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쇼핑을 좋아하는 남자
우리 자매는 한참을 마주 안고 울었다. 가까스로 울음을 멈췄을 때는, 이미 두 눈이 흉하게 퉁퉁 부은 뒤였다.
나는 동생의 눈가를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신신당부했다.
“가방은 미리 싸둬. 언니가 나오라고 하면 바로 나와야 해. 알았지?”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어린 동생을, 아버지가 순순히 놓아줄 리가 없었다.
‘남들 눈에 납치처럼 보이더라도 단호하게 동생을 데리고 나와야겠어.’
그래야 아버지도 빨리 포기를 하지. 그리 생각하며 애니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있을 때였다.
애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물었다.
“정말 괜찮아? 나 때문에 겨우 행복해진 언니도 힘들어지는 거 아니야?”
“너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대도.”
내 동생은 속이 너무 깊어서 탈이었다. 서로 달래고 우는 사이 시간이 꽤 지났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어서 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나왔다.
그리고 동생의 카디건을 다시 살뜰하게 펴주며 당부했다.
“금방 데리러 갈게. 알았지?”
“응.”
애니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마음은 좀처럼 편하지가 않았다.
‘아버지가 또 화풀이로 애니를 때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전생에는 손찌검은 안 했던 것 같은데.
‘혹시 그때도 내가 몰랐던 건가.’
그리 생각하니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애니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올리비아.”
“이안.”
산책이 끝난 두 사람이 돌아왔다는 신호였다. 나는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런데 그의 곁에는 아버지가 보이질 않았다.
“왜 혼자예요? 아버지는요?”
목을 길게 빼고 곁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커다란 손가락이 내 귓가를 살짝 건드렸다. 그리고는 눈을 부드럽게 반달 모양으로 휘며 웃었다.
“붉은 옷이 잘 어울리네요.”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요.”
나는 손을 들어 목덜미를 지분거리는 손가락을 쓱 밀어냈다. 그리고 뾰족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순순히 대답했다.
“장인어른께서는 먼저 집으로 가셨습니다. 급한 일이 생기셔서요.”
“급한 일이요?”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급한 일? 급한 일이 있을 것이 뭐가 있어, 그 양반이.’
사업이 번창하는 사람이나 바쁘게 돌아다니는 거지, 쫄딱 말아먹어서 딸들한테 빌붙어 사는 사람이 급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딸들이 돈줄이니까 딸하고 조금이라도 더 얼굴을 보고 가엾음을 어필해도 모자랄 시간에.
“설마 당신…….”
나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버지의 급한 일이라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도박.
“나 몰래 큰돈을 쥐여준 것 아니죠?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돈이 생겼다면 아버지는 당장 도박장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몸이 근질근질했겠지. 그동안에도 가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참고 있었을 뿐이니까!
‘그래서 신신당부했던 것인데!’
우리 아버지는 염치도 뭣도 없는 사람인지라,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위에게 용돈 좀 달라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이안이 내 당부를 어기고 아버지에게 용돈을 준 게 아닌가 싶어서, 내가 도끼눈을 떴을 때였다. 이안은 항복한다는 듯이 두 손을 들고는 내게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저는 아내 말을 잘 듣지 않습니까. 지금도 시키시는 대로 1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하고 있고.”
“2미터라고 말했어요.”
어디 은근슬쩍 1미터로 거리를 줄이고 그래.
“그럼 한 걸음 물러나도록 하죠.”
“…….”
내 말에 이안은 상큼한 표정으로 한 걸음 성큼 뒤로 물러났다. 나를 향해 반짝거리는 푸른 눈이 꼭 한 마리 어린 양의 눈동자 같았다. 무해하고, 순수하고, 선량한.
‘정말인가?’
참 무서운 외모였다. 저 남자에게 얼렁뚱땅 넘어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막상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으니 말이다. 심지어 내 막냇동생마저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언니 어떻게 이렇게 착한 형부를 노려보고 있을 수가 있어? 형부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잖아.’
아이고야.
이 대치가 정말 쓸데없이 느껴져서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 눌렀을 때였다. 이안이 특유의 담백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장인어른께서 하고 있는 사업에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그래서 서둘러서 집에 돌아간다고 전해달라셨어요.”
“사업에 문제요? 문제가 될 게 뭐가 있지?”
애초에 사업이 돌아가고는 있나?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어서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먼저 갔다는 말에 애니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혼자 돌아갔어요? 그럼 저는…….”
아버지가 돌아갔다는 건 마차가 집으로 돌아갔다는 뜻이었다. 플로렌스 자작가에 그들을 데리러 간 마차가 애초에 타이론 가문의 마차인지라, 지금 저 말대로라면 아버지와 애니에게 각각 우리 집안의 마차가 나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대단한 결례지.’
손님이 두 명인데 무슨 귀빈이라고 마차가 두 대나 움직이겠는가. 눈치를 보는 게 습관이 된 애니는 그 부분을 신경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귀족 가문일 때 이야기지! 지금 타이론은 내가 살고 있잖아.’
언니가 타이론 공작부인이 되었는데도 그런 걸 신경 쓰다니. 지나치게 위축되어 있는 내 동생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왔다.
‘불쌍한 내 동생.’
내가 그 바람에 눈시울을 붉히고 있을 때였다. 이안이 내 눈물이 쏙 들어갈 만한 말을 툭 내뱉었다.
“우리 처제는 오늘 저희 집에서 묵으면 어떻겠습니까?”
“네?”
애니가 타이론 가문에서 묵는다고?
깜짝 제안에 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거기 반응한 건 애니였다. 애니는 처음으로 열네 살답게 뺨을 발그레 붉히며 흥분해서 물었다.
“정말 그래도 되어요?”
“그럼요. 남아도는 게 방인걸요.”
“우와!”
애니는 정말 좋은지 방방 뛰었다. 나는 당황해서 내 동생의 어깨를 붙들려 했다.
“자, 잠깐만, 애니…….”
“쉿.”
하지만 그런 내 손목은 이안에게 붙들려서 애니에게 닿기 전에 멈춰 서고 말았다. 이안은 애니에게 보이지 않게 고개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괜찮아요.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
그 말에 내 눈동자가 돌풍이 부는 것처럼 흔들렸다. 나를 향해 미소 짓는 얼굴이 오늘처럼 찬란해 보인 것이 처음이었다.
‘먼저 말을 꺼내 준 거야. 내가 부담감을 느낄까 봐.’
부담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사실 안주인의 동생이 하룻밤을 자고 가는 것뿐이지만.
‘파넬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지난 생에서 나는 애니의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했다. 진상들이 초청장을 멋대로 숨겼기 때문이다.
“어째서 숨기신 거죠? 제 동생이에요! 동생의 결혼식이라고요!”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내가 거세게 항의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나를 비난했다.
“사람이 격에 맞게 지내야지. 그러니까 네가 아직도 진짜 공작부인이 못 되는 거야.”
아버지는 애니를 돈을 주는 집안에 팔 듯 넘겼고, 당연히 별 볼 일 없는 집안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너무했어.’
친동생이 결혼을 하는데, 집안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가지 못 하게 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이가 박박 갈리는 일이었다.
‘역시 그 진상들의 마빡을 한 대씩 때려주고 나왔어야 했는데.’
아무리 시간을 거슬러 와서 이제는 없는 일이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는 생생한 상처였다.
‘그리고 이제는 알겠어.’
나는 고개를 들어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부끄럽게도 지난 생에 나는 그런 진상들의 말에 휘둘렸다. 정말로 내가 그렇게 격이 낮고 품위가 없는 사람인 줄 알았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썼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집안이나 어울리는 친구들이 아니야.’
이안도 제임스도 같은 공작이었지만, 두 사람을 이제 같은 반열에 두는 건 이안에게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의 격을 결정하는 건, 그 사람의 행동과 마음 씀씀이지.’
그런 의미에서 이안은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나는 진심을 담아서 그에게 인사했다.
“정말, 정말 고마워요, 이안.”
공작부인으로 사교계를 누빌 때는 마음껏 늘어놓을 수 있었던 수많은 말들이, 목이 막힌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
내 인사를 들은 이안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말로만요?”
나를 놀리는 느낌이 강했다. 나는 그런 그를 흘겨보다가.
‘에라이.’
나는 두 손을 뻗어서 그의 뺨을 감쌌다. 키가 얼마나 큰지 머리가 한참 위에 있었다. 뒤꿈치를 들어도 아슬아슬하게 닿을까 말까 한 높이였다.
‘쓸데없이 키만 커서.’
나는 힘을 주어 그의 고개를 당겼다.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뜬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하지만 입술은 예쁘지. 꼭 립스틱 바른 것 같은 새먼핑크.’
부드럽고 맛있게 생겼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쪽 하고 맞추었다.
숨결이 얽히지 않는,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어…….”
이안이 그답지 않게 멍한 표정을 지으며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애니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럼 우리 정원을 먼저 구경할까, 애니?”
“좋아!”
나는 애니와 함께 정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장미꽃 향기가 달콤했다.
* * *
당연하지만 플로렌스 자작은 급한 일이 있어서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제가 정원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신사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안 타이론이 그에게 다가섰을 때, 플로렌스 자작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타, 타이론 공작님이 내게 존댓말을!’
플로렌스 자작의 뺨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빚을 갚는 것 이상으로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처음에는 파넬 공작가에서 요구하는 빚을 갚아달라고만 부탁할 셈이었다. 그 금액도 꽤 되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와서 본 올리비아와 타이론 공작의 사이가 심상찮아 보였다.
‘내 생각보다 더 사이가 좋아.’
어색하지 않고 다정한 스킨십, 그리고 서로 존중하고 아끼는 대화.
아주 짧은 단락에서도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진정 부부답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도 깍듯하잖아.’
부인이 좋으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더니. 지금 이안 타이론의 모습이 딱 그랬다. 인사를 건네도 무시할 만한 상대에게 존댓말에 고개도 숙인다.
‘이참에 크게 한몫 잡을 수 있을지도.’
그리 생각하며 플로렌스 자작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쪽으로 오면 멋진 오랑제리가 있습니다. 선대 공작부인께서 직접 가꾸고 만드신 곳이죠.”
“아.”
선대 공작부부는 이안의 어린 시절에 사이좋게 세상을 떠났다. 마차 사고였다.
‘그러고 보니 부모가 없군.’
원래라면 가문의 어른들이 이안을 가르쳤겠지만, 타이론 가문에는 혈육이 별로 없어, 방계인 화이트폴 후작이 자식처럼 키웠다.
타인의 불행을 들으며 플로렌스 자작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 조금 더 인정에 호소하기 쉽겠는걸. 나를 친아버지처럼 생각하라고 해야겠어.’
이런 애송이 하나 구슬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역시 내가 딸은 잘 키웠다니까.’
콧노래를 부르며 이안의 뒤를 따라 오랑제리 안으로 들어가니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세상에 이런 곳이!’
둥근 유리온실 안은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이색적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넓은 바나나잎에 진한 분홍색 꽃잎의 플루메리아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우와…….”
타이론 공작가가 부유하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시설까지 만들어 유지할 정도인 줄은 몰랐다.
‘이, 이 부유함이 내 것이라면.’
올리비아에게 빨대를 꽂고 좀 빼앗아 올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의 십분지 일이라도!
‘상상만 해도 황홀하다.’
찰나의 달콤한 꿈에 취해서 플로렌스 자작이 오랑제리를 한 바퀴 돌았을 때였다.
“그런데…….”
오랑제리 안을 안내해주는 것 같던 이안의 걸음이 딱 멈췄다. 묘하게 말꼬리를 늘이며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긴 무슨 일이지?”
언제 높였냐는 듯이 고압적인 말투, 그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을 마주하는 순간, 플로렌스 자작은 단꿈이 모두 홀딱 깨는 기분이었다.
“그, 그게…….”
플로렌스 자작의 눈이 쥐새끼처럼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랑제리의 문은 단단하게 잠겨 있었고, 이 자리에는 이안 타이론의 수족이 적어도 다섯은 있었다.
