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이거 사기 결혼 아닙니까
결국 완성된 옷을 입고 궁에 갈 수는 없었다. 옷이 완성되길 기다릴 수 없었던 황제가 재차 칙서를 보낸 것이다.
어제 입었던 옷을 다시 입고 마차에 올랐다. 이안과 마주 보고 앉아서 마차 창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이안이 말을 걸었다.
“파넬 공작가가 가난합니까?”
나는 그제야 창밖으로 두고 있던 시선을 이안에게 돌렸다. 이안의 눈빛에서는 딱히 무시한다거나 하는 오만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순수하게 궁금한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왜요? 그렇게 이 옷이 보기 싫어요?”
“네.”
“흐응.”
내 치마 끝자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까슬까슬한 옷자락 감촉이 남았다.
물론 내가 공작부인으로 실권을 쥔 뒤에는 쳐다도 보지 않는 재질의 옷감이었으나, 그전까지는 죄다 이런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가진 옷 중에 가장 좋은 옷이었고.’
잠시 주마등처럼 과거의 괴로운 추억들이 몰려왔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결혼한 뒤에 당신이 호강시켜주면 되죠.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주세요.”
“…….”
내 대답에도 다물린 이안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마차 안에는 침묵이 들이찼다.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하나둘 기억이 떠올라서, 결국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파넬 공작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계속 생각했다.
마치 황궁으로 가는 길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버리듯이.
* * *
황궁에 가니 빨간 망토를 두른 중년 남자가 맨발로 뛰어나왔다.
“아이고, 제수씨!”
“네?”
나를 덥석 껴안으려는 걸 이안이 살짝 끼어 들어준 덕분에 피할 수 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려고 애쓰며 치맛자락을 쥐고 깊게 무릎을 꿇었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렇게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튀어나왔지만, 바로 이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 폐하셨다.
“뭘 그리 딱딱하게 예를 표하고 그러나. 어서 일어나게.”
‘너 같으면 긴장을 풀 수 있겠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무릎을 폈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은 바닥에 고정한 채였다.
그런 내 앞에서 황제가 곁에 선 보좌관에게 손짓했다. 보좌관이 손에 쥐고 있던 네모난 판을 내밀었다. 고풍스러운 서류가 끼워져 있었다.
“자,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여기 서명부터 하지.”
“…….”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것은 혼인신고서였다.
‘정말 마음이 달았나 보구나.’
이안의 이름과 내 이름이 하단에 적혀 있는 네모난 서류는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서명 자리는 비어 있는데 이미 황제의 인장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다는 것.
‘아니, 황제가 미리 도장을 찍어놓는 법이 어디 있어?’
절차가 한참이나 잘못된 일이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황제에게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폐하,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
“어서 이야기하게. 무엇인가?”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저지른 일이었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되니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제가 이렇게 파혼하게 되면 생길 구설이 두렵습니다. 우선 그쪽을 해결하고 서명하는 것이 어떨지요.”
그때였다. 황제는 내 말에 껄껄껄 웃더니 또다시 손짓했다. 다른 보좌관이 또 다른 서류를 들고 왔다.
“구설이 있을 게 뭐 있나. 파넬 공작가 쪽에서 먼저 혼인 무효 서류를 보냈는데.”
“네?”
그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이미 혼인 무효 서류를 보냈다고?’
아니, 내가 파넬 공작가를 박차고 나간 지 이틀이 지났나, 사흘이 지났나.
‘어떻게 이렇게 빨리 혼인 무효 서류를 보낼 수가 있어?’
어이가 없었지만, 보좌관이 내민 서류에 찍힌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파넬 공작가의 인장과 황제의 인장이었다. 황제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공작가에서 바로 사람이 찾아왔더군. 마음이 변할까 봐 얼른 도장 찍었지. 그리고 이 사본은 전쟁터에 나가 있을 제임스 파넬 공작에게도 전해질 걸세. 걱정하지 말게.”
“하하.”
기가 막혀서 나는 웃었다.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역시 진상들, 변하질 않는구나.’
처음부터 나를 싫어하던 진상들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먼저 선수 쳐서 나를 쫓아내겠다는 거겠지.
‘미련 남기지 않아서 좋네.’
이렇게 되니 마지막 남은 한 줌의 망설임조차 파스스 사라졌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습니다.”
내가 허락하기 무섭게 보좌관이 잉크가 듬뿍 묻은 펜을 내밀었다. 나는 거침없이 서명했다. 습관처럼 올리비아 파넬이라고 쓰려다가 올리비아 플로렌스로 바꾸면서 뒤에 P부터 글자체가 이상해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서명을 하고 나자, 보좌관은 이안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런데 뜻밖에 이안이 서명을 하지 않고 멈춰 선 채로 서류를 바라보기만 했다.
‘뭐야, 지금 나는 서명했는데. 밑장빼기냐?’
꼭 내가 저 남자를 자빠뜨려서 결혼하는 것 같지 않나. 팔꿈치로 그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뭐 해요, 이안. 어서 서명해야죠.”
“폐하.”
그는 서명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황제를 불렀다. 팔짱을 끼고 싱글싱글 웃고 있던 황제가 벌꿀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날 부르는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촌 동생이여?”
“설마 이 서류 한 장으로 결혼 인정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요?”
“뭐? 당연히 결혼식을 치러야지. 이건 영애와 너의 마음이 바뀔까 봐 미리 받아놓는 족…… 아차, 그냥 행정업무라네.”
말 고쳐도 늦었다. 족쇄라고 하는 거 다 들었다고!
‘그런 걸 묻다니, 의외네.’
솔직히 결혼식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나인지라, 이안을 곁눈질했다.
이안은 무섭도록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은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
“다이아몬드 홀을 열어주시죠.”
“이안!”
나는 기겁하고 그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다이아몬드 홀이라니!’
황궁에는 다양한 모양과 용도의 무도회장이 여럿 있었는데 다이아몬드 홀은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것으로 수년 지나야 한 번 열릴까 말까 한 곳이었다.
스타티스 황제와 로메오가 거기서 혼인과 대관식을 한 번에 치렀었지.
‘그런 곳을 내 결혼식을 위해 열어달라고?’
황제가 아무리 이 남자를 아낀다고 해도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황제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손가락으로 이안을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었다.
“너, 이 녀석…….”
거봐라. 당신의 무엄함에 질린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게 웬일, 당장 소리를 지를 줄 알았던 황제는 갑자기 이안을 얼싸안았다.
황제가 이안의 아버지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격하고 애정이 듬뿍 담긴 포옹이었다.
“그래. 나는 믿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네가 불능이라고 해도 그럴 리 없다고. 모처럼 그렇게 훌륭한 물건이 나왔는데.”
뭐라고요.
‘훌륭한 물건.’
서로 물건도 공개한 사이였냐.
“흠흠.”
내 앞에서 떨어서는 안 될 주접까지 떨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황제는 헛기침하며 애써 권위적인 이미지를 회복하려 노력했다. 물론 이미 늦었지만.
‘내 생각보다도 사촌 사이가 좋은가 보네.’
나는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안은 결국 펜을 받아서 서류에 서명을 남겼다. 황제는 무척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장 다음 주에라도 열어주마. 황후에게 부탁할 테니 앞으로 그쪽에게 도움을 받거라.”
“감사합니다.”
나는 사실 황후 마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내가 제대로 사교계 활동을 하기 시작할 무렵, 그녀는 병으로 두문불출했기 때문이다.
‘이참에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있겠네.’
그 뒤로 이어진 황제와의 대담은 별것이 없었다. 그냥 잡담이 대부분이었고, 이 말도 정말 많이 했다.
“우리 사촌 동생을 잘 부탁하오.”
내가 콧구멍을 파고 있어도 예뻐할 것 같은 황제의 태도를 보니 얼떨떨하기만 했다. 돌아가는 길에 잘 정돈된 황궁 정원을 걸어가며, 이안을 가늘어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사촌 형님이 무척 마음고생 하셨나 봐요.”
“저 때문에 말입니까?”
내 말에 이안은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작게 웃었다. 한 나라의 황제가 뭐가 아쉬워서 내게 그리 다정하게 제수씨, 제수씨 하면서 말을 걸겠는가.
‘모두 이 남자 때문이지.’
전생에도 몇 번이나 우리 사촌 동생이, 우리 사촌 동생이, 도돌이표 노래를 부르기에 유독 아끼고 있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주선한 파넬 공작가의 혼담을 깨버리고 혼인서에 도장까지 찍어 내밀 줄은 몰랐다.
‘정말 빨리 결혼시키고 싶었나 봐. 그런데 20년이나 버티다니, 이 남자가 잘못했네.’
하지만 내 눈에도 보이는 것이 이 남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나 보다.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폐하께서 혼자서 고민하시는 거죠. 요즘 적적하니 하실 일이 없으시니.”
“그런 것치고는 제게 너무 상냥하신데요.”
아니, 황제가 왜 적적하고 할 일이 없어?
게다가 정말 그런 이유라면 나한테 상냥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 그냥 사무적으로 대해도 충분하니까.
“그건 그렇고.”
하지만 그 태도나 이 상황이, 이안에게는 정말 별 의미가 없는 거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를 흘려보낸 남자는 지금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서로를 부르는 호칭을 정해야 할 것 같은데.”
호칭?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부르면 되잖아요?”
내 대답에 이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부인.”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팔에는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부인.”
그건 제임스가 날 부르던 호칭이었다. 말수가 적은 남자의 ‘부인’이라는 두 글자에는 항상 많은 뜻이 담겨 있어서, 듣고 있는 나는 늘 고민에 빠져야 했다.
이안이 그리 부르니 저절로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제임스가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얼른 흔들었다.
“그, 그거 말고요.”
“그럼.”
이안의 얼굴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반듯한 입술이 내 귓가에 머무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올리비아.”
두근. 소름이 오스스 돋아나는 것 같았다. 간지러움이 귀 끝에서부터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획, 몸을 돌렸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귀를 문질거리는데, 열 받게도 이안은 담담하기만 했다.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으으, 앞으로 이렇게 귓가에 속삭이는 건 지양해주세요. 귀가 너무 간지럽네요.”
“부인의 요구라면.”
“부인이라고 하지 말래도요. 그건 싫어요.”
