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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가족들끼리 인사라고 하기엔 스케일이 좀 (7/28)
  • 2장. 가족들끼리 인사라고 하기엔 스케일이 좀

    타이론 공작가는 꽤나 살풍경한 인테리어를 가지고 있었다. 이 나라 최고의 독신남의 집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어색하지 않은 삭막한 인테리어였으나, 이제는 독신도 아니고! 인테리어를 적당할 때마다 교체할 안주인도 있고!

    ‘역시 돈이 최고다.’

    그리고 사실 나도 무척 즐거웠다. 이건 무슨 보물이고, 이건 무슨 사연이 있는 그림이고, 훈수를 두는 사람 없이 내 마음대로 척척 가구와 벽지를 배치하고 있으니 마음이 얼마나 시원하던지.

    ‘이 맛에 이안도 여기서 본 거 전부 줘!를 외치는 건가.’

    그리고 그동안 아무도 인테리어를 건드리지 않아서 쌓인 재정이 넉넉했다. 내가 집을 전체 다 뒤집어도 끄떡도 없을 정도로 말이다.

    ‘기왕 애니도 살게 되었으니 아늑한 분위기로 방을 바꾸어야지.’

    이안이 흔쾌히 애니를 머무르게 해주었고, 그런 걸로 생색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애니와 이안이 남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최대한 두 사람의 동선을 겹치지 않게 배치해서 서로의 사적 공간을 지켜줄 생각이었다.

    ‘특히 지난번 같은 일은 사양이야.’

    애니가 다짜고짜 나를 이안의 방에 밀어넣었던 날을 떠올리면 저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앞으로 애니랑도 같이 자지 말아야지.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그날, 그 밤을 떠올리니 저절로 이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낮고 부드러운 음성도.

    “잘 자요, 올리비아.”

    ‘으으으, 진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귀를 박박 긁고 싶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그윽한 음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를 때면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 일었다.

    ‘왜 그 사람만 이렇게 특별할까.’

    머리까지 열이 오르는 것 같아서 나는 콩 하고 머리를 책상에 박았다. 버석한 종이의 질감이 한쪽 뺨을 간질였다.

    ‘참을 수 없이 신경 쓰이고, 목소리만 들어도 긴장되고, 눈도 못 마주치겠고.’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나는 양손으로 내 팔을 감싸 안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역시 이 감각은…….’

    바로 그때였다.

    벌컥!

    “올리비아!”

    “아이고!”

    두근거리기 무섭게 내가 떠올리고 있던 그 남자가 벌컥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벌렁거렸다. 나는 손바닥으로 가슴께를 부여잡고 허덕거렸다.

    ‘으아, 진짜 놀랐다.’

    꼭 내 머릿속에서 남자가 불쑥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내가 하얗게 질려서 그를 바라보자, 그는 그제야 어깨를 수그리고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미안해요, 깜짝 놀랐습니까?”

    “당연하죠! 노크는 이럴 때 하는 거라고요.”

    “당신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어서. 그런데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습니다. 앞으로 조심하도록 하죠.”

    “…….”

    성질이 났는데, 풀죽은 강아지처럼 축 처진 눈을 보고 있으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면서 살짝 시선을 내렸다. 놀라서 희게 질렸던 얼굴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리니 그가 들고 있는 둥근 은색 쟁반이 보였다. 가위와 천보도 함께였다.

    “그게 뭐예요?”

    “뭘까요?”

    내 질문에 그가 가볍게 가위를 들고는 철컹철컹거렸다. 저런 작은 가위를 어디에 쓰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미용 가위였다.

    문제는 왜 그 가위를 저 남자가 들고 왔느냐인데!

    “……설마 당신이 직접 내 머리를 자르려고요?”

    “이렇게 보여도 손재주가 좋답니다. 한번 믿어보시죠.”

    설마설마했더니 진짜였나!

    ‘쇼핑에 이어 미용까지.’

    여러모로 내가 가지고 있던 남성에 대한 이미지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니, 얼굴은 세상 시크하게 생겨가지고.’

    왜 결혼 전에 저 남자를 무뚝뚝하고 과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나는 당당하게 가위를 들고 들어오는 이안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못 미더운데.’

    아니, 그래도 사람이 취미와 특기는 엄연히 다른 것 아니겠는가. 하물며 단발은 촌스러움과 세련됨이 한 끗 차이였다. 검증도 되지 않은 이안에게 맡기기에는 내 담이 좀 작았다.

    그래도 직접 하겠다고 찾아왔는데 딱 잘라 거절하면 마음에 상처를 크게 입을 것 같아서, 나는 에둘러 거절의 말을 던졌다.

    “당신 바쁘잖아요. 이런 건 아랫사람에게 시켜요.”

    그랬더니 성큼 다가온 이안이 내 머리카락 한 가닥을 쥐더니 그 끝에 입술을 맞추는 게 아닌가.

    “아내의 목덜미에 다른 사내의 손길이 스치는 건 달갑지 않아서요. 어리석은 사내의 독점욕이라고 생각하시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입으로 어리석다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리 대답하며 나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서 그의 손에서 빼내었다. 잠깐 잠잠했던 심장이 다시 콩콩 빠르게 뛰었다.

    ‘아니, 진짜 유혹이 본능인가 봐. 그동안 어떻게 참았대.’

    그냥 아내의 머리를 잘라주고 싶다고 말하면 되지, 독점은 또 뭔 소리야. 괜히 심장 부정맥 걸리게.

    나는 슬쩍 그를 노려보았다.

    그건 그렇고.

    ‘머리라.’

    머리를 자르는 것에는 큰 거부감이 없었다. 물론, 짧은 머리를 해본 적이 없기는 하지만.

    ‘기분 전환이 될지도 모르지.’

    새로운 삶을 사는 김에 머리 스타일을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머리는 다음에 잘라요, 우리.”

    “역시 제가 못 미더워서…….”

    “그런 것보다 폐하의 탄신제가 가까워서요.”

    머리를 싹둑 자르기에는 앞에 놓인 큰 공식 행사가 있었다.

    “첫 행사니까 가장 자신 있는 모습으로 서고 싶어요.”

    내가 맞춘 드레스는 머리가 긴 내 얼굴에 가장 최적으로 잘 어울리는 색과 형태들이었다. 머리를 잘라서 이미지가 달라지면 또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행사를 잘 끝내고 난 뒤에 잘라도 충분하니까.’

    내가 타이론 공작부인으로서 첫 행사이니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내가 진지하게 다짐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이안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럼 우리 사이좋게 무슨 옷을 입을지 골라볼까요.”

    “네?”

    탄신제는 거대한 무도회니까, 부부가 보통 드레스코드를 맞추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직접 고른다고?’

    보통 아내가 일방적으로 고르거나 재단사가 추천하는 걸 입지 않나.

    ‘보면 볼수록 특이한 사람이야.’

    나는 또 내게 은근슬쩍 찰싹 달라붙은 이안을 밉지 않게 흘겨보며 말했다.

    “진짜 그런 거 좋아하네요. 어릴 때 인형 놀이 같은 거 안 했어요?”

    “아무 여자나 옷 갈아입히는 취미 없습니다. 당신이니까 좋아하는 거죠.”

    “또, 또, 팔불출 같은 소리.”

    내 불퉁한 대답에 이안이 반박하려고 입술을 막 벌렸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울리더니 집사의 단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마님, 주인님, 황궁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아.”

    나와 이안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서둘러서 황실에서 황제의 친서를 들고 온 신하를 만나기 위해 내려갔다.

    서신의 내용은 간결해서 답신을 그 자리에서 보내기에 어렵지 않았다.

    -이번 주 목요일, 황후궁에서. 참석자는 황태자와 알키저스 백작 영식, 그리고 타이론 공작 부부.

    알키저스 백작 영식이 누구인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바로 떠올랐다.

    ‘로메오.’

    내 친구.

    ‘역시 이번 생에도 스타티스 황태자의 반려가 되는구나.’

    별 이변이 없다면 똑같이 황후 자리에 오르겠지.

    ‘오랜만에 얼굴을 볼 수 있겠네.’

    연한 푸른색 머리카락에 주홍색 눈을 가진 내 친구를 떠올리며, 나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 * *

    로메오 알키저스는 알키저스 백작가의 삼남이었다.

    늦둥이라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컸는데, 가문을 이을 형들과 달리 아카데미를 수료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덕분이었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만났지.’

    솔직히 아카데미의 수업은 재미도 없고 지루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유일하게 건진 게 있다면 바로 친구.

    올리비아 플로렌스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친구였다. 그냥 한숨만 쉬어도 속내를 읽을 수 있는, 그 정도로 잘 맞는 사이.

    ‘올리가 요즘 좀 이상해 보였는데.’

    새침한 듯 얌전한 성품이었는데, 파넬 공작과 떠밀리듯 결혼한 뒤로는 사람이 휙 달라졌다.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나.’

    타이론 공작과의 염문을 내달라니. 처음에는 얘가 제정신으로 이런 말을 하나 싶었다.

    ‘하지만 정말 타이론 공작과 결혼할 줄은 몰랐어.’

    주고받은 편지가 단편적이라, 그녀가 파넬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로메오는 알지 못했다.