‘일부러 이쪽으로 몰아넣은 것이구나.’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이안 타이론은 이런 남자였다. 길들일 수 없는 한 마리 표범 같은 남자.
왜 잘 어르면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물러나야 해.’
뒤늦게 정신이 든 플로렌스 자작은 당장 넙죽 엎드렸다. 그리고는 겸손하다 못해 비굴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제 딸아이에게 볼일이 있어서요. 각하께 말씀드릴 건더기가 못 됩니다.”
그런 말들이 이안의 귀에는 바람 소리나 다름없었다. 오만한 주인에게 익숙한 시중인들이 ‘그래, 이게 정상이지.’라는 표정으로 의자를 플로렌스 자작의 앞에 놓았다.
이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건방진 자세가 찰떡처럼 잘 어울렸다.
꼰 다리 위에 손을 올리고 손톱을 들여다보며 이안이 운을 떼었다.
“파넬 공작가로부터 빚 독촉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아, 부,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굳이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파넬에서는 자신들이 상환을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
‘다 알고 있었군.’
이안이 이미 상황을 알고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슬그머니 괘씸함이 치밀어 올랐다.
‘따지고 보면 올리비아를 제가 채간 탓인데 뭐 이리 고압적이야?’
당연히 달려와서 미안하다고 고개를 조아려야지. 딸을 데려가도 되겠냐고 장인에게 의중도 묻고 말이다.
그냥 신랑과 신부 둘이서 마음에 든다고 저들끼리 홀랑 결혼하는 건 어느 나라 법이란 말인가!
‘하여간 올리비아 그 계집애는, 난잡한 핏줄은 속일 수가 없어.’
플로렌스 자작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안 보는 척, 예리하게 표정 변화를 살피고 있던 이안의 눈썹도 덩달아 비죽 솟았다. 저절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올리비아에게 할 이야기가 뭐였지? 상환에 관한 이야기 아니었나?”
“그건…….”
데굴데굴 굴리는 눈이 이게 대화를 해볼 만한 상대인가 재보는 게 분명했다.
이안은 살짝 다리를 들어 쾅 하고 뒷굽으로 바닥을 걷어찼다. 그리고 살짝 놀라 들썩이는 플로렌스 자작에게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 이야기는 나하고 하는 편이 나을 텐데.”
“네! 맞습니다.”
얄팍한 인간은 바로 태도를 바꾸어서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이안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빚만 다 갚아주면 되나?”
“그, 그리고.”
플로렌스 자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말하기엔 겁이 났으나, 이안 타이론이 다시 자신을 만나줄 거란 확신이 들지 않으니 지금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 플로렌스 가문의 사정이 좋지 않아서요.”
“그래서?”
“그, 그래서라고 하긴 뭐하지만 지원금을…….”
플로렌스 자작의 말에 이안의 반듯한 눈썹이 쓱 올라갔다.
“내가 왜?”
“그, 그거야, 제가 장인이고, 올리비아의 아버지이고…….”
지난하게 이어지는 뻔한 이야기를 이안이 가벼운 목소리로 끊었다.
“올리비아는 그대를 정말 싫어하던데.”
‘젠장! 역시 그 계집애가!’
플로렌스 자작의 이가 바드득 갈렸다. 하지만 지금 화가 났다는 걸 겉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
‘이게 마지막 기회야.’
그래도 올리비아 앞에서 자신을 이렇게 꿇리지 않고 장인 대접을 한 것을 보면, 올리비아와 사이가 좋은 건 분명했다. 플로렌스 자작은 납작 엎드려서 빠른 속도로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그 딸을 어떻게 키웠는데요!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그 아이는 아카데미를 졸업했습니다. 딸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누가 계집애에게 고등교육을 합니까?”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여자는 배워서는 안 된다는 케케묵은 사고방식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이안의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반면 그 얼굴을 다르게 해석한 플로렌스 자작이 변명이랍시고 또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무, 물론 저도 그 부분에서는 각하께 죄송하기도 하죠. 신부수업을 받지 못하고 보냈으니.”
“내 아내는 춤을 출 줄 모르더군.”
사실이 아니었다. 올리비아는 원래 상류계층으로 태어난 것처럼 춤을 우아하게 췄다.
“자수도, 사교 언어도, 초대장을 쓰는 법도.”
올리비아의 훌륭한 솜씨를 알면서도 이안이 굳이 교양을 들먹이는 건 순전히 넘겨짚은 것이었다.
‘이런 사람이 딸에게 그런 교육을 시켰을 리가 없어.’
“물론, 지참금도 없었지.”
“그, 그건.”
그리고 어리숙한 플로렌스 자작은 그 넘겨짚음에 훌륭하게 넘어가버렸다. 그는 웅얼웅얼 어리석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그 아이가 이렇게 상류계층과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대체 왜?”
그 변명도 이안을 납득시키기에는 무리였다. 이안은 미간에 주름을 지은 채로 물었다.
“귀족 영애의 혼사에는 부모의 의사가 제일 크게 반영되는데. 그대가 제대로 된 신랑감을 찾으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해석하면 되나?”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
목소리는 클지 몰라도, 딸에게 관심 없는 것은 확실했다.
‘올리비아가 미련이 없는 것도 당연하군.’
이안이 굳이 그와 이렇게 긴 시간 대화를 한 것은 그가 정말로 올리비아 곁에서 쳐내도 되는 사람인가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이봐.”
그리고 자신의 딸조차도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하는 플로렌스 자작의 모습을 보며, 이안은 결론을 내렸다.
“빚은 내가 갚아주지. 내 아내에게 괜한 추문이 붙는 건 싫으니.”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안의 긴 손가락이 반듯한 입술을 둥글게 반원을 그리듯 미끄러졌다. 뱀처럼 교활한 목소리가 은근히 자작의 귀를 울렸다.
“지원금은 그대가 하기에 달렸는데…….”
아둔한 자작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분주하게 눈을 깜빡이는 사이, 묵직한 금화 주머니가 쿵 하고 그의 앞에 떨어졌다.
“이건 그대가 수도에서 떠나는 대가야.”
“허억.”
갑자기 거금을, 현금으로 받게 된 자작의 손이 벌벌 떨렸다. 그런 그를, 미의 남신이 강림한 것같이 잘생긴 남자가, 표정 없는 얼굴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내 아내의 눈앞에 영영 나타나지 않는 대가는 얼마일 것 같아?”
* * *
플로렌스 자작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함께 왔던 막내딸의 존재는 아예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정말 피곤하군.’
이안은 손가락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황제의 신임을 받는, 이 나라에 몇 명 없는 공작이면서도 그가 굳이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었다.
‘저렇게 선명한 욕망은 보고만 있어도 피곤하단 말이야.’
그는 그런 사람들을 무척 싫어했다. 마주하고 있으면 자신의 에너지까지 모두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물론,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손안에 쥔 것처럼 잘 굴렸지만.
‘올리비아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내가 가진 것이 많다면 욕망이 투명한 사람을 다루는 건 쉽다. 그 욕망을 채워주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가진 게 없으면?
‘들들 볶아댔겠지.’
보아하니 제대로 된 혼처를 찾아줄 생각도 없었던 것 같던데, 그런 상태로 파넬 공작가에 시집을 가서 얼마나 구박을 받았을지 눈에 훤했다.
“부모님 안 계시죠? 그러니까 저랑 결혼해요.”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거군.’
무척 무례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후 사정을 꿰맞추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녀의 머릿속에는 시어머니 셋으로부터 탈출할 생각밖에 없었으리라.
“올리비아.”
이름을 부르자 돌아보는 희고 깨끗한 얼굴이 아름다웠다. 루비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이 선명했다.
‘사실…… 처음엔 그냥 외모가 마음에 들었던 건데.’
예쁘고, 당돌하고, 자세가 곧았다. 어차피 시달리기 싫어 결혼하는 것, 이 정도면 되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공작부인에 어울리는 모습이 되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까.’
춤도, 예법도 가르치지 않았다는 부모 밑에서 자란 그녀는 누가 봐도 완벽한 공작부인이었다.
그녀가 눈을 휘며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정말 고마워요, 이안.”
“말로만 말입니까?”
그녀를 향한 애잔한 마음이 흘러가 버릴까 봐, 이안이 일부러 장난스럽게 대꾸했을 때였다.
가느다란 손이 힘을 주어 이안의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체온은 이안보다 훨씬 서늘했다. 꼭 얼음조각 같은 그녀의 인상과 마찬가지로.
‘어라?’
마주치는 붉은 눈이 꼭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당돌한 미소를 베어 문 여자가, 뒤꿈치를 들고는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어?”
얼떨떨해진 이안이 멍하니 굳어졌을 때였다.
씨익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그녀는 동생의 팔짱을 끼고 물러나 버렸다.
두근.
혼자 남은 이안은 멍하니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입술이, 심장이 뜨거웠다.
꼭 그녀의 눈동자에서 불이 옮겨붙은 것처럼.
* * *
케닌은 퀭해진 눈으로 집무실 중앙에 앉아 있는 자신의 상사를 쳐다보았다.
‘아씨, 또냐.’
미의 남신이 강림한 것 같은 미남이 자신의 커다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지난번에는 미친 듯이 웃었지. 그다음에는 계속 부끄러워했고. 이번엔 뭐냐!’
무시하고 싶었지만, 저 넓은 등은 못 본 척하기에는 지나치게 존재감이 컸다. 케닌은 무슨 지옥의 문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이안의 등짝을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짓이든 해봐라! 나는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기합을 단단히 넣은 케닌은 저벅저벅 걸어서 이안의 앞에 섰다. 인기척을 느낀 이안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케닌.”
같은 남자도 홀릴 것 같은 잘생긴 얼굴이 그를 마주했다. 아주 작정을 한 건지, 눈가가 붉게 물들어서 무척 촉촉했다.
괜히 달래주고 싶은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케닌이 속으로 ‘저놈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다.’라고 되뇌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였다. 이안이 입을 벌려, 이렇게 말했다.
“너도 얼른 결혼해라.”
“컥!”
‘이젠 결혼 공격이냐?!’
이건 또 상상도 하지 못한 공격이었다. 무슨 명절에 고향 집에 찾아온 기분을 느끼며 케닌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결혼 절대 안 해요. 아무리 상관이라도 그런 간섭은 그만두시죠.”
케닌은 정말 독실한 독신주의였다. 부모님으로부터 결혼 이야기 듣는 것이 싫어서 고향에 안 내려간 지가 수년일 정도였다. 애초에 아카데미 수석졸업자로 여기저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던 그가 굳이 타이론 공작가를 택한 것은 타이론 공작이 독신주의자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이만큼 선을 그었으니 이제 말을 하지 않겠지.’
그냥 공적인 일에 대해서나 이야기하자. 그런 바람을 담아 상사를 쳐다보았을 때였다.
이안은 답지 않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마리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결혼이 정말 좋은데. 진짜진짜 좋은데. 이게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네.”
“아오오오!”
자세, 눈빛, 말투 뭐 하나 원래 이안 타이론과 어울리질 않아서 소름이 돋았다. 케닌은 괜히 울고 싶어졌다.
‘아니, 한때는 가장 듬직한 동지였던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세상이 다 변해도 이 사람만큼은 계속 독신일 거라 생각했건만.
‘진짜 여길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이안의 계속되는 올리비아 예찬을 들으며 케닌의 얼굴은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 * *
애니와 한 바퀴 정원을 돌고 온 다음에는 악기실에서 악기를 연주했다. 역시 예상대로 애니는 악기실을 무척 좋아했다.
“와, 신기해! 온갖 악기가 다 걸려 있네. 세상에! 이 바이올린 좀 봐! 세브람의 15번째 바이올린이야!”
아버지는 내게 교양에 관련된 것은 어떤 것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애니에게는 달랐다. 애니는 바이올린을 아주 잘 켰다.
놓여 있는 푹신한 의자에 앉으며 나는 애니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연주해보렴.”
“정말? 이거 연주해도 돼? 얼마에 낙찰받았을지 상상도 되질 않는걸?”
“안주인하고 함께 왔으니, 여기 있는 건 다 만져 봐도 돼. 부술 것도 아니잖니.”