부인이라는 단어는 자꾸만 제임스를 떠올리게 했다. 내가 정색하고 그렇게 말하자 이안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눈을 마주 보았을까.
그는 흠, 하고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그런가.”
“뭐가요?”
뭐가 그렇다는 거야.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얄밉도록 침착한 얼굴이었다.
“아닙니다.”
공작가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집으로 편지가 날아들었다.
2주 뒤에 결혼식을 치르겠다는 황실의 편지였다.
* * *
2주 안에 결혼식을 준비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애초에 아무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 아닌가.
당연하게도 아직 적응하지 못한 나를 대신해서 하녀장이 결혼식을 준비하기로 했으나.
“나 줘요. 내가 할게요.”
나는 당당하게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집무실에서 이런저런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이안이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이요?”
“할 수 있어요. 파넬 공작부인으로 이미 연습한걸요.”
“하지만…….”
이안은 말꼬리를 흐렸다. 아마 많은 할 말이 있을 것이다. 타이론 공작과와 파넬 공작가의 내정 규모도 차이가 있을뿐더러, 내정을 처리하는 과정도 다르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잘할 수 있어요. 어차피 대부분 굵직굵직한 일은 황실의 황후 마마께서 처리해주시잖아요.”
“…….”
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결혼식 장소가 황궁의 다이아몬드 홀이 되면서 우리의 결혼식에 대한 대부분은 황실에서 처리하게 되었다.
결혼식에서 해야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식장과 내빈 대접임을 생각하면 이는 무척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쪽에서 할 일은 황실에게 보여야 하는 감사와 하객에게 줄 선물, 각 가문에 초청 편지를 보내는 것, 그리고 나와 이안의 꾸밈 정도다.
“그럼 당신에게 맡기도록 하죠.”
잠시 셈을 하는 것 같던 이안은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녀장에게 당부했다.
“잘 보필하도록.”
“네.”
“그럼 전 가볼게요. 이따 저녁은 같이 먹나요?”
“물론이죠.”
“그럼 이따 뵈어요.”
그리 인사하고 내가 경쾌하게 돌아섰을 때였다. 이안이 나를 불렀다.
“올리비아.”
으으,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어쩐지 오싹오싹해지는 목소리였다. 어깨를 움츠리며 살짝 몸을 떨었다. 그리고 내 팔을 문지른 채로 뒤로 돌아섰다.
“네.”
바쁜데 왜 부르냐.
“…….”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또 침묵이냐.
‘하지만 벽돌도 잘 데리고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사람이 바로 나였지.’
내뱉은 말이 있기에, 차분하게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그 남자의 손가락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내 이마에 닿았다. 그러고는 슬쩍 미끄러지는 것 같다가 내 귓가를 스쳤다.
오싹.
예민한 피부에 손가락이 닿으니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나는 내 귀를 손바닥으로 가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가 나를 보더니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군요.”
“네네, 말로 하셔도 될 텐데요.”
“자신의 얼굴은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니까요.”
어쩜, 한마디도 지질 않는다.
“고~맙습니다. 그럼 전 진짜 가요! 농담 아니고 정말 바쁘거든요!”
나는 잔뜩 빨개진 얼굴로 휙, 돌아섰다. 하녀장이 서둘러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쾅, 하고 집무실 문을 닫았다.
뭔가 웃음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 * *
결혼식에 대한 전권을 받은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이것이었다.
“파넬 공작가로 연락하지.”
“네?”
내 말에 하녀장의 표정이 단박에 굳어졌다. 뒤늦게 그녀에게 원래 공작부인이던 시절처럼 하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어쩔 거냐. 이제 나는 진짜로 이 집 마님인데. 혼인서에 서약도 했다, 이거지.
“하지만 마님, 그쪽에서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그러니까 보내는 거야. 필시 내가 결혼식에서 사용했던 드레스와 귀금속들이 애물단지겠지.”
파넬 공작가의 지금 상황은 굳이 보지 않아도 훤했다.
버리자니 보석과 드레스가 아깝고, 두고 보자니 눈엣가시처럼 밉겠지. 그게 파넬 공작가의 빠듯한 재정 상황이기도 했다. 나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팔아버렸을 텐데 말이다.
‘경매라도 붙이면 더 프리미엄이 붙을 거고.’
얼마나 핫한 드레스와 보석들인가. 파넬 공작과 결혼했다가 이제는 타이론 공작부인이 된 올리비아 플로렌스가 사용했던 보석과 드레스입니다!
‘원금보다도 더 벌 수 있는 기회인데, 머리가 돌들이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하겠지.’
우아한 진상은 셀레브리티들의 물건을 경매로 붙이는 게 천박한 오락이라고 믿었다. 내가 보기엔 돈이 없어 참가하지 못하는 가난뱅이 공작가 대부인의 변명 같았지만 말이다.
나는 쓱쓱 서류를 적었다. 내가 뭘 차고 뭘 입었는지는 지금도 훤히 꿰고 있었다. 공작가에서 유일하게 얻은 물건들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쪽에서 매입하겠다고 해. 굳이 후하게 쳐줄 필요도 없어. 제값을 치러줘.”
깎아버릴까 했다가, 그러면 정말 진상들이 타이론 공작가까지 찾아올까 봐 꾹 참았다.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 얼굴들이 이제 진짜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것저것 적어서 건네는 서류를 눈으로 훑은 하녀장이 희게 질린 안색으로 되물었다.
“설마 전 혼인식에서 입으셨던 드레스를 또 입으시려고요?”
“왜 아니겠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시간도 없는데 괜한 옷을 맞추는 건 물자 낭비, 시간 낭비야. 조금 수선을 하면 아예 다른 드레스처럼 보일 거야. 초대장을 쓰는 것만으로도 촉박해서 그런 데 시간을 쓸 수 없어.”
겉치레를 좋아하는 귀족들은 초대장도 꼭 손으로 써야 했다.
그것도 그 집안의 안주인이!
파넬 공작가에서야 대부인인 우아한 진상이 직접 편지를 적었지만, 타이론에는 딱히 어른이라고 할 사람이 없기에 예비 안주인인 내가 적어야 했다.
하지만 수도에 귀족 가문이 몇 개인데. 그걸 쓰기에도 시간은 충분히 촉박했다. 나는 얼마 안 되는 시간을 괜히 재단사와 씨름하고 보석상을 방문하는 것으로 흘릴 마음이 없었다.
나의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에, 하녀장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내게 물었다.
“하지만 불길하지 않으세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건 다 미신이야.”
그 드레스를 입고 치른 결혼식은 나에 의해 처참하게 박살이 났다. 하지만 나는 그 결혼을 계속 유지해도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행복했나?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절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공작부인이어야 했어.’
나와 제임스는 생일이 같아서 부부가 되었다. 모두 생일이 같으면 잘 맞을 거라는 미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와 제임스는 농담으로도 맞지 않았다. 사소한 기호부터 습관까지 뭐 하나 닮은 점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런 건 다 말도 안 돼.
“한낱 숫자에 불과한 생일이, 한낱 물건에 불과한 드레스가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리 없잖아. 난 돈과 시간을 아낄 수 있으면 만족해.”
“알겠습니다.”
괜한 미신을 따지느니 물자와 시간을 아끼는 방향으로 가겠다는 게 나의 의견이었다.
‘어차피 파넬 공작도 없이 혼자 치렀던 결혼식에, 내가 뭘 입고 있는지 세세히 기억할 사람도 하나 없으니 상관없어,’
편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파넬 공작가에서도 답신이 왔다. 내가 초대장을 100장 정도 썼을 때였다.
-가격을 흥정하고 싶지도 않으니 그냥 주는 것만 받겠다. 네가 두고 간 잡다한 물건들은 이미 모두 버려서 챙겨줄 수도 없구나.
우아한 진상의 편지와 내가 사용하던 물건들이 든 상자였다. 그 편지를 받아 든 나는 읽고 나서 박박 찢고, 당장 등불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상자에서 작은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물방울 모양의, 투박하기 짝이 없는 크리스털 목걸이.
‘엄마.’
내가 파넬 공작가에 드레스와 보석들을 구입하겠다고 굳이 편지를 보낸 것은 온전히 이 목걸이 하나 때문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팔 듯이 딸을 보냈으니 뭘 해서 보냈겠는가. 하지만 이 목걸이 하나는 챙길 수 있었다. 이건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팔라고 하길 잘했군. 달라고 했으면 분명 버렸을 거야.’
하여간 끝까지 정떨어지는 사람들.
이걸로 파넬 공작가와는 정말 안녕이었다.
* * *
밤의 여왕이 깊은 장막을 드리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늦은 밤.
달칵.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키가 큰 사내가 조용히 걸어들어왔다.
바로 이안이었다.
밤눈이 밝은 그는 어둠 속에서 조금도 헤매지 않고 침대로 갔다. 그곳에는 한 여자가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달빛을 그대로 옮긴 것 같은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이 침상에 그림같이 흩어져 있었다.
단정하게 두 손을 모으고 반듯하게 누워 새근새근 자는 여자는, 자는 모습조차 아름다웠다.
“…….”
너무나 가만히 잠을 자고 있어 꼭 죽은 것 같았다.
괜히 심장이 조여든 이안이 가만히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긴장을 풀었다.
‘정말 알 수가 없는 여자야.’
올리비아는 이안에게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특별했다.
“저랑 결혼해요.”
당돌하기 짝이 없는 요구, 남루한 옷차림이지만 당당한 태도, 예의가 바른 듯, 맹랑한 듯, 적정선을 잘 지키는 예법까지.
‘분명 앳된 여자인데, 하는 행동은 꼭 사교계에서 오래 활동한 사람 같단 말이야.’
가느다란 팔에, 살집이 거의 없는 몸매는 버들가지처럼 낭창낭창했다. 하지만 힘이 없거나 연약해 보이지 않는 것은 불꽃처럼 활활 불타는 붉은 눈동자 때문이리라.
그녀는 묘한 여자였다. 눈을 마주하면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자체로 아름답게 빛나 모두를 매혹시키는 태양처럼.
‘여러모로 신기한 사람이야.’
올리비아에 대한 조사 결과는 모두 한결같았다.