    그냥 이렇게 무리한 일을 저지를 정도로 괴로웠나 보다, 정도.

    ‘처음에 이걸 다 들어주는 게 정말 옳은 일인가 싶었는데.’

    로메오는 가장 최근에 받은 올리비아의 편지를 펴보았다. 편지에는 조금 망설인 듯 동그랗게 고인 잉크 자국과 함께 한 줄이 간결하게 적혀 있었다.

    -이안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며칠 동안 지난하게 이어지던 걱정은 그 한 문장으로 끝이 났다.

    로메오는 올리비아를 알았다. 쉽게 누군가를 단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로메오가 가지고 있던 편지를 정리했을 때였다. 어쩐지 창백한 안색의 집사가 로메오를 찾아왔다.

    “도련님,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도대체 누구냐고 물으려고 했을 때였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커다란 몸을 가진 사내가 집사의 어깨를 붙들고 휙 밀치며 들어왔다.

    ‘뭐, 뭐야? 곰인가?’

    가무잡잡한 얼굴, 이리저리 뻗친 검은 머리카락,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얼음송곳 같은 눈동자가 심장까지 섬뜩하게 했다.

    성큼 다가온 그는 로메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었다. 위압감에 로메오는 혀를 깨물 뻔했다.

    “아니, 당신은…….”

    “처음 만나 뵙겠소.”

    처음 뵙는다면서 로메오의 얼굴을 지긋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사내는 거칠고 퍼석한 입술을 열어 말했다.

    “제임스 파넬이오.”

    바로 올리비아의 전남편이었다.

    ***

    시간은 훌쩍 흘러서 황제가 초대한 가족 모임 날이 되었다.

    ‘황후 마마 건강이 별로 안 좋으시니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시지는 않을 거야.’

    지난 생에도 황후는 대외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빠르게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외부에는 스타티스 황태자가 빨리 황위를 물려받은 데에 황후의 건강 문제도 있다는 이야기가 안개처럼 퍼졌었다.

    ‘가족 모임이니 옷은 단정하게 입고.’

    이안과 전날 고른 옷은 과감하게 옷장에다가 다시 넣었다. 선명한 산호색이었는데, 가슴이 깊게 파이고 러플이 가득한 디자인이라 지나치게 발랄했다.

    ‘이안은 이런 디자인을 좋아하더라. 정숙한 공작부인 이미지에는 어울리지 않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귀에 오팔 귀걸이를 막 채우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나더니 이안의 목소리가 울렸다.

    “접니다.”

    “네. 다 되었어요. 나가요.”

    문을 열자, 진한 적색 정장을 빼입은 이안이 서 있었다. 그는 단정한 남색 일색인 내 옷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고른 옷은 이게 아니었던 거 같은데.”

    ‘예리하긴.’

    제임스는 내가 어제랑 똑같은 옷을 입었는지 어쨌는지도 몰랐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가족 모임에 파티드레스를 어떻게 입고 가요. 돌아오는 길에 인형 사줄 테니까 걔 옷이나 갈아입혀요.”

    “너무해.”

    이안은 낙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냥 그의 팔을 잡아끄는 것으로 말을 잘랐다.

    ‘이 남자의 잘생긴 얼굴과 정중한 징징거림에 넘어가면 한도 끝도 없다고.’

    우리가 앉자마자 마차는 바로 출발했다. 나는 시가지를 내다보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로메오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을까? 나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로메오에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다.

    ‘하지만 이야기하기 쉽지 않겠지. 로메오도 스타티스 황태자와 약혼이 머지않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딱딱한 손가락이 말랑한 내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이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피 나겠어요.”

    “아.”

    그제야 나는 초조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안의 손을 밀어내며 살짝 뺨을 붉혔다.

    “조금 떨리네요.”

    “거짓말.”

    적당히 대답한 말에 이안이 제법 예리하게 치고 들어왔다.

    “당신은 그런 걸로 긴장하지 않죠. 조금 들뜬 것이라면 모를까.”

    괜히 뜨끔한 나는 목에 힘을 주고 입술을 삐죽이며 되물었다.

    “제가 들뜰 일이 뭐가 있어요?”

    그런데 대답이 또 묘했다.

    “모르죠. 오늘 가족 모임에 나올 사람이 보고 싶다든가.”

    ‘혹시 로메오가 나를 돕기 위해 이안과 나의 스캔들 노래를 퍼뜨렸다는 걸 알고 있나?’

    직감적으로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반짝반짝거리는 푸른 눈을 본 순간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다면 결혼했을 리가 없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그 사실을 알고도 따지기는커녕 순순히 넘어갈 리가 없다.

    ‘내가 너무 과민한 걸 거야.’

    그리고 로메오와 나는 철저하게 서신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는걸. 어디선가 내용이 유출될 일도 없었다.

    곤두선 내 신경을 어르기라도 하듯, 이안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스타티스 황태자 때문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요. 퉁명스럽지만 착한 아이거든.”

    ‘역시 내가 과민했나 봐.’

    그리 생각하며 나는 피식 웃었다.

    “잘 알고 있나 봐요.”

    ‘스타티스 황태자.’

    지난 생에서 나는 그녀를 보아 알고 있었다. 냉철하고 과감한 정치 스타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걸 퉁명스러운데 착한 아이라고 칭하다니.’

    황제의 태도도 그랬지만, 역시 이안은 황가 식구들과 무척 막역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그냥 사촌이라고 하기엔 너무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

    내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을 때였다. 이안이 턱을 괴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잘 알긴 아는데, 솔직히 좋은 사이는 아니죠.”

    “?”

    좋은 사이는 아니라니.

    어쩐지 꺼림칙한 한마디였다.

    * * *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차에서 내리자 황제의 시종이 직접 우리를 모임 장소까지 안내해주었다.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한 정원에 흰 테이블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한 사람이 이미 먼저 앉아 있었다.

    순금을 녹인 것같이 진한 금빛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은 자신만만한 표정의 여성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바로 황제의 적통 장녀, 스타티스 황태자였다.

    “오랜만이오, 타이론 공작. 그리고 그대가 타이론 공작부인?”

    바다처럼 파르스름한 눈동자가 찔리는 것처럼 선명했다. 그녀는 턱을 괴고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해서 미안하게 되었소. 대외 행사와 날짜가 겹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오.”

    황태자가 그때 당시 중요한 공무로 국외에 있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다이아몬드 홀에서 치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자손 대대로 영광이었는걸요.”

    적당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황태자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그녀의 붓으로 단숨에 그린 것같이 길게 뻗은 눈썹이 크게 휘어졌다.

    “그 소식에는 나도 조금 놀랐소. 부황께서 타이론 공작을 아낀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설마 다이아몬드 홀까지 열어줄 줄이야.”

    ‘뭐야, 이 분위기.’

    워낙 상대가 강직한 이미지라서 그렇게 안 들릴 뿐이지, 묘한 비꼼이 가득한 말이었다.

    ‘심지어 자리에 앉으라는 말을 안 하고 있잖아.’

    나와 이안은 여전히 그녀의 앞에 서서 그녀가 앉으라고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진짜 사이가 안 좋은 거냐?’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 잘생긴 남자는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고 서서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 아닌가.

    “뭐, 새삼.”

    아니, 불난 데에 기름 붓기냐고!

    빠직.

    스타티스 황태자의 이마에 힘줄이 솟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한결 뾰족해진 어조로 말했다.

    “오호라. 지금 그런 말로 부황의 호의를 퉁 치시겠다?”

    “폐하께서 소신을 자식처럼 사랑하시는 게 사실인데 굳이 겸양을 떨 필요가 있습니까?”

    “결혼하고 철이 들었나 했더니 오만방자한 태도는 여전하시군.”

    “그렇게 말씀하시는 황태자께서는 참 많이 변하셨군요. 드레스 입고 걸려 넘어져서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다고 앙앙 울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내가 잊으라고 명하지 않았소!”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고 하셔도 사람의 기억은 지울 수 없습니다.”

    “이익.”

    이안의 뻔뻔한 대답에 스타티스 황태자는 조금 더 격앙된 태도로 말했다.

    “나라고 공의 수치스러운 과거 하나둘 모르는 줄 아시오? 내가 공보다 에스페란어를 잘 쓰니까 삐져서 몰래 숙제 한 장을 숨겼었지.”

    “전하께서 잃어버리신 걸 왜 제 탓을 합니까.”

    “그게 아니고선 공이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사라지던 것이 설명이 될 리가 있나.”

    두 사람의 다다다 이어지는 대화에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저기, 그러니까…….”

    꼭 남매처럼 똑같은 푸른 눈이 나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 분은 어릴 때부터 무척 친한 사이시라는 거군요?”

    “절대 아닙니다.”

    “절대 아니오.”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고만.

    ‘이렇게 어린 시절을 속속들이 아는데 뭐가 안 친해. 생긴 것도 비슷해서.’

    이안보다 스타티스 황태자의 머리카락이 조금 더 색이 짙은 금발이었지만, 두 사람은 비슷했다. 입을 꾹 다물면 무척 퉁명스러워 보이는 점이라든가.

    ‘……설마 정말 배다른 남매는 아니겠지?’

