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 눈 떠보니 다시 쓰레기통 (2/28)
  • 1장. 눈 떠보니 다시 쓰레기통

    내 이름은 올리비아 파넬. 이 나라의 셋밖에 안 되는 파넬 공작가의 안주인이다.

    그저 그런 자작가인 플로렌스 가문의 차녀로 태어난 내가, 이 나라 군 권력의 상징, 파넬 공작가의 공작부인이 된 이유는 내가 절세 미녀였던 것도 아니고, 무슨 로맨스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어떻게 너 같은 게 우리 아들하고 같은 날 태어나서!”

    나는 내 앞에서 교양 없이 찻숟가락을 던지는 세 번째 시어머니를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름다워야 하는 아침 시간, 넓은 테이블에는 네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의 첫 번째 시어머니, 우아한 진상.

    나의 두 번째 시어머니, 징징대는 진상.

    나의 세 번째 시어머니, 무식한 진상.

    파넬 공작 제임스는 바로 저 ‘무식한 진상’의 아들이다.

    그리고 나는 제임스와 같은 날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의 아내가 되었다.

    ‘같은 날은 무슨. 나이도 다섯 살이나 차이 나는데.’

    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황제 폐하의 시큰둥한 예언이, 혼인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귓가에 선했다.

    “생일이 같으니 분명 잘 맞을 걸세. 황후와 생일이 같은 내가 보증해.”

    ‘개똥 같은 소리.’

    그러니까,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령 때문에 성사된 결혼이었다.

    황제 본인부터 잘 맞는다고 하기에는 황제의 후궁이 열 손가락을 넘어갔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계속 새로운 후궁을 들이고, 또 들인 결과였다.

    ‘말이 아들이지, 제국에 여자 황제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실제로 지금 황태자도 첫 번째 황녀인 스타티스였다. 그녀는 무사히 황제가 되어서 나의 절친한 아카데미 동기 로메오를 황후로 맞이하고 나중에 내가 공작부인으로서 자리를 굳히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하여간 말이 길어졌는데.

    ‘황제의 예언은 거짓말이야. 그냥 막 던진 말이라고. 나와 제임스는 절대로 잘 맞지 않았어.’

    시간을 거슬러, 다시 스무 살이 되었으니, 나의 남편 제임스 또한 스물다섯의 봄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그리고 전쟁이 끝나는 10년 뒤에나 나는 그이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지.’

    제임스와의 첫 만남 또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기억이었다.

    그날은 내 첫 번째 시어머니의 장례식 마지막 날이었다. 수많은 손님을 상대하고, 관을 땅에 묻고, 이제 막 집에서 쉬려는데 소란이 일었다.

    “꺄악!”

    “이,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피! 피다……!”

    끔찍한 것을 본 듯한 비명, 그리고 쿵쾅거리는 낯선 발걸음.

    그 바람에 피곤한 몸을 소파에 묻고 있던 내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곰처럼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들어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가 말라붙어 있어서 머리카락 색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데, 두 눈만 도깨비불처럼 새파랗게 빛났더란다.

    “당신…….”

    그게 바로 내 남편 제임스와의 첫 만남이었다.

    * * *

    첫 만남부터 그 지경이었는데 그 후에 잘 지냈겠는가. 남편은 말수가 적고 바깥일에만 열심이었다. 그러다 밤만 되면 내 침실로 제가 먼저 들어와 누워 있었다.

    꼭 이런 놈들이 쓸데없이 정력은 좋기 마련. 제대로 말 한마디 나누어본 적 없는 남편과의 밤은 길고, 힘들었다.

    ‘다시 생각해도 최악의 남편이었군.’

    이제 그럭저럭 미운 정이 붙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막상 과거를 떠올리니 안에서 겁화처럼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지난날을 떠올리며 내가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였다.

    우리 우아한 진상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포문을 열었다.

    “지금 어른들을 앞에 두고 딴생각하는 거니? 역시 못 배운 아이라 예법이 형편없구나.”

    그녀의 비꼼 덕분에 나는 기나긴 상념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님.”

    근데 돌아오는 대답이 이 지경이었다.

    “파넬 대부인이라고 부르랬지?”

    가자미눈을 뜨고 째려보는 시어머니를 보며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지었다.

    우리 우아한 진상은 다른 두 진상과 달리 나를 적극적으로 물 먹였다. 사교계에 나가서 나를 깎아내리는 것은 물론, 교묘하게 서류를 바꿔치기해서 공작가에 큰 손해를 입힌 적도 있었다.

    ‘하긴, 물불 가리지 않는 악랄한 성품을 지녔으니 공작가의 실세가 될 수 있었겠지만.’

    전대 공작의 딸을 낳은 징징대는 진상, 현 공작 제임스의 어머니인 무식한 진상과 달리, 우아한 진상은 불임이었다. 하지만 악랄한 수법들을 이용해서 두 부인을 뒷방에 앉히고 내게도 물려주지 않은 채, 본인이 실권을 지니고 있었다.

    ‘과거에야 눈뜨고도 그 수법에 고스란히 당했지만…….’

    부러 뾰족하게 눈을 떴다. 지금 나는 그때의 스물 햇병아리가 아니었다. 고개를 곧게 들고 그녀를 똑바로 마주한 채로 말했다.

    “그럼 어머님께서도 제게 파넬 공작부인이라고 깍듯하게 존대하시죠.”

    “뭐라고?”

    내 말에 우아한 진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른 두 진상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목에 힘을 주어 고개를 더 꼿꼿하게 들었다.

    “이제 이 집안의 안주인은 저예요. 그이가 전쟁에 나가서 없으니 공작 각하의 모든 권한을 대행하는 사람 또한 저지요. 지금 어머님께서는 가주 대행인 저를 조금도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존중해 달라고 생떼를 부리고 계시잖아요.”

    “뭐, 뭐……?”

    논리적으로 하나도 빈틈이 없는 말에 우아한 진상은 입술을 벙긋거리며 굳어졌다.

    할 말 없지? 나 같아도 할 말 없겠다.

    ‘속으로 수백 번 생각했던 말이거든.’

    설마하니 이렇게 시간을 돌려서 못했던 말을 내뱉을 기회가 주어질 줄 누가 알았나.

    ‘아, 속 시원하다.’

    저 입술만 벙긋거리는 꼴을 보라지. 그리 생각하며 내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을 때였다. 우리 대화에 끼어든 것은 무식한 진상이었다.

    “그이라니. 우리 아들을 네가 왜 그이라고 부르는데?”

    제임스의 친어머니. 가장 오래 살아남아서 나를 괴롭히던 시어머니이기도 했다.

    ‘제임스가 만날 제 어머니 편만 들어서 이러다 내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죽는 줄 알았지.’

    남편이 ‘남의 편’이라서 남편이라는 말도 그때 처음 실감했다. 제가 없는 동안 이 공작가를 꾸려가느라 죽을 뻔한 건 나인데, 그렇게 자기 어머니 편만 들 줄이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야. 괜히 회상하면서 스트레스 받지 말자. 후우.’