“말수가 적고 예의가 발라, 아카데미에서도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로메오 알키저스 백작 영식을 비롯한 소수의 친우들과만 교우를 나누었으며.”
“회계학을 전공했고, 상류 귀족사회에 대한 지식은 어디서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파넬 공작가에서는 거의 외면받으며 지낸 것으로 보입니다.”
소극적이고, 차분하고, 상류사회를 모르는 여자.
‘그러면 이 눈앞에 있는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이안은 물끄러미 올리비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저 종이에 흑백으로 남아 있던 여자가 살아나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의 쇄골 근처에서 반짝이는, 작은 눈물 같은 목걸이가 보였다.
‘이게 그 목걸이인가.’
이안의 눈이 빛났다. 그가 굳이 이곳을 찾은 이유도 저 목걸이에 대한 하녀장의 보고 때문이었다.
“파넬 공작가에서 온 물건 중 그것만 챙기셨습니다. 뭔가 의미가 있는 물건인 듯했습니다.”
‘영리한 여자야. 소중한 물건을 찾기 위해서 웨딩드레스 구입을 운운했겠지. 물론 합리적인 결정이기도 하고.’
막상 와서 보니 그렇게까지 챙길 귀물처럼 보이진 않았다. 올리비아를 내려다보고 있던 이안이 입술을 열었다.
“부인.”
움찔.
잠결에도 그 호칭에 반응하듯 몸이 떨렸다. 미간도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이안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도대체 누가 그대를 부인이라고 불렀을까. 그 목걸이를 선물한 남자일까?”
조사 결과에는 어떤 남성과의 접촉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굳이 있다면 로메오 알키저스 백작 영식.
하지만 그가 스타티스 황태자의 약혼자로 물망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안은 대범하게 그 가정을 지워버렸다.
결국 그녀에게 ‘부인’이라고 불렀던 남자의 정체는 오리무중.
희미한 불쾌감을 느끼며, 이안은 입술을 비틀었다.
“빨리 시간이 가면 좋겠군.”
두 사람의 결혼식이 이제 고작 일주일 남은 밤이었다.
결국 이날이 오고야 말았다.
‘으아, 생전에 결혼식을 두 번이나 하게 되다니.’
대기실에 앉은 나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안과 마주하고 있을 때는 사실 별로 긴장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황궁에 들어와 드레스를 차려입고, 화장하고, 머리를 틀어 올리고 나니 그때부터 큰북처럼 심장이 둥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가 정말 결혼을 하는구나.’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인데, 이제야 떠올랐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머리핀으로 고정된 베일이 우수수 내 시야를 가렸다.
‘……두 번째 결혼식이라.’
이미 한 번 치렀던 제임스와의 결혼식이 떠올랐다.
‘쓸쓸했었지.’
그건 결혼식이라고도 부를 수 없었다.
신랑은 전쟁터에 나가서 없고, 신부 혼자 있는 결혼식. 신부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이 그냥 자신들의 이야기만 쏟아내던 하객들. 내내 눈꼴신 표정으로 앉아 있던 진상들.
오로지 고작 스무 살이었던 나만이 들떠서 그 시간 내내 긴장해 있었더란다. 그 결혼식이 그저 보여주기식 쇼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나는 정말 불행으로부터 탈출한 걸까.’
쓸쓸하고 차가웠던 그때를 떠올리니 저절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괴로움에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묵직하고, 간지러운 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올리비아.”
“헛!”
깜짝 놀란 나는 비둘기인 양 파드득거리고 말았다. 깜짝 놀라서 앞을 바라보니, 나만큼이나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남자가 보였다.
“이, 이안.”
금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뒤로 넘기고 순백색의 정장을 빼입은 남자는 평소보다 훨씬 더 잘생겨 보였다. 그가 살짝 눈을 찡그리며 내게 물었다.
“어디 아픕니까?”
그 질문에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제임스와의 결혼식 때도 나는 이렇게 대기실에서 긴장해서 벌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이렇게 내 안부를 물은 적이 없었다.
‘울면 안 돼. 울 일이 아니야.’
그리 스스로를 다독이며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면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여서 그와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베일이 가리고 있으니 눈물이 고인 건 모르겠지.’
그나마 이렇게 베일이 한 겹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갑자기 울면 무슨 일인가 그가 미심쩍어할 것이 분명했다.
“아니에요. 그냥 눈만 감고 있었어요.”
내 대답에 그는 평소처럼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장식이 무거워서 그런 겁니까?”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어이가 없으니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그런데 이안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씰룩이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이.’
“……제가 얘기했던가요?”
“뭘 말입니까?”
“당신 농담 정말 재미없다고.”
“저런.”
정말 그걸 농담이라고 했나 보다. 기가 막혀서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내 앞에 이안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이거.”
“이건 뭐예요?”
“결혼반지.”
조개껍데기처럼 잠겨 있는 주먹을 손가락으로 펴니 동그란 반지가 나왔다. 이안이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아무리 당신이 수수하다고 해도 결혼반지까지 사용하던 것을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생각도 못 했던 선물인지라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 보니.
“하긴, 한쪽은 전쟁터에 가 있을 테니까요.”
한쪽은 전쟁터에 있는 제임스에게 배달되었을 테니 중고로 사용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제임스가 그걸 낄지 안 낄지는 모르겠지만.
내 대답에 이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면, 뭔데요?”
“휴.”
뭐야. 왜 기분 나쁘게 한숨만 내쉬고 말을 안 하는데.
내가 눈꼬리를 뾰족하게 하고 그에게 뭐라고 대꾸하려고 했을 때였다.
그는 이제 더 말하기가 싫어졌는지, 내 손을 잡고 손가락에 직접 반지를 끼웠다. 반지는 맞춘 것처럼 넷째 손가락에 쏙 들어갔다. 별다른 무늬 없는 투박한 평 반지였다.
‘반지조차도 이 사람답네.’
그리 생각하며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자꾸 보다 보니 차라리 이렇게 투박한 게 더 질리지 않고 오래 지닐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손가락을 툭툭 흔들어보던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왜 이렇게 잘 맞아요?”
여자 손가락 치수를 잘 아는 남자는 바람둥이라고 하던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니,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담담히 대답했다.
“당연히 당신 치수를 쟀으니까요.”
“내 손가락을요? 언제요?”
“비밀입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계속 그를 노려보았음에도, 그는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나 자는데 변태처럼 몰래 들어와서 재고 그랬던 거 아니겠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반지 치수를 잰 기억이 없었다.
결국 남은 것은 하나, 내가 잘 때 몰래 재는 방법뿐인데…….
‘상대는 고자인데. 그럴 리가 없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감이 좋은가 보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손가락에서 빛나는 납작한 평 반지를 쳐다보았다. 레몬색 금이라 희한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금색과 은색 실이 교차하는 것처럼 아주 얇게 반복되어서 연한 금색으로 보인 것이었다.
‘이게 뭐지?’
파넬 공작부인으로 살 때도 본 적 없는 정교한 금속이었다. 내가 눈을 깜빡이며 조금 더 세심하게 반지를 살피려고 할 때였다. 문이 열리고 하인이 이안을 찾았다.
“공작님, 먼저 손님을 맞으셔야 합니다.”
“이런.”
이안은 귀찮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얼른 사라지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내 손가락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반지를 보고 있던 이안의 입술이 희미하게 휘어졌다.
그가 불쑥 내 손을 붙잡았다.
‘다시 반지를 빼려는 건가?’
생각해보니 주례가 끝나고 반지를 끼워주는 시간이 따로 있었던 것도 같다. 일순간 긴장했던 내가 느슨하게 팔의 힘을 풀었을 때였다. 훅, 다가온 이안이 내 귓가에 나지막한 크기로 속삭였다.
“잠시만 있다 봐요, 올리비아.”
“읏!”
아니, 귓가에서 속삭이지 말라니까 왜 이렇게 속살거리는 거야!
꽥, 화를 내려고 했더니 그는 이미 내게서 여러 걸음 물러난 뒤였다. 하녀들이 흘금거리는 것을 눈치챈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날 놀리고 있어. 놀리는 게 분명해.’
저렇게 뻔뻔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을 치다니.
‘제임스하고는 비슷한 듯 다르다니까.’
과묵하고 어딘지 모르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 생각을 수정해야 할 지경이었다.
과묵하다기엔 지나치게 짓궂잖아!
‘하지만 덕분에 우울함은 모두 사라졌네.’
지난 결혼을 떠올리며 가라앉았던 기분이, 이안의 농담과 장난에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 목에 걸린 물방울 모양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행복해야 해, 내 딸.”
‘엄마.’
수년 전 돌아가신 우리 엄마가 지금의 나를 보면 뭐라고 이야기할까. 결혼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 뒤로 넘어가실지도 모른다. 우리 엄마는 여자는 바깥일을 알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엄마. 나 힘내고 있어요.’
잠시 불안감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제임스와 결혼하여 파넬 공작부인으로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은 이미 한 번 걸었던 길.
그 길을 박차고 나온 내 앞에 펼쳐진 것은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미지의 길이었다. 이미 한 번 걸은 적 있는 익숙한 길이 나를 유혹했다.
‘이쪽 인생은 이미 다 알고 있잖아. 이쪽 길을 걷는 것이 좀 더 수월하지 않겠어?’
하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펜던트를 꼭 쥐었다.
‘행복해지고 싶으니까.’
다 알고 있으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쪽 인생은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들어가실 시간입니다.”
마음의 미련을 떨쳐버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부르러 사람이 왔다. 나는 의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해야 공작부인처럼 걸을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미 20년을 공작부인으로 살았으니까.
그리고 이제.
“신부 입장!”
남은 인생도 공작부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턱을 들고 어깨를 폈다. 흰 비로드가 길게 늘어진 길 끝에 눈처럼 흰 예복을 빼입은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새로운 인생을 향해 나는 천천히 발을 디뎠다.
* * *
다이아몬드 홀은 명성이 자자했던 것만큼 화려하고 넓었다. 그리고 그 홀을 꽉 채우고 있는 꽃과 꽃 그리고 꽃.
‘꽃값만 해도 장난 아니었겠네.’