    두 사람의 나이는 이안 쪽이 아슬아슬하게 두 살 더 많았다. 스타티스가 황태자가 되는 게 가장 큰 이유가 적통의 장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배다른 남매라는 가정은 무척 큰 파장을 불러올 수도 있다.

    ‘설마! 그런 소설 같은 일이 있진 않겠지.’

    나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버렸다. 아무리 막장인들 그런 일이 있을 리가.

    바로 그때, 스타티스 황태자가 팔짱을 끼며 입술을 비틀었다.

    “화이트폴 후작저에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을 텐데.”

    “스타티스.”

    황태자의 말에 이안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그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하지 않는 나도 몸이 흠칫 떨릴 정도였는데, 정작 황태자는 입꼬리를 올려 고양이처럼 웃었다.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텐가? 어릴 때처럼 발이라도 걸게?”

    황태자의 말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런 짓도 했었냐.’

    모르긴 몰라도 유년 시절의 긴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은 분명해 보였다. 사이가 썩 좋지 않은 편이라는 점도.

    ‘아니, 그럼 나랑 로메오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지난 생에서야 파넬은 황제에게도 꼭 챙겨야 하는 파벌이니, 나와 로메오도 친근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안과 황태자가 사이가 좋지 않다면?

    ‘친하게 교류하는 것 자체를 고까워할 수도.’

    이런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태자와 이안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생김새가 비슷한 두 사람인지라, 꼭 거울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결국 기나긴 눈싸움에서 져준 것은 이안이었다. 그는 노려본 게 언제냐는 듯이 유들유들한 어조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늘따라 짓궂으시군요.”

    ‘엥? 갑자기?’

    황태자고 뭐고 거침없이 노려보던 사람이 갑자기 멀쩡한 척을 하고 있으니 이상했다.

    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릴 때였다. 황태자가 턱을 괴고 내게 말했다.

    “이렇게 쪼잔하고 뒤끝이 긴 음험한 남자를 데리고 사느라고 애쓰오, 공작부인.”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쪼잔하고 음험하다고?

    차라리 그런 사람이었으면 내 마음이 편했을까. 나는 한숨 섞인 어조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안은 좋은 사람입니다.”

    내 말에 이안이 나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꼿꼿하게 스타티스 황태자를 응시했다.

    그녀가 어쩐지 재미있어하는 듯,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제수씨!!”

    “컥!”

    내가 긴장할 틈도 없이, 등 뒤에 명랑쾌활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랜만에 들으니 또다시 적응이 안 되네!’

    이 세상에 나를 제수씨라고 부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는 얼른 무릎을 굽히고 떨리는 목소리로 화답했다.

    “화, 황제 폐하를…….”

    얼마 전에 만났던 흰 만두 같은 얼굴의 황제가 나를 향해 두 손을 펼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손수 내 팔을 붙들어 몸을 일으켜 세우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우리 제수씨. 굳이 그렇게 예를 차리지 않아도 좋아. 귀한 아기를 품었을지도 모르는 몸인데.”

    “컥!”

    두 번째 충격이었다.

    ‘아, 아기?’

    아니, 물론 남녀가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이루면 아기도 낳고 그렇게 살긴 하는데.

    ‘하지만 이렇게 면전에 대놓고 아기 타령은 아니지!’

    뭣보다 우리는 아기를 가질 생각이 없단 말이다.

    이안이 그때 나와 황제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는 나를 자신의 등 뒤로 감추며 말했다.

    “폐하, 그런 말씀은 자중하시는 편이…….”

    하지만 그 말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황제의 등장에 자리에서 일어난 황태자 스타티스가 빙글빙글 웃으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왜요? 자식같이 공작을 아끼는 마음에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죠.”

    뿌득.

    이안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무서운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잦은지, 스타티스는 여유롭게 웃어넘겼다.

    그때 황제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뭐야. 임신한 거 아니었나?”

    당연히 임신으로 확신한 투였다. 나는 나대로 기가 막혀서 되물었다.

    “절대 아닙니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내가 제수씨를 보고 싶어서 그동안 타이론 가문으로 그렇게 편지를 보냈는데도 이안 저 녀석이 다 튕겨냈거든. 제수씨가 몸이 좋지 않다면서.”

    ‘그런 짓도 했냐.’

    나는 이안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탓하려는 건 아니었다. 내 대신 거절해줬다니 감사한 일이었다.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소름 끼치게 천진난만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몸이 안 좋다니 역시 임신이 아닐까.”

    ‘그게 뭐야!’

    몸이 아파서 입궁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그렇게 곡해하다니, 이쯤 되면 망상이었다.

    ‘제발 그런 관심은 꺼주시면 안 되나요!’

    목 끝까지 그런 말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상대가 황제라 참았다. 황제는 정말로 그렇게 믿은 것인지 축 늘어진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당연히 그럴 줄 알고 축하선물까지 준비했는데 필요 없어졌군.”

    시댁(?)에서 이런 행동을 할 때 나를 감싸줄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남편이다.

    그리고 이안은 대단히 눈치가 빠른 남편이었다. 그는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빙긋 웃었다.

    “감사하지만, 저희는 신혼을 더 즐기고 싶답니다. 자녀계획은 아직 없지요.”

    당분간 아이 가질 생각이 없다고 에둘러 밀어내는 말이었다. 내가 속으로 ‘잘했어!’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스타티스 황태자가 또 한 방 날렸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가 있나. 정말 아기를 만들 수 없는 몸일 수도 있지.”

    요컨대 너 정말 고자 아니냐는 뜻이었다. 설마 황태자가 이런 성품일 줄 몰랐던 나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세, 세다.’

    허나 이안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 공격을 되돌렸다.

    “그 선물은 그대로 황태자 전하께 드리면 되겠군요. 곧 결혼하실 테니까요.”

    뿌득.

    이번에는 저쪽에서 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역시 저쪽도 당분간 아이를 가질 마음이 없나 보구나.’

    꽤 오랫동안 스타티스와 로메오의 사이에도 아이가 없었다. 감히 황제에게 불임이냐는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로메오가 시달렸던 기억은 난다.

    ‘아무래도 안정적인 치세를 위해서는 가지기가 어렵겠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황제는 온화하게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말이 나왔으니, 소개하도록 하지.”

    그가 손을 편 곳에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평균적인 키에, 마른 편인 몸, 순하고 지적인 인상을 가진 푸른 머리카락에 주홍색 눈을 가진 남자였다.

    “장래 황후가 될 로메오 알키저스 영식이라네.”

    바로 내 친구 로메오였다.

    * * *

    황후는 건강을 핑계로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부럽다.’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

    “…….”

    가족 모임은 지나치게 말이 없었으니까.

    ‘사실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나는 황태자를 처음 보았고, 이안은 로메오를 처음 보았다.

    ‘그렇다고 황제 폐하께서 계신데 아까처럼 한가롭게 어린 시절 폄훼하기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 보니 묵직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로메오의 긴장한 얼굴을 보던 나는 결국 어렵사리 운을 떼었다.

    “전하와 알키저스 영식께서는 오늘 처음 만나시는 건가요?”

    “얼굴은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황태자는 순순히 입술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걸 그랬다.

    황태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보들은 중신들이 추려주었고, 그중 한 명을 내가 골랐지. 후보 중 나랑 머리색이 다른 사람이 이 남자뿐이었거든.”

    “네?”

    “머리색이 다른 사람이 이 남자뿐이었다고.”

    “…….”

    ‘아니, 우리나라 황족들, 너무 결혼을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아버지는 생일로 반려를 뽑더니, 이쪽은 머리색으로 뽑았단다.

    나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로메오를 바라보았다. 로메오 또한 이유를 처음 듣는 것인지, 살짝 희게 질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머지 두 후보는 후궁으로 들어왔던 거 같은데.’

    여자 황제라고 해서 혼인동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스타티스도 나중에는 황후 로메오 말고도 많은 남자 후궁을 두었다.

    그러니 저절로 이런 걱정이 들었다.

    ‘로메오는 그런 결혼으로 괜찮은 건가?’

    희게 질려서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친구를 보니 내 마음도 선득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황태자가 우리 부부 쪽으로 화살을 돌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슨 이유인들,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결혼한 타이론 공작 부부만 하겠는가.”

    뼈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왜 이렇게 적대적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의에 내가 이맛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이안이 내 손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저희야 뜨거운 열애 끝에 결혼했지요.”

    “이안.”

    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담 크게 나와 그의 연애 스토리를 날조하려는 건가 했더니만, 그는 피식 비웃음을 날리는 게 아닌가.

    “뭐, 사랑 따윈 전혀 모르는 전하께선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아니, 너희끼리의 신경전은 그만둬줄래.’

    스타티스와 이안의 한 방씩 주고받기가 계속되니 이젠 긴장이 되다 못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을 지경이었다.

    로메오도 다르지 않은지, 이제는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안색이었다.

    ‘으으, 가엾은 내 친구. 뭐라고 한마디라도 붙여줘야 하는 건가.’

    사람을 불렀으면 한마디 말이라도 하게 해줘야지. 지나칠 정도로 예를 따지는 데다가 소심한 편인 로메오는 이 매운맛 대화에 맞장구조차 치지 못하고 있었다.

