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인생은 계약의 연속이다
제임스가 그녀를 처음 본 건 아카데미에서였다.
막 검술훈련을 마치고 터덜터덜 걸어오는데, 곧게 뻗은 은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묶은 발랄한 이미지의 소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죄송한데 입학식 장소는 어디죠?”
“아.”
그는 멍청이처럼 얼굴을 붉혔다. 고양이처럼 새침해 보이는 눈, 오뚝한 코, 붉은 입술이 오밀조밀 작은 얼굴에 담겨 있었다.
아름다웠다.
“저, 저, 아마도 저쪽…….”
“네, 감사해요.”
그가 잘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챈 건지, 소녀는 쌩하니 그의 곁을 지나갔다.
하늘하늘, 연기처럼 펄럭이며 흩어지는 은빛 머리카락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이런 쪽에 무지한 제임스는 그 향기가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나한테서는 아마 땀 냄새가 났을 텐데.’
제임스는 손등으로 자신의 이마를 문질렀다. 아직 식지 않은 땀이 흠뻑 묻어나왔다. 그녀에게 고약한 냄새를 풍겼을 거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도대체 누구지? 입학식을 물었으니까 신입생일까?’
그녀는 이미 저 멀리 사라졌는데도 자꾸만 그 얼굴이 아른거렸다.
과묵한 제임스는 이제 졸업반인데도 아카데미의 소수의 인물하고만 교제하고 있었다.
그들도 제임스처럼 사교성이 없는 건 똑같아서, 결국 그녀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직접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는 열심히 교내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보름 정도 다녔을까.
그는 겨우 그녀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
회계학과의 올리비아 플로렌스.
* * *
“……올리비아.”
제임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했던 시야가 또렷해지면서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복부의 아릿한 통증이었다.
“큭.”
참을성이 좋은 그도 신음이 절로 나오는 큰 부상이었다.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부관이 서둘러서 다가왔다.
“일어나셨습니까, 각하?”
“그래.”
복부가 단검에 꿰뚫리는 중상이었다.
너무 급하게 수술이 진행되어서 제대로 된 간호사도 뭣도 없는 상황에서 군의관 한 명이 쩔쩔매며 그의 복부를 꿰매었다. 돌아가실 가능성이 높다며 질질 울기까지 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눈을 떴다. 타고나길 건강한 체질인 데다가 살고자 하는 의지도 강한 덕분이었다.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그가 앉으려고 하자 부관은 기겁하고 그를 말렸지만, 결국 고집을 꺾지 못했다.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며 고통을 참은 제임스는 겨우겨우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을 수 있었다. 그는 손등으로 뻑뻑한 눈을 비비며 물었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지?”
“일주일 정도입니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하셨습니다.”
이 변방에서 제임스 파넬 공작은 신이나 다름없었다. 부관 또한 존경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맨 처음 새파랗게 젊은 공작이 내려왔을 때, 변방의 병사들은 수도 놈들은 자신들이 죽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는 게 분명하다며 분통을 터뜨렸었다.
하지만 제임스의 지휘를 받은 지 1년 만에 그들은 제임스의 말이라면 불구덩이도 믿고 뛰어들 광신도들이 되었다.
이렇게 몸을 사리지 않고 몸소 달려드는 상관을 존경하지 않으면 누굴 존경하겠는가.
이번 부상도 자꾸 이민족에게 정보를 흘리는 내부의 스파이를 잡다가 생긴 것이었다.
부관은 분통을 터뜨렸다.
“설마 내부에 그렇게 많은 스파이를 심어두었을 줄은. 악랄한 놈들.”
“그래.”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죽을 뻔했는데도 담담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다. 그의 대답에, 부관이 한층 더 존경스러워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각하께서 일찍 찾아내신 덕분에 피해가 적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
제임스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숨이 거칠었기에, 부관은 대답하기 힘드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카데미에서 군사학을 전공한 제임스 파넬 공작이 변방의 전쟁터로 보내진 것은 졸업과 동시였다. 국경선 근처에서 수백 년간 살아온 이민족과의 국지전이었다.
전면전으로 번질 리 없는 사소한 전쟁이지만, 범위가 넓은 데다가 그 지역 주민들의 피해가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는 성가신 전쟁터였다.
‘그런 자리에 경험도 없는 내가 보내졌고.’
제국을 수호하는 상징적인 파넬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
정계에 힘이 있는 가족도 없고, 혈통은 좋아 명분은 충분하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황제는 계속 그를 보내고 싶어 했다.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지식을 쌓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아카데미에서 군사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그 까닭이었다.
오로지 그를 참전하지 않게 보호해주던 구실은 단 하나. 그가 미혼이라는 것.
그래서 참전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그는 결혼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신부는 수도에서 올린, 이상한 결혼식이었다.
‘아내는 잘 있을까.’
옛날 꿈을 꿔서 그런지 그녀가 보고 싶었다. 제임스는 습관처럼 자신의 검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금빛 반지가 보이질 않았다.
“……내 반지는?”
“네?”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아, 그거요.”
그 반지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이 변방에는 없었다. 검을 많이 휘두르는 검사들은 손가락을 다칠까 봐 반지를 끼지 않는다.
그건 사령관임에도 일선에 자주 나서는 제임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이상할 정도로 결혼반지를 고집했다. 분명 불편할 텐데도 말이다.
‘얼굴도 모르는 아내일지라도 의리를 지키시는 거겠지. 각하는 그런 분이니까.’
부관은 그리 좋게 생각하며 성실하게 대답했다.
“안쪽이 너무 닳아져서 끊어졌더군요. 아무래도 반지를 끼고 검을 많이 휘두르신 탓 같습니다. 지금은 수리 중입니다.”
“그래.”
제임스는 무뚝뚝한 얼굴도 대답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비어 있는 반대쪽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아픔 때문인가.’
그리 생각하며 제임스가 다시 누울 것인가, 아니면 보고를 받을 것인가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부관이 사령관의 책상 위에서 두 통의 편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서신이 왔습니다.”
“아내에게?”
제임스는 바로 그렇게 물었다. 올리비아에게 편지가 온 것이 단 한 번뿐인데도, 그다음부터 그는 늘 올리비아의 편지를 기다렸다. 부관은 안타깝다는 듯이 이마를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대부인께서 보내신 거 같습니다. 황실에서도 한 통 왔고요.”
“황실에서?”
황실에서 급한 일이라면 칙사를 보내지, 이렇게 서신을 보내는 일은 드물다.
제임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황실의 편지부터 열어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편지를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무슨 일이십니까?”
부관은 놀라서 제임스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가 떨어뜨린 것은 편지가 아니었다. 그저 공문서 사본 한 장이었다.
큼지막하게 문서의 성격이 쓰여 있었기 때문에 굳이 집어 들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수가 있었다.
-혼인 무효장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제임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눈을 의심하듯 몇 번이나 비볐다.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글자를 보고, 그의 얼굴은 희게 질렸다.
“호, 혼인 무효라니. 도대체 왜…….”
“아, 이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하얗게 질려 있는데, 곁에서는 알겠다는 듯이 탄성이 흘러나왔다. 제임스의 날카로운 눈빛이 대번에 그를 향했다.
“도대체 뭘 알고 있지?”
“그, 그게 소문을 듣긴 했는데. 헛소문이라고 생각해서 각하께 전하지 않았습니다.”
“소문?”
“그게…….”
망설이던 부관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각하의 부인이신 플로렌스 영애와 타이론 공작님이 열애 중이라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황제 폐하께서 적극적으로 두 분을 이어주시기로 했다고 하시더군요.”
“타이론 공작? 이안 타이론?”
소문을 들은 제임스는 이번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안 타이론이라면?
“그는 고자잖아?”
소문에 어두운 제임스조차 아는, 그야말로 대국민 고자였다.
그리고 설령 그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고, 해도 혼인은 자기들끼리 결정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혼인 무효장에 도장을 찍지 않았는데?”
이미 올리비아는 그의 아내이지 않은가.
무엇 하나 답을 알 수가 없었지만, 왠지 그 대답이 편지 안에 있을 것 같아서 제임스는 떨리는 손으로 공작가에서 날아온 다른 편지를 꺼냈다.
구구절절 긴 편지 속에서, 그가 찾던 내용은 마지막에 짧게 언급되어 있었다.
-집안의 명예를 더럽히는 계집애라, 우리가 알아서 쫓아냈다. 플로렌스 가문에 넘겨주었던 거액의 투자금도 회수할 예정이니 신경 쓰지 말고 변방을 열심히 지키거라.
제임스는 힘을 주면 안 된다는 것도 잊고 두 팔에 힘을 주었다. 편지가 원래 두 장이었던 것처럼 북, 뜯겨나갔다.
* * *
어떻게 해도 울혈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목에는 스카프를 매고, 머리카락을 아래쪽으로 낮게 묶어 등이 아닌 앞쪽으로 늘어뜨리기로 했다.
나의 치장을 도와준 하녀들이 발그레한 얼굴로 웃으며 인사했다.
“다시 한번 결혼을 축하드려요.”
“예쁜 사랑 하세요.”
흘금거리는 시선에는 흥미가 반, 재미있음이 반으로 섞여 있었다.
이 나라 최고의 스캔들, 대국민 고자 사기 사건을 실시간으로 감상하고 있으니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하지만 그 눈빛을 받고 있는 나는 무슨 죄인데?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내가, 내가 왜 이런 수모를…….”
침대에 걸터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으니 이안이 걸어들어왔다. 단추를 두 개 푼 셔츠에, 까만 바지를 입은 그는 어제처럼 단정하기만 했다.
여유롭게 걸어온 그가 나를 보더니 놀라서 성큼성큼 걸어왔다.
“왜 그래요? 어디 아픕니까?”
“!”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라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막상 무릎까지 굽혀서 나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 그를 보니 말문이 막혔다.
‘나를 걱정하고 있어.’
그건 참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에게 나의 마음속 상처들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는데도, 그가 보내는 다정한 눈길, 이런 사소한 배려 하나하나가 약처럼 그곳에 덮이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왜 이 사람에게…….’
지난 생, 40년을 사는 동안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간질간질한 감정이 왜 이 남자를 마주하고 있으면 밀려오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더 마주하고 있으면 내 속내를 다 쏟아내게 될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애써 밝은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저리 비켜주세요. 아프지 않아요.”
“정말이죠? 하나도 아프지 않죠?”
“네.”
목은 조금 아프지만. 그래도 약이 좋았는지, 개구리 소리 같았던 목소리도 많이 가라앉았다. 나는 큼큼 헛기침했다.
그런데 그때, 다행이라고 말할 줄 알았던 남자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 아닌가.
“이런. 내가 많이 부족했네.”
“……뭐라고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부족했다고? 뭐가 부족해?
‘설마 밤일? 밤일을 말하는 거 아니겠지?’
거의 잠을 자지 못 하도록 괴롭힘을 당했는데 부족할 리가 있나. 내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니, 그는 자리에서 다시 반듯하게 일어서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당장 떠나려는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았는데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내가 다 대답할 테니까, 정말 솔직하게 말해요! 뭐가 부족했는데요?”
“진짜 아니에요. 배고프니까 빨리 식사하러 갑시다.”
“…….”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나보다 두 걸음 정도 앞서서 걸어갔다. 내가 그의 휘적거리는 긴 다리를 보며 뒤를 따르고 있는데.
“역시 아침에도 그냥 놔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
역시 지금 밤일 이야기 하는 거지!
나는 이 남자의 끔찍한 오개념을 바로 잡아주고 싶었으나, 그는 끝까지 시치미를 떼며 말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는 방이 아닌 식당에서 이루어졌다. 고소한 냄새가 문밖까지 흘러나와서 비어 있는 위장이 요동쳤다.
‘많이 먹어야지.’
그런 결심을 하며 열리는 식당 문을 쳐다보았을 때였다. 막상 문이 열리고 보인 것은 내가 기대하던 맛있는 아침 식사가 아니었다.
“제수씨!”
“컥!”
토실토실한 곰이 열리는 문으로 날다람쥐처럼 뛰쳐나왔다. 담비 털이 목을 장식하고 있는 붉은 망토는 잘못 보려야 잘못 볼 수가 없었다.
“폐, 폐하!”
바로 황제 폐하셨다.
‘이 아침부터 황제 폐하 행차라니 무슨 말이요?!’
아무리 여기가 황궁이고, 이 나라의 지존이신 황제께서 못 갈 곳은 이 세상에 없다지만, 초야가 지난 아침 식사 자리에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건 아니지 않나.
나의 불편함이 보이지도 않는지, 황제는 껄껄 웃으며 내게 친근히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우리 제수씨 오셨구나. 밤새 잠자리는 편안했는가?”
“화, 황송하옵니다.”
농담이 아니고, 너무나 마음에 심히 부담되어서 저절로 황송했다. 제수씨라니. 일국의 황제에게 듣기에는 지나치게 삿된 호칭 아닌가.
‘정말 이안을 아끼나 보다.’
그가 이렇게 황궁에 첫날밤을 내어준 것도, 아침 식사 자리부터 찾아온 것도, 나에게 제수씨라고 부르며 생글생글 웃는 것도 모두 이안과 그가 친근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남자가 문제야.’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심드렁해하고 있는 이안을 째려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아침 식사에 참석하신다는 이야기를 왜 안 했어?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거 아니야.’
내 시선을 눈치챈 이안이, 벽의 무늬를 세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푸른 눈이 꼭 햇빛을 반사하는 파도처럼 반짝이는가 싶더니만.
쪽. 별안간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설마하니 황제 폐하 앞에서 입을 맞출 거라 상상도 하지 못한 나는 후다닥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졌다.
“뭐, 뭐예요?!”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그를 째려보니,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키스해 달라고 쳐다보지 않았습니까.”
“제가 언제요!”
아니, 아까부터 왜 이렇게 자기 좋을 대로 내 말을 곡해하는 건지. 내가 뾰족한 시선으로 그를 흘겨보고,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의뭉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음흉하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후후후후.”
뭐야, 왜 자꾸 웃는데. 그 웃음 뭔데.
소름이 돋아서 쳐다보니,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그는 맛있게 부푼 만두처럼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이 이렇게 잘 어울리다니!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네. 나는 오늘 아침은 들지 않아도 되겠군.”
정말 우리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보니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위엄을 지키기 위해 큰 소리로 헤벌쭉하게 웃지는 않았으나, 참을 수가 없는지 근질거리는 입꼬리가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숨겨놓은 아들이야, 뭐야.’
너무 자기 일처럼 좋아하니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이안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미 식사를 드셨나 보군요.”
“너희가 워낙 늦게 나왔지 않니.”
나는 뒤늦게 말을 이해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니까.
‘……정말로 배가 불러서 안 먹어도 된다고 한 거였냐.’
지금 이 순간 나는 한 가지 교훈을 배웠다. 황제 폐하의 말씀을 모두 믿지는 말자.
하여간 우리를 오래 기다리신 건 맞는 것 같아, 나는 치맛자락을 쥐고 나붓하게 인사를 올렸다.
“제가 몸이 미편하여. 죄송합니다.”
“아니, 내가 제수씨에게 뭐라고 하는 건 절대 아니야. 아무렴! 내가 어떻게 제수씨에게 뭐라고 하겠어? 우리 부족한 사촌을 거두어준 것만으로도 감사감사지!”
여기까지만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황제는 이야기하다가 흥분한 나머지 콧김을 풍풍, 뿜으며 2절을 시작했다.
“첫날밤에 혹시 신랑이 고자라고 신부가 도망이라도 치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한 나머지 새벽부터 달려와서 계속 이 시간까지 기다린 거지만 괜찮네! 오늘 아침쯤에는 사촌이 ‘결혼은 사실 장난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고자고요!’하고 배신을 때리는 건 아닐까,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괜찮다고! 아예 노을이 질 때 침실에서 나와도 뭐라고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그러니까 정말로 소문대로 대국민 고자라서, 도장까지 미리 찍은 결혼식이 엎어질까 봐 걱정되어 새벽부터 진을 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나의 얼굴이 저절로 핼쑥해졌다.
나처럼 질린 표정이 된 이안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폐하, 차라리 아무 말씀도 하지 마십시오.”