아마 지난 생의 나였다면 다리에 힘이 풀리거나 규모에 압도되어서 입구에서부터 굳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 다이아몬드 홀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내 절친한 친구, 로메오의 국혼에서.
그러기에 나는 주위에 한눈팔지 않고 곧게 이안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적어도 이번 생에는 남편 없는 결혼식은 하지 않네.’
사박사박, 신부 길을 걷고 있으니 지난 결혼식이 떠올랐다.
지난 결혼식에는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식장에 들어섰었다. 그리고 옆에 아무도 없는 채로 혼자 서서 주례사를 듣고 혼인 맹세를 읊었었다.
하지만 이번엔 많은 것이 바뀌었다. 타이론 공작부인의 이름이 적힌 초대장을 플로렌스 자작가로 보내지 않았다.
초대받지 못한 우리 아버지는 결국 들어오지 못하셨으리라.
‘다신 친정에도 휘둘리지 않을 거야.’
주고 또 줘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더 달라고 앙앙거리는 것이 우리 아버지란 인간이었다.
그 사실을 지난 생에서는 지나치게 늦게 깨달았다.
내가 파넬 공작부인으로 제대로 자리도 잡지 못했을 때,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하며 내게 손을 벌렸다.
“네 막냇동생의 혼례비용 좀 다오.”
그래서 자존심도 다 접고 진상들에게 빌어서 없는 돈, 있는 돈 만들어 건넸더니 그 인간은 이렇게 말했다.
“아? 다행히 그 애를 5만 데르크에 데려간다는 집이 있더구나. 잘되었지 뭐니.”
내 돈은 돈대로 챙기고 동생은 동생대로 팔아넘겼다.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 뒤로 친정과 연을 끊었지만, 친정에 한 푼, 두 푼 돈을 건넨 것은 내 약점이 되어서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었다.
‘이번 생에서는 절대 그런 일 없어.’
그렇게 밑바닥을 보고도 또 속으면 천하의 멍청이였다.
‘기회를 봐서 막냇동생도 내가 데리고 와야지.’
그리 생각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때였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오싹.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신부 길은 이미 끝나 있었고, 나는 이안의 곁에 서 있었다. 엄숙한 표정의 대주교가 우리의 결혼에 대한 주례를 늘어놓고 있었다.
주례를 읊는 대주교의 주름진 얼굴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이안에게 속삭였다.
“그냥, 결혼식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
“거짓말.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거 아니고요?”
“그럴 리가요.”
사실 조금 뜨끔했다. 그를 보며 제임스를 생각했던 건 사실이니까. 그다음에는 열통 터지게 하는 우리 아버지를 떠올렸고.
‘하지만 전생의 남편을 떠올렸다고 할 수는 없잖아.’
내가 생각해도 미친 소리인지라,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이 입술을 비틀었다.
“나를 눈앞에 두고 딴생각하는 사람이 드문데.”
재수 없는 말이었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말이기도 했다. 순금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 자신감 없이는 드러낼 수 없는 매끈하고 예쁜 이마, 오뚝한 코, 그리고 반듯한 입술.
신이 심혈을 기울여 빚은 예술품 같은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자라는 사실을 알아도 홀릴 법한 얼굴이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림을 관람하듯 이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귓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자못 사나웠다.
“만약 이룰 수 없는 연인이 있어서 나를 택한 거라면 지금 당장 포기하십시오.”
“네?”
이건 또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순간 기가 막혀서 입술을 벙긋거렸을 때였다.
“신랑, 신부, 충실의 맹세를.”
‘연인 같은 거 없다!’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공교롭게 그 순간 대주교의 주례가 끝이 났다.
충실의 맹세라니.
‘지난 결혼식에는 이런 거 안 시켰잖아?’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 돌처럼 굳어졌을 때였다. 나의 허리에 이안의 팔이 감겨왔다. 굵은 손가락이 내 얼굴을 가린 베일을 슬쩍 들췄다.
희미했던 얼굴이 선명해지면서 그의 표정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웃어?’
웃을 줄 모르는 남자가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햇빛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꼭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사납게 느껴졌다.
그가 꼭 제대로 들으란 듯이 한 글자, 한 글자 선명하게 내게 속삭였다.
“난 내 여자를 품 밖으로 다시 내보내는 취미 없거든.”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쳐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졌다.
‘아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당연히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 * *
결혼식은 대단히 호평이었다.
“역시 다이아몬드 홀이에요. 그간 명성은 다 이유가 있었군요.”
요즘 수도 인테리어는 대체로 깔끔하고 모던한 쪽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그래도 막상 화려함의 극치인 다이아몬드 홀을 마주하니 입이 딱 벌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공작 각하께서도 정말 멋지시고.”
“아아, 공작 각하만큼은 결혼하지 않으시고 제국 여인들의 영원한 연인이 되어주실 줄 알았는데요.”
“설마 우는 거예요, 조쉬?”
워낙 미남인지라, 대국민 고자라고 해도 속으로 흠모하는 영애들이 꽤 있었다. 그들을 의식해서인지 식을 끝낸 타이론 공작부부는 인사를 하러 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와 황후도 있는 자리에서 그런 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머나, 선물까지.”
예식의 대부분을 황후가 직접 준비했기 때문에 타이론 공작가에서 준비한 것은 사실상 답례품과 감사장 정도였는데,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딱 적절한 정도의 선물이었다.
“센스가 좋네요. 보통 이럴 때는 부를 과시해서 괜한 욕을 먹거나 하는데.”
“공작부인이 했겠어요? 그 아랫사람이 했겠죠.”
“그런 걸까요.”
어쨌든 결혼식은 성황리에 끝났다. 신부의 친부인 플로렌스 자작이 문전박대당하고, 전 시댁이었던 파넬 공작가에서 불참하는 등 몇 가지 해프닝은 있었지만,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는 결혼이었다.
물론, 사람들은 뒤에서는 이런 말들을 속닥거리곤 했다.
‘여태 얼굴을 비추지 않으시는 거 보면 자택으로 돌아가신 거겠지?’
‘자택으로 돌아갔다면…… 초야?’
‘하지만 공작은 고자잖아.’
‘그런데 아까 무척 열정적으로 키스하던걸. 진짜 고자가 그렇게까지 입을 맞출까?’
‘그럼 그 추문이 거짓이었다고? 말이 돼? 정상적인 남자라면 당연히 부정할 텐데.’
‘그러게.’
사람들은 대국민 고자라는 치욕스러운 별명으로 불리던 이안 타이론 공작이 과연 초야를 치를 것인가 아닌가 궁금해했지만, 그건 그저 궁금함으로 끝났다.
누구도 공작부부의 침실을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올리비아 플로렌스, 아니 이제 올리비아 타이론은 사람들의 궁금함을 확인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게 뭐야!’
이 나라의 수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녀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녀는 현재 무척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 * *
모든 하객 앞, 심지어 대주교와 황제까지 바라보는 와중에 충실의 맹세랍시고 질척거리는 키스를 한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뻔뻔한 얼굴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돌아가죠.”
다이아몬드 홀의 중앙, 넓고 화려한 커튼 뒤에는 휴게실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휴게실의 통로를 통해 아무와도 마주하지 않고 홀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에게 손이 붙들린 채로 따라가던 내가 물었다.
“하객들에게 인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건 이전 생에서도 그랬다. 심지어 남편인 제임스가 이 자리에 없는데도 나 혼자서 하객들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건네야 했다. 파넬 공작가가 아무리 겉만 번지르르한 속 빈 강정이라고 해도, 하객의 수는 어마어마하게 많았고, 인사를 건넨 뒤 앓아누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안 하면 욕먹을 거 아니야. 안 그래도 나는 두 번째 결혼인데.’
그리 생각하며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정작 이안의 대답은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황제 폐하께서 하실 거예요.”
“아니, 지난번부터 황제 폐하께 지나치게 허물이 없으신데.”
우리 제국의 황제가 동네 아저씨냐! 네 부하냐! 지나치게 홀대하는 거 아니냐.
상대방이 지나치게 담담하다 보니 내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애국심이 저절로 피어올랐다. 내 말에 이안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슬쩍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초면에 대뜸 당신은 부모님이 없어서 좋아요, 라고 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요.”
헉.
“누, 누구예요. 그 못된 사람…….”
누구긴 누구겠는가. 바로 나였다.
‘내가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했던가.’
그땐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막 내질렀던 거 같기도 하다. 그래도 사람이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 법.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내가 고개를 숙여 이안에게 사과했다.
“미, 미안해요. 제가 무례했어요.”
“아닙니다.”
이안은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마치 그의 눈동자 안에 나를 온전히 담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남자의 입술이, 슬그머니 비틀렸다.
“실제로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
“네?”
뭐라고?
제대로 듣지 못한 내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미 커다란 보폭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뒤였다. 나는 다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어?
“잠깐만요, 이안. 이쪽은 마차보관소 쪽이 아닌데요.”
홀 밖으로 나와 다시 타이론 공작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정원을 지나서 마차보관소로 가야만 했다. 그런데 이안이 가는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복도였다.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이안이 대답했다.
“네, 아닙니다. 오늘은 황궁에서 하루 묵을 겁니다.”
“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하룻밤을 묵어?
‘황궁에서?!’
황족이 아닌 이상, 황궁에서 하루라도 묵는다는 집안 대대로 영광으로 여길 만큼 드문 일이었다. 국혼이나 황제 대관식같이 지방의 모든 귀족과 타국 사신들까지 오는 일이 아니면 이렇게 개방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황궁에서 첫날밤을 보낸다고? 그게 가능해?’
내 기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정작 이안은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폐하께서 방을 내주셨습니다. 먼저 들어가라고 하신 것도 황제 폐하십니다.”
“우와. 폐하께서 정말 당신을 아끼시나 봐요.”
“글쎄. 그런 의미만 있을까요.”
그게 아니면 무슨 의미가 있는데.
‘당신을 나한테 잘 부탁하는 건가? 내가 이렇게 귀하게 여기는 사촌 동생이니 제임스처럼 버리지 말라고?’
그리 생각하니 또 그럴듯했다. 내가 혼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이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이렇게 가다가 종일 걸리겠군요. 실례하겠습니다.”
“꺄아!”
아니, 이 남자가!