    ‘쟤도 참. 앞으로 계속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야 할 텐데, 담이 약해서 큰일이야.’

    황태자와 로메오의 부부 생활이 안 봐도 훤히 보였다. 내가 혀를 끌끌 찼을 때였다.

    대화에서 소외되어 존재마저 잊힐 지경이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요즘 재미난 것을 꾸미고 있더구나? 백화점이라고?”

    최근 몰두하는 사업 이야기가 나오니 저절로 신경이 곤두섰다. 황제는 차를 호로록 마시며 물었다.

    “네가 요구한 거라 인가는 내주었지만……. 과연 장사가 될 거라고 생각하느냐.”

    장사가 될 것인가.

    ‘원래도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지. 실제로 시작할 때는 점포가 대부분 비어서 시작했고.’

    사실 대단한 도박이었다. 건물주는 불패라고 하지만, 사실 건물 상권이 죽으면 수습이 불가능하고, 손실도 크니까.

    결국 이 상황에서 사업이 끌어가지는 것은 오로지 될 거라는 내 말 한마디뿐이었다.

    ‘이 사람은 정말 내 말을 믿는 걸까.’

    문득 그게 궁금해진 나는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불안을 읽은 것처럼 내내 무뚝뚝하던 이안이 빙긋 마주 미소 지어주었다. 그리고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제 아내가 된다고 했으니 잘될 것입니다. 원래 인생은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풀린다고 하니까요.”

    “세 여자?”

    “어머니, 아내, 딸이요.”

    그는 내 손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나를 바라보는 푸른 눈이 설탕처럼 달았다.

    “제게는 아내밖에 없으니, 아내 말을 세 배로 잘 들어야지요.”

    아니, 좋은 말인데. 날 존중해주고, 아끼는 말이니까. 그렇긴 한데.

    ‘왜 이렇게 부끄럽지.’

    당장 앞에 놓여 있는 쿠키를 쥐어서 저 나불거리는 입에 넣어주고 싶었다.

    ‘으아, 로메오까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어.’

    나는 빨개진 얼굴에 살짝 부채질을 했다. 하지만 이 닭살 돋는 멘트가 마음에 들었는지, 황제는 껄껄 웃었다.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여기서 끝났으면 그래도 괜찮았을 텐데. 황제는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물었다!

    “그래, 백화점 이름이 뭐라고?”

    ‘으악! 그건 안 돼!’

    더 이상의 부끄러움을 감수할 마음이 없었던 나는 이안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안의 대답이 더 빨랐다.

    “마티니입니다.”

    “마티니? 그 올리브가 올라가 있는?”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던 황제의 눈이 내 얼굴에서 멈췄다. 내 얼굴은 이제 장미처럼 새빨개졌다.

    ‘이런 건 왜 이렇게 빨리 알아듣는 건데!’

    나도, 케닌도 마티니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올리브를 떠올리지 못했는데, 왜 이렇게 황제는 빠르게 떠올렸단 말인가!

    로메오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우릴 바라보았고, 스타티스 황태자는 들고 있던 찻잔을 엎질러 버렸다.

    “…….”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안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뻔뻔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부러우시면 지는 겁니다, 전하.”

    “이 표정을 보고 부럽다고 해석하다니 자의식이 부럽군, 공작.”

    황태자의 말에 이안이 또 뭐라고 말대답을 하려 입술을 열었을 때였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안.”

    “네, 올리비아.”

    태양 아래, 태양의 신이 강림한 것처럼 찬란한 미모가 빛을 발했다. 하지만 이미 심장이 넝마가 될 정도로 수치심을 느낀 내 눈에는 전혀 잘생겨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이를 갈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입 좀 다물어요.”

    “……예.”

    그는 내가 심히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인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테이블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려는데 황제 보좌관이 다가와서 뭐라고 황제에게 속삭였다.

    황제는 껄껄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젊은 사람들끼리 이야기가 잘 통하나 보구나. 나는 이만 물러가보마.”

    아니, 이런 불편한 모임을 주선해 놓고 가긴 어딜 가!

    하지만 잡을 새도 없이 그는 훌쩍 일어나버렸다. 만두 같은 풍채와 어울리지 않는 날쌘 행동이었다.

    그래서 결국 테이블에는 더더욱 불편한 사람들만 모였다.

    ‘이게 무슨 가족 모임이야!’

    다행히 답답한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황태자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뭐하겠소. 조금 걷지?”

    덕분에 우리는 답답한 테이블을 벗어나 정원을 걷게 되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백배 나은 게 당연했다.

    ‘역시 황궁이네.’

    타이론 가문의 화원도 무척 대단하지만 역시 황궁에는 비할 수가 없었다.

    ‘검은 나비란이라니, 처음 봐.’

    그렇게 내가 하나하나 꽃을 보며 걷고 있을 때였다. 이안이 내 곁에 와서는 슬쩍 물었다.

    “올리비아, 화가 많이 났습니까?”

    나는 그에게 빙긋 미소 지어주며 대답했다.

    “네. 그러니까 말 걸지 말아요.”

    사실 이렇게 성질을 낼 건 아니었다. 남편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 좋다고 큰 소리로 말하는데 왜 화를 내겠는가.

    ‘하지만 부끄러운걸!’

    너무 무뚝뚝한 남자를 데리고 살아서 그런가, 이안의 다정다감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적응이 되질 않았다.

    심지어 그걸 다른 사람에게 하다니!

    ‘그러니까 혼자 생각을 정리하게 내버려 둬!’

    솔직히 말하면 지금 이안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도 수줍었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허리를 굽혀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내 아내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그만.”

    “입 다물라고 했죠.”

    혼자 마음을 가라앉히게 내버려 두라니까!

    내가 축 늘어진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휙 돌렸을 때였다.

    우리보다 조금 앞서서 걷고 있던 스타티스 황태자가 팔짱을 끼고 빈정거렸다.

    “집요한 남자는 인기가 없다네, 공작.”

    “이게 누구 때문인데…….”

    황제도 자리를 떠났겠다, 두 사람 사이에는 본격적인 설전이 붙었다. 이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황태자에게 뭐라고 이야기할 때였다.

    마침 이안보다 커다랗게 자라난 울타리 나무 옆으로 꺾이는 길이었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이안의 뒤를 따르는데, 커다란 손이 나를 뒤에서 휙 낚아챘다.

    “헛!”

    황궁에서 누가 이런 위해를 가할 수 있단 말인가. 상상도 못 한 일에 내가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졌을 때였다. 익숙한 얼굴이 나를 향해 검지를 세워 보였다.

    “쉿.”

    “로메오?”

    바로 내 친구 로메오였다. 그는 미안한 듯 뺨을 붉히며 말했다.

    “잠시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우리 둘이 이야기하기에는 다소 분위기가 딱딱하긴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우리 둘만 뒤처지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지 않은가.

    ‘이렇게 무리수를 둘 사람이 아닌데.’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로메오를 바라보았다. 로메오는 나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행복해, 올리?”

    ‘왜 이런 걸 묻는 거지?’

    모든 것이 다 이상했다. 여태 불편해하던 로메오가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까지다. 하지만 나는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타이론 공작부인의 삶은, 파넬 공작부인의 삶과 조금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는 내가 큰소리를 낼 필요도, 세 보이려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마음이 편안한 생활이라면.

    “난 행복해.”

    “하…….”

    내 대답에 로메오는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로메오는 조금 빠른 어조로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했다.

    그 말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네 전남편이 수도에 있어.”

    “제임스가?”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텐데…….’

    한참 변방을 지켜야 할 상황인데 그가 어떻게 수도에 있단 말인가.

    좀 더 캐묻고 싶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로메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조심해.”

    “자, 잠깐만, 로메오.”

    나는 나를 두고 일어나려는 로메오의 팔을 꽉 붙들었다. 목소리가 다급하게 흘러나왔다.

    “너는 괜찮아? 내가 도울 것 없어?”

    내 말에 로메오의 주홍색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러더니 그는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야, 어떻게 하든 결국 이 신세일 텐데, 뭘.”

    로메오의 사정은 내가 잘 알았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황태자와 결혼을 하는지도.

    하지만.

    “나는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가정을 꾸렸으면 좋겠어.”

    나는 로메오도 행복했으면 했다.

    내 대답에 로메오는 눈을 가느다랗게 휘며 웃었다.

    “고마워, 올리.”

    어쩐지 서글픈 미소였다. 내가 재차 그렇게 대답만 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보라고 다그치려고 할 때였다.

    내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안이었다.

    “무슨 일이죠, 알키저스 영식?”

    그렇게 묻는 이안의 목소리가 어쩐지 으스스했다. 로메오는 성큼 내 곁에서 뒤로 물러나며 대답했다.

    “공작부인께서 넘어지셔서 부축했을 뿐입니다.”

    “앗, 이런.”

    로메오의 말에 이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괜찮나요, 올리?”

    ……다 들었구나, 이 남자.

    * * *

    우리는 황실 정원을 가로질러 잘 관리된 유리온실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서부터는 따로 움직이지.”

    그렇게 말한 황태자 덕분에 온실 안에서 나와 이안 둘이 걷게 되었다.

