니, 이내 입술 사이를 가르고 말랑한 혀가 밀려 들어왔다.
두근. 두근. 심장이 다시 쿵쾅쿵쾅 뛰었다. 이거야말로 시간차 공격 아닌가.
‘방심하기 무섭게 훅 치고 들어오다니.’
하지만 동시에 밀려오는 묘한 안도감에, 나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내가 이 남자에게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걸.
그렇게 한참을 각도를 다르게 하여 입을 맞추던 그가 천천히 떨어졌다. 빨간 혀가 자신의 입술을 할짝 핥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달아.”
내 얼굴은 속수무책으로 빨개지고 말았다.
* * *
황제가 아직 스물두 살의 황태자였던 그 무렵 선대 황제의 나이는 예순. 그러나 젊은 시절 마약과 사치, 향락에 절었던 몸은 일흔에 더 가까워 보일 정도로 마르고 쇠약했다.
누가 봐도 곧 죽을 것 같은 노인.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노인은 마지막에 젊은 여인을 황후를 들였다. 그리고 그녀를 임신까지 시켰다.
‘이대로 아들이라도 낳으면!’
평생 가족은 물론이요, 백성까지 괴롭혔던 아버지의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 후궁의 장자로 태어나 황좌에 오를 날만 초조하게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황후가 낳은 적통이라니.’
태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어떻게든 몰아내야.’
권력 앞에 황태자는 매정해졌다. 이미 눈에 보이는 수많은 사람도 밀어냈는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어린 동생과, 자기 또래의 새어머니에게 매정해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타이론 공작을 부르라.”
그것이 긴 비극의 시작이었다.
* * *
정열적인 입맞춤을 몇 번 더 반복하는 사이, 마차는 멈춰 섰다. 나는 이안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덩달아 우리를 따라 내린 하녀가 나를 보고 당황했다.
“아니, 마님 입술이…….”
지워졌다고 말하려다가 뒤늦게 왜 지워졌는지 깨달은 하녀가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어서 다시 칠해주렴.”
나도 얼굴이 덩달아 빨개졌지만,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다.
우린 부부인데 마차 안에서 뽀뽀도 할 수 있고 그렇지, 뭐!
‘다음부터는 마차 안에 화장품을 놔두라고 해야겠다.’
어차피 입술을 칠하는 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지라, 화장 수정은 금방 끝났다. 잠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안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이쪽으로.”
보통 귀족들은 여성이 남성의 팔짱을 끼는 것으로 에스코트를 하건만, 이 남자는 왜인지 손가락을 펼쳐서 깍지를 꽉 끼었다. 내가 무슨 뜻이냐는 의미로 붙들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이게 뭐예요?”
“당신을 붙잡은 건데요.”
“그러니까 왜 이렇게 붙들어요?”
내가 어린애냐.
‘길 잃어버릴 것 같은가.’
하지만 나는 황궁 지리에 빠삭하다. 지난 생에서도 나는 공작부인이었으니까!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고 내가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이안은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속삭였다.
“당신이 도망칠까 봐요.”
“네?”
도망은 무슨. 내가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자, 그는 빙긋 웃었다.
“나는 이미 당신에게 푹 빠졌는데, 당신이 도망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나 몰래 빚졌어요? 아님 사기당해서 집문서라도 빼앗겼나요?”
“절대 아니에요. 절 무슨 반푼이로 보고.”
“그럼 내가 왜 도망을 쳐요?”
현실적으로 아내가 남편을 버리는 이유들이 모두 해당이 아닌데 왜 도망을 친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그런 나를 보고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살짝 눈썹 위에 입을 맞췄다.
“지난번에, 저보고 황제 폐하와 무슨 사이냐고 물었죠?”
“네네.”
“당신 추측이 맞아요. 저랑 황제 폐하는 좀 사연이 있어요. 원래는 죽을 때까지 그대로 묻어놓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안은 조금 흐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그 표정에 뭐라 반응하기 전에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오늘 발표하실 생각이신 거 같아요. 그러니 당신도 듣고 놀라지 마세요.”
“……설마 진짜 애인 이런 거 아니죠?”
“폐하는 모르겠고, 저는 남색가가 절대 아닙니다.”