‘말만 하면 다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줘야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내 무릎과 등 밑으로 자신의 손을 넣어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엉겁결에 그의 목에 매달렸다.
결혼식이라고 향수라도 뿌린 건지, 그에게는 달콤한 냄새가 났다.
“처, 천천히 가도 되는데요.”
빨리 가면 뭘 하고, 늦게 가면 뭘 한단 말인가. 어차피 피곤해서 잠만 잘 건데.
“…….”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복도에, 그가 나를 안고 걸어가는 소리가 빠르게 울렸다.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깨도 튼실하네.’
제임스도 이랬던가? 솔직히 골격으로는 제임스가 이안보다 단단하고 넓은 것 같았다.
‘안겨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불안하지 않고 안정감이 있어서 나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쿵쿵. 발걸음 사이로, 빠르게 뛰는 또 다른 소리가 섞여 들어간 것 같았지만, 너무 피곤했던 나는 슬쩍 선잠이 들고 말았다.
침실에 와서 비몽사몽 중에 하녀들의 시중을 받았다. 오늘 아침 있었던 절차를 그대로 밟는 듯했다. 깨끗하게 씻고 향유로 몸을 문질러 부드럽게 했다. 향기로운 향수도 뿌렸다. 머리카락에도 뭘 하는 것 같았는데 잘 모르겠다.
나는 계속 꾸벅꾸벅 졸았으니까.
‘아, 피곤해.’
손님 접대도 없다고 생각하니 그간의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늘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계속 긴장하고 있었나 봐.’
결혼식을 치르는 그 순간까지 긴장하고 있어서 잘 몰랐지만, 사실은 좀 불안했던 모양이다.
다시 눈 뜨고 일어나면 ‘아, 이건 꿈!’ 하고 깰까 봐.
‘이젠 괜찮아.’
혼인 서약도 했고, 황제 폐하의 인가도 받았고, 결혼식도 끝났다. 더는 파넬 공작가와 절대 겹칠 일 없다는 확신이 들고 나니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툭, 끊어졌다.
“공작부인, 이쪽으로 오세요.”
“네네.”
흐느적거리며 그들이 인도하는 대로 슬렁슬렁 걸어갔다. 그녀들이 안내해 준 침실에는 다섯 사람이 누워도 충분할 것 같은 넓은 침대만이 덩그러니 있었으나, 그것이 잠에 취한 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조금 있으면 각하께서도 들어오실 거예요.”
“네네.”
“결혼 축하드려요.”
“네네.”
너무 졸려서 앵무새처럼 대답만 반복했다. 머릿속에는 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이고야.”
다소 늙은이 같은 소리를 내며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쏙 들어갔다. 푹신한 침대는 몸을 누이자마자 휘감기는 것처럼 내게 착 달라붙었다. 나는 보드라운 이불에 뺨을 비볐다. 그렇게 누워서 꼼지락꼼지락 자리를 잡고 있으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런데 이불 촉감이 지나치게 생생하게 느껴지는 거 같은데.’
비비적거린 것은 얼굴인데 온몸에서 이불의 촉감이 느껴졌다.
나는 꿀 바른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떠서 내 어깨를 바라보았다. 손으로 잡아당기면 끊어질 듯한 얇은 끈 하나를 빼면, 내 흰 어깨를 가리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 맨살이 보여?’
침실은 은은한 향초가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나는 살짝 팔을 들어 이불을 들췄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고는 금세 다시 폭 덮었다. 잠이 훅 깨는 것 같았다.
‘아니, 이게 무슨 옷이야.’
뭐야, 그 언니들. 되게 정중하게 입히는 것 같더니만 어디서 이런 야한 슬립을!
별다른 레이스가 달리지 않은 슬립은 아주 얇아서 속살이 그대로 비쳤다. 후다닥 이불을 덮은 것도 그 이유였다.
‘이, 이런 야한 차림이라니.’
제임스와 부대낀 것이 10년이라고 하지만, 제임스는 여러 가지 의미로 변함이 없는 남자였다. 그건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는 때때로 야한 옷을 입어 분위기를 반전시키거나, 색다른 플레이를 하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지만, 제임스는 늘 한결같이 굴었다.
‘내가 뭘 입었는지도 모르지 않을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도 그냥 편안한 면으로 지은 원피스 잠옷만 입게 되었고….
그런데 갑자기 속살이 비치는 잠자리 날개 같은 슬립이라니! 단계를 건너뛰어도 몇 단계를 단숨에 뛰었잖아!
‘이불을 돌돌 말고 있어야겠어.’
내 어깨조차 보여주지 않겠다. 그리 생각하며 이불을 꾹 눌러 덮었는데, 막상 애벌레처럼 웅크리고 있으니 이내 이런 마음도 들었다.
‘뭐, 어때. 잠만 잘 건데. 굳이 들춰보지도 않을걸.’
나는 사실 고자와 무성욕자를 혼동하고 있었다. 성기가 서지 않는다고 해서 성욕이 없는 건 아닌데 말이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했던 걸까. 이안이 나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맨몸에 얇은 가운 하나를 걸친 이안이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아니, 이 언니들이! 이 남자한테도 이런 옷을!’
부드러운 실크로 만들어진 가운은 그의 몸에 착 달라붙어서 그의 신체 굴곡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제임스보다 골격은 좀 작을지언정, 마른 근육이 촘촘하게 붙어 있으면서 살집이 없는 몸은 좀 더 조형물 같은 미가 있었다.
‘하필 색도 저런 걸…….’
게다가 가운의 색깔이 그의 피부색보다 조금 더 짙은 정도라 꼭 맨살에 향유를 부은 것처럼 그의 피부가 반질반질해 보였다. 남사스러워진 나는 베개에 얼굴을 꼭 묻었다.
‘아이고, 세우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왜 저리 섹시한 얼굴이 달려 있단 말인가. 괜히 마음만 술렁거리니까 잠이나 자야겠다.’
하지만 이미 잠이 깨버린 건지 심장만 콩닥콩닥 뛰었다. 얼마나 그렇게 베개만 쳐다보고 있었을까.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속삭여졌다.
“올리비아.”
“꺄!”
목소리에 꿀이라도 발라놨나, 왜 이렇게 간지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제임스는 항상 부인, 아니면 여보라고 불렀으니까.’
나는 살짝 몸을 돌려서 이안을 바라보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아주 가까운 곳에 선 그가 침대를 짚고 상체를 숙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 가슴팍이 보, 보, ……안 보련다!
‘왜 이렇게 가까이 와서 이야기하는 거야!’
고개를 다시 획 돌려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질끈 감자, 이안이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자려고요?”
“피, 피곤하니까 당연히 자야죠. 당신도 고생했어요! 잘 자요!”
“잘 자라고요?”
침대가 끼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기울었다. 나는 그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어쩐지 등 뒤가 오싹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더욱 빠른 속도로 뛰었다.
‘나대지 마, 심장아! 상대는 고자야! 아무 일도 없어!’
이건 남자가 내 침대 위에 올라왔으니 당연히 드는 긴장감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것이기도 하지. 아무리 고자라고 해도 우리는 가끔 이렇게 침대를 함께 쓸 테니까.
‘그래. 이 사람은 침대를 공유하는 남자사람친구야. 침대를 빌려주는 대가로 나를 파넬 쓰레기통에서 꺼내주었지.’
그렇게 끝없이 읊조리며 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였다. 이제는 바로 내 등 뒤로 다가온 이안이, 내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가 낮게 끓어오르는 물처럼 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을 뜨시죠. 잠자기 전에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하, 할 일이요? 손님 접대 말고?”
나는 눈을 뜨고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이 만들어 낸 그림자 때문에 그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웃고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당신을 파넬 부인이라고 불렀을 때, 당신이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까?”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선명하게 기억났다. 누군가가 나를 파넬 공작부인이라고 부른다면 이렇게 대답할 거라며 몇 번이고 생각했던 말이니까.
“제국법상 초야를 치르지 않은 모든 혼례는 무효죠.”
그 말이 떠올랐음에도 쉽사리 그가 해야 한다는 ‘일’이 무엇인지 연상하지 못했다.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고개를 숙였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며 저를 버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날아갈지 누가 압니까.”
반듯한 입술이 내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그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의 키스가 내 콧잔등이에, 뺨에, 꽃잎처럼 툭툭 내려앉더니 마지막으로 내 아랫입술을 쪼옥- 길게 빨아들였다.
‘이게 뭐야.’
머리가 고장 난 것 같았다. 당혹스러움이 내 머릿속을 지나치게 잠식해서, 나는 화들짝 놀라거나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얼음처럼 굳었다.
그가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은근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무효로 만들기 전에 제가 먼저 선수 쳐야지요.”
“하, 하지만.”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나랑 초야를 치르자는 거야?’
전혀 생각도 못 했던 일이, 이제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굳어진 채로 그를 바라보다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다, 당신은 고자잖아요?”
내 말에 이안은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그러고는 피식 웃었다.
“제 입으로 그렇게 내뱉은 적은 없습니다만?”
“하, 하지만 서지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무도회에서!”
나도 모르게 이불을 꽉 쥐고 빽, 소리쳤다.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가 세울 수 없는 건!
‘고자인 게 왜 괜찮냐고도 물었잖아! 정말 고자인 줄 알고 사실대로 말했는데.’
내가 이안과 두 번째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데에는 더 이상의 관계가 없을 거라는 이유도 있었다.
서로의 사적인 영역에 들어오지 않고, 각자 필요한 것을 취하면서, 그냥 데면데면한 사업파트너처럼 지내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잖아!
“이건 사기예요. 대국민 사기라고요! 우리나라 백성들은 모두 당신이 고자라고 믿고 있는데! 당신의 ‘서야 뭘 하죠.’라는 한 마디 때문에!”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내뱉는 말은 내 귀에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빨랐다. 그만큼 난 억울했다.
‘애초에 당신이 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을 거란 말이야.’
말을 다다다 내뱉고 씩씩거리고 있으니, 이안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리고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한 어조로 내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 상황에서, 그 영애에게 서지 않는다는 뜻이죠. 아무 여자에게나 세우면 그게 사람입니까? 짐승이지.”
“하, 하지만…….”
나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 나잇대 남자들은 슬리퍼만 봐도 선다고 했는데.”