    무식한 진상을 마주하고 있자니, 제임스가 떠올라서 화가 또다시 치밀었지만, 나는 몇 번 숨을 쉬는 것으로 화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무식한 진상의 속을 훅 긁었다. 그녀가 어떤 말에 파르르 떠는지, 20년이나 상대한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제 남편이니까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이, 이 XX한 계집애가!”

    무식한 진상은 하녀 출신으로 제임스를 임신한 것으로 인생 역전한 것이라 제임스에 대한 집착이 컸다. 뭐만 하면 ‘우리 아들, 우리 아들’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역린은 바로 내가 ‘내 남편’이라고 제임스를 칭할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냈다. 그러자 잔뜩 움츠러들어서 음식을 깨작거리던 징징대는 진상이 말했다.

    “귀가 울려서 하나도 못 먹겠어. 제발 좀 조용히 해 주면 안 돼……? 하여간 이럴 때마다 너희가 나를 미워해서 그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우물우물,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늘어놓는 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래. 스무 살이었으면 참았어. 내가 스무 살이라면 참았다고.’

    하지만 여기 껍데기만 스물이지 마흔 살이 안에 들어 있다. 징징대는 진상은 지금 마흔으로, 세 시어머니 중에 가장 젊었다. 동갑인데 얘는 이렇게 징징거린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나는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럼 방에 올라가서 혼자 드세요. 어린애도 아니고 징징거리지 않으면 말을 못 하시나요?”

    “뭐?”

    내 말에 징징대는 진상의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돌처럼 굳었다. 이렇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하나하나 진상을 격퇴하는 나를 본 우아한 진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네가 정녕 미쳤구나.”

    고작 몇 마디 한 걸로 미치기는.

    나는 피식 웃었다.

    “안 미쳤어요. 멀쩡해요. 언젠가 한 번 짚었어야 하는 것들이죠.”

    인생 1회차에는 너무 미숙해서 짚고 넘어가지 못했던 것들이지만, 이제는 말해야겠다. 나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파넬 공작 각하께서 안 계신 지금, 저는 이 집에서 가주를 대행하는 가장 높은 사람이에요. 저에게 제대로 예의를 지켜주세요.”

    물론 우리 진상들은 내 말을 납득하지 않았다. 심지어 무식한 진상은 주먹으로 식탁을 내려치며 말했다.

    “시골 무지렁이로 한평생을 살아온 네가 공작가의 재정에 대해 뭘 안다고 가주 대행이라는 거야? 네까짓 것이 할 수 있는 일인 줄 알아?”

    “제게 해 볼 기회조차 주지 않으셨잖아요.”

    나는 우아한 진상을 째려보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공작가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고 있는 이가 바로 저 우아한 진상이었다. 그녀에게서 재정을 빼앗아오는 데 꼬박 5년이 걸렸고, 그녀가 죽기 직전까지도 우리의 다툼은 계속되었다.

    “제가 아카데미에서 전공한 게 뭔지 아세요? 회계예요, 회계. 종일 주판 튕기면서 어떻게 재정관리를 하는지 배웠다고요!”

    내가 적극적으로 내 존재를 피력하는 이 순간에도 그녀는 우아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저 시선을 들춰보면 나를 업신여기고, 어떻게 괴롭힐까 궁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장담하건대 어머님보다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서 재정 권한부터 내놓으세요.”

    “…….”

    “…….”

    재정권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징징대는 진상과 무식한 진상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그녀들은 입을 다물고 우아한 진상을 쳐다보았다. 세 사람의 위계질서가 저토록 투명하게 드러난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입을 다물고 표정 변화 없이 나를 응시하던 우아한 진상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래, 네가 허락하지 않을 줄 알았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에 타격도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어머님의 허락을 받을 거리도 아니죠.”

    당신이 허락하든, 안 하든 이 공작가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나였다. 조마조마한 눈으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집사를 불렀다.

    “집사!”

    “……예, 마님.”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식탁 앞으로 나왔다. 20년 뒤에도 파넬 공작가의 집사로 일하는 충직한 사람이었다. 나는 여전히 우아한 진상과 눈싸움을 하면서 그에게 경쾌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앞으로 공작가의 모든 서류는 내 방으로 가져와요. 집무 볼 수 있는 넓은 방도 준비해주고.”

    “집사!”

    결국 우아한 진상의 얼굴에서 가면이 떨어져 나갔다. 그녀가 볼살을 파르르 떨며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가져가기만 해 봐. 내가 가만히 안 있어!”

    ‘그래. 이게 당신의 본색이지.’

    절제심을 잃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우아한 진상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긴장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아서 의자 팔걸이를 쥐고 있는 손가락이 작게 바들거리며 진동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곤란해요, 어머니.”

    “그건 내가 할 말이구나.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이런 당돌한 요구를 할 줄은.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니?”

    말이 안 될 건 또 뭔가. 나는 집사를 향해 말했다.

    “집사. 앞으로 누구와 더 공작가에서 오래 살지 생각해요.”

    “집사!”

    나의 말에 우아한 진상은 집사를 재차 큰 소리로 불렀다. 집사가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래. 당신도 고민이 되겠지.’

    고민이 되는 게 당연했다. 나는 이제 고작 스무 살, 우아한 진상은 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가는 데 순서 없다지만 우아한 진상보다는 내가 오래 살 가능성이 컸다.

    그 말인즉슨, 지금 이 순간 우아한 진상의 편을 들었다가는 그녀가 떠나고 난 뒤 그가 무척 고달플 거란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내 편을 들기도 애매할 터.’

    나는 스무 살, 실무 능력을 아직 증명하지 못한 햇병아리였다. 무작정 나를 밀어주었다가 우아한 진상에게 찍히면 나중에 독박을 쓸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그가 당장 나를 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아한 진상에게 모든 힘을 실어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바란 대답은 적당한 절충안. 하지만 역시 인생이란 두 번 살아도 예측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안건은…….”

    머뭇거리던 집사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주인님께 여쭈겠습니다.”

    여기서 주인이라고 말할 사람이 누구인가.

    전쟁터에 있는 이 집안의 실질적인 주인, 제임스 파넬 공작. 그 이름이 등판하자 바로 기세가 등등해진 무식한 진상이 주먹으로 식탁을 내려치며 소리를 질렀다.

    “한창 나라를 위해 싸우느라 바쁠 내 아들을 서신으로 귀찮게 하겠다는 거야? 고작 이런 문제로?”

    고작 이거라니, 공작가의 재정이 고작이냐.

    나는 한심한 눈으로 무식한 진상을 쳐다보았다. 내 시선을 눈치챈 무식한 진상이 또 입에 담지도 못할 상스러운 욕을 한 바가지 장전했을 때였다.

    우리의 다툼을 종식한 것은 집사였다. 그는 깔끔한 태도로 다시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그렇군.”

    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을 보탠 것은 우아한 진상이었다. 그녀는 다시금 여유를 찾고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 자신감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보나 마나 제임스가 자신의 편을 들 거라는 확신이겠지.’