    온실 안에는 아까 정원에서 본 것보다 훨씬 진귀한 꽃들이 많았으나, 내 눈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제임스가 수도에 있다고?’

    나는 멍한 표정으로 온실 어드메를 응시하며 아까 로메오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럴 리가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질 않았다.

    ‘과거에도 그는 10년 동안 한 번도 수도에 온 적이 없는걸. 그리고 설령 왔다고 해도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어.’

    제임스가 왔다면 진상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동네방네 자랑했겠지. 특히 나에게.

    ‘로메오가 잘못 알고 있는 걸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 결론뿐이었다.

    그리고 막말로 오면 어쩔 건가.

    ‘나랑 그는 접점이 더 이상 없는데.’

    지난 생에서도 우리가 함께했던 것은 결혼하고 10년 뒤, 전쟁을 끝내고 그가 돌아온 후였다.

    ‘본 적 없는 신부를 그가 찾아올 리가.’

    하지만 한번 번지기 시작한 불안감은 내 마음을 스멀스멀 좀먹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던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앞에 선 남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저기, 이안.”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여태까지 나는 누군가를 의지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불안하고 괴로워도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마음이 불안해진 나는 저절로 이안을 붙들었다.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말랑말랑했던 마음은 나를 돌아보는 이안의 말을 듣는 순간 와스슥 깨지고 말았다.

    “왜 부르죠, 올리?”

    ‘이 남자가.’

    늘 올리비아라고 날 부르던 남자가 굳이 올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안 봐도 뻔했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요. 빈정거리지 말고요.”

    “하고 싶은 말은 없는데요. 그냥 조금 서운할 뿐입니다.”

    내 말에 이안은 기다란 속눈썹을 처연하게 내리깔았다.

    “제 아내는 부인이라는 호칭도, 친구도 부르는 애칭도 제게 허락해주지 않으니…….”

    “으으.”

    참 팔색조 같은 얼굴이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조각상 같은데, 웃으면 웃는 대로, 시무룩해하면 시무룩해하는 대로 빛이 나니 말이다.

    ‘꼭 내가 나쁜 사람이 된 느낌이잖아!’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이안을 보고 있으면 더 이상 모진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아무리 그가 잘못을 해도 말이다.

    ‘그리고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닌데.’

    로메오는 분명 내게 특별한 친구이지만, 그것이 이안과 같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열었다.

    “……올리비아라고 불리는 게 좋아요.”

    “네?”

    내 말에 이안은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아주 오랫동안 이름을 잊고 살았어요.”

    내 지난 생 내내, 나는 파넬 공작부인이었지, 올리비아가 아니었다. 그 집에 사는 내내 누구도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부인.”

    “여보.”

    심지어 남편 제임스조차도.

    하지만 다시 스무 살의 내가 되었을 때는 달랐다. 이안은 나를 그저 타이론 공작부인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끊임없이 나의 의견을 묻고,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나는 이안과 두 눈을 곧게 마주했다. 내 진심이, 이렇게 전해지길 바라며.

    “그러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인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 좋아요.”

    “이런…….”

    내 말에 이안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슬쩍 내 눈을 피하기에, 나는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바로 그때였다.

    와락.

    그가 두 손을 넓게 펼쳐서 나를 꽉 끌어안았다. 단단하고 넓은 가슴에 내 온몸이 쏙 들어갔다.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따뜻한 입술이 이마에 쪽 하고 닿았다 떨어졌다.

    “그렇게 예쁘게 말하기 있습니까?”

    “그래요?”

    예쁜 말이었나. 잘 모르겠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가 키득키득 웃으며 재차 내 눈꼬리에 입을 맞췄다.

    “키스해도 되나요, 올리비아?”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의 가슴을 살짝 밀치며 말했다.

    “여긴 보는 눈이 많아요. 집에서 해요.”

    아닌 게 아니라, 풀숲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이 온실 안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끌어안고 있는 우리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주변을 신경 쓰는 내 귓가에 버석하게 마른 모래사막처럼 건조하고, 또 뜨거운 목소리가 울렸다.

    “집에서는 키스보다 더한 걸 하게 될 것 같은데요.”

    그의 입술이 명확한 의미를 남아서 내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다시 그를 마주했다. 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빛이 나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오로지 나만 알고 있는 이 남자의 정염.

    ‘내 심장까지 떨리는 것 같아.’

    그 열기가 내 몸으로 옮겨붙는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 내 심장은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두근. 두근.

    그를 마주하면 쑥스럽고, 심장이 뛰고, 도망치고 싶은, 이 감정이 뭐겠는가.

    ‘사랑.’

    이제는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 남자를 사랑해.’

    전에 겪었던 어떤 사람들에게도 느끼지 못했던 명확한 감정이 나를 휩쓸었다.

    한 발 내디디면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될 것 같은, 그런 불안하고 흉포한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더 이상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셔츠 깃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상관없어요.”

    “네?”

    내 행동에 나를 안고 있는 이안의 팔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재차 속삭였다.

    “오늘은 해도 돼요.”

    “아, 진짜.”

    그는 낮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짤막한 욕설 같았지만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완전히 내 입술을 덮어버렸으니까.

    뭉근한 혀가 밀려들어 와서는 내 혀뿌리가 아릿하도록 강하게 혀를 쪽쪽 빨았다.

    나는 온몸을 완전히 그에게 맡기고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와 맞닿은 모든 부분이 화끈거렸다.

    “하아.”

    기나긴 입맞춤이 끝나고도, 그의 입술은 배가 고픈 것처럼 쪽쪽 내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콧등에 입을 맞추며 그가 내 허리를 힘주어 안았다.

    한숨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어쩌자고 이렇게 예쁜 겁니까?”

    “당신만 그렇게 말해요.”

    도대체 몇 번째 예쁘다는 말인지.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자 이안이 내 턱을 살짝 돌리며 나와 눈을 맞추었다.

    “다른 사람은 이제 말 못 하죠. 함부로 내 부인을 입에 올렸다가는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푸른 눈동자가 망망대해처럼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묘하게 위험한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내가 질투심이 많은 거, 이미 알고 있잖습니까.”

    왜 이렇게 남자들은 아이처럼 구는 건지. 나는 눈을 살짝 찡그리며 그를 밀어냈다.

    “질투쟁이에, 애정결핍에, 아주 결함이 많으시네요.”

    “하지만 운이 아주 좋은 남자죠.”

    말이나 못하면. 나는 그에게 안기는 바람에 구겨진 치마를 펴며 담담하게 말했다.

    “로메오는 정말 친구예요.”

    그러니 괜한 질투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깔끔했다.

    “알고 있어요.”

    방금까지는 그가 ‘올리’라고 불렀다고 삐졌으면서? 내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자,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음에 한번 저택으로 초대하도록 하죠. 이제 가족이 될 사이인데.”

    그럴 필요 없다고 대답하려던 나는 멈칫 굳어졌다.

    ‘……제임스에 대해서 더 들어봐야 하니까. 갑자기 제임스의 이야기를 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야.’

    로메오가 아무 근거도 없이 그런 말을 내뱉을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로메오와 사적으로 대화를 나눌 시간이 필요했기에, 굳이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이안의 말에는 내 귓가를 간질이는 단어가 섞여 있었다.

    ‘가족.’

    스타티스 황태자와 로메오가 결혼하는데 왜 이안과 가족이 되는가. 그건 그가 황태자를 가족처럼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예리하게 그 부분을 눈치챈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랑 정말 절친하신가 봐요.”

    “절대 아니거든요. 여동생 같은 존재랄까.”

    내 말에 이안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동생이 어때서, 라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내게도 웬수 같은 큰 오빠가 있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는 로메오 덕분에 파넬을 벗어났는걸. 나도 로메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스타티스 황태자가 과연 로메오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일까. 나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흐린 얼굴을 해서일까. 이안은 내 어깨를 감싸며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친구도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까 전하께서 머리카락 색으로 뽑았다고 했잖습니까.”

    “그래서 걱정되는 거예요! 그런 이유로 결혼이라니.”

    차라리 그 말을 안 들었다면 이렇게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생이나 이번 생이나 로메오는 나에게 힘들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결혼했다는 걸 알고 나니까 걱정되잖아. 황후 자리가 그냥 헤실헤실 웃기만 하면 되는 자리도 아니고.’

    잔뜩 걱정으로 찡그려진 나와 달리, 이안은 명랑하게 웃었다.

    “그래요? 나는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스타티스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무슨 뜻이냐고 묻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그런 내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뭐라고 설명하긴 어렵지만, 당신 생각처럼 그렇게 매정한 상황은 아닐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무척 확신하는 어투였다. 미간을 찌푸리고 갸웃거리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역시 절친한 거 맞네.”

    스타티스 황태자를 잘 알지 못하면 단언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내 말에 이안은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절대 아닙니다. 소름 끼치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뭘, 소름까지.’

    도대체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마음은 조금 편해.’

    참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았다. 나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달랐다. 그의 말은 마법 같았다. 그가 된다고 하면 모든 것이 정말 될 것 같았다.

    ‘불안한 감정도 사라졌어.’