“……도대체 누굽니까, 그런 상스러운 말을 알려준 사람은?”
“흡.”
누구긴 누구겠는가. 내 전남편인 제임스 파넬이지.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전남편을 만나기는커녕, 이름만 간신히 알고 있는 상황이기에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이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내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내려고 잡아당겼다.
‘안 돼!’
그걸 걷어내면 내가 걸치고 있는 건, 입은 목적이 의심스러운 야시시한 슬립 한 장만 남는다.
나는 이불을 꽉 쥐었다. 그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손등이 희게 질렸다. 힘이 잔뜩 들어간 탓이었다.
“저, 저는 아기를 가지고 싶지 않아요. 아기 가지는 게 무서워요.”
나는 더듬더듬 말했다. 내 안에 이런 공포가 있는지, 말하고 나서야 다시 한번 깨달았다.
몸이 망가지는 두 번의 출산은, 시간을 돌린 지금도 내게 선연한 공포로 남아 있었다.
이안이 진중한 눈빛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내 어깨와, 팽팽하게 힘이 들어간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딱딱한 얼굴과 달리, 입맞춤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나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것처럼 그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거짓말처럼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바로 그때였다.
“앗!”
이 여우 같은 남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불을 젖혔다. 나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다시 잡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나의 허리를 이안이 꽉 끌어안았다.
화끈.
슬립은 역시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뜨거운 이안의 체온이 한 겹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게 온전히 전해졌다. 이안과 밀착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자, 긴장하여 내 어깨가 굳어졌다.
그런 나를 잡아당기듯 끌어안으며 이안이 말했다.
“피임차는 마셨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아이는 필요 없으니까. 그래서 고자라는 꼬리표가 붙어도 굳이 해명하지 않았던 건데.”
그의 팔에 끌려오다 보니, 그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것처럼 되었다. 목 뒤로 흩어지는 그의 숨결이 지나치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것 같더니, 촉 소리를 내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이를 세워 얕게 깨물었다.
“여기 이렇게 아기가 필요 없다는 여자가 제 발로 찾아왔네요. 그런데 또 그 여자가 내 취향이야?”
이안은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다시 힘을 주어 나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다른 쪽 손으로 내 허벅지를 뱀처럼 스윽, 쓸었다. 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내 이름을 귓가에 속삭였다.
“올리비아.”
오싹.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송곳니가 이번에는 둥글게 드러난 내 어깨를 얕게 깨물었다.
내가 도리질하며 그의 손가락이 나를 더듬지 못하게 꽉 붙들자, 그는 아예 내 허리를 들어서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뭐냐.
내가 경험이 없다면 몰랐을지도 모른다. 몰랐을지도 모르는데.
‘이건 모를 수가 없잖아!’
“으악!”
엉덩이를 쿡 찌르는 무언가를 느끼는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구르듯이 도망쳤다. 내가 너무 날쌔게 도망을 치자, 이안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렇게 안 봤는데 운동신경이 좋네요?”
지금 내 운동신경이 문제냐!
나는 손을 들어 내 눈을 가렸다. 그리고 어린애처럼 도리질을 쳤다.
“모, 못 해요! 난 못 해요!”
저절로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나는 슬쩍 손을 내려 눈만 그와 마주 보려 애쓰며 빽 소리를 질렀다.
“왜 그런 걸 달고 다니는 거예요!”
그렇다. 내 엉덩이를 쿡 찌른 건 바로 그의 물건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언제나 말랑말랑하다고 믿고 있는 그것.
‘아니, 그 말에 어째서 다 속았단 말이야? 저렇게 혈기 왕성한데?!’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황제가 왜 내 앞에서 체통도 잊고 훌륭한 물건, 운운했는지! 다들 그가 고자라는 말에 아깝다고 통탄을 했는지.
하지만 패닉에 빠진 나와 달리, 이안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하체를 흘긋 내려보았다가 - 끔찍하게도 가운이 흐트러져 그것(?)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그걸 제게 물으셔도?”
어째 이안의 행동이 능글맞게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인가?
나는 그것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두 눈을 가리고 몸을 돌렸다. 너는 내 등이나 봐라.
“넣다가 죽을 거예요. 난 못 해요!”
“저런.”
내 행동에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햇빛이 부스러지는 것 같은 따뜻하고 편안한 웃음소리였다.
‘웃어?’
그간 그가 입술을 비틀 듯, 희미하게 웃는 모습만 보았지, 이렇게 소리 내어 편안하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어떤 표정으로 웃고 있지?’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슬금슬금, 몸을 조금씩 돌렸다. 그의 얼굴이 보일 만큼만, 아주 조금.
바로 그때였다.
“꺄아!”
언제 다가온 건지, 가까이 다가온 그가 다시 나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이번엔 두 손으로 내 허리를 휘감았다. 속절없이 그의 품에 갇힌 내가 고개를 젖혀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어린애처럼 환한 미소가 그의 얼굴 전체에 퍼져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이, 크림처럼 달콤했다.
“내가 말했던가요. 당신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여자라고.”
“내가 뭘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내 콧잔등이에 쪽, 입을 맞췄다. 살짝 핥듯 혀를 내밀어 쿡 찍은 그가, 또다시 쿡쿡 웃었다.
“그게 나쁘지 않아.”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얼굴에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사실 마주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착하다.”
나를 칭찬하는 그의 목소리가 내 얼굴에서 멀게 들리는가 싶더니, 거미가 먹이를 옭아매듯 남자가 힘을 주어 나를 꽉 안았다. 이상한 안온감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당황스러워 죽겠는데, 또 이렇게 편안하고 믿음직한 건 또 뭐란 말인가. 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팔뚝을 만지작거렸다. 살이 거의 없고 근육으로 빽빽한 그의 팔은 돌처럼 단단했다. 내가 손톱으로 할퀴어도 상처를 내지 못할 만큼.
내가 그의 살갗을 만지고 있으니, 그가 쿡쿡 웃으며 속삭였다.
“수줍어하는 것 같더니 재촉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냐!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것은 고함 대신 신음소리였다.
“앗!”
그의 손 하나가 허리에서 올라와 나의 가슴을 슬립 위로 꽉 쥐었다. 그리고는 둥글게 가슴을 문질렀다.
차라리 이 따위 슬립 벗어버릴 것을! 천이 부드럽고 맨들맨들해서 그가 그렇게 가슴을 부비자, 오싹오싹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번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붙들었다.
“하, 하지 말아요.”
“쉿.”
칭얼거리는 나를 달래가며, 그는 계속 나의 가슴을 주물거렸다. 뾰족하게 세운 손톱 끝으로 누르기도 하고,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비비기도 했다. 이 감각이 어색해서 바르작거리자, 뒤에서 내 귓바퀴를 얕게 깨물었다.
“부끄러운 거지, 싫은 건 아니잖아요?”
귀에서 오는 예민한 자극에,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렇게 누군가가 내 살갗을 만지는 것이 처음이라, 좋은 것보다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컸다.
‘내가 이상해지는 것만 같아.’
내가 아는 부부관계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품 안에서 몸을 돌렸다. 이제 나는 그를 마주 보는 자세가 되었다.
팔을 느슨하게 풀어 여전히 내 가슴을 조물거리며 이안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잘생긴 눈이 스르르 눈꺼풀에 갇힌다 싶었더니 반듯한 입술이 내게 다가왔다. 부드럽게 입술을 핥고는 그의 혀가 내 입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녹아내릴 듯,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마치 연인들이나 할 법한.
이대로는 우리가 특별한 사이라고 착각할 것만 같았다.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한참을 내 입 안을 헤매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긴장해서 숨을 할딱거리는 내가 숨 쉴 틈을 주기 위해서였다. 내가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쉬자, 그는 재차 내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의 입술을 턱 막았다.
“자, 잠깐만요.”
그러자, 그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하, 핥지 마요!!”
내 손바닥을 혀로 핥고 내 손가락을 자기 입에 쏙 넣는 게 아닌가. 나는 기겁하고 손을 빼내어 내 가슴팍에 모았다. 그리고 엉덩이를 쓱쓱 뒤로 물러 그에게서 조금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반듯하게 누웠다.
그가 뭘 하냐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꼭 해야겠다면 그냥 하면 되잖아요. 알았어요. 내가 얌전히 누워 있을게요.”
이렇게 계속 체온을 나누다보면 이상한 마음이 들 것만 같았다. 그가 날 사랑한다는, 요상한 착각이라든가.
‘차라리 제임스처럼 빨리 끝내는 게 낫겠어.’
그리 생각하며 내가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그가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조금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쓰레기로 만들 셈입니까?”
“네?”
아니, 이게 왜 쓰레기야? 나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뭐가 쓰레기예요? 부부관계는 다 그런 거 아닌가요?”
“당신에게 그렇게 알려준 사람이 누군지 정말 궁금해지는군요. 슬리퍼 발언도 그렇고.”
둘 다 같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말해도 믿지 않을 테지만.
10년 동안, 매일매일 나의 부부관계는 그런 식이었다. 이런 게 뭐가 좋다는 건가 싶은, 고통스럽고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시간들.
하지만 이안은 전혀 달랐다. 그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운 앞자락을 잡아당겼다. 스르륵 끈이 풀리는 소리가 마치 뱀이 지나는 것 같았다. 은근하고, 위험한 소리.
완전히 알몸이 된 그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내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부부관계는 대화예요, 올리비아. 그리고 나는 내 할 말만 쏟아낼 생각이 없어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살짝 굳어져 있던 그의 입가가 다시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러니까 참지 말고 소리를 내요.”
“부끄러우면요?”
커다란 손바닥이 내 눈을 가렸다. 급작스럽게 찾아온 어둠인데도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 때문인지, 두렵지 않았다.
“그러면 마사지 받는다고 생각하고 눈을 감아요. 실제로도 비슷하니까 긴장할 필요도 없고.”
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종아리를 쥐었다. 반사적으로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힘 풀어요.”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가 어쩐지 믿음직스러웠다. 머뭇거리던 나는 천천히 다리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그가 내 다리를 넓게 벌렸다. 그의 단단한 몸이, 내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니, 이대로 휩쓸려도 되는 거냐. 내 인생 2회차 그걸로 괜찮은 거냐. 그런데 진짜 초야를 치러야 결혼인데.
