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프롤로그 (1/28)
  • 프롤로그

    내 눈앞의 이 남자는 대국민 고자이다.

    고자. 사전 그대로의 의미. 성기 발랄하지 못한 자. 혼인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격사유였으나, 내게는 아니었다.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더 좋아.’

    시집살이시키고, 아내의 힘이 되어주기는커녕 남의 편만 들고, 집안일에는 무심한 남편과 살 바에는 차라리 대국민 고자랑 사는 게 나았다. 아무리 고자라고 하지만 저 남자는 그냥 아무것도 없는 고자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진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타이론 공작님.”

    내 부름에 부들부들한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베일 듯이 날카로운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보며 반짝였다.

    남자의 이름은 이안 타이론. 이 나라에 셋밖에 없는 공작 중 하나. 황제의 외사촌으로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남자였다.

    ‘저런 남자가 고추를 세우지 못 하는 게 무슨 흠이람. 차라리 못 세우는 게 낫지.’

    조각상이 움직이는 듯한 저 아름다운 얼굴을 보라.

    그가 가진 직위나 부를 제외하더라도 그는 저 미모만으로도 수백 명의 추종자를 거느릴 수 있었다. 저런 남자가 성기 발랄하기까지 하다면…….

    ‘어디서 애인이 사생아를 안고 나타나는 것보다 밤일을 못 하는 게 훨씬 나아. 역시 잘 골랐어.’

    인생 2회차, 냉정하게 득실을 계산해보고 결국 그래도 타이론 공작이 정답이라고 결론 지었다. 분주하게 눈망울을 굴리는 나를 냉랭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남자가 입술을 열었다.

    “당신이 파넬 공작부인입니까?”

    살구색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완벽한 바리톤이었다. 얼마나 섹시한지, 귓가에 속삭이면 있지도 않은 그것이 설 것만 같은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에 취해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긴장으로 인해 손바닥이 축축했으나, 목소리는 의연하게 흘러나왔다.

    “아니요, 틀리셨어요. 저는 올리비아 플로렌스예요. 플로렌스 영애라고 부르셔야죠.”

    내 대답에 남자의 반듯한 눈썹이 크게 휘어졌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내게 물었다.

    “하나, 파넬 공작과 혼인하지 않았습니까?”

    웃으면 안 되는데. 그 질문에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냉소적인 어조로 되물었다.

    “전쟁터에 나가서 앞으로 10년 동안 돌아오지 않을 그 남편이요?”

    제임스 파넬, 이 시점에서 내가 얼굴도 몰라야 하는 내 남편.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과거, 혼자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들어서면서 나는 막연히 이상적인 남편을 그렸더란다.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와, 나를 지켜주고 든든한 가정을 만들어 줄 그런 남편을.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내 남편은 쓰레기였다.

    시부모에게 대리효도 시키고, 집안일에 무심한데 성욕은 왕성하고, 남의 편만 드는.

    최악의 쓰레기!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 쓰레기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고 있자니, 긴장이 가시고 이상한 자신감이 생겨났다. 나는 한층 더 여유로운 어조로 이안에게 나, 자신을 소개했다.

    “제국법상 초야를 치르지 않은 모든 혼례는 무효죠. 저는 남편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여전히 플로렌스예요.”

    “당돌한 말씀이시군요. 그래요, 호칭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내 말에 이안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져갔다. 푸른 눈동자는 아까와는 다른 기묘한 빛으로 반짝였다. 나를 향한 흥미였다.

    “그래서 플로렌스 영애,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일단 상대방의 주의를 끌어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는 어떻게든 내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해야지. 목덜미를 잡아채서라도.’

    나는 눈을 내리깔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입술을 열었다.

    “공작님께서는 저잣거리에 퍼진 노래를 들으셨나요?”

    “아아, 그 노래요. 당신과 제가 밤마다 붙어먹는다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는데, 뜻밖에 돌아오는 말이 적나라했다. 의연한 척하려고 해도 저절로 뺨이 붉어졌다.

    나는 큼큼, 헛기침했다.

    ‘좋아. 알고 있다니 더 잘되었군.’

    하긴,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널리 퍼지기도 했지. 나는 눈을 내리깔고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힘이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 노래 때문에 제가 아주 곤란해졌어요. 그래서 공작님께서 책임지셨으면 좋겠어요.”

    “책임? 제가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겁니까?”

    이안의 눈썹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래, 나도 안다. 너도 기가 막히겠지. 저잣거리에 요상한 노래가 퍼졌는데 막무가내로 너보고 책임지라고 하니까 말이야.

    나는 이안의 생각이 엄한 곳 - 예를 들어 노래를 퍼뜨린 최초 유포자를 잡아다 족친다든가 - 으로 튀기 전에, 잽싸게 내 용건을 말했다.

    “타이론 공작님, 저와 결혼해주세요.”

    또다시 쓰레기통에 나 자신을 빠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 *

    오늘은 내 마흔 살 생일이었다.

    ‘어서 일어나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지.’

    오늘따라 유난히 몸이 무거웠다. 하지만 뭉그적거릴 시간은 없었다.

    ‘축하연에는 황후마마께서도 오신다고 했으니까 준비가 잘 되어가는지 확인해야 해. 집사를 불러서…….’