    그리고 그 확신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지난 생에서, 남편은 남의 편이라는 호칭에 충실하게 다른 사람의 편만 들었다. 우아한 진상이 죽을 때까지 내가 집안의 실권을 제대로 쥐지 못했던 것에는 남편의 역할이 컸다.

    ‘이번까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방으로 올라온 나는 곧장 내 책상에서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꺼내 들었다.

    ‘너희만 편지 쓰냐? 나도 편지 쓸 수 있다.’

    지난 생의 나는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지만, 지금 생의 나는 달랐다.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지금 상황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전장에서 고생 중이실 제 낭군님께.

    전장에서 나라를 위해서 고생 중이신데 집안일로 연락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현재 저는 이 집에서 내정과는 완전히 배제된 상태로 안주인 대접은커녕 골방에 갇혀서 하녀처럼 지내고 있는 중입니다. 각하의 군대는 위계질서가 확실하고 군기가 깍듯하다고 수도까지 명성이 자자한데, 정작 집안은 흐트러져 있는 셈입니다.

    (중략)

    이번 기회에 내정관리를 제게 맡겨주신다면 책임지고 각하께서 돌아오실 때 공작가 재산을 두 배로 늘려놓겠습니다. 단순 재산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어질 가정생활의 평화를 위해서도 꼭 이번에 제 편을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각하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당신의 아내, 올리비아.

    내가 실권을 쥐는 데 5년이나 걸렸고, 또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우아한 진상이 여러 가지 술수를 부리는 바람에 가문에는 재산 손실이 컸다. 나중에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온 제임스도 부실한 재정 때문에 곤란을 겪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미래를 알고 있어.’

    어디서 금맥이 터지는지, 어떤 사업이 대박을 터트리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재산을 두 배로 불릴 수 있다는 건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정의 평화…….’

    제임스는 옛날부터 그렇게 가정의 평화, 평화, 지저귀어 대었다. 누가 보면 비둘기가 환생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집안의 평화는 그냥 웃어른의 말만 들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웃어른 말을 듣는 게 아니라 내 말을 들어야지.’

    집안의 평화는 올바른 위계질서에서 나온다. 수만의 군대를 호령하는 남편은 어떠한 상황을 군대에 빗대어 이야기하면 찰떡같이 알아듣곤 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군대 이야기까지 편지에 적었다.

    ‘네가 그렇게 바라는 평화를 이루려면 내게 실권을 실어줘.’

    아무리 돌머리여도 이쯤 이야기하면 알아듣겠지. 그리 생각하며 편지를 끝맺었다. 이제 즐겁게 답장을 기다리다가, 우리 우아한 진상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구경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참,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나.

    그렇게 한 달. 한 달 만에 돌아온 남편의 답장은 이런 내용이었다. 너무 간결해서 잘못 읽을 수도 없었다.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어머니들의 말씀을 잘 들으시오.

    “……이, 이 개자식!”

    편지를 읽는 순간 나는 그대로 편지를 찢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햇병아리 공작부인의 반란은 공작의 편지 한 통으로 무위로 돌아갔다. 실패한 반란의 대가는 컸다. 차라리 반란을 벌이지 않는 편이 좋았으리라.

    “젠장.”

    아침에 눈을 뜬 나는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장작 하나 넣어주지 않은 방은 한겨울처럼 추웠다. 빨개진 코끝을 문지르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치사한 사람들 같으니.”

    우아한 진상과의 실권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한 나에게는 더 참혹한 대우가 돌아왔다.

    불을 피워주지 않는 차가운 냉골의 방, 실온에 내버려 둔 지 일주일은 된 것 같은 딱딱하고 퍼석한 빵, 불러도 오지 않는 하녀들. 보나 마나 우아한 진상이 명령한 것이리라.

    덜덜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남의 편이 괜히 남의 편이 아닌데.’

    설마하니 집사와 나의 편지에도 어머님들의 편을 들 줄이야.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장 내 눈앞에 있었으면 등짝을 때려주었을 텐데.

    너무 무모한 수를 두었지만, 사실 나도 좀 억울했다. 내가 아는 제임스는 이런 상황에서는 내 편을 들어주곤 했으니까. 만난 적 없는 스물다섯의 제임스를 떠올리며 이를 박박 갈고 있을 때였다. 소름 끼치는 가정이 떠올랐다.

    ‘설마…… 내가 데리고 살아서 조금 나아진 게 그거였단 말이야?’

    아니, 그건 정말 너무한데. 그때도 그 남자는 남의 편이었다고!

    ‘진짜 답이 없다. 답이 없는 남자야.’

    그럼 나는 그 답도 없는 남자를 다시 고쳐서 써야 한단 말인가. 돌아온 세월이 서러울 지경이었다.

    아니, 겨우 인간 비슷한 걸로 만들어 놓았더니 다시 인간으로 만들어와야 한다고? 영문도 모른 채 시간을 거슬러서?

    ‘신이시여! 이건 정말 아니잖아요.’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꽁꽁 얼어붙은 손으로 베개를 쥐어뜯고 있을 때였다.

    노크도 없이 방문이 활짝 열리더니 된소리가 쏟아졌다.

    “이렇게 게으른 며느리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니! 지금 시어머니들은 다 깨서 돌아다니는데 방에서 자빠져 있는 거야?”

    이 집에서 이렇게 교양 없는 짓을 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한 사람밖에 없지. 나는 이불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으며 대답했다.

    “……셋째 어머니.”

    바로, 무식한 진상.

    아침부터 뭘 먹었길래 저리 기운이 펄펄 나는지 무식한 진상은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질렀다.

    “집안에 여자를 들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어디서 저런 게 들어와서는! 너 같이 되바라진 것은 제임스가 오면 당장 내쳐질 테니 미리 짐 싸놔!”

    “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소리에 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막 무식한 진상에게 덩달아 소리를 지르려고 했을 때였다.

    ‘잠깐.’

    무식한 진상이 한 말 중에 내 머리를 통, 때린 것이 있었다.

    ‘나를 당장 내친다고?’

    나도 참 답답하기도 하지. 처음부터 해야 했던 생각이 이제야 들었으니 말이다. 내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똑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깨달음에 나는 얼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래. 내가 두 번째 인생도 제임스 그놈을 데리고 살 필요가 있나?’

    인생은 한 번 사는 것이라 다들 앞날을 모르고 그냥 그게 최선인가보다 하면서 살고 있지만.

    ‘나는 아니잖아?’

    깨달음을 얻은 내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무식한 진상을 보며 말했다.

    “어머님, 역시 어머님은 천재세요.”

    “……뭐라고?”

    “어머님은 천재시라고요! 네네, 덕분에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네요.”

    그래. 제임스를 개조하여 데리고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는데, 다시 그 고행을 할 수 있으랴.

    ‘진상들은 어떻고.’