“너한테 말 건 거 아니거든. 우리 예쁜 제수씨에게 말 건 거거든?”
‘아니, 이 사람 이런 사람이었어?’
들리시나요, 내 애국심이 사라지는 소리.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속내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멍청하게 굳어졌다. 나는 이안이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흘긋 옆을 응시했다.
그는 살구색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
그리고 보았다. 이안의 팔뚝에 일순간 힘이 불끈 들어가는 것을.
‘황제만 아니었으면 패대기쳤겠어.’
반짝이는 푸른 눈이 무척이나 위험해 보였다. 이러다가 결혼한 지 하루 만에 반역자의 부인이 되어서 나라에서 추방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안의 서슬 퍼런 눈을 마주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지, 황제는 여유작작하게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그래, 황궁에는 언제까지 머물 거냐? 아예 한 일주일쯤 저쪽 별궁을 내어주랴?”
‘이 꼴을 일주일이나 더 겪으라고?!’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이안이 서늘한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오늘 나갈 겁니다.”
“왜? 더 머물다 가렴.”
자꾸만 질척이는 황제를, 이안은 한마디로 격퇴했다.
“그럼 신혼여행이나 보내주시죠.”
“……큼큼, 아무리 부인이 어여뻐도 내일 대회의는 꼭 참석해야 하네, 공작.”
우리를 구경하는 건 재미있어 죽겠지만, 그 때문에 자신의 일이 늘어나는 것은 죽어도 싫은 모양이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네. 둘이 이야기 많이 나누고.”
이안의 마음이 바뀌어서 일주일 휴가를 청할 것 같았는지, 황제는 아까까지의 기세는 어디로 팽개치고 꽁지에 불붙은 닭인 양 빠르게 사라졌다.
결국 식당에는 황제가 남기고 간 어수선함과 조금 식어버린 아침 식사만이 남았다.
이제야 식당이 조용해지자, 이안은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어휴, 주접은.”
헉.
황제가 식당을 나갔다고 해도 식당에는 아직 황실에서 일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이안의 입술을 막았다.
“조용히 해요! 그거 황족모독인 거 아시죠?”
갑자기 내 손바닥으로 입술이 막힌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끔뻑거렸다. 그러더니.
“으악! 핥지 말래도요!”
물컹한 혀가, 내 손바닥을 뭉근하게 스쳤다. 나는 질색을 하며 손을 떼었다.
하지만 손목 한쪽이 그의 손에 꽉 붙들렸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을 그가 얕게 깨물었다.
‘무슨 사탕인 줄 아나!’
왜 이렇게 물고 빨고 하는 걸 좋아하는지 통 모를 노릇이었다. 빨간 혀가 결혼반지를 낀 네 번째 손가락을 느릿하게 핥아내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색기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로 홀린 듯이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식사가 식어서 다시 기다려야 할 건데.”
손끝에 쪼옥, 입을 맞춘 그가 여우처럼 요사스럽게 웃었다.
“우리, 방에서 편안하게 먹는 건 어때요?”
또 은근슬쩍 나를 홀리는 발언이었다. 이때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야 했는데.
끄덕.
그의 혓바닥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긴 나는, 무슨 말인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귀엽다는 듯이 픽 웃은 그가 덥석 나를 안아 들었다.
식당에 올 때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우리는 다시 나왔던 방으로 돌아왔다.
막 침대 이불과 시트를 갈려고 준비하던 궁인들이 다시 들어오는 우리를 보고 쨍하니 얼어붙었다.
이안은 턱짓으로 그들을 내보냈다.
“시트 갈 필요 없네. 곧 다시 더러워질 테니까.”
그 말에 얼어붙었던 궁인들이, 이번에는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훈련받은 궁인답지 않게 그들은 무척 허둥대며 방을 빠져나갔다.
침대를 탈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침대로 돌아오게 된 내가 그의 팔을 꽉 붙들고 말했다.
“바, 밥 먹자고 했잖아요.”
“네. 저도 배고파요.”
그의 대답에 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짜고짜 하자고 끌고 온 건 아니구나.’
하지만 역시 안심은 일렀다. 내가 그의 팔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기 무섭게 그가 나를 억세게 끌어안고는 입을 맞췄던 것이다.
잇새를 비집고 들어온 살덩이는 억세게 나의 혀를 붙잡아 쪽쪽 빨아대었다. 혀 뿌리가 아릿할 정도로 강렬한 키스였다.
넓은 손바닥이 정신없이 내 치맛자락을 들치고 오동통한 허벅지를 꽉 쥐었다. 그 바람에 허리가 휘어지면서 몸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잡을 것 없어, 두 손을 허공에 허우적대던 나는 그의 목에 두 손을 감고 매달렸다. 부드러운 금빛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얽혔다.
단정한데 묘하게 으스스한 목소리가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여졌다.
“하지만 저는 당신부터.”
“그게 무슨 말…… 읍!”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내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리려고 했을 때였다. 그의 입술이 다시 또 내 입술을 덮었다. 아랫배가 뜨겁게 조여드는 것만 같아, 나는 살짝 몸을 뒤틀었다. 그가 내뱉는 더운 숨이 입술을 통해 꼴깍꼴깍 넘어오는 것만 같았다.
딱히 만져주지도 않았는데 딱딱하게 선 단단한 살덩이가 속옷 위를 쿡쿡 찔렀다. 여전히 격하게 내 입술을 탐하면서, 그가 손가락을 슬쩍 속옷을 옆으로 젖히고 들어왔다.
“읍!”
어제 밤의 여파로 살짝 부풀어오른 도톰한 살갗을 손가락이 간지럽히듯 문질렀다.
‘아, 왜 자꾸 거기를.’
자꾸만 아랫배가 간질간질해지고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힘을 빼려고 해도 저절로 힘이 들어가서 사타구니 사이에 파고든 그의 손을 조였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그를 밀어내려고 해도 단단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뭉근하게 계속되는 쾌락에 나는 다리를 벌벌 떨었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입맞춤에, 숨을 할딱이며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왜 이렇게 이 사람은 집요하고…….’
상냥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그의 손가락이 갑자기 콱 꼬집었다. 예민한 살에 갑작스레 밀려오는 날카로운 통증에, 허리가 저절로 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속옷을 옆으로 밀어젖히며 그가 내 안으로 푹 파고들었다.
“아아…!!”
갑작스럽게 밀려들어오는 뜨끈뜨끈한 열기에, 나는 거칠게 고개를 도리질치고 말았다.
“미안해요. 내가 좀 급해서.”
나직하게 속삭여지는 그의 목소리는, 목이 마른 사람처럼 갈라져있었다. 내 입술에서 떨어진 그의 입술이 이번에는 내 목덜미를 촘촘히 깨물었다. 간지러움에 어깨를 움츠리자, 그가 나의 몸을 두 손으로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앙!”
다시 한번 나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배꼽 부분까지 꽉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몸을 작게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숨을 할딱거리며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생각만큼 아프지 않네.’
빠듯하고 더부룩할지언정, 아프고 괴롭진 않았다.
‘맞아. 대화를 즐겁게 하는 것도 배려와 상냥함이니까.’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가 눈꼬리를 곱게 휘며 웃었다.
“기특하네요.”
“뭐가요?”
그와 시선을 마주하려고 허리를 살짝 뒤틀었더니, 다른 각도로 푹 찔러들었다.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 촉하고 닿았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금빛 머리카락이 부들부들 이마를 덮은 얼굴은 과연 이 나라 최고의 미남이었다. 하지만 신사 같은 얼굴이, 내뱉는 말은 야하기 짝이 없었다.
“한계까지 벌어졌는데도 또 힘내서 삼키고 있잖아요.”
“그런 칭찬은 별로 듣고 싶지 않거든요?”
내가 입술을 삐죽이며 그렇게 대답하자, 이안이 내 허리를 꽉 붙들고는 다시 한번 흔들었다. 나는 온 몸을 벌벌 떨며 그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자, 잠깐만요. 기다려요! 잠깐만.”
어떻게 이렇게 내가 느끼는 지점을 콱콱 쑤실 수 있는 걸까. 벗어나려고 해도 밀려들어오는 쾌락에, 내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입술을 깨물었을 때였다. 그가 부드럽게 내 입술에 입을 맞추더니 조금 짓궂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행이에요. 처음부터 당신이 잘 느끼고 있는 거 같아서.”
“절대 아니거든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짓말이었다. 그와의 스킨십은 무척 좋았다. 어떻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과 나누는 농밀하게 스킨십이 이렇게 편안하면서도 두근거릴 수 있는가 의아할 정도로. 하지만 그 사실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라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인생은 혼자 사는 거다. 그 사실을 나는 2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배웠다. 비록 이안이 내게 신사적으로 대하고, 또 그가 내게서 뺏을 수 있는 것들은 그에게 필요 없는 하잘 것 없는 것들일 지라도, 나는 그에게 내 모든 마음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나의 속 좁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안이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나는 당신이랑 하는 게 정말 좋은데. 사실은 아까 당신에게 좀 서운했어요. 내가 식사부터 할 건지, 목욕부터 할 건지 물었을 때 당신이 망설이지 않고 식사부터 한다고 해서요.”
나랑 하는 게 좋다는 그의 말에 저절로 귀 끝까지 열이 확 올랐다. 나는 눈을 내리 깔고 더듬더듬 툴툴 거렸다.
“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런 소리를…….”
어떻게 이런 말을 이렇게 솔직하게 내뱉을 수가 있지? 눈을 깜빡이는 내 턱을 꽉 쥐고 이안이 또 다시 입술을 들이댔다. 가까이 몸이 달라붙으면서 몸 안쪽으로 더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당신이 계속 부족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단정한 잇새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흐릿한 눈으로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반듯한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늘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은 약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촛불이 넘실거리는 듯 일렁이는 푸른 눈이 나를 응시했다.
‘처음 보는 표정.’
쾌락에 젖은 얼굴.
나만 보았을 얼굴.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는 계속 능글맞고 여유로웠는데, 이 표정은 다급하고 서툴게만 보였으니까. 사실은 그도 조금 불안했던 걸까.
- 나는 당신부터
그게 ‘식사부터 할래요? 목욕부터?’라고 물었던 아까 질문에 대한 답이란 것을, 한참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 * *
참 이상하기도 하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나는 이불 밖으로 내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새초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짐승.”
내 말에 셔츠에 팔을 꿰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이 장면조차도 기시감이 느껴져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시감이 아니지! 바로 아까 있었던 일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거잖아!
‘고자라고 했잖아. 고자라고 했잖아!!’
굳게 믿었건만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뾰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외쳤다.
“이건 대국민 사기예요! 난 사기 결혼을 당한 거라고요.”
절대로 안 설 거라고 생각했던 남편이 이렇게 발랄할 줄 누가 알았나요.
내 말에 이안은 픽, 하고 웃었다.
“사기 결혼이라.”
잘생긴 얼굴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 손길이 은근해서, 나는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내게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밀히 말해서 제게 접근한 건 당신 아닙니까?”
움찔.
괜스레 찔린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를 선택해서, 주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한 건 나였다.
‘설마 뭘 알고 있나?’
하지만 그 과정이 그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되었다. 나는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담담한 얼굴에는 나를 향한 분노라든지, 실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떠올라 있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로메오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되는데.’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건 내 부탁대로 그런 노래를 퍼뜨려준 로메오 덕분이었다.
로메오는 장차 이 나라의 황후가 될 남자. 괜히 내 일로 그의 발목이 잡힐까 걱정이 되었다.
‘아나? 모르나?’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던 남자는, 언제 그렇게 위화감을 조성했냐는 듯이 산뜻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이제 집으로 갈까요? 아니면 며칠 더 머무를래요?”
“집으로 갈래요.”
나는 냉큼 대답했다. 솔직히 결혼식에, 초야에, 아침부터 방문한 황제 폐하까지.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빨리 쉬고 싶어.’
자꾸 은근한 무드가 되는 것도 여기가 신방이라서 그렇겠지. 얼른 타이론 공작가의 내 방으로 쏙 들어가고 싶었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침대에 흐트러진 내 원피스를 주워 들었다.
그때였다.
쓰윽.
이안의 검지가 이불 밖으로 드러난 내 척추를 따라 쓰윽 미끄러졌다. 그 의도를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가 없었다.
“조금 아쉽기는 한데.”
‘이 사람이!’
아쉽기는 뭐가 아쉽단 말인가! 밤새 그렇게 괴롭히고, 눈 떠서 밥 먹나 했더니 또 괴롭히고!
그 과정에서 나의 초야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수줍어하던 궁인들은 어떻고! 그 시선을 받으며 부끄러워하던 나는 또 어떻고!
‘그런데도 아쉽다고?!’
대국민 고자에서 봉인 해제된 남자는 멈출 줄 모르고 달리는 말 같았다. 나는 이 야생마에게 마구를 씌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안 하면 내가 죽겠어!
“잠깐만요.”
“네?”
이안은 또 깔끔한 표정을 지었다. 저 뻔뻔한 얼굴에 속았다고 생각하니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전에 우리 계약서부터 작성하죠.”
“무슨 계약서요?”
“생활 전반에 대한 계약서요. 지금 결혼할 때와 상황이 많이 바뀌었잖아요.”
“뭐가 바뀌었다는 거죠?”
“그, 그…….”
내 말에 그는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이 고개의 방향에 따라 흐트러지는데, 그 모습이 또 순수한 소년처럼 아름답게만 보였다.
‘으으, 이 얼굴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다.’
신께서는 어쩌자고 미모를 이렇게 한 사람에게 몰아주었단 말인가. 카스텔라처럼 부드럽게 보이는 살구색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혹시 잠자리에 관한 계약서를 쓰자는 겁니까?”
미심쩍은 듯 눈살을 찌푸린 얼굴조차도 멋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동시에 내 가슴을 돌로 꽉 틀어막는 것 같았다.
‘계약서를 쓰자는 말이 왜 미심쩍은데?’
“다, 당연하죠! 내가 계속 말하잖아요. 사기 결혼이라고!”
당신이 고자라고 철석같이 믿고 결혼한 거란 말이야. 알았다면 상대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그 사실이, 그에게는 그냥 스치는 바람이나 다름없는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왜 그게 문제가 되죠? 속궁합이 이렇게나 잘 맞으면 좋은 거 아닌가?”
“절대 아니거든요.”
밤일로 좋았던 기억이 한 톨도 없는 나에게 조금도 메리트가 아니었다.
나의 단호한 부정에,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좋아요. 그럼 말해 봐요. 그 계약 조건이라는 것.”
또또, 남의 일처럼 재미있어한다.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계약을 제시하는 사람은 나였다.
나는 손가락을 들며 말했다.
“첫 번째, 피임은 꼭 한다.”
“네네. 그리고?”
“두 번째, 결혼생활 동안 서로에게 충실한다.”
“그건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조항인데요.”
그리 말하며 그가 내 목덜미로 손을 뻗었다. 어머니의 유품인 물방울 모양의 목걸이가 그의 검지에 걸려서 줄이 팽팽해졌다.
“?”
그의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목걸이를 잡아당긴 손을 떼었다.
“계속 말해 봐요.”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거예요. 잠자리 횟수.”
나는 심호흡을 했다. 잠자리 횟수. 그것이 사실상 우리 계약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했다.
비장한 표정을 지은 내가 손가락을 펴 보였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어때요?”
내 말에 이안의 잘생긴 얼굴이, 구겨버린 편지처럼 확 찡그려졌다. 그가 느릿한 어조로 되물었다.
“농담이죠?”
“농담 아니거든요!”
내 말에 그는 펼쳐져 있는 내 손가락 하나에 자신의 손바닥을 대었다. 이제 손가락은 여섯 개가 되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주일에 여섯 번. 조물주께서도 일주일에 하루는 쉬셨다고 하니, 우리도 하루는 쉽시다.”
“이, 이, 이 무슨! 이게 무슨 일인 줄 알아요?!”
여섯 번이라니! 조물주가 쉬는 안식일에만 거르자니! 무슨 직장 출근하는 줄 아나.
나의 반박에 그는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일이 아니니까 많이 하는 거죠. 일은 일주일에 한 번이면 족해요.”