“그건 그래.”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 애니는 척하니 바이올린을 어깨에 얹었다. 잠깐 음을 맞춰보듯 몇 번 쓱쓱 연주를 해보던 애니는 심호흡을 했다.
끼잉.
바이올린 소리가 듣기 좋았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무아지경으로 바이올린을 켜는 애니를 바라보았다.
‘악기라.’
나에겐 악기도 물론 좋은 추억이 없었다. 나는 악기 연주는커녕 제대로 감상하는 법도 몰랐고, 당연히 진상들은 그 부분을 비웃었다.
“제대로 된 귀족 부인이라면 힘들게 바깥일을 하고 온 남편을 악기 연주로 기쁘게 해줄 줄 알아야 하는 법이거늘.”
내 약점이 하나둘이 아니었지만, 악기 연주는 가장 큰 약점이었다.
연습해서 실력이 늘던 다른 것들과 달리, 악기는 쉽사리 늘지 않았다. 마흔이 되고, 파넬 공작부인으로 정점에 섰을 때도.
‘애니에게는 참 다행인 일이야.’
나중에 혼인을 한 뒤에도 애니가 저런 것들로 책잡힐 일은 없을 테니 다행이었다.
조금 있으니 애니가 숨을 헐떡이며 바이올린을 내려놓았다. 나는 짝짝짝 손뼉을 쳐주었다.
“멋진 연주였어. 보라첼리 경도 무덤에서 뛰쳐나올걸.”
“어?”
애니가 연주한 노래가 보라첼리 경이 만든 소나티네 6번이어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내 말에 애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언니가 어떻게 알아? 원래 음악에는 관심이 없었잖아.”
“내가 그랬던가?”
애니의 격한 반응에 나는 덩달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까지 반응할 정도로 음악에 냉담했나.’
기억을 뒤져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내가 애니와 보낸 유년 시절은 지금 나에게는 20년이나 전 이야기니까. 내 반응에 애니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대놓고 돈 낭비라고 했었잖아. 레슨비는 비싸고, 관람료도 너무 높아서 우리 사정에는 무리라고.”
“어어…….”
그렇게까지 직설적이었냐, 나.
과거의 발언들이 흑역사가 되어서 나를 바늘처럼 콕콕 찔러댔다. 내가 떨떠름해하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였을 때였다.
애니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시 한번 결혼한 거 축하해, 언니. 형부를 만나고 언니가 여유로워진 거 같아서 제일 좋아.”
“……그래.”
나는 뺨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애니의 말은 어린아이답게 투박했지만, 정곡을 찔렀다.
‘여유라.’
전생의 나도 공작부인이었지만,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다. 동생을 공작저로 초대도 하지 못했고, 지금처럼 다정하게 대화할 시간도 가지지 못했다.
‘이런 게 여유겠지.’
사소한 농담을 건네고, 악기 연주도 하고, 또 그 연주를 듣고.
‘이안이 내게 준 여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이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맞아. 이안은 좋은 사람이야.”
“헤헤.”
내 대답을 들은 애니가 혀를 내밀고 웃었다.
악기 연주를 하고,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었다.
“주인님께서는 밀린 일이 많아서 저녁 식사에는 참석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안은 눈치 좋게 빠져주었다. 나중에 진심으로 감사 표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먹은 뒤, 우리는 사이좋게 커플 잠옷을 입고 잠자리에 들었다. 일찍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든 것은 하늘이 한참 캄캄해진 깊은 밤이었다. 할 이야기가 잔뜩 있었기 때문이다.
애니는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 목걸이 차고 있네? 예전에는 촌스러워서 싫다고 하더니.”
“그러니까.”
나는 손가락으로 물방울 모양의 크리스털을 만지작거렸다. 전생에는 애니의 말대로 자주 착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잃어버렸다.
‘무식한 진상이 집어던졌었지.’
제 아들처럼 힘만 센 여자라, 창밖으로 던지니 눈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날아갔다. 파넬 공작가의 정원은 무척 넓어서, 수풀 속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몰라.’
목에 걸고 있었으면 날아가는 일이 없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이젠 잘 차고 다닐 거야.”
“잘 생각했어. 그건 어머니가 언니한테만 남긴 거잖아. 다른 형제들 말고.”
애니의 목소리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묻어났다. 나는 대답 대신 동생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내려간 우리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아버지가 고향으로 내려가셨다고요?”
“네. 여기 서신이 있습니다.”
아침임에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머리를 뒤로 넘기고, 단정한 셔츠에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친 이안이 한 장의 서신을 내게 넘겨주었다.
-내 딸 올리비아에게.
고향에 계신 형님이 편찮으셔서 나를 유언 집행자로 부르시는 바람에 급하게 가봐야겠구나. 내가 올 때까지 애니를 잘 부탁한다.
‘고향에 계신 형님?’
우리 아버지한테 형제가 있었나? 친가와는 왕래가 없다시피 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지난 생에도 이 무렵에는 파넬 공작가에서 몸종처럼 구르느라 플로렌스 가문에 일어난 일은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하필 유언 집행자로 우리 아버지라니?’
하지만 아버지가 이런 걸로 내게 거짓말을 할 리도 없지 않은가. 이 편지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하니 얼굴도 모르는 큰아버지가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보나 마나 무슨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려나 희희낙락해서 달려갔겠군. 급한 일이라고 달려갔다니, 이해가 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묘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이안에게 물었다.
“그래서 아버지랑은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어요?”
“뭐가요?”
“파넬 공작가에서 빚을 갚으라고 하고 있다면서요. 보나 마나 당신에게 갚아달라고 했을 텐데.”
“그건 파넬 공작가 측과 직접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흥.”
길길이 뛰고 있을 진상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이안에게 말했다.
“지고 오면 안 돼요.”
“네?”
“파넬 공작가랑 싸워서 지면 안 된다고요.”
“뭐라고요? 하하하.”
농담이 아니었는데 이안은 세상 재미난 말을 들었다는 듯이 껄껄 웃어댔다. 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니, 진짜 지고 오면 안 되는데.’
우아한 진상이 뭐라고 할지가 뻔했다.
‘그냥 빚만 갚는 게 아니라 자기들의 명예가 훼손되었으니 물어내라고 하겠지.’
물어내라고 하고 싶은 쪽은 나였다. 원하지도 않는 결혼으로 희생된 내 인생은 어떻게 할 건데?
‘내 지난 세월도 보상 못 받는데 돈까지 뜯기면 나 그 꼴 못 봐!’
그리 생각하며 내가 시근거릴 때였다. 이안은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동생이랑 쇼핑이라도 다녀오면 어때요? 처제가 꽤 오래 타이론 공작가에 머물 것 같은데요.”
“아, 그러네요.”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또랑또랑 뜨고 있는 내 동생을 마주 보았다.
‘잠깐 방문인 줄 알고 아무것도 안 들고 왔지.’
심지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어제 입고 온 외출복 그대로였다.
‘옷이랑 이것저것 사긴 사야 하는데.’
하지만 그건 다시 또 타이론 공작가의 신세를 지는 거잖아.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하지만 물건은 제 것을 사용하면 되고.”
“괜찮으니까 다녀와요, 올리비아. 아니면 저랑 같이 갈까요?”
“네? 그건…….”
나는 이안의 쇼핑 스타일을 알았다. 이것저것 눈이 핑핑 돌 정도로 꺼내고는 막판에 ‘다 줘.’라고 말하지.
‘그건 절대 안 돼!’
보석 때도 민망했는데, 동생 물건들까지 그런 식이면 나는 자존심이 상해서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절대로 애니와 둘이 갈 거라고 강하게 말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애니가 갑자기 식탁에 두 손을 올리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아, 언니. 갑자기 나 머리가 어지러워. 토할 것 같아.”
나는 깜짝 놀라서 애니의 어깨를 붙들었다.
“뭐라고, 애니? 왜 그래? 찬물 가져다줄까?”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 같아. 어제 긴장했더니.”
“아아.”
갑자기 타이론 공작가로 초대를 받아서 성질 더러운 아버지와 오게 되었으니 얼마나 긴장했을지 알 만했다.
별로 아프지 않다는 사실에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애니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오늘은 형부랑 쇼핑 다녀와. 알았지?”
“응?”
“그래요, 처제. 집에서 쉬도록 해요. 내 집처럼 편안하게.”
“네, 형부!”
“응?”
눈 깜짝하는 사이 이안과 애니가 사이좋게 한 마디를 주고받았다.
‘어라? 그럼 나랑 이안이랑 둘이 나가는 거야?’
뭔가 얼렁뚱땅 휘말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외출이 결정되어버렸다. 남색 바탕에 흰 줄무늬가 있는 드레스에 몸을 끼워 넣으며, 나는 걱정스럽게 애니를 바라보았다.
“정말 혼자 있어도 되겠어?”
애니는 내 침대에 편안한 잠옷을 차려입고 앉아 있었다. 내가 자꾸 흘금대자, 애니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내가 무슨 아기도 아니고.”
“몇 살을 먹어도 넌 내게 아기 같을 거야.”
“어머, 난 그럼 우리 언니랑 평생 살아야겠네.”
“뭐라고.”
나는 농담을 하는 동생을 살짝 끌어안아 주었다. 이맘때의 애니를 안아준 기억이 없었기에, 괜스레 마음이 쓰라렸다.
“말이라도 고맙다.”
“엥? 왜 그래, 언니. 할머니같이.”
“후후.”
나는 애니에게 운명의 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난 생에서, 나락에 빠질 뻔한 애니를 구해준 남자.
‘분명 이번 생에도 열렬히 애니를 사랑하고 있겠지.’
지난 생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는 역경이 지나치게 많았다.
이번 생에는 두 사람이 보다 상처 없이,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아프면 움직이지 말고 누워 있고, 책은 하녀들에게 가져다 달라고 말하면 줄 테니까 꼭 하녀들 시키고, 배고프면 참지 말고…….”
“알았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얼른 다녀와.”
“응.”
나는 애니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고 나왔다.
“올리비아.”
이미 밖에는 단정한 남색 정장을 차려입은 이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슷한 색의 납작한 보울러 모자까지 꾹 눌러쓴 차림이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옷 입는 센스가 좋아.’
내가 꺼내주는 대로, 자기가 만국기 같은 꼴인 줄도 모르고 입던 제임스와는 딴판이었다. 이안은 자기가 잘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대범하게 아이템을 선택했는데, 그게 또 잘 어울렸다.
‘아오, 너무 완벽하니까 괜히 얄밉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저렇게까지 차려입었나 싶었다. 내가 괜히 입술을 삐죽일 때였다. 이제 한 걸음 앞으로 가까워진 그가 나를 향해 팔짱을 내밀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아이고.”
어쩜 이렇게 달달한 소리도 잘하는지. 나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에스코트는 사양해야겠네요. 이미 남편이 있는 몸이어서요.”
“그 운이 좋은 남자의 이름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뻔뻔하다는 소리 많이 듣죠?”
“전혀.”
내가 팔짱을 끼지 않자, 그가 덥석 손을 뻗어서는 내 손을 깍지를 끼어 단단히 쥐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손에 힘을 풀었다.
“내 동생 물건이니까 제가 고를 거예요. 절대 나서면 안 돼요.”
“그렇게 신신당부하지 않아도 나서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나는 처제에 대해 잘 모르는걸요.”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저에 대한 불신이 이렇게 뿌리 깊은 줄은 몰랐군요.”
손을 잡고 조금 걸어 나오니 이미 마차가 문을 활짝 열고 대기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먼저 올라타려던 나는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
내가 오늘 입고 나온 드레스는 거의 다리에 바짝 달라붙어 허리부터 무릎까지의 라인을 살리는 디자인이었다.
그렇다 보니 막상 마차에 올라타려는데 다리가 벌어지지 않았다.
‘어쩌지.’
이런 기본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드레스를 고르다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굳어진 것처럼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내가 머뭇거릴 때였다.
“하여간.”
이안이 짧게 혀를 차며 내 허리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꼭 인간 깃털이 된 것 같았다. 내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그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그가 살짝 눈을 찡그리며 내게 말했다.