“…….”
모르겠다는 말은 또 뭔데.
나는 찜찜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았지만, 이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발표일까.’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그냥 안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현재에서 나오는 만족감이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내가 정말 이제 불행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걸까.’
조금 걸으니 익숙하게 느껴지는 커다란 홀이 보였다. 보통 부부가 함께 입장하는 문을, 나는 수없이 혼자서 통과했다.
제임스가 전쟁터에 있을 때, 그리고 돌아온 뒤에도 그는 사교활동을 싫어했기에.
‘하지만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야.’
문 앞에서 시종이 우리의 입장을 알렸다.
“타이론 공작 부부 드십니다!”
눈부신 샹들리에 빛이 나를 삼키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아찔해지는 그 순간, 나는 내 손을 꽉 쥐고 있는 온기를 기억했다.
‘그래, 나는 이제 더 이상 불행한 파넬 공작부인이 아니야.’
나는 이안의 손을 꽉 쥐었다. 이안이 놀란 듯 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눈부신 빛 속으로, 나는 한 걸음 내디뎠다.
* * *
“아니, 소문 자자한…….”
“결혼식 때도 한 번 보긴 했는데.”
“저렇게 예뻤던가요?”
들어서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말이 쏟아져나왔다. 얼굴에 꽂히는 시선에 뺨이 따끔거릴 지경이었지만 마음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모두 이안이 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도에 벌벌 떨면 지난 생의 경력이 울지.’
그리 생각하며 내가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내가 생각해도 우아하고 자연스러운 걸음이었다. 내 손을 잡은 이안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생각보다 의연하네요.”
뜨끔.
그 말에는 나도 뻔뻔한 표정을 짓기 어려웠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을 거 같아요.”
아마 20년 전의 나는 그랬을 것이다.
적당히 지어낸 대답에 이안이 피식 웃었다.
“그럼 얼른 주저앉아버려요.”
“네? 왜요?”
“제가 당신을 안고 휴게실로 가게요.”
“아직 무도회 시작 안 했는데요?”
황제도 입장하지 않았는데 휴게실에 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시 키스하고 싶어졌거든요.”
“!!”
어휴, 이 짐승. 나는 눈을 흘겨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바람에 주변에서는 조금 또 소란이 일었다.
“세상에, 저렇게 환하게 웃으시는 건 처음 봐요.”
“아니, 연애혼이라는 말이 맞나봐요. 당연히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그럼 뜨거운 초야를 보냈다는 소문도……?”
쏟아지는 시선에 내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이안의 얼굴과 반대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놀랍겠지. 나도 이 남자랑 결혼하기 전까지 되게 무뚝뚝하고 말수도 적은 줄 알았거든.’
애완동물로 벽돌을 택했는데 골든레트리버가 나타난 느낌이었다.
괜히 속은 것 같은 기분에 내가 입술을 삐죽이고 있을 때였다. 나를 이글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저 여자.’
소라처럼 둘둘 만 붉은 머리카락에 연한 푸른색 눈을 가진 화려한 미인이었다.
지난번 레스토랑에서 마주친 그 영애가 분명했다. 나는 내가 붙들고 있는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이안, 지금이라면 절대로 화 안 낼 테니까 사실대로 말해요.”
“네?”
이안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를 노려보는 여자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자 누구예요?”
“아…….”
이안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나는 나대로 답답했다.
‘아니, 지난번에 그렇게 찐하게 입을 맞추는 걸 봤는데도 저렇게 질척거린다면 뻔하잖아.’
보통 사이가 아닌 사이.
이런 찜찜함을 남겨두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안이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그녀는…….”
바로 그때였다.
“황제 폐하, 납십니다!!”
타이밍도 좋지.
하필 막 대답을 하려는데 만두 곰, 아니 황제가 등장했다. 나와 이안은 가장 높은 단상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허허허, 모두 자세를 편안하게 하지.”
무슨 동네 빵집 아저씨 같은 목소리로 황제가 인사를 받았다. 모두 일제히 허리를 다시 세우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이 인사는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단 말이야.’
모두가 동시에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을 홀로 서서 받는 기분은 어떨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니, 제수씨!”
“헙.”