    지금이야 정신이 단단해져서 그렇지, 어린 시절에는 진상들에게 구박받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제임스가 오면 내칠 거라는 말을 듣고 진짜 그럴까 봐 덜덜 떤 적도 있었다.

    모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 결혼생활 한 번 했으면 되었지, 굳이 두 번 할 필요가 뭐 있어. 이번 생에는 제임스랑 같이 안 살아!’

    그리 다짐하며 내가 주먹을 꽉 쥐었을 때였다. 무식한 진상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소리를 지를 줄 알았던 내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그녀에 대한 예찬까지 하니 무척 이상해 보였던 모양이다.

    “아니, 너 제정신…….”

    당신이랑은 더는 할 말 없거든. 그녀의 말을 싹둑 자르며 내 방 밖으로 그녀를 떠밀었다.

    “저는 이제 씻어야겠어요. 감사해요, 어머님!”

    내가 떠민다고 순순히 나갈 무식한 진상이 아니었으나, 너무 당황했는지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쾅, 닫힌 문에 기대어 선 채로 나는 두근두근 떨리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흥분한 나머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맞아. 내가 이번 생까지 이 집안에서 살 필요는 없잖아?’

    제임스와의 결혼생활을 반추해 보자면, 즐거운 나날보다는 고통스러웠던 날이 더 많았다. 그가 끝없이 남의 편을 드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이.

    말수가 적은 점, 나에게는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점, 그리고 잦았던 관계까지.

    심지어 나는 큰아이를 낳다가 죽을 뻔했다. 무려 20시간이나 지속된 난산이었다. 그렇게 죽다 살아났을 때도 그는 내 곁에 없었다. 그런 주제에, 또다시 아이를 낳는 것이 두려워 밤을 보내는 것을 꺼리는 내게 그는 계속 관계를 요구해왔었다.

    ‘다시 생각하니 끔찍하다.’

    산후우울증에 빠져서 죽고 싶었을 때도 그는 내게 다정한 말 한마디를 건넨 적이 없었다.

    나의 20년은, 그와 실질적으로 살을 비비고 산 10년의 결혼생활은 고작 그 정도였다.

    ‘그래. 결정했어. 이번 생은 제임스랑 살지 않을 거야.’

    솔직히 애도 낳아봤겠다, 곤혹스럽기만 한 관계도 해 봤겠다, 이번 생은 수녀로 신에게 귀의해도 좋을 것 같았다.

    ‘뭔들 파넬의 허수아비 공작부인으로 사는 것보다 나쁘겠어.’

    하지만 마음을 그렇게 먹어도 문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일단 내게 이혼 도장을 찍어줘야 하는 파넬 공작 본인이 전쟁터에 있는 데다가.

    ‘황제 폐하께서 주선하신 결혼인걸. 파혼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황제가 우리의 결혼식을 주선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파넬 공작가는 황실의 검으로, 백 년 가까이 제국에 봉사해온 가문이었다. 하지만 가문의 후계 다툼으로 저들끼리 하나둘 밀어내다 보니까, 당대에 이르러서는 제임스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제임스 또한 하녀의 배를 빌어 나온, 소위 ‘귀한 자손’ 아니던가.

    그런 그를, 전쟁터로 내보내려니 당연히 이런 여론이 흘러나온 것이다.

    “파넬 공작가는 손이 귀한데 어떻게 미혼의 공작을 전쟁터로 내보낼 수 있습니까?”

    “원래 미혼의 사내는 전쟁터에 보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에게는 책임져야 하는 어머니가 셋이나 있는데 어떻게 전쟁터에 보냅니까. 어머니들을 돌보아 줄 사람이라도 하나 있어야…….”

    구구절절한 여론이었지만, 사실 그 속내 또한 투명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그만큼 부귀영화를 빠른 시일 내에 얻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젊은 애송이, 제임스 파넬 공작을 밀어낸 다음에는 자기 사람을 군대 사령관으로 보내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입을 닥치게 하고자, 황제는 무척 빠른 결단을 내렸다.

    “결혼을 안 한 것이 문제라면 결혼을 하면 되지!”

    그렇게 신부로 간택된 사람이 나였다. 지참금도 없고, 집안도 변변찮고, 아카데미에서 회계를 전공하며 명문가의 안주인과는 거리가 먼 스펙만 쌓은 바로 나.

    ‘이유라고는 고작 생일이 똑같아서…….’

    고작이었지만, 아무도 고작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기준이 아무리 허술한들, 황제가 직접 간택한 파넬 공작부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다시 막막해진 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무서운 미래가 다시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모를 때야 그냥 그게 최선인 줄로만 알고 살았지만, 한 번 알고 나니 차마 엄두가 나지 않는 험지였다.

    ‘다시 저 길을 갈 수는 없어.’

    생각해내야 했다. 제임스와 겹치지 않고 제2의 인생을 살 방법을 말이다.

    그러니까 이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미친 척이라도 해 볼까? 그러다가 평생 요양병원에 감금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겠지?’

    ‘시어머니들을 더 자극해 봐? 그런데 이혼도 못 하고 집에서 신망만 잃으면 어떻게 해.’

    그렇게 내가 손톱을 얼마나 잘근거렸을까.

    이것도 저것도 다 해결책이 되지 못해서 짜증이 치민 나는 이렇게 소리쳤다.

    “차라리 황제 폐하께 눈물로 읍소하는 게 낫겠어! 남편 새끼 고자라서 같이 못 산다고!”

    그리고 내 말에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

    ‘맞아, 고자!’

    이 나라는 더럽게 이혼이 까다로웠다.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 중 하나로, 모든 이혼 절차는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승인이 나고 안 나고는 황제 폐하의 의중대로였으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혼시켜주는 조항이 있었다.

    바로 남편이 고자일 때.

    ‘제임스는 고자가 아니지.’

    고자는커녕 성욕이 넘쳤다. 짜증나서 고자로 만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는 고자 사촌을 가지고 계시지.’

    고자라는 사실이 아주 지나치게 널리 알려져서 이제는 대국민 고자로 불리고 있는 남자.

    이안 타이론 공작.

    * * *

    이안 타이론 공작은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미남자였다.

    숱이 많은 굵은 눈썹은 꼭 순금을 녹인 듯이 아름다웠고, 움푹 들어간 눈은 어쩐지 고뇌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부드러운 금빛 고수 머리카락은 늘 단정하게 포마드로 넘겼는데, 딱딱하고 근엄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늘 셔츠의 단추가 하나둘 풀려 있었다.

    그게 아슬아슬한 남자로 느껴져서 더 좋다는 것이 제국 여성 다수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약혼자는커녕 애인조차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전 국민이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저 얼굴로 고자라니. 신께서는 참 공평하기도 하시지…….”

    그렇다. 그 남자는 ‘대국민 고자’였다.

    시간을 거슬러 2년 전 늦가을, 사건은 이안 타이론 공작을 향한 애끓는 사랑을 참지 못한 한 영애 때문에 벌어졌다.

