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내가 불도저라고 말 안 했니?
“네?”
내 말에 이안은 다시 얼음처럼 쨍하니 굳어졌다. 손바닥으로 귀를 문지르는 모습이, 제 귀의 성능을 의심하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시죠. 당신 귀는 지극히 정상이에요!
“저는 지극히 이성적으로 계산해서 지금 당신에게 청혼하고 있어요. 농담도 장난도 아니에요. 저랑 결혼합시다.”
“…….”
나의 말에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남자가 어떨 때 입을 다무는지 알겠다.
생각이 필요할 때다. 화를 내면 일을 그르치기 쉬우니 잠깐 텀을 두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협상 테이블에 앉았을 때, 상대방에게 시간을 주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비련의 여배우처럼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힘껏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면 정말로 절 농락하신 것이었나요?!”
“헉!”
쨍그랑!
누군가 접시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목소리는 이 홀 전체를 다 울릴 만큼 쩌렁쩌렁했다.
이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내가 보란 듯이 더 큰 소리로 오해가 될 만한 말을 던지려고 했을 때였다.
“읍!”
커다란 손이 내 입을 막았다. 제임스보다 훨씬 부드러운 손바닥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하긴, 제임스는 전쟁터에서 10년을 보냈으니 거친 게 당연한가.’
이 와중에도 드는 생각이 고작 남편과의 비교라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20년 세월의 무게가 묵직했다. 소리를 지르는 나 때문에 반쯤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말문이 막힌 적이 없는 사람인데, 당신은 이 짧은 순간에도 수차례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군요.”
칭찬이냐. 나는 내가 유일하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 즉 눈 깜빡거리기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남자가 결국 한숨을 내뱉었다.
“좋아요. 프라이빗룸에서 이야기합시다.”
사실상 그쪽의 패배 선언이었다.
* * *
아라미르의 프라이빗룸은 메인 홀과 비슷한 인테리어였다. 커다란 크리스털 파티션으로 공간을 분리했다는 것만 다를 뿐.
이미 여러 번 이곳에 방문한 적이 있는 나는 새삼 그곳을 둘러보는 얼뜨기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럼 즐거운 시간…….”
“잠깐.”
나는 우리를 안내하고 그대로 사라지려는 지배인을 불렀다. 지배인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소파에 등을 대고 앉아서 말했다.
“달콤 짭짤한 것들은 잔뜩 먹었으니, 스모키 얼그레이가 좋겠어요.”
“……차를 좋아하는군요.”
내가 홀에서 호화로운 티 코스를 즐긴 것을 아는 모양이다. 어깨를 으쓱했다.
“네. 제 유일한 사치죠. 각하께서는 이 정도 사치는 사치도 아니게 느껴질 만한 부를 소유하고 계시고요.”
이까짓 푼돈이 아깝냐, 라는 비꼼이었다. 나의 말을 알아들은 이안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가져다주게.”
“예.”
지배인은 정중하게 떠났다. 차가 올 때까지는 시간이 좀 있고, 딱히 그와 할 말이 없는 나는 앵무새처럼 내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저랑 결혼하시죠.”
“……그 말은 좀 안 하면 안 됩니까?”
이안은 진심으로 곤혹스러운 것 같았다.
내가 파넬 공작부인으로 사교계를 휘젓던 그 시절에도 그의 흐트러진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아는 그는 좀 더 과묵하고, 조금 더 딱딱했다.
‘이 사람도 젊어서 그런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이 시점의 타이론 공작에 대해서 떠올려보려고 했으나, 대국민 고자 말고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살짝 찌푸려진 눈이 내게 대답을 촉구하고 있었다. 나는 곱게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공작님이 흔쾌히 승낙하시면 저절로 그만하게 되겠죠.”
듣기 싫으면 나의 청혼을 받아들이라는 뜻이었다. 내 대답에 이안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그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조금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선택지가 없나요? 노예도 자기가 일할 곳 정도는 택할 수 있는 법입니다.”
노예라니. 그 정도로 싫었어?
‘그럼 내가 배려해드려야지.’
나는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
“선택지를 두 개 드릴게요. 흔쾌히 결혼한다, 수줍어하면서 결혼한다. 어느 쪽이세요?”
“…….”
이안은 입술을 꾹 다물고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미리 생각한 것 이상으로, 지금 이맘때의 그는 숫기 없는 젊은 청년인 것 같았다.
‘재미있네.’
저절로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시간을 돌리는 기적 덕분에 그 철옹성 같은 타이론 공작을 놀릴 기회가 생기다니.
나는 귀여운 척 두 주먹을 내 얼굴에 대고, 아기 고양이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속에는 마흔 살 들어 있지만 뭐 어쩔 건가. 몸뚱이는 스무 살인데.
“참고로 제 반응을 선택하라는 거예요. 이미 봐서 아시겠지만 연기도 잘하거든요. 수줍어하시는 게 취향이면 지금부터 수줍어할게요.”
“관두죠.”
하지만 장난이 과했던 모양이다. 이안은 고개를 흔들어 나의 말을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 그리고 테이블에 척, 한쪽 팔을 올려 턱을 괴고, 나른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물었다.