절대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설마설마하는 눈으로 단상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찐만두 같은 얼굴을 한 황제가 나를 향해 손을 살래살래 흔들고 있었다.
‘설마하니 여기서까지 그렇게 사사로운 호칭으로 부를 줄이야.’
왜 또 부끄러움은 내 몫인 건데. 둘이 왜 다 나한테 수치심을 주는 건데.
“지금 제수씨라고 했어요?”
“타이론 공작님을 아끼는 것은 알았지만.”
“엄밀하게 타이론 공작부인은 두 번째 결혼인데…….”
웅성거림이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나는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허허허, 황제께 고치라고 할 수는 없으니 내가 익숙해져야지.’
다행히 그런 사사로운 주목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황제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늙은이의 생일에 참석해주어 모두 감사하오.”
늙은이라고 하기엔 황제는 아주 정정했다. 아직 쉰도 안 된 것이다.
하지만 굳이 저렇게 스스로를 칭하는 것에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함양되어 있었다.
“역시 황위를 일찍 물려주기 위해서.”
“여황제가 고금에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드문 것도 사실이니 일찌감치 선위하여 기틀을 다지겠다는 거죠.”
황제의 말을 들은 귀족들의 눈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것이 꼭 바퀴벌레가 샤샤샥 도망칠 때 나는 소리 같았다.
황제는 그런 건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었다.
“내 생일날 경사스러운 소식을 전하게 되어 무척 기쁘군. 스타티스 황태자와 로메오 알키저스 영식이 약혼을 하기로 했다오.”
나와 이안은 지난 티파티 때 만나서 알고 있었지만, 다른 귀족들에게는 황태자의 반려가 누구로 정해졌는지 처음으로 공표받는 자리였다. 연달아 터지는 폭탄에 장내가 가라앉을 시간 없이 술렁였다.
물론 황제는 그것이 가라앉게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신관 한 사람이 작은 쿠션에 반지를 얹어서 걸어 나왔다. 황제는 자신이 입장했던 안쪽 문을 향해 손짓했다.
“두 사람은 이쪽으로 서도록.”
흰색으로 의상을 통일한 로메오와 스타티스 황태자가 걸어 나왔다. 귀족들은 탄성을 질렀다.
“헉!”
“설마 약혼식을 지금 치르는 거야?”
“어머나!”
흰 옷, 신관, 반지. 그 의미가 명확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약혼을 이렇게 간단하게 치르다니 고금에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결혼을 일찍 당겨서 하겠다는 의지도 느껴졌다.
‘역시 사람 좋게 생겼지만 보통 수완이 아니야.’
저 포슬포슬한 겉모습에 속으면 절대로 안 되겠다. 나는 재차 스스로 다짐했다.
모두가 놀라든지 말든지, 약혼식은 간결하게 진행되었다. 뭐라고 축사를 읊은 신관이 마지막으로 맹세를 받아냈다.
“서로에게 충실할 것을 맹세합니까?”
“예.”
두 사람은 곱게 고개를 숙이며 맹세했다.
반지를 나누어 끼는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던 황제가 불현듯 황태자를 불렀다.
“스타티스.”
“예, 폐하.”
“만약 이 자리에 또 하나의 황위계승권자가 네게 도전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이건 또 무슨 질문이란 말인가. 모두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단상을 응시했다. 다소 당혹스러운 질문에도 스타티스 황태자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정정당당하게 밀어낼 것입니다.”
“자신이 있느냐?”
이렇게 재차 물으면 심장이 떨릴 만도 한데, 황태자는 여전히 의연했다. 그녀는 확고한 어조로 대답했다.
“누구도 절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나는 긴장했지만, 막상 그 대답을 들은 황제는 큰 소리로 웃었다.
“허허허! 이리 믿음직스러운 후계자를 낳아, 짝까지 찾아주었으니 어찌 아니 기쁘겠는가.”
저 대답을 기다렸다는 투였다.
“아니, 왜 갑자기 저런 질문을?”
“또 다른 황위 계승자라니.”
등 뒤에서 또 소곤소곤 말들이 흘러나왔다. 사실 의아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왜 하필 이 시점에서?’