“남편분이 굉장히 힘이 세시다고 하던데, 좀 믿지 그래요?”
스스로를 3인칭으로 칭하는 뻔뻔함이 조금 웃겼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힘이 세다는 건 순전히 본인 주장일 텐데요.”
“네네, 본인한테 들었거든요. 그리고 혹시 자기 부인을 만나면 이렇게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내 지적을 그는 넉살 좋게 받아넘겼다.
“늘 스스로 해결하려는 모습이 멋진 건 아는데, 나한테는 기대도 된다고요.”
“…….”
그 말이 괜히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동안 나는 내 일은 뭐든 내가 해결했다. 주변에서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 나를 챙기는 건데.’
지금까지 언제나 혼자 하는 게 편했는데, 이제는 내가 알아서 내 앞가림하는 것이 당연해졌는데, 왜 이 남자는 이렇게 상냥한 말을 하는 걸까.
어제에 이어서 꼴사납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목 끝까지 올라온 뜨거운 열 덩어리를 꾹 삼켰다. 그리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심하죠.”
“좋습니다.”
내 대답에 그는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꼭 여름 하늘처럼 상쾌한 미소였다.
그는 훌쩍 마차에 올라서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창틀에 턱을 괴며 여유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정말 고맙다고 생각하면 꼭 보답은 키스로 해주십시오.”
“그건 못 들은 걸로 할게요.”
‘하여간 받아주면 한없이 기어오르지.’
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물론 예전처럼 사나운 눈빛은 아니었다.
마차 문이 닫히고 마부가 마부석에 오르느라 마차가 잠시 들썩였다. 이안이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그럼 제일 먼저 어딜 갈까요?”
“어디냐니 당연히…….”
습관적으로 ‘고슈 백화점으로 가야죠.’라고 대답하려던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백화점이라는 것이 수도에 없구나.’
고슈 백화점(Department store Gauche)은 제국 최초의 백화점으로 설립자가 외국인이라 고슈라는 이국적인 이름이 붙었다.
‘아마도 오르세 왕국 사람이었지.’
누구였는지는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가 이 나라를 찾은 것은 내가 한참 첫째를 출산하고 사경을 헤맬 때였으니까.
‘아마 잃어버린 딸을 찾아 떠돌고 있다고 했지.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고.’
딸을 찾으러 와서 백화점을 만들고 가다니, 누군지 몰라도 부지런함이 병인 사람이었다.
‘하여간 정신 번쩍 차려야지. 이런 식으로 사소한 말실수를 자꾸 하면 이 남자는 알아차릴 거야. 예리하니까.’
나는 슬쩍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이안은 내 침묵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죠, 올리비아? 일단 의상실로 갈까요?”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안에게 내가 회귀자이며, 내 안에 마흔 살 여자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언제까지고 비밀로 할 셈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조금 바뀌었다. 어제까지는 말해봤자 정신이 나간 여자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이유로 그랬다면.
‘내가 과거를 말하면 이 남자는 분명 날 싫어하게 되겠지?’
지금은 나를 향한 저 따뜻한 눈빛이, 상냥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질까 두려움이 앞섰다.
“……좋아요.”
‘절대 말하지 말아야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나는 조금 더 마음의 빗장을 세게 잠갔다.
* * *
마차가 향한 곳은 지난번 내 타이론 공작가로 찾아와 내 옷을 재단했던 의상실이었다.
우리가 직접 올 줄 몰랐는지, 재단사는 무척 당혹스러워하며 입구까지 맨발로 뛰어나왔다.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타이론 공작 각하, 공작부인.”
그의 태도에 나는 잠시 당혹스러워하다가, 내 옷방으로 잔뜩 들어가던 옷들을 떠올리며 납득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주인이 이렇게 극진히 굽실거리자, 의상실에서 일하던 다른 직원들도 덩달아 허리를 숙였다.
나는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레디메이드 옷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유명한 곳이었구나.’
유행이 빨리 지나는 의류업계에서는 기완성품이 많이 걸려 있으면 걸려 있을수록 인기가 많은 의상실이라는 증거였다.
‘확실히 20년 전이라 그런가 내 눈에는 좀 촌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의상실을 휘 둘러보았을 때였다. 재단사가 굽신거리며 물었다.
“지난번 주문하신 의상들은 어떠셨나요?”
지난번 주문한 것들?
‘좋았지. 죄 내가 좋아하는 색들이었고.’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 오늘 입은 옷은 이안과 색을 맞추느라 그때 맞춘 옷이 아니었다.
나는 불안해하는 재단사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괜찮았네.”
적당히 위엄 있는 공작부인다운 대응이었는데, 그 순간 내 팔짱을 끼고 걷고 있던 이안이 빙글 방향을 바꾸는 것 아닌가.
나는 당황한 나머지 그의 팔에 완전히 내 몸을 맡기고 빠른 걸음으로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
“어? 이안, 어디 가요?”
그의 대답은 태연스럽기 그지없었다.
“나가는데요?”
“왜요? 우리 방금 왔는데.”
“당신이 별로라고 했지 않습니까.”
“네?”
그의 대답은 그의 청력을 의심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힘을 주어 버텼다. 세심한 남자답게 그는 바로 걸음을 멈추고 나를 마주 보았다.
나는 팔짱을 풀고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꽉 붙들고 물었다.
“당신 귀 안 들려요? 아님 심각한 언어장애가 있다든가.”
“정상입니다.”
내 대답 하나로 휙 돌아서는 모습이 영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나와 마주하고 있던 그가 살짝 눈을 내리깔아 내 시선을 피했다. 그의 흰 뺨이 그의 입술 색처럼 연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게…….”
도대체 뭔 이유인데 이렇게 수줍어하면서 운을 뗀단 말인가.
‘어디 들어나 보자.’
내가 더더욱 그의 얼굴을 붙들고 있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그가 끝까지 나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는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내 부인이 사용하는 것인데, 괜찮았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아이고!”
아니, 그럼! 내가 ‘괜찮았네.’라고 대답해서 안 좋다는 걸로 듣고 바로 뒤돌아 나간 거야?!
‘이 세상에 팔불출이라고 광고할 셈인가!’
무슨 콘셉트인가, 계략인가 했더니, 말간 눈동자가 송아지처럼 끔뻑인다.
나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재단사에게 말했다.
“각하께서 이렇게 철이 없네. 못 들은 걸로 하게.”
“네? 네!”
재단사는 냉큼 나의 변명을 받아들였다. 순간 기가 빨렸던 나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이안이 강아지처럼 눈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제가 철이 없습니까?”
“당연하죠! 세상 어느 귀부인이 ‘최고예요! 정말 좋아요!’라고 대답하나요. 괜찮다는 건 좋다는 뜻이에요.”
“그래요?”
히죽 웃는 얼굴이 귀여워서 나는 신경질과 사랑스러움이 어지럽게 섞이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차라리 웃지 마.’
퉁명스럽게 그렇게 대꾸하려고 입술을 막 벌렸을 때였다. 그가 빙글빙글 웃으며 내게 물었다.
“그럼 당신 남편은 어떻습니까?”
내 얼굴이 코 푼 휴지처럼 와작 일그러졌다.
‘나는 어떻습니까? 라고 물으면 되지, 뭔 남편이야.’
나는 그를 흘겨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또 3인칭 놀이예요? 끈질긴 남자는 인기 없는 거 아시죠?”
“빨리요.”
“아…….”
칭얼거리는 폼이 내가 대답할 때까지 버틸 셈으로 보였다. 오만상을 다 쓰고 그를 흘겨보고 있던 나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귀 좀 대봐요.”
“네.”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가까이 내게 들이미는데 무슨 천사가 내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저희 남편은…….”
순순히 내게 내밀어지는 귓가에 운을 떼었던 나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밤에 제일 괜찮아요.”
“……지금 저 유혹하는 겁니까?”
이안의 푸른 눈동자가 파르스름하게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나를 꽉 붙들려는 손을 피해 휘리릭 두 걸음 물러나며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맘대로 생각하세요.”
언젠가 마주한 적 있는 갈증으로 가득 찬 눈빛이 나를 잡아먹을 듯 응시했다.
‘위험해.’
그를 더 이상 자극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를 조금 더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대체로 이안을 마주하면 이런 식이었다. 감정이 엉망으로 뒤죽박죽 섞인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그게 애니가 말하던 여유라는 걸까. 나는 몸을 슬쩍 돌려 의상실 안쪽으로 들어가며 손가락으로 진분홍색 벨벳 소파를 가리켰다.
“그럼 저는 애니의 옷을 고를 테니까 잠시 앉아 계세요.”
“네네. 얌전히 앉아 있겠습니다.”
나는 이안이 순순히 소파에 앉는 모습까지 지켜본 뒤, 재단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동생의 옷을 고르러 왔네. 시간이 없어서 그냥 완성된 옷들 중에서 고르려고 하는데.”
“동생분의 신체 사이즈가 대략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아시나요?”
“내 동생은 키가…….”
내 경험상 남자들은 대부분 쇼핑을 싫어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애니의 옷가지를 구입해야 했다.
나는 빠르게 애니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전달했고, 재단사는 완성된 옷들을 모두 꺼내왔다.
* * *
아버지는 장례식에 가셨으니 아마도 50일 정도는 오지 못할 것이다. 50일 동안 입을 옷과 속옷, 모자, 양말 따위를 고르다 보니 아무리 척척 골라도 시간이 꽤 걸렸다.
‘이안도 짜증이 났겠지?’
잘 모르겠다. 제임스는 아예 내가 쇼핑하는 데 따라온 적이 없고.
‘하지만 먼저 쇼핑을 하자고 한 건 이안인데.’
보석상에서도 그가 직접 찾아온 것이 신기하지 않은 눈치였다. 이미 몇 번 찾아왔다는 듯이 말이다.
‘설마 쇼핑을 좋아하나?’
잘 모르겠다.
‘이따가 물어봐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내가 막 의상실 입구로 나섰을 때였다. 나는 물론이고 재단사도 입을 떡 벌렸다.
“이, 이게 뭐죠?”
색색의 비단과 온갖 종류의 천이 발을 디딜 수 있는 장소마다 널려 있었다. 연한 분홍색, 크림색, 연한 노란색, 산호색, 민트색 등등등.
범인이 누군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널려 있는 천들이 특정 스팟을 중심으로 널려 있으니까.
바로 이안이 앉아 있는 소파였다!
“끝났습니까?”
이 난리통에 그는 홀로 여유작작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디자인지와 천을 나르는 직원들만 분주했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얌전히 앉아 있으라고 했죠! 이게 다 뭐예요!”
“얌전히 있었는데.”
내 말에 이안이 특유의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툭 하고 들고 있던 디자인지를 튕겼다.
“가만히 숨만 쉰다고는 안 했잖습니까. 당신 말대로 얌전히 앉아서 카탈로그를 봤을 뿐입니다. 그런데 당신한테 어울리는 디자인들이 눈에 들어와서 하나둘 고르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네.’
한숨 같은 말이 귓가를 울렸다. 내가 발을 동동 구르니 직원이 서둘러서 내 앞의 천들을 치워주었다. 요정 같은 느낌의 오간자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냥, 어림잡아도 10벌 이상.
10벌이 뭐냐, 20벌도 넘을 거 같았다.
“아이고!”
왜 이 남자는 금전 감각이 이 모양이란 말인가.
나는 아직 치워지지 않은 천은 발로 쓱쓱 밀어가면서 이안의 앞에 허리에 손을 올리고 섰다. 그리고 뾰족한 어조로 말했다.
“진짜 이렇게 말 안 듣기예요? 엉덩이라도 맞아야 말 들을 거예요? 지난번에 맞춘 옷들도 아직 한 번도 안 입었다고요.”
내 취향대로 고른 와인색에 산호색 드레스들이 옷장에서 빛을 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과소비야. 게다가 옷은 유행이 빨리 지난다고.’
입지도 못하고 이대로 유행이 지나서 버려야 할 수도 있었다.
‘이번에는 꼭 화를 내야지.’