    그리고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여긴 내 방인데?’

    정확히 말하면 한 10년 전쯤 쓰던 내 방이었다.

    한 집안의 안주인, 위풍당당한 공작가의 귀부인의 방이라기엔 터무니없이 좁은 데다가 허름한 방.

    ‘내가 막 결혼하고 지내던 방이지.’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천장이 보인단 말인가. 내 나이 마흔, 결혼한 지 무려 20년이나 지났는데.

    ‘내가 헛것을 보나?’

    아무래도 연회를 준비한다고 너무 피곤했던 모양이다. 나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침대 맡에 있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댕댕, 하녀를 부르는 종이 울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하녀가 오질 않았다.

    ‘아니, 이것들이 미쳤나.’

    아니면 내 생일이라고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걸까? 하지만 이런 깜짝 파티 따위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부름을 무시하거나, 방을 허름하게 꾸미는 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니 할 수 있는 장난이 아닌가.

    ‘혼쭐을 내야겠군.’

    그리 생각하며 슬리퍼에 발을 꿰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문을 박차고 나갔다. 거친 움직임에 탐스러운 은색 머리카락이 치렁거리며 어깨로 떨어졌다.

    그때 나는 빠르게 걷느라고 눈치채지 못했다. 마흔을 넘어서 슬슬 돋아나기 시작한 새치가 지금 내 머리카락에 한 가닥도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을.

    “마샤! 마샤!”

    나는 큰 목소리로 우리 집안의 하녀장을 불렀다. 내 부름에 저 멀리서 검은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예, 마님. 부르셨나요?”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종을 울리는데도 왜 하녀가 오질 않는 거지?”

    “그, 그건…….”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넘기며 마샤를 탓하던 나는 이상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마샤, 그런데 왜 이렇게 젊어졌어?”

    “네?”

    마샤는 내가 스무 살일 적에 전속 하녀로 채용되어 마흔이 될 때까지, 20년간 내 곁을 충실하게 지켜준 여인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다 보니 나에게는 자매와 다름없었다. 즉, 그녀에 대해서 일에서부터 백까지 모두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젊었나?’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눈앞의 마샤는 여러모로 내가 알고 있는 마샤와 달랐다. 숱이 많은 밤색 머리카락은 내 기억보다 훨씬 잘 익은 밤에 가까운 색이었고,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는 주름 대신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게다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저 표정도 생경했다. 하녀장이 된 뒤로 마샤는 표정을 감추는 데 능숙해졌으니까.

    ‘저건 꼭 내 전속 하녀로 막 채용되었을 때의 마샤 같은데…….’

    그 생각을 떠올리고 픽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검지로 미간을 짚으며 코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축하연 준비 때문에 너무 피곤했던 모양이야. 페퍼민트 차 좀 우려다 줘.”

    “예? 제, 제가요?”

    “그럼 누가 내게 차를 내줘?”

    내가 마시는 차는 늘 마샤가 우려내었다. 젊은 시절에야 내가 우렸지만, 집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나서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차 우리는 것 같은 잡일은 마샤에게 넘겼고…….

    ‘한 번도 안 해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내 반문에 마샤는 눈에 띄게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두 손으로 앞치마를 꽉 붙드는 모습이 생경하다 못해 신선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을 때, 가을의 찬 서리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내 귓가를 쨍- 하고 울렸다.

    “감히 뉘 앞에서 아침부터 소란이냐?!”

    “……!”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목덜미에서 척추를 타고 소름이 쭉 끼쳤다. 저절로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이 목소리를 잊으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을 크게 부풀려서 둥글게 말아 올린 부인이 계단 난간을 붙들고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꼬장꼬장하게 생긴 그녀의 등 뒤로는 하녀 다섯이 고개를 푹 숙이고 따르고 있었다.

    여왕과도 같은 위엄이었으나, 나는 알고 있었다. 저 기품 있는 얼굴 뒤로 개도 못 당할 성질머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입술을 열었다.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님.”

    “누가 네 어머님이야? 파넬 대부인이라고 깍듯이 부르지 못해?”

    어머님을 어머님이라고 부르지 못 하게 하는 저 개 같은 성질머리.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10년 전에 병사한 내 첫 번째 시어머니, 로자 부인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머리가 찡하니 아파와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이게 무슨 일이야. 수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어째서 우리 집을 돌아다니고 있는 건데.’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저쪽에서 쨍하게 울렸다.

    “아이고, 아침부터 누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거야.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목소리 마디마다 징징거림이 뚝뚝 떨어지는 이 음성. 이 또한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시어머니!’

    입만 열면 어디가 아프고, 옆집 누구는 뭘 해줬고, 징징거리는 진상 중 진상. 우리 둘째 시어머니.

    시어머니가 둘이나, 심지어 둘 다 진상이라 놀랐나? 하나, 여기서 놀라기는 이르다.

    “이 XX 것들이! 뭐 잘났다고 떠들어! 확 XX해버릴까 보다!”

    파넬 공작가와 어울리지 않는 더러운 욕설.

    무식하기로는 이 나라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의 셋째 시어머니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하하하. 셋째 시어머니까지…….”

    이쯤 되니 아무리 현실을 부정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로 돌아왔어!’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시간을 되돌아와 스무 살의 햇병아리 공작부인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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