한마디 말도 흘려들을 수 없는 위치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저런 말을 할 때는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사실 갑작스러운 발표가 하나 더 남아 있다오. 최근 짐이 큰 결심을 하나 했지. 짐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나, 또한 꼭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거든.”
나는 물론이고 모두 긴장해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의 입술에서 폭탄선언이 떨어졌다.
“이안 타이론 공작은 사실 내 막냇동생이오.”
“!!”
“헉!”
술렁이던 장래는 이제 완전히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잊은 것 같았다.
나는 내 곁에 선 남자를 돌아보았다.
“이안……?”
짙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가 단상의 황제를 응시하고 있었다. 황제 또한 이안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보았다.
“내 욕심으로 그간 저 아이에게 제대로 된 지위를 주지 못하였으나,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돌려주려 하오. 두 사람도 이리 올라오라.”
“네?”
갑자기 우리 둘을 향하는 시선에 나는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내 손을 이안이 잡아끌었다.
“갑시다.”
“이, 이안.”
정말 이 남자가 황제의 동생인가?
‘보통 사이가 아닌 거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안과 손을 마주 잡고 단상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그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았다.
단상 위의 황제는 드디어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그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이 결심을 하게 된 건 모두 제수씨 덕분이라오.”
“폐, 폐하.”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내가 한 일이라고는 요상한 노래를 퍼뜨린 것뿐인데.’
내가 찔끔해서 어깨를 움츠렸을 때였다.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 아이에게 황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은 것도 미안한데, 부인과 태어날 아이에게까지 빼앗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더군.”
그제야 그의 마음이 납득이 되었다.
‘지난 생에서는 이안은 계속 타이론 공작이었지. 황족이라는 건 밝혀지지도 않았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제를 마주 보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가족이 생긴다 생각하니 마음이 변한 거구나.’
이것 또한 내가 이안과 결혼한 것과 같은 새로운 미래였다.
내가 행동해서 이렇게까지 미래가 바뀌다니. 내가 신기한 눈으로 황제를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이안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저를 죽이시는 편이 가장 편하셨을 겁니다. 저는 살아서 이 행복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드립니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는 그가 보냈던 어린 날들의 풍랑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 말하지 마라, 이안.”
황제가 결국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이안을 끌어안았다. 나는 두 사람을 보며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티아라를 내게 주었구나.’
얼마 전 황제는 황족만 쓸 수 있는 티아라를 내게 하사했었다. 지금 보니 두 사람 사이에는 그 티아라가 사인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사실을 공표하겠다는.
‘그래서 이안은 아기를 낳고 싶지 않은 거였고.’
이안의 황위계승권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지금의 대화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황태자를 위협할 만큼 높은 모양이다.
본인이야 고사한다고 해도 자식 또한 황위계승권을 가지니, 그 잡음을 피하고 싶어 아예 낳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속앓이를 했을까.’
나는 안쓰러운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서로 눈으로 대화를 나눌 새도 없었다. 바로 황제가 이렇게 공표했기 때문이다.
“이안 타이론 공작을 본래 지위에 복권하고자 하오. 타이론 공작가를 대공가로 승작하며, 롤렌스 공국의 주인으로 삼겠소.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시 누리리라.”
타이론 대공.
공국.
이제 그는 한 나라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황제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그리고 올리비아 타이론, 그대는 이제부터 타이론 대공비이오. 신분에 알맞은 너그러움으로 공국민들을 품어주시오.”
세상에, 내가 대공비라니. 한 나라의 왕비가 되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어떻게 인생이 이렇게 풀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파르르 떨려서 목소리가 잘 흘러나오지 않았다.
“성은이 망극…….”
그렇게 내가 감사를 표하려고 할 때였다.
“이의 있습니다.”
묵직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좌중을 갈랐다.
아주아주 귀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듣는 순간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돋아났다.
‘설마.’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었다.
‘그럴 리 없어.’
그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겁이 더럭 나서, 나는 황제를 향해 숙인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등 뒤로 소란스러움이 벌떼처럼 번져나갔다.
“저, 저 사람은?”
“아니, 왜 저 사람이 여기에?”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에 귀가 울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굳어져버린 나를 이안이 붙들었다.
“올리비아? 괜찮아요?”