‘어, 그거 상당히 논리적인데.’
아차! 넘어갈 뻔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일하는 삶에 잠시 홀렸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안 돼요! 그랬다가는 매일매일 잠만 잘 거예요. 당신은 몰라도 나는 힘이 달린다고요.”
“거짓말. 당신이 손톱을 세워 긁어서 목덜미가 지금도 따끔따끔한데…….”
“우와악!”
그가 보란 듯이 자신의 셔츠를 벌려서 나를 보여주는데……. 흰 살갗에 붉은 손톱자국이 무슨 야수가 할퀸 것처럼 나 있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가렸다.
‘네, 저예요. 제가 했습니다.’
그런 나를 보며 그가 씨익,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여섯 번.”
“한 번!”
“다섯 번.”
“두 번!”
“그럼 다시 여섯 번.”
“…….”
다 내 말대로 해줄 것같이 굴더니 왜 이럴 때는 이렇게 단호한 건데.
나는 억울함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 저는…….”
나는 왜 잠자리가 꺼려질까. 사실 어제는 싫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잠자리가 무서워요.”
마음이 느슨하게 풀려서인지, 내뱉지 않아야 할 진심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나쁜 사람이라는 건 아니에요. 아프고 괴로웠다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그러니까…….”
나에게 부부관계는 큰 상처로 남았다.
내가 거부할 수도 없고, 거부해서도 안 되는 괴로운 행위는 내 인간의 존엄성까지 바닥에 패대기쳐 밟히는 것 같았다.
밤만 되면 스스로가 한없이 가볍고 하찮은 존재가 된 것 같아서 서러웠다.
그 기억들은 내가 그때의 올리비아가 더 이상 아닌데도, 가시넝쿨처럼 끈질기게 나를 휘감아왔다.
아무 생각 없이 진심을 토로하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아내의 역할에 잠자리가 있다는 건 명심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을 거부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저를 배려해서 그 횟수만 줄여주면…….”
“그런 건 관계가 아니죠. 의미가 없는 강압이에요.”
애써 밝은 목소리를 쥐어 짜내어 늘어놓는 나의 말을, 이안이 단호하게 잘랐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사파이어처럼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깊은 바다처럼 진중하게 나를 담았다.
“전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은 거예요. 이왕이면 그게 즐겁고, 스릴 넘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당신에게 의무나 역할, 두려움을 주려는 게 아니고요.”
너무 많은 말을 토해냈다는 듯이, 그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를 불렀다.
“올리비아.”
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깔끔하고, 낮았다. 사심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음에도, 저절로 지난밤의 그의 손길이 떠올랐다.
“이건 부부 두 사람의 농밀한 대화예요. 그리고 나는 일방적으로 내 말만 쏟아낼 생각이 없어요.”
“당신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나와 즐겁게 이야기를 할 때까지 밀어붙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뻔뻔한 얼굴로 퍽 다정했더라지.
그러면서도 나를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가 구름이라도 낀 것처럼 흐려졌었다. 말 한마디 내뱉지 않아도 전해져오던 떨림.
“알아요.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모독하려는 건 아니었다. 정말로 내 개인적인 두려움이었지,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나의 마음이 전해진 걸까.
그가 고개를 숙여서는 내 눈꼬리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간질이듯 내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누굴까요. 당신에게 이렇게 두려움을 심어준 사람은? 아버지일까. 아니면 연인?”
“그런 거 없어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차라리 연애나 해 보고 이런 시궁창 인생길에 빠졌으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아, 이번 생은 애인이나 잔뜩 거느리고 살 걸 그랬나.’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삶이 상상으로나마 떠올랐다. 미남들을 잔뜩 거느리고 사는 삶이라. 상상하니 그건 그것대로 또 설렜다.
히죽거리는 나를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던 이안이 우리의 대화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조항은 동의하고, 세 번째 조항은 우리 조금 더 생각해보도록 해요. 당신이 두려워하지 않을 때까지.”
“그래요.”
나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가락에 그가 새끼손가락을 걸어왔다.
‘이럴 때 보면 또 어린애 같아.’
손가락 걸고 약속이라니. 이게 도대체 몇 년 만에 해 보는 거람.
나는 손가락을 선선히 흔들었다. 이안이 내게 재차 말했다.
“분명히 동의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알았다니까요. 몇 번씩 물어보지 말아요.”
손가락을 빼려고 하니, 그가 손가락에 힘을 주며 얽힌 손가락을 풀어주지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질투가 꽤 심하거든요.”
그는 눈꼬리를 휘며 조용히 웃어 보였다.
마차로 이동하는 것은 다행히 금방 끝이 났다. 타이론 공작가의 타운하우스가 황궁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덕분이었다.
이안의 손을 붙들고 마차에서 내리니, 수많은 사용인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우리를 맞았다.
“오셨습니까.”
수십 명의 사용인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일순간 압도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파넬 공작가에서도 이만한 사용인들을 다스렸던 나다.
별다른 떨림 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집사에게 웃어 보였다.
“우리가 조금 늦었지?”
“아닙니다, 마님.”
집사는 과분하다는 듯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붙들고 있던 이안의 손을 풀었다. 마차에서 내렸으니 더 이상 에스코트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묘하게 시선이 내 손가락에 따라붙는 것 같았다.
“음?”
시선을 느낀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그는 언제 자신이 나를 그리 바라봤냐는 듯이 산뜻한 표정이었다. 커다란 손이 은근히 내 손등을 스쳤다.
“느긋하게 쉴까요? 정원에서 차 한 잔은 어때요?”
뭐래. 나는 슬쩍 내 손에 다시 깍지를 끼려는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그리고 턱을 들고 새침한 어조로 말했다.
“전 좀 자고 싶은데요.”
그러자 그는 턱을 괴고는 소름 끼치도록 순진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 그래요? 내 방이 준비되어 있으려나.”
“……제발 그런 오해 살 소리는 하지 말아 달라고 했죠?”
아니, 이런 아저씨 같은 발언을 하면서, 저런 사랑의 신 에로스 같은 얼굴은 반칙 아닌가.
나는 한 손을 활짝 펼쳐서 그의 앞을 막았다.
“자꾸 달라붙지도 말아요. 1미터 이내 접근 금지.”
그가 내 손을 다시 또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집은 괜찮잖아요.”
“안 괜찮거든요! 애초에 우리 계약에……!”
잠자리 횟수를 언급하려던 나는 일순간 얼음처럼 쨍하니 굳고 말았다.
“계약에 뭐요?”
그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활짝 펴진 손을 꽉 잡았다. 내 손보다 훨씬 큰 손에 내 손이 쏙 들어갔다.
“정하지 않았잖아요, 우리.”
“이, 이, 이!!”
사기꾼!
내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나와 눈을 마주친 그가 과자 부스러기를 흘리듯 달콤하고 바삭바삭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하.”
‘웃어? 나는 성질나 죽겠는데.’
뾰족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의 눈가를 문지르며 키득거렸다.
흰 뺨에 연한 홍조가 물들었는데, 그것이 어쩐지 소년처럼 사랑스럽고 귀엽게만 보였다.
“장난이에요. 당신이 정색하는 게 너무 귀여워서.”
반짝반짝 빛나는 미모가 분노를 녹일 지경이었으나, 나는 애써 녹아내린 분노를 끌어올렸다. 자꾸 이렇게 넘어가면 버릇을 잘못 들이는 거란 생각이 늘었기 때문이다.
“정말 장난치지 말아요. 이번에는 화낼 거예요! 제가 화내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요?”
“얼마나 무서운데요?”
“어어.”
아니, 이렇게 되물을 줄은 몰랐는데. 잠시 멍해졌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무섭냐면.
“뾰롱뾰롱해진 복어만큼?”
“하하.”
복어 발언은 실제로 내가 사교계에서 들은 악담 중 하나였다. 파넬 공작부인은 가시복어 같은 사람이라, 작고 여리여리한 외모를 얕보면 안 된다고.
‘아니, 그땐 웃기지 않았는데.’
왜 지금 들으니까 이렇게 하찮게 느껴지는 거람.
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이안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수많은 사용인이 멍하니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각하께서 웃고 계셔…….”
“이게 꿈인가요, 현실인가요?”
“이익!”
모두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이 남자는 여름의 바닷바람처럼 상쾌하기 짝이 없었다.
‘또 부끄러움은 내 몫이냐!’
부끄러움에 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서둘러 걸으며 등 뒤로 소리쳤다.
“하여간 저는 올라갈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당신은 2미터 내에 접근 금지예요!”
“식사 시간에 봐요, 올리비아.”
접근 금지라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만 건지.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콧김을 풍 뿜었다.
‘못 살아, 내가 정말.’
그가 내뱉었던 말, 행동들이 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면서 어지럽게 했다.
“예뻐요.”
‘으으윽!’
여우처럼 요사스러운 미소라니!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내뱉는 ‘예뻐요’라는 칭찬이라니!
‘나한테는 너무 버거워. 칭찬에 면역력이 없단 말이야.’
쿵쾅쿵쾅 걷는 사이, 순식간에 내 방에 도착했다. 나를 따라 올라온 하녀장이 새빨개진 내 얼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찮으세요, 마님?”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고 대답은 했지만, 자꾸자꾸 이안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아서 얼굴에서 열기가 빠지질 않았다.
‘조금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혀야겠어.’
나는 소파에 털썩 앉아 몸을 묻었다. 그리고 두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덮었다.
‘이런 남자가 고자라고 믿었다니. 나도 참.’
고자는 무슨. 바람둥이가 틀림없었다. 씩씩,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런 거 정말 곤란해.’
내가 쓰레기통에서 탈출을 꿈꾸긴 했는데.
뭐랄까. 하나뿐인 탈출구인 줄 알고 폭포로 전심전력으로 뛰어내렸는데, 미지근하고 얕은 웅덩이였더라, 하는 느낌이었다. 각오했던 것과 너무나 다른 생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곤란하다고.’
그렇게 눈을 감고 있으니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제 되었다 싶어서 손을 떼니, 하녀장이 공손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잠시 확인해 주셔야 하는 서신이 하나 있습니다만.”
“내가? 서신?”
누가 신혼 첫날부터 안주인이 꼭 확인해야 하는 서신을 보낸단 말인가. 아주 센스가 없고 무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하녀가 내미는 서신을 보았다.
봉투에는 이렇게 보내는 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플로렌스 자작
바로 내 아버지였다.
* * *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전생보다 좀 빠르지만.’
나는 봉투 위에 찍힌 인장을 만지작거렸다.
내 아버지, 플로렌스 자작.
이렇게 말하긴 뭐하지만, 그는 완전 쓰레기였다.
‘머리도 나쁘면서 남의 말은 안 듣고, 특히 여자 말이라면 다 무시했지.’
아는 게 없으면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기 마련인데. 그는 제 고집대로 여기저기 투자를 일삼았다. 당연히 모두 망했다. 그런 주제에 허영심만 가득해서 어떻게든 종잣돈을 만들어서 크게 한탕 할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사업실패로 종잣돈을 어디서 만들겠는가. 대출에도 한계가 왔을 무렵.
‘결혼 장사를 했지.’
말 그대로 자식을 팔아넘겨서 돈을 받는 결혼 장사.
그 방법을 그에게 깨닫게 한 시발점이 바로 장녀인 나의 결혼식이었다.
황제가 나를 파넬 공작부인으로 지목하고, 파넬 공작가에서 이를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아버지는 보란 듯이 이런 요구를 했다.
“저희가 빚이 많아서. 파넬 공작가에도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빌빌거리면서 한 말이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너희도 망신당할걸? 연대책임 싫으면 대신 갚아주든가.
시어머니들은 그런 아버지를 경멸하면서도 정말로 그의 요구대로 돈을 갚아주었다.
‘그것에 맛이 들인 아버지는 결국 내 막냇동생인 애니까지 마약쟁이에게 돈을 받고 넘겼지.’
결국에는 잘 풀려서 마약쟁이의 손아귀에서 잘 탈출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아무 상처 없이 잘 해결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큰 상처를 받았던 막냇동생을 떠올린 나는 입술을 비틀었어.
‘다행히 다시 과거로 돌아왔어. 애니를 구할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리고 그러려면 이 쓰레기부터 해결해야 했다. 내 앞으로 날아온 편지를 열어보았다.
내용은 간결했다.
-올리비아. 네가 제임스 파넬 공작과 혼인하는 대가로 받았던 돈들이 다시 추징에 들어갔단다. 너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죽게 생겼으니 어서 해결해다오.
‘미쳤나. 이게 왜 나 때문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입술을 비틀었다. 내가 플로렌스 가문의 빚이 늘어나는 데 손가락 하나라도 일조한 것이 있나? 가문의 빚이 늘어난 것은 순전히 아버지 탓이었다.
나는 펜을 쥐었다. 답장을 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어요, 아버지. 제 덕분에 잠깐 빚이 사라졌던 것이지, 저 때문은 아니죠. 죽는 것도 제 알 바 아니고요. 이런 걸로 편지 보내지 마세요.
멍청한 사람이니 돌려 말하면 알아듣지도 못한다. 나는 직설적으로 편지를 적은 뒤 단단하게 봉했다.
그리고 다른 편지 한 장을 적었다. 바로 막냇동생인 애니를 향한 것이었다.
-애니, 언니랑 얼굴 좀 보자. 너랑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이 있어. 사흘 뒤, 타이론 공작가에서 마차를 보낼게.
거침없이 봉투를 밀봉했던 아버지의 편지와 달리 애니의 편지에서는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니는 아버지와 같은 집에 살고, 분명 아버지는 애니의 편지까지 뜯어볼 테니까.
‘내가 아는 아버지는 거머리처럼 애니에게 붙어서 따라올 양반이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버지와 연관된 모든 것을 무시하고 그냥 귀를 막고 지내고 싶었다. 자기가 타이론 공작가의 정문을 넘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좀 웅얼거리다가 결국엔 포기하겠지.
‘하지만 너무 절박한 나머지, 애니를 더 빨리 팔아치우려 들지도 몰라.’
미래가 빠르게 변한 탓에, 변수 또한 많았다. 내가 스물이니, 애니는 지금 막 열넷이 되었을 터. 한참 곱고 사랑스러울 동생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너까지 진흙탕에 빠지게 놔둘 수는 없지.”
망설임이 무색하게, 나는 시원스럽게 봉투를 붙이고 밀랍을 쾅 찍었다.
* * *
플로렌스 자작은 요즘 며칠간 죽을 것 같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바로 사람들의 비웃음과 파넬 공작가에서 찾아오는 빚 독촉 때문이었다.
“젠장!”
얼마 전만 해도 하늘을 나는 것처럼 즐거웠다. 당연했다. 파넬 공작가와 사돈이 되었으니까.
‘자작이라고 비웃는 놈들이 입을 닥쳐서 좋았었는데.’
무려 황제가 직접 지목해서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파넬 공작가에서는 사돈댁이 빚에 쫓긴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자존심 상했던 모양인지, 그 빚을 대신 갚아주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비싼 값에 딸을 잘 넘긴, 수지맞는 장사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니!’
플로렌스 자작은 자신의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종이를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바로 파넬 대부인이 보낸 편지였다.
-혼인 동맹을 위한 거래였으나, 혼인이 무효로 돌아가면서 그에 대한 거래금 또한 추징에 들어갈 예정이오. 빠른 시일 내에 돌려주길 바라오.
차라리 빚쟁이가 빚을 가지고 있을 때는 나았다. 바로 당장 토해내지 않아도 되는 돈이었으니까. 하지만 파넬 공작가로 빚의 주체가 바뀌면서 돈은 바로 갚아야 하는 것으로 변해버렸다.
‘젠장! 이게 다 그 계집애가 변덕을 부리는 바람에.’
플로렌스 자작은 들고 있던 종이를 책상에 내던졌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화가 치미니, 자연스럽게 문제의 원흉이 떠올랐다.
“올리비아…….”
올리비아 플로렌스. 아니, 이제는 올리비아 타이론 공작부인.
“그 계집애는 어떻게 나에게 한마디 언급도 없이 이렇게 큰일을 저지를 수가 있지?!”