그리 다짐했건만, 묘하게 빨개진 얼굴로 이안이 중얼거리는 꼴을 보니 화가 푸시시 식어버렸다.
“엉덩이…….”
“이상한 부분에 의미 부여하지 말고!”
정말 마조히스트야?
‘왜 이런 말에 늘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이안이 눈을 내리깔고 부끄러워하자 분위기가 이상해져 버렸다. 나는 나대로 화르륵 달아오른 얼굴에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했다.
조금 어색함이 가시고 나자, 이안이 내 곁으로 걸어왔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하여간 나 이런 과소비 좋아하지 않아요. 그만둬요.”
“과소비가 왜 문제입니까?”
“네? 그걸 몰라서 물어요? 당연히 낭비니까 그렇지요. 투자하면 돈이 늘어난다고요.”
내 잔소리에 이안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투자는 충분히 하고 있는데. 이건 제 용돈 수준이고.”
“네?”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돈 수준?’
뜻밖의 말에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 이안이 진지하게 턱을 짚고 말했다.
“낭비는, 없는 돈을 쥐어짜서 쓸데없는 데 쓸 때 쓰는 말이잖습니까. 저는 돈도 많고, 내 아내에게 사용되는 돈은 쓸데없는 돈이 아니죠.”
“아니…….”
순간 혼란이 밀려왔다.
하긴 내가 말하는 과소비는 철저하게 내 기준이잖아?
‘아니, 타이론 가문의 재력이 확실히 크긴 하잖아. 내가 괜한 잔소리를 하는 건가?’
하지만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펑펑 의미 없이 쓰는 것이 옳은가.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나대로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돈을 쓰고 싶어 하는데요? 쇼핑 좋아해요?”
“네, 좋아합니다.”
이안의 대답은 굉장히 빨랐다. 그는 살짝 삐뚤어진 모자를 고쳐 쓰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침마다 스타일이 달라진 나를 보며 짜릿함을 느끼고 있죠.”
‘역시 알고 있구나. 자기가 잘생긴 거.’
그가 잘생긴 건 사실인데 저리 뻔뻔하게 구니 왠지 재수 없었다.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모자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이번에는 내 귀를 만지작거렸다. 둥근 진주 귀걸이가 구슬처럼 그의 손끝을 굴렀다.
“근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라, 솔직히 이제 슬슬 시시하고 재미가 없었는데.”
은근한 손짓에 내가 입술을 삐죽이며 그를 마주 보았을 때였다. 푸른 눈이 깊은 바다처럼 일렁였다.
꼭 나를 낚아채서 물속으로 끌어들일 것 같은 눈빛이었다.
“당신을 꾸미는 건 질리지 않을 거 같아요.”
그가 저런 눈으로 날 응시할 때마다 마음 전체를 다 헤집는 기분이었다.
나는 슬쩍 그의 손을 밀어냈다.
“헛소리 말아요.”
매정한 내 대꾸에도 그는 기가 죽기는커녕 개구쟁이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스르륵 내려가는 손가락 사이로 내 머리카락이 걸렸다.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하시니 이참에 더 고백해보자면, 언젠가 그 아름다운 머리도 바꿔보고 싶습니다.”
머리?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곱슬머리를 좋아하세요?”
“절대 아닙니다.”
그 단호한 대답을 듣는 순간 떠올랐던 건 레스토랑에서 만난 타오르는 불꽃 같은 진한 곱슬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더 떠올리기 전에, 그가 성큼 내게 다가왔다. 뜨거운 체온을 담은 손바닥이 내 얼굴을 감쌌다.
“그냥 당신은 얼굴이 작아서 단발머리도 잘 어울릴 것 같아.”
두근.
가까운 접촉에 저절로 심장이 뛰었다.
‘단발이라니.’
태어나서 나는 단 한 번도 머리를 짧게 잘라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늘 허리에서 찰랑거리는 머리가 여자의 상징이라고 믿는 사람이었으니까.
‘공작부인이 되어서는 더더욱 머리를 자를 수가 없었고.’
공작부인이라는 위치가 가지는 이미지는 꼿꼿하고 우아한 귀부인이다 보니, 나는 늘 머리를 틀어 올렸다.
나는 살짝 고개를 흔들어 이안의 손바닥을 물리며 대답했다.
“머리를 자르면 위엄이 없어 보여요.”
“당신은 젊지 않습니까. 위엄 있는 공작부인보다 젊고 감각 있는 공작부인인 게 당연하죠.”
뜨끔.
그 지적에는 괜히 가슴 한구석이 뜨끔했다.
‘내가 생각하는 공작부인의 이미지가 내 지금과 맞지 않는지도.’
나에게는 지나버린 시간인지라, 이 나이대에 알맞은 이미지가 무엇인지 떠오르질 않았다.
어쨌든 내 동생의 옷도, 나의 옷도 쇼핑이 끝났다.
“결제는 늘 하던 대로.”
내가 내 이미지에 대해 혼란해 하는 사이 이안이 재단사를 불러 옷값들을 지불했다. 그리고는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우리는 그럼 얼른 가보도록 합시다. 처제에게 필요한 게 잔뜩 있으니까요.”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냉큼 따라가기에는 이제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얌전히 있을 거죠?”
“약속합니다.”
“꼭이에요.”
“네!”
이안은 무척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마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서점, 그리고 애니가 쓸 필기구, 노트, 구두 가게 등이었다.
이안은 약속을 아주 잘 지켰다. 적어도 그는 ‘애니의 물건’을 고르는 데는 얌전했다. 어디까지나 애니의 물건에서만!
“당신 말은 절대 안 믿어!”
버럭 소리를 지르는 나를 보며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손에는 크리스털이 잔뜩 박힌 분홍색 펜이 들려 있었다.
“왜요? 나는 내 쇼핑을 즐기고 있는데.”
뻔뻔하게 대답하는 모습에 내 말문까지 막혔다. 뒤집히는 내 속도 모르고 점원은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다.
“어쩜, 두 분 금실이 아주 좋으시네요! 이렇게 다정한 남편분은 처음 봐요.”
“허허.”
이렇게 말을 안 듣는 남편이 처음은 아니고요?
차마 그렇게 반문은 하지 못하고 나는 힘없이 웃기만 했다.
다시 저택으로 돌아올 무렵에 나는 잘 말린 오징어처럼 노릇노릇해졌다.
쇼핑이 이렇게 사람의 진을 쪽 뺄 수 있다는 사실을 40년 만에 처음으로 알았다.
돈을 아껴 사용해라, 그런 건 필요 없다, 그만 사라, 너무 많이 사지 마라, 등등.
‘잔소리도 한두 번이지.’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나는 마차 소파에 늘어지듯 붙어서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안을 응시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그게 내 돈이냐, 네 돈이지.’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니, 잠깐! 내가 이제 타이론 가문의 안주인이니 엄연히 내 돈이기도 하잖아!’
이걸 어느 정도 고삐를 죌 것인가. 제임스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생의 기억이 도움이 되질 않았다.
‘하긴, 제임스도 무기를 구입할 때는 돈을 아끼지 않았지.’
사교모임도 없고, 황궁에서 부르지 않으면 늘 집에 붙어 있는 제임스가 딱 하나 돈을 쓸 때는 바로 자신의 무기를 살 때였다.
온갖 보검들, 마법 아티펙트들의 가격은 눈이 돌아갈 정도였지만 그가 유일하게 사고 싶어 하는 것이라 딱히 제지하지 않았더란다.
‘이 남자의 경우에는 쇼핑이 취미일지도 몰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을 쳐다보았다. 잘생긴 얼굴, 푸른 눈과 잘 어울리는 남색 정장에, 타이는 남자가 쉬이 소화하기 어려운 페이즐리 무늬였다. 구두부터 부토니에까지 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 이 남자의 경우에는 꾸밈비가 많이 드는 것뿐이야. 좀 과하게 많지만, 가문의 재산 규모가 더 크니 용납할 수준이지.’
퍼센트로 계산하면 제임스나 이안이나 비슷비슷하리라. 그리 생각하며 이 상황을 내가 합리화했을 때였다.
이안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당신을 꾸미는 건 질리지 않을 거 같습니다.”
저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거울이나 실컷 들여다볼 것이지. 왜 남의 얼굴을 그렇게 꼼꼼히 쳐다본데.’
부끄러우니 뾰족한 생각이 퐁퐁 솟아났다. 나는 자꾸 화끈거리는 뺨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이안에게 부끄러워하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역효과였다. 내 뺨을 매만지던 손길이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얼굴이 마음에 들었나.’
계속 그랬지. 처음 나를 만나서,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들었음에도 마음이 동했던 이유.
내 얼굴이 취향이었다고.
‘그런다고 돈을 펑펑 쓰면 어떻게 해? 그럼 맘에 드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쇼핑하러 다닐 거야? 이 가게, 저 가게 헤매면서?’
툴툴거리다 보니 오늘의 동선이 떠올랐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수도를 한 바퀴 돌다시피 했다. 사야 하는 상점들이 모두 뚝뚝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곳에 뭉쳐 있으면 시간도 절약할 수 있을 텐데. 오히려 한 곳에서 물건을 사다 보면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파악하게 될 수도 있어.’
지금 계속 한 곳 들러서 잔뜩 사고, 또 다른 곳으로 가니 전 가게에서 산 건 까먹고 또 산더미처럼 사고 그랬지 않나.
‘역시 백화점이 있어야겠어. 앞으로도 이안이 이렇게 같이 쇼핑을 가자고 조를 것 같은데.’
내 다리와 정신의 안녕을 위해서도 백화점은 필요했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서 이안을 불렀다.
“있잖아요, 이안.”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이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른하면서도 어쩐지 시큰둥해 보이는 시선에서 나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지. 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그는 턱을 괴고 시큰둥한 표정이었고.’
하지만 관계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가까웠다. 나는 나를 담는 푸른 눈동자의 온기가 확연히 다름을 알고 있었다.
나를 존중하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
그렇기에, 나는 용기를 내어 말할 수 있었다.
“우리 사업을 하면 어때요? 타이론의 재력과 당신의 적성을 살릴 수 있는 사업.”
“내 적성?”
내 말을 들은 이안의 눈가가 살짝 찡그려졌다. 그리고는 이내 픽 하고 웃었다.
둥근 아몬드형의 눈이 나를 응시했다. 부드러운 곡선이지만, 그리 녹록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당신은 참 훌륭한 낚시꾼입니다. 한마디씩 혹할 만한 말을 섞는단 말이지.”
나는 대답 없이 살짝 어깨를 으쓱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내 도도한 태도에 마음이 동한 듯 이안이 상체를 내 쪽으로 내밀며 물었다.
“그래서 내 적성을 살릴 수 있는 사업이 뭡니까?”
이미 반쯤 넘어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자신감 있는 태도로 이안에게 사업을 설명했다.
“백화점이란 걸 만들면 어때요?”
백화점.
말 그대로 모든 물건을 한곳에 다 모아둔 곳.
추가로 내 설명을 들은 이안이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로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그거…….”
나는 투자자를 모집하는 사업가의 마음이 되어서 이안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조금 뜸을 들이고 반듯하고 예쁜 입술이 벌어졌다.
“대단한 생각이네요.”
‘휴.’
그의 환한 미소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이안은 눈을 반짝거리며 조금 빠른 어조로 말했다.
“집에 돌아가는 대로 케닌에게 사업성 분석을 맡기도록 할게요. 상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도록 합시다.”
“네.”
그의 반응은 생각보다 긍정적이었다.
한참 뒤, 오르세에서 온 외국 상인이 백화점을 만들 때도 귀족들 반응이 이렇게 긍정적이지 않았는데.
‘천박한 평민들이나 이용할 거라고 했었지. 결국 가장 많이 호응을 보인 건 귀족들이었지만.’
어쨌든 그만큼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리는 것이 백화점이었다. 높은 귀족일수록 사람을 집으로 부르는 걸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건 순전히 이안이 쇼핑을 좋아하기에 걸어본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나의 말을 무시하지 않은 그의 인품 덕분이기도 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줘서.”