“괘, 괜찮…….”
괜찮지 않았다.
손끝까지 차갑게 식어내리는 감각에 저절로 이가 딱딱 부딪쳤다. 내 얼굴도 백지처럼 희게 질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없어.’
나는 필사적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런 비웃음이 퐁 하고 솟아났다.
‘불행으로부터 그렇게 쉽게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어?’
“부인.”
꿈에서도 잊을 수 없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리되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 검게 그을린 건강해 보이는 얼굴, 셔츠를 터트릴 것 같은 단단한 어깨와 팔다리.
“이리 오시오.”
내 첫 번째 남편 제임스 파넬이었다.
* * *
무도회장은 더 이상 고요할 수 없을 만큼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모두가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제임스.’
그동안 어떻게 그를 잊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음울한 회청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내게 제임스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말수가 적고, 바깥 활동도 거의 하지 않고, 그냥 나를 졸졸 쫓아다니던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당신 뜻대로 하시오.”
“마음대로 하시오.”
“괜찮소.”
그는 무엇 하나 의견을 내는 법이 없었다. 저택의 주방장을 바꾸어도, 인테리어를 바꾸어도, 내가 오늘 무슨 옷을 입든, 내가 무엇을 하든.
그저 그가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나도 많이 참았소.”
굴욕스러웠던 과거가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 몸도 덩달아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밖에서 아무리 사교계 정점에 오르면 무엇하나. 파넬 공작가 안에선, 그리고 제임스 앞에선 나는 한 마리 애완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수년간의 억압 때문일까. 나는 이미 현재가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멍하니 멈춰 서고 말았다. 그런 나를 향해 제임스가 재차 말했다.
“내 옆으로 오시오, 부인.”
“아…….”
가야 하는 건가. 나는 아직도 올리비아 파넬인 것인가.
내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을 때였다.
커다란 손이 내 팔을 꽉 붙들었다.
“올리비아.”
제임스의 어두운 눈과 달리 반짝거리는 맑은 바다 같은 색채의 푸른 눈이 나를 담았다. 나를 향한 온전한 애정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앗!”
그제야 잠에서 깨는 것만 같았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요?”
나는 대답 대신 이안의 손을 꽉 붙들었다. 이 커다란 손만 있으면, 이 남자만 있으면 세상 무엇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내 그런 마음을 눈치챈 이안이 몸을 돌려 제임스를 마주 보았다. 그의 입에서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혼인무효장이 북부까지 날아갔을 텐데. 이 여자는 이제 올리비아 타이론이오. 함부로 부인이라고 부르지 말지.”
얼음처럼 차가운 말에 나는 깜짝 놀라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맞아. 나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었지.’
그래서 나도 자연스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이안 타이론은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그동안이 특별했던 거야.’
오로지 내게만, 그는 봄날의 바람처럼 따뜻한 어조로 말을 했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쪼그라들었던 마음이 다시 풍선처럼 부풀었다.
나는 이안의 손을 꽉 잡았다.
‘맞아. 이쪽이 내 현실이야.’
난 용기를 내었고, 현실은 바뀌었다. 과거의 망령이 이제 와 나타난들 내 발로 끌려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와 이안의 행동이 마음이 들지 않았는지, 제임스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안보다 훨씬 낮은 묵직한 목소리가 고요한 무도회장을 울렸다.
“내가 인장을 찍지 않은 혼인무효장이 효력이 있다는 건가?”
그 말은 웃기지도 않는 반문이었다. 이안은 비꼬듯 입술을 비틀며 되물었다.
“그럼 내가 가지고 있는 혼인무효장에 찍힌 인장은 무엇인가. 그것도 내가 위조했다고 할 셈인가?”
“…….”
이안의 반문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임스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 인장은 파넬 공작인 제임스가 직접 찍은 것이 아니니까.’
전쟁터에 있는 사람이 무슨 정신으로 도장을 찍겠는가. 그 도장을 찍은 것은 다름 아닌 제임스의 어머니들일 터.
‘보나 마나 나를 내쫓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때다 싶어서 찍었겠지.’
진상들은 나를 무척 싫어했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싫어했을 인간들이기에 굳이 상처받지도 않았다.