밀려드는 온갖 생각에, 내가 조마조마해하고 있을 때였다.
“질척질척 녹아내릴 때까지 풀어줄 테니까. 당신이 다치지 않도록.”
오싹한 목소리와 함께, 따뜻하고 물컹한 살덩어리가 사타구니를 핥았다.
“이, 이안!”
뒤늦게 당황한 내가 발을 바둥거렸지만, 그의 단단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조이는 꼴이 되었다. 내가 바둥거리거나 말거나, 그는 차분하게 제 할 일을 했다.
설마하니 그곳에 타인의 입술이 닿을 줄이야. 창피해서 나는 두 손으로 내 입만 틀어막았다.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올랐다.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혀끝으로 쿡쿡 찔렀다. 그리고 뭉근하게 누르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핥아주던 그가, 송곳니를 세워 얕게 깨물었다. 예민한 자극에 아랫배가 꽉 조여들었다. 그가 웃었다.
“귓가에 속삭일 때도 느꼈던 건데.”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고집스럽게 눈을 가렸다. 그와 도대체 어떤 얼굴로 마주 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 나는 그의 얼굴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당신 참 예민하네요.”
굵은 손가락 하나가, 구불구불 길을 내어 들어왔다. 이미 남녀 관계에 대해서는 겪을 만큼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배울 것이 있다니. 나는 훌쩍거리며 웅얼거렸다.
“차, 창피해요.”
“하나도 창피하지 않아요.”
톡톡 건드리는 촉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뜨거워진 머리만큼이나 온몸이 달아올랐다. 아랫배에 간지럼증이 쌓이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다리에 힘을 풀려고 해도 저절로 발끝이 뾰족하게 섰다. 나는 울먹거렸다.
“그냥, 그냥 빨리 하면 안 돼요? 이런 거 이상해요.”
차라리 제임스 때처럼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런 이상한 감각은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조르는 나를 이안이 부드럽게 달랬다.
“그러다 다쳐요. 부드럽게 풀어줘야 당신도, 나도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겠죠.”
하지만 손가락을 하나 더 넣는 행동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 항의할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고. 나는 속절없이 얼굴만 가리고 몸을 비틀며 다리를 움찔움찔 떨었다.
계속 낮게 불을 지피는 것 같이, 배 속에 쌓이기만 하는 감각에 나는 다리에 힘을 주어 그의 몸을 감싸듯 조였다.
“제발…….”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나는 흐끅대며 그를 재촉했다.
“제발 빨리 해줘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그가 내 양 허벅지를 쥐고 다리를 넓게 벌렸다. 나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가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 이제야 알겠어.’
이 이상한 감각이 무엇인지.
그것은 바로 쾌락이었다. 여린 살을 벌리며, 단단한 것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고작 한 마디나 파고들었을 뿐인데 두근두근 거세게 뛰는 맥박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윽, 너, 너무…….”
커요, 라는 말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버거움에 내가 도망치듯 엉덩이를 살짝 들었을 때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안이 내 골반을 붙들어 쾅 하고 안으로 쑥 들어왔다. 굵고 커다란 것이 순식간에 쑥 밀려들어와서, 가장 깊은 곳을 푹 찔렀다.
열심히 모아두었던 폭죽이 단숨에 파바박 터지는 것만 같았다. 온 몸이 벌벌 떨리면서 허리가 들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톱으로 내 손을 쥐어뜯었다. 처음 맛보는 감각에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이, 이거, 이, 이상해…… 이상해요.”
내가 파넬 공작가를 떠나, 이번 생에는 제임스와 얽히지 않겠다고 이 길을 택했지만, 그 길에서 이런 생경한 쾌락을 맛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훌쩍거리는 나의 손을 이안이 붙잡았다.
“쉬이. 다쳐요.”
단단한 손이 깍지를 껴서 내 손을 꽉 잡아주었다. 나는 훌쩍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미간이 일그러져 있었다. 예쁘다고 생각했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천천히…… 천천히 할 테니까.”
나는 흐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왜 부부관계가 대화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말을 한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도 나만큼이나, 지금 겪는 쾌락이 생경하고, 당혹스럽고, 하지만 그럼에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럼 괜찮은 거 아닌가.’
그리 생각하며 나는 손을 흔들어 이안에게 풀어달라는 의지를 전달했다. 내가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이안이 손을 풀어주었다. 나는 허리에 힘을 주어 살짝 몸을 들었다. 그리고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에 감았다.
“……올리비아.”
그가 나의 포옹에 놀란 듯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눈을 감았다.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제길.”
그와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소리였다. 그걸 놀릴 새도 없었다. 그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그의 목을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머리가 아찔아찔했다.
나는 아이처럼 훌쩍이면서도 그의 넓은 품에 있는 힘껏 매달렸다. 마치 내가 기대고 있는 이 몸이 세상의 전부라는 듯이.
얼마나 소리를 질렀던지, 다음 날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는 꼭 개구리 울음소리 같았다.
* * *
나는 이불 밖으로 눈만 삐죽 내밀었다. 장신의 늘씬하고 잘생긴 남자가 셔츠에 팔을 끼우고 있었다. 그의 너른 등짝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사기꾼.”
내 말에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찬란한 금색 머리카락에 반사된 빛이 무슨 특수효과처럼 그의 얼굴을 빛나게 했다.
‘아니, 실제로 빛나고 있을지도 몰라. 저 정도 미모면.’
하지만 잘생겼으면 뭐 해! 나한테는 그냥 잘생긴 사기꾼일 뿐!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계속 단어를 내뱉었다.
“거짓말쟁이. 바보. 멍청이.”
내 말에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부스스한 금빛 머리카락이 우수수 한쪽으로 쏠리는데, 그 모습조차도 어쩐지 시적이고, 어쩐지 그림 같았다. 무서운 미모였다.
“바보, 멍청이는 이해하는데 거짓말쟁이와 사기꾼은 이해 못 하겠네요.”
그는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허리만 아프지 않았다면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삿대질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지금 세상 모두를 속였잖아요!”
“착각을 정정해준 것이 속인 거라면.”
소매 단추를 채운 그가 별안간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나는 걸친 것 하나 없는 알몸으로 이불만 둘둘 말고 있었기 때문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런 내게 가까이 다가온 이안이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저 대신 알려주시면 되겠네요.”
“뭐, 뭘요.”
그는 대답 대신 부드럽게 휘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그 눈빛이 어째 간질간질했다.
‘으으, 창피해!’
저 눈을 계속 마주하고 있으면, 뭔가 그의 뜻대로 끌려갈 것만 같았다. 나는 번데기인 양 이불 안으로 숨어 고개까지 파묻었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우수수 쏟아져서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게 내 실수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안의 입술이 목덜미에 쪽, 하고 닿았다.
내가 손바닥으로 목을 가리며 입술을 벙긋거리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뭘까요?”
“으으으……!”
얄미워! 진짜 얄미워!
나는 팔을 뻗어서 그의 잘생긴 턱을 꾹꾹 밀어냈다.
“저리 가요! 달라붙지 마요!”
“뭐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제부터 부부인데.”
“그래도요!”
내가 날카롭게 대답하자, 그는 두 손을 들고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나는 붉어진 얼굴로 씨근거리며 이불을 더 둘둘 말았다.
‘너한텐 내 어깨도 안 보여줄 거야.’
그리 생각하며 그냥도 깊숙이 덮고 있던 이불을, 이제는 내 몸 전체를 휘감아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참 얼마나 짧은 생각인가.
‘이러면 팔을 움직일 수가 없지 않나.’
그를 밀쳐야 하는데 밀치려면 어깨까지 둘둘 힘겹게 말았던 이불을 다시 펴야 하는 것이다.
“저, 저, 저기…… 읍!!”
피할 새도 없이, 기다란 팔이 이불 채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이불에 막혀서 바둥거림은 완전히 소용이 없었다. 자승자박이었던 셈!
“읍읍!”
살구색의 예쁘게 생긴 입술이 내 입술을 완전히 덮었다.
한데 온기를 머금고 따뜻해야 할 그 안이 차가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머금고 있던 액체가 내 목으로 꼴깍 넘어갔다.
그리고는 조금 더 농밀하게 입을 맞춰왔다.
내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할딱할딱 댈 때쯤에야, 길고 열정적인 키스가 끝났다.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
“뭐, 뭘 먹인 거예요?”
이안은 여전히 이불째로 나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까딱했다. 얄밉게도 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약입니다. 당신 목이 상할까 봐요.”
뭐래, 진짜! 약이라고 하면 고마워할 줄 알았냐!
‘얼마나 놀랐는데!’
“내가 스스로 먹을 수 있거든요?!”
나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어제는 못 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내가 언제? 몇 시, 몇 분, 몇 초에?!
그를 타박하려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석상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세 번째인가 네 번째 경기(?) 중에.
“스스로 움직여봐요.”
“못 해요. 못 해…….”
“살짝 여기 힘을 주면.”
“못 해요. 못 한다고요! 아무것도 못 하겠으니까 다 당신이 해줘요!”
“그 못 한다는 게 아니잖아!”
나는 꽥 소리치고 말았다.
한 번의 경기로 끝날 줄 알았던 밤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정말 그는 나를 다른 의미로 흐물흐물하게 만들었다. 나중에는 제대로 허리를 세워서 앉을 힘도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자꾸 닦고 자야 감기가 들지 않는다는 둥, 잠옷을 입혀주겠다는 둥 귀찮게 굴어서 했던 게 바로 저 말이었는데.
‘이걸 이렇게 써먹다니.’
이제는 잠도 잤고, 멀쩡한 정신이란 말이다. 내가 뾰족해진 눈으로 그를 흘겨보자 그가 입꼬리를 느슨하게 휘며 웃었다.
“하하.”
어제 보여줬던, 바로 그 웃음이었다.
흐릿한 촛불 아래서도 환하게 빛나던 웃음이었는데, 이렇게 해가 쨍한 아침에 보니 정말 태양의 신이 이 자리에 강림한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흥.”
저 얼굴을 보고 있으니 화를 더 내려야 낼 수가 없었다. 내가 그와 반대편 벽을 쳐다보며 꼼지락대고 있자, 그가 나를 다시 힘주어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화났어요?”