    순진한 영애는 혼자서 이안과 연애하는 망상만 수개월을 했다. 그리고 결국 현실과 생각을 혼동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무려 황제 폐하까지 참석한 어느 무도회에서 대형사고를 치고 만다.

    “나를 안아줘요, 이안. 그 밤처럼 뜨겁게.”

    술에 취한 영애는 이안에게 그렇게 말하며 매달렸다. 사람들은 대박 사건에 입을 벌리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날 이전까지 두 사람은 서로 인사조차 건넨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오해는 이미 시작되었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그럼 그렇지! 혈기 왕성한 나이에 흔한 염문 하나 없다 했더니만!’

    ‘와,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말을 해도 이안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아무 접점이 없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아주 곤란한 상황.

    이 상황을 이안은 아주 기가 막힌 대답으로 타파했다. 제 가슴에 손을 올린 영애를 귀찮다는 듯이 내려다본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서야 안아주든 말든 할 것 아닌가.”

    그의 어조는 태연자약했으나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이안의 가랑이 사이로 향한 것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

    연회를 위해 그는 탄탄한 허벅지가 드러나는, 딱 붙는 타이즈 같은 바지를 입고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드러난 윤곽은 명백히 그의 대답이 진실임을 보여주었다.

    “저런.”

    “오, 세상에. 신이시여.”

    그때부터 이안 타이론 공작은 아주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하나 얻게 되었다.

    바로 ‘대국민 고자’.

    ‘뭐, 본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거 같았지만.’

    쥐고 있던 펜대를 손가락으로 빙그르르 굴리며 생각했다.

    물론, 나는 이전의 생에서 파넬 공작부인으로 이안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무척 사교적이지 못한 인사여서, 두 마디 이상 나누어본 적은 없지만.

    ‘20년 뒤까지 그는 부인이 없었지.’

    정황상 그가 고자라는 사실은 확실하리라.

    ‘뭐, 고자면 어때. 하나뿐인 황제의 사촌이지, 작위도 공작이지, 재산도 많고, 얼굴도 훌륭하고.’

    그에게는 장점이 끝도 없이 많았다. 게다가 사실, 그가 고자라는 것이 나는 싫지 않았다.

    ‘잠자리라면 이미 질릴 만큼 해 봤고.’

    우스운 말이지만, 사실이었다. 지금이라면 턱도 없을 일이지만, 10년 전의 나는 무척 어렸고, 제임스를 무척 무서워했다. 첫 만남부터 피 칠갑을 하고 나타난 남자였으니 당연했다.

    그래서 아프고, 도통 좋은 줄도 모르겠는 관계에 대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제임스와 이번 생에서는 아직까지 아무 접점이 없다지만, 10년간 함께 살아온 그를 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자니. 남편을 놔두고 다른 남자랑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아서 찜찜하기도 해.’

    그러니 차라리 영영 잠자리가 없는 편이 나았다. 그리 단정 지으니 이안은 더더욱 환상의 신랑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20년 뒤에도 황제 폐하는 고자인 사촌에게 중매를 서지 못해서 안달이셨으니 이안과 결혼한다고 나서면 흔쾌히 이쪽 편을 들어줄 거야. 옛날처럼 이혼이 손가락질 대상도 아니고.’

    모든 조건은 다 갖춰졌다. 이제 이안 타이론 공작과 나의 동의만 있으면 되는데.

    ‘일단 편지를 적어보자.’

    나는 굴리고 있던 펜을 꽉 쥐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백지상태였던 편지지에 한 자, 한 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이안 타이론 공작님께.

    딱 거기까지 쓰고 뒷내용을 적지 못했다. 이안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라고 적지. 내가 사실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다고? 아니면 고자라도 좋으니 나와 결혼해 달라고?’

    어느 쪽도 적을 수 없었다.

    그런 말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고작 이런 말에 홀딱 넘어갈 사람이었으면 20년이나 혼자 살지도 않았을 거야.’

    내가 지금 이렇게 결론을 내린 것처럼, 이안이 고자여도 상관없다는 여성들 또한 제국에 존재했다. 그가 가진 것들은 고자라는 단점을 상쇄할 만큼 찬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이안은 만년설처럼 차갑게 대했다. 그런 그의 태도로 인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생각했다.

    ‘과연 대국민 고자!’

    ‘평범한 방법으로는 그 남자의 얼굴도 볼 수 없어. 다른 묘안을 생각해내야 해.’

    지금 상황에서 같잖은 편지를 보내봤자, 그가 답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잠시 머리를 싸매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입술을 깨물었을 때였다.

    ‘릴리 다리가 무너지네! 릴리 다리가 무너지네! 오, 내 사랑~’

    틀이 잘 맞지 않아 바람이 숭숭 새는 문틈으로 경쾌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어린 하녀가 청소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제국 사람이라면 절대로 모를 리 없는 마더구스, ‘릴리 다리가 무너지네.’였다.

    ‘아오, 그냥도 심란해 죽겠는데.’

    그리 생각하며 내가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겼을 때였다. 번개처럼 묘안이 내 머릿속에서 반짝 떠올랐다.

    ‘맞아. 노래…….’

    제국의 모든 백성은 노래를 좋아했다.

    길거리 음유시인들이 많은 수입을 올릴 정도로 말이다. 음유시인들은 주로 나라의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었는데, 제임스가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는 ‘제임스 파넬 공작 찬가’도 등장했었다.

    ‘그걸 이용하면 되잖아.’

    제임스 따위도 노래가 있는데 이안이라고 노래의 주인공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지.

    ‘그래. 노래를 만드는 거야.’

    이안과 나의 진하다 못해 끈적끈적한 러브스토리를 가사로.

    ‘파넬 공작부인은 외로움을 참지 못해

    밤마다 등 하나 켜고 창문을 열어둔다네

    다른 사람들이 서지 않는다고 믿는

    은밀한 연인에게 들어오라고.’

    노래는 대성공이었다. 노래를 만든 지 일주일 만에 제국 백성 중에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이번 생은 작사가로 살아야 하는 거 아닐까.’

    나도 몰랐다. 나의 이 놀라운 재능. 이안 타이론 공작의 이름이 한 글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그를 떠올리게 하는 미친 듯한 작사.

    “일이 잘 풀린다면 제2의 신곡도 발표해야지.”

    제목도 이미 정했다.

    ‘남편 새는 미련새, 시어머니 새는 10새.’

    내 감정이 담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편지지를 넘겼다. 정갈한 글씨체로 나에 대한 걱정을 전하고 있었다.

    -네 부탁대로 하긴 했는데, 역효과가 너무 클 것 같아서 걱정돼.

    바로 나의 아카데미 동기이자, 나의 절친, 장래 이 나라의 남자 황후가 되는 로메오였다.

    이 시기의 나는 공작가의 허수아비, 하녀조차도 깔보는 햇병아리 공작부인이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한 푼의 예산도 없었다.

    게다가 어쨌든 스캔들이 나면 파넬 공작가의 위상도 바닥에 떨어지는데, 예산이 어떻게 쓰였나 역추적 당하다가 내 이름이 나오면 곤란했다.