‘싫어하던 애가 나간다니 얼마나 고마웠겠어.’
그리고 나는 제임스를 잘 알았다. 그는 무척 효자였다.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부인도 되지 못한 자신의 어머니와, 아이를 낳지 못해 평생 가련하게 살아온 우아한 진상과 징징거리는 진상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니 인장을 자신이 찍지 않았다고 짚고 넘어갈 수 없겠지. 그랬다가는 인장 날조죄로 크게 벌을 받을 테니까.’
귀족 가문의 인장 날조죄는 최소 10년형이었다.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그런 벌을 받도록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제임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감히 가주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파넬 공작가의 인장을 남용한 죄인들은 이미 구금해두었습니다, 폐하.”
‘죄인을 구금해놓았다고?’
구금해둔 죄인이 누구겠는가.
‘설마 진상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내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있어? 다른 사람을 대신 뒤집어씌웠겠지.’
제임스가 어떤 아들인데. 내 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럼 진상들은 다 어디 갔지?’
하지만 그렇게 넘기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이런 자리라면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우아한 진상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설마…… 진짜?’
심장이 다시 불안하게 뛰었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과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무엇보다도 나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딱 하나였다.
‘제임스가 이렇게 나설 사람이었나?’
내가 아는 제임스는 누구 앞에 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장에서야 누구보다 용감한 장군이었다고 하지만, 일상에서는 나 아니면 생활이 불가능할 사람인지라 쉬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가 나섰잖아.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과연 애먼 사람에게 누명 씌우고 저리 당당하게 설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은 아니오, 였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만약 정말로 진상들을 구금한 거라면…… 절대로 날 놔줄 리 없어.’
어머니들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닌 존재였다. 그 존재를 버릴 각오까지 했다면 나를 포기할 리가 없었다.
‘무서워.’
제임스는 일상에서는 무능할지 몰라도 사냥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능한 사냥꾼이었다. 그의 무관심한 얼굴 너머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집요함이 있음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참을 수 없이 불안해한 탓일까. 이안이 내 앞으로 한 걸음 더 막아섰다. 든든한 등이 나와 제임스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안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올리비아와 나는 이미 혼례를 치른 정식 부부 사이요.”
이안의 말에 제임스의 눈썹이 다시 크게 휘어졌다.
“혼례? 남편이 없는 사이 약탈한 것이 아니고?”
“약탈? 그녀가 훔칠 수 있는 물건으로 보이는가?”
“말장난은 그만두지. 그대가 결코 떳떳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양심이 있다면 알 텐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긴 했다. 합법적으로 혼인무효장을 받아서 진행한 혼례이지만, 그림이 썩 아름답지는 않았다.
‘전쟁터에 남편이 나간 사이 아내가 다른 사람하고 결혼한 거니까.’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의아했다.
‘왜 당신이 내게 집착하지? 우린 그런 사이 아니잖아.’
이안과 제임스가 치열하게 눈싸움을 주고받을 때였다. 잠시 떨어져 있던 황제가 결국 아수라장에 끼어들었다.
“우선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군, 파넬 공작. 못 본 사이 많이 변한 것 같고.”
자칫 자신이 우스워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부드럽게 운을 떼는 모습에서 정치적 연륜이 느껴졌다.
하지만 황제가 이렇게 말하면 보통이면 수그렸을 제임스가, 이번에는 비꼬아 말하는 게 아닌가!
“죽을 위기를 넘기고 있는 사이 아내를 다른 사내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으면 누구라도 변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황제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그런 단어는 삼가도록 하지. 타이론 대공은 잘못하지 않았어. 모두 정당한 절차를 거쳤지.”
그는 한결 엄해진 어조로 말했다.
“무엇보다 그녀를 위한다면 이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욕보는 건 삼가야 하지 않겠소?”
사건을 더 크게 만들지 말고 물러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조용히 바로 잡으려 했다면 제게 기회조차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
제임스답지 않은 태도에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제임스 파넬 맞아?’
내가 아는 제임스는 저렇게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아.’
나는 굳어진 얼굴로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안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잠시간 즐거웠겠지. 이젠 내 부인을 돌려줄 차례요, 타이론 공작.”
“싫다면?”