“안 났어요.”
“정말요?”
“화났다고 하면요?”
“그럼 화를 풀어드려야지.”
당연하다는 대답이 어이가 없어서 나는 다시 그를 흘겨보았다.
‘당신이 내 화를 어떻게 풀어줄 건데?’
나와 눈을 맞춘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같이 식사부터 먼저 할까요? 아니면 같이 목욕부터?”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질문이란 말인가.
“……당신, 이런 사람이었어요?”
설마 남편에게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질문에 나는 입술을 떡 벌리고 말았다.
이대로는 종일 번데기인 양 이불만 뒤집어쓰고 있겠다. 나는 이불 안에서 통통 그의 몸을 두드렸다.
“팔 풀어줘요. 일어날 거예요.”
하지만 그는 팔을 풀기는커녕 강아지처럼 내 목덜미에 고개를 비비며 웅얼거렸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잘생긴 남자와 딱 달라붙어 있으니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역시 그와 이렇게까지 농밀한 대화를 나눌 거라 상상도 못 했기에, 속았다는 찜찜한 기분도 들었다.
‘아니, 정말 이런 사람이었어? 그 무표정하고 어색했던 말투는 다 거짓이었던 거야?’
나는 연신 내 머리카락에 입술을 얕게 쪽쪽거리는 남자를 흘겨보았다. 이렇게 스킨십을 좋아하면서 그간 숨기고 사느라 애썼다 싶었다.
“용케 추문 없이 얌전히 지냈네요.”
내 말에 이안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했다. 가을 하늘을 옮겨놓은 듯 청명한 푸른색의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말했잖아요. 아무 여자한테나 찝쩍거리는 짐승이 아니라고.”
그의 사생활이 깨끗하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20년 뒤의 미래까지 그는 혼자였고, 변변한 염문설 하나 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대단한 자기 절제력이야.’
기댈 수 있는 가족이 있어도, 사람은 때때로 지독한 외로움에 빠져든다. 그런데 이 남자는 가족도 없이 20여 년을 혼자서 보냈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이렇게 쉽게 넘어간 거지?’
아무리 황제가 결혼, 결혼…… 빽빽 소리를 쳐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독신을 고집하던 남자가, 왜 이렇게 내게는 쉽게 넘어갔던 걸까.
‘내가 그렇게 말을 예쁘게 건넸던 것 같지도 않은데.’
이맛살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공교롭게도 그 또한 나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예쁜 아몬드형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생각해보면 당신은 제게 퍽 무례했었죠. 그런데도 나는 당신에게 너그러웠고. 왜였을 거 같습니까?”
“…….”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잡아끄는 것만 같았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언어가 되지 못한 수많은 감정이 시선을 통해 오고 갔다.
‘이상한 사람.’
분명 어제도 만났던 사람인데, 지금 이 순간 그가 한층 더 가깝게 느껴졌다.
고작 하룻밤을 보냈을 뿐인데.
“응? 대답해요, 올리비아.”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전과 달리 꿀처럼 달았다. 이전의 목소리가 뭔가 오싹오싹했다면, 지금은 묘한 여유 같은 게 느껴졌다. 나는 지난밤 그가 나를 끌어안으며 뭐라고 말했는지를 떠올렸다.
“여기 이렇게 아기가 필요 없다는 여자가 제 발로 찾아왔네요. 그런데 또 그 여자가 내 취향이야?”
첫 만남에서부터 무례한 여자에게 관대했던 것,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것과 달리 내게 다정했던 것, 상냥하게 안아줬던 것까지.
왜 그걸 몰랐을까.
그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나는 얼떨떨한 어조로 되물었다.
“설마…… 내가 마음에 들었어요?”
“정답.”
칭찬이라도 하듯 그의 입술이 내 뺨에 닿았다. 맨들맨들한 입술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오스스한 감각이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틀어 입술을 피하면서 물었다.
당황한 나머지 눈이 빠르게 깜빡여졌다.
“내가요? 나를 왜? 당신 그때 나를 처음 만났잖아요.”
그가 손을 뻗어 내 뒷머리를 감쌌다. 이제 더는 그의 입술을 피할 수 없도록 말이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이 반짝이는 사파이어 같았다.
“처음엔 얼굴이 취향이었죠. 특히 눈이.”
내 눈?
그 대답이 또 참 이상했다. 내 눈은 그와 정반대의 색깔이었으니까. 내 눈은 붉은 편이라 마치 적자주색 루비 같았고, 눈이 크고 쌍꺼풀은 있지만, 끝이 살짝 뾰족해서 일반적인 제국의 미인상은 아니었다.
계속 못 믿겠다는 듯이 찌푸려지는 내 얼굴을 보며 그가 낮게 쿡쿡 웃었다. 그리고는 능청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예쁜 여자가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제발 결혼해 달라고 간절하게 청혼을 하는데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던지.”
“저기요, 오해가 생길 만한 말은 그만두지 않을래요?”
내가 청혼을 한 건 맞지만, 그렇게 로맨틱하지 않았잖아! 내가 언제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어!?
나한테는 창피한 과거였으나, 그에게는 회상만 해도 웃음이 나는 에피소드였던 모양이다.
그의 얼굴이 숨결이 얽힐 정도로 가까운 곳에 다가왔다. 잘생긴 코끝이 내 코끝과 부딪쳤다.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다음엔 당신이 내미는 조건이 마음에 들었죠. 아기를 가지고 싶어 하지 않고, 굳이 내 생활에 간섭할 것 같지도 않고, 야무지고 당돌하면서 욕심도 없으니 내정도 잘 다스릴 것 같고.”
그건 다 추측 아닌가. 나는 새초롬하게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다가 내가 타이론 공작가의 재산을 몽땅 들고 도망치면 어쩌려고요. 그렇게 사람 한번 보고 판단하면 큰일 나요.”
퉁명스러운 대답에 그가 내 코끝을 얕게 깨물었다. 전희처럼 자꾸 이어지는 스킨십에 얼굴이 저절로 달아올랐다. 그가 날 놀리기라도 하듯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연상인데도 이렇게 어린애 대하듯이 행동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어요. 내가 좀 애정결핍이라.”
뜨끔.
그 말에는 그동안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내 양심이 펄떡거렸다.
‘내가 연상 맞지. 맞고요…….’
진실은 죽을 때까지 저 너머에 있을 예정이었다.
내 뒷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손가락이, 내가 딱히 반항하지 않는 것 같으니 다시 슬슬 돌아와서는 내 뺨과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마지막으로 결정 내리게 된 계기는 차입니다. 스모키 얼그레이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차예요. 당신이 마시는 걸 보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취향이 비슷하니, 잘 살 수 있겠다.”
꼭 보석이라도 만지듯 가만가만한 손길이 간지러웠지만, 웃을 수도, 눈을 뗄 수도 없었다.
그가 이렇게 속삭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는 참 운이 좋아요. 충동적으로 혼인한 아내가 속궁합까지 잘 맞는 것 같네?”
작게 나를 간질이는 것 같던 손가락이 갑자기 이불 안으로 쏙 들어왔다. 계속 그를 피해 숨어 있던 알몸이 이불이 흘러내리면서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올리비아.”
등줄기를 훑어 오르는 손길이 오싹했다. 명확한 의미를 담고서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나는 두 손바닥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밤에 그렇게 했으면 됐지! 이제 그만!
“잠깐, 잠깐, 이 사람이! 지금 대낮이에요! 나는 배가 고프고요!”
“이런.”
그가 난처한 듯 웃었다. 나는 씩씩대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밤새 시달린 데다가 어제는 드레스를 입는다고 새 모이만큼만 식사했기 때문에 배가 무척 고팠다.
‘틈을 주면 안 돼. 언제 끝날지 몰라!’
상대가 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침대 위에서 방심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잔뜩 빨개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의 간절한 시선을 읽은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내 허리를 붙들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건 어쩔 수 없네요. 아내를 굶기는 남편이 될 수는 없으니.”
달려들 때와 달리 그는 깔끔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침대 맡에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아랫사람을 부르는 종소리가 뎅그렁, 뎅그렁 울렸다.
‘설마 옷 갈아입는 것까지 쳐다보고 있을 셈은 아니겠지?’
다시 주섬주섬 이불을 당겨서 알몸을 가리면서도, 나는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기 여우인 양 잔뜩 경계하는 나를 보며 그가 피식 웃었다.
“10분만 있다 올게요. 함께 식사합시다.”
방문이 열리고 세숫물과 갈아입을 옷, 수건 등을 카트에 실은 하녀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내가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이안은 손을 살래살래 흔들고는 방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래도 막 짐승처럼 달려들진 않는구나.’
아니다, 달려들었나? 아닌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헷갈렸다. 번데기처럼 이불을 감고 있는 내게 하녀들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리 오세요, 공작부인. 치장을 돕겠습니다.”
몰라, 몰라. 짐승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단 말인가.
적어도 그는 나를 아프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좋아서 괴로울 정도였다.
‘나중에 생각하고 밥이나 먹자.’
그리 생각하면서 침대에서 내려섰을 때였다. 허리가 찌릿, 아파서 잠시 비틀거렸다. 이때만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이었으니까.
내 컨디션을 배려했는지 시녀가 챙겨온 드레스는 몸을 조이는 부분이 하나도 없는 편안한 드레스였다.
내 옷을 입혀준 하녀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소, 송구합니다, 공작부인. 준비된 옷이 이것인데…… 나가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가?”
“거울을 보시는 편이.”
하녀가 지나치게 수줍어하는 모습이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른 하녀가 내게 내밀어주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짐승처럼 달려들었나? 아닌가?’
이전 질문의 답은, 거울을 보는 순간 알 수가 있었다.
흰 목덜미부터 쇄골까지, 꼭 벌레에라도 쏘인 것처럼 울혈이 울긋불긋했으니 말이다.
초야, 그리고 울혈.
이게 무슨 자국인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빼액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사람 몸을 이 지경을 만들고 또 하자고 했냐!”
누가 이 사람보고 고자라고 했어?
누가 잘생긴 얼굴이 아깝다고 입방아를 찧어댔냐고.
‘나는 고자라는 말만 철석같이 믿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사기 결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