    그래서 나는 로메오에게 부탁하는 것을 택했다. 부유한 백작가의 삼남인 로메오는 예술에 조예가 깊어서, 집에서 후원하는 음유시인들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나는 걱정하는 로메오에게 이렇게 답장했다.

    -걱정하지 마.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바야. 여긴 지옥이야. 이혼은 최악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너의 친구, 올리비아.

    편지 봉투를 단단히 봉하고 난 뒤, 한숨을 내쉬었다. 못된 짓을 저지른 아이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기분 나쁜 두근거림은 아니었다. 나는 여유롭게 웃었다.

    “좋아. 저런 노래가 도는데도 나를 찾아오지 않으면 정상이 아니지.”

    그리 생각하며 노래가 널리널리 퍼지기를, 그리고 이안이 빨리 나를 찾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사흘.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다 했더니, 찾아온 것은 엉뚱한 사람이었다.

    “이 망할 계집애!!”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웅크리고 있던 나는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기운찬 중년 부인을 가느다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제임스의 친모인 무식한 진상이었다.

    그녀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걸어와서는 내 손아귀에서 이불을 휙, 뺏으며 소리쳤다.

    “도대체 행실을 어떻게 하길래 저잣거리에 저런 남사스러운 노래가 도는 거야?!”

    “어머님.”

    추워죽겠는데 이불까지 빼앗다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아니면 나한테도 당신이 입고 있는 두꺼운 벨벳 원피스를 지급하던가.’

    화가 치밀었지만 나는 꾹 참았다. 이 집구석을 떠날 날이 머지않았는데 굳이 진상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처우를 더 나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나는 순진한 표정으로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전 무슨 노래를 말씀하시는지도 모르겠어요. 아시잖아요. 제가 제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는다는 걸요.”

    “그, 그럼…!”

    무식한 진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 말에는 한 점 거짓이 없었다. 노래를 의식해서, 나는 정말로 내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가끔 식료품을 훔쳐먹기 위해 부엌에 몰래 가던 것조차도 멈춘 참이었다.

    나의 대답에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무식한 진상은 결국 이렇게 꽥 소리쳤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있어?!”

    “어머, 어머니께서 그런 고결하지 못한 속담의 신봉자이신 줄은 몰랐네요.”

    그런 속담을 알고 있었냐.

    ‘나는 그게 더 놀랍다.’

    무식한 진상이 내 생각보다 아는 것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화난 그녀를 얼렀다. 밖의 상황이 어떤지, 보다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였다.

    “무엇 때문에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지만 진정하세요.”

    “진정? 진정하게 생겼냐! 내 금쪽같은 아들 이름에 똥물이 튀겼는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대답하고 싶은 것을 또 꾹, 참았다. 내 인내심이 이렇게 넓은지 나도 처음 알았다. 계속 참다가 꾹꾹이 되겠네!

    당장 내쫓고 이불이나 뒤집어쓰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으며 나는 그녀에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도대체 뭔데 그래요?”

    “오늘 큰형님이 참석한 티 파티에서 부인들이 모두 이야기하더란다! 네가 타이론 공작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타이론 공작이요?”

    웃음이 삐져나오는 입을, 놀란 척하느라 손바닥으로 가렸다.

    큰형님, 티 파티라.

    ‘우아한 진상도 화가 잔뜩 났겠군.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우아하고 멋있는 줄 아는 사람인데.’

    이 집안에서 바깥 활동을 하는 건 우아한 진상이 유일했다. 여우처럼 교활한데다가 혓바닥도 유연해서 사교계에서도 그럭저럭 입지가 있었다.

    그런데 모처럼 나갔더니 모두 며느리의 부정한 소식만 와글와글 떠들어댄다면? 하늘같은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졌겠지.

    ‘그 일그러진 얼굴을 봤어야 하는데.’

    봤으면 일주일은 즐거웠을 텐데 아쉽다. 그리 생각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속으로는 방방 뛰고 있었지만, 처연하게 눈을 내리깐 모습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해 보였을 것이다.

    “저런. 그런 소문이 돈단 말이에요? 저도 그렇지만, 타이론 공작님께서도 참 난처하시겠네요.”

    내 말이 무식한 진상의 속을 제대로 뒤집었다. 그녀는 다시 방방 뛰며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난처는 얼어 죽을 놈의 난처! 무지렁이들 입에 오르내리는 내 아들은 어떻게 할 거야?! 전쟁터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는데 응원은커녕 이런 이상한 오명이나 들러붙고.”

    뭐라는 거야. 당장 무지렁이에게 사과해.

    ‘나는 평생 셋째 어머님보다 더 무식한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맘에 안 들면 아랫것들이 보든 말든 며느리의 머리채를 잡기 일쑤.

    식탁의 모든 것을 던지며 행패를 부린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물리적 난동을 부리는 양반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살살 긁어서 약 올리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괜히 한 대 맞을 수도 있으니 참아야지. 그리 생각하며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마침 여태 아무 연락이 없는 이안 때문에 초조해지기 시작한 참이었다.

    “저는 이 방에만 갇혀 있는데 그런 소문이 돌다니 이상하네요. 아무래도 그분을 뵈어야겠어요.”

    * * *

    그렇게 나는 이안 타이론 공작에게 만나 뵙고 싶다는 서신을 보냈다.

    절대로 이런 요구에 응할 사람이 아닌데, 그 노래가 어지간히 신경 쓰였던 모양인지 답신이 빨리 왔다.

    -오후 세 시에, 아라미르에서.

    아라미르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차 가게로 탁 트인 홀과 프라이빗한 룸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예약한 곳도 탁 트인 홀이겠지.’

    들어가는 모습도,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만인에게 공개하여 괜한 의심을 사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좋은 선택이야.’

    어차피 상대는 대국민 고자. 이번에도 서지 않았다는 말 한마디로 이 모든 사태를 무마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불리하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다.

    -황제 폐하께서 이 소문을 무척 흥미로워하시며 대회의 때 언급까지 하셨다고 해. 어떻게 할 셈이야, 올리!

    가장 최근에 도착한 로메오의 편지 중 한 구절이었다. 로메오는 ‘너의 자작극이 이렇게 커지고 있다. 어쩔 셈이냐.’라는 뜻이었지만 나에게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분명 황제는 사촌을 불러다가 한 번 물었을 거야.’

    소문이 진짜냐. 너 어떤 여자에게도 서지 않는다더니 파넬 공작부인에게는 서냐.

    ‘결혼하겠다고 하면 분명 전폭적으로 지지하겠지.’

    황제는 하나뿐인 사촌이 고자라는 사실에 가장 크게 낙심했던 사람이었다. 20년 뒤에도 심심하면 “내 사촌이 내가 죽기 전에 결혼해야 할 텐데.”라고 한탄했었다.

    ‘그러니 모든 건 이제 나에게 달렸어.’

    바람의 방향은 바뀌었다. 남은 건 이안이 자기 입으로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뿐.

    ‘꼭 설득해야 해.’