    로메오에게 제임스의 이야기를 들어서 술렁이던 마음도 어느 순간 잔잔한 바다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보조개가 옴폭 들어가도록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이 좋아.’

    언제 이렇게 마음이 깊이 흘러가

    버렸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니, 흘러가지 않는 게 이상하지.’

    이토록 매력적인 남자에게.

    빛에 반짝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이 꼭 수천 개의 별을 뿌려놓은 것만 같았다. 찬란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노골적이면서도 또 간절한 말에 나는 푸흡 웃었다. 그리고 뾰로통해하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요.”

    그가 솔직하게 내게 말했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날이 색이 변해가는, 나의 감정을.

    * * *

    로메오 알키저스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건강하고 능력이 출중한 장남.

    그리고 그 장남을 보좌할 냉철한 차남.

    소극적이고 얌전한 삼남은 이미 가문에 필요하지 않았다.

    “차라리 여자아이가 태어나는 편이 훨씬 나았을 텐데.”

    그것이 로메오가 성장하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저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로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어른들은 어느 순간 말을 이렇게 바꾸었다.

    “너는 최대한 알키저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가거라.”

    그러니까 로메오 알키저스에게 스타티스 황태자는 최고의 결혼 상대였던 셈이다. 그에게 저런 말을 했던 어른들식 표현으로는 ‘가장 득이 될 상대’.

    로메오가 올리비아와 절친한 친구가 된 것에는 별 이유가 없었다. 그의 세상에서 그녀만이 그를 그런 가치거래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으니까.

    덥고 습했던 여름, 아카데미에서 만난 은색 포니테일의 소녀는 대뜸 다가와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너 알키저스 가문이라며?”

    “아, 응.”

    알키저스는 백작가지만 일찍이 상업에 뛰어들어서 어마어마한 부를 창출했다. 그 부를 노리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양손 양발을 다 동원해도 셀 수 없을 만큼.

    ‘이 애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가?’

    그렇게 보기에는 그를 바라보는 올리비아의 시선이 지나치게 시큰둥했다. 오로지 자신의 용건만 중요한 표정.

    “그럼 오르세 왕국에 가본 적이 있겠네?”

    “아, 아니.”

    오르세 왕국은 알키저스가 가진 상단이 거래하는 나라로, 알키저스에서는 오르세에 저택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모두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나 알키저스의 주요 업무에서 배제되어 혼인 시장의 매물로만 취급되는 로메오에게는 갈 이유가 없는 곳이기도 했다.

    “아, 그래? 그랬구나. 실례했어.”

    하지만 왜일까. 그 대답에 미련 없다는 듯이 휙 돌아서는 올리비아의 손을 다급하게 잡아챈 건.

    “자, 잠깐.”

    로메오의 말에 올리비아의 붉은 눈이 시큰둥하게 그를 응시했다. 로메오는 필사적으로 말을 쥐어짰다.

    “하지만 어, 언젠가는 가볼 수 있을 거야.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그래?”

    로메오의 말에 그때서야 올리비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때 나도 데려가 줄래? 궁금한 게 있거든.”

    햇살처럼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차마 로메오는 오르세 왕국으로 가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로메오는 올리비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사실 그 사람, 우리 아버지가 아니야.”

    “뭐?”

    점심 샌드위치를 베어 먹으며 올리비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충격 선언을 했다.

    탄생의 비밀을 논하는 것치고 지나치게 태연스러운 어조라, 로메오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고 굳어졌다.

    올리비아는 뭘 놀라느냐는 투로 어깨를 으쓱했다.

    “나랑 별로 안 닮았잖아.”

    “그, 그건…… 그렇지.”

    플로렌스 자작과 올리비아는 분위기부터 손가락 끝까지 뭐 하나 닮은 구석이 없었다.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머니께서는 아무것도 내게 말해주지 않고 돌아가셨고, 오로지 이 유품만 남기셨어. 그런데 들어보니까 이게 오르세산 크리스털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오르세 사람인가보다 한 거야.”

    “아버지가 남긴 증표래?”

    “아니, 그런 말도 안 했어. 순전히 내 추측.”

    “그게 뭐야.”

    결국 그냥 막연한 단서를 가지고 오르세에 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허탈하게 웃는 로메오에게 올리비아는 눈을 찡긋했다.

    “어차피 너 세 번째 아들이라 바쁘지도 않잖아. 약속대로 나를 오르세로 데려가 주는 거다.”

    태어나서 무엇 하나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할 것이 있던가. 아무도 그에게 결혼 외에 무언가를 해내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올리비아만큼은 달랐다. 그래서 분명 집안 어른들이 싫어할 걸 알면서도, 자신에게는 별 득이 되지 않는데도, 로메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나 그가 그 약속을 지킬 날은 오지 않았다. 졸업 날이 정해지기 무섭게 올리비아는 파넬 공작부인이 되었으니까.

    * * *

    ‘그래서 그 부탁이라도 들어주려고 한 건데.’

    데려가 주지 못한 오르세 왕국 대신, 로메오는 올리비아의 부탁대로 저잣거리에 이상한 노래를 뿌렸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올리비아는 파넬 공작과의 혼인을 무효로 돌리고 타이론 공작부인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파넬 공작이 찾아오다니.’

    로메오는 지난밤에 찾아왔던 제임스를 떠올렸다.

    로메오의 키는 평균, 하지만 제임스는 그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컸다. 어깨도 넓고 팔도 허벅지만큼 두꺼워,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사내였다.

    “내 부인을 되찾아오려고 하오. 부인은 지금 속고 있소. 그대가 내 부인의 친우라면 나를 도와주시오.”

    “어떻게 도와달라는 겁니까?”

    올리비아가 어떻게 지내는지, 로메오는 몰랐다. 이안과의 결혼식은 폭풍처럼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올리비아가 속고 있다는 제임스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 로메오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는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부인과 개인적으로 대화할 시간을 만들어주시오.”

    섬세함과는 거리가 억만 광년 떨어져 있을 것 같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니 올리비아는 너무 행복해 보이는데.’

    이안은 진심으로 올리비아를 아끼는 것 같았다.

    ‘설령 소문대로 고자라면 또 어때. 저렇게 사랑하는데.’

    답을 내리기 어려운 고민에, 로메오가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와 함께 온실을 걷고 있던 스타티스 황태자의 걸음이 뚝 멈췄다.

    “영식은 독특하군. 다들 날 만나면 환심을 사지 못해서 안달인데.”

    그녀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머릿속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로메오의 시선에 가장 먼저, 남자처럼 슬랙스에 감싸인 스타티스의 두 다리가 들어왔다. 그리고 좋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까만 옥스퍼드화.

    자신만만함이 가득 담긴 시선이 그를 응시했다. 로메오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안달한들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요.”

    느슨하게 늘어지는 푸른색 머리카락 때문인지, 그렇게 미소 짓는 로메오의 얼굴은 묘한 처연함이 맴돌았다.

    그 미소에 스타티스가 이맛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작게 까르르 웃음소리가 울렸다. 반대편 길로 걸어간 타이론 부부의 목소리였다.

    무심코 로메오가 그쪽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스타티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왜? 저런 게 부럽나?”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로메오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정략결혼이 자연스러운 귀족사회에서, 부부의 성품이 잘 맞는다는 건 순전히 운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무언갈 건드린 걸까. 스타티스 황태자의 입술이 위험하게 휘어졌다.

    “모르지, 그대와 나도 운이 좋을지. 아님, 나쁠지. 한번 시험해볼 텐가?”

    스타티스는 키가 컸다. 옥스퍼드화를 신고도 로메오와 시선이 맞을 정도였다. 키가 큰 만큼 커다란 손바닥이 로메오의 셔츠를 꽉 붙들었다.

    “내가 딴 사람은 몰라도 타이론 공작한테 지는 것 못 참거든.”

    “넌 그저 운이 좋을 뿐이야!”

    언젠가 그녀에게 악에 받쳐서 소리 지르던 이안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

    온실을 한 바퀴 돌면 중앙에서 다시 넷이 만나야 했는데, 아무리 온실을 돌아도 황태자와 로메오를 만날 수가 없었다.

    “먼저 떠나셨습니다.”

    “네?”

    황태자야 그렇다 쳐도, 로메오가 내게 인사 없이 떠나다니.

    ‘이상하네. 너무 긴장해서 그런가.’

    그리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내 손을 이안이 잡아당겼다.

    “우리도 이만 집으로 가요.”

    틈을 좀 주었더니 또 금세 기어오른다. 그래도 그 모습이 밉지 않아 나도 마주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오르려는데, 아까 급한 일이 있다던 황제가 다시 싱글싱글 곰처럼 웃으며 나타났다.

    “벌써 가려고?”

    “황제 폐하!”

    아이고, 깜짝이야. 왜 이렇게 불쑥불쑥 튀어나와? 한가하세요?

    ‘황제 폐하께서 이렇게 한가해도 괜찮은 거야?’

    애국심에 한 줄 균열이 또 생겼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폐하의 은덕에 즐거이 지내다 갑니다.”

    나의 인사에 황제는 당장 나를 끌어안고 털을, 아니 수염을 비비고 싶다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감사는 내가 할 말이지! 우리 제수씨 덕분에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저렇게 어린애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마음 한편에 저절로 삐뚤어진 마음이 생겼다.