“왜 접니까?”
“네?”
“남사스러운 노래 한 곡 돌았다고 해서 저와 결혼이라니, 왜 그런 극단적인 결론으로 튑니까.”
“제가 이미 알아듣게 말씀드렸잖아요.”
갑자기 진지해진 그의 태도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곧게 허리를 세우고 이안을 마주 보았다.
완전한 진실은 아니었으나, 완전한 거짓도 아니었기에 말은 술술 나왔다.
“저는 그 노래 때문에 지금 상당히 곤란해요. 시어머님들이 엄청 못살게 군다고요. 그러니까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아예 노래를 기정사실로 만들고 싶어요.”
“고작 그런 이유로요?”
그 말에는 저절로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이번 생에서 지금까지는 약삭빠르게 시어머니들의 폭발을 아슬아슬 피했지만, 지난 생에서는 그녀들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했다. 무식하게 때리는 것부터, 지능적으로 헛소문을 퍼뜨리고 몰래 따돌리는 것까지.
20년이나 흘렀는데도 과거의 상처들은 유리처럼 나를 찔러대었다. 나는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비꼬았다.
“고작이라니. 저 대신 시어머님들께 두들겨 맞아보셨나 봐요.”
내 말을 들은 이안의 두꺼운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래도 그는 제임스 같은 돌머리는 아닌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은 실례했습니다.”
“용서하죠.”
굳이 그와 잘잘못을 따져서 싸우고 싶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냉큼 그의 사과를 받았다. 그리고 정말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보다 애절하게 늘어놓았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당신에게 봉양해야 할 부모님이 없다는 게 너무 좋아요. 당신이 말수가 적은 것도, 부인에게 관심이 없을 사람이라는 것도, 세우지 못하는 것도 다 제겐 괜찮아요. 그러니까 결혼해주세요.”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솔직했다.
가리는 것도 쥐고 있는 패가 많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거지, 겨우 쪽박 패 하나를 들고서 어디까지 허세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난 내 속내를 다 보여줬어.’
그러니 이제 당신의 결단만이 남았지.
나는 이안에게도 이게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공작부인으로 20년이나 일했으니, 업무에도 익숙하다. 20년 뒤에도 아내가 없어서 구설에 오르던 남자이니, 차라리 나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내 일이나 하는 아내라도 있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
하지만 바로 대답할 줄 알았던 이안은 입술만 꾹 다물고 있었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내가 반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때였다.
“이봐요, 빨리빨리 대답을…….”
“실례합니다.”
낯선 목소리가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비집고 들어왔다. 다름 아닌 지배인이었다.
‘엿들었나.’
흘긋 지배인의 안색을 살폈다. 전혀 동요하지 않는 얼굴은 나의 망발을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침 내게 안정을 취하라는 듯이 알싸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주문하신 스모키 얼그레이입니다.”
바로 차향이었다.
스모키 얼그레이는 말 그대로 얼그레이 티에 훈연향을 입힌 것으로, 마치 궐련과 같은 독한 향이 난다.
대부분의 귀부인들은 혓바닥에 차향이 짙게 남는 이 티를 선호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안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 차를 좋아합니까?”
어디까지나 대부분이지. 나는 찻잔 가득 찻물을 채우며 대답했다.
“최고가 아니라는 의미로 물으신다면, 좋아해요. 제 개인 5위 안에는 들어요.”
“흠.”
나는 ‘옜다, 너도 맛 좀 봐라’ 하는 마음으로 이안의 찻잔에도 차를 가득 채워주었다. 사파이어처럼 푸른 이안의 눈동자가 일렁이는 찻물을 바라보았다. 나는 구태여 그가 마시길 기다리지 않고 내 몫의 찻잔을 들었다.
홀짝홀짝, 내가 딱 세 모금을 넘겼을 때였다. 이안이 찻잔을 쥐었다. 커다란 손 크기 때문인지 찻잔이 작게만 보였는데, 입가로 가져가는 모습은 또 흐르는 물처럼 유려했다.
이제 마시려나, 하고 흘긋 바라보니 그가 입술을 열었다.
“좋습니다.”
“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기 무섭게 그가 단숨에 찻잔을 후루룩 비웠다. 그렇게 마시는 차가 아니다, 라고 핀잔하지 못한 것은, 빈 찻잔을 달칵 내려놓으며 남자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합시다, 결혼.”
나를 바라보는 찻잎이 떫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짜증이 나서인지 이안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워낙 미남인지라 찡그리고 있는 모습도 전혀 추하지 않았다.
그래서 왠지 진 기분이었다.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저도 마침 그쪽 때문에 지긋지긋하던 참이거든요.”
그 와중에 목소리는 무척 섹시했다.
시간을 돌려 사흘 전.
업무차 입궁했던 이안 타이론 공작은 자신을 향해 방정맞게 달려오는 황제를 보며 얼굴을 힘껏 구길 수밖에 없었다.
“이안, 내 사랑하는 아우여!”
원래도 멀쩡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텐션이 높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남자가 얼싸안은 채로 목에 매달려 수염을 비비는 건 절대로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이안은 질색하고 황제를 밀어내며 물었다.