이안의 반문에 제임스의 커다란 주먹에서 우드득 소리가 울렸다.
“힘으로 빼앗을 수밖에.”
사람이 길들일 수 없는 흉포한 야수가 으르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제임스 주변에 선 귀족들이 행여 자신을 공격할까 두렵다는 듯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안은 그에게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힘을 빼앗겠다? 아까부터 상당히 거슬리는 표현을 하시는데.”
이안은 입술을 비틀어 차게 웃었다.
“그대는 배워야 할 것 같군, 파넬 공작. 이 세상에는 되돌릴 수 있는 일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뭐라고?”
이안의 말에 제임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그는 걸치고 있던 검은 겉옷을 벗어 던졌다. 셔츠 위로도 위압적인 근육이 그 존재를 드러냈다.
“당장 겉옷을 벗고 내려오시든가. 자신 없으면 얌전히 비키든가.”
그 말에 이안도 막 자리를 박차고 나갈 듯 몸을 내밀었을 때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안의 팔을 붙들었다.
“이, 이안.”
나는 제임스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인성이, 살아온 날들이 어떠하든 간에 제임스 파넬은 강한 기사였다.
‘이안이 다칠까 봐 두려워.’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를 붙든 나를, 이안이 돌아보았을 때였다.
조용한 무도회장을 낭랑한 목소리가 갈랐다.
“무엄하오, 파넬 공작.”
바로 황태자 스타티스였다.
“더 이상의 행위는 나, 스타티스를 적대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소.”
“전하.”
황제가 나서기엔 지나치게 사사로운 일이었으니 황태자가 나선 것은 좋은 판단이었다. 스타티스는 여태 할 말을 고르고 있었던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 자리는 존엄하신 폐하의 탄생을 기리는 자리. 사적인 이야기는 따로 날을 잡아 하도록 하지. 어떤 결론이 나든 내가 공정한 참관인이 되어주겠소.”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두 남자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충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싶어질 무렵, 이안은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정신없이 이끌려 아무도 오지 않는 황족의 입장 통로로 따라왔다.
“올리비아.”
다른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안이 멈춰 서서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나를 원망하고 있진 않을까? 괜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내 머릿속도 이토록 웅웅 울리는데.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부인, 이리 오시오.”
무거운 목소리가 재차 내 귓가를 울렸다. 내 무릎이 휘청 흔들렸다. 이안이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올리비아!”
갑자기 어둠이 훅 눈을 가렸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나를 꽉 붙드는 이안의 손바닥을 느꼈다.
* * *
“올리비아!”
이안은 희게 질린 얼굴로 품에 안긴 여자를 흔들었다.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는 힘없이 흔들릴 뿐 눈을 뜰 것 같지 않았다.
“젠장.”
그 무식한 작자가.
이안이 이를 갈았을 때였다.
“하여간 네가 하는 일이 그렇지.”
저벅저벅 단정한 발소리와 함께 늘씬하게 쭉 뻗은 몸매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황태자 스타티스였다.
이안은 딱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빚을 졌군.”
“고맙다는 말은 못 해?”
“그건 파넬 공작을 완전히 쫓아낸 다음에 하도록 하지.”
이안의 차가운 시선이 쓰러진 올리비아의 얼굴로 향했다. 스타티스는 팔짱을 끼고 혀를 찼다.
“참 이상하지 않아? 두 사람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서류상의 부부였을 뿐인데, 파넬 공작은 정말 부부였던 것처럼 말한단 말이지.”
“…….”
스타티스의 말에 이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부인.”
‘그놈이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올리비아를 자다가도 뒤척이게 만드는 ‘부인’이라는 말을 사용한 남자.
‘어떻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올리비아의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니. 이안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해한다고 해서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스타티스가 불편해 보이는 이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도와줄까?”
이안은 올리비아를 번쩍 안아 올리며 대답했다.
“필요 없어.”
“밉살맞기는.”
스타티스는 입술을 비틀었다. 하여간 눈앞의 이 남자는 처음 만나서 지금까지 줄곧 비호감이었다.
* * *
스타티스는 뜨거운 여름, 이안 타이론을 기다리다가 일사병에 걸린 뒤부터 그를 싫어하게 되었다.