플로렌스 자작은 주먹으로 책상을 쾅쾅 내리쳤다. 정말 그의 큰딸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시집을 보낸 딸이, 제멋대로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해버린 것이다.
“심지어 결혼식에 부르지도 않고!”
타이론 공작가에서 초대장이 오지 않을 때도 설마설마했다. 잊어버린 거겠지, 깜빡한 거겠지, 늦는 거겠지, 아직 안 온 거겠지.
설마 정말로 안 불렀을 줄이야!
“배은망덕한 계집! 못된 계집!”
딸을 생각하며 자작은 잠시 버둥거렸다. 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올리비아는 무척 차분하고 조용한 성품이었다. 아버지의 말에 토를 단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반항아였던 큰아들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았을 텐데.’
말하자면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셈이다.
독촉장을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던 플로렌스 자작의 서재 문이 똑똑 울렸다. 자작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아무도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저, 저기요, 아버지.”
문이 열리고, 지렁이가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자작은 좀 더 짙은 빛을 띠게 된 눈동자로 문을 노려보았다.
그를 닮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빼꼼 겁에 질린 눈을 내밀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막내딸, 애니였다.
“아, 아버지. 편지가 와서요…….”
“그딴 것은 있다가 이야기하라고 했지!”
당장 손에 잡히는 문진을 집어던지려던 플로렌스 자작이 손을 들었을 때였다. 어깨를 움츠린 작은 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반짝 빛이 들어왔다.
“……잠깐. 그게 누구 편지냐?”
하잘것없는 편지야, 집사에게 맡겼을 터. 딸이 직접 들고 왔다면 보낼 만한 인물은 단 한 명이었다.
애니가 부들부들 떨면서 자작이 원하던 대답을 내뱉었다.
“오, 올리비아 언니요.”
“그래!”
자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하게 개었다. 그는 신이 난 걸음으로 걸어와서 애니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챘다. 타이론 가문의 인장이 찍힌 편지는 분명 올리비아가 보낸 것이었다.
‘우리 올리비아는 지금 우리 집 사정을 몰라서 그래. 그 아이가 가족의 어려움을 모른 척할 리가 없어.’
그것이 그가 알고 있는 올리비아였다. 20년 전, 그녀는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진상들에게 구박당하고 입지가 좁아지면서도, 아버지가 죽는소리를 하면 없는 돈 있는 돈 긁어다가 줬으니까.
하지만 그때의 올리비아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없었다. 신이 나서 편지를 뜯어본 자작은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이, 이 망할 계집애가!”
올리비아에게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되바라진 말에 자작은 미친 사람처럼 쿵쿵 날뛰고 말았다.
“정말 미친 건가? 어떻게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돌아버린 게 분명했다. 이안 타이론 공작과 결혼하더니 눈에 뵈는 게 없던가.
한동안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을 모두 던지고, 가구를 발로 차버리던 자작의 시선이 얼어붙은 것처럼 문가에 선 애니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작은 손가락으로 타이론 가문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꽉 쥐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시근덕거렸다.
“그 편지는 뭐야?”
“이, 이건, 어, 언니가 제게…….”
“이리 내!”
이렇게 불을 질러놓고, 동생에게는 편지를 썼단 말이지? 자작은 봉투를 갈기갈기 찢어서 올리비아가 애니에게 쓴 편지를 꺼냈다. 편지 내용은 간략했다.
-사흘 뒤, 타이론 공작가에서 마차를 보낼게.
자작에게 보낸 것과는 전혀 다른, 간결하지만 따뜻한 편지였다. 그 편지를 보는 순간 자작은 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하긴! 그 예쁜 딸이 갑자기 이렇게 매정하게 굴 리가 없지. 다 생각하고 있는 게 있었던 거야.”
졸렬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자작의 머리도 빙글빙글 돌아가며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상황을 짜 맞추기 시작했다.
‘타이론 가의 눈치가 보여서 내게는 이런 편지를 보내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애니에게 보낸 거지.’
평생 순종적이었던 딸이 갑자기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리가 없었다.
플로렌스 자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한편 타이론 가문의 가주 집무실에서는 미묘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이안의 보좌관은 총 세 명.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이었는데, 모두 이상한 눈으로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금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조각처럼 잘생긴 남자가 반듯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꼭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잘생긴 모습이었으나.
“푸흡.”
그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요상스러운 웃음소리가 간헐적으로 그의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왜 저러시지?’
‘잘 모르겠어요.’
세 보좌관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안이 다시 웃지 않았기 때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서류로 시선을 두었다. 바로 그때였다.
“푸흐흐.”
또였다.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방정맞은 웃음소리. 결국 참지 못하고 보좌관 중 가장 경력이 높은 케닌이 총대를 메고 입을 열었다.
“드디어 미치셨습니까, 각하.”
그의 지적에 이안은 여름 하늘처럼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미안, 미안. 자꾸 생각나서 말이야.”
그러면서 또 푸흐흡,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린다. 케닌이 세상 하찮은 사람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실없이 웃는 이안을 쳐다보다가 안경을 손가락으로 추켜올리며 말했다.
“뭐가 그렇게 생각나시는데요. 들어주길 바라시는 것 같으니 들어드리겠습니다.”
“일부러 가운뎃손가락을 세운 건가?”
“……실수입니다.”
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케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이 건방진 꼬라지를 보니 화가 치밀어야 마땅했는데, 우습게도 올리비아를 떠올리니 화가 사르륵 녹았다. 이안은 입가에 미소를 가득 베어 문 채로 말했다.
“내 아내가 나보고 1미터 이내 접근금지래.”
“네?”
맥락 없는 말에 케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이안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게 귀여워서 뽀뽀했더니 2미터로 거리가 늘어났고.”
“그런 아저씨 같은 짓을 각하께서 하셨다고요?”
케닌은 이제 경악했다.
이안과 뽀뽀라니, 그걸 질색해서 도망치는 아내라니. 무엇 하나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울 지경이야!’
괜히 내상을 입고 싶지 않아서 케닌은 저절로 떠오르려는 상상을 머리를 흔들어 털어버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다른 보좌관이 입을 열었다.
“원래 스킨십 싫어하시잖아요?”
싫어하다 뿐인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타인과의 접촉을 꺼리는 사람이 바로 이안 타이론이라는 남자였다. 오죽하면 자신에게 달라붙는 사람을 아예 없애겠다며 전 국민 고자 인증까지 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사람이 바뀔 수가 있나?’
두 사람의 열렬했던 첫날밤, 그리고 많은 목격자가 나온 스킨십까지 전해 들은 보좌관들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보좌관들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진짜 타이론 공작님 맞아?’
그리고 이 시점에서, 이 상황을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이안 타이론 본인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반듯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랬지. 그랬는데. 이상하게 참을 수가 없어서.”
이안은 올리비아를 떠올렸다.
실낱처럼 흩어지던 가늘고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 매서운 듯 무른 붉은 눈동자. 다 안다는 듯이 굴다가도 막상 손길이 닿으면 부끄러워 귀 끝까지 붉히는 여자.
‘내 여자.’
답지 않게 음습한 소유욕이 끓어올랐다. 매사 타인과 거리를 두며 인간관계의 산뜻함을 추구하던 이안 타이론이라는 인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이안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왜 그럴까?”
그의 시선이 케닌을 향했다. 상사의 때늦은 봄바람에 구역질을 참고 있던 케닌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그는 모태솔로였고, 진지한 비혼주의자였다.
사실 타이론 가문에 취직을 결심한 데에는 이안이 대국민 고자라는 점도 한몫했다.
“제게 물으면 어떻게 압니까?”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가 그런 것도 모르나?”
“개인 소견으로는 각하께서 조금 미치신 것 같습니다.”
“그대는 대가리를 좀 박아야 할 것 같군.”
“……시정하겠습니다.”
사랑의 열병에 달아올라서 조금 우습게 보이는 상관이라고 해도 머리를 박으라면 박아야 한다. 케닌은 바로 자신의 발언을 철회했다.
머리 박아라, 한 번만 봐주십쇼.
대략 그런 내용의 시선이 어지럽게 오가고 있을 때였다. 다른 보좌관이 서류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각하, 그런데 유심해서 들으셔야 할 보고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플로렌스 자작가에 대한 것입니다.”
플로렌스 자작가. 바로 사랑하는 아내의 친정에 대한 것이었다.
이미 결혼 전, 조사로 플로렌스 가문에 대한 내용이 대략 오갔기 때문에 상황을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보좌관에게 지금 올리비아가 받았을 편지의 내용을 들은 이안은 엄지로 턱을 문질렀다.
“플로렌스 가문이 그런 상황이라고?”
“네, 각하.”
딸을 팔아서 빚을 메꾸었는데, 결혼이 파기되면서 자연스럽게 빚을 조기 상환하게 된 상황이었다. 이안은 냉소를 지었다.
“파넬 공작가도 어지간히 재정이 달리나 보군. 이미 한 차례 혼인 무효로 이목이 쏠린 상황인데 굳이 이 시점에서 빚 독촉이라니?”
“괘씸죄 때문 아니겠습니까. 저라도 화가 치밀 것 같은데요.”
“그러기에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잖아?”
정말 남편하고 통정이라도 했는데 바람나서 이혼하는 상황이면 모를까. 혼인 이야기가 오가던 시점에서 이미 제임스 파넬은 전쟁터에 나간 참이었다. 이안은 입술을 비틀었다. 올리비아의 새초롬한 얼굴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이름을 불러주세요. 부인이라는 호칭은 어색해서.”
‘그럼 도대체 누굴까, 그 자식은.’
아무리 조사를 해도 그녀에게 부인이라고 불렀을 법한 남자는 인생에 존재하질 않았다. 교수도, 친구도 하나같이 그녀는 학창 시절 내내 공부만 했다고 증언했다.
“행정부에 취직해서 어려운 집안에 보탬이 되는 게 꿈이라고 했었죠. 현실적인 소녀였어요.”
그때의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그녀의 설계와 180도 다르게 전개될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그리 생각하니 어쩐지 그녀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조사가 모든 것을 알려주는 건 아니니까.’
부인이라는 말에 어깨를 움츠리며 거북스러워하던 그녀를 떠올리며 이안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는 촉이 좋은 편이었다. 분명 뭐가 있긴 있었다.
그의 회상을 깨뜨리고 보좌관이 질문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는 편이 좋을까?”
이안은 마주 질문했다. 그의 태도에 케닌은 질색인 표정을 짓더니 완벽한 정론을 내놓았다.
“마님 몰래 갚아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마님께서 자존심 때문에 주인님께 말씀을 못 드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게 타이론 공작가의 이미지에도 좋았다. 지금도 그가 파넬 공작의 부인을 빼앗았다고 은근히 뒷말이 돌고 있었다. 이참에 정말 죽고 못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안의 의견은 좀 달랐다.
“그런 여자는 아니야.”
자존심 때문에 빚을 갚아달라는 말을 못 꺼낼 여자였으면 다짜고짜 자신을 책임지라고 뻔뻔하게 굴지도 않았으리라.
‘오히려 빚을 내버려 둬 달라고 하지 않을까?’
이안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올리비아가 했던 모든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평했는지도.
“당신도 행여나 처가라고 관심 보이거나 하지 말아요. 그럴 가치도 없는 종자들이니까.”
새초롬하게 입술을 삐죽이던 올리비아를 떠올리니 다시 또 짜릿했다. 저절로 입가가 느슨해지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세 보좌관이 희귀동물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안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왜 그런 표정이지?”
“아니, 신기해서요.”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최근까지 보좌관들조차도 자신의 주인이 ‘연약한 남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누가 거짓말로 고자라고 말하냐고.’
거짓으로 꾸미기에는 지나치게 치명적인 소문 아닌가.
“각하께서 가정을 꾸리시다니. 정말 심복으로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만. 정말 평생 이룰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확고한 독신주의자셨잖아요.”
“그랬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본인도 이렇게 갑자기 결혼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황제가 아무리 괴롭히고 질질 짜도 버틸 자신도 있었고.
케닌이 조심스럽게 이안에게 물었다.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나요?”
“흠.”
케닌의 질문에 이안은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왜 갑자기 결혼하게 되었냐고?’
처음 그 거지 같은 노래를 들었을 때는 픽 웃어넘겼다. 노래 유포자가 그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참 되바라진 여자라고 생각했고.
일부러 모욕을 느끼고 떨어지라고 찻집에 홀로 내버려 두었더니, 차를 코스로 시켜 마시는 걸 보고 보통 여자가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 그녀를 마주했을 때는…….’
인생에 길은 이것뿐이라는 듯, 올곧게 자신을 응시하는 붉은 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불안한 상황인데도 밑도 끝도 없이 당당한 태도도.
그 모습이 우습게도 그의 마음을 훅 낚아채는 것만 같았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일일이 설명할 수 있겠나.’
하지만 인간의 언어에는 이 모호하고도 애매한 상황을 설명하는 두 글자가 존재했다.
이안은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운명의 상대가 지금 나타난 것 아니겠어?”
운명. 식상하지만 적절한 단어였다. 거창한 대답을 기대했던 케닌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거참.”
“다들 얼른 일이나 하도록 해. 있다가 나는 아내와 데이트를 할 거니까.”
벌써부터 그녀를 마주할 일이 기대가 되어서, 서류를 넘기는 이안의 손길이 가벼워졌다.
* * *
나는 지금 무척 어이가 없다. 눈을 끔뻑거리며 내 앞에서 빙그레 미소 짓고 있는 이안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 상황이 뭐죠?”
이 상황에서도 참 상큼하기도 하지. 저 얼굴을 저 남자에게 달아준 건 아무리 생각해도 신의 실수였다. 이런 게 바로 지나친 몰아주기 아니겠는가.
분명 그는 이따가 보자고 했고 나는 타이론 공작가의 안주인으로서 해야 할 업무를 보았다. 그리고 슬슬 저녁 식사 시간이라 내려온 건데.
‘웬 마차?’
하녀들이 나를 안내한 곳은 식당이 아니라 현관이었다. 그리고 이미 준비 완료된 마차가 문을 활짝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덤으로 몸이 날렵하게 보이는 정장을 입은 잘생긴 남자가 모자에 지팡이까지 들고 날 기다리고 있었고 말이다.
‘매일매일 놀라게 하는 것도 재주네.’
도대체 어떻게 행동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해서 눈가를 좁혔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상큼했다.
“데이트입니다, 올리비아.”
“네?”
나는 잠시 멍하니 ‘데이트’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내가 뭘 입고 있는지 내려다보았다.
‘이런 옷차림으로 데이트라고?’
그냥 귀부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집에서 편하게 입는 민소매 이브닝드레스 차림이었다.
“저어, 저는 그냥 저녁 먹으러 나온 건데요.”
“꾸미지 않아도 아름답습니다.”
“말씀은 감사한데.”
너만 상큼하면 다냐.
미의 남신이 강림한 것 같은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미남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웬만한 미인도 저 곁에 서려면 상당히 긴장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빙글 돌아섰다.
“……그래도 꾸미고 나올게요.”
그냥도 저 여자가 어떻게 이안 타이론을 자빠뜨렸나 궁금해하는 사람 천지일 텐데, 괜히 외모로 비교당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얼른 물러나려고 할 때였다.
“허허.”
산들바람처럼 가벼운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지나치게 가까운 소리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났다. 다시 그를 돌아보려고 했을 때였다.
“꺄아!”
이게 도대체 몇 번째란 말인가. 단단한 팔이 이번에는 나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졌다. 깜짝 놀란 나는 다리를 바둥거리다가 주먹으로 그의 등을 퍽퍽 때렸다.
“왜 이렇게 번쩍번쩍 안아대는 거예요?”
그냥 곱게 말하면 되지!
성큼성큼 걸어서 그는 나를 마차의 의자에 정중하게 앉혔다. 내가 팔짱을 끼고 노려보자, 그가 눈을 사르르 접으며 웃어 보였다.
그가 할 것 같지 않은 달큰한 말들이 내 귓가를 적셨다.
“저는 당신과 떨어져 있는 1분의 시간도 아까운데 당신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내 머리카락을 붙들어서 그 끝에 쪽, 입을 맞췄다. 반사적으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슬쩍 엉덩이를 떼어 마차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그의 손가락에서 머리카락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나는 턱에 힘을 주었다.