“윽, 뭡니까.”
그러자 황제는 밀리기는커녕 더 억센 손길로 이안을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너무 좋아서 그렇지! 세상 사람들이 다 그 남사스러운 소문을 믿어도, 나는 안 믿었다. 그럼, 네가 그럴 리가 없지!”
“네?”
이건 또 무슨 개똥 같은 소리란 말인가. 남사스러운 소문이 뭔지는 알겠는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커다란 눈을 껌뻑이는 이안에게, 황제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드디어 너한테도 애인이 생겼다며!”
그렇게 된 거였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슨 일인지 다 이해가 갔다. 이안은 대놓고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설마 믿으시는 거 아니죠, 그 소문?”
이 나라의 지엄한 지존이심과 동시에, 이안의 사촌 형인 황제는 이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나라 안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믿을 리가 없지.’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떴더니, 이게 웬일. 황제는 뻔뻔하게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믿을 건데. 아니 믿다 못해, 사실이 아니라면 권력을 남용해서라도 사실로 만들 의향도 있단다. 권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 아니겠니?”
“신이시여.”
아니, 이런 데 쓰라고 준 권력이 아니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말 아닌가.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 게다가 애초에 파넬 공작부인은 폐하께서 직접 중매 선 혼처가 아닙니까?”
올리비아 플로렌스라는, 한미한 가문의 여식을 파넬 공작부인으로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그 부분을 지적했더니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거야 번복하면 그만이지. 이미 공작은 전쟁터로 나갔고, 이제 와 파혼한다고 다시 돌아오겠냐, 아니면 사람들이 궁으로 다시 불러들이자고 하겠냐. 아무 문제 없다.”
“허허.”
어이가 없어서 이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황제는 쉽게 말했지만,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황제 자신이, 황명을 번복해야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파넬 공작이 전쟁터에 있는 터라 두 사람이 서로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을 거라고 해도, 파넬 공작부인은 이미 관청에서 인정하는 유부녀이기도 했다.
자신을 둘러싼 소문은 대국민 고자로 충분했다. 이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전 내키지 않습니다.”
“이안.”
사촌 동생의 연이은 거절에 황제의 얼굴이 진중해졌다. 그는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두 사람이 혈연이라는 걸 보여주듯 황제의 푸른 눈동자가 깊은 호수처럼 빛났다.
“부부란 게 별거 있냐. 그냥 얼렁뚱땅 만나서 살다 보면 정도 들고, 마음도 쌓이고 하는 거지. 날 봐라. 황후랑 그냥 생일이 같아서 이어졌을 뿐인데 잘 살지 않니.”
일국의 황제나 되는 사람의 혼사에, 개인의 의사가 개입될 여지가 무엇 있으랴. 그가 할 수 있었던 선택은 딱 하나뿐이었다. 황제의 나이 8살. 저 혼자 살기에도 바쁜 어린애 앞에 두 장의 서류가 내밀어졌다.
“골라보세요, 황태자.”
서류에 적힌 것은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는 어린 여자아이 둘. 이미 엄선된 조건을 거쳐 선정된 두 명의 후보였다. 황후 자리는 하나뿐이니, 마지막 선택이 결국 황태자의 손으로 돌아간 것이다.
고작 8살이 무얼 알겠는가. 그는 지극히 즉흥적으로 골랐다.
“이쪽이 나랑 생일이 같네요. 이쪽으로 하겠습니다.”
그게 지금의 황후였다.
황제는 아버지처럼 인자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전대 공작이 재수가 없었을 뿐이지,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무난하게 살아간단다. 그러니 너도 이제 네 인생 살도록 해.”
이쯤 하면 알아들었겠지.
황제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것을 기대하며 사촌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이안은 무뚝뚝한 얼굴로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고 있어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는걸요.”
“그렇다고 그런 괴상한 소문을 달고 살겠다고?!”
결국 황제는 폭발하고 말았다. 이렇게 잘생긴 내 사촌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우리 사촌 동생이, 지금 대국민 고자라고 불리며 살고 있는데!
“젠장!”
결국 화를 참지 못한 황제가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으며 빈 벽을 발로 걷어찼다.
젊은 시절을 전쟁터에서 험하게 보낸 황제는, 때때로 감정이 격해지면 그때의 습관이 튀어나오곤 했다.
황제를 그렇게 몰아세운 주제에, 이안은 뻔뻔스럽게 이렇게 대답했다.
“상스러운 말은 자제하시죠.”
“시끄럽다, 이 고얀 놈. 전쟁터로 이놈을 보냈어야 했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하니?”
“…….”
이건 좀 위험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파넬 공작처럼 전쟁터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얼굴도 모르는 부인이 있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이안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황제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저절로 조사해 두었던 내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바닥을 노려보듯 쳐다보며 입술을 열었다.
“수상한 여자예요. 왜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지도 모르겠군요.”
소문이 돌기 시작한 순간부터 공작가의 가신들은 발 빠르게 소문의 근원지를 찾았다. 그리고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뜻밖의 인물이 나왔다.
올리비아 파넬. 바로 파넬 공작부인.