    나는 흘러내리는 은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반묶음으로 묶었다. 그리고 옷장 안에 있는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었다. 귀걸이도 목걸이도 죄 시시한 것뿐이라 그냥 과감하게 아무것도 달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주름도, 흰머리도 없는 스무 살의 여자가 거울 속에서 붉은 눈을 당돌하게 빛내며 곧게 앞을 보고 있었다.

    “……좋아.”

    뭔들 지옥 같은 20년을 다시 반복하는 것보다 어려울까.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방 밖으로 나섰다.

    * * *

    “파넬 공작가의 인장이다.”

    “아니, 그럼 저 여자가…….”

    파넬 공작가의 마차를 타고 아라미르에 내리니 내 얼굴로 시선이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의연하게 들었다.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내가 대외 경력이 몇 년인데.’

    별별 소문이 다 도는 것이 사교계이다.

    나만 해도 우아한 진상을 몰아낼 때, 그녀가 퍼뜨린 소문 때문에 무척 괴로웠었다.

    ‘아마, 위아래도 모르는 안하무인, 패륜아였지?’

    그때는 그 소문 때문에 무척 힘들고 괴로웠는데 지나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나의 의연한 태도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니 인생에는 버릴 게 없는 거야.’

    다소 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며 나는 아라미르로 들어왔다.

    “예약하셨습니까?”

    “네. 이안 타이론 공작님 앞으로요.”

    “아, 그것이…….”

    내 예상대로 그가 예약한 자리는 탁 트인 홀 자리였다. 지배인은 내 말에 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홀을 눈으로 훑어본 뒤에야 왜 그가 그런 표정인지 알 수 있었다.

    ‘아직 오지 않았군.’

    당연히 레이디보다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타이론 공작이 보이지 않았다.

    ‘기 싸움인가.’

    레이디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큰 실례인 데다가, 특히 오늘 같은 상황에서 내가 혼자 앉아서 타이론 공작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대중에게 즐거운 먹잇감이 될 수도 있었다.

    ‘다들 신나게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겠군.’

    다른 이들이 홀로 앉아 있는 나를 본다면, 내가 몸이 달아서 혹은 타이론 공작을 흠모해서 절절맨다는 소문이 나게 될 터. 사교계 경력이 긴 타이론 공작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만약 내 기를 죽이려고 한 행동이라면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보았다.

    “그래서 티 코스가 어떻게 되지요?”

    “네?”

    나의 말에 지배인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꼴이 우습게 된 상황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지, 설마하니 티를 주문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심지어 여러 가지 차를 마시는 티 코스를.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보는 남자에게 나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같은 말을 계속하게 하면 제가 이 가게에 대단히 실망할 것 같아요. 티 코스가 어떻게 되냐고요.”

    내 말에 지배인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유명한 차 가게 지배인답게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저희 티 마스터가 엄선한 6종의 티 코스가 준비되어 있고, 그 종류는 이 책자를 참조해주십시오.”

    “좋아요.”

    지배인이 내미는 작은 책자를 받아 들고 나는 가게로 한 걸음, 성큼 들어섰다.

    ‘안 그래도 차가 마시고 싶었지.’

    전생의 나의 취미는 차를 마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시 박대당하는 병아리 공작부인이 되는 바람에 차를 마실 수가 없었다. 질 좋은 찻잎은 비싸고, 현재 파넬 공작가에서는 우아한 진상이 독점하고 있었으니까.

    ‘이번 기회에 잔뜩 마셔야겠어.’

    자기가 예약하고 불러낸 주제에 쩨쩨하게 티 코스 가격까지 내게 물게 하진 않겠지.

    나는 의연하게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았다.

    민트색과 화이트톤으로 단장된 홀은 고풍스러운 맛은 없었지만 발랄하고 깨끗해 보였다.

    내가 앉으니, 유니폼을 입은 아가씨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반짝이는 눈에는 나를 향한 호기심도 보였다.

    “첫 번째로 제공될 티는 본 가게 한정 홍차인 퀸 애니예요. 다과는 단것과 짠 것 중 어느 것이 좋으신가요.”

    “짠 것으로. 핑거푸드를 즐기지 않으니 조금만 가져다주세요.”

    “예.”

    대답을 마치고도 그녀는 잠깐 내 앞에서 머뭇거렸다. 아마 이안 타이론 공작에 대해서 묻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내가 눈을 내리깔고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자, 결국 비슬비슬 물러났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직원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밥값보다도 훨씬 비싼 차를 마시러 오는 사람들이, 과연 질 좋은 차에만 그 돈을 지불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름다운 인테리어, 나를 귀한 사람으로 대접하는 서비스에도 값을 매겨서 비싼 금액을 치르는 것이다.

    ‘그런데 소문에 정신이 팔려서 고객을 흘긋대?’

    하지만 좋게 생각하면 그만큼 소문이 널리 퍼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조금 기다리니 주문한 대로 짭조름한 디저트가 들어 있는 이단 트레이와 뜨거운 물이 든 찻주전자, 그리고 찻잔이 도착했다.

    “다른 티로 바꾸실 때는 직원을 불러주세요. 뜨거운 물은 수시로 보충해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그녀가 내려놓은 주전자에서는 향긋한 홍차 향이 풍겼다. 홍차같이 한 번 가열된 찻잎들은 너무 뜨거운 물에 우리면 떫은맛이 나고 만다. 그래도 차를 우리는 솜씨는 잘 훈련된 것 같아서 내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래. 이게 차지.’

    이런 사치가 도대체 얼마 만이란 말이냐. 집안의 실권을 쥐고 나서는 당연한 일상이었던 이 한 잔의 여유가, 이제 와 이렇게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나는 차 맛을 음미하며 시간을 죽였다. 이후 이어지는 차들도 모두 흡족했다. 과일 차도, 꽃잎 차도, 동방에서 들여왔다는 보이 차도.

    문제의 남자가 등장한 것은 내가 막 다섯 번째 차를 시키려 했을 때였다.

    뚜벅뚜벅.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그 자리에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남자만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발소리만큼은 선명하게 울렸으니 말이다.

    나는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과 접시가 부딪치며 달칵,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앞으로 성큼 걸어온 남자가 내 앞에 의자를 제 손으로 빼내고는 털썩 앉았다.

    ‘얼씨구.’

    자리를 권한 것도 아니고, 인사도 하지 않고선 자리에 제 맘대로 앉다니?

    “당신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무례한 줄은 몰랐네요.”

    나는 눈을 들어 내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타이론 공작님.”

    내 말에 부들부들한 금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긴 남자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베일 듯이 날카로운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보며 반짝였다.

    그였다. 내가 종일 기다린 남자.

    이 나라 최고의 미남, 황제의 유일한 사촌, 하지만 대국민 고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남자.

    ‘이안 타이론 공작.’

    나를 냉랭한 눈으로 훑은 이안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당신이 파넬 공작부인입니까?”

    얼굴도 멋있고, 체격도 좋았다. 심지어 살구색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조차 완벽했다. 순간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 같았으나, 나는 평안함을 가장했다.