이안이 황궁에 들어오게 된 것은 스타티스가 한참 사춘기를 겪고 있던 열두 살 때.
황실의 장녀로 살던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자기보다 연상의 존재가 꺼림칙하기만 했다.
“귀한 손님이니 잘 대해주도록 해라.”
황제가 저렇게 명하지만 않았다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물며 기다리다가 일사병으로 쓰러지게 되다니. 이안의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생긴 건 또 왜 저래.’
이안과 스타티스의 외모는 꽤 많이 닮아 있었다. 하지만 친근감을 느끼기는커녕 반감만 들었다.
‘곱상하게 생겨가지고.’
스타티스는 삐뚜름하게 생각했다.
두 사람은 계속 자잘하게 부딪쳤다. 하지만 그 갈등이 가장 크게 터진 것은 바로 황제의 서른여덟 번째 탄신제였다.
스타티스는 그때 이미 남자처럼 바지 정장을 입고 공식행사에 참석했다. 황위계승에 여자라는 이유로 빠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 탄신제에서 잠깐 바람을 쐬러 나온 사이, 스타티스의 가장 위협적인 라이벌인 러셀 황자가 스타티스의 옷차림을 조롱했다.
“네가 그런 옷을 입는다고 남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곧 후회하게 될걸. 차라리 드레스 입고 예쁜 꽃이 되어 좋은 혼처라도 찾을 걸 그랬다고 말이야.”
너무나 갑작스레 받은 조롱이라 스타티스는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러셀 황자의 머리 위로 와인이 확 쏟아졌다.
촤악.
와인을 쏟은 것은 다름 아닌 이안이었다.
“아, 이런 실수.”
느릿하게 그렇게 말하는 이안을 러셀 황자가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러셀 황자가 그에게 달려들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하지만 말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어? 스타티스가 황제가 되면 후회하게 될 텐데.”
“이, 이!”
러셀 황자는 부들부들 떨었지만 결국 이안에게 덤비지 못했다. 덤벼봤자 힘으로 밀리는 건 둘째치고, 황제가 그를 무척 애지중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두고 보자!”
그렇게 악당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러셀 황자는 도망쳤다. 그 뒤통수를 싸늘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이안이 스타티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혼자 나오지 말아.”
스타티스는 그 손을 쳐냈다. 이안이 빤히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휙 돌리며 툴툴거렸다.
“왜 당신이 나섰어? 내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거든? 내가 새삼 당신에게 감사할 줄 알아?”
그렇게 말을 내뱉고 나서야 스타티스는 그동안 품었던 자신의 마음을 알았다.
바로 열등감이었다.
‘아바마마는 이 사람은 무조건 다 사랑하시지.’
자식조차도 정치판에 이용해먹는 사람이 황제였다. 그에게는 가족도 그저 정치의 무게추를 이리저리 기울이며 이권을 뺏는 데 이용할 도구일 뿐.
하지만 오로지 이 남자만은 달랐다. 아무 이유 없이 황제는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
정말 가족처럼.
‘내 마음속에 이런 더러운 감정이 있었다니.’
하지만 스타티스의 꼬인 마음을 알 리 없는 이안에게는 실컷 도와줬더니 화풀이를 당하는 꼴이었다. 그는 턱을 굳히며 고개를 휙 돌렸다.
“괜한 호의를 베풀었군.”
“호의라고? 내가 당신보다 못하다는 거야?”
“마음대로 생각해.”
이안은 휙 돌아섰다. 그 모습이 꼭 스타티스의 눈에는 황제의 총애를 자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속에 품고 있던 격한 말들이 툭 튀어나왔다.
“네 앞가림이나 잘하시지. 오갈 데 없어서 황궁까지 밀려온 주제에!”
그 말에 이안의 푸른 눈에 팍 불꽃이 튀었다.
“너야말로 말조심해. 네가 나보다 뭐가 잘나서 든든한 부모 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알아?”
여태, 한 번도 감정을 분출한 적 없던 그가 스타티스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넌 그저 운이 좋을 뿐이야!”
그제야 스타티스도 깨달았다. 자신이 이안을 질투하듯, 이안 또한 자신을 질투하고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