“천만에요.”
내 말에 이안은 손을 뻗어서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인지 손바닥이 축축했다.
“나를 믿고 이야기해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듬직하고 믿을 수 있어 보였다.
* * *
그렇게 본격적으로 백화점 사업에 대한 검토가 시작되었다. 나는 바쁠 것이 없었다. 아이디어만 제공하는 것이지, 실제 사업안은 실무자들이 짜는 거니까.
“좋은 생각이긴 한데, 수도 땅값이 이미 너무 올라 있어서 수익이 맞을까 모르겠습니다.”
“초기 과감한 투자가 중요해요. 동시에 타이론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죠.”
“흠.”
이안의 수석보좌관이라는 케닌은 유능한 사내였다. 대화에 군더더기도 없고, 어떤 편견도 없어서 나도 한결 편안하게 의견을 낼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또한 그런 인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백화점 계획안이 마무리될 무렵, 그는 진지하게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 각하 보좌관 때려치우고 마님 보좌관 해도 됩니까?”
“네?”
어이없는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의 사소한 농담은 농담을 농담이 아니게 받아들인 이안 덕분에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케닌, 너 감봉.”
“농담이었습니다, 각하. 저는 각하께 충성을 바친 몸이지요.”
“자본주의식 충성 말이지?”
만담 비스무레한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대략 타이론 가문의 사업들이 어떤 분위기 속에서 굴러가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어쨌든 백화점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고, 내게 가장 가까이 닥친 문제는 바로 애니의 기숙학교였다.
‘아버지가 마침 안 계시니 내 맘대로 해도 될 것 같은데.’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버지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오질 않았다. 하루 이틀 즐겁게 타이론 가문에서 지내던 애니도, 아버지의 부재가 길어지니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는 왜 안 오시는 거지?”
“일이 길어지나 보지.”
잠자리에 들기 위해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앉아서, 나는 애니의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사실 연락이 없는 이유는 추측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시골로 떠난 것은 ‘유언 집행’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유언 집행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사람이 죽어야 대략 언제쯤 일정이 끝나는지 아는데, 아직 안 죽어서 유언 집행도 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보통 유언을 미리 받아야 하기 때문에 죽기 전에 유언 집행인을 부른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라는 게 딱 정해진 날 끊어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이번 계절이 다 지나고 돌아오실지도 모르지.’
내가 예상한 50일보다도 훨씬 늦게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 또한 잘된 일이지.’
곧 있으면 새학기가 시작된다. 애니가 기숙학교에 들어가서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면 아버지도 어쩌질 못하리라.
‘좋아.’
생각을 정리한 나는 머리빗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대신 테이블에 있던 한 뭉치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바로 기숙학교 카탈로그였다.
“애니.”
“응?”
내 부름에 침대에서 발장난을 치던 애니가 반듯하게 앉았다. 나는 카탈로그를 그녀의 앞에 펼쳐주며 말했다.
“너는 이 중에 어느 곳이 마음에 드니? 네가 직접 골라보렴.”
“정말 나 학교 가도 돼?”
“당연하지.”
살짝 흐려진 얼굴에서는 나를 향한 걱정이 느껴졌지만, 내가 단호하게 괜찮다고 말하자, 애니의 얼굴도 한결 풀렸다.
“진지하게 고민해봐. 아직 기한은 일주일 남았으니까.”
“흐음.”
내 말에 애니는 카탈로그를 받아 들고 턱을 문질렀다. 마냥 어리게만 보였던 동생이 의젓하게 학교를 고르는 모습이 귀여워서 내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애니가 카탈로그를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그럼 형부께 가서 여쭈어야겠다.”
“뭐?”
이게 무슨 소리람. 나는 덩달아 깜짝 놀라 그녀를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잠깐만, 애니. 누구한테 물어본다고?”
꼭 이럴 때만 빠르지.
애니는 거침없이 카탈로그를 들고 걷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방문이 열리고 우리는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애니는 묘하게 명랑한 어조로 대답했다.
“형부! 언니의 남편.”
“이안을 말하는 거야? 이안한테 잠옷 차림으로 가서 묻는다고?”
“잠옷 차림 아니야. 카디건도 걸쳤는걸.”
“그게 잠옷 차림이지!”
얘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이안은 타이론 공작이었다. 이 나라에서 황족 다음으로 높은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는데 카디건 걸친 잠옷이라니 웬 말인가.
하지만 대경실색한 나와 달리 애니는 무척 떳떳한 거 아닌가?
“가족이니까 괜찮아.”
뻔뻔함을 넘어 친근함까지 느껴지는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도대체 둘이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거야?’
나도 까먹고 있었는데, 애니는 역시 내 동생이었다. 얌전하고 조용한 것 같아도 마음먹으면 활화산처럼 강한 추진력을 가진 아이.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애니는 같은 층에 있는 이안의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 아직 자지 않았는지 맑은 목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누구?”
“형부, 저예요!”
“처제.”
조금 있으니 달칵 문이 열리고, 가운 차림의 이안이 얼굴을 내밀었다.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에 붉게 물들어 있는 눈가가 어쩐지 섹시했다.
‘으으, 심장에 해로워.’
나는 이안의 얼굴을 보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괜히 내 심장도 빠르게 콩콩 뛰었다.
정처 없이 설레는 나와 달리 애니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해맑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제가 주무시는데 깨운 건 아니죠?”
“전 이 시간에 책을 읽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우리 얼굴 보기 힘든 부인까지.”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일부러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애니는 명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언니가 학교를 골라보라고 해서요. 그런데 저는 어떤 학교가 좋은지 모르겠고.”
“흐음. 다 기숙학교네요?”
커다란 손가락이 팔랑팔랑 카탈로그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조금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산뜻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냥 타이론가에서 통학을 하면 어떨까요?”
“네? 잠깐만요, 이안.”
그 말에는 그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통학이라니?
‘그럼 애니한테 타이론가에서 지내라는 말이잖아.’
엄밀하게 말해서 애니는 타이론과는 아무 혈연적 관계가 없었다. 친족이 아닌데 학교에 다니는 긴 기간 동안 다른 사람의 집에서 머무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꽉 막힌 생각을 하는 나와 달리 이안은 오히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어린 처제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려면 어려움이 많을 거예요. 귀족들은 대부분 통학하기도 하고요. 그편이 처제에게도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 하지만…….”
그거야 그렇지. 나도 애니를 내 곁에 두고 살뜰하게 돌보는 게 좋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이……. 이안도 이렇게 말하지만 나중에는 군식구가 불편해질 수도 있어.’
그리 생각하며 내가 슬그머니 이안의 눈치를 살폈을 때였다. 이안은 산뜻하게 웃었다. 얼굴 어디에도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방이야 남아도니까, 걱정하지 마시죠. 그럼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오늘은 이만 잠자리에 들까요?”
“고마워요, 형부!”
“천만에요.”
애니가 기뻐서 방방 뛰었다. 서로 미소 지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무척 친근해 보였다. 내 입술도 저절로 휘어졌다.
‘……좋다.’
이런 상황까지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남편과 내 가족이 사이가 좋은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이안과 인사를 끝낸 애니가 빙글 몸을 돌렸다. 내가 무심코 그 아이의 뒤를 따라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애니가 갑자기 멈추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언니는 왜 따라와?”
“응?”
왜 따라오기는?
애니가 타이론 가문에 온 뒤로, 나는 계속 애니와 함께 잠을 잤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과 할 말도 많았고, 그동안 못 해준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나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마냥 아이라고 생각했던 내 동생이 또랑또랑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어휴, 언니는 나를 어디까지 눈치 없는 동생으로 만들 셈이야? 나 어린애 아니거든? 혼자 잘 수 있어.”
“뭐?”
설마 애니에게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말이라 나는 멍하니 굳어지고 말았다.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어서 어버버거리는 나의 등을, 애니가 떠밀었다. 다름 아닌 이안을 향해서였다.
“형부, 이제 언니는 형부께 돌려드릴게요. 그동안 죄송했어요.”
“자, 잠깐만, 애니!”
돌려주긴 뭘 돌려줘! 잠깐, 돌아와. 그거 아니야!
하지만 내가 막을 새도 없이 애니는 이안의 방문까지 쾅 닫았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눈만 껌뻑껌뻑거렸다.
뒤를 돌아보니 이안이 눈을 휘며 웃었다.
“아무래도 처제가 단단히 오해한 거 같죠?”
단둘이 밀실.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밤.
그제야 애니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나 지금 이 남자랑 같이 자야 하는 거야?!’
* * *
“…….”
사실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우리는 부부였다. 그것도 대외적으로 깨가 쏟아진다고 소문이 자자한 부부.
‘부부가 한 침실을 쓰는 건 맞지.’
매일매일이 아니더라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내가 생각이 짧았어.’
하지만 내가 당연히 이안과 한 침대를 쓸 생각을 못 한 것은 최근 이안과 나의 대화 때문이었다.
“당신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게요.”
내가 잠자리가 두렵다고 고백한 그날, 이안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달래주었다. 그리고 그 뒤로 그의 말대로 그는 한 번도 내게 잠자리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 뒤로 이어진 아버지의 서신, 그리고 애니의 방문, 백화점 사업 계획까지.
그래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잠자리!
‘그런데 갑자기! 믿었던 내 동생이 이렇게 행동할 줄이야!?’
마음의 준비는커녕 그동안 생각도 안 했는데, 상황이 먼저 닥쳤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혓바닥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나는 어색하기 짝이 없이 웃으며 이안에게 말했다. 입꼬리가 비슬비슬거리는 것이 내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하하하, 제 동생이 생각이 많았나 봐요.”
내 말에 이안은 손으로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처제 입장에서는 신경 쓰일 수도 있죠. 괜히 자신 때문에 우리 부부 사이가 멀어졌나 걱정도 되었을 겁니다. 생각이 깊으니까요.”
“……둘이 진짜 많이 친해졌네요.”
언제 애니의 캐릭터를 다 파악했데.
이안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애니 입장에서는 갑자기 신혼집에 신세를 지게 된 것도 모자라, 언니까지 계속 자기가 데리고 자는 상황이었으니까.
‘계속 내게 눈치를 줬는데 내가 못 알아차린 건지도 몰라.’
내가 이렇게 눈치가 없는 언니였다니!
나한테 직설적으로 말도 못 하고 끙끙 고민하고 있었을 애니를 떠올리니 마음이 뜨끔거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안의 방문 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그럼 애니가 자기 방에 도착했을 무렵까지 기다렸다가 나갈게요.”
그때였다. 어쩐지 으스스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나가요?”
내가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커다란 팔이 내 옆을 짚었다. 갑자기 문과 이안 사이에 끼게 된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드리운 그늘에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이 묘하게 나른했다. 어둠 속에서도 푸른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였다.
“나를 두고?”
“이, 이, 이안.”
이럴 때일수록 떨면 안 되는데, 목소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심장도 목소리만큼이나 어지럽게 뛰어댔다.
쿵쾅쿵쾅.
이게 무서워서 떨리는 건지, 아님 다른 느낌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안이 움츠러든 나를 묘한 눈길로 내려다보다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슬슬 계약사항을 어떻게 조절할지 논의해볼 때 아닙니까?”
계약사항이 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황궁에서 얘기 나누었던 바로 그 계약.
여러 가지 조항을 체결했지만 마지막 하나가 우리 사이에 남아 있었다.
바로 잠자리.
“나 이 정도면 무척 잘 기다린 거 같은데.”
새침한 듯 요염하게 중얼거린 남자가 살짝 나를 흘겨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당신은 속도 모르고 자꾸 유혹이나 하고.”
“내, 내, 내가 언제요?”
유혹은 무슨!
내가 격하게 반박했을 때였다. 이안은 대답 대신 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쪽.
어린애들끼리 할 법한 가벼운 뽀뽀였다. 하지만 그 뽀뽀로 연상되는 기억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화르륵!
내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이안이 나를 보고 짓궂게 웃었다.
“역시 알면서.”
“이, 일부러는 아니었어요. 상황상 필요했다고나 할까.”