사실, 조사착수단계에서 그녀는 절대로 아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여자에게 불륜이라는 소문이 얼마나 치명적인데 심지어 그걸 스스로 낸단 말인가.
하지만 정작 황제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냐? 나는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황제가 주선한 결혼을 걷어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몇 개라고 생각해?”
“…….”
그러니까 요컨대 파넬 공작부인이 되기 싫어서 이런 짓을 벌였다는 뜻이었다.
‘얼토당토않은 욕심쟁이인가. 아니면 그냥 대중의 관심을 즐기는 타입?’
한미한 가문의 영애가 공작부인이 되었으니, 대단히 성공한 결혼인데 왜 그것을 박차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뭐, 내가 이해할 필요도 없지.’
소문이야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게 되어 있다. 이안은 대국민 고자였다. 애초에 이런 열애설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상대이다.
이런 시큰둥한 사촌의 속내를 꿰뚫어 본 황제가 말했다.
“정 내키지 않으면 한번 만나보기라도 하렴.”
“싫다니까요.”
“싫어도 그쪽에서 접촉해올걸.”
그 말이 퍽 의미심장했다. 소문이 그냥 가라앉도록 황제마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불길한 뉘앙스가 풀풀 풍겼다. 이안이 진저리 난 표정으로 황제를 쳐다보자, 황제는 사람 좋은 아저씨처럼 환하게 웃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나는 대찬성이란다.”
* * *
‘일이 이렇게 술술 풀려도 좋은 건가.’
나는 멍하니 앉아서 그렇게 생각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지어진 높은 층고의 천장에는 으리으리한 벽화와 크리스털 수백 개가 쓰인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지금 나는 타이론 공작가의 응접실에 있다.
시간을 조금 돌려 볼까? 바로 아까 아라미르 찻집. 이안은 뜻밖에 내 제안에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합시다, 결혼. 저도 마침 그쪽 때문에 지긋지긋하던 참이거든요.”
뭐가 그렇게 지긋지긋한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보나 마나 그를 고자라고 알고 있는 이들이 괴롭혔겠지.
우아하게 차를 다 비우니,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바로 갑시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네? 당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으면 되나요?”
“연락을 기다려요? 어디 가서 말입니까?”
“가요? 어디로요?”
그제야 생략된 목적어 때문에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말이 꼬였다는 걸 깨달았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고는 조금 더 길게 풀어 말했다.
“저랑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굳이 파넬 공작가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저희 집으로 같이 가시죠.”
‘이런. 나도 한 시원 한다고 생각했는데.’
나 못지않게 이 남자도 거침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내민 손에 내 손가락을 올리는 순간 심장이 두근, 뛰었다.
알 수 없는 미래가 주는 기분 좋은 기대감이었다.
***
그렇게 해서 나는 지금 타이론 공작가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마님(?) 때문에 저택 전체가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응접실을 바라보았다.
‘조금 삭막하네.’
결혼하면 인테리어부터 조금 건드려야겠다. 굳이 미술품을 사지 않아도 이 정도 역사와 전통을 가진 저택이라면 쓸 만한 전시물들이 창고에 그득할 것이다.
‘좋아. 할 일은 산더미로군. 마음에 들어.’
남편과는 거의 내외하며 지낸다고 생각하면, 결국 내 앞에 남은 것은 공작부인으로 남의 눈총을 받지 않을 정도의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시간은 넉넉하고, 자원도 넉넉한데, 저택이 완벽해서 할 일이 없는 것만큼 불행한 게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타이론 공작을 이용해서 파넬을 탈출하는 건 정말 좋은 생각이었어.’
타이론 공작가로 훌쩍 떠나버린 나를 두고 진상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조금 궁금했다. 하지만 그 진상들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히 궁금한 것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잠시 응접실을 어떻게 꾸밀까 생각하고 있는데 이안이 문을 열고 돌아왔다.
“조금만 기다리시죠.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지낼 방이 준비가 안 되어서요.”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설핏 불쾌함이 스쳤다. 완벽주의자 특유의 굴욕감 같았다.
나는 흔쾌히 어깨를 으쓱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하루 정도 여기 소파에 구겨져서 자도 돼요.”
응접실 소파라고 해도, 파넬 공작가에서 내게 준 다 삭아가는 지푸라기 침대보다 나았다. 게다가 저택 안도 훨씬 따뜻했고. 내가 여기서 잔다고 하면 불도 지펴주지 않을까?
‘으으으, 다시 생각해도 거긴 쓰레기통이었어. 망할 진상들.’
아니, 얼마나 괴롭혔길래 20년이나 지나서 다시 만났는데도 미움이 조금도 희석되지 않고 살아난단 말인가.
‘이젠 다시 만날 일이 없겠지.’
그리 생각하니, 긴장이 풀려서 저절로 나른한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파넬 공작가에서는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지만, 타이론 공작부인으로는 그리하면 안 됩니다.”
“그럼 당신 침실에서 하루 자죠, 뭐.”
어차피 고자라며?
그럼 같이 자도 문제없잖아.
그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건넨 말인데, 뜻밖에 이안이 돌처럼 굳어졌다.
“…….”