“2미터 접근금지라고 했어요.”
진심으로 한 말이었건만,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저런. 그러면 마차를 함께 탈 수가 없는데. 1미터로 줄여주시면 안 됩니까?”
“그래도 마차를 함께 못 타는 건 마찬가지거든요? 그리고 아까 말했죠. 옷이라도 갈아입게 해주세요.”
내 말에 그가 이번에는 마차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마차는 충분히 넓었지만, 그의 키가 워낙 커서인지 마차 안이 꽉 차는 것만 같았다.
허리를 숙이고 팔로 내 곁을 짚은 남자가 나를 막아서듯 서서는 싱긋 웃었다.
“저도 말했는데요. 갈아입지 않으셔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만두세요. 그리고 이건 당신의 눈에 보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타이론 공작부인으로서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요.”
“그럼 치장하는 동안 동석해도 됩니까?”
이건 뭔 소리야.
‘옷을 갈아입는 동안 쳐다보겠다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내가 입술을 벌리고 그를 올려보았을 때였다. 살구색 입술이 잔망스럽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조금 흥분해서 옷을 다 벗기…… 읍!”
“으으으!”
이놈의 남자! 부끄러움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건가! 어떻게 이런 말을 나불나불할 수가 있지?!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이안을 노려보고 있으니, 그의 푸른 눈이 다시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커다란 손이 그의 입을 막고 있는 내 손등을 감쌌다.
그리고는 송곳니를 세워서 내 손바닥 안쪽을 살짝 깨무는 게 아닌가.
“하, 하지 마요!”
당연히 기겁해서 손을 빼내었다. 그런 나를 재미있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이안이 웃었다.
“정말 치장하러 가실 겁니까?”
“으으.”
치장하러 간다고 하면 또 저 미친 소리가 도돌이표인 건가, 설마. 슬쩍 눈을 굴렸더니 음험하게 걸린 미소가 영 찜찜했다.
‘도대체 뭔 데이트를 계획했길래 이래?’
치장하면 안 되는 장소로 계획이라도 했나. 그런데 자기는 정작 삐까번쩍하게 차려입었고?
도대체 뭔질 모르겠다. 나는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끼었다.
“좋아요. 갑시다! 가요! 도대체 어딜 이렇게 가자고 조르는 건지, 만약 별로면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내 엄포 따위 고양이의 가르릉, 소리 같은 건지. 그는 활짝 웃으며 냉큼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마차 밖으로 말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출발하지. 다녀오겠네, 집사.”
“다녀오십시오, 주인님.”
마차 문이 기다렸다는 듯이 닫혔다.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이안의 얼굴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아오, 얄미워!’
마차의 덜컹거림에 몸을 맡기고 앉은 남자는 여유롭게만 보였다.
‘결국엔 또 넘어가 버렸어.’
이 남자의 막무가내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항상 정신 차려 보면 이 남자의 뜻대로였다. 내가 계속 입술을 삐죽거리며 노려보고 있으니,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다 당신 뜻대로 되는 것 같아서 분해서요.”
“하하.”
내 말에 이안은 유리처럼 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리를 꼬고 허리를 숙여 내 쪽으로 고개를 내민 자세였다.
갑자기 훅 다가온 시선에 나는 뒤로 몸을 빼려다가 의자에 바짝 붙은 꼴이 되었다.
이유 없이 긴장해서 굳어진 내 얼굴을 그가 나른하게 휘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혀 안 그래요. 당신이 바라는 걸 말하지 않으니 제가 먼저 움직이는 것뿐이죠.”
뭐래. 점점 다가오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바라는 건 그냥 명목상 부부인데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다.
내가 바랐던 건 그냥 나를 파넬 공작가에서 꺼내줄 사람이었지, 이렇게 찐득찐득 끈끈한 부부 사이가 아니었다.
이안은 순순히 내가 미는 대로 물러나며 피식 웃었다.
“저런. 그 소원은 들어드리기 어렵겠는걸요.”
“우리가 왜 이런 관계가 되었는지를 모르겠어요.”
얄미운 얼굴을 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 말에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팔짱을 끼고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왜냐고 물으신다면 당신이 대낮에 다짜고짜 저를 불러내어서는 제발 결혼해 달라고…….”
“으왁!”
나는 마차 안이라는 사실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가 머리가 꽝하고 부딪쳤다. 놀란 이안이 나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내 머리가 지금 문제냐. 너무나 창피한 나머지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버럭 그에게 소리쳤다.
“말 좀 바꾸면 안 돼요? 수치스러워!”
“네? 그럼 어떻게 바꿀까요?”
이안은 눈을 깜빡였다.
“당신을 제가 책임져야 한다고 하셨지요?”
“으악!”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방방 뛴 탓인지 갑자기 머리가 멍했다.
“……우리 그냥 다른 이야기해요.”
내 말에 이안은 다시 눈꼬리를 접고 웃었다. 그 웃는 모습조차도 얄미웠다. 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렇게 자주 웃는 사람 아니었잖아? 난 속았다고.’
그가 사교계에서 지금처럼 굴었다면, 나는 절대로 그에게 결혼 같은 걸 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임스로 인해 결혼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고, 부부가 무엇인지도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안과의 결혼생활은 전혀 달라.’
제임스와 다르다고 해서 무작정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무언가 찜찜했다. 내가 감추고 있는 과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말해봤자 미친 사람 취급만 당하겠지만.’
내가 겪었던 일을 떠올리니 다시 얼굴이 침침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우울함을 감추지 못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였다. 창밖을 내다보던 이안이 손가락으로 유리를 톡톡 두드렸다.
“도착한 것 같군요.”
그의 말대로였다. 마차가 천천히 느려지더니 이내 완전히 멈춰 섰다. 마차 문이 열리고, 이안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완벽한 자세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얼마나 맛있는 음식이길래…….”
기분이 상한 탓인지, 내리기도 전에 투덜거림부터 나왔다. 그의 손을 붙들고 다른 한 손은 치맛자락을 쥐고 마차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일이람. 눈에 들어온 것은 음식점이 아니었다.
“아니, 여긴 음식점이 아닌데요?”
저녁 식사하러 온 거 아니었어?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니, 이안이 또 예의 상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꾸미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잖아요.”
우리가 선 곳은 보석상 앞이었다.
* * *
도대체 몇 번이나 얼이 빠지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멍하니 서서 중얼거리듯 물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죠?”
“그 말 되게 많이 하는 것 같네요, 올리비아.”
나의 말에 그는 내 손을 들어 올리더니 쪽,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가 입술을 휘며 웃는 것이 손등을 타고 전해졌다.
소름과 비슷한 감각이 손등을 간지럽게 하고, 팔을 타고 올라와, 목까지 오스스하게 만들었다.
나는 간지럼증이 더 번지기 전에 재빨리 그의 손아귀에서 내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 슬쩍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당신이 그만큼 나를 얼빠지게 하는 거라고요.”
“그것참 영광이군요.”
나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처음 만났을 때였나. 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내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무척 드문데…….”
“그것참 영광이군요.”
‘그때 이 사람도 무척 어이가 없었겠구나.’
이런 식으로 역지사지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 남자에게 미안함을 느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성질을 내야 하는 건지 잠시 혼란을 느꼈다. 그렇게 내 감정을 고민하는 사이, 그가 손을 잡아끌었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복도가 열린 문으로 이어졌다. 보석상을 자택으로 불러서 구입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보석상으로 직접 행차한 것은 처음이었다.
신기한 눈으로 인테리어를 살피며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제 부인에게 어울릴 만한 걸 찾고 싶어서 말입니다.”
이안이 운을 떼었다. 또 무슨 엉뚱한 말인가 싶어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잘생긴 데다가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 직원이 우리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또 다른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안으로는 좀 어두운 느낌의 방이 있었다. 느낌상 VIP실 같았다. 안내해주는 대로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목이 살짝 따끔했다.
의자를 빼내주던 이안이 손가락으로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잡아당긴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검지를 걸어서 목걸이를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남자는 섹시했다. 그가 능글맞은 데다가 스킨십을 좋아하는 자칭 애정결핍남이라는 사실을 아는데도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말이다.
투명한 물방울 펜던트가 그의 살구색 입술 끝에 닿았다. 살짝 벌어지며 붉은 혀가 슬쩍 비치는 모습이 야릇했다. 귓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 또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낮았다.
“부인이 늘 같은 목걸이만 하고 있는 게 신경 쓰여서요. 기왕이면 제가 사준 목걸이를 늘 하고 다녔으면 좋겠는데.”
“별걸 다 신경 쓰네요.”
이러다가 심부전증으로 죽겠네. 나는 일부러 매정하게 그의 손가락에서 목걸이를 빼내었다.
그러자 이안이 눈살을 찌푸리고 내게 물었다.
“제가 매일매일 같은 넥타이만 매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신경 쓰이지 않겠습니까?”
“음?”
자기 딴에는 목걸이니까 남편의 넥타이로 치환을 한 것 같았는데, 솔직히 확 와닿지 않는 이유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보통 남자들은 잘 눈치채지 못하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죠?”
내 말에 이안도 덩달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부인이나 집사가 골라주는 대로 매지 않나요? 매일매일 달라지는 걸 알고 있나요?”
내가 누구의 넥타이를 신경 써서 이런 걸 알고 있겠는가. 내가 말하는 사람은 당연히 내 전남편인 제임스였다.
‘물론, 나야 매일 같은 넥타이를 하고 있으면 신경 쓰이지.’
괜히 꿉꿉한 냄새가 날 것 같고, 아내가 신경 안 쓰는 남편 같고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그건 순전히 내 입장이었다. 나는 매일매일 심혈을 기울여서 넥타이를 골랐지만, 제임스는 한 번도 그것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아마 내가 매주지 않으면 노타이로 돌아다닐 사람일 거야. 어디 있는지도 몰라서.’
그리 생각하니 정말 상대방은 알지도 못하는데 혼자 애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고생했다고 토닥이고 있을 때였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이안의 눈이 유리 조각처럼 예리하게 번뜩였다.
“혹시 슬리퍼 발언과 같은 사람 이야기입니까?”
뜨끔. 아니, 왜 이렇게 예리해.
갑자기 정곡을 찔린 내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안을 마주 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내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이대로 넘어가면 안 돼.’
꼭 뭔가 찜찜한 일이 있는 것 같지 않나. 더듬더듬 입술을 열었다.
“제, 제 아버지…….”
간신히 쥐어 짜낸 변명은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막혀버렸다. 이안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이렇게 되물었던 것이다.
“플로렌스 자작님은 꽤 멋쟁이셨던 거 같은데. 상처(喪妻)하신 지도 오래되셨고.”
“제 아버지를 아세요?”
이 수도에 귀족이 몇 명인데 이렇게 콕 집어서 우리 아버지를 알고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얼마나 기억력이 좋은 거야?’
순수하게 신기해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안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마주했다. 꼭 수수께끼를 내는 고양이 같은 표정이었다.
“혹시…….”
기묘한 위화감에 내가 막 말문을 떼었을 때였다. 문이 다시 열리고는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화려하게 장식한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들어왔다.
열 손가락에 반지를 열 개 다 낀, 아주아주 눈에 띄는 여자였다.
‘마담 바네사!’
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알다마다. 20년 뒤, 제대로 공작부인으로 자리를 잡은 내가 겨우 만날 수 있었던 콧대 높은 보석상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셀레브리티로도 이름이 높았지. 예전부터 패션이 범상하지 않았구나.’
진상들의 견제, 그리고 난산으로 오랫동안 사교계에 부재했던 내가 겨우겨우 복귀했을 때, 그녀는 걸쭉한 입담과 그녀만이 취급하는 상등품의 귀금속, 그리고 훗날 그녀가 유행시키는 모피로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이안에게는 더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검지에 끼워진 커다란 비취반지가 어둠침침한 방에서도 휘황찬란한 존재감을 뽐냈다.
“공작님, 오랜만이에요. 안 그래도 멋진 청금석 커프스가 수중에 들어와서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이안은 이때도 이 여자와 거래를 하고 있었고.’
하여간 보통 수완이 좋은 남자가 아니다. 왜 대국민 고자라는 헛소문을 순순히 내버려 두었는지 모를 정도로.
‘정말 아기가 싫어서? 하지만 그 이유가 평생 독신이 되는 이유의 충분조건은 아니지 않나?’
내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커다란 손이 내 두 어깨를 꾹 짓눌렀다.
나는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내 뒤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내 물건을 보러 온 게 아니야. 내 아내를 위해서지.”
“다정하시기도 하시지.”
말은 그리하지만, 마담 바네사도 잔뜩 놀란 것이 분명했다. 나를 흘긋대는 그녀의 시선에 호기심이 그득그득했다. 나는 뺨을 붉히며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다음 주 수도의 모든 신문의 헤드라인을 알 것 같네.’
-대국민 고자마저 굴복시킨 올리비아 타이론 공작부인. 그녀의 매력은?
‘내가 뭘 한 거 아니고요. 그이는 고자가 더더욱 아니었고요.’
그렇게 말할 수도 없겠지. 나는 진실을 내 가슴 한구석에 묻어놓고 쓴웃음을 지었다. 마담 바네사가 부드러운 말씨로 내게 물었다.
“어떤 품목을 원하세요?”
뭘 사러 왔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목걸이.’
내가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을 때였다. 내 등 뒤에서 이안이 이렇게 대답했다.
“전부 다.”
공통점이라고는 세 글자라는 점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지친다.’
보석을 구경하는 내 소감은 딱 그랬다. 지쳤다.
‘자꾸 보니까 뭐가 예쁜지도 모르겠고.’
이안의 ‘전부 다’라는 말은 정말이지 파급력이 컸다. 마담 바네사의 입술이 마녀처럼 말려 올라간 것이다.
“역시 통이 크시다니까.”
저기요? 역시라뇨? 그게 무슨 말이죠?
그때 그녀를 말렸어야 했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보석, 그리고 또 보석의 향연이었다.
“이건 몇 해 전 알함브라 광산에서 진상된 다이아몬드고요.”
“이건 블랙마켓에서 압수된 장물이에요. 세상에는 비극의 줄리엣이라고 알려져 있죠.”
“옐로 다이아몬드는 어떠세요? 노란색은 도전해보지 않으셨을 거 같은데.”
나를 향해 쏟아지는 말에 한마디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물론, 나도 파넬 공작부인으로서 이런 보석에는 많이 익숙했다. 정확히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차원이 달라.’
새삼 타이론 가문의 부가 얼마나 큰지 체감이 되었다.
파넬 공작부인 올리비아는 저 보석 중 둘, 셋은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을 테고.
‘그마저도 내 개인재산이 아니라 가문의 보물창고로 들어갔을 테지.’
하지만 이안의 태도를 보니 이건 내게 주는 선물, 즉 내 개인재산이었다.
‘부담스러운데.’
귀족의 개인재산에는 많은 의미가 있었다. 가문의 것은 이혼하면 들고 나올 수 없지만, 개인재산은 들고 나올 수 있다.
애인에게 홀랑 빠져서 가문의 보물을 넘겨주고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는 전래동화 같은 게 나오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내가 파넬 공작부인이었을 때, 내게는 개인재산이 거의 없었다. 결혼 초부터 지나치게 친정에 빼돌리는 거 아니냐는 비난을 듣다 보니 학을 뗀 탓이었다.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지나고 보면 얼마나 부질없나. 소처럼 일하고, 손에 쥔 건 미련새 같은 남편 하나에 진상들 편만 드는 아이 둘이라니. 보석이라도 쥐었다면 허한 마음이 좀 달래졌을까.
‘그럼 저것들도 그냥 내버려 둬?’
눈을 가늘게 뜨고 마담 바네사와 대화를 나누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경악스럽게도 그는 본 모든 보석을 구입하려 했다.
“이거 전부 다 가문으로 배송해주고 결제는…….”
잠시 고민해봤지만, 역시 과해. 나는 물질로 뭔가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이안을 덥석 붙들었다.
“잠깐만요.”
백지수표를 내밀다 말고 손목이 붙들린 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받을 수 없어요. 이건 너무 과해요. 당신에게 이런 빚을 지고 싶지 않아요.”