우리가 입을 맞춘 건 황궁에서 나온 뒤 두 번. 레스토랑과 애니의 방문 때였다.
레스토랑에서 내가 도발적으로 군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여자가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내가 미쳤었나.’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굳이 그렇다고 그 상황에서 도발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내가 그 여자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때 왜 발끈했던 거지?’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내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숨결이 얽힐 듯 가까이 다가온 그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까?”
“그게…….”
심장이 이 이상 빨리 뛸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뛰었다. 그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얼마나 상냥하고 좋은지 아는데도, 내 심장이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망설이는 나를 이안의 눈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그는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아…….”
잘생긴 얼굴이 멀어졌다. 그가 걸친 흰 가운이, 너른 등이 희끄무레하게 흐려졌다.
‘나는 잠자리 거부를 했었지. 그때마다 그 사람은.’
끔찍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일순간 훅하고 밀려들어 왔다.
“나도 많이 참았소.”
“이건 당신의 의무야.”
그때의 나는 무력했다. 세 진상들은 강력했고, 의지할 사람은 남편뿐이었다.
내가 버려질 것 같아서, 강경하게 구는 남편에게 나는 재차 거절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저 남자가 날 싫어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내가 가진 권한들을 하나하나 빼앗으면 어떻게 하지?
홍수처럼 밀려드는 아찔한 생각들에,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이, 이…….”
내가 내게서 멀어져가는 남자를 붙들기 위해, 열리지 않는 입술을 가까스로 열었을 때였다.
그가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돌연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자장가를 불러줘요. 내가 잠들 때까지. 당신의 옛날이야기도 좋아요.”
“……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피식 웃었다.
“재워달라고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습니까? 전에 말했듯이 내가 좀 애정결핍이거든요.”
“…….”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장난스럽게 던지는 말이 내 마음을 둥 하고 울렸다. 나는 멍하니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 잘생긴 얼굴이 물에 비친 것처럼 아롱거린다고 생각했는데.
후드득.
그 순간 눈에서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엇, 올리비아!”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를 향해 급히 다가오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적잖이 당황한 듯 내 얼굴을 이리저리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픕니까? 아님, 제가 무슨 말실수 했어요?”
“아니요…….”
커다란 손이 내 눈꼬리 끝을 문질렀다. 따뜻한 온기가 눈가에서부터 번져 얼굴을 물들이는 것 같았다.
‘다행이야.’
이제야 실감이 났다. 내가 그 지긋지긋한 파넬을 벗어났다는 것이.
더 이상 전남편의 그늘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는 것이.
“100곡이라도 불러드릴게요.”
나는 그를 향해 웃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퐁퐁 솟아올랐지만, 미소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날, 나는 말 그대로 이안의 침대에서 잠만 잤다. 재워달라는 그의 부탁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내가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못한 탓이었다.
나를 안아서 달래던 그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내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이제는 절대로 공감할 수 없는 말로 시작된 이야기는, 바로 그 자신의 이야기였다.
“부모님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당시 너무 나이가 많으시기도 했고. 그래서 제게 진정한 의미로 아버지라고 생각되는 분은 두 분이죠. 황제 폐하와, 화이트폴 후작님.”
‘아, 역시 아버지 같은 분이었군.’
머릿속에 포슬포슬 쪄낸 만두 같은 얼굴의 황제 폐하가 오랜만에 뾰로롱 떠올랐다.
‘그런데 그렇게 타이론 공작부부가 나이가 많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본격적으로 사교활동을 하기 전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확하진 않았다. 하지만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난 공작부부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동화처럼 전해오기 마련이다.
‘그림 같은 부부였다고.’
그리고 그 이야기는 종종 이안의 비현실적인 미모와 맞물려서 흘러나오곤 했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부부였으니, 각하 같은 미남이 나오는 게 당연하죠. 에로스의 현신 같지 않나요.”
“그런데 미혼이시니 너무 속상해요.”
“미혼인 점까지 사랑의 신 같지 않나요?”
‘그때도 참 화제만발이었지. 그 무렵에는 나이도 지긋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눈을 올려 이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기억보다 훨씬 앳된 얼굴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때도 좀 웃지. 이렇게 잘 어울리는 것을.’
이렇게 잘 웃고 떠드는 남자가 과묵하고 사교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들었다는 게 조금 속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괜히 그의 허리를 쥐고 있는 손에 꽈악 힘을 주었다.
그러자 이안이 키득키득 웃으며 손바닥으로 내 눈을 덮었다.
“졸리면 얼른 자요. 버티지 말고.”
우느라 진이 빠져서인지 졸립기도 하긴 했다. 그래도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당신 이야기인데…….”
“앞으로도 몇 번이고 해줄게요. 당신이 지긋지긋하다고 할 때까지.”
“그건…….”
그 말은 또 다르게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이 다정함이 오늘만 한시적인 것이 아니고, 내가 사는 동안에 여러 번, 계속될 거라는 말.
“잘 자요, 올리비아.”
그의 굿나잇 키스를 받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퉁퉁 부은 눈이 조금 따가웠지만 오래지 않아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이안의 침실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 눈을 떴을 때, 이미 이안은 하루를 시작한 뒤였다.
슬리퍼에 발을 꿰고 밖으로 나오니, 어쩐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하녀장이 문 앞에서 나를 반겼다.
“기침하셨습니까.”
“으, 응.”
“주인님께서는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황궁으로 나가셨습니다. 아가씨께서는 마님과 함께 식사하겠다고 기다리고 있고요.”
“아, 그래.”
차라리 대놓고 좋아하지.
평소처럼 근엄하고 깐깐한 얼굴에 입꼬리만 씰룩씰룩거리는 모습이 되려 더 부끄러웠다.
‘아니야, 그래도 황제 폐하를 떠올려봐. 차라리 보고도 못 본 척하는 편이 낫지.’
정말 초야를 치렀나, 안 치렀나 새벽부터 달려와서 문 앞을 서성거리던 통통한 황제를 떠올리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차라리 이렇게 은근히 좋아하는 게 낫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를 낳지 않을 건데. 그럼 그때 되면 또 이 사람들은 실망하려나.’
타이론 가문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가문의 사용인들이 모두 가족처럼 이안을 위한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지금은 평생 결혼하지 않을 줄 알았던 주인이 결혼을 해서 행복해하지만, 조금 있으면 그 기대는 주인을 꼭 닮은 아이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번지게 될 것이다.
‘은근히 실망하는 건 양반이지. 그때 되면 황제 폐하께서는 만날 찾아와서 좋은 소식 없냐고 닦달하실지도 몰라.’
그 모습을 상상하니 등줄기에 소름이 쭉 돋았다. 잠시 굳어졌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서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때는 이안이 잘 커버해주겠지.’
푼수데기 시아버지(?) 앞에서 믿을 건 이안뿐이었다. 이안을 떠올리니 안도감이 마음을 채우고 묘한 여유가 피어나왔다.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그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내 자신에게 조금 당혹스러워졌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안하고는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기분이야. 그도 그렇게 생각할까.’
나는 자각하지 못한 채 그렇게 식당까지 걷는 내내 이안에 대해 떠올렸다.
식당에 도착하니 애니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안녕, 언니!”
“잘 잤니, 애니?”
나를 한참 기다렸던 건지, 내가 앉기 무섭게 음식들이 나왔다. 샐러드에 구운 가자미, 그리고 콩수프였다.
내가 막 가자미 한 토막을 잘라 입에 넣는데, 찐한 시선이 느껴졌다.
‘뭐야?’
애니가 배가 고플 텐데도 스푼도 들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가자미를 우물우물 씹어 삼킨 뒤 물잔을 들며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니?”
“아니. 아닌가 싶어서.”
“뭐가?”
내 물음에 애니는 잔뜩 풀죽은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그 대답이 나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임신 말이야. 임신하면 생선 냄새가 역하다던데.”
“풋!”
애니의 발언에 나는 마시던 물을 거하게 뱉어냈다. 내가 사레들려서 콜록콜록 기침을 하고 있는데, 애니는 내 안부를 묻기는커녕 갑자기 밝게 웃는 것 아닌가?
“그치, 역하지? 임신 맞지?”
‘아니, 얘가!’
먼 데 계신 황제 폐하가 문제가 아니었다.
‘내 동생부터 어떻게 해야 해!’
가까운 곳에 이런 강적이 있을 줄이야. 나는 긴장한 눈으로 반짝거리는 애니를 마주했다.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 * *
아기가 그렇게 간단하게 생기는 것이 아님을 동생의 머리에 주지시키는 동안 순식간에 오전 시간이 지나갔다.
어떤 의미에서 애니는 황제 폐하보다 더 강적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애니는 이렇게 대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조카를 빨리 만나고 싶은데. 조카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모가 될 자신도 있는데.”
그 다짐 넣어둬. 넣어두라고.
‘우리는 아이를 낳지 않을 건데.’
하지만 내가 자꾸 허튼소리를 하는 애니에게 매몰차게 나무라지 못하는 이유도 있었다.
지난 생에서 애니는 불임이었다.
‘끝내 아이를 가지지 못해서 무척 마음고생을 했었지.’
아무리 내가 과거로 돌아와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쥔다고 해도 이런 문제들은 내 권한 밖이었다.
‘나중에도 분명 그 때문에 마음 아파할 텐데. 나까지 상처 주고 싶지 않아.’
그래서 최대한, 유하게 애니에게 둘러대느라 우리의 대화는 길게 늘어졌다. 솔직히 마지막까지 그 아이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도 의문이었다.
‘내일이 되면 또 조카 타령을 할지도.’
나는 좀 지친 표정으로 내게 할당된 집무실에 앉았다. 하녀장이 가져다준, 타이론 공작가의 한 달 인건비 등에 사인하는 사이 단정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마님.”
“반가워요, 케닌.”
바로 이안의 보좌관인 케닌이었다.
외눈 안경을 쓴 케닌은 조금 신경질적인 이미지의 미남이었다. 깡말라서 힘이 없어 보이는 것이 조금 흠이었지만, 그조차도 창백한 얼굴과 어울려 지적인 이미지를 자아냈다.
그는 커다란 종이 한 장을 내 책상에 펼쳤다.
“이게 백화점의 예상도입니다.”
“음.”
그냥 백화점 사업에 대해서 아이디어를 냈을 뿐인데, 이렇게 건물 예상도까지 들고 오다니 번개 같은 일 처리에 입이 벌어졌다.
‘역시 유능해.’
괜히 타이론 가문의 자산이 풍족한 게 아니었다. 본래도 종잣돈이 넉넉한데, 과감한 투자에 신속하기까지 하니 돈을 안 벌기가 더 어렵겠지.
나는 진지하게 도면을 살펴보았다. 크고 넓은 직사각형 형태의 건물은 우아하고 고풍스러웠다.
다만 단층 건물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짚었다.
“적어도 5층 이상으로 짓도록 해요.”
내 말에 케닌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화려한 귀족 저택들 중에서도 3층 이상의 건물은 드물었다.
하물며 백화점 같은 대형 건물이 5층으로 올라가는 건 유례가 없었다.
굳이 찾자면 황궁에서 유폐 때나 사용하는 탑 정도일까.
“하지만 한 층 올리는 것만으로 비용이 상당히 드는걸요. 차라리 면적을 넓히는 게 비용 측면에서는 나을 겁니다.”
“그러면 매장이 휑해 보일 거예요. 입점 업체가 초반에는 그렇게 많지 않을 테니까요.”
내가 고층을 원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백화점은 초반에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건물이 크기만 하면 매장이 비어 있는 모습만 크게 들어올 터. 차라리 층수를 높여서 한 층씩 폐쇄했다가 호응을 얻은 뒤 열면 그만이다.
나는 여전히 고심에 빠진 케닌에게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이 건물은 장담하건대 제국의 랜드마크가 될 거예요. 나중에 흥하고 나서 확장하려면 훨씬 돈이 많이 드니까 초반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도록 해요.”
“마님.”
내 말에 케닌이 반짝이는 눈으로 날 응시했다. 계속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남자가 저런 표정을 지으니 부담스러웠다.