또다. 말문이 막혔을 때, 분노하거나 회피하는 대신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것.
‘절대 자기 침실로 들이진 않겠구나.’
나라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같은 침대를 공유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내 방이 빨리 정비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제가 고자여도 괜찮은 이유가 뭡니까?”
뜻밖의 질문이었다.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이유?’
이유야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도 될까?’
나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을 살펴보았다. 내 이유는 귀부인으로서 치명적인 것이라, 정말 믿는 상대가 아니라면 절대로 털어놓아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지. 상대는 대국민 고자인걸.’
뭔들 내 남편이 고자라는 것보다 치명적인 이유겠는가. 그리 생각을 정리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가벼운 어조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 아이가 싫어요. 낳고 싶지 않아요.”
무척 간단하지만, 반드시 후계를 봐야 하는 귀족에게는 치명적인 이유였다.
나와 제임스 사이에는 아이가 둘 있었다. 하나는 아홉 살, 그다음은 일곱 살. 내 배로 낳은 자식은 예쁘기 마련이라는데, 나는 솔직히 아이에게 정을 줄 수가 없었다.
‘내가 죽을 뻔했으니.’
큰아이를 낳을 때 끔찍한 난산을 겪었다. 20시간을 꼬박 앓다가 낳았고, 힘을 너무 오래 주면서 엉덩이 쪽 근육에 이상이 생겨서, 낳고 나서도 계속 침상에 누워서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했다.
등이 썩어들어가는 욕창과 힘겹게 싸우며 이대로 다신 걷지 못할까 봐 공포에 질려 밤마다 숨죽여 울었다.
‘그 끔찍한 후유증이 낫고 나니 곧장 제임스가 달려들었지.’
아이를 낳다가 죽을 뻔했던 나에게 남편과의 잠자리는, 공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거절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많이 참았소.”
꼭 관계해야겠다면 피임을 해달라는 말에,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젖이 나오는 동안은 임신이 안 된다오.”
안 되긴 무슨. 그렇게 덜컥 두 번째 애가 들어섰다. 23개월, 연년생이나 다름없는 둘째였다.
그래도 남들이 둘째는 큰 애보다 수월하게 낳을 수 있다고 해서 좀 안심하고 있었더니 이게 웬걸.
‘정신 차려 보니 보름이나 지나 있었지.’
아이를 낳다가 기절하는 바람에 아이도 죽을 뻔하고 나도 죽을 뻔했다. 의사는 이대로 의식을 못 찾는 줄 알았는데, 기적이라고 말했다. 그 힘겨웠던 출산으로 나는 자궁이 상해 다신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의사로부터 불임 선고를 순간, 나는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다신 그런 끔찍한 경험은 사양이야.’
“아이가 없는 귀부인들의 말년이 얼마나 참혹한지 충분히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저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그 꼴이 되지 않도록 준비하겠어요.”
다시금 밀려오는 출산의 고통과 두려움을 마음 한구석으로 꾹 밀어 넣으며, 나는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고자여도 상관없어요. 아니, 오히려 좋아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안과 시선을 마주했다. 푸른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피하고 싶진 않았다.
잠시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나와 마주 보고 있던 그가 느릿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습니까.”
‘어라?’
너무도 쉽게 납득하는 모습에 나의 어깨는 일순간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나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물었다.
“왜 그렇게 쉽게 대답해요? 당신한테도 중요한 문제잖아요, 후계자는.”
나야 출산의 고통을 두 번이나 겪었으니 그 행위 자체에 포비아가 생겼다고 해도, 이안은 아니잖아?
‘남자들은 철저히 자기의 경험을 신뢰한다고.’
이 몹쓸 일반화는 바로 제임스를 10년간 겪으면서 터득한 것이다. 그는 한 번도 내게 만족하냐고 물은 적이 없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는 만족하니까.’
집안일은 야무진 아내가 척척 잘 굴려, 사업을 벌이기만 하면 뒷수습도 해줘, 가문에 돈이 없으면 어디서 돈도 만들어와, 가문에 도움이 안 되는 시어머니들은 모두 내쫓아줘.
‘그는 손 하나 대지 않고 코를 푼 격이지.’
그래서 결국 욕을 처먹은 건 나 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천하의 불효자, 못돼먹은 며느리,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의 공작부인.
그 모든 상황을, 제임스는 자신이 만족하기에 당연히 나도 만족할 거라고 믿었다.
그것이 내가 아는 남자였다.
‘그런데 왜 당신은 내게 따지지 않지?’
그런 의미에서 이안은 여러모로 특이한 사람이었다. 대국민 고자라니. 듣기만 해도 치욕스러운 별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려 두질 않나, 철부지 스무 살처럼 보이는 여자의 자녀가 필요 없다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다니.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그렇게 뭐든지 수긍하다 보면 집문서, 땅문서 다 날아가게 되어 있어요. 중요한 문제일수록 신중해야죠.”
아무리 겉으로야 내가 연하라지만, 알맹이는 마흔 살 아닌가. 그렇다 보니 한참 어린 청년이 걱정되어, 저도 모르게 이상한 잔소리가 나와버렸다.
내 말에 이안이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이내 턱을 단단하게 굳히고 대답했다.