    ‘그런 사람이 나를 제임스하고 엮어줬냐.’

    내 인생이 저렇게 바람처럼 가벼운 사람 때문에 쓰레기통에 박혔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허나, 인생 2회차에서 쉽사리 혼인 무효까지 진행된 것도 저 바람처럼 가벼운 성품 덕분이었다.

    나는 당장 멱살을 잡아채고 싶은 손을 등 뒤로 감추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였다. 황제는 벌꿀 단지를 꺼내는 곰처럼 곰지락곰지락 상자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내 약소하지만, 임신 축하선물을 마련했는데.”

    “네?”

    임신 아니래도!

    하지만 이미 황제는 떠넘기러 온 모양이었다. 나는 어색한 손길로 상자를 받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세상에.”

    뚜껑이 열리기 무섭게 수십 알 박혀 있던 다이아몬드가 휘황찬란한 빛을 뿌렸다.

    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잘 세공된 다이아몬드가 수십 개 있으니 그 규모에 압도된 탓도 있었지만, 그것의 종류에도 놀랐다.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 이건 티아라잖아요.”

    내 손바닥만 한 다이아몬드와 백금으로 만들어진 티아라.

    ‘어떻게 이렇게 위험한 물건을!’

    이 나라에서 티아라를 쓸 수 있는 것은 황족과 황족의 배우자뿐이다. 당연히 나는 티아라를 쓸 수 있는 자격이 없다.

    ‘괜히 쓰고 다니다가 역모를 꾸민다고 누명을 쓰기 십상이라고.’

    나는 고도의 엿 먹이기인가 싶어서 황제를 쳐다보았지만, 황제는 만두처럼 따끈따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인을 찾게 되어 기쁘군.”

    역시 생각이 없는 사람이고만! 충동적으로 티아라를 선물하다니!

    “과합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

    인생 2회차. 이번 생은 마음고생 없이 평화롭게 살다 가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그런데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는 귀물이라니. 절대로 사양이야.’

    조금 더 단호하게 황제에게 말하기 위해 입술을 떼었을 때였다.

    나의 말을 막은 것은 이안이었다. 나처럼 정색할 줄 알았던 이안은 뜻밖에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받아둬요, 올리비아.”

    “예?”

    이안의 강권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티아라가 든 상자를 품에 안고 말았다.

    “그럼 정말 돌아가 보겠습니다.”

    깔끔한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이안이 나의 어깨를 자신의 팔로 감쌌다.

    ‘정말 이렇게 가도 되는 건가?’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런 우리의 등 뒤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안.”

    황제가 이안을 부르는 소리였다.

    그리움과 회환, 기쁨, 안타까움 등등이 어지럽게 섞인 목소리는 무척이나 애절하게 들렸다.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황제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이름은 내가 지었단다, 알고 있니?”

    “예.”

    달달한 사탕 같은 황제의 목소리와 상반되게도, 대답하는 이안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 온도 차에,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진정 개의치 않는 듯했다.

    “정말 마음의 짐을 던 것 같아서 기쁘구나. 행복하거라.”

    단순한 사촌에게 건네기에는 지나치게 애정이 듬뿍 담긴 인사였다. 이안은 까딱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는 나를 마차로 이끌었다.

    나는 티아라가 든 나무상자를 품에 안은 채로 마차에 올라탔다. 그가 내 맞은편에 앉자, 마차는 부드럽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안은 창틀에 턱을 괴고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홀릴 것같이 잘생긴 모습이었으나, 나는 그의 외모를 감상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대로 말해 봐요. 둘이 무슨 사이예요?”

    “예?”

    내 말에 이안이 무슨 뜻이냐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연인? 아니면 숨겨둔 아들?”

    “하하.”

    내 말이 어이가 없었는지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아, 느슨하게 손가락 깍지를 끼며 대답했다.

    “이제 나에게도 관심이 생긴 겁니까?”

    “그거야…….”

    우린 부부잖아요.

    그 대답은 나오려던 도중에 목구멍에 턱하고 걸려서 흘러나오지 못했다. 부부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낯설게 느껴진 탓이었다.

    당혹스러움이 표정에 드러났던 모양이다. 나를 예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가 픽 웃으며 물었다.

    “사연이 좀 깊은데. 들으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

    그의 물음은 가벼웠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또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아 있어서 그런 지도 모른다.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건 그의 개인적인 부분이야.’

    아마도 그동안 누구도 들여놓지 않았을, 그의 비밀.

    ‘하지만 나도 내 모든 비밀을 털어놓지 못했는걸.’

    그런 주제에 그의 비밀만 쏙 듣는 것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그럼 안 들을래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는 내가 그리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이 냉큼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어쩐지 뻘쭘해져서,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틈새로 티아라의 영롱한 빛이 흘러나왔다.

    ‘예쁘긴 예쁘다.’

    파넬 공작부인으로 지내며 쌓은 안목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티아라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최상급이었다. 알의 크기도 크기지만, 세공에서도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이렇게 예쁜데 써보지도 못할 곳에 박혀 있다니.’

    이렇게 아까울 수가. 나는 한참 동안이나 티아라를 꼼꼼히 쳐다보았다. 그런 내게 이안이 물었다.

    “왜 그렇게 보고 있어요?”

    그의 물음에 퍼뜩 놀라 고개를 드니,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차피 한 번도 쓸 수 없을 텐데. 하사품이니 팔 수도 없고.”

    게다가 나와 이안은 아이를 낳지 않을 예정 아닌가. 그럼 이 물건은 훗날 아예 일면식도 없는, 운이 억세게 좋은 후손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억울하네요.”

    “재미있는 생각이네요.”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왜 그렇게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지 물어도 되나요?”

    그건 그에게 듣고 싶지 않은 여러 가지 질문들 중 하나였다.

    나를 바라보는 푸른 시선이 자못 예리했다. 꼭 내 마음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나는 눈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당신도 듣고 나서 감당할 수 있겠어요?”

    “이런. 한 방 먹었네요.”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이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를 마주 보기 멋쩍어, 나는 다시 티아라를 바라보았다. 티아라는 여전히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아아, 그래도 정말 아깝다.”

    ‘이렇게 예쁜데, 사람의 머리에 한 번 올라가질 못하다니.’

    내가 손가락으로 가장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툭 건드렸을 때였다. 이안의 커다란 손이 불쑥 상자를 붙들었다.

    ‘빼앗아 가는 거냐!’

    쳐다본다고 닳냐!

    내가 그의 행동에 발끈했을 때였다. 그가 다른 손으로 티아라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이 커서 티아라가 마치 뱅글처럼 작아 보였다.

    “한번 써 봐요. 여긴 우리 두 사람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어서.”

    티아라. 내가 절대 써서는 안 되는 물건.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심장이 살짝 떨려왔다. 그는 담이 얼마나 큰 건지, 내게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고개를 살짝 숙여 봐요.”

    티아라를 직접 씌워주겠다는 뜻이었다.

    ‘상관없겠지. 이안의 말대로 여긴 우리 두 사람뿐이니까.’

    나는 그의 말대로 고개를 살짝 그에게로 내밀며 숙였다. 왜인지, 눈이 저절로 감겼다.

    그렇게 두근두근거리며 그가 티아라를 씌워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쪽.

    “?!”

    어째서인지 머리가 아니라 입술에서 뭉근한 촉감이 느껴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다. 그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눈을 감은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만. 입술이 저절로 나갔네요.”

    “아, 진짜!”

    이 사기꾼!

    내가 씩씩대며 그를 노려보자, 그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다시 고개 내밀어 봐요. 정말 씌워줄게요. 이번엔 농담 아니에요.”

    “그런 장난 또 치면 정말 화낼 거예요.”

    “알았어요.”

    하여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나는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고 계속 그를 흘긋대며 머리를 내밀었다. 그는 쿡쿡 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티아라를 내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으으, 황족만 쓸 수 있는 걸 쓰다니. 심장이 떨린다.’

    좋은 듯 나쁜 듯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발그레한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딱히 마차 안에 거울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자연스럽게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눈을 곱게 접으며 마주 웃어주었다.

    “잘 어울립니다. 다시 한번 반할 것 같은데요?”

    “관둬요, 그런 거짓말은.”

    이렇게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남자인 줄 몰랐다. 이렇게 자주 웃는 남자인 줄도.

    고자라고 해도 부와 권력을 쥔 데다가 이렇게 휘황찬란한 미남이었으니, 따라붙는 여자들은 꽤 있었다. 관계가 더 진전되지 못한 것은 결국 그가 곁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즉 이렇게 행동했으면 금방 결혼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부채질했을 때였다. 그가 조금 더 진지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정말 예뻐요. 진심이에요.”

    부채질한 보람도 없이, 내 얼굴은 속수무책으로 빨개졌다.

    ***

    마차 안에서 어떻게 앉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이안은 내 손목을 꽉 붙들고 내 방으로 올라갔다.

    “시중은 필요 없다.”

    이안의 말에 상황을 눈치챈 시중인들이 얼굴을 붉히며 물러났다.

    “잠깐만요, 씻어…… 읍.”