“정말 마님이 훨씬 낫네요. 저 마님 아래로 소속 옮기렵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농담하지 말아요.”
“진심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고 케닌은 외알 안경을 벗은 뒤 손등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그 모습에서는 그간 그가 이안 밑에서 얼마나 고생했나가 고스란히 보였다.
“각하께서는 어느 때고 장담하는 법이 없으시거든요.”
뜨끔.
‘나도 미래를 몰랐다면 망설였을 테지.’
내가 장담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미래를 아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사업을 턱턱 밀 수 없으리라.
그런 내 속사정을 모르는 케닌에게는 내가 무척 결단력 있고 책임감 있는 상사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감격한 척 은근히 이안을 돌려 깠다.
“이 아이디어도 각하께서 내셨다면 분명 일거리가 네 배 이상이었을 거예요. 어느 위치에 지으면 수익률 예상이 얼마나 되는지 보고서 만들어와라, 어느 업체가 입점할 거 같은지, 안 할 거 같은지 뽑아와라 등등.”
이안이 역시 꼼꼼한가 보구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 또한 내가 모르는 일에서는 그처럼 수많은 증거들을 원했을 것이기에 그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나는 적당히 겸양의 말을 지어냈다.
“저는 그냥 말을 던지는 것뿐이잖아요. 모두 유능한 여러분이 계시니까 할 수 있는 거죠. 말씀이라도 감사해요.”
“마님.”
그런데 내 말이 오히려 케닌을 더 감격시킨 모양이다. 케닌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따라서 지옥에라도 갈 거라고 맹세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집무실 문가에서 울렸다.
“내 아내에게서 3미터 이상 물러나.”
바로 이안이었다.
언제 온 건지, 그가 문가에 서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이안의 시선을 마주한 케닌은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어휴, 좀생이.”
가까운 곳에 있는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는데, 이안은 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입술을 비틀며 한 걸음 한 걸음 내 쪽으로 걸어왔다.
“자네 요즘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 같은데.”
“무슨 소리세요. 지금 열 걸음 떨어진 것 안 보이세요?”
역시 문어처럼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케닌은 언제 빈정거렸냐는 듯이 순종적인 표정을 지으며 내 책상에서 후다닥 물러났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왔어요, 이안?”
“네. 예쁜 아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요.”
걸어온 이안은 내 의자 뒤에 섰다. 그리고는 내 의자 등받이에 한쪽 팔을 올리고 기대서서 케닌을 흘겨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열렬히 하느라 노크 소리도 못 듣나 했더니, 내 아내에게 구애 중일 줄은.”
이안의 말에 케닌은 이번엔 구운 오징어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구애 아니거든요! 하여간 요즘 뭐든 삐딱하게 들으셔서.”
“자네가 자꾸 삐딱하게 구니까 그렇지.”
하여간 못 말릴 콤비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이안에게 말했다.
“농담 그만해요, 이안. 더 이상 농담을 건네면 서로 감정이 상할 것 같아요.”
“충격적이게도 농담이 아니랍니다, 마님. 제가 아주 요즘 죽겠어요!”
내 말에 케닌이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큰 소리로 일렀다. 그 말에 나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 남편이 제 명예까지 떨어뜨리는 말을 진담으로 할 리가 없어요.”
“…….”
내 말에 내 등 뒤에서 건들거리던 이안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헤에~.”
케닌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휘파람을 불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나로서는 둘이 뭐라고 떠들든 큰 상관 없었다.
‘그냥 입이나 다물어 주었으면.’
오늘 안 그래도 애니 때문에 진이 다 빠졌는데, 이런 입씨름까지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한 달은 이런 대화 안 하겠지.
나는 자연스럽게 백화점 건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안건은 다 끝났나요?”
“아뇨. 제일 중요한 게 남아 있습니다.”
“뭐죠?”
케닌은 내 책상에 다가와 펼쳤던 백화점 예상도를 다시 말며 말했다.
“백화점 이름이요. 도시부에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름이 정해져야 내지 않겠습니까.”
“아.”
그제야 나는 백화점 이름조차도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라고 지어야 하지?’
너무 당연하게 고슈라는 이름이 떠올랐지만, 그것으로 지을 수는 없었다. 나는 외국인도 아니고, 고슈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걸.
그때였다. 이안이 명쾌한 어조로 말했다.
“마티니로 하지.”
“마티니요?”
갑자기 등장한 칵테일 이름에 케닌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이해가 가질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왜 하필 마티니예요?”
내 물음에 이안은 눈꼬리를 여우처럼 휘며 대답했다.
“마티니에 뭐가 꼭 들어가나 생각해보세요.”
“올리브?”
마티니는 잔에 올리브를 끼워서 장식하는 칵테일이다. 그런데 하필 올리브라니.
‘올리브? 올리비아?’
바로 내 이름 아닌가!
“세상에, 이안!”
“하하.”
이안의 말뜻을 이제야 알아들은 내 얼굴이 화르륵 붉게 물들었다. 그런 나를 이안이 잘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그윽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서로 마주하는 우리를 보고 케닌이 떫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와, 두 눈 뜨고는 못 보겠네요.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잠깐, 케닌. 이걸 빼먹었어.”
“뭔데요?”
재빨리 사라지려던 케닌은 이안이 붙들자 무척 시큰둥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그러나 케닌의 기대처럼 이안은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곧 폐하의 탄신제잖아.”
“아.”
황제 폐하의 탄신제. 말 그대로 황제 폐하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이다.
‘내가 타이론 공작부인으로서 참가하는 첫 공식 행사가 되겠군.’
이미 드레스와 보석은 넉넉하니 따로 준비할 것이 없었다. 한 가지 준비한다면 황후마마와 미리 친분 쌓기 정도?
‘그런데 이걸 왜 케닌과?’
내가 의아한 시선으로 케닌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케닌은 명료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마님, 탄신제에 황제 폐하께 올릴 선물을 고르셔야 합니다. 이건 저희 쪽 예산에서 처리하니까 제게 정해서 알려주세요. 이건 기존에 준비했던 선물 목록이고요.”
“알겠어요.”
파넬에서는 이 모든 게 생활비에서 지출되었는데, 타이론에서는 다른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닌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내 집무실에서 나갔다. 문이 탁하고 닫히자마자 이안의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 한 가닥을 돌돌 말았다.
“일은 할 만합니까?”
“나 잘한다고 했잖아요.”
빈말이 아니었다. 내가 공작부인으로 지낸 시절이 얼마인데. 파넬 공작부인일 때는 집안의 투자 전반에 관한 일까지 모두 내가 관장했었다.
“물론 당신이 보기엔 부족한 점이 많을 테지만…….”
“절대로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내 말에 이안은 팔에 얼굴을 묻은 구부정한 자세로 입술을 삐죽였다.
“오히려 부인이 너무 일만 해서 외롭다는 투정일까요.”
“무슨 소리예요.”
그렇게 말할 만큼 일을 많이 하지 않았다. 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가 도와줄 수 있을 만한 일을 에둘러 전했다.
“그보다 미리 황후 마마와 안면을 익혀야 할 텐데.”
“그 부분은 제가 폐하께 서신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감이 좋은 남자였다. 내가 툭 던졌을 뿐인데도 자기가 할 일을 척척 캐치해내니 말이다.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안에게 물었다.
“황후 마마는 어떤 분이세요?”
“글쎄요. 저도 대화를 잘 안 해봐서.”
그건 그럴 것 같았다. 과거를 돌이켜봐도 지금의 황후 마마는 무척 조용하고 엄격한 분이었던 것 같다.
“올리, 장모님이 자꾸 일을 못한다고 구박해. 실수하면 소리 없이 빤히 쳐다만 보시는데 정말 무섭다고!”
‘그러고 보면 로메오가 스타티스 황태자와 약혼식을 올리는 게 이맘때였나.’
요즘 로메오와 서신을 할 때 너무 내 이야기만 늘어놓았던 것 같다. 로메오의 상황도 어떤가 한번 물어봐야겠다.
바로 그때였다. 딴생각으로 마음껏 방심하고 있는 사이, 이안이 불쑥 치고 들어왔다.
“그보다 아침 식사 때 체했다고 들었는데 괜찮은 겁니까?”
“그, 그건 체한 게 아니라.”
‘임신 소동이 있었다고 어떻게 말을 해!’
나는 난처함에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 * *
황제는 찐빵처럼 포근한 데다가 너구리처럼 귀염성 있는, 모난 부분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외모를 지녔지만, 사실 대단히 계산적인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황후 외에도 후궁이 여럿 있었는데 모두 정치적인 계산속에서 선택된 여인들이었다.
‘황후가 조용한 성품이라 다행이었지.’
황후는 여러모로 황제에게 하늘이 내려준 연분이었다. 큰 사랑은 느끼지 못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전우애가 있었다.
“당신의 입장을 이해해요. 한 여자의 남편이기보다 한 나라의 지배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요.”
꼭 황제를 돕기라도 하듯 황후는 딸만 셋을 낳았다. 그래서 아들을 낳은 후궁들은 자신의 아들들이 황태자가 될 수 있을까 꿈에 부풀어 올랐다.
그 사이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본 사람은 당연히 황제였다.
그리고 지금.
“오랜만이구나, 스타티스.”
황제의 앞에는 다음 대 황제가 될 황후의 첫 번째 딸, 스타티스 황태자가 앉아 있었다.
어깨를 스치는 짧은 금빛 머리카락에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에는 푸른 눈동자가 총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빼어난 미색은 아니었지만, 자신만만하고 고압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예, 폐하.”
“내가 오늘 왜 너를 불렀는지 알겠지?”
“제 반려 때문이겠지요.”
타이론 공작의 갑작스러운 혼인으로 시끌시끌해져서 그렇지, 황실에서는 스타티스의 남편감을 간택했고 최종 후보 셋을 남긴 참이었다.
황제는 따뜻한 차를 호로록 마시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내용은 차디찼다.
“너는 여성이라 내가 했던 것처럼 황태자위를 두고 이득을 노리긴 어렵겠지.”
스타티스는 많은 아이를 낳을 수는 없다. 아이를 낳는 데 본인의 부담이 없었던 황제와 달리, 여자인 스타티스에게는 임신 기간은 물론 출산과 육아 모든 문제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많이 낳아야 넷, 하나나 둘에서 멈출 가능성이 높았다.
자녀가 적다는 건 후궁 간의 암투를 붙이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후궁을 많이 두어야 한다. 네게 위협이 될 만한 자들을 후궁에 가두어두고 팔다리를 꺾어야 해.”
“…….”
황제의 말에 스타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영리한 딸이라면 굳이 당부하지 않아도 알아서 저 길을 갈 터였다.
다만.
“그래서 최종 후보는 정했느냐?”
“예.”
피는 못 속인다고 해야 할까. 생일로 황후 후보를 골랐던 황제처럼, 스타티스 역시 최종 후보에 어떤 감흥도 없었다. 그녀가 생각한 건 단 하나였다.
‘차후 황권의 안정을 위해서는 그래도 황후 소생을 황태자위에 앉히는 게 나을 터.’
후보 중 두 사람은 스타티스와 같은 금발이었다. 이 두 사람의 아이라면 스타티스를 닮은 아이여도,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생김새가 스타티스와 확 구분이 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알키저스 백작가의 로메오 영식으로 하지요.”
그저 머리색이 달라서. 스타티스는 그토록 간단하게 평생의 반려를 정했다. 대답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타이론 공작가에서 인사차 황궁에 방문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단다. 그때 먼저 가족들끼리 인사하자꾸나.”
스타티스는 눈썹을 슬쩍 올렸다.
이안 타이론.
자식에게도 피도 눈물도 없는 황제의 유일한 예외.
‘그러고 보니 나는 그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지.’
그 무렵 스타티스는 주변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결혼이 지나치게 서둘러서 치러지는 바람에 참석 일정을 조율할 수도 없었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한 권 읽겠군.’
그래도 약혼식에 앞서서 약혼자의 얼굴도 한번 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타이론은…….
‘하는 수 없지.’
스타티스는 한숨과 함께 찻잔을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