“뭐든지 수긍하는 게 아니라 정말 상관없어서 고개를 끄덕인 겁니다.”
“상관없어요? 당신 아이에 대한 문제인데도요?”
“글쎄요. 딱히 대답하고 싶지 않군요.”
“헤에.”
기가 막혀서 혀를 차던 나는 불현듯 눈앞의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다.
‘아, 맞다. 이 남자, 안 서지.’
저런, 저런.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거였구나.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다고.’
이유를 알고 나니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애잔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안의 눈썹이 굵게 꿈틀거렸다.
“그렇게 바라보지 마시죠.”
아이고, 들켰냐. 생긴 건 벽돌같이 생겨서 은근히 예리했다. 나는 고개를 살포시 돌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 아니에요. 제가 뭘 어쨌다고.”
“대단히 불쌍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바라보지 않으셨습니까.”
“큼큼, 오해예요. 오해. 제가 왜 공작님을 불쌍해하겠어요.”
“흠.”
거짓말하는 나를 추궁하는 것처럼 자꾸 이안이 내 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쩐지 시선이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 드는데……?’
슬쩍 눈알을 굴려서 이안 쪽을 바라본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느낌이 아니었어!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거야!’
잘생긴 얼굴이, 숨결이 얽힐 것같이 가까운 지척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굵은 팔뚝이 내 어깨를 지나 소파 헤드를 붙들었다. 순식간에 나는 그의 품 안에 갇힌 꼴이 되었다.
‘세상에! 시선을 피할 여유도 없어!’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잘생겼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마주하니 정말 숨이 막힐 듯한 외모였다.
나는 두 손바닥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벽돌이라는 거 취소다. 이 얼굴이 어떻게 벽돌이야. 같은 벽돌이래도 이건 대리석으로 만든 벽돌이라고.’
제임스도 제법 준수한 미남이었지만, 이 남자와는 아예 종족이 다른 것 같았다. 베일 것처럼 오뚝한 코, 숱이 많고 예쁜 눈썹, 빛에 따라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는 꼭 보석 같았다.
지긋이 나를 바라보던 남자의 살구색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어디서 이런 여자가 갑자기 뚝 떨어졌을까?”
“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묘한 색기를 풍기던 그는 다시 딱딱한 얼굴이 되어서는 내게서 훌쩍 멀어졌다. 그러고는 구겨진 재킷을 탁탁 펴며 말했다.
“그럼 전 제 할 일을 하고 있도록 하죠. 우리 결혼식을 위해서는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거든요.”
“그…….”
그렇기야 하겠지만.
‘왜 나한테 벽치기를 했는지 설명을 먼저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니?!’
꽥 소리를 지르지 못한 것은 지나치게 당황했기 때문이리라. 아직도 저 아름다운 얼굴에 놀란 심장은 펄떡펄떡 뛰면서 온몸으로 피를 돌리고 있었다.
그런 나를 향해, 그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담백하게 인사했다.
“이따가 봅시다, 올리비아.”
나는 얼음처럼 굳은 채로 응접실을 빠져나가는 이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끼이익, 하고 문이 열리고 탕, 하고 닫혔다. 그와 동시에 내 긴장도 마법처럼 풀렸다.
“푸하.”
비록 한 놈이지만 어르고 달래서 데리고 산 것이 10년! 이제 남자라면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책 없이 긴장해버리다니!
‘정말 고자 맞아?’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아까의 이안은 무척이나 섹시했다. 나른하게 휘어진 입술, 살짝 붉은 눈가,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까지.
정말 서지도 못하는 남자가 그렇게 색기를 풍길 수 있나?
‘하지만 진짜 미래에도 저 남자는 계속 혼자인걸. 다른 염문도 없이.’
순간 의혹이 솟았지만, 이내 털어버렸다. 나는 20년 뒤의 미래를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조금 있으니 집사가 찾아와서 내게 방을 안내해 주었다. 파넬 공작가와는 조금도 비교할 수 없는 넓고 호화로운 방에서 몸을 뉘였다. 피곤했던 탓에 뒤척이지도 않고 잠만 잘 잤다.
* * *
검은 머리카락에 회색에 가까운 푸른 눈을 가진, 곰 같은 덩치의 사내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제임스였다.
“여보, 눈 좀 떠보오. 여보.”
나는 피식 웃을 뻔했다. 웬일이래. 세 마디 이상 말을 하지 않더니.
‘그렇게 애절한 목소리도 낼 줄 알았어?’
너무나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 나는 이게 꿈이라는 걸 알았다. 제임스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내가 그의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고꾸라져도 큰 소리를 내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제임스가 만약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더라도, 나는 조금 놀랄 뿐이지 딱히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잘 죽었다고 박수 치지 않는 것은 그간 살아온 정이 있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우리의 결혼은 뭐였을까.’
언제 사라져도 아쉽지도 않은 사람. 부부가 된 지는 20년, 함께 산 지는 10년. 그렇게 긴 세월을 보냈음에도 나눈 교감이라고는 잠들기 전 운동처럼 하는 잠자리뿐.
‘당신과 나는 도대체 왜 만난 거지.’