세상에 대가 없는 선의는 없었다. 그건 40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내가 배운 교훈이었다. 이 수많은 보석은 언제든 결국 쇠고랑이 되어서 내 목을 죌 것이었다.
내 말에 이안의 반듯한 눈썹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전 검소한 편이라서 돈을 쓸 데가 없거든요. 부인을 위해 쓰게 해주시죠.”
검소는 무슨. 재킷에 박힌 금박이나 떼고 말해라.
“거짓말…… 아니, 그게 아니라.”
속으로만 생각해야 하는데, 무심코 입 밖으로 거짓말이라고 튀어나와 버렸다. 내 비꼼 아닌 비꼼에, 이안의 미간 주름이 더더욱 깊어졌다.
나는 꼬이려는 혓바닥을 어버버거리며 서둘러 말했다.
“정말 과해서 그래요. 이렇게 많아봤자 다 차볼 수도 없는걸요. 여기서 세 개, 아니 다섯 개만 고를게요.”
“흐음.”
내 말에 이안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마담 바네사가 우리 앞에 깔아놓은 보석은 18세트. 일부러 저런 숫자로 맞췄나 싶을 정도였다.
‘이제 내 말 듣고 정신이 들었냐? 누나가 이렇게 이야기할 때 다섯 개만 골라.’
그런 눈빛으로 내가 이안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결정했다는 듯이 고개를 든 이안이 상큼한 어조로 말했다.
“다 줘.”
“예, 각하.”
“이안!”
이놈이 진짜!
내가 화가 치밀어서 여우눈을 하고 그를 노려보았을 때였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여름 바람처럼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 잘 어울려서 고를 수 없는걸요.”
내 말 무시하고 달달한 말만 하면 다냐. 자꾸만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모습이 여러 번 보이니 화가 치밀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 자꾸 이런 식으로 마음대로 하는데, 나 좋은 일이라고 마냥 웃으며 묵과할 줄 아나요? 사람을 맘대로 휘두르는 데도 정도가 있는 거예요. 정말 나한테 혼날래요?”
“윽.”
내 말에 이안이 갑자기 자신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신음성을 흘렸다. 모처럼 얼굴을 굳히고 화를 내고 있던 나도 일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내가 화내서 쇼크라도 온 거야?!’
대국민 고자가 아니라 대국민 개복치였냐!
나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살짝 숙여 가려진 그와 눈을 맞췄다.
“괜찮아요, 이안? 어디 아파요?”
그런데. 그런데 이 사람이!
“……아, 미안합니다. 순간 너무 짜릿해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네요.”
필사적으로 등을 둥글게 말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왜, 왜 좋아하는 거예요! 나 지금 화내고 있다고요!”
여자가 화를 내는데 짜릿은 무슨! 정말 화났다는 투로 발을 굴렀더니, 이안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설마 마조히스트인 건 아니지?’
왜 혼나면서 좋아하는데?
나한테 욕을 먹으면서도 실실 웃는 얼굴이 이젠 무서울 지경이었다. 기가 막혀서 그를 내버려 두고 방 밖으로 혼자 나가버리려고 할 때였다.
이번에는 그가 나를 꽉 붙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강아지처럼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내 마음대로 해서 미안해요, 올리비아. 하지만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에요. 낭비는 당연히 아니고요.”
으으, 마주치기만 하면 저절로 마음이 무장 해제되는 무서운 얼굴이었다. 여전히 그를 흘겨보면서도, 한풀 꺾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유가 뭔데요?”
“우린 지금 중요한 곳에 갈 거예요. 저는 그곳에서 당신이 최고로 화려했으면 해요.”
데이트라고 하더니 뭔가 목적이 있긴 했나 보다. 그래도 마음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어서 나는 뾰족한 어조로 반문했다.
“아름다웠으면 하는 게 아니고요?”
그러자, 이안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정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당신은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으으, 바람둥이야. 바람둥이가 분명해.’
저절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떻게 저런 말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할 수 있는가 싶었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췄다.
구입한 보석들은 차곡차곡 포장되어 상자 안에 담겼다. 그중 하나, 심플하면서도 영롱한 다이아 목걸이를 이안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목걸이는 이걸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였지만 목걸이를 건드리니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안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만요. 목걸이는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움찔.
시종일관 여유롭던 그의 몸이 크게 흔들린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싶어서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역시나라고 해야 할까.
평소와 별 차이 없는 표정의 이안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묻는 목소리는 묘하게 낮았다.
“왜입니까?”
“그게.”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이걸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거의 유리와 다름없는, 보석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물방울 모양의 펜던트.
‘내겐 소중한 물건이지만, 누가 봐도 초라한걸.’
내가 무엇으로 자존심을 내세운들 이안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안이 그런 걸로 누군가를 무시하지 않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도 하지만.
‘하지만 진상들은 날 무시했지.’
“혼수라고 그런 걸 들고 오다니, 플로렌스 자작가에서 박대받는 딸을 우리에게 주었구나.”
“사람이 사랑을 받고 자랐어야 사랑할 줄도 알지. 네가 그러니 네 아이를 그 모양으로 키우는 거야!”
상처받았던 기억들이 가시처럼 떠올라서 나를 찔러댔다. 내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쥐고 있자, 이안이 어떻게 오해를 한 건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소중한 사람의 물건인 모양이죠?”
“그, 그런 셈이죠.”
“누구?”
평범한 질문인데 왜 이렇게 소름이 돋는담.
‘내가 예민한 건가.’
눈망울을 굴려서 그를 올려보았다.
바다처럼 푸른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짙어져 있었다. 말하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겠다는 단호함도 느껴졌다.
결국 나는 작은 목소리로, 우물쭈물 대답했다.
“……어머니의 유품이에요.”
내 말에 이안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그의 몸이 일순간 돌처럼 굳어졌는데, 그 바람에 내가 잘못 대답했나 스스로 의심할 정도였다.
그림처럼 느릿하게 이안이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나고, 커다란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술을 덮었다. 눈을 껌뻑거리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유품? 플로렌스 자작부인의?”
“너무 초라하죠?”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라고 이것보다 좋은 목걸이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모두 아버지가 팔아먹고, 결국 이 초라한 물건 하나만 남았을 뿐.
내 표정을 본 이안의 몸이 다시 움찔 떨렸다. 그는 드물게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전혀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벗기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런 의미?’
목걸이에 무슨 의미를 부여해서 벗기려고 했던 거란 말인가.
‘의미를 부여할 게 있어?’
내가 고개를 갸웃했을 때였다. 그의 얼굴이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묘하게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서,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제가 무신경했군요. 몸에서 떼지 않는 물건이라면 마땅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을 텐데.”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어조와 달리 그의 입꼬리가 꼭 애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슬금슬금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요?”
왜 좋아할까?
도무지 맥락이 느껴지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부터 영 이상하네. 약이라도 먹었나. 아님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안 먹은 건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안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잠시 입술을 잘근거리던 그가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대답했다.
“돌아가신 장모님이 이 자리에 함께 계신 것 같아서요. 분명 다정하고 상냥하셨을 테죠.”
“……?”
워낙 천사 같은 얼굴인지라, 그런 자세를 취하니 신부님처럼 경건해 보였다. 하지만 말이야. 표정과 달리 얼굴은 격앙되어 있는걸. 그리고.
“왜 식은땀을 흘리세요?”
잘생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은 또 뭔데?
내 질문에 이안은 그답지 않게 아하하, 하고 어색한 목소리로 웃었다. 오늘의 그는 정말 이상했다.
나는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어머니, 내 어머니라.
‘다정한 어머니상은 아니셨지. 그냥 힘없는 화초 같은 이미지였는데.’
나는 신기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버지를 잘 아는 것도 그렇고, 어머니를 언급하는 것도 그렇고.
‘나에게 관심이 생긴 걸까.’
이렇게 생각하면 지나치게 낙관적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물감처럼 분홍빛으로 물드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목걸이에 대한 이야기가 일단락되고 나자, 다시금 내 치장 문제로 주제가 돌아왔다.
이안은 마담 바네사에게 물었다.
“흠, 그럼 목걸이를 그냥 놔두고 화려하려면 어떤 장신구가 제일 좋을까?”
“역시 서클릿이 제일 낫지 않을까요?”
서클릿은 얇은 링 같은 형태로, 머리에 쓰는 장신구였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서클릿은 주로 아가씨들이 착용하는 장신구잖아요. 저는 이미 기혼인데.”
그 이유로 나는 서클릿을 한 번도 착용한 적이 없었다.
머리 전체를 장식하는 서클릿은 보석을 알알이 연결하여 늘어뜨리기 때문에 다른 장신구들에 비해 값이 비쌌다. 금전적으로 구입할 수 있었던 시기에는 이미 나이가 많았고.
하지만 하나 간과한 것이 있으니, 나는 시간을 거슬러 스물로 돌아왔다는 점이었다. 마담 바네사는 나를 보며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신혼이신데요.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아요.”
“…….”
그러고 보니 결혼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구나. 나는 부끄러움에 뺨을 붉혔다.
고른 것은 입고 있는 연한 초록색 드레스와 색을 맞춘 에메랄드 서클릿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은색 머리카락 위에 살포시 서클릿을 올려준 이안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예뻐요.”
‘평생 들을 예쁘다는 소리를 이 사람에게 다 듣는 거 같네.’
민망함에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에 바람을 부쳤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드레스까지 새로 사는 대신 노란 실크 숄을 두르는 것으로 단장은 끝났다. 보석은 직접 타이론 공작가로 배송되고, 우리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나도 아는 곳이었다.
‘레스토랑 아마란테?’
아마란테는 정통 제국음식점으로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긴 역사만큼이나 유명한 것은 층별로 들어갈 수 있는 계층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전생에는 여기 올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플로렌스 가문이야 거의 평민처럼 취급되던 가문이었고, 파넬 공작부인이 된 다음에는 혼자 레스토랑을 찾았다가 다른 귀부인들의 비웃음을 사서 다신 방문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외식하는 것도 싫어했지. 지금 생각해도 정말 귀찮은 남편이었어.’
식사는 무조건 집에서, 몸을 단련할 때가 아니면 굳이 밖에 나가지도 않는다. 다른 고위 귀족이 흔히 하는 카드게임이든, 사교모임이든 제임스에게는 일절 해당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내가 남편과 이런 곳을 오다니.’
내 손을 잡고 있는 이안을 흘긋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화려한 조명이 쏟아진 탓에 금빛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빛났다.
새삼 인생이 바뀌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오셨습니까, 공작님.”
“늘 앉던 자리로.”
한두 번 온 것이 아닌지, 이안의 대답은 간결하기 짝이 없었다. 1층에서 식사를 하던 이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꽂혔다. 정확히는 나에게.
‘다들 어지간히 궁금했나 보구나.’
수도에 타이론 공작의 열애 사실과 파격적인 결혼 행보가 널리 소문이 났지만, 실제로 우리 둘이 붙어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우리가 짠, 팔짱을 끼고 유명 레스토랑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무념무상…… 무념무상.’
또다시 부끄러울 뻔했지만, 나는 계속 딴생각을 하면서 이안의 곁을 걸었다.
그래도 공작부인으로 지낸 것이 몇 년인가. 따가울 정도의 시선에도 걸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타이론 공작은 VIP 중에서도 VIP. 내가 과거 혼자 올랐던 3층 계단을, 이번에는 이안의 팔을 붙들고 올랐다. 그때였다.
‘시선?’
바늘처럼 예리한 적의가 나의 옆얼굴을 쿡 찌르고 지나갔다. 나는 계단을 오르던 걸음을 멈추었다.
‘누구?’
“올리비아?”
갑자기 멈춘 나를 이안이 불렀다. 내게 쏟아지는 시선들 속에서 적의의 주인을 찾았다. 사교계 경험이 많은 만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2층에서 식사하던 이들 중 하나였다.
‘붉은 머리, 푸른 눈.’
타오르는 불꽃처럼 곱슬거리며 물결치는 붉은 머리카락, 이안과 비슷한 느낌의 푸른 눈이 나를 선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구나.’
그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 적의를 보이는 만큼, 그 적의를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올리비아.”
“이안.”
계속 움직이지 않는 나를 이안이 다시 팔을 살짝 움직이며 재촉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우리 키스할까요?”
“네?”
내 말에 이안은 물론이고 우리를 안내하던 직원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리던 이안이, 이내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언제는 2미터 이내 접근금지라더니.”
“제가 과감할 때는 또 과감한 여자랍니다.”
“그건 제가 잘 알죠. 그것 말고도 아는 게 얼마나 많다고요.”
나와 팔짱을 끼고 있던 이안의 굵은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그리고는 자신을 향해 바짝 잡아당겼다. 그가 나보다 한 계단 위에 서 있는 데다가 키가 훨씬 큰 탓에, 내 발끝이 미끄러지듯 아슬아슬하게 계단 끝을 스쳤다.
‘넘어지겠어!’
나는 반사적으로 그 사람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이러다가 계단을 구를까 무서웠던 탓이다. 그렇게 갑자기 밀착된 내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등줄기부터 목덜미까지 쭈뼛쭈뼛 서게 하는 섹시한 목소리였다.
“당신의 살결이 얼마나 보들보들한지, 당신의 체취가 얼마나 달콤한지, 당신의 신음이 얼마나 육감적인지.”
쪽.
그의 입술이 귓불에 닿았다. 뾰족한 송곳니가 얕게 내 귓불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그의 입술이 내 뺨과 눈가에 차례로 촉촉, 자취를 남겼다.
나는 열기가 고인 눈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그가 입술을 벌렸다. 어쩐지 짐승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함부로 도발하지 말아요.”
‘감당도 하지 못하면서.’
그 말은 내 입안으로 넘어갔다.
* * *
‘아, 지친다.’
이 생각을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다. 타이론 가문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 나는 가물거리는 눈으로 마차 밖을 내다보며 작게 하품을 했다.
위명만큼이나 아마란테의 음식은 훌륭했다. 입에서 살살 녹는 것 같은 갈릭 새우구이와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스테이크, 내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크림수프와 올리브유에 적신 부드러운 흰 빵까지.
하지만 나는 식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식사 시간 내내 허기진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남자 때문이었다.
‘으으, 이제 손끝 하나라도 내가 내미나 봐라.’
키스 한 번 허락해줬더니 그다음부터 이안은 줄곧 저 상태였다. 눈빛에서 떨어지는 열기가 너무나 의도가 투명하여 모른 척하려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떻게 밥이 넘어가는지도 모르고 식사 시간은 끝이 났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것은 단둘이 들어가야 하는 마차. 밀실에 두 사람만 남는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졌다.
그런 나의 어깨를 이안은 부드럽게 감쌌다.
“걱정하지 말아요. 손가락 하나도 안 댈 테니까.”
아니, 방금까지 그렇게 나를 먹음직스러운 음식처럼 쳐다보고 이 말을 믿으라고?
내 찌푸려진 얼굴에서 마음의 소리를 읽은 그가 쿡쿡 낮게 웃었다. 그리고는 가벼운 어조로 속삭였다.
“당신이 싫어하는 건 안 해요.”
그리고 그의 말대로였다. 마차에 올라탄 뒤, 그는 팔짱을 끼고 내 맞은편에 앉아서 창밖만 바라보았다. 반쯤 자다 깨다 하던 나는 몽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마차 안,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그의 금빛 머리카락에 혜성 같은 자취를 남겼다. 불빛이 지날 때마다 조각처럼 높은 콧등이 희게 빛났다.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리고 나는 이제 저 남자의 얼굴뿐만 아니라 저 남자의 됨됨이 또한 알게 되었다.
‘좋은 사람이야.’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이안은 좋은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여 자신의 감정을 한 걸음 물릴 줄 알고, 참을 줄도 아는 착한 사람.
‘그러니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안.”
“예.”
하도 조용히 창밖을 보고 있어서 자는 줄 알았더니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나는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저도 당신한테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초라한 물방울 목걸이가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이라는 걸 고백했던 것처럼, 나는 오늘 종일 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편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제게는 막냇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를 제가 책임져야 해요.”
“책임이요?”
내 말에 이안이 잘생긴 얼굴을 갸웃거렸다.