    방문이 닫히기 무섭게 그가 나를 꽉 끌어안고는 입을 맞췄다.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아.’

    어떻게 지난지도 모를 초야와 지금은 확실히 달랐다. 심장이 어지럽게 뛰어서 귀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넓은 손바닥이 허벅지를 꽉 쥐었다. 그 바람에 허리가 휘어지면서 몸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잡을 것 없어, 두 손을 허공에 허우적대던 나는 그의 목에 두 손을 감고 매달렸다. 부드러운 금빛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얽혔다.

    ‘이안 타이론.’

    나는 눈을 나른하게 떴다. 나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고 있던 푸른 눈과 시선이 부딪쳤다.

    ‘……내 남편.’

    긴 키스가 끝나고 단정한데 묘하게 으스스한 목소리가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여졌다.

    “무슨 일입니까?”

    “뭐가요?”

    “무섭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허락해주는 겁니까?”

    왜일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화를 냈는데, 내 눈치를 보며 ‘내 아내’라고 말하는 이 남자를 보는 순간 깨달은 것이다.

    ‘아아,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구나.’하고.

    “그냥…….”

    “그냥?”

    사실 나만 보면 예쁘다, 아름답다, 당신이 좋다고 말하는 남자에게 마음이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 심장은 얼어붙은 것이리라.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좋아서요.”

    “올리비아.”

    그의 입술이 다시 또 내 입술을 덮었다. 아랫배가 뜨겁게 조여드는 것만 같아, 나는 살짝 몸을 뒤틀었다. 그가 내뱉는 더운 숨이 입술을 통해 꼴깍꼴깍 넘어오는 것만 같았다.

    “읍!”

    쉬지 않고 이어지는 입맞춤에, 숨을 할딱이며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왜 이렇게 이 사람은 집요하고…….’

    상냥한 걸까.

    그와의 스킨십은 무척 좋았다. 타인과 나누는 체온이 이렇게 편안하면서도 두근거릴 수 있는가 의아할 정도로.

    걸치고 있던 드레스가 툭 떨어졌다. 셔츠 단추는 내가 풀었다. 머리가 엉망이 되는 것도 모른 채, 나는 정신없이 그의 목에 매달려서 교성을 내질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 안을 깊숙하게 파고든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단정한 잇새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읏.”

    나는 흐릿한 눈으로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안.’

    반듯한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늘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은 약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촛불이 넘실거리는 듯 일렁이는 푸른 눈이 나를 응시했다.

    ‘처음 보는 표정.’

    쾌락에 푹 젖은 얼굴.

    ‘아마도 이 세상에서 나만 보았을 얼굴.’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는 계속 능글맞고 여유로웠는데, 이 표정은 다급하고 서툴게만 보였으니까.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올리비아. 당신을 만난 게 꿈만 같아요. 때때로 당신의 편지를 무시하고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소름이 끼칩니다.”

    그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나는 손을 뻗어, 땀에 젖은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저도요.”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다 체념하고 파넬 공작가에 남기로 결심했다면 어땠을까.

    그냥 수녀원에 가기로 했다면? 무작정 가방을 싸 들고 야반도주했다면?

    ‘이 사람을 만나지 못했겠지. 이런 삶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거야.’

    그렇게 몇 번의 우연, 몇 번의 판단 끝에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런 게 운명 아닐까.’

    졸음이 밀려와서 더 이상 생각하기 어려웠다. 나는 내 몸을 짓누르는 무게와,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

    로메오가 제임스의 이야기를 한 탓일까. 꿈에 오랜만에 제임스가 나왔다.

    “부인.”

    이안과 키는 비슷하지만, 제임스 쪽이 훨씬 덩치가 컸다. 그를 마주하고 있으면 단단한 성벽 앞에 선 기분이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인.”

    계속 부르지 말고 용건을 말하면 될 텐데. 눈이 내리는 들판 같은 어두운 회청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저것도 이안하고 다르네.’

    반짝반짝거리는 이안의 눈동자는 청명한 가을하늘 같았다. 하지만 제임스의 눈은 음울하기만 했다.

    ‘당신에게 나는 어떤 의미였을까.’

    정말 그가 날 사랑하고 있었을까. 그냥 결혼은 해야 하는데 그 상대 중 가장 자신을 편안하게 해줬던 상대가 나였던 게 아니고?

    ‘나한테 한마디 따뜻한 말이라도 해주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자를 마주하며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날 부르지 말아요.”

    “부인.”

    “이제 우린 끝이에요.”

    어차피 이쪽 삶의 당신은 나를 모르지 않나.

    나는 과거의 잔상을 뒤로한 채 완전히 몸을 돌렸다.

    * * *

    ‘아이고, 죽겠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아이고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허리가 징하고 울려서,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이안과의 관계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좋았다. 쉬지 않고 쏟아지는 쾌락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할 때마다 이렇게 집요하게 굴어서야.’

    하지만 아무리 달콤한 음식도 한두 번이지! 이렇게 숨 쉴 틈도 없이 계속 먹으면 되겠나!

    ‘어제도 진짜. 아이고, 그동안 어떻게 참았담.’

    제대로 씻지도 않고, 돌아오자마자 정신없이 얽히기 시작한 관계는 해가 뜰 무렵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장소는 무려 욕실이었다.

    “찝찝해요. 씻고 싶어.”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그리 말하기 무섭게 이안의 얼굴이 환해졌다.

    “제가 씻겨드릴게요, 올리비아.”

    “아뇨. 당신은 당신 방으로 가라는 뜻으로 한 말인데.”

    “어떻게 지친 당신을 그냥 두고 갑니까. 제가 깔끔하게 씻겨드리고 보송보송 말려서 눕혀드릴게요.”

    한밤중이라 시중인을 깨우기도 뭐해서 고개를 끄덕인 것이 통한의 실수였다.

    ‘욕실이라 소리도 많이 울리던데. 설마 다른 방으로 들리진 않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간밤을 떠올리니 다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벌써 일어났어요?”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

    눈이 가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은 사우나라도 한 것처럼 반짝반짝거렸으니까.

    ‘자체 발광 중이시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눈을 떠도 무결점 미모라니, 혼자만 뭔데?

    ‘내 얼굴은 안녕한가? 막 침 자국 있고 그런 거 아니겠지.’

    얼굴을 더듬어보려던 나는 허리가 욱씬 아파서 다시 끙 소리를 내며 반듯하게 누웠다.

    이안이 몸을 일으켜서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습니까? 많이 아파요?”

    “네, 누구 덕분에요.”

    목소리도 잔뜩 갈라져 나왔다.

    ‘다신 안 속을 거야. 딱 한 번 하면 거침없이 방 밖으로 내쫓아야지.’

    그래도 보송보송하게 만들어 눕혀준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나는 흰 원피스 잠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슬쩍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남자의 턱에 입을 맞췄다.

    “앞으로 일주일은 제 방에 들어오지 말아요.”

    “네? 일주일이나? 우리 내일도 만나는 거 아니었어요?”

    이게 무슨 소리야. 양심 있냐.

    “저는 당신처럼 체력이 좋지 않거든요.”

    내 말에 이안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잠시 턱을 괴고 있던 그가 내게 말했다.

    “우리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군요. 그러니까 지나치게 제가 집요했다는 거죠?”

    “네. 기절할 때까지 하는 게 말이 되나요.”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내 대답에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매일매일 해도 제가 그렇게 늘 집요할 수 있겠습니까?”

    “아?”

    이안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 어렵겠죠?”

    그도 사람이면 지칠 테니 말이다.

    내 대답에 이안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만 하면 집요해지지 않겠습니까?”

    “…….”

    그럴듯한 말이었다.

    내가 잠시 미간에 주름을 잡고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이안이 귀엽다는 듯이 쿡쿡 웃으며 내 콧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훌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시중들 사람을 불러올게요. 따뜻한 물주머니도요.”

    저릿저릿한 허리에 물주머니를 대고 있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안이 나가고 조금 있으니, 옥수수수프와 물주머니를 들고 하녀장이 들어왔다. 소파에 파묻히듯이 앉아서 옥수수수프를 떠먹고 있으니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그때 방을 정돈하던 하녀장이 물었다. 바로 황제가 하사한 티아라였다.

    “마님, 이 상자는 어디에 둘까요?”

    “귀한 것이니 가문의 보물창고에 넣어두도록 해.”

    “예.”

    과연 훈련이 잘된 사용인들이었다. 하녀장은 귀한 것이라는 내 말에 아랫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이 집어 들었다.

    ‘파넬 공작가에서는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도 무척 힘들었지. 그래서 일정 시기마다 재물조사를 해야 했고.’

    새삼 전생보다 훨씬 편해졌다는 체감이 들었다. 내가 너그럽게 눈꼬리를 휘었을 때였다. 하녀장이 말했다.

    “그리고 알키저스 백작가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알키저스?”

    바로 로메오였다.

    ‘안 그래도 어제 그렇게 헤어져서 신경이 쓰였는데.’

    나는 서둘러서 하녀장이 내미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편지 내용은 간결했다.

    -꼭 행복해야 해, 올리.

    ‘내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나 행복하래도.’

    나는 친구의 편지를 꽉 붙들었다. 눈물이 송송 솟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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