아무 의미도 없이 만나, 어떤 의미도 없이 시간만 보낼 사이였다면. 그런 게 정녕 인생이라면.
‘우리는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되었잖아.’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눈을 떴다.
결혼식 아침이었다.
* * *
그러니까,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황제는 사촌의 혼사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이안과 내가 혼인에 동의하고, 내가 타이론 공작가로 들어가기 무섭게, 당장 황궁으로 입궁하라는 칙지를 보낸 것이다.
타이론 공작가에서 이제 막 첫잠을 자고 일어난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뭐라고요? 입궁하라고요?”
“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도 자기 집이라고, 이안은 셔츠 한 장을 걸친 채 흐트러진 금발 그대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물기를 머금어 아직 촉촉한 머리카락은 순금 색처럼 짙게 빛났다.
‘머리카락을 내린 것도 잘생겼네.’
빈틈없이 머리카락을 넘긴 모습이 전쟁의 신 아레스처럼 잘생겼다면, 저렇게 고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모습은 사랑의 신 에로스처럼 풋풋한 멋이 있었다.
‘아차! 지금 저 얼굴을 감상할 때가 아니지.’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방 한가운데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를 따라 들어온 하녀가 트레이에서 접시를 하나, 하나, 꺼내어 세팅했다.
‘설마 아침 식사?’
황궁에서 칙지가 내려왔는데 태연스럽게 밥을 먹는다고?
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니,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이제 결혼할 사이인데 아침 식사는 함께해야죠?”
“그건 상관없는데…….”
생각보다 더 뻔뻔한 성품이신 거 같기도 하고.
나는 얼떨결에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냥 가볍고 뻔한 아침 식사였다. 잘 익힌 에그베네딕트에 샐러드 조금.
긴장한 탓인지 배고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물끄러미 접시를 바라보다가 슬슬 포크와 나이프를 드는 이안에게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신다면서요?”
이안이 괜찮다고 몇 번을 이야기하는데도 내가 자꾸 황제 폐하를 언급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무서운 분이셨지.’
내가 공작부인으로 자리매김을 단단히 했을 때, 이미 황제는 황태자인 스타티스로 바뀌었다. 황제가 죽어서는 아니었다.
‘일찌감치 황위를 물려주고 황권을 단단히 다지도록 관리 감독했어.’
황제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만만히 보는 멍청이들이 의외로 세상에 많았다.
지금의 황제는 그 미래를 눈여겨보고 피의 숙청을 한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태황제가 되어 뒤에서 모든 욕 먹을 만한 일들을 단행했다.
‘그래서 로메오가 만날 구박당한다고 징징거렸었고.’
하지만 시집살이로 내 앞에서 큰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내가 쓱, 노려보는 것으로 로메오의 징징거림도 쏙 들어갔었다.
황제를 떠올리니 저절로 황제의 사위가 되어 내 지위를 단단하게 해주었던 내 친구, 로메오가 떠올랐다.
‘그래도 로메오가 있어서 다행이었어. 그때도, 지금도.’
내가 지금 타이론에서 한가로이 아침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온전히 로메오가 내가 부탁한 대로 소문을 내어준 덕분이었다.
나와 로메오의 친분은 과거에도 입이 가벼운 이들의 입방아에 올랐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스타티스 황제의 공언 덕분이었다.
“내 남편과 파넬 공작부인은 정말 친구 사이이니 더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말게.”
‘폐하께서도 대단한 사람이었지.’
일개 가문을 관장하는 공작부인으로서도 이렇게 피곤한데, 어떻게 한 나라를 관리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속으로 조용히 스타티스 황제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런 나를 현실로 끄집어 올린 것은 이안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죠?”
“아…….”
둔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 특유의 맑은 하늘 같은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포크로 접시 끝을 둥글게 덧그리며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 뭐라고 이야기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
“제 앞에서 했던 것처럼 해요. 말 잘하던데. 긴장도 안 하고.”
“하하.”
나는 영혼 없이 웃었다. 이안에게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품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계속 식사를 하지 않고 샐러드 잎만 쿡쿡 찌르고 있으니, 이안이 턱을 괴고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랑 결혼 못 하면 어떻게 할 셈이었습니까?”
“뭘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그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 사이를 기정사실처럼 만들고 막상 나랑 결혼하지 못하면 어쩔 셈이었냐고요.”
뭘 어떻게 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랬으면 시어머니들께서 알아서 절 내쫓아 주셨겠죠.”
지금처럼 사지 멀쩡하진 못했겠지만. 우리 무식한 진상이 아마 화분도 던지고 가방도 던지고 막 두들겨 패서 내쫓지 않았을까?
그 꼴을 상상해보니 다시 입맛이 써서 미간을 찌푸렸다. 택도 없는 상상이 아니었다. 정말로 지난 생에서 무식한 진상이 내 짐을 싸서 문밖으로 던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말을, 이안은 다른 쪽으로 곡해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플로렌스 집안의 부채는 모두 해결되었으니 돌아가겠다?”
“설마요.”
플로렌스 자작. 제약사업으로 전 재산 쫄딱 말아먹고 딸자식으로 장사를 벌인 우리 아버지.