    “아니요, 틀리셨어요. 저는 올리비아 플로렌스예요. 플로렌스 영애라고 부르셔야죠.”

    내 대답에 남자의 반듯한 눈썹이 크게 휘어졌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내게 물었다.

    “하나, 파넬 공작과 혼인하지 않았습니까?”

    “전쟁터에 나가서 앞으로 10년 동안 돌아오지 않을 그 남편이요?”

    제임스 이야기가 나오니 저절로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고 이미 준비했던 대답을 성실하게 내뱉었다.

    “제국법상 초야를 치르지 않은 모든 혼례는 무효죠. 저는 남편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여전히 플로렌스예요.”

    “참 당돌한 말씀이시군요. 그래요, 호칭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내 말에 이안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져갔다. 푸른 눈동자는 아까와는 다른 기묘한 빛으로 반짝였다. 나를 향한 흥미였다.

    “그래서 플로렌스 영애,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어떻게든 내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해야지. 목덜미를 잡아채서라도.’

    “공작님께서는 저잣거리에 퍼진 노래를 들으셨나요?”

    “아아, 그 노래요. 당신과 제가 밤마다 붙어먹는다는.”

    나는 눈을 내리깔고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힘이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 노래 때문에 제가 아주 곤란해졌어요. 그래서 공작님께서 책임지셨으면 좋겠어요.”

    “책임? 제가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겁니까?”

    이안의 눈썹이 크게 일그러졌다. 여기 찾아오게 된 목적을 내뱉기 전에, 나는 심호흡을 했다. 잠깐 말을 멈춰서 그런지, 일순간 시야가 넓어지며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고개를 빼고서, 나와 그의 이야기를 엿들으려 기를 쓰고 있었다. 아라미르를 방문한 우아한 손님들이 그리 행동하는 걸 보니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긴장이 풀린 나는 조금 더 느긋한 어조로, 조금 더 크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타이론 공작님, 저와 결혼해주세요.”

    이게 내가 오늘 이 남자를 만난 용건이었다.

    * * *

    “…….”

    이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반듯하게 좌우대칭이 딱 맞는 얼굴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무척 뚱해 보였다.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마주 보고 있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라고 대답 좀 하시죠? 어디까지 레이디를 부끄럽게 할 셈인가요?”

    “……아, 실례.”

    나의 까칠한 말에, 이안은 뒤늦게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는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내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무척 드문데…….”

    “그러시겠죠.”

    생면부지의 영애가 달라붙어서 ‘지난밤처럼 뜨겁게 안아줘요.’라고 말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안 서는데.’라고 대답한 위인 아닌가.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이안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의아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소문에 귀가 어두우십니까?”

    “적어도 공작님이 걱정하실 정도는 아닌데요. 그쪽이 여자를 상대로 안 선다는 건 알고 있어요.”

    “…….”

    이안의 말문이 재차 막혔다. 습관처럼 톡 쏘며 대답한 나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아, 아무리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소문이어도 면전에서 대놓고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나 보구나.’

    성공적인 결혼을 위해 조금 더 조신하게 굴었어야 했나.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은 마음속에서 지워버렸다. 이 한마디조차 참지 못하는 놈이면 결혼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럴 바에는 제임스를 데리고 사는 게 낫지. 개자식이었어도 내 말은 잘 듣는 편이었다고.’

    무섭고 험악한 인상과 달리 제임스는 늘 나를 깃털처럼 대했다. 머리가 벽돌처럼 단단해서 그렇지, 납득 가능한 말에는 대체로 맞춰주는 편이기도 했다.

    20년이란 세월이 무섭다. 이렇게 슬그머니 제임스의 좋은 점들이 떠오르다니. 무심코 남편을 옹호하고 있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그래도 제임스는 아니지. 그냥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수도원으로 갈래. 그게 나아.’

    나는 미래를 알고 있었고, 그 정보를 가지고 쓸 수 있는 수는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잘생긴 남자를 다시 선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너도 빨리빨리 말해. 그래야 나도 플랜B를 세울 거 아니야.’

    이안은 내 속을 파헤치려는 듯이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남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가 고자여도 상관없다는 뜻입니까?”

    고자, 를 발음하는데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대국민 고자로 불리면서도 정신적 대미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나 보구나.’

    스스로의 약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건 좋은 징조였다. 협상 테이블이 적어도 내 쪽으로 기울 테니 말이다. 나는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웃으며 대답했다.

    “오히려 좋은데요. 저는 잠자리가 싫거든요. 곤충이든 뭐든.”

    “쓸데없는 말장난은 집어치우시죠.”

    “어머, 유머 감각도 없으신 줄은 몰랐네요.”

    나의 빈정거림에 이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날을 세운 의장용 검처럼 새파랗게 빛났다. 내 빈정거림이 성질을 건드린 것 같았다.

    ‘어디 성질부려 봐라.’

    뭔들 우리 무식한 진상보다 더 진상이겠는가.

    이참에 나는 이 남자의 밑바닥이나 다 보자, 하는 마음으로 팔짱을 끼고 그 시선을 마주해주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시간 나를 노려보고 있던 그는 꽤 시간이 지난 후에도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지는 않았다.

    ‘다행히 내 예상보다 참을성은 많은 모양이네.’

    그것도 좋은 징조였다. 아무리 쓰레기통에서 날 꺼내줄 거라고 해도, 그곳이 또 다른 쓰레기통이라면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화를 참은 남자가, 아까보다 조금 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말수가 적습니다. 재미도 없고, 타인에게 기본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제게 뭘 기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무엇을 기대하시든 실망하실 거라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무래도 그동안 몸통박치기를 날렸던 다른 영애들처럼 내가 저를 백마 탄 왕자로 착각하고 있는 줄 아나 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환상을 가지기엔 이 누나는 나이가 한참 많단다.’

    나는 영혼 없이 미소 지으며 나의 첫 번째 결혼생활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제임스도 말수는 정말 적었는데. 지금 이 남자가 내뱉은 단어 개수를 세보면 제임스의 일주일 치는 되지 않을까?’

    이안에 대한 환상도 없고, 남편이 나랑 놀아주길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말수가 더 적은 놈도 데리고 살았으니 문제없네.

    나는 또 어깨를 으쓱했다.

    “어머, 말수가 적은 남자라면 제가 전문이죠. 벽돌을 데리고 살았거든요.”

    “말장난은 그만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남자는 한없이 진실에 가까운 대답도 농담으로 일축했다. 나는 소파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기대듯 앉았다. 자연히 그와 나의 시선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안 타이론 공작님.”

    그가 왜 자길 부르냐는 듯이 눈알만 굴려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한 채로 물었다. 시선을 잡을 수 있다면 그의 시선은 지금 내게 멱살을 잡혀 끌려오고 있으리라.

    “부모님 안 계시죠?”

    “네. 두 분 모두 작고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저랑 결혼해요.”

    나는 시어머니가 세 분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에 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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