아, 너무 단도직입적이었나. 설명이 짧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손바닥을 내저었다.
“앗! 책임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에요! 그냥 기숙사 학교에 보내는 정도? 무, 물론, 그 돈은 제가 공작부인으로서 받는 용돈에서 지급할 거고요.”
부모가 있는데 내가 동생을 책임진다는 게 어떻게 보일지 난 잘 알았다. 그런 행동이 내가 타이론 가문에서 자리를 잡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를 내버려 두면 그 아이는 불행한 결혼을 하게 될 거라서요.”
운이 좋아 좋은 부모를 만나, 결혼 때까지 잘 보살핌을 받다가 지참금을 받고 사뿐히 독립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고, 팔려가는 결혼의 비참함을 20년이나 절절히 맛보았다. 내 동생인 애니에게까지 그런 아픔은 주고 싶지 않았다.
나의 짧은 말에서도 이안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한 것 같았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입장 때문인지, 괜히 마음이 졸렸다. 나는 조금 더 빠른 어조로 그의 부담감을 줄일 만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사흘 뒤에 저희 집으로 초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어요. 당신은 신경 하나도 안 쓰셔도 되어요. 그래도 그런 일이 있다는 건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올리비아.”
그가 얼굴을 굳힌 것은 그때였다.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단호함을 머금고 나를 담았다.
“저는 명목상 부부로는 지낼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네? 그…….”
시종일관 다정하던 그의 단호한 한 마디에, 머릿속이 털실처럼 일순간 꼬여 들어갔다.
‘이게 무슨 말이지? 무슨 의미이지?’
간단한 문장이었는데 글자가 따로따로 뛰어노는 것처럼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를 꾸짖는 말인가.’
생각이 나쁜 쪽으로 흘러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내 친정에 신경을 기울이는 건, 파넬 공작가의 진상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격 거리였으니까.
‘역시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해결했어야 했나.’
결국 제임스와 지낼 때, 그랬던 것처럼. 내가 그리 생각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굵은 손가락이 내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그만.”
생각을 잘라내는 것처럼 상쾌한 목소리였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이안이 진지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파넬 공작과의 혼인을 깰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좋았을 거예요. 그중에서 나를 골랐죠.”
그의 말은 옳았다. 다른 좋은 선택지가 있었다면 나는 그쪽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황제가 직접 짝지은 결혼인지라, 황제가 더 간절할 혼처를 찾다 보니 그가 걸렸을 뿐이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당신을 몰랐고, 설마 내게 청혼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나갔어요.”
이안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우리의 썩 로맨틱하지 못한 첫 만남이 지금 흘러나오는 이유는 뭘까. 나는 둔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내 대답에 이안의 반듯한 이마가 구겨졌다. 꼭 쓰게 웃는 것 같았다.
“우린 이제 운명공동체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
운명공동체. 그에게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우린 그저 서로 조건이 마음에 들었던 것뿐이잖아. 당신은 떠밀리듯 내 청혼에 응했고.’
그런데 운명공동체라니. 너무나 과분한 말이었다. 내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자, 그의 미간의 주름이 점점 더 깊어졌다. 그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얼마나 가벼운 결심으로 나를 당신 인생에 끌어들였는지는 충분히 알겠군요.”
정확히는 결심이고 뭐고도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쓰레기통을 벗어날 생각이었으니까. 그것을 위해서라면 미친 여자가 되는 것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절박했던 그때를 떠올리니 저절로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이안의 손이 이번에는 그런 내 두 손을 꽉 붙들었다. 나보다 훨씬 높은 체온이 꼭 불덩어리 같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그는 느리지만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부부입니다. 그렇게 남에게 설명하듯 이야기하지 말아요. 당신 동생이면 내게도 가족이잖아요.”
“이안…….”
그에게, 아니 평생 누구에게도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다정한 말에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멍하니 내 앞에 앉아 내 손을 잡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 남편.’
이제야 실감이 들었다. 내가 결혼했다는.
그러자 내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 사실을 느낀 이안은 천천히 붙들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한층 가벼운 어조로 내게 물었다.
“일단 문제는 당신 아버지군요. 맞습니까?”
“맞아요. 평생 상종도 하고 싶지 않아요.”
거기에 줄줄이 사탕으로 붙은 오빠와 남동생들도 골칫덩어리이긴 마찬가지였으나, 일단 그쪽은 접어두었다. 실제로 내게 돈 달라고 괴롭히던 사람은 아버지뿐이니까.
내 즉답을 들은 이안의 눈동자가 빛을 달리 받는 사파이어처럼 반짝였다.
“치워버리고 싶습니까?”
“당연한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손가락질해도 상관없어요. 되도록 멀리, 평생 볼 일 없는 곳으로 보내버리고 싶어요.”
“그럼 그렇게 내게 부탁해요. 이젠 그럴 수 있는 사이잖아요, 우리.”
그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속눈썹이 어지럽게 자취를 그렸다.
“우리가 그럴 수 있는 사이예요?”
내 반문에 그가 픽 가볍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당신은 날 모르고요.”
“하지만 우린 결혼으로 얽히게 되었죠. 몇 가지 우연이 겹쳐서요.”
“…….”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우리의 만남을 회고했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좋을 건 없는 만남이었잖아.’
떠밀리듯이 치렀던 결혼, 심지어 재혼, 상대는 대국민 고자.
서로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는 사이. 함부로 밑바닥을 보여줘도 되는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이리 다정하다니.’
소금 덩어리인 줄 알고 눈 딱 감고 와삭, 씹었는데, 설탕과자가 바삭바삭 씹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속으로는 못돼먹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다소 날 선 말투에도, 이안의 대답은 시종일관 다정했다.
“힘들었을 텐데 이젠 괜찮다고 안고 토닥여주고 싶습니다.”
“…….”
토닥이다니. 태어나서 언제 받아봤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이야기였다.
계속 눈을 가늘게 뜨고 있자, 이안은 자신의 진심을 의심한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올리비아.”
“잠깐만요.”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그가 내뱉는 모든 말 중에서도 유독 달았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면 무엇이든 간에 모른 체하고 넘어가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건 내 문제였고, 그렇게 얼렁뚱땅 남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되었다.
“일단 사흘 뒤에요.”
손바닥을 펴서 이안의 접촉을 막고, 다소 단호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때 당신에게 모두 말할게요.”
나의 태도에 그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러더니 아까 내가 목걸이를 거절했을 때처럼 황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마음이 상한 건가?’
어깨를 돌려서 얼굴을 볼까, 했을 무렵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목소리였다.
* * *
어쨌든 우리의 첫 데이트는 그렇게 끝이 났다. 보석상에서 구입한 수많은 보석상자는 이미 타이론 가문에 도착해 있었다.
‘나쁘지 않아. 이런 상황.’
그 때문인지 시종들은 내게 더 사근사근한 태도를 보였다. 솔직히 파넬 공작가에서 권위를 세우려 노력할 때보다 지금이 백배는 더 쉬웠다.
그때는 나를 시종일관 짓누르는 진상들이 셋이나 있었고, 내 편이 될 수 있는 남편은 부재했으니까.
‘물론, 그 인간이 와서도 딱히 변하는 건 없었지.’
그에 비하면 타이론 공작가는 얼마나 좋은가.
이안이 나에게 꼬박꼬박 존대하며 나를 존중해주는 태도는, 저절로 시중인들을 긴장시킨다. 산더미만 한 보석 또한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우리 둘이 죽고 못 사는 신혼부부라고 생각할 거야.’
“그럼 쉬어요.”
이마에 입술 도장을 찍고, 이안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피곤하고 지쳤던 나는 목욕 대신 가볍게 물로 몸을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아직도 간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이안.’
그를 떠올리니 자연히 아까 아마란테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파도치는 붉은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푸른 눈을 가진 여자. 기억이 날 듯 안 날 듯 애매한 얼굴이었다.
‘귀족이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쉬이 잊히지 않는 강렬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2층에서 식사하는 것을 보니 백작 가문 정도 되었을 텐데.’
그런데 파넬 공작부인으로 지내던 내가 모른다니.
‘잘 모르겠네.’
이안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지만, 너무나 개인적인 일일 거라는 느낌이 들어서 망설여졌다.
‘설마 옛날 여자친구?’
남녀 사이에 떨떠름한 관계라면 역시 헤어진 연인이겠지?
무심한 표정의 이안과 그의 팔짱을 끼고 있는 붉은 머리칼의 그녀를 떠올리니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따끔.
“어?”
그런데 이게 웬일? 그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 한구석이 바늘로 찔린 것처럼 아팠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프지?’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심장마비 전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움직여야 하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뛸 때 할 수 있는 행동 따위를 내가 알 리가 없다. 그냥 몸이 아프지 않으려면 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꿀벌인 양 내 방을 빙빙 돌았다.
‘그런데 이게 운동이 되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 하는 문소리가 들려 대답하니 하녀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마님.”
“응?”
“마님께서 외출하신 사이 서신이 하나 왔습니다.”
“이리 주렴.”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전해준 서신은 연보라색 봉투의,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편지였다.
겉봉투에는 알키저스 백작부인이라고 찍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게 누구의 편지인지 알았다.
‘로메오.’
미혼 남성인 자신이 보내면 행여나 의심을 살까 봐 자기 어머니인 백작부인 이름으로 서신을 보낸 것이었다.
‘하여간 배려심이 깊다니까.’
그리 생각하며 나는 밀랍을 뜯었다. 들어 있는 편지는 간결하지만, 다정함이 뚝뚝 묻어났다.
-올리비아에게.
연락이 없어서 걱정되어서 편지를 보냈어. 물론, 잘 지내고 있겠지만 말이야.
결혼생활은 괜찮아? 네가 꿈꾸던 대로야?
편지를 읽은 나는, 나도 모르게 푸흐흐 웃고 말았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내가 만약 잘못 지낸다고 하면 어쩔 건가. 왕자님처럼 말 타고 구하러 오려고?
‘로메오는 그러고도 남지.’
다정하고 세심하고 용기 있는, 나의 소중한 친구.
‘아카데미는 로메오를 만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가길 잘했어.’
편지는 담담하지만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로메오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얼른 답장을 줘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자리에 앉아서 펜을 들었다.
미끄러지듯 유려하게 한 문장을 적었다.
-걱정하지 마. 이안은 좋은 사람이야.
거기까지 썼던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결국 한 단어를 추가했다.
-이안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 * *
편지를 보내고 곧장 잠든 올리비아와 달리, 이안의 집무실은 꽤 오래 불이 켜져 있었다. 자다가 상관의 부름에 끌려 나온 케닌은 잠옷 차림에 눈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예. 마님께는 형제가 많은데 여동생은 한 명 있습니다. 애니 플로렌스, 나이는 열넷일 겁니다.”
“열넷.”
이안은 턱을 문질렀다. 아까 올리비아가 어깨를 움츠리고 울상을 지으며 내뱉은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아이를 내버려 두면 그 아이는 불행한 결혼을 하게 될 거라서요.”
아직 혼인을 운운하기에는 어린 나이인 것 같은데.
‘그런데 왜 그렇게 확정적으로 말하는 걸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만큼 많은 상처를 입은 걸까. 이안은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플로렌스 자작을 생각하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도대체 그녀를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올리비아가 얼마나 야무지고 당찬 여자인데. 그런 여자를 움츠러들게 만든 그 아버지라는 작자를 당장 꿇어 앉히고 싶은 마음이었다.
‘좋은 것만 잔뜩 걸어줘도 아쉬운 사람인데.’
그리 생각하며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그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오늘 데이트가 떠올랐다.
난처한 듯 고개를 흔들던 올리비아의 표정도.
“이건 너무 과해요.”
과하다.
이안도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 외출했을 때는 이렇게까지 많은 보석을 살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보석상에 앉아서 이것도 저것도 대보니.
‘하지만 모두 다 어울렸는걸.’
곧은 직모 은발에 붉은 눈을 가진 여자는 색색의 보석 중 어느 것을 가져다 대도 찰떡같이 소화했다. 그렇다 보니 몇 개를 골라낼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해서 18세트나 구입하게 된 것이었는데, 그런 자기 마음도 모르고 올리비아는 이렇게 으르렁거렸다.
“정말 나한테 혼날래요?”
“윽.”
매혹적이던 그때의 그녀를 떠올린 이안은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책상에 ‘쿵’ 박았다.
하품을 쩍하고 있던 케닌이 펄쩍 뛰었다.
“아씨! 깜짝이야! 이번엔 또 뭐예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기엔 책상에 부딪힌 이마가 빨간데. 케닌이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이번엔 이안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쿵!
“으으.”
“아이고, 정말. 이랬다가 저랬다가 버라이어티한 상관 때문에 제 명에 못 살겠네!”
케닌은 결국 참지 못하고 이안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책상에 엎드린 이안을 보고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안의 귀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창피해진 것은 다름 아닌 목걸이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유품이에요.”
‘유품이라니! 그런 줄도 모르고 난 그동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앞으로 향후 5년간은 이 사건 때문에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날 것 같았다.
‘내가 이런 흑역사를 만들 줄은!’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던 이안은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보좌관에게 물었다.
“……케닌, 왜 사랑을 하면 사람은 이렇게 부끄러워지는 걸까.”
“아, 쫌!”
독실한 독신주의자이자, 연애무상주의, 솔로 왕국의 1등 시민인 케닌은 결국 상관에게 짜증을 부리고 말았다.
* * *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영지, 골드웨이.
그곳에 검은 망토를 두른 한 무리 커다란 덩치의 사내들이 찾아온 것은 성문을 닫아야 할 무렵이었다.
‘헉! 어디서 이렇게 큰 사내들이.’
‘사냥꾼인가.’
‘저렇게 건장한 사냥꾼이 어디 있어? 용병대 아니야?’
사냥꾼도 거칠지만, 나라와 나라를 오가며 전쟁에 참전하는 용병들은 더더욱 거칠었다.
‘골드웨이에는 이런 사람들이 방문한 적이 없는데.’
문지기들은 긴장해서 들고 있던 창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선두에 선 사내에게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분을 대시오.”
신분증을 보고 성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당연한 절차. 그런데도 위압감이 들어서인지 절차고 나발이고 얼른 통과시키고 싶은 마음이 밀려왔다.
문지기가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곁에 선 사내가 호랑이처럼 큰 소리로 화를 버럭 냈다.
“이 무엄한 것들이!”
“히익!”
오금이 저렸다. 꼴사납게 넘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문지기는 자신의 용기를 다한 셈이었다. 더 이어지려는 대치를 사내가 막았다.
“조용히 해라.”
손을 들어서 수하들을 가라앉힌 사내는 자신의 품에서 네모난 패를 꺼내 보여주었다. 거기 적힌 이름을 확인한 문지기는 이번에야말로 얼음처럼 얼어붙고 말았다.
“파, 파넬 공작 각하?”
제임스 파넬 공작.
골드웨이의 영주, 골드웨이 남작보다도 한참 위인 사내였다. 문지기는 잔뜩 얼어붙어서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후드 밖으로 보이는 어두운 남색 눈동자가 살벌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폭풍이 천천히 북상 중이었다.
* * *
사흘이 지났다. 일찍 눈을 뜬 나는 시중을 들러 온 하녀에게 간결한 명령을 내렸다.
“입맛이 없으니 아침은 되었다. 옷은 빨간색이 좋겠구나.”
“어디 외출하시나요?”
내 주문에 하녀는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집에서 입고 있는 가벼운 드레스들은 주로 파스텔 톤의 가벼운 것들이니 당연한 질문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손님이 올 거란다.”
오늘이 바로, 내 막냇동생 애니가 오는 날이었다.
가볍게 몸을 씻고 따로 장식이 달리지 않은 붉은 원피스에 몸을 끼워 넣었다. 색이 쨍해서인지, 따로 보석을 달지 않아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머리는 어떻게 할까요?”
“말아 올려줘.”
“너무 단조로운 것 같은데 꽃으로 장식하면 어떨까요?”
“좋아.”
굳이 왜 빨간색이어야 했는가. 이건 내 나름의 각오였다.
‘분명히 아버지가 함께 올 테니까.’
내 아버지 플로렌스 자작을 떠올리니 저절로 입술이 뒤틀렸다.