파넬 공작부인 자리는 반짝반짝 빛이 났지만, 동시에 고위귀족들은 꺼리는 자리였다. 공작이 전쟁터에서 죽기라도 하면 남편 얼굴도 못 본 채 과부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그때 거금을 요구하며 딸 장사를 하는 데 성공한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였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집구석엔 내 발로는 안 들어가요. 당신도 행여나 처가라고 관심 보이거나 하지 말아요. 그럴 가치도 없는 종자들이니까.”
“흠.”
빈말이 아니라 나는 우리 아버지가 객사한다고 해도 쳐다도 안 볼 생각이었다.
다소 시니컬한 내 대답을 들은 이안이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이야기하면 할수록 당신은 참 알 수가 없습니다. 굉장히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 같은데…….”
유리알처럼 푸르고 반짝거리는 눈이 나를 향했다.
같은데 뭐.
나는 팔짱을 꼈다.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아닙니다.”
무슨 욕인가 들어보자 하고 있었더니, 이안은 부드럽게 화제를 돌렸다.
“어서 드시죠. 감자수프가 굳고 있군요.”
나는 다시 수프 그릇을 내려보았다. 그의 말대로 수프 표면에 얇은 막이 생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지. 여전히 입맛이 없었다.
스푼을 들었던 나는 결국 다시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니, 정말로 걱정되어서 그러는데. 폐하께서 기다리시는데 한가로이 아침이나 먹어도 돼요? 지금 당장 달려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재미있어서 몸이 달아 있으실 텐데, 좀 늦는다고 별일 있겠습니까. 기다리는 시간조차도 즐거우실 겁니다.”
“네에.”
재미있어 죽으려고 하는구나. 황제의 상태를 알아차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저리 말하는 거 보니 정말 괜찮은가 보네.’
그럼 나도 그냥 식사나 해야겠다.
그제야 한 스푼을 뜬 수프는 파넬 공작가에서 먹던 것과 맛이 확 달라서, 새삼 내가 다른 인생길로 접어들었다는 체감이 들었다.
* * *
밥을 먹으면 바로 황궁으로 출발할 줄 알았더니, 산 넘어 산이었다.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방문한 꼬장꼬장하게 생긴 마른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마님. 저는 이 집의 내정에 관한 총괄업무를 대행하는 로만나 하녀장입니다.”
벌써 마님이냐.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안을 흘긋 쳐다보았더니, 그는 덤덤하게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 안 보이는데 은근히 추진력 있네.’
벌써 마님이라니. 어쨌든 그쪽이 허락한 호칭인 거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았다.
“반가워요, 부인.”
하지만 그다음 말에는 또다시 의연할 수가 없었다.
“재단사가 마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재단사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이안을 휙 돌아보았다. 이안은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폐하를 뵈어야 하는데 당신 옷은 모두 파넬가에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기다리고 계시는데…….”
아니, 황제를 기다리게 하고 옷을 맞춘다고? 그 옷은 언제 지어서 입고 가는데.
‘내일이 되어도 완성 안 될 거 같은데.’
어이가 없어서 이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코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에라, 모르겠다.’
진짜 괜찮으니까 이렇게 뻔뻔하게 굴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하녀장에게 턱짓했다.
“좋아요. 안내해주세요.”
우리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이안도 찻잔을 내려놓고 우리의 뒤를 따랐다.
‘옷 맞추는 것까지 쳐다볼 생각인가.’
아무래도 타이론 공작은 할 일이 없나 보다. 하긴, 제임스도 나보다 한가한 거 같았지.
‘그래도 제임스는 옷 맞추고 이런 거에는 쫓아다니지 않았는데.’
아침 식사도 같이했던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우리는 잠만 같이 잤구나.’
그리 생각하니 이쪽이 훨씬 나은 것 같았다. 옳았던 내 선택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하녀장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안내해준 곳은 바로 내가 어제 잠을 잘까, 고민했던 응접실이었다. 응접실에는 이미 여러 종류의 천과 예시로 가져온 드레스 몇 벌이 펼쳐져 있었다.
모노클을 끼고 귀에 연필을 꽂은 재단사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건네고 그 뒷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나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나는 턱을 꼿꼿하게 세우고 대답했다.
“플로렌스 영애라고 부르시죠.”
“안녕하십니까, 플로렌스 영애.”
엄밀히 말해서 아직 결혼한 건 아니니까. 이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재단사는 눈이 쨍할 정도로 푸른 드레스와 보라색 드레스를 내게 내밀었다.
그냥 슬쩍 봐도 날 생각해서 내미는 디자인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와인색 계열로 뽑아주세요. 새먼핑크도 좋고.”
“영애의 눈동자 색과 맞추시는 건가요. 하지만 각하께서는…….”
재단사가 대놓고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들으란 듯이 큰소리로 물었다.
“아직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맞춰 입을 필요가 있나요?”
당돌한 말에 재단사의 몸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정작 소파에 기대앉은 이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뜻대로 하시죠.”
“들었죠?”
내가 눈짓을 하자, 그제야 재단사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나는 거침없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색을 질렀다.
그런 내 모습을 이안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