‘아버지가 이런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지.’
내가 아는 아버지는 무척 염치가 없는 사람이라, 애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저 좋을 대로 해석할 게 분명했다. 굳이 빨간색의 원피스를 택한 것은 그에게 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아버지는 원색을 싫어하니까.’
여자는 조신하고 얌전하게. 절대로 큰소리를 내면 안 된다. 옷도 지나치게 화려해서는 안 된다.
살아생전 아버지가 귀에 못 박히도록 해대던 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빨간 옷을 입은 걸 보면 대번에 얼굴을 구길 거야.’
당신 좋은 일을 하나라도 해줄 줄 아나. 플로렌스 자작이 올 때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남짓. 나는 어떻게 그를 면박 주어 쫓아낼까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그렇게 조금 책을 읽고 있으니, 하녀장이 올라왔다.
“마님, 플로렌스 가문에서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아버지가 오셨다는 뜻이었다. 나는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다.”
현관을 향해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오면서 천천히 오늘 내가 해야 하는 말들을 되뇌었다.
‘일단 아버지의 흠을 잡아야 해. 그래서 싸움을 일으키고, 마음씨 착한 애니가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말리거나 하면 그때 트집을 잡아서 애니를 그 집에 놔두지 못하겠다고 떼를 쓰는 거야.’
그렇게 애니를 플로렌스 가문에서 데리고 나올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성격상 내가 아버지를 믿지 못하겠다고 화를 내면 버럭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럼 잘난 네가 그 아이를 책임지든지 말든지!”
그 말을 그의 입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 오늘의 목표였다.
‘첫술에 배가 부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예상대로 아버지가 움직여주면 고맙겠지만, 꼭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난리를 치며 꽁꽁 숨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결국에는 날 찾아올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돈이 탐나서.
‘그러니까 조바심 내지 말고, 애니를 데려오는 것에만 신경 쓰자.’
그리 몇 번 다짐하니, 술렁이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허리에 힘을 주어 반듯이 섰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의 끝.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버지와 애니가 서 있었다. 물끄러미 그들을 내려보았다.
덩달아 나를 꼿꼿하게 바라보는 아버지를 보고 있으니 저절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지난 생에 나는 계속 그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었다. 그게 내 가족을 위하는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떤가. 가족을 위한다고 했지만 정말 내 도움이 필요한 애니는 나보다도 더 심한 결혼 장사에 동원되었지 않나.
‘그러니 이제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저는 플로렌스 영애만 초대했는데요.”
내가 도와줄 가치가 없는 당신에게는 더 이상 손 내밀지 않으리라.
나는 아버지를 노려보며 그렇게 다짐했다.
* * *
“뭐?”
아버지는 내가 그리 말할 줄 몰랐는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굳어졌다. 나는 턱짓으로 하인들에게 명했다.
“이 무례한 방문객은 내쫓도록 해라.”
아버지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굳어졌다. 그런 그의 양팔을 하인들이 단단하게 붙들었다.
정말로 끌고 나갈 것이라는 걸 알게 된 아버지가 팔다리를 휘저으며 소리쳤다.
“올리비아! 이 배은망덕한 것!”
그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나를 향한 저주를 몇 마디나 내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그의 저주는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았다. 또각또각 계단을 완전히 내려온 나는 미친개처럼 으르렁거리는 아버지를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타이론 공작부인이에요. 예를 지키세요.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방문객이니 당장 내쫓기는 거죠.”
“이, 이 망할 년이!”
아버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에게 이런 모욕을 당할 거라고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리라.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보다 눈을 내리깔다를 반복하던 그가 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누구 덕분에 공작부인이 되었는지 알아?!”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나는 입술을 비꼬았다.
“제 덕분이죠. 틀린가요?”
“그, 그…….”
내 말에 아버지의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양심이 있으면 자기 덕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파넬 공작부인이 된 거야 넓게 말해서 자기가 제임스와 똑같은 날, 나를 낳은 거라고 주장할지 몰라도, 타이론 공작부인이 된 건 순전히 내가 한 일이니까.
“그래도 양심은 있으신가 보네요. 다행이네.”
말문이 막힌 아버지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 아버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잠시 부들부들 떨고 있던 아버지가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타이론 공작부인이 친아버지도 못 알아보는 못돼먹은 여자라는 살 알게 되면 볼만하겠구나.”
“그걸 협박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저도 똑같이 돌려드려야겠네요.”
어쩜 이렇게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참신한 대사를 만들지 못하는 건지.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세상 사람들이 플로렌스 자작이 딸에게 빌붙어 호의호식하기만 바라는 속물이란 걸 알면 어떨까요?”
“이, 이!”
점점 목소리를 높이는 아버지를 나는 냉정한 눈으로 내려보았다. 어릴 때는 왜 이런 초라한 아저씨를 두려워했는지 모르겠다.
뭐가 예쁘다고 진상들에게 빌어가면서 돈까지 구해다 바쳤는지도 모르겠고.
‘조금 더 갈궈서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야…….’
그리 생각했을 때였다. 아버지는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 했는지, 나를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했는데도.”
“뭐라고요?”
“내가 누누이 말했지! 너는 네 어미를 닮아서 천박한 품성을 가지고 있다고. 결국 그 품성을 이기지 못하고 집안 망신을 다 시키는구나. 불명예스러운 재혼에! 그 꼴은 또 뭐냐.”
너무나 날것의 비난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머릿속에 누가 표백제를 때려 부어서 할 말을 지우는 것만 같았다.
그런 나를 향해, 아버지가 내가 참을 수 없는 한마디를 던졌다.
“쯧쯧, 하여간 피는 못 속이지.”
눈앞이 분노로 하얗게 질리는 것만 같았다. 이가 빠드득 갈렸다. 내가 그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당신.”
“뭐, 뭐!”
가만두지 않겠다.
그리 생각하며 내가 눈도 깜빡하지 않고 그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따뜻한 손바닥이 나의 어깨를 감쌌다.
“올리비아.”
정신이 번쩍 드는 것만 같았다. 나는 퍼뜩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생글생글 봄바람처럼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이안이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대다수 무표정하고, 가끔 시니컬하고, 가끔 산뜻하게 웃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안.”
“올리비아, 오늘도 아름답군요.”
“별말씀을…….”
당혹스러운 나머지 부자연스럽게 말이 흘러나왔다. 나의 어깨를 감싸듯 안은 이안이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플로렌스 자작을 붙들고 있던 하인들이 서둘러 손을 놓았다.
이안은 완벽하게 사교적인 태도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장인어른. 이안 타이론입니다.”
“고, 공작 각하.”
하늘처럼 높은 공작 각하에게 존댓말을 들은 아버지는 굽신거리며 인사를 올렸다. 그 태도는 더더욱 나를 화나게 했다.
‘나를 향해서는 예도 갖추지 않았잖아.’
도대체 나를 얼마나 우습게 알면 저따위로 행동한단 말인가. 내 입술이 일그러졌을 때였다. 내가 폭발하기 직전에, 이안은 타이밍 좋게 내 말을 끊었다.
“동생이 많이 보고 싶다고 말했잖아요. 제가 장인어른께 저택을 안내할 테니 동생하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요.”
“이안.”
아무리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고 해도 그의 말을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났으니, 플로렌스 자작은 자신에게 맡기고 화를 식히고 오라는 뜻이었다.
‘맞아. 내가 이성을 잃으면 안 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시 이성을 찾은 것을 눈치챈 이안은 정중한 태도로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리 오시죠, 장인어른.”
“예, 예.”
그렇게 내 아버지는 비굴하게 퇴장했다. 나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정원 쪽으로 걸어가는 두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내 옷자락을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언니…….”
울먹거리는 커다란 녹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내 막냇동생 애니였다.
“애니!”
나와 아버지의 대거리를 보고 어지간히 놀랐는지, 산홋빛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애니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짧은 소매를 입은 나와 달리 애니는 부들거리는 연한 분홍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나는 애니의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물었다.
“괜찮니? 아프진 않고?”
“응. 언니는?”
“언니도 아주 좋아. 쓰레기통에서 나왔거든.”
“쓰레기통?”
“그런 게 있어.”
파넬 공작가라고 쓰고, 이 세상의 나 혼자만 쓰레기통이라고 읽는다. 순진한 여동생에게 그런 말까지 할 수는 없어서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랜만에 보는 여동생은 조금 말라 있었다. 나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애니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이게 몇 년 만이야.’
애니가 5만 데르크에 못된 약쟁이 놈에게 팔려 갈 때는, 내가 막 큰아이를 출산하고 침상에 누워 있을 때였다. 몸이 회복되는 데는 아주 오래 걸렸고, 다시 애니를 떠올렸을 때 이미 애니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애니가 어디 갔다고?”
“알게 뭡니까. 나도 팔아버렸어요, 그 여자.”
돈으로 사람을 사 온 남자는 내 동생도 쉽사리 돈으로 팔아버렸다. 천하의 쓰레기라 내 동생을 어디다 팔았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약 때문에 기억이 조각난 탓이었다.
‘다행히 애니를 오랫동안 흠모한 남자가 애니를 구해주어서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그 시간 동안 동생이 겪은 고초는 너무나 극심해서 그 후에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리고 내게는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가 되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그리 다짐을 하며, 나는 막냇동생의 손을 꽉 잡았다.
“이리 와. 함께 차 마시면서 다과를 들자.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준비하라고 했단다.”
애니는 말랑말랑한 토끼 같은 인상에 꼭 어울리게 혀가 아릴 정도로 달달한 것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설탕도 크림도 워낙 비싼 물건이라 플로렌스 가문에서는 자주 먹을 수가 없었다.
“우와!”
응접실에 들어서니 내 지시대로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 내 몫으로는 스모키 얼그레이에, 통밀로 구운 비스킷. 애니의 몫으로는 시원하게 냉침한 감귤차. 디저트로 꾸며진 3단 트레이였다.
흰색에 분홍색, 민트색으로 꾸며진 화사한 응접실을 구경하던 애니는 눈을 반짝이며 자기 자리에 앉았다. 애니가 어서 즐거워하며 먹기를 기대하며 나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그런데 뜻밖에, 그 아이는 다람쥐처럼 디저트를 먹는 대신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그 사람이 언니 남편이야?”
“응.”
“세상에! 정말 멋있다.”
멋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이내 찻잔을 높이 들어 입술에 바짝 대었다.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잘생……기긴 했지.’
속이야 구렁이가 있을지언정, 겉은 동화 속 왕자님 같은 남자였다. 다른 사람에게 대할 때는 굉장히 신사적이기도 하고.
‘아까 일도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이안이 적절하게 끊어주지 않았다면 공작부인의 체면이고 뭐고 다 까먹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알면 알수록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찻잔에 퍼져가는 진갈색 파문을 바라보았다. 황홀한 듯 두리번거리던 애니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게다가 이렇게 화려한 집이라니. 정말 멋져. 언니 축하해.”
“고마워, 애니.”
수많은 사람이 내게 타이론 공작부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내가 느낀 진심 어린 축하는 이것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당연히 황제 폐하.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애니는 다람쥐처럼 디저트를 우물우물 먹기 시작했다.
“맛있다! 이 계절에 딸기라니 멋져!”
“천천히 먹으렴.”
열넷이나 되었는데도 애니는 마냥 아이 같았다. 나는 살뜰하게 애니의 뺨에 묻은 생크림을 닦아주며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열심히 먹어서 그런지, 응접실이 따뜻해서 그런지 애니의 이마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붙었다.
나는 애니의 카디건 자락을 쥐었다.
“그런데 덥지 않니? 왜 이렇게 두껍게 옷을…….”
“자, 잠깐만.”
애니는 카디건을 잡아당기는 내 손길을 막으려 했지만, 어깨가 드러나는 것은 막지 못했다. 나는 싸늘한 얼굴로 애니의 드러난 어깨를 바라보았다.
“……이건 뭐니?”
흰 피부에 뱀처럼 붉은 줄이 죽죽 가 있었다. 내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누가 봐도 이건 매질 자국이었다.
“내, 내가 잘못해서….”
도대체 이게 뭐냐는 의미로 나는 눈을 들어 애니를 바라보았다. 애니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흠칫 몸을 굳히더니,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대답했다.
“사실 우리 언니 결혼식에 갔었어.”
황궁 다이아몬드 홀에서 치러진 내 결혼식.
나는 플로렌스 자작가로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 일부러였다. 그런데도 말을 못 알아듣고 아버지가 찾아왔다가 위병들에게 쫓겨났다는 소식도 들었다. 쌤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애니는 차마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두 손을 꽉 마주 잡은 채로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런데 들여보내 주지 않으니까 아버지가 화가 나셔서…….”
“세상에.”
그러니까.
“지금 화가 나서 널 때렸다는 거야?”
하도 어이없으니 목소리가 덜덜 떨리며 흘러나왔다. 애니의 속눈썹에 방울방울 눈물이 맺히더니 결국 툭 하고 떨어졌다. 고개를 끄덕이는 턱이 바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치맛자락을 휘어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미친 인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내가 결혼식 초대장을 안 보낸 것은 아버지도 깨닫는 바가 있었으면 해서 그런 것이었다. 나를 파넬 같은 곳에 넘겼지만, 나는 내 힘으로 그곳을 나왔다.
그러니까 당신은 으스대지 마. 내 새 출발에 얼굴도 내밀지 마.
‘그런데 그 화를 왜 애니한테 풀어?’
이렇게 어린애한테 매질을 했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팔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런 내 팔에 애니가 덥석 매달렸다.
“언니! 난 괜찮아. 진짜야.”
“세상에, 애니.”
선량한 녹색 눈동자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괜찮다니.
‘정말 괜찮으면 울 리가 없잖아.’
나는 손바닥으로 애니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아까부터 애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애니, 플로렌스 집안에서 나오자. 언니가 기숙사가 있는 학교도 모두 알아다 놨어. 거기서 살면서 우리 인생을 찾자.”
“언니.”
내 말에 애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반짝이는 촛불처럼 일렁이던 희망의 빛은 순식간에 꺼지고 말았다.
애니는 슬쩍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하지만 나까지 집을 나오면 아버지는 혼자잖아. 아버지가 불쌍해.”
이건 또 무슨 말이람. 나는 참지 못하고 결국 애니에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불쌍한 건 아버지가 아니고 너야!”
나도 저 마음이 뭔지 알았다. 전생의 20년이란 세월 동안 나는 내 아버지를 가엾다고 생각했다. 일찍 상처하고 외롭게 살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도 않으니 얼마나 힘들까.
하지만 이렇게 두 번째 기회를 얻고 나니 이젠 알겠다. 아버지는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 그냥 불쌍하다는 구실로 나를 뜯어먹고 싶을 뿐.
정말 불쌍한 건 바로 나였다.
“화가 난다고 이렇게 어린 딸에게 손찌검하다니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야. 한번 손을 올렸으니 앞으로는 더 쉬울 거야.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어서 집을 나오자.”
“하지만 기숙학교는 아주 비싸잖아. 언니가 무슨 돈이 있다고…….”
“언니 네 말대로 좋은 사람과 결혼했어. 이제 돈도 많아.”
나는 화려한 집을 손으로 가리키며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먹으며 자란 동생은 나의 허세에도 속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언니 돈이 아니잖아.”
“!”
왜 내 동생은 다른 아이들처럼 속지 않는 걸까. 그냥 겉모습을 보고 언니가 행복하다고 믿으면 안 될까?
‘그래서 내가 파넬 공작부인이던 전생에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던 거니, 애니?’
내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마흔이나 먹은 나도 주책맞게 우는데, 이 어른스러운 동생은 오히려 나를 웃으며 달랬다.
“나 때문에 눈치 볼 것 없어. 언니야말로 행복하게 살아. 나도 언니처럼 좋은 사람 만나면 돼.”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
네가 결국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다는 걸.
하지만 결과를 안다고 해서 감내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멸시받고 괴롭힘당하던 그 선연한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적어도 나는 그래.’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짓는 동생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강한 어조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넌 그런 걱정하지 안 해도 돼. 너는 어린아이잖아.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언니가 다 알아서 할게.”
바들바들 떨리는 등을, 나는 힘주어